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힐 #한자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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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newdu.com/m/view.php?aid=75324

谁是仓颉 —— 关于汉字起源问题的讨论[上]
창힐倉頡은 누구인가 —— 한자 기원 문제에 관한 토론[상]

 

목차

文字, 人類交流的重要手段
문자, 인류 교류의 중요한 수단

倉頡, 傳說的文字發明者
창힐倉頡, 전설 속 문자의 발명가

倉頡, 古文字學家的祖師爺
창힐倉頡, 고문자학자의 시조

文字發明, 從原始文字到成熟文字
문자 발명, 원시 문자에서 성숙 문자로

漢字在世界文字中的位置
한자의 세계 문자 속 위치

漢字和「中國境內之古外族遺文」
한자와 ‘중국 경내의 옛 외래 민족이 남긴 글’

突發說和過程說
돌발설과 과정설

定義是一把刀, 歷史是一條河
정의는 칼 한 자루, 역사는 강 한 줄기

定義說批判
정의설 비판

文字跟語言是什麼關係
문자와 언어는 어떤 관계인가

文字跟符號、圖畫是什麼關係
문자와 부호, 그림은 어떤 관계인가

他山之石和此山之玉
타산지석과 차산지옥

陶符的年代
도부陶符의 연대

禮儀說和管理說
예의설과 관리설

漢字和史官
한자와 사관史官

史官是幹什麼的
사관史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나

誰來書寫
누가 글을 썼는가

 

倉頡何許人? 實在虛無縹緲. 我們只知道, 他是古人心目中最最聰明的人. 古人講倉頡, 漢代皆曰黃帝史, 魏晉卻說古帝王. 上博楚簡《容成氏》證明, 後一說法戰國就有. 古人所謂「黃帝史」, 只是強調文字的發明與史官有關. 倉頡不過是漢字發明者的代名詞.

창힐倉頡은 어떠한 사람인가? 실로 허무하고 아득하다. 우리는 단지 그가 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었음을 알 뿐이다. 고대인들이 창힐倉頡을 논할 때, 한대漢代에는 모두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라 했고 위진魏晉 시대에는 옛 제왕帝王이라고 했다. 상박초간上博楚簡 《용성씨容成氏》는 후자의 설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미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대인들이 말하던 이른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은 문자의 발명이 사관史官과 관련 있음을 강조할 뿐이었다. 창힐倉頡은 한자 발명가의 대명사에 불과하다.

這是一篇讀書筆記. 近二十年, 不知為什麼, 國際學術界對漢字起源和漢字性質的討論突然熱鬧起來. 前不久, 鄭也夫教授以新作《文明是副產品》見贈, 邀我就他的書和漢字起源問題寫點感想. 我說, 您談的問題, 我很有興趣, 但我得把有關材料找來讀一讀, 比較一下, 再發議論, 於是找了一些在我看來比較重要的書和文章, 匆匆瀏覽後, 寫了下面這些字.

이것은 한 편의 독서 필기이다. 근 20년 동안, 무슨 이유에선지 국제 학술계에서 한자 기원과 한자 성질에 대한 토론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얼마 전, 정야부鄭也夫 교수가 신작 《문명시부산품文明是副產品》를 나에게 증정하며, 그의 책과 한자 기원 문제에 대해 소감을 좀 써달라고 청했다. 나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제에 아주 흥미가 있습니다만,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어보고 비교한 후에 의견을 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비교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과 문장들을 찾아 서둘러 훑어본 후, 아래의 글을 쓰게 되었다.

李約瑟說, 中國古代有四大發明. 研究中國科技史的人說, 何止四大, 幾十種上百種都打不住[如華覺明先生]. 不過, 跟文明探源有關, 考古學家說, 文字、冶金、城市才最重要. 漢字對中華文明的塑造, 確實很重要.

이약슬李約瑟은 중국 고대에 4대 발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중국 과학기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찌 4대 발명뿐이겠는가, 수십 종에서 수백 종으로도 모자란다고 말한다[화각명華覺明 선생처럼]. 다만, 문명 탐원과 관련해서 고고학자들은 문자, 야금冶金, 도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자가 중화 문명을 만드는 데 미친 영향은 확실히 매우 중요하다.

 

文字, 人類交流的重要手段
문자, 인류 교류의 중요한 수단

動物和動物交流, 手段非常多. 鳥有鳥言, 獸有獸語, 我們聽不懂.

동물과 동물이 교류하는 수단은 매우 많다. 새에게는 새의 말이 있고 짐승에게는 짐승의 말이 있는데,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다.

它們的眼睛, 有些是千里眼, 特別尖.

그것들의 눈 중 어떤 것은 천리안이어서 특별히 예리하다.

它們的耳朵, 有些是順風耳, 特別靈.

그것들의 귀 중 어떤 것은 순풍이順風耳여서 특별히 영민하다.

它們的鼻子, 往往可以代替眼睛和耳朵, 即使黑咕隆咚, 悄無聲息, 也能嗅出一切.

그것들의 코는 종종 눈과 귀를 대신할 수 있어, 칠흑같이 어둡고 소리 한 점 없어도 모든 것을 냄새로 맡아낼 수 있다.

它們的眼神臉色和肢體語言, 也遠比人類發達.

그것들의 눈빛, 안색과 신체 언어 역시 인류보다 훨씬 발달했다.

它們還會做記號, 比如在樹上蹭蹭, 留下氣味, 拿爪子撓撓, 留幾個印兒, 或者朝它撒泡尿, 好像如今的小廣告.

그것들은 또한 기호를 남길 줄 안다. 예를 들어 나무에 몸을 비벼 냄새를 남기고, 발톱으로 긁어 자국을 몇 개 남기거나, 그곳에 소변을 보기도 하는데, 마치 오늘날의 작은 광고들 같다.

它們還會收發信號, 有些簡直是高科技[如遠紅外、超聲波、電磁波].

그것들은 신호를 주고받을 줄도 아는데, 어떤 것들은 그야말로 첨단 기술이다[가령 원적외선, 초음파, 전자기파].

這些本事, 人類比不了.

이러한 능력들은 인류가 따라갈 수 없다.

人和人交流靠什麼? 一靠聽覺信號[如語言], 二靠視覺信號[如符號、圖象和文字].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첫째는 청각 신호[가령 언어]에 의지하고, 둘째는 시각 신호[가령 부호, 도상과 문자]에 의지한다.

古代沒有電話、電報, 更沒有手機、電腦, 口說, 耳聽, 只能面對面. 遠距離交流靠什麼? 主要靠文字.

고대에는 전화, 전보가 없었고, 휴대전화, 컴퓨터는 더더욱 없었으니,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것은 오직 얼굴을 마주해야만 가능했다. 원거리 교류는 무엇에 의지했는가? 주로 문자에 의지했다.

 

倉頡, 傳說的文字發明者
창힐倉頡, 전설 속 문자의 발명가

中國古代有本書叫《世本》, 內容是講中國貴族的世系, 屬於刨根問底的書. 這書的後面有個《作篇》, 「作」的意思是發明. 中國古代有哪些發明, 這些發明的發明者是谁, 古代沒有專利局, 這是最早「註冊」的地方.

중국 고대에 《세본世本》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은 중국 귀족의 세계世系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근원을 파고드는 종류의 책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작편作篇〉이 있는데, ‘작作’의 의미는 발명이다. 중국 고대에 어떠한 발명들이 있었는지, 이 발명들의 발명가는 누구인지, 고대에는 특허국이 없었으니 이곳이 가장 먼저 ‘등록’된 곳이었다.

《作篇》佚文說, 「伶倫造律呂」、「大撓作甲子」、「容成造曆」、「隸首作數」、「史皇作圖」、「倉頡作書」. 宋衷注說, 他們都是「黃帝史」. 倉頡是傳說的文字發明者, 秦代字書《倉頡篇》就是托他的大名.

〈작편作篇〉의 일문佚文에 따르면, “영륜伶倫은 율려律呂를 만들고”, “대요大撓는 갑자甲子를 만들고”, “용성容成은 역법을 만들고”, “예수隸首는 수를 만들고”, “사황史皇은 그림을 만들고”, “창힐倉頡은 글을 만들었다”고 한다. 송충宋衷의 주석에서는 그들이 모두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라고 했다. 창힐倉頡은 전설 속 문자의 발명가이며, 진대秦代의 자서字書인 《창힐편倉頡篇》은 바로 그의 대명을 빌린 것이다.

倉頡何許人? 實在虛無縹緲. 我們只知道, 他是古人心目中最最聰明的人. 《漢書·古今人表》把人分為九等, 聖人上上, 仁人上中, 智人上下. 倉頡是智人中的頭一位.

창힐倉頡은 어떠한 사람인가? 실로 허무하고 아득하다. 우리는 단지 그가 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었음을 알 뿐이다. 《한서漢書》〈고금인표古今人表〉는 사람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성인聖人은 상상上上, 인인仁人은 상중上中, 지인智人은 상하上下이다. 창힐倉頡은 지인智人 중 첫 번째 인물이다.

古人講倉頡, 漢代皆曰黃帝史, 魏晉卻說古帝王. 上博楚簡《容成氏》證明, 後一說法戰國就有. 古人所謂「黃帝史」, 只是強調文字的發明與史官有關.

