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綿厚. 關於漢以前東北「貊」族考古學文化的考察──兼論大石棚和石棺墓文化的族屬與時代[J]. 文物春秋, 1994[01]46-58.
王绵厚. 关于汉以前东北“貊”族考古学文化的考察──兼论大石棚和石棺墓文化的族属与时代[J]. 文物春秋, 1994[01]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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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요동의 고인돌 유적지 59곳이 소개된다.
東北地區大石棚、積石墓、石棺墓文化分布概覽表
| no. | 名稱 | 時代 | 地点 | 遺存現狀及遺物 | |
| 1 | 1-1 | 老鐵山積石墓 | 新石器時代晚期 | 旅順口區老鐵山、將軍山、刁家村北山等地 | 調查發現四十餘座,出土灰褐陶、磨製石器和磨光黑陶,后者與“龍山文化”關係密切。 |
| 2 | 1-2 | 于家砣頭積石墓 | 商末周初 | 大連市旅順口區鐵山于家村 | 面積960平方米,發現墓葬58座,多單室墓,出土陶器為夾砂黑褐陶飾編織紋。 |
| 3 | 1-3 | 後牧城驛石棺墓、積石墓 | 春秋-戰國 | 大連市旅順口區營城子東“樓上”和後牧城驛村東北“崗上” | 共發現三座,長方單室石棺墓。隨葬有青銅短劍、斧、鑿、刀等。 |
| 4 | 1-4 | 三澗堡石棺墓 | 春秋 | 大連市旅順口區三澗堡蔣家村 | 出土青銅短劍二件,有火燒痕跡。 |
| 5 | 1-5 | 北嶺積石墓 | 春秋 | 大連市旅順口區江西鎭小潘家村北嶺 | 出土曲刃頸青銅短劍四把。 |
| 6 | 1-6 | 小關屯石棚 | 青銅時代 | 大連市金州區向應鄉小關屯東山上 | 共兩座,其一殘,另一以花崗岩構築,四壁石塊合成箱形上有蓋石。 |
| 7 | 1-7 | 大佛石棚 | 青銅時代 | 大連市西崗子區大石佛寺頂部 | 多毀不存,存殘骸。 |
| 8 | 1-8 | 徐家溝石棺墓 | 戰國 | 大連市長海縣大長山島徐家溝 | 出土青銅工具多種,均經火燒,曲刃短劍、直刃短劍五件。 |
| 9 | 1-9 | 臥龍泉積石墓 | 春秋-戰國 | 大連市金州區董家溝臥龍泉村 | M5為積石墓,出銅劍、石劍一把、銅斧、銅鏃,經火燒。 |
| 10 | 2-1 | 劉屯石棚 | 青銅時代 | 大連市新金縣安波鄉劉屯東山坡 | 花崗岩構築,已坍塌蓋石破碎。 |
| 11 | 2-2 | 劉屯石蓋墓 | 青銅時代 | 遼寧省新金縣安波鄉劉屯西山 | 共十座,地下土坑上蓋大石,出土夾砂黃褐陶壺,人骨經火燒。 |
| 12 | 2-3 | 王屯石棺墓 | 春秋 | 遼寧省新金縣普蘭店王屯西南山坡 | 二座,石板構築,長方形。出土夾砂褐陶罐五件,口沿飾附加堆紋。 |
| 13 | 2-4 | 雙房石棺墓石棚 | 西周一春秋 | 遼寧省新金縣安波鄉雙房村西山南坡 | 石棚六座,石棺墓三座。隨葬紅褐陶筒形罐、陶壺及青銅短劍等。石棚下有人骨。 |
| 14 | 2-5 | 大荒地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莊河縣塔嶺鄉大荒地村 | 花崗岩構築,東、西、北三面壁石套含蓋石斷裂。 |
| 15 | 2-6 | 楊屯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莊河縣太平嶺鄉楊屯西北 | 三處,花崗岩構築,出土夾砂紅褐陶片石鐵、人骨。 |
| 16 | 2-7 | 白店子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莊河縣英烈鄉小房身村白店子屯北姑嫂石山上 | 二座,花崗岩構築,四壁合圍成箱形,上覆蓋石。 |
