[20]武家昌. 撫順山龍石棚與積石墓[J]. 遼海文物學刊, 1997[01]13-18. [20]武家昌. 抚顺山龙石棚与积石墓[J]. 辽海文物学刊, 1997[01]13-18. 인용회수 20 [2025.7.24. 현재]
무순 산룡 석붕과 적석묘 撫順山龍石棚與積石墓
무가창武家昌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
撫順山龍石棚與積石墓地是80年代初文物普查時發現的。1990年重修虎台水庫,石棚墓地正在淹沒區內。遼寧省考古研究所會同撫順市博物館,對該墓地進行了發掘,現簡介如下:
무순撫順 산룡山龍의 석붕石棚과 적석묘積石墓 부지는 1980년대 초 문화재 전수조사 때 발견되었다. 1990년 호대虎台 저수지를 보수하면서 석붕 묘역이 수몰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에 요녕성고고연구소遼寧省考古研究所가 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과 함께 이 묘역을 발굴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차
1. 묘역의 지리적 환경(墓地的地理環境) 2. 무덤의 형태와 구조(墓葬形制及其結構)
1. 묘역의 지리적 환경(墓地的地理環境)
墓地位於撫順縣救兵鄉山龍村南500米的一山坡下。此處西北距撫順市30公里。墓地東西為山,救兵河的支流從東部山下流過,撫順至清河城公路在墓地的西側通過(圖一)。
묘역은 무순현撫順縣 구병향救兵鄉 산룡촌山龍村에서 남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산비탈 아래에 있다. 이곳은 무순시撫順市에서 서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묘역의 동쪽과 서쪽은 산이고, 구병하救兵河의 지류가 동쪽 산 아래를 흐른다. 무순撫順에서 청하성清河城으로 가는 도로는 묘역 서쪽을 지난다(그림1).

墓地由北向南,兩座石棚並排立于地表,石棚南20米左右有三塊大巨石露于地面,無支石,平臥于雜草之中。在公路之西側也有大石多塊,據村民介紹,曾出過人骨、陶片等。可知此處為一古代的墓地(圖二)。
묘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며, 두 기의 석붕石棚이 지표면에 나란히 서 있다. 석붕에서 남쪽으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받침돌 없이 큰 돌 세 개가 잡초 속에 평평하게 놓여있다. 도로 서쪽에도 큰 돌이 여러 개 있는데, 마을 주민에 따르면 사람 뼈와 도자기 조각 등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곳이 고대 묘지임을 알 수 있다(그림2).

2. 무덤의 형태와 구조(墓葬形制及其結構)
此墓地,雖然發現的墓不多,但墓的形制結構不一,各具特色,墓可分三個類型:石棚墓、積石墓、積石石室墓。
이 묘역에서는 많은 무덤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발견된 무덤들은 형태와 구조가 저마다 달라 각기 특징이 있다. 무덤은 석붕묘石棚墓, 적석묘積石墓, 적석석실묘積石石室墓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2.1. 석붕묘(石棚墓)
墓1、墓2為石棚結構。從外形來看,上部有巨型大蓋石,底部有支石,而且現今仍支立于山崗之上,蓋石及支石的部分暴露在外。
1호묘와 2호묘는 석붕石棚 구조다. 겉모습을 보면 위에는 거대한 덮개돌이 있고 아래에는 받침돌이 있다. 지금도 산등성이 위에 서 있으며, 덮개돌과 받침돌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 있다.
1號墓,在墓群的最北部,在整個墓群中保存較好。墓為長方形,南北立大塊的支石,西部為一封堵板石,東部為墓口,用高於墓室一半的板石封擋墓口,墓的方向為東偏南5°。上部用一巨石蓋住,基底用大塊石板平鋪。在墓的前部擋石前,有一用小型石塊壘砌的祭祀台及門道。墓頂部大蓋石為褐色沉積岩,整體略近方形,僅前部略少一塊,頂部較平滑,四邊較直,在蓋石上有明顯的人工劈鑿痕。最長邊為230,另一邊為170,後部寬165,前部寬180,厚為28—35厘米。兩支石間的距離84厘米,蓋到基底石間距離112厘米,基底長150厘米。先挖土壙,再建墓室。土壙的東西長250、南北170厘米。然後下後部支石,後部的支石支頂於南壁之上,再立北部支石,北部支石緊緊的支頂於後部支石之上,使三面支石相互支頂,更加穩固,不易因蓋石的沉重而倒塌。支石很少部分露于地表。但支石上砌墊小石塊露于地表。