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
[41]史念海. 論《禹貢》的著作年代[J]. 陝西師大學報[哲學社會科學版], 1979[03]42-55.
[41]史念海. 论《禹贡》的著作年代[J]. 陕西师大学报[哲学社会科学版], 1979[03]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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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禹貢》的著作年代
《우공》의 저작 연대에 대한 고찰
목차
一、徐州的菏水是《禹貢》成書年代的最早極限的標誌
1. 서주徐州의 하수菏水는 《우공禹貢》의 성서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한계의 표지이다.
二、《禹貢》九州與戰國前期的形勢
2.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와 전국 전기의 정세
[一]《禹貢》九州和《孟子》所說的 “海內之地方千里者九”
[一]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와 《맹자孟子》에 나오는 “해내지지방천리자구海內之地方千里者九”의 관계
[二]《禹貢》九州與《呂氏春秋》九州
[二]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와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구주
[三]《禹貢》的冀州和晉國
[三]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와 진국晉國
三、由河水流經的地方論《禹貢》的著作年代
3. 하수河水가 흐르는 지역을 통해 본 《우공禹貢》의 저작 시기
四、《禹貢》的成書當出於魏國人之手
4. 《우공禹貢》의 저작은 마땅히 위국魏國 사람이 집필한 것이다.
六、《禹貢》的撰述與梁惠王的霸業
6. 《우공禹貢》의 찬술과 양혜왕梁惠王의 패업霸業에 대하여
사념해史念海
《禹貢》是我國最早的地理名著. 它的內容極為豐富, 舉凡疆域輪廓、政治區劃、山脈、河流、土壤、田地、物產、道路以及各地的部落, 無不兼收並蓄, 詳加論列. 它顯示出我國先民地理知識的淵博, 也展現出我國先民利用自然和改造自然的豐碩成果.
《우공禹貢》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지리 명저이다. 그 내용은 매우 풍부하여 국토의 윤곽, 행정 구획, 산맥, 하천, 토양, 전지田地, 생산물, 교통로, 각지의 부락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아우르고 상세하게 논술한다. 이 책은 중국 선민들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이용하고 개조한 풍부한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可是這樣一篇地理名著, 對於它的著作時期卻一直難得定論. 由於它列入《尚書》, 就被當作夏史, 認為是夏禹治理洪水、劃土分州的記載. 殷商甲骨文字始具書契芻形, 夏禹更遠在殷商之前, 何能有此煌煌鉅著? 晚近學人對於這篇名著日益重視, 對於它的成書遲早, 也多有論列. 於是, 上起西周初年, 下迄戰國季世, 皆有不同的主張. 議論紛紜, 莫衷一是. 當前我們正在從事《中國歷史地理》一書的論著, 對於《禹貢》這樣一篇地理名著中所顯示的我國先民利用自然和改造自然的設計和實踐, 不能略而不論. 因就這個問題提出一些私見, 以求正於各方同志.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지리 명저임에도 불구하고 그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우공禹貢》이 《상서尙書》에 편입되어 있어서 하대夏代의 역사로 간주되고 하우夏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토지를 나누어 주州를 구획한 기록이라고 여겨져 왔다. 은상殷商 시대의 갑골문자부터 비로소 문자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는데 하우는 은상보다도 훨씬 앞선 인물이다. 그런데 어찌 이처럼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근래 학자들은 이 명저를 점점 더 중시하게 되었고 그 성립 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위로는 서주西周 초기부터 아래로는 전국戰國 말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주장이 나왔다. 논의가 분분하지만 일치된 결론은 없다. 현재 필자는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라는 책을 집필하는 중이며, 《우공》과 같은 지리 명저가 보여주는 선민들이 자연을 이용하고 개조한 설계와 실천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사견을 제시해 여러 동지들의 비판과 교정을 구하고자 한다.
我認為這篇地理名著為戰國時期的著作. 其成書年代不應早於前四八二年, 亦即周敬王三十八年和魯哀公十三年, 吳晉黃池會盟之年. 這時吳王夫差始“闕為深溝, 通於商魯之間”. 這是一個最早的極限, 《禹貢》的成書絕對不能在這一年之前. 不僅不能在這一年之前, 還應在前四○三年之後. 前四○三年即周威烈王二十三年三家分晉之年. 因為《禹貢》中所反映的乃是戰國時期的形勢, 不應上推到春秋時期, 更無論春秋時期以前了. 我還認為《禹貢》的成書當出於魏國人士之手. 其成書的年代可能在前三七○年至前三六二年之間, 也是梁惠王元年至九年之間. 前三七○年, 梁惠王於安邑即位, 前三六二年, 遷都於大梁. 梁惠王上承晉國舊風, 積極圖霸. 《禹貢》這篇地理名著就是魏國人士在這期間於安邑撰著成書的, 是在魏國霸業基礎上設想出來大一統事業的宏圖. 遷都大梁之後, 也許還繼續有所增刪修訂, 不過其著作年代至遲不能晚於前三三四年, 亦即周顯王三十五年, 也是梁惠王後元年. 這一年魏齊兩國在“徐州相王”. “相王”是互相承認霸業. 這顯示魏國霸業的衰落, 大一統事業已經無從說起[1].
[1] 關於春秋戰國的年曆, 《史記·十二諸侯年表》與《六國表》所列的往往與《竹書紀年》不相符合. 近年有關這方面的論著不少, 本文斟酌採用, 不再一一註明. 又本篇所據以論證的素材, 皆以能有確定的年代, 堪資佐證者為主. 其他史事、言論、典章制度、名物訓詁等, 凡未能據以推求出具體的歲月的, 皆不加擷取.
필자는 이 지리 명저가 전국시대의 저작이라고 본다. 그 성립 연대는 기원전 482년, 즉 주경왕周敬王 38년이자 노애공魯哀公 13년,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진나라 군주와 황지黃池에서 회맹한 해보다 앞설 수 없다. 이 해에 오왕 부차는 비로소 “깊은 도랑을 파서 상商과 노魯 사이를 통하게” 했으니, 이는 가장 이른 한계로서 《우공禹貢》의 성립은 이보다 앞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해보다도 더 뒤여야 하며 기원전 403년 이후여야 한다. 기원전 403년은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으로 삼가三家[한韓·조趙·위魏]가 진晉을 분할한 해이다. 《우공》에 반영된 것은 전국시대의 정세이므로 그 저술 시기는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릴 수 없고 더구나 춘추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필자는 또한 《우공》의 저술자는 위국魏國 사람일 것이라고 본다. 그 성립 시기는 기원전 370년부터 기원전 362년 사이, 즉 양혜왕梁惠王 원년부터 9년 사이로 추정된다. 기원전 370년 양혜왕은 안읍安邑에서 즉위했고, 기원전 362년에는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양혜왕은 진晉의 옛 전통을 계승하여 패권을 도모하는 데 힘썼으며, 《우공》이라는 지리 명저는 바로 이 시기 안읍에서 위국 사람들이 저술한 것으로 위국의 패업을 기반으로 대일통大一統 사업을 구상한 청사진이었다. 대량으로 천도한 뒤에도 약간의 증감과 수정을 거쳤겠지만, 저술 연대는 늦어도 기원전 334년, 즉 주현왕周顯王 35년이자 양혜왕의 후원년後元年을 넘기지 않는다. 이 해에 위와 제齊가 “서주상왕徐州相王”에서 서로의 왕호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상왕相王”은 상호 패업을 인정한 것이며, 이는 위국 패업의 쇠퇴를 보여주어 대일통 사업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1].
關於《禹貢》成書戰國時期, 與梁惠王有一定關係這一基本論點, 近若干年來已經有人提出, 特別是戰國時期著作的說法, 主張的更多. 我在這方面所做的工作, 只是列舉了具體論證的根據和理由, 使它能成為一個內容充實的學說而已.
《우공禹貢》이 전국시대에 성립되었고 양혜왕梁惠王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이 기본 논점은 최근 몇 년 사이 이미 제기된 바 있으며, 특히 전국시대 저작이라는 견해는 더욱 많은 지지를 받는다. 필자가 이 방면에서 한 작업은 단지 구체적인 논증의 근거와 이유를 열거함으로써 그것이 내용이 충실한 하나의 학설이 되도록 한 것뿐이다.
下面的論證就從前四八二年這個最早的極限開始.
아래의 논증은 기원전 482년이라는 가장 이른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一、徐州的菏水是《禹貢》成書年代的最早極限的標誌
1. 서주徐州의 하수菏水는 《우공禹貢》의 성서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한계의 표지이다.
《禹貢》九州中皆規劃著貢道. 貢道是各州向都城進貢時必由的道路. 《禹貢》的作者認為水路是最為便捷易行的, 所說的貢道都盡量遵由水路, 只有在沒有適當的河流時才改取陸路. 這裡面徐州的貢道應該引起重視. 《禹貢》以“海岱及淮惟徐州”. 就是說, 徐州的轄地是東濱東海, 西北及於泰山, 而南以淮河為界. 徐州的貢道是“浮於淮泗, 達於菏”[1]. 《禹貢》所說的都城是在冀州的西南部. 徐州的貢道就是由淮入泗, 由泗入菏, 由菏入濟, 由濟入河, 才能達於都城. 淮、泗、濟、河都是自然水道, 只有這一條菏水卻是人工開鑿的水道. 《禹貢》既然記載了這樣一條水道, 就足以說明它的著作年代只能在這條人工水道開鑿成功以後, 而不能超過他的前面.
[1] “達於菏”的“菏”字, 或作“河”字. 金履祥說: “《古文尚書》作‘達於菏’, 《說文》引《書》亦作‘菏’, 今俗本誤作‘河’耳. 菏澤與濟水相通. 徐州浮淮入泗, 自泗達菏也, 書‘達於河’, 則達於河可知”. 《水經·濟水注》引此, 亦作“菏”.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에는 모두 공도貢道가 계획되어 있다. 공도란 각 주州가 도성都城에 공물을 바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우공》의 저자는 수로水路가 가장 편리하고 쉽다고 여겼기에 언급된 공도는 가능한 한 모두 수로를 따르며, 적절한 하천이 없을 경우에만 육로를 택한다. 이 가운데 서주徐州의 공도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공》은 “해대급회유서주海岱及淮惟徐州”라 하여 서주의 관할 지역이 동쪽으로는 동해東海에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태산泰山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회수淮河를 경계로 삼는다고 했다. 서주의 공도는 “부어회사浮於淮泗, 달어하達於菏”이다[1]. 《우공》에서 말하는 도성은 기주冀州의 서남부에 있다. 서주의 공도는 회수淮水에서 사수泗水로, 사수에서 하수菏水로, 하수에서 제수濟水로, 제수에서 황하河水로 들어가 비로소 도성에 이르는 수로이다. 회수·사수·제수·황하는 모두 자연 하천이지만, 이 가운데 하수菏水만은 인공적으로 개착한 수로이다. 《우공》이 이러한 인공 수로를 기록했다는 점은, 그 저작 연대가 반드시 이 수로가 개통된 이후여야 하며 그 이전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菏水是一條大致東西向的水道, 位於今山東的西南部, 西端起自今定陶縣, 東端至於今魚台縣. 西端接當時的濟水, 東端入於泗水. 這條菏水上無源頭, 只是從濟水裡引出來的一條水流, 所以不能說是一條自然水道. 而且這裡的地勢有的地方較高, 當時也不能有一條自然水道. 至少在它的西端近濟水處就是這樣的. 據《禹貢》所載, 在菏水西端近濟水處有一個菏澤. 菏澤與濟水相通, 菏水就是由菏澤引出來的[2], 所以說菏水西接濟水. 《禹貢》的作者說, “導菏澤, 被孟諸”. 意思是說當這個菏澤水盛難容的時候, 就溢而南流, 注入孟諸澤中. 孟諸澤在今河南商丘、虞城兩縣之北, 正位於菏澤的南方. 當時菏澤和孟諸澤之間, 如果說沒有一條經常的水道, 至少應該有一條泛道. 這樣菏澤之水才可以流到孟諸澤中. 泛道只向南流, 不向東流, 恰正說明了菏澤之東地勢的高昂, 雖在菏澤盛漲的時候也不易向東流去. 如果菏澤之東地勢並不高昂, 而且本來就有一條自然水道, 則盛漲之水當不會向南泛流的. 《禹貢》成書已在菏水鑿通以後. 菏水既已鑿通, 菏澤還要被於孟諸, 當是菏水鑿於高昂之地, 河身不廣, 難於容納盛漲的水流. 菏澤之水無由排出, 就不能不南流, 而被於孟諸. 既然這裡地勢高昂, 為什麼吳王夫差還要在這裡開鑿一條人工水道? 現在看來, 魚台定陶兩縣間是濟水和泗水間相距最近的地方, 地勢即使間有稍高之處, 人工開鑿一條水道還是有一定的條件的.
[2] 《禹貢》導沇水, 東至於菏. 則菏澤與濟水相通, 而菏水上通菏澤, 見於《水經·泗水注》.
하수菏水는 대체로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수로이며 지금의 산동山東 서남부에 위치한다. 서쪽 끝은 지금의 정도현定陶縣에서 시작하고 동쪽 끝은 지금의 어태현魚台縣에 이른다. 서쪽 끝은 당시의 제수濟水에 연결되고 동쪽 끝은 사수泗水로 들어간다. 이 하수는 상류가 따로 없으며 단지 제수에서 끌어온 물줄기일 뿐이므로 자연 하천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이 일대의 지세는 일부가 높은 곳에 위치해 당시에도 자연적으로 물이 흐를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으니, 특히 하수의 서쪽 끝 제수에 가까운 지역이 그러했다. 《우공禹貢》에 따르면 하수의 서쪽 끝 제수 근처에는 하택菏澤이 있다. 하택은 제수와 연결되어 있으며 하수는 바로 이 하택에서 끌어온 수로이다[2]. 그러므로 하수가 서쪽으로 제수와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공》의 저자는 “도하택導菏澤, 피맹저被孟諸”라고 하여 하택의 물이 넘쳐 담아둘 수 없을 때에는 남쪽으로 흘러 맹저택孟諸澤으로 들어간다고 서술했다. 맹저택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商丘·우성虞城 두 현縣 북쪽에 있는데 바로 하택의 남쪽에 해당한다. 당시 하택과 맹저택 사이에는 상시적 수로는 없더라도 최소한 범도泛道가 있었을 것이며, 그래야만 하택의 물이 맹저택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 범도는 남쪽으로만 흐르고 동쪽으로는 흐르지 않았으니, 이는 하택 동쪽의 지세가 높아서 하택이 넘칠 때라도 동쪽으로 흐르기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만약 하택의 동쪽 지세가 높지 않고 본래부터 자연 수로가 있었다면 물이 넘칠 때 남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흘렀을 것이다. 《우공》이 성립된 시점은 하수가 이미 뚫려 통수通水된 이후이다. 하수가 이미 뚫렸음에도 하택의 물이 여전히 맹저로 흘러들었다면, 이는 하수가 고지대를 통과해 강폭이 넓지 않았던 까닭에 수량이 많을 때 감당하지 못해 넘쳤음을 의미한다. 하택의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결국 남쪽으로 흘러 맹저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대 지세가 높은데도 어째서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이곳에 인공 수로를 개착했는가? 지금 보기에 어태현과 정도현 사이는 제수와 사수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이며, 지형이 다소 높더라도 인공 수로를 개착할 만한 조건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這條人工水道乃是吳王夫差為了要和晉侯在黃池會盟而開鑿的[3]. 黃池在今河南封丘縣南, 當時正濱於濟水. 菏水的開鑿就可以使吳國的船舶直抵會盟的地方. 吳晉黃池之會是前四八二年, 則這條菏水的開鑿可能始於它的前一年, 而在會盟這一年才鑿成通航的[1].