| 17 | 2-8 | 石棚溝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新金縣石棚溝村 | 十餘座一群。出土夾砂粗褐陶,素面磨光。 |
| 18 | 2-9 | 河北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蓋縣楊運鄉河北村龍爪山上 | 三座,四壁多殘,蓋石多為橢圓形。 |
| 19 | 3-1 | 運雲寨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蓋縣什字街鄉連雲寨村西山坡下 | 二座,花崗岩構築,其一蓋石橢圓形,長3.4米,寬2.7米。 |
| 20 | 3-2 | 長脖崗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蓋縣什字街鄉牌坊村長脖崗上 | 三座,均已坍殘,僅存疊壓在一起的巨石。 |
| 21 | 3-3 | 鄒屯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蓋縣什字街鄉鄒屯村 | 石棚群,分布于五個地點,十餘座,花崗岩質,今皆坍毀。 |
| 22 | 3-4 | 紅石村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岫岩縣龍潭鄉紅石村河北 | 二座東西并立,其一立石三塊,石長1.18 – 1.84米。 |
| 23 | 3-5 | 山頭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岫岩縣朝陽鄉荒地村山頭屯東 | 二座南北相對,皆花崗岩構築。 |
| 24 | 3-6 | 高家堡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岫岩縣三家子鎭高家堡子村 | 二座,其一已殘,另一座多埋于地下。露出部分長1.9米,寬2.1米。 |
| 25 | 3-7 | 銅礦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復縣李宮鄉銅礦村 | 四壁巨石台圍,上覆蓋石出檐,內出土灰陶罐、紅褐陶壺及人骨等。 |
| 26 | 3-8 | 石棚峪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營口縣(大石橋)東北二十里石棚峪屯西南山。 | 花崗岩石板構築,四壁石高2米,寬2.5米,上覆蓋石,每邊長約4米。 |
| 27 | 4-1 | 姑嫂石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海城市析木城鄉姑嫂石村 | 二座,其一保存完好,由六塊石板支筑,蓋石長、寬各五米,石棚下發現陶片和人骨。 |
| 28 | 4-2 | 東牌樓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海城市牌樓鄉東牌樓村東南300米處 | 二座,皆花崗岩質,大石棚已坍塌,小石棚存蓋石。 |
| 29 | 4-3 | 二道河子石棺墓 | 春秋-戰國 | 遼寧省遼陽市河欄鄉二道河子村東湯河沿岸 | 石棺墓群,清理發現以石板砌棺壁,并以石板鋪成棺蓋。出土青銅短劍、夾砂褐陶器,素面、平底,無三足器。 |
| 30 | 4-4 | 大甲幫石棺墓 | 春秋時期 | 遼寧省撫順市前甸鄉大甲幫村北坡 | 石板砌筑石棺,棺底未鋪石,出土夾砂紅褐陶壺,下腹有橋狀耳。與遼陽二道河子石棺類同,無三足器。 |
| 31 | 4-5 | 大伙房水庫石棺墓 | 戰國 | 撫順市大伙房水庫 | 發現多座。1982年發掘六座,皆長方形石棺。出土夾砂紅褐陶壺并短劍。類型與遼陽二道河子、大甲幫等相似,無三足器。 |