北壁支石為褐色沉積岩,內壁較平,外部略顯粗糙。石為長方形,長190、高90,厚32厘米。在大石之上又有壘砌的小塊石以增加其高度,石塊的高20—30厘米,有的地方已殘落,僅有幾處支撐蓋石。南部支石也為褐色沉積岩,長210、高100、厚12厘米。在此石之上也砌有小石塊,高35厘米。後部支石為一塊完整的大石,長120、高110、厚30厘米。蓋石並未壓在其上面,與蓋石之間尚有25厘米的間隙。在墓門口有不到頂部的半擋石,擋石的寬正同兩支石相齊,向內縮進30厘米,擋石的高60、寬84厘米。在墓室前從南部支石前向東又立砌兩塊石,並有小石加砌。在北部支石前也有平砌的石塊牆。在兩牆中間橫放置一較大的石塊,在墓室前部形成了一個小方台(或祭祀台)的結構。方台長90、寬55厘米。在支石的外側同土壙之間充填卵石、塊石,用以加固支石,在地表形成積石堆(圖三,圖版貳:1)。此墓清理後未發現遺物,據村民介紹,50年代曾有人在墓中取出紅色陶罐。
1호묘는 묘역 가장 북쪽에 있으며, 전체 묘역 중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무덤은 직사각형으로, 남북으로 큰 받침돌을 세우고 서쪽은 판석으로 막았다. 동쪽은 입구인데, 묘실 높이의 절반 정도 되는 판석으로 입구를 막았다.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5° 기울어졌다. 윗부분은 하나의 거대한 돌로 덮고 바닥은 큰 판석을 평평하게 깔았다. 무덤 앞쪽 막음돌 앞에는 작은 돌로 쌓은 제사단과 통로가 있다. 무덤 꼭대기의 덮개돌은 갈색 퇴적암으로, 전체적으로 사각형에 가깝다. 앞부분만 약간 모자라며, 윗면은 비교적 매끄럽고 네 변은 곧다. 덮개돌에는 인공적으로 쪼아낸 흔적이 뚜렷하다. 가장 긴 변은 230cm, 다른 변은 170cm, 뒷부분 너비 165cm, 앞부분 너비 180cm, 두께는 28—35cm다. 두 받침돌 사이 거리는 84cm, 덮개돌에서 바닥돌까지의 거리는 112cm, 바닥의 길이는 150cm다. 먼저 구덩이를 파고 묘실을 만들었다. 구덩이는 동서 길이 250cm, 남북 길이 170cm다. 그 다음 뒷부분 받침돌을 세우는데, 이 돌은 남쪽 벽에 기대게 했다. 다시 북쪽 받침돌을 세우는데, 이 돌은 뒷부분 받침돌에 바짝 기대게 하여 세 면의 받침돌이 서로를 지탱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덮개돌의 무게로 무너지지 않도록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받침돌은 아주 적은 부분만 땅 위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받침돌 위에 괴어 놓은 작은 돌들은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북쪽 벽의 받침돌은 갈색 퇴적암이며, 안쪽 벽은 평평하고 바깥쪽은 약간 거칠다. 돌은 직사각형으로 길이 190cm, 높이 90cm, 두께 32cm다. 이 큰 돌 위에는 높이를 더하기 위해 작은 돌들을 쌓아 올렸다. 이 돌들의 높이는 20—30cm인데, 일부는 이미 무너져 내려 몇 군데만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남쪽 받침돌도 갈색 퇴적암으로, 길이 210cm, 높이 100cm, 두께 12cm다. 이 돌 위에도 작은 돌들을 높이 35cm로 쌓았다. 뒷부분 받침돌은 하나의 완전한 큰 돌로, 길이 120cm, 높이 110cm, 두께 30cm다. 덮개돌은 이 돌 위에 놓여있지 않고, 25cm의 틈이 있다. 무덤 입구에는 천장까지 닿지 않는 절반 높이의 막음돌이 있다. 이 막음돌의 너비는 두 받침돌 너비와 같고 안쪽으로 30cm 들어가 있다. 막음돌의 높이는 60cm, 너비는 84cm다. 묘실 앞 남쪽 받침돌 앞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돌을 세우고 작은 돌을 더 쌓았다. 북쪽 받침돌 앞에도 평평하게 쌓은 돌담이 있다. 두 담 사이에는 비교적 큰 돌이 가로로 놓여 있어, 묘실 앞에 작은 단(또는 제사단) 형태를 이룬다. 이 단의 길이는 90cm, 너비는 55cm다. 받침돌 바깥쪽과 구덩이 사이는 조약돌과 깬돌로 채워 받침돌을 보강했고, 지표면에는 돌무지를 형성했다(그림3, 도판2:1). 이 무덤을 정리한 후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마을 주민에 따르면 1950년대에 누군가 무덤에서 붉은 도기 항아리를 꺼내 갔다고 한다.

