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작가의 말
1부 산책
2부 사물
3부 사람
4부 행간
작가의 말
삶의 무늬를 아로새기다
보이지 않는 바람도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깁니다. 살면서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내 삶의 발자취와 무늬를 더듬어봅니다. 접어두었던 귀퉁이를 펴고 쟁여두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승이며,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모든 것이 예술임을 믿습니다. 산책하며 만났던 사람과 사물 그리고 행간에서 길을 잃고 보지 못한 것들을 써 내려갑니다.
저의 어쭙잖은 글쓰기는 행여 신변잡기나 대중 수필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함께 문학 작품으로서의 표현과 진술이 숙제로 남습니다. 정통 수필의 틀을 벗어나 마음 가는대로 쓴 글이니만큼 잡문이라 함이 옳을 듯합니다. 보따리를 함부로 풀어 이야기가 빗발치는 듯한 산만함과 군말과 사족으로 문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장황함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글발이 막히거나 주춤할 때 주위의 따뜻한 시선은 지친 글이 힘을 받아 일어서게 하는 동력입니다. 여러분 덕에 납작 엎드린 글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습니다.
내 삶의 무늬가 누군가의 마음에 아로새겨진다는 것은 실로 기쁜 일이죠. 푸른 잉크 머금은 채 사각거리는 펜의 감촉으로 써 내려간 손편지 같은 파란 마음을 건넵니다.
2022년 여름
김병준

1부 산책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 짧은 산책길에서도 이르는 곳마다 어느 하나 선善 아닌 것이 없다.
봄날 일기
봄은 반갑지 않은 손님, 황사라는 이름의 불청객을 데려왔다. 코로나로 엎어졌는데 황사가 온 나라를 덮치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마스크가 시험에 든 듯하다. 덕유산 자락의 청정 지역인 이곳 거창도 예외는 아니어서 흙바람이 뿌옇게 일고 하늘은 잿빛이다. 어제는 꽃비가 내리더니 지금은 흙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벚꽃의 만개를 시샘한 토우土雨다.
전국이 황사 경보 발령 중. 길을 나서는데 저멀리 덕유산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연 낮달처럼 보이던 태양마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없다. 눈에 회색 렌즈를 끼운 듯 가시거리는 짧아지고 하늘이 무거워 발걸음도 휘청거린다. 누런 고름 같은 먼지가 앞을 가려 몸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밤새 건너 온 거대한 모래 먼지 폭풍이 아가리를 벌려 갓 물든 초록과 생동의 봄들을 모조리 집어삼킨다. 속수무책이다. 세상이 온통 누렇다. 소읍이 초토화 되고 사람들은 발이 묶였다.
시장에는 코로나 직격탄의 잔해와 구석구석 밀려온 누런 먼지로 장날임에도 발길이 뜸하다. 최근에 다시 문을 연 영화관 롯데시네마는 50세 이상 중년 파격 할인에도 미동이 없다.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 「미나리」 흥행마저 잠잠한데 그나마 봄의 미각을 깨우는 미나리의 판매량이 늘어나 다행이다. 봄미나리는 미세먼지나 황사로 체내에 쌓인 중금속을 몸밖으로 배출하는 뛰어난 해독 작용을 자랑한다. 덕분에 미나리 밭에는 죽음의 먼지가 아예 가닿지 않았을 게다.
먼지 알갱이들이 눈 안에 서걱거리고 콧구멍을 넘나들며 간지럼을 태운다. 마스크 틈새를 비집고 온 대책 없는 이 모래 난민들을 어떡하나? 황토 한 줌, 아니 풀썩풀썩 먼지 나는 황톳길 하나가 마스크 팩처럼 찰싹 얼굴을 감싼다. 숨이 턱턱 막힌다.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영호강도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한숨을 고른 후 고개를 드니 회색 하늘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오는 말,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실제로 체험 중이다.
코로나의 상흔과 황사의 공습이라는 삶의 고비 앞에서 고비 사막의 언덕을 오르는 낙타의 고단을 생각한다. 황사의 발원지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몽골의 거친 땅에도 염소와 낙타가 산다. 한때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자연은 인자하지 않다. 인간에게 끊임없이 경고를 준다. 하지만 그 노여움 뒤에는 새봄의 약동이 숨쉰다. 누런 먼지가 쌓인 호미와 삽을 씻으며 맑은 정신의 날을 벼린다. 마스크를 잠시 내리고 눈을 크게 뜨면 흐린 하늘이 문장 하나를 선사한다.
‘자연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감사한 것이다.’
이렇듯 황사와 함께 상춘하며 3월을 갈무리한다.
서흥사 참선
서흥사, 최근 들어 부쩍 자주 찾는 절입니다. 깊은 산중에 자리잡은 고즈넉한 산사가 아닌,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조그만 암자나 토굴 정도랄까요. 상좌나 절의 살림을 도우는 보살이나 행자도 없이 주지 한 명만 머무는 단출한 비구 절입니다. 그래서 절 이름 끝에‘사寺’를 붙이기가 약간은 딱한 지경입니다. 근데 여느 절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죠. 이 절에는 불상도 없고 탱화도 걸려 있지 않습니다. 시줏돈을 넣는 불전함이 법당 출입문 입구에 보란 듯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이 절의 소재지는 합천입니다.
합천, 하면 언뜻 해인사를 떠올리죠.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겨 큰 절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어 명산이 되었다
소리길을 오를 때 마주하는 글귀에서 보듯 해인사는 아주 큰 절입니다. 큰 절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죠. 제 일터와는 한 시간 거리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부처님의 향기를 접할 수 있기에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 3대 사찰, 법보 종찰, 교구 본사, 총림, 팔만대장경 등 해인사의 스케일과 장엄함 때문에 일개 불자에게는 큰 산문을 마주하기가 외려 버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자가용이 없는 뚜벅이 신세가 되고 나서부터는 절에 한 번 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때 편하고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절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만나게 된 절이 바로 서흥사입니다. 정규 말사축에도 들지 않는 주지 한 명만 수행하는 1인 사찰이라 별 부담이 없습니다.
수시로 들러 흐트러진 마음을 닦고 단속하기가 참 편안한 곳이죠. 다만 갈 때마다 늘 정좌하고 있는 주지스님과 독대하는 차茶공양의 시간이 없어 아쉽기는 했습니다.
거창에서 합천으로 가는 출근길. 화요일과 목요일, 주 2회 합천행 시내버스를 탑니다. 두 곳 모두 시市가아닌군郡 지역임에도 시내버스라 함은 아마 원거리를 운행하는 시외버스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시골 버스는 산을 넘고 들을 지나고 물을 건너서 마을마다 정차하는 완행버스입니다.
아침 첫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늘 첫 손님인 나는 언제나 딱 한자리에 앉습니다. 버스 오른쪽 뒷바퀴 바로 뒷자리입니다. 나의 전용 지정석인 셈이죠. 이런 곳을 두고 어느 시인이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고 얘기했음 직합니다. 나도 ‘꽃자리’라고 이름 붙입니다. 헐한 차비에 비하면 반갑고 고맙고 기쁜 자리입니다.
꽃자리에 앉아 여러 일을 해치웁니다. 창문 밖의 풍광도 눈에 넣고, 푸른 나무의 키 크는 소리도 귀에 담고, 봄 향기도 킁킁거립니다. 시상을 띄우고 글감 주위를 어정대다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검색창을 엽니다. 졸음에 겨운 버스 시계를 보다가 입안에 흥얼거리던 하모니카 음계를 자꾸 놓칩니다. 버스가 한참을 달렸는데도 승객은 여태 나 한 명뿐. 너른 버스 안에 홀로 있어도 마음은 넉넉합니다. 이른바 ‘텅 빈 충만’입니다.
버스 안에서 양손을 깍지 껴 단전에 모으고 두 엄지가 맞닿은 채 정좌한 내 모습을 보고 스스로 깜짝 놀랍니다. 불안한 감정을 달래보겠다는 마음이 그대로 발동했는지 나도 모르게 참선 자세가 자연스레 잡힌 것이죠.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추 세웁니다. 내친김에 어설프게나마 참선에 들어갑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하나씩 들리기 시작합니다. 먼저 버스 뒷바퀴가 굉음을 내더니 오르막, 내리막, 평길, 요철에 따라 소리맵시가 제각각입니다. 기어를 변속할 때마다 음의 높낮이와 강약이 바뀌고 과속방지턱을 넘을 땐 소리가 춤을 춥니다. 참선은 나에게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를 듣는 공부법인데 미욱한 중생에겐 잡음만 왱왱거릴 뿐입니다.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승객들 수가 늘어납니다. 등짐 가득 진 팔순의 할머니를 보면 수행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요. 무거운 짐 진 채 하루를 지탱하려 몸소 움직입니다. 행선行禪입니다. 화두와 견성 같은 어려운 말은 당치않습니다. 좌선坐禪이랍시고 시늉을 내던 내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눈을 감으니 오감 중 나머지 감각들이 활짝 핍니다. 내 몸은 촉수를 뾰족 세워 마음의 소리를 듣고, 마음의 향기를 맡고, 마음의 고요를 찾습니다.
무엇이 ‘참나眞我’인가? 참선은 고요한 마음 상태를 통해 나의 실제 모습을 찾는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덜컹대는 버스 안에서 흔들리는 마음으로 참선 수행이 제대로 될까마는 참선의 시도만으로도 성불한다는 믿음으로 정신을 다잡습니다. 어디서건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들이 마음을 닦는 일임을 믿습니다.
마음을 밝히는 참선이 연꽃처럼 고운 빛깔을 뿜어냅니다. 달리는 버스 안이 환해졌습니다. 거창과 합천을 오가는 서흥여객 40번 버스가 내 선방이요, 나의 절입니다.
그래서 「서흥사」라 이름 지었습니다.

소나기 단상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올 여름은 유난히 소나기가 잦았다. 비가 마구 쏟아지다가도 어느새 뚝 끊겼다가 또다시 들이퍼붓는 등 하루의 날씨가 수시로 변했다. 비가 그치고 땅바닥도 금세 마른 저녁답에 걷기 운동을 나선다. 길가 풀섶의 지워지지 않은 빗방울도 살피며 이른 가을의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목표 삼은 곳까지 갔다 오는 길에 내 발자국을 따라오는 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빗소리다. 어둑해진 하늘은 소나기를 함께 거느리고 와 걸음을 재촉한다. 어정걸음을 잰걸음으로 바꾼다.
출발 때 마른 하늘이라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했는데,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지갑마저 두고 나온 상황이다.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며 한바탕 세차게 퍼붓는다. 땅바닥에는 벌써 물길이 생긴다. 우산 대신 뒤집어쓸 옷도 없거니와 억수 같은 장대비 사이로 뛰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죽비처럼 등짝을 내리치는 빗줄기에 고개를 숙여 걸었으나 길가엔 널브러진 우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차들이 나를 보고 세워줄 리 만무하다. 스치듯 달리던 승용차가 튀긴 흙탕물 세례가 몸을 때린다.
소나기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 같다. 소나기는 피하라 했는데, 실로 난감하다.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 중 글귀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래. 삶에 가끔씩 맞닥뜨리는 소나기를 피하지 않고 즐기기로 했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바로 세워 정면 돌파한다. 흠뻑 젖은 몸은 빗속으로 춤추듯 뛴다. 뛰어라. 나 또한 굵은 빗줄기가 되어.
관음觀音
햇볕 쨍쨍한 날, 강변 아름드리 그늘 아래서 여름의 절정을 듣는다. 소나기 그치기가 무섭게 매미들이 열창을 퍼붓는다. 땅속에서 7년의 기다림 끝에 세상 밖으로 나온 매미는 2주일 만에 수명을 다한다. 암컷을 부르는 구애의 목소리는 일생을 다 울어도 짧다.
입추가 지나면서 더욱 큰 소리로 쩡쩡 울어댄다. 목놓은 울음이 슬프진 않다. 나무에 매달린 짧고 강한 일생을 경배하듯 올려다본다. 매미가 크게 울어 한 그루 여름을 이루었다. 온 힘을 다하는 소리 공양 덕에 깊은 그늘 아래서 하안거 수행에 든 듯하다. 매미 울음 한 소쿠리를 폰에 담았다. 여름이 그리울 때 두고두고 꺼내 들을 요량이다. 소나기처럼 찾아온 여름은 불사佛事를 다 행하고 나면 고요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마음은 아직도 젖어 있는데 하늘을 뒤덮은 구름장은 또 소나기를 마구 뿌려댄다. 나뭇잎들은 고개를 숙이고, 매미들은 숨을 죽이며 뜨거운 여름을 식히고 있다. 자연은 내게 묻는다. 땡볕처럼 뜨거운 사람인지, 소나기처럼 세차고 격한 삶인지, 매미처럼 세상을 향해 크게 울어보았는지. 매미 울음에서 소나기 소리를 듣는다. 매미 울음은 지친 몸과 마음을 적셔놓고 이내 사라진다. 이렇게 또 여름이 지나가고 소리의 여운은 가을이 되어도 가시지 않는다.
베토벤
소나기가 세차다. 불안의 시대를 위로하는 베토벤을 만난다. 그에겐 비 오는 날 어울리는 한여름 소나기 같은 음악이 많다.
「전원 교향곡」 4악장은 ‘폭풍우’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처음엔 먹구름이 천천히 밀려오다가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거듭 휘몰아친다. 나중엔 햇살이 살짝 비치며 다시 전원의 평온하고 목가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악장의 구성이 인생의 날씨를 연상케 한다.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를 통해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Tempest」를 듣는다. 내 마음속에도 폭풍우가 인다. 연주가 끝난 후 2분 가까이 이어진 청중의 박수갈채는 소나기 소리보다 훨씬 소나기답다. 천상의 빗소리다.
세찬 소나기 소리와 베토벤의 운명은 멋진 조화를 이룬다. 「운명 교향곡」 1악장 첫 소절에서 ‘따따따단’, 이 강렬한 음은 마치 소나기가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소나기는 걷잡을 수 없는 나의 운명 같기도 하다.
삶에 소나기가 쏟아질 때, 참기 힘든 고통이 쏟아질 때 명작이 탄생한다. 삶의 역설이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을 비롯해 교향곡 「운명」, 「전원」, 「합창」 등의 걸작들은 베토벤의 청력 상실 이후에 쓰여진 작품이다. 그는 불행과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연말이면 지구상에 널리 울려 퍼지는 음악이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그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작곡한 마지막 작품이다. 특히 4악장 피날레는 교향곡에 성악을 등장시킨 파격까지 더해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을 남겼다. 바로 「환희의 송가」다.
합창 교향곡이 초연되었을 때 천상의 소리로 연주가 끝났으나 청중은 긴 침묵에 빠져든다. 한동안 박수 소리는 물론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혼을 울린 감동 앞에 다들 넋을 잃었을 뿐이다. 한참 후 후두둑 후두둑 성긴 박수 소리가 일순간 쏴아 하며 소나기처럼 장내를 뒤덮는다. 모두 기립하여 갈채를 보내지만 지휘대의 베토벤은 불행히도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한 단원이 그를 객석으로 돌려 세운다. 그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청중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때서야 열광적인 환호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는 다섯 번이나 무대로 불려나왔다.
베토벤에게서 침묵을 본다. 소나기 직전의 먹구름 같은 침묵을 본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32곡)을 완주한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베토벤이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소리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이다.”라고 했다. 소나기가 이제사 그친다. 소나기 뒤엔 무지개의 위로가 있다.
파란 하늘
눈길 모아 한곳을 오래 보고 있으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 예술 작품과 그녀의 얼굴이 그러하다. 수평선, 그리고 마음 흐릴 때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 역시 그러하다. 어린이에게 하늘색이 사라지고 어른의 우울은 하늘을 회색으로 칠하지만 오늘은 구름 한 점, 황사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다. 내게 늘 파란 하늘로 남아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본다.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라다 보니 어릴 적엔 부산-통영 간 배편을 많이 이용했다. 뱃멀미는 일상이었고 멀미를 쫓느라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귀신같이 멀미를 잡아준 건 어머니 말씀이었다.
“멀리 수평선을 오랫동안 쭉 바라보고 있거라.”
그 말씀은 어떤 처방보다 특효약이었고 멀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세월이 지나 삶의 멀미가 날 때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생각한다. 어설픈 시인이 되어서도 큰 파도에 연연하지 않는 수평선 같은 시를 적으려 애쓴다. 흔들리는 바다 위의 수평선을 곧고 팽팽하게 지탱해 주는 건 파란 하늘이다.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며 자라니까요
–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어효선 님이 노랫말을 썼는데 「과꽃」, 「꽃밭에서」 등 주옥 같은 동요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산과 들, 나무가 파란 이유를 아이들의 맑은 마음 같은 파란 하늘에서 찾았다. 미세 먼지로 아이들 마음에 하늘색이 사라진 요즈음, 아이들이 예전처럼 파란색 크레파스를 꺼내어 꽃밭을 칠하고 꿈을 그려 나가길 바래본다.
푸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을엔 어둠이 내리고 짙은 남색의 밤하늘에 노란 별들이 소용돌이친다. 병실의 작은 창을 통해 바라본 별들의 회오리는 눈부시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구글이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과 함께 진행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은 전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고흐 역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병원 입원 중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1년 후 세상을 떠나지만 우울과 발작의 고통 속에서도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밤하늘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 그림 속에서 나는 어린 왕자와 알퐁스 도데의 별을 찾고 윤동주와 이성선 시인에게 길을 묻는다. 얼마 전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떠나 저 하늘 별이 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김환기가 점점이 찍은 오만가지 그리움이 수많은 푸른 별이 되어 총총히 빛난다. 나는 지금도 내 가슴에 푸른 하늘을 담고 별 여럿을 안고 살아간다.
양산시에 거주하는 하모니카 제자들이 거창으로 소풍을 오겠다고 한다. 그들의 방문은 원족遠足이란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들은 시각 장애인이다. 자체 하모니카 모임을 만들었는데 가르칠 선생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한 달에 한 번 출장 지도를 자청해 그들과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다. 연령은 50~70대로 안내 도우미 3명을 포함하여 남녀 10명이 겨울 추위를 뚫고 방문한다고 알려 왔다. 일정이 정해지고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무덤덤했지만 그들의 기대와 설렘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그들은 부풀어 있었다. 선생님 계신 곳 원정 공연을 위해 자발적으로 맹연습을 거듭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아차 싶어 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그들에게 제공할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 리스트를 만들었고 오감 중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만족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했다. 일단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지역의 시각 장애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사정을 듣더니 그는 거창의 명소를 꼭 구경시킬 것을 당부했다.
“아니 눈이 불편한데 어떻게?” 이런 반문을 무색케 했다.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 단, 좋은 풍광을 마음에 그려줄 수 있는 해설이 필요하다.’라는 천금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거창의 선수급 지인들에게 도와달라는 SOS를 쳤더니 바로 OK 싸인이 왔다. 대금 연주를 들려주고 우리 고유의 가락인 전통 소리도 잠시 가르쳐주겠다는 후배, 허브 농장 견학과 함께 실제 허브 체험의 시간을 제공하겠다는 농장주, 그리고 거창의 문화 해설사를 자처하는 친구까지 동참했다.
하지만 마음의 눈, 이것이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주위의 도움으로 맞이할 준비는 끝났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마음의 눈으로, 그리고 소리로도 과연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별이 빛나는 어느 날 밤, 추억의 영화 한 편을 본다.
「푸른 하늘」. 원제는「A Patch of Blue」, 한 조각의 파란 하늘이란 뜻이다. 흑인 청년과 시각 장애를 가진 백인 소녀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1965년도 미국 영화이다. 흑백 갈등이 심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스토리인데 현실의 틀을 깨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준다.
여기서 파란색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블루인가? 난폭한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학교도 포기한 채 하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시각 장애 소녀에게 흑인 청년은 검정 선글라스를 선물하며 세상 밖으로 인도한다.‘ 검둥이와 놀아난 더러운 년’이란 욕을 어머니로부터 듣지만 바깥세상의 푸른 하늘은 소외와 폭력에서 탈출하는 자유이자 구원 그 자체다.
영화의 제목을 「푸른 하늘」이라 한 이유도 파란색의 상징성에 있다. KBS 라디오에서 40년째 최장수 방송 중인 장애인 프로그램의 이름이 「내일은 푸른 하늘」이며 각종 시각 장애인 지원 사업이나 봉사 단체의 이름도 「푸른 하늘」 타이틀이 많다. 파랑은 천상의 빛이며 신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파랑은 바다와 하늘을 품은 색이다. 우리가 깊게 내려가 닿을 수 없는 심연의 색이며, 높게 올라가 미칠 수 없는 초월의 색이다. 미美를 향해 평생을 쫓아다니는 예술가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색이다.
영하의 추위지만 구름과 바람 한 점 없는 겨울날, 거창을 방문한 10명의 천사들에게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아니 다 함께 바라본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 고결한 빛이 되어 천상에서 메아리친다. 파란 하늘은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며 선물이다.
파란 하늘 아래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파란 하늘은 우리들의 눈을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마력이 있다. 그들은 두 눈을 활짝 뜨고 세상이 얼마나 푸르고 희망적인지 보고 있다. 다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감사하는 그들은 마치 하늘 같다. 더 멀리 더 높게 보면서도 내면과 본질을 꿰뚫어 본다. 눈앞의 가까운 것에만 눈이 멀어 작은 일에도 욕심내고 아등바등하는 내게 그들은 큰 어른이다. 나는 눈뜬 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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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와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
– 바실리 칸딘스키

보랏빛 소묘
봄이 여름에 자리를 내어 줄 즈음 창포원을 찾았습니다. 거창의 수변 생태 공원 창포원은 사계절 내내 꽃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봄에는 창포, 여름에는 연꽃, 가을에는 국화, 겨울에는 억새와 갈대가 장관을 연출하지요. 경남지방정원 1호인 거창 창포원은 경기 양평의 세미원, 전남 담양의 죽녹원과 더불어 전국에 3개뿐인 지방정원에 선정되어 그 위상을 짐작케 합니다.
일 년 새 벌써 열두 번도 더 찾은 곳이지만 창포원의 풍정은 일몰 무렵이 제일입니다. 한낮보다는 저물녘, 한철보다는 계절의 끝자락이나 끝물이 주는 감회는 새롭습니다. 활발하던 기세가 사그라들고 난 후 꽃들과 나누는 눈인사와 대화는 마음의 일렁임이 더 크지요.
아이리스 정원이 저를 맞이합니다. 아이리스는 붓꽃, 꽃창포, 창포를 총칭하는 속명으로 장미, 튤립, 국화와 함께 세계 4대 꽃 중의 하나입니다. 보랏빛 아이리스가 자신의 일화 한 토막을 내게 들려줍니다.
아이리스Iris라는 이름의 미녀가 한 화가를 만나 둘이 사랑하게 됩니다. 화가는 청혼의 선물로 꼭 살아있는 듯한 아이리스를 그려주었으나 그녀는 향기가 없다고 실망하게 되죠.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날개를 접더니 그림의 꽃에 살포시 입맞춤을 합니다. 그 순간 감격한 그녀 역시 화가에게 다가가 키스하지요. 처음 나누었던 달콤한 키스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아이리스는 지금도 꽃이 필 때면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를 풍깁니다.
아이리스의 꽃말은 ‘좋은 소식’입니다. 보랏빛 향기 속에 사랑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아이리스 정원을 걷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 받는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를 마주합니다. 고흐가 그린 아이리스를 떠올립니다. 130년 전,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병원 정원의 캔버스를 이곳으로 옮기면 액자 포토존이 만들어지죠. 우울에 시달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꽃처럼 시들어가던 정물화 한 점이 여기에서는 보랏빛으로 물든 풍경화로 활짝 피어납니다.
그의 역작 중 밝고 희망적인 해바라기 시리즈에 비해 말년에 그린 아이리스는 슬프고 아름답습니다. 저녁 어스름의 애잔함도 묻어 있지요. 하지만 아이리스는 불안한 영혼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고 위로와 편안함을 줍니다. 고흐의 아이리스를 소환하면 내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분분했던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창포원이 주는 선물입니다. 사실 이곳을 수도 없이 들락날락거린 것은 승용차로 15분이라는 짧은 거리 덕분이기도 하지만 고흐를 만나러 가는 기쁨이 더 큰 이유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유독 못 하는 게 있죠. 멈춤과 휴식입니다. 별과 연꽃과 당신,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가질 수는 없지만 바라볼 수는 있다는 것이죠.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 비운 만큼 더 채워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한 친구가 서울 지리에 밝은 내게 광화문에 있는 땅을 좀 팔아 달라고 합니다. 권리 관계가 복잡하기는 해도 상당히 괜찮은 곳이라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광화문로 1번지, 바로 광화문 광장이었어요. 그 친구의 광장만큼 큰 배포와 여유에 웃음이 나왔죠. 세종대왕과 충무공 동상, 겨울밤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 젊은 날 영혼의 때를 씻었던 교보문고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청계천을 그 친구는 자기 집, 자기 땅이라 여긴 것이죠. 이곳 거창의 수승대와 창포원 그리고 원룸 뒷마당인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모두가 내 뜰이고 내 정원입니다.
‘차경 효과’라 그러죠. 풍경을 빌린다, 주변 경관을 내 집 안으로 들여다 쓴다는 차경借景. 전통 정원 조성과 관련된 건축 용어인데 창문이나 마당의 정자를 통해 바깥의 좋은 경치를 끌어들여 액자에 담긴 한 폭의 그림처럼 만끽하는 것입니다. 작은 절의 풍경 소리, 큰 절의 범종 소리, 숨 통째 담보 잡혀 사둔 어느 시인의 노을 만평과 그 발치에서 흔들려줄 갈대밭도 모두 내 것입니다.
자연에 한하지 않습니다. 칸트, 셰익스피어, 베토벤, 고흐 역시 내 친구들입니다. 그들의 작품을 통한 잦은 교류는 세기의 철학자, 문호, 예술가들을 내 친구로 만듭니다. 빌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소유가 아니라 공유 개념입니다.
초여름 밤, 창포원의 여러 정자 중 하나인 원학정猿鶴亭에 앉았습니다. 자리는 서너 평이지만 마음은 광장입니다. 화르르 지천에 깔렸던 꽃들은 이제 숨을 고르고, 한낮에 만개했던 웃음꽃도 꽃잎을 닫았습니다. 조금 전 날이 저물 무렵의 장면 하나를 떠올립니다. 쪼그려 앉은 채 습지에 드리운 창포뿐 아니라 온갖 수생 식물과 곤충에까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여인. 그리고 몸을 굽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만가만 속살거리는 시 한 편.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 문태준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부분
삶의 달콤함은 멈춤과 휴식에 있습니다. 우주의 존재들은 촘촘한 그물처럼 이어져 있기에 인간은 자연과의 교감과 균형으로 우주의 기운을 얻지요. 조금만 몸을 굽히고 먼저 다가가면 자연은 가깝고 문턱이 낮아집니다. 그때 우리들 눈은 세상과 수평을 이룹니다.
아이리스가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일에 쫓기듯 사는 분, 효율이 삶의 우선인 분, 휴식마저 다음의 성과를 위한 도구로 삼는 분, 현재가 선물Present임을 잊고 미래만을 위해 희생하고 유예하는 분들은 지금 바로 창포원에 다녀가십시오. 13만 평의 창포원은 당신의 땅, 당신의 정원입니다. 몸을 굽히지 않더라도 보랏빛 아이리스는 늘 활짝 피어 있습니다.
지하철 단상
지하철이 강처럼 흐른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양산에 이르러 강줄기 하나가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샛강을 이룬다. 이 강은 본래의 큰 강에 합류하지 않고 땅 속 깊이 파고들며 물길을 만든다. 사상沙上에서 물줄기를 돌리더니 부산의 한복판 서면西面을 관통한 후 못골을 지나 해운대 앞바다에 제 몸을 부린다. 땅속을 흐르는 물줄기는 호포역에서 출발하여 덕천, 사상, 서면, 수영에서 지류들과 합수 후 마침내 해운대 장산역에 이른다. 부산 지하철 2호선 코스다.
삶에 뭔가 헝클어지거나 머릿속이 하얘지면 일없이 지하철을 탄다. 일렬로 반듯하게 이어진 전동차의 어둠 속 질주가 좋다. 2호선 기점 장산역을 출발하는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아까와는 역순으로 종점 호포역까지 39개 역을 지나는 나홀로 여행이다.
은퇴 후의 꿈이 문화 해설사 혹은 가이드계의 삼성전자인데 벌써 올해로 법적 노인 대열에 합류했다. 만 65세 지공선사가 된 것이다. 노추를 거부하고 향기 나는 신사를 자인하며 ‘낭만석’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경로석에 앉아 한동안 상념에 잠긴다. 눈을 감은 채 역 이름들을 차례대로 외워보기도 하고 역마다 주저리 매달린 이야기들을 들추며 짧은 기행문을 써내려간다.
장산역. 634m 높이의 장산은 금정산, 백양산에 이어 부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장산에 올라 바다를 향해 해운대를 조망하면 왼쪽이 좌동左洞, 오른쪽이 우동右洞, 가운데 동네가 중동中洞이다. 해운대는 4개의 시티City로 이루어진다. 좌동에는 해운대 신시가지의 새로운 이름인 그린시티, 우동에는 마린시티와 센텀시티, 중동에는 101층 초고층 건물군群 엘시티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해운대의 거대한 빌딩숲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50층 이상 초고층 건물 개수가 서울 전체보다 많다. 이러한 위상을 반영하듯 이곳 사람들은 해운대가 ‘부산의 강남’이란 말로 서울 강남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한다. ‘한국의 맨하탄’으로 생각할 만큼 자존심도 높다.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동백역을 지나 전동차는 벡스코역에 닿는다. 벡스코역의 원래 이름은 ‘시립미술관역’이었다. 미술관, 가슴 두근거리는 단어다. 근데 부산은 왜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역’ 같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가. 역명 변경 후 역을 지날 때마다 문패 떼어진 집처럼, 미술관이 휴관한 것인 양 그림 한 점 없는 가슴처럼 허전하다.
춘천에는 ‘김유정역’이 있다. 수도권 전철 경춘선의 정차역인데 지역 출신 문인 김유정을 기리는 차원에서 사람 이름을 역명으로 쓴 최초의 사례다. 역 인근에는 ‘김유정문학관’, ‘김유정우체국’, ‘농협 김유정지점’, ‘김유정거리’가 있다. 참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또 주변엔 ‘봄봄식당’, ‘점순네닭갈비’ 등 그의 작품과 관련된 상호도 더러 있다. 지역 예술 문화 마인드가 이쯤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전동차는 오래 전 파란 기억들을 센텀시티역에 부려놓는다. 수영 바닷가에서 해수욕하던 어린 소년과 해수욕장 폐쇄 후 수영만을 지키던 육군 충렬부대 부산경비단 박병장은 이제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김해공항으로 옮겨간 수영비행장 자리엔 마천루가 즐비하다. ‘센텀’이란 명찰을 달고 초고층 건물들이 기립한다.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밤낮으로 기동한다. 센텀시티는 수영강변 우동 일원에 세워진 미래형 신도시다. 본래 이곳은 수영비행장과 수영해수욕장이 있었던 곳인데 IT, 영상, 쇼핑, 관광, 전시·컨벤션, 주거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미래형 복합도시로 변신했다. 수영비행장이 센텀시티로, 수영만 바다가 매립을 거쳐 마린시티로 바뀌면서 상전벽해를 이룬다. 수영만의 모래 퇴적층 위에 올라선 초고층 스카이라인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다.
수직 도시, 세계 최대, 하이엔드, 젊음의 해방구, 욕망의 용광로, 시티 속의 시티… 이런 단어들이 전동칸처럼 줄지어 떠오른다. 센텀Centum은 라틴어로 숫자 100을 뜻하며 센텀시티는 100% 완벽한 첨단 미래 도시를 지향한다. 센텀시티는 미식美食 도시다. 여기서 팁 하나. 센텀이란 칭호를 문패 앞에 붙여 주고 싶은 맛집 한 곳을 감히 소개한다. 나건필 가이드가 미슐랭 가이드가 되어 추천하는 곳은 가히 무결점 프렌치 레스토랑 「르꽁비브」. 맛, 서비스, 분위기 셋 다 우아하고 훌륭하다.
민락과 수영, 두 개의 역이 졸음 속에 지나갔다. 파도와 갈매기 소리가 오후의 나른함을 깨운다. 전동차가 광안역으로 접어들면 안내 방송 효과음으로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쏴~ 쏴쏴~~ 끼륵~ 끼륵끼륵~~ 이번 역은 광안, 광안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안내 멘트와 동시에 광안리 앞바다로 뛰쳐나갈 뻔했다. 광안 바다를 잠시 추억한다. 청년 시절의 블루오션이 이제는 잠잠하다. 무한한 자유를 꿈꾸며 높이 날아오르던 내 마음의 갈매기 조나단은 사라지고 파도를 피해 현실이라는 뭍에서 단지 눈앞의 먹이만을 구하는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비상飛上은 갈매기와 젊은이만의 전유물이 아닐 터.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았다.
그러나 두 눈만은 예외였다.
바다 빛깔을 띤 파란 두 눈동자는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가 우리들에게 던진 말을 떠올렸다. 광안리 바닷가에서 월척 문장을 위해 투망을 던져보지만 고작 추억의 편린 몇 낱 주워 올린다. 경로 우대 공짜 탑승이라 힘이 달렸는지 기행 열차는 애초 작정했던 코스의 절반에도 못 미친 채 마음의 본향 광안역에 지금껏 정차하고 있다.
자리 잡기
시골 장날엔 재래시장과 접한 길가에도 장이 빼곡 서지요. 점포가 없는 장사치들은 새벽같이 나와 자리를 잡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 아침을 지배하는 사람만이 성공한다.’ 라는 금언을 새겨봅니다.
자리를 잡았다는 말은 작은 성공이라도 이루었다는 뜻이라 듣기에 참 좋아요. 하지만 자리에 싸움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부정적인 말로 바뀝니다. 자리싸움이라면 언뜻 도서관과 지하철 자리 잡기가 떠오릅니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이 일은 재빠르고 능란한 민첩성과 투쟁심 이외에도 낯두꺼운 철판이 필수적이죠.
마치 농구 경기의 박스 아웃Box Out 같다고나 할까요. 리바운드 볼을 따내기 위해 미리 자리 잡기를 하려면 골밑에서 상대와 등을 밀치고 팔을 끌어당기는 등 치열한 몸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자리를 잡았다면 다행입니다만 요즘 왠지 아픈 단어가 하나 있네요. ‘일자리’입니다. 자리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이지요. 취업 성공은 차치하고라도 젊은 청춘들이 앉을 면접 자리라도 많이 생겨야겠습니다. 그들의 자리가 일터로 정착되면 고마운 일이지만 우선 방석이나 돗자리 같은 역할의 깔개라도 주어졌으면 해요.
일자리 시장에 「오징어 게임」이 설핏 보입니다. 돈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 게임은 자리싸움, 땅따먹기 차원에서 더욱 처절한 벼랑 끝 버전이죠.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절박한 생존의 비명이 들립니다. 넷플릭스 시청 세계 1위에 오른 문화 강국 글로벌코리아의 높은 위상에도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습니다.
다시 장터로 돌아옵니다. 팔아야 먹고사는 생존의 공간으로서 이곳 역시 자리 잡기가 치열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시골 장터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식의 서바이벌 게임이 아닌 이해와 배려, 공존과 상생의 훈훈함이 장터거리 곳곳에 깔려 있지요.
볼썽사나운 밥그릇싸움 대신에 한술 밥도 나누고, 메뚜기 이마 같은 작은 자리라도 쪼개어 전을 펴고 마음을 앉힙니다. 무심결에 남의 점포 앞을 가로막아도 주인이 너그러이 헤아리며, 노점 단속도 닷새장마다 눈을 감아줍니다.
