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묘 #북방계무덤
[20]田偉. 試論兩週時期的積石積炭墓[J]. 中國歷史文物, 2009[02]59-67.
[20]田伟. 试论两周时期的积石积炭墓[J]. 中国历史文物, 2009[02]59-67.
인용회수 22 [2024.12.30. 현재]
試論兩周時期的積石積炭墓
양주 시기 적석적탄묘에 대한 시론
전위田偉
內容提要:
本文將兩周時期的積石積炭墓分為積石墓、積炭墓與積石積炭墓,進而在每一類下劃分小類,並結合時間、地域進行系統分析與研究。作者認為,相對於積石墓的墓主等級參差不齊而言,積炭墓與積石積炭墓的墓主身份較高,在西周及春秋早期只見於諸侯墓,然後也僅擴大到次於諸侯一級的貴族。積石積炭墓不但具有固墓、防盜、防潮等作用,亦有防備動物破壞椁室之功用。
초록:
본문은 양주兩周 시기의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를 적석묘積石墓, 적탄묘積炭墓,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로 나누고, 나아가 각 유형 아래에 세부 유형을 나누었으며, 시간과 지역을 결합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했다. 필자는 적석묘積石墓의 묘주 등급이 일정하지 않은 것에 비해, 적탄묘積炭墓와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묘주는 신분이 비교적 높았다고 본다. 서주西周 및 춘추春秋 초기에는 제후諸侯의 무덤에서만 보이며, 그 후 제후 다음 등급의 귀족에게까지로만 확대되었다.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는 무덤을 견고하게 하고, 도굴을 방지하며, 습기를 막는 등의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동물이 곽실椁室을 파괴하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었다.
關鍵詞: 兩周時期、積石積炭墓、積石墓、積炭墓、晉侯墓地
키워드: 양주 시기, 적석적탄묘, 적석묘, 적탄묘, 진후묘지
목차
1. 적탄묘積炭墓
2. 적석묘積石墓
3.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積石積炭墓作爲一種重要的墓葬結構, 多見于兩周時期的高等級墓葬。近年來, 隨着北趙晉侯墓地、羊舌晉侯墓地等一批新考古材料的發表, 使得對積石積炭墓産生與發展的硏究具有了基礎。本文試從考古材料入手, 對兩周時期的積石積炭墓進行硏究, 以求理清其發展規律, 並對其功用以及在禮制方面的體現進行必要的探討。由于春秋與戰國界線的劃定歷來是史學界聚訟不休的問題, 爲便于硏究, 文中采用公元前453年之說, 涉及包括燕、中山、秦晉、兩周、齊魯及荊楚等不同地域。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는 중요한 무덤 구조 중 하나로, 양주兩周 시기 높은 등급의 무덤에서 많이 보인다. 최근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양설진후묘지羊舌晉侯墓地 등 새로운 고고학 자료가 발표되면서,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발생과 발전에 대한 연구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글은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양주兩周 시기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를 연구하여 그 발전 규칙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또한 그 기능과 예법禮制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온 문제이다. 그래서 연구의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기원전 453년을 기준으로 삼았다. 연구 대상 지역은 연燕, 중산中山, 진秦·진晉, 양주兩周, 제齊·노魯, 형초荊楚 등 여러 지역을 포함한다.
自積石積炭墓在考古工作中被發現以來, 較早對這一類墓葬發表看法的是王伯洪先生。王氏在《輝縣發掘報告》中認爲, 琉璃閣區140號戰國積石積炭墓符合《呂氏春秋》〈節喪〉中“積石積炭, 以環其外”的說法, 也同意高注“石以其堅, 炭以御濕”用途的解說[1]。在王氏認識的基礎上, 郭寶鈞先生指出:“積石子不止取其堅, 兼取其潰, 使盜者不易洞入。”[2]趙化成先生在對周代棺椁制度進行系統硏究的基礎上, 提出太原金勝村M251的積石積炭有可能發揮了外椁的作用。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가 고고학 조사를 통해 발견된 이후, 이 종류의 무덤에 대해 비교적 일찍 의견을 낸 학자는 왕백홍王伯洪 선생이다. 그는 《휘현발굴보고輝縣發掘報告》에서 유리가琉璃閣 140호 전국戰國 시기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가 《여씨춘추呂氏春秋》 〈절상節喪〉 편의 “돌과 숯을 쌓아 그 바깥을 둘렀다”는 기록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또한 고씨高氏의 주석인 “돌은 단단하게 하고 숯은 습기를 막는다”는 기능에 대한 설명에도 동의했다.[1] 왕백홍王伯洪의 견해를 바탕으로 곽보균郭寶鈞 선생은 “돌을 쌓는 것은 단단하게 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도굴 시) 쉽게 무너지게 하여 도굴꾼이 굴을 파고 들어오기 어렵게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2] 조화성趙化成 선생은 주대周代의 관곽棺椁 제도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기초 위에서, 태원太原 금승촌金勝村 M251 무덤의 돌과 숯 쌓기가 바깥 곽外椁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進而認爲“黃河流域的列國墓葬, 有一點與楚墓不同, 即前面已經提到的這一時期的大中型墓流行積石積炭, 大凡有積石積炭的大墓, 一般較少使用重椁之制, 這種積石的設置似有替代外層木椁的趨勢”[3]。黃曉芬博士在對先秦墓葬進行梳理的基礎上, 認爲積石積炭墓的出現與春秋戰國時代椁墓的形制趨于復雜化有關。並認爲, 積石積炭墓的流行與注重椁墓的密封、隔絕、防腐性有着很大的關系, 這種墓葬形制“徹底貫徹實施了封閉型椁墓原理, 出現不久就很快在各地的大型墓中推廣開來”[4]。宋玲平博士在其專著《晉系墓葬制度硏究》中, 對積石積炭墓進行了簡要的探討。宋氏認爲古今學者對積石積炭的用途認識正確, 並認爲積炭現象首先發現于西周中期, 如豐西張家坡的井叔墓地和北趙晉侯墓地所見, 此後流行開來, 于秦漢時逐漸銷聲匿迹[5]。
나아가 그는 “황하黃河 유역 여러 나라의 무덤은 초楚나라 무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이 시기의 대·중형 무덤에서 적석적탄積石積炭이 유행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적석적탄積石積炭이 있는 큰 무덤은 여러 겹의 곽椁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는 돌을 쌓는 방식이 바깥쪽 목곽木椁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3] 황효분黃曉芬 박사는 선진先秦 시기 무덤을 정리하면서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등장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곽묘椁墓의 형태가 복잡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유행은 곽묘椁墓의 밀봉, 차단, 부패 방지 기능을 중요하게 여긴 것과 큰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 무덤 형태는 “밀폐형 곽묘椁墓의 원리를 철저히 구현했으며, 등장한 지 얼마 안 되어 여러 지역의 대형 무덤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평가했다.[4] 송령평宋玲平 박사는 자신의 책 《진계묘장제도연구晉系墓葬制度硏究》에서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를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는 옛날과 오늘날 학자들이 적석적탄積石積炭의 용도를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보았다. 또한 숯을 쌓는 현상은 서주西周 중기에 처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풍서豐西 장가파張家坡의 정숙묘지井叔墓地와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이후 유행하다가 진한秦漢 시기에 점차 사라졌다고 했다.[5]