2號墓,在墓群的北部,同1號墓在一條直線上,北距1號墓南部11.5米,墓口的方向東偏南5°。其墓室保存尚好,僅蓋石曾被用火藥炸裂成三塊,中間塌陷,兩端上翹,墓口已不能進人。墓室為長方形,北部的支石暴露在外,支石大部埋在土內,在墓的周圍,清除浮土之後暴露出大量的積石,積石堆近方形。後部積石寬85、北部90、東部90、而南部積石略寬為140厘米。積石的深30厘米,近支石部分積石漸深。此墓也是先挖土壙,後立支石,後再在支石外側加充積石以加固。墓的南北部支石底部距墓壙為30、上部為90厘米。墓壙從斷面看為梯形。後壁的支石距墓壙為45厘米。墓室上部蓋石已碎,分成三段,全長350、西段長170、東段長180、中間的部分長130厘米。後部的支石在南北兩壁間,而高於其兩壁。後部支石為一整塊方形大石,高130、寬85、厚25、未清理前露出地表45厘米。北壁也為一整塊大石板,長175、寬95、厚25厘米。此石內部較為平整光滑,在東部裸露部分受到破壞,略有凹口。南部支石是由兩塊較窄的石板,相拼而成。上部為兩段,長各為130和50、厚均為15、高均為85厘米。蓋石支石所用石料全部為褐色沉積岩略經修整而成。前部的擋石正好頂在南北兩支石之上,也為兩塊拼立,高52、寬95、厚18厘米。墓室為長方形,長163、寬70厘米,底部平鋪石板,在北側鋪一長條石板,長140、寬46厘米。在東南角鋪一長條寬20、長43厘米的石板。此石板並未全部鋪滿基底前部不到頭,南部為多塊石板拼鋪。在基底西北角發現已經火燒的頭蓋骨片,在墓室底、後擋石、南壁上都有火燒痕,由此可見此墓為火葬,而且屍體是在墓內焚燒的。在基底的東南出有磨制石紡輪一枚,此處並有紅褐色陶片及木炭,未見完整器。在墓室的前部擋石前用小石塊立砌一方框,方框的長為70厘米,寬與墓室寬相同。在墓室的前部也發現了大量的積石,深有10—25、最長處為190厘米(圖四)。
2호묘는 묘역 북쪽에 있으며 1호묘와 일직선상에 있다. 1호묘 남쪽에서 북쪽으로 11.5미터 떨어져 있고, 입구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5° 기울어졌다. 묘실은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지만, 덮개돌이 화약에 의해 세 조각으로 갈라져 가운데는 무너지고 양 끝은 들려 있어 입구로 들어갈 수 없다. 묘실은 직사각형이고 북쪽의 받침돌이 밖에 노출되어 있다. 받침돌 대부분은 흙에 묻혀 있다. 무덤 주위의 뜬 흙을 걷어내자 많은 돌무지(적석)가 드러났는데, 이 돌무지는 사각형에 가깝다. 뒷부분 돌무지 너비는 85cm, 북쪽은 90cm, 동쪽은 90cm이며 남쪽은 약간 넓어 140cm다. 돌무지 깊이는 30cm이고 받침돌 가까운 부분으로 갈수록 깊어진다. 이 무덤 역시 먼저 구덩이를 파고 받침돌을 세운 뒤, 받침돌 바깥쪽을 돌로 채워 보강했다. 남북 받침돌은 아래쪽이 구덩이 벽에서 30cm, 위쪽이 90cm 떨어져 있다. 구덩이는 단면으로 보면 사다리꼴이다. 뒷벽의 받침돌은 구덩이 벽에서 45cm 떨어져 있다. 묘실 윗부분의 덮개돌은 부서져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전체 길이는 350cm, 서쪽 조각 길이는 170cm, 동쪽 조각 길이는 180cm, 가운데 부분 길이는 130cm다. 뒷부분 받침돌은 남북 양쪽 벽 사이에 있으며 두 벽보다 높다. 이 받침돌은 하나의 네모난 큰 돌로, 높이 130cm, 너비 85cm, 두께 25cm이며, 정리 전에는 지표면에 45cm 드러나 있었다. 북쪽 벽도 하나의 큰 판석으로, 길이 175cm, 너비 95cm, 두께 25cm다. 이 돌의 안쪽은 비교적 평평하고 매끄러우나, 동쪽의 노출된 부분은 파손되어 약간 패인 곳이 있다. 남쪽 받침돌은 두 개의 좁은 판석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윗부분은 두 조각으로, 길이는 각각 130cm와 50cm, 두께는 모두 15cm, 높이는 모두 85cm다. 덮개돌과 받침돌에 사용된 석재는 모두 약간 다듬은 갈색 퇴적암이다. 앞쪽의 막음돌은 남북 두 받침돌 위에 딱 맞게 놓여 있으며, 역시 두 조각을 세워 만들었다. 높이는 52cm, 너비 95cm, 두께 18cm다. 묘실은 직사각형으로 길이 163cm, 너비 70cm다. 바닥에는 판석이 깔려있는데, 북쪽에는 길이 140cm, 너비 46cm의 길쭉한 판석을 깔았다. 동남쪽 모서리에는 너비 20cm, 길이 43cm의 길쭉한 판석을 깔았다. 이 판석들은 바닥 전체를 채우지 못하고 앞쪽까지 닿지 않았으며, 남쪽은 여러 개의 판석을 이어 깔았다. 바닥의 서북쪽 모서리에서 불에 탄 머리뼈 조각이 발견되었고, 묘실 바닥, 뒤 막음돌, 남쪽 벽에서도 불에 탄 흔적이 있다. 이를 통해 이 무덤이 화장묘火葬墓이며, 시신을 무덤 안에서 태웠음을 알 수 있다. 바닥 동남쪽에서는 갈아 만든 돌가락바퀴[석방륜石紡輪] 한 개와 붉은 갈색 도기 조각 및 목탄이 나왔으나, 완전한 그릇은 없었다. 묘실 앞쪽 막음돌 앞에는 작은 돌을 세워 네모난 틀을 만들었는데, 길이는 70cm이고 너비는 묘실 너비와 같다. 묘실 앞부분에서도 많은 돌무지가 발견되었는데, 깊이는 10—25cm, 가장 긴 곳은 190cm다(그림4).