잠시 터를 잡았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노점露店이지만 제 마음은 그리운 별자리처럼 오래 머뭅니다. 리어카와 좌판을 삶의 자리로 삼은 노점상들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생존을 위한 자리 잡기와 자리싸움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늘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스스로 묻습니다. 오래전 고향이 아닌 이곳에 와서 자리를 제대로 잡았는지, 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잘 받드는지, 타인들의 마음속에 내 존재는 과연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제가 내린 답은 셋 다 오징어 모양의 세모입니다.
덤, 틈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다.’
2021년 연말에 교보생명 사옥에 걸린 광화문 글판 겨울편의 메시지다. 짧은 문장이 주는 울림이 크다. 책 한 권의 독서가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짧은 글이나 단어 하나가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연말이면 교수신문이나 유명 인터넷 포털에서 한 해의 한국 사회를 정리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어느 영어 강의 전문 기업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에 대해 설문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 사자성어와 단어들을 음미하는 재미가 자못 쏠쏠하다. 글 쓰는 입장이라 특정 단어에 매료되기도 한다.
LOVE.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다. 1위를 차지한 LOVE 다음에 HAPPY, FAMILY, TRAVEL, COFFEE 순으로 뒤를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를 꼽아본다. ‘CARE’라는 단어가 오랜 세월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다. CARE는 돌보다, 챙기다, 보살피다, 걱정하다, 관심 갖다, 마음 쓰다, 배려하다 등 참으로 좋은 뜻을 가진 단어다. 유명 스님 한 분은 법문에 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불교도, 기독교도, 유태교도, 회교도 아닌 ‘친절과 배려’라고 했다. 그 덕목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바로 CARE다.
모국어로 돌아와 보자. 순우리말 중에서도 특히 한 음절로 된 낱말이 참 좋고 당긴다.
밥 빵 떡 죽 국 묵 술 물 잠
이들은 아내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것이며 최근 부쩍 불어난 내 몸을 이룬 것이기도 하다. 이들을 위해 오랜 세월 밤낮으로 일했다. 삶과 말과 글은 하나이기에 자주 말하고 글로 쓰는 단어들은 삶과 깊숙이 연결된다. 한 글자로 이루어진 원초적인 단어들이 많은 것도 우리 한글의 우수성이다.
해 달 별
낮 밤 봄 비 눈 불
감 배 밤 귤 꿀 젖
땅 풀 꽃 숲 새 집 논 밭 뜰 돌 담 굴 섬
눈 귀 코 입 손 발 팔 등 배 목 몸 뼈 피 땀 일 돈
시의 소재나 수필의 글감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밖에도 한 글자로 된 절창들이 또 있다.
꿈 멋 맛 넋 결 샘 덤 틈 숨 곁 품 님 길
그 중에서도 요즘 내 마음을 빼앗은 단어가 2개 있다.
‘덤’과 ‘틈’이다.
덤
제 값어치 외에 조금 더 얹어준다는 뜻의 참 기분 좋은 단어다. 시골장에서 과일 흥정을 하다가 덤으로 한 두어 개 더 받았을 때, 편의점에서 내게 꼭 필요한 1+1 행사 상품을 접했을 때의 기분이란.
덤은 바둑 용어이기도 하다. 맞바둑의 경우 먼저 두는 사람(흑돌)이 유리하므로 나중에 두는 사람(백돌)에게 그 불리한 만큼 몇 집을 보상하는 것이 덤이다. 한국 바둑에서는 덤의 값으로 6집 반을 준다. 골프에 통용되는 핸디캡Handicap과 같은 개념이다. 프로 스포츠에서 소속 선수를 다른 팀과 맞바꾸는 트레이드의 경우에도 선수의 역량이 기울 때 몇 명의 선수나 돈을 덤으로 얹어주기도 한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도 두루 쓰이는 덤은 상대방에게 주는 배려라 할 수 있다.
거저 살짝 얹어주는 덤이 가득 차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경우를 접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주된 일보다 부수적인 일이, 메인Main보다 서브Sub가, 주연보다 조연이 빛을 발할 때가 종종 있다. 진주 풍경이 그랬다.
출장 차 진주에 갔었는데 시간이 꽤 남아 본연의 일을 잠시 제쳐둔 채 들른 곳의 풍경은 마치 텅 빈 곳간을 가득 채운 듯한 기쁨을 선사했다. 진주 소재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쥐라기 숲」에 가 보길 권한다. 공룡이 나올 만큼 울창한 숲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쥐라기 숲에는 107년 학교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을 지켜온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메타세쿼이아, 계수나무, 느티나무, 플라타너스 등의 수목들이 만여 평의 숲을 이루고 있다. 초겨울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횡재라도 한듯 거저먹기, 주워먹기, 이삭줍기 식으로 카메라 셔터를 마구마구 눌러댔다. 여자분들 계 탄 기분이 이럴 것이다. 나의 사진 곳간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숲, 만추가경을 다 담기엔 내 눈이 작고, 내 갤러리가 협소할 뿐이다.
틈
사이, 벌어진 자리, 두 대상 간의 거리를 뜻하는 틈은 찢김, 갈라짐, 균열이라기 보다는 좁다란 틈새로 숨 쉬고 숨 돌리는 안식의 공간이다. 틈은 담벼락, 건물 벽, 보도블록뿐만 아니라 어긋난 빼닫이, 삐걱거리는 문이나 창틀, 금이 간 우리의 마음에도 있다. 작은 틈이 가끔 사람들 사이를 큰 간격으로 갈라놓기도 하지만 어두컴컴한 틈 속에도 볕이 들고, 바람이 불고, 별이 뜬다. 돌담이 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틈 때문이듯 틈은 바람의 길이 되어준다. 틈이 있어야 숨길이 트이고 물이 흐른다. 틈새로 비가 적시고, 풀꽃이 피고, 나비도 날아든다. 돌담 발치에는 이야기꽃이 오종종하다.
담장처럼 반듯한 사람보다 드문드문 구멍난 돌담처럼 군데군데 빈틈이 있는 사람이 편하고 좋다. 무결점의 주도면밀한 삶은 숨이 막힌다. 글과 말도 마찬가지다. 꽉 짜여 빈틈이 하나도 없는 글과 허튼 소리나 군더더기 없는 말은 엄하고 철저해 긴장만 팽팽할 뿐이다. 상대의 빈틈은 나의 빈틈을 메워주기도 한다. 벽을 허물고 턱을 낮춘다.
법정스님에게도 빈틈이 있었다. 무소유 스님이 탐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만년필이다. 탐했다기보다 지극한 만년필 사랑이다. 문장이 술술 저절로 나오는 부드러운 필감에 반해 하나를 더 사게 되었다. 두 개가 되자 그날부터 만년필에 대해 처음 가졌던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져버려 결국 뒤에 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만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필요를 넘어선 욕심을 줄이는 삶으로 해석했지만, 하나 더 갖게 되는 마음에서 고매한 스님에게도 빈틈이 엿보인다. 일개 범부가 고승의 존엄을 들먹여 송구스럽지만 그 틈새 하나가 마음의 거리를 좁힌다. 때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작은 틈 하나가 마음을 연다. 스펀지가 자잔한 구멍으로 물을 빨아들이듯 누군가가 다가오게 하려면 빈틈, 빈구석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법정스님은 평소 머물던 강원도 산골 오두막의 방을 세간 없이 아예 텅 비어 두었다. 바람도, 새도, 사람도 마음대로 들락거렸다.
틈은 배려고, 용서다. 틈 사이의 간격만큼 못 본 체 눈감아 주고, 맹한 척 허점도 보여준다. 갈라진 틈새로 난 구멍과 빈 구석이 있는 모습은 반듯하기보다 조금은 기울어져 있기에 서로 사람 ‘人’을 만들고 오히려 균형을 잡아간다.
틈은 사이, 거리, 여지라는 공간적 개념이지만 짬, 겨를, 여유 등 시간적 개념이기도 하다. 일상의 짐을 잠시 내려놓은 주말 저녁에 틈을 내어 바닷가 카페를 찾았다. 송정 해수욕장 남쪽 끝자락 구덕포에 위치한 「틈」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카페다. 이름 하나가 나의 발길을 몇 번이나 당긴 곳이다. 겨울로 가는 시간을 툭 잘라 찾은 한적한 카페. 여기의 문, 창, 탁자, 의자, 마루, 천정, 계단까지 곳곳의 틈에 주목한다. 텅 빈 자리마다 앉은 침묵을 즐기다가 밖을 나서 바다로 향하면 파도는 쉼 없이 뭍에 부딪치고, 하늘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파도의 간격과 별빛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 본다. 파도 와 별들은 수많은 쉼표를 쏟아낸다. 카페 「틈」의 달콤한 빵 조각 같은 겨울밤의 위로다.

정말 그럴 때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문고리를 걸어 잠그다시피 나 홀로의 시간을 보낸다. 대면 영업이란 업의 특성상 나의 일터가 코로나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상황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혹사시키던 몸에 휴식을 주며 침잠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본다.
최근에 칩거하는 생활 패턴은 마치 스님들의 묵언 수행처럼 하안거에 들었다고나 할까.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스스로의 고립을 좀 더 이어가나 싶었는데 친구의 문자 한 통이 한동안 처진 나의 삶을 약동으로 이끌었다. 거리두기는 몸의 격리임에도 SNS 소통마저 잠잠할 때 뜻밖에 서울 친구의 부름은 반갑기 그지없다.
코로나 전선을 뚫고 아침 일찍 서울행 기차를 탔다. 차창 밖을 우두커니, 멀거니 보다가 여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초록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마음이 모처럼 편해진다. 그 푸르름은 멀미 날 때 바라보는 수평선이나 마음 흐릴 때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이나 다름없다. 국민 근심 코로나 때문에 조락한 가을 낙엽 같았던 마음이 조금 생기를 되찾는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거나 절박한 삶의 끝자락에 서 본 자만이 느끼는 작은 희 열이다.
두 번이나 자녀의 혼사를 연기한 친구, 손님이 뚝 끊겨 매상이 없어도 늘상 문을 열어놓아야 하는 자영업자, 취업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 취업을 미루는 취업 준비생, 병원 문을 한 달째 아예 닫고 마스크를 겹으로 쓴 채 코로나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는 의사, 다들 걱정이지만 용기를 낸다.
코로나로 인해 서울행 초고속 열차가 텅 비었다. 인간의 과욕과 무분별한 환경 파괴가 불러온 재앙으로 뻥 뚫린 국민들 마음 같다. 마스크 한 장 해결 못하는 나라에서 각자도생으로 제각기 살아 나갈 방도를 꾀해야 하는 형국이다. 그래도 늘 깊은 심지로 마음 동행해주는 친구가 있어 든든하다. 그가 메일로 보내준 시 한 편이 백신 같다.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부분
엄혹한 시절, 방역 전문가들은 마음 백신을 강조한다. 그 첫 번째는 ‘나를 격려하기’다. 나의 불안과 걱정을 인정하고 잘 받아들인 후 자신을 격려할 것을 권한다.
시 한 편 읽고 나니 오랫동안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짝이 빗장을 푼다. 외로움의 문이 열리고 바람이 넘나든다. 이 와중에도 낮과 밤은 찾아오고, 풀은 자라고, 꽃은 피고, 새들은 노래한다.
차창에 친구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접촉이 아닌 접속의 시대, 종식이가 그립고 종철이가 보고 싶다. 코로나 팬데믹이 하루빨리 ‘종식’되길 바라지만 종식은 내게
“미안하다. 종식은 없다. 토착병이 될 것이다.”라며 코로나의 운명을 얘기한다. 대신 보고픈 이름 ‘종철’을 소리쳐 불러 본다.
“종쳐라~~!! 코로나.”
벌써 ‘수서역 도착’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SRT보다 전파 속도가 빠른 ‘코로나 확진자 397명 추가’라는 뉴스 자막이 눈앞을 막는다.
대구근대골목 기행
큰길 안으로 이리저리 나 있는 좁은 길을 누빈다. 역사는 대로를 거쳐 지나간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골목에도 시간의 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구석구석 이야기가 숨어 있다. 대구는 골목 도시다. 도심에는 천여 개의 골목이 있다. 골목이라는 글자 앞에 근대라는 시간의 단어를 붙이고 스토리를 입혀 명소로 탈바꿈했다. 근대골목투어 2코스, 청라언덕으로 향한다.
먼저 찾은 곳은 「계산성당」. 대구 경북 지역 가톨릭 신앙의 요람으로 명동성당, 전주의 전동성당과 더불어 한국 3대 성당 중의 하나다. 풀 네임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 대성당」. 종교든 무엇이든 나의 짧은 지식과 긍금증을 즉시 해결해주는 스마트폰의 검색 기능이 고맙다. 여행 때마다 스스로 알아가는 기쁨 또한 크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렸던 이곳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지를 물었던 민족 저항 시인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라는 시의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끝내 봄을 누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절망과 허무의 순간에도 꿈속의 애인 마돈나를 부르던 어둡고 구석진 골목은 이제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며 그의 우국충정과 문학 정신을 기리는 환한 봄 길이 되었다.
성당 오른쪽 마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조선의 고갱’으로 불린 대구 출신 천재 화가 이인성의 작품 「계산동 성당」의 배경이 된 수령 100년의 감나무다. 「이인성 나무」로 명명된 이 나무는 화가의 손길이 닿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명소가 되었다. 그림 속의 나목과 90년이 지나 훌쩍 커버린 현재의 나무를 견주어보면 감상의 묘미가 훨씬 클 것이다.
본당 안으로 들어서면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고요와 침묵 앞에 발자국과 숨소리마저 조심스럽다. 무거운 죄와 생명을 떠받치며 양옆으로 줄지어 선 회색 벽돌 기둥들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채광과 어우러진다. 기둥에는 십자가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빛을 머금은 십자가 하나를 마음으로 떼내어 성호를 긋듯 가슴에 아로새기며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진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길을 잃거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하나님을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날 내가 그랬다. 우연히 마주한 신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흐트러진 나를 가다듬었다. 이곳은 나처럼 영적으로 주린 비신자가 찾기에 더없이 좋은 도심 속의 오아시스다. 성스러운 우물에서 잠시 목을 축였다. 골목 기행이 주는 선물이다.
한참 기도 후 눈을 뜨니 갑작스레 성령이 너무 충만해서인지 오히려 길을 잃어버린 형국이다. 갈 곳은 많고 마음은 바쁜데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 골목 여정은 문득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길을 가는데 웬 젊은이가 길가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장님이 되어 살아 왔는데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이 떠진 것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가려했으나 골목길이 너무 많고 대문은 다들 똑같아서 제집을 못 찾아 운다고 했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하고 처방하니 장님은 지팡이를 더듬으며 제집을 잘 찾아갔다. 눈을 뜨고 보니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정작 길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제 걸음을 믿고 제 길을 가라는 가르침이다. 장님이 다시 눈을 감아 집을 찾듯 길 잃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서성대던 골목에서 빠져나와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길 건너 지척에 「청라언덕」이 있다. 청라언덕은 큰 언덕大邱이 아니라 작은 언덕이다. 90계단만 오르면 충분히 다다르는 높이의 나지막한 동산이자, 동산東山이기도 하다. 달성토성(달성공원)의 동쪽에 위치해 이 지역은 동산으로 불린다. 청라언덕은 3·1만세운동길, 동산의료원 옛 건물, 의료 선교 박물관, 선교사 주택, 동무생각 노래비가 함께 하는데 대구와 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제일교회」를 품고 있다. 코로나19가 일상을 멈추게 하고 신앙의 발걸음마저 멈추게 하지만 청라언덕은 우리에게 등을 내주는 언덕이며, 우리가 비빌 언덕 이다.
동산의료원은 1899년 미국의 의료 선교사가 세웠는데 처음엔 제중원으로 불리었고 대구 경북 지역 최초로 서양식 의술을 펼쳤다. 1980년 지역의 대표적 기독 사학인 계명대학교와 통합하면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라는 뜻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며 담쟁이를 많이 심었는데 담쟁이 넝쿨이 무성해지자 청라언덕으로 불리었다. 청라언덕은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 생각」이란 가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노래비 앞에서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이 곡의 탄생 비화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라언덕 아래 계성학교 재학생 박태준은 등하굣길에 마주친 이웃 신명여학교 학생을 흠모했다. 그후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 중 동료 국어 교사였던 이은상에게 러브스토리를 얘기했는데 이렇게 태어난 노래가 동무생각이다. 이 곡은 동요 풍으로 시작하여 후반부에 8분의 9박자로 변주되어 사랑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킨다.
가곡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이 언덕을 찾고 있다. 추억의 서랍 속에서 첫사랑의 누런 악보를 꺼내면 백합꽃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 가슴에 하얗게 피고 있다. 벤치에 앉아 허한 마음을 달래려 당糖을 충전한다. 시대를 빚고 문화를 굽는다는 「근대골목단팥빵」을 한입 베어 물면 푸른 동산의 역사 향기가 빵만큼 달달하다. 잠시 옛사랑의 추억에 빠져들며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은 청춘으로 돌아간다.
순례의 마음으로 걸었던 골목, 그 끄트머리에 자리한 푸른 담쟁이 언덕을 뒤로 하고 또 한 명의 청춘을 찾아 나선다.
영원한 가객,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 김광석.
그를 대구골목투어 4코스 중 하나인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에서 만난다. 그를 그리고(Draw), 그리워하는(Miss) 길이다. 골목에 들어서면 그를 추억하는 벽화, 동상, 카페, 상점들이 즐비하다. 다섯 살까지 김광석이 살았던 골목의 벽면에 11명의 작가들이 그림과 노래를 채워 넣었다. 기타 하나에 혼을 불어넣듯 쇠락하던 골목도 그로 인해 생명을 얻었다. 그는 떠난 후에 더욱 빛을 발하는 가수다. 수많은 핑크 하트와 꽃, 손 편지와 빨간 우체통이 너무나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가객은 떠났지만 노래는 남아 청춘, 사랑, 인생 이야기가 긴 골목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니.
김광석, 그가 연극 「이등병의 편지」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가 못다한 노래를 연극으로 승화시킨 사람은 연극배우 ‘이재선’. 주말이면 그를 김광석 길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연출, 제작, 출연한 이등병의 편지는 20분 동안 대사 없이 진행되는 1인 신체극 슬랩스틱 코미디다. 또한 주말 공연 300회 이상을 이어가고 있어 김광석 거리의 대표적 문화 콘텐츠로 자리를 잡았다. 이재선 혼자 기획, 연출, 제작, 출연, 조명, 음향, 홍보, 마케팅, 사회, 스태프까지 맡아 일인다역의 진수와 출중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 연극은 베트남 전쟁에서 적의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대원들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이인호’ 소령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고故 이인호 소령은 대구 대륜고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재선 역시 해병 출신인데 스토리 곳곳에 유머와 위트라는 지뢰를 숨겨놓아 수시로 웃음이 빵빵 터진다. 이 연극은 무료다.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버스킹 형태로 돈을 받는다. 이재선 특유의 입담이 웃음을 더하지만 슬며시 군용 밥통(돈통)을 들이미는 능청은 가히 압권이다.
연극이 끝나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가며 관객과 함께 소통하는 시간도 큰 재미다. 그의 진심에 매료된 나는 그와 어깨동무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즉석 단박 브로맨스다. 마지막 순서로 깜짝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맨 앞줄에 앉았던 나는 이등병의 아버지 역 즉흥 연기로 만석 관객 중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상품은 연극 타이틀 이등병의 편지와 콘셉트를 맞춘 편지지 세트. 잊혀 가는 영웅을 재현하고 지역 이야기를 예술을 통해 알리는 일에 큰 박수를 보낸다.
공연 후 길을 나서니 골목은 벌써 어둠이다. 낮에 휑하던 김광석 동상에 다가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의 노래에는 위로가 있다. 20대 이등병의 편지부터 60대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른다. 스스로 갈고 닦은 음악 세계가 둥글다. 법정스님으로부터 ‘원음圓音’이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그의 팬클럽 「둥근 소리」는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여전히 그는 우리들에게 유효하다. 음반, 뮤지컬, 영화와 연극, 추모 콘서트로 늘 우리 곁에 있다. 젊음이 절박한 세상의 현실과 맞서느라 사랑과 낭만을 노래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노래하던 친구다. 그의 콘서트 엔딩 곡 「일어나」를 젊은 청춘들과 외치고 싶다. 상으로 받은 편지지에 그가 불러주는 노랫말을 또박또박 적어나가며 그의 서른 즈음을 위로한다.

2부 사물
나는 꿈에 잠길 때마다 단 몇 분이라도 우리집 개의 뇌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세상의 사물들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것인가!
– 파브르 –
그릇
오랜 세월 함께한 사물들이 있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 인연을 이어가는 사물들. 옷, 신발, 시계, 안경, 필기구, 스마트폰, 노트북, TV, 자동차, 주택 등 수많은 만남 속에서 분실, 매매, 수명, 유통 기한, 내구 연수, 생애 주기 등의 이유로 떠나보내고 같은 이름과 다른 존재로 새로이 만난다.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별 없이 지내온 것이 있다. ‘구절초’라고 이름 지은 녹갈색 찻그릇이다. 시인이자 도예가인 달묵 박영현 선생 작품을 지금껏 곁에 두고 있다.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못생긴 사발인데 거칠고 투박한 데가 있어 막사발이라고 쉬이 부른다.
이 그릇에는 달무늬 같은 고동색 반점이 하나 있다. 문양이 없는 둥근 찻그릇은 원래 앞뒤가 없는 법. 하지만 나는 반점이 새겨진 쪽을 늘 앞면으로 친다. 검붉은 빛을 띤 얼룩점은 질감이 까끌까끌한데 이 부분은 유약이 덜 발렸다. 유약이 흘러내리다가 중도에서 멈춰선 듯한데 이는 실수가 아니라 도예가의 의도임에 틀림없다. 밋밋한 그릇 표면에 발색을 두드러지게 하는 악센트 하나가 이 그릇의 운명을 못난이에서 이쁜이로 바꾼 듯하다. 작은 그릇이 연출해 내는 조화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릇은 지구를 횡으로 이등분한 모습이다. 반으로 쪼개진 적도 밑 남반구를 눈으로 항해하다가 호주쯤 되는 곳인 얼룩 반점에 기항했다.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빠져나와 그릇을 엎으면 돔Dome 구장 한 개가 들어선다. 반구형으로 된 지붕 안에 프로야구 관중들이 꽉 들어차 있다. 나는 작은 그릇이 봉분처럼 솟은 마운드에 올라 청춘 때부터 꿈꾸던 힘찬 시구를 한다.
다시 그릇을 바로 세워놓고 찬찬히 눈길을 모은다. 그릇 바깥면에 일곱 개의 줄무늬가 가로로 길게 패여 있다. 패인 홈이 파도 모양으로 굴곡을 이룬다. 그릇의 밑동을 잡고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면 밑은 둔탁하고 위는 낭랑하다.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도레미파솔라시 칠음계 소리를 내며 그릇은 이내 악기가 된다. 그릇을 귀에 갖다 댄다. 소라 껍질 대듯 귀를 감싸 바짝 붙인다.
아, 이럴 수가! 내 무딘 청각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심해의 소리를 듣는다. 처음엔 먹먹했지만 귀에서 조금씩 뗐다 붙였다 할 때마다 색색의 소리들은 신묘한 조화를 부린다. 나는 심해 물고기가 되어 귀를 열고 마리아나 해구를 유영한다. 햇빛이 들지 않아 깜깜한 암연을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전라남도 신안군 해저 유물 보물선에 닿아 천년 잠을 잔다. 함께 깊은 잠에 빠진 후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그릇은 멀고도 오래된 바다 소리를 낸다. 작은 그릇에 오묘한 소리들이 산다. 그 속에 태평양 큰 바다가 들어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릇을 보며 그림 한 점 그린다. 정물화다. 정물화靜物畵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를 그린 그림인데 왜 멈출 ‘停’을 쓰지 않고 고요할 ‘靜’을 쓰는지 알겠다. 요란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붓을 잡으면 그릇은 바람 한점 없는 고요한 빈집이 된다. 아귀가 안 맞아 덜컹거리는 창틀과 삐걱거리는 의자도 숨을 죽이고 있다. 그릇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려보지만 그릇도 나도 비어 있을 때가 좋다. 비어 있는 충만과 고요한 울림에 전율할 때가 있다. 침묵하는 그릇의 심중을 헤아리다 보면 미세한 소리 하나에도 움찔한다.
어릴 적 달그락 소리가 그릇에서 새어나온다. 식솔 여럿이 달라붙어 밥솥을 달그락 긁는다. 아버지 가슴팍이다. 턱없이 모자라는 밥을 금세 비운 허기는 빈 밥그릇 속에서 달그락거린다. 달그락달그락 어머니 설거지 소리는 늦은 밤 일 마치고 우물 앞에서 하루의 고단을 씻어 내리는 아버지 물바가지 소리에 가닿는다. 바닥을 달달 긁어 가장으로서 감춘 눈물 한 방울까지 잠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뿌려주는 것이다.
그릇의 심연과 두레박줄을 생각한다. 두레박줄은 짧은데 우물은 깊다. 내 얕은 정신으로 깊은 물을 길어 올릴 수가 없다. 실제 한 뼘 깊이도 되지 않는 그릇이 심오하다.
그릇이 크다, 작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능력이나 도량을 이르는 말이다. 종지, 종발, 중발, 대접, 대야를 머릿속에 죽 일렬로 세우며 내 그릇의 크기를 가늠한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부산 놈이 간이 작다, 통이 작다는 소리를 이따금 들어 왔다. 속이 좁고 배포가 작다,라는 사나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얘길 듣고 나면 여간 비위가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심함을 세심함으로 합리화하고 디테일의 힘으로 포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잘다를 야물다로, 우유부단을 신중함으로 돌려 해석하며 나름의 그릇론論으로 스스로 위안 삼았다. 설령 그릇이 작기로서니 잔멸치 한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고래까지 리드하지 않는가. 작은 물방울이 큰 물방울을 끌어당겨 삼키고 작은 도끼가 큰 나무를 마침내 눕힐 것이다,라고 되뇌며 항변했다. 나를 품기에는 오히려 그들의 그릇이 작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찻그릇을 보며 내 그릇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나의 항변과 믿음이 독기였고 치기였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그릇은 내 깜냥을 스스로 살피게 하여 균형을 잡아 주었고,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넣을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많은 것들을 품고 담아내는 그릇은 너그럽게 감싸고 보듬는 포용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릇은 외로움을 나누는 친구다. 단아한 풍모는 어릴 적 좋아하던 소녀 같아 와락 끌어안기도 하고, 세상이 나를 무심히 대할 때면 그릇이 살며시 다가와 안기기도 한다. 스스로 그릇 안으로 들어가 소리쳐 본다. 소리의 진폭이 커져 다리 밑이나 동굴 속처럼 메아리친다. 울림이 크다. 공명이다.
그릇 속에 무엇을 담아 본다. 오랫동안 함께한 사물들을 담고, 갖가지 생각들도 차곡차곡 담는다. 하나씩 채우다가 반대로 하나씩 비워 낸다. 그릇을 통해 비우는 연습도 한다.
오랜 지기인 그릇에 담기고 비워 낸 시간들을 생각한다. 그릇과 함께한 18년의 세월 동안 나는 어느새 40대 후반에서 6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 사이 그릇 또한 빈티지, 엔틱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월의 더께가 두터이 쌓였다.
가을 나이가 되고 보니 한낮의 반짝임보다 저물녘 일몰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무성한 여름보다 가을의 낙엽이 좋다. 작고 하찮은 것, 절망의 바닥에 엎드린 것에 눈길이 간다. 평범한 사물인 그릇 하나가 급기야 내 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오래 연을 쌓은 익숙한 물건에서 내 마음을 훔치는 게 있는가 다시 살핀다.
그릇의 아름다움은 절제다. 화려한 꽃무늬 광택은 없지만 넘치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균형 잡힌 절제미 앞에서 나는 숙연해지고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다. 꾸밈없는 수수한 그릇에 구절초가 핀다. 화장기 없는 가을 여인이다. 구절초 꽃말인 ‘어머니 마음’을 본다.
낡은 구두
「낡은 구두」.
가끔 명화집이나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다. 곳곳을 누비며 발품을 팔아야 하는 날, 일이 힘에 부쳐 스스로 전의를 불태워야 할 때, 게으름이 고개를 쳐들거나 절약과 내핍 생활에 변덕과 심술이 생길 때마다 이 그림을 들춰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
목이 긴 군화를 닮은 낡아빠진 검정색 작업화는 끈을 풀고 고단한 하루를 벗어놓았다. 거칠거칠한 가죽 표면과 앞코에 난 허연 생채기는 진창과 자갈길을 가리지 않았을 터. 검은 구두와 보색을 이루는 노란빛 환한 배경은 해가 저무는 귀갓길의 안식이다.
신발이 예술가의 눈길을 받지 못하던 시절에 고흐가 그린 이 작품은 낡은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있어 왔다. 농촌 아낙네, 도시 노동자, 탄광의 광부, 고흐 자신, 철저히 가난했던 예수님 등으로 낡은 구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경외와 신비감 속에 상상의 나래를 편다.
땀의 결정인 낡은 구두 한 켤레의 값이 고흐의 손을 거치면서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물질 지향적 생각은 이내 나의 낡은 구두로 옮겨간다.
「금강·랜드로바 20% 세일」.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친, 내게 환희와 환호를 끌어낸 현수막 광고다. 세일 기간 4/1~4/7. 나로서는 정말로 기다리던 봄이었다.
구두에 관해서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두서너 켤레를 준비해놓고 계절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돌려가며 신는 것이 아니라 한 켤레를 수명 다할 때까지 신고난 후 새 구두로 바꾼다. 또 특정 제품만 고집해 왔다. 30년 가까이 금강제화의 「리갈」이라는 브랜드만 고집스레 신었다. 금강제화의 세일 기간은 1년에 두 차례다. 4월 초와 12월 초. 세일 기간을 서너 번 깜빡하고 놓치는 바람에 할인 구입을 포기하고 새 구두를 바로 장만할까 하는 갈등도 있었지만, 6만 원에 달하는 할인 금액을 놓칠 수 없었다.
나이 들면서 지갑이 얇아질수록 구두를 구매하는 텀이 차츰 길어졌다. 봄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구두는 너무 닳고 너절한 모습이다. 최근 들어 더 무겁고 고단해진 몸을 실어나르느라, 게다가 승용차 없는 뚜벅이 신세가 된 후로 뒤축은 부쩍 많이 닳아 있었다. 경사진 내 삶의 모습 같은 해진 뒤축과 너덜너덜 허옇게 보풀이 일어난 뒤꿈치 패드를 행여 누구라도 볼까 신경이 곤두섰다. 즉시 새 구두로 갈아탔다. 6만원의 봄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
「금강제화 리갈 광폭 옥스포드」.
오랜 세월 나와 함께한, 단종 안된 스테디셀러다. 리갈Regal은 로얄Royal과 이음동의異音同意. 제왕에게 걸맞는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구두다. 광폭 행보에 맞게끔 볼이 넓어 쪼이지 않고 착화감이 좋다. 구두 자체는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하고 무겁지만 신을수록 다리의 근력을 키우는 각반 역할을 하며 내 일생을 끌고 다닌다. 구두끈을 단단히 죄어 맨다. 새 구두는 지금까지 내 수고에 대한 위로이며,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이다.
헌 구두를 신발장에 넣어 둔다. 살아온 길을 구두가 기억하고 있기에 내 삶의 족적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구두끈을 혼자서 맬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몇 켤레의 낡은 구두를 신발장에 모셔놓을지.

애인
나이 들면서 시간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남자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별장과 애인이다. 하지만 돈 있고, 시간 있는 남자들이 별장과 애인을 두는데 주저하는 이유는 그것을 가지게 되면 ‘관리’ 문제로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애인에게 별장을 선물 받은 여자를 상상해본다. 돈도, 시간도 별로 없는 나에게 늘그막에 애인이 생겼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우울을 느낄 무렵인 오춘기에 다가온 그녀는 각별했다. ‘Fall in love’라는 영어 숙어를 수십 년 만에 되뇌게 했으며 케미Chemistry라는 단어의 뜻을 알려주었다. 비밀스러워야 한다는 사랑의 기본 원칙마저 무시한 채 우리는 대놓고 보란 듯 거리낌없이 붙어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부르면 바로 달려갔고 둘의 스킨십은 편의점 영업처럼 24시간을 거의 함께 했다.
특히 그녀와의 키스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다.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솔제니친은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감옥에서는 한 조각의 빵을 먹더라도 진미를 알 수 있도록 조금씩 입안에 넣고 혀끝으로 굴리고 침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하며, 빵에 묻은 설탕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걸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 조각의 빵도 그럴진대 더욱이 키스를,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그녀와의 키스를 사탕 빨 듯 할 수는 없었다. 단물 급히 들이키듯, 입안에 천둥이나 번개 치듯 시작해서 구석구석 동굴 탐험하듯, 목구멍 밑바닥까지 닿을 듯 깊고 진하게 마무리했다. 진지함을 넘어 마치 성스러운 의식 같이 행해진 그녀와의 키스는 일종의 행위 예술이라고나 할까. 황금빛 옷과 장식에 둘러싸인 채 입맞추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의 몽환적인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며 사랑의 순간을 최절정까지 끌어올리려 어떠한 포즈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임을 증명하려 했다. 지금껏 구석에 내버려두었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한껏 만끽했다.
그럼에도 불같은 사랑의 후폭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앙과 양심의 갈등도 없었다. 둘은 온몸으로 서로를 탐닉했다. 그 황홀경이 여태껏 쌓아올린 인생을 단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애정 표현을 쉴 수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늦바람을 걱정하는 주위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리아와 같은 존재였으며 구원의 여인이었다.
하씨 성을 가진 그녀의 이름은 모니카. 카톨릭 성녀 모니카를 연상시키는 성스러운 이름이다.
나의 애인 하모니카 사랑을 설명하는 단어는 ‘몰입’이다. 몰입은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는 편안한 명상 같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하며 사람은 몰입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깨우고 숨은 능력까지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나는 하모니카에 깊이 빠져들었다. 직장생활의 성공은 입사 후 3개월이 결정적인 것처럼 취미생활의 성공도 입문 후 3개월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하모니카에 쏟아 부었고 남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미친 듯이 몰두했다. 21개 비밀의 구멍마다 입맞추며 설레는 숨결을 마음껏 불어넣었고 목구멍 깊숙이 세상을 빨아들였다.
하모니카를 배우는 초보자들은 대개 C키(다장조) 트레몰로 하모니카로 시작한다. 지역 대학의 평생교육원 하모니카반에 등록한 나는 일단 똑같은 C키 하모니카를 7개나 동시에 구입했다. 내 몸 가까이 어느 곳이든 주요 동선 따라 곳곳에 하모니카를 두었다. 집, 원룸, 사무실, 차, 화장실, 침대, 가방, 포켓 등 도처에 하모니카를 두고 언제 어디서든 불어 제꼈다. 하모니카와의 뜨거운 사랑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한밤에는 작은 소리라도 행여 이웃에 새 나갈까 싶어 이불을 덮어쓰고 불기도 했다. 꿈결에도 입술 포개기를 간절히 바라며 잠잘 때도 하모니카를 손에 꼭 쥐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배우는 하모니카 수업이 양에 차지 않아 과외를 받기로 했다. 단 한 시간의 특별 레슨을 위해 학원이 소재한 대구까지 왕복 다섯 시간을 투자하는 열정에 스스로 감탄했다. 지하철 경북대병원역에 내려 학원까지 10분 남짓 걸어가는 동안에도 하모니카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행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을 불면서 8차선 대로변을 활보했다.
