譚長生. 中國境內石構墓葬形式的演變略論[J]. 華夏考古, 1994[04]53-62+45.
谭长生. 中国境内石构墓葬形式的演变略论[J]. 华夏考古, 1994[04]53-62+45.
인용회수 14 [2024.12.2. 현재]

中國境內石構墓葬形式的演變略論
중국 경내 석구묘장 형식의 변천에 대한 간략한 논고

담장생(譚長生)

 

Stone-constructed tombs have existed and developed for more than 5,000 years in China. They are distributed mainly in several areas such as Northeast China, Southeast China, the Central Plain, and Xinjiang. They can be divided into several categories, including large stone-constructed tombs, tombs with stone coffins, and tombs with stone outer-coffins. The evolutionary process can be divided into four stages. During the fourth stage, all these categories mixed and developed together. This feature of distribution and evolution is the result of the imbalanced development of the social economy, politics, and culture in different areas. It shows that the cultures of different areas and nationalities can be well-developed through communication and interaction.

돌로 만든 무덤(石構墓)은 중국에서 5,000년 이상 존재하며 발전해 왔다. 이 무덤들은 주로 동북(東北), 동남(東南) 중국(中國), 중원(中原), 신강(新疆) 등 여러 지역에 분포한다. 석구묘는 대형 석구묘, 석관묘(돌널무덤), 그리고 시기별 석곽묘(돌덧널무덤) 등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발전 과정은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4단계 동안에는 이 모든 유형이 서로 융합하여 함께 발전했다. 이러한 석구묘의 분포와 발전 양상은 각 지역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발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이는 또한 서로 다른 지역과 민족의 문화가 교류하고 융합함으로써 훌륭하게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목차

1. 유형(類型)

1.1 석관묘(石棺墓)

1.2. 석곽묘(石槨墓)

1.3. 석실묘(石室墓)

1.3.1. 崖墓 절벽무덤

1.3.2. 石砌墓室 돌로 쌓은 무덤방

1.3.3. 石、磚、灰漿混筑墓室 돌, 벽돌, 회반죽을 섞어 지은 무덤방

1.4. 대형 석구묘(大型石構墓)

1.4.1. 東北地區積石冢墓 동북지역의 돌무지무덤

1.4.2. 西南地區大石墓 서남지역의 큰돌무덤

1.4.3. 新疆石圍石堆墓 신강의 돌울타리 돌무지무덤

1.4.4. 石棚墓 고인돌무덤

2. 분포(分布)

2.1 동북지역(東北地區)

2.2. 중원지역(中原地區)

2.3 서남지역(西南地區)

2.4. 신강지역(新疆地區)

3. 유변(流變)

3.1. 대형 석구묘 단계(大型石構墓階段)

3.2. 석관 석곽묘 단계(石棺石椁墓階段)

3.3. 석실묘 단계(石室墓階段)

3.4. 융합 발전 단계(融合發展階段)

4. 특징(特徵)

주석(注釋)

 

用石質原料構築的墓葬,在全世界有比較廣泛的分布。中國境內的石構墓葬,目前發現年代最早的實例是仰韶文化元君廟墓地的石棺[1]和紅山文化積石冢,從那時到明清時期的數千年的歷史中,各種各樣的石構墓葬在全國各地有較廣泛的分布。在長期的社會經濟文化發展過程中,石質的和陶質、木質的等各種質料的葬具,以及它們的不同形式,隨著社會政治、經濟、思想文化、風俗習慣的變化,彼此相互影響,交匯融合,成為古代墓葬形制演變的主要因素之一,構成了一幅豐富多彩的歷史文化風俗畫卷。國內外學者曾對中國各主要區域的石構墓葬進行過比較深入的研究工作,並且取得了很多成果。在前人的研究基礎上,本文擬從比較大的時間和空間範圍,對石構墓葬的基本類型、分布狀況,以及它們的特徵和演變情況,作一些粗淺的考察分析。

돌을 재료로 써서 만든 무덤은 전 세계에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중국(中國) 안에서 발견된 돌무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앙소문화(仰韶文化) 원군묘(元君廟) 묘지에서 나온 돌널(석관)[1]과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 그때부터 명(明)·청(清)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돌무덤이 중국(中國) 전역에 널리 만들어졌다. 오랜 사회·경제·문화 발전 과정에서 돌, 흙, 나무 등 여러 재료로 만든 널과 그 형태는 사회, 정치, 경제, 사상, 문화, 풍습의 변화에 따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섞였다. 이는 고대 무덤 양식이 변화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고, 다채로운 역사 문화 풍속도를 만들어냈다. 국내외 학자들은 중국(中國) 각 주요 지역의 돌무덤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논문은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더 넓은 시간과 공간 범위에서 돌무덤의 기본 종류, 분포, 특징, 그리고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유형(類型)

石構墓葬出現年代早,延續時間長,分布範圍廣,形制變化比較繁雜。為了更好的分析研究石構墓葬的演變规律和發展趨勢,先利用比較熟知的木質葬具的一些名詞形式,相應的將其分為石棺墓、石椁墓、石室墓,以及大型石構墓等主要類型。

돌무덤은 일찍 나타나 오랫동안 이어졌고, 넓은 지역에 퍼져 있으며 그 형태 변화가 꽤 복잡하다. 돌무덤의 변화 규칙과 발전 방향을 더 잘 분석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나무 널(목관)의 용어를 빌려 돌널무덤(석관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그리고 대형 돌무덤(대형 석구묘) 등으로 우선 나누어 보겠다.

 

1.1 석관묘(石棺墓)

石棺墓是石構墓葬中延續時間最長的一種形式。目前發現最早的石棺墓是仰韶文化元君廟墓地的M458,此後的數千年中,石棺的形制經歷了從簡單粗糙的原始型到精雕細刻的成熟型的发展过程,大致可分為三型。

돌널무덤(석관묘)은 돌무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형태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돌널무덤은 앙소문화(仰韶文化) 원군묘(元君廟) 묘지의 M458호 무덤이다. 그 후 수천 년 동안 돌널의 형태는 단순하고 거친 원시형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성숙형으로 발전했으며,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A型:原始型石棺。在長方形墓穴中用自然礫石堆砌而成。元君廟墓地的M458,墓底有二層台,台上堆砌數層礫石,形成石棺。

A형: 원시형 돌널. 네모난 무덤 구덩이 안에 자연석인 자갈돌을 쌓아 만들었다. 원군묘(元君廟) M458호 무덤은 무덤 바닥에 2층 단이 있고, 그 단 위에 자갈돌을 여러 겹 쌓아 돌널을 만들었다.

B型:簡易型石棺。在墓穴內用較整齊的,或略經加工的石塊砌成石棺。石材一般為當地或就近所產。石棺的砌成有多種情況:四壁、底蓋完全由石塊砌成;四壁加蓋而無底或有底而無蓋;兩壁加蓋而無底或有底而無蓋;有的僅在土壙上加蓋幾塊石塊而就。此型石棺可分為三式。

B형: 간이형 돌널. 무덤 구덩이 안에 비교적 반듯하거나 약간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돌은 보통 그 지역이나 가까운 곳에서 구했다. 돌널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네 벽과 바닥, 덮개를 모두 돌로 쌓거나, 네 벽과 덮개만 있고 바닥은 없거나, 바닥은 있는데 덮개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두 벽과 덮개만 있고 바닥이 없거나, 바닥은 있는데 덮개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흙구덩이 위에 돌 몇 개만 덮어 만들기도 했다. 이 유형은 세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1式:長方形石棺。一般一頭寬,一頭窄,長1.7米左右。遼寧凌源縣城子山遺址紅山文化墓葬 M2[2],在墓壙內用薄石板壘砌長方形石棺。石棺頭寬尾窄,底大口小。棺壁壘砌整齊,棺底鋪一層石板,為把石板鋪平,先鋪一層0.4厘米厚的細砂。石棺口長2、寬0.45、深0.6米。棺口蓋有石板。甘肅景泰張家台遺址馬家窯文化半山類型墓葬中的M5[3],在長方形土坑內,四壁用略經修整的自然板石擋立而成,光面向內,墓口略小於基底,蓋用數片板石拼湊叠合而成。

1식: 장방형 돌널. 보통 한쪽은 넓고 다른 쪽은 좁으며 길이는 1.7미터 정도이다. 요녕(遼寧) 능원현(凌源縣) 성자산(城子山) 유적의 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 M2호는[2] 무덤 구덩이 안에 얇은 돌판을 쌓아 네모난 돌널을 만들었다. 머리 쪽은 넓고 발치 쪽은 좁으며, 바닥은 넓고 입구는 좁았다. 널의 벽은 반듯하게 쌓았고 바닥에는 돌판 한 층을 깔았다. 돌판을 평평하게 깔기 위해 먼저 0.4cm 두께의 고운 모래를 깔았다. 돌널 입구는 길이 2미터, 너비 0.45미터, 깊이 0.6미터였다. 입구는 돌판으로 덮었다. 감숙(甘肅) 경태(景泰) 장가대(張家台) 유적의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 반산(半山) 유형 무덤 M5호는[3] 네모난 흙구덩이 안에 약간 다듬은 자연 판석을 세워 네 벽을 만들었는데, 매끈한 면이 안쪽을 향했다. 무덤 입구는 바닥보다 약간 작았고, 덮개는 여러 판석을 겹쳐 만들었다.

2式:有付棺石棺。付棺的位置有兩種情況。一種是付棺在主棺的一端,與主棺同一方向,或在主棺的一端用石塊隔出付棺;另一種是付棺在主棺的一側,與主棺成直角相交。付棺內有人骨或隨葬品,以隨葬品居多。吉林西團山墓地1號棺[4],由13塊大石砌成,長1.7、中部寬0.35、深0.4米。付棺砌在主棺尾端,近正方形,長、寬、深都是0.3米。付棺內有隨葬品。四川理縣子達 SZM1A和SZM1B[5], SZM1A為主棺,緊靠主棺左側又建造了付棺,兩棺中間共一石壁。主、付棺內各埋尸骨一具。

2식: 덧널(부관) 딸린 돌널. 덧널의 위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덧널이 주된 널의 한쪽 끝에 같은 방향으로 놓이거나, 주된 널의 한쪽 끝을 돌로 막아 덧널을 만드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덧널이 주된 널의 옆에 직각으로 놓이는 경우이다. 덧널 안에는 사람 뼈나 껴묻거리(부장품)가 있었는데, 껴묻거리가 더 많았다. 길림(吉林) 서단산(西團山) 묘지 1호 널은[4] 큰 돌 13개로 만들었고, 길이는 1.7미터, 가운데 너비는 0.35미터, 깊이는 0.4미터였다. 덧널은 주된 널의 발치 쪽에 만들어졌고 정사각형에 가까웠으며, 가로, 세로, 깊이가 모두 0.3미터였다. 덧널 안에는 껴묻거리가 있었다. 사천(四川) 이현(理縣) 자달(子達)의 SZM1A와 SZM1B 무덤은[5] SZM1A가 주된 널이고, 그 왼쪽 옆에 덧널을 만들었는데 두 널은 돌벽 하나를 공유했다. 주된 널과 덧널에는 각각 시신 한 구씩 묻혀 있었다.

3式:近方形小石棺。是專為幼兒砌筑的。石棺的大小視幼兒的大小而定,吉林西團山墓地6號棺[6],蓋石由十塊小石组成,四壁由5塊石板砌就,棺底鋪2塊。棺長0.77、寬0.3、深0.17米。棺內有小兒牙齒和頭骨碎片。

3식: 정사각형에 가까운 작은 돌널. 주로 어린아이를 위해 만들었다. 돌널의 크기는 아이의 크기에 따라 정해졌다. 길림(吉林) 서단산(西團山) 묘지 6호 널은[6] 덮개돌이 작은 돌 10개로 이루어졌고, 네 벽은 돌판 5개로, 바닥은 2개로 만들었다. 널의 길이는 0.77미터, 너비는 0.3미터, 깊이는 0.17미터였다. 널 안에는 아이의 이빨과 머리뼈 조각이 있었다.

C型:成熟型石棺。一般由6塊比較堅硬,經過雕鑿而規整的石板組合而成。形狀類似木棺而略大。東漢時期的此類石棺,除有些棺蓋素面無裝飾外,棺身一般刻有淺浮雕畫像。四川郫縣新勝公社二號東漢墓石棺一[7],棺長2.17、下寬0.78、上寬0.68、通高0.9米,棺蓋呈弧形,棺蓋及四壁都刻有淺浮雕畫像。隋唐以後,石棺除底以外,一般通體滿飾浮雕花紋、四神圖像,或刻陀羅尼經等。西安西郊隋李靜訓墓[8],石棺為長方形,三間有浮雕的房屋形狀,通長1.92、寬0.89、高1.22米。蓋是由一塊整石雕成的歇山式屋頂。棺壁合縫處有鐵細腰。西面中心間雕板門兩扇,各有鐵門環一個。柱及牆上有淺浮雕和線刻圖案。

C형: 성숙형 돌널. 보통 단단하고 잘 다듬어 조각한 돌판 6개를 조립해 만들었다. 모양은 나무 널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컸다. 동한(東漢) 시대의 이런 돌널은 덮개에 장식이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널 몸체에는 보통 얕은 돋을새김 그림(천부조 화상)이 새겨져 있었다. 사천(四川) 비현(郫縣) 신승(新勝) 인민공사 2호 동한(東漢) 무덤의 돌널은[7] 길이가 2.17미터, 아래 너비 0.78미터, 위 너비 0.68미터, 전체 높이 0.9미터였다. 덮개는 아치형이고 덮개와 네 벽에는 모두 얕은 돋을새김 그림이 있었다. 수(隋)·당(唐) 이후에는 돌널 바닥을 제외한 전체에 돋을새김 무늬, 사신도(四神圖)를 새기거나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새겼다. 서안(西安) 서쪽 교외에 있는 수(隋)나라 이정훈(李靜訓)의 무덤은[8] 돌널이 네모나고, 돋을새김이 있는 세 칸짜리 집 모양이었다. 전체 길이는 1.92미터, 너비 0.89미터, 높이 1.22미터였다. 덮개는 통돌 하나를 깎아 만든 팔작지붕 모양이었다. 널 벽이 만나는 부분에는 쇠로 된 ‘가는 허리’ 장식이 있었다. 서쪽 중앙 칸에는 판문 두 짝이 조각되어 있고 각각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기둥과 벽에는 얕은 돋을새김과 선으로 새긴 그림이 있었다.