2.2. 적석묘(積石墓)
此類墓與大蓋石墓相近,但有別於大蓋石墓,上有大壓石,下有充填的積石,壙室內也有積石,此類墓葬在墓區的東南部。
이런 종류의 무덤은 덮개돌무덤[대개석묘大蓋石墓]과 비슷하지만 구별된다. 위에는 큰 누름돌[압석壓石]이 있고 아래에는 채워 넣은 돌무지가 있으며, 무덤방 안에도 돌무지가 있다. 이런 무덤은 묘역의 동남쪽에 있다.
4號墓,在墓群的中間部位,北部為8號墓,南為5號墓,西部在修公路時已遭破壞,部分積石已不存。壓石的方向為東偏南20°。此墓有一大塊石及三塊大條石壓於積石堆之上。大壓石為褐色沉積岩,呈不規整的長方形,壓石的長2.4、寬1.9、厚0.19—0.35米。條石也為褐色沉積岩,都倒躺于大壓石的北部,基本東西向、三塊條石相壓在一處。條石1長2、寬0.80、厚0.35米。條石2長1.90、寬0.30、厚0.15米。條石3長1.75、寬0.50、厚0.20米。此墓在大壓石的周圍堆砌大量的卵石、塊石的積石,在大石下也有積石。北部的積石最寬為2.4米,南部為0.92米,東部為0.70米,西部早年遭到破壞,積石已不存。積石在東部、南部較有規律,有的積石是經過細心排列的,使積石井然有序,可見兩排整齊的積石帶,尤其在邊緣更明顯。在把壓石揭開,下部有一整齊的石牆,南部不明顯,西部已無存。此應為墓室,長150、寬70、深50厘米(圖五,圖版貳:2)。底部為黃砂土,在其上發現有紅褐陶片、木炭等。
4호묘는 묘역의 중간 지점에 있다. 북쪽은 8호묘, 남쪽은 5호묘이며, 서쪽은 도로 공사 때 파괴되어 돌무지 일부가 없어졌다. 누름돌의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20° 기울어졌다. 이 무덤에는 큰 돌 한 개와 길고 큰 돌[조석條石] 세 개가 돌무지 위에 놓여있다. 큰 누름돌은 갈색 퇴적암으로 불규칙한 직사각형이며, 길이는 2.4m, 너비 1.9m, 두께 0.19—0.35m다. 조석도 갈색 퇴적암이며, 모두 큰 누름돌 북쪽에 쓰러져 있다. 기본적으로 동서 방향이며 세 개가 서로 포개져 있다. 조석1은 길이 2m, 너비 0.80m, 두께 0.35m다. 조석2는 길이 1.90m, 너비 0.30m, 두께 0.15m다. 조석3은 길이 1.75m, 너비 0.50m, 두께 0.20m다. 이 무덤은 큰 누름돌 주위에 조약돌과 깬돌로 된 돌무지를 많이 쌓았고, 큰 돌 아래에도 돌무지가 있다. 북쪽 돌무지의 가장 넓은 부분은 2.4m, 남쪽은 0.92m, 동쪽은 0.70m다. 서쪽은 일찍이 파괴되어 돌무지가 남아있지 않다. 동쪽과 남쪽의 돌무지는 비교적 규칙적이다. 일부 돌무지는 정성껏 배열하여 질서정연하며, 두 줄의 가지런한 돌무지 띠를 볼 수 있는데 가장자리에서 특히 뚜렷하다. 누름돌을 들어내자 아래에서 가지런한 돌담이 나왔으나 남쪽은 불분명하고 서쪽은 없었다. 이것이 묘실로 보이며, 길이는 150cm, 너비 70cm, 깊이 50cm다(그림5, 도판2:2). 바닥은 노란 모래흙이었고 그 위에서 붉은 갈색 도기 조각, 목탄 등이 발견되었다.