[3] 《國語》十九〈吳語〉: “吳王夫差既殺申胥, 不稔於歲, 乃起師北征, 闕為深溝, 通於商魯之間, 北屬之沂, 西屬之濟, 以會晉公午於黃池.” 韋昭說, 這裡的沂水是南流在下邳入泗的. 這樣的解釋是錯誤的. 這裡所說的沂水應是泗水另外一條支流, 是發源於今曲阜縣東南尼丘山而於今鄒縣西南注入泗水的沂水. 《泗水注》固曾記載了一條黃溝, 是由黃池附近東流入泗的. 然酈道元既未敘述它的來歷, 而它也未能在當時後世發生過什麼影響, 應與吳國所開鑿的無關.
[1] 按《史記》三十一〈吳太伯世家〉, 黃池之會在吳王夫差十四年七月, 吳王於當年六月即已達到黃池. 由年初至此, 不到半載, 開渠鑿溝, 似屬匆促. 然前一年, 吳王方召魯、衛之君會於橐皋, 似尚未全力從事於這條新水道的施工開鑿.
이 인공 수로는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진후晉侯와 황지黃池에서 회맹하기 위해 개착한 것이다[3]. 황지黃池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봉구현封丘縣 남쪽에 있었고 당시 제수濟水에 접해 있었다. 하수菏水를 개착함으로써 오나라의 선박이 회맹 장소까지 곧장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오와 진의 황지 회맹은 기원전 482년의 일이므로, 이 하수의 개착은 그 전해에 시작되어 회맹이 있었던 그 해에 비로소 항행이 가능해졌을 것이다[1].
菏水的開鑿在當時很快就引起了巨大的影響. 那時江、淮、河、濟被稱為四瀆. 四瀆是各自獨流入海的. 其實, 濟水是由黃河裡分流出來的, 只能說是黃河的一條支津. 所以那時應該是三大流域, 而且是互不相通的. 黃池之會以前, 吳王夫差曾經在邗城之下鑿溝以連接江水和淮水[2]. 因而當時已演變成為河濟和江淮兩大水道交通網. 菏水的開鑿連接了濟水和泗水. 連接了濟水就等於接連了黃河. 泗水為淮水的支流, 連接了泗水也就是等於連接了淮水和江水. 這就使江淮兩水和河濟兩水這兩個互不相通的交通網終於互相連接起來, 有利於交通的發展, 而且這樣的發展是以前從來所沒有過的. 交通發展促進了經濟的繁榮, 也促進了經濟都會的興起. 菏水和濟水連接處的陶, 也就是後來的定陶, 就因此而成為繁榮一時的經濟都會. 陶的發展較之周圍其它經濟都會都顯得迅速. 吳王夫差開鑿菏水後, 還沒有十年, 越國就滅掉吳國. 越王勾踐的滅吳很得力於范蠡的輔佐. 吳國既滅, 范蠡亦功成身退, 扁舟遊於江湖之上. 後來遊到陶, 以為陶乃是“天下之中”, 諸侯四通, 貨物交易的地方. 就在當地經營商業, 曾經三致千金. 僅就這一點說, 菏水的作用也是顯而易見的. 或者有人要說, 范蠡與傳說中的陶朱公並非一人. 如此說果確, 亦無損於陶為“天下之中”, 因為戰國時期陶的繁榮是無容抹殺的.
[2] 《左傳》哀公九年.
하수菏水의 개착은 당시 곧바로 막대한 영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강수江水·회수淮水·황하河水·제수濟水는 사독四瀆이라 불렸고, 사독은 각각 따로 바다로 흘러드는 수계였다. 그런데 사실 제수는 황하에서 갈라져 나온 물줄기일 뿐이므로 황하의 지류라고만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사실상 세 개의 큰 수계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셈이다. 황지黃池 회맹 이전에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한성邗城 아래에 도랑을 파서 강수와 회수를 연결한 바 있다[2]. 이로 인해 당시에는 황하·제수를 중심으로 한 수로망과 강수·회수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수로망, 즉 두 개의 수로 교통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수의 개착은 제수와 사수泗水를 연결했고, 제수를 연결했다는 것은 곧 황하와 연결했다는 뜻이다. 사수는 회수의 지류이므로 사수를 연결했다는 것은 곧 회수·강수와 연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강·회 두 물길과 황하·제수 두 물길로 갈려 서로 통하지 않던 두 교통망이 마침내 연결되었고, 교통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발전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교통의 발전은 경제의 번영을 촉진했고, 경제 도회都會의 흥기도 촉진시켰다. 하수와 제수가 연결되는 지점인 도陶, 곧 훗날의 정도定陶는 이로 인해 한때 매우 번영한 경제 도회가 되었다. 도의 발전은 주변의 다른 경제 도회들보다 훨씬 빨랐다. 오왕 부차가 하수를 개착한 후 10년도 되지 않아 월越이 오를 멸망시켰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오 정벌은 범려范蠡의 보좌에 크게 힘입었다. 오가 멸망한 뒤 범려는 공을 이루고 물러나 작은 배로 강호를 떠돌다가 도陶에 이르러, 그곳이 “천하지중天下之中”으로 제후가 사방으로 통하고 화물이 거래되는 곳임을 알아보고 그곳에서 상업을 경영해 세 번이나 천금千金을 모았다. 이 한 가지 점만 보아도 하수의 역할은 명백히 드러난다. 혹자는 범려와 전설 속의 도주공陶朱公이 동일인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도가 “천하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다. 전국시대 도의 번영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陶於春秋時期為曹國故地. 如果對照一下曹國和陶的差異情形, 當更可明瞭菏水開鑿前後的顯著不同處. 曹國雖然也是一個諸侯封國, 可是經歷整個春秋時期, 都是漠漠無聞. 晉楚城濮之戰前, 晉國曾加兵於曹國. 這主要是由於晉文公出亡時, 不見禮於曹侯的緣故, 並不一定是它在戰略上有何重要之處. 除此以外, 曹國殆未再見重於諸侯之間. 這與菏水開鑿後陶的繁榮蒸蒸日上的情景是不能同日而語的[3].
[3] 拙著《河山集》〈釋《史記·貨殖列傳》所說的“陶為天下之中”兼論戰國時代的經濟都會〉.
도陶는 춘추시기 조국曹國의 옛 땅이었다. 조국과 도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하수菏水 개착 전후의 현저한 차이를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조국은 비록 제후의 봉국이었지만 춘추시기 전체를 통틀어 그 존재감은 미미했다. 진晉·초楚의 성복城濮 전투 이전에 진국이 조국에 출병한 적이 있는데, 이는 주로 진문공晉文公이 망명할 때 조후曹侯에게 예우받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일 뿐, 조국이 전략적으로 어떤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외에는 조국이 제후들 사이에서 중시된 사례는 거의 없다. 이러한 조국의 모습은 하수가 개착된 이후 도陶가 번영해 일약 성장한 모습과 결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3].
《禹貢》這部書是以夏禹相標榜的, 是應該按照夏禹時的具體情況從事撰述的. 可是《禹貢》的作者究竟不能完全脫離當時的實際. 《禹貢》記載了菏水這條貢道, 當然並不是因為它是一條人工水道, 而是由於捨棄了這樣一條水道, 所說的貢道系統便不能建立起來. 實際上則是當《禹貢》的作者從事著作的時候, 這條菏水早已成為交通要道, 和濟、泗諸水沒有什麼差別, 所以就把它和濟泗諸水一樣列入於所說的貢道之中. 這就說明了: 《禹貢》的著作年代不僅應該後於前四八二年吳王夫差掘溝於商魯之間, 而且更應該在菏水已經成為交通要道之後.
《우공禹貢》은 하우夏禹를 표방한 책이므로 마땅히 하우 시대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서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공》의 저자는 결국 당대의 현실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공》이 하수菏水라는 공도를 기록한 것은 그것이 인공 수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수로를 빠뜨리면 서술된 공도 체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공》의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 이 하수는 이미 교통의 요로가 되어 있어 제수濟水·사수泗水 등 자연 하천들과 별 차이가 없었기에 제수·사수와 마찬가지로 공도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는 곧 《우공》의 저작 연대가 단지 기원전 482년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상商과 노魯 사이에 도랑을 판 시점보다 늦을 뿐만 아니라, 하수가 이미 교통 요로로 기능한 이후여야 함을 보여준다.
不過這裡還有一個問題應該隨著提出來. 吳王夫差開鑿了菏水, 還開鑿了邗溝, 而開鑿邗溝還在菏水以前. 可是《禹貢》只提菏水, 卻沒有提到邗溝. 邗溝在揚州. 《禹貢》揚州的貢道乃是“沿於江海, 達於淮泗”. 這恰恰把邗溝繞過了. 是不是《禹貢》的著作年代不在菏水暢通以後, 而應該在邗溝開鑿之前? 不是的. 因為如果在邗溝開鑿之前, 那時根本沒有菏水, 《禹貢》的作者怎麼能憑空寫下這一筆, 而且能夠寫得一點都不錯.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함께 제기되어야 한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하수菏水뿐 아니라 한구邗溝도 개착했는데, 한구를 판 시기는 하수보다도 더 이르다. 그런데 《우공禹貢》은 하수만 언급할 뿐 한구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구는 양주揚州에 있었다. 《우공》에서 양주의 공도는 “연어강해沿於江海, 달어회사達於淮泗”라 했는데, 이는 정확히 한구를 비껴간 것이다. 그렇다면 《우공》의 저작 시기는 하수가 통행 가능해진 이후가 아니라 한구가 개착되기 이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만일 한구 개착 이전이라면 그 당시에는 하수 자체가 없었는데 《우공》의 저자가 어떻게 무에서 그러한 내용을 써낼 수 있었으며, 게다가 조금도 틀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邗溝和菏水這兩條交通水道, 至少有一點是不相同的. 在那時, 菏水是濟泗兩水之間唯一的捷徑, 捨此以外別無他途. 邗溝卻不是如此. 揚州近在海濱, 近海的人是習於風濤之險的, 因而海上交通早已發達, 至少江水和淮水之間是可以繞道海上往來的. 邗溝的開鑿使這兩個地區之間可以走點近路, 且可以免去海上風濤之險. 由於邗溝要利用一些湖泊, 甚至遷就東北的射陽湖, 還是要走些彎路的. 在菏水鑿成的當年, 吳王夫差就由這條新水道去和晉國會盟. 而在邗溝鑿成之後, 吳王夫差伐齊都還是由海上出兵的[1]. 為什麼如此? 史籍沒有說明其中曲折. 很可能不外下面這兩點: 其一是運輸力不強, 其二是航道繞路較多. 當然最根本的一條還是由於另有一條海道, 可供選擇.
[1] 《史記》三十一〈吳太伯世家〉, 三十二〈齊太公世家〉.
한구邗溝와 하수菏水 이 두 수로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서로 같지 않다. 당시 하수는 제수濟水와 사수泗水를 잇는 유일한 지름길이었고 이 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한구는 그렇지 않았다. 양주揚州는 해변에 가까워 그 지역 사람들은 풍랑의 위험에 익숙했기 때문에 해상 교통이 이미 발달해 있었고, 강수江水와 회수淮水 사이의 왕래는 적어도 해로를 우회해 가능했다. 한구의 개착은 두 지역 사이를 좀 더 가깝게 이어주고 동시에 해상 풍랑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구는 일부 호수들을 활용해야 했고 동북쪽의 사양호射陽湖를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다소 굽은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수가 완성된 그 해에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이 새 수로를 따라 진국晉國과 회맹했다. 그러나 한구가 완성된 뒤에도 오왕 부차가 제齊를 정벌할 때는 여전히 해로로 출병했다[1]. 어째서 그러했을까? 역사 기록은 그 곡절을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는 운송 능력이 충분치 못했고, 둘째는 항로가 굽이가 많았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외에 또 하나의 해로가 있어 선택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吳國滅後, 越國稱霸東南. 海上運輸益臻發達. 越王勾踐徙都瑯琊[2], 瑯琊在今山東諸城縣東南海濱[3], 越國故都會稽亦在海濱, 其間往來自應取道於海上. 若當時捨海道而就陸路, 亦殆不可能. 由瑯琊陸路南行, 當沿沭水而下. 沭水下與沂水相合, 而郯國正在沂水東岸, 為南行道路必經之地. 郯國後雖亦為越國所滅, 乃在越王朱勾時[4]. 勾踐之後三傳始及於朱勾, 則勾踐時尚不能據有沂水下游. 南行的道路尚不能暢通, 何能輕易捨水就陸, 自取困頓? 據說勾踐當時有樓船之卒三千餘人, 又有戈船三百艘[5]. 此雖出自後世的記載, 所言亦頗合理.
[2] 《今本紀年》, 又《水經·濰水注》.
[3] 或謂勾踐所遷都的瑯琊乃在今安徽滁縣的瑯琊山. 這是一種牽強傅會的說法. 諸城縣的瑯琊台本為海濱富饒的地方. 不僅勾踐以之為都城, 就是後來秦始皇東巡, 到了瑯琊台時, 對當地也頗加稱讚, 還曾為之停留了三個月. 且勾踐遷此是為了爭霸中原, 故國為之築長城, 以相防備. 至於滁縣雖有瑯琊山, 然居於群山之間, 勾踐如遷都於此, 果何所取乎? 據說滁縣的瑯琊山, 以曾為西晉末年瑯琊王所居而得名, 則與勾踐初無關涉也.
[4] 《史記》四十一〈越王勾踐世家·索隱〉引《紀年》.
[5] 《越絕書》二.
