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Introduction
2. 네 가지 질문
2.1. 고조선은 압록강 남쪽에 있었는가? 북쪽에 있었는가?
2.4.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인가? 다른 산인가?
4.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제가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내용은 크게 일곱 가지인데요.
첫 번째, 인트로[introduction]. 지난 100년 동안 한민족의 역사 연구는 진화를 멈추었다. 좀 도발적인 인트로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는 오해와 진실에 대한 질문 4가지를 하고요.
미리 말씀드릴 것은 저는 문외한입니다. 문 밖에 있는 건달입니다. 도대체 평생 40~50년을 역사 연구를 하신 분들, 또 학사, 석사, 박사, 정규 과정을 밟으신 분들과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모든 일을 하더라도 경쟁력이 뭔가를 생각을 하는데요.
그래서 남들이 하는 방식으로 어프로치 해서는 승부가 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제 나름 독특한 방식을 몇 가지 채택을 해봤습니다.
네 번째가 콘텐츠 중에 가장 핵심인데요.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모르는 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소개 말씀을 드리고,
다섯 번째는 이것도 이번에 제가 좀 새롭게 제안하는 내용인데요. 고유명사, 특히 지명 같은 것은 한 군데 고착돼 있죠. 그런데 오천 년이라는 세월을 놓고 보니까 고유명사라는 것이 마치 발이 달린 것처럼 여기저기 옮아 다니더라, 그러면 그 지명이 5천 년 동안 어떻게 옮아 다녔는가 라는 말씀을 드리고,
마지막으로 앞에 쭉 말씀드린 것을 종합해서 그럼 지난 5천 년 동안 우리 한민족과 지나족 사이의 국경은 어떠했는가를 짧게 리뷰를 하고,
마지막 마무리로서 왜 우리나라 역사 연구가 현재처럼 100년 동안 진화는커녕 퇴보를 하고 있는가. 엄청난 터부[taboo]와 도그마[dogma]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Introduction
먼저 시작하기 전에 제가 중국, 중국인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에 지나, 지나인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China죠. 우리가 흔히 인도지나반도, 남지나해 이런 식으로 쓰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과 지나는 완전 다른 이야기입니다.
지나는 진나라, Chin에서 온 것이죠. 진나라라 해봐야 현재 중국 영토의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국,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현재처럼 거대한 중국과 거대한 13억, 14억 명에 이르는 중국인을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개념상 혼란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화족이라고 이야기를 해버리면 너무 작죠 인구가. 사방 천리 밖에 안 되고, 그래서 과거 역사 이야기할 때 가장 적절한 용어는 지나, 지나족이라고 표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주제는 지난 100년 동안 일제 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한민족의 역사 연구는 진화를 멈추었다라는 주제입니다.
1920년도에 일본의 오다 쇼고라는 분이 내신 아동용 역사 교과서입니다.
이 교과서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1948년 신석호 선생이 내신 《중등학교 사회생활과 우리나라의 생활》입니다.
내지는 이렇습니다. 그래서 바로 1948년도 판과 현재 우리가 학생들한테 가르치고 있는 역사 교과서를 비교를 해보죠.
옛날 일제시대 때 고조선이죠. 지금은 고조선 지도 자체가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다만 관련 문화 범위 이렇게 설명이 돼 있죠.
그다음에 고대 제국, 고대 제국. 똑같습니다.
고구려 옛날 사진을 보면, 이쪽 끝 대릉하 쪽까지 고구려 영토라 되어있죠. 그런데 지금 보면 현재 요하 유역까지 우리 고구려 최대 영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히려 일제시대 때보다 땅이 더 좁아졌습니다.
그리고 발해 강역을 보더라도 이 지도를 보면 오른쪽 끝에 흑룡강 끝까지 발해의 영토입니다. 요새 교과서를 보면 송화강 정도까지 발해의 영토로 되어있죠. 오히려 일제시대 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좁은 영토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라 때는 대동강, 지금도 대동강으로 똑같습니다.
고려 때도 왼쪽 서계[西界]가 압록강, 압록강 똑같습니다.
옛날 책을 보니까 조선지도가 없는데요. 갈음할 수 있는 것이 정묘 병자 호란 약도를 보시면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이 경계로 되어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죠.
전체 종합을 해보겠습니다. 고조선 지도는 현재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한사군은 동일하고 고구려 영토는 일제시대 때보다 오히려 줄었습니다. 통일신라 동일하고 발해도 오히려 줄었습니다. 고려, 조선은 동일하죠.
제가 지난 100년 동안 한민족의 역사 연구는 진화를 멈췄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더 엄밀하게 말씀을 드리면 오히려 퇴보를 했다, 제가 조금 이상한 부분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요. 고조선, 고구려, 발해 세 가지 분야에서 오히려 일제시대 때보다 역사책이 더 퇴보를 했습니다.
먼저 고조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국토가 아니고 관련 문화 범위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고조선의 국토, 영토가 어디까지였다고 말을 할 수 없는지 저는 그 이유 자체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요. 지금은 개정 7판 교과서가 나왔는데 개정 6판을 보면 연두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동이족의 분포 지역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아까 지도와 조금 차이가 나죠. 이것과 이것.
제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산해관에 있던 부분까지는 충분히 고조선의 영역이었고 그 아랫부분에 점을 쳐 놓은 것이 조금 애매모호한데요. 산동반도 끝입니다. 우이[嵎夷]라는 동쪽 오랑캐가 살았던 땅인데요.
이 지도는 대만에서 출간한 《중국역사지도집》입니다. 끝에 보면 우이[嵎夷]라고 되어있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바이두백과에 들어가서 우이[嵎夷]라고 검색해 보면 우이문화가 중국문화로 융합이 됐다, 우이문화가 멀리 조선반도로 전파됐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이두백과에서, 중국 나라 전체가 동북공정에 휩싸여 있는 입장에서 이 정도 표현하는 것은 최대한의 표현입니다. 우이문화는 중국문화와 완전히 다르다, 우이라는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라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봐야 됩니다.
1705년에 《우공추지》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에 보면 《구주분역도》라는 지도가 실려 있습니다.
보시면 우리나라 한반도에 우이[嵎夷]라고 표기되어 있죠. 산동반도에 살던 우이[嵎夷]라는 족이 우리 한민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아구주도》라는 지도인데요.
아랫부분에 보시면 바로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朝鮮即嵎夷, 조선 즉 우이다. 그러니까 산동반도에 살던 우이는 바로 한민족이다. 결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거의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죠.
고구려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유명한 두우 선생이 쓰신 《통전》이라는 책인데요.
《통전》에 보면 변방 동이 고구려전에 빨간 부분이 보이시죠. 동서 육천리[東西 六天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가 후한 때는 사방, 남북동서 2천 리였는데, 위나라 때 1천 리 정도로 줄었고,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 6천 리가 됐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방 2천 리, 사방 1천 리로 줄었다가 수나라 때 동서 6천 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교과서를 보면 동서 3천 리, 남북 3천 리입니다. 이것이 고구려 때 최대 강역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정말 턱도 없는 소리죠.
세 번째 발해를 보시죠. 발해는 대조영이 북쪽을 병탄을 해서 땅이 사방 5천 리입니다. 《요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신당서》는 발해가 있던 당대 역사책이죠. 여기서는 사방 5천 리고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 땅을 모두 다 차지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신당서》라는 책 자체가 상당히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역사 왜곡이 된 책인데도 불구하고 사방 5천 리라고 표현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 교과서에서 나온 지도에서 대충 계산을 해보면 동서가 4천 리, 남북이 2천 5백 리 정도입니다. 엄청나게 작게 표현이 되어있죠.