5號墓,在墓區的中部略偏南,北部積石同4號墓相接,東南同6號墓相接。從地表看此墓僅有上部的壓石暴露于地表之上。此壓石為褐色沉積岩,壓石略近長條形,放置方向為東偏南20°。壓石的長2.7、最寬處0.90、厚0.20—0.30米。在大石下及其周圍,全部為積石,積石由卵石和塊石組成,一般不小於20—30厘米長。大石壓于積石堆正中,周圍小碎石有規律的堆積,在積石堆的邊緣四個角上都有一直立的石塊,以示積石的周邊及範圍。在東部兩石中間,又立一石,同兩所立之石的距離都為126厘米。在積石堆的西部,也就是墓的後部,西北角和西南角各立石之間距為3米。堆石正是按四個角的立石而堆積的。東西積石長4.7,南北寬3.9,積石的平面近梯形。西部積石到大石的寬為1.10米,東部積石到壓石的寬為0.9米,北部積石到大壓石的寬為1.4米,南部積石到大石的寬為1.6米。
5호묘는 묘역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있다. 북쪽 돌무지는 4호묘와 이어지고 동남쪽은 6호묘와 이어진다. 지표면에서는 이 무덤 윗부분의 누름돌만 드러나 보인다. 이 누름돌은 갈색 퇴적암으로, 길쭉한 모양에 가까우며 동쪽에서 남쪽으로 20° 기울어진 방향으로 놓여있다. 누름돌의 길이는 2.7m, 가장 넓은 곳의 너비는 0.90m, 두께는 0.20—0.30m다. 큰 돌 아래와 그 주변은 모두 돌무지다. 돌무지는 조약돌과 깬돌로 이루어져 있고, 보통 길이 20—30cm보다 작지 않다. 큰 돌은 돌무지 한가운데를 누르고 있고, 주위의 작은 자갈들은 규칙적으로 쌓여있다. 돌무지 가장자리의 네 모퉁이에는 각각 세워진 돌이 있어 돌무지의 경계와 범위를 표시한다. 동쪽 두 돌 사이에는 또 하나의 돌을 세웠는데, 양쪽 돌과의 거리는 모두 126cm다. 돌무지 서쪽, 즉 무덤의 뒷부분에서는 서북쪽과 서남쪽 모서리에 각각 세운 돌 사이의 거리가 3m다. 돌무지는 바로 네 모퉁이에 세운 돌을 기준으로 쌓은 것이다. 동서 방향 돌무지 길이는 4.7m, 남북 너비는 3.9m이며, 돌무지의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서쪽 돌무지에서 큰 돌까지의 너비는 1.10m, 동쪽 돌무지에서 누름돌까지의 너비는 0.9m, 북쪽 돌무지에서 큰 누름돌까지의 너비는 1.4m, 남쪽 돌무지에서 큰 돌까지의 너비는 1.6m다.
在大石下為淤土,淤泥土下為積石堆,在積石堆上近大壓石旁放置一長60、寬40、厚30厘米不甚規整的塊石。積石無規律,去掉上部雜石之後,出現了用塊石壘砌的墓室。在墓室內充填大量的雜石。墓室呈長方形,墓室的壁用塊石壘砌,選用齊整平滑的面為內壁,北部為三層,南壁為四層,東部為二層壁石,西壁無有。墓壁高為15—20厘米。墓底為一長條形,同墓室相等的板石平鋪基底。墓底石東低西高,西部幾乎露于外部,同積石等高。值得注意的是西部無墓室壁,底石露于外部。底石下部為黃砂土,底石厚20厘米,有10厘米臥于土內,在底石下有小石塊鋪墊,底石東部窄,西部寬,東南角缺損。墓室的壁也是在黃砂土上壘起,圍砌底石一周。墓室的長1.60米,東部寬0.40米。方向為東偏南5°,在墓室的東南角出有紅褐陶片,石紡輪一枚以及大量經燒過的人骨片。在清理之後發現上部的壓石是斜放于墓室之上的,墓室的西部底石就暴露在外,根本沒有壓住。此處的大石並未起到蓋石的作用,而且純屬是一種象徵性或某種禮俗要求所至(圖六)。
큰 돌 아래는 진흙이고, 진흙 아래는 돌무지이다. 돌무지 위, 큰 누름돌 옆에는 길이 60cm, 너비 40cm, 두께 30cm의 불규칙한 깬돌이 놓여 있다. 돌무지는 규칙이 없으며, 윗부분의 잡돌을 치우자 깬돌로 쌓은 묘실이 나타났다. 묘실 안은 많은 잡돌로 채워져 있었다. 묘실은 직사각형이고, 묘실 벽은 깬돌로 쌓았는데, 반듯하고 매끄러운 면을 안쪽 벽으로 삼았다. 북쪽 벽은 세 겹, 남쪽 벽은 네 겹, 동쪽 벽은 두 겹의 벽돌이며 서쪽 벽은 없다. 묘벽의 높이는 15—20cm다. 무덤 바닥에는 묘실과 길이가 같은 길쭉한 판석이 깔려있다. 바닥돌은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으며, 서쪽은 거의 밖으로 드러나 돌무지와 높이가 같다. 주목할 점은 서쪽에 묘실 벽이 없고 바닥돌이 밖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닥돌 아래는 노란 모래흙이고, 바닥돌 두께는 20cm이며 10cm는 흙 속에 묻혀 있다. 바닥돌 아래에는 작은 깬돌이 깔려 있고, 바닥돌은 동쪽이 좁고 서쪽이 넓으며, 동남쪽 모서리는 깨져있다. 묘실 벽 또한 노란 모래흙 위에 쌓아 바닥돌 둘레를 감쌌다. 묘실의 길이는 1.60m, 동쪽 너비는 0.40m다.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5° 기울어져 있으며, 묘실 동남쪽 모서리에서 붉은 갈색 도기 조각, 돌가락바퀴 한 개, 그리고 불에 탄 수많은 사람 뼈 조각이 나왔다. 정리 후, 위쪽의 누름돌은 묘실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고 묘실의 서쪽 바닥돌은 밖으로 드러나 전혀 눌려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의 큰 돌은 덮개돌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순전히 상징적인 의미나 어떤 예법상의 요구 때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림6).