오국吳國이 멸망한 뒤 월국越國이 동남에서 패권을 잡았고 해상 운송은 더욱 발달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도읍을 낭야瑯琊로 옮겼는데[2], 낭야는 지금의 산동 제성현諸城縣 동남 해안에 있다[3]. 월국의 옛 도읍 회계會稽 또한 해안에 있었기에 그 사이의 왕래는 당연히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만약 당시 해로를 버리고 육로를 택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낭야에서 육로로 남하하려면 술수沭水를 따라 내려가야 했는데, 술수는 하류에서 기수沂水와 합류하고 담국郯國이 바로 기수의 동쪽 기슭에 자리해 남행 도로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담국은 뒷날 역시 월국에 멸망했으나 그것은 월왕 주구朱勾 때의 일이다[4]. 구천 이후 세 대를 지나서야 주구에 이르렀으니 구천 시기에는 아직 기수 하류를 점유하지 못했다. 남쪽으로 가는 육로조차 원활하지 못한데 어찌 쉽게 수로를 버리고 육로를 택해 스스로 곤궁함을 자초할 수 있었겠는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구천 당시 누선樓船의 병사가 3천여 명이었고 과선戈船이 3백 척이었다고 한다[5]. 비록 후세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 말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勾踐遷都瑯琊之後, 越都是否再經遷徙? 這有兩種不同的記載: 一說王翳三十三年遷吳[6]; 一說楚考烈王並越於瑯琊[7]. 這後一種是說越國都城再未遷徙. 楚考烈王已至戰國末年, 不必過於申論. 王翳三十三年, 為周安王二十三年, 亦即前三七九年. 這一年上距三家分晉已經二十四年, 下距梁惠王即位也只有十年. 即令王翳這一年遷都, 越國的海運亦不應到此即戛然而止. 如果越國未再遷都, 最後就是在瑯琊被滅, 海運更當延續下去.
[6] 《史記》四十一〈越王勾踐世家·索隱〉引《紀年》.
[7] 《越絕書》二.
구천句踐이 낭야瑯琊로 천도한 뒤 월越의 도읍은 다시 옮겨졌는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기록이 있다. 하나는 왕예王翳 33년에 오吳로 천도했다는 설이고[6], 다른 하나는 초고열왕楚考烈王이 낭야에서 월을 병합했다는 설이다[7]. 후자의 설은 월의 도읍이 다시 옮겨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초고열왕은 이미 전국 말기의 인물이므로 굳이 길게 논할 필요는 없다. 왕예 33년은 주안왕周安王 23년, 즉 기원전 379년에 해당한다. 이 해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 24년이 지났고 양혜왕梁惠王의 즉위까지는 겨우 10년 남짓이다. 설령 왕예가 이 해에 천도했다 하더라도 월의 해운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중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월이 다시 천도하지 않고 결국 낭야에서 멸망했다면 해운은 더더욱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由於海運發達, 邗溝的交通當然會受到很大影響. 《禹貢》不載邗溝這段本可以作為貢道的河流, 並不是由於它的成書時期邗溝尚未施工, 實際上當時因為這條河流運輸力量不如海運, 不為人所稱道. 所以《禹貢》的貢道也就只說“沿於江海”, 無須再特別涉及邗溝了.
해운海運의 발달로 인해 한구邗溝의 교통은 당연히 큰 영향을 받았다. 《우공禹貢》이 본래 공도貢道로 삼을 수 있던 한구 구간의 하천을 싣지 않은 것은 성서成書 시기에 한구가 아직 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당시 이 수로의 운송력이 해운에 미치지 못해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공》의 공도도 단지 “연어강해沿於江海”라고만 서술하고 굳이 한구를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二、《禹貢》九州與戰國前期的形勢
2.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와 전국 전기의 정세
《禹貢》的作者還曾留下其它的線索, 可供繼續對它的著作年代的探討. 九州的劃分就是其中的又一端.
《우공禹貢》의 저자는 그 외에도 몇 가지 단서를 남겨 저작 연대를 계속 탐구하는 데 참고할 수 있게 했다. 구주九州의 구분이 바로 그중 또 하나의 단서이다.
以九州來分劃天下的設想, 起源很早[1]. 不過這不是唯一的想法, 其它還有九有[2]、九圍[3]、九隅[4]等形式. 以這些名稱相對照, 則這裡所謂的九州並不是一個有具體範圍的名稱. 當然“九”也只是表示多數的意思, 並不一定就說是有九個大致相同的地方.
[1] 《齊叔弓鐘銘》.
[2] 《詩·商頌·玄鳥》.
[3] 《詩·商頌·長發》.
[4] 《逸周書·賞麥解》.
구주九州로 천하를 구분하려는 구상은 매우 이른 시기에 기원했다[1].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구상은 아니었고, 그 외에도 구유九有[2]·구위九圍[3]·구우九隅[4] 등의 형식이 있었다. 이러한 명칭들을 서로 대비해 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구주는 구체적인 범위를 지닌 고유 명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구九”라는 숫자도 단지 많음을 뜻하는 표현일 뿐 반드시 아홉 개의 대체로 비슷한 지역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禹貢》這篇地理名著的撰書, 如前所說, 它是在規劃大一統事業的宏圖. 當然劃土分州應是其中一項主要的任務. 在這一方面, 它是採用以前舊有的九州的設想. 九州的說法雖久已形成, 但只是一些空泛的概念, 從來沒有實際的輪廓. 《禹貢》的作者既要劃土分州, 當然要確定具體的區劃, 因而所說的九州都各有其名稱和疆界. 這是和以前舊有的空泛概念完全不相同的, 也是不能混為一談的. 這樣具體的區劃固然是出自《禹貢》作者的構思, 也應是它的成書時期實際局面的反映. 也正是因為當時確有九州的實際基礎, 《禹貢》的作者才會採用這樣舊有的空泛概念.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공禹貢》이라는 지리 명저는 대일통大一統 사업의 거대한 청사진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저술되었다. 당연히 국토를 구획하고 주州로 나누는 일이 그 가운데 주요한 과업이었으며, 이 점에서 《우공》은 예전부터 있던 구주九州 구상을 채택했다. 구주라는 관념은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었을 뿐 실제적인 윤곽을 가진 적은 없었다. 《우공》의 저자가 국토를 주 단위로 나누고자 했다면 당연히 구체적 구획을 설정해야 했고, 따라서 《우공》에서 말하는 구주는 각각의 명칭과 경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이는 기존의 추상적 개념과는 완전히 달라서 서로 혼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구획은 《우공》 저자의 창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 책이 성립된 시기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에 실제로 구주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우공》의 저자도 이 오래된 추상 개념을 차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一]《禹貢》九州和《孟子》所說的 “海內之地方千里者九”
[一]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와 《맹자孟子》에 나오는 “해내지지방천리자구海內之地方千里者九”의 관계
論戰國時期的史事, 一般都樂道七雄並立. 其實這只是戰國後期的形勢. 戰國前期稱雄於當時的乃是九國而非七國. 故孟子告齊宣王說: “海內之地方千里者九, 齊集有其一”[5]: 這樣以九國並稱, 說者尚有數家, 並非孟子一人的私見. 孟子所說的方千里之國九, 雖沒有九國的名稱, 但至少可以顯示出如下的兩點: 一不是空泛的概念, 二應是與齊國大致相當的諸侯封國. 因為孟子所向之陳言的乃是具有一定雄心的齊宣王, 是不能以空言搪塞的. 《禹貢》九州既是反映一定時期的實際局面, 只能是戰國前期像孟子所說的“方千里者九”這種局面. 因為過此以後, 即成了七雄並立的局面, 自然是不相符合的.
[5] 《孟子·梁惠王上》.
전국戰國 시대의 역사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는 칠웅병립七雄並立을 즐겨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국 후기의 형세일 뿐이며, 전국 전기에 당대에서 패권을 다툰 것은 일곱 나라가 아니라 아홉 나라였다. 그래서 맹자孟子는 제선왕齊宣王에게 “해내지지방천리자구海內之地方千里者九, 제집유기일齊集有其一”[5], 즉 “바다 안쪽에 사방 천 리 되는 땅이 아홉이며 제齊는 그 하나를 모두 차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구국九國을 함께 거론한 견해는 맹자 한 사람의 사견이 아니라 당시에도 여러 사람이 공유하던 것이었다. 맹자가 말한 ‘사방 천 리 되는 나라 아홉’이라는 구도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그것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인식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 아홉 나라는 제齊와 대략 비슷한 수준의 제후 봉국이었다는 점이다. 맹자가 발언한 대상은 강력한 야망을 품고 있던 제선왕이었으므로 빈말로 얼버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공禹貢》의 구주九州가 일정한 시기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타내는 시대는 전국 후기의 칠웅병립 체제가 아니라 바로 맹자가 말한 “사방 천 리 되는 나라 아홉”의 전국 전기 구도와 일치한다. 그 이후에는 칠웅 체제로 고정되어 《우공》의 구주 개념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孟子於遊齊之前, 曾遊梁[其時魏已徙都大梁, 以梁相稱]. 其時已在梁惠王末年. 梁惠王卒後, 復遊於齊. 至遲在梁惠王和齊宣王之間, 正當九國並列之時, 故孟子特別提到“海內之地”, 以明其並不是祖述前代故實. 《禹貢》九州既實有所指, 則其著作年代可能要遲至這個時期.
맹자孟子는 제齊에 유세하기에 앞서 양梁[당시 위魏가 이미 대량大梁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양梁이라 부른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시점은 이미 양혜왕梁惠王 말년이었다. 양혜왕이 죽은 뒤 맹자는 다시 제로 유세를 떠났다. 따라서 늦어도 양혜왕과 제선왕齊宣王 사이의 시기, 곧 아홉 나라가 병립하던 시기에 해당하며, 이 때문에 맹자는 “해내지지海內之地”라는 표현을 특별히 사용해 그것이 단지 옛 시대의 이야기를 답습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우공禹貢》의 구주九州가 실재하는 특정 지역들을 가리킨 것이라면 그 저작 시기는 바로 이 시기까지 늦춰질 수밖에 없다.
孟子所說的“方千里者九”, 卻未具體指出國名. 西漢時賈誼著《過秦論》, 論六國合從攻秦事, 說是“並韓、魏、燕、楚、齊、趙、宋、衛、中山之眾”. 既然說是六國合從, 何以又備舉九國的名稱? 又何況宋、衛、中山已淪為小國, 而宋、衛又已降與泗上十二諸侯同列? 這顯然是戰國前期九國局面的規模. 可見這樣舊規的說法已經深入人心, 習為故常, 雖事殊世異, 論者猶舉以為說.
맹자孟子가 말한 “방천리자구方千里者九”는 구체적인 나라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서한西漢 시대 가의賈誼는 《과진론過秦論》을 지어 육국六國이 합종해 진秦을 공격한 일을 논하면서 “한韓·위魏·연燕·초楚·제齊·조趙·송宋·위衛·중산中山의 무리를 아울렀다”고 했다. 이미 “육국 합종”이라 했으면서 어째서 다시 아홉 나라의 이름을 모두 나열한 것일까? 더구나 송·위·중산은 이미 소국으로 전락했고 송·위는 또 사상십이제후泗上十二諸侯와 함께 거론되는 처지로 떨어졌는데도 그러했다. 이는 분명 전국 전기에 존재했던 구국九國 병립 체제의 규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옛 인식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아 일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일과 시대가 달라졌어도 논자들이 여전히 이를 예시로 들었음을 알 수 있다.
賈誼所說的九國實際上應是十國. 因為九國興師攻秦, 秦國自是主要的一國. 十國之中國力並不一律. 韓、魏等六國與秦合稱七雄, 這是不必說的. 衛國自春秋時期為狄人所破後, 迄未再復強大, 疆土也顯見贍縮, 更說不上是方千里之國. 至於宋和中山兩國雖不是大國, 卻先後稱王. 而中山稱王時, 趙國尚自稱君[1]. 中山國的土宇於諸國中較狹, 敢與諸侯並稱王號, 當是能具有相當力量. 宋與中山稱王的具體年代各家尚有不同的說法. 不過都在魏國徙都大梁稍後一段時期中. 魏國未徙都前, 這兩國當已具有稱王的基礎. 由此可見, 在梁惠王時, 不僅有“方千里者九”的說法, 實際上也有九國並立的局面. 《禹貢》九州既不是空泛的概念, 而是實際的反映, 則所反映的當是戰國前期的形勢. 具體的時期是上不能早於三家分立之年, 下距孟子見齊宣王之時亦不能過遠.
[1] 《史記》四十三〈趙世家〉: “武靈王八年, 五國相王, 趙獨否. 曰: 無其實, 敢處其名乎? 令國人謂己為君.” 相王的五國, 注者無說. 《戰國策·中山策》: “犀首立五王, 而中山後持.” 則這時相王的五國中應有中山.
가의賈誼가 말한 “구국九國”은 실제로는 십국十國이라 해야 옳다. 아홉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진秦을 공격했고 진 자체도 당연히 주요 국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열 나라 가운데 국력은 모두 같지 않았다. 한韓·위魏 등 여섯 나라는 진과 함께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일컬어졌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위衛는 춘추시대에 적인狄人에게 격파당한 뒤 다시는 강성해지지 못했고 영토 또한 뚜렷이 줄어들어 사방 천 리에 이르는 나라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송宋과 중산中山 두 나라는 비록 대국은 아니었지만 차례로 왕을 자칭했다. 중산이 왕호를 칭했을 때 조趙는 아직 스스로를 군君이라 하고 있었다[1]. 중산의 영토는 여러 나라 중에서 좁은 편이지만 감히 제후들과 더불어 왕호를 자칭한 것은 그만큼 일정한 국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송과 중산이 왕호를 칭한 구체적 연대에는 학자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으나, 모두 위국魏國이 대량大梁으로 천도한 직후의 시기로 본다. 위국이 천도하기 전에도 이 두 나라는 이미 왕호를 칭할 만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로써 양혜왕梁惠王 시대에는 단지 “방천리자구方千里者九”라는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홉 나라가 병립하던 상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우공禹貢》의 구주九州는 공허한 관념이 아니라 실제 현실의 반영이며, 그것이 반영하는 것은 곧 전국 전기의 형세이다. 구체적인 시기는 위로는 삼가분진三家分晉의 해보다 이를 수 없고, 아래로는 맹자가 제선왕을 알현한 시기와도 너무 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二]《禹貢》九州與《呂氏春秋》九州
[二]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와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구주
自《禹貢》說九州之後, 說九州的接著又有幾家. 其中《呂氏春秋》的九州還附帶提到各州所影射的國名, 可以前後比照.
《우공禹貢》이 구주九州를 말한 이래 구주를 언급한 사례가 그 뒤로도 몇 가지 있었다. 그중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구주는 각 주가 가리키는 나라의 이름까지 함께 적어 놓았기 때문에 앞뒤를 비교할 수 있다.