대략 우리들이 중국 이야기를 할 때 중국의 본토를 사방 5천 리라고 표현을 하죠. 여기에 비해서 고구려를 보면 동서 6천 리, 남북은 조금 좁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발해를 그려보면 사방 5천 리가 이 정도 땅입니다. 정말 우리 선조들이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땅을 차지를 하고 있었죠. 이렇게 놓고 보면 중국 지나족이나 우리나라 조상이나 거의 차지했던 땅이 거의 비슷하다, 오히려 더 넓을 수도 있다, 진나라 보다는 발해가 훨씬 더 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히 진시황제가 통일한 땅은 엄청나게 넓은 땅이고 우리가 차지했던 발현한 고구려는 상당히 좁은 땅이라고 선입감을 갖고 있죠. 지난 100년 동안 우리 한민족의 역사 연구는 진화를 멈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2. 네 가지 질문
두 번째, 몇 가지 이슈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2.1. 고조선은 압록강 남쪽에 있었는가? 북쪽에 있었는가?
첫째 질문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압록강 남쪽에 있었을까요? 압록강 북쪽에 있었을까요?
우리가 배운 모든 교과서나 모든 자료에서는 고조선이라는 게 평양 부근에 있었으니까 압록강 남쪽에 있었다고 대부분 생각들을 하시죠.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도읍 자체가 평양이니까 압록강 남쪽에 있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몇 개 고지도를 보시죠. 《역대지리지장도》라는 지도는 꽤 유명한 지도죠. 중국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역사지도집이라고 자랑할 정도인데요.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십구사지리도》라는 지도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확대를 해보면 압록수, 조선이 보이시죠. 압록수 훨씬 위쪽에 조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압록수도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지금의 요하를 그때 압록수라고 불렀습니다.
그걸 현대 지도에 표현을 해보면 장성이 있고 요동, 요수가 있고 압록수가 있고 조선 땅은 여기가 조선 땅입니다.
그다음 1616년에 나온 《십구사략통고》라는 책에 나오는 지도입니다. 제가 거의 유일하게 디지털원본을 못 가지고 있는 지도인데요.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서 인용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압록수 북쪽에 조선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육경도》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죠.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갖고 있는 책인데요.
보시면 우공구주급금[禹貢九州及金], 지금의 군현산하를 그렸다는 지도겠죠.
확대를 하면 압록강, 조선. 이 압록강은 현재 요하를 말합니다. 요하 훨씬 위쪽에 조선이 있습니다.
그다음 우리나라 중앙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도인데요. 《우공구주지도》라는 지도입니다.
빨간 인장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데 확대를 하면 압록수 북쪽에 조선이 있습니다.
고조선은 압록강 남쪽에 있었나요? 북쪽에 있었나요?
답은 고조선의 도읍은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2.2. 백이숙제는 지나족인가? 한민족인가? 고죽국은 지나족 국가인가? 한민족 국가인가?
두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백이숙제는 지나족, 중국 사람인가? 우리 한민족인가? 그리고 백이숙제의 고향인 고죽국이라는 나라는 지나 계열 국가인가? 우리 한민족 계열 국가인가?
너무나 당연하게 고죽국이라는 나라 이야기를 할 때는 백이숙제 이야기가 나오고, 중국책이 나오고,
교과서에도 우리들은 《수양산을 바라보며》 이런 것을 배웠습니다. 성삼문 선생이 쓰신 시죠.
누구나 다 백이숙제는 중국 사람이고, 왜냐하면 백이숙제 이야기는 사마천 사기열전 제일 앞부분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중국 사람이지 우리 한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죠.
공부를 해보니까 백이숙제는 우리 한민족입니다. 그리고 고향 땅인 고죽국은 한민족의 국가고 특히 고조선의 거수국, 제후국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고조선은 엄청나게 방대했습니다. 중국 지나계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강대한 민족이었고 그 형태는 연방 형태입니다.
《제왕운기》를 보면 고조선이 신라, 고려, 남북 옥저, 동부 부여, 예, 맥 모두를 아울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봐도 조선, 신라, 고려,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 맥 모두 단군이 다스렸다고 되어있죠.
그러니까 “United States of America”처럼 그 당시 고조선은 “United States of 고조선” 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단군은 사람이 아니죠. 고조선 연방의 연방대통령의 직책을 단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단군왕검이라고 되어있죠. 첫 번째 단군의 이름이 왕검이었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 고조선 연방의 제후국, 거수국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거수국 중 하나가 고죽국입니다. 고지도를 보시죠.
일본에서 나온 《당토명승도회》라는 책에 보시면 《영평부총도》라는 지도가 나오는데요.
영평부 위쪽에 고조선성[古朝鮮城]이라고 되어있죠. 왼쪽에 보시면 고고죽국[古孤竹國], 그 옆에 백이숙제묘[伯夷叔齊廟]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쪽에 고죽국이 있었던 것이죠.
백이숙제의 묘는 소설에 나오는 무덤이 아니고 얼마 전까지,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실제 존재를 했다고 합니다. 사진도 남아 있죠.
그 위치가 대략 영평부가 이쪽입니다. 고문헌을 보시죠.
《수서》를 보시죠.
수양제가 고구려를 상당히 좀 고깝게 여기는 것이죠. 그래서 공격을 해야 되겠다고 작전을 짜면서 자기의 책사인 배구한테 물어봅니다. 이 고구려란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냐고 이야기하니까,
그 이야기가 《수서》, 《구당서》, 《신당서》 거의 비슷하게, 글자 한두 개 다르게 수록이 되어 있는데요.
배구가 말하기를 고려, 고구려라는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때 기자를 보냈고 한나라 때 한사군 또는 한삼군, 그리고 진나라 때는 요동땅이 되었다. 그러니까 고구려 땅, 고죽국, 기자가 왔던 곳, 한사군 한삼군, 요동땅이 다 같은 지역이죠.
여기가 아까 전에 말씀드린 영평부 지역입니다. 여기에 고구려, 고죽국, 기자 봉지, 한삼군 한사군, 요동땅이 있었다는 것이죠.
저도 이런 중국 정사가 한두 가지도 아니고 수없이 중국 정사 24사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처음에는 상당히 놀랐죠. 저도 평생 알기로 한사군이라는 것은 평양 땅에 있었고, 위만 조선도 평양에서 망했고, 고조선도 평양에 있었고 이렇게 배웠는데 중국의 정사 24사/25사, 중국이 그렇게 자기들이 스스로 자랑을 하고 자부심을 갖는 정통 역사책에서 다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죽국이라는 나라가 고조선의 제국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지나 국가들의 나라 이름은 무조건 한 자입니다. 중국의 24사, 25사나 중국의 역사책을 보면 자기들 지나 계통 국가 이름에서 두 개 이름 자가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요, 순, 우, 하, 상, 주, 한 이런 식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들이 한나라를 부를 때 동한, 서한, 전한, 후한 이렇게 부르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그 당시에 한나라가 두 개가 있으니까 헷갈리지 말라고 앞에 있던 한이 전한이고 뒤에 있던 한이 후한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죠.