2.3. 적석석실묘(積石石室墓)
6號墓,是唯一的一座積石石室墓。此墓已遭破壞,上部亦不存,殘留底部墓室。墓室為長方形,墓道方向南偏東5°。墓室四壁是由大塊石砌成。東壁是由一塊大條石砌起,長約210、寬45、高30厘米的大塊石為一段,外加幾段略小的塊石砌築,北壁的長同墓室內壁相同為195厘米。西壁為多塊大石砌築,殘高35—50厘米。長210厘米。墓門開在南壁。略向西偏,墓門寬60厘米,墓門順鋪砌兩塊條石中間橫鋪小塊條石,墓門東壁寬70、西部寬45厘米。南壁全長175厘米,殘高25—30厘米。從墓門橫置的條石一直向南,約140厘米長的橫鋪的條石甬道,甬道中間為橫置條石,條石兩側順砌甬道的邊框,整個甬道的長170、寬80厘米。在甬道下為小碎石及黑土,黑土之下為黃沙土。在墓室低部平鋪多塊不規整的板石。在墓室的外部西壁,發現有依護牆,也可稱為積石,發現三層相壓,斜貼護于墓室的外壁,依護牆的底部長270、寬90、高60厘米。此依護牆部分壓在了5號墓的積石之上。此墓破壞較嚴重,東部及北部積石已不存,南部在甬道的邊緣有部分積石。此墓未發現人骨及隨葬品(圖七)。
6호묘는 유일한 적석석실묘다. 이 무덤은 이미 파괴되어 윗부분이 남아있지 않고 바닥 쪽 묘실만 남아있다. 묘실은 직사각형이고, 묘길[묘도墓道] 방향은 남쪽에서 동쪽으로 5° 기울어졌다. 묘실의 네 벽은 큰 돌로 쌓았다. 동벽은 길이 약 210cm, 너비 45cm, 높이 30cm의 큰 조석 하나에 약간 작은 깬돌 몇 개를 더해 쌓았다. 북벽의 길이는 묘실 안쪽 벽과 같은 195cm다. 서벽은 여러 개의 큰 돌로 쌓았고, 남아있는 높이는 35—50cm, 길이는 210cm다. 무덤 문은 남벽에 있고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문 너비는 60cm이며, 문에는 조석 두 개를 나란히 깔고 그 사이에 작은 조석을 가로로 깔았다. 문 동쪽 벽 너비는 70cm, 서쪽 벽 너비는 45cm다. 남벽 전체 길이는 175cm, 남아있는 높이는 25—30cm다. 무덤 문에 가로놓인 조석에서부터 남쪽으로 약 140cm 길이의 조석을 가로로 깐 널길[용도甬道]이 이어진다. 널길 가운데에는 조석을 가로로 놓고, 그 양옆으로 널길의 테두리를 쌓았다. 전체 널길의 길이는 170cm, 너비는 80cm다. 널길 아래는 작은 자갈과 검은 흙이고, 검은 흙 아래는 노란 모래흙이다. 묘실 바닥에는 불규칙한 판석 여러 개를 깔았다. 묘실 바깥 서벽에서 보호벽[의호장依護牆]을 발견했는데, 이를 돌무지(적석)라고도 부를 수 있다. 세 겹으로 포개져 묘실 바깥벽에 비스듬히 붙어있었다. 이 보호벽의 바닥 길이는 270cm, 너비 90cm, 높이 60cm다. 이 보호벽 일부는 5호묘의 돌무지 위에 놓여 있었다. 이 무덤은 파괴가 심해 동쪽과 북쪽의 돌무지는 남아있지 않고, 남쪽은 널길 가장자리에 일부 돌무지가 있다. 이 무덤에서는 사람 뼈나 껴묻거리[수장품隨葬品]가 발견되지 않았다(그림7).

3. 껴묻거리[수장품, 隨葬品]
隨葬品極少,所見器物破碎很厲害,陶器未見完整器物。陶器主要是夾砂紅褐陶和褐陶,素面抹光、手制、制作粗糙,表面有明顯的指窩痕,可辨認的器形有壺、罐、缽等。
껴묻거리는 매우 적고, 보이는 유물들은 파손이 심하며, 도기 중 완전한 형태의 것은 없었다. 도기는 주로 모래 섞인 붉은 갈색 도기와 갈색 도기다. 민무늬에 표면을 문질러 광을 냈고, 손으로 빚어 제작이 거칠다. 표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있다. 알아볼 수 있는 그릇 형태로는 단지[호壺], 항아리[관罐], 바리[발缽] 등이 있다.