以往的這些硏究對筆者綜合認識積石積炭墓有着重要啓示, 但尚嫌籠統。隨着考古材料的不斷豐富, 有必要對積石積炭墓進行更爲系統與深入的硏究。在筆者看來, “積石積炭”是一泛稱(下文屬此意者, 加引號以別于真正的積石積炭), 細別之應有三種類型, 分別爲:積炭墓、積石墓和積石積炭墓。具體而言, 這三種類型可以作如下界定:
기존의 연구들은 필자가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지만, 다소 막연한 점이 있다. 고고학 자료가 계속 풍부해짐에 따라,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에 대해 더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가 보기에 ‘적석적탄積石積炭’은 포괄적인 명칭이다. (이후 글에서 이런 의미로 쓰일 때는 따옴표를 붙여 진짜 적석적탄과 구분하겠다.) 세밀하게 나누면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바로 적탄묘積炭墓, 적석묘積石墓, 그리고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이다. 구체적으로 이 세 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積炭墓:是指有意在木椁外放置木炭, 如年代屬于西周晚期的北趙晉侯墓地M2[6]。
적탄묘積炭墓: 의도적으로 목곽木椁 바깥에 숯을 놓은 무덤이다. 서주西周 후기에 해당하는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2호분[6]이 그 예다.
積石墓:是指有意在木椁外放置石塊, 不置木炭, 如戰國中期的臨淄東夏莊M3[7]。在此需要說明的是, 墓中置石在先秦時期比較常見, 尤其是在北方地區, 如石棺墓、石椁墓等。本文將不予涉及這類墓葬, 所討論者, 限于兩周時期在木質椁室外置石塊的墓葬。
적석묘積石墓: 의도적으로 목곽木椁 바깥에 돌을 놓고 숯은 놓지 않은 무덤이다. 전국戰國 중기의 임치臨淄 동하장東夏莊 M3호분[7]이 그 예다. 여기서 설명할 점은, 무덤에 돌을 놓는 것은 선진先秦 시기에 흔하며, 특히 북방 지역의 석관묘石棺墓, 석곽묘石椁墓 등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종류의 무덤은 다루지 않을 것이다. 논의 대상은 양주兩周 시기에 나무로 된 곽실椁室 바깥에 돌을 쌓은 무덤으로 한정한다.
積石積炭墓:是指有意在木椁外既置石塊, 又置木炭, 典型的積石積炭墓如時代處于春秋戰國之交的太原金勝村M251[8]。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의도적으로 목곽木椁 바깥에 돌과 숯을 모두 놓은 무덤이다.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시기 전환기에 만들어진 태원太原 금승촌金勝村 M251호분[8]이 대표적인 예다.
由目前的考古材料可以看出, “積石積炭”墓從産生到發展存在着一定的規律。以下分別對積炭墓、積石墓、積石積炭墓進行討論。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적석적탄積石積炭’ 무덤은 발생부터 발전까지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 적탄묘積炭墓, 적석묘積石墓,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에 대해 각각 논의하겠다.
1. 적탄묘積炭墓
依據墓中積炭的位置及使用方式, 可將其分爲三類:
무덤 안에서 숯이 놓인 위치와 사용 방식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A類積炭僅見于外椁之下。現知有張家坡M1709、北趙晉侯墓地M7[10]。
A유형: 숯이 바깥 곽外椁 아래에서만 발견된다. 현재 알려진 예로는 장가파張家坡 M170호분[9](그림 1)과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7호분[10]이 있다.

그림 1. A유형 적탄묘 개념도 (《장가파서주묘지張家坡西周墓地》를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椁室(곽실), 积炭(적탄), 北(북))

표 1. 적탄묘積炭墓 분포 지역 및 시대 (형태 불명확한 것은 제외)
B類積炭僅見于外椁椁蓋之上。如曲阜魯故城乙組墓M3、M52、M58[11]。
B유형: 숯이 바깥 곽外椁의 덮개 위에서만 발견된다. 곡부曲阜 노고성魯故城 을조乙組 무덤 M3, M52, M58호분[11]이 그 예다.
C類積炭見于外椁上、下及周圍, 可謂典型積炭墓。如北趙晉侯墓地M32、M2(圖二)。
C유형: 숯이 바깥 곽外椁의 위, 아래, 그리고 주변 모두에서 발견된다. 이를 전형적인 적탄묘積炭墓라고 할 수 있다.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32호분[12](필자 주: 원문에는 M32호분에 대한 각주 번호가 없으나, 참고문헌 [12]번이 관련 자료로 보임)와 M2호분(그림 2)[6]이 그 예다.

그림 2. C유형 적탄묘 개념도 (《1992년 천마-곡촌유지 묘장 발굴보고》를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M3, 盗洞(도굴 구멍), 木炭(목탄))

표 2. 적석묘積石墓 분포 지역
從目前考古發現來看(表一), A類出現較早, 時當西周中期, 張家坡M170[9]和北趙晉侯墓地M7[10]均屬此時。B類主要見于曲阜魯故城, M3、M52、M58[11], 時代處于春秋戰國之交。C類除見于北趙西周晚期的晉侯墓之外, 南方地區戰國早期的曾侯乙墓[13]亦可歸入此類。
현재까지의 고고학 발견을 보면(표 1), A유형은 비교적 일찍 나타나는데, 시기는 서주西周 중기이며 장가파張家坡 M170호분[9]과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7호분[10] 모두 이 시기에 해당한다. B유형은 주로 곡부曲阜 노고성魯故城에서 보이며, M3, M52, M58호분[11]은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시기 전환기에 만들어졌다. C유형은 북조北趙의 서주西周 후기 진후묘晉侯墓 외에도, 남방 지역의 전국戰國 초기 증후을묘曾侯乙墓[13]도 이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因有些積炭墓報告或敘述簡略籠統, 或無正式材料發表, 無法確切地將其歸入上述幾類中。如燕下都燕國貴族墓虛糧冢M8[19]、中山國靈壽城中山王族M4[20]、M5[20]、鳳翔秦公1號大墓[21]等。
일부 적탄묘積炭墓는 보고서나 설명이 간단하고 개괄적이거나, 정식 자료가 발표되지 않아 위에서 나눈 유형들로 정확하게 분류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연하도燕下都의 연燕나라 귀족 무덤인 허량총虛糧冢 M8호분[19], 중산국中山國 영수성靈壽城의 중산中山 왕족 무덤 M4호분[20]과 M5호분[20], 그리고 봉상鳳翔 진공秦公 1호 대묘[21] 등이 그렇다.