원래 당시에는 무조건 한 자로 부릅니다. 고죽은 두 자죠. 이미 여기에서 이것은 지나계 국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죽을 해석을 해보면 외로운 대나무. 무슨 나라 이름이 이래요. 외로운 대나무입니까? 이거 뭐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수필 쓰는 것도 아니고. 대략 북경 동쪽의 한자말 중에서 뜻풀이가 잘 안 된다고 하면 한민족 또는 만주 계통 말을 음차한 것이라고 보시면 큰 대과가 없죠.
음차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코카콜라를 중국 사람들이 가구가락[可口可樂]이라고 표현을 하고 발음이 비슷하게 코카콜라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표시할 말이 없으니까 한자말로 따온 것을 음차한다고 하는 것이죠.
예컨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주몽이라는 이름도 광개토대왕비를 보니까 추모라는 우리 말을 한자말로 쓰니까 주몽이더라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고죽[孤竹]도 고추[Gū zhú]라고 발음이 되는 것이죠. 그럼 이 고추라는 말이 어디서 왔느냐고 따져보니까 우리나라 말에 고추가[古雛加]라는 직책이 있습니다. 고구려 때요. 아마 여러분들 어릴 때 배운 기억이 나시죠.
《삼국지》를 보면 위서 동이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때 직책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등등 아주 중요 직책 중 하나인데 고추가가 누구냐 하면 왕의 피붙이 중에서 똑똑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임명해서 지방에 제후로 보내는 것이죠.
고추가[古雛加]에서 가[加]는 우리가 님 자, 어머님 아버님 할 때 님 자고 고추[古雛]를 한자말로 표현을 하다 보니까 고죽[孤竹]으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다들 인정을 하죠.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고구려 때 직책 아니냐, 물론 고구려라는 나라가 고조선의 여러 가지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직접 고조선 때 고추[古雛]라는 직책을 쓴 증거가 없지 않느냐고 반론을 하죠.
그런데 얼마 전에 무려 1400년이나 된 두로영은이라는 분의 비석이 하나 발견이 됐는데요.
이 비문에서 결정적인 단어가 나옵니다. 위에 한자가 보이시죠.
조선건국고죽위군[朝鮮建國孤竹為君]입니다. 조선이 나라를 세웠는데 고죽을 위군으로 삼았다. 조선이 고죽국을 만들고 거기다가 고추가를 한 명 보냈다, 그래서 군주가 되도록 했다. 아주 결정적인 문구가 나오는 것이죠.
그다음에 조선은 기자를 봉한 땅이고 고죽백이의 나라다. 바로 직접적인 이야기입니다. 조선이 기자가 온 땅이고 고죽백이의 나라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면 백이숙제는 중국 사람이 아니고 지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한민족입니다. 고죽국은 지나계의 국가가 아니고 한민족의 국가입니다.
고조선의 방계 거수국 중에 하나인데 가장 서쪽에 있다 보니까 사마천의 눈에 띈 것이죠. 그래서 조선을 표현하기로 고죽국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이죠.
2.3. 요수와 요하는 같은 강인가? 다른 강인가?
그다음 세 번째, 요수 요하라는 강이 고문헌을 보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 강이 과연 같은 강일까요? 다른 강일까요? 상식은 같은 강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강입니다.
중국의 바이두백과인데요. 바이두백과에 요하[遼河]를 검색해보면 지금 요동땅에 있는 요하 그대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수[遼水]를 검색해보면 옛날의 요하 이름이라고 되어있고 거의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른쪽에 지도가 하나 붙어 있는데요.
이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글에 표시를 하면 이쪽에 요수가 있습니다. 북경 한참 밑 제나라 위에, 산동반도 사이에 요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이두백과에서 이미 요수와 요하는 다른 강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면 이것은 최후의 bottom-line으로 봐야죠. 바이두백과에서 표현한 것은 중국 사람 전체는 아니겠죠. 그 중에서 아주 앞서 있는 지리학자들은 요수와 요하는 완전 다른 강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죠.
중국 한전을 찾아보면 요[遼]라는 말은 멀다. 그래서 지리학 관점에서 보면 멀리 국경 부근 또는 국경 너머에 있는 땅을 요[遼]라고 했고 그쪽에 흐르는 강을 요하 또는 요수라고 했고 그곳의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라고 불렀다는 것이죠.
고지도를 하나 보겠습니다. 1584년에 만든 《법계안립도》라는 책에 나오는 《남섬부주도》라는 지도인데요.
오른쪽 위에 보시면, 제가 조금 확대를 하겠습니다. 요[遼]라는 것이 보이시죠. 국경 근처에 멀리 있는 땅을 요[遼]라고 불렀고 그 요[遼] 건너편에 보면 고려[高麗]라고 보이시죠. 이것이 고구려입니다.
답은 요수와 요하는 완전히 다른 강이다 라는 겁니다.
2.4.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인가? 다른 산인가?
그다음에 더 황당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입니까? 다른 산입니까?
같은 산이죠. 대개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부르고 중국 사람들은 같은 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한때는 달랐다가 지금은 같은 산이 됐습니다. 좀 왔다갔다 하는데요.
그 분기점이 청나라 강희제 때 1712년, 1718년 이때가 우리나라 조선 숙종 때인데요. 그때부터 희비가 갈립니다.
1712년이 무슨 연도냐 하면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지던 때입니다.
그리고 1718년에는 거기에 정계비를 세우고 나서 지도를 만들죠. 《황여전람도》. 이 지도가 그 이후 거의 100년 동안 동북아시아 표준 지도가 됩니다. 엄청난 역사왜곡이 들어가 있는 지도죠.
원래 백두산은 여기 있었습니다. 현재 백두산의 동북쪽 1천 여리. 여기 있는 산을 장백산, 백두산, 불암산, 태백산이라고 우리들은 불렀는데 강희제가 백두산정계비를 이쪽에 세우고 나서 원래 있던 백두산과 장백산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흔적은 고지도에 그대로 남아 있죠. 1266년도에 나온 《남송여지도》인데요. 이것은 비석에 새겨져 있는 지도의 탁본입니다.
모사본을 보시죠.
오른쪽 위를 보면 장백산, 장백봉 보이시죠. 한반도는 훨씬 남쪽 밑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1270년도에 나온 《거란국지》에 《거란지리지도》가 실려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고려와 장백산은 엄청나게 떨어져 있죠. 그 사이에 강도 있고, 산도 있고, 들판도 있고, 숲을 지나야 장백산이 나옵니다.
다른 판본인데요.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장백산은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1666년도에 나온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인데요. 서울역사박물관에 두 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확대를 해보면, 장백산과 백두산이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죠. 장백산은 만리장성 한참 위에 있고 백두산은 저 아래쪽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림인데요. 마찬가지로 장백산과 백두산이 완전히 다른 산으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1666년도에 나온 《조선팔도고금총람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도는 북쪽 지방 상하를 조금 압축 해놨기 때문에 위도가 비슷하게 보이지만 확대를 해보면 위도가 좀 차이가 납니다. 장백산과 백두산은 완전히 다른 산이죠.
이 지도가 상당히 재미난 지도인데요. 17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인데 《천하도, 중국십삼성도》라는 지도입니다.
하나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갖고 있는 지도인데요. 왼쪽 지도를 보시면 중국의 십삼성도인데 우리나라 부분을 확대를 하면 먼저 백두산과 장백산은 완전히 다른 산으로 표시가 되어 있죠. 백두산은 조선 위에 있고 장백산은 저 위에 만리장성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만리장성이 있는데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이것은 산해관이죠. 우리가 잘 아는 노룡현에 있는 산해관입니다. 우리가 관광할 때 많이 가죠.