壺口沿,M5:1,夾砂褐陶,壺口直領、直口、圓唇、肩部較平。領高為3.5厘米(圖八:1)。
단지壺 입구 가장자리(M5:1): 모래 섞인 갈색 도기. 단지 목이 곧고, 입구는 수직이며, 입술은 둥글고, 어깨는 비교적 평평하다. 목 높이는 3.5cm다(그림8:1).
陶器底,M5:2,褐色夾砂,手制,底圓已變形,器表雖經抹光,但仍有凸凹不平的小窩(圖八:2)。
도기 바닥(M5:2): 갈색의 모래 섞인 도기. 손으로 만들었고, 둥근 바닥은 이미 변형되었다. 표면을 문질러 광을 냈지만 여전히 울퉁불퉁한 작은 홈들이 있다(그림8:2).
陶器底,M7:1,夾砂褐陶,素面,底部略高似假圈足,平底,由于經火燒後底部有龜裂,底徑8.5厘米(圖八:3)。
도기 바닥(M7:1): 모래 섞인 갈색 도기. 민무늬이며, 바닥 부분이 약간 높아 거짓 굽다리[가권족假圈足]처럼 보인다. 평평한 바닥이고, 불에 타서 바닥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무늬가 있다. 바닥 지름은 8.5cm다(그림8:3).
陶流,M5:3,夾砂褐陶,素面,其形呈圓台形,外部雖為圓形,但極不規整,有凸棱,似用刀修整過。在此中間有管狀孔,在粗的一端為使孔增大加一孔相連。殘長3、底寬2、上部為1.5,孔徑為0.7厘米(圖八:5)。
도기 주구[도류陶流], M5:3: 모래 섞인 갈색 도기. 민무늬이며, 모양은 원뿔대 형태다. 바깥은 둥글지만 매우 불규칙하고 튀어나온 모서리가 있어 칼로 다듬은 듯하다. 가운데에 관 모양 구멍이 있고, 굵은 쪽 끝에는 구멍을 넓히기 위해 다른 구멍을 이어 붙였다. 남아있는 길이는 3cm, 밑 너비 2cm, 윗부분 너비 1.5cm, 구멍 지름은 0.7cm다(그림8:5).
石紡輪,M2:4,青綠色沉積頁岩,打制後磨成圓形,兩面都有脫落,表面不平,有薄厚不均之感,有的部分已呈薄刃,邊緣極不規整,中間鑽一孔,一次鑽磨而成。直徑6.5、厚0.3,孔徑0.8厘米(圖八:4)。
돌가락바퀴[석방륜石紡輪], M2:4: 청록색 퇴적 셰일. 때려서 만든 후 갈아서 둥글게 만들었다. 양면 모두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고 표면이 고르지 않아 두께가 일정하지 않다. 어떤 부분은 얇은 날처럼 되었고 가장자리가 매우 불규칙하다. 가운데에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한 번에 뚫고 갈아서 만들었다. 지름 6.5cm, 두께 0.3cm, 구멍 지름 0.8cm다(그림8:4).
石紡輪,M5:4灰白色泥質沉積岩,硬度較小,此紡輪已殘,僅存三分之二,圓形、中間有一鑽孔,孔為兩面鑽磨而成,直徑為6.8,中間孔徑為1.2厘米,厚0.5厘米(圖八:6)。
돌가락바퀴[석방륜石紡輪], M5:4: 회백색 이질泥質 퇴적암. 단단하지 않다. 이 가락바퀴는 부서져 3분의 2만 남아있다. 둥근 모양이고 가운데 구멍이 하나 있는데, 양쪽에서 뚫고 갈아서 만들었다. 지름 6.8cm, 가운데 구멍 지름 1.2cm, 두께 0.5cm다(그림8:6).

4. 맺음말(結語)
此次發掘山龍墓地,在一個墓地發現了三種形制的墓葬。實為罕見。1、2號墓從結構外形看應屬石棚,但又不同于已往發現的石棚。
이번 산룡山龍 묘역 발굴에서는 한 묘역에서 세 가지 형태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는 매우 드문 일이다. 1, 2호묘는 구조와 외형으로 보아 석붕石棚에 속하지만, 이전에 발견된 석붕과는 또 다르다.