從演變規律來看, 北趙晉侯墓地M7[10]與該墓地M32[12]年代相接, 墓主分別是晉成侯夫人和晉厲侯夫人[22]。可以認爲A類積炭墓一經發生, 便很快發展爲C類。至于B類, 即曲阜魯故城幾例, 爲積炭與河蚌殼混雜, 構成獨特, 且時代較晚, 最早者被定爲春秋晚期, 當是受中原同類墓影響形成的一種地方特點。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7호분[10]과 M32호분[12](필자 주: 원문 각주 없음)은 시대가 이어진다. 무덤 주인은 각각 진성후晉成侯 부인과 진여후晉厲侯 부인이다.[22] 이를 통해 A유형 적탄묘積炭墓가 나타나자마자 곧 C유형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B유형, 즉 곡부曲阜 노고성魯故城의 몇몇 사례는 숯과 강 조개껍데기가 섞여 있어 독특한 구조를 이룬다. 시대도 비교적 늦어 가장 이른 것이 춘추春秋 후기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원中原 지역의 비슷한 무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지역적 특징으로 보인다.
2. 적석묘積石墓
以積石在墓中位置的不同, 可將積石墓分爲三類。
무덤 안에서 돌이 놓인 위치에 따라 적석묘積石墓를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A類積石見于木椁四周。如中山國靈壽城戰國早期鮮虞族墓M8004、M8006、M8502[23](필자 주: 원문은 [23]번 각주를 인용했으나, 해당 각주는 제나라 임치 지역 보고서로 내용상 오류이다. 중산국 관련 보고서인 [20]번을 참고해야 함)。
A유형: 돌이 목곽木椁 주변에서 발견된다. 중산국中山國 영수성靈壽城의 전국戰國 초기 선우족鮮虞族 무덤 M8004, M8006, M8502호분[23](필자 주: 원문은 [23]번 각주를 인용했으나, 해당 각주는 제나라 임치 지역 보고서로 내용상 오류이다. 중산국 관련 보고서인 [20]번을 참고해야 함)이 그 예다.
B類積石見于木椁下部及四周。如臨淄東夏莊戰國早期M324等(필자 주: 원문은 [24]번 각주를 인용했으나, 해당 각주는 하남 섭현 보고서로 내용상 오류이다. 임치 관련 보고서인 [7]번 또는 [23]번을 참고해야 함)。
B유형: 돌이 목곽木椁 아래와 주변에서 발견된다. 임치臨淄 동하장東夏莊의 전국戰國 초기 M3호분[24](그림 3) 등(필자 주: 원문은 [24]번 각주를 인용했으나, 해당 각주는 하남 섭현 보고서로 내용상 오류이다. 임치 관련 보고서인 [7]번 또는 [23]번을 참고해야 함)이 그 예다.

그림 3. B유형 적석묘 개념도 (《임치제묘臨淄齊墓》 제1집을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椁室(곽실), 积石(적석))
C類積石見于木椁上、下及四周。如河南葉縣舊縣戰國早期一號墓[25](필자 주: 원문은 [25]번 각주를 인용했으나, 해당 각주는 임치 5호묘 보고서로 내용상 오류이다. 섭현 1호묘 보고서인 [24]번을 참고해야 함)。
C유형: 돌이 목곽木椁 위, 아래,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된다. 하남河南 섭현葉縣 구현舊縣의 전국戰國 초기 1호묘[25](필자 주: 원문은 [25]번 각주를 인용했으나, 해당 각주는 임치 5호묘 보고서로 내용상 오류이다. 섭현 1호묘 보고서인 [24]번을 참고해야 함)가 그 예다.
從地域上來看(表二), A類積石墓主要見于中山地區; B類則主要發現于齊臨淄地區, 除臨淄東夏庄M3外, 還有M4、M5、M6, 臨淄單家庄M1、M2, 臨淄相家庄M1、M2、M4、M5、M6, 臨淄淄河店M1、M3、M8[23], 臨淄故城五號墓[25]等。此外, 洛陽西郊四號墓[26]、陝縣后川M2075[27]亦可歸入B類。C類墓主要發現于中原地區。除上述河南葉縣舊縣一號墓外, 邯鄲周窯一號墓[28]、臨淄淄河店M2的積石也可劃歸此類。
지역적으로 보면(표 2), A유형 적석묘積石墓는 주로 중산中山 지역에서 보인다. B유형은 주로 제齊나라 임치臨淄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임치臨淄 동하장東夏莊 M3호분 외에도 M4, M5, M6호분, 임치臨淄 단가장單家莊 M1, M2호분, 임치臨淄 상가장相家莊 M1, M2, M4, M5, M6호분, 임치臨淄 치하점淄河店 M1, M3, M8호분[23], 임치고성臨淄故城 5호묘[25] 등이 있다. 그 외에 낙양洛陽 서교西郊 4호묘[26], 섬현陝縣 후천后川 M2075호분[27]도 B유형에 포함시킬 수 있다. C유형 무덤은 주로 중원中原 지역에서 발견된다. 위에서 언급한 하남河南 섭현葉縣 구현舊縣 1호묘 외에 한단邯鄲 주요周窯 1호묘[28], 임치臨淄 치하점淄河店 M2호분의 돌 쌓기도 이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從以上分析可以看出, 積石墓有着較强的地域性, A類主要見于中山地區; B類集中發現在齊國; C類則主要出現在中原地區。由于年代大都屬于戰國時期, 難以從中理清其發展演變脉絡。
위 분석을 통해 적석묘積石墓는 지역적 특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유형은 주로 중산中山 지역에서 보이고, B유형은 제齊나라에 집중되어 있으며, C유형은 주로 중원中原 지역에서 나타난다. 대부분 전국戰國 시대에 만들어져서, 그 발전과 변화 과정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3.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以積石積炭在墓中位置的不同, 可將積石積炭墓分爲以下幾類。
무덤 안에서 돌과 숯이 놓인 위치에 따라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A類外椁上、下、四周積炭, 墓底平鋪積石一層, 積石上鋪木炭、木炭上爲椁底板。如北趙晉侯墓地M31[29]。
A유형: 바깥 곽外椁의 위, 아래, 주변에 숯을 쌓는다. 무덤 바닥에는 돌을 한 겹 평평하게 깔고, 그 위에 숯을 깐 뒤, 숯 위에 곽椁의 바닥판을 놓는다.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31호분[29]이 그 예다.