《禹貢》九州是冀、兗、青、徐、揚、荊、豫、梁、雍. 《呂氏春秋》所說的九州, 較之《禹貢》少了一個梁州, 多了一個幽州. 其他七州相同. 《呂氏春秋》這個九州, 實際上每一個州都代表一個諸侯封國. 按它所說的: “河漢之間為豫州, 周也; 兩河之間為冀州, 晉也; 河濟之間為兗州, 衛也; 東方為青州, 齊也; 泗上為徐州, 魯也; 東南為揚州, 越也; 南方為荊州, 楚也; 西方為雍州, 秦也; 北方為幽州, 燕也.”[2] 這個名單和上面賈誼所說的顯然還有差別. 賈誼所說的九國, 應該去掉衛國, 加上秦國. 這是上面已經說過的了. 《呂氏春秋》多了魯、衛兩國, 少了宋和中山兩國, 又多了一個周王朝和一個晉國, 少了韓、趙、魏三國. 另外還添了一個相當於揚州的越國. 這裡就著重說揚州和越國.
[2] 《呂氏春秋·有始覽》.
《우공禹貢》의 구주는 기冀·연兗·청青·서徐·양揚·형荊·예豫·양梁·옹雍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말하는 구주는 《우공》보다 양주梁州가 하나 적고 유주幽州가 하나 더 있을 뿐 나머지 일곱 주는 동일하다. 《여씨춘추》의 이 구주는 사실상 각 주가 모두 하나의 제후 봉국諸侯封國을 대표한다. 그 서술에 따르면 “하한河漢 사이가 예주豫州이니 주周요, 양하兩河 사이가 기주冀州이니 진晉이요, 하제河濟 사이가 연주兗州이니 위衛요, 동방은 청주青州이니 제齊요, 사상泗上은 서주徐州이니 노魯요, 동남은 양주揚州이니 월越이요, 남방은 형주荊州이니 초楚요, 서방은 옹주雍州이니 진秦이요, 북방은 유주幽州이니 연燕이다”[2]라 했다. 이 명단은 앞서 가의賈誼가 말한 것과 분명히 차이가 있다. 가의가 든 구국九國에서는 위국衛國을 빼고 진秦을 더해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여씨춘추》는 노魯·위衛 두 나라를 더하고 송宋과 중산中山 두 나라를 빼었으며, 또 주왕조와 진국晉國을 포함시키고 한韓·조趙·위魏 세 나라는 빼었다. 그 외에도 양주揚州에 해당하는 월국越國이 더해져 있다. 여기에서는 양주와 월국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한다.
專就名稱音義而論, 揚州的“揚”和越國的“越”乃是字的聲轉, 其實是一樣的. 《禹貢》以揚州列入九州, 已顯出時代的背景. 《呂氏春秋》九州以揚州影射越國, 更能道出具體的年代. 無論為揚為越, 都指出這裡不是吳國, 而是越國. 越國興起雖早在春秋末年, 然其疆土遠至淮上, 稱霸東南, 實在滅吳之後. 越國滅吳在前四七三年, 亦即周元王三年. 這時下距三家分晉雖尚有五十多年, 然已在獲麟之後, 也未列於《史記·十二諸侯年表》之中, 則其非春秋時期殊甚明確. 《禹貢》能夠在九州中列入影射越國的揚州, 也說明《禹貢》著作的年代不能上推到戰國以前.
이름의 음과 뜻만 따져보면 양주揚州의 “양揚”과 월국越國의 “월越”은 글자의 음이 변한 것일 뿐 사실은 같은 말이다. 《우공禹貢》이 양주를 구주에 포함한 것은 이미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구주가 양주를 통해 월국을 비유한 것은 더욱 구체적인 시대를 일러준다. “양揚”이든 “월越”이든 이 지역이 오국吳國이 아니라 월국임을 가리킨다. 월국은 비록 춘추 말기부터 흥기했지만 영토가 멀리 회상淮上에 이르고 동남에서 패권을 잡은 것은 실제로 오국을 멸한 이후의 일이다. 월이 오를 멸한 것은 기원전 473년, 즉 주원왕周元王 3년이다. 이 시점은 삼가분진三家分晉보다 50여 년 앞서 있지만 이미 “획린獲麟” 이후이며 《사기史記·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에도 등재되지 않았으므로 춘추시대의 일이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우공》이 구주 가운데 월국을 가리키는 양주를 포함했다는 사실은 《우공》의 저작 연대를 전국시대 이전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不過對於越國的演變, 還應再作進一步的論證. 勾踐時, “越兵橫行於江淮東, 諸侯畢賀, 號為霸王.”[3] 可是其子若孫都不能步其後塵, 直至王無疆時, 越始復“興兵北伐齊, 西伐楚, 與中國爭強”[4]. 王無疆之立在梁惠王十七年[5], 上距魏遷都大梁不到十年. 王無疆能夠驟起, 未必即與其祖上的餘烈無關. 當梁惠王即位之初, 東南江淮之間的越國仍不能漠然視之. 《禹貢》九州中列入揚州, 不能說不是當時實際情況的具體反映.
[3][4] 《史記》四十一〈越王勾踐世家〉.
[5] 按越王無疆為無顓弟. 《史記·越世家·索隱》引《紀年》, 謂無顓八年薨. 王國維《古本竹書紀年輯校》引《史記·越世家·索隱》, 謂顓竟於梁惠王十四年. 范祥雍謂當在十六年. 據范說, 則王無疆即位時應在梁惠王十七年, 亦即前三五四年.
그러나 월국越國의 변천에 대해서는 더 진전된 논증이 필요하다. 구천句踐 시기에는 “월의 군대가 강회江淮 동쪽을 종횡무진했고 제후들이 모두 경하했으며 패왕霸王이라 불렸다”[3]. 그러나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뒤를 잇지 못했고, 왕무강王無疆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대를 일으켜 북으로 제齊를 치고 서로 초楚를 쳐서 중국中國과 강성을 다투었다”[4]. 왕무강의 즉위는 양혜왕梁惠王 17년의 일로[5] 위魏가 대량大梁으로 천도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이다. 왕무강이 갑작스레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남긴 위업의 여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양혜왕이 즉위할 무렵 동남 강회 사이의 월국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공禹貢》의 구주九州 가운데 양주揚州를 포함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당대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這裡應該順便論述一下梁州. 《呂氏春秋》無梁州, 蓋已並入雍州了. 梁為巴、蜀, 秦惠文王後九年為秦所並. 這一年為前三一六年, 已在梁惠王死後三年. 《禹貢》於雍州之外另立梁州, 顯然未能預料到以後的演變. 如果說, 梁州這個州名應該和其他各州一樣, 也是可能有所指的, 這所指的不是巴即是蜀了. 巴蜀道路險阻, 與中原交通多有隔閡. 然梁惠王十年已有瑕陽人自秦道岷山青衣水來歸[1]. 此瑕陽不知究在何地. 然魏國自有兩個瑕城: 一在河東[2], 一在河外[3]. 如瑕陽與這兩個瑕城之一有關, 則瑕陽人當為魏國的人. 這樣的遠去和歸來, 顯示出魏國對於隔著秦國遠在西南的巴蜀是相當熟悉的, 故能來去自如. 瑕陽人此次由蜀中歸來, 雖已在魏國徙都大梁之後, 其前往巴蜀時, 魏國的都城固仍是在安邑. 因此之故, 《禹貢》的作者能夠根據當時關於巴蜀的知識為這篇著作中添了一個州. 抑有進而論述的, 是梁州這個州名的含義. 九州的名稱各有取意, 這是不消說的. 以前已經有過不少這方面的論列. 不過對於梁州卻仍未見得中肯. 有的學者曾經提出這樣一個解釋, 說是巴蜀處於環繞的群山之中, 丘陵起伏, 多呈山梁狀的地形. 這就是梁州名稱的取義[4]. 從地形方面觀察, 這樣的說法應該是近乎情理的. 魏國當時和巴蜀往來的記載, 目前所知道的只有瑕陽人這次的往來. 由梁州名稱的含義, 應該說就在安邑作為魏國都城的時候, 魏國人對於巴蜀的知識應該是相當豐富的了. 也許遷都大梁之後, 瑕陽人自蜀導青衣水歸來, 關於梁州的具體內容還有所增益.
[1] 《水經·青衣水注》.
[2] 《左傳》成公六年及杜注.
[3] 《左傳》僖公三十一年及杜注.
[4] 顧頡剛先生《浪口村隨筆》.
이 대목에서는 양주梁州에 대해서도 함께 논할 필요가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양주가 없는데, 이는 이미 옹주雍州에 병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梁은 파巴·촉蜀에 해당하며 진秦 혜문왕惠文王 후원 9년[기원전 316]에 진秦에 병합되었다. 이 해는 양혜왕梁惠王이 죽은 지 3년 뒤이다. 《우공禹貢》이 옹주 외에 따로 양주를 세운 것은 그 이후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만약 양주라는 주명州名이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대상은 파巴 아니면 촉蜀이었을 것이다. 파촉巴蜀은 길이 험해 중원과의 교통에 단절이 많았다. 그러나 양혜왕 10년에 이미 하양瑕陽 사람이 진秦을 거쳐 민산岷山과 청의수青衣水를 따라 돌아온 일이 있다[1]. 이 하양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위국魏國에는 두 개의 하성瑕城이 있었으니, 하나는 하동河東에 있고[2] 다른 하나는 하외河外에 있다[3]. 만약 하양이 이 두 하성 중 하나와 관련이 있다면 하양 사람은 위국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먼 왕래는 위국이 진을 사이에 두고 서남쪽 멀리 있는 파촉에 대해 상당히 정통하여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양 사람이 이번에 촉에서 돌아온 시점은 이미 위국이 대량大梁으로 천도한 뒤였지만, 그가 파촉으로 떠난 시점에 위국의 도성은 여전히 안읍安邑이었다. 그러므로 《우공》의 저자는 당시 파촉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책에 한 주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논의할 부분은 “양주”라는 주명의 함의이다. 구주九州의 명칭에는 각기 취한 뜻이 있다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대해 이전에도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양주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절한 해석이 부족하다.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파촉 지역은 산들에 둘러싸인 지형으로, 구릉의 기복이 많아 산등성이[山梁] 모양의 지형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곧 “양梁”이라는 주명의 유래라는 것이다[4]. 지형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해석은 이치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위국이 당시 파촉과 왕래했던 기록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하양 사람의 이번 왕래뿐이다. “양주”라는 주명의 함의에 비추어 보면 안읍이 위국의 도성이던 시기에 위국 사람들은 이미 파촉에 대해 상당히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대량 천도 이후 하양 사람이 청의수를 따라 촉에서 돌아온 일을 거치며 양주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더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當然, 關於梁州這個地區和相鄰各處的交往還可以追溯到從周武王伐紂的庸、蜀等八族人以至於春秋時期的巴國. 不過當時這些部落的居地還不能夠完全確定, 可能不一定就都在現在的四川[5], 也不是《禹貢》梁州所能包括得了的. 就是那些時期的交往已經相當頻繁, 也不能因為梁州一隅而提早《禹貢》的著作年代. 由九州的成立而定《禹貢》的著作年代, 是不能由其中個別的一州而特別提早的. 梁州如此, 荊、雍和青州也都是一樣的. 荊為楚, 雍為秦. 稱荊為雍, 都各自有其淵源所在. 荊楚連稱, 早已見於《詩·商頌·殷武》, 故稱荊也就是說楚. 而以雍為秦, 顯系由於秦國都城在雍的緣故. 秦國以雍為都, 則早在西周初亡時即已如此. 然不能即因《禹貢》九州中有荊有雍, 而謂它的成書應早在商代或西周時期.
[5] 童書業《中國古代地理考證論文集·古巴國辨》.
물론 양주梁州 지역과 인접 지역들 사이의 교류는 주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동원된 용庸·촉蜀 등의 팔족八族 사람들과 춘추시기의 파국巴國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들 부족이 살던 곳을 완전히 확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지금의 사천四川 지역에만 속한다고 보기도 어렵다[5]. 또한 그것은 《우공禹貢》에서 말하는 양주의 범위에 모두 포함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시기의 교류가 상당히 빈번했다 하더라도 양주 한 모퉁이 때문에 《우공》의 저작 연대를 앞당길 수는 없다. 구주九州의 성립 시기를 기준으로 《우공》의 성립 시기를 판단할 때, 그 가운데 개별 한 주만을 근거로 시기를 특별히 앞당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주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형荊·옹雍·청靑 세 주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형은 곧 초楚이고 옹은 곧 진秦이다. “형”이라 부르고 “옹”이라 부른 데에는 각기 그 연원이 있다. 형초荊楚라는 병칭은 이미 《시경詩經·상송商頌·은무殷武》에 보이므로, “형”이라 함은 곧 초를 가리키는 것이다. 옹을 진이라 한 것은 진의 도성이 옹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이 옹을 도성으로 삼은 것은 이미 서주西周 초기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공》의 구주에 형과 옹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그 성서 시기를 상대商代나 서주 시기로 거슬러 올릴 수는 없다.
[三]《禹貢》的冀州和晉國
[三]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와 진국晉國
《禹貢》九州的第一個州是冀州. 《禹貢》說冀州, 沒有提出它的界線. 《呂氏春秋》不僅提出“兩河之間為冀州”, 而且還添了兩個字, 說是“晉也”. 這“兩河之間”的界線實際上概括了《禹貢》對冀州的敘述. 不過以冀州為晉國卻引起了問題. 晉國始封於西周初年, 中間歷春秋時期曾為五霸之一. 瓜瓞綿延, 至戰國初年仍未絕祀. 晉國歷年雖如此長久, 《禹貢》冀州所影射的晉國卻是三家分晉後的魏國, 而非原來姬姓的公侯. 三家分晉後, 韓、趙、魏三國各自有其社稷. 不過在初期的階段, 韓、趙兩國的實力較之魏國, 實各遜一籌. 魏國未得全晉的舊疆, 卻以晉國的繼承者自命. 梁惠王曾自詡其國力, 說是“晉國天下莫強焉”[1], 儼然是晉國嫡傳的口吻. 《禹貢》冀州保存了全晉時的舊規模, 實際上是以魏國為主, 把韓、趙兩國並到一起, 這和梁惠王所標榜的晉國天下自然也就相一致了. 正是因為這樣的緣故, 固然可以用《呂氏春秋》來探尋《禹貢》九州的線索, 然《禹貢》影射冀州的晉國卻與三家分晉以前的晉國不同. 三家分晉在前四○三年, 亦即周威烈王二十三年. 《禹貢》所論列的既在三家分晉以後, 其著作年代自不能早於前四○三年.