此次發掘的4、5號墓,從其結構上看同積石墓相接近,而不同于大蓋石墓①,大蓋石墓上部以大蓋石為頂蓋,下部有墓室,以土壙或用石塊砌的墓坑,墓內無填石等。而山龍的4、5號墓,墓室為石塊壘砌,墓較淺,室內用石塊充填,然後用大石壓在其上,大石不一定把墓室全部壓上,故我們認為它同大石蓋墓是不同的兩種類型的墓葬。此種積石墓同石棚有關,是由石棚發展而來,是石棚發展的最後階段。4號墓上的壓石較大,在其北部緊貼蓋石斜放三塊大石,幾塊石已具備了架起石棚的條件,但並未支立起來,僅僅是象徵性的壓置于積石墓上。大石既然已費力搬來,何不支架起來呢?這應是當時石棚在人們心中已不那麼重要,但大石還得要,而用大石來表示石棚的存在,只是象徵性的存在而已。
① 許玉林、崔玉寬:《鳳城東山大石蓋墓發掘簡報》,《遼海文物學刊》1990年第2期。
이번에 발굴된 4, 5호묘는 구조상 적석묘積石墓에 가까우며 덮개돌무덤[대개석묘大蓋石墓]과는 다르다[1]. 덮개돌무덤은 윗부분을 큰 덮개돌로 덮고 아랫부분에 묘실이 있으며, 구덩이를 파거나 돌로 쌓은 무덤 구덩이를 사용하고 무덤 안에 돌을 채우지 않는다. 그러나 산룡山龍의 4, 5호묘는 묘실을 돌로 쌓았고 무덤이 얕으며, 실내를 돌로 채운 뒤 큰 돌을 그 위에 눌러놓았다. 큰 돌이 묘실 전체를 다 덮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이것이 덮개돌무덤과는 다른 유형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적석묘는 석붕石棚과 관련이 있으며, 석붕에서 발전해 온 것으로 석붕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4호묘 위의 누름돌은 비교적 크고, 그 북쪽에 덮개돌에 바싹 붙여 큰 돌 세 개를 비스듬히 놓았다. 이 몇 개의 돌은 석붕을 세울 조건을 갖추었지만 세우지는 않았다. 단지 상징적으로 적석묘 위에 눌러놓았을 뿐이다. 큰 돌을 힘들여 옮겨왔으면서 왜 세우지 않았을까? 이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석붕이 더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큰 돌은 여전히 필요했고, 큰 돌을 사용해 석붕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은 단지 상징적인 의미였을 뿐이다.
[1] 허옥림許玉林·최옥관崔玉寬, 〈봉성 동산 대석개묘 발굴 간보〉, 《요해문물학간遼海文物學刊》1990년 제2기.
此次發掘的山龍墓地,發現了石棚、積石墓、積石石室墓,形制不同,它們之間,有著一定聯繫和淵源關係。在2號石棚中發現了夾砂紅褐陶陶片,一面鑽孔的石紡輪,在1號石棚蓋石上有明顯的金屬刻鑿痕,由此可見石棚的年代已近入了青銅時代,此類石棚同新金雙房石棚相近,又不同于它,在結構上有了新的變化,出現了石框圈,支石加高,進入地下三分之二等特點,故它的時代要晚于新金雙房石棚的時代,時代應為春秋晚期或已到戰國。4、5號積石墓從外形上看較為特殊,在結構上看已同高句麗時期的積石墓相近。6號積石石室墓壓在5號積石墓的積石之上,說明了5號積石墓要早于積石石室墓。積石石室墓從其形狀看為高句麗時期墓葬,而4、5號積石墓的時代應為戰國晚或漢初較為合適。
이번에 발굴한 산룡山龍 묘지에서는 석붕, 적석묘, 적석석실묘가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서로 일정한 관련과 유래 관계가 있다. 2호 석붕에서는 모래 섞인 붉은 갈색 도기 조각과 한쪽 면에만 구멍을 뚫은 돌가락바퀴가 발견되었고, 1호 석붕 덮개돌에는 뚜렷한 금속 도구 자국이 있었다. 이를 통해 석붕의 연대가 이미 청동기시대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석붕은 신금新金 쌍방雙房 석붕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구조적으로 돌 테두리[석광권石框圈]가 나타나고, 받침돌을 더 높이 쌓고, 3분의 2가 지하로 들어가는 등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그 시대는 신금 쌍방 석붕보다 늦으며, 춘추春秋 말기나 전국戰國 시대에 해당할 것이다. 4, 5호 적석묘는 겉모습이 비교적 특이하고 구조적으로는 고구려高句麗 시기의 적석묘와 가깝다. 6호 적석석실묘가 5호 적석묘의 돌무지 위에 놓여있어, 5호 적석묘가 적석석실묘보다 이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석석실묘는 그 형태로 보아 고구려 시기 무덤이며, 4, 5호 적석묘의 시대는 전국 말기나 한漢나라 초기로 보는 것이 비교적 타당하다.
在山龍墓地,發現的墓中未見完整的人骨,都為殘碎經火燒的骨片,在基底及四壁都有燒薰的痕跡,在8號墓中不僅人骨經火燒,而且陶器都燒變形,石板燒裂,由此可知,此墓地的墓都為火葬,而且在墓室內進行的。
산룡山龍 묘지에서 발견된 무덤들에서는 온전한 사람 뼈가 보이지 않았고, 모두 불에 탄 뼛조각이었다. 바닥과 네 벽에는 모두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다. 8호묘에서는 사람 뼈뿐만 아니라 도기도 불에 타서 변형되고 석판이 타서 갈라졌다. 이를 통해 이 묘지의 무덤들은 모두 화장火葬이었고, 화장은 묘실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本文責任編輯 城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