고대인들이 창힐倉頡을 논할 때, 한대漢代에는 모두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라 했고 위진魏晉 시대에는 옛 제왕帝王이라고 했다. 상박초간上博楚簡 《용성씨容成氏》는 후자의 설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미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대인들이 말하던 이른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은 문자의 발명이 사관史官과 관련 있음을 강조할 뿐이었다.

倉頡不過是漢字發明者的代名詞.

창힐倉頡은 한자 발명가의 대명사에 불과하다.

 

倉頡, 古文字學家的祖師爺
창힐倉頡, 고문자학자의 시조

中國, 三百六十行, 各行有各行的祖師爺. 祖師爺, 當然有人祭拜.

중국에는 삼백육십 가지의 직업이 있고, 각 직업마다 그들의 시조가 있다. 시조는 당연히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다.

中國各地有很多倉頡廟[或倉聖祠]、倉頡陵[或倉頡墓], 年代最早要數陝西白水縣史官鎮的倉頡廟和倉頡陵. 此廟有漢延熹五年[162年]《倉頡廟碑》, 現藏碑林博物館, 我特意看過這通碑. 《續漢書·郡國志》、《皇覽·冢墓記》說, 倉頡葬于衙縣利陽亭南. 衙縣即今白水縣. 這類古蹟, 其實是為了填補「前不見古人」的遺憾, 從「敬愛上穿鑿出來」[《紅樓夢》第五十一回賈寶玉語], 讓後人有個憑吊之處.

중국 각지에는 많은 창힐묘倉頡廟[혹은 창성사倉聖祠], 창힐릉倉頡陵[혹은 창힐묘倉頡墓]이 있는데, 연대가 가장 이른 것은 섬서陝西 백수현白水縣 사관진史官鎮의 창힐묘倉頡廟와 창힐릉倉頡陵을 꼽아야 한다. 이 사당에는 한漢 연희延熹 5년[162]의 《창힐묘비倉頡廟碑》가 있는데, 현재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는 특별히 이 비석을 본 적이 있다. 《속한서續漢書》〈군국지郡國志〉, 《황람皇覽》〈총묘기冢墓記〉에 따르면, 창힐倉頡은 아현衙縣 이양정利陽亭 남쪽에 묻혔다고 한다. 아현衙縣은 바로 지금의 백수현白水縣이다. 이런 종류의 고적은 사실 ‘옛사람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메우기 위해,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억지로 갖다 붙인 것”[《홍루몽紅樓夢》 제51회 가보옥賈寶玉의 말]으로, 후인들에게 추모할 장소를 마련해 준 것이다.

古人說「昔者蒼頡作書, 而天雨粟, 鬼夜哭」[《淮南子·本經》], 「倉頡四目」[《倉頡廟碑》《論衡·骨相》], 今人聽了, 一笑置之, 但文字發明確實是驚天地泣鬼神了不得不得了的大事.

고대인들은 “옛날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자,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울었다”[《회남자淮南子》〈본경本經〉]고 했고, “창힐倉頡은 네 개의 눈을 가졌다”[《창힐묘비倉頡廟碑》, 《논형論衡》〈골상骨相〉]고 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듣고서 한번 웃어넘길 뿐이지만, 문자의 발명은 실로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릴 만큼 대단하고 또 대단한 큰일이었다.

研究古文字, 舊稱許學, 許是許慎, 「五經無雙許叔重」. 許慎《說文解字》之前, 《史籀》、《倉頡》最有名. 古人相信, 倉頡比史籀早, 他才是發明古文字的第一人.

고문자를 연구하는 것을 예전에는 허학許學이라 불렀는데, 허許는 허신許慎으로, ‘오경五經에 견줄 이 없는 허숙중許叔重’을 말한다. 허신許慎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이전에는 《사주史籀》와 《창힐倉頡》이 가장 유명했다. 고대인들은 창힐倉頡이 사주史籀보다 빨랐으며, 그가 바로 고문자를 발명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믿었다.

當年, 王國維從日本回來, 在上海哈同花園為哈同夫婦打工, 受聘於他們辦的倉聖明智大學, 為廣倉學宭編《學術叢編》, 研究甲骨金文. 哈同夫婦崇拜的倉聖就是我們這行的祖師爺.

그 시절, 왕국유王國維가 일본에서 돌아와 상해上海의 하동화원哈同花園에서 하동哈同 부부를 위해 일했는데, 그들이 세운 창성명지대학倉聖明智大學에 초빙되어 광창학군廣倉學宭을 위해 《학술총편學術叢編》을 편찬하며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을 연구했다. 하동哈同 부부가 숭배했던 창성倉聖이 바로 우리 이 분야의 시조이다.

王國維是倉學大師.

왕국유王國維는 창학倉學의 대가이다.

 

文字發明, 從原始文字到成熟文字
문자 발명, 원시 문자에서 성숙 문자로

中國, 凡是說不清道不明的事, 多推黃帝時. 考古學家說, 那叫新石器時代.

중국에서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대부분 황제黃帝 시대로 미룬다. 고고학자들은 그 시기를 신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中國的新石器時代, 距今上萬年. 各種新石器文化, 歷年出土的陶器, 上面多有刻劃符號. 這些符號, 哪些算文字, 哪些不算, 一向有爭論. 學者為了區別文字和文字的前身, 發明兩個詞, 一個叫「成熟文字」[full writing], 一個叫「原始文字」[proto-writing].

중국의 신석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만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각종 신석기 문화에서 여러 해에 걸쳐 출토된 도기 위에는 새겨진 부호들이 많이 있다. 이 부호들 중 어느 것을 문자로 보고 어느 것을 문자로 보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늘 논쟁이 있었다. 학자들은 문자와 문자의 전신을 구별하기 위해 두 개의 단어를 만들어 냈는데, 하나는 ‘성숙문자成熟文字’[full writing]이고, 다른 하나는 ‘원시문자原始文字’[proto-writing]이다.

成熟文字, 目前可以確認, 年代最早是商代文字, 如安陽殷墟出土的甲骨刻辭. 比安陽殷墟年代早, 有小雙橋遺址出土的朱書陶文, 與殷墟文字寫法相似, 或許可以算殷墟文字的前身. 但比小雙橋陶文更早呢, 因為材料不足, 前後寫法連不起來, 就不好說了. 我們並不知道, 成熟文字的上限在哪裡.

성숙문자成熟文字는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 중 연대가 가장 이른 것이 상대商代 문자로, 안양安陽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갑골甲骨 각사刻辭와 같은 것이다. 안양安陽 은허殷墟보다 연대가 이른 것으로는 소쌍교유지小雙橋遺址에서 출토된 주서도문朱書陶文이 있는데, 은허殷墟 문자와 서체가 비슷하여 아마도 은허殷墟 문자의 전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쌍교도문小雙橋陶文보다 더 이른 것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고 전후 서체가 연결되지 않아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숙문자成熟文字의 상한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同樣, 新石器時代出土的陶符, 數量很大, 哪些算原始文字, 哪些不算, 原始文字的上下限到底在哪裡, 我們也不清楚.

마찬가지로 신석기 시대에 출토된 도부陶符는 수량이 매우 많은데, 어느 것을 원시문자原始文字로 보고 어느 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볼지, 원시문자原始文字의 상한과 하한이 도대체 어디인지 우리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這種說不清也要說的問題, 便是所謂「文字起源」問題.

이처럼 명확히 말할 수 없으면서도 말해야만 하는 문제가 바로 이른바 ‘문자 기원’ 문제이다.

 

漢字在世界文字中的位置
한자의 세계 문자 속 위치

殖民時代, 歐洲歷史學以歐洲為中心, 就像古代中國, 我們也曾以我們為中心, 其他國家, 其他民族, 只能入於蠻夷列傳、諸番志. 歐洲的蠻夷列傳、諸番志叫東方學、民族學和民族志, 研究對象是落後國家和落後民族, 即所謂「他者」.

식민 시대에 유럽 역사학은 유럽을 중심으로 삼았는데, 이는 마치 고대 중국에서 우리 또한 우리를 중심으로 삼아 다른 국가, 다른 민족은 오직 만이열전蠻夷列傳, 제번지諸番志에나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유럽의 만이열전蠻夷列傳, 제번지諸番志는 동방학, 민족학, 민족지라 불렸고, 연구 대상은 낙후된 국가와 낙후된 민족, 즉 이른바 ‘타자他者’였다.

本來, 情況明明是, 歐洲受羅馬影響, 羅馬受希臘影響, 希臘受埃及、兩河流域以及小亞細亞和伊朗地區影響, 但黑格爾說, 東方只是鋪墊, 希臘、羅馬、日爾曼才是世界歷史的巔峰, 屬於最成熟、最健全的文明, 其他文明都是早熟兒童, 老人反而是小孩. 這是十九世紀歐洲歷史學的通病.

본래 상황은 분명히, 유럽이 로마의 영향을 받고, 로마가 희랍希臘의 영향을 받고, 희랍希臘이 애급埃及, 양하유역兩河流域 및 소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헤겔[黑格爾]은 동방은 단지 기반일 뿐이고, 희랍希臘, 로마, 게르만이야말로 세계 역사의 정점이며, 가장 성숙하고 가장 건전한 문명에 속하고, 다른 문명들은 모두 조숙한 어린아이이며, 노인이 오히려 어린아이라고 말했다. 이는 19세기 유럽 역사학의 공통된 병폐였다.