그런데 그 오른쪽에 성이 쭉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만리장성이라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유네스코에 등록해 놓은 성인데요. 그 성이 려성[麗成]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려[麗] 자를 쓸 때는 고구려[高句麗]를 줄인 말입니다. 고구려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도가 말하는 것은 산해관까지는 중국 사람들이 지었고
산해관부터 쭉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성은 고구려 사람들이 지었다고 이 지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지도는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 대영도서관에서도 거의 동일한 지도를 갖고 있습니다.
조금 확대해서 보면 똑같죠. 백두산, 장백산은 완전히 다르고 산해관이 있고 그 오른쪽에 조금 희미하게 보입니다만 려성[麗成]입니다. 이것이 고구려성입니다.
그다음에 그림만 보시죠.
완전히 다른 산으로 표시된 지도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 구경하러 가자!”고 하면 어디로 갔을까요? 당연히 함경북도 쪽으로 갔겠죠. 그런데 실제 옛날 역사책을 보면 함경도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갔습니다.
요동반도 한가운데와 백두산은 천몇백 리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왜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을 구경하러 함경도로 가지 않고 요동반도로 갔을까요?
황경원 선생은 대제학까지 하셨으니까 학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고봉까지 오르신 분이죠.
이분이 쓴 시 중에서 《영액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자 원본은 이렇고 이것이 《강한집》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원본이고요.
우리 말로 해석을 하면 “삼차하의 수원은 백두산에서 나오니” 라고 쭉 되어 있습니다.
이 삼차하는 지금의 요하를 가리키는 것이고 요하의 물줄기가 백두산에서 나온다는 말씀 들어보셨습니까? 백두산에서는 압록강, 두만강이 나오죠. 요하는 저 위에서 나오는 것이죠.
이분이 중국에 사행[使行]을 가면서, 사신으로 가면서 시를 상당히 많이 남겼는데 시 중에서 많은 부분은 지명들이 나옵니다.
봉성, 연산관, 낭자산, 냉정, 요동, 천산 등 쭉 나오는데 이것을 나열을 해서 실제 지도 위에 제가 표시를 해보니까 어떤 행적이 나오느냐 하면 이런 식입니다.
의주에서 출발을 해서 쭉 원래는 심양까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심양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서 이제 북경까지 가는 것인데요. 이분은 심양에서 바로 북경으로 안 가고 심양에서 잠깐 쉬면서 농땡이를 치죠. 뭐를 하느냐 하면 백두산 구경을 합니다. 백두산 구경을 가는데 영액성, 영액문이라는 곳에 백두산 구경을 가는 것이거든요.
심양으로부터 영액성까지는 소위 지금으로 따지면 훈허[渾河]라는 강이 있고 옛날에 그 강을 압록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양에서 영액문까지 가는 강을. 압록강을 배를 타고 올라와서 영액문에서 내려서 백두산 구경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양에서 백두산으로 가려고 하면 이쪽으로 가야죠. 그런데 이분은 그쪽으로 간 게 아니라 심양까지 갔다가 심양에서 영액문에 갔다가 영액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그게 지금까지 우리한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당한 이야기 아닌가요? 저도 이런 시를 보고 해석을 하면서 정말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때까지 제가 근 70년 동안 알았던 역사 지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왜곡되고 잘못됐는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제가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삼차하는 강이 3개가 만나니까 삼차하라 하는 것이고 심양에서 배를 타고 쭉 올라가면 그 길이 압록강입니다. 끝이 영액문, 영액성이라는 지역인데요.
제가 추정하기는 바로 여기가 단군께서 고조선을 만들었던 지역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1712년 그 이후에는 강희제가 장백산을 옮기면서 지도상에 여러 개의 장백산들이 등장을 합니다.
1822년도 《황청지리도》를 보시면 이 부분을 확대를 해보면 장백산이 무려 네 군데 나타납니다.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1842년도에 《해국도지》라는 지도를 보시면 확대를 해보면 장백산이 네 군데 나타납니다.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1875년도에 《조선전도》. 이것은 일본의 육군 세작[細作, 스파이]들이 실제 밀정 역할을 하면서 만든 지도인데요.
이 부분을 확대해서 보시면 장백산이 세 군데 나타납니다.
그다음에 이것은 마찬가지로 《만주기행부도》라는 지도데요. 이것도 일본의 세작이 만든 지도인데 장백산이 무려 다섯 군데 나타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원래 있던 장백산을 없애고 강희제가 지금의 장백산 백두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장백산의 위치가 확정이 안 됐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여기도 장백산, 저기도 장백산.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죠.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이기도 하고 다른 산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3. 이번 프로젝트는 무엇이 다른가?
이상 네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제가 이번에 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차별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1. 쇼비니즘[과도한 국수주의] 거부
첫 번째, 쇼비니즘. 과도한 국수주의를 거부를 합니다. 쇼비니즘[chauvinism]이라는 것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광신적인 애국주의나 국수적인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죠.시쳇말로 표현을 하면 국뽕, 환빠가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만간 다가올 중국과의 역사전쟁에 돌입을 하려면 철저하게 과학에 근거한, 입각한 자료, 증거만을 대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이런 환국의 지도, 한민족 세계정복설, 고구려의 강토 같은 지도를 보면 정말 가슴이 뿌듯하죠. 정말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했을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하는데요.
이런 자료들의 근거가 《환단고기》라든지 《규원사화》라든지 이런 책들은 현재 위서 논쟁이 붙어져 있거든요. 이런 책들을 우리들이 인용을 해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역사 전쟁에서 그냥 단칼에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용할 수 있는 자료는 중국의 정사 24사, 25사 또는 신뢰도가 확보된 사료를 근거로 해야 되는 것이죠.
3.2. 고지도로 승부
두 번째는 고지도 이야기인데요. 제가 이번 작업을 하면서 고지도를 약 천 장을 구했습니다. 처음에 한두 편 모으다 보니까 신기하다, 신기하다 해서 지도를 약 천 장을 모았는데요.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설명을 드리고, 인터넷에 공개를 하고, 제 개인 블로그에 올릴 작정인데요.
오래된 것은 기원전 250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 지도인 《마왕퇴한묘지도》 이런 지도도 있고
비석에 새겨진 지도, 중국의 국보로 된 지도부터 시작을 해서 최근까지 지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지도들은 중국에서 구한 것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전부 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만, 이런 데서 구했죠. 중국은 자기 지도를 공개하는 순간 엄청난 역사왜곡과 조작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기 때문에 자기들이 지도를 공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인지 몰라도 최근 1~2년 사이에 이 고지도들이 수도 없이 공개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볼 때는 코로나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박물관, 도서관들이 폐쇄 상태에서 사람은 지켜야 되고 하다 보니까 있던 자료를 디지털화 하자 이런 식인데요.
제가 가장 고지도를 많이 구했던 곳은 미국의 의회도서관, 하버드대학 도서관, 그리고 하버드대학의 옌칭연구소 도서관에도 고지도가 상당히 많습니다. 스탠포드대학 도서관도 꽤 있죠. 그리고 일본의 내각문고, 일본의 국회도서관, 그리고 영국의 국립도서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 의외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도 고지도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고 공개를 하고 있습니다.
지도 하나 구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하루 종일 지나갑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아, 아 소리를 하면서 하루 종일 시간이 지나갈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적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는 지도들이 상당히 많죠.
3.3. 요소환원주의 → 전포괄주의: 빅데이터 활용
그다음 세 번째는 빅데이터 활용입니다. 과거에는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해서 이런 식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고 하면
빅데이터가 나오고 나서는 거꾸로 방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고문헌들은 거의 다 디지털화가 됐습니다.