그해 겨울, 입문한 지 3개월이 지날 무렵 대구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고교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 후 술김에 즉석 거리 공연 소위 버스킹을 감행했다. 장소는 대구의 중심 반월당역 뒷골목. 그곳은 연말이라 사람들이 제법 흥청거렸는데 초짜 연주의 부끄럼도 잊고 18번 「나그네 설움」을 필두로 「울고 넘는 박달재」, 「찔레꽃」등 트로트를 연이어 불러댔다.
일행 중 한 명은 겨울 털모자를 길바닥에 펼치고 또 한 친구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니 제법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어설픈 거리 악사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친구들이 부르는 옛 가요가 길가는 사람들의 종종걸음을 붙들어 매었다. 취객이 놓고 간 천 원짜리 지폐 서너 장과 동전 몇 푼이 전부였지만 털모자 안은 겨울밤 찬 공기를 감싸는 호기로 가득했다. 인근 대폿집에서 한 잔 더 걸친 후 일행들과 함께 자리를 봉산문화회관 앞으로 옮겨 밤늦도록 2차 공연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입문 3개월 차 걸음마 수준의 실력으로 겨울 송년 및 신년 모임에 30회 출격이 라는 기염을 토했다. 모임이 있는 곳이면 청하고 부름을 떠나 닥치는 대로 달려갔으니 정말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일이다. ‘연주는 이론이 아니라 기능’임을 굳게 믿고 실전을 연습처럼, 연습을 실전처럼 행하며 무대 울렁증을 극복했다. 그때 아슬아슬하고, 철없고, 겁없는 연주를 인내하며 귀기울여주신 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하모니카는 주목받지 못한 마이너 악기다. 흔히 말하는 비주류다. 오케스트라에서는 당당히 뽐을 낼 수가 없다.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볼륨과 소리가 약하다는 이유로 외면 받아왔다.
그러나 세상에는 큰 나무도 있지만 작은 풀도 있는 법. 더불어 사는 곳에서는 크고 작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 더욱 좋은 소리가 난다. 하모니카는 세상의 작고, 낮고, 여리고, 눈물겨운 것들을 나직한 소리로 부른다. 추억의 서랍 속에 오래 두었던 조그만 한 뼘 악기가 이 시대의 아픈 청춘들과 바깥으로 내몰리는 중장년층, 차별 받는 소수자, 비정규직, 사회적 약자들을 어둠 속에서 무대 한가운데로 불러낸다.
참 좋은 악기 하모니카가 고맙다. 악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연주자를 최고로 만들기에 오늘도 나의 평생 애인과 입을 맞춘다. 연주곡은 「뻐꾹 왈츠」. 아름다운 선율 따라 손안의 새, 숲속의 새뿐만 아니라 산 너머 새들까지 춤추며 내 주위에 날아든다.
물국수
장날 거창시장에 갑니다. 시장이란 말 참 정겹지요.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정을 주고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할머니, 어머니, 동네아주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고 헤어진 친구들의 목소리도 담겨 있습니다.
장에 간다는 말 참 설렙니다. 마주치는 얼굴들이 모두 어머니 품 같습니다. 어릴 적 익숙해진 냄새와 사람들을 기억하며 걸음은 소풍 가듯 시장으로 향합니다. 십 년 전, 시장 앞을 흐르는 강의 징검다리를 건너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제 고향에 돌아와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 장에 갑니다. 강물 흐르는 소리 들립니다. 월천에서 흘러내린 맑은 달강수의 노랫소리가 시장 안까지 울려 퍼집니다.
나의 허기는 묵집 골목을 돌아 돼지국밥, 순대, 족발집을 지나 국숫집에 닿았습니다. 할매분식 주인 오봉순 여사가 물국수 한 그릇 내놓습니다. 사발 가득 하얀 면 위로 색색의 고명이 소복이 곱게 얹어졌습니다. 잘 데친 초록 부추, 노란 단무지채, 빨간 신김치, 황갈색 깨소금, 잘게 부순 검은 김에다가 황백의 계란지단까지 오색찬란한 한 송이 꽃입니다. 국수와 마주보는 내 얼굴도 꽃 피듯 환해졌습니다.
국물부터 먼저 후루룩 마십니다. 국수 맛은 그냥 나는 게 아니지요. 제맛을 내려면 국물 하나에도 손이 많이 갑니다. 우리 음식에서 육수로는 멸치 다시물을 제일로 치지요. 멸치 내장을 함께 우려내면 쓴맛과 비린내가 강해져 일일이 머리를 떼 내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발라내는 수고가 따릅니다. 그러면 훨씬 담백하고 깔끔하고 깊은 육수 맛이 우러납니다. 손맛 이전에 재료를 다듬는 손길과 다시물을 우려내는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국물에서 바다 내음이 납니다. 멸치가 뛰놀던 바다를 떠올리면 작은 사발 안에서 남해 바다가 출렁입니다. 산간 내륙 여기까지 파도 소리 들립니다. 국물을 좀 더 달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멸치 곰국입니다. 어릴 적 어머님이 말아주던 바로 그 맛이지요. 정성으로 푹 고아낸 진한 곰국 같아서 한 대접 쭈욱 들이키니 후줄근한 몸이 금세 팔팔 살아납니다.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올렸습니다. 한 점 오물오물 삼키기가 무섭게 어머니 손맛 같은 환희가 입속 가득합니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 번집니다. 탱글탱글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퍼지거나 불어 터지지도 않은 면발이 혀에 살살 감깁니다.
나이 들면 칼날 무디어지듯 입맛도 중심을 잡는가봅니다. 젊을 땐 된밥을 좋아했지만 세월 흐를수록 진밥이 나은 듯하고, 국수도 꼬들꼬들한 면보다 적당히 익혀진 것이 입에 맞습니다. 중용의 맛이라 할까요?
그러나 입에 착 감기는 듯한 국수 자체의 맛은 면의 재료나 굵기보다 국수 삶을 때의 비법에 좌우됩니다. 솥에서 면이 최고도로 끓을 때 찬물을 한 바가지 붓습니다. 더 쫄깃쫄깃한 면발을 위해서지요. 펄펄 끓는 물속에서 국수 가닥들이 화려하고 현란한 군무를 펼칩니다. 마치 회오리 모양의 리본처럼, 관절 꺾어 힘차게 뻗어나는 스카이댄스 인형처럼, 빙글빙글 휘돌아 감겼다 풀리는 열두 발 상모처럼 춤을 춥니다.
찬물에 벼락 맞듯 놀란 가닥들이 잠시 흥분을 멈추고 긴장합니다. 최고조로 격해진 감정이 누그러지며 한순간 차렷 자세로 찬비 맞은 수숫대처럼 매끈하고 가지런히 정열합니다. 냉온을 오가며 퍼지지 않기 위한 각성과 긴장의 순간들이 수 차례 반복되면 보다 찰지고 쫄깃한 면발로 완성되지요.
여주인장의 큰 솥에 국수 삶는 과정을 떠올리며 인생을 들여다봅니다. 뜨겁게 펄펄 끓던 나의 젊은 날과 인생의 찬물을 만나 세상의 차가움 앞에 꼼짝없이 서 있던 시절들을 기억해 봅니다.
다시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올립니다. 2500원짜리 국수 한 그릇 안에는 펄펄 끓던 사랑과 고향으로 되돌아온 사내의 눈물도 있습니다. 후루룩 소리도 죽여 가며 혼자 국수를 먹다가 고개를 드니 벽 한편에 묵은 시화 한 점 눈에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물국수」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시를 읽어 내려가던 눈길이 마지막 연에서 멈추었습니다.
오랜만에 아내와 겸상을 한다
젓가락 부딪히던 옛사랑 건져 올리면
국수 사발에 물꽃이 핀다
물기 마른 팍팍한 삶이 물컹, 하며
응어리도 강물처럼 풀린다
물국수 비우며
팍팍한 삶에 물이라는 화두 던지고
낮은 물길 찾아 나선다
고향 장날 국숫집에 홀로 앉은 중년 사내의 모습과 어울리는 시입니다. 국수가 갑자기 짜졌습니다. 사랑이 금방이라도 기적처럼 우러날까 젓가락으로 휘휘 두어 번 저어봅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핸드폰부터 찾았습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아내에게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전화 한 통 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여느 국수와 달리 배가 쉽게 꺼지지 않을 것 같네요. 낯선 귀향을 위해 봉순 여사께서 사랑이란 재료를 듬뿍 넣었기 때문이죠.
어머니의 신발
친구가 시집을 보내왔다. 동봉한 편지에는
너의 시집을 받고 내 시집도 한 권 보낸다.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지만 바로 곁에서 말하는 듯한 호흡을 느낀다. 나도 그간 2권의 시집을 냈는데 마냥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들여다보는 일상의 기록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낸다. 이렇게 시로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고 기쁘다.
서로 한 권씩 주고받은 시집은 긴 공백의 둘 사이를 가깝게 이어 주었다. 시집 서문에서 그는 시의 힘은 미약할 뿐 당장 빵이 되어 배고픈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손수 지은 따신 밥 같은 그의 시 한 편과 겸상하듯 마주앉았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집에서 십 리 정도 되는 산아래에 논 농사를 지었습니다. 큰물이 지고 난 다음 날 논을 살피기 위해 어머니와 길을 나섰습니다. 아직 물이 불어 있던 도랑을 건너다가 그만 어머니 고무신이 벗겨져 물에 떠내려갔습니다. 우리는 마치 가재 잡듯 큰 돌도 뒤집어 보며 애썼지만 결국 못 찾고 말았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맨발로 십 리나 되는 시골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흘렀어도 그날 생각을 하면 발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들고 발바닥이 따끔따끔 저려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아무리 거센 물길도 헤쳐 나갈 자신이 생깁니다. 그날 어머니처럼 묵묵히 걸어갈 힘이 생깁니다.
– 김정열 「어머니의 신발」 전문
개울물에 시선이 제법 오래 잠긴다. 험한 자갈길을 이겨낸 맨발의 고독과 초연超然을 공감했다. 어머니의 몸빼 자락에 묻어온 풀내와 흙내가 스며든다. 논밭일로 이마에 동여맨 수건의 땀 냄새는 어머니 가슴에서 나는 달달한 젖내다. 어머니의 고무신은 늘 젖어 있었다. 아들과 동행한 아침 숲길을 어머니가 앞장선다. 아들을 위해 수풀의 이슬을 털어내는 긴 작대기는 훗날 인생의 회초리다. 어머니의 고무신과 맨발은 길이 곧 인생임을 가르친다. 앞만 보며 살아온 인생길에서 어머니는 어찌 신발만 잃어버렸겠는가. 크고 작은 수많은 이별과 맞닥뜨리면서도 잃지 않는 어머니의 의연함 앞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김주영의 신작 단편 소설 「아무도 모르는 기적」을 읽으며 사모思母의 정이 어린 아이의 효심보다 못함을 자책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덟 살 난 순진무구한 소년 준호. 산골 마을에 사는 준호는 아버지를 따라 난생처음 장에 간다. 아버지는 준호에게 하얀 고무신을 사 주었지만 준호는 어머니의 닳고 해진 고무신이 자꾸 생각나 어머니에게 드릴 새 고무신을 몰래 감춘다. 제 고무신과 바꿀 작정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도둑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소설은 탁월한 이야기꾼인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빠르고 힘있게 전개된다. 비정한 어른들에 의해 위기에 내몰린 소년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잃어버린 새 고무신 두 켤레가 준호네 집 마당에 나란히 놓인다. 이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며 우화 소설이다. 순박한 소년을 통해 우리 어른들의 삶을 되짚고 들여다보게 만든다.
여덟 살 어린 아이 눈에 밟힌 닳고 해진 고무신,
새벽 밭에 일 나가 이슬 털고 오는 젖은 고무신,
징검다리 건너다 물살에 떠내려간 고무신,
장판 조각 오려 덧댄 밑창에 구멍 뚫린 고무신
어머니의 고무신이 생각나면 얼른 내 발을 감춘다. 다가오는 어버이날에는 하얀 고무신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어머니에게 예쁜 신발 한 켤레 사 드릴 것이다.
뭉쳐진 시간들을 문지르면
「거창국제학교」.
거창군 가조면 소재 헝가리 국립 데브레첸의과대학 한국 캠퍼스다. 올해 한국 의사고시에 ‘8명 응시, 전원 합격’이란 괄목의 성적을 내었고 거창국제학교 수석을 거쳐 헝가리 의대를 수석 졸업한 조신영 학생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련의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한국, 유럽, 미국 의사 자격을 취득한 이른바 글로벌 닥터다. 의학 교육의 세계화 추세에 따라 헝가리로 눈을 돌려보자.
‘제멜바이스’. 헝가리의 의사 이름이다. 19세기 중엽, 그가 일하던 종합병원 산부인과에는 산모가 세균에 감염되어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는 사고가 흔했다. 산모와 태아의 사망률이 심지어 길거리 출산보다 높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가 원인을 곰곰이 분석하던 중에 의사들이 수술이나 시체 해부 후 손을 씻지 않고 분만실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손씻기를 제대로 시행한 결과 사망률은 몇 달 만에 18%에서 1%로 뚝 떨어졌다. 의사들의 행태는 명백한 의료 사고이자 살인인데 의료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역린을 건드린 꼴이 되어 심한 왕따 후 병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47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손씻기는 수많은 환자의 목숨을 건졌지만 그는 의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파스퇴르 등장 이후 그의 공적은 주목받게 되고 부다페스트국립의대는 1969년 개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이름을 딴 「제멜바이스의과대학」으로 개명하게 된다.
코로나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손씻기의 선구자 제멜바이스를 소환하고 손씻기를 떠올린다. 마스크와 더불어 손씻기는 코로나 예방의 일등공신이다. 마스크를 쓰면 입과 코를 가려 바이러스가 차단된다고 여기지만 그보다 직접적인 감염 경로는 손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감염자가 코나 입을 만진 손으로 문고리나 화장실을 사용하면 거기를 사용한 사람들 손에 바이러스가 묻게 되고, 그 손으로 음식을 먹고 눈을 비비고 코를 만지다가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손씻기는 감염병 예방을 위한 첫 번째 수칙이며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손씻기만 잘해도 감염병의 70%가 예방된다고 알려져 있다. 질병관리 본부는 ‘흐르는 물에, 비누로, 손가락 사이, 손톱 밑까지, 하루에 8번, 30초 이상’ 씻을 것을 권고한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리는 마스크와 비누 한 장은 정치인의 백 마디 말보다 소중하며, 정부가 재난 지원 명목으로 살포하는 헬리콥터머니보다 값지다.
한동안 멀어졌지만 이제 각광받는 작고 보잘것없는 비누를 쓱쓱 문질러본다.
탐욕의 질주가 멈춘 욕실 구석에
오래된 침묵 하나
단단하게 뭉쳐진 시간들을 문지르면
잊혀진 아이보리 향 거품이 말문을 연다
이제는 영웅
바이러스 천적으로 부름받고 쓰임받아
닳고 녹고 야위어 제 살 없어질 때까지
눈물로 씻고 또 씻어 세상을 빛나게 하는
무참한 봄 지나면
둥근 세수와 각진 빨래가
으레
꽉 쥔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갈 것임을
– 졸시 「비누」 전문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의사들은 왜 손씻기를 하지 않았을까? 바로 ‘습관’이다. 시체 해부 후 피를 묻힌 채 분만실로 가서 손을 씻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 반복되고 습관화된 것이다. 습관은 처음엔 거미줄 같다가 점점 단단한 쇠사슬이 된다.
나의 습관에 대해 체크해 본다. 나쁜 건강 습관이 셀 수도 없다. 늦게나마 올바른 손씻기 습관을 들여 감기와 멀어진 것이 다행이다. 우리 인체 중에 손이 제일 바쁘고 더럽다.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들이 묻어 있다. “물만 보면 씻어라.”는 말이 와닿는다.
성경에도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보고 책망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 유출병 있는 자가 씻지 않은 손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옷을 빨고 목욕할 것을 규율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에 대해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은 같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멈춰 섰다. 멈출 줄 모르는 과욕이 불러온 비극이다. ‘씻은듯’이라는 단어가 있다. ‘조금도 남김없이 깨끗하게’라는 뜻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씻은듯 없어지기를 소망한다. 코로나로 시험에 든 인간의 죄과마저.
거룩한 면麵
삶은 그저 밥 한끼 먹는 일.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고단을 내려놓는 시간이면 비싸고 화려한 만찬보다 소박한 짜장면 한 그릇이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공과 수고가 깃든 음식의 거룩함을 생각해 본다.
일광역을 출발한 동해선이 종착역인 부전역에 다다르니 기차도 배가 고프다. 나의 허기는 역사를 빠져나와 부산지하철 부전역 1번 출구 바로 앞 「영자면옥」으로 향한다. 이 가게의 메뉴는 2500원짜리 칼국수와 짜장면. 둘 중 하나의 선택을 두고 잠시 고뇌하는 햄릿이 된다. 으레 특유의 결정 장애가 발동하여 내 마음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종잡을 수 없다. 평소엔 물냉면이냐 비빔냉면이냐를 놓고 망설였는데, 오늘은 칼국수와 짜장면의 선택을 두고 나의 결단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국물이 땡겼다. 입에서 ‘칼’자가 나오다 말고 주문은 짜장면. 난 늘 이런 식이다.
이곳은 나 같은 혼밥러의 성지. 혼밥 아니 혼면이 전혀 깔끄럽지 않는 곳이다. 딱 2가지 메뉴에 가격은 똑같이 2500원. 현금, 선불이다. 바쁜 시대에 심플하고 임팩트 있는 구성과 가격이다. 오늘 공친 나의 일을 셈해 보면 밥값도 못한 내겐 이마저도 과하다.
누구는 인생 최고의 기다림을 짜장면 주문 후 나올 때까지의 시간이라 했는데, 이 가게는 주문과 동시에 단출한 상이 금세 차려진다. 쓰윽쓰윽 쇠젓가락으로 두어 번만 저어도 새까만 짜장이 면발에 바로 스며들며 흑백의 오묘한 케미가 완성된다.
첫입은 젓가락 비집을 틈도 없는 찰진 사랑을 훑어 삼킨다. 반짝거리는 짜장의 감칠맛, 거친 듯 부드럽고 끊길 듯 잇닿은 면발,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후루룩 면치는 소리, 흑백이 뒤엉켜 끈적거리고 찰박거리는 관능의 맛까지 단 한 번의 흡입만으로도 충분하다.
두 번째 젓가락질 전, 소박한 음식에 깃든 은혜에 두 손 모아 감사하며 잠깐 눈을 감는다. 최근 나의 작은 소출과 부족한 덕행에 비하면 짜장면 한 그릇도 입에 올리기가 송구하다. 배불리기에만 기를 쓰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벼워진 주머니로 부쩍 마음이 허허한 요즘 밀 한 톨에 깃든 수많은 수고의 손길을 생각하면 짜장면 한 그릇은 참으로 넉넉하다. 욕심의 그릇이 작아질수록 누리는 것은 커지는 법이다.
윤기 머금은 짜장면이 반쯤 남았을 때 불황에는 매운 맛이라는 속설에 맞춰 고춧가루를 조금 털어 넣는다. 이에 바로 붉은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느끼한 맛을 잡아주고 칼칼한 맛을 낸다. 짜장면은 그 시작이 중국이지만 우리 입맛에 맞게 개발된 뛰어난 한국 음식이다. 우리 정서와 혼을 닮은 맵고 화끈한 고춧가루 반 스푼으로 느글느글한 중국 대륙을 잠재운다. 나의 밋밋한 삶에도 콕 쏘는 자극을 뿌려본다.
젓가락질 네댓 번이면 짜장면 한 그릇을 싹 비워낸다. 면발의 목넘김이 아주 좋다. 맛을 목구멍으로 느낄 정도다. 하지만 한동안 짜장면이 부드럽게 잘 넘어가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자장면과 짜장면의 표준어 논란 때문이다. 맞춤법상 자장면만 인정되는 시절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고 하며 짜장면에 힘을 실었다. 또 ‘자장면은 아이 재울 때 먹는 것’, ‘우리가 원하는 건 짜장면’, ‘이제는 짜장면을 먹게 해 주십시오.’라는 슬로건으로 짜장면 표기의 정당성을 많은 분들이 청원했다. 그 결과 2011년 국립국어원은 실제로 짜장면이 많이 쓰이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 두 단어 모두 표준어로 인정했다. 지금도 ‘짜’라는 된소리가 우리 기억 속의 짜장 냄새를 더욱 자극하고 군침을 돌게 만든다.
짜장면은 국민 음식이다. 외식 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철가방에 담긴 짜장면은 배달의 기수와 배달의 민족 원조격이다. 짜장면 가격은 국민 경제의 관점에서도 서민 물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 소위 ‘짜장면 지수’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2500원. 20년 전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다. 요즘 시중 짜장면 값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착한 가격으로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데 어찌 흥감하지 않을 수 있나.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이 있듯 주머니 사정을 알아주는 「영자면옥」에게 목숨이라도 바칠 충정으로 한끼 식사에 임한다. 난 이미 이 가게의 충성고객이 된 것이다. 이곳은 주인이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돈을 버는 곳이다. 은혜로운 이 가격을 고수하려면 재료를 덜 쓰거나 양을 줄여야 되는데 여기는 양, 맛, 가격 셋 모두를 잡은 곳이다. 가성비를 넘어 ‘갓성비’란 용어가 딱이다. 가격 대비 훌륭하다,라는 뜻의 신조어 ‘혜자스럽다’를 ‘영자스럽다’로 바꿔야 될 듯.
초저가의 비밀은 박리다매. 그리고 박리다매의 핵심은 스피드다. 스피드에 초점을 맞추려면 메뉴는 단품으로 두 가지 이하, 그리고 공정이 단순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왜 이곳 메뉴가 짜장면과 더불어 서민 외식의 양대 산맥인 짬뽕이 아니고 칼국수인지 수긍이 갈 것이다. 짬뽕은 재료비가 비싸고 작업 단계마다 손이 많이 가서 주방장의 피로도가 높다. 시간이 생명인 점포와 고객 모두에게 착한 가격으로는 쉽지 않은 음식이다.
살다 보면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날이 있다. 이때 앞에 놓인 짜장면 한 그릇은 사람 사는 맛이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생명의 맛이다. 내 영혼을 감싸주는 소울푸드Soul Food다. 혼자서 먹는 짜장면 한 그릇은 칼로리나 돈의 가치를 넘어선다. 한끼 식사라기보다는 위로다. 낮과 밤이 마주앉은 저물녘 성스러운 시간에 먹고 사는 일을 잠시 생각한다. 일용할 양식 앞에서 거룩한 삶을 간구하면 단무지 한 조각에도 미안하다.
짜장면 한 그릇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그릇 다 비우고 가게를 나와 길을 한참 나섰는데도 짜장면이 전해 주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어머니의 휴대폰
삶은 세상과의 관계 맺음이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씁쓸하다.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인연뿐 아니라 사물과 이어지는 연줄도 마찬가지다. 청년 시절, 통장이 바닥날 즈음 매월 부쳐오던 아버지의 원조가 끊겼을 때의 단절감이란. 폭설로 도로가 끊겨 고립된다거나 어떤 연유로 전기나 수도, 전화와 인터넷마저 끊길 때면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단절은 ‘끊다’보다는 어감이 센 ‘끊어버리다’로 귀결된다. 끊어져 자연스레 멀어지는 게 아니라 끊다(Cut)에 더해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Off) 나간다는 느낌까지 가세한다. 마음이 칼로 베는 듯 아프다. 연을 끊게 되면 오래 맺었던 의가 끊기고 정이 죄다 지워지며 따뜻한 마음의 전류나 열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끝장이란 뜻의 종언이라는 무거운 뉘앙스의 단어처럼 마음이 실로 무거워진다. 어머니의 휴대폰을 해지하는 순간이 그랬다.
해지를 위해 고객 센터를 찾았다. 본인의 내방이 필수적이지만 병환 중인 구순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당신의 주민등록증을 지참해 일을 금세 마무리지었다. 휴대폰을 통해 세상과 이어진 끈이 완전히 끊어진 셈이다. 사실은 해지를 좀더 일찍 했어야 했다. 수년 전부터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하고 같은 질문을 자주 하는 등 치매의 초기 증세를 가끔씩 보이면서 어머니의 폰 사용 횟수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루 중 아침, 점심, 저녁과 사계절 중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분간 못하는 적도 종종 있었다. 시간 인지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특히 청력 저하로 인해 어머니의 최애 TV 프로그램인 「가요무대」 시청마저 그만두었는데 이는 폰 사용을 그만둔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반들거리던 까만색 폰이 방구석에 내버려진 채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노환은 그녀의 일상을 옥죄었다. 말이 짧아지고 한두 마디 표현에 그치기 일쑤였다. 급할 때는 마치 수화라도 하듯 표정이나 손짓 몸짓으로 말을 대신했다. 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실내 이동이나 식사, 화장실 사용, 목욕 등이 여의치 않아 가족들의 수발이 필요했다. 그나마 앉거나 누워서도 할 수 있는 것이 휴대폰 작동이었지만 기억력과 청력이 떨어지면서 휴대폰은 소통의 도구에서 장난감이나 노리개로 차츰 바뀌어갔다.
혹시 걸려오는 전화라도 있을까 싶어 늘 충전 상태를 잘 유지했지만 단 한 통의 전화도 오고감이 없이 한 달이 그냥 지나가기도 한다. 노화, 즉 늙어감은 시간만 흐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도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폰 속에 단축 다이얼로 저장된 어머니의 지인들 이름이 하나씩 둘씩 저절로 지워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어머니의 폰을 열어본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크기의 폴더폰. 어머니의 휴대폰이 개통된 2010년은 스마트폰이 우리나라에 막 퍼져 나가던 때였지만 어르신들은 통화 기능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숫자판이 크고 조작이 편리한 저가 효도폰을 마련해드렸다. 그후 우리의 삶과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었다. 손바닥 안의 작은 단말기는 소형 핸드폰에서 대형 스마트폰으로 발전했지만 어머니의 폰은 애초의 폴더폰 그대로다.
새까맣고 조그만 폰에서 왜소하고 쪼그라든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차츰 줄어드는 폰 배터리 잔량 표시처럼 어머니의 기력과 정신은 쇠잔하다. 기계도 움직여야만 살아있는 것이기에 폰 전원이 꺼져 죽어있을 때마다 나는 충전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계속했다.
매달 9900원의 폰 요금이 그냥 빠져나가는데도 진작 해지를 안 한 이유가 있다. 어머니의 건강이 언젠가는 회복되어 폰을 예전처럼 시용할 날이 올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 그리고 그나마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도구가 서류상만이라도 생존의 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폰 속 어머니의 평생 친구들을 한 명씩 하늘로 데려갔다. 최근에는 단축 번호 2번인 당신의 둘째 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한숨짓는다. “나도 빨리 죽어야 할 텐데. 자는 잠에 갔으면…” 한번은 어머니 곁에 나란히 누워 자주 하던 질문을 또 한다. “어머니, 심심하지 않으세요?”라고 여쭈었더니 평소처럼“ 아들이 있는데 뭐가 심심하니.” 대신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그래, 참 심심하다.” 어머니는 병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이젠 휴대폰 대신 무료함과 지루함을 이겨낼 새로운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휴대폰 충전이라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급기야 해지를 하기에 이른다.
시간을 오래 머금은 물건은 아름답다. 생명이 다해 경대 서랍에 고이 간직한 세월의 손때 묻은 휴대폰을 대신해 앞으로 10년을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어머니 머리맡, 휴대폰이 자리하던 곳에 호두알 한 쌍을 올려놓았다.
막 수확한 튼실하고 굵은 호두알을 만지작거린다. 호두알의 주름이 어머니 손의 주름과 어우러진다. 꼬옥 쥐고 있으면 딱딱한 껍질이 피부처럼 느껴지고 체온이 전해진다. 한 손에 잡은 호두알 두 개가 딱딱 달그락달그락 서로 몸을 비비다가 손을 펴니 또르르 구른다. 호두가 내는 소리는 일찍 여윈 남편의 음성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한때의 푸른 열매와 잘 여문 갈빛 추억을 떠올린다. 호두 속 꽉 찬 미로 같은 남편 속을 알 수 없지만 그걸 굳이 깨뜨리지 않고 지금껏 기다린다. 기다림은 단단한 갑옷이 되고 견고한 성이 되어 홀로 된 40여 년 세월을 무던히 견뎌낸다.
호두 한 쌍은 부부가 되었다가, 모녀가 되었다가, 소리를 아는 지음이 되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보배로운 물건이다. 소장 중인 휴대폰이 그랬듯이 앞으로 수많은 시간과 대화가 호두알 속에 담길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나는 이 애틋한 물건을 쉬이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 또한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확인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몽블랑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지났음에도 저멀리 덕유산은 하얀 눈을 이고 있다. 겨울의 침묵을 보자기에 싼 듯 설산은 ‘숭엄’이라는 단어를 품는다. 높고 고매하여 가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이 있다. 산은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위안을 준다. 지친 영혼에 순백의 위로를 더하는 흰 눈까지 산머리에 얹었으니 마음은 이른 봄에도 설산을 오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첫 문장이 시작되는 소설 「설국雪國」의 정경을 그려 본다. 설산이 주는 설렘은 덕유에서 설국의 배경인 니가타현 유자와를 거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알프스 영봉들을 지나 몽블랑에 가닿았다. 어느새 나는 하얀 눈이 주는 매력에 푹푹 빠지고 있었다.
몽블랑Mont Blanc. 누구나 한번은 가고픈, 물론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려져 있는 곳이다. 내가 ‘흰 산’이란 뜻의 몽블랑의 눈 속으로 더욱 깊이 빠지게 된 연유는 유럽 최고봉으로 4,810미터의 높이가 주는 독보적 가치와 그것에 맞서는 절대 고독이나 수천 년을 얼어붙은 하얀 침묵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청년의 혜안에서 비롯된다.
프랑스의 어느 청년이 일망무제의 하얀 설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면 어린이, 노약자, 장애인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한 일대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고 제안하여 1955년에 케이블카가 놓여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 청년의 안목에 힘입어 해발 3,842미터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까지 쉽게 올라가 알프스의 경이를 굽어볼 수 있다.
명산은 명품을 낳는다. 몽블랑산山은 「몽블랑」이라는 독일의 명품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특유의 로고 「화이트 스타White Star」로 인해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에서 최고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만년필 뚜껑 끝에 새겨진 육각형의 흰색 별은 눈 덮인 몽블랑 정상을 형상화했다. 요술이나 마법을 부리는 듯한 심벌마크에서 신비스러운 힘이 나오기를 믿으며 사람들은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기록한다. 글을 써 내려갈 때 너무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종이에 살짝 긁히는 듯 사각거리는 펜의 감촉에 매료된다. 어떤 이는 ‘사각사각’ 리에 흥분되어 만년필을 잡는다고 했다. 사각사각, 이 단어는 원래 눈이 내리거나 눈을 밟을 때 나는 소리임을 감안하면 조어가 참으로 절묘하다.
만년설과 만년필, 이 두 단어 또한 기막힌 조합이다. 녹지 않고 계속 쌓여 있는 만년설처럼 몽블랑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다. 펜촉마다 ‘4810’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알프스 최고 높이에 걸맞는 장인 정신이 배어 있다. 이는 단지 필기구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자루 한 자루마다 작품이고 명품이며 성공한 사람의 상징임을 각인시킨다.
명품은 서민들의 로망이다. 당신의 역사와 오랜 세월 함께한 물건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명품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했고, 그것이 내겐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버킷리스트에 올린 지 20년이 지나도록 몽블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몽블랑 만년필이라도 하나 가진다면 명품을 소유했다는 심리적 위안 이외에 캡의 하얀 별 문양을 보면서 눈 덮인 몽블랑 정상에 등극한 듯, 스스로 눈사람이라도 된 듯 우쭐할 것이다.
평소 명품에 개의치 않던 나도 실은 명품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하얀 육각별 한 개가 구슬처럼 오롯이 박힌 검정색 몽블랑 지갑이다. 선배 한 분이 선물한 지갑을 십 수 년째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지갑 속에는 그해 새로 발행된 빳빳한 황금빛 5만원 신권 2장과 함께 손글씨 메모가 담겨 있었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평상시 극도로 말을 아낀 채 조언조차 잘 하지 않고 도움만 주던 고마운 선배였다. 그 선배는 하늘이 사람들에게 두 개의 귀와 하나의 입을 준 이유를 일깨워주었고, 돈에 대한 마음의 여유와 항심恒心을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이 문제고, 지갑은 얇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나의 로망이었던 몽블랑 만년필은 볼펜으로 바뀌어 내 손에 쥐어졌다. 글 모임 「필통」 회원들이 나의 때늦은 등단을 축하하며 몽블랑 볼펜을 선물한 것이다. 상단 꼭대기엔 브랜드 특유의 화이트 스타가 도드라지고, 하단의 바디는 고결하고 차분한 푸른빛을 띤다. 클립 위쪽에는 제품의 일련번호가 새겨져 명품의 위용을 뽐낸다. 손에 쏘옥 잡히는 도톰한 그립감과 얼음 위에서 미끄럼을 타는 듯한 부드러운 필감은 몽블랑이 괜한 허세가 아니라 왜 명품인지 확인시킨다. 늘그막에 손에 쥔 명품 볼펜은 중년을 넘기며 시들어가는 자존감을 차오르게 했고 가끔씩 불거지는 초라함을 가려주었다.
사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라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메모 역시 스마트폰이 대세여서 수첩과 펜이 많이 사라진 세상이다. 그럼에도 펜이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즐기며 한동안 그 명품 볼펜을 꼭 갖고 다녔다. 이는 나의 건필과 문운을 바라며 선물한 분들에게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낙서라도 하며 수시로 만지작거리다 보면 볼펜은 온기를 머금고 자연스레 「필통」 회원들과 따뜻한 교감을 나누게 된다. 볼펜 한 자루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켰고 그 포만감으로 프로 작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몽블랑 볼펜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몽블랑의 프로 알피니스트가 된 듯한 기분이었으니.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친했던 몽블랑 볼펜을 어느 날부터 서랍 안에 고이 모셔놓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확인하게 된 사악한 가격 때문이었다. 100만 원에 육박하는 충격적인 가격을 알고 난 후부터 볼펜은 너무나 무거웠다. 리필심 한 개에 2만 원이라는 사실도 머리가 아팠다. 값비싼 물건이 주는 중압감과 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이상 볼펜과 동행할 수 없었다.
상의 왼쪽 안주머니에 꽂힌 펜이 혹시 저절로 빠져나가지 않을까 불안했다. 수시로 왼쪽 가슴께에 손을 갖다 대며 초고가품의 존재와 안위를 걱정했다. 손이라도 탈까 싶어 윗도리를 함부로 벗어놓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명품의 노예가 된 것이다.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동경의 대상이 유명세를 치르는 듯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몽블랑의 폭설에 갇혔다. 사각거리던 몽블랑의 눈이 내게 폭설로 내렸다. 바닥을 살짝 덮은 자국눈이 아니라 밤새 내려 한 길이나 되는 눈에 고립되었다. 볼펜을 선물한 그들은 내게 폭설 같은 시를 원했다. 세상의 모든 발이 묶이더라도 가만가만 쌓이지 않고 빈 들과 빈 마음을 한꺼번에 뒤덮는 갑작스런 눈. 하지만 폭설을 겁내는 자가 어찌 폭설 같은 시를 쓸 수 있겠나. 나의 글 마당은 가루눈 정도가 어울리는 듯했다.
볼펜은 눈에 푹푹 빠지며 더듬더듬 길을 잃었다. 결국 나는 어색한 명품을 서랍에 가두었다. 몽블랑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몽블랑을 험준한 문학의 산으로 상정하고 어설픈 산꾼이라도 되어 아찔한 설벽과 크레바스가 도사리는 죽음의 빙하를 넘어야 했지만 나는 다만 겁쟁이일 뿐이었다. 명품을 가질 자격과 즐길 수 있는 미덕이 내게 부족했다. 사물을 단지 돈의 관점에서 안목이 아닌 일상의 눈으로만 본 것이다. 명품 인생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명품이 되는데, 나는 남들이 선사한 명품마저 애써 팽개쳤다. 물건에 유용성이 사라지면 한낱 고물이거나 죽은 목숨이다. 명품은 끊임없이 숨을 불어넣고 손에 닿아야 진짜 명품으로 빛나는 것임을 몰랐다.