| 32 | 4-6 | 廟後山洞穴石室墓 | 青銅時代 | 遼寧省本溪縣山城子村廟後山 | 洞穴墓群,僅清理十餘座發現系用不規則石塊砌基壙,火葬。隨葬陶器有夾砂紅褐陶碗、缽等,均手制、素面、平底無三足器。同出有磨製石斧、锛、刀、棍棒頭等。與遼東地区石棺墓同。 |
| 33 | 4-7 | 梁家石板墓 | 春秋-戰國 | 遼寧省本溪市明山區高台子鄉梁家村 | 石板砌筑墓室,出土青銅短劍兩把,雙鈕銅鏡一面。 |
| 34 | 4-8 | 石砬子石棺墓 | 春秋 | 遼寧省法庫縣大孤家子鎭石砬子村西南黃花山北坡 | 兩座,土壙石棺墓,出土夾砂紅褐陶壺、罐各一件。形制同遼陽二道河子。 |
| 35 | 5-1 | 南雜木石棺墓 | 春秋 | 遼寧省新賓縣南雜木鎭西山 | 土壙石棺墓,出山夾砂紅褐陶罐、石紡輪各一件。陶罐素面、假圈足、腹飾乳丁。 |
| 36 | 5-2 | 包家石棺墓 | 春秋-戰國 | 遼寧省新賓縣永陵鄉包家村北山 | 土壙石棺墓,出土夾砂紅褐陶罐三件,并石斧、石鑿、石鏟和青銅刀一件。 |
| 37 | 5-3 | 湯圖石棺墓 | 戰國 | 遼寧省新賓縣湯圖鄉河西村 | 土壙石棺墓。出土石斧、石鑿、石鑄。 |
| 38 | 5-4 | 城紅山石棺墓 | 戰國 | 遼寧省新賓縣城紅山南坡下 | 小型石棺墓、出土夾砂紅陶、泥質紅陶壺、高領出肩。 |
| 39 | 5-5 | 蓮花堡石棺墓 | 戰國 | 撫順市李家堡鄉蓮花堡後山 | 石棺墓群,出土夾砂灰褐陶雙耳罐,夾砂黑陶罐等。 |
| 40 | 5-6 | 茨溝石棺墓 | 戰國 | 撫順市碾盤鄉茨溝村 | 出土夾砂灰褐陶壺,夾砂黑陶雙耳罐、平底、斂口、橋狀橫耳。 |
| 41 | 5-7 | 大甸子石棺墓 | 戰國 | 遼寧省桓仁縣四河鄉大甸子村 | 長方形石板構成,底鋪卵石。出土青銅短劍和“明”刀錢200餘枚,人骨經火燒過。 |
| 42 | 5-8 | 和隆石棺墓 | 春秋 | 遼寧省西豐縣和隆鄉阜豐屯南山碾盤河上游 | 石棺群,長方石棺以石板拼成。出土夾砂黑褐陶罐、壺,素面、平底,及少量青銅器,無三足器。 |
| 43 | 6-1 | 李家台石棺墓 | 春秋-戰國 | 遼寧省開原縣李家台村西雞冠山下 | 兩座,長方形石棺墓,出土夾砂褐陶雙橫耳罐一件。形制與吉林“西團山文化”石棺墓出土品相同。 |
| 44 | 6-2 | 李家台石棺墓 | 春秋-戰國 | 遼寧省清原縣三家鄉李家堡東北大葫蘆溝 | 石棺墓四座,出土夾砂紅褐陶及青銅短劍,曲刃矛與大伙房水庫一帶出土者同。 |
| 45 | 6-3 | 馬家店石棺墓, 大廟石棺墓 | 戰國 | 遼寧省清原縣夏家堡馬家店村和甘井子鄉大廟村 | 遣跡及遣物與李家堡類型同。 |
| 46 | 6-4 | 土口子石棺墓 | 戰國 | 遼寧省清原縣土口子中學院內 | 出土夾砂黑褐陶壺一件。 |
| 47 | 6-5 | 小錯草溝石棺墓 | 戰國 | 遼寧省清原縣城東南小錯草溝口 | 墓壁用石板砌成,出土石劍兩把(仿銅器)。 |
| 48 | 6-6 | 葦塘溝石棚 | 青銅時代 | 遼寧省開原縣新邊鄉寧遠村葦塘溝後山岡上 | 花崗岩質,蓋石長約3.5米,寬2.9米,厚0.35米。 |
| 49 | 6-7 | 樹芽屯石棺墓 | 春秋-戰國 | 遼寧省鐵嶺市樹芽屯東黃土崗上 | 長方形石板石棺墓,出土陶器十四件,皆為夾砂粗褐陶罐、壺、豆。其中豆與吉林汪清百草溝同。 |
| 50 | 6-8 | 小孤娘山遺址 | 青銅時代 | 遼寧省丹東市振安區小孤娘山 | 面積2500平方米,出土夾砂紅褐陶。手制、素面、刻劃紋陶器。與東部石棚、石棺墓文化同。 |
| 51 | 7-1 | 大南溝、康家堡石棺墓 | 青銅時代 | 遼寧省清原縣萊河鐵礦大南溝西山頭以及康家堡等處 | 石棺墓群,僅康家堡三十餘座,出土黃褐陶罐、四耳壺,直頸出肩,橋狀耳。并出青銅短劍。 |
| 52 | 7-2 | 三道崴子遺址 | 青銅時代 | 吉林省集安縣城西北75公里二道崴子西溝 | 遺存豐富,其中陶器以夾砂褐陶素面平底罐、杯、豆,多橋裝橫耳,與后來高句麗陶器相近,無三足器。 |