[1] 《孟子·梁惠王上》.
《우공禹貢》 구주九州의 첫 번째 주는 기주冀州이다. 《우공》은 기주를 말하면서 그 경계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양하兩河 사이가 기주이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진晉이다”라는 두 글자를 더했다. 이 “양하 사이”라는 경계는 사실상 《우공》이 기주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개괄한 것이다. 그러나 기주를 진국晉國에 비정한 데서 문제가 생긴다. 진국은 서주西周 초기에 봉해져 춘추시대를 거치며 오패五霸의 하나가 된 적이 있고, 그 뒤로도 끊이지 않다가 전국시대 초까지 제사가 이어졌다. 진국이 이처럼 오래 이어졌지만 《우공》의 기주가 가리키는 진국은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의 위국魏國이지 본래의 희성姬姓 공후국이 아니다. 삼가분진 이후 한韓·조趙·위魏 세 나라는 각각 사직社稷을 따로 두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한·조 두 나라의 실력은 위魏보다 한 등급씩 떨어졌다. 위는 진의 옛 영토를 모두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를 진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양혜왕梁惠王은 자국의 국력을 자랑하며 “진국은 천하에 그보다 강한 나라가 없다[晉國天下莫強焉]”라고 했는데[1], 이는 진국의 적통을 자임하는 어투이다. 《우공》의 기주는 진 전체의 옛 규모를 보존하고 있으니, 사실상 위국을 중심으로 두고 한·조 두 나라를 함께 묶은 것이다. 이는 양혜왕이 표방한 “진국이 천하에 가장 강하다”는 자부와 자연히 일치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여씨춘추》를 통해 《우공》 구주의 단서를 탐색할 수는 있지만, 《우공》의 기주가 가리키는 진국은 삼가분진 이전의 진국과 다르다. 삼가분진은 기원전 403년, 즉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의 일이다. 《우공》이 논한 것은 삼가분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므로 그 저작 연대는 기원전 403년보다 앞설 수 없다.
全晉時的疆土兼有河外和河西各地. 《禹貢》以兩河之間為冀州, 自然只是全晉時主要的地區. 可是全晉時也未能據有整個的冀州. 冀州東北部還有燕國和中山. 《禹貢》冀州保存了全晉的舊規模, 也摒除了燕國和中山. 燕國土宇並非過於狹小, 《禹貢》以燕國疆土並入冀州, 不像《呂氏春秋》那樣另列成一個幽州, 顯然是由於當時燕國國力的不強. 《呂氏春秋》時, 燕國已成為七雄之一, 所以幽州也和其他諸州並列. 至於中山, 入戰國後已經不是一個小國. 後來梁惠王逝世不久, 五國相王, 中山巍然也參預其間, 齊國曾提出反對, 也未能減損中山的王號[2]. 可是在《禹貢》中, 和燕國一樣, 也未有中山的位置. 這沒有別的緣故, 只是因為原來的中山已為魏文侯所滅. 文侯既滅中山, 就以故地封其子. 改易了統治者, 卻仍因襲中山的國名[3]. 梁惠王時, 中山實際上是魏的與國, 所以《禹貢》就可以不必以之與他國相等.
[2] 《戰國策·中山策》.
[3] 《史記》四十四〈魏世家〉.
진晉 전체의 강역은 하외河外와 하서河西 각지를 아울렀다. 《우공禹貢》이 양하兩河 사이를 기주冀州로 삼은 것은 진 전체 시기의 주요 지역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 전체 시기에도 기주 전 지역을 모두 차지하지는 못했다. 기주의 동북부에는 연국燕國과 중산中山이 있었다. 《우공》의 기주는 진 전체의 옛 규모를 보존하면서도 연국과 중산을 배제했다. 연국의 영토는 과도하게 좁지 않았으나, 《우공》이 연국 영토를 기주에 병합시켜 《여씨춘추呂氏春秋》처럼 별도로 유주幽州를 세우지 않은 것은 당시 연국의 국력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씨춘추》가 작성되던 시기의 연국은 이미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부상해 있었으므로 유주도 다른 주들과 함께 별도로 설정되었다. 중산도 마찬가지여서 전국시대로 접어든 뒤로는 더 이상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양혜왕梁惠王이 사망한 직후 오국상왕五國相王이 있었는데 이때 중산도 당당히 참여했고 제齊가 이에 반대했지만 중산의 왕호를 깎지는 못했다[2]. 그러나 《우공》에는 연국과 마찬가지로 중산의 자리도 없다.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본래의 중산이 이미 위문후魏文侯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문후는 중산을 멸한 뒤 그 옛 땅을 자기 아들에게 봉해주었다. 통치자는 바뀌었으나 중산이라는 국호는 그대로 이어졌다[3]. 양혜왕 시기에 중산은 사실상 위魏의 여국與國이었으므로 《우공》은 굳이 다른 나라들과 동급으로 다룰 필요가 없었다.
這樣以《禹貢》九州的形成和戰國時期的形勢相對比, 也可以證明《禹貢》這篇著作是戰國時期的作品, 其成書年代應降至梁惠王時期, 而不能提早到三家分晉以前. 《禹貢》九州應該和《呂氏春秋》九州一樣, 也影射一些諸侯封國, 但所影射的並不和當時的諸侯封國完全符合. 這是因為《禹貢》並非完全是一篇記事的著作, 而是一幅治理天下的宏圖, 這一點到後面另行論述.
이렇게 《우공禹貢》 구주九州의 구성과 전국시대의 형세를 대비해보면, 《우공》이 전국시대의 작품이며 그 성립 시기는 양혜왕梁惠王 때까지 내려가야 하지 삼가분진三家分晉 이전으로 앞당길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우공》의 구주는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구주와 마찬가지로 일부 제후 봉국을 비유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비유 대상이 당시의 실제 제후 봉국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우공》이 단순한 기사記事의 책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거대한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뒤에서 따로 논한다.
三、由河水流經的地方論《禹貢》的著作年代
3. 하수河水가 흐르는 지역을 통해 본 《우공禹貢》의 저작 시기
上文已經初步論證《禹貢》的著作年代, 不能在吳王夫差掘溝於商魯之間以前, 實應在三家分晉以後. 可是, 或者有人要說, 《禹貢》所說的導河, 是“禹河”, 是夏禹所曾經治理過的黃河. 禹河與戰國時期的河水不同. 因此, 《禹貢》的著作年代應該大大往前提, 即使不能提早到禹時, 也應該提早到周初, 而不應該推遲到戰國前期. 其實這樣的說法是沒有根據的, 因而也是不能成立的.
앞에서는 이미 《우공禹貢》의 저작 연대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상商과 노魯 사이에 도랑을 파기 이전일 수 없고 실제로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여야 한다고 예비적으로 논증했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공》에서 말하는 도하導河는 “우하禹河”, 곧 하우夏禹가 한때 다스렸던 황하黃河이며, 우하는 전국시대의 하수河水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공》의 저작 연대는 크게 앞당겨야 하며 비록 우 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周 초기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전국 전기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성립할 수 없다.
應該指出, 這裡所說的河道差別乃是指河水下游而言. 河水在上中游流經黃土高原峽谷之間, 亙古以來, 就是如此, 不會有很大的變遷的. 只有在下游平原地區, 河水容易決口改道, 前後就不免有若干不同. 所謂“禹河”和戰國時期的河水如果有什麼不同, 也應該發生在這個地區. 核實而論, 所謂“禹河”, 迄至目前為止還是相當渺茫的. 因為除過這一篇《禹貢》外, 再無其他史事足以說明夏禹之時河水下游的確實所在. 近年太行山東河北平原大規模地探索古河道遺跡, 也迄未發現相當於“禹河”的河道[1]. 也就是說, 還不能證明《禹貢》河水和“禹河”的關係. 當然, 這個問題還應該繼續探索, 希望將來能夠確實知道其間的曲折. 這就不能因此而得出結論, 說是《禹貢》河水就根本和“禹河”無關, 從而否定《禹貢》河水就是“禹河”. 即使已經證明《禹貢》河水確是“禹河”, 也不能因此而得出另一個結論, 說是《禹貢》河水就和戰國時期的河水根本不同.
[1] 河北省地理研究所: 《河北平原黑龍港區古河道圖》說明書.
지적해 둘 점은 여기에서 말하는 하도河道의 차이가 하수河水의 하류 지역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하수는 상·중류에서 황토고원黃土高原의 협곡 사이를 흐르는데 이는 예로부터 그러했고 큰 변화도 없었다. 다만 하류의 평원 지역에서는 하수가 쉽게 제방을 터뜨려 물길을 바꾸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생긴다. 이른바 “우하禹河”와 전국시대의 하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또한 이 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하”라는 존재 자체는 지금까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이 한 편의 《우공》 외에는 하우夏禹 시기 하수 하류의 실제 위치를 설명할 다른 역사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근래 태행산太行山 동쪽 하북평원 일대에서 고하도古河道의 유적을 대대적으로 탐사했지만, “우하”에 해당할 만한 물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1]. 다시 말해 《우공》의 하수와 “우하” 사이의 관계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문제는 계속 탐구해야 하며 언젠가 그 곡절을 확실하게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공》의 하수가 “우하”와 전혀 무관하다고 단정해 《우공》의 하수가 “우하”라는 견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또 설령 훗날 《우공》의 하수가 실제로 “우하”라는 점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우공》의 하수가 전국시대의 하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또 다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然而事實卻並非如此單純. 問題恰恰就出在戰國以前河水曾經有過一次決口. 這就可能導致這樣一個說法, 從而認為《禹貢》河水確實是和戰國時期無關. 據說這次決口是在前六○二年, 亦即周定王五年和魯宣公七年. 還是在春秋中葉, 距戰國時期尚遠. 至於決口的地方則被確定在宿胥口, 其地乃在今河南濬縣的西南. 也就是說, 宿胥口以北, 流經太行山東麓的乃是《禹貢》所說的河水, 也就是“禹河”. 而由宿胥口東流, 轉趨東北入海的, 才是戰國時期的河道.
그러나 사실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문제는 바로 전국 이전에 황하黃河가 한 차례 결구決口[제방이 터져 물길이 바뀌는 일]를 일으킨 데 있다. 이 일은 《우공禹貢》의 하수河水가 전국시기의 하수와 무관하다는 견해를 낳을 수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결구는 기원전 602년, 즉 주정왕周定王 5년이자 노선공魯宣公 7년에 일어났다고 한다. 아직 춘추 중엽이며 전국시기와는 상당한 시차가 있다. 결구가 일어났다는 곳은 숙서구宿胥口로 비정되는데, 그곳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준현濬縣 서남에 해당한다. 즉 숙서구 이북에서 태행산太行山 동쪽 기슭을 따라 흐르는 물길이 바로 《우공》에서 말한 하수, 곧 “우하禹河”이며, 숙서구에서 동쪽으로 흘러 다시 동북으로 꺾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전국시기의 하도河道라는 것이다.
關於這一點, 我已經作過詳細的論證, 證明周定王五年河水並無在宿胥口改道事. 周定王五年雖有河水改道的記載, 卻沒有明確記載改道的地點. 所謂宿胥口改道事, 乃是清初胡渭諸人的說法, 其說本於《水經注》. 然《河水注》中僅說宿胥口為“舊河水北入處”, 而未舉出其具體年代. 《淇水注》還曾提到“宿胥故瀆”, 也沒有指出它就是“禹河”的故道. 《水經注》稱故瀆的不少, 在宿胥口上下就有酸水故瀆、白馬瀆和瓠子河故瀆等, 都是由河水中分流出來的. 不能說每一條故瀆就都是河水的故道. 胡渭諸人乃據以說明宿胥故瀆就是“禹河”的故道, 殊嫌孟浪. 如果河水長期流經宿胥口以北, 不能對當地了無影響. 夏禹之時史籍闕如, 固不必細論. 周定王五年已在入春秋後一百四十一年, 這不是一個短促的期間. 史家記事不少, 詩人歌頌尤多. 河決為一時巨災, 若果構此不幸, 奈何不一涉及? 宿胥口以北, 與衛國舊都朝歌近在咫尺, 當地如真有此大川, 衛人何以不多稱道? 胡渭諸人雖亦嘗列舉若干證據, 無奈皆未中肯, 不足以說明問題的所在. 反之, 史籍詩篇中卻可以證明春秋前期河水一直由宿胥口滔滔東流, 不似新近的改道. 胡渭諸人強欲指證周定王五年河水始由宿胥口東流, 何不稍一說明這一年以前宿胥口以東的河水為虛妄? 如不能證明這一年以前河水無在宿胥口東流事, 則所謂周定王五年河水曾在宿胥口決口改道之說就難免不是虛妄.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이미 상세히 논증해 주정왕周定王 5년에 황하가 숙서구宿胥口에서 물길을 바꾼 일이 없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주정왕 5년에 황하가 물길을 바꾸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른바 숙서구에서 물길을 바꾸었다는 설은 청초淸初의 호위胡渭 등이 주장한 것으로, 그 근거는 《수경주水經注》이다. 그러나 〈하수주河水注〉에서는 숙서구를 “옛날 하수가 북쪽으로 흘러들던 곳”이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연대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기수주淇水注〉에도 “숙서고독宿胥故瀆”이 언급되지만 그것이 곧 “우하禹河”의 옛 수로라는 말은 없다. 《수경주》에서 옛 물길[고독故瀆]이라 부른 것은 적지 않은데, 숙서구 위아래에만 해도 산수고독酸水故瀆·백마독白馬瀆·호자하고독瓠子河故瀆 등이 있으며 모두 하수에서 갈라져 나온 물줄기이다. 그렇다고 모든 옛 물길이 곧 하수의 본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호위 등은 이를 근거로 숙서고독이 “우하”의 옛 강줄기라고 단언했으나 이는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만약 하수가 장기간 숙서구 이북을 따라 흘렀다면 그 지역에 영향이 없을 수 없다. 하우 시대는 사료가 부족하니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주정왕 5년은 이미 춘추시대로 들어선 지 141년이나 지난 시점이므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역사 기록도 적지 않고 시가 또한 풍부하다. 하수의 결구는 일시의 큰 재난이니, 만약 그러한 불행이 실제로 있었다면 한 번쯤 언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숙서구 이북은 위衛의 옛 도읍 조가朝歌와 매우 가까워서, 그곳에 정말로 큰 강줄기가 있었다면 위 사람들이 자주 언급했을 것이다. 호위 등이 몇 가지 근거를 들었지만 모두 적절하지 않아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사적史籍과 시편詩篇에서는 춘추 전기에 하수가 숙서구를 통해 도도히 동쪽으로 흘렀음을 증명할 수 있어 이는 새로 물길이 바뀐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호위 등이 주정왕 5년에야 비로소 하수가 숙서구를 따라 동쪽으로 흘렀다고 강변하려면, 그 이전에 숙서구 이동에 하수가 흘렀다는 사실이 허구임을 어째서 조금이나마 설명하지 않는가? 만약 그 이전에 하수가 숙서구 동쪽으로 흘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주정왕 5년에 하수가 숙서구에서 결구하여 물길을 바꾸었다”는 설은 허구를 면하기 어렵다.