서랍 속의 그를 다시금 불러낸다. 다행히 아직도 만년설을 그대로 머리에 이고 있다. 등단 때의 초심을 가슴에 새기며 몽블랑을 안주머니에 다시 꽂았다.

봄이 차린 한끼
봄이 문 앞에 왔다. 우연히 접한 시 한 편이 나를 꽤 먼 밥집으로 이끈다. 창궐하는 코로나19로 인해 바깥 식사가 여의치 않아 집에다가 전자렌지용 간편식인 컵반Cup飯 형태의 미역국밥, 황태국밥, 날치알밥, 짜장덮밥 등을 쌓아놓고 골라먹는 요즘, 신달자 시인의 「눈엽」이란 시가 굳게 닫힌 문짝의 돌쩌귀를 풀고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폭우로 막 두들기고
폭풍으로 잔가지 잔혹하게 꺾어버리고
폭설로 서서히 숨구멍을 막아도
기어이 사랑하겠다고
여리고 푸른 혀를 내어 미는
봄
– 신달자 「눈엽」 전문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바이러스로 인한 집밥, 혼밥 신세가 푸른 혀를 내미는 봄을 따라 오랜만에 바깥 점심 나들이를 한다. 시의 힘이다.
「청학산」.
‘콩잎곰국’ 전문 한정식집으로, 함양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24번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다. 코로나 시국엔 밥집의 제반 조건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데, 이곳은 내 취향의 기준을 나름 충족하고 있었다. 붐비지 않고, 독립된 방이 있고, 음식이 소박하되 면역력을 위해 영양이 부실하지 않아야 하고, 새봄을 맞아 거창을 잠시 벗어난 곳… 거창에서 30분을 달려 청학산에 닿았다.
대문과 담장이 없는 대신에 입구에 키 큰 산벚나무와 작은 우물이 반가이 맞는다. 한옥의 외관이 예사롭지 않다. 한편에 숨은 듯 자리한 장독들이 옹기종기 서로 곁을 내주며 모여 있다. 맛의 보고寶庫다.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 소개되었던 ‘콩잎곰국정식’을 주문했다. 가격은 15000원. 밥과 국을 제외하고 찬이 26가지, 푸짐한 한상차림이다. 한술 뜨기도 전에 찰기가 느껴지는 흑미밥에 마음이 간다. 한 접시에 담긴 전병과 호박전이 어머니 손처럼 따시다. 소쿠리에 담긴 노란 어린 배추 속살에 얹은 죽염 된장의 진한 맛은 여운이 깊다.
메인 메뉴인 ‘콩잎곰국’은 쉽지 않은 발음만큼이나 상에 오르기까지의 공정 또한 만만치 않다. 먼저 콩잎을 따다가 억센 줄기를 제거하고 까칠한 부분을 비벼 부드럽게 만든다. 윤기 나는 콩잎을 잘 말렸다가 흐르는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다음 한우 사골, 사태살 등과 함께 끓여내는데, 콩잎의 향이 푹 고아낸 진한 국물과 어우러져 보약 같다.
콩은 예부터 감자, 고구마, 옥수수와 더불어 흉년으로 기근이 심할 때 허기를 채우던 구황 작물이었다. 콩밥은 가난을 상징했고 콩잎국은 청빈한 생활을 뜻했다. 이제는 콩이 쌀보다 비싼 시대다.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콩은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의 함유량이 많아 성인병 예방에도 효험 있는 건강 식품이다. 게다가 콩잎은 콩보다 영양분이 더 풍부해 콩잎장아찌와 콩잎김치는 너른 평야가 별로 없는 경상도 서민들의 가난한 밥상에 훌륭한 밑반찬이다. 특히 콩잎곰국은 쇠뿔도 구부러진다는 한여름 최고의 별미 보양식으로 자리잡았다. 문헌에 따르면, 콩잎을 많이 뜯어먹는 양羊 한 마리는 유독 많은 암컷 양들을 거느리며 하루에도 백 번 넘게 교미를 하였다고 한다. 그걸 지켜보던 노인이 콩잎을 양껏 먹고 왕성한 원기로 아들까지 낳았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콩잎이 기름기가 많은 곰국과 음식 궁합이 잘 맞는 데 착안하여 함양의 명망 높은 풍천 노씨 종가에서 콩잎곰국을 내림 음식으로 발전시켰다. 그후 지리산의 기세 좋은 땅에 자리잡아 사랑받는 향토 음식이 된 것이다.
눈엽嫩葉은 새로 나온 연한 잎이다. 새로 움트는 연한 잎들과 함께한 점심 나들이는 한아름 봄을 선사했다. 봄이 상에 그득하니 갖가지 찬이 다투어 꽃을 피운다. 입맛 떨어지는 나이에 모처럼 맛의 물꼬가 트이고 식욕의 둑이 터진다. 미각이 회춘을 맞은 듯 무뎌진 혓바닥의 돌기들이 곧추선다. 음식을 두루 섭렵한 후 콩잎곰국 한 그릇을 달랑 비워내니 후줄근한 몸이 활짝 핀다. 진정한 한끼는 상다리가 부러지는 음식들로 죄다 배를 채워야 함이 아닐진대 성찬에 매료되어 과식을 하고 말았다. 부른 배는 방바닥에 한 손을 짚고 두어 번 기우뚱 끝에 겨우 일어섰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건강한 맛과 가심비價心比를 동시에 충족했다.
시간은 눈엽에서 신록을 거쳐 녹음으로 갈 것이다. 봄처럼, 코로나에 갇힌 우리의 일상도 빨리 깨어나기를 기원하며 밥집을 나선다.

3부 사람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
– 탁닛한 –
아름다운 비행
한 청년의 감동적인 비상飛上이 오래 전 접했던 아름다운 기억 둘을 소환한다. 영화와 시, 한 편씩이다.
「아름다운 비행」은 자연과 교감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감성 영화로 1996년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원제는「Fly Away Home」.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열한 살 소녀 에이미는 10년 만에 재회한 아버지와 늘 서먹하다. 어머니 부재의 외로움과 아버지와의 거리감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에이미 는 기러기 알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온다. 엄마 없는 기러기 알들은 에이미의 따뜻한 손길로 부화하게 되고 16마리 새끼 기러기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본 에이미를 어미로 알고 있다. 에이미는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는 기러기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키운다. 기러기는 날아야 하고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에이미는 아빠의 응원 속에 기러기와 함께 아름다운 비행을 시작한다.
또 하나의 기러기 스토리가 있다. 시 한 편을 보자.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 이상국 「기러기 가족」 전문
기러기 부자가 동해안 송지호 상공을 날고 있다. 어린 기러기가 힘에 부치어 쉬었다 가자고 사정을 하지만 아버지는 갈 길이 멀다고 계속 날기를 재촉한다.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추락함을 알기 때문이다. 멀고도 고단한 인생길이 어린 기러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비행, 그 주인공을 만나 보자.
아름다운 청년, 그는 2020 도쿄 올림픽 육상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4위를 차지한 노메달 영웅 우상혁. 기록은 2m35. 한국 육상 트랙·필드 종목의 올림픽 최고 순위다. 자신의 종전 최고 기록(2m31)과 24년 동안 멈춰 있던 한국 기록(2m34)을 갈아치웠다. 그의 기록 경신은 일단 멈추었지만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각인, 하면 영화 「아름다운 비행」 중 기러기들이 에이미를 엄마로 알고 졸졸 따라다니던 장면이 떠오른다. 각인은 동물이 태어난 직후 처음으로 보게 된 대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행동 양식이다. 우상혁은 그의 이름만 각인시킨 것이 아니었다. 육상의 불모지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육상의 매력을 한껏 각인시켰다.
육상은 맨몸으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을 행하는 운동으로 모든 스포츠의 기초 종목이다. 코로나와 더위에 힘들고 지친 국민들은 위로 몸을 솟구쳐 더 높이 날아오르는 그에게 환호했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바Bar를높일때마다 한계를 뛰어넘는 그에게 열광했다. 국민들은 그가 도약하는 순간마다 선사하는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긴장감에 매료되었고, 대한민국이 뛰어넘어야 할 벽 앞에서 그가 주문呪文하는 무한 긍정의 메시지에 최면이 걸린 듯했다.
“괜찮아.” “이제 시작이야.” “할 수 있다.” “올라가자.” “Let’s Go.” “장대야, 너 오늘 나 못 이기겠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를 지르고 주문을 쉬지 않고 읊는다. 그는 즐긴다. 세계적인 선수들 사이에서도 경기를 즐겼다. 갖가지 표정이나 제스처가 연기자보다 더 사실적이다. 즐기면 즐거운 일이 생기고,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듯했다. 각종 인터뷰에서 현역 일병 군인 신분의 스물다섯 살 청년이 단단한 내공과 관록을 쌓은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을 쏟아낸다.
“기록은 수직 상승이 아니라 파도라는 것, 굴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목표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버렸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급한 지름길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도를 차분히 걷다 보면 행복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다.”
시베리아를 향해 하늘을 나는 기러기 부자에게 시베리아는 삶의 목표이고, 날개는 삶의 수단이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 난생 처음인 어린 기러기의 여정을 통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어린 기러기에겐 의연하고 든든한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의 존재는 힘들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희망이다.
우상혁에게는 아버지가 한 명 더 있다. 아버지 같은 은사 윤종형 감독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나 13년간 그를 가르친 윤감독을 아버지라 부른다. 한국 육상의 새로운 역사를 쓴 우상혁 뒤에는 가족처럼 이끈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다.
우상혁의 핸디캡은 단신과 짝발이다. 1m88의 키는 세계적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단신이다. 어릴 적 택시 바퀴에 오른발이 깔리는 사고로 오른발이 왼발보다 1cm 작은 짝발이다. 이런 경우 밸런스에 상당한 문제가 있게 된다. 윤감독은 이런 단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 긍정 에너지를 심어주고 기술을 전수했다.
우상혁이 은인으로 부르는 또 한 명의 지도자가 있다. 도쿄 올림픽 육상 도약 종목 대표팀 코치 김도균. 우상혁이 부상과 슬럼프로 벼랑 끝에 있을 때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분이다. 선수 생명이 위기에 처해 훈련을 거르고 매일 술로 자포자기의 시간을 보낼 때 자신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여 함께 생활했다. 기자들이 우상혁에게 ‘도약의 조건’을 물었을 때‘ 김도균 코치님과 계속 함께 하는 것’이라 대답했다. 술독에 빠진 제자를 스타로 키운 김코치는 사제의 인연을 끝내려 한다. 상혁에겐 앞으로 더 유능한 코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참스승이다.
기러기를 소재로 한 2개의 스토리가 우리 마음을 꿰뚫는 주제어는 교감交感이다. 영화 「아름다운 비행」에서 에이미는 부모의 마음으로 기러기의 날갯짓을 도왔고, 기러기는 소녀의 외로운 시간에 나타나 돌아가신 어머니 마음으로 그녀를 지켰다.
「기러기 가족」을 부정父情과 효심으로 읽는다. 날개가 파릇한 아들 기러기는 힘이 달린 아버지를 위해 송지호에 좀 쉬었다 가자 한다. 어린 기러기의 효심에 아버지 가슴은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제 우상혁의 차례, 그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좋은 스승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는다. 제자 우상혁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도쿄 하늘을 날아오를 때마다 그는 한국 육상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철 멘탈은 기록보다 놀랍다. 심박수가 올라가는 초조한 긴장의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무관중 속 대회 관계자들의 박수를 유도한다. 스마일 일병 특유의 여유 있는 프로급 제스처는 국민들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주술 이외에도 등에 새겨진 문신의 비밀과 짝짝이 신발의 속사정, 도약 직전의 루틴과 직후의 세리머니, 마지막 도전에 실패한 뒤 올린 거수 경례 또한 화젯거리다.
그는 숫자 ‘238’을 좋아한다. 높이뛰기의 ‘마의 벽’이라 불리는 「50클럽」 가입을 희망한다. 높이뛰기 선수들에겐 본인의 키에서 50cm를 더 뛰어넘는 것이 목표다. 이제 그는 2020 도쿄 올림픽의 단꿈에서 깨어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가을이다. 기러기는 가을에 우리나라에 와서 봄에 시베리아 등지로 가는 겨울 철새다. 기러기가 날면 내 겨드랑이도 간지러워진다. 날자. 날자. 이상李箱의 날개처럼. 높이뛰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스포츠였다니. 나도 한번 날아보자꾸나.
마지막 수업
기울어진 나무는 기울어진 쪽으로
해지는 소리를 보고 있다
이 꽃나무와 저 꽃나무 사이
기울어지는 그림자의 빛깔을 만지고 있다
기울어지다가 잠깐
지는 해의 틈새를 받치고 있다
기울어짐과 기울어짐의 각도에 대하여
절하다가 고개를 드는 이목구비
어슬한 얼굴 너머로 지는 해가 기울고 있다
제비는 오지 않고 복사꽃 붉은 꿈이
기울어진 어깨를 쓰다듬고 있다
어쩌면 한갓지다
– 유병근 「복사꽃나무」 전문
복사꽃 한창 피던 봄날, 부산의 대표 원로 시인 유병근 님이 작고했다. 그는 시집 16권과 수필집 등 총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고모부이기도 한 그분 덕에 나는 어설픈 시인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 봄 아지랑이 끝에 걸린 시인의 침묵을 듣는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겨울산을 좋아했고 침묵으로 더 크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릇도 비어 있을 때 그릇이다’라고 역설했던 분이 많은 걸 비우고 떠났다.
지난 3월 나의 졸시집 『거울을 보는 남자』를 들고 양산의 자택을 찾았다. 온몸에 퍼진 암을 잠시 잠재우고 노구를 스스로 일으킨 당신이 조카에게 힘겨운 강의를 쏟아낸다. 그도 나도 이것이 마지막임을 안다. 구술을 눈물로 메모했다.
모든 예술은 새로운 상상력과 이미지가 중요하다. 시詩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쓴 시를 버려라. 참신한 생각으로 써라. 나무가 흔들린다는 건 나무 속의 힘으로 바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소리를 낸다. 나무가 왜 푸르느냐? 나무가 물소리를 내기 때문에 푸르다. 왜 푸른지, 왜 바람이 부는지 늘 생각해야 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나는 것만 쓰면 안된다. ‘길가에 바위가 있다’라고 쓰지 말고 바위 속에 무엇이 있는지, 석공은 바위에서 무얼 찾아내는지, 마애불인지 오두막인지 고민해야 한다. 조각가는 돌 속에 감춰진 표정과 미소와 눈물을 끄집어내어 깎고 빚는다. ‘바위는 서 있고 이끼가 끼어있다’처럼 일반인은 겉을 보지만 시인은 바위의 속을, 사물의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돌 속에 꽃이 핌을 알아차려야 한다.
화가는 보이는 산이 아닌 내 가슴 속의 산을 그린다. 산이 안 보이는 도심에서도, 지나는 사람의 얼굴에서도 자신만의 산을 본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산의 화가 유영국의 말을 새겨라.
준비 중인 나의 산문집에 관해서도 한 수 던지신다.
수필은 일기가 아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내 가슴을 울리는 것을 써야 한다. 만만치 않은 진지한 작업이다. 강이 왜 바다로 흘러가는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상식을 벗어나야 한다. 강물이 그리워하는 존재가 바다에 있어서 그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상투가 아닌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 한다.
구름을 보고 하늘이 보낸 문자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싱겁다. 구름을 보고 수증기 덩어리라 하면 과학적 상식에 불과하다. 구름을 하늘이 그린 추상화, 이렇게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이 재창조되는 은유의 과정을 아프게 겪어야 한다. 그래서 문학이 어렵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입체적으로 봐라.
어느 시인은 나뭇잎맥을 항로航路로 보았다. 과학자도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다가 발명한다. 상상력이 중요하다. 문학의 요체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을 키우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한다. 철학, 미학, 사학 책을 많이 읽어라. 미술 공부도 하고 추상화를 많이 봐라. 문학은 취미로 하는 게 아니다. 직업으로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해라. 그래야 프로 작가로 발돋움한다.
네가 양산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호포역을 거치지 않았느냐. 지하철 방송 멘트가 “이번 역은 호포, 호포역입니다.”라고 할 때 나는 호포가 아니라 허파로 들었다. 역 바로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숨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영남의 허파 역할을 하는 낙동강 유역의 습지 등 자연 생태계가 떠올라야 한다.
그는 오랫동안 부산 화명동 낙동강변에 살았다. 첫 시집 제목을 『연안집沿岸集』으로 정할 정도로 육지와 면한 물가를 좋아했다. 물과 뭍의 경계에서 마른 땅을 적시는 강물을 쳐다보며 강가를 거닐었다. 인근 양산으로 이사한 후에도 강 따라 길게 이어진 지하철 역들을 지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다듬었을 것이다.
애제자에게 거침이 없던 말씀이 흐름을 잠시 중단한 강물과 같다. 목소리는 차츰 가늘어지더니 강에 잠긴다. 숨이 가빠진 허파는 제 몸마저 적시지 못한다. 하지만 눈물로 받아 적은 글들은 낱낱이 물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기지개를 켠다.
마지막 수업2
삶을 스치는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라 했던 노시인이 그가 스쳐간 인연들을 두고 떠났다. 모든 사물의 이목구비와 사귐을 끝내고 먼 하늘로 봄나들이 갔다. 어깨에 쌓인 인연의 무게는 털지 않고 가서 다행이다.
유병근 시인은 1932년 통영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소 먹일 때 고삐를 손목에 감고 남은 한 손에는 책을 쥐고 있었다. 나무 할 때도 톱이나 낫 보다 먼저 책이 손에 들려 지게의 짐은 늘 가벼웠다. 고삐를 놓은 손과 빈 지게가 곧 여백이고 상상력이었으며 배고픈 소년에게 마음을 살찌우는 자양분이었다. 통영중학교 재학 시 김춘수 선생의 가르침으로 시심을 키웠고 해군 복무 때는 윤동주 시인의 동생이자 사상계 출신 시인인 윤일주 대위를 상관으로 만나 문학의 길에 들었다.
그후 부산에서 시와 수필 활동을 이어가며 「신작품」, 「절대시」, 「목필」 동인으로 활약했다. 중앙 문단 일변도의 한국 시단에서 지방 디스카운트를 마다하지 않고 부산을 지킨 문인이다. 그 이유로 선생의 작품이 전국적으로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젊고 참신한 시 세계로 후배 문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특히 수필은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한국 수필의 격을 한껏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에 『꽃도 물빛을 낯가림한다』는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시집 16권과 수필집 등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왕성한 창작열을 보이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신춘문예 당선 제조기’로 언론에 회자될 만큼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들의 당선 소감엔 ‘유병근’을 빠뜨리지 않는다.
“유병근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시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신 유병근 선생님”, “시를 익힐 무렵부터 기꺼이 동료로 대해 주셨던 유병근 선생님” 등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올해도 변함이 없다. 202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또한 당선 소감에서 “유병근 선생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기원한다.”며 그를 응원한다.
그는 빛나는 스승이 아니라 따뜻한 스승이었다. 누구에게나 멘토를 자처해 그들 눈높이에서 재능을 키웠고, 그들의 조그만 성취에도 크게 기뻐했다. 문청 시절도 없이 한참 늦은 나이에 문학의 문턱에서 헤매던 조카인 내게도 각별했다. 그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다. 스승임을 앞세우지 않고 파트너십에 입각해 제자들을 문학 동료로서 깎듯이 대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의 스승이라고 했다. 말석에 앉은 어설픈 제자 앞에서도 훈김을 피워낸다. 마치 격의 없는 길동무나 문학 수행을 함께 하는 도반과 같았다. 이러한 품성으로 문단에 서는 좀처럼 뵙기 힘든 어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진심어린 존중은 철저한 절제와 겸양에서 비롯된다. 자신에게 타이르고 경계하는 마음이 몸에 밴 분이다. 스스로 깨치기를 실천한다. 이런 깨우침은 시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시론詩論 하나를 옮겨 보자.
계란은 깨어져 병아리가 된다. 사물이 시의 기쁨을 누리자면 사물의 형태는 깨어져야 한다. 깨어진 계란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아 너희가 한 줄의 시로 태어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깨어져야 한다. 삭막한 폐허로 쓰러져야 한다. 폐허에서 눈뜨는 거듭남의 아픔 끝에 비로소 너희는 한 줄의 시로 영생하리라.
– 수필 「언어의 꿈」 중
성경 구절 같은 말씀으로 시의 복음을 전하는 듯하다.
첫 시집 출간 후 조만간 산문집을 펴낼 작정으로 나는 유병근 선생께 수필 습작 5편을 메일로 보냈다. 내 글의 방향성을 수필의 대가에게 선을 보이고 평을 받아보겠다는 일종의 개인 오디션인 셈이다. 바로 답신을 보내왔는데 이번에도 좀체 지적은 않고 덕담만 널어놓으셨다.
작품 다섯 편을 한달음에 읽었다. 표현, 언어를 굴리는 기법, 앞 문단과 뒤따르는 문단의 연결 고리도 아주 훌륭하다. 수필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문장 속에는 시적 울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다분히 성공하고 있다. 더욱 매진하여 좋은 작가로 우뚝 서기 바란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다시 메일이 왔다.
지난 번 평가에 첨언한다. 대상을 보고 묘사하려는 노력은 보이나 문학 작품으로서의 표현과 진술로는 약간 거리가 멀다. 글이 작품이 되려면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어 갈고 닦아야 한다.
문학적인 글은 내가 본 것의 단순한 전달이 아니며 느낌 그 너머에 있는 한 차원 다른 것을 그려내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가 아니라 피를 말리는 진통 끝에 한 편의 수필이 탄생함을 명념해라. 네가 시인임에 문장 속에서 시적 운치와 시적 표현을 좀더 염두에 둔다면 수필의 격이 한층 높아질 것이다.
칭찬보다 꾸중이 오히려 고마웠다. 이는 행여 신변잡기 수준의 대중 수필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칫 편하고 쉽게 쓴 미담 위주의 이야기에 대한 호통 같은 조언이다.
본 것의 단순한 전달이 아닌 느낌 그 너머의 것을 오륙도를 소재로 한 그의 수필에서 본다.
남구 용호동 장자산의 남서끝자락 해안에 매달린 오륙도는 이마에 부딪칠 듯 훤하다. 성큼 건너뛰면 금방 방패섬에 닿을 듯하다. 육지에서 가까운 섬부터 헤아려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그리고 등대섬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장자산이 미처 말하지 못한 속내를 말줄임 표처럼 띄엄띄엄 찍어둔 것이 섬이 되었을 것이다. 섬 이름에서 그 말줄임표가 무슨 내용인지를 대강 짐작할 수도 있어 보인다.
– 수필 「다섯 섬인지 여섯 섬인지」 중
산이 미처 말하지 못한 속내를 말줄임표처럼 띄엄띄엄 찍어둔 것이 섬이 되었다니! 창조적 상상과 은유가 기가 막힐 정도다. 바라보는 대상은 같을 진대 나는 오륙도를 고작 이렇게 조망했다.
동에서 보면 여섯 섬
서에서 보면 다섯 섬
물 들면 여섯 섬
물 나면 다섯 섬
자리 따라 물때 따라
사라진 섬 하나
내 마음 속
– 졸시 「오륙도」 전문
나는 보이는 그대로 썼고 그는 저편 그 너머의 것을 적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라는 그의 시론을 수필에서도 적용한 것이다.
이번엔 시적 표현과 관련하여 내 마음을 흔든 그의 수필 한 편을 감상하자. 「실내악단」이란 제목으로 비 오는 날의 서정을 그렸는데 작품 속에 시심이 그득해서 서정시 여러 편을 이어놓은 듯하다.
후박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타악기 소리를 한다. 잎은 소리를 감상하듯 눈을 감는다. 백인백인百忍百忍 하는 기도문이라도 중얼대나 보다. 물방울 속에 악기가 있다. 서로 부딪치면 쟁그랑거리는 얇은 금속음이 터질 듯했다. 빗방울 속에는 은빛이 있다. 유리창은 은방울의 화음으로 달콤하게 쟁그랑거리는 관악기였다.
어디서 송아지가 길게 울고 있다. 햇빛이 톡톡 등에 땀띠를 꽂을 때마다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다. 어느 새벽에는 모로 누워 마당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곤 했다. 발치에 떠밀린 이불을 다시 끌어올리고 늦잠을 즐기는데 싸한 바람 냄새가 코에 닿았다. 새벽 일찍 들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이슬 냄새와 흙내였다. 그 냄새가 우리집의 실내악이었다. 나에게 가족이 딸리게 되자 어느새 나는 실내악단장이었다.
– 수필 「실내악단」 중
종명누진鐘鳴漏盡. 때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물시계의 물이 다한다는 뜻이다. 하루의 시간이 다 끝나고 밤이 깊어가듯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깨우치는 단어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다. 게다가 그는 가까운 친척이었고 거주지 또한 지척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축복을 멀리했다. 만남을 소홀히 했다. 문학의 길을 잃었을 때 여쭤볼 어른의 부재를 이제 어찌할 것인가. 후회가 막급하다. 그가 피워낸 난향이 가득할 땐 맑음을 모르다가 이제 와서 먼 향기가 맑음을 더해 가기를 바랄 뿐이다.
작고하기 한 달 전, 마지막 강의를 듣고 선생의 집을 나서며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을 떠올렸다. 프란츠 소년의 어투로 그 시간을 추억한다.
내게는 실은 문학 공부보다 문학 주변이 더 신나는 일이다.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택을 찾았는데 집안 분위기가 꽤 무거웠다. 선생님은 침대에 누워 계시고 고모님은 별 말씀이 없으시다. 거실로 자리를 옮겨 개인 과외가 시작된다. 선생님의 가늘고 낮은 목소리는 무척 떨렸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임을 알아차리고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나는 그동안 선생님이 내주신 문학과 삶의 숙제에 게으름을 피운 것을 반성했다.
부족한 내게 친구처럼 다가와 아버지처럼 이끌어주셨는데 나는 단지 철부지 학생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거실 안까지 길게 드리워질 즈음 선생님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모로 누우신다.
마지막 인사가 된 큰절을 올린 후 나는 돌아서서 한참을 울었다.
호포역을 지나며 낙동강변을 바라본다. 웅숭깊은 노시인의 강물이 나의 얕은 강모래 바닥을 적신다. 강 위로 구름이 떠 간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는 문자 메시지다. 구름을 보며 이별 후의 심산心散함을 달랜다.
우리 곁을 떠난 지 며칠 후 선생님의 메일이 도착했다. 난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병근 님의 손자 유채은입니다. 유병근 이름으로 드리는 마지막 메일입니다. 생전에 당신의 ID와 패스워드를 주셔서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는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함께 해 주셔서 할아버님도 많이 기뻐하셨을 거예요. 큰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건강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할아버님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내게는 마지막 편지가 아니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선생님이 보낸 구름 메시지를 확인할 것이다. 그의 강의는 끝나지 않았다.

부부의 날
봄이 오는 듯하더니 벌써 꼬리를 감춘다. 기온도 널뛰기를 한다. 내 기억도 마찬가지다. 탁상용 달력의 날짜에 친 동그라미가 예전보다 많아졌다. 폰 캘린더에도 듬성듬성하던 스케줄 표시가 제법 빽빽하다. 이는 요즘 들어 부쩍 깜빡거리는 기억력에 포스트잇 구실도 하거니와 소중하고 아까운 인생을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의도다. 특히 축하하거나 기릴 만한 일을 잘 기억해 그날만큼은 좀더 의미 있게 보내자는 생각에서다.
지난 3월 8일, 지인 모임에서 홍일점 여성에게 조그만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뜬금없는 꽃 선물에 다들 놀란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상징 꽃인 장미와 함께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깜짝 이벤트 하나로 인해 전체 분위기가 활짝 피었음은 물론이다. 기념일 메모 덕분이다.
5월 달력을 들추어 본다. 1일 근로자의 날,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17일 성년의 날, 19일 부처님 오신 날을 지나 21일 부부의 날에 눈길을 준다.
주말부부로 지내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구순의 노모를 돌보며 집안을 건사한 아내에게 평소 ‘고맙다’, ‘수고 많다’,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했다. 그럼에도 무심한 경상도 남자에게 무한한 자존과 자유를 지금껏 변함 없이 주고 있다. 무거운 짐을 내색 않고 감내해 온 아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금귀월래金歸月來의 생활을 십수 년째 이어 온다. 금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월요일 아침에 일터로 오는 주말부부 스케줄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른바 이도오농二都五農 생활이 만족스럽다. 멀리 떨어져 있어 가끔 애잔한 마음도 일지만 주말에 다시 만난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참고 견디다 보니 일과 사랑을 오래토록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시골 변방에서 외로이 지내는 남편이 안쓰럽고 혼밥이 염려스러웠는지 아내가 일말의 미안함을 꺼낸 적이 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내 특유의 「주말부부 예찬론」을 설파했다.
주말부부는 서로에게 ‘별’이다. 별의 시인 이성선은 「별을 보며」라는 시에서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 지 않았을까/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라며 별의 오염을 걱정한다. 내 비록 가난하고 먼지와 때로 찌들었지만 깨끗하게 헹구어 말간 영혼으로 다가서겠다는 고백도 함께 곁들인다. 맑게 빛나는 선한 사랑의 별은 함부로 자주 보면 닳고 낡아지기에 아끼고 아껴야 한다. 주말부부는 날마다 만나는 밥 같은 사랑이 아니라 필요할 때 만나는 약 같은 사랑이다. 최소한으로 충분한 극미의 사랑이다.
그리고 주말부부는 ‘배관拜觀’이다. 배관은 명품과 명작의 감상법 중 하나로 삼가 절하고 경배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일례로 국보 제 180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널리 입에 오르내린다. 한국에 건너오기 전 일본인 소장자였던 후지스카는 수장고에 깊숙이 넣어둔 세한도를 일 년에 몇 번만 꺼내 배관의 예를 갖춰 마음 졸이며 보았다고 전해진다. 공경과 두려움으로 매일 보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환희와 경이 속에 가슴 설레는 것은 단지 예술 작품 감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용안 뵈듯 배관하는 주말부부에겐 일주일에 한 번 친견도 잦은 셈이다.
주말부부는 ‘수繡의비밀’이다. 만해 한용운은 「수의 비밀」이란 시에서 수에 담긴 사랑의 비밀을 들려준다.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놓았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은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주고 짓다가 놓아주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 한용운 「수의 비밀」 부분
주머니에 수를 놓는 것은 당신을 기다리는 일. 그래서 일부러 수놓기를 미루고 있다. 수놓기의 완성은 기다림을 끝내는 것이므로 다 지을 수 없다. 이는 제주 해녀가 제일 크고 좋은 전복은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 물속 바위에 그대로 남겨둔다는 미당 서정주의 시론과 맞닿는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주말부부 역시 기다리는 마음을 숨기고 남겨두면서 만남을 미룬다. 사랑의 역설이다.
끝으로 주말부부는 ‘향원익청香遠益淸’이다. 향기는 멀리 갈수록 그 맑음을 더해 간다. 꽃향기는 가까울수록 진하고 멀수록 옅어지지만 사람의 향기는 다를지어다. 그래서 화향백리인향만리라 하지 않는가.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은 더 멀리 가는 법. 너무 가까워 속속들이 참견하고 부대끼는 사이보다 일정한 거리두기로 자주 못 봐도 평온한 사이가 좋다. 이는 종鐘의 성향과도 같다. 자주 딸랑거리는 작은 종소리는 경박스럽다. 큰 종은 가끔씩 타종해야 울림이 크고 여운이 오래 간다.
장황한 설명에 아내는 짐짓 눈웃음만 짓는다. 다시 달력을 들여다보며 동그라미가 굵게 마킹된 5월 21일에 나의 시선은 멈춘다.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뜻을 지닌 부부의 날을 맞아 아내를 위해 시 한 편 적는다. 여태껏 누렸던 무한한 감사를 뒤늦게나마 깨닫고 헐한 말이 아닌 깊은 위로의 헌사를 힘주어 써내려 간다.
5월 21일, 부부의 날
나라에서 지정한 보물이
우리 고장에 몇 개 있는가를 놓고
집사람과 종일 다투었다
그녀는 여섯 개라 했고
나는 끝까지 일곱 개라 우겼다
그녀는 여태 자신이 보물인지를 모른다
일천구백팔십팔년 결혼기념일에 지정된
살아있는 보물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내 아내
– 졸시 「일기」 전문
결혼기념일에 지정된 보물을, 멀리 있어 더욱 향기로운 맑은 별을 배관한다. 팔불출이라는 비난이 부끄럽지 않다.
퉁, 치다
“생일 축하해!”
멀리 사는 오빠가
장미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사연인즉,
매년 생일 축하금을 10만원씩 보내왔는데
올해는 꽃이 온 것이다
손편지와 함께
“0 하나 더 치는 바람에 100만원 송금했다.
10년 퉁친 거다.”
장미는 일주일이면 시들지만
마음은 오래 간다
꽃으로도 돈으로도 갈음할 수 없는
퉁
– 졸시 「퉁, 치다」 전문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의 생일 에피소드를 듣고 즉석에서 끄적인 시다. 시를 접한 그녀가 보내온 생일에 얽힌 사연은 감동적이었는데 일종의 시작 노트인 셈이다.
멀리 시집보낸 외동딸 생일이면 서글퍼질까 외롭지 말라고 편찮으신 친정아버님은 오빠더러 잊지 말고 동생 잘 챙겨라 이르셨습니다. 아버님 하늘로 떠나시고 맞이하는 첫 번째 제 생일. 더 힘들어질까 걱정에 스마트뱅킹 숫자 ‘0’을 누르는 오빠의 손가락은 10년 치 축하금을 한꺼번에 보내며 위로해주었습니다.
“앗! 실수! 10년 치 퉁치자. 샘샘이다.”라며 웃는 오빠의 전화 목소리에 따뜻한 속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습니다. 지난 해부터 남동생을 통해 들어오는 생일 축하금이 또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빠가 시키지 않았나 싶어요.
떠나신 아버님 마음을 채워 주려는 오빠가 너무 고마워
“괜찮아, 잘 살게 오빠! 괜찮아, 잘 살게 오빠!”
라고 되뇌며 막 울었습니다.
사는 것이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특히 중년의 삶은 생존과 도태의 절박함을 안고 어정쩡한 자리에서 분투하느라 아프기조차 힘들다. 빠듯하고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오빠는 얇은 지갑을 쪼개어 누이에게 마음을 건넨다. 이 대목에서 동요 2곡을 잠시 소환한다.
「꽃밭에서」와 「오빠 생각」. 아빠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와 봉숭아 등 꽃들만 한창이며, 뜸북새 우는 여름이 지나 기러기 우는 가을이 되어도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질 뿐이다. 그때 멀리 사는 누이에게 꽂힌 애틋한 생일 축하금은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피어나는 나팔꽃이며, 서울로 떠나 한참 소식 없던 오빠가 사가지고 온 비단 구두와 다름 아니다.
‘퉁치다’는 상대방과 주고받을 것이 있을 때 서로 없는 것으로 셈하는 것이다. 아버지 부재 시 누이에게 큰 울타리가 되어 오빠가 친 ‘퉁’은 셈이 없고 조건이 없다. 무조건 다 내어 주는 부모의 무한한 사랑과 같다.