其實, 講文字起源, 情況差不多. 來國龍和鄭也夫說, 歐洲語言學, 從亞里士多德到索緒爾, 一直以拼音文字為出發點, 把文字當口語[oral language]的附庸, 帶有重語輕文的嚴重偏頗, 這是問題的要害.

사실, 문자 기원을 논하는 상황도 비슷하다. 내국룡來國龍과 정야부鄭也夫는 유럽 언어학이 아리스토텔레스[亞里士多德]에서 소쉬르[索緒爾]에 이르기까지 줄곧 병음문자拼音文字를 출발점으로 삼아, 문자를 구어[oral language]의 부속물로 여기며 언어를 중시하고 문자를 경시하는 심각한 편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世界四大古文字, 蘇美爾楔形字最早[說法不一, 約前3200年], 埃及聖書字其次[說法不一, 約前3150年], 安陽甲骨文[約前1200年]又其次, 美洲瑪雅文最晚[約前500年, 或說公元前650年、公元前800年].

세계 4대 고문자 중, 수메르[蘇美爾]의 설형문자楔形字가 가장 이르고[설이 분분하나, 대략 기원전 3200년], 애급埃及의 성서문자聖書字가 그 다음이며[설이 분분하나, 대략 기원전 3150년], 안양安陽의 갑골문甲骨文[대략 기원전 1200년]이 또 그 다음이고, 아메리카[美洲]의 마야문瑪雅文이 가장 늦다[대략 기원전 500년, 혹은 기원전 650년, 기원전 800년 설도 있음].

過去, 受拼音文字優越論和文字單線進化論影響, 很多人都以表音水平為文字發展定高下, 認為拼音文字是世界文字發展的共同出路和最後歸宿, 上述古文字只是拼音文字的史前史和化外史, 漢字保存至今, 屬於誤入進化死胡同, 變成活化石.

과거에는 병음문자拼音文字 우월론과 문자 단선單線 진화론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표음表音 수준을 기준으로 문자 발전의 우열을 가리고, 병음문자拼音文字가 세계 문자 발전의 공동 출구이자 최종 귀착지라고 여겼다. 앞서 말한 고문자들은 단지 병음문자拼音文字의 선사시대 역사나 문명 밖의 역사에 불과하며, 한자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진화의 막다른 골목으로 잘못 들어서 살아있는 화석이 된 것이라고 여겼다.

這是所有誤解的出發點.

이것이 모든 오해의 출발점이다.

 

漢字和「中國境內之古外族遺文」
한자와 ‘중국 경내의 옛 외래 민족이 남긴 글’

文字起源是多源還是一源? 蓋爾布[Ignace J. Gelb]有「激發擴散」說, 以為世界文字同出一源, 俱出美索不達米亞. 這種一源說, 早被證明是誤解.

문자의 기원은 다원多源인가 아니면 일원一源인가? 겔브[蓋爾布][Ignace J. Gelb]는 ‘자극 확산[激發擴散]’ 설을 제기하여, 세계의 문자는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며, 전부 메소포타미아[美索不達米亞]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원설一源說은 일찍이 오해임이 증명되었다.

漢字是獨立起源, 但不是孤立發展.

한자는 독립적으로 기원했지만, 고립되어 발전하지는 않았다.

十九、二十世紀之交, 中國有「五大發現」. 它們除殷墟甲骨、西域簡牘、敦煌卷子和大內檔案, 還有一項是「中國境內之古外族遺文」.

19, 20세기 전환기에 중국에는 ‘5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들은 은허殷墟의 갑골甲骨, 서역西域의 간독簡牘, 돈황敦煌의 권자卷子와 대내大內의 당안檔案 외에,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중국경내지고외족유문中國境內之古外族遺文’이다.

王國維說的「中國境內之古外族遺文」, 主要指絲綢之路中國段的古文字, 如梵文、佉盧文、焉耆文、龜茲文、于闐文、粟特文、突厥文、回鶻文、藏文. 此外, 中國北方還有契丹文、西夏文、女真文、八思巴文、蒙古文、察合台文、滿文, 南方還有彝文、傣文、東巴文. 這些文字, 多半是拼音文字, 少數是方塊字.

왕국유王國維가 말한 ‘중국 경내의 옛 외래 민족이 남긴 글’은 주로 비단길의 중국 구역에 있던 고문자들을 가리키는데, 예를 들면 범문梵文, 구로문佉盧文, 언기문焉耆文, 구자문龜茲文, 우전문于闐文, 속특문粟特文, 돌궐문突厥文, 회골문回鶻文, 장문藏文 등이다. 이 밖에 중국 북방에는 거란문契丹文, 서하문西夏文, 여진문女眞文, 파스파문[八思巴文], 몽고문蒙古文, 차가타이문[察合台文], 만문滿文이 있었고, 남방에는 이문彝文, 태문傣文, 동파문東巴文이 있었다. 이 문자들 대부분은 병음문자拼音文字이고, 소수는 방괴자方塊字이다.

中國有兩個古文字學會: 中國古文字研究會研究漢字系統的甲骨、金文和簡帛, 中國民族古文字研究會研究漢字系統以外的古文字.

중국에는 두 개의 고문자학회가 있다. 중국고문자연구회中國古文字研究會는 한자 체계의 갑골甲骨, 금문金文과 간백簡帛을 연구하고, 중국민족고문자연구회中國民族古文字研究會는 한자 체계 이외의 고문자를 연구한다.

唐釋道世《法苑珠林》卷十五: 「昔造書之主, 凡有三人. 長名曰梵, 其書右行; 次曰佉盧, 其書左行; 少者蒼頡, 其書下行.」

당唐나라의 석도세釋道世가 쓴 《법원주림法苑珠林》 제15권에 이르기를, “옛날 글자를 만든 주인은 무릇 세 사람이 있었다. 첫째는 이름이 범梵인데 그 글은 오른쪽으로 쓰고, 둘째는 이름이 구로佉盧인데 그 글은 왼쪽으로 쓰며, 막내는 창힐蒼頡인데 그 글은 아래로 쓴다.”

這是翻譯佛經遇到的三種文字. 它是以佛經寫本和譯本的先後為早晚.

이는 불경을 번역하면서 마주친 세 종류의 문자이다. 이것은 불경 사본과 번역본의 시간적 선후를 기준으로 순서를 정한 것이다.

梵文從左往右寫, 佉盧文從右往左寫, 都是橫著寫. 漢字不同, 豎著寫. 釋道世把漢字排在梵文和佉盧文之後是不對的. 梵文和佉盧文並不比漢字早.

범문梵文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고, 구로문佉盧文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등 모두 가로로 쓴다. 한자는 달라서 세로로 쓴다. 석도세釋道世가 한자를 범문梵文과 구로문佉盧文 뒤에 배치한 것은 옳지 않다. 범문梵文과 구로문佉盧文은 결코 한자보다 이르지 않다.

漢字與上述文字一直有來往, 相互交流, 相互影響, 是個多元一體的文化圈.

한자는 위에서 언급한 문자들과 줄곧 교류가 있었고, 서로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주며 하나의 다원일체多元一體 문화권을 형성했다.

 

突發說和過程說
돌발설과 과정설

研究漢字起源, 有突發說和過程說.

한자 기원을 연구하는 데에는 돌발설突發說과 과정설過程說이 있다.

突發說是語言學家從語言學定義出發, 也可以叫定義說. 此說強調, 文字是記錄語言的符號, 不經人為設計, 制定聽說讀寫的規則, 不成其為文字; 不經人為傳授, 不可能成為交流工具. 這就像打牌, 光有牌, 我們無法知道它的玩法, 必須有人告你怎麼玩, 你才知道怎麼玩. 因此, 文字發明不可能集思廣益、約定俗成. 相反, 它只能由一個權威機構, 指派少數人或一個人, 比如倉頡類的聰明人, 在短時間內突然發明, 一次性發明.

돌발설突發說은 언어학자들이 언어학적 정의에서 출발한 것으로, 정의설定義說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설은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이므로, 인위적인 설계를 거쳐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규칙을 제정하지 않으면 문자라고 할 수 없으며, 인위적인 전수를 거치지 않으면 교류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카드놀이와 같아서, 카드만 있어서는 우리가 그 놀이 방법을 알 수 없고, 반드시 누군가 어떻게 노는지를 알려줘야만 어떻게 노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문자의 발명은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거나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질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오직 하나의 권위 있는 기관이 소수의 사람이나 한 사람, 예컨대 창힐倉頡과 같은 총명한 사람을 지명하여, 짧은 시간 안에 갑자기 발명, 즉 일회성으로 발명한 것이어야만 한다.

過程說, 認為文字是複雜系統, 不可能從無到有, 一蹴而就, 總得有個從簡單到複雜的準備過程. 此說比較投合考古學家的口味. 考古學的研究對象是大時段的歷史過程. 他們希望從成熟文字往前追, 找到更古老的文字, 叫什麼無所謂, 反正文字得有個前身, 不可能無中生有.