 

1.2. 석곽묘(石槨墓)

隨著生產力的發展,社會生活的進步,原始而簡易的葬具向多層次發展。山東龍山文化的東海峪墓地已發現有石槨結構[9]。中原地區商周時期普遍實行的棺椁制度,對石椁墓的形成和發展起了重要的影響作用。石椁的形式也經歷了由自然礫石簡單填砌到精心加工、結構完整的发展过程,大致可分為兩種類型。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회생활이 나아지면서, 원시적이고 간단했던 무덤 도구는 여러 겹의 구조로 발전했다. 산동(山東) 용산문화(龍山文化)의 동해욕(東海峪) 묘지에서는 이미 돌덧널(석곽) 구조가 발견되었다.[9] 중원(中原) 지역에서 상(商)·주(周) 시대에 널리 쓰인 널(관)과 덧널(곽) 제도는 돌덧널무덤이 생기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돌덧널의 형태도 자연석인 자갈돌을 간단히 채워 넣는 방식에서, 정교하게 가공하여 완전한 구조를 갖추는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A型:在棺與土壙之間用礫石鋪叠砌成,底蓋和四壁的厚度沒有一定的规律,年代在西周晚到春秋早期的內蒙古寧城縣南山根石槨墓[10],槨室的四壁用礫石叠砌,高約1.8米。厚度不等,兩端各砌三層,厚60————70厘米,兩側各砌一層,厚約20-30厘米。底部用小石板平鋪,厚約10厘米。上面頂蓋用小石板以叠澀的方法向中間鋪砌。

A형: 널과 흙구덩이 사이에 자갈돌을 깔고 쌓아 만들었다. 바닥, 덮개, 네 벽의 두께는 일정하지 않았다. 서주(西周) 말기에서 춘추(春秋) 초기에 해당하는 내몽고(內蒙古) 영성현(寧城縣) 남산근(南山根)의 돌덧널무덤은[10] 덧널방의 네 벽을 자갈돌로 쌓았는데 높이가 약 1.8미터였다. 두께는 일정치 않았는데, 양쪽 끝은 세 겹으로 쌓아 두께가 60-70센티미터였고, 양옆은 한 겹으로 쌓아 두께가 약 20-30센티미터였다. 바닥은 작은 돌판을 깔았는데 두께가 약 10센티미터였다. 위쪽 덮개는 작은 돌판을 이용해 천장을 활처럼 오므려 쌓는 방식(첩삽법)으로 중앙을 향해 쌓아나갔다.

B型:用加工整齊的條石在棺外合成。條石之間接合緊密,結構完整。唐章懷太子墓、懿德太子墓[11],石椁為廡殿式,長4、寬3、高2米,由33塊規整的大石板組成。

B형: 잘 다듬은 길고 네모난 돌(장대석)을 널 바깥에 조립해 만들었다. 장대석 사이는 빈틈없이 딱 맞고 구조가 완전했다. 당(唐)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와 의덕태자(懿德太子)의 무덤은[11] 돌덧널이 우진각지붕(무전식) 모양이었고, 길이 4미터, 너비 3미터, 높이 2미터였으며, 반듯하게 다듬은 큰 돌판 33개로 이루어졌다.

 

1.3. 석실묘(石室墓)

西漢中期以後,洞室墓在中原等一些地區盛行,仿照生人府第構築墓室成為風尚,石材比其他建築材料更堅固耐用,並且具有較好的防盜和美觀性能,符合人們期望陰宅經久無毁的心態。因此,用石材構築墓室一時風靡,而且其基本因素一直成為漢以後墓葬形制的主要成分之一。目前,西漢以來利用自然山岩開鑿的墓室和用石材構築的墓室已有較多的發現,大致可分為三種類型。

서한(西漢) 중기 이후, 굴식 무덤(동실묘)이 중원(中原) 등 일부 지역에서 유행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저택을 본떠 무덤방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돌은 다른 건축 재료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갔으며, 도둑을 막고 보기에도 좋았다. 이는 저승의 집(음택)이 영원히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과 잘 맞았다. 그래서 돌로 무덤방을 만드는 것이 한때 크게 유행했고, 그 기본 요소는 한(漢)나라 이후 무덤 양식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현재까지 서한(西漢) 시대 이래로 자연 암벽을 파서 만들거나 돌로 쌓은 무덤방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3.1. 崖墓 절벽무덤

兩漢時期,有些墓葬是在山崖或岩層中開鑿洞穴為墓室,習稱為崖墓。幕的規模大小不等,有單室、前後室和多室。大型崖墓的墓道多為狹長的橫穴,一般都附有排水設施 河北、山東、江蘇等地已發現西漢時期的大型崖墓。河北滿城漢墓[12],開鑿於陵山主峰東坡接近山頂處的山岩中,為中山靖王劉勝夫婦“同墳異藏”墓,規模宏大。劉勝墓全長51.7、最寬處37.5、最高處6.8米 由墓道、甬道、南耳室、北耳室、中室和后室六部分構成。墓頂作拱形或穹窿頂,周壁鑿成弧形。墓內有完整的排水設施。

양한(兩漢) 시기에는 산 절벽이나 바위층에 굴을 파서 무덤방으로 삼는 무덤이 있었는데, 이를 보통 절벽무덤(애묘)이라 부른다. 무덤 규모는 다양해서, 방이 하나인 것, 앞뒤로 방이 있는 것, 방이 여러 개인 것이 있었다. 큰 절벽무덤의 무덤길(묘도)은 대부분 좁고 긴 횡혈식이었고, 보통 물 빼는 시설(배수 시설)이 딸려 있었다.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소(江蘇) 등지에서 서한(西漢) 시기의 대형 절벽무덤이 발견되었다. 하북(河北) 만성한묘(滿城漢墓)는[12] 능산(陵山) 주봉 동쪽 비탈의 정상 가까운 바위 속에 만들었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 부부가 “같은 무덤에 따로 묻힌(동분이장)” 무덤으로 규모가 매우 컸다. 유승(劉勝)의 무덤은 전체 길이 51.7미터, 가장 넓은 곳 37.5미터, 가장 높은 곳 6.8미터로, 무덤길, 널길(용도), 남쪽 곁방(남이실), 북쪽 곁방(북이실), 중앙방(중실), 뒤방(후실)의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 천장은 아치형이나 둥근 천장(궁륭정) 모양이고, 주변 벽은 곡선으로 팠다. 무덤 안에는 완전한 배수 시설이 있었다.

東漢時期,崖墓曾流行於四川地區,俗稱蠻洞。往往是幾十座聚集於一處,分布密集,錯落有致。有的一墓數室,放置各類葬具多副,可能為家族墓。成都天回山3號墓[13],是一座大型崖墓,墓室長19.05、寬1.75——2、高1.86米,有前、后室和6個側室,放置瓦棺、石棺等14副。

동한(東漢) 시기에는 절벽무덤이 사천(四川) 지역에서 유행했는데, 흔히 만동(蠻洞)이라 불렸다. 보통 수십 기가 한 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고, 들쑥날쑥하면서도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어떤 무덤은 방이 여러 개이고 다양한 널(장구)이 여러 개 놓여 있어, 가족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도(成都) 천회산(天回山) 3호 무덤은[13] 큰 절벽무덤으로, 무덤방 길이가 19.05미터, 너비 1.75-2미터, 높이 1.86미터였다. 앞방, 뒷방과 6개의 곁방이 있었고, 기와널(와관), 돌널 등 14개의 널이 놓여 있었다.

 

1.3.2. 石砌墓室 돌로 쌓은 무덤방

主要反映仿照生人府第建造陰宅的設計構思,用石材或磚、石混砌墓室的墓葬,西漢時期出現后,時斷時續,一直到明清的帝王陵墓,仍在沿襲,其基本形狀可分為A、B兩型,即方形或長方形墓室和圓形墓室。

이는 주로 살아있는 사람의 저택을 본떠 저승의 집(음택)을 만들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돌이나 벽돌과 돌을 섞어 무덤방을 만든 무덤으로, 서한(西漢) 시기에 나타난 후 명(明)·청(清) 시대 황제릉까지 이어졌다. 기본 모양은 네모난 무덤방과 둥근 무덤방 두 가지(A, B형)로 나뉜다.

A型:墓室平面呈方形或長方形,用石材或者磚、石等材料混砌。西漢晚期出現,到東漢末年盛極而衰的一種石構多室墓,在石構件上鐫刻畫像,習稱畫像石墓。主要分布在山東和蘇北、河南南陽和湖北襄樊、陝北與晉西北等地。著名的沂南畫像石墓[14],有前、中、后三個主室,東面三個側室,西面兩個側室,共計8室。前室和中室均設中柱,形成面闊二間,進深二間的格局,后室由壁石隔成并列的兩間,結構嚴謹。墓中畫像石42塊,畫像73幅,分布于墓門和三個主室的四壁。

A형: 무덤방 평면이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돌이나 벽돌과 돌 같은 재료를 섞어 쌓았다. 서한(西漢) 말기에 나타나 동한(東漢) 말기에 크게 유행했다가 쇠퇴한, 방이 여러 개인 돌무덤이다. 돌 부재에 그림을 새겨 보통 화상석묘(畫像石墓)라고 부른다. 주로 산동(山東)과 소북(蘇北), 하남(河南) 남양(南陽)과 호북(湖北) 양번(襄樊), 섬북(陝北)과 진서북(晋西北) 등지에 분포한다. 유명한 기남화상석묘(沂南畫像石墓)는[14] 앞방, 중앙방, 뒷방의 세 주실과 동쪽에 곁방 셋, 서쪽에 곁방 둘, 총 8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방과 중앙방에는 모두 가운데 기둥이 있어 정면 2칸, 안쪽 깊이 2칸의 구조를 이룬다. 뒷방은 벽돌로 나란히 두 칸으로 나뉘어 있어 구조가 치밀하다. 무덤에는 화상석 42개, 그림 73점이 있으며 무덤문과 세 주실의 네 벽에 분포해 있다.

B型:圓形墓室,用石材或磚、石等材料混合砌成。一般墓室平面呈圓形或橢圓形,穹窿頂。比較早的山東臨淄北朝崔氏墓[15]為單室,五代時期的后蜀和陵[16],三個墓室平面均呈規整的正圓形,穹窿頂。

B형: 둥근 무덤방. 돌이나 벽돌과 돌 같은 재료를 섞어 쌓았다. 보통 무덤방 평면이 원형이나 타원형이고, 천장은 둥근 돔(궁륭정) 형태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산동(山東) 임치(臨淄)의 북조(北朝) 최씨(崔氏) 무덤은[15] 방이 하나였다. 오대(五代) 시기 후촉(后蜀)의 화릉(和陵)은[16] 세 무덤방의 평면이 모두 반듯한 원형이고 둥근 돔 천장이었다.

 

1.3.3. 石、磚、灰漿混筑墓室 돌, 벽돌, 회반죽을 섞어 지은 무덤방

南宋的帝王攢宮,據傳為“石藏子”結構,可惜已毀,不能見其面貌。元、明時期,一些官紳富戶,多用石料、磚材以及石灰、米漿和松香等混筑墓室,整個墓室構成一道嚴密堅固的防腐防盜體系。蘇州吳張士誠母曹氏墓[17]”,是目前發現的石藏子的唯一實例。墓室的四周用三合土澆漿、石板、青磚五層混筑。由外及里 第一層用長1.1、寬0.65、厚0.25米的石板豎身叠六層,各層石板上鑿有對稱雙圓孔,雙孔內安圓木,彼此貫穿;第二層為厚1.1米的“三合土澆漿”和碎石,至3.34米高處,復用不規則石板順身平叠四層;第三層為厚0.37米的磚牆;第四層為厚0.55米的石灰和黃土,經過夯實,三、四層至2.72米高處,叠放石板作橫列式;第五層為1.8米厚的石灰澆漿。整個墓壙經多層混筑,結為一體,非常堅固。

남송(南宋) 황제들의 임시 무덤인 찬궁(攢宮)은 ‘석장자(石藏子)’ 구조라고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파괴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원(元)·명(明) 시기 일부 관리나 부자들은 돌, 벽돌, 석회, 쌀뜨물, 송진 등을 섞어 무덤방을 지었다. 이 무덤방 전체는 부패와 도굴을 막는 매우 단단한 구조를 이뤘다. 소주(蘇州)에 있는 오(吳)나라 장사성(張士誠)의 어머니 조씨(曹氏) 무덤은[17] 현재 발견된 유일한 석장자(石藏子)의 실제 사례이다. 무덤방 사방은 삼합토(三合土) 반죽, 돌판, 푸른 벽돌 등 다섯 겹을 섞어 지었다. 밖에서 안으로, 첫 번째 겹은 길이 1.1미터, 너비 0.65미터, 두께 0.25미터의 돌판을 세워서 여섯 층으로 쌓았다. 각 층의 돌판에는 대칭되는 둥근 구멍 두 개를 뚫고 그 안에 둥근 나무를 넣어 서로 연결했다. 두 번째 겹은 두께 1.1미터의 삼합토 반죽과 깬돌로 채웠고, 3.34미터 높이까지 쌓은 뒤 불규칙한 돌판을 가로로 눕혀 네 겹을 더 쌓았다. 세 번째 겹은 두께 0.37미터의 벽돌담이었다. 네 번째 겹은 두께 0.55미터의 석회와 황토를 다져 만들었고, 세 번째와 네 번째 겹은 2.72미터 높이에서 돌판을 가로로 쌓았다. 다섯 번째 겹은 1.8미터 두께의 석회 반죽이었다. 무덤 구덩이 전체가 여러 겹으로 지어져 하나로 뭉쳐 매우 견고했다.