‘오빠’라는 단어는 친남매나 친족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의미가 많이 확장되어 사용된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친오빠와 더불어 정겹고 친근한 매너남을 두루 아우르고 일컫는 의미심장한 단어가 되었다. 이 시대의 오빠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소녀
베토벤을 듣는다. 교향곡 제5번 「운명」은 세상의 음악 중 가장 영향력이 크고 사랑 받는 곡이다. 1악장 첫 소절처럼 강렬한 비트로 나의 문을 두드린 소녀. 운명을 닮은 첫사랑을 추억하며 2009년 봄의 비망록을 펼쳐 본다.
야구 중계방송 시청을 위해 TV 앞에 앉았다. 「WBC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야구 종주국 미국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야구 하는 나라 불러다가 폼을 잡고 광내는 대회다. 제2라운드 우리의 상대는 숙적 일본.‘숙적’이라는 단어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초등 3학년 때 나의 애인으로 공인되었던 단짝 황숙희를 어찌 한번 자빠뜨려 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동네 형이 있었다. 생김새가 흡사 쪽발이 같았고 집마저 일본식 적산 가옥에 살았던 5학년생 조길태. 그는 미성극장 뒤편 복개 도랑으로 나를 유인해 숙희를 시비 삼아 싸움을 걸어왔다.
3학년생과 5학년생의 맞짱은 애초부터 급이 맞지 않고 밸런스가 깨진 싸움이었다. 싸우면서 정드는 또래와의 싸움이 아니라 아예 쨉이 안 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숙희 보호 본능으로 무장한 나는 결코 겁을 먹거나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너는 칼로 싸우지만 나는 신의 이름, 숙희 이름으로 싸우겠다며 맞섰다. 선빵을 날리며 선제 공격을 했으나 훨씬 큰 덩치와 주먹은 한순간에 내 코피를 터지게 했다. 당시에는 코피가 나면 싸움은 끝장이었다. 흘러내리는 쌍코피의 따스한 감촉과 달짝지근한 맛은 나의 유소년 기억 중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스냅으로 남아 있다. 숙희가 그 광경을 보고 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그의 악행을 용서할 수 없었다. 코피는 멈추었으나 증오와 복수심은 굳어진 코피처럼 앙금이 오래 남았다. 태권도 도장에 입문한 것도 그즈음이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훈을 열 살짜리 어린 나에게 미리 가르쳐 준 사건이었다.
관순 누님의 계절 3월이 되면 조길태보다 더 미운 기억의 찌꺼기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은 사라진 섬이지만 오래전 바닷새들의 천국이었던 섬, 언젠가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꼭 되찾아야 할 섬이 있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있는 좆도鳥島. 이 섬마저 일본은 자기네 땅이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는다.
WBC 야구 지난 경기에선 봉중근 의사가 이치로 히로부미를 동경의 돔구장에서 단방에 아작내었지만 그것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평소 점잔 빼는 내가 점심을 거르고 입에 거품까지 물며 일본전을 관전했는데 이번 경기 또한 일본 대표팀을 오뉴월에 워커 신고 개구리 밟듯 완전 제압했다. 58년 개띠 하라 감독이 차고 있던 사무라이 니뽄도日本刀를 빼내어 일본 야구의 숨통을 완전히 끊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늦은 점심으로 짜장면을 곱빼기로 흡입했다.
짜장면도 좋지만 특히 부산 사람들에게는 짜장면보다 더 좋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야구다. 목포가 항구면 부산은 야구다. 젊은 커플이 신혼여행을 해외로 가지 않고 배낭 차림으로 사직구장을 찾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박봉의 어느 택시 기사는 비번 날 프로야구 직관이 인생의 낙이라고 했다.
모교 수정초등학교에도 야구부가 있었다. 당시 이름을 날린 선배들이 꽤 많았다. 4년 선배 박순철은 해병대 소속으로 국가대표 1루수를 지냈다. 그의 동생 박학성도 경남고 시절 명성을 날렸었고, 추경덕 선배는 경북고 주장을 맡았는데 여학생 팬이 상당히 많았다. 2년 선배 김원용은 명투수로 활약하다가 공부로 방향을 틀어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했다.
어느 날, 행운이라는 장쾌한 홈런 볼이 나의 글러브 속으로 마구처럼 날아들어와 꽂힌 소설 같은 사건이 있었다. 오랜 세월 가슴 깊숙이 품고 있었던 황숙희를 초등학교 이후 근 2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내 나이 서른이었던 1985년, 5년차 사원인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애국 일꾼이었다. 고도성장의 주역임을 자처하며 일요일에도 회사 출근을 마다하지 않았고 ‘개발이 나발’ 즉 ‘개인의 발전이 나라의 발전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틈틈이 자기 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상황이었기에 일본에 대한 일말의 거부감 없이 한국은 일본어 배움의 열풍에 휩싸였다. 독어와 불어가 대한민국 제2외국어 자리를 마침내 일어에게 넘겨주는 시기다. 나 역시 고교 때 2년 간 학습한 독일어를 기억에서 내리고 당시 최고의 학습 교재였던 연두색 표지의 「박성원 표준일본어교본」을 손에 달고 다녔다.
이때 기적이라는 꽃말을 가진 파란 장미가 내 서른 살 인생의 어느 봄날에 피어난다. 이는 신神이 행한 일이라고 믿는다. 단짝으로 지내다가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다시 전학 간 후 소식이 끊겼던 첫사랑 황숙희를 18년 만에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기적 혹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일컫는가?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니 소설은 그럴 듯하고 있음직한 개연성을 전제로 하기에 소설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서울에서의 극적인 만남 스토리는 잠시 제쳐두고 초등 시절로 다시 거슬러 가보자. 서울에서 전학 온 숙희는 조숙하고 과감했다. 소꿉장난과 고무줄놀이 대신 구슬치기와 도랑 탐험을 즐겼다. 서울서 온 애들에게 으레 쓰는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는 말로 놀려줄 만한데 어느 누구도 그녀를 골려 대지 않았다. 그 아이는 껍질 벗긴 양파처럼 뽀얗고 반질반질 빛나는 외모였다.
그녀는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전학을 온 3학년 때에는 한 반 짝지였고, 집이 바로 이웃하고 있어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이라는 부제를 후대 음악가들이 붙이듯 그녀와의 만남을 운명이라 단정짓고 이 글의 부제를 「운명」이라 붙여봄 직하다.
5학년 때부터는 이전에 왜놈처럼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오곤 했던 훼방꾼 조길태가 졸업한 터라 숙희와의 행보는 평화가 넘쳤다. 적극적인 서울 소녀와 수줍은 부산 소년, 둘은 마치 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주인공처럼 함께 쏘다녔다. 학교 뒷산인 수정산부터 부둣가, 부산진역, 전차, 극장, 만화방, 그리고 멀리 구덕야구장까지 함께한 수많은 기억들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둘은 300미터 남짓한 높이의 수정산을 자주 올랐다. 토끼풀로 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주고받고, 퐁당퐁당 돌을 던지며 시냇물을 멀리 퍼지게 했다. 푸른 잔디에 누워 쳐다보던 새파란 하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둘은 함께 누운 채 동요 「푸른 잔디」를 불렀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 유호 작사, 한용희 작곡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이 대목에서 소녀는 소년의 손을 끄집어 이제 막 피어날 듯 봉긋한 그녀 가슴에 올린다. 그 순간 소년은 얼떨결에 손을 뿌리치고 만다. 둘은 노래도 못다 부른 채 일어섰다. 소년은 한동안 몸을 파르르 떨다가 내달렸다. 등 뒤로 소녀가 내뱉는 말. “이 바보!”
다시 1985년, 그녀가 한 그루 봄이 되어 내게로 왔다. 목련의 계절이 올 때마다 나는 제2외국어 하나쯤은 마스터할 요량으로 종로2가 파고다공원 건너편 일본어 학원을 노크했다. 일과 후 일본어 수강이 벌써 3년째지만 매번 두어 달을 버티지 못했다. 올해는 여하튼 결실을 맺으리라 다짐한 개강 첫날, 나는 뒷자리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성공 행렬의 앞줄에 다가서겠다는 일념으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수업 시작 직전에 수강생들 간의 서먹함을 애써 감추려 연두색 교재를 매만지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피로를 살푼 잠재우고 눈을 뜨자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야, 너 황숙희!”
그녀가 일본어 강사로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18년 만의 상봉. 이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뭉크의 「절규」가 단박에 이해되었다.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숨이 거칠어 졌다. 일순 그녀는 움찔했지만,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기색이다. 예나 이제나 역시 나보다 선이 굵은 친구다. 잊혀진 목소리가 익숙한 목소리로 바뀌어 한 글자도 빠짐없이 내 머릿속에 입력되며 첫 수업이 순식간에 끝났다.
그녀의 다음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초등시절 그녀와의 순수한 사랑을 떠올린다. 나는 주머니에 든 조약돌을 매만지며 소녀를 기다리던 「소나기」 속의 소년이 된다. 또한 눈을 감고 알퐁스 도데의 단편 「별」 중 명문장을 읊조려 보기도 한다.
노새의 발굽에 차여 뒹구는 자갈돌 하나가 내 심장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꿈이 깨질까 봐 꿈쩍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숙희에겐 또래가 흉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친했지만 선뜻 다가설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것을 ‘아우라’라고 일컬었다. 숙희의 손짓, 몸짓, 말투까지 나는 따라했다. 그녀는 내게 떨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함께 뛰놀던 부둣가에서 바라보던 푸른 바다, 수정산의 푸른 잔디와 새파란 하늘은 한없이 나를 설레게 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파란색을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친다. 내가 선택해 몸담고 있는 직장이 파란 피가 흐르는 삼성인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난 그녀를 잊지 않았다. 운명적인 재회를 늘 꿈꾸어 왔다. 자주 되뇌던 그녀의 이름 중 맑을 淑(숙)은 소주를 마실 때도 이슬처럼 맑은 진로眞露만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어릴 적 첫사랑을 선생으로 모셨으니 그녀와 일본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날 우리는 밤새 통음했다.
그녀와의 재회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연두색 교재를 외우다시피 하며 깊이 파고들었다. 공부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그녀에게 빠져들며 매일 한 장의 편지를 일본어로 써서 건넸다. 러브레터인 셈이다.
일취월장한 일본어 실력 덕분으로 일본의 선진 보험사 견학 기회가 회사로부터 주어져 도쿄를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어 실력이 커질수록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커 갔기에 그녀에겐 극존칭 ‘사마’를 써서 ‘희사마’라 불렀다. 그즈음 일본에 대한 나의 개인적 정서도 극일克日에서 지일知日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의 1악장 첫머리 ‘따따따단 따따따단’, 이 8개의 음은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전해진다. 그녀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8개의 단어로 구성해 본다.
초등학교, 야구, 일본, 전학, 푸른 잔디, 1985년, 일본어, 조길태가 그것이다. 8개의 에피소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잘 뒤섞이고 버무려져 그럴듯한 추억담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둘이서 일본어 소통이 제법 자유스러워질 무렵, 운명의 마지막 퍼즐 조길태가 등장한다.
그해 여름, 4개월간의 일본어 중급반 종강을 며칠 앞두고 숙희는 대뜸 “조길태 만나 볼래?”라며 서로의 대화 중 금기시해 왔던 결혼에 대해 입을 연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결혼 유무에 대해선 일체 함구해 온 터였다. 3년 전 조길태와 결혼했는데 가을에 그와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 오래 머문다 했다. 난 까무러칠 뻔했으나 심호흡으로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셋이서 기꺼이 만났다. 실로 20년 만에 만난 그는 낯설지 않았다. 체구는 왜소한 편이었지만 눈은 빛났다. 오랜 공백이 있는 경우 어릴 적 한 동네에서 가까이 지낸 사이였더라도 서로 존대함이 예의일진대 나는 2년 선배에게 의도적으로 어릴 때와 같이 말을 놓았다.
“반갑다, 길태야.” 악수하는 손아귀에 힘을 세게 주며 상대를 제압하듯 꽉 쥔 손을 두어 번 힘껏 흔들었다. 초등 3학년생의 코피를 터뜨렸던 바로 그 오른손은 맥없이 오그라들며 한동안 떨고 있었다. 차 한 모금 후 나에게 가해진 폭력의 이유에 대해 때와 장소, 맞은 부위까지 적시하며 단도직입으로 질문했지만 그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 군대, 사회 어디서건 폭력은 피해자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되지만 가해자는 실제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일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깊이 사과하겠다는 조길태의 말이 이어졌다.
헤어지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연두와 파랑의 숨가쁘고 황홀했던 시간들이 방울방울 눈물처럼 맺힌다. 그래서 첫사랑은 만나지 말아야 할 존재이던가.
그날 이후 숙희로 인해 극일에서 지일로, 급기야 친일까지 갈 뻔했던 일본이 연적 조길태 때문에 다시 싫어졌다. 이는 나의 편협함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조길태와 일본, 가해자와 가해국, 폭력 트라우마와 강점强占 트라우마라는 동질성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나에겐, 일본은 없다.
베토벤을 듣다가 속절없는 시간 앞에서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조우遭遇라는 낱말이 있더군. 신하가 뜻에 맞는 임금을 만나다,라는 뜻. 황선생 만나는 일은 어전에서 성은의 눈빛을 마주하는 듯했다. 조우는 또 우연히 서로 만나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러러 조우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1985. 9
언젠가 다시 그녀를 만날 것을 믿는다. 필연 같은 우연과 운명적인 인연을 믿기에. 하느님은 가끔씩 우리들에게 예기치 않은 선물을 주시기에.
운명 교향곡이 3악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만난 이중섭
2021년 소의 해를 맞이하여 새해 벽두부터 낭보가 날아들었다. 작년 8월 합천에서 기록적인 폭우로 황강 물에 휩쓸려 90킬로나 떠내려갔다가 11일 만에 주인의 품으로 돌아온 소가 암송아지를 출산했다는 소식이다. 어미소는 발견 당시 제대로 못 먹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였지만 뱃속의 5개월 된 송아지는 무사했다. 복덩이 어미소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 번째 기적을 낳은 것이다.
의령에서는 8살 한우가 흰 송아지 한 마리를 출산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머리와 다리를 제외하고 몸 전체가 흰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흰 소의 해에 흰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마을과 군 전체의 경사라며 반겼다.
신축년 새해, 흰 소와 함께 큰 절 올린다.
소 팔아 자식 키우고 소 팔아 대학 보내듯 소는 재산 목록 1호로 부와 풍요의 상징이었으며 우직과 근면의 아이콘이다. 호시우보虎視牛步,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성어로 인간을 가르치기도 한다.
흰 소는 재물과 명예가 찾아오고 신성한 기운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새해 인사와 덕담을 나눌 때 SNS를 통해 가장 많이 주고받는 이미지가 이중섭 화가의 그림 「흰 소」 아닐까. 나 역시 사무실 벽에 이중섭의 「흰 소」를 걸어놓고 흰 소의 상징과 기운을 접한다. 물론 원작은 아니지만 원화를 선명하게 재현한 캔버스 액자에서 명작의 감동을 그대로 느껴본다.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이다. 그가 졸업한 오산학교는 김억, 김소월, 백석을 배출하였는데 전통 있는 명문교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으로 그림에 혼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는 25점의 소 그림을 남겼는데 이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오산학교 4년 선배인 백석 시인이다. 이중섭은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고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시집은 소를 소재로 한 시편들이 많았다. ‘소’ 연작 중 익히 알려진 「황소」는 일본에 둔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반추한다. 고 개를 치켜든 채 토하는 울부짖음은 가족과의 재회를 바라며 힘든 세상을 버텨나가겠다는 굳센 다짐이다. 굵고 거친 필선은 골격과 근육에 힘이 넘치고 희망이 꿈틀댄다. 배경의 붉은 노을이 선연함을 더한다.
「흰 소」라는 제목의 그림도 몇 점 남겼는데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흰 소는 울분이 치민 듯 앞발에 나란히 힘을 모으고 뒷발을 굳건히 내딛은 채 하시라도 튀어나갈 채비다. 꼬리를 한껏 치켜올리고 아랫도리는 성이 단단히 나 있다. 야만성과 광기마저 느껴진다.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화난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소가 살며시 내게 눈을 맞춘다. 맑은 눈망울에 빠져들면 흰 소는 맑음에 눈이 시린 하얀 수선화 같다. 희고 늠름한 선인仙人이다. 소는 이중섭에게 고향이며, 조국이다. 일제의 압박을 잘 견뎌낸 백의민족의 기상이다.
고은 시인은 『이중섭 평전』에서 이중섭이 일생동안 본 소가 우시장의 장꾼들이 본 소보다 많을 것이라 했다. 여러 날을 해가 저물도록 어느 집의 소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소도둑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소는 언제나 이중섭의 자화상이었다. 서귀포로 피난 와서 쓴 자작시 「소의 말」은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시인데 옹색한 피난살이 방 벽에 이 시를 붙여놓았다. 소가 대신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 이중섭 「소의 말」 전문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삶과 예술의 자유를 찾아 1951년 1월 가족과 함께 서귀포로 피난했다. 파랑波浪과 곤궁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그해 12월 부산으로 떠난다. 서귀포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이중섭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1996년 그가 거주했던 초가 일대에 「이중섭거리」를 조성했으며 2002년 「이중섭미술관」을 개관했다.
불운한 천재 화가 이중섭은 짧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갔다.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삶이 서귀포에서의 1년이었다. 겨우 1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네 식구가 지냈다.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찬 없이 밥을 먹고 고구마를 삶아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었지만 이후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기에 비하면 참으로 행복 한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작품의 소재를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서 많이 찾았다. 특히 그는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일본인 아내(한국명 이남덕)를 미친듯이 사랑했다. 그녀는 이중섭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입맞추는 암탉과 수탉 한 쌍을 통해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부부」 등 실제 그가 그린 수많은 작품에 이남덕이 등장한다. 불우했던 그의 생애가 끝난 후에라도 작품들 이 명작으로 인정을 받아 다행이다.
이중섭의 생애에 통영을 빼놓을 수 없다. 통영에서는 1952년부터 2년 가까이 살았다. 「황소」, 「흰소」, 「부부」, 「달과 까마귀」 등 그의 대표작들이 통영에서 탄생했다. 「통영 풍경」, 「충렬사 풍경」등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과 교유交遊했고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술로 달랬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이중섭에 반해 연작시 9편을 남겼다. 아내를 기다리는 화가의 그리움은 캄캄한 밤바다와 같다. 김춘수가 만난 이중섭을 은박지에 새긴다.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오지 않는다고
–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 전문
번개
구름과 구름 사이에 방전이 일어나 번쩍이는 번개는 유독 자연 현상만은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우리 몸에도 전기가 흐르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도 전기가 통한다. 저릿저릿, 움찔, 소름, 전율이란 단어도 몸의 전기적 현상에 의한 떨림을 표현한 것일 게다. 번개는 동작이 아주 빠른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또 예정에 없는 급작스런 즉석 만남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번개같이 찾아왔다. 하느님이 가끔씩 주시는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찾아왔다. 이른바 번개 만남이다. 8월 초순 더위의 절정을 뚫고 창원의 정우현이 거창의 나를 찾았다. 중고교 동창인 우리는 고교 졸업 후 첫 만남이다. 헤아려보니 실로 47년만의 만남인지라 상봉, 해후 같은 단어들이 어울릴 듯하다.
스피드광 우현은 불쑥 전화 한 통 하더니 그의 애마 「VOLVO 크로스컨트리」를 몰고 날아들었다. 이날 나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 중 하나를 만끽한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누추한 사무실에서 차 한 잔 나눈 후 둘은 거창에서 무주로 곧장 넘어간다. 이 역시 불시 방문이다. 그곳엔 중학교 동창 정차균이 「설국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와의 만남은 50년 만이다.
‘설국雪國’. 참 좋은 이름 아닌가! 한여름에도 겨울의 눈 덮힌 덕유산, 새하얀 눈의 나라를 즐거이 상상해 본다. 차균의 아내가 이 펜션의 시그니처 메뉴인 팥빙수를 차려오기가 무섭게 한 그릇씩 뚝딱 비웠다. 오랜 공백 후 나누는 소회가 팥빙수처럼 시원하고 달달하다. 중학 시절 교복 단추 2개는 늘 풀고 다녔다는 차균은 여전히 자유인의 풍모를 보인다.
펜션을 둘러본다. 객실 이름이 특이하다. 솔제니친,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버트런드 러셀 등 14개 모든 객실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손님들을 위한 환대가 가히 노벨상 감이다. 문호들의 이름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내 문학의 키가 훌쩍 커진 듯하다. ‘설국’이라는 상호 역시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어떻게 연고도 없는 이곳 무주에서 펜션 사장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5년 전 서울서 통영 가는 길에 우연히 들러 이 펜션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덕유의 풍광에 매료된 데다가 좋은 공기만 마셔도 1년 치 연봉은 되겠다 싶어 덜컥 인수를 했단다. 충동구매다.
우현, 차균과의 오늘 만남이 예정에 없던 번개이듯 그의 펜션 소유 또한 이와 다름 아니다. 산봉우리 풍경이 마음을 흔들 때가 있다. 나뭇가지 하나가 삶의 모서리를 툭 하고 칠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소함이 가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제도권과 조직 문화에 길들여지고 주어진 길에만 익숙한 나로서는 그의 즉흥과 파격의 용기가 부럽다. 이렇듯 우연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무주까지 이어진 우현의 거창 방문은 내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함께 온다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문득 떠올랐다. 찌는 듯한 더위에 그의 일생과 함께 온 우현의 광폭 행보가 고맙다. 둘은 서로를 격하게 환대했다. 불과 5시간 동안 지난 50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잠깐 스치고 지나는 만남이 아니라 서로의 일생을 관통하는 만남이다. 다 털어놓아도 부끄럽거나 아깝지 않은 진실된 인연임을 증명이 라도 하듯 서로의 존재를 이해했고 서로의 세계를 공감했다.
이제 바람이 마음을 더듬는 듯 정우현을 만나보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제약회사 신입 사원이 음악 공부를 위해 홀연히 독일로 유학을 떠나자 사람들은 제정신이냐며 몹시 의아해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번듯한 외국계 제약회사의 잘나가는 인재가 서른다섯 나이에 욕지도에 약국 개업하러 내려간다고 하니 아내는 정말 그 먼 섬으로 이사 가는 것이냐고 몇 번씩 되물었다. 욕지도는 통영에서 뱃길로 당시에는 2시간이나 걸리는 섬이다. 동료들은 섬으로 귀양 가는 것마냥 안쓰러워했다.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으로 쉬운 결정이 아닐진대 어릴 적부터 독실한 개신교 신자임에도 신앙의 배를 갈아탔다. 그 후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신자 회장으로 빛과 소금을 실천하고 있다. 창원대학교 음악대학 지휘 전공 대학원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기도 했는데 63세 때 일이다.
지금 그는 창원의 「이레약국」 약사다. 약사라는 하나의 타이틀만으로는 부족한 통섭형 인간이다. 익숙함과의 결별, 낯설게 하기, 파격과 자유를 일찍부터 아는 친구다. 둘 사이의 오랜 공백을 깬 것은 고교 동기 밴드에 우현이 올린 글이다.
저는 2박 3일 일정으로 30년 전 처음으로 약국을 개업했던 욕지도로 여행을 떠납니다.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 하기 위해 14개의 꼭지글을 준비하고 생각을 정리할 계획입니다. 1991년 중외제약 사보에 기고했던 글을 온 약국을 뒤져 발견했기에 올려봅니다.
중외제약 사보 「중외약보」는 1991년 6월호 기획 특집으로 「소외된 사람과 함께하는 약사」를 마련했다. 거기에 실린 우현의 기고문 중 일부를 발췌한다.
욕지도는 볼락 낚시와 흑염소, 고구마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이 소문나 있다. 그러나 배편이 많지 않고 고르지 못한 일기로 며칠씩 발이 묶이기 때문에 낚시꾼들을 제외하곤 외지인들의 발길이 뜸해 그야말로 외로운 낙도인 셈이다.
욕지도에 온지 일 년이 넘었지만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 나를 따르고 의지하는 주민들의 믿음은 나를 전혀 피곤치 않게 해주며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할 버팀목과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약국은 밤새 셔터를 내리지 않는다. 새벽이나 한밤중에 환자가 찾아왔을 때 다시 여는 것이 귀찮기도 하거니와 바깥의 인기척을 더 잘 듣기 위함이다. 그러나 7살 난 아들 승훈이는 이것이 큰 불만이다. 아마 약국 일을 마치고 아빠가 혼자 어디 놀러 나갈까 봐 불안한 모양이다. 그래서 매일 저녁 “아빠, 약국 문 뻥(셔터 내리는 소리) 하자.”는 아들 녀석과 다투게 된다.
여기 와서 구입한 오토바이는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오토바이 덕분에 거동이 불편하거나 원거리에 거주하는 환자의 왕진 서비스가 가능하고 뱃머리에 도착한 약을 실어오는데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다. 가끔 연로하신 할머니나 할아버지 환자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하는데 아내는 이를 못마땅해 한다. 약국을 비운 사이 아내 혼자 약국 지키는 것이 불안하고 노약자를 태우고 가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얼마 전 이곳 보건지소 공중 보건의들이 모두 바뀌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바뀌는 셈이다. 다행히 나보다 훨씬 연하인 이들 모두가 나를 선배로서 깍듯이 대해주며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왕 먼 곳까지 왔으니 배움과 사회적 혜택이 많은 우리들이 여기에 머무는 동안 아낌없이 베풀고 일하다가 떠나자는 의견에 그들은 동감한다. 일과가 끝난 후에도 내가 처리하지 못한 환자를 보내면 불평 없이 받아주는 것이 무척 고맙다.
며칠 전 밤늦은 시간, 집에서 해산하려는 산모를 위해 보건소 윤선생과 함께 그 어두운 산길을 오토바이로 달려가 2시간 넘도록 땀 뻘뻘 흘리며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낸 적이 있다. 산모와 아이가 무사함을 확인 후 돌아올 때 스치던 새벽 공기의 상큼함과 가슴속의 뿌듯함이란… 작년 여름에는 서울서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 및 의료 봉사 차 40명이나 다녀갔다. 정말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언제 욕지도를 떠날지를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섬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아직까지는 이 섬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내 자신이 이 섬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욕지섬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아내가 고맙다. 서울에서만 살아온 여자로서 이 먼 곳, 외 딴 곳에 불편하고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불평 한마디 않고 도와준다. 아이는 그저 신이 나서 뛰어노느라 오늘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게 잡으러, 개구리 잡으러 간다며 마음껏 뛰논다.
– 통영 욕지도, 서울약국 약사 정우현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가 떠올랐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는 말을 따라 우현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먼 바다와 섬을 찾은 것이다. 그는 다가올 폭풍우와 거친 파도 등 바다의 무서움과 망망대해 속 섬의 외로움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하얀 날개가 물결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바다 위에 뜨는 달과 섬에 피는 꽃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 섬에 감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간극보다는 공감과 유대, 그리고 스스로의 구원에 무게를 둔 것이다.
서울에서 정주와 안주의 삶을 마다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웃이 된 섬마을 약사님, 그가 선택한 길을 숨가쁘게 읽었다. 즉시 장문의 답글을 달았다.
내 고향도 통영인지라 우현의 글이 큰 파도가 되어 가슴에 인다. 통영은 모교 교가를 작사 작곡한 유치환, 윤이상뿐만 아니라 유치진,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전혁림 등 불세출의 예술가들을 남겼다. 욕지도에서 수년 간 머물며 큰 족적을 남긴 우현에게서 통영에 잠시 머물면서도 역작을 남긴 백석과 이중섭을 본다. 우현은 둘의 풍모를 닮은 듯하다.
고교 졸업 후 우현과 함께한 적이 한번도 없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사보 특집 「소외된 사람과 함께하는 약사」를 뛰어넘는 존재다. 지금은 2천명으로 줄어든 당시 인구 6천명의 섬에서 그가 헌신한 시간들은 섬김과 받듦의 역사다. 겨울 새벽바람에도 문턱이 없는 옥호 「서울약국」은 24시간편의점의 원조이자, 환우뿐 아니라 섬마을 주민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는 성소聖所다.
천 걸음이든, 오토바이든, 섬 구석구석까지 닿는 소위 찾아가는 의료 서비스를 누구보다 일찍 그는 실천했다. 시골에는 ‘서울대 출신 약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외롭다. 내가 머무는 거창에도 고교 1년 후배인 서울대 출신 약사가 있기에 익히 아는 바,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들에게 외딴 섬 약사의 안분지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부러움이자 비록 친구지만 존경의 대상이다.
미소를 머금고 문진, 처방, 첩약하는 지문 닳은 따뜻한 손길이 눈에 선하다. 그의 상술 아닌 인술은 큰 파도 되어 우리네 마음을 흔들고 욕지섬을 넘어 세상에 크게 울려 퍼진다.
다시 그리운 섬을 찾아 2박3일 동안 전개할 인생의 전환이 자못 궁금하다. 우현의 또 하나의 영혼이었던 음악처럼, 법적 노인의 대열에 합류한 우리들에게 저편 저 너머 새로운 세상을 힘차게 지휘해주기 바란다.
살아가다 보면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많다. 무언가를 결심하고 결정해야 할 고뇌의 순간들이 있다. 짜장면과 짬뽕, 프라이드와 양념 치킨을 앞에 두고서도 결정 장애가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현은 인생의 중대한 결단의 순간에 머뭇거림 없이 과감하고 빠르다. 사람 마음은 부산 앞바다보다 넓다가도 집 앞 실개천보다 좁아질 때가 있는데 그는 선이 굵고 거침이 없다.
중고교 시절 그는 운동에도 탁월했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어 1번 자리는 늘 비워 둘 정도로 친구들이 부러워했는데 그는 번개처럼 날래고 빨랐다.
그는 음악의 길을 갔다. 독일에서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의 음악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학창 시절 서울대 합창부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그의 글 한 구석에서 찾을 수 있었다. 창원의 국회의원이었던 중학 동기 노회찬이 2018년 생을 마감하자 우현은 「그리운 사람, 노회찬」이란 타이틀로 추모 음악회를 기획하여 창원 윈드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림도 30여 점 소장하고 있는 바 음악, 미술, 신학, 문학, 철학을 넘나드는 그의 미학적 수준을 가늠할 만하다.
그의 변신은 자로 잰 듯 살아가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으로 쩌릿쩌릿한 감동과 전율을 안겨주지만 자신에겐 만만치 않은 고독의 여정이다. 하지만 보통 세상과 거리를 둔 광야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변신의 순간마다 삶의 외연은 넓어만 간다.
우리 삶엔 ‘우연’이라는 묘한 단어가 있다. 우연히 접한 그의 욕지도행 글 한 편으로 이렇게 긴 졸문 하나를 성취한다. 예비하지 않은 우연한 만남이 번개 치는 우정으로 변한다. 친구들끼리 “언제 밥 한번 먹자.” 하고 나면 자꾸 미루게 되어 한 해가 금세 지나가지 않던가.
번개는 바로, 즉시, 지금 당장이다.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칫 행하기 쉬운 막행막식이 아니라 스피드가 생명인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삶의 방향이기도 하다.
방금 번개같이 우현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 하나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다.
‘Just Go’

여름밤을 훔치다
무려 한 달 동안 원룸 게시판을 달구어 온 입주민 A와 B의 층간소음 공방이 올여름을 더욱 뜨겁게 했다.
A 부탁드립니다. 밤늦은 시간 소음으로 인해 고통과 짜증을 느낍니다. 수면에도 방해가 됩니다. 좀 조용하게 사랑을 나눠주시면 고맙겠습니다.
B 방음이 잘되는 아파트에도 코 고는 소리 정도는 용인됩니다. 어느 정도의 소음은 감안하고 원룸에 입주하신 것 아닌가요?
A 집은 휴식과 안락의 공간입니다. 일터에서 돌아온 후 지친 몸을 충전하는 장소입니다. 못 하나 박는 것도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특히 심야에는 정숙을 유지하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B 네, 그렇죠. 집은 조용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이지만, 새가 깃드는 둥지처럼 일과 후 가족 간의 따뜻함을 느끼고 존재감을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강아지 소리도 용서되는 세상에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그렇게 거슬렸나요? 혹시 불륜동의 모텔이라도 상상되셨나요? 댁은 사랑을 어떻게 속삭이나요? 이불을 덮어쓰나요, 입에 타올을 물리나요?
A 비약이 지나치군요. 저는 공동주택 거주자로서 서로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범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공동주택규약에 따르면 입주자는 아이들 뛰는 소리, 문 닫 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 기타 소음 등으로 이웃한 세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정이 안되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죠.
B 법을 존중하시는군요. 그러나, 연립주택 등 50세대 이하의 공동주택은 주택법시행령에 따른 공동주택규약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리고 저는 일정액의 보증금에다가 월세를 꼬박꼬박 잘 내고 있는 성실 세입자입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주거 생활을 침해 받지 아니할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애로가 있으면 그 놈의 법 이전에 계약 당사자인 원룸 주인을 통해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A 저는 ‘부탁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첫 번째 메모 한 장이면 얼굴도 모르는 이웃간의 일이 금방 풀릴 줄 알았습니다. 서로에게 부끄럽고 무안한 일이라 그냥 잘 넘어갈 줄 알았죠. 이제는 법의 힘을 빌리든지 아니면 민원이라도 넣어야할까요?
B 그래요. 법에 호소하세요. 경범죄처벌법에 ‘인근 소란’이라는 조항이 있고, 피해가 심각하다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합니다. 야간에 45데시빌 이상의 소음이 5분 이상 계속되면 소음·진동 분쟁을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녹취 등의 증거를 마련하여 관할 관청에 민원을 제기하세요. 스스로 입증을 못한다면 이사를 가시든지요.
A 그렇게 정당하고 당당하시면 귀하의 실명과 호수를 밝혀 주실래요?
소음의 고통과 자제를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벽과 바닥을 사이에 둔 익명의 전쟁은 더위가 수그러들 즈음 중단되었다. 돌싱녀로 여겨지는 손글씨와 신혼남으로 추정되는 활자체가 아직도 내 눈 앞에 교행하고 있다.
일곱 평 작은 집에서 훔쳐 듣고 훔쳐 본 큰 싸움… 일주일에 두어 번 주고받듯 나붙은 게시판 편지는 한여름 밤 나에겐 작은 열쇠 구멍, 아니면 반투명 창이다. 짧은 밤을 즐기는 관음이다.
시래기
한겨울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겨울나무 같은 친구다. 지금도 나무에 깃들어 사는 그에게 뜨거운 차 한 잔 따라주고 싶다. 내 고향 통영의 시락국 한술 같이 뜨며 찬바람에 배배 말라가는 그의 시래기도 함께 말고 싶다.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
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
배배 말라가면서
그저,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 윤중호 「시래기」 전문
윤중호 시인은 2004년 49세로 작고했다.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시집 4권을 남기고 반세기를 채우지 못한 채 갔다.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으로 살다간 그를 추억한다. 충청북도 영동 산골이 고향인 윤중호는 바다를 좋아했다. 오륙도와 광안리 앞바다를 소주병에 담고 거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동갑내기 그는 군대 친구다. 1979년, 나는 전투경찰로 부산 기동대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그 시절 일기장을 들추어보면, 유신 독재로 정국이 경색되고 부산 지역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예상되자 시위 진압 부대의 증원을 위해 그해 2월 충청 병력 67명이 합류했다. 부여에서 근무하던 윤중호 상경도 그 일원이었는데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작은 체구에 맑은 눈의 그는 착하고 후덕한 성품을 가졌다. 전투경찰 역시 나름 빡센 기수 문화가 있었고 그는 나보다 2기수 빠른 고참이었으나 서열에 개의치 않고 비 올 때 함께 비를 맞는다는 동지애를 앞세우며 고참으로서의 지분을 많이 양보했다. 평생을 낮은 곳과 약자 편에 선 그의 배려심은 군에서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문학에도 계급이 있다면 나는 말단 졸병이고 그는 별을 몇 개나 단 장군이다. 고작 고참들 연애편지를 대필하거나 당시 성인용 오락 잡지 『선데이서울』 모퉁이의 독자란에 투고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나의 잡문에 비해 그의 글은 결이 달랐다.