과정설過程說은 문자가 복잡한 체계이므로 무無에서 유有로, 단숨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반드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가는 준비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 설은 비교적 고고학자들의 구미에 맞는다. 고고학의 연구 대상은 장기간에 걸친 역사 과정이다. 그들은 성숙문자成熟文字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더 오래된 문자를 찾기를 희망하며,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어쨌든 문자는 전신前身이 있어야 하고 무無에서 생겨날 수는 없다고 본다.

現在, 這兩種說法, 突發說主於成熟文字, 過程說主於原始文字. 成熟文字是安陽甲骨文, 前面只有陶符. 陶符和甲骨文不一樣, 陶符和陶符也不一樣, 時間拉得很長.

현재 이 두 가지 설 중, 돌발설突發說은 성숙문자成熟文字를 주로 다루고, 과정설過程說은 원시문자原始文字를 주로 다룬다. 성숙문자成熟文字는 안양安陽의 갑골문甲骨文이며, 그 이전에는 도부陶符만 있을 뿐이다. 도부陶符와 갑골문甲骨文은 다르고, 도부陶符와 도부陶符도 서로 다르며, 시간 간격이 매우 길다.

鄭也夫說, 陶符不是文字, 但文字起源是漸變加突變.

정야부鄭也夫는 도부陶符는 문자가 아니지만, 문자 기원은 점진적 변화에 돌발적 변화가 더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問題是, 文字起源的源有多早? 漸變的漸有多長? 突變和漸變, 界限在哪裡? 陶符如果都不算文字, 那什麼算原始文字? 成熟文字還有沒有前身?

문제는, 문자 기원의 근원이 얼마나 이른가? 점진적 변화의 기간은 얼마나 긴가? 돌발적 변화와 점진적 변화의 경계는 어디인가? 만약 도부陶符가 모두 문자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원시문자原始文字로 간주되는가? 성숙문자成熟文字에는 전신前身이 없는 것인가?

 

定義是一把刀, 歷史是一條河
정의는 칼 한 자루, 역사는 강 한 줄기

過程說遭遇定義說, 語言學家說, 你們找到的那些符號, 再多也沒用, 再早也沒用, 那都是符號, 並不是文字. 文字的定義很清楚, 它是記錄語言的符號. 語言是個系統. 記錄語言的文字, 不可能一個一個發明, 或按指事-象形-會意-假借-形聲一類順序, 分期分批創造. 儘管考古學家蒐集了很多資料, 通過比較, 說某些符號和某些符號像, 某些符號和某些文字像, 樣子很像, 但持定義說者一棍子就把它打死了. 他們說, 符號不等於文字, 文字是記錄語言, 只有音節、詞義固定, 有詞序和文法, 可以讀出來講明白, 這樣的符號才能叫文字. 陶符, 別說單個不算, 就是寫成幾行也未必是, 只要不表音, 讀不出來, 沒有連貫的思路和文義可尋, 就不是文字.

과정설過程說이 정의설定義說과 마주치자, 언어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찾아낸 그 부호들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고, 아무리 일러도 소용없다. 그것들은 모두 부호일 뿐, 문자가 아니다. 문자의 정의는 매우 명확하다. 그것은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이다. 언어는 하나의 체계이다.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는 하나하나 발명되거나, 혹은 지사指事-상형象形-회의會意-가차假借-형성形聲과 같은 순서에 따라 시기를 나누어 단계적으로 창조될 수 없다.” 비록 고고학자들이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비교를 통해 어떤 부호가 어떤 부호와 닮았고, 어떤 부호가 어떤 문자와 닮았으며,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정의설定義說을 지지하는 자들은 단번에 이를 부정해 버린다. 그들은 부호는 문자와 같지 않으며,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것으로, 음절과 단어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고, 어순과 문법이 있으며, 읽어서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만 그런 부호들을 문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도부陶符는 개별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줄로 쓰여 있더라도 반드시 문자인 것은 아니며, 표음表音 기능이 없고, 읽어낼 수 없으며, 연관성 있는 사유나 문맥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문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考古有個難以擺脫的困境: 語言學家刻意追尋的是聲音的痕跡, 而考古學家面臨的卻是無聲世界, 他們只能「用眼睛閱讀」.

고고학에는 벗어나기 어려운 곤경이 있다. 언어학자들은 의식적으로 소리의 흔적을 추적하지만, 고고학자들이 마주하는 것은 소리 없는 세계이므로, 그들은 오직 ‘눈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現在, 我們要想找到早期文字的過硬證據, 只能從已知的文字體系, 反向逆推——用饒宗頤的話講, 就是「以後證前」. 但反向逆推的結果是什麼? 走著走著, 線索就斷了, 前途非常渺茫. 殷墟文字相當成熟, 前面沒有文字, 後面一旦有了, 就一應俱全. 定義說是個要麼全無要麼全有的創世說, 很像孫悟空出世, 文字是從石頭縫里蹦出來的.

지금 우리가 초기 문자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으려면, 오직 이미 알려진 문자 체계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이는 요종이饒宗頤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뒤의 것으로 앞의 것을 증명하는[以後證前]’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거슬러 추론한 결과는 무엇인가? 가다 보면 단서가 끊어지고, 앞날은 매우 막막하다. 은허殷墟 문자는 상당히 성숙했는데, 그 이전에는 문자가 없다가, 이후에 일단 생겨나자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정의설定義說은 아예 없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는 식의 창세설創世說과 같아서, 마치 손오공孫悟空이 태어난 것처럼 문자가 돌 틈에서 튀어나왔다는 것과 같다.

符號是啞巴, 只要找不到它和成熟文字的聯繫, 它就不會開口講話. 而不會開口講話的文字當然也就不能證明是文字.

부호는 벙어리와 같아서, 그것과 성숙문자成熟文字와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는 문자는 당연히 문자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

可以證明的無須證明, 不能證明的也無法證明, 大家很尷尬.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또한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모두가 매우 난감하다.

定義是一把刀, 符號、文字, 一刀兩斷. 歷史是一條河, 抽刀斷水水更流.

정의는 칼 한 자루와 같아서 부호와 문자를 단칼에 베어 나눈다. 역사는 강 한 줄기와 같아서, 칼을 뽑아 물을 베어도 물은 더욱 흐른다.

 

定義說批判
정의설 비판

文字是記錄語言的符號. 這個定義, 從理論上講, 似乎天衣無縫, 顛撲不破, 但對文字起源的探討, 幾乎是廢話. 如果說, 成熟的文字才是文字, 不成熟的文字就不是文字, 說了等於沒說. 定義是概念, 不是歷史. 與其削足適履, 不如量體裁衣.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이다. 이 정의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여 깨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자 기원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는 거의 쓸모없는 말이다. 만약 성숙한 문자만이 문자이고, 미성숙한 문자는 문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말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 정의는 개념이지, 역사가 아니다.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기보다는, 몸에 맞춰 옷을 재는 것이 낫다.

其實, 研究漢字起源, 我們不光需要一個定義, 還需要理解其社會功能. 我們更希望知道的是, 它是因何種需要被發明, 用什麼樣的文字記錄什麼樣的語言, 文字演化進程的線索到底在哪裡.

사실, 한자 기원을 연구함에 있어 우리에게는 단지 하나의 정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우리가 더욱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이 어떤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어떤 종류의 문자로 어떤 종류의 언어를 기록했는지, 문자 진화 과정의 단서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이다.

2004年, 來國龍專門批判過文字起源研究中的「語言學眼光」, 「一是在文字起源研究中以是否表音作為界定成熟文字的唯一標準; 二是在西方廣為流傳的單源單線的文字進化論和字母文字優越論」. 他認為, 真正解決這個問題, 還是要靠考古學.

2004년에 내국룡來國龍은 문자 기원 연구에서의 ‘언어학적 시각’을 전문적으로 비판했는데, “첫째는 문자 기원 연구에서 표음表音 여부를 성숙문자成熟文字를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서양에 널리 퍼져 있는 단일 기원, 단선적 문자 진화론과 알파벳 문자 우월론”이라고 했다. 그는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면 역시 고고학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最近, 鄭也夫再次提起這個話題, 則以哲學思考為切入點. 他以德里達的《論文字學》為武器, 批判「亞里士多德-盧梭-黑格爾-索緒爾」的語言中心主義, 指出上述定義是以拼音文字為背景, 並未參考世界四大古文字, 特別是中國古文字, 帶有重語輕文的嚴重偏頗.

최근 정야부鄭也夫가 다시 이 화제를 꺼내면서, 철학적 사유를 접근점으로 삼았다. 그는 데리다[德里達]의 《논문자학論文字學》를 무기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亞里士多德]-루소[盧梭]-헤겔[黑格爾]-소쉬르[索緒爾]’의 언어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앞서 언급한 정의가 병음문자拼音文字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세계 4대 고문자, 특히 중국 고문자를 참고하지 않아, 언어를 중시하고 문자를 경시하는 심각한 편향을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他說, 他想不到, 定義說在中國比西方更有市場.

그는 정의설定義說이 서양보다 중국에서 더 시장성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文字跟語言是什麼關係
문자와 언어는 어떤 관계인가

文字有三要素, 形、音、義. 世界上的文字分兩大系統, 一個以形為主, 如上述四大古文字; 一個以聲為主, 如源出迦南字母的拼音文字. 兩者都表音, 兩者都表意. 問題不在有什麼要素沒什麼要素, 而在要素組合的形式不一樣.