| 53 | 7-3 | 長川遺址大朱仙溝遺址 | 青銅時代 | 吉林省集安縣黃柏鄉長川村和榆樹鄉大朱仙溝村台地 | 遺址均出夾砂紅褐、灰陶罐、壺、缽等,均手制、素面、無三足器,同出仿青銅器的石劍、石矛。 |
| 54 | 7-4 | 王家屯遺址 | 青銅時代 | 吉林省柳河縣王家屯 | 面積24平方米。出土有黃褐陶、紅褐陶罐等,皆手制、素面有板耳。并有磨製石鎬、石斧、石刀。 |
| 55 | 7-5 | 狼頭山石棺墓 | 青銅時代 | 吉林省永吉縣西陽鎭狼頭村 | 石棺皆板石立砌。出土有夾砂褐陶罐、碗等,多橫耳,遺址有三足器,屬“西團山文化”。 |
| 56 | 7-6 | 西團山石棺墓 | 青銅時代 | 吉林省吉林市西南歡喜鄉吉興村 | 西團山石棺墓,多以花崗岩板石立砌。出土夾砂褐陶罐、壺、碗。并有石斧、石刀及石鐮。同類遺址有三足器、鼎、鬲等。 |
| 57 | 7-7 | 猴石山石棺墓 | 青銅時代 | 吉林省吉林市郊孤店鄉孤家子村北山 | 石棺墓多為石塊壘砌。出土夾砂褐陶罐、壺,并石斧、豬骨。同出有青銅矛。同類遺址有三足器,屬“西團山文化”。 |
| 58 | 7-8 | 靳家溝遺址 | 春秋-戰國 | 吉林省海龍縣晏家街鄉靳家溝 | 面積7500平方米,出土夾砂黃褐陶,灰陶。素面、手制罐、碗、豆、盆有橋狀耳、板耳,遺址有三足器。 |
| 59 | 7-9 | 石崴子石棺墓 | 青銅時代 | 吉林省樺甸縣八道河子鎭西西崴子西山 | 石棺墓為板石圍砌,出土青銅劍、屬“西團山文化”晚期。 |
關於漢以前東北「貊」族考古學文化的考察-兼論大石棚和石棺墓文化的族屬與時代
한나라 이전 동북 ‘맥貊’족 고고학 문화에 관한 고찰 – 대석붕大石棚과 석관묘石棺墓 문화의 족속族屬과 시대에 대한 논의를 겸하여
왕면후王綿厚
早在漢以前已屢見於文獻中的穢與貊,是古代東北地區的重要少數民族之一。但關於穢貊族系的歷史淵源和考古學文化的性質,卻是中外學術界長期關注、然而仍存在著許多未解之端 的東北亞歷史考古中的重大課題之一。這篇短文擬對歷年來以遼東為中心,包括吉南和鴨綠江兩岸廣泛發現的大石棚、積石墓與石棺墓文化的考古學性質及其族屬問題,通過與文獻印證的類型學分析,提出作者的拙見。希望得到專家和同仁的批疵,以便深化對這一問題研究的認識。
한漢나라 이전부터 문헌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예穢와 맥貊은 고대 동북東北 지역의 중요한 소수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예맥穢貊 족속의 역사적 기원과 고고학적 문화 성격은 국내외 학계가 오랫동안 주목해왔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동북아 역사 고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 짧은 글은 여러 해 동안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길림성吉林省 남부와 압록강鴨綠江 양쪽에서 널리 발견된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 문화의 고고학적 성격과 그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문헌 기록과 비교하고 유형별로 분석하여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문가와 동료들의 비판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연구 인식을 깊게 하기를 바란다.