 

1.4. 대형 석구묘(大型石構墓)

在遼寧、新疆、四川、雲南及浙江等一些地區,先后發現用石料构筑的大型墓葬。這些墓葬一般反映了比較低下的生產力,是石構墓葬原始而粗獷時期的產物。這類墓葬各個地區以及各個時期的形制有較大差別。

요녕(遼寧), 신강(新疆), 사천(四川), 운남(雲南), 절강(浙江) 등 일부 지역에서 돌로 지은 대형 무덤들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 무덤들은 일반적으로 생산력이 비교적 낮았던 시기를 반영하며, 돌무덤의 원시적이고 거친 시기의 산물이다. 이런 종류의 무덤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형태가 크게 다르다.

 

1.4.1. 東北地區積石冢墓 동북지역의 돌무지무덤

東北地區的紅山文化遺跡點、遼東老鐵山等地,先后發現有積石冢墓。紅山文化的積石冢,都是用石塊壘牆,形成冢,冢內以石筑墓。積石冢位于山丘最高處,結構複雜,冢內大、小墓有别。墓內只隨葬玉器,墓外排列彩陶筒形器。冢与冢相連,构成有機的统一體。遼寧牛河梁紅山文化積石冢[18],Z2主体呈方形,東西長17.5、南北寬18.7米,冢中央是一座大型石筑墓。Z1地上主体結構平面亦呈長方“回”形,內牆外墓葬排列密集,大致成行,往往兩墓相連,共用一壁。

동북(東北) 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지, 요동(遼東) 노철산(老鐵山) 등지에서 돌무지무덤(적석총)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돌무지무덤은 모두 돌로 담을 쌓아 무더기(총)를 만들고, 그 안에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 돌무지무덤은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구조가 복잡하고, 무더기 안에는 크고 작은 무덤이 섞여 있다. 무덤 안에는 옥기만 껴묻거리로 넣었고, 무덤 밖에는 채색토기인 통 모양 그릇을 줄지어 놓았다. 무더기와 무더기가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인 하나를 이룬다. 요녕(遼寧)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은,[18] Z2호의 본체가 네모 모양으로 동서 길이 17.5미터, 남북 너비 18.7미터이며, 무더기 중앙에는 큰 돌무덤이 하나 있다. Z1호의 지상 본체 구조 평면 역시 긴 ‘回’자 모양이며, 안쪽 담 바깥으로 무덤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종종 두 무덤이 서로 붙어 벽 하나를 공유하기도 했다.

遼東老鐵山積石墓[19]是依山脊坡度筑于地表的一種多室墓葬。墓長一般為7——20米,墓內分筑數量不等的墓室。單排墓室以一次筑成為多,多排墓室般為多次筑成。

요동(遼東) 노철산(老鐵山)의 돌무지무덤(적석묘)은[19] 산등성이 경사면을 따라 땅 위에 지은, 방이 여러 개인 무덤이다. 무덤 길이는 보통 7~20미터이고, 무덤 안에는 여러 개의 무덤방이 나뉘어 있다. 한 줄로 된 무덤방은 대부분 한 번에 지었고, 여러 줄로 된 무덤방은 보통 여러 번에 걸쳐 지었다.

 

1.4.2. 西南地區大石墓 서남지역의 큰돌무덤

主要分布在四川西南安寧河流域和滇西金沙江至怒江之間的西南地區大石墓[20],系在地面上用巨石砌成,整体為長方形石室。主要有四種類型。A型,兩側壁和后端用長方形大石豎立而成,前端用碎石壘砌封閉,頂部用大石覆盖。B型,在長方形石室周圍用碎石壘砌圓丘,其上再加封土,形成“墓尾”。C型,在長方形石室一側壁正中開辟墓門,墓門兩側各豎立一列大石,构成石廊式墓道,整座墓俯視成“T”形。D型,在墓室內用石板隔為多室,或分層筑墓室,一層中又隔為幾個小室。大石墓內人骨直接堆積在墓底,骨架錯亂,系多次入葬,每墓入葬數人至百余人不等,男女老小都有。

주로 사천(四川) 서남부 안녕하(安寧河) 유역과 운남(雲南) 서부의 금사강(金沙江)에서 노강(怒江) 사이에 분포하는 서남(西南) 지역 큰돌무덤(대석묘)은[20] 땅 위에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들었고, 전체적으로 네모난 돌방 형태이다. 주로 네 가지 유형이 있다. A형은 양쪽 벽과 뒤쪽 끝을 네모난 큰 돌을 세워 만들고, 앞쪽은 깬돌을 쌓아 막았으며, 꼭대기는 큰 돌로 덮었다. B형은 네모난 돌방 주위에 깬돌을 쌓아 둥근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무덤 꼬리(묘미)’를 만들었다. C형은 네모난 돌방의 한쪽 벽 중앙에 무덤문을 내고, 문 양옆에 큰 돌을 한 줄씩 세워 복도식 무덤길을 만들었는데, 위에서 보면 전체 무덤이 ‘T’자 모양이다. D형은 무덤방 안을 돌판으로 나누어 여러 방을 만들거나, 층을 나누어 무덤방을 지었는데 한 층 안을 다시 여러 작은 방으로 나누었다. 큰돌무덤 안에는 사람 뼈가 무덤 바닥에 바로 쌓여 있고 뼈대가 흐트러져 있는데, 여러 번 사람을 묻었기 때문이다. 무덤마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백여 명까지 묻혔고,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아이가 모두 있었다.

 

1.4.3. 新疆石圍石堆墓 신강의 돌울타리 돌무지무덤

在新疆的北部地區比較廣泛地分布着種石圍石堆菜,這些墓葬在地面上有明顯的標志,有的用卵石或塊石圍成石垣,其形狀多為圓形,長圓形或圓角三角形,有些石垣前立石人或三四塊條石,或者在地面上用卵石堆成一個圓丘形石堆。石圍或石堆下為墓室,多為豎穴石室,一些墓地的石圍內還有豎穴土坑墓。石室多為長圓形或長條形,或為直壁,或為袋狀,石室口部用巨大石板棚蓋,有的還蓋有木頭。石室中可見到簡單葬具。墓葬除個別為一次葬外,基本上都是二次葬,而且多為叢葬墓,多者一墓達數人。早期的墓葬年代可在西周春秋時期,晚期可達隋唐。西周春秋時期的和靜察吾乎溝口一號墓地83M18[21],石垣呈長圓形,長5、寬3.2米。石圍內偏西南處為豎穴石室墓,略呈袋狀,石室口上棚蓋大塊大石板。石室中有二次葬的13個個體。在石圍外西北邊緣有3座馬頭坑,西南邊緣有3座兒童墓。

신강(新疆) 북부 지역에는 돌울타리 돌무지무덤이 비교적 넓게 퍼져 있다. 이 무덤들은 땅 위에 뚜렷한 표시가 있다. 어떤 것은 조약돌이나 깬돌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모양은 대부분 원형, 타원형, 또는 모서리가 둥근 삼각형이다. 어떤 돌울타리 앞에는 돌사람(석인)이나 서너 개의 길쭉한 돌을 세워두기도 하고, 혹은 땅 위에 조약돌을 쌓아 둥근 언덕 모양의 돌무더기를 만들기도 했다. 돌울타리나 돌무더기 아래에는 무덤방이 있는데, 대부분 수직굴 돌방(수혈 석실)이며, 일부 묘지에서는 돌울타리 안에 수직 흙구덩이무덤(수혈 토광묘)도 있다. 돌방은 대부분 타원형이나 길쭉한 모양이며, 벽이 수직이거나 자루 모양이다. 돌방 입구는 거대한 돌판으로 덮었고, 어떤 것은 나무를 덮기도 했다. 돌방 안에서는 간단한 널이 보이기도 한다. 무덤은 일부 한 번만 쓴 것을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두 번 이상 쓴 2차장이며, 여러 사람을 함께 묻은 무덤이 많아 한 무덤에 여러 명이 묻히기도 했다. 이른 시기 무덤은 서주(西周)·춘추(春秋) 시대까지 올라가고, 늦은 시기는 수(隋)·당(唐) 시대에 이른다. 서주·춘추 시기의 화정(和靜) 찰오호구(察吾乎溝口) 1호 묘지 83M18호 무덤은[21] 돌울타리가 타원형이고 길이 5미터, 너비 3.2미터이다. 돌울타리 안 남서쪽에는 수직굴 돌방무덤이 있는데, 약간 자루 모양이며 돌방 입구는 큰 돌판으로 덮여 있다. 돌방 안에는 2차장으로 묻힌 13명의 유골이 있었다. 돌울타리 밖 북서쪽 가장자리에는 말머리 구덩이(마두갱) 3개가, 남서쪽 가장자리에는 어린이 무덤 3기가 있었다.

 

1.4.4. 石棚墓 고인돌무덤

我國境內的石棚墓主要分布在遼寧東部、山東、浙江等沿海地區[22],大部分石棚坐落在臨河的台地上,也有在高山峻嶺上。石棚有單個的,也有大量石棚集聚在一片,形成石棚群。石棚主要有兩種形制。一種是在地面上豎立數塊石板,上面盖一塊大石板构成墓室,另一種是用自然的规则和不规则大石盖放在地上,下面盖有板石、積石、土坑等不同形制的墓室,有的還有壁龕。遼東半岛的石棚多為花崗石,壁室和盖石多經加工磨制。壁石套合較整齊。盖石伸出壁石之外,形成棚檐。盖縣石棚山的大石棚[23],盖石長8.10、寬5.6、厚0.45米,重達幾十噸。浙江瑞安岱石山石棚[24],盖石下四角各用一塊不规则的石條作柱,再用石塊和礫石圍牆。石棚室内高0.75米,室内地面較室外地面低0.47米。

중국(中國) 내의 고인돌(석붕묘)은 주로 요녕(遼寧) 동부, 산동(山東), 절강(浙江) 등 해안 지역에 분포한다.[22] 대부분의 고인돌은 강가 언덕(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높은 산에 있는 경우도 있다. 고인돌은 하나만 있기도 하고, 한곳에 많이 모여 고인돌군을 이루기도 한다. 고인돌은 주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땅 위에 돌판 여러 개를 세우고 그 위에 큰 덮개돌을 올려 무덤방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듯하거나 불규칙한 자연석 큰 돌을 땅 위에 덮개처럼 놓고, 그 아래에 판석, 돌무지, 흙구덩이 등 다른 형태의 무덤방을 만드는 방식인데, 어떤 것은 벽감(벽에 움푹 파서 만든 공간)이 있기도 하다. 요동(遼東) 반도의 고인돌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벽과 덮개돌은 대부분 갈아서 다듬었다. 벽을 이룬 돌들은 비교적 잘 맞아떨어진다. 덮개돌은 벽 바깥으로 튀어나와 처마를 이룬다. 개현(蓋縣) 석붕산(石棚山)의 큰 고인돌은[23] 덮개돌 길이가 8.10미터, 너비가 5.6미터, 두께가 0.45미터로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한다. 절강(浙江) 서안(瑞安) 대석산(岱石山)의 고인돌은[24] 덮개돌 아래 네 모서리에 각각 불규칙한 돌기둥을 세우고, 다시 돌과 자갈로 벽을 둘렀다. 고인돌 내부 높이는 0.75미터이고, 안쪽 바닥은 바깥 땅보다 0.47미터 낮았다.

 

2. 분포(分布)

不同時期不同類型的石構墓葬在全國很多地區已有所發現,比較集中的主要區域有東北地區、中原地區、西南地區,以及新疆等地。石構墓葬延續時間長,分布地域廣,各主要分布區域有着明顯的地區特色,呈現出一定的分布规律。

시기별, 종류별로 다양한 돌무덤이 중국(中國)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동북(東北), 중원(中原), 서남(西南), 그리고 신강(新疆)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돌무덤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넓은 지역에 퍼져 있으며, 주요 분포 지역마다 뚜렷한 지역적 특징과 일정한 분포 규칙을 보여준다.

 

2.1 동북지역(東北地區)

東北地區以紅山文化積石冢墓為先導,歷經數千年,一直到元明時期,可以見到多種類型的石構墓葬,是中國石構墓葬主要分布區域之一。

동북(東北) 지역은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돌무지무덤(적석총)을 시작으로 수천 년을 거쳐 원(元)·명(明) 시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돌무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중국(中國) 돌무덤의 주요 분포 지역 중 하나이다.