B類外椁上、下及四周積炭。墓底上用石塊壘砌兩或三道短墻以承椁。如北趙晉侯墓地M8(圖四)、M64[30]。
B유형: 바깥 곽外椁의 위, 아래, 주변에 숯을 쌓는다. 무덤 바닥에는 돌로 두세 줄의 낮은 담을 쌓아 곽椁을 받친다.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8호분(그림 4), M64호분[30]이 그 예다.

그림 4. B유형 적석적탄묘 개념도 (《천마-곡촌 북조진후묘지 제2차 발굴》을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椁室(곽실), 木炭(목탄), 石梁(석량))
C類外椁上、下及四周積炭, 墓底先平鋪一層石塊, 其上再砌成三道石梁以承椁。如北趙晉侯墓地M63[31]。
C유형: 바깥 곽外椁의 위, 아래, 주변에 숯을 쌓는다. 무덤 바닥에는 먼저 돌을 한 겹 평평하게 깔고, 그 위에 다시 세 줄의 돌담石梁을 쌓아 곽椁을 받친다.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63호분[31]이 그 예다.
D類外椁上、下及四周積炭。墓底用石塊壘砌三道短墻以承椁, 椁外四角用石塊砌成8垛石墩。但墓底上未全部鋪石。如北趙晉侯墓地M93(圖五)、羊舌晉侯墓地M1、M2[32]。
D유형: 바깥 곽外椁의 위, 아래, 주변에 숯을 쌓는다. 무덤 바닥에는 돌로 세 줄의 낮은 담을 쌓아 곽椁을 받치고, 곽椁 바깥 네 모퉁이에는 돌을 쌓아 8개의 돌무더기石墩를 만든다. 하지만 무덤 바닥 전체에 돌을 깔지는 않았다.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93호분(그림 5), 양설진후묘지羊舌晉侯墓地 M1, M2호분[32]이 그 예다.

그림 5. D유형 적석적탄묘 개념도 (《천마-곡촌유지 북조진후묘지 제5차 발굴》을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石墩(석돈), 石梁(석량), 墓底积炭(묘저 적탄))
E類積石積炭見于外椁上、下及四周, 石内炭外, 屬典型的積石積炭墓。如春秋戰國之際的太原金勝村M2518。
E유형: 돌과 숯이 바깥 곽外椁의 위, 아래, 주변에서 발견된다. 안쪽에 돌, 바깥쪽에 숯을 쌓는 방식으로, 전형적인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에 해당한다.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시기 전환기에 만들어진 태원太原 금승촌金勝村 M251호분[8](그림 6)이 그 예다.

그림 6. E유형 적석적탄묘 개념도 (《태원진국조경묘太原晉國趙卿墓》를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椁室(곽실), 积石积炭(적석적탄))
F類積石積炭見于外椁之下與四周。如戰國早期的長治分水嶺M126[34]。
F유형: 돌과 숯이 바깥 곽外椁 아래와 주변에서 발견된다. 전국戰國 초기 장치長治 분수령分水嶺 M126호분[34]이 그 예다.
G類積石積炭見于外椁四周。如戰國早期的新絳柳泉M301、M302[35]。
G유형: 돌과 숯이 바깥 곽外椁 주변에서 발견된다. 전국戰國 초기 신강新絳 유천柳泉 M301, M302호분[35]이 그 예다.
H類積石積炭見于外椁上、下。如陝縣后川戰國早期的M2040[27]。
H유형: 돌과 숯이 바깥 곽外椁 위와 아래에서 발견된다. 섬현陝縣 후천后川의 전국戰國 초기 M2040호분[27]이 그 예다.
從分布地域上看(表三), A B C D四類目前僅發現于晉南地區的兩處晉侯墓地。E類除太原金勝村M251之外, 還有山彪鎭1號墓[36]、長治分水嶺12號墓、14號墓[37]、中山王墓(椁下爲自然石)[38]、中山成公M6、洛陽西郊M1[39]等; F類的發現還有琉璃閣140號墓(圖七)、長治分水嶺M25[40]等; G類與H類的發現見于上述舉例。由以上發現可知, 積石積炭的使用區域主要集中在三晉、兩周地區。
분포 지역으로 보면(표 3), A, B, C, D 네 유형은 현재 진晉나라 남쪽 지역의 두 진후묘지晉侯墓地에서만 발견된다. E유형은 태원太原 금승촌金勝村 M251호분 외에도 산표진山彪鎭 1호묘[36], 장치長治 분수령分水嶺 12호묘와 14호묘[37], 중산왕中山王 무덤(곽 아래는 자연석)[38], 중산성공中山成公 M6호분[20], 낙양洛陽 서교西郊 M1호분[39] 등이 있다. F유형은 유리가琉璃閣 140호묘(그림 7)[1], 장치長治 분수령分水嶺 M25호분[40] 등이 발견되었다. G유형과 H유형은 위에서 든 예와 같다. 이상의 발견을 통해, 적석적탄積石積炭은 주로 삼진三晉과 양주兩周 지역에 집중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7. F유형 적석적탄묘 개념도 (《휘현발굴보고輝縣發掘報告》를 바탕으로 수정)
(이미지 내 번역: 积石积炭(적석적탄))

표 3.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분포 지역
從演變規律來看, A、B、C、D四類見于北趙晉侯墓地M31[29]、M8[30]、M64[30]、M63[31]、M93[32]和羊舌晉侯墓地M1、M2[33]。北趙晉侯墓地幾座雖都屬西周晚期, 但墓主分屬于早晚三代晉侯及夫人, 即晉獻侯夫婦(M8和M31)、穆侯夫婦(M64和M63)和文侯夫婦(M93, 或以爲是殤叔)[22]。羊舌晉侯墓地M1、M2墓主是誰, 意見不一[32], 但晚于北趙晉侯墓地最晚的M93, 屬春秋早期的看法, 學者們沒有分歧。可見A、B、C、D四類基本是由早到晚, 發展脉絡比較清晰。這一演變脉絡主要反映在積石方面, 因爲積炭的情况相同, 都是見于椁外上、下與四周, 唯積石狀況有別, 即由最初的僅在墓地鋪一層石塊或砌二、三道石梁, 到二者兼具, 再到于椁周增加8個石墩。至于典型的積石積炭墓一椁外上、下與四周都有積石積炭者, 即E類, 現知最早屬春秋戰國之際, 於戰國時期流行, 同時還因地域之不同衍生出F、G、H三类。