문자에는 형形, 음音, 의義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세계의 문자는 두 개의 큰 체계로 나뉘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4대 고문자처럼 형形을 위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迦南] 알파벳에서 기원한 병음문자拼音文字처럼 소리[聲]를 위주로 하는 것이다. 둘 다 소리를 나타내고, 둘 다 의미를 나타낸다. 문제는 어떤 요소가 있고 없는지가 아니라, 요소 조합의 형식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這兩大系統的差異, 不完全是由造字方法的不同所造成. 技術上的差異, 背後有文化上的差異. 關鍵還是語言系統不同, 國家形態不同, 不同文化對文字的需求不同.

이 두 체계의 차이는 단순히 글자를 만드는 방법의 차이만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기술상의 차이 배후에는 문화상의 차이가 있다. 핵심은 언어 체계가 다르고, 국가 형태가 다르며, 다른 문화가 문자에 대해 갖는 수요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漢字是早期文字的嫡傳, 和蘇美爾、埃及、瑪雅等系統的文字類似, 是以符號類或圖形類的構形要素, 通過排列組合, 用字形變化表達語音、語義的變化, 視覺效果起着不容忽視的作用.

한자는 초기 문자의 직계 후손으로, 수메르[蘇美爾], 애급埃及, 마야[瑪雅] 등 체계의 문자와 유사하며, 부호류나 도형류의 구성 요소를 배열 조합하여 자형의 변화로 어음語音, 어의語義의 변화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시각적 효과가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

拼音文字不一樣, 它用字母記音, 主要靠音位、音節的排列組合來表意, 語言變化主要靠聽覺效果. 字母, 形體簡單, 數量有限, 只起記音符號的作用, 視覺效果被降到最低.

병음문자拼音文字는 다르다. 그것은 알파벳으로 소리를 기록하며, 주로 음위音位, 음절의 배열 조합에 의존하여 의미를 나타내고, 언어 변화는 주로 청각적 효과에 의존한다. 알파벳은 형태가 간단하고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 단지 소리를 기록하는 부호의 역할만 할 뿐, 시각적 효과는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다.

拼音文字既然以聲為主, 當然強調以語控文, 把文字當語言的附庸, 把文字學視為語言學的一部分.

병음문자拼音文字는 소리[聲]를 위주로 하므로, 당연히 언어가 문자를 통제함을 강조하고, 문자를 언어의 부속물로 여기며, 문자학을 언어학의 일부로 간주한다.

漢字不同, 文字、語言並不對等. 不但不對等, 還脫離語言, 超越語言, 反客為主, 君臨口語之上, 成為控制語言的東西. 中國傳統小學, 文字學是排在前面, 我們的音韻學, 我們的訓詁學, 都是附麗於文字學.

한자는 다르다. 문자와 언어는 결코 대등하지 않다. 대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서 벗어나 언어를 초월하고, 주객이 전도되어 구어口語 위에 군림하며, 언어를 통제하는 존재가 되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소학小學에서 문자학은 앞 순위에 놓이며, 우리의 음운학音韻學, 우리의 훈고학訓詁學은 모두 문자학에 부속되어 있다.

 

文字跟符號、圖畫是什麼關係
문자와 부호, 그림은 어떤 관계인가

文字是符號. 符號有很多種, 外延比文字大. 文字只是符號之一種.

문자는 부호이다. 부호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외연은 문자보다 넓다. 문자는 단지 부호의 한 종류일 뿐이다.

這裡所謂符號[sign、signal、mark、logotype]是指視覺符號. 可視符號, 從實際使用看, 可以讀, 也可以不讀, 相對獨立, 跟今天的符號沒什麼兩樣. 可讀符號只是可視符號中的一種.

여기서 말하는 부호[sign, signal, mark, logotype]는 시각적 부호를 가리킨다. 시각 부호는 실제 사용을 보면, 읽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으며,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어서 오늘날의 부호와 별 차이가 없다. 읽을 수 있는 부호는 단지 시각 부호 중의 한 종류일 뿐이다.

符號和圖畫有關, 但不等於圖畫. 圖畫, 狀物圖形、抒情寫意、供人觀賞, 跟符號的功能不一樣.

부호는 그림과 관련이 있지만, 그림과 동일하지는 않다. 그림은 사물의 형태를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며,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제공되는 것으로, 부호의 기능과는 다르다.

符號和圖畫的根本區別, 不在描摹工細還是抽象寫意, 而在其指代性, 即符號是一種代碼. 代碼有數字碼, 有符號碼, 有圖形碼, 早期文字兼而有之.

부호와 그림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교하게 묘사하는지 아니면 추상적으로 표현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시성指代性에 있다. 즉, 부호는 일종의 코드[代碼]이다. 코드에는 숫자 코드, 부호 코드, 도형 코드가 있으며, 초기 문자는 이들을 모두 겸비했다.

郭沫若把中國新石器時代的早期符號分成兩大系統: 刻劃符號和圖形符號. 前者以半坡遺址的陶符為代表, 多為點線式的幾何形符號; 後者以大汶口遺址的陶符為代表, 多為用線條勾勒的圖形符號[這兩類符號, 不盡出於刻, 也有用毛筆硬筆書寫者]. 他把這兩類符號稱為指事、象形兩大系統, 分別當作漢字的兩個源頭. 他認為, 商代有兩種族徽, 一種是「刻劃系統的族徽」[包括今所謂「數字卦」], 一種是「圖形系統的族徽」. 這兩種「族徽」即源自陶器上的這兩類符號. 這種類型學的劃分對裘錫圭有重要影響, 但裘先生更看重的是圖形符號.

곽말약郭沫若은 중국 신석기 시대의 초기 부호를 두 개의 큰 체계로 나누었다. 바로 각화부호刻劃符號와 도형부호圖形符號이다. 전자는 반파유지半坡遺址의 도부陶符를 대표로 하며, 대부분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형태의 부호이다. 후자는 대문구유지大汶口遺址의 도부陶符를 대표로 하며, 대부분 선으로 윤곽을 그린 도형 부호이다[이 두 종류의 부호는 모두 새긴 것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붓이나 단단한 필기구로 쓴 것도 있다]. 그는 이 두 종류의 부호를 지사指事, 상형象形의 두 체계라고 부르며, 각각 한자의 두 가지 기원으로 간주했다. 그는 상대商代에 두 종류의 족휘族徽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각화 체계의 족휘[刻劃系統的族徽]’[오늘날 이른바 ‘숫자점[數字卦]’을 포함]이고, 다른 하나는 ‘도형 체계의 족휘[圖形系統的族徽]’이다. 이 두 종류의 ‘족휘’는 바로 도기 위의 이 두 종류의 부호에서 기원했다. 이러한 유형학적 구분은 구석규裘錫圭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구裘 선생은 도형부호圖形符號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文字并非符號之全部. 文字出現前有符號, 文字出現後也有符號, 文字外有符號, 文字內也有符號, 文字本身就是由符號組成, 文字本身就是符號.

문자가 부호의 전부는 아니다. 문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부호가 있었고, 문자가 나타난 후에도 부호가 있었으며, 문자 밖에도 부호가 있고, 문자 안에도 부호가 있다. 문자 자체가 부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자 자체가 부호이다.

我們不能說, 所有符號都是文字, 但也不能說, 文字與符號毫無關係. 這就像人與猿有別, 人、猿分手後, 人是人, 猿是猿, 你說人與猿不同, 這是對的, 但不能說人與猿毫無關係. 人是從類人猿進化而來. 類人猿, 上與猿, 下與人都有關係.

우리는 모든 부호가 문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문자가 부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는 마치 사람과 원숭이가 구별되는 것과 같다. 사람과 원숭이가 갈라진 후, 사람은 사람이고 원숭이는 원숭이이니, 사람과 원숭이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사람과 원숭이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유인원類人猿에서 진화해왔다. 유인원類人猿은 위로는 원숭이와, 아래로는 사람과 모두 관계가 있다.

漢字以形聲字為主, 形聲字的形旁是符號, 聲旁也是符號. 形符主形, 以形別意, 強調可視性, 但單獨使用, 照樣離不開聲. 聲符主聲, 以聲別意, 強調可讀性, 但單獨使用, 照樣離不開形.

한자는 형성자形聲字를 위주로 하는데, 형성자形聲字의 형방形旁은 부호이고, 성방聲旁 역시 부호이다. 형부形符는 형태를 주관하여 형태로 의미를 구별하고 시각성을 강조하지만,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도 여전히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부聲符는 소리를 주관하여 소리로 의미를 구별하고 가독성을 강조하지만,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도 여전히 형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聲符和形符, 其別不在於形, 而在功能. 聲符多半與字義孳乳的連續性和同音假借的替代作用有關, 形符多半起分類、區別和限定的作用. 兩者互為經緯.

성부聲符와 형부形符의 차이는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있다. 성부聲符는 대부분 자의字義 파생의 연속성 및 동음同音 가차假借의 대체 작용과 관련이 있고, 형부形符는 대부분 분류, 구별 및 한정의 역할을 한다. 양자는 서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다.

 

他山之石和此山之玉
타산지석과 차산지옥

語云「他山之石, 可以攻玉」[出《詩·小雅·鶴鳴》]. 他山之石, 古人叫厝, 字亦作錯.