新石器時代的石構墓葬,主要有遼西地區的紅山文化墓葬,均為積石冢性質[25]。遼東半島的老鐵山和四平山,發現有新石器晚期的積石墓[26]。

신석기 시대의 돌무덤으로는 주로 요서(遼西) 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 무덤이 있는데, 모두 돌무지무덤(적석총) 성격을 띤다.[25] 요동(遼東) 반도의 노철산(老鐵山)과 사평산(四平山)에서는 신석기 후기의 돌무덤(적석묘)이 발견되었다.[26]

青銅文化時期,石構墓葬已擴大到東北地區全境和貝加爾湖一帶。年代相當于西周初至秦漢時期,以吉林長春地區為中心的西團山文化多為石棺墓,B型三式石棺都有發現[27]。東北地區的石棚墓主要集中在遼東半島,絕大多數屬青銅文化時期。主要分布于燕山山區的夏家店下層文化,以及主要分布于燕山以北的內蒙古自治區昭烏達盟、哲里木盟和遼寧省朝陽地區、河北省承德地區等的夏家店上層文化,有石槨墓和石棺墓。夏家店上層文化以石棺石椁墓為主[28]。吉林省中南部山地戰國時期的墓葬,多為石板對砌或石塊壘砌的長方形石棺,上盖大石板[29],主要為多人二次葬或多人二次火葬墓。圖們江流域青銅文化墓葬也多為石棺墓[30]。呼倫貝爾西部青銅文化墓葬,在土坑墓穴四周直立石板形成石棺,然后加填碎石塊。這類石棺墓分布達今俄羅斯境內的貝加爾湖一帶[31]。

청동기 시대에는 돌무덤이 동북(東北) 전역과 바이칼호(貝加爾湖) 근처까지 퍼져나갔다. 서주(西周) 초기부터 진(秦)·한(漢) 시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길림(吉林) 장춘(長春)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는 대부분 돌널무덤(석관묘)이었고, B형의 세 가지 형식 돌널이 모두 발견되었다.[27] 동북(東北) 지역의 고인돌(석붕묘)은 주로 요동(遼東) 반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 청동기 시대에 속한다. 연산(燕山) 산간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와, 연산(燕山) 북쪽의 내몽고(內蒙古) 자치구 조오달맹(昭烏達盟), 철리목맹(哲里木盟)과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 지역, 하북성(河北省) 승덕(承德) 지역 등에 주로 분포하는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에서는 돌덧널무덤(석곽묘)과 돌널무덤(석관묘)이 발견되었다.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는 돌널돌덧널무덤(석관석곽묘)이 주를 이룬다.[28] 길림성(吉林省) 중남부 산지의 전국(戰國) 시대 무덤은 대부분 돌판을 맞대거나 돌을 쌓아 만든 네모난 돌널에 큰 돌판을 덮은 형태이며,[29] 주로 여러 사람을 두 번에 걸쳐 묻거나(2차장), 여러 사람을 화장하여 두 번에 걸쳐 묻은 무덤이었다. 두만강(圖們江) 유역의 청동기 시대 무덤도 대부분 돌널무덤이다.[30] 호륜벨(呼倫貝爾) 서부의 청동기 시대 무덤은 흙구덩이 사방에 돌판을 세워 돌널을 만들고 깬돌을 채워 넣었다. 이런 돌널무덤은 오늘날 러시아(俄羅斯) 바이칼호(貝加爾湖) 근처까지 분포한다.[31]

秦漢以后,石構墓葬在東北地區仍有廣泛分布。遼東的旅大發現有東漢時期的雙室石板墓[32]。遼南地區以及遼陽等地,均有東漢時期石構或磚石混筑多室墓分布[33]。

진(秦)·한(漢) 이후에도 돌무덤은 동북(東北) 지역에 여전히 널리 분포했다. 요동(遼東)의 여대(旅大)에서는 동한(東漢) 시기의 방 두 개짜리 돌판무덤(쌍실석판묘)이 발견되었다.[32] 요남(遼南) 지역과 요양(遼陽) 등지에서도 동한(東漢) 시기의 돌로 짓거나 벽돌과 돌을 섞어 지은 방 여러 개짜리 무덤이 분포한다.[33]

魏晉時期的石室、石槨墓在遼寧朝陽地區累有發現,如北票縣西官營子的馮素弗墓和袁台子東晉壁畫墓等[34]。

위진(魏晉) 시기의 돌방무덤(석실묘)과 돌덧널무덤(석곽묘)은 요녕(遼寧) 조양(朝陽) 지역에서 여러 차례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어 북표현(北票縣) 서관영자(西官營子)의 풍소불(馮素弗) 무덤과 원대자(袁台子)의 동진(東晉) 벽화무덤 등이 있다.[34]

高句麗時期的墓葬大致可分為積石墓和封土石室墓兩大類,主要集中在遼寧桓仁和吉林集安兩地,遼寧撫順等地也發現過一些小型高句麗墓[35]。

고구려(高句麗) 시기 무덤은 대체로 돌무지무덤(적석묘)과 흙무지돌방무덤(봉토석실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요녕(遼寧) 환인(桓仁)과 길림(吉林) 집안(集安) 두 곳에 집중되어 있으며, 요녕(遼寧) 무순(撫順) 등지에서도 작은 고구려(高句麗) 무덤이 발견된 적이 있다.[35]

勃海時期墓葬多為石椁墓和石室墓,目前發現吉林省敦化六頂山[36],以及和龍縣為兩個大墓區。已調查發掘的還有黑龍江省海林縣和東寧縣等地的勃海時期石構墓葬[37]。

발해(渤海) 시기 무덤은 대부분 돌덧널무덤(석곽묘)과 돌방무덤(석실묘)이다. 현재까지 길림성(吉林省) 돈화(敦化)의 육정산(六頂山)과[36] 화룡현(和龍縣)이 두 개의 큰 무덤 지역으로 밝혀졌다. 흑룡강성(黑龍江省) 해림현(海林縣)과 동녕현(東寧縣) 등지에서도 발해(渤海) 시기 돌무덤이 조사·발굴되었다.[37]

遼金元時期的石槨、石棺墓,在內蒙古東部,以及遼寧、吉林、黑龍江三省都有所分布[38]。石棺主要為C型,即成熟型石棺。遼寧朝陽地區發現較多[39]。法庫葉茂台遼墓的石棺外罩以歇山式木屋棺罩[40]。

요(遼)·금(金)·원(元) 시기의 돌덧널무덤, 돌널무덤은 내몽고(內蒙古) 동부와 요녕(遼寧),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 3성에 모두 분포한다.[38] 돌널은 주로 C형, 즉 성숙형 돌널이다. 요녕(遼寧) 조양(朝陽)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39] 법고(法庫) 엽무대(葉茂台) 요(遼)나라 무덤의 돌널은[40] 바깥을 팔작지붕 모양의 나무집 널덧집(관조)으로 덮었다.

 

2.2. 중원지역(中原地區)

中原地區主要指黄河流域、長江流域的中下游地區,以及華南地區。由于這一區域的墓葬一直以木質葬具為多,石構墓葬的分布呈現出零散和相對集中相結合,以及多層次的特點。

중원(中原) 지역은 주로 황하(黃河) 유역, 장강(長江) 중·하류 유역 및 화남(華南)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의 무덤은 줄곧 나무 널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돌무덤의 분포는 흩어져 있으면서도 일부 지역에 집중되는 특징과 여러 층위가 섞인 특징을 보인다.

新石器時代的石構墓葬,日前發現的遺跡點和數量都比較少。陝西華縣柳子鎮仰韶文化元君廟類型墓地,發現一原始型石棺[41]。甘肅景泰張家台馬家窯文化半山類型墓地,發現11座石棺墓[42],屬B型。陝西神木縣石峁龍山文化遺址,發現有B型石棺[43],並且有精美的玉器隨葬。山東東海峪龍山文化遺址有石椁墓。

신석기 시대의 돌무덤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지와 수가 비교적 적다. 섬서(陝西) 화현(華縣) 유자진(柳子鎮)의 앙소문화(仰韶文化) 원군묘(元君廟) 유형 묘지에서 원시형 돌널이 하나 발견되었다.[41] 감숙(甘肅) 경태(景泰) 장가대(張家台)의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 반산(半山) 유형 묘지에서는 B형에 속하는 돌널무덤 11기가 발견되었다.[42] 섬서(陝西) 신목현(神木縣) 석묘(石峁)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에서는 B형 돌널이 발견되었고, 정교한 옥기가 함께 묻혀 있었다.[43] 산동(山東) 동해욕(東海峪)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에는 돌덧널무덤이 있다.

青銅文化時期,商周文化腹地幾乎見不到石構墓葬,只是在周邊地區有一些發現。浙江端安分布有年代相當于商周時期的石棚墓群[44]。山東乳山縣黄莊村西周墓地,有石棺石椁墓,具有濃厚的地方特色,可能是山東半島東部的一種土著文化[45]。山東長島縣王溝村有春秋時期的石砌重槨墓[46]。河北平山縣戰國時期中山國墓葬,有的墓壙下半部分開鑿在山岩中,並且在墓壙內積石。

청동기 시대에 상(商)·주(周) 문화의 중심지에서는 돌무덤을 거의 볼 수 없고, 주변 지역에서만 일부 발견된다. 절강(浙江) 서안(瑞安)에는 상(商)·주(周) 시기에 해당하는 고인돌(석붕묘) 무리가 분포한다.[44] 산동(山東) 유산현(乳山縣) 황장촌(黃莊村) 서주(西周) 묘지에는 돌널돌덧널무덤(석관석곽묘)이 있는데, 짙은 지역적 특색을 띠어 산동(山東) 반도 동부의 토착 문화일 가능성이 있다.[45] 산동(山東) 장도현(長島縣) 왕구촌(王溝村)에는 춘추(春秋) 시기의 돌로 쌓은 겹덧널무덤(석체중곽묘)이 있다.[46] 하북(河北) 평산현(平山縣) 전국(戰國) 시대 중산국(中山國) 무덤은 무덤 구덩이 아랫부분을 바위 속에 파고, 구덩이 안에 돌을 채워 넣은 것도 있다.

秦漢以后,中原地區的石構墓葬,數量大為增加,分布範圍逐漸擴大。河北滿城和山東曲阜九龍山等地,有西漢時期的大型崖墓[47]。廣州南越王墓[48],用石板构筑成石椁形墓室。漢代畫像石墓在中原地區有較廣泛的分布,主要是三個地區:山東和蘇北、河南南陽和湖北襄樊、陝北與晉西北,北京丰台、天津薊縣、河南密縣、浙江海寧等地也有一些發現[49]。

진(秦)·한(漢) 이후 중원(中原) 지역의 돌무덤은 수가 크게 늘고 분포 범위도 점차 넓어졌다. 하북(河北) 만성(滿城)과 산동(山東) 곡부(曲阜) 구룡산(九龍山) 등지에는 서한(西漢) 시기의 대형 절벽무덤(애묘)이 있다.[47] 광주(廣州) 남월왕묘(南越王墓)는[48] 돌판으로 돌덧널(석곽) 모양의 무덤방을 만들었다. 한(漢)나라 화상석묘(畫像石墓)는 중원(中原) 지역에 꽤 넓게 분포하는데, 주로 산동(山東)과 소북(蘇北), 하남(河南) 남양(南陽)과 호북(湖北) 양번(襄樊), 섬북(陝北)과 진서북(晋西北)의 세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북경(北京) 풍대(丰台), 천진(天津) 계현(薊縣), 하남(河南) 밀현(密縣), 절강(浙江) 해녕(海寧) 등지에서도 일부 발견되었다.[49]

魏晉時期,山東臨淄崔氏族墓,為圓形石室墓[50]。

위진(魏晉) 시기, 산동(山東) 임치(臨淄) 최씨(崔氏) 가문 무덤은 둥근 돌방무덤(원형 석실묘)이다.[50]

隋唐時期,上層統治者葬具多用石棺石槨。陝西西安隋李靜訓墓和乾縣唐章懷太子墓、懿德太子墓[51],均為石棺石椁。

수(隋)·당(唐) 시기에는 상류층 지배자들이 널과 덧널로 돌을 많이 사용했다. 섬서(陝西) 서안(西安)의 수(隋)나라 이정훈(李靜訓) 무덤과 건현(乾縣)의 당(唐)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의덕태자(懿德太子) 무덤은[51] 모두 돌널과 돌덧널(석관석곽)을 사용했다.

宋遼金元明清時期,石棺石椁墓、磚石米汁混筑墓等,在各地有零散分布,華北比較多一些。如山西大同遼、金時期石棺火葬墓[52],北京房山金代石墓[53],山西芮城元代石椁墓[54]等。山東鄒縣元代李裕庵墓[55],大小兩個石椁周圍,用石灰米汁拌合花崗岩碎塊、石英石和沙礫澆灌,结成一個异常堅固的整体。長江中下游地區,北宋時期已出現磚、石、米汁等材料的混筑墓[56]。南宋帝王的攢宮為石藏子結構,元初已毀。元末蘇州張士誠母曹氏墓[57],為石藏子結構提供了实例。明代帝王和各地的高級官吏,多用石材构筑墓室[58]。

송(宋)·요(遼)·금(金)·원(元)·명(明)·청(清) 시기에는 돌널돌덧널무덤, 벽돌·돌·쌀뜨물을 섞어 지은 무덤 등이 각지에 흩어져 분포했는데, 화북(華北) 지역에 비교적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산서(山西) 대동(大同)의 요(遼)·금(金) 시기 돌널화장무덤,[52] 북경(北京) 방산(房山)의 금(金)나라 돌무덤,[53] 산서(山西) 예성(芮城)의 원(元)나라 돌덧널무덤[54] 등이 있다. 산동(山東) 추현(鄒縣) 원(元)나라 이유암(李裕庵) 무덤은[55] 크고 작은 두 개의 돌덧널 주위를 석회, 쌀뜨물, 화강암 조각, 석영, 모래 등을 섞어 부어 매우 단단한 하나로 만들었다. 장강(長江) 중·하류 지역에서는 북송(北宋) 시기에 이미 벽돌, 돌, 쌀뜨물 등을 섞어 지은 무덤이 나타났다.[56] 남송(南宋) 황제의 임시 무덤(찬궁)은 석장자(石藏子) 구조였으나 원(元)나라 초에 파괴되었다. 원(元)나라 말 소주(蘇州) 장사성(張士誠)의 어머니 조씨(曹氏) 무덤은[57] 석장자(石藏子) 구조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명(明)나라 황제와 각 지역의 고위 관리들은 대부분 돌로 무덤방을 지었다.[58]

 

2.3 서남지역(西南地區)

西南地區的四川、雲南、貴州和西藏自治區,是石構墓葬的一個重要分布區域。早期的大石墓和石棺葬[59],在這一地區有較廣泛的分布。西漢以后,西南地區與中原地區的聯系加強了,中原地區出現的石構墓葬形式,先后在西南地區流行。

서남(西南) 지역의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그리고 티베트(西藏) 자치구는 돌무덤의 중요한 분포 지역이다. 초기 큰돌무덤(대석묘)과 돌널무덤(석관장)이 이 지역에 널리 분포했다.[59] 서한(西漢) 이후 서남(西南) 지역과 중원(中原) 지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원(中原) 지역에 나타난 돌무덤 양식이 서남(西南) 지역에서도 차례로 유행했다.