변화 과정을 보면, A, B, C, D 네 유형은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의 M31[29], M8[30], M64[30], M63[31], M93호분[32]과 양설진후묘지羊舌晉侯墓地의 M1, M2호분[33]에서 보인다.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의 무덤들은 모두 서주西周 후기에 속하지만, 무덤 주인은 시기적으로 다른 3대에 걸친 진후晉侯와 그 부인들이다. 즉, 진헌후晉獻侯 부부(M8, M31호분), 목후穆侯 부부(M64, M63호분), 그리고 문후文侯 부부(M93호분, 혹은 상숙殤叔이라는 의견도 있음)이다.[22] 양설진후묘지羊舌晉侯墓地 M1, M2호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32],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의 가장 늦은 무덤인 M93호분보다는 늦은 춘추春秋 초기라는 점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이를 통해 A, B, C, D 네 유형은 기본적으로 이른 시기에서 늦은 시기로 발전했으며, 그 과정이 비교적 명확함을 알 수 있다. 이 변화 과정은 주로 돌을 쌓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숯을 쌓는 방식은 모두 곽椁 바깥의 위, 아래, 주변에 쌓는 것으로 동일하지만, 돌의 상태는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덤 바닥에 돌 한 층을 깔거나 두세 줄의 돌담을 쌓는 방식에서 시작하여,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고, 나중에는 곽椁 주변에 8개의 돌무더기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전형적인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즉 곽椁 바깥의 위, 아래, 주변에 모두 돌과 숯을 쌓은 E유형은 현재 알려진 바로는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시기 전환기에 처음 나타나 전국戰國 시기에 유행했다. 동시에 지역적 차이에 따라 F, G, H 세 가지 유형이 파생되었다.
以上是積炭墓、積石墓和積石積炭墓各自的基本情况, 實際上三者之間是互有關聯的, 也與國別(或地域)有關。
이상으로 적탄묘積炭墓, 적석묘積石墓,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각각의 기본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관련이 있으며, 나라(또는 지역)와도 관계가 있다.

표 4. 각 유형의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출현 시기
據已有發現(表四), 積炭墓出現的時間最早, 其由最初的僅在墓底鋪墊一層(A類), 迅速發展爲椁外上、下和四周均有(C類)。這一過程在西周中晚期之際完成。稍後, 即西周晚期偏晚及春秋早期又在C類積炭的基礎上出現了A、B、C、D類積石積炭墓, 即除在椁外上、下和四周積炭外, 又在墓底及椁四周不同程度積石。到春秋戰國之際才出現了典型的積石積炭墓(E類)。
기존 발견에 따르면(표 4), 적탄묘積炭墓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 처음에는 무덤 바닥에 한 층만 까는 방식(A유형)에서 시작하여, 곽椁 바깥의 위, 아래, 주변에 모두 숯을 까는 방식(C유형)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이 과정은 서주西周 중기에서 후기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 후, 서주西周 후기 말에서 춘추春秋 초기에는 C유형 적탄묘積炭墓를 기반으로 A, B, C, D유형의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가 나타났다. 즉, 곽椁 바깥의 위, 아래, 주변에 숯을 쌓는 것 외에, 무덤 바닥과 곽椁 주변에도 다양한 정도로 돌을 쌓기 시작했다.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시기 전환기가 되어서야 전형적인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인 E유형이 등장했다.
單純的積石墓出現較晚, 最早不過春秋晚期。從其分布地域來看, 主要集中在兩個地區, 一是東方的齊, 二是北方的中山。其構建方法也自具特色, 多與上述積石積炭墓的積石構建不同。其出現的原因有兩種可能, 一是受積石積炭墓的影響; 一是受北方族系葬俗的影響, 而以後一種可能更大。鮮虞中山本就是北方族類, 屬狄之一支, 考古發現又在北方地區。再說晉國本是與戎狄爲鄰的國家, 《左傳》〈定公四年〉[43]載:“分唐叔以大路、密須之鼓, 闕鞏沽洗, 懷姓九宗, 職官五正。命以唐誥, 而封于夏墟, 啓以夏政, 疆以戎索”; 《左傳》〈莊公二十八年〉[44]曰:“狄之廣莫, 于晉爲都。晉之啓土, 不亦宜乎?”又《左傳》〈昭公十五年〉[44]云“晉居深山, 戎狄之與鄰, 而遠於王室, 王靈不及, 拜戎不暇。”依照陳芳妹[45]、商彤流[46]、張童心[47]、雍穎[48]對晉侯墓地材料的硏究及林沄[49]對北方地區少數民族族屬的硏究, 西周時期的晉國與戎狄之間的關系密切, 交流頻繁。積石積炭墓中的積石最早在西周晚期晉墓出現, 就很容易想到或與北方戎狄石椁(或石棺)墓有關, 或許就是“戎索”之表現。
순수한 적석묘積石墓는 비교적 늦게 나타나며, 가장 빠른 것도 춘추春秋 후기이다. 분포 지역을 보면 주로 두 곳에 집중되는데, 하나는 동쪽의 제齊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중산中山이다. 만드는 방법도 독특한 특징이 있어, 위에서 언급한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돌 쌓기 방식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등장 원인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방 민족의 장례 풍습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 선우鮮虞 중산中山은 본래 북방 민족으로, 적인狄人의 한 갈래이며, 고고학적 발견도 북방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진晉나라는 본래 융적戎狄과 이웃한 나라였다. 《좌전左傳》〈정공定公 4년〉[43]에는 “당숙唐叔에게 대로大路와 밀수密須의 북을 나눠주고, 궐공고세闕鞏沽洗와 회성懷姓 9종, 직관職官 5정을 주었다. 