如果周定王五年河水確曾在宿胥口改道, 則前後就是有了兩條河道. 前六○二年前的河水是流經今河南濬縣和內黃, 又流經今河北曲周和巨鹿, 而東北入海. 前六○二年後的河水則是流經今河南濬縣、濮陽, 又流經今河南清豐, 山東德州而東北入海. 其實這是人為的區分, 不符合於當時的實際. 河水既無在宿胥口改道事, 則本是一條, 無所謂前六○二年前後兩條河道. 這一條河道只是由今河南濬縣、經濮陽、內黃, 以至於曲周、巨鹿, 再折而東流. 也就是說所謂前六○二年前的河道本無由今濬縣至內黃一段, 而所謂前六○二年後的河道又無清豐以下的一段. 這就是《禹貢》所說的河道. 而這條河道也正符合戰國前期有關的史事. 關於這些方面的論證, 具見拙著〈論《禹貢》的導河和春秋戰國時期的黃河〉一文中, 這裡就不再一一贅述了.
만약 주정왕周定王 5년에 황하가 실제로 숙서구宿胥口에서 물길을 바꾸었다면 그 전후에 두 개의 서로 다른 황하 수로가 존재한 셈이 된다. 기원전 602년 이전의 황하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준현濬縣과 내황內黃을 지나 다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곡주曲周와 거록巨鹿을 거쳐 동북으로 바다에 이르렀고, 기원전 602년 이후의 황하는 지금의 준현·복양濮陽을 지나 다시 지금의 하남 청풍清豐과 산동 덕주德州를 거쳐 동북으로 바다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위적인 구분일 뿐 실제 당시의 상황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황하가 숙서구에서 물길을 바꾼 일이 없으므로 본래 한 줄기였을 뿐, 기원전 602년 전후로 두 개의 수로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이 한 줄기는 단지 지금의 준현에서 출발해 복양·내황을 지나 곡주·거록에 이른 뒤 동쪽으로 꺾여 흐르는 것이다. 즉 기원전 602년 이전의 수로라고 일컬어진 것에는 본래 지금의 준현에서 내황에 이르는 구간이 없었고, 기원전 602년 이후의 수로라고 일컬어진 것에는 청풍 이하의 구간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공禹貢》에서 말한 강줄기이며, 이 수로는 정확히 전국 전기와 관련된 사사史事와도 부합한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증은 졸저 〈논《우공》적도하화춘추전국시기적황하論《禹貢》的導河和春秋戰國時期的黃河〉에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일일이 언급하지 않는다.
正是由於《禹貢》所說的河水是戰國時期的河水, 也符合戰國時期的形勢, 則《禹貢》的著作年代就應該在戰國時期. 如果不能證明《禹貢》所說的河水不是戰國時期的河水, 那就不可能把《禹貢》的著作年代上推到戰國時期以前的任何時期.
《우공禹貢》에서 말하는 하수河水가 곧 전국시기의 하수이며 전국시기의 형세와도 부합하므로, 《우공》의 저작 연대는 마땅히 전국시기로 보아야 한다. 만약 《우공》에서 말하는 하수가 전국시기의 하수가 아님을 입증할 수 없다면, 《우공》의 저작 연대를 전국시기 이전의 어느 시기로도 끌어올릴 수 없다.
四、《禹貢》的成書當出於魏國人之手
4. 《우공禹貢》의 저작은 마땅히 위국魏國 사람이 집필한 것이다.
《禹貢》這篇書應該是戰國時期魏國人著作的.
《우공禹貢》 이 책은 마땅히 전국시대 위국魏國 사람이 저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禹貢》記載各州山川, 一般不以所在的方位作具體的名稱. 可是卻有幾個例外, 如說河水有西河和南河, 說江水有北江和中江. 另外還有一個東原和一個東陵.
《우공禹貢》은 각 주州의 산천을 기록할 때 일반적으로 그 위치한 방위를 따서 구체적 명칭을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예외가 있는데, 예컨대 하수河水를 서하西河와 남하南河로 구분하고, 강수江水를 북강北江과 중강中江으로 나누어 부른 것이다. 그 밖에 동원東原·동릉東陵이라는 지명도 있다.
東原於《禹貢》屬徐州. 所以稱為東原, 據說是因為在濟水之東[1]. 東陵為江水所流經的地方, 據說本是巴陵, 以在夷陵之東, 夷陵為西陵, 故巴陵因之稱為東陵[2]. 不論這些說法的確否, 這個原和陵實際上各在一個州之內. 所標示的方位, 是根據本州之內相對稱的自然地形而得來的, 影響不大. 《禹貢》以江水下游分為三江, 雖沒有特別提出南江, 北江自然是對南江而言的. 中江也自然是夾處南北兩江之間, 同樣與他處無涉. 所以這裡只論西河和南河.
[1] 《禹貢錐指》五引蔡氏說.
[2] 《禹貢錐指》十四下引曾彥和說.
동원東原은 《우공禹貢》에서 서주徐州에 속한다. “동원”이라 부르는 까닭은 제수濟水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1]. 동릉東陵은 강수江水가 흐르는 지역으로, 본래 파릉巴陵이었으나 이릉夷陵의 동쪽에 있고 이릉이 곧 서릉西陵이었기 때문에 파릉이 이에 대응해 동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2]. 이 설명들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이 “원原”과 “릉陵”은 각각 하나의 주州 안에 있다. 그것이 가리키는 방위는 본주本州 안에서 상대적인 자연 지형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큰 영향이 없다. 《우공》이 강수의 하류를 셋으로 나누어 삼강三江이라 한 것에서, 비록 남강南江이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북강北江이라 한 이상 이는 자연히 남강에 대응되는 것이다. 중강中江 역시 남·북 두 강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므로 다른 지역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서하西河와 남하南河만을 논한다.
《禹貢》說西河, 是雍州的東界; 說南河, 是荊州貢道最後一個河段. 以河水為州界, 在《禹貢》中一共有四個州. 冀州雖未提到具體的州界, 但三面臨河還是明確的. 兗州的西界和豫州的北界都只說是河水, 只有這個雍州的東界卻明確說是西河. 就方位而論, 這顯然是以冀州為主的. 遠在春秋時期, 晉人對於這兩段河水就以西河和南河相稱. 前五二九年[魯昭公十三年], 晉國發起平丘之會, 魯國季孫意如前往參加. 晉人以魯侯不親自與會, 執季孫意如以歸. 過了些時候, 晉人釋放了季孫, 季孫一定要晉國以禮相遣, 不願輕易就此歸去. 晉國叔魚就恐嚇季孫, 說是如再不走, 可能把他安置在西河. 對於魯國大夫來說, 這是極遠的地方[3]. 前六三二年[魯僖公二十八年], 晉國伐曹. 曹在衛國東南. 晉國假道於衛, 衛人不許, 晉軍只好改由南河渡過[4]. 這裡所說的西河和南河, 和《禹貢》所說的實際上是一樣的. 《禹貢》以南河為荊州的貢道, 當然也是以冀州為主的. 因為這段河水乃在荊州以北, 而不是在它的南方.
[3] 《左傳》昭公十三年.
[4] 《左傳》僖公二十八年.
《우공禹貢》은 서하西河를 옹주雍州의 동쪽 경계라 했고, 남하南河를 형주荊州 공도貢道의 마지막 하천 구간이라 했다. 하수河水를 주州의 경계로 삼은 경우는 《우공》에 모두 네 주가 해당된다. 기주冀州는 비록 구체적인 주 경계를 말하지는 않았으나 삼면이 하수에 접해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연주兗州의 서쪽 경계와 예주豫州의 북쪽 경계는 단지 “하수河水”라고만 했는데, 옹주의 동쪽 경계만은 명확히 “서하西河”라고 했다. 방위로 보면 이는 분명히 기주를 중심에 둔 서술이다. 멀리 춘추시대부터 진晉 사람들은 이 두 구간의 하수를 각각 “서하”와 “남하”라 불렀다. 기원전 529년[노소공魯昭公 13년], 진이 평구平丘에서 회맹을 주관했고 노魯의 계손의여季孫意如가 참석했는데, 진 사람들은 노후魯侯가 직접 참석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계손의여를 잡아갔다. 얼마 뒤 진이 그를 풀어주자 계손은 진이 예에 맞게 송환해야 한다고 고집하며 쉽게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진의 숙어叔魚가 그를 협박하기를 “다시 가지 않으면 너를 서하에 안치하겠다”고 했는데, 노의 대부에게 있어 서하는 매우 먼 곳이었다[3]. 또 기원전 632년[노희공魯僖公 28년]에는 진이 조曹를 정벌했다. 조는 위衛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진은 위에 길을 빌리고자 했지만 위가 허락하지 않자 진군은 부득이 남하南河를 건너야 했다[4]. 여기에서 말한 서하와 남하는 《우공》에서 말한 것과 사실상 동일하다. 《우공》이 남하를 형주의 공도로 삼은 것 또한 기주를 중심으로 한 서술이다. 이 하수 구간이 형주의 북쪽에 있고 남쪽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後來到戰國時期, 魏國人更經常提到西河. 魏武侯曾與其群臣將西河而下, 盛稱西河的險固[5]. 魏國的翟璜自稱其功績, 說是他曾經向魏王推薦過西河的守臣[6]. 而吳起更是以任西河守, 使秦兵不敢東向, 為人所稱道[7]. 由吳起的任西河守, 可以推知魏國當時還曾設置過一個西河郡. 可見這個西河不僅是魏國人的習慣稱謂, 而且成了魏國地方區劃的專名了.
[5] 《戰國策·魏策》一.
[6] 《史記》四十四〈魏世家〉.
[7] 《史記》六十五〈吳起傳〉.
이후 전국시대에 이르러 위국魏國 사람들은 서하西河를 더욱 자주 언급했다. 위무후魏武侯는 일찍이 군신群臣들과 함께 서하를 따라 내려가며 서하의 험준함과 견고함을 크게 칭송했다[5]. 위국의 적황翟璜은 자기 공적을 자랑하며 자신이 위왕에게 서하의 수신守臣을 추천한 적이 있다고 했다[6]. 또 오기吳起는 서하수西河守로서 진秦의 군대가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7]. 오기가 서하수에 임명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위국이 당시 서하군西河郡을 설치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서하”라는 명칭은 단지 위국 사람들이 관용적으로 쓴 말일 뿐 아니라 위국 지방 구획을 가리키는 전용 명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由於當時河水在流過南河這個河段之後, 又折而趨向東北. 在這裡河東的人也把這一段河水稱為西河. 還在春秋末年, 衛靈公打算用兵征討在蒲的叛者, 徵求孔子的意見. 孔子回答說, 蒲人不願從叛者, 男子有必死之心, 婦人有保西河之志[1]. 蒲在今河南長垣縣. 當時的河水是由今河南新鄉、汲縣流向滑縣、濬縣的, 正在蒲的西北, 所以蒲的婦人欲逃向西河, 據險自保. 實際上當時衛國的國土主要就在這段西河以東. 後來孔子弟子子夏也居西河教授[2]. 子夏所居的西河, 當也是衛國的西河. 說者多以為秦晉之間的西河, 然那段西河絕遠, 似非子夏所能前往的. 魯、衛諸國皆在東方, 以其西的河水為西河, 也是合於事理的. 這裡有一點是應該引起注意的. 雖然東方魯衛諸國都稱這一河段為西河, 但是從晉國到魏國卻是沒有人稱它是西河的. 說到這個河段, 一般都是只說河水, 不特別提明它的方位, 這和《禹貢》說兗州的西界是一樣的.
[1] 《史記》四十七〈孔子世家〉.
[2] 《史記》六十七〈仲尼弟子列傳〉.
당시 하수河水는 남하南河 구간을 지난 뒤 다시 꺾여 동북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하동河東의 사람들은 이 구간의 하수도 서하西河라고 불렀다. 춘추 말 위령공衛靈公이 포蒲의 반란자를 정벌하려 하면서 공자孔子의 의견을 물었다. 공자는 “포의 사람들은 반란자를 따르려 하지 않으며, 남자는 죽을 각오를 가졌고 여자는 서하를 지키려는 뜻을 품고 있다”라고 답했다[1]. 포는 지금의 하남河南 장원현長垣縣에 있다. 당시 하수는 지금의 하남 신향新鄉·급현汲縣을 지나 활현滑縣·준현濬縣 쪽으로 흘렀고, 이는 포의 서북쪽에 해당하므로 포의 부녀들이 서하 쪽으로 도피해 험지를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위衛의 국토는 주로 이 서하의 동쪽에 있었다. 뒷날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도 서하에 거주하며 학문을 가르쳤다[2]. 자하가 거주한 서하 또한 위국의 서하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일부에서는 진秦과 진晉 사이의 서하라 하지만 그 서하는 너무 멀어 자하가 갈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魯·위衛 등 동방의 제후국들이 자국의 서쪽에 흐르는 하수를 “서하”라고 부른 것은 이치에 맞는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동방의 노·위 제후국들은 모두 이 구간의 하수를 서하라고 불렀지만 진晉과 위魏에서는 이를 서하라 부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구간을 언급할 때는 단지 “하수河水”라고만 했고 방위를 따로 밝히지 않았으니, 이는 《우공禹貢》이 연주兗州의 서쪽 경계를 말한 방식과 동일하다.
雍州東界的河水自春秋以來即已為秦晉兩國爭奪的所在. 這種局面下至戰國也還沒有多少改變. 可是秦人說這一河段, 卻只說到河或者河水, 一般也不特別提明它的方位. 這當然也不是沒有例外的. 戰國後期, 楚國攻魏, 張儀說秦王, 請出兵助魏. 說是魏國戰勝, 必然感激秦國, 那就一定要割給秦國以“西河之外”[3]. 這段話雖是出於秦國的君臣, 實際上卻是指魏國的土地. 因為魏國當時在西河之外還有不少的疆土, 而這塊地方正是秦國所企圖佔有的. “西河之外”和吳起為西河守的西河應具有同樣的意義, 已經成為魏國的地方區劃的名稱. 張儀就是以能否取得這一部分魏國疆土來決定秦國出兵的政策的. 顯然這並不是秦國人以這段河水為西河. 因而《禹貢》所說的“西河黑水惟雍州”也不是出自秦國人的口吻.