四川境內的安寧河流域是大石墓分布的中心,沿河兩岸的越西、冕寧、喜德、西昌、昭覺、德昌、米易等縣境內都有發現,以西昌縣境最為集中。石棺墓主要分布在四川境內的阿壩藏族自治州、甘孜藏族自治州、涼山彝族自治州以及雅安地區,岷江上游的汶川、理縣、茂汶等地最為密集;西藏自治區東部的芒康、貢覺;雲南西北部的楚雄彝族自治州等地[60]。

사천(四川)성 안의 안녕하(安寧河) 유역은 큰돌무덤 분포의 중심지로, 강 양쪽의 월서(越西), 면녕(冕寧), 희덕(喜德), 서창(西昌), 소각(昭覺), 덕창(德昌), 미역(米易) 등 현에서 모두 발견되었으며, 특히 서창현(西昌縣)에 가장 집중되어 있다. 돌널무덤은 주로 사천(四川)성 내의 아바 티베트족 자치주,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량산 이족 자치주 및 아안(雅安) 지역에 분포하며, 민강(岷江) 상류의 문천(汶川), 이현(理縣), 무문(茂汶) 등지에 가장 빽빽하게 있다. 또한 티베트(西藏) 자치구 동부의 망강(芒康), 공각(貢覺), 운남(雲南) 서북부의 초웅 이족 자치주 등지에도 분포한다.[60]

東漢至南北朝時期曾在西南地區流行的崖墓[61],主要分布在東起四川巫山、巫溪,西至漢源、昭覺,北抵廣元,南達雲南的照通、貴州的遵義這一區域。東漢時期的畫像石棺,在四川郫縣、壁山、瀘州、重慶等地有發現[62]。漢至南朝時期的石室墓在四川、雲南、貴州也有分布[63]。大約在吐蕃時期,西藏自治區境內一度流行封土石室墓。60年代迄今,在朗縣、乃東縣、林芝地區、拉薩市、昌都縣等地,已陸續發現了這類墓葬[64]。

동한(東漢)부터 남북조(南北朝) 시기까지 서남(西南) 지역에서 유행했던 절벽무덤(애묘)은[61] 동쪽으로는 사천(四川)의 무산(巫山), 무계(巫溪)에서, 서쪽으로는 한원(漢源), 소각(昭覺)까지, 북쪽으로는 광원(廣元), 남쪽으로는 운남(雲南)의 소통(照通), 귀주(貴州)의 준의(遵義)에 이르는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동한(東漢) 시기의 화상석관은 사천(四川) 비현(郫縣), 벽산(壁山), 노주(瀘州), 중경(重慶) 등지에서 발견되었다.[62] 한(漢)나라부터 남조(南朝) 시기까지의 돌방무덤(석실묘)은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에도 분포한다.[63] 토번(吐蕃) 시기 무렵에는 티베트(西藏) 자치구 내에서 흙무지돌방무덤(봉토석실묘)이 한때 유행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랑현(朗縣), 내동현(乃東縣), 임지(林芝) 지구, 라싸시(拉薩市), 창두현(昌都縣) 등지에서 이런 무덤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64]

宋元明時期,西南地區的石室墓有很多是帶雕刻的。四川境內帶雕刻的石室墓,多分布在近山區的廣元、昭化、綿陽、金堂、彭山、大足、重慶、宜賓和瀘州等地[65]。帶雕刻的石室墓在貴州省烏江北岸的桐梓、遵義、綏陽、湄潭、赤水等地都有發現[66]。貴州中部的清鎮、平壩一帶,則多為長方形土坑豎穴石槨墓[67]。明代石椁墓在四川等地也有分布[68]。

송(宋)·원(元)·명(明) 시기, 서남(西南) 지역의 돌방무덤 중에는 조각이 있는 것이 많다. 사천(四川)성 내에서 조각이 있는 돌방무덤은 주로 산간 지역인 광원(廣元), 소화(昭化), 면양(綿陽), 금당(金堂), 팽산(彭山), 대족(大足), 중경(重慶), 의빈(宜賓), 노주(瀘州) 등지에 분포한다.[65] 조각이 있는 돌방무덤은 귀주성(貴州省) 오강(烏江) 북쪽 강가의 동재(桐梓), 준의(遵義), 수양(綏陽), 미담(湄潭), 적수(赤水)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66] 귀주(貴州) 중부의 청진(清鎮), 평패(平壩) 일대에는 네모난 흙구덩이 수직굴 돌덧널무덤(장방형 토광수혈 석곽묘)이 많다.[67] 명(明)나라 시대 돌덧널무덤은 사천(四川) 등지에도 분포한다.[68]

 

2.4. 신강지역(新疆地區)

新疆石人石堆墓主要分布在天山以北伊犁地區的昭蘇、特克斯、霍城[69],博爾塔拉自治區 的博樂、溫泉,阿勒泰地區的阿勒泰、富蘊、青河、吉木乃[70]:天山以東的哈密、巴里坤、伊吾、奇台、木壘、吉爾薩爾;天山以南的溫宿等地[71]。

신강(新疆)의 돌사람 돌무지무덤(석인석퇴묘)은 주로 천산(天山) 북쪽 이리(伊犁) 지역의 소소(昭蘇), 특극사(特克斯), 곽성(霍城)과[69] 보얼타라(博爾塔拉) 자치구의 박락(博樂), 온천(溫泉), 알타이(阿勒泰) 지역의 알타이(阿勒泰), 부온(富蘊), 청하(青河), 길목내(吉木乃)에 분포한다.[70] 또한 천산(天山) 동쪽의 하미(哈密), 파리곤(巴里坤), 이오(伊吾), 기태(奇台), 목루(木壘), 길살이(吉爾薩爾)와 천산(天山) 남쪽의 온숙(溫宿) 등지에도 있다.[71]

 

3. 유변(流變)

從目前的資料來看,石構墓葬各種各樣類型比較集中出現的先后順序,大致可分為四個階段:即大型石構墓階段、石棺石椁墓階段,石室墓階段、融合發展階段。

현재 자료로 볼 때, 다양한 돌무덤 종류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순서는 대체로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대형 돌무덤 단계, 돌널·돌덧널무덤 단계, 돌방무덤 단계, 그리고 융합 발전 단계이다.

 

3.1. 대형 석구묘 단계(大型石構墓階段)

大型石構墓主要有紅山文化積石冢、遼東積石墓、遼東和東南沿海地區的石棚、西南大石墓、高句麗早期積石墓,以及新疆石圍石堆墓等。這些分布範圍很廣的大型石構墓葬,其絕對時間有很大差距,但它們反映的生產力水平及社會發展階段又極為相似,在形制上也有較多的共性。

대형 돌무덤에는 주로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적석총), 요동(遼東) 돌무덤(적석묘), 요동(遼東)과 동남 해안 지역의 고인돌(석붕), 서남(西南) 큰돌무덤(대석묘), 고구려(高句麗) 초기 돌무지무덤, 그리고 신강(新疆)의 돌울타리 돌무지무덤 등이 있다. 매우 넓은 범위에 분포하는 이 대형 돌무덤들은 만들어진 시기는 크게 차이 나지만, 당시의 생산력 수준과 사회 발전 단계는 매우 비슷하며 형태에서도 공통점이 많다.

1. 大型石構墓葬的規模一般都較大。紅山文化積石冢結構複雜,冢內墓葬排列密集,冢与冢相連。牛河梁Z2方形主体,東西長17.5、南北寬18.7米。旅順老鐵山積石墓M1,平面呈長方形,墓長14、寬5———5.6米,東西排列6個大小不等的墓室,四川西昌壩河堡子1型大石墓[72],直徑13米,高約3米。遼寧盖縣石棚山石棚,盖石長8.10、寬5.6米,重達幾十噸。

1. 대형 돌무덤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매우 크다.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은 구조가 복잡하고, 무더기 안에 무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으며 무더기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하량(牛河梁) Z2호의 네모난 본체는 동서 길이가 17.5미터, 남북 너비가 18.7미터이다. 여순(旅順) 노철산(老鐵山) 돌무덤 M1호는 평면이 네모나고, 무덤 길이가 14미터, 너비가 5~5.6미터이며, 동서로 크기가 다른 6개의 무덤방이 늘어서 있다. 사천(四川) 서창(西昌) 패하보자(壩河堡子) 1형 큰돌무덤은[72] 지름이 13미터, 높이가 약 3미터이다. 요녕(遼寧) 개현(蓋縣) 석붕산(石棚山)의 고인돌은 덮개돌 길이가 8.10미터, 너비가 5.6미터로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한다.

2.以地上建築為主。紅山文化積石冢都是在地表上以石壘墻筑墓。老鐵山積石墓是按山脉走向,依山脊坡度,在地表用自然風裂石塊壓縫交叠筑成長方形或方形的積石墓。西南地區的大石墓,其外表一般為修建在地表上的石砌圓丘形建築。有人研究大石棚构筑方法為[73]:先將鋪底石平放在地上,再在鋪底石四周立壁,然后利用斜坡將盖石壓到壁石上。

2. 주로 땅 위에 지은 건축물이다.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은 모두 땅 위에 돌로 담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 노철산(老鐵山) 돌무덤은 산맥의 방향을 따라 산등성이 경사면에, 자연적으로 갈라진 돌들을 틈새를 눌러가며 겹쳐 쌓아 네모난 돌무덤을 만들었다. 서남(西南) 지역의 큰돌무덤은 겉모습이 보통 땅 위에 돌로 쌓은 둥근 언덕 모양의 건축물이다. 큰 고인돌을 짓는 방법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73] 먼저 바닥돌을 땅에 평평하게 놓고, 그 주위에 벽을 세운 다음, 경사면을 이용해 덮개돌을 벽 위에 올렸다고 한다.

3.隨葬器物數量小,性質比較單純。紅山文化積石冢,墓內只隨葬玉器,墓外排列彩陶筒形器。西南大石墓墓室后部或兩側,放置少量陶容器,以及陶質或石質工具,有的墓內僅有少量小飾件。高句麗早期積石墓,基本沒有隨葬器物。

3. 껴묻거리(부장품) 수가 적고 종류가 비교적 단순하다.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은 무덤 안에 옥기만 묻었고, 무덤 밖에는 채색토기인 통 모양 그릇을 늘어놓았다. 서남(西南) 큰돌무덤은 무덤방 뒤쪽이나 양옆에 약간의 토기 그릇과 흙이나 돌로 만든 도구를 놓았고, 어떤 무덤에는 작은 장신구만 약간 들어 있었다. 고구려(高句麗) 초기 돌무지무덤에는 껴묻거리가 거의 없었다.

各地區不同時期各種各樣類型的大型石構墓,又有各自不同的特點。

각 지역, 각 시기의 다양한 대형 돌무덤들은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1.時間差距大。牛河梁較晚的Z1[74],碳十四測定為距今4995±110年,樹輪校正為5000±130年。老鐵山積石墓中的隨葬器物有山東龍山文化的影響。石棚墓則反映了新石器晚期到早期鐵器時代的文化性質。西南大石墓年代約在東周至西漢前期。新疆石圍石堆墓年代在西周至隋唐時期。高句麗早期積石墓大約在秦漢時期才剛剛興起。

1. 시간 차이가 크다. 우하량(牛河梁)의 비교적 늦은 시기인 Z1호는[74] 탄소-14 연대 측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4995±110년 전으로 나왔고, 나이테 보정 연대는 5000±130년 전이다. 노철산(老鐵山) 돌무덤의 껴묻거리에서는 산동(山東)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고인돌(석붕묘)은 신석기 후기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의 문화적 성격을 보여준다. 서남(西南) 큰돌무덤은 대략 동주(東周)부터 서한(西漢) 전기까지 만들어졌다. 신강(新疆)의 돌울타리 돌무지무덤은 서주(西周)부터 수(隋)·당(唐) 시기까지 이어졌다. 고구려(高句麗) 초기 돌무지무덤은 진(秦)·한(漢) 시기 무렵에 막 나타나기 시작했다.

2.墓葬形制有别。紅山文化積石冢為圍墻筑墓,冢內大小墓葬有别。老鐵山積石墓為數量不等的墓室成排组合在一起,單排墓室以一次筑成為多,多排墓室則一般為多次筑成。西南大石墓外表為圓丘形建築,長方形墓室內叢葬數人至上百人。

2. 무덤 형태가 다르다.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은 담을 둘러 무덤을 만들었고, 무더기 안에는 크고 작은 무덤이 섞여 있었다. 노철산(老鐵山) 돌무덤은 여러 개의 무덤방이 줄지어 합쳐진 형태로, 한 줄로 된 것은 대부분 한 번에 지었고 여러 줄로 된 것은 보통 여러 번에 걸쳐 지었다. 서남(西南) 큰돌무덤은 겉모습이 둥근 언덕 모양 건축물이고, 네모난 무덤방 안에는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백여 명까지 함께 묻었다.

3. 隨葬器物各具特色。紅山文化積石冢墓內只隨葬玉器,而西南大石墓小飾件比例較大,遼東一些石棚墓中多有青銅短劍隨葬,浙江瑞安石棚中僅有幾何印紋硬陶片。

3. 껴묻거리가 저마다 특색 있다.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 안에는 옥기만 묻었지만, 서남(西南) 큰돌무덤은 작은 장신구 비율이 비교적 크다. 요동(遼東)의 일부 고인돌에서는 청동 단검이 많이 함께 출토되었고, 절강(浙江) 서안(瑞安) 고인돌에서는 기하학 무늬가 찍힌 단단한 토기 조각만 나왔다.