윤중호는 숭전대(현 한남대) 영문과에 입학한 후 「여명문학회」라는 문학 서클에서 훗날 큰 시인의 바탕을 다졌다. 당시 서클 지도 교수였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과 사제지간의 연을 맺어 본격적인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문학성이나 문단의 위치는 차치하고 ‘윤중호’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설레고 저릿하다. 군 생활 중 9개월을 그와 한 공간에서 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흥감하다. 사람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그의 사람 됨됨이를 이렇게 추억할 수 있어 행운이다.
충청도 출신 셋과 부산 사나이 넷, 모두 일곱 명의 대원들은 기수를 불문하고 자주 어울렸는데 그는 뭔가 남달랐다. 나무 같은 친구인 그에게 우리는 많이 기대었다. 군 생활 하루 하루가 무료한 대원들에게 그는 2월 전입 때부터 11월 전역할 때까지 철따라 색다른 그늘을 연출했다. 누구 한몸 누이는 그늘이 아니라 모든 이의 그늘이 되어주는 큰 나무였다.
싱긋하는 미소가 매력적인 그는 말수가 별로 없었다. 수줍어하거나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내공이 쌓인 결과 말을 아낄 뿐이다. 감수성 예민한 시절 몇 차례 가출 끝에 급기야 머리를 깎고 잠시 암자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깨달음에 미리 눈을 떠 이미 구도의 길을 가고 있었기에 현실에 매여 있는 우리 같은 먹물에게는 그냥 비죽이 침묵하고 있었을 터이다.
그의 이바구는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라는 명목으로 평생 우려먹는 식상하고 뻔한 레퍼토리가 아니라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주제인지라 우리들은 하염없는 군 생활에 허물어져가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충청도 사람 특유의 농이나 능청, 넉살 대신 넙죽 미소 지으며 툭툭 던지는 말은 짧은 시처럼 울림이 컸다. 좋은 시 한 편은 좋은 선생님 한 분을 모셔오는 일이기에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가 뱉은 말은 군대 빳다처럼 묵직한 깨달음으로 꽂히고 후줄근한 정신의 옷깃을 빳빳이 세우게 했다.
말년에 이를수록 우리들은 전역 후의 복학, 학업, 연애, 취업 등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했지만 그는 이러한 세속에 눈을 반짝거리지 않았다. 늘 책을 붙잡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으며 낮은 포복 자세로 밑바닥의 약자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연애편지나 끄적일 때 그는 「용호 2동」이란 시를 썼다.
흐드러지듯, 흰 날갯짓에 묻어나는
가벼운 현기증
노란 취기의 아지랭이에, 아찔한
겨울초 꽃
열 개의 손가락으로 열을 셀 수 없는 자들이거나
네 개의 손가락으로 열을 셀 수 없는 자들이거나
꿈을 버려야 사는 자들이, 한 움큼씩
꿈붙이에 실려주는,
헐리운 생선횟집의 담장 근처나
천주교 공원묘지의 천사상 주위로
심심하게, 서성대는 바람
동백섬은 붉게 타는데
잃어버린 여섯 개의 손가락이
유난히 시려운 새벽 바다가
불끈 적셔내는, 샛노란
겨울초 꽃
– 윤중호 「용호 2동」 전문
그가 부산기동대에 근무할 때 쓴 시다. 부산시 용호 2동에는 당시 나환자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오래 전 나의 일기장 속에 그곳의 기억이 숨어 있다.
1979년 3월 14일 (수) 흐림
기동대 출범 후 한 달 만에 첫 출동이다. 용호동 용호농장의 미감아 취학 문제를 둘러싸고 관할 용산국민학교의 학부모들과 농장 주민들이 대치하고 있으나 뚜렷한 수습책이 없어 취학 거부 소동은 장기화 될 것 같다.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도무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용호농장의 회색 집들이 스산하다. 봄이 왔으나 용호동은 온통 회색빛이다.
우리는 그곳을 ‘문촌’이라고 불렀다. 문둥병, 나병 환자로 불려진 부산의 한센병 환우들은 산과 바다로 가로막힌 용호동의 비탈진 땅에 터를 잡았다. 이들을 치료하는 국립용호병원이 자립형 「용호농장」으로 바뀌면서 한센인들은 돼지와 닭을 키우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훗날 이 버려진 땅마저 투기의 대상이 되어 그들은 다시 내쫓기는 아픔을 맞는다.
눈앞의 오륙도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위해 마치 기도라도 하듯 용호농장을 향해 줄지어 있다. 용호농장에 출동한 윤중호 대원은 점점이 떠 있는 여섯 개의 섬을 한센병 환우가 잃어버린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보았을 것이다.
대치 상황이 길어졌다. 한센인 자녀들은 아직 감염이 안된 미감아未感兒라 불리며 사회적 차별을 크게 받는다. 3월이 되자 용산국민학교 입학을 반대하는 용호동 주민들로부터 등교 거부 및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양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갈등을 풀어내는 타협의 기술이 필요했다. 출동한 우리들은 편견으로 고통 받는 한센인들부터 다독여야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살다 보면 먹거리로 인해 드라마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지루한 대치가 길게 이어 지던 중 뜻밖에도 용호농장의 과년한 처녀 두 명이 삶은 계란을 넉넉히 들고 기동대 버스를 찾아온 것이다. 깜짝 방문에 다들 놀라고 울컥했다. 그들은 적이 아니라 함께 품고 안아야 할 누이들이었다. 그날 이후 적절한 치료를 하면 완치가 가능하고 전염되지 않아 격리가 필요없는 한센병에 대한 편견을 대원들 스스로 깨기 시작했다.
며칠 후 야간 근무를 틈타 윤중호와 나는 답방 사절이 된다. 취학 어린이들을 위한 빵과 과자를 가득 사들고 농장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재회했다. 인사를 건네기 전 손부터 덥석 잡았다. 일그러진 마음을 다독이며 우리들은 서로에게 빠져 들었다. 주위를 서성이던 바닷바람이 선남선녀들에게 술을 부추긴다. 소록小鹿, 작은 사슴의 눈망울을 닮은 그녀들과 밤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나누었다.
용호농장은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와 갈매기, 동백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왼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두 명의 기녀가 왜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내렸다는 이기대, 오른편에는 흰 구름이 쉬어가는 백운포와 신선들의 놀이터인 신선대가 자리한다. 천혜의 비경인 이곳에서 넷은 허연 슬레이트 지붕의 홈을 타고 곱게 내려오는 달빛에도 흠뻑 취했다. 슬픈 숙명의 누이들을 보듬고도 흠씬 더 껴안아 주고픈 밤이었다. 밤새도록 마셔도 목이 말랐다.
그해 10월이 되자 조용했던 부산의 대학가는 최루 가스와 함성으로 뒤덮힌다. 기동대원들의 손에는 민중의 지팡이 노릇을 하던 질서 유지용 짧은 경찰봉 대신 시위 진압용 곤봉과 방패가 들려 있었다. 유신의 절정에서 부마항쟁 시위 진압 임무를 맡은 윤중호 대원은 전역을 불과 1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는 타격대의 최선봉에서 부마항쟁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체험했지만 고뇌의 눈빛이 역력했다. 적이 아닌 학생, 시민들과의 힘겹고 괴로운 싸움이었다. 본연의 임무와 의로운 양심 사이에서 갈피를 잡아야 했다. 곤봉과 방패와 최루탄으로 사력을 다해 시위대를 막아야 했고, 속으로는 ‘독재 타도, 유신 철폐’라는 시민들의 외침을 응원하는, 어쩔 수 없게 운명 지어진 시간이었다. 그는 자비 없는 과잉 진압을 경계했고 후배 대원들에게 비폭력 진압을 주문했다. 막다른 길로 쫓기 던 시위대를 몰래 숨겨주기도 하고 연행하던 다친 대학생을 풀어주기도 했다. 약자에 대한 연민은 용호농장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1979년 11월에 전역한 윤중호는 다음 해 안면도 소재 「누동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태안군 안면읍 누동리의 누동학원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이 힘든 학생들을 위한 재건학교다. 그는 1980년 3월부터 6개월 동안 그의 말처럼 해 지는 곳에서 새벽을 기다리고, 해 지는 곳에서 아이들의 새벽꿈을 키웠다.
언덕은, 올라가도
올라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까치발을 선 채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눈을 감고도 보는 법을 배운 것은
여기, 이 언덕을 다 올라오고서부터이다.
다락 같은 운동장에 모여
잔바람에도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마다
풋보리 피는 소리에
얼굴이 까맣게 타서, 우린
손을 잡고 웃었다.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예쁜 수염을 휘날릴 줄 아는 강냉이에 싸여, 우린
얼굴을 가리지 않고서
하늘을 보는 법을 배운다.
– 윤중호 「언덕의 얘기들」 부분
그는 사람과 삶에 대해 관심이 많은 친구다. 자신의 삶보다 타인의 삶의 현장에 천착했다. 제대 후 복학한 우리가 공부와 취업 준비에 정진할 때 그는 복학을 미룬 채 소외와 가난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그를 필요로 한 곳으로 달려간 것이다. 누동학원에서의 생활은 6개월에 불과했지만 그곳의 제자들은 교사가 꿈이었던 그를 평생 스승으로 여길 것이다.
그가 겨울나무처럼 서 있다. 벌거벗은 채 서 있어도 쓸쓸하지 않다.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다. 고단한 삶을 덤덤한 필치로 그린 박수근 화백의 「나무」를 닮았다. 박수근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 전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펀치볼 시래기」 산지다. 필연처럼 박수근의 시래기와 윤중호의 시래기가 오버랩 된다. 큰 나무는 겨울이 되어서야 가지를 다 드러낸다.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빛을 발한 박수근의 그림처럼 윤중호의 시편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빛날 것이다.
『고향 길』. 2005년 윤중호 시인의 1주기를 맞아 발행된 유고 시집이다. 그의 스승 김종철은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호평했다.
“윤중호 시인은 사람을 아끼는 것이 제일이라는 믿음에 투철했고, 무엇보다도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에 행복을 느낀 철저한 ‘비근대인’이었다. 시집 『고향 길』은 한국 현대시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드물게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크게 보면 백석의 『사슴』이나 신경림의 『농무』의 맥을 잇는 세계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 시집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나무가 봄을 맞이할 시간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에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복합 문화 공간 「책마을 해리」가 있다. 15만권의 책과 함께 하는 3천 평의 공간은 하루 종일 머물고 싶은 곳이다. ‘아무 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스스로 바랬던 윤중호의 흔적을 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을 만든 책마을 촌장 이대건은 윤시인의 제자다. 그는 윤중호 시인을 기리는 공간인 「시인의 집」을 지어 생전에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이대건은 윤중호를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한다.
“자본 만능 시대에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풀 한 포기의 생명이 왜 소중한지, 소외된 약자들을 따뜻하고 겸손하게 보살피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히말라야시다 나무로 만든 「윤중호 시비」가 있다. 그가 나무처럼 서 있는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시래기」를 새겼다. 몸통을 다 내주고도 시래기를 남긴 푸른 무청을 생각한다. 따뜻한 죽 한 그릇으로 살다간 친구 윤중호를 그리워하며 이 졸문 한 편을 그와 나의 푸르렀던 20대에 바친다.
■ 윤중호
1956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삶의 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격월간 『세상의 꿈』을 창간했고, 잡지사 기자와 출판사 편집장을 지내며 시와 동화를 썼다. 2004년 췌장암으로 영면했다.
<시집>
- 본동에 내리는 비(문학과지성사, 1988)
- 금강에서(문학과지성사, 1993)
- 청산을 부른다(실천문학사, 1998)
- 고향 길(문학과지성사, 2005)

4부 행간
행과 행 사이의 여백에 속내를 다 드러낸 채 양껏 담아 채우고, 쉼표 앞에서도 속도를 드러내고야 마는 내 과욕의 글쓰기
저편, 저 너머
상상은 즐거우며 미래를 부르고 마침내 현실이 된다. 생일을 축하하는 꽃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받았을 때 꽃 향기가 묻어난다면… 시 한 편 읽어주는 영상을 보냈을 때 그 시에 걸맞는 향기와 함께 시인의 인품까지 배달된다면… 이런 가벼운 상상 속에서 화향백리, 문향천리, 인향만리의 진경들이 자연스레 피어난다.
첫 시집 출간 후 시집을 받은 지인이 답신을 보내왔다. 시인이 아닌 평범한 주부가 졸시들을 완독한 직후 「위안부가 되고 싶다」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보내온 것이다.
욕실 거울 앞에
한 그루 아름다운 봄이 조신하게 앉아 있다
나는 기꺼이 위안하는 아낙이 되고 싶다
기꺼이, 라는 긍정의 부사를 립스틱처럼 갖고 놀며
마른 입술 칠하듯
내 영혼을 판 당신의 시 한 편
빨갛게 필사하고 싶다
샘이란 이름의 변기 위에 웅크린 꽃잎
어둠에 눈물 흘려야 빛나는 초 한 자루 되어
거울 속 스러져가는 중년의 그믐달
환하게 부풀리고 싶다
타 흘러내리는 촛농에도 나는 뜨겁지 않다
제법 도발적인 전개에 짐짓 놀라며 답신을 보냈다.
위안부라는 시대적, 사회적 통념의 소재를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낯설고 새로운 시선으로 그려냈군요. 전복적 상상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우리들에게 고정 관념과 기성 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생각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법과 도덕, 관습을 초월하고 현실에 굳어버린 감각과 사고방식을 거부하며 기존의 틀을 깨뜨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시가 쉽게 읽히지 않고 그림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관련하여 뛰어난 예술가로 파블로 피카소를 손꼽는다. 피카소는 무엇이 남달랐을까?
『예술 수업』의 저자 오종우 교수는 피카소가 열차 여행을 할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객실에서 피카소를 알아 본 남자가 그를 반기면서 “왜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피카소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오히려 그 남자에게 되묻는다. “사실적이라 함은 어떤 것인지요?” 남자는 즉시 지갑에서 아내의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피카소는 말하기를 “당신 아내는 매우 납작하군요.”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 받는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했는데, 그의 실험적 도전은 예술 개념 자체에 혁명 같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은 창작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 기성품Ready Made 변기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현대 미술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뒤샹은 흔한 것들을 새롭게 보라는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준다. 낯설고 새롭게 보기와 자세한 관찰은 영감과 상상력으로 이어져 또 하나의 독창적 예술에 닿는다.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질문에 마르셀 뒤샹을 언급한다.
“음악은 규율, 박자, 음정 등이 수학 공식처럼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 그에 반해 미술은 자유롭지. 현대 미술의 공식을 깨준 마르셀 뒤샹의 변기를 봐. 정교한 그림만을 미술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지났다는 거야.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은 화투 그림도 당초에 내가 콜라주로 만든 작품이었어. 화투를 잘라 붙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랬어. 조수에 부탁해 똑같이 그려라 했는데 조수 기용 여부를 따진다? 현대 미술에서는 정말 유치한 얘기야.”
흔한 소변기 하나로 미술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뒤샹은 기성품인 물감으로 그린 그림 역시 기성품이라 일갈한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며 변화한 인물이다.
내겐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해소된 셈이지만 ‘이것이 과연 그림이고, 예술인가?’라는 의문이었다. 중학교 미술 시간, ‘고흐’라는 별명을 가진 미술 선생님은 예술의 전복적인 힘에 대해 일례를 든 듯하다. 그러나 그때는 어린 치기로 저 그림 정도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거장들의 비현실적이고 비사실적인 대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기억을 더듬어 중학 시절의 미술 수업을 재구성해 본다.
어느 화가가 큰 작업실 공간에 벽과 천정을 하얀 화선지로 도배하듯 붙인 다음 말 한 마리를 들여와 꼬리에 먹물을 잔뜩 묻혀 강하게 채찍한다. 사방팔방으로 튄 검은 먹물들은 백지 위에 제법 그럴듯한 비구상 그림으로 태어나는데, 이것을 화가가 적당하게 구분해 잘라내어 무제Untitled 1, 2, 3, 4… 식으로 제목을 붙이면 추상화 몇 점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감상자의 몫. 더구나 「무제」로 이름 지어졌기에 사람들은 좀더 독자적인 감상과 해석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하얀 눈밭 위의 어지러운 발자국 또는 쉼표, 마침표, 느낌표 등 문장 부호들의 조합이나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피와 땀의 결정체 등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있다. 굳이 땀흘린 붓으로 공들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작가와 교감한다.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미술의 힘이다.
전복적 상상력과 관련하여 잠시 눈을 국내로 돌리면 조영남과 더불어 또 한 명의 다빈치형 천재인 김창완을 빼놓을 수 없다. 또래보다 두 살 빨리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기타를 처음 잡은 지 한 달 만인 대학교 1학년 때 곡을 쓴 그는 1977년 「아니 벌써」라는 노래로 대중 앞에 불쑥 나타나 가요계의 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해 한 해 동안 무려 네 개의 앨범을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한번도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기시감’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그의 노래에 환호했다. 김창완 음악의 요체는 상상력과 자유, 파격과 실험 정신이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사운드와 가사에 사람들은 전율했다.
그의 어린 시절 일화 한 토막.
창덕궁 사생대회에 참가한 김창완 학생은 혼자 빈둥빈둥 놀다가 그림 제출 마감 시간이 임박하자 도시락에 남은 밥풀을 도화지에 문질러놓고 그 위에 낙엽을 뿌려서 뒤엎은 후 발로 밟아 제출해 큰 상을 받는다. 그림 제목은 「가을」, 전복적 상상력의 전형이다. 자칭 괴짜 김창완은 가수, 작가, 작곡가, 연기자, 라디오 DJ 등 전천후 만능 예술인의 길을 지금도 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의 예술가들은 실제적, 사실적 현실 세계에 머물지 않고 창의적, 창조적 상상의 세계를 추구한다. 기존 삶의 방식에 안주하거나 정주하기 보다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노마드적 모험을 택한다. 현실의 대상물을 보고 느낀대로 즉시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아 두고 익히고 삭히면서 감동을 재현한다.
사물을 옆과 뒤, 위아래에서도 관찰하며 사물 안으로 들어가서 보기도 하는데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 사물이 되기를 감행한다. 그들은 생각의 틀을 저멀리 높이 딴 곳으로 옮긴 후 제재를 축소, 확대하거나 생략, 비약시킨다. 또 비틀고, 뒤집고, 자르고, 붙이고, 부수고, 녹이면서 독창적인 변형과 변신을 꾀하는데 이러한 제 과정을 관통하는 단어는 ‘상상’이다.
Beyond. 저편, 저 너머.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힘, 이것이 예술이다.

마음속의 작은 방
만추가경晩秋佳景.
늦가을의 아름다운 경치는 글 속에도 있다. 국화차 한 잔 마시며 인터넷 웹사이트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중 「인생의 주소」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글이 여기저기 곳곳에 단풍잎처럼 매달려 있어 글 이파리 하나 따와서 옮긴다.
인생의 주소
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만 줄을 선다
아! 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인 것을
이른 아침 커피 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커피 한 잔 값을 치르기 위해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는 순간 계산대 남자 직원이 말했다.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가세요.”
여인이 잠시 멈칫하자 직원은 다시 큰 소리로 말한다.
“제가 사는 겁니다.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녀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빵을 들고 나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그 직원에게 말했다.
“생일날 좋은 일을 하셨군요. 멋집니다. 생일 축하해요.”
그가 고맙다며 미소를 짓자 옆의 직원이 말하길
“가난한 사람이 오는 날은 언제나 이 친구의 생일이에요.”
나는 커피 값을 계산하며
“거스름돈은 안 받겠소, 그건 당신 몫이에요.”라고 했다.
“손님, 하지만 거스름돈이 너무 많은데요.”
“괜찮아요, 젊은이.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하하.”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인 만큼 그리 길지 않다. 매일매일 생일처럼 살아가는 그 청년의 넉넉한 마음이 부럽다.
문무학 시인의 「인생의 주소」라는 시와 함께 시작한 이 글은 가을 끝자락의 커피처럼 따뜻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에겐 인생 최고의 커피 맛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생일처럼 살아가는 청년으로부터 여여한 실천적 삶을 배운다. 아침 일찍 너절한 행색의 손님이 나타나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짜증스럽게 맞이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돈으로 셈할 수 없는 귀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한 청년의 아름다운 마음이 늦가을의 중년을 울린다. 어쩌면 고뇌와 절망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오히려 어른들을 위로하고 있다. 단 한 잔의 커피를 주문한 우리들에게 그는 인생의 주소를 짚어주며 삶의 여백을 사랑으로 채울 것을 주문한다.
나도 느지막이 철이 들면서 날마다 생일처럼 지내보겠다는 염원으로 생일날 끄적인 시 한 편이 있다.
소풍 같은 봄
태양 같은 여름 지나고
이제 살며시 뒤란으로 물러나 앉은
가을 나이
저만치 홀로서기할 겨울이 기다리지만
날마다 생일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는 점심처럼
한결같이
여여如如하게
– 졸시 「생일날에」 전문
가을 나이에 접어든 사람이 날마다 생일처럼 산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휴가 언제 갑니까?”
여름이면 자주 받는 질문이다. 난 늘상 같은 대답을 한다.
“저는 일 년 내내 휴가처럼 지내요. 365일이 휴가라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물론 이 대답은 실제 사실과 다른 나의 속마음을 표현한 일종의 반어법이다. 마음의 기상도가 매일 다를진대 날마다 생일처럼, 365일 휴가처럼 하루하루를 특별한 날로 여기고 보내기는 실상 쉽지 않다.
커피점 풍경을 다시 들추면 온종일 내 마음에 물결이 인다. 그 장면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선하다. 작은 나뭇잎 하나가 우주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기 위해서 온 우주의 힘이 필요하기도 한다. 그 청년에게 날마다 생일이라는 커다란 힘은 어디서 났을까? 어떤 우주의 힘이 작용했을까? 남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에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 것일까?
커피 가게의 훈훈한 장면을 곱씹으며 아름다운 청년에 대해 여러 생각에 잠긴다. 환한 미소 속에 숨어있는 청년의 진짜 모습, 그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그를 수소문했다.
오전 일찍 그를 찾았다. 커피점 한쪽 벽면의 커다란 영어 글귀가 나를 맞이한다.
POUR YOUR HEART INTO IT.
‘당신의 마음을 담으세요.’
그가 근무하는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상징이기도 한 짧고 강한 메시지가 그 청년과 오버랩 된다. 나는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암환자였다. 급성 림프성 백혈병, 즉 혈액암으로 4년 동안 투병과 재활을 거친 후 최근 일상에 복귀했다. 그를 살린 것은 흔히 골수 이식이라 일컫는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 백혈병 환자들은 정상적인 혈액 세포를 만들어내지 못해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타인으로부터 이식 받아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다만 환자와 맞는 조혈모세포를 찾을 확률이 2만분의 1 정도로 극히 낮아 기증자를 찾아 헤매거나 마냥 기다려야 하는 길고도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한다.
기증 시 골수 채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검사, 입원 등 의 절차로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다행히 용기 있는 기증자 한 분이 그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현행법상 기증자와 환자는 서로 신원을 알 수 없지만 그 청년은 자기를 일으켜 세운 사람의 봉사와 도움을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를 구한 것은 기적의 이식 수술 이외에 생명의 마지막 잎새를 위한 주위 사람들의 수많은 기도임을 잊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오래도록 약병에 기댄 고통의 나날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었기에 청년은 이제 인생의 말석에 겸손하게 앉아 있다. 늘 감사의 마음으로 특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소 하나라도 던져주려 애쓴다. 하지만 환한 미소 뒤엔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여전하다. 이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순간 순간이 기적처럼 소중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선한 마음으로 날마다 생일처럼 살아가는 이유이자 동력이다.
삶의 비탈이나 사선死線에 서 본 사람은 마음의 방을 여럿 만든다. 그가 가슴팍을 내게 활짝 열어보였는데 그 속엔 비탈진 경사면의 다랑논처럼 마음의 방이 층층이 들어서 있었다. 좁다란 방이 아니라 넉넉한 품이 느껴지는 방이다. 절망의 바닥에 낮게 웅크린 사람들에게 흔쾌히 내어주는 방이다. 가파른 무논에 핀 하얀 벼꽃을 떠올린다. 스물아홉 그 청년의 방은 날마다 생일이며 365일 휴가다. 매일 축제이고 매끼 파티이며 매 순간이 시詩다. 그의 인생은 늘 봄날이다.
아스라이
아스라이 한겨레가 오천재를 밴 꿈이
세기의 굽잇물에 산맥처럼 부푸놋다
배움의 도가니에 불리는 이 슬기야
스스로 기약하여 우리들이 지님이라
스스로 기약하여 우리들이 지님이라
나의 모교 부산고등학교 교가이다.
1952년 유치환 시인이 노랫말을 짓고 당시 부산고 음악 교사였던 윤이상 작곡가가 곡을 붙였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이라는 조합도 대단하지만 두 분 다 내가 태어난 통영 출신 예술가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지금도 교가를 읊조릴 때면 늘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교가 중의 백미다. 가사에 그 흔한 산, 강, 바다와 학교 이름조차 없다. 한겨레와 오천 년 역사를 등장시켜 큰 뜻과 큰 꿈을 스스로 기약하고 지니게 한다. 스케일이 크다. 거기에 더해 곡의 장엄까지 울림이 크다.
고교 대선배 한 분이 들려준 윤이상 일화.
“1953년 고등학교 1학년 시절로 기억되는데 그때 음악 교사가 윤이상 선생이었거든… 당시 김하득 교장이 삼고초려로 모시고 온 분이야. 워낙 실력이 출중했거니와 카리스마도 대단해 학생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었지. 수업 시작할 때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선생의 첼로 연주를 난 지금 도 잊을 수 없어. 그런데 갑자기 서울로 전근을 가게 된 거야. 학생들은 망연자실했고 전근을 반대하는 스트라이크성 집단 행동까지 하게 되었어. 이상근이라는 후임 교사가 부임했지 만 학생들은 계속 수업을 거부했었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상근 선생은 일단 학생들을 음악실에 불러 모은 후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어.”
“윤이상 선생님을 향한 충정과 열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존경받는 선생님이지만 나에게도 역시 존경받는 선배이시다. 너희들은 그분과 일 년을 함께 했지만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나 또한 선생님을 멀리 떠나보내려 하니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선배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음악실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이상근 선생은 칠판에 큼직한 글씨로 ‘윤이상’이라고 적더니 바로 이어 ‘근’이라는 글자를 덧붙여 적었어. 그러니까 ‘윤이상근’이 된거지. 그리고 나서 말씀을 계속하셨어.”
“나는 윤이상 선생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존재지만 보는 바와 같이 이름도 비슷한 인연이 있으니 그 분을 최대한 닮아 최선을 다해 여러분들을 가르치겠다. 부끄럽지 않는 선생이 될 것을 약속한다.”
학생들이 바로 평정을 되찾았음은 물론이다. 참된 스승은 위기의 순간 더욱 빛을 발한다. 진심어린 말의 힘이 부러울 따름이다. 두 분의 훌륭한 가르침 속에 학생들은 예술적 감성과 소양을 마음껏 키우고, 전공과 직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음악 애호가로 멋진 삶을 이어나갔을 것으로 믿는다.
이상근 선생은 학생들에게 한 약속을 잘 지켰다. 부산고에 4년 남짓 재직한 다음 부산교육대학을 거쳐 부산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직 때까지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윤이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작곡가 반열에 섰다. 관현악곡, 실내 악곡, 가곡, 합창곡 등 여러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으며 국립교향악단이 가장 많이 연주한 한국 작곡가이기도 하다.
부산은 야구 도시다. 목포는 항구고, 부산은 야구다. 신혼 여행지로 사직구장을 배낭 차림으로 찾는 젊은 커플이 부지 기수다. 어떤 아줌마는 첫아이 출산 때도 울지 않았는데 사직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보면서 필 받아 펑펑 울었다고 한다. 잘 아는 박봉의 택시 기사는 비번 날 프로야구 직관이 인생의 낙이라고도 했다.
모교 부산고에도 야구부가 있었다. 지역 라이벌 경남고와의 대결은 그야말로 빅매치다. 부산고의 추신수와 경남고의 이대호 등 양교 야구부는 걸출한 동문 스타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프로야구 시즌이 오면 고교야구가 오버랩 된다. 나의 고교 시절 어느 봄 토요일 오후 구덕야구장의 한 장면이 직구처럼 꽂힌다. 숙적 경남고와의 경기였는데 양교 모두 전교생이 참가한 응원전은 불꽃이 튀었고 교사들도 총출동한 일전이었다. 하지만 시합은 모교 부산고의 패배로 끝났다.
이틀 후 월요일 국어 시간. 석패로 인한 분이 아직도 안 풀렸는지, 아니면 패배의 원인을 선생 탓으로 돌리려는 듯한 학생이 작정하고 짓궂은 질문을 했다. 그때 교사는 경남고를 졸업한 조달곤 선생으로 이틀 전 야구장에서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내내 잃지 않으시던 분이다.
“선생님은 야구장에서 부산고등학교를 응원하십니까, 경남 고등학교를 응원하십니까?“
선생의 머리를 겨낭한 듯한 거의 빈 볼Bean Ball에 가까운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교실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실로 난감한 상황에서 선생의 표정과 반응을 궁금해하며 학생들은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렵사리 한 질문을 가벼운 견제구 정도로 생각하는 듯 미소까지 머금은 채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야이 자슥들아! 내 아들이 내 동생하고 팔씨름을 하면 내가 누굴 응원하겠노?”
제자 사랑이 깊게 담긴 선생의 일갈은 우리들의 명치를 세게 때렸다. 패배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좁은 속을 호되게 꾸짖는 뼈아픈 일침이었다. 얄팍한 수로 데드볼을 노렸으나 선생의 필살기 같은 방망이 한 방에 우리들은 모조리 패전 투수가 된 셈이다. 곧바로 수업이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한 말씀 더 던지신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다. 공 하나, 시합 하나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야구도, 인생도 길게 봐라.”
선생님 가르침대로 나는 삶의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긴 호흡으로 멀리 보려고 애썼다. 나의 삶은 아직 6회 진행 중이다.
조달곤 선생은 우리들이 졸업한 후에 대학교수의 길을 걸으셨다. 경성대학교 교수로 오래 계시다가 정년퇴임한 국문 학자이자 시인이시다. 시를 가까이 하면 앞으로의 삶을 잘 지탱할 수 있다며 입시 전쟁을 목전에 둔 우리들에게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게 하고 생의 외연을 넓혀주셨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구위가 떨어져 벤치를 지키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청년의 모습으로 7회 말 구원 등판을 자청하신다. 힘주어 꽉 쥔 공에는 선생님의 자작시 한 편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제 중년을 넘어 살며시 뒤란으로 물러나 앉은 우리들을 위해 지은 시다. 꽃은 시들어도 향기는 마르지 않고 사랑은 더욱 뜨거워진다.
뒤란이 시끌시끌해서 문을 열고 나가보았더니
지난 봄 왁자지껄 살구꽃 피던 살구나무 밑동에
낙엽들이 지천으로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뜰 안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들 모여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은
지난 밤에 불던 바람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밤새 무슨 전갈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살구나무, 배롱나무, 산수유, 단풍나무, 산벚나무, 은행나무, 담쟁이…
낙엽들은 다가가는 내 발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남의 등에 코를 박고 자고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가지에 달려서 살던 재기발랄했던 젊은 날과는 다르게
한결 수더분해진 모습을 하고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서로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삶이 상처덩이라는 것을 아는 듯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었고 서로의 이불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도 안 아픈지 남의 귀에다 대고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소곤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짠해 있다 돌아서는 내 등뒤가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 조달곤 「뒤란이 시끌시끌해서」 전문
살아가면서 죽는 순간까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어머니, 고향, 그리고 모교가 그것이다. 연어가 각자의 바다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모천으로 되돌아가듯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이 셋을 찾게 되고 그 품을 그리워한다. 모교의 스승은 우리들이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 마음껏 항해할 수 있도록 자유와 상상력이라는 GPS(위성항법장치)를 달아주셨다. 스승은 인생을 가르치는 분이다. 스승 부재의 시대라고 일컫는 요즈음 참스승과 그들의 통찰력이 그립다.
진실의 순간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한국과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축구 경기를 TV로 시청했다. 스코어는 5:0으로 한국의 승리. 한국은 3승1무의 성적으로 레바논과 승점은 같지만 골 득실에서 앞서 조 선두를 지켰다. 골 득실 차는 승부를 가리는 경기에서 승점이 같을 때 득점과 실점을 계산하여 순위를 결정짓는 변수다.
그런데 2021년 6월 현재 FIFA 랭킹은 한국 39위, 투르크메니스탄 132위, 레바논 92위, 또 같은 조의 스리랑카 204위다. 레바논과 골 득실 차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훨씬 우위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물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응원하지만 현격한 실력 차를 극복하며 앞뒤 재지 않고 선이 굵은 축구를 구사한 상대팀에 더 마음이 간다. 그래서 인구 600만 명의 이름마저 생소한 나라 투르크메니스탄을 입안에서 되뇌어보고 지도에서 한 번 더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득실 앞에 ‘이해’라는 단어가 붙으면 더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가 된다. 이해득실. 이로움과 해로움, 얻음과 잃음을 이르는 말인데 이 단어의 뒤에는 캐묻고 가려 낱낱이 헤아리다라는 뜻의 ‘따지다’라는 말이 대개 따라 붙는다. 내가 약간 밑 지고 상대가 이익 보는 너른 품은 사라지고 어떡하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볼까 하는 마음이 늘 머릿속에 가득하다. 이해득실의 논리가 가장 민감하게 적용되는 분야가 정치다. 정치적 신념보다는 눈앞의 이해득실을 따질 때 우리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대선을 앞두고 대권 주자들과 잠룡들의 신간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른바 ‘책들의 전쟁’이다.
여러 책들 중 국무총리를 관두고 대권 출사표를 던진 정세균의 에세이집 『수상록』을 눈여겨봤다. 그는 “우리 정치는 너무 품위가 없다. 양아치 세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2007년 산업자원부 장관을 마치고 『나의 접시에는 먼지가 끼지 않는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접시를 깨더라도 열심히 일하자, 접시에 먼지가 낀 공무원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책인데 나는 먼지에 주목했다. 먼지 없는 접시, 거짓 없는 참의 관점에서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는 온유하고 조용한 신사 이미지다. 이번 책은 여타 정치인의 진부한 회고록과 차별화를 꾀한 듯하다. 프로필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별이 쏟아지는 산골에서 태어나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마친 후
한걸음씩 전진하는 인생을 살아온 민주주의자
독자들에게 어필이 되는 부분이다. 대기업 임원, 장관, 6선 국회의원,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 화려한 그의 이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편안하고 친근하다.
책표지뒤에는
무엇이 유리하고 무엇이 불리한 지를 분석하지 말고
무엇이 올바른지를 분석하게나.
그러면 단순해진다네.
이해득실이 아닌 바름과 진실을 청유형 화법으로 잔잔히 강조하고 있다. 내가 그를 보는 관전 포인트는 차기 대권 후보 적합도 여론 조사 결과치나 당내 경선, 당선 여부와 무관하다.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인 정치 풍토에서 적어도 정치가 한 명을 통해서라도 진실의 순간을 보고픈 것이다. 설사 그의 진실이 역시나 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의 접시가 혼탁한 먼지로 점철되더라도.
득실보다 진실의 순간을 만날 수 있는 곳, 두 군데를 찾는다. 한 곳은 바닷가 횟집, 또 한 곳은 시골 밥집이다.