[3] 《戰國策·秦策》一.
옹주雍州 동쪽 경계의 하수河水는 춘추시대 이래로 진秦과 진晉 두 나라가 다투던 곳이었다. 이 형세는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진秦 사람들은 이 하수 구간을 말할 때 단지 “하河” 또는 “하수河水”라고만 할 뿐 방위를 특별히 밝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전국 후기에 초楚가 위魏를 공격하자 장의張儀는 진왕秦王에게 위를 도와 출병할 것을 청하면서 “위가 승전하면 반드시 진에 감격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서하지외西河之外’를 진에 떼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3]. 이 말은 진의 군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위의 영토를 가리킨다. 위는 당시 서하 바깥에도 적지 않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이 지역이야말로 진이 차지하려 노리던 곳이었다. “서하지외”는 오기吳起가 서하수西河守일 때의 “서하”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이미 위국의 지방 구획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어 있었다. 장의는 바로 이 지역, 즉 위의 일부 영토를 얻을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진의 출병 정책을 결정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분명 진 사람들이 이 구간의 하수를 “서하”라 부른 사례가 아니다. 따라서 《우공禹貢》이 말한 “서하흑수유옹주西河黑水惟雍州” 또한 진 사람의 입에서 나온 표현이 아니다.
由此可見, 在戰國時期西河和南河已經成了魏國人所習用的名稱. 如果《禹貢》的作者不是魏國人, 他可能不會把魏國人習用的名稱寫到《禹貢》裡面. 因為在《禹貢》裡面, 像這樣習用的名稱並沒有什麼特別的意義的.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전국시대에 이르러 서하西河와 남하南河가 이미 위국魏國 사람들이 관용하던 명칭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우공禹貢》의 저자가 위국 사람이 아니었다면 위국 사람들이 관용하던 이러한 명칭들을 굳이 《우공》 안에 적어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공》 안에서 이러한 관용 명칭들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出於秦漢之際的《禮記·王制》篇, 也以這段河水為西河, 西漢時且在今山陝兩省間黃河峽谷的兩側設置了一個西河郡. 這都在西河這個名稱普遍使用之後, 是不足為奇的.
진秦·한漢 교체기에 편찬된 《예기禮記·왕제王制》편 또한 이 하수 구간을 “서하西河”라 했고, 서한西漢 시기에는 지금의 산서山西·섬서陝西 두 성 사이에 있는 황하 협곡의 양안에 “서하군西河郡”을 설치했다. 이는 모두 “서하”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뒤의 일이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五、禹都和魏都
5. 우도禹都와 위도魏都
《禹貢》這部書是托名夏禹而論述全國的地理的, 所以它實際上是有一個都城的. 各州根據所規定的貢道, 以時向都城輸送各州的物產和貢賦. 《禹貢》雖沒有寫出這個都城的名稱, 其實它的所在位置卻是明確無誤的, 就是說在冀州的西南部. 冀州為今山西省和河南省黃河以北的西部以及河北省的西部. 冀州的西南部應該就是今山西省的西南部. 這樣的都城所在地當不是《禹貢》的作者冒然的安排, 而是有它的淵源的. 傳說中禹的都城在安邑, 而安邑就在冀州的西南部. 直到現在這裡還有一個夏縣. 禹的故都據說就在這個縣的西北. 正是由於都城在這裡, 而這裡距河水又不很遠, 所以它所規定的各州貢道, 不論經過若何曲折, 最後一段途程都是歸到河水中, 由河水就可直達都城. 有的同志說, 《禹貢》是西周時期的著作, 所論述的是西周一代的制度. 這個說法是不符合《禹貢》的實際的. 不必舉出別的論據, 僅僅梁州和雍州的貢道就可以作為說明. 《禹貢》說雍州的貢道是“浮於積石, 至於龍門西河, 會於渭汭”. 這是整個利用河水的上中游一段河道. 西周的都城在豐鎬, 也就是今陝西西安市的西南. 為什麼雍州的貢賦卻只是“會於渭汭”, 並沒有溯渭河而上, 直抵於豐鎬? 其實, 根據《禹貢》用字遣詞的體例, 這“會於渭汭”還不只是由河水而下運來的貢賦沒有溯渭上運, 而是沿渭各地的貢賦卻要由渭河下運. 河運和渭運是兩條貢道, 所以才能說是“會於渭汭”. 如果只是一條路, 那就無由會起. 這樣說, 也還可能有點推論演繹. 梁州的貢道卻更為清楚. 梁州的貢道是“浮於潛, 逾於沔, 入於渭, 亂於河”. 梁州為今四川省地. 由四川北上, 道路不免要曲折複雜些. 潛水據說是西漢水, 也就是現在的嘉陵江. 沔水為現在陝南的漢江. 梁州的貢賦由潛水運到河水, 再由沔水運到渭水. 豐鎬就在渭水岸邊. 貢賦不在這裡卸船上岸, 為什麼卻要不憚煩地向東運到河水裡去? 顯然可見, 《禹貢》這篇書和西周是沒有什麼關係的.
《우공禹貢》은 하우夏禹의 이름을 빌려 전국의 지리를 서술한 책이므로 사실상 하나의 도성都城을 전제로 한다. 각 주州는 정해진 공도貢道를 따라 정해진 시기에 도성으로 각지의 물산과 공부貢賦를 운송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공》은 그 도성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위치는 명확하다. 곧 기주冀州의 서남부이다. 기주는 지금의 산서성과 하남성의 황하 이북 서부 지역, 그리고 하북성의 서부 지역에 해당하므로, 기주의 서남부는 곧 지금의 산서성 서남부에 해당한다. 이러한 도성의 위치는 《우공》의 저자가 함부로 정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연원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하우의 도성은 안읍安邑에 있었고 안읍은 바로 기주의 서남부에 해당한다. 지금까지도 그곳에는 하현夏縣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고, 하우의 옛 도읍은 이 현의 서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성이 이곳에 있고 황하와도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우공》이 설정한 각 주의 공도는 아무리 복잡한 경로를 거치더라도 마지막 구간은 모두 황하로 모이고, 그 황하를 통해 곧장 도성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어떤 이는 《우공》이 서주西周 시기의 저작이며 그 서술은 서주 시대의 제도를 반영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우공》의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 다른 근거를 들 필요도 없이, 양주梁州와 옹주雍州의 공도만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우공》은 옹주의 공도를 “부어적석浮於積石, 지어용문서하至於龍門西河, 회어위예會於渭汭”라 했다. 이는 황하 상중류의 한 구간을 그대로 이용한 공도이다. 서주의 도성은 풍호豐鎬, 즉 지금의 섬서陝西 서안시西安市 서남에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옹주의 공부는 단지 “위예에서 합류”할 뿐이고 위수渭水를 거슬러 올라가 풍호에 곧장 이르지 않는가? 사실 《우공》의 어법으로 볼 때 이 “회어위예”는 하수에서 내려온 공부가 위수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위수 연안 각지의 공부 또한 위수를 따라 하류로 운반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운河運과 위운渭運은 두 개의 다른 공도이므로 비로소 “위예에서 합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하나의 길뿐이라면 “합류”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이 정도까지는 다소 추론적인 면이 있지만, 양주의 공도는 더욱 분명하다. 양주의 공도는 “부어잠浮於潛, 유어면逾於沔, 입어위入於渭, 난어하亂於河”이다. 양주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지역이다. 사천에서 북상하려면 길이 험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잠수潛水는 서한수西漢水, 곧 지금의 가릉강嘉陵江으로 이해되고, 면수沔水는 지금 섬남陝南 지역의 한강漢江이다. 양주의 공부는 잠수를 통해 하수까지 운반된 뒤 다시 면수를 따라 위수로 옮겨졌다. 풍호는 바로 위수 강가에 있었는데, 어째서 거기에서 배를 내리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동쪽으로 황하까지 운반했는가? 이로써 《우공》이라는 책이 서주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正是《禹貢》提示了這個都城, 對於探索《禹貢》的著作年代應有很大的啟發. 這裡固然是傳說中的禹都, 卻也是戰國時期的魏國的都城. 傳說中的禹都是安邑, 直到戰國時期魏國以這裡為都時, 還是叫做安邑. 其間蛛絲馬跡不是毫無關係的.
바로 《우공禹貢》이 이 도성의 위치를 일러주었다는 점은 《우공》의 저작 시기를 탐색하는 데 큰 시사점을 준다. 이곳은 전설 속 우禹의 도성인 동시에 전국시대 위국魏國의 도성이기도 했다. 전설 속 우의 도성은 안읍安邑이며, 전국시대 위국이 이곳을 도성으로 삼았을 때도 여전히 안읍이라 불렸다. 그 사이의 흔적은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上文已經論證了《禹貢》為三家分晉後戰國時期的著作, 其成書蓋出於魏國人之手. 《禹貢》所說的都城既與魏國都城同在一地, 似非偶然, 應作進一步的探索. 魏之先世畢萬初居於魏, 至魏悼子徙居於霍. 至昭子始遷治安邑. 昭子事晉悼公, 其遷治當在前五六二年, 亦即魯襄公十一年[1]. 三家分晉以前, 知伯圍晉陽時, 魏仍以安邑為都[2]. 其時為前四五三年, 亦即周貞定王十六年. 僅這一期間, 安邑為都已逾百年, 於魏國先後諸都中歷年最為長久. 自魏昭子以下, 都是晉國的卿士, 說不上什麼霸業, 所以雖居安邑, 卻與《禹貢》無關. 其後文侯居鄴[3], 而武侯居魏[4]. 此鄴與魏俱在太行山東, 距安邑遠甚. 武侯之後為梁惠王. 惠王又居於安邑. 惠王之前, 武侯是否再以安邑為都, 不可詳知. 武侯在位二十六年中, 其二年[5]和十一年皆曾為安邑修築城垣[6]. 與安邑同時築城的有王垣等處, 其目的都是為了增強對於秦國的防禦力量, 並不是為了修整舊日的故都. 即使武侯曾經還都過安邑, 也是在他的晚年, 為時無幾, 對於以後梁惠王都城的影響, 當不會過多. 所以魏國再以安邑為都, 應該從梁惠王時算起.
[1] 《史記》四十四〈魏世家〉.
[2] 《戰國策·趙策》一.
[3] 《水經·濁漳水注》.
[4] 《漢書》二十八〈地理志〉.
[5] 《史記》四十四〈魏世家〉.
[6] 同上〈索隱〉引《紀年》.
앞에서 이미 《우공禹貢》이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 전국시대의 저작이며 그 성립이 위국魏國 사람의 손에서 나왔음을 논증했다. 《우공》이 말하는 도성과 위국의 도성이 같은 곳에 있다는 점은 우연으로 보기 어려우니, 좀 더 진전된 탐구가 필요하다. 위魏의 선조 필만畢萬은 처음 위魏 땅에 거주했고, 위도자魏悼子에 이르러 곽霍으로 옮겼으며, 소자昭子에 이르러 비로소 안읍安邑으로 도성을 옮겼다. 소자는 진도공晉悼公을 섬겼는데, 그의 천도는 기원전 562년, 곧 노양공魯襄公 11년에 해당한다[1]. 삼가분진 이전 지백知伯이 진양晉陽을 포위했을 때에도 위魏는 여전히 안읍을 도읍으로 삼고 있었다[2]. 그때는 기원전 453년, 즉 주정정왕周貞定王 16년이다. 이 기간만 해도 안읍이 도성이 된 지 이미 100년이 넘었으며 위국 역대 도성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도읍으로 유지되었다. 위 소자 이후 그 후손들은 모두 진국晉國의 경사卿士였기에 패업이라 말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으므로, 비록 안읍에 거주했더라도 《우공》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이후 문후文侯는 업鄴에 도읍했고[3] 무후武侯는 위魏에 도읍했다[4]. 이 업과 위는 모두 태행산太行山 동쪽에 있어 안읍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무후의 뒤를 이은 양혜왕梁惠王은 다시 안읍에 거주했다. 양혜왕 이전에 무후가 다시 안읍을 도읍으로 삼은 적이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무후 재위 26년 가운데 2년[5]과 11년에 안읍의 성벽을 수축한 기록이 있다[6]. 이때 안읍과 함께 성을 쌓은 곳으로는 왕원王垣 등이 있는데, 모두 진秦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 옛 도성을 정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령 무후가 만년에 안읍으로 환도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 기간이 매우 짧았으므로, 이후 양혜왕의 도성 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위국이 다시 안읍을 도성으로 삼은 것은 양혜왕 때부터로 보아야 한다.
魏都與禹都前後恰是一地, 所以後來梁惠王稱霸就是以夏禹相標榜, 《禹貢》的作者也就假借這個傳說中的禹都, 在梁惠王霸業的基礎上, 繪製以安邑為中心來實現大一統事業的瑰麗宏圖.
위국魏國의 도읍과 우禹의 도읍이 시기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뒷날 양혜왕梁惠王이 패권을 잡았을 때 자신을 하우夏禹에 빗댄 것이며 《우공禹貢》의 저자 또한 이 전설 속의 우의 도읍을 빌려와 양혜왕의 패업 위에서 안읍安邑을 중심으로 대일통大一統 사업을 실현할 화려한 청사진을 그려낸 것이다.
六、《禹貢》的撰述與梁惠王的霸業
6. 《우공禹貢》의 찬술과 양혜왕梁惠王의 패업霸業에 대하여
魏國是戰國時期一個強國. 魏國強盛的基礎奠定於文侯之時. 文侯得國, 遠在三家分晉以前. 當時文侯雖尚為晉國的大夫, 然已在禮賢下士, 以收人望. 其所延攬的賢士, 如卜子夏、田子方、段干木、吳起、李克、西門豹諸人, 皆一時的俊傑, 對於魏國立國規模的制定, 也皆能多所借助. 文侯與韓、趙兩國共分晉國, 若論國力, 似非韓、趙兩國所能及. 後來到了武侯, 更是蒸蒸日上. 梁惠王繼承乃祖乃父的餘烈, 愈益強大. 這時不僅韓、趙兩國不能望其項背, 就是其他諸侯封國殆也不在魏人眼中. 梁惠王所說的“晉國天下莫強焉”, 誠不免顯出盛極而驕的氣焰, 不過也能恰當道出魏國的實力. 當年晉國曾為霸王, 到梁惠王時, 這種霸業形勢依然存在. 梁惠王此時, 僅一霸主的銜頭似已不能滿足他個人的欲望, 實際上可能還有更大的抱負.