各種大型石構墓葬的時間和空間跨度大,既有共性又又 有个性,其相互之間的關系目前還不十分明確,有待今后考古工作的繼續努力。

다양한 대형 돌무덤은 시간과 공간의 폭이 넓고, 공통점과 함께 각자의 개성도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아, 앞으로 고고학계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3.2. 석관 석곽묘 단계(石棺石椁墓階段)

中原地區的仰韶文化元君墓地曾發現年代最早的原始型石棺。甘肅景泰張家台馬家窯文化半山類型遺址墓地,有11座簡易型石棺墓與土坑墓、木棺墓共處。但隨着木質葬具的普遍實行,石棺墓在中原地區幾乎被這種風潮淹沒了。商周時期,木質棺椁制度在其統治區域成為定制,并且影響逐漸擴大。這種影響包括兩個方面。一是直接影響,即實行木質棺椁制度的地域範圍擴大。象東北地區的遼寧朝陽魏營子就發現有西周早期墓地[75],均為木椁結構。二是間接影響,原有實行石構墓葬地區的形制随其變化。正是在這種影響下,石構墓葬開始了它的第二個發展階段——————石棺石槨墓階段。

중원(中原) 지역의 앙소문화(仰韶文化) 원군묘(元君廟) 묘지에서는 가장 오래된 원시형 돌널이 발견된 바 있다. 감숙(甘肅) 경태(景泰) 장가대(張家台)의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 반산(半山) 유형 유적 묘지에는 11기의 간이형 돌널무덤이 흙구덩이무덤, 나무널무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나무 널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돌널무덤은 중원(中原) 지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상(商)·주(周) 시기에는 나무 널과 덧널(목관곽) 제도가 그 통치 지역에서 공식화되었고, 그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이 영향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직접적인 영향으로, 나무 널과 덧널 제도를 사용하는 지역이 넓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동북(東北) 지역의 요녕(遼寧) 조양(朝陽) 위영자(魏營子)에서는 서주(西周) 초기 묘지가 발견되었는데,[75] 모두 나무 덧널 구조였다. 둘째는 간접적인 영향으로, 원래 돌무덤을 사용하던 지역의 무덤 형태가 그에 따라 변한 것이다. 바로 이런 영향 아래, 돌무덤은 두 번째 발전 단계인 돌널·돌덧널무덤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西周初期以后,在有石構墓葬傳統的東北地區以及西南地區,用石材叠砌构筑的類似中原地區木質棺椁形式的石棺石椁墓相繼興盛起來。燕山以北西周到春秋戰國之際的夏家店上層文化,B型石棺、A型石椁墓為其主要墓葬形式。已發掘的寧城南山根遺址,在土坑的四周砌以大石板,上面覆盖數層石板,形成石棺。在木質葬具和土坑之間填砌石塊,葬具上下鋪盖石塊或石板,形成石椁。以吉長地區為中心,年代在西周至秦漢時期的西團山文化,石棺墓是其主要特征之一,B型的三式石棺都可以見到。這一時期的石棺墓影響到東北全境,以及呼倫貝爾西部和貝加爾湖一帶,河北唐山也有發現。隨葬品有磨制石器生產工具和一定數量青銅器。其中青銅直刃矛和短劍形制與中原地區的器物相似,而雙曲刃式則具有東北地方色彩。西南地區的石棺墓,年代上限大約在西周,到漢武帝時期基本消失,B型三式石棺都有所發現。葬式有仰身、二次葬和火葬等,以仰身直肢葬為主,隨葬器物有陶、銅、鐵、銀器和中原王朝的錢幣。

서주(西周) 초기 이후, 돌무덤 전통이 있던 동북(東北) 지역과 서남(西南) 지역에서는 중원(中原) 지역의 나무 널·덧널과 비슷한 형태의 돌널·돌덧널무덤이 잇따라 유행했다. 연산(燕山) 북쪽에서 서주(西周)부터 춘추전국시대에 걸친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는 B형 돌널과 A형 돌덧널무덤이 주요 무덤 형태였다. 발굴된 영성(寧城) 남산근(南山根) 유적에서는 흙구덩이 사방에 큰 돌판을 쌓고 그 위를 여러 겹의 돌판으로 덮어 돌널을 만들었다. 나무 널과 흙구덩이 사이에는 돌을 채우고, 널 위아래에 돌이나 돌판을 덮어 돌덧널을 만들었다. 길림(吉林)·장춘(長春) 지역을 중심으로 서주(西周)부터 진(秦)·한(漢) 시기에 걸친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는 돌널무덤이 주요 특징 중 하나이며, B형의 세 가지 형식 돌널을 모두 볼 수 있다. 이 시기 돌널무덤은 동북(東北) 전역과 호륜벨(呼倫貝爾) 서부, 바이칼호(貝加爾湖) 근처까지 영향을 미쳤고, 하북(河北) 당산(唐山)에서도 발견되었다. 껴묻거리로는 간석기 생산 도구와 일정 수의 청동기가 있었다. 그중 청동 곧은날 창(직인모)과 단검은 중원(中原) 지역 유물과 형태가 비슷하지만, 양날이 굽은 형태(쌍곡인식)는 동북(東北) 지방의 색채를 띤다. 서남(西南) 지역의 돌널무덤은 가장 이른 것이 서주(西周) 무렵이고, 한(漢) 무제(武帝) 시기에 거의 사라졌으며, B형의 세 가지 형식 돌널이 모두 발견되었다. 장례 방식으로는 바로누워묻기(앙신직지장), 두벌묻기(2차장), 화장 등이 있었으나 바로누워묻기가 주를 이루었다. 껴묻거리로는 토기, 청동기, 철기, 은기와 중원(中原) 왕조의 화폐가 있었다.

這一階段的石構墓葬主要有A型石槨和B型石棺,一般均為單人葬,有一定數量的隨葬品,包括石、陶、銅、鐵器和銀器,顯示出比大型石構墓階段的社會發展水平提高了,墓葬形制以及隨葬品,深受中原地區文化的影響。

이 단계의 돌무덤은 주로 A형 돌덧널과 B형 돌널이다. 보통 한 사람만 묻었고, 돌, 흙, 구리, 쇠, 은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정 수량 있었다. 이는 대형 돌무덤 단계보다 사회 발전 수준이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무덤 형태와 껴묻거리는 중원(中原) 지역 문화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3.3. 석실묘 단계(石室墓階段)

戰國時期,石構墓葬的因素已滲入中原地區。河北平山縣戰國時期中山國墓葬[76],墓室下半部在岩石中鑿成,椁室內積石,厚達1.5 2.1米。文獻記載表明[77],戰國末期,中原地區已經認識并且利用石材來加固墓室。隨着洞室墓的興起,富有“深埋厚藏”傳統的中原地區,把石材引入了墓室的筑造之中,使石構墓葬出現了一個新的發展階段 石室墓階段。這個階段恰恰出現在一直是以土坑豎穴、木質棺椁為主要墓葬形式的中原大地。

전국(戰國) 시대에 돌무덤의 요소가 이미 중원(中原) 지역에 스며들었다. 하북(河北) 평산현(平山縣) 전국(戰國) 시대 중산국(中山國) 무덤은[76] 무덤방 아랫부분을 바위 속에 팠고, 덧널방 안에는 돌을 1.5~2.1미터 두께로 채웠다. 문헌 기록을 보면,[77] 전국(戰國) 말기 중원(中原) 지역에서는 이미 돌을 이용해 무덤방을 단단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활용했다. 굴식 무덤(동실묘)이 유행하면서 ‘깊이 묻고 후하게 껴묻는(심매후장)’ 전통이 강한 중원(中原) 지역은 무덤방을 지을 때 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돌무덤은 새로운 발전 단계인 돌방무덤(석실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단계는 줄곧 수직 흙구덩이(수혈)에 나무 널과 덧널을 쓰는 것이 주요 무덤 형태였던 중원(中原) 땅에서 나타났다.

首先出現的是王侯之家開鑿的大型崖墓。西漢中期的滿城劉勝夫婦墓和曲阜九龍山魯王墓[78],由墓道、甬道和數個墓室,以及完整的排水設施构成,規模宏大,隨葬金縷玉衣等大量珍貴遺物。東漢魏晉時期,崖墓又流行于四川地區,連普通老百姓都開鑿山岩,修筑墓室。西漢南越王墓,形制與滿城漢墓有些相似,但其墓室用石板构筑成石椁形的平面布局,則在兩廣地區西漢前期的大型木槨墓中能找到形迹[79]。還有東漢時期流行于中原地區的畫像石墓,魏晉以后出現的圓形石室墓,以及磚石混筑墓室等等的墓葬,在中原地區形成了一股石構墓葬的浪潮。石構墓葬的文化因素從此在中原地區扎下了根。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왕이나 제후 가문이 만든 대형 절벽무덤(애묘)이다. 서한(西漢) 중기의 만성(滿城) 유승(劉勝) 부부 무덤과 곡부(曲阜) 구룡산(九龍山) 노왕(魯王) 무덤은[78] 무덤길, 널길과 여러 개의 무덤방, 그리고 완벽한 배수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가 거대하고 금실옥의(금루옥의) 등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함께 묻혔다. 동한(東漢)·위진(魏晉) 시기에는 절벽무덤이 다시 사천(四川) 지역에서 유행하여, 평범한 백성들까지 바위를 파서 무덤방을 지었다. 서한(西漢) 남월왕묘(南越王墓)는 형태가 만성한묘(滿城漢墓)와 약간 비슷하지만, 무덤방을 돌판으로 돌덧널 모양 평면으로 지은 점은 양광(兩廣) 지역 서한(西漢) 전기 대형 나무덧널무덤(목곽묘)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79] 또한 동한(東漢) 시기 중원(中原) 지역에서 유행한 화상석묘, 위진(魏晉) 이후 나타난 둥근 돌방무덤, 그리고 벽돌과 돌을 섞어 지은 무덤방 등이 중원(中原) 지역에 돌무덤 유행을 일으켰다. 이로써 돌무덤의 문화적 요소는 중원(中原) 지역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3.4. 융합 발전 단계(融合發展階段)

隋唐以后,石構墓葬的多种形式在各地區交替出現,此起彼伏,有時结合在一起,交相輝映,或是造型精美,或是堅固難摧,并且與原有墓葬形制的一些因素融合,在新的基礎上發展。隋李靜訓墓、唐章懷太子墓、懿德太子墓中的石棺石椁,寬大規整,结合緊密。石棺上的浮雕圖案精美,形似木棺。法庫葉茂台遼墓[80],石棺通體平雕花紋,并填色彩繪, 頂式棺蓋,石棺外安置一架木結構“小帳”式棺室。遼寧朝陽前窗戶遼墓[81],用黄色砂岩砌筑3個墓室,石棺由6塊石板组成,通體滿飾浮雕花紋。北宋時期,長江中下游地區已出現磚、石、糯米汁混筑的墓葬。南宋帝王的攢官據傳為石藏子結構,元明時期,用石材、青磚、石灰、三合土,以及米汁松香等混筑的墓葬,异常堅固,具有很好的防腐防盜效能。東漢時期一度在中原地區流行的畫像石墓,魏晉以后漸趨衰落。兩宋時期,帶雕刻的石室墓又在西南地區盛行。明代的皇陵,用石材构筑地下宫殿式墓室。

수(隋)·당(唐) 이후, 여러 형태의 돌무덤이 각 지역에서 번갈아 나타났다. 때로는 서로 결합하여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하고, 모양이 정교하거나 매우 견고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 무덤 형태의 요소와 융합하여 새로운 기반 위에서 발전했다. 수(隋)나라 이정훈(李靜訓) 무덤, 당(唐)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와 의덕태자(懿德太子) 무덤 속의 돌널과 돌덧널은 크고 반듯하며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돌널 위의 돋을새김 무늬는 정교하고 모양은 나무 널과 비슷하다. 법고(法庫) 엽무대(葉茂台) 요(遼)나라 무덤은[80] 돌널 전체에 무늬를 평평하게 새기고 색을 칠했으며, 덮개는 지붕 모양이다. 돌널 바깥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장막’ 모양의 널방을 설치했다. 요녕(遼寧) 조양(朝陽) 전창호(前窗戶)의 요(遼)나라 무덤은[81] 노란 사암으로 3개의 무덤방을 쌓았고, 돌널은 6개의 돌판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체에 돋을새김 무늬가 가득하다. 북송(北宋) 시기에는 장강(長江) 중·하류 지역에 이미 벽돌, 돌, 찹쌀풀을 섞어 지은 무덤이 나타났다. 남송(南宋) 황제들의 임시 무덤(찬궁)은 석장자(石藏子) 구조라고 전해지며, 원(元)·명(明) 시기에는 돌, 푸른 벽돌, 석회, 삼합토, 그리고 쌀뜨물·송진 등을 섞어 지은 무덤이 나타났다. 이 무덤은 매우 견고하여 부패와 도굴을 막는 효과가 뛰어났다. 동한(東漢) 시기 한때 중원(中原)에서 유행했던 화상석묘는 위진(魏晉) 이후 점차 쇠퇴했다. 양송(兩宋) 시기에는 조각이 있는 돌방무덤이 다시 서남(西南)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명(明)나라의 황릉은 돌로 지하 궁전식 무덤방을 지었다.

 

4. 특징(特徵)

石構墓葬在中國曾存在數千年,經歷了幾個發展階段,是中國古代墓葬形制演變的重要构成因素,其發展歷程有着明顯的一般特征。

돌무덤은 중국(中國)에서 수천 년간 존재하며 몇 단계의 발전을 거쳤다. 이는 중국(中國) 고대 무덤 형태 변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그 발전 과정에는 뚜렷한 일반적 특징이 있다.