당고唐誥로 명하고 하허夏墟에 봉했으며, 하夏나라의 정치를 열고 융적戎狄의 법도로 경계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전左傳》〈장공莊公 28년〉[44]에는 “적狄의 광활한 땅은 진晉에게는 도읍과 같으니, 진晉이 영토를 넓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했고, 《좌전左傳》〈소공昭公 15년〉[44]에는 “진晉은 깊은 산에 위치하여 융적戎狄과 이웃하고 왕실과는 멀어, 왕의 위엄이 미치지 못하고 융戎을 섬기기에도 바빴다”고 한다. 진방매陳芳妹[45], 상동류商彤流[46], 장동심張童心[47], 옹영雍穎[48]의 진후묘지晉侯墓地 자료 연구와 임운林沄[49]의 북방 지역 소수민족 연구에 따르면, 서주西周 시기 진晉나라와 융적戎狄은 관계가 매우 가깝고 교류도 잦았다.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적석積石’이 서주西周 후기 진晉나라 무덤에서 처음 나타난 것을 보면, 북방 융적戎狄의 석곽묘石槨墓(또는 석관묘石棺墓)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이 아마도 ‘융삭(戎索, 융의 법도)’의 표현일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齊地積石墓的出現原因雖不像中山那樣易于理解, 但春秋中期以來, 齊與北方接觸也較多, 不能排除其影響。
제齊나라 땅에서 적석묘積石墓가 나타난 원인은 중산中山처럼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춘추春秋 중기 이후 제齊나라도 북방과 접촉이 많았으므로 그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這里需要特別說明的是, 上述最早的積炭墓(A類)—西周中期的張家坡M170[9]、北趙晉侯墓地M7[10], 還不是最早的積炭墓, 在山東青州蘇埠屯M1的墓底也鋪有一層木炭, 同屬A類[16]。時屬商末或商周之際, 年代更早。那麽可否認爲青州蘇埠屯M1爲張家坡M170與北趙晉侯墓地M7積炭作風之濫觴? 從年代、地域和族屬來看, 這個假設若要成立又存在諸多問題。青州蘇埠屯M1的年代距西周中期尚有一段時間, 在此期間的大墓發掘不少, 未發現有積炭者。如鹿邑太清宮長子口墓[50]、浚縣辛村西周墓地[51]、琉璃河西周墓地[52]、洛陽北窯西周墓地[53]、北趙晉侯墓地M114組、M9組[54]等, 均未有積炭現象發現。青州位處山東東部, 西距晉陝尚遠, 其間所見西周中期以前同等級別的大墓也未發現積炭。在族屬上, 蘇埠屯M1應爲商人系統, 張家坡與晉侯墓地爲周人系統。文獻所見周人葬禮沿用商人者, 惟《禮記》〈檀弓上〉[55]云:“周人以殷人之棺椁葬長殤, 以夏后氏之甓周葬中殤、下殤, 以有虞氏之瓦棺葬無服之殤。”
여기서 특별히 설명할 점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가장 이른 시기의 적탄묘積炭墓(A유형), 즉 서주西周 중기의 장가파張家坡 M170호분[9]과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7호분[10]은 사실 가장 최초의 적탄묘積炭墓가 아니다. 산동山東 청주青州 소부둔蘇埠屯 M1호분 바닥에도 숯이 한 겹 깔려 있어 같은 A유형에 속하는데[16], 시기는 상商나라 말기 또는 상주商周 교체기로 더 이르다. 그렇다면 청주青州 소부둔蘇埠屯 M1호분을 장가파張家坡 M170호분과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7호분의 숯 쌓기 방식의 시초라고 볼 수 있을까? 시대, 지역, 민족적 계통을 볼 때 이 가설이 성립하려면 여러 문제가 있다. 청주青州 소부둔蘇埠屯 M1호분은 서주西周 중기와 시간 차이가 꽤 있는데, 그 사이 기간에 발굴된 많은 대형 무덤에서는 숯이 발견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녹읍鹿邑 태청궁太清宮 장자구묘長子口墓[50], 준현浚縣 신촌辛村 서주묘지西周墓地[51], 유리하琉璃河 서주묘지西周墓地[52], 낙양洛陽 북요北窯 서주묘지西周墓地[53],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114조와 M9조[54] 등에서는 모두 숯을 쌓은 현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청주青州는 산동山東 동부에 위치해 진晉·섬陝 지역과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서 발견된 서주西周 중기 이전의 비슷한 등급의 대형 무덤에서도 숯은 발견되지 않았다. 민족적 계통으로 보면, 소부둔蘇埠屯 M1호분은 상商나라 계통이고, 장가파張家坡와 진후묘지晉侯墓地는 주周나라 계통이다. 문헌에서 주周나라 사람이 상商나라의 장례법을 따른 예는 오직 《예기禮記》〈단궁檀弓 상上〉[55]에 나오는 “주周나라 사람은 은殷나라 사람의 관곽棺椁으로 장상長殤을 장사 지내고, 하후씨夏后氏의 벽돌 두른 방식으로 중상中殤과 하상下殤을 장사 지냈으며, 유우씨有虞氏의 와관瓦棺으로 무복지상無服之殤을 장사 지냈다”는 기록뿐이다.
且不說此記載與積炭關系並不明確, 即使從考古材料上來看, 商人的墓葬中亦不存在普遍的積炭情况。目前發現的商人墓葬, 除1991年安陽后崗M96一例, 發掘者認爲是有意焚燒椁室内部而致積炭(筆者按:該墓非積炭墓)外, 也無積炭墓發現[56]。因此, 蘇埠屯M1的積炭實爲特例, 其出現的原因暫時難以究明。它與張家坡M170號墓以及北趙晉侯墓地M7之間在積炭方面是否有傳承關系, 還難下結論。
이 기록이 숯 쌓기와 명확한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고고학 자료를 보더라도 상商나라 사람의 무덤에서 숯을 쌓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상商나라 무덤 중, 1991년 안양安陽 후강后崗 M96호분 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적탄묘積炭墓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무덤의 경우 발굴자는 곽실椁室 내부를 의도적으로 불태워 숯이 생겼다고 보았지만 (필자 주: 이 무덤은 적탄묘積炭墓가 아님), 다른 예는 없다.[56] 따라서 소부둔蘇埠屯 M1호분의 숯 쌓기는 매우 특별한 사례이며, 그 원인은 현재로서는 밝히기 어렵다. 이 무덤이 장가파張家坡 M170호분 및 북조진후묘지北趙晉侯墓地 M7호분과 숯 쌓기 방식에서 계승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결론 내리기 힘들다.