목차
1.對文獻中關於漢和漢以前遼東貊族記載的分析
문헌 속 한漢나라 및 그 이전 요동遼東 맥貊족 기록 분석
2.從考古學文化上對漢以前遼東貊族遺存的比較印證
고고학 문화로 본 한漢나라 이전 요동遼東 맥貊족 유적 비교·검증
3. 對漢以前大石棚和石棺墓文化性質及其族屬的綜合考察
한漢나라 이전 대석붕大石棚과 석관묘石棺墓 문화의 성격 및 족속族屬에 대한 종합 고찰
1. 對文獻中關於漢和漢以前遼東貊族記載的分析
문헌 속 한나라 및 그 이전 요동 맥貊족 기록 분석
貊又作“貉”,同穢族一樣,是古代“遼東”(含東北南部乃至朝鮮半島北部)的一支古老部族。先秦文獻中關於“貊”的記載舉其要者有:
맥貊은 ‘맥貉’으로도 쓰며, 예穢족과 마찬가지로 고대 ‘요동遼東’(동북 남부 및 한반도 북부 포함) 지역의 오래된 부족이다. 선진先秦 시기 문헌에 나오는 ‘맥貊’에 대한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詩經·大雅·韓奕》:“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
《시경詩經》〈대아大雅·한혁韓奕〉: “왕께서 한후韓侯에게 그 추追와 맥貊을 주시니, 북쪽 나라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周禮·秋官司寇》:“夷隸百有二十人,貉隸百有二十人”。東漢鄭玄注:“〈貉〉征東北夷所獲”。
《주례周禮》〈추관사구秋官司寇〉: “이夷 출신 노비가 120명이고, 맥貉 출신 노비가 120명이다.” 동한東漢의 정현鄭玄은 〈맥貉은 동북쪽 오랑캐를 정벌하여 얻은 것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大戴禮記·禮察》篇:“湯武置天下於仁義禮樂……廣育被蠻貊四夷”。
《대대례기大戴禮記》〈예찰禮察〉편: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천하를 인의예악仁義禮樂의 기반 위에 두었고, 널리 만맥蠻貊과 사방의 오랑캐를 교화했다.”
《管子·小匡》篇:“(桓公)九合諸侯,一匡天下,北至於孤竹、山戎、穢、貊”。
《관자管子》〈소광小匡〉편: “환공桓公은 제후를 아홉 번 규합하고 천하를 바로잡았으며, 북쪽으로는 고죽孤竹, 산융山戎, 예穢, 맥貊에 이르렀다.”
《孟子·告子》篇:“夫貊(貊)在北方,五穀不生,惟黍生之,元城郭宮室宗廟祭祀之禮”。
《맹자孟子》〈고자告子〉편: “맥貊은 북방에 있어 오곡이 자라지 않고 오직 기장만 자란다. 성곽, 궁실, 종묘와 제사 의례가 없다.”
《戰國策·秦策》:“西有巴蜀、漢中之利;北有胡、貉、代馬之用”。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 “서쪽에는 파촉巴蜀과 한중漢中의 이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호胡, 맥貉과 대代 땅의 말을 쓸 수 있다.”