(一)各地區各民族文化習俗的交流和融合發展,是石構墓葬形制變化的總趨勢。文化習俗的交流和融合,首先是交流,在交流的過程中相互影響,相互滲透,而后是各種文化因素的融合和發展。融合發展是主流,是總趨勢,在主流和總趨勢中包含着多種因素和多種文化習俗的互為你我。融合發展是通過相互的繼承和揚棄,在新的起點上,以新的風格、新的面貌出現。正是這種融合發展,促使了石構墓葬形制的自原始到成熟、從簡易到精致、由單一到多層次的階段性進步。在陝西、甘肅等地,可以見到仰韶文化和馬家窯文化時期的原始型和簡易型石棺,但很快被土坑豎穴木質棺椁形制墓葬的風潮所淹沒。商周時期中原地區木質棺椁的發展和普及,又深刻影響了周邊地區的石構墓葬形制。東北地區夏家店上層文化的石棺石椁墓、西團山文化的石棺墓、山東半島的西周早期石棺石槨墓、西南地區的石棺葬等等,都是這種影響的產物,然而影響不是單方面的,而是相互滲透。石構墓葬因素與中原地區原有墓葬形制的融合,導致了多种形式的石室墓,以及精致的石棺石椁的出現和發展。

1. 여러 지역과 민족의 문화 풍습이 교류하고 융합하여 발전한 것이 돌무덤 형태 변화의 전반적인 흐름이다. 문화 풍습의 교류와 융합은 먼저 교류에서 시작된다. 교류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스며들며, 그 후에 여러 문화 요소가 융합하고 발전한다. 융합 발전이 주된 흐름이자 전체적인 경향이며, 그 안에는 다양한 요소와 문화 풍습이 서로 뒤섞여 있다. 융합 발전은 서로의 것을 계승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새로운 출발점에서 새로운 스타일과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융합 발전이 돌무덤 형태를 원시적인 것에서 성숙한 것으로, 간단한 것에서 정교한 것으로, 단일한 것에서 다층적인 것으로 단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섬서(陝西), 감숙(甘肅) 등지에서는 앙소문화(仰韶文化)와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 시기의 원시형·간이형 돌널을 볼 수 있지만, 곧 수직 흙구덩이에 나무 널과 덧널을 쓰는 무덤 유행에 휩쓸려 사라졌다. 상(商)·주(周) 시기 중원(中原) 지역의 나무 널·덧널 발전과 보급은 주변 지역의 돌무덤 형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동북(東北) 지역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돌널·돌덧널무덤,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의 돌널무덤, 산동(山東) 반도의 서주(西周) 초기 돌널·돌덧널무덤, 서남(西南) 지역의 돌널무덤 등은 모두 이러한 영향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영향은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돌무덤 요소가 중원(中原) 지역의 기존 무덤 형태와 융합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돌방무덤과 정교한 돌널·돌덧널이 나타나고 발전하게 되었다.

融合不是某一點的放射狀影響,而是象小溪匯成大河一樣,多种因素的不斷匯合,從而形成巨大的文化潮,组合成具有中國社會一定時期文化特點的墓葬形制,随着時間的推移,其勢越來越大,影響所及的地域越來越廣。石構墓葬的分布,大型石構墓階段只有紅山文化遺跡、遼東老鐵山、西南安寧河流域等幾個點,石棺石惇墓階段發展到全國大部分地區,融合發展階段已遍及神州大地,包括隋唐時期的吐蕃地區。

융합은 한 지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영향이 아니라, 여러 시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여러 요소가 끊임없이 합쳐져 거대한 문화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중국(中國) 사회 특정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가진 무덤 형태로 조합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기세가 점점 커지고 영향을 미치는 지역도 넓어진다. 돌무덤의 분포를 보면, 대형 돌무덤 단계에서는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 요동(遼東) 노철산(老鐵山), 서남(西南) 안녕하(安寧河) 유역 등 몇몇 지점에 불과했다. 돌널·돌덧널무덤 단계에서는 전국 대부분 지역으로 발전했고, 융합 발전 단계에 이르러서는 수(隋)·당(唐) 시기 토번(吐蕃) 지역을 포함하여 중국(中國) 전역에 퍼졌다.

(二)石構墓葬的出現及其形制的发展,總體上大致呈階段性,但各地區各民族間,尤其是邊遠地區的少數民族,由于地理環境、政治經濟狀況,以及風俗習慣等因素的影響,又有明顯的不平衡性,又有各自的特點。

2. 돌무덤의 출현과 그 형태 발전은 전체적으로 단계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각 지역과 민족 간, 특히 외진 지역의 소수민족은 지리적 환경, 정치·경제 상황, 풍습 등의 영향으로 뚜렷한 불균형을 보이며 각자 고유의 특징을 가진다.

2.1.形制上的差异。石構墓葬的形制,不僅同一階段不同地區和同一地區不同階段存在差异,同一地區同一階段也存在差异。大型石構墓的形制,各地區差异很大。石槨石棺墓,夏家店上層文化用礫石和塊石叠砌的較多,而西團山文化和西南地區,則用板石砌筑的較多,吐蕃時期的又多用石塊砌成石室狀。漢代崖墓,王侯之家的大型崖墓均為主一人所筑,四川的大型崖墓,則一基數棺,多為家族共一墓,廣州南越王墓則用石材砌成石椁形式。石室墓基本上是方形和長方形,魏晉以后,山東、山西以及四川等地,還出現了圓形石室墓。

2.1. 형태상의 차이. 돌무덤의 형태는 같은 단계의 다른 지역, 같은 지역의 다른 단계뿐만 아니라, 같은 지역 같은 단계에서도 차이가 있다. 대형 돌무덤의 형태는 지역별로 차이가 매우 크다. 돌덧널·돌널무덤의 경우,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는 자갈돌과 깬돌을 쌓아 만든 것이 많지만,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와 서남(西南) 지역은 판석으로 쌓은 것이 많고, 토번(吐蕃) 시기에는 돌덩이로 돌방 모양을 만든 것이 많다. 한(漢)나라 절벽무덤의 경우, 왕후 가문의 대형 절벽무덤은 모두 무덤 주인 한 사람을 위해 지었지만, 사천(四川)의 대형 절벽무덤은 하나의 무덤에 여러 널이 있어 대부분 가족 공동묘지였다. 광주(廣州) 남월왕묘(南越王墓)는 돌로 돌덧널 형태를 만들었다. 돌방무덤은 기본적으로 네모난 형태이지만, 위진(魏晉) 이후 산동(山東), 산서(山西), 사천(四川) 등지에서는 둥근 돌방무덤도 나타났다.

2.2. 時間上的差异,包括出現和持續的時間差异。時值石構墓葬發展到第三階段之際,活動于鴨綠江流域的高句麗族,卻繼承了東北地區新石器晚期的積石墓形式,并由積石基到封土石室墓,自成發展體系。新疆地區的石圍石堆墓,自西周時期出現,一直持續到隋唐時期。西藏在吐蕃時期曾流行石構墓葬,但持續時間不長,后又被其他葬俗所取代。隋唐時期,中原地區已出現了精致的石棺石椁,地處東北的勃海,卻仍然在构筑簡易型石棺墓。

2.2. 시간상의 차이. 나타난 시기와 지속된 시간에서 차이가 있다. 돌무덤 발전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 압록강(鴨綠江) 유역에서 활동하던 고구려(高句麗)족은 동북(東北) 지역 신석기 후기의 돌무지무덤(적석묘) 형식을 계승하여 돌무지무덤에서 흙무지돌방무덤(봉토석실묘)으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발전 체계를 이루었다. 신강(新疆) 지역의 돌울타리 돌무지무덤은 서주(西周) 시기에 나타나 수(隋)·당(唐)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티베트(西藏)에서는 토번(吐蕃) 시기에 돌무덤이 유행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른 장례 풍습으로 대체되었다. 수(隋)·당(唐) 시기 중원(中原) 지역에서는 이미 정교한 돌널과 돌덧널이 나타났지만, 동북(東北)에 위치한 발해(渤海)는 여전히 간이형 돌널무덤을 짓고 있었다.

2.3. 分布的不平衡。東北地區是石構墓葬的主要分布區域之一,種類多,持續時間長,包括紅山文化積石冢,遼東積石墓、石棚墓,夏家店文化石棺石棹墓,西團山文化石棺墓,高句麗、勃海石構墓葬,以及遼以后的石棺墓等。西南地區自西周時期出現大石墓和石棺葬以后,相繼有崖墓、石棺、石室墓出現,是石構墓葬的重要分布區域。中原地區從漢以后,石材用于构筑墓葬,主要起加固作用,木質葬具仍然占主要地位,因此分布比較零散。

2.3. 분포의 불균형. 동북(東北) 지역은 돌무덤의 주요 분포지 중 하나로, 종류가 다양하고 지속 기간이 길다. 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지무덤, 요동(遼東) 돌무덤과 고인돌,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의 돌널·돌덧널무덤,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의 돌널무덤, 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의 돌무덤, 그리고 요(遼)나라 이후의 돌널무덤 등이 포함된다. 서남(西南) 지역은 서주(西周) 시기 큰돌무덤과 돌널무덤이 나타난 이후, 절벽무덤, 돌널무덤, 돌방무덤이 잇따라 나타나 돌무덤의 중요한 분포 지역이 되었다. 중원(中原) 지역은 한(漢)나라 이후 돌을 무덤을 짓는 데 사용했지만, 주로 보강하는 역할을 했고 나무 널이 여전히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분포가 비교적 흩어져 있다.

(三)石構墓葬的發展和分布,受社會生產力水平、政治經濟狀況和環境條件的制約,深深印下社會歷史發展的痕迹。

3. 돌무덤의 발전과 분포는 사회의 생산력 수준, 정치·경제 상황, 환경 조건의 제약을 받으며 사회 역사 발전의 흔적을 깊이 남겼다.

石器時代,由于生產力低下和大量石器的應用,導致用自然石塊构筑的墓葬大量出現,分布範圍比較廣,并且以大型為多,主要是叢葬或聚族葬。青銅時代,大型石構墓葬基本由以單人葬為主的簡易型石棺石椁墓所取代。有些石材略經加工,較為規整。秦漢時期,鐵器的普遍應用,才有可能開鑿大型崖墓,也才有可能出現成熟的C型石棺和畫像石墓。

석기시대에는 생산력이 낮고 석기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자연석으로 지은 무덤이 대량으로 나타났다. 분포 범위가 비교적 넓었고, 대형 무덤이 많았으며 주로 여러 사람을 함께 묻거나(총장) 씨족을 함께 묻었다(취족장).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대형 돌무덤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을 묻는 간이형 돌널·돌덧널무덤으로 대체되었다. 일부 돌은 약간 가공하여 비교적 반듯해졌다. 진(秦)·한(漢) 시기에는 철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비로소 대형 절벽무덤을 팔 수 있게 되었고, 성숙한 C형 돌널과 화상석묘가 나타날 수 있었다.

龍山文化到商周時期,中原地區政治經濟實體的强大,在被統治地區完成了客觀上的移風易俗。木質葬具的普及和發展,淹沒了本地區的石構墓葬形式,并且對周邊地區构成了巨大的影響源和抗拒力。東北、山東、西南以及新疆地區,在這個影響源的影響下,原始而笨拙的大型石構墓相繼由石棺石椁墓所取代。石構墓葬習俗在商周統治的中心區域遭到强有力的抗拒,只能沿邊遠地區分兩個方向影響。一是自內蒙東部到陝西、甘肅、青海一帶,再到新疆和西南地區,一是从遼東到山東及東南沿海一帶。與內蒙接壤的陝西神木縣石峁龍山文化遺址發現的石棺墓,墓內僅隨葬玉器,與紅山文化的玉器墓的特點相似。可以看作是東北石構墓葬影響線路上的一個點。夏鼐先生曾推測,寺窪文化典型陶器之一的兩大耳灰黑陶罐和四川理番一帶秦漢時代遺留的相似[82]。有人研究,西南地區西周至秦漢時期的石棺墓中最為普遍、最具特征的雙耳陶罐,與甘、青和陝西地區的同類陶罐有一定的淵源關系[83]。墓中出土的銅柄鐵劍和銅牌飾等,也具有明顯的北方草原風格。山東半島與遼東半島在龍山文化時期已相互影響。遼東老鐵山積石墓中隨葬的陶器有山東龍山文化的因素,山東龍山文化遺址中也發現石構墓葬。屬于夷、越地區的山東乳山縣和浙江瑞安等地,有西周早期的石板墓和商周時期的石棚墓。

용산문화(龍山文化)부터 상(商)·주(周) 시기까지 중원(中原) 지역의 강력한 정치·경제적 실체는 피지배 지역의 풍속을 바꾸었다. 나무 널의 보급과 발전은 그 지역의 돌무덤 형식을 밀어냈고, 주변 지역에는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저항을 받기도 했다. 동북(東北), 산동(山東), 서남(西南), 신강(新疆) 지역은 이 영향 아래 원시적이고 투박한 대형 돌무덤이 점차 돌널·돌덧널무덤으로 대체되었다. 돌무덤 풍습은 상(商)·주(周) 통치의 중심 지역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아, 외곽 지역을 따라 두 방향으로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나는 내몽고(內蒙) 동부에서 섬서(陝西), 감숙(甘肅), 청해(青海) 일대를 거쳐 신강(新疆)과 서남(西南) 지역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요동(遼東)에서 산동(山東) 및 동남 해안 일대로 가는 길이다. 내몽고(內蒙)와 인접한 섬서(陝西) 신목현(神木縣) 석묘(石峁)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에서 발견된 돌널무덤은 무덤 안에 옥기만 묻었는데,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옥기 무덤의 특징과 비슷하다. 이를 동북(東北) 돌무덤 영향 경로상의 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하내(夏鼐) 선생은 사와문화(寺窪文化)의 대표적 토기 중 하나인 큰 귀 두 개 달린 회흑색 토기 항아리가 사천(四川) 이번(理番) 일대의 진(秦)·한(漢) 시대 유물과 비슷하다고 추측했다.[82] 서남(西南) 지역의 서주(西周)부터 진(秦)·한(漢) 시기 돌널무덤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귀 두 개 달린 토기 항아리가 감숙(甘肅), 청해(青海), 섬서(陝西) 지역의 유사한 토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83] 무덤에서 출토된 구리 자루 쇠칼(동병철검)과 구리 판장식(동패식) 등도 뚜렷한 북방 초원 양식을 띤다. 산동(山東) 반도와 요동(遼東) 반도는 용산문화(龍山文化) 시기에 이미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요동(遼東) 노철산(老鐵山) 돌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산동(山東)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요소가 있으며, 산동(山東)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에서도 돌무덤이 발견되었다. 동이(夷)·월(越) 지역에 속하는 산동(山東) 유산현(乳山縣)과 절강(浙江) 서안(瑞安) 등지에는 서주(西周) 초기의 돌판무덤과 상(商)·주(周) 시기의 고인돌이 있다.