호수가
산을 다 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글귀 하나가 벌써 손님을 압도한다. 부산 민락동 수변 공원에 자리한 「방파제횟집」. 이곳의 컨셉은 작품이다. 상에 오른 갖가지 음식뿐만 아니라 복도와 화장실 그리고 방마다 걸린 글과 그림이 전부 작품이다. 횟집다움을 뛰어넘는 고혹적인 분위기에 매료된다. 상업적 욕심보다는 문화적 욕심이 큰 곳이다. 곳곳에 예술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우라’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이곳에서 찾았다.
이 집은 바다 전망이 없다. 바닷가 입지에서 이런 치명적인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질 좋은 재료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연히 자연산 활어만 고집한다. 쌀, 채소, 양념류 등 갖가지 음식 재료는 청정지역 토종으로 원산지 표시는 전부 국산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상급 횟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내가 천착하는 건 주인장의 선비 마음, 양심이다. 그 마음 하나로 40년 장사를 버텨온 듯하다. 그는 음식 장사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 그 중심엔 양심이 있다. 사람이 변하면 음식 맛이 변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는 양심이란 재료를 써서 한결같은 맛을 낸다. 그는 탐심 없는 분이라 이문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않다. 어떤 날은 주문도 하지 않은 복어회가 덤으로 올라와 감동한 적도 있다.
그는 셈하고 견주고 따지고 가늠하지 않는다. 욕심을 우려 내지 않는다. 좋은 재료와 양심만을 믿는다. 방파제 같은 든든한 믿음이다. 그에게 양심은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최후의 방파제다. 이 횟집의 상호가 방파제라는 것에 수긍이 간다.
이곳의 바다가 고객을 다 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마지막 식사 순서로 매운탕 대신 말갛게 끓인 지리를 주문했다. 맑은 영혼들과 어울릴 듯해서. 사람이 진실되면 음식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법. 거짓 없는 진실의 상床을 그대로 내놓을 뿐이다.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좋은 먹거리는 배를 든든히 채워 주고, 잃었던 입맛도 깨워 주고, 인생의 맛도 음미하게 만든다. 특히 내 삶의 허기가 고기 한 점 걸치면서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라는 걸 느끼게 된다면… 다행히도 이런 곳이 있다.
거창군 읍내 「봉천식당」. 단돈 7천원이면 고기 밥상이 차려 진다.‘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힘들 때 참는 건 이류, 힘들 때 먹는 건 육류’를 표방하는 밥집이다. 주메뉴인 두루치기와 돼지불고기를 미친 가격 7천 원에 흡입할 수 있다. 더욱이 밥과 계란 프라이가 무한리필이라 너무나 넉넉하다. 다만 계란 프라이는 최근 조정을 거쳐 인당 2개가 세팅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불과 몇 년 전까지 밥값이 5천 원이었다는 사실. 개업 후 10년 동안 가격 동결을 고수했는데 6천 원을 잠시 거쳤다가 코로나 직격으로 현재 7천 원을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착한 가격이다.
육체노동자와 대학생, 지갑 얇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이면 40개 전 좌석을 가득 메운다. 착한 주인과 착한 직원 기껏 둘이서 착한 맛집을 너끈히 커버한다. 고기 고픈 사람들, 엄마 손맛과 할머니 빈 젖이 그리운 사람들을 위해 아침 6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문이 열려 있다.
두루치기를 주문했다. 음식에서 언어를 건져 먹는 묘미 또한 한맛 한다. 3개의 부사를 음미한다. 고추장 양념 국물이 ‘자박자박’ 졸아들고 적당히 어우러진 돼지 살코기와 비계가 걸쭉하게 ‘자글자글’ 끓다가 이내 숨을 죽인다. 상추 위에 고 기 한 움큼, 마늘, 낙지젓, 무생채를 차례로 얹어 쌈으로 한 입. 리필한 밥으로 남은 양념과 함께 ‘슥슥’ 비며 또 한입. 따라 나온 된장국마저 죽이는 맛이다.
여기는 손님들의 밥과 땀과 삶을 하늘처럼 받드는 곳이다. 그래서 봉천奉天식당이다. 셀프로 제공되는 무한리필의 밥은 눈칫밥이 아닌 주인이 진심으로 퍼주는 밥이다. 밥보시다. 하나라도 더 움켜쥐겠다는 세상에서 무한정 퍼준다.
배 든든한 것은 고마운데 저래 가지고 장사 되나? 처음 온 손님들은 걱정이다. 그 의문은 식당을 나설 때 풀린다. 계산대 위 조그만 액자 속 글귀에 답이 있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이 글귀 앞에서 우리는 진실의 순간과 대면한다.
여름 숲은 그냥 오지 않는다
첩첩산중 명달리 저녁이 층층이나무에 얹힐 즈음
최하림夏林 시인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벌써 여름 숲을 깔아놓고 맞이하신다
인사와 함께 드린 질문
시詩가 막히면 어떻게 하나요
기다려야지
여자는 뱃속의 아기만을 생각하며 열 달을 기다리지 않느냐
시의 열병 앓는 밤
아직 내 시는 차갑다
폭포 같은 고요
자정께 마음의 발우 머리에 얹고 시를 기다리니
금방 새벽이다
새벽바람 한 줄기
멀리서 여름 숲이 걸어오고 있다
– 졸시 「여름 숲은 그냥 오지 않는다」 전문
십여 년 전 경기도 양평의 서종면에 계시던 최하림 시인을 찾아 뵙고 쓴 시다. 시에 입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통 시 사랑에 빠져 있을 때였다. 거창의 문우 염민기 시인은 「시를 띄우다」라는 온라인 시 배달 사이트에 초짜 시인의 졸시 한 편을 소개하며 호평을 남긴다.
삼키지 못하고 고여 있는, 그리운 한입
온통 짙은 여름이다. 저 숲의 초록은 계절을 견뎌온 색들이다. 그리고 여름 저녁 숲은 고요로 깊어진다. 침잠의 숲을 깔아놓고 맞이하는 노시인과 마음의 발우 머리에 얹고 시를 기다리는 시인.
그렇게 만남의 설렘으로 한 질문. 한껏 기대했지만 ‘그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답한다. 어쩜 너무나 평범한 대답이 오히려 줄탁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하림夏林과 여름 숲, 시적 언어의 재치도 엿보인다. 다들 직선의 눈으로 급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이다. 삼키지 못하고 고여 있는 그리움 한입, 너무 자주 잊는다. 시인의 말대로 그냥 오는 것은 없는 데 말이다.
바닷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 것을
– 서정주 「시론」
저처럼 남겨두는 것, 기다리는 일. 시든, 삶이든 그럴 것이다. (시 편지 집배원 염민기, 시인)
문학적 내공이 대단한 염 시인이 갓 입문한 서툰 신인에게 선사하는 다분히 격려성 해설이다. 미당未堂의 시를 인용해 부족한 시의 격을 한층 높였기에 실로 과분하다. 드러내지 말고 숨겨두라는 시 창작의 핵심을 두고두고 마음에 둘 일이다.
새 옷을 사면 바깥출입이 잦아진다. 약속이 없어도 괜스레 새 옷을 걸치고 외출한다. 문학이라는 새 옷을 막 입고 쏘다니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초등학교 동창회 카페. 초록 동심이 무지개꽃으로 피어나는 곳이다. 어설픈 시를 우쭐대며 뽐내기도 했고, 시가 무서울 때는 도망치고 숨는 곳이었다. 어쭙잖지만 문학을 하는 친구가 나 혼자뿐이라서 그런지 카페 친구들은 내 작품의 서툰 몸짓, 손짓에도 추임새와 맞장구를 아끼지 않았다. 어필하고 싶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슬쩍 눈감아 주며 수많은 댓글로 문학적 발심을 북돋워주었다.
여름 숲에 달린 댓글과 거기에 덧붙인 나의 답글을 간추려 본다.
멀리서 오는 여름 숲을 반기며 몇 자 적는다. 시경 삼백여 편의 시를 공자는 ‘사무사思無邪’ 한마디로 요약했다. 생각에 사악함이 없고 꾸밈과 기교가 없는 순수무구가 시의 본질이라 했다. 그리고 릴케의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필연이 시인의 운명이라고 이해한다.
‘시의 열병 앓는 밤 / 아직 내 시는 차갑다’에서 릴케와 공자를 본다. 음풍영월吟風詠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아래 시를 짓고 즐겁게 놀다. 나는 이번 여름에 맑은 물에 발 담그고 달을 희롱하며 탁족의 호사를 누리던 선현들의 시모임詩社을 생각하면서 무더움을 이겨내려고 한다. 그리고 일작… 그곳에서 좋은 사람과 한잔 또 한잔 마시면 흐르는 물과 스치는 바람은 바로 ‘아무 것도 없음의 無’이다. 그 없을 無의 소리를 전하는 서늘한 바람이 한없이 그리운 요즈음이다.
– 댓글이 본문 보다 훌륭하면 어떡해. 예식장에서 아무리 출중한 미모의 하객이라도 신부보다는 예쁘지 않게 예의를 갖추는 법. 여름 숲에서 릴케와 공자를 본다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감언이다. 단맛이 치아를 썩게 하듯, 지나친 감언은 시심을 썩게 하여 자칫 그릇된 문학의 길로 빠져들게 할지 모른다. 새내기 시인을 정녕 위한다면 달콤한 감언보다 쓰디쓴 고언이 낫지 않을까.
음풍영월이라. 내친 김에 거창으로 한번 다녀가시라. 여기는 세월을 낚는 백수와 시인묵객들이 노닐기 좋은 곳. 냇물을 베개 삼아 달빛을 이불 삼아 자연과 대작하며 시름을 내려놓을 곳이 너무 많다. 훌륭한 댓글, 술로써 화답할게.
음풍吟風과 농월弄月. 거창과 이웃한 안의면의 농월정. 가히 달을 희롱한다는 정자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창의 친구와 조우하면 꼭 찾고 싶은 곳이었는데 안타깝다. 정자 앞 너럭바위 월연암月淵岩… 달바위를 돌아 옥류와 노송이 조화된 비경은 무릉도원을 이룬다. 옛 선비들의 정취가 묻어나는 농월정은 흔적만 남았다지만 기회가 되면 월연암에 앉아 함께 탁족이나 즐겨보세. 아참, 일작이 빠졌네.
그런데 질문 하나. 시는 내재된 마음을 담은 함축된 글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폭포 같은 고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일종의 반어법인가?
– 시에 대한 경배, 그리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듯 시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담아보려 했는데… 시는 그냥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만큼 끊임없이 수행정진하는 구도자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 같아. 시에 구애하는 내 마음만 뜨거웠지 진작 필요한 시어나 싯귀는 나에게 여전히 멀고도 차가운 존재… 마치 폭포 아래서 소리를 깨우치는 명창의 마음 같은 고요한 침잠의 상태를 나타내려 했지. 일종의 반어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묻지 말고 그냥 네 상상껏 느껴라. 감상과 해석은 독자의 몫.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문구가 찬란한 슬픔, 즐거운 비명, 사랑의 두려움… 이런 것들인데 ‘폭포 같은 고요’ 역시 반어적인 표현이라 더욱 마음이 가네.
– 그것을 ‘모순 형용’이라고 하지. 서로 의미가 다른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뜻을 강조하는 일종의 역설법이지. 이를테면 ‘찬란한 슬픔’, ‘소리 없는 아우성’, ‘고와서 서러워라’ 등 주로 문학 작품에 많이 사용되고 있어. ‘작은 거인’, ‘행복한 고민’, ‘영원한 찰나’ 등 일상에서 쓰는 말도 많아. 노래 가사 중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도 일례가 되겠지.
마음의 발우 머리에 얹고… 시어에 굶주린 시인의 고통이 엿보이네. 발우는 본시 중생의 뜻에 따라 양대로 채우므로 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하지. 친구의 양이 얼마나 될까? 시상의 세계는 무한이니 곧 발우를 가득 채우고 여름 숲을 맞이하 시길…
– 시어를 구하는 것이 마치 스님의 탁발처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내 그릇만큼만 얻고 싶어. 그런데 친구들의 댓글이 본문보다 출중하네. 단순한 격려성 댓글이 아니라 기성 평론 같은 해설이 졸시를 더욱 빛나게 하는구나. 친구들과 여름 숲에 들어가 다함께 삼림욕하며 문학의 향기를 공유할 수 있었으면… 더불어 친구들을 통해 내 발우의 용량도 점점 커져갔으면 한다.
기다림은 삶의 일부분이지만, 기다림에 지친 숯검정이 하얀색이 되려면 숙명처럼 뒤엉킨 매듭을 풀어야 되는데 시인 친구는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혼자만의 밤 시간이 멋져 보이기 보담 어딘지 암울한 느낌을 주네. 한밤의 사색은 자신을 더 나락으로 몰고 갈지 모르니 짝사랑의 열병으로 끙 끙 앓지 말고 한낮의 뜨거운 목마름을 시상으로 떠올려보심이 어떨까요. 바람 지나는 그늘막에 앉아서.
– 작은 창가에 머무는 한 줄기 바람도 한밤엔 친구가 되네. 난 원래 낙천, 자유주의자인데, 시 앞에만 서면 꼼짝을 못하네. 애모병인가?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여름 숲은 숙연하다. 내가 좋아하는 시 「국화 옆에서」를 떠올린다. 봄의 소쩍새, 여름의 천둥, 가을의 서리 등 만물의 인연과 고통, 번민 끝에 비로소 한 송이 국화꽃은 핀다. 우리들의 우정도 그냥 쉽게 오지 않음을 안다. 멀리서 숲이 걸어오는 것을 보는 친구는 기다림의 고해를 지나 생명의 경외와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다. 한때는 우리 모두 문학소녀였는데 이제사 순수한 마음의 본향으로 돌아가 본다.
– 제각기 작은 시냇물로 흐르다가 함께 모인 이곳은 밤마실 나가 이야기보따리 풀고 동네 오빠 하모니카 소리 듣던 빨래터나 우물가 느낌이다. 넘쳐나는 글들의 성찬으로 문학 살롱이나 예술 사랑방이 따로 없다. 하지만 친구들아! 감언과 과찬의 댓글들은 그저 친절한 설명에 그친 나의 시를 한층 부끄럽게 하는구나. 이야기만 쓰고 생각을 쓰지 않았음을 자책한다. 숲을 마냥 기다리지 말고 숲에 뛰어 들어가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 했다. 나무가 말하는 소리, 숲과 바람의 외침을 적어야 했다.
댓글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에 대해 짤막하게 답하는 글이다. 사회적 큰 이슈나 쟁점이 아닌 부족한 시 한 편에 순식간 수많은 댓글이 올라왔다.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는 정도로 짤따란 꼬리말 두어 개 덧대면 족할 터인데 너나없이 장문의 댓글로 글발을 세워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악플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댓글 조작과 공작으로 시끄러운 SNS 시대에 친구들의 진심어린 응원 댓글은 나의 시를 여름 숲처럼 울울창창하게 만든다.
와우 포인트
와우Wow! 언빌리버블Unbelievable!
2020 도쿄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삼성의 믿기지 않는 선물에 환호했다. 삼성전자는 도쿄 올림픽 및 패럴림픽 출전 선수 약 17000명에게 최신 스마트폰 패키지 「갤럭시21 2020 도쿄 올림픽 에디션」을 선물했다. 소요 비용은 240억. 하지만 이 깜짝 선물은 선수들의 SNS를 타고 일파만파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된다. 도쿄 올림픽이 무관중으로 열리는 만큼 삼성전자는 비대면 마케팅에 주력했는데 이번 선물 이벤트는 ‘와우 포인트’가 잘 적용된 마케팅 성공 사례이다.
감탄사 ‘와우Wow’는 우리말 와, 우와처럼 큰 놀라움을 나타내는 소리다. 가벼운 놀라움을 나타내는 아, 어, 어머, 저런 정도의 오호Oh보다는 어감이 더 세다. ‘와우 포인트’는 놀라운 점, 즉 폭발적 감동을 한순간에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것을 뜻한다. 고객이 상품을 접하는 순간 ‘와우’라는 감탄사를 터뜨린다면 고객의 마음을 여는 데 이미 성공한 것이다. 고객의 구매 결정에는 첫인상이 중요하다. 와우 포인트는 회사나 제품을 처음 접할 때 이미지를 결정짓는 짧은 순간인 ‘진실의 순간’과도 맥을 같이 한다.
더운 여름 도심을 벗어나 도착한 카페. 근데 와우,하고 탄성을 절로 터지게 하는 것이 있다. 눈앞에 펼쳐진 널따랗고 쾌적한 진초록 숲이다. 고급진 브런치와 디저트로 배를 살푼 채운 후 아이스커피 한 잔을 들고 숲길을 거닌다. 정원 한편 명화 전시 갤러리를 잠시 둘러본다. 작은 음악회 시간을 기다리며 여기만의 차별화된 시그니처 음료를 즐긴다. 머그컵, 텀블러 등 갖가지 커피 용품과 굿즈가 눈길을 끈다. 와우 감탄사는 곳곳에서 연발되고 이쯤 되면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가 성비를 뛰어넘는 가심비價心比가 내 마음을 이곳에 오래 붙들어놓는다.
와우 포인트는 마케팅 용어이지만 꼭 장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감동을 추구하는 예술은 물론 우리들 삶의 모든 접점마다 적용된다.
가수 나훈아가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와우 포인트의 정수를 선사했다. 2020년 KBS 한가위 대기획 「나훈아 어게인」으로 15년만에 외출한 가황歌皇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강림하는 듯 초대형 크루즈선을 끌고 무대에 등장한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곡은 「고향으로 가는 배」. 그를 닮은 거침없는 파도를 3대의 배가 힘차게 가른다. 중앙의 큰 배 양쪽 옆, 2대의 작은 배에는 매니아합창단과 경북대합창단 250명이 나눠 타고 다함께 노를 저으며 떼창을 이룬다.
웅장하고 실감나는 장면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되었지만 그가 3분 남짓 무대를 씹어 먹는 동안 객석에서는 미쳤어 미쳤어,를 연발하고 지친 국민들은 노래가 주는 위로에 흠뻑 젖는다. 역시 가황이다. 디테일로 꽉 채워진 엄청난 스케일에 국민들은 감전된다. 그가 직접 기획한 감탄의 오프닝은 아싸, 얼쑤, 얼씨구, 브라보, 원더풀, 오마이갓 등 동서양의 숱한 탄성과 감탄사를 동원해도 모자랄 판이다.
탄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곡 「테스형」으로 2500년 전의 소크라테스를 소환하여 국민들을 철학에 빠지게 한다. “국민을 위해 목숨건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국민이 이 나라를 지켰다.” 국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이 작심 발언으로 그날은 나훈아가 대통령이었다. 정치인 백 명의 위로가 나훈아 한 명보다 못했다. 정치인의 말 백 마디가 나훈아의 노래 한 소절보다 못한 것이다. 특유의 ‘찢청’ 정신에서 터져 나온 카랑카랑한 일갈이 온 국민의 귀를 찢고 안방을 홀렸다. 와우 포인트의 정점이다.
‘NDR’.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있는 단어다. 나의 조어造語로서 사전에 나오지 않지만 내 호기심과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남다른’, 이 세 글자의 머리 자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와우 포인트의 요체는 ‘남다른’이다. 세상은 다른 눈,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Think different’. 애플은 이 슬로건으로 세계 정상에 섰다. 나의 오래된 친구들 몇몇이 모임을 재정비했는데 이름은 「노다지 클럽」. 노년을 남다르게 색다르게 지내자는 모토로 상투라는 노폐물을 싹 빼고 의기투합한다. 낡은 것과 묵은 것을 거부하고 과거의 익숙함과 결별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출퇴근 길 코스를 조금만 바꾸더라도 마주하는 풍경은 참 새롭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더 좋은 곳으로 이끌 때도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렸을 때 감동은 배가 된다.
규칙과 반복은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처럼 건조하다. 나의 시詩는 늘 기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획일화, 기계화, 습관화를 수시로 점검하고 루틴과 스탠다드를 경계한다. 스시 명인은 1인분 8개의 초밥 중 1개에 겨자를 듬뿍 넣어 톡 쏘는 알싸한 맛을 더한다. 반복과 중복이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서예의 경우, 병풍 한 폭에 중복되는 글자가 있으면 다르게 표기한다. 음악에서도 리프Riff, 즉 반복 악절에서는 임의로 약간 다르게 연주한다.
와우 포인트는 굳이 폭발적이지 않아도 된다. 거창하고 대단할 필요는 없다. 잔잔한 감동의 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목례로 말을 걸어올 때, 늘 무장한 듯 경계를 좀체 풀지 않던 무뚝뚝한 친구가 큰 소리로 웃을 때, 점심도 거른 채 일하는 중 누가 양갱 하나 건네줄 때, 군대 간 늦둥이 아들 녀석이 완전한 싸나이가 되어 첫 휴가를 나와 “필승!”하면서 인사할 때 와우라는 느낌표를 받는다.
작은 변화로 인해 생긴 와우는 삶의 곳곳에 숨어 있다. 마당의 돌을 옮겨놓거나 책상의 위치를 조금만 바꾸어도 작은 감흥이 일어난다. 아파트 보도블록 틈새로 풀꽃 흔들리는 것을 보고 어느새 내 몸도 떨고 있다. 홀로 서 있는 난분蘭盆 곁에 수석 한 점을 앉혔더니 둘은 제법 어울리는 친구가 되어 서로 외로움을 달랜다. 날마다 바라보는 앞산도 해와 구름, 비와 바람에 따라 사계절 아침저녁 밤낮으로 풍경을 바꾼다. 무심히 서 있는 것을 유심히 보다 보면 와우라는 탄복이 인다.
리셋Reset 역시 와우 포인트다. 컴퓨터를 초기화 하는 것, 칠판을 지우는 것, 상을 다시 차리는 것, 화투판을 새로 까는 것, 삼겹살 불판을 바꾸는 것, 찬물 세수로 얼굴을 민낯으로 만드는 것 등 원상태로 되돌리는 리셋은 초심이라는 백지를 펼친다. 자연스레 비워진 마음은 조금 물러서서 나를 본다. 백지 위의 평정심은 와우라는 감탄사를 조용히 내뱉는다.
와우 포인트는 적소의 침 한 방이다. 침 한 방에 통증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일침一鍼은 혈자리를 제대로 뚫어 피를 돌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한다. 순간 번쩍, 하고 번개가 친다. 시 한 구절도 일침이다. 싯귀 하나가 무명無明을 걷어낸다.
와우 포인트는 감동이며, 은혜이고, 발견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와우의 순간은? 오늘 하루 최고의 와우 순간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낯선, 별난, 독특한, 반짝이는, 희소성 있는, 하늘 아래 유일한 나만의 것을 찾아 오늘도 와우의 순간을 영접한다.
스토리가 있는 음악
‘파닥이다’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파닥이다는 새가 날개를 치는 것, 물고기가 지느러미나 꼬리를 치는 것, 깃발이나 빨래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늘 파닥이게 하는 분이 있죠. 비로 이 분을 소개합니다.
부산 앞바다는 자기가 큰 바다인 지 모릅니다. 거창을 품고 있는 덕유산도 자기가 큰 산인 지 모릅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들은 부산 앞바다가 얼마나 큰 바다이고, 덕유산이 얼마나 큰 산인 지를 압니다. 그릇이 부산 앞 바다처럼 덕유산처럼 크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시한 2개의 글은 행사 때 사회를 보면서 실제 사용한 출연자 소개 멘트다. 주인공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짤막한 화법에 참석자들은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모니카를 연주할 기회가 종종 있다. 이럴 경우 보통 두어 곡 정도를 부르게 되는데 대체로 곡목의 연주 시간이 짧은 터라 너무 일찍 끝나는 게 늘 아쉬웠다. 하루는 글 첫머리에 예를 든 사회 멘트처럼 연주곡에 관련된 짧은 해설을 미리 곁들였더니 호응이 제법 좋았다. 그때부터 「스토리가 있는 음악」이란 타이틀 아래 간략한 곡 정보와 곡에 얽힌 사연 등을 먼저 소개한 후 연주를 시작한다.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주목 받듯 스토리텔링 한 꼭지를 사전 배치했는데 아는 만큼 들렸는지 곡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며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 조리 시 적당한 온도에 도달하기까지 예열의 시간이 필요하듯 연주를 앞두고 청중과 연주자가 마음의 온도를 함께 데우는 친숙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라 할까, 이는 청중과의 소통을 자연스럽게 하고 연주의 부족함을 덮고 장점을 돋보이게 했다.
나의 공감 프로젝트, 스토리가 있는 음악을 소개한다.
(실제 연주를 들려 드릴 수 없는 사정이라 1절 가사로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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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서랍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하모니카가 어둠을 털고 세상 밖으로 나와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음악, 첫 번째 순서는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입니다.
이 곡은 저의 아버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소위 18번 노래입니다. 아버님은 제 나이 스물세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저는 군 복무 중이었는데 암으로 입원 중인 병원에 들러 아버님을 모시고 인근 초량시장으로 갔었죠.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부자지간의 마지막 정을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아버님은 통영의 작은 시골 마을인 ‘노전’이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노전蘆田은 갈대밭이란 뜻인데, 아버님의 호號이기도 합니다.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지났네요. 갈대밭의 바람이 저를 조용히 감쌉니다. 지키지 못한 사랑을 못잊어 사나이는 갈대처럼 웁니다. 아버님의 애창곡 「갈대의 순정」 들려 드리겠습니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에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아라 아 아 갈대의 순정
– 전세일 작사, 오민우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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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한 글자로 된 순우리말 하나가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숨가쁘고 가슴 뛰는 단어입니다. 존경과 사랑을 담은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입니다. 님, 하며 소리 내고 나면 자연스레 입술을 다물게 되지만 소리가 바로 그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정적 후 님의 받침 미음은 입 口(구), 즉 사각의 입 안에 갇혀 공명하듯 여운을 길게 끌고 갑니다. 님은 품을 연상시킵니다. 희로애락 어느 순간에도 우리들은 가장 멀고도 가까이 있는 님의 품을 찾습니다. 하나님, 부처님, 어머님, 선생님… 님은 초월적 존재와 그리움의 본향을 함께 아우릅니다.
박재란의 「님」을 연주하겠습니다.
미8군 무대를 통해서 데뷔한 박재란은 「럭키 모닝」, 「밀짚 모자 목장 아가씨」, 「산 너머 남촌에는」, 「진주 조개잡이」 등 주옥같은 히트곡으로 60년대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특히 「님」이란 노래로 인기의 절정을 치닫게 되는데 이 노래의 가사를 따서 제목으로 삼은 영화 역시 대성공을 거두게 되죠. 바로 「창살 없는 감옥」입니다.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의 이 노래엔 애틋한 사연이 있습니다. 차경철은 어릴 적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러브스토리를 레코드사에 보내고 입대를 하게 되는데 레코드사를 운영하던 한복남이 곡을 써서 박재란에게 부르게 하여 대히트합니다. 차경철이 병장 시절, 박재란은 그 부대에 위문 공연을 가게 되고 이 곡의 작사자가 차병장이란 사실을 소개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60년 전 차병장을 떠올리며 박재란의 「님」을 찾아갑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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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같은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교회 오빠, 성당 누나처럼 친근한 소위 아는 여동생입니다. 그녀는 밤하늘의 별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돈을 세는 재미보다 별을 헤는 기쁨을 사랑했었죠. 스토리가 되려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명이 아프게 되지요. 그녀는 갑작스레 큰 병을 얻어 서울의 대형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저는 병문안을 갔죠. 병원 뜰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요즘도 하모니카 열심히 부시나요. 꼭 듣고 싶은 곡이 있는데 들려주실 수 있나요?”
“오늘은 하모니카 준비가 안되어 다음 문병 때 꼭 들려 드릴게요.”
저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병문안 전에 그녀는 저 하늘로 떠났습니다. 밤이면 가끔씩 별이 되어 저를 찾아옵니다.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거나 가슴에 안기기도 하지요. 오늘은 별 하나가 더욱 반짝이며 내려와 귀를 기울입니다. 사랑이 저를 최고의 연주자로 만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어야 할 순간입니다. 그때 그녀가 신 청한 곡 「내 마음 별과 같이」 들려 드립니다.
산노을에 두둥실 홀로 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
한 송이 구름꽃을 피우기 위해 떠도는 유랑별처럼
내 마음 별과 같이 저 하늘 별이 되어
– 주일청 작사, 임택수/박성훈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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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지나도록 할아버지는커녕 아저씨가 못되고 오빠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빠부대의 원조 가왕 조용필입니다. 그는 고3 때 미8군 무대 기타리스트로 시작해 국민가수를 거쳐 가왕까지 한국 가요계의 역사를 새로이 썼습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상징이자 정점, 궁극이며 카네기홀에 선 최초의 한국 가수입니다. 국민들은 그를 가왕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죠. 그가 가왕임을 거부하는 딱 한 사람은 바로 조용필 그 자신입니다.
1975년 그룹사운드 「조용필과 그림자」로 활동하던 무명 시절에 부산 용두산 자락의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조우한 바 있으니 그와 친한 교분은 없지만 인연은 꽤 깁니다. 그의 광팬으로서 나의 필명 겸 예명 ‘나건필’에 그의 이름 끝자 ‘필’을 차용했습니다. 나건필은 나의 연필이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좋은 글을 제대로 열심히 쓰겠다, 나 스스로 건필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를 동경해 마지않았기에 다분히 조용필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입니다.
1982년 발표된 자작곡 「비련」. 첫 소절 “기도하는”에 일제히 까무러지며 지르는 짧은 비명은 병상의 소녀마저 전율케 합니다.
일화 한 토막. 병원에서 투병 중인 14세 지체장애 소녀가 「비련」을 불러달라, 용필 오빠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용필은 그날 스케줄을 전부 취소하고 시골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소녀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비련」을 부르자 소녀와 소녀 어머니는 펑펑 눈물을 쏟지요. 소녀 부모의 고마운 뜻을 담은 사례금을 마다하고 한 말,
“따님 눈물이 제가 평생 벌었던 돈보다 더 값집니다.”
이번에 연주할 곡은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입니다. 이 노래에는 작사를 한 이주연 님의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 있 습니다. 1981년 발표 당시 72세였던 이주연은 자신의 한 맺힌 사연을 일면식이 없던 조용필을 통해 세상에 남기고자 했죠.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었나’라는 노랫말 중 그 여름 어인 광풍은 6·25동란의 비극을, 낙엽 지듯 가시었나는 남편이 가을에 납북되었음을 뜻합니다. 남편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생명력 강한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옛사랑에 가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민들레 홀씨는 여린 입김이나 바람 한 점에도 이리저리 가벼이 날아다니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으면 원하는 곳, 지구 끝까지라도 날아갑니다. 민들레 홀씨 같은 마음을 담은 곡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여러분을 향한 저의 변함없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었네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나지 않으리라
– 이주연 작사, 조용필 작곡
도박
딱지치기, 구슬치기, 물방개, 뺑뺑이, 엿치기, 판치기, 짤짤이… 초등학교 시절 즐겨 하던 놀이다. 딱지와 구슬치기는 금세 싫증이 났고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동심과는 거리가 먼 사행성 놀이에 몰입했다. 둥근 함석통 물 위를 헤엄치는 물방개는 늘 꽝이 있는 곳으로 골인하기 일쑤였다. 숫자가 적힌 동그란 판이 돌아갈 때 목표물을 맞히는 뺑뺑이는 내 기대와는 엉뚱한 곳에 깃털 화살이 꽂혔으며, 엿치기조차 큰 구멍은 번번이 나를 외면했다. 이 놀이들은 내 의도와 간절함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영역으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은커녕 오로지 요행만 작용했다. 이에 비해 판치기와 짤짤이는 나의 숨은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졸업 때까지 학교와 동네를 평정했다.
판치기는 책 위에 동전을 올려놓은 후 손바닥으로 동전 주위를 쳐서 동전이 모두 같은 면이 되면 판돈을 다 가져가는 놀이다. 표적이 된 소수의 동전만 뒤집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힘 조절, 그리고 디테일이 요구된다. 어렵사리 성공한 짜릿한 손맛을 추억하면 고사리손의 흥분이 여태껏 내 오른손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짤짤이는 손안에 든 동전의 개수를 알아맞히는 놀이다. 홀짝 혹은 3이나 4로 나눈 수의 나머지 수를 맞춘다. 용하게도 오른손에 잡히는 감촉과 짤짤거리는 소리만으로 손에 쥔 동 전이 몇 개인가를 맞힐 수 있었다. 당시엔 십 원짜리 동전이 대세였는데 30개까지는 오차 없이 정확했다. 부단히 연습한 결과다. ‘훈련할 때 땀을 많이 흘리면 전장에서 그만큼 피를 덜 흘린다.’는 명언처럼 실전을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손에 감을 익힌 덕분이다. 함께 겨룬 중학생 형들도 ‘고수’라 는 별명까지 얻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짤짤이가 끝나고 나면 손에는 돈독이 올라 손바닥이 퍼렇게 변한다. 동전에 낀 파란 녹 때문이었을 게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손에도 내공이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만 이른 나이에 승부의 세계를 접하며 폭넓은 삶에 눈뜨게 되었지만 소년의 감수성의 촉은 너무 일찍 18금 도박 성인물에 빠지게 되었다. 그 특유의 호기심으로 음악이나 그림 등 예술에 몰입하거나 공부에 매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초등학교 때가 사행성 놀이에 맛을 본 시기라면 중학 시절은 개안의 시기다. 내기 문화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여러 종류의 노름을 하나하나씩 섭렵해 나갔다. 노름의 어원이 ‘놀음’이라면 오락과 재미 위주의 놀이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노름으로 바뀌었다. 유희에서 도박으로 격상된 것이다. 판돈은 동전에서 지폐로 진일보하며 판이 커졌고 기계는 화투장과 트럼프로 바뀌었다. 중학교 입학 직전에는 마치 선행 학습이라도 하듯 동양화 48폭에 둘러 쌓인 채 민화투, 육백, 나이롱뽕, 섰다, 도리짓고땡을 차례로 연마했다. 특히 섰다와 도리짓고땡에 탐닉했다. 섰다는 2장의 패를 가지고 겨루는 노름인데 족보와 베팅에 대한 심리 싸움이 매력이다. 상대의 마음을 읽으며 따라지 정도의 낮은 끗발의 패를 들고서도 통 크고 과감한 베팅 레이즈Betting Raise로 상대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었을 때의 짜릿함이란. 극도의 심리전은 열다섯 살 소년에겐 버거워 머리끝에 쥐가 나고 오줌을 지리기도 했지만 이때의 경험은 훗날 본격 도박인 포커판에서 육감을 동원하여 상대의 표정을 읽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도리짓고땡은 5장의 화투패 중 3장의 합으로 10 또는 20을 만들고 나머지 2장으로 승패를 가린다. 패 2장으로 단박에 승부가 결정되는 스피디한 섰다에 비해 여유롭다. 섰다가 직행이라면 도리짓고땡은 완행버스다. 패의 일부가 오픈되므로 남의 패 액면을 이리저리 살필 수가 있다. 길 가다가 눈에 띄는 차 넘버로도 10과 20을 짓는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숫자 조합을 보는 순간 바로 합계가 나올 정도로 덧셈이 아주 빨라졌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구구단처럼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콩콩팔(118), 끼끼륙(226), 심심사(334), 살살이(442), 이파장(2810), 삼팡구(389), 내친구(479), 꼬꼬장(5510), 쭉쭉팔(668), 펄펄사(884)
화투짝이 손안에서 자유자재로 놀아날 즈음 포커에 입문했다. 중2 때다. 신비한 마력을 가진 서양화는 내게 신세계를 선물했다. 반질반질한 트럼프 카드는 마치 「북치는 소년」의 싯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와 같았다. 교재 즉 책이 화투에서 트럼프로 바뀌고 학교 운동장이 좌식 방바닥에서 입식 테이블로 변하자 오그리고 포갠 책상다리에서 해방된 학생은 온종일 카드놀이를 해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부작용도 생겼다. 판이 길어지고 커질수록 친구들은 적으로 여겨졌고 페어플레이를 넘어선 속임수도 서서히 등장했다.