위국魏國은 전국시대의 강국이었다. 위국이 강성해진 기초는 문후文侯 때 다져졌다. 문후가 국권을 잡은 것은 삼가분진三家分晉 이전의 일이다. 당시 문후는 비록 진국晉國의 대부에 불과했지만 이미 어진 이를 예로 대하고 인망을 모으고 있었다. 그가 모은 현사賢士로는 복자하卜子夏·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干木·오기吳起·이극李克·서문표西門豹 등이 있는데, 모두 한 시대의 준걸로서 위국 입국立國 체제의 수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문후는 한韓·조趙와 함께 진국을 나누어 가졌는데 국력으로 보면 한·조가 위에 미치지 못했다. 무후武侯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했고, 양혜왕梁惠王은 선조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한층 더 강대해졌다. 이때는 한·조뿐 아니라 다른 제후 봉국들도 위 사람의 눈에 차지 않을 정도였다. 양혜왕이 “진국이 천하에 가장 강하다[晉國天下莫強焉]”라고 한 말은 분명 극에 달한 자만의 기세를 드러내지만, 또한 위국의 실력을 적절히 드러낸 표현이기도 하다. 그 옛날 진국이 패자였던 것처럼 양혜왕 시기에도 그 패업의 형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양혜왕에게 단지 한 명의 패주霸主라는 칭호만으로는 그의 개인적 야심을 채울 수 없었던 듯하며,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포부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當梁惠王即位伊始, 其弟公中緩爭國, 而韓、趙兩國又摻雜其間, 協助公中緩. 惠王初雖少挫, 然一敗趙於平陽[1], 再敗韓於馬陵[2], 三敗趙於懷[3]. 這就穩定了魏國的局面, 也取得了對韓、趙兩國所居的優勢. 魏國本來有強盛的基礎, 惠王就可以繼續發揮力量, 實現他所期望的霸業. 這樣的努力到逢澤之遇達到了高潮. 在這次會盟中, 惠王乘夏車, 稱夏王[4]. 這樣的聲勢和氣派是戰國時期所少有的.
[1] 《水經·濁漳水注》引《紀年》: “梁惠成王元年, 鄴師敗邯鄲師於平陽.” 按此條當有誤文. 《太平寰宇記》五十四〈相州〉引《紀年》作“梁惠成王敗邯鄲之師於平陽”.
[2][3] 《史記》四十四〈魏世家〉.
[4] 逢澤之遇見《戰國策·秦策》四. 〈秦策〉記此事說: “魏伐邯鄲, 因退為逢澤之遇. 乘夏車, 稱夏王, 朝天子. 天下皆從. 齊太公聞之, 舉兵伐魏. 梁王身抱質執璧, 請為陳侯臣. 天下乃釋梁.” 按《史記·六國表》, 梁惠王十八年, 邯鄲降. 二十年, 歸趙邯鄲. 〈秦策〉所說魏伐邯鄲事, 當指此而言. 逢澤之遇為梁惠王霸業的極點, 既已乘夏車, 稱夏王, 何來朝天子事? 這可能是記此事的人有意詆毀. 至於齊伐魏事當指馬陵之戰. 這一年魏軍敗北, 梁惠王的霸業急劇下降. 馬陵之戰, 《史記·孫子吳起列傳·索隱》引《紀年》謂在梁惠王二十七年十二月; 〈魏世家·索隱〉引《紀年》, 則作梁惠王二十八年. 王國維《古本竹書紀年輯校》謂〈魏世家·索隱〉乃是根據周正改算. 雷學淇《紀年義證》三十八謂馬陵之戰在魏惠王二十八年, 逢澤之遇在梁惠王二十七年. 茲從之. 《史記·秦本紀》: “孝公十九年, 天子致伯. 二十年, 諸侯畢賀. 秦使公子少官率師會諸侯逢澤.” 〈六國表〉更增似“朝天子”一節, 與〈秦策〉所說相同. 〈六國表〉紀魏國年曆不與《紀年》一致, 而列此事於馬陵之戰之前, 顯然是一宗事情. 或因此謂逢澤之遇乃秦孝公所發起, 梁惠王僅參預而已. 然〈秦本紀〉所載極為明確, 諸侯賀秦與逢澤之遇乃是截然不同的兩事, 不能混為一談. 如果確是一事, 則諸侯既已畢集秦廷, 有何不可商議之處, 而需要另派人千里迢迢再到逢澤集會? 〈魏世家〉又載有梁惠王與秦會彤事. 此事亦見〈六國表〉. 〈六國表〉列此事於魏“歸趙邯鄲”之後. 魏歸趙邯鄲這一年, 秦取魏的固陽; 又前一年, 秦降魏的安邑. 魏秦彤之會當為這兩座城池易手而舉行的. 不然, 怎麼前後相接如此之近? 〈六國表〉與《紀年》雖不同, 亦列這次相會於逢澤之遇前七年, 可見兩者並非一事. 且彤之會只是魏秦兩國間事, 與他國無關, 也無他國參預的記載. 逢澤之遇除秦國派其公子少官參加外, 至少還有泗上十二諸侯. 此事又見於《戰國策·齊策》五和〈秦策〉五, 並非單文孤證. 這兩次會盟的會址不同, 規模又異, 其不能混而為一是十分明顯的. 逢澤之遇的前數年間, 魏國亦曾不斷與韓、趙、秦、齊、衛諸國爭戰. 疆場之間有勝有負, 本是常事. 魏國即使敗北, 其所受創傷當不如魏齊馬陵之戰為嚴重, 故梁惠王猶得從容在逢澤與各國相遇, 以夏王故事相炫耀.
양혜왕梁惠王이 즉위하자마자 동생 공중완公中緩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고 한韓·조趙 두 나라가 여기에 끼어들어 공중완을 도왔다. 혜왕은 처음에는 다소 좌절했으나 평양平陽에서 조를 한 차례 격파하고[1], 마릉馬陵에서 한을 다시 무찔렀으며[2], 회懷에서 조를 다시 격파했다[3]. 이로써 위국魏國의 정세가 안정되었고 한·조 두 나라에 대한 우세도 확보되었다. 위국은 본래 강성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혜왕은 그 힘을 계속 발휘해 자신이 원하던 패업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봉택逢澤의 회맹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회맹에서 혜왕은 하거夏車를 타고 하왕夏王을 자칭했다[4]. 이러한 성세와 기개는 전국시대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禹貢》以夏禹相標榜, 梁惠王又乘夏車, 稱夏王, 這其間的關係是極為明顯可見的. 《禹貢》的作者在魏國都城論夏事, 當然不是為了稱頌夏禹的功德, 而是為了扶持梁惠王的霸業. 由後來逢澤之遇時梁惠王的言行, 可以看到當時所謂霸業, 已不限於像齊桓晉文那樣僅為諸侯的盟主, 而是要像夏禹那樣協和萬邦, 四海會同. 《禹貢》所論列的多半為山川土壤等自然形勢, 這固然是在大一統局面下進行統治所不可或少的基礎. 不過《禹貢》的作者卻更備述了各州田地的高下、賦稅的等第, 甚至詳細指出貢物的種類以及貢道的曲折. 而以九州的具體劃分總其大成. 這都是大一統局面下梁惠王布政施治時所應注意的項目. 正是由於有了這樣一幅瑰麗的宏圖, 梁惠王才能在逢澤之遇時以夏王自命.
《우공禹貢》이 하우夏禹를 표방한 것과 양혜왕梁惠王이 하거夏車를 타고 하왕夏王을 자칭한 것 사이의 관계는 매우 분명하다. 《우공》의 저자가 위국魏國의 도성에서 하 시대의 일을 논한 것은 당연히 하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양혜왕의 패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뒷날 봉택逢澤의 회맹에서 보인 양혜왕의 언행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이른바 “패업”은 단지 제환공齊桓公·진문공晉文公처럼 제후들의 맹주에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하우처럼 만방을 화합시키고 사해를 함께 모으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우공》에서 다룬 내용은 대부분 산천·토양 등 자연 형세에 관한 것이며, 이는 대일통大一統의 국면에서 통치를 펴는 데 빠질 수 없는 기초이다. 그러나 《우공》의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주州의 토지 고저, 부세賦稅의 등급은 물론 공물貢物의 종류와 공도貢道의 굽이까지 상세히 밝혔으며, 구주九州의 구체적 구획으로 그 모든 내용을 종합했다. 이는 모두 대일통의 국면에서 양혜왕이 정치를 펴는 데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항목들이다. 바로 이러한 화려한 청사진이 있었기에 양혜왕은 봉택의 회맹에서 스스로 하왕이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逢澤之遇為梁惠王霸業的極點. 這次會盟可能就是在梁惠王二十六年. 這一年為前三四四年. 在此以前, 魏國於前三六二年, 也就是梁惠王九年, 由安邑徙都大梁[1]. 這樣說來, 逢澤之遇時, 魏國的都城已在大梁, 而不在安邑, 而且上距遷都之時已經將近二十年. 如果說《禹貢》是在安邑這個都城為梁惠王準備好的霸業圖案, 是不是在時間上相距太遠? 因為魏國以安邑為都, 最多也不過九年. 而遷都後將近二十年, 才有了逢澤之遇, 達到魏國霸業的高潮. 核實而論, 魏國遷都大梁, 不過是魏國為了實現霸業所採取的一個步驟, 並非改變魏國圖霸的目的. 魏國遷到大梁雖已過了十多年, 大梁誠然和夏禹沒有多少關係, 可是梁惠王並沒有忘情於《禹貢》的圖案, 仍以夏禹相標榜. 雖然如此, 由建都安邑時提出圖霸的宏圖, 經過如許時間, 才達到霸業的高潮, 這中間的經歷顯然是有不少的曲折的.
[1] 關於梁惠王徙都事, 《史記·魏世家》謂在惠王三十一年, 是由於安邑近秦才徙都大梁的. 然以當時形勢而論, 惠王徙都大梁, 是為了向東方中原謀求發展, 也是其霸業的一部分, 並非由於畏秦之逼而東遷的. 《紀年》謂在惠王的初年, 其說較〈魏世家〉為長. 然諸家所引《紀年》亦有兩說. 一說在惠王六年. 見《水經·渠注》和《漢書·高帝記·注》臣瓚所引. 一說在惠王九年, 見〈魏世家·集解〉及《孟子正義》所引. 究竟是六年, 抑是九年? 後來說者各有不同, 紛紜難決. 茲篇所論從九年之說. 惠王九年為前三六二年.
봉택逢澤의 회맹은 양혜왕梁惠王 패업의 절정이었다. 이 회맹은 양혜왕 26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해는 기원전 344년에 해당한다. 이보다 앞서 위국魏國은 기원전 362년, 곧 양혜왕 9년에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도읍을 옮겼다[1]. 그러므로 봉택 회맹 당시 위국의 도성은 이미 안읍이 아니라 대량이었으며, 천도한 시점에서 거의 20년이 흐른 셈이다. 그렇다면 《우공禹貢》이 안읍이라는 도성에서 양혜왕을 위해 마련한 패업의 청사진이라는 견해는 시간적으로 너무 멀어 보일 수도 있다. 위국이 안읍을 도성으로 삼은 기간은 길어야 9년에 불과했고, 천도 이후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비로소 봉택의 회맹을 통해 위국 패업의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보면, 위국의 대량 천도는 패업을 실현하기 위해 취한 한 가지 수단이었을 뿐 패권 추구라는 목적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위국이 대량으로 옮긴 지 10여 년이 지났고 대량은 실제로 하우夏禹와 별다른 관련이 없는 곳이었지만, 양혜왕은 《우공》의 청사진을 잊지 않고 여전히 하우를 표방했다. 그렇기는 하나, 안읍에 도성이 있던 시기에 제시된 패업의 청사진이 그토록 긴 시간을 거쳐 비로소 절정에 이른 점을 보면, 그 사이에 적지 않은 곡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自逢澤之遇後又十年, 為前三三四年, 亦即梁惠王的後元年. 這一年魏齊兩國於徐州相王[2]. 相王是相互承認王位, 也就是說兩國此時地位相等. 這兩次會盟之間的十年, 是魏國的一個巨大變局. 徐州相王就是標誌. 逢澤之遇後, 接著是齊魏馬陵之戰. 這一戰魏軍全軍覆沒, 梁惠王的長子也為齊國所擄. 其後戰端仍未消弭, 魏國也一再敗北. 正如梁惠王自己所說的, “西喪地於秦七百里, 南辱於楚”[3]. 魏國霸業迅速低落, 導致了徐州相王的局面. 逢澤之遇時, 梁惠王自居於夏王的地位, 儼然是大一統的國君, 何能容許其他諸侯同等並列? 徐州相王時, 夏王的稱號早已消聲匿跡, 而梁惠王又自降其地位, 承認齊王的稱號, 以示與齊王相等. 這不能說不是一宗巨變. 魏國霸業既已終結, 《禹貢》自然成為陳跡. 雖然如此, 《禹貢》以它的前所未有的豐富內容, 作為古代地理名著, 仍然是有一定的價值和地位的.
[2] 參據陳夢家《六國紀年》四十四〈魏齊徐州相王〉.
[3] 《孟子·梁惠王上》.
봉택逢澤의 회맹 이후 다시 10년이 지나 기원전 334년, 곧 양혜왕梁惠王의 후원년後元年이 되었다. 이 해에 위魏와 제齊 두 나라가 서주徐州에서 서로 왕으로 인정하는 회맹을 가졌다[2]. “상왕相王”이란 서로의 왕위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이는 두 나라의 위상이 동등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두 차례 회맹 사이의 10년은 위국魏國에 있어 큰 전환기였다. 서주의 상왕 회맹이 그 전환을 상징한다. 봉택의 회맹 이후 곧이어 제·위 사이의 마릉馬陵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위군은 전멸했고 양혜왕의 장자 또한 제에 사로잡혔다. 그 뒤로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위국은 잇따라 패배했다. 양혜왕 자신이 말한 그대로 “서쪽으로는 진秦에 700리의 땅을 잃었고 남쪽으로는 초楚에 욕을 당했다”[3]. 위국의 패업은 급격히 쇠퇴했고 그 결과가 서주의 상왕 회맹이라는 사태로 이어졌다. 봉택의 회맹 당시 양혜왕은 스스로를 하왕夏王의 지위에 두어 마치 대일통의 군주처럼 행세했으니 어찌 다른 제후들이 동등하게 병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서주의 상왕 회맹에 이르러서는 “하왕”이라는 칭호는 이미 사라졌고, 양혜왕은 스스로 지위를 낮추어 제왕齊王의 칭호를 인정함으로써 제와 대등함을 드러냈다. 이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위국의 패업은 이미 끝났고 《우공禹貢》 또한 자연히 지난 시대의 자취가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공》은 그 전례 없는 풍부한 내용 덕분에 고대의 지리 명저로서 여전히 일정한 가치와 위상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