關於積石積炭墓墓主的身份, 尚不可籠統而言。單純的積石墓, 使用者等級參差不齊, 目的是實用, 似與身份等級關系不大, 這也可從一個方面說明與北方族類葬具用石有關, 因爲北方所見石葬具之墓有大有小, 沒有嚴格的等級之分。而積炭和積石積炭墓不然, 他們僅限于高級貴族的墓葬。西周和春秋早期, 只見于諸侯級墓, 再後擴大到僅次于諸侯一級的貴族, 如燕下都虛糧冢M8[19]、中山王族M46及山彪鎭1號墓[36]等。尤其是積炭, 在東周時期更被不少邊遠國家的高級貴族使用, 如西方的秦公1號大墓[21]、南方的曾侯乙墓[13]和印山越王墓[18]等。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 주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포괄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순수한 적석묘積石墓의 경우, 사용자의 등급이 다양하고 실용적인 목적이 강해 신분 등급과는 큰 관련이 없는 듯하다. 이는 북방 민족이 장례 도구로 돌을 사용한 것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북방에서 발견되는 돌을 사용한 무덤은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어 엄격한 등급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탄묘積炭墓와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는 다르다. 이 무덤들은 고급 귀족의 무덤에만 한정되었다. 서주西周와 춘추春秋 초기에는 오직 제후諸侯급 무덤에서만 보이다가, 그 이후에 제후 바로 아래 등급의 귀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연하도燕下都 허량총虛糧冢 M8호분[19], 중산中山 왕족 M46호분(필자 주: 원문은 M46호분으로 표기했으나 M4호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20] 및 산표진山彪鎭 1호묘[36] 등이 그 예다. 특히 숯 쌓기는 동주東周 시기에 변방 국가의 고급 귀족들이 많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서쪽의 진공秦公 1호 대묘[21], 남쪽의 증후을묘曾侯乙墓[13]와 인산월왕묘印山越王墓[18] 등이 있다.
關於積石積炭墓的功用, 如前所述, 以往學者論及較多, 概言之, 有固墓、防盜、防潮與阻擋樹木之根穿入諸說[57]。然而, 積炭還有一條功用是我們不應忽略的。《周禮》〈秋官司寇〉〈赤犮氏〉[58]載:“赤犮氏掌除墻屋, 以蜃炭攻之, 以灰灑毒之, 凡隙屋, 除其狸蟲。”鄭注:“蜃, 大蛤也。”《左傳》〈成公二年〉[59]載:“宋文公卒, 始厚葬, 用蜃炭………………” 杜注:“燒蛤爲炭, 以痊壙。”孔疏引劉炫說曰:“用蜃炭者, 用蜃復用炭。”杜預認爲蜃炭爲蜃燒後之炭, 蜃炭爲一物。劉說則認爲蜃与炭爲兩物。楊伯峻先生亦認爲蜃、炭爲兩物,“蜃”即蜃燒成之灰, 即生石灰, “炭”即木炭[42]。魯國曲阜故城的幾座B類積炭墓便是蜃與炭共存。因此, 當以楊說爲是。又《呂氏春秋》〈節喪〉[41]云:“善棺椁, 所以避螻蟻蛇蟲也。”從這方面來看, 墓中積炭亦有防備動物破壞椁室的功用。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의 기능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기존 학자들이 많이 논의했다. 요약하면, 무덤을 단단히 하고, 도굴을 막고, 습기를 막으며, 나무뿌리가 파고드는 것을 막는다는 여러 설이 있다.[57] 하지만 숯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또 다른 기능이 있다. 《주례周禮》〈추관사구秋官司寇〉〈적발씨赤犮氏〉[58]에는 “적발씨는 담과 집을 청소하는 일을 맡아, 신탄蜃炭으로 공격하고 재를 뿌려 독을 죽이며, 틈이 있는 집의 여우나 벌레를 제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현鄭玄은 “신蜃은 큰 조개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좌전左傳》〈성공成公 2년〉[59]에는 “송문공宋文公이 죽자 처음으로 후하게 장사 지내며 신탄蜃炭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예杜預는 “조개를 태워 숯을 만들어 무덤 구덩이를 채웠다”고 주석했다. 공영달孔穎達은 유현劉炫의 말을 인용해 “신탄蜃炭을 썼다는 것은 신蜃을 쓰고 또 숯을 썼다는 것”이라고 했다. 두예杜預는 신탄蜃炭을 조개를 태운 재, 즉 하나의 물질로 보았지만, 유현劉炫은 신蜃과 탄炭을 두 가지 물질로 보았다. 양백준楊伯峻 선생 역시 신蜃과 탄炭을 두 가지 물질로 보았는데, ‘신蜃’은 조개를 태운 재, 즉 생석회이고 ‘탄炭’은 목탄이라고 했다.[42] 노魯나라 곡부고성曲阜故城의 몇몇 B유형 적탄묘積炭墓는 바로 조개 재와 숯이 함께 발견된다. 따라서 양백준楊伯峻의 설이 옳다고 봐야 한다. 또한 《여씨춘추呂氏春秋》〈절상節喪〉[41]에는 “관곽棺椁을 잘 만드는 것은 땅강아지, 개미, 뱀, 벌레를 피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무덤에 숯을 쌓는 것은 동물이 곽실椁室을 파괴하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었다.