“다른 산의 돌로도 옥을 갈 수 있다[他山之石, 可以攻玉]”[《시경詩》〈소아小雅·학명鶴鳴〉에서 나옴]는 말이 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을 고대인들은 조厝라고 불렀고, 글자는 또한 착錯으로도 썼다.

現在講漢字起源, 學者多借鑒蘇美爾、埃及、瑪雅的古文字, 立說於比較研究. 蘇美爾楔形文字, 進化分四階段: 陶符-陶籌-原始楔形文字-成熟楔形文字. 受這一進化模式啟發, 有些學者認為, 漢字的進化應與之相似, 也是從陶符發展而來, 所謂原始文字, 主要功能是記數記名, 不一定有固定讀音, 更沒有固定的詞序和文法, 比如拱玉書、顏海英、葛英會就這麼看.

현재 한자 기원을 논할 때, 학자들은 대부분 수메르[蘇美爾], 애급埃及, 마야[瑪雅]의 고문자를 참고하여 비교 연구를 통해 학설을 세운다. 수메르[蘇美爾] 설형문자楔形文字는 진화 과정이 네 단계로 나뉜다. 도부陶符-도주陶籌-원시 설형문자-성숙 설형문자이다. 이러한 진화 모델에 영향을 받아, 일부 학자들은 한자의 진화도 이와 유사하여 도부陶符에서 발전해 왔을 것이라고 본다. 이른바 원시문자原始文字의 주요 기능은 수를 세고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며, 반드시 고정된 독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고정된 어순과 문법은 더더욱 없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공옥서拱玉書, 안해영顏海英, 갈영회葛英會가 그렇게 본다.

葛英會認為, 中國史前的刻劃符號, 記數符號是原始數字, 記名符號是早期象形字, 記數符號早于記名符號, 漢字的發明可能與古人傳說的結繩、契刻、籌策有關. 此即所謂「先數後文」說. 但另一方面, 他強調說, 通常所謂的幾何形符號是象形符號或象形符號的抽象化, 不應稱為指事符號. 他又把象形符號看作原始文字的主流.

갈영회葛英會는 중국 선사시대의 각화부호刻劃符號에서, 기수記數 부호는 원시 숫자이고, 기명記名 부호는 초기 상형자이며, 기수記數 부호가 기명記名 부호보다 먼저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자의 발명은 고대인들이 전하는 결승結繩, 계각契刻, 주책籌策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선수후문先數後文’ 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기하학적 형태의 부호는 상형부호象形符號 또는 상형부호象形符號의 추상화된 것이므로, 지사부호指事符號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상형부호象形符號를 원시문자原始文字의 주류로 보았다.

現在, 借鑒西亞模式, 尋找王名表、習字表和簿書統計, 似乎是探討文字起源的幾個主要途徑. 比較研究很重要, 但不能代替漢字本身的研究.

현재, 서아시아 모델을 참고하여 왕명표王名表, 습자표習字表, 장부 통계를 찾는 것이 문자 기원을 탐구하는 몇 가지 주요 경로인 것 같다. 비교 연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한자 자체의 연구를 대체할 수는 없다.

陶符在中國, 從南到北, 從東到西, 分屬不同的文化類型, 不能混為一談. 它的歷史也很長, 即使晚近, 粗瓷大碗、磚頭瓦片上照樣有之. 現在主張陶符是原始文字者, 意見並不統一.

도부陶符는 중국에서 남쪽에서 북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서로 다른 문화 유형에 속하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의 역사 또한 매우 길어서, 근래에 이르러서도 투박한 자기 그릇이나 벽돌, 기왓장 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현재 도부陶符가 원시문자原始文字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事實上, 陶符是個混沌. 所謂原始文字, 標準是什麼, 尺度寬一點還是窄一點, 結果可能大不一樣.

사실, 도부陶符는 혼돈 상태이다. 이른바 원시문자原始文字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척도를 넓게 잡느냐 좁게 잡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陶符的年代
도부陶符의 연대

來國龍、鄭也夫批評語言中心主義, 認為定義說和突變說不能解決漢字起源問題. 現在受上述模式啟發, 很多學者相信, 殷墟文字之前肯定有一個準備過程. 這個過程有多長, 有各種推測. 過去, 陳夢家說, 至少得上推五百年, 即至少在公元前1700年左右.

내국룡來國龍, 정야부鄭也夫는 언어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정의설定義說과 돌변설突變說이 한자 기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앞서 언급한 모델에 영향을 받아 많은 학자들이 은허殷墟 문자 이전에 분명히 준비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과정이 얼마나 길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다. 과거에 진몽가陳夢家는 적어도 50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으니, 즉 적어도 기원전 1700년경이라는 것이다.

中國史前的刻劃符號, 賈湖遺址所出[約前6000年]最早, 是否為原始文字, 爭議比較大. 半坡遺址所出[約前4500年], 裘錫圭叫甲類符號. 大汶口遺址所出[約前2700-2500年], 裘錫圭叫乙類符號. 郭沫若認為, 甲類符號早于乙類符號, 是最早的文字. 裘錫圭相反, 認為甲類符號不是文字, 乙類符號記名物, 才更接近語言學家定義的文字. 正是基於這種理解, 他曾一度把大汶口陶文的族名符號視為類似商代族徽的符號[1978年]. 雖然後來他又放棄此說, 認為兩種符號都不是文字[1989年A、1993年]. 他說漢字形成完整的文字體系約在夏商之際[1978年]. 他說的夏商之際, 其實並非通常認為的夏商之際, 而是約公元前第三千紀的中期[1989年A], 也就是公元前2500年左右. 可見他是拿乙類符號作原始文字的下限, 把成熟文字的出現放在這一時間後.

중국 선사시대의 각화부호刻劃符號 중 가호유지賈湖遺址에서 나온 것[대략 기원전 6000년]이 가장 이르지만, 원시문자原始文字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비교적 크다. 반파유지半坡遺址에서 나온 것[대략 기원전 4500년]을 구석규裘錫圭는 갑류부호甲類符號라고 부른다. 대문구유지大汶口遺址에서 나온 것[대략 기원전 2700-2500년]을 구석규裘錫圭는 을류부호乙類符號라고 부른다. 곽말약郭沫若은 갑류부호甲類符號가 을류부호乙類符號보다 이르며, 가장 최초의 문자라고 생각했다. 구석규裘錫圭는 반대로, 갑류부호甲類符號는 문자가 아니며, 을류부호乙類符號가 사물의 이름을 기록했으므로 언어학자들이 정의한 문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그는 한때 대문구大汶口 도문陶文의 족명族名 부호를 상대商代의 족휘族徽와 유사한 부호로 간주했다[1978년]. 비록 나중에 그는 이 설을 포기하고 두 종류의 부호 모두 문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1989년 A, 1993년], 그는 한자가 완전한 문자 체계를 형성한 시기를 대략 하상지제夏商之際라고 말했다[1978년]. 그가 말한 하상지제夏商之際는 사실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하상 교체기가 아니라, 대략 기원전 제3천년기 중기[1989년 A], 즉 기원전 2500년경이다. 이를 통해 그가 을류부호乙類符號를 원시문자原始文字의 하한으로 삼고, 성숙문자成熟文字의 출현을 이 시기 이후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再晚, 丁公遺址所出[約前2300-1800年]、龍虬莊遺址所出[約前2000年], 屬於廣義的龍山時代. 中國進入銅石並用時期, 城市遍地開花, 開始出現成行成片的符號. 很多人說, 這些總該是原始文字了吧, 但裘錫圭說, 這些符號是「走入歧途的原始文字」, 無法斷定與作為成熟文字的甲骨文有關[1993年].

그보다 늦은 시기인 정공유지丁公遺址 출토품[대략 기원전 2300-1800년], 용구장유지龍虬莊遺址 출토품[대략 기원전 2000년]은 광의의 용산시대龍山時代에 속한다. 중국은 동석병용시대銅石並用時期에 접어들었고, 도시가 곳곳에 생겨났으며, 줄을 이루고 무더기를 이룬 부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이야말로 원시문자原始文字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구석규裘錫圭는 이 부호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원시문자[走入歧途的原始文字]’이며, 성숙문자成熟文字인 갑골문甲骨文과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1993년].

中國人, 心中往往有個潛臺詞, 夏、商、周三代才是最早的文明. 許宏把公元前2000年的「陶寺革命」視為中國文明的起點. 1984年陶寺遺址出土陶扁壺上有兩個符號, 引發種種猜測. 很多人都認為, 公元前2000年左右, 無論如何, 中國應該有文字了. 《史記》有夏世系, 更加強了這類聯想的信心. 裘錫圭說, 「夏代有完整的世系流傳下來這件事, 就是原始文字有了巨大改進的反映. 這種改進為漢字在夏商之際形成完整的文字體系打下了基礎.」[1978年]

중국인들은 마음속에 종종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야말로 가장 이른 문명이라는 잠재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 허굉許宏은 기원전 2000년의 ‘도사혁명陶寺革命’을 중국 문명의 기점으로 본다. 1984년 도사유지陶寺遺址에서 출토된 도편호陶扁壺 위에 두 개의 부호가 있어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기원전 2000년경에는 어떻게든 중국에 문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기史記》에 하夏나라의 세계世系가 있다는 점은 이러한 연상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 구석규裘錫圭는 “하대夏代에 완전한 세계世系가 전해져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원시문자原始文字에 거대한 개선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선은 한자가 하상지제夏商之際에 완전한 문자 체계를 형성하는 기초를 닦았다”고 말했다[1978년].