손놀림은 현란해졌으나 말초적 감성에 발이 묶여 종종 밤을 새우기도 했다. 충혈된 눈은 더 이상 순수한 소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우정과 친목은 뒷전이고 돈 잃고 친구 잃는 사태도 일어났다. 판은 일시적 심심풀이나 유희를 넘어 꾼들이 벌이는 도박을 닮아가고 있었으나 내기를 지나치게 즐기는 나의 노름벽은 시들 줄을 몰랐다. 중학 시절을 돌이키면 도박 학습에 관한 한 월반을 거듭했다. 초짜 급우들이 판치기, 짤짤이, 화투짝에 서툰 손질을 할 때 나는 선수들과 포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급기야 열심히 쌓아가던 도박의 성城이 허물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뺑끼’라는 도박 용어가 있다. 속임수를 뜻하는 페인트Feint의 비표준, 비속어다. 차범근 선수의 페인트 모션이 동네 축구에서 통하지 않듯 노름판에도 초짜나 하수들에겐 뺑끼가 먹히지 않는다. 또래 친구들과의 게임은 수준차로 인해 점점 재미를 잃어갔다. 고수들을 찾아 리그를 옮겨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학교에선 매주 월요일마다 모의고사를 치르고 전교생의 학년별 석차를 일등부터 꼴등까지 본관 앞 게시판에 공지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공부량이 성적을 좌우하는 시스템이다. 시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학 후 첫 시험 바로 전날, 포커 멤버들은 수정동 골목 안 친구 집으로 모여들었다. 정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나 혼자 뿐. 일요일 오후에 시작된 판의 열기가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야간통행금지 시기라 새벽 4시까지는 꼬박 판이 이어져야했는데 파장이 다 되어갈 무렵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레이스가 막판으로 치달으며 그날의 위너가 거의 가려질 시점인지라 ‘판이 깨졌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형국이다. 현장은 친구의 부모가 외지로 장기 출타 중이라 안가安家로 점찍어 둔 곳인데 참으로 운이 없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유물이 되었지만 골목 벽에 설치된 그놈의 ‘순찰함 ’때문에 일이 크게 꼬인 것이다. 당시 부산의 동구 국회의원이 김승목 씨였는데 그분 자택이 친구 집의 바로 옆집이었다. 야간 취약 시간대에 순찰을 돌던 경찰이 창문 커튼 사이로 새 나간 불빛과 소리로 낌새를 채고 급습했다. 모두 인근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평소 그림책 대신 소설책을 열심히 보았더라면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혐의로 체포된 후 한 말을 되뇌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안이 중대했다. 도박죄. 눈앞이 캄캄했다. 부모나 학교에 알려지면 큰일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최소 무기정학 처분은 각오해야 한다. 관할 동부경찰서로 이첩되면 일이 더 커지기에 읍소했다. 일시적 오락에 불과한 점, 상습 도박이 아닌 점, 학생 포함 다들 나이가 어리다는 점,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점 등 정상을 참작하여 훈방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장문의 반성문에 감동했는지 반성문을 잘 썼다는 칭찬과 함께 선임 경찰관의 장시간 훈계 끝에 파출소를 나왔다. 밖에는 동이 터고 있었다.
1975년 봄, 대학가는 낭만이 춤을 추었다. 술과 담배, 연애는 자유와 성인이라는 이름 하에 무한정 허락되었고 통기타와 노래 선율이 봄처럼 피어올랐다. 캠퍼스 곳곳에 삼삼오오 활기가 넘쳤지만 대학의 낭만에 별로 흥을 못 느낀 나는 그나마 포커판에 얼굴을 내밀었다. 순찰함 사건 이후 한동안 업계를 떠나 있었지만 다행히 대학에는 그 허전함을 채울 만한 먹거리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교내 잔디밭, 휴게실, 서클룸과 근처 하숙집엔 시험 기간 중에도 장이 섰다. 3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학생들과의 승부는 어린애 팔 비틀기였다. 판이 커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가웠다. 특히 외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호구이자 쉬운 먹잇감이다. 용돈은 물론 아르바이트 수입, 하숙비, 심지어 등록금까지 투입되어 판돈이 풍성했다. 교련 시간의 총 값 명목으로 시골 부모를 속여 삥을 치는 녀석도 있었다.
복학생까지 가세한 포커판에 신입생인 내가 왕초 노릇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루저들에게는 인심을 잃지 않았다. ‘판돈 일곱 닢에 노름꾼은 아홉’이라는 속담처럼 노름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돈을 초장에 다 잃고도 개평 받으려 끝까지 남아 있는 친구, 장소 제공은 물론 돈 빌려주고 잔 돈 바꿔주면서 구전口錢 속칭 데라를 떼는 친구, 담배나 먹거리 외 끗발용 드링크제를 대주고 서비스차지 받는 친구, 딜러를 자청하는 친구 등 이들에게도 섭섭하지 않게 했다. 개평을 후하게 주다보니 한때 ‘개평’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던 나는 구경꾼 포함 그날 참석자 모두를 학생 출입이 쉽지 않은 중국집이나 유흥업소에 데려가 독한 술로써 그들의 쓰린 속을 달래 주기도 했다.
동업자 정신에 충실했다. 노름판에서 딴 돈은 절대 집에 가져가지 않는다는 나름의 도박 철학을 행했다. 그럼에도 진리 탐구의 상아탑 아래 눈속임과 거짓으로 도배된 포커판은 탐욕의 찌꺼기만 남겼다. 회한이 왔다. 사촌 형제들과의 광복절 매치에서 포카드(확률 24/100,000)를 스트레이트플러쉬(확률 62/1,000,000)로 누르는 기적을 이루며 포르가즘을 만끽 하기도 했지만 눈보다 빠르다는 나의 손은 군 입대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카드를 접었다.
7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고스톱은 화투 한 벌로 시간과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놀이다. 그때까지 도박의 양대 축이었던 섰다와 포커를 단숨에 압도하며 국민 오락, 국민 놀이로 우뚝 섰다. 80~90년대엔 ‘고스톱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그 열풍이 대단했다. 최근의 놀이 문화가 인터넷 게임 등으로 옮겨가는 추세지만 아직도 고스톱은 중장년층과 노인들에게 대중 오락으로 건재하다. 고스톱에 임할 때는 먼저 점백 정도의 친목을 위한 단순 놀이인지 아니면 반드시 돈을 따야 하는 도박인지, 즉 게임과 갬블링의 경계를 잘 구분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순수 친목이나 접대 고스톱이 아닌 실전 고스톱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기본 3점은 백 번 줘라
– 대형 사고를 노려라
– 쓰리고는 재미 교포의 이름이 아니다
– 손에 든 패는 일곱 장에 불과하다
– 설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 포기할 줄 알아야 이긴다
– 판쓰리 기회를 주지 마라
– 꼴찌는 있어도 2등은 없다
– 헌신짝처럼 버리는 패가 애첩일 수도 있다
1987년에 출간된 김난승의 『비법 쓰리고』에 소개된 주요 금언이다. 나는 밑줄을 그어 가며 고스톱 관련 서적 『실전 고 스톱』과 『비법 쓰리고』를 10회독 이상 하며 이론을 무장했다.
고스톱은 과학이며 확률 게임이다. 2배의 금액으로 계산하는 배판은 고스톱의 큰 묘미 중 하나다. 따따 혹은 따불Double로 일컬어지는 배수의 원칙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배판의 조건은 쓰리고, 흔들고, 광박, 피박, 멍박(멍텅구리 열끗), 나가리판(승자가 없어 판이 무산되는 것) 등 통상 6개인데 극단적 케이스로 6개 전부 바가지 쓴다면
2×2×2×2×2×2=64 즉 64배의 금액으로 계산된다.
예를 들어 최종 점수가 30점이라면 기본 3점에 비해 640배의 위력이다. 점당 천 원 고스톱의 경우 3천원 지출이 192만원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배판은 승자에게 대박, 패자에게 쪽박이라는 극단을 선물한다. 특히 패자에게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 복구 불가능한 대참사다. 그래서 기본 3점은 백 번 주더라도 대형 사고는 막아야 하는 것이다.
고스톱의 꽃은 ‘쓰리고’다. 쓰리고는 쾌감이 큰 대신 매우 어렵다. 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으로 축구의 해트트릭, 배구의 트리플 크라운, 농구의 트리플 더블이라는 대기록에 견주기도 한다. 평소 ‘양에서 질이 나온다’는 말을 굳게 믿고 있다. 글이나 예술 작품의 경우 다작을 하는 시기에 걸작이 나온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파워 블로거나 유튜버들도 콘텐츠를 많이 내놓다보니 유명해졌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천재 화가 피카소도 3만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일반인의 성공 비결은 수많은 도전에 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재개한 나의 고스톱 역사도 끊임없이 수많은 시도 끝에 ‘파이브고Five Go’라는 대위업을 이루었다. 고스톱은 쓰리 고 이상 나오기가 상당히 어려운 구조다. 실현 가능한 최다 Go의 횟수는 다섯 번이다. 초구에는 3점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므로 2구부터 Go에 들어가게 되는데 3, 4, 5, 6구까지 중단 없이 이어져야 최대 다섯 번의 Go가 완성되는 것이다. 파이브고는 고수들의 세계에서도 평생에 한번 구경조차 쉽지 않은 업적이다. 1991년 봄, 직장 선후배들과의 신춘매치에서 대운이 작용해 기적적으로 이룬 쾌거다. 이를 기념하는 핸드 프린팅 이벤트를 준비할까 했지만 소박한 술자리로 대신하였고 카운트파트 2명 포함 참석자 5명의 이름은 수첩에 적어두었다. 이날 이후 나는 고스톱 업계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목표가 사라졌고 더 이상 계속해야 할 명분마저 없어졌기 때문이다.
흔히 주색잡기라 하여 술, 여자, 도박으로 남자의 세계를 특정짓기도 한다. 도박은 남자의 본능적 욕구와 해방감을 만족시킨다. 승패에 대한 모험과 스릴은 권태적 일상에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동시에 억압된 감정을 화투짝에 실으면 우울과 긴장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가벼운 술내기, 밥 내기를 통한 공술, 공밥의 기쁨 또한 크다. 밤새 돈을 잃었더라도 오랫동안 오그렸던 양반다리를 풀고 잠시 바깥으로 나와 참았던 오줌을 갈기면서 허탈 속에 바라본 새벽녘의 그믐달, 그 박명薄明을잊을수없다.
도박은 아무런 가치 창조 없이 돈이 오고 간다.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이지만 정산해보면 결국은 잃은 사람밖에 없다. 승부 세계의 냉정함과 돈의 힘을 어릴 적부터 터득한 나는 그 만큼 빨리 손을 씻게 되어 다행이다. 도박판에는 나이, 성별, 지위, 인격, 권력과 돈마저도 끗수 앞에서 무시된다. 높은 족보와 높은 끗수가 왕이다. 끗수에 따라 승부가 나는 실로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높은 끗수가 잇달아 나오는 끗발 앞에는 어느 누구도 무력하다. 끗발로 무릎 꿇게 만드는 도박 세계는 인간의 삶과 다름 아니다. 이런 도박판을 끝없이 노크하고 배회하게 만드는 도박 심리의 밑바닥에는 탐욕이 꿈틀거리고 있다. 대박과 일확천금에 대한 경외는 사술詐術에 사술邪術을 불러온다. 따라지와 망통을 잡고서도 광땡이나 장땡을 넘본다. 인생을 도박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 끝은 가산을 탕진하고 몸을 망친다. 막판에 마누라를 걸고 벌이는 막장 스토리는 씁쓸하다. 다행히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탐욕이 줄어든다.
나의 왼손에는 카드나 화투장 대신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패를 돌리고 돈을 세던 오른손은 펜을 쥐고 있다. 도박은 일깨운다. 인생은 검은 커튼 속에서 요행을 바라며 뒤집는 한판 도박이 아니라 진지한 노력과 땀의 결정이란 사실을.
삶의 고비마다 마지막 한판 승부에 내 존재를 깡그리 걸고, 마지막 카드 한 장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당겨 올리던 순간을 떠올리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오랜 세월 사행의 도박에 빠져 있다가 착하고 바른 길로 돌아온 회심回心의 순간처럼.

평화의 길, 시인의 눈으로 여는 평화
– 거창평화학교 영상 강의(2020.11.27)
경남 거창에는 「평화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가 있습니다. 제도권 학교는 아니고 평화의 씨앗을 심는 학교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것의 목표는 평화임을 모토로 하는 학교입니다. 올해로 3년째 운영되고 있는데 학교 분위기가 이름에 걸맞게 참 평화로워요.
여러분 제 얼굴 한 번 보시겠어요. 인상이 평화롭게 보이지 않나요. 평화가 넘쳐나서 이목구비의 배치가 너무 자유스러운가요. 평화학교에 입학하면 몸도 마음도 평화롭게 변합니다. 오늘 강의도 평화롭게 진행하겠습니다.
저의 출근길을 소개하면서 평화의 길로 안내합니다. 저는 시골 버스를 타고 거창에서 합천으로 출근합니다. 아침 7시 첫차를 타고 가는데 버스 이용객들은 대부분 60~80대 어르신들입니다. 버스 안 장면 하나를 얘기해 드릴게요. 코로나 시국이라 반드시 마스크 착용 후 승차해야 함에도 그냥 버스에 오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세요. 버스 기사가 승차를 제지하면 마스크는 주머니 안에 있다, 가방 안에 있다고 변명하며 일단 타고 보는데 실제로는 없는 경우가 많죠. 그러면 버스는 가다가 곧 멈춰버립니다.
기사가 백미러로 보면서 “내리세요!” 하고 고함지르면 안 내리고 계속 마스크를 찾는 시늉을 하죠. 주위 승객들은 폭탄 피하듯 흩어져 자리를 옮기고, 기사의 큰소리와 함께 화난 승객들도 덩달아 야단치면 버스 안은 흡사 전쟁터가 됩니다. 그 순간 위기 상황을 지켜보던 승객 한 분이 여분의 마스크를 꺼내 건네주면 다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버스는 평온을 되찾고 상황은 종료됩니다. 마스크 한 장이 전쟁터로 변한 버스를 평화로 바꾼 셈이죠. 이 일화는 평화는 조그만 것에서 시작됨을 시사합니다.
코로나와의 전쟁 때문에 이런 말이 있죠.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잃어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없는 일상을 상상해보셨나요? 평화가 없다면 일상은 전쟁, 일상은 지옥이 되겠죠.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 갈등이 없는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림 한 점 보면서 진행하겠습니다.
비 오는 밤에 붉은 코트 차림의 여인이 기차역 플랫폼에 홀로 서 있습니다. 이 그림에 제목을 한 번 붙여보실래요? 저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로 제목을 붙입니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많이 알려진 노래죠. 11월에 어울리는, 그리스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11월 어느 날, 한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남겨두고 그리스 레지스탕스의 집결지인 카테리니행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납니다. 전쟁이 끝나고 참전 용사들은 다 돌아오는데 그 청년은 소식이 없습니다. 여인은 그가 떠났던 고향 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청년은 끝내 돌아올 줄 모릅니다. 전쟁은 사랑마저 앗아가 버립니다.
사진 한 장 보시겠습니다. 안면이 많은 사진이죠. 6·25전쟁에 참전한 학도병 사진입니다. 그땐 철모도 귀했는지 고등학생들이 교모를 쓰고 1~2주 총검술 정도 훈련 받고 전장에 투입됩니다. 사진 속 9명 중 과연 몇 명이 돌아왔을까요? 전장으로 떠나는 18세 어린 청년의 눈망울을 기억한다면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진 한 장 더 보고 이어가겠습니다.
부산항 제3부두의 파월장병 환송식 후 배가 이국땅으로 떠나는 장면입니다. 사진이 흐리지만 자세히 보면 거대한 수송 선에는 층층이 도열한 장병들이 흔드는 태극기와 부두에 운집한 수많은 인파의 태극기 물결이 어우러지네요. 여기엔 군인들의 가족과 학생, 군악대, 연예인 위문단이 함께합니다. 자매선으로 불리는 또 한 척의 수송선이 맞은 편에 정박 중입니다. 길이 200미터, 7층 건물 높이로 3천명이나 태울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미국 수송선은 베트남까지 엿새를 항해합니다. 연예인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끝나고 나면 장병들은 “아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로 시작되는 「잘 있거라 부산항」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데, 이때 부산 앞바다는 온통 눈물바다가 됩니다. 생과 사의 기약도 없는 맹호와 청룡 용사들을 태운 수송선은 뱃고동 부웅~ 울리며 항구를 떠납니다. 중학교 시절 저 부두 저 장소에서 태극기 흔들며 함께 눈물짓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다음 사진 볼게요. 이 사진 역시 부산항 제3부두에서 모자가 이별하는 장면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 무엇이겠습니까? 꼭 살아서 돌아오라, 아니겠어요. 그런데 수많은 대한의 아들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강원도 화천 소재 「베트남 참전기념관」 자료에 의하면 1964년부터 1973년까지 국군 파병 인원 31만 명, 전사자 4600명, 부상자 16000명 이외에 많은 참전 용사들이 팔순의 노병이 된 지금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평화가 깨진 모습을 그림과 사진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본 강의 주제로 넘어가 시인들의 눈에 비친 평화는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도종환, 김수우, 김바다, 김병준 네 시인의 작품을 소개드립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시는 김수우 시인의 「허리디스크」입니다. 김수우 시인은 부산 출신 여류 시인이자 사진작가인데, 부산에서 인문학 카페 「백년어서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허리디스크
김수우
자세가 잘못된 까닭이라며
의사가 꼬리뼈에 주사를 놓는 순간
오래 잊었던 눈물이 솟구쳤다
그랬지, 꼬리뼈가 있었지
까맣게 잊어버렸던 원시를 발견한다는 것은
죽음에 당도하는 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건
꼬리뼈가 휘었다는 건
걷는 것도 앉는 것도 엉망이었다는 말
믿음도 절망도 기다림도 엉터리였다는 말
꼬리뼈가 휘어
내 책상과 내 도시, 내 혁명도 저리 비틀어졌던가
어정어정 걸어가는 한 마리 말똥게
참 미안하구나 부끄럽구나
병원을 나서서도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아
핑계를 찾아본즉
나 때문에 한반도가 허리디스크가 심하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걷기가 저리 어렵다는 말이다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고 시인은 잘못된 자세에 대해 생각 합니다. 내 삶이, 우리네 삶이 휘어지고 굽어 있기에 한반도도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고 또 평화를 위해 걷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내 몸의 평화를 한반도의 평화로 확장 연결시킨 시인의 시선이 놀랍죠.
이번에는 도종환 시인의 시를 감상하시겠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중학교 교사를 거쳐 문학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3선 국회의원입니다.
출렁이는 평화
도종환
평화는 대개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이제 정말 끝이다 했다가
이제 다시는 용서하지 말자 했다가
엎어지기 직전의 출렁이는 수평처럼
위태하게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
내면에 진흙탕이 된 것들을
구석에서 끄집어내 씻어내는 동안
흙물과 함께 곤두박질치는 물방울처럼
쏟아지는 욕설과 함께
길게 내뿜는 한숨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시인은 평화가 출렁인다 하네요. 출렁이는 파도, 출렁이는 마음처럼 출렁이는 평화라고 했습니다.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거친 격랑도 광대한 바다 같은 마음을 갖고 중심을 잘 잡으면 표류, 좌초하지 않고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든, 가정이나 조직의 평화든, 한반도의 평화든 진정한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출렁이는 파도에도, 흔들리는 세상에도, 아슬아슬한 삶에도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합니다.
평화를 주제로 한 시 한 편 더 보시겠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졸시 「한 이불권」을 소개드립니다. 부부가 방이나 이불을 따로 쓰는 소위 각방족, 각이불족이 부쩍 늘어난 요즘 세태에서 가정의 평화를 주제로 한 시입니다.
한이불권
김병준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라는 말 각방 또는 각이불족의 멀어진 마음을 촘촘히 누비는 이음매 사랑을 잃은 손발들은 인연 닳아 해진 잠옷자락이나 이불자락이라도 끌어당겨야 하지 않겠나 밤새 몇 번씩 뒤척이는 딴청도 모른 척 슬며시 끄집어다 놓아야 한다 한 이불 안에서만 버텨 있다면 느슨 해진 금슬도 잠결인 듯 비비고 꿈결인 듯 뭉개다 보면 이불솜처럼 부풀어 올라 결국 한몸이 된다 꿈쩍 않고 얼었던 몸에 봄물이 들었던 소리 어쩌다 잠시 돌아눕게 된 북에서 남까지도 어차피 한 이불권이다
꿈쩍 않던 몸이 한 이불 속에선 이불솜처럼 부풀어 올라 한몸이 되고, 서로 춤을 추다가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사랑을 접은 자들은 차가운 방에 회심의 이부자리를 펼 때입니다. 부부의 평화는 물론 어쩌다 잠시 돌아눕게 된 남과 북의 통일까지 염원합니다.
이제 마지막 순서로 시집 한 권을 소개드리겠습니다.
시집 제목은 『수달을 평화대사로 임명합니다』. 제목이 참 재밌죠. 평화의 길을 알려주는 김바다 시인의 동시집입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과 평화와 통일을 꿈꾸며 만든 시집이며, 어린이와 청년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시집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시지만 어른에게도 울림이 큽니다.
시 몇 편 함께 볼까요.
발 디딜 틈 없이
촘촘히 묻힌 지뢰밭에서도
동물들은 자기들만의
길을 만들어 다닌다지
– 지뢰밭에도 길은 있어
밤마다 어둠이
살푼살푼 내려오면
지도에서 사라지는
북쪽의 깜깜한 나라
– 밤이면 사라지는 나라
북쪽 가는 경의선으로
한번 달려보고 싶어서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엉덩이를 들썩들썩
– 임진각의 꼬마기차
음악은 날개 없이도 날아가
국경을 넘고 넘어
귓속으로
마음속으로
쏙쏙 스며들지
– 음악은 국경이 없어
언제 그랬냐는 듯
나폴락나폴락 봄꽃을 내밀며
봄이 오듯이
평화도 그렇게
우여곡절 겪으며 오고 있겠지
– 평화로 가는 길
음악처럼, 봄처럼 평화가 오고 있습니다. 아직은 잔잔한 바람이지만 시골의 대문과 담이 없는 마당처럼 사방팔방에서 평화의 강풍이 휘몰아치길 바라면서 질문 하나 던지며 마무리 짓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평화란 무엇입니까?
늘 마음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새벽에 시를 쓰며
– 문학 입문기
40대 후반 나이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맞이한 객지 거창 에서의 삶은 낯선 이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가 고향이 아니었기에 지역 동화에 가장 빨리 젖어드는 방법은 바로 술이었다. 맑은 공기 때문이었는지, 현지인의 너른 품과 시골 인심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문턱을 낮춘 무장 해제 때문이었는지 밤새 술을 마셔대도 취할 줄을 몰랐다. 소읍이라 5분이면 족한 짧은 출퇴근 시간 또한 5시간 정도는 너끈히 술판에 빠져드는데 한몫을 했을 터. 차들이 모습을 감추고 인적도 끊긴 새벽 거리에 마주친 이마에 닿는 바람과 어슴푸레한 비몽사몽의 묘한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술이 일과 후 내 생활의 중심이 된 지 2년쯤 지날 무렵 즐거운 술자리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옥에는 티가 있고 좋은 일에도 탈이 나는 법. 문제는 인구 수만 명에 불과한 좁디좁은 지역사회에서 술과 함께하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대부분 간파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첫 술잔을 나누기가 바쁘게 초면인 사람조차 형님, 아우 하다 보니 웬만한 여자들은 거의 형수님, 제수씨요 잠시 스쳐가는 안면도 소위 교회 오빠, 성당 누나처럼 금방 살가워졌다. 연예인도 공인도 아니었지만 오롯이 자유인으로서 청산별곡만을 구가할 수는 없었다. 술 이외의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술에 기울어진 막행막식의 삶에 균형을 잡아준 것은 문학이었다. 지역의 문학회에 가입했다. 혹자는 술을 마시니 봄산에 꽃이 핀다며 자연과의 합일을 내세운다. 시인에게는 섬광이나 번개 같은 영감을 위해 술이 필수적이라며 내게 술을 강권했다. 하지만 문학에 갓 입문한 나는 술보다 시에 취해야 했다. 술잔 대신 연필 잡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문학은 돈을 세는 재미보다 별을 헤는 기쁨을 주었고, 가격보다 가치에 눈 뜨게 했으며, 나의 정신적 누추를 말끔히 닦아주었다. 술에 쩐 냄새가 차츰 맑은 글의 향기로 바뀌어갔다. 주향이 사라지고 문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앞만 보던 걸음은 숨을 잠시 멈추고 옆과 뒤를 살피는 여유를 갖게 되었고 삶에 여백이 생겼다.
길 가다가 풀꽃 하나에도 눈길을 준다. 작은 틈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아픔을 함께 울어 줄 수 있었다. 짜릿하고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져 있던 도시적 오감이 즉흥과 속도의 강박에서 벗어나 느림이 주는 아름다움에도 눈이 갔다. 문학으로 인해 인접 예술인 음악, 그림, 영화, 사진에도 제법 눈뜨게 되었고 세상은 더 넓고 아름답고 희망차고 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하필 문학인가? 사람들은 묻는다. 돌이켜보면 목표를 향해 직진하며 모질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보험 세일즈로 황폐 해진 마음을 다잡고 다독여줄 예술적인 그 무엇이 필요했다. 직업 특성상 말로써 먹고 사는 내게 오래전부터 말보다 글의 힘이 세다는 것을 일깨워준 예화가 있다. 「걸인의 팻말」로 알려진 이야기인데 뉴욕 브루클린 다리에서 한 시각 장애인이 도로가에 앉아 구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앞을 못 보는 장님입니다. 불쌍한 저를 도와주세요.”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그때 행인 한 명이 다가와 팻말의 글귀를 바꾸어놓고 사라졌다.
“봄은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걸인 앞에는 이내 동전과 지폐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앙드레 불톤이라는 프랑스 시인이 적은 것으로 알려진 팻말의 감동 글귀는 행인들의 냉담을 관심으로 바꾸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게 만든 것이다. 글의 위력이다.
술도, 밥도, 돈도 안 되는 문학을 노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우연히 접한 시 한 편, 안도현 시인의 「무말랭이」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片片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 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 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글썽 울었다
– 안도현 「무말랭이」 전문
꼬들꼬들해진 외할머니 세상 뜨시고 나니 고방에서 토해내던 귀뚤귀뚤 울음도 침묵이다. 내가 대신 귀뚜라미가 되어 밤새 운다. 눈 내리는 밤에 만난 정일근 시인의 「적寂」이 주는 애잔함은 세상의 길에 줄을 끊고 비구니 스님이 된 초등학교 동창의 파르스름하게 떨리는 목덜미를 떠올렸고, 바람이 차가운 날 송수권 시인의 「여승」을 읽고서는 이 세상의 작고, 낮고, 여린 사물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했다.
그러나 매주 한 번씩 모이는 문학 공부 합평회 시간이 늘 걱정이었다. 두레밥상처럼 쭉 둘러앉은 자리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다. 차려진 밥상에 올려놓은 숟가락 하나 몫이 그리 힘들 줄 몰랐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기에 고작 내뱉는 말이라곤 “참 좋으네요. 잘 읽었습니다.” 짧은 두 문장 뿐.
안쓰러워하는 문우들이 그냥 씹어서 떠먹여주는 말과 글의 성찬마저 바로 삼키지 못하고 목구멍에 한참 걸려 있었다. 그나마 말석에 앉은 어설픈 신참에게 손 내밀고 일으켜 세워준 선배들 덕에 가파른 문학의 산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들이 고맙다. ‘예술 마당’이라는 뜻으로 모인 「예장」 동인은 회원을 넘어 문학 동지다. 제일 연장자인 내게 문학은 인생을 걸만한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을 위해 입문 때의 마음가짐처럼 시골 학교의 소사, 교회의 종지기, 절의 시봉을 자처한다. 엉성하고 허술하지만 수업 준비물도 챙기고, 교재도 복사하고, 마당도 쓸고, 시간 되면 종이라도 치는 지금의 소임이 기쁘다.
다시 입문 시절을 기억한다. 좋은 시집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으며 시에 대한 혈기를 풀어나갔다. 2년 동안 700권은 족히 되었으리라. 특히 시집 끝 부분에 실린 해설을 빠짐없이 탐독했다. 또한 시 전문 잡지 2권을 정기 구독하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는 시와 시인의 칼럼, 문학 담당 기자의 기사를 스크랩했다. 30여권의 스크랩북이 쌓이는 동안 손은 많이 갔지만 공들인 시간이 주는 아날로그적 재미 또한 쏠쏠하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문학 정신과 예술적 기운을 받아들였다. 고은 김이듬 나희덕 문정희 문태준 박주택 복효근 신경림 신달자 신용목 신중신 유병근 유홍준 이기철 이대흠 장석남 전동균 정현종 정호승 정희성 천양희 최하림 한승원… 이분들이 입문 초창기에 직접 만난 시인들이다.
고행과 순례의 마음으로 접한 문태준 시인의 「맨발」과 송수권 시인의 「아내의 맨발」에 매료되어 두 시인의 시집들을 깡그리 구입하여 통독했다. 이른바 전작주의자가 된 것이다. 전동균 시인의 「초승달 아래」를 읽은 후 어디 갈 데 없으면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거리며 지나가는 헐렁한 스웨터 입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의 배경인 강릉의 등명 해변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거창으로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으레 애송시 「방문객」으로 환대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방문객」 부분
외지에서 멀리 시골 변방까지 찾아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며 내겐 생의 축복이다. 낭송 후에는 손님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현종 시인을 거창으로 초청했다. 원작자가 실제 방문객이 되어 먼 곳까지 내려와 부드러운 바람으로 후배 문인들의 마음의 갈피를 쓰다듬어주고 가셨다.
양평군 서종면 북한강가에 사시는 최하림夏林 시인을 찾아 뵙고서는 졸시 「여름 숲은 그냥 오지 않는다」가 생겨났고, 나의 텅 빈 문학 곳간을 채울 몇 년 치 양식을 얻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의 숲에 깊이 들어갈수록 길을 잃고 헤매는 느낌이었다. 문학의 산은 높고도 험했다. 한계를 절감했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음을 실감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천재성’과 ‘달란트’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맴돌았다.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 한 수를 짓는다는 칠보재七步才는 차치하고 문예반과 백일장 경험조차 없는 나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기성 시인이나 주위의 뛰어난 글 솜씨에 열등감을 느꼈다. 개성과 독창성이 전제가 되는 예술 세계에 나의 상상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랜 세월 일과 돈, 술에 경도된 내 삶의 모서리는 어느새 닳아 있었고, 촉수는 무디어져 있었다. 창작의 고통은 컸다. 원고 마감이 생업인 보험 마감보다 더 힘들고 빠듯했다. 글이 된다 싶으면 문학성이 발목을 잡았다. 내 심상은 상투라는 벽에 번번히 막혔으며, 시의 행간에서 곧잘 길을 잃었다. 시가 막힐 때는 눈물도 났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냥 고급 독자로 남았으면…’
이런 생각이 종종 치밀어 올랐다.
그럼에도 주위에서 시인이라고 불러주는 바람에 시작을 멈추지 않았다. 문학의 언저리를 오래 돌다 보니 시인이라는 호칭도 얻었지만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직업이 아닌 취미 생활임을 잊지 않았다. 전업 시인이 아니기에 자기만족, 자기도취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부추겼다.
시가 막혀 갑갑할 때는 통영 바다를 생각했다. 백석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통영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바다가 있다. 내 고향 통영을 자주 찾아 문학관, 기념관, 생가, 시비, 작가의 거리 등 이곳 출신 예술인들의 작품 세계와 예술혼을 두루 살폈다. 백석과 이중섭이 유치환, 윤이상과 자주 어울려 다녔던 강구안 골목도 거닐었다. 유치환, 유치진, 윤이상,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전혁림을 탄생시킨 천혜의 자연에서 그들의 본능적 감각이 나에게도 조금은 흐르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도무지 시가 안 되는 어느 날, 치기가 발동했다. 이른바 필명筆名이란 것을 만들어 보았다. 늘 제자리인 글이 조금이나마 주목 받아볼까 싶어 연예인의 예명처럼 나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글의 진전은 없었다.
‘나건필’. 대한민국 남자 가수 3인방 나훈아, 김건모, 조용필의 조합으로 최고를 지향한다는 뜻도 담았지만 작가들의 의욕을 북돋우는 인사가 “건필하십시오.”인지라 나 스스로 건필하겠다는 다짐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후 시가 오히려 뒷걸음친다는 지적도 받았지만 살아가며 이름 하나 더 있다는 여유로 만족하며 지금껏 병기하고 있다. 나건필과 관련되는 팬클럽 2개가 결성된 것도 덤이다.
「나사모」와 「필통」. 나사모는 나건필을 사랑하는 모임이며, 필통은 나건필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표방한다. 나건필은 나의 전용 연필이기도 하다. 글이 한계에 부딪치고 뚝뚝 끊어진다 싶으면 연필심에 침 묻혀 가며 온몸으로 쓴다. 나건필이 몽당연필 될 때까지 글을 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오늘도 연필을 깎는다.
좋은 글은 안간힘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며칠 몇 달을 다투고 겨루다가 난산했던 시가 좋다. 고도 근시의 슈베르트가 자다가 떠오른 악상을 바로 오선지에 옮기기 위해 잠잘 때도 안경을 벗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나 역시 꿈속에서 하늘이 내린 축복 같은 싯귀에 놀라 새벽잠이 깨었는데, 안경을 찾느라 더듬거리는 순간 주옥같은 시상이 한방에 훅 날아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 허탈감에 엎드린 채 바닥을 치고 이마를 찧기도 했다. 입문 시절 쓴 아래의 시가 그렇다.
새벽이면 언제나 부풀어 오른다
꼿꼿이 서는 문학적 발심
잠든 마누라에게
하릴없이 온몸으로 시비 걸곤 했던 그 시각
요즘은 시詩에 대고 입질한다
어르고 달래고 치대고 보듬으며
잠 덜 깬 낯선 언어들을 희롱한다
한껏 약이 오른 시어들이 잠시 뒹굴다가
등 돌리고 눕지만
어릴 적 몽정처럼 비릿한 시어들을 쏟아낸다
아침 햇살 비치면
곧추선 새벽 금세 사라지고
벌거벗은 시는 몸을 감추지만
내일도 어김없이 부풀 새벽은 돌아오는데
내 어찌 시인 되기를 포기할 수 있겠나
– 졸시 「새벽에 시를 쓰며」 전문
나름의 노력으로 문학이란 가파르고 긴 길이 완만하고 짧게 다가오기도 한다. 끝이 없는 길이지만 시인이란 타이틀을 얻었고, 시집도 한 권 내었다. 여러분의 따뜻한 시선과 응원 덕분이다. 세상을 헤아리는 서정은 부족하지만 글이 삶과 다르지 않고 어우러져야하기에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살핀다.
졸시집 『거울을 보는 남자』 중 ‘시인의 말’로 문학 입문기를 마무리한다.
강물처럼
길게 이어져 온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뒤늦게 바라보는 문학의 거울 속에
사진처럼 정지해 있던 한 남자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제의 이야기는 오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설 것이다.

저편, 저 너머
2022년 7월 12일 초판 1쇄 펴냄
지은이 _ 김병준
펴낸이 _ 신승열
펴낸곳 _ 도서출판 덕유아침
등록번호 _ 제2015-4호
주소 _ 경남 거창군 거창읍 거창대학로72,BI센터 2204호
전화 _ 055-942-8288
이메일 _ hyun919@hanmail.net
홈페이지 _ http://www.nomadview.co.kr
모바일에 덧칠한 작품 새롭고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병준작가님 더욱 발전 하시길 기원합니다김병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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