《山海經·海內西經》:“貊國,在漢水東北。地近於燕,滅之”。
《산해경山海經》〈해내서경海內西經〉: “맥국貊國은 한수漢水 동북쪽에 있다. 연燕나라와 가까운 땅에 있었는데, 연나라가 멸망시켰다.”
《荀子·強國》篇:“秦北與胡貉為鄰”。
《순자荀子》〈강국強國〉편: “진秦나라는 북쪽으로 호胡·맥貉과 이웃하고 있다.”
以上列舉的先秦文獻八種,多單稱“貊”(貉)或“蠻貊”、“胡貊”等。在漢代以後史書中關於貊的記載,則多與“穢貊”連稱。如:
위에 나열한 8가지 선진先秦 문헌에서는 대부분 ‘맥貊’(貉), ‘만맥蠻貊’, ‘호맥胡貉’ 등으로 단독으로 칭했다. 한漢나라 이후의 역사책에서는 ‘예맥穢貊’으로 함께 칭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史記·貨殖列傳》:“燕 東綰穢貊、朝鮮、真番之利”[1]。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 “연燕나라는 동쪽으로 예맥穢貊, 조선朝鮮, 진번真番의 이로움을 차지했다.” [1]
《史記·匈奴列傳》:“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貊、朝鮮”[2]。
《사기史記》〈흉노열전匈奴列傳〉: “좌방左方의 왕과 장수들은 동쪽에 거주하며, 상곡上谷 동쪽 지역은 동으로 예맥穢貊, 조선朝鮮과 접해 있다.” [2]
《漢書·高帝紀》:(高祖)“四年(公元前203年)八月,……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3]。
《한서漢書》〈고제기高帝紀〉: “고조高祖 4년(기원전 203년) 8월, 북쪽의 맥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와서 한漢나라를 도왔다.” [3]
《漢書地理志》:“玄菟、樂浪、武帝時置,留朝鮮、歲貊、句麗蠻夷”[4]。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무제武帝 때 설치했으며, 조선朝鮮, 예맥歲貊, 구려句麗의 오랑캐가 남아 있었다.” [4]
《漢書·食貨志》:“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都”[5]。
《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 “팽오彭吳가 예맥穢貊과 조선朝鮮을 뚫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다.” [5]
《後漢書·東夷高句麗傳》:“句麗,一名貊耳。有別種以小水為居,因名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同書注引《魏氏春秋》曰:“遼東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因名之曰小水貊”[6]。
《후한서後漢書》〈동이고구려전東夷高句麗傳〉: “구려句麗는 일명 맥이貊耳라고도 한다. 그 별종別種이 소수小水에 근거하여 살았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렀는데, 좋은 활이 생산되어 이른바 맥궁貊弓이 바로 이것이다.” 같은 책의 주석에 《위씨춘추魏氏春秋》를 인용하여 “요동遼東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구려句麗의 별종이 이 강 이름을 따서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렀다”고 했다. [6]
上述漢代史籍中的記載已十分明確。所謂西安平縣北的“小水”,應是指今南流入鴨綠江的渾江;而与之相应的“大水貊”,则指居于“大水”即今鴨綠江上(漢代又稱馬訾水)的貊部[7]。
위에서 언급한 한漢나라 시대 역사책의 기록은 매우 명확하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의 ‘소수小水’는 오늘날 압록강鴨綠江으로 흘러 들어가는 혼강渾江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응하는 ‘대수맥大水貊’은 ‘대수大水’ 즉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한나라 때는 마자수馬訾水라고도 불림)에 살던 맥貊족을 가리킨다[7].
在關於漢代貊族記載的朝鮮古籍中,與“大水貊”、“小水貊”並稱的尚有“梁貊”,即“梁水之貊”。
한漢나라 시대 맥貊족에 대한 한국 고대 기록에는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과 함께 ‘양맥梁貊’ 즉 ‘양수梁水의 맥貊’도 등장한다.