商代, 小雙橋遺址出土的陶文, 其絕對年代為公元前1435-1412年. 從公元前2000年到公元前1400年, 這段時間很關鍵. 問題是, 研究這一段, 目前還缺乏線索, 前後關係並不清楚.

상대商代 소쌍교유지小雙橋遺址에서 출토된 도문陶文의 절대 연대는 기원전 1435-1412년이다.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400년까지의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이 시기를 연구하는 데 있어 현재 단서가 부족하며, 전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禮儀說和管理說
예의설과 관리설

文字是幹什麼用的? 向有二說, 一說為了宗教禮儀, 比如祭祀、禱告、占卜、祈禳; 一說為了國家管理, 比如財會收支、商貿往來、政令頒行、史事記載.

문자는 무엇에 쓰였는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제사, 기도, 점복占卜, 기양祈禳과 같은 종교 예의를 위한 것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재무 회계, 상업 무역, 정령 반포, 역사 기록과 같은 국가 관리를 위한 것이라는 설이다.

表面看, 埃及的聖書體偏于前者, 兩河流域的楔形文字偏于後者; 歐洲中世紀的拉丁文偏于前者, 秦漢以來的漢字偏于後者. 其實, 各國文字差不多都有這兩種功能, 僧侶用它通神, 官吏用它管理, 都是為了統治百姓. 文字跟國家權力分不開.

표면적으로 보면, 애급埃及의 성서체聖書體는 전자에 치우쳐 있고, 양하유역兩河流域의 설형문자楔形文字는 후자에 치우쳐 있다. 유럽 중세의 라틴어는 전자에, 진한秦漢 이래의 한자는 후자에 치우쳐 있다. 사실, 각국의 문자는 거의 모두 이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승려는 신과 통하기 위해 사용했고, 관리는 통치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모두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자는 국가 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禮儀說, 從宗教著眼, 說文字主要不是寫給人看的, 而是寫給神看的, 比如芝加哥大學東方研究所展出的亞述石刻, 本來文字朝里砌在牆上, 從外邊看, 什麼也看不見. 它的文字就是寫給神看的.

예의설禮儀說은 종교에 착안하여, 문자가 주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신에게 보이기 위해 쓰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카고대학 동방연구소에 전시된 아시리아 석각은 원래 글자가 안쪽을 향하도록 벽에 쌓여 있어서,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문자는 바로 신에게 보이기 위해 쓰인 것이다.

中國, 甲骨文是占卜文字, 當然是用來求取神喻. 青銅器是禮器, 也毫無問題. 商周銅器, 銘文多在內底, 小口深腹的觚, 不打光, 朝里瞅, 啥也看不見, 拓時得拿個長長的鑷子夾著很小的拓包, 伸到裡面拓, 有人說, 這肯定也是給神看的.

중국에서 갑골문甲骨文은 점복占卜 문자이니, 당연히 신의 계시를 구하는 데 사용되었다. 청동기가 예기禮器라는 것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 상주商周 시기 청동기의 명문銘文은 대부분 안쪽 바닥에 있는데, 입구가 작고 몸체가 깊은 고觚는 빛을 비추지 않고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탁본을 뜰 때는 긴 족집게로 아주 작은 탁본 뭉치를 집어 안에 넣어서 떠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 역시 분명 신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現在, 羅泰強調禮儀, 主張金文主要是寫給神祖看的, 屬於宗教文書. 波斯特蓋特、汪濤、威爾金森、貝格利和王海成強調管理, 認為古代書寫材料的主體是簡冊一類軟材料, 甲骨文和金文是刻鑄在硬材料上, 前者易腐, 早就爛掉, 現在看不到.

현재, 나태羅泰는 예의를 강조하며, 금문金文이 주로 신과 조상에게 보이기 위해 쓰인 종교 문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게이트[波斯特蓋特], 왕도汪濤, 윌킨슨[威爾金森], 베글리[貝格利]와 왕해성王海成은 관리를 강조하며, 고대 서사 재료의 주체는 간책簡冊과 같은 부드러운 재료였고,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은 단단한 재료에 새기거나 주조한 것이며, 전자는 쉽게 썩어서 오래전에 썩어 없어져 지금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其實, 甲骨、金文只是商周文字的一部分. 禮儀說和管理說只是各執一偏.

사실, 갑골甲骨, 금문金文은 단지 상주商周 문자의 일부일 뿐이다. 예의설禮儀說과 관리설管理說은 단지 각자 한쪽에 치우친 주장일 뿐이다.

 

漢字和史官
한자와 사관史官

上面提到, 古人有「倉頡為黃帝史」一說, 這個身分很重要. 古人喜歡這麼講, 主要是為了強調, 文字和史官分不開.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대인들에게는 ‘창힐倉頡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신분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던 주된 이유는 문자와 사관史官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史字, 《說文》以為「從又持中」, 或說此即「允執厥中」. 但許慎所謂的這個中, 和古文字的中不一樣, 中間不是圓圈, 而是開口朝上的器物. 其棍狀物, 有人說是簡, 有人說是筆. 如果是簡[只有一枚簡], 下面的器物可能是櫝; 如果是筆, 下面的器物可能是硯. 這個中到底是什麼意思, 學者有各種猜測.

사史 자에 대해, 《설문說文》에서는 ‘우又를 따르고 중中을 잡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며, 혹은 이것이 바로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라[允執厥中]’는 의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허신許慎이 말한 이 중中은 고문자의 중中과는 다르며, 가운데가 원이 아니라 입구가 위로 향한 기물이다. 그 막대기 모양의 물건에 대해 어떤 사람은 간簡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필筆이라고 한다. 만약 간簡[오직 한 개의 간簡]이라면 아래의 기물은 독櫝일 수 있고, 만약 필筆이라면 아래의 기물은 연硯일 수 있다. 이 중中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추측이 있다.

江永說「凡官府簿書謂之中」, 把史與書聯繫在一起. 中國所謂書, 寫字的行為叫書[書寫], 寫下來的字叫書[文字], 書於竹帛, 成為閱讀材料也叫書[竹書、帛書、紙書].

강영江永은 “무릇 관청의 장부를 중中이라 이른다”고 하여 사史와 서書를 연결시켰다. 중국에서 이르는 바 서書란, 글자를 쓰는 행위를 서書[서사書寫]라 하고, 써 놓은 글자를 서書[문자]라 하며, 대나무나 비단에 써서 읽기 자료가 된 것 또한 서書[죽서竹書, 백서帛書, 지서紙書]라고 한다.

王國維受他啟發, 作《釋史》, 說「周六官之屬掌文書者」謂之「史」, 「史之職專以藏書、讀書、作書為事. 其字所以從中, 自當為盛策之器」. 王氏以中為盛策之器, 學者有不同意見, 但史與書有關, 與識文斷字[literacy]有關, 這個判斷沒有錯.

왕국유王國維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석사釋史》를 지어, “주나라 육관六官에 속하여 문서를 관장하는 자”를 ‘사史’라 하고, “사史의 직분은 오로지 책을 보관하고, 책을 읽고, 책을 짓는 일을 맡았다. 그 글자가 중中을 따르는 이유는 마땅히 책策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씨王氏가 중中을 책策을 담는 그릇으로 본 것에 대해 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사史가 서書와 관련이 있고,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literacy]과 관련이 있다는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歷代官府收藏的檔案文書是本來意義上的書, 即狹義的史書. 諸子尊奉的經典, 如儒墨盛稱的三大經典, 《詩》《書》《易》, 即來自史官的典藏. 諸子拿這些古書說事, 對當代政治發議論, 成為今哲學史、思想史、學術史的寶庫, 也是一種特殊的史書. 後世的史書更是層出不窮.

역대 관청에서 수집한 기록 문서는 본래 의미의 서書, 즉 좁은 의미의 사서史書이다. 제자諸子들이 받드는 경전, 예컨대 유가[儒]와 묵가[墨]에서 크게 칭송하는 3대 경전인 《시詩》, 《서書》, 《역易》은 바로 사관史官의 소장품에서 비롯되었다. 제자諸子들은 이 고서들을 가지고 논하며 당대의 정치에 대해 의론을 펼쳤는데, 이는 오늘날 철학사, 사상사, 학술사의 보고가 되었으며, 또한 일종의 특수한 사서史書이기도 하다. 후대의 사서史書는 더욱 끝없이 나왔다.

中華文明跟其他文明比, 歷史連貫史書多是一大特點, 史官文化特別發達.

중화 문명이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역사가 끊이지 않고 사서史書가 많다는 점이 큰 특징이며, 사관史官 문화가 특별히 발달했다.

 

史官是幹什麼的
사관史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나

《國語·鄭語》說, 人類早期, 家為巫史, 巫史不分, 後來絕地天通, 通神要靠官, 由管理宗教事務的官員代表他們與神靈交通, 就像早期民主發展出代議制, 得由大富大貴代表老百姓.