積石積炭墓從其發生到消失, 大約經歷了近千年, 分布範圍甚廣, 其功用也許因時因地而異。如先秦時期有“葬必于高陵之上, 以避狐狸之患, 水泉之濕”, 即所謂葬不及泉, 墓底部不能太過潮濕。而現知最早的積炭墓都是僅見于墓底, 後很快發展爲椁外全部, 可能防潮御濕就是主要目的。在南方地區, 積炭往往與白(或青)膏泥同用, 顯然也是爲了起到防潮、防蟲的作用。戰國中晚期, 積石還常與積沙并用, 應該與防盜有關, 因爲東周時期盜墓之風盛行。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는 나타나서 사라지기까지 약 천 년의 세월을 거쳤고, 분포 범위도 매우 넓어서 그 기능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랐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진先秦 시기에는 “반드시 높은 언덕 위에 장사 지내 여우의 해와 지하수의 습기를 피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는 이른바 ‘장사는 샘에 미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무덤 바닥이 너무 축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현재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적탄묘積炭墓들은 모두 무덤 바닥에서만 발견되다가, 곧 곽椁 바깥 전체로 발전했는데, 아마도 습기를 막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을 것이다. 남방 지역에서는 숯을 종종 백고니白膏泥나 청고니青膏泥와 함께 사용했는데, 이 또한 습기와 벌레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전국戰國 중·후기에는 돌을 모래와 함께 쌓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도굴 방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주東周 시기에는 도굴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積石積炭墓存在的基礎是注重密封、隔絕的封閉形式, 隨着洞室墓開始流行, 積石積炭墓便失去了存在的基礎, 逐漸走向衰亡[59]。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가 존재할 수 있었던 기반은 밀봉과 차단을 중시하는 폐쇄적인 무덤 형태였다. 동실묘洞室墓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는 그 존재 기반을 잃고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59]
當然, 積炭或積石積炭墓自西周出現以來, 並非所有的高級貴族墓都使用, 有相當多的同級別墓葬則不使用“積石積炭”, 是何原因, 還需繼續探討。
물론, 적탄묘積炭墓나 적석적탄묘積石積炭墓가 서주西周 시대에 나타난 이후, 모든 고급 귀족 무덤이 이 방식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같은 등급 무덤들은 ‘적석적탄積石積炭’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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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필자 주: 원문 [13], [14], [15] 등 번호는 본문과 참고문헌 목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
[16] (필자 주: 청주 소부둔 M1호분 관련 원문헌 정보 없음)
[17] (필자 주: 참고문헌 목록에 번호 없음.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13]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
[18] (필자 주: 참고문헌 목록에 번호 없음.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14]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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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河南省文物硏究所等:《河南葉縣舊縣一號墓的淸理》,《華夏考古》1989年第3期。
[25] 山東省文物考古硏究所:《齊故城五號東周墓及大型殉馬坑的發掘》,《文物》1984年第9期。
[26] 洛陽市文物工作隊:《洛陽西郊四號墓發掘簡報》,《文物資料叢刊》9, 文物出版社1985年。
[27]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陝縣東周秦漢墓》, 科學出版社, 1994年。
[28] 河北省文物管理處等:《河北邯鄲趙王陵》,《考古》1982年第6期。
[29] 北京大學考古學系、山西省考古硏究所:《天馬一曲村北趙晉侯墓地第三次發掘》,《文物》1994年第1期。
[30] 北京大學考古學系、山西省考古硏究所:《天馬一曲村北趙晉侯墓地第二次發掘》,《文物》1994年第1期。
[31] 山西省考古硏究所、北京大學考古學系:《天馬一曲村北趙晉侯墓地第四次發掘》,《文物》1994年第8期。
[32] 關于該墓墓主人身份問題, 學界有殤叔與文侯兩種意見。吉琨璋:《曲沃羊舌墓地1號墓墓主初論》,《中國文物報》2006年9月29日。馬冰:《也談羊舌墓地M1和北趙晉侯墓地M93的墓主》,《中國文物報》2007年3月20日。孫慶偉:《試論曲沃羊舌墓地的歸屬問題》, 北京大學震旦古代文明硏究中心:《古代文明硏究通訊》總第33期。若認爲該墓墓主人爲殤叔, 則M93的年代當爲西周晚期, 若以文侯爲該墓墓主人, 則其年代應爲春秋早期, 筆者從文侯說。
[33] 吉琨璋等:《山西曲沃羊舌村發掘又一處晉侯墓地》,《中國文物報》2006年9月29日第二版。
[34] 邊成修:《山西長治分水嶺126號墓發掘簡報》,《文物》1972年第4期。簡報語焉不詳, 石与炭內外不明。
[35] 山西省考古硏究所:《晉都新田》, 山西人民出版社, 1996年。報告語焉不詳, 依圖上看椁下也有積石積炭, 石与炭內外不明。
[36] 山西省文物管理委員會:《山西長治市分水嶺古墓的淸理》,《考古學報》1957年第1期。
[37] 山西省文物管理委員會、山西省考古硏究所:《山西長治分水嶺戰國墓第二次發掘》,《考古》1964年第3期。
[38] 河北省文物硏究所:《 墓一中山國國王之墓》, 文物出版社。此墓經火燒, 木炭不存, 原應有。
[39]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洛陽西郊一號戰國墓發掘記》,《考古》1959年第12期。
[40] 洛陽唐宮西路C1M7983、C1M7984發掘報告稱之爲積石積炭, 然其所謂積炭非木炭, 而是草木灰, 不在本文所定義的積炭之列。洛陽市文物工作隊:《洛陽市唐宮西路東周墓發掘報告》,《文物》2003年第12期。
[41] 陳奇猷:《呂氏春秋新校釋》, 上海古籍出版社, 2002年。
[42] 楊伯峻:《春秋左傳注》(修訂本), 中華書局, 1990年。
[43] 《十三經注疏》〈春秋左傳正義〉卷第五四, 中華書局, 1979年。
[44] 《十三經注疏》〈春秋左傳正義〉卷第一〇, 中華書局, 1979年。
[45] 陳芳妹:《晉侯墓地靑銅器所見性別硏究的新線索》, 上海博物館編《晉侯墓地出土靑銅器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上海書畫出版社, 2002年。
[46] 商彤流:《從晉侯墓地M113出土的雙耳罐看晉文化與羌戎的關系》, 上海博物館編《晉侯墓地出土靑銅器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47] 張童心:《晉與戎狄——由M113出土的靑銅三足瓮所想到的》, 上海博物館編《晉侯墓地出土靑銅器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48] 雍穎:《晉侯墓地性別、地位、禮制和葬儀分析》, 收入林嘉琳、孫岩主編《性別硏究與中國考古學》, 科學出版社, 2006年。
[49] 林沄:《中國北方長城地帶游牧文化帶的形成過程》,《燕京學報》新14期, 北京大學出版社, 2003年。
[50] 河南省文物考古硏究所、周口市文化局:《鹿邑太清宮長子口墓》, 中州古籍出版社, 2000年。
[51] 郭寶鈞:《浚縣辛村》, 科學出版社, 1964年。
[52] 北京市文物硏究所:《琉璃河西周墓地》, 文物出版社, 1995年。
[53] 洛陽市文物工作隊:《洛陽北窯西周墓地》, 文物出版社, 1999年。
[54] 北京大學考古文博院、山西省考古硏究所:《天馬一曲村遺址北趙晉侯墓地第六次發掘》,《文物》2001年第8期。
[55] 《十三經注疏》〈禮記〉卷第六, 中華書局, 1979年。
[56]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安陽隊:《1991年安陽后崗殷墓的發掘》,《考古》1993年第10期。
[57] 《呂氏春秋》〈節喪〉高注“石以其堅, 炭以御濕”下畢沅曰:“積炭非但御濕, 亦使樹木之根不穿入也”。
[58] 《十三經注疏》〈周禮〉卷第七〇, 中華書局, 1979年。
[59] 西漢時期仍有, 如咸陽楊家灣4號大墓、長沙馬王堆2號墓、北京大葆台漢墓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