政治上的一體性也促進了風俗習慣方面的一致性。漢武帝時期,西南地區與中原地區的聯系加強了,石棺葬随即消失了。南宋的帝陵行“石藏子”制,江南地區迅速仿效,直到元明時期,出現許多石、磚和米汁等混筑墓葬。明代的帝陵用石材构筑地下宫殿式建築,各地的官僚相繼效法,也大多用石材构筑墓室,甘肅蘭州上西園[84]和青海大通縣黄家寨[85]等地,均發現有明代官僚的石構墓葬。

정치적 통일성은 풍습의 통일성도 촉진했다. 한(漢) 무제(武帝) 시기, 서남(西南) 지역과 중원(中原) 지역의 교류가 강화되자 돌널무덤은 곧 사라졌다. 남송(南宋) 황제릉이 ‘석장자(石藏子)’ 제도를 시행하자 강남(江南) 지역이 빠르게 이를 모방하여, 원(元)·명(明) 시기까지 돌, 벽돌, 쌀뜨물 등을 섞어 지은 무덤이 많이 나타났다. 명(明)나라 황제릉이 돌로 지하 궁전식 건물을 짓자, 각 지역의 관료들도 잇따라 이를 본받아 대부분 돌로 무덤방을 지었다. 감숙(甘肅) 난주(蘭州) 상서원(上西園)과[84] 청해(青海) 대통현(大通縣) 황가채(黃家寨) 등지에서[85] 명(明)나라 관료들의 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주석(注釋)

[1] 黄河水庫考古隊華縣隊:《陝西華縣柳子鎮第二次發掘的主要收獲》,《考古》1959年11期。

[2] 李恭篤:《遼寧凌源縣三官甸子城子山遺址試掘報告》。《考古》1986年6期。

[3] 甘肅省博物館:《甘肅景泰張家台新石器時代的墓葬》,《考古》1973年3期。

[4] 東北考古發掘團:《吉林西團山石棺墓發掘報告》,《考古學報》1964年1期。

[5] 馮漢驥、童恩正:《岷江上游的石棺葬》,《考古學報》1973年2期。

[6] 同上[4]。

[7] 四川省博物館、郫縣文化館:《四川郫縣東漢磚墓的石棺畫像》,《考古》1979年6期。

[8] 唐金裕:《西安西郊隋李靜訓墓發掘簡報》,《考古》1959年9期。

[9] 東海峪發掘小組:《一九七五年東海略遺址的發掘》,《考古》1976年6期。

[10] 遼寧省昭烏達盟文物工作站、中國科學院考古研究所東北工作隊:《寧城縣南山根的石槨墓》,《考古學報》1973年2期。

[11] 陝西省博物館、乾縣文教局唐墓發掘組:《唐章懷太子墓發掘簡報》,《唐懿德太子墓發掘簡報》,《文物》1972年7期。

[12]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河北省文物管理處:《滿城漢墓發掘報告》,文物出版社,1980年。

[13] 劉志遠:《成都天回山崖墓清理記》,《考古學報》1958年1期。

[14] 曾昭燏、蔣寶庚、黎忠義:《沂南古畫像石墓發掘報告》,文化部文物管理局出版,1956年。

[15] 山東省文物考古研究所:《臨淄北朝崔氏墓》,《考古學報》1984年2期:淄博市博物館、臨淄區文管所:《臨淄北朝崔氏墓地第二次清理簡報》,《考古》1985年3期。

[16] 鐘子周:《孟知祥墓》,《成都文物》1985年1期。

[17] 蘇州市文物保管委員會、蘇州博物館:《蘇州吳張士誠母曹氏墓清理簡報》,《考古》1965年6期。

[18] 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遼寧牛河梁紅山文化“女神廟”與積石冢群發掘簡報》,《文物》1986年8期。

[19] 旅大市文物管理組:《旅順老鐵山積石墓》,《考古》1978年2期。

[20] 童恩正:《四川西南地區大石墓族屬試探》,《考古》1978年2期:羅開玉:《川西南與滇西大石墓試析》,《考古》1989年12期。

[21] 中國社會科學院考古所新疆隊、新疆巴音郭楞蒙古自治州文管所:《新疆和靜縣察吾乎溝口一號墓地》,《考古學報》1988年1期。

[22] 許玉林、許明綱:《遼東半島石棚綜述》,《遼寧大學學報》1981年1期。

[23] 同上。

[24] 浙江省文管會、浙江省博物館:《浙江新石器時代文物圖錄》附錄六。

[25] 見[2]、方殿春、劉葆華:《遼寧阜新縣胡頭溝紅山文化玉器基的發現》,《文物》1984年6期。

[26] 同[19]。

[27] 賈蘭坡:《吉林西團山古墓之發掘》,《科學通報》1950年1卷8期:東北考古發掘團:《吉林西團山石棺墓發掘報告》,《考古學報》1964年1期。

[28] 同[10]:中國科學院考古研究所內蒙古工作隊,《寧城南山根遺址發掘報告》,《考古學報》1975年1期。

[29] 《文物考古工作十年》(1979————1989),文物出版社,1990年,73頁。

[30]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吉林汪清金城古墓葬發掘簡報》,《考古》1986年2期。

[31] 黑龍江省博物館,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黑龍江文物考古三十年主要收獲》,《文物考古工作三十年》,文物出版社,1979年,116頁。

[32] 許明綱;《旅大市營城子古墓清理》,《考古》1959年6期。

[33] 許玉林:《遼南地區花紋磚墓和花紋磚》,《考古》1987年9期:馮永謙、鄒寶庫等:《遼陽舊城東門里東漢壁畫墓發掘報告》,《文物》1985年6期。

[34] 朝陽地區博物館、朝陽縣文化館:《遼寧朝陽發現北燕、北魏墓》,《考古》1985年10期:黎瑤渤:《遼寧北票縣西官營子北燕馮索弗墓》,《文物》1973年3期;遼寧省博物館等:《朝陽袁台子東晉壁畫墓》,《文物》1984年6期。

[35] 陳大為:《桓仁縣考古調查發掘簡報》,《考古》1960年1期 李殿福:《一九六二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查簡報》,《考古》1962年11期。 王增新:《遼寧撫順市前屯、注渾木高句麗墓發掘簡報》,《考古》1964年10期。

[36] 王承禮、曹正榕:《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年6期:吉林省考古研究室、吉林省文物工作隊:《統一的多民族國家的歷史見證》,《文物考古工作三十年》,文物出版社,1979年。

[37] 黑龍江省文物考古研究所:《黑龍江海林北站渤海基試掘》,《黑龍江海林二道河子渤海墓葬》,《北方文物》1987年1期;《文物考古工作十年》(1979-1989),88頁,文物出版社,1990年。

[38] 《文物考古工作三十年》117頁,文物出版社、1979年。

[39] 靳楓毅:《遼寧朝陽前窗戶村遼墓》,《文物》1980年12期:《遼李進墓發掘報告》,《文物參考資料》第二卷第九期;徐英章:《遼寧喀左縣大城子元代石槨墓》,《考古》1964年5期。

[40] 曹汛:《葉茂台遼墓中的棺床小帳》,《文物》1975年12期。

[41] 同[1]。

[42] 同[3]。

[43] 戴應新:《陝西神木縣石峁龍山文化遺址調查》,《考古》1977年3期。

[44] 浙江省文物管理委員會:《浙江新石器時代文物圖錄・岱石山石棚》,1958年;俞天舒:《瑞安石棚墓初探》,《溫州文物》第5期。

[45] 北京大學考古系、煙台市文管會、乳山縣文管所:《山東乳山縣南黄莊西周石板墓發掘簡報》,《考古》1991年4期。

[46] 《文物考古工作十年》(1979-1989), 172頁,文物出版社,1990年。

[47]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河北省文物管理處:《滿城漢墓發掘報告》,文物出版社,1980年,山東省博物館:《曲阜九龍山漢墓發掘簡報》,《文物》1972年5期。

[48] 廣州象崗漢墓發掘隊:《西漢南越王墓發掘初步報告》,《考古》1984年3期。

[49] 《新中國的考古發現和研究》,文物出版社,1984年。

[50] 同[15]。

[51] 同[8]。

[52] 山西雲崗古物保養所清理組:《山西大同西南郊唐、遼、金墓清理簡報》,《考古》1958年6期。

[53] 張先得、黄秀純:《北京市房山縣發現石檸墓》,《文物》1977年6期。

[54] 山西省文物管理委員會、考古研究所;《山西芮城水樂宮舊址宋德芳、潘德冲和“呂祖”墓發掘簡報》,《考古》1960年8期,

[55] 山東鄒縣文物保管所:《鄒縣元代李裕庵墓清理簡報》,《文物》1978年4期。

[56] 江西省文物管理委員會:《江西永新北宋劉沆墓發掘報告》,《考古》1964年11期。

[57] 同[17]。

[58]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定陵博物館、北京市文物工作隊:《定陵》,文物出版社,1990年。

[59] 同[20]。

[60] 楚雄彝族自治州文管所、雲南省博物館文物隊:《雲南永仁永定鎮石板墓清理簡報》,《文物》1986年7期。 羅二虎:《四川崖墓的初步研究》,《考古學報》1988年2期。

[61] 同上。

[62] 李復華等:《郫縣出土東漢畫像石棺圖像略說》,《文物》1975年8期:四川省博物館、郫縣文化館:《四川郫縣東漢磚墓的石棺畫像》,《考古》1979年6期:雷建金;《簡陽縣鬼頭山發現榜題畫像石棺》,《四川文物》1988年6期。

[63] 貴州省博物館:《貴州黔西縣漢墓發掘簡報》,《文物》1972年11期;貴州省博物館:《貴州清鎮平壩漢至宋墓發掘簡報》,《考古》1961年4期。

[64] 索郎旺堆:《西藏郎縣列山墓地的調查和試掘》,《文物》1985年9期:西藏文管會文物普查隊:《西藏乃東縣普努溝古墓清理簡報》,《文物》1985年9期。

[65] 四川省博物館:《四川東山灌溉渠宋代遺址及古墓清理簡報》,《考古》1959年8期;蔣美華等:《四川大足縣繼續發現帶精美雕刻的宋墓》,《文物參考資料》1955年8期:重慶市博物館歷史組:《重慶井口宋墓清理簡報》,《文物》1961年11期。

[66] 貴州省博物館發掘組:《貴州桐梓宋墓的清理》,《考古通訊》1958年2期。

[67] 貴州省博物館:《貴州清鎮宋墓清理簡報》,《文物》1960年6期。

[68] 重慶市博物館;《四川銅梁縣明代石槨墓》,《文物》1983年2期;四川省博物館、劍閣縣文化館:《明兵部尚書趙炳然夫婦合葬墓》,《文物》1982年2期。

[69] 李遇春:《博爾塔拉自治州石人基調查簡記》,《文物》1962年7、8期。

[70] 李征:《阿勒泰地區石人墓調查簡報》,《文物》1962年7、8期:新疆社會科學院考古所:《新疆克爾木齊古墓群發掘簡報》,《文物》1981年1期。

[71] 《溫宿縣包孜東墓葬的調查和發掘》,《新疆文物》1986年2期。

[72] 四川省聯合考古調查隊:《西昌壩河堡子大石墓發掘簡報》,《考古》1976年5期;《西昌壩河堡子大石基第二次發掘簡報》,《考古》1978年2期。

[73] 同[22]。

[74] 同[18]。

[75] 遼寧省博物館文物工作隊,《遼寧朝陽縣魏營子西周和古遺址》,《考古》1977年5期。

[76] 河北省文物管理處:《河北省平山縣戰國時期中山國墓葬發掘簡報》,《文物》1979年1期。

[77] 《呂氏春秋·孟冬記》高誘注。

[78] 同[47]。

[79] 高崇文:《西漢長沙王墓和南越王墓葬制初探》,《考古》1988年4期。

[80] 遼寧省博物館,遼寧鐵嶺地區文物組發掘小組:《法庫葉茂台遼墓記略》,《文物》1975年12期。

[81] 靳楓毅:《遼寧朝陽前窗戶遼墓》,《文物》1980年12期。

[82] 夏鼐:《臨洮寺佳山發掘記》,《考古學論文集》43頁,科學出版社,1961年。

[83] 同上。

[84] 甘肅省文管會:《蘭州上西園明彭澤墓清理簡報》,《考古通訊》1957年1期。

[85] 青海省文物管理處考古隊:《青海省文物考古工作三十年》,《文物考古工作三十年》166頁,文物出版社,1979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