《국어國語》〈정어鄭語〉에 따르면, 인류 초기에는 집집마다 무巫와 사史가 있었고, 무巫와 사史가 구분되지 않았다. 후에 절지천통絕地天通하여, 신과 통하는 것은 관리에 의존해야 했고, 종교 사무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그들을 대표하여 신령과 소통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초기 민주주의가 대의제代議制로 발전하여, 큰 부자와 귀족이 백성을 대표하게 된 것과 같다.

西周金文, 官分天地: 天官叫大史寮, 分祝、宗、卜、史, 主要掌宗教事務; 地官叫卿事寮, 分司土、司馬、司工, 主要掌世俗管理. 《周禮》六官是從天地二官分化.

서주西周 금문金文에서는 관직이 천지天地로 나뉘었다. 천관天官은 대사료大史寮라 불리며 축祝, 종宗, 복卜, 사史로 나뉘어 주로 종교 사무를 관장했고, 지관地官은 경사료卿事寮라 불리며 사토司土, 사마司馬, 사공司工으로 나뉘어 주로 세속 관리를 관장했다. 《주례周禮》의 육관六官은 이 천지天地 이관二官에서 분화된 것이다.

史官本來與宗教活動有關, 上知天文, 下知地理, 熟悉貴族世系和他們的禮儀, 還擅長占卜, 跟西方的僧侶差不多, 也是壟斷宗教和壟斷知識的人. 但中國歷史, 大趨勢是國家大一統, 宗教多元化, 史官與祝、宗、卜日益疏遠, 逐漸向世俗管理靠攏, 以記載政事、政務為職事. 世俗管理的日常工作也靠書史支撐.

사관史官은 본래 종교 활동과 관련이 있어,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알며, 귀족의 세계世系와 그들의 예의에 정통했고, 점복占卜에도 능하여 서양의 승려와 거의 비슷했으며, 종교와 지식을 독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의 큰 흐름은 국가의 대일통大一統과 종교의 다원화였고, 사관史官은 축祝, 종宗, 복卜과 날로 멀어져 점차 세속 관리 쪽으로 기울어, 정사政事와 정무政務를 기록하는 것을 직무로 삼게 되었다. 세속 관리의 일상 업무 또한 서사書史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甲骨文, 史與吏, 吏與事, 本來就是一個字.

갑골문甲骨文에서 사史, 리吏, 사事는 본래 하나의 글자였다.

士文化來自史文化. 士文化發展為官文化. 官者, 管理人員之謂也.

사士 문화는 사史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사士 문화는 관官 문화로 발전했다. 관官이란 관리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中國的官文化特別發達.

중국의 관官 문화는 특별히 발달했다.

秦漢以來, 讀書才能做官, 寫字跟做官有關. 帝國的運行靠文官政治.

진한秦漢 이래로, 책을 읽어야 관리가 될 수 있었고, 글씨를 쓰는 것은 관리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제국의 운영은 문관 정치에 의존했다.

 

誰來書寫
누가 글을 썼는가

治大地域國家, 主要靠書[抄寫文件]與數[財會審計]. 寫字和計數是兩種最基本的管理功能. 我跟漢學家交流, 他們常問, 中國寫字的人是什麼人? 他們是僧侶或奴隸嗎? 我說不是, 中國寫字, 早期靠祝、宗、卜、史, 特別是書史.

넓은 지역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주로 서書[문서 필사]와 수數[회계 감사]에 의존했다. 글씨를 쓰는 것과 수를 세는 것은 두 가지 가장 기본적인 관리 기능이었다. 내가 한학자들과 교류할 때, 그들은 종종 중국에서 글씨를 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는다. 그들은 승려나 노예였는가?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글씨를 쓰는 것은 초기에 축祝, 종宗, 복卜, 사史, 특히 서사書史에 의존했다.

下面是幾個例子:
아래는 몇 가지 예이다.

  1. 師旂鼎: 「引以告中史書.」
    사기정師旂鼎: “이끌어 중사中史에게 고하여 쓰게 했다.”
  2. ■鼎: 「史留受[授]王令[命]書.」
    ■정鼎: “사史 유留가 왕명王命의 서書를 받았다[授].”
  3. ■鼎: 「史黹受[授]王令[命]書.」
    ■정鼎: “사史 치黹가 왕명王命의 서書를 받았다[授].”
  4. 頌鼎、頌簋、頌壺: 「尹氏受[授]王令[命]書.」
    송정頌鼎, 송궤頌簋, 송호頌壺: “윤씨尹氏가 왕명王命의 서書를 받았다[授].”
  5. 格伯簋: 「厥書史戠、武, 立■成■」.
    격백궤格伯簋: “그 서사書史인 시戠와 무武가, ■을 세워 ■을 이루었다.”

書史是史官中的下級官員, 負責用簡冊記錄政令和抄寫文件, 早期歸作冊管. 銅器銘文雖然不是書寫主體[甲骨文也不是], 但會轉引這類記錄. 秦漢以來, 這類小吏叫書吏或刀筆吏, 明清也叫刑名師爺. 書史類似今之所謂書記員, 寫字是基本功. 文人士大夫, 準備當官或已經當官的人, 都拿寫字當看家本事.

서사書史는 사관史官 중의 하급 관리로, 간책簡冊을 사용하여 정령을 기록하고 문서를 필사하는 일을 맡았으며, 초기에는 작책作冊의 관할에 속했다. 동기 명문은 비록 서사의 주체는 아니지만[갑골문도 마찬가지], 이러한 기록을 인용하곤 했다. 진한秦漢 이래로 이러한 하급 관리를 서리書吏 또는 도필리刀筆吏라고 불렀고, 명청明清 시대에는 형명사야刑名師爺라고도 불렀다. 서사書史는 오늘날의 이른바 서기원書記員과 유사하며, 글쓰기는 기본기였다. 문인 사대부, 관리가 되려 하거나 이미 관리가 된 사람들은 모두 글쓰기를 자신의 중요한 기량으로 삼았다.

許慎《說文解字序》引《尉律》: 「學僮十七已上, 始試諷籀書九千字, 乃得為吏. 又以八體試之, 郡移太史, 並課最者以為尚書史, 書或不正, 輒舉劾之.」

허신許慎의 《설문해자서說文解字序》에서는 《위율尉律》을 인용하여, “학동學僮이 17세 이상이 되면, 비로소 주서籀書 9천 자를 외우는 시험을 보아, 이에 관리[吏]가 될 수 있었다. 또한 팔체八體로 시험을 보아, 군郡에서 태사太史에게 보내고, 함께 평가하여 가장 뛰어난 자를 상서사尚書史로 삼았으며, 글씨가 혹 바르지 않으면 즉시 탄핵했다.”고 했다.

張家山274號墓出土的漢律是公元前186年以前的漢律, 年代比《說文》引《尉律》應當更早. 其中《史律》規定, 學童十七歲學史、卜、祝, 考試各有要求. 史科習史書[《史籀》]十五篇, 能讀能寫五千字, 方得為史, 又以八體試之, 課其最者以為尚書卒史: 卜科也學史書, 能讀能寫三千字, 並以卜書三千字測試其預測能力, 卜九中七, 方得為卜; 祝科習祝書十四章, 能背祝書七千字以上, 方得為祝.

장가산張家山 274호 묘에서 출토된 한漢나라 법률은 기원전 186년 이전의 것으로, 그 연대는 《설문說文》이 인용한 《위율尉律》보다 더 일렀을 것이다. 그중 《사율史律》에 따르면, 학동學童이 17세에 사史, 복卜, 축祝을 배우는데, 시험에 각기 요구 사항이 있었다. 사과史科는 사서史書[《사주史籀》] 15편을 익혀, 5천 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비로소 사史가 될 수 있었으며, 또한 팔체八體로 시험을 보아 그중 가장 뛰어난 자를 상서졸사尚書卒史로 삼았다. 복과卜科도 사서史書를 배워, 3천 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했고, 아울러 복서卜書 3천 자로 그 예측 능력을 시험하여, 아홉 번 점을 쳐 일곱 번 맞혀야 비로소 복卜이 될 수 있었다. 축과祝科는 축서祝書 14장을 익혀, 축서祝書 7천 자 이상을 외울 수 있어야 비로소 축祝이 될 수 있었다.

拼音文字, 認字簡單, 難在文法. 我國不一樣, 字是個頂個, 至少要背幾千字, 才勉強夠用.

병음문자拼音文字는 글자를 익히기는 간단하지만, 문법이 어렵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글자를 하나하나 익혀야 하므로, 적어도 수천 자는 외워야 겨우 쓸 만하다.

秦代, 以吏為師, 以法為書, 光靠書史抄不過來. 睡虎地秦簡《法律答問》說, 書史有罪, 罰為史隸. 史隸是抄書的犯人. 隸書叫隸書, 就是這麼來的.

진대秦代에는 관리를 스승으로 삼고 법을 책으로 삼았는데, 서사書史만으로는 필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수호지睡虎地 진간秦簡 《법률답문法律答問》에 따르면, 서사書史가 죄를 지으면 사예史隸로 삼는 벌을 내렸다. 사예史隸는 책을 베껴 쓰는 죄인이었다. 예서隸書를 예서隸書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敦煌出土釋道經卷, 不是主流. 市場上, 有人代寫書信, 更不是主流.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불교, 도교 경전 두루마리는 주류가 아니다. 시장에서 남을 대신해 편지를 써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 또한 더욱 주류가 아니다.

錄入編輯: 張珺
입력 편집: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