디지털화가 됐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접근성[accessibility]이 좋아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것이 대규모로 축적이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죠. 그걸 우리들이 빅데이터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3.4. 텍스트 → 오디오, 비디오
네 번째 제가 차별화한 요소는 제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논문, 텍스트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죠. 접근성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오디오나 비디오로 만들겠다고 제가 아까 말씀을 드렸고 제가 동영상을 약 100편 제작 중에 있는데 제작되는 대로 윤순봉의 서재 채널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4.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그다음 네 번째입니다.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두 가지 말씀을 드리는데요. 고지도, 고문헌.
테라[terra], 땅입니다. 테리토리[territory], 떼루아르[terroir]. 땅이죠. in = not. 부정에 대한 접두사죠. 코그니타[cognita] 코그니션[cognition], 인식.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땅을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라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미지의 땅이죠.
예를 들어서 콜럼버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서쪽으로 갈 때는 그쪽에 뭐가 있는지 몰랐죠. 테라인코그니타가 있었습니다.
발견하고 나서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가 테라코그니타[terra cognita]로 바뀌는 것이죠.
우리들이 고지도를 볼 때는 중요한 것은 그 지도상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지도에 무엇이 그려져 있지 않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당시 지도를 그렸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그 땅의 인식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바로 무엇이 없는가? 라는 것이 테라인코그니타입니다.
4.1. 고지도에서의 테라인코그니타
예를 들어서 지도 하나를 보죠. 1121년도에 만들어진 《구역수령도》라는 지도죠. 사천박물관에 현재 소장되어 있습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지도인데요. 이것에 대한 모사본인데 재미난 것은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지 않는 땅을 바다로 표시를 했습니다. 물론 동쪽은 바다고 남쪽의 일부도 바다지만 북쪽과 서쪽은 당연히 땅이잖아요. 땅인데도 바다로 표시를 하고 이를 사해, 4개 바다라고 불렀죠.
그리고 자기들이 인지하는 땅을 해[海]의 안쪽이니까 해내[海內]라고 부르고 그 바깥쪽을 해외[海外]. 해외가 바로 테라인코그니타죠. 북쪽은 우리하고 관련 되니까요.
북쪽을 보시면 북쪽에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당시 지나족들이 인지하고 있던 땅의 끝이죠.
이 지도를 현재 구글에 찍어보면 톈진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지도를 그렸을 때 지나인들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북쪽 땅의 끝은 톈진입니다.
그리고 이 노란 점들을 쭉 연결을 해보면 바로 역수라는 강이 흐르죠. 현재 이 역수하, 역하가 그 당시에 지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던 땅의 북쪽 끝이죠. 그것을 요수라고 불렀습니다.
현재로 보면 북경 아래쪽에 있는 대청하 수계의 일부인데요. 이쪽까지가 중국 사람들의 천하죠.
그다음에 1584년도에 나온 《법계안립도》라는 지도를 보시면 동진단국도. 동진단은 인도 사람들이 중국을 부를 때 동진단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른쪽 위를 보시면 북경 오른쪽에 요동, 요동 위에 백이숙제의 나라가 있죠. 벌써 이 지도를 봐도 장성 밖에 그렸다는 것은 백이숙제의 나라는 지나족의 나라가 아니라는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흐르는 강을 요수라고 해놨죠. 이것이 지금의 난하인 것이죠.
더 재미난 것은 1877년에 일본의 세작들이 그린 《만주기행부도》라는 지도가 있습니다. 제가 이 지도를 며칠 동안 들여다봤는데 정말 잘 그린 지도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가 아주 많이 담고 숨겨져 있는 지도인데 희미해서 잘 안 보이지만 지도가 보면 중간에 뚝 잘려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일본의 세작들이 땅 끝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렸는데요.
이 윗부분은 땅과 지면과 산과 도읍을 다 그려놨는데 아랫부분은 공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땅과 세작이 알고 있었던 만주 땅이 다른 것이죠.
이 공란이 뭐냐하면 여기가 우리 옛날의 조선 땅이죠. 조선 땅이니까 만주라고 안 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만주는, 조선 위쪽을 만주라고 본 것이죠.
그러니까 그 당시 이 사람들이, 일본의 세작들이 지도를 그렸을 때 테라인코그니타가 된 것이죠.
4.2. 고문헌에서의 테라인코그니타
제가 고지도에서 테라인코그니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다음 고문헌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까 빅데이터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떤 식으로 최근에 빅데이터를 활용을 할 수 있느냐 라고 한 용례 중 한 가지가 이 역사연구인데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테라인코그니타라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는가?”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테이블을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쭉 지명을 적었습니다. 지명이라는 것이 대개 그 당시 나라의 국경이라는 게 지금처럼 철책이 있는 게 아니고 대부분 강이나 산이나 산맥을 중심으로 국경이 이루어집니다. 자연의 지형지물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역하로부터 시작을 해서 우리나라 압록강 사이에 있는 유명한 지명을 쭉 나열을 했습니다. 역하, 조백하, 갈석산, 난하, 소릉하, 대릉하, 의무려산, 요하, 압록강. 쭉 나열을 했거든요. 나열을 했다는 이야기는 만일 역하에서 출발을 해서 지금의 압록강까지 누가 간다라고 하면 반드시 거쳐야 되고, 또 역사책을 쓴다고 하면 반드시 언급해야 되고, 누가 사행길을 갔다 오면 반드시 일기로 남겨야 되는 지명들을 쭉 나열을 한 것이죠.
그다음 두 번째, 위에서 아래는 연도순으로 쭉 나열했습니다.
가장 정확한 연도순은 중국의 24사, 25사죠. 제일 위가 사마천 《사기》고 제일 아래가 《청사고》입니다. 그럼 이런 표가 나오겠죠.
그럼 이런 표를 놓고 현재 나와있는 여러 가지 중국 사서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서치해서 각각의 역사책에 이 지명이 나타난다, 나타나지 않는다고 동그라미를 쳐보면 이런 동그라미가 쳐집니다. 한눈에 보셔도 이 경향성을 알 수가 있죠. 크게 사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제일 아래 《청사고》는 최근의 책이니까요. 이 《청사고》에서는 모든 지명이 다 나타납니다.
제일 위 사마천 《사기》에서는 지명이 두 개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가 역수, 하나가 갈석산. 그러니까 사마천 선생이 《사기》라는 책을 쓸 당시에 자기 머리 속에 있던 땅의 끝은 역수와 갈석산까지라는 것이죠.
역수와 갈석산까지가 사마천 머릿속에 있는 천하의 전체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109년에 멸망을 했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대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사마천은 친구나 사돈팔촌 중에 많은 사람들이 위만조선 전쟁에 참가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죠. 당대 기록입니다. 당대 기록을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을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위만조선이 멸망을 하고 그다음 거기에 한사군이 세워졌다고 이야기할 때 대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평양 부근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다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요동땅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다음 아주 소수 의견이 갈석산 부근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럼 위만조선이 어디 있었느냐? 세 군데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평양, 어떤 사람들은 요하, 어떤 사람은 갈석산이라고 하는데 조금 전 테이블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쪽 땅은 사마천 머릿속에 존재 자체를 안 했던 땅입니다. 테라인코그니타였죠.
그러니까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시에 뭐라고 썼든지 간에 사마천은 갈석산 부근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거기에 위만이 망하고 나서 한사군이 만들어졌다고 책을 쓴 것이죠. 그런데 후대 사학자들이 해석을 하면서 역사조작과 역사왜곡을 한 것이죠.
만일에 이 당시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면 이 중간 사이에 있는 지명들 중에 최소한 서너 개는 나와야 됩니다.
사마천이라는 분이 얼마나 엄청난 분이신가 하면 서양으로 따지면 헤로도토스와 맞먹는, 거의 맞비교되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이분이 역사책을 쓰기 위해서 앉아서 쓴 것이 아니라 중국 땅 방방곡곡을 다 찾아다니고 또 여러 가지 자료를 채록한 이런 아주 엄청난 분이거든요.
그분이 만일 갈석산부터 평양까지 실제 사람이 갔다고 하면 아마 본인이 거기까지 가봤을 것이고 또 간접적으로 모든 자료를 채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지명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두 가지죠.
첫째 하나는 사마천이 역사책을 쓰면서 직무유기를 했다, 사가로서 자기 자세를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다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에 한나라 무제가 날틀, 비행기를 발명을 해서 그쪽에서 평양까지 가서 공수부대를 떨어뜨려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시 공수부대로 돌아왔다고 하면 평양에 한사군이 있는 것이 맞습니다. 두 개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한사군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테라인코그니타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지도나 문헌을 볼 때 무엇이 있는가 보다 무엇이 없는가를 통해서 역사의 허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고유명사가 보통명사처럼 옮아 다닌다
다섯 번째입니다. 고유명사가 마치 보통명사처럼, 발이 달린 것처럼 옮아 다닌다는 것이죠. 예컨대 먼저 동이에 대해서 말씀을 한번 드리겠습니다.
5.1. 동이
크게 보면 동이라는 이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대개 동이라고 하면 동쪽 오랑캐고 우리 한민족을 지나족들이 비하할 때 부르는 이름이 동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도 흐름과 이동과 역사가 있는 것이죠.
먼저 질문입니다. 공자가 동이족인가요? 맞습니다. 공자가 동이족입니다. 왜냐하면 주나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다 동이족이라고 불렀거든요.
여기가 주나라고 여기가 노나라니까 공자는 당연히 동이족이죠.
그런데 공자가 한민족인가요? 아니죠. 공자는 지나족입니다. 지나족 사이에서도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동이족이라고 부른 것이죠.
그러다가 후한서에 보면 동이열전이 나오죠. 여기서부터 우리 한민족을 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이한국인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다음 재미난 것은 우리나라 내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충주에 가면 고구려비가 있죠. 우리나라 국보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동이매금토, 동이는 매금의 땅이다. 매금은 마립간을 매금이라고 하죠. 마립간이라는 것이 신라왕의 별칭 아닙니까?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라를 깔보고 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다음에 조선 때 보면 성종 시절에 조선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동이, 동쪽 오랑캐라 불렀습니다.
양성지가 왕에게 올리는 글을 보면 동이는 일본으로서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며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동쪽 오랑캐라고 부른 것이죠.
일본 내에서도 교토 사람들이 에도 촌놈들을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에도 촌놈들 중에서 거친 사무라이들을 동이라고 불렀죠.
그러니까 동이라는 말은 종족과는 상관없이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해서 낮춰서 부를 때 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대개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가 동이족이었죠.
그러다가 우리 한민족 전체가 동이족이 됐다가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를 동이로 이야기했고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동이라고 했고
교토 사람들은 에도 사람들을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이라는 말이 옮아 다니는 것이죠.
5.2. 요수, 요하, 요동, 요서
그다음 두 번째,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명 하나만 들으라고 하면 요수, 요하, 요동, 요서에서 요[遼]라는 글자인데요.
식민사관, 반도사관의 가정은 요하와 요수는 같은 강이고 그 위치는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다는 가정이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모든 역사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딱 이 가정이 가장 큰 것 중에 한 가지입니다. 사실이냐? 아니죠.
제가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요수, 요하, 요동, 요서라는 고유명사도 마찬가지로 마치 발이 달린 보통명사처럼 이동을 했죠.
제가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기원전 2천 년 당시 하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은 현재의 역수 또는 역수하인데요. 이 강을 당시 요수라고 불렀죠. 그다음에 지나족들이 이 역수를 건너오자 국경은 조금 이동을 하고 현재의 조백하가 요수로 됩니다. 그 이후에 연나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동쪽으로 진출을 하면서 현재의 난하가 요수가 되는데요. 이 요수는 그 뒤에 유수로 이름이 바뀐 후 마지막에 난하가 되죠.
그다음에 한참 지나서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가 대릉하까지 진출을 하면서 대릉하를 요수라고 부르죠. 그다음에 천 년 전후에 요나라가 생기고 요나라가 현재의 요하까지 진출을 하면서 당시 요동반도 한가운데를 흐르던 요하를 처음으로 요하라고 부르는 것이죠.
요컨대 요수는 네 번에 걸쳐서 위치 이동을 했고 요하는 위치 이동을 한 적이 없는 것이죠.
먼저 첫 번째 역수를 요수로 불렀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서서 살펴보았고 그다음에 조백하도 뛰어넘겠습니다.
그다음에 현재의 난하를 요수라고 불렀다는 것인데요.
1247년에 만들어진 《추리도》. 현재 소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중국이 국보로 지정을 했으니까 그 가치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죠. 이 《추리도》는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탁본인데요. 이 부분을 확대를 해보면 여기에 장성이 보이시죠. 그 왼편에 갈석산[碣石山]이 있죠. 그리고 그 위에 요수[遼水]라고 뚜렷이 보이죠.
그러니까 현재의 난하를 당시에 요수라고 불렀던 것이죠.
그다음에 1136년에 만들어진 《우적도》라는 비석에 새겨진 지도를 보시죠.
탁본이고, 모사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른쪽 위를 확대해서 보면 이미 지금의 난하가 유수라고 이름이 바뀌었죠. 그리고 훨씬 동쪽에 요수가 있습니다. 이 요수가 바로 지금의 대릉하에 해당되죠.
그다음에 요나라가 생기면서 요동반도 한가운데를 흐르는 현재 요하에서 고려와 국경을 이루었죠. 이때부터 요하라는 이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더라도 그 이전에는 요수 밖에 나오지 않죠. 그러다가 요나라 역사를 그린 《요사》부터 요하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요수와 요하의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라고 불렀던 것이죠. 이상 여기까지 요수, 요하, 요동, 요서의 이동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5.3. 압록강
세 번째로 압록강도 마찬가지로 위치를 네 번이나 이동을 했습니다.
먼저 《삼국유사》를 보시죠.
고구려 때 도읍은 안시성, 일명 안정홀로서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이죠. 요수는 일명 압록으로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281년도는 이미 요나라 때 현재의 요하를 요하 또는 요수라고 불렀을 때죠. 그런데 그 요수, 요하를 일명 압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안민강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먼저 지나족 입장에서는 요[遼]가 멀다는 뜻이니까 국경 또는 국경 너머 멀리 있는 아득한 강을 요수라고 불렀던 것이죠. 우리 한민족 입장에서 보면 안민강[安民江], 편안할 안[安] 자에 백성 민[民] 자니까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강이다 이런 뜻이겠죠. 그러니까 이 요하가 국경에 있는 방어선 또는 해자[垓子]의 역할을 했던 것이죠.
그다음에 압록이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그 유명한 두우 선생께서 《통전》에서 압록수에 대해서 물빛이 오리 머리[鴨頭] 같아서 예로부터 그리 이름 붙였다. 그러니까 오리 압[鴨] 자에 푸를 록[綠]자를 쓴 것이죠. 오리 머리가 푸르기 때문에 압록이라 했다는 것인데요.
제가 아무리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대부분의 오리 머리는 갈색입니다.
아주 예외적으로 청둥오리 머리가 푸른색인 경우가 있죠.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압록강을 네 가지로 쓰는데요.
강[江] 또는 수[水] 자로 부르니까 결국 압록은 두 가지가 있죠.
하나가 푸를 록[綠]자고 하나가 맑을 록[淥] 자입니다.
만일에 두우 선생의 말이 맞다고 하면 맑을 록[淥] 자는 쓸 수 없는 것이죠. 오리 머리처럼 맑다? 오리 머리가 투명합니까? 아니죠. 그래서 마찬가지로 같은 발음에 다른 한자를 쓸 경우에는 대개 한민족이나 만주족의 말을 음차한 것이죠.
우리가 현재 압록강을 영어로 부를 때 Yalu River라고 부르죠. ㄹ-ㄹ, ㄹ이 두 개죠. 그런데 중국어로 압록을 발음을 하면 야루[ya-lu]입니다. ㄹ이 두 개가 아니고 하나죠.
그런데 이 야루라는 말은 만주어 사전을 찾아보면 경계 또는 국경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루강이라는 것은 국경에 있는 강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요나라, 발해, 고려, 궁예까지 해서 서로 영토에 대한 경쟁이 아주 극심했죠. 따라서 국경도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 국경이 만일 이동을 한다고 하면 국경을 나타내는 야루도 마찬가지로 이동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을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면 먼저 현재의 혼하, 훈허를 마자수 또는 압록수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에 발해의 강토가 점점 넓어지고 결국 나중에 사방 오천 리까지 되는데요. 그때는 현재의 요하 전체를 압록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한참 지나서 조선 때 국경이 많이 후퇴를 하고 현재의 애하를 압록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다음 네 번째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고 1718년에 강희제가 《황여전람도》라는 지도를 편찬한 이후부터 현재의 압록강을 압록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하나씩 살펴보죠. 먼저 첫 번째, 현재의 혼하를 마자수 또는 압록강이라고 불렀죠.
《신당서》에 보면 고구려 당시 8대 강이 나옵니다. 《신당서》 표지이고, 이 부분인데요.
원문 그대로 보면 여기 이 초록색 부분에 강 이름이 8개가 나오죠.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이런데요.
제가 다시 정리를 하면, 요수, 패수, 대요, 소요, 양수, 마자수, 압록수, 염란수 8개죠.
과연 이 강들의 위치가 어디일까요? 그 단초는 아까 보신 《추리도》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당나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이루었던 갈석산 부근에 요수가 있었죠. 그리고 그 동쪽을 쭉 보면 소요수라는 강이 보이시죠. 이게 현재의 요하 입구입니다.
구글 지도에 표시하면 여기가 요수, 여기가 소요수죠.
그다음에 《신당서》에 실려있는 내용 중에 마자수가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신당서》에서는 발해를 말갈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말갈의 백산은 발해의 장백산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물빛이 오리 머리 같아서 압록수라고 한다. 국내성 서쪽을 지나서 염란수와 같이 합치고 또 서남쪽으로 흘러서 안시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돼 있죠.
다시 《추리도》를 보겠습니다. 여기 장백산이 있고 말갈지가 있고 남서쪽으로 흐르는 강에 표시가 있는데 수[水] 자는 보이는데 그 앞에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자수 또는 압록수겠죠.
추가로 구글맵에 표시를 하면 지금의 혼하, 여기가 당시 마자수 또는 압록수라고 불렀던 것이죠.
추가로 몇 가지를 더 표시하면 여기에 장백산이 있고 장백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마자수 또는 압록강이죠. 국내성의 서쪽을 지나가고 염란수와 만나서 안시성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 정도까지 되면 다른 부분은 쉽게 나오죠.
추가로 지금의 동요하를 양수라고 불렀고 지금의 태자하를 패수라고 불렀죠.
그다음에 《신당서》 원문을 보면, 고구려의 왕은 평양성에 사는데 남쪽에 패수가 흐르고, 그리고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별도, 또 다른 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평양은 압록수의 동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죠.
지도상에 그려보면 패수 북쪽 마자수, 압록강 남쪽에 평양성이 있고 한참 밑에 현재 평양에 한성이 있었던 것이죠. 평양, 국내성, 한성 세 곳에 있었는데요.
구글맵에 표시를 해보면, 요동 한가운데 평양성이 있었고 조금 위쪽에 국내성이 있었고 현재 평양 자리에 한성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교과서에서는 현재 압록강변에 있는 집안에 국내성이 있었고, 당시 한성이 있었던 곳에 평양성이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죠.
두 번째, 요하 전체를 압록강, 압록수로 불렀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그 자리에 발해가 들어서죠. 발해가 강토를 넓혀가면서 국경이 점점 서쪽으로 이동을 하죠. 그래서 현재의 요하 전체를 압록강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801년 당나라 때 만들어진 가탐도리기라는 지리지가 있죠. 가탐이라는 분은 당나라 때 재상을 지내신 분인데요. 재상으로서의 능력은 평균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지리에 대해서는 아주 능통하셨습니다.
그래서 “중국 역사 3천 년 동안 지리학자 한 사람만 골라라” – 그러니까 원픽[one-pick]이죠 – 라고 하면 이 가탐이라는 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봐도 중국의 수많은 시리즈 중에서 토시 하나 바꿀 수 없을 정도만큼 정확하고 완벽한 시리즈가 가탐도리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가탐도리기에서 보면, 중국 산동반도 등주에서 출발을 해서 발해왕성까지 가는 길이 적혀져 있습니다.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를 지나서 1천 리를 가면 압록강당은포구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압록강당은포구의 위치를 찾으면 당시에 압록강이 나오겠죠.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산동직례성경해강도》라는 군사용 지도가 있습니다. 1차원적으로 아주 횡으로 길게 그려진 지도인데요. 지나인들은 이런 지도를 보고 해방만리도라고 하죠. 바다를 방어하는데 중국의 바다 전체 길이가 만리니까요. 그래서 해방만리지도라고 부르는 것이죠.
실제로 보면 지나 국가의 해안선은 이렇게 들쑥날쑥한 것이죠. 그런데 이런 2차원을 1차원으로 쭉 늘려서 표시를 하면 이렇게 됩니다.
제일 왼쪽 부분을 확대를 해보면 여기가 금주, 그러니까 명나라의 동쪽 끝이 금주인 것이죠. 그다음 오른편에 요하, 대릉하, 소릉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구글맵에 표시를 하면 금주, 요하, 대릉하, 소릉하는 이쪽 위치죠.
그런데 요하 앞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여기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양방구. 요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양방구라고 불렀던 것이죠. 명나라 당시에는요. 그러니까 801년에 가탐도리기를 쓸 당시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를 지나서 당은포구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곳이 바로 명나라 때는 양방구로 바뀌었던 것이죠.
밑에 보시면 요하도라는 지명이 있고, 요부관이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이 부근에 당은포구가 있었던 것 아닌가 추정하는 것이죠.
문헌을 봐도 명나라 정사인 《명사》를 보면 양방구관이라는 관이 있는데 바다로부터 오는 배가 이곳에서 요하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양방구, 요하, 당은포구가 같은 곳에 있었던 것이죠.
참고로 당나라 등주에서 출발을 해서 발해왕성으로 가는 길을 복원을 하면 대개 이런 모습입니다. 등주에서 압록강당은포구까지는 바다배를 타고 가고 당은포구에서는 작은 강배로 바꾸어서 압록강을 쭉 거슬러 올라가다가 압록강 끝에서 내려서 땅 길로 발해왕성까지 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연산도》라는 지도가 있습니다. 《인자수지》라는 책에 나오는 지도인데요. 경사가 지금의 북경입니다. 북경 오른쪽 위에 압록강이 있죠.
저는 이 지도를 처음에 보고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림이 있느냐 라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정확하게 그린 지도입니다.
요하 중에서 서요하, 그중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을 압록강이라고 표시한 것이죠.
구글 지도에서 오른쪽을 압축을 하면 이런 모습이 되죠.
결국 이 지도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시한 것입니다.
이 지도는 《도서편》에도 반복해서 나오고 《우공회소》라는 책에서는 《제경도》, 황제의 도읍을 그린 지도라고 이름이 바뀌었지만 내용은 같죠. 다만 이쪽에 보시면 여진이 표시가 되어 있죠.
그러니까 여진족이 살던 곳 왼쪽을 흐르는 강이니까 너무나 당연히 지금의 요하죠. 그 당시 요하를 압록강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1613년에 나온 《도서편》 이라는 책에 또 다른 지도가 하나 실려 있는데요. 《화이고금형승지도》라는 지도입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옛날과 현재의 땅 모양을 그린 지도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압록강이 보이시죠. 이게 현재 어디쯤 될까요? 바로 오른편 위에 주석이 있는데요.
한번 보시면, 옛날 숙신의 땅이다. 수나라 당나라 때 흑수말갈이 있었다. 당나라 초에 연주를 설치를 했고 흑수부가 있었다. 금나라 태조가 여기서 일어났고 금나라가 여기서 망했다. 발해에 요도가 있었다. 원나라 때는 만호부를 설치를 했다. 본조 명나라 때는 200여 개의 도사위가 있다.
현재의 요동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죠. 거의 완벽한 증거죠.
세 번째, 현재의 애하를 압록강이라고 불렀습니다. 구글맵을 보면 여기 흐르는 강을 애하라고 하죠.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 입구 거의 다 가서 있죠.
1896년에 그려진 《팔도지도총론》이라는 지도집인데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대조선국전도》를 보시죠. 서쪽을 위로 하고 북쪽을 오른쪽으로 해서 눈에 익숙지 않습니다.
왼쪽으로 90도 돌리면 이렇게 되는데요. 조금 눈에 익숙하시죠.
여기 보시면 강 하구에 대총강이라고 되어 있고 조금 올라가면 구련성이 있고 그 옆을 흐르는 강을 압록강이라고 적어놨죠.
그다음 지도는 《평안도도》라는 이름의 지도인데요.
조금 더 확대를 해보면, 강 입구에 대총강. 그 위에 구련성, 그 옆으로 흐르는 강을 압록강이라고 해놨죠.
그다음에는 조선시대 때 그려진 《해좌전도》라는 지도인데요. 이 부분을 확대하면 마찬가지로 대총강이 보이고, 구련성이 보이고, 오른편에 압록강이라고 적혀 있죠.
그다음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관서총도》라는 지도를 보시죠. 이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마찬가지로 여기에 대총강이 있고, 조금 올라가면 구련성이 있고, 그 옆을 흐르는 강을 압록강이라고 해놨죠.
앞에서 본 세 편의 지도는 한반도만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고 중국에서 그려진 지도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먼저 《도서편》이라는 책인데요. 제일 마지막 부분에 《조선도》라는 지도가 붙어 있습니다. 보기에 조금 까다로운 지도인데요.
먼저 제일 밑에 개성부터 시작을 하죠.
그 북서쪽에 대동강이 보이죠.
그리고 그 위쪽에 대령강이 보입니다. 이 강이 현재의 압록강이죠.
이 강을 쭉 따라서 올라가 보면 위쪽에 갑산. 삼수갑산 할 때 갑산과 함경도가 보이시죠.
그 왼편에 있는 백산이 바로 백두산이겠죠.
그다음에 왼편에 흐르는 강을 압록강이라고 적었습니다. 바로 지금의 애하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 강을 쭉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심양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하는 요동반도 가운데를 흐르는 것이죠.
쭉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백산이 보입니다. 이 태백산이 바로 원래 장백산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 압록강과 대령강 사이는 현재의 요동땅입니다. 그런데 이 요동땅 한가운데에 평안도가 보이죠. 좀 이상하죠. 평안도가 요동땅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으시죠.
1700년도 초에 프랑스의 아주 유명한 지리학자인 당빌 선생이 그린 지도 두 편을 보시죠.
1730년에 독일에서 발행된 지도인데요. 그 저본은 당빌지도입니다. 이 부분을 확대해 보시면, 여기가 압록강, 여기가 백두산, 여기가 두만강이죠. 그런데 여기 PINGAN이라고 돼 있고 여기에 HIENKING이라고 되어 있죠. 우리말로 PINGAN이 평안도고 HIENKING이 함경도죠.
평안도를 보면, 절반은 현재의 압록강 북서쪽에 있고 또 절반은 현재의 압록강 동남쪽에 있죠. 평안도 한가운데를 현재의 압록강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1732년에 나온 지도인데요. 확대를 해보면 앞의 지도와 거의 유사합니다. 여기가 현재의 압록강이고, 여기가 백두산, 여기가 현재의 두만강이죠. 마찬가지로 여기가 평안도인데요. 요동땅 상당 부분을 평안도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러면 애하라는 강이 어떻게 해서 압록강이라고 불렸을까요? 소위 말하는 유조변이라는 국경 때문입니다. 유조변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만 유조변장, 유조변책 등등으로 불리죠.
버드나무 류[유][柳] 자에 가지 조[條] 자, 변방 변[邊] 자에 담장 장[𢉈] 자. 그러니까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변방의 담장이라는 뜻이죠.
청나라 때 영토의 동쪽 끝을 만리장성처럼 성으로 쌓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버드나무로 담장을 친 것이죠.
이 그림은 1700년 대에 청나라 정치인인 장부라는 선생이 그린 유조변의 그림입니다.
현재도 유조변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또 설명비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죠.
보시는 바와 같이 “청대유조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883년도에 그려진 지도를 보면 이 부분을 확대를 하면 여기 연두색으로 보이시죠. 이게 바로 유조변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 서쪽이 청나라 땅이니까 당연히 이 부분 동쪽은 조선 땅이었겠죠.
그다음에 1830년도에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라는 지도죠.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을 하고 있죠.
확대를 해보면 여기 빨간 줄로 그어진 부분이 유조변입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성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유조변을 통과하는 일종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곳이 바로 청나라의 동쪽 끝이죠. 그리고 그 오른쪽은 당연히 조선땅입니다.
《성경여지전도》를 보셔도 여기를 확대를 해서 보면 유조변이 보이시죠.
그런데 1880년도에 만들어진 《중국, 일본, 한국 지도》. 현재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소장을 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에서 빨갛게 표시된 부분이 유조변입니다. 그런데 애하가 이 녹색인데요. 유조변 가를 흐르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이 당시에는 유조변이 국경이었고 국경에 애하가 흐르고 있으니까 당연히 애하를 압록, 즉 국경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그다음에 위에서 소개했던 1875년도 일본의 스파이들이 만든 《조선전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