《三國史記》卷十三載:“高句麗琉璃明王三十三年(公元十四年),西伐梁貊,滅其國,進兵襲取漢高句麗縣”[8]。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에는 “고구려高句麗 유리명왕琉璃明王 33년(서기 14년),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진격시켜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8]
同書卷十六:“高句麗新大王二年(公元166年),拜答夫為國相……兼領梁貊部落”[9]。
같은 책 권16에는 “고구려高句麗 신대왕新大王 2년(서기 166년), 답부答夫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양맥梁貊 부락을 겸하여 다스리게 했다”고 되어 있다. [9]
從漢魏時期的中外史籍中看,大水、小水和梁水,已被學術界公認。由此不難辨知,至少在西漢時代,居于“大水”(鴨綠江)、“小水”(渾江)和“梁水”(太子河)上的貊族,雖然遭到強大的遼東高句麗的侵逼,但仍襲舊稱、世居故地。這說明至少在遼東三河流域,在漢和漢代以前,必為貊部的土著文化地區。據此,可以對東北地區漢以前貊族歷史及其文化的分布,歸納出以下幾點:
한위漢魏 시기 국내외 역사 기록으로 볼 때, 대수大水, 소수小水, 양수梁水의 위치는 학계에서 공인되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서한西漢 시대에는 ‘대수大水’(압록강), ‘소수小水’(혼강), ‘양수梁水’(태자하)에 살던 맥貊족이, 비록 강력한 요동遼東 고구려高句麗의 압박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이름을 유지하며 고향 땅에 대대로 살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적어도 요동遼東의 세 강 유역이 한漢나라와 그 이전에 반드시 맥貊족의 토착 문화 지역이었음을 설명한다. 이를 근거로 한漢나라 이전 동북東北 지역 맥貊족의 역사와 문화 분포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一) 以遼東(古泛指東北南部和朝鮮半島北部)為中心的貊族,始見於文獻當在西周以後。從史籍中看,貊族應是一支自先秦以來獨立發展的北方(燕北)民族集團。據翦伯贊先生考證,包括貊在內的先秦“東夷”,原來主要居住在山東半島和環渤海沿岸,是一支殷族分化出來的民族[10]。山東省壽光縣紀侯台出土的“已侯貉子殷”,銘文中即有“王令土(饋)貉子鹿三”等文字[11]。如果進一步從考古學文化和東北南部古交通地理上看,山東半島上的“東夷”,向遼東半島的遷移和文化傳播,當在周以前已經開始。但大量的遷徙,則應在周滅商以後,殷人及其周邊各族包括貊人大舉被迫渡海北遷之時,這與當時殷末遺臣“箕子”攜眾遠避遼東、朝鮮,幾乎是同時發生在水、陸兩條交通道上。這也正和發現于遼東半島及其廣闊腹地的以大石棚、積石墓和石棺墓為代表的考石文化,其上限集中在商周之際相吻合。由此可知,東北南部的“貊”族,應是從“東夷”中分化出來,並至少在三千年前已開始定居東北的土著民族。所以在上引先秦文獻中,多單稱為“貊”、“貊隸”、“蠻貊”、“胡貊”,即東漢鄭玄所注“東北夷”。至漢代以後,史書中方合稱為“穢貊”——即北部之穢與南部之貊的結合體(詳下節)。
(1) 요동遼東(옛날에는 동북 남부와 한반도 북부를 넓게 지칭)을 중심으로 한 맥貊족은 서주西周 시대 이후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역사 기록으로 볼 때, 맥貊족은 선진先秦 시대 이래 독자적으로 발전한 북방(연나라 북쪽) 민족 집단으로 보인다. 전백찬翦伯贊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맥貊을 포함한 선진先秦 시대의 ‘동이東夷’는 원래 주로 산동반도山東半島와 발해만渤海灣 연안에 거주했으며, 상殷나라 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이다[10]. 산동성山東省 수광현壽光縣 기후대紀侯台에서 출토된 ‘기후맥자은已侯貉子殷’ 명문에는 “왕이 맥자貉子에게 사슴 셋을 하사하도록 명했다”는 등의 글자가 있다[11]. 고고학 문화와 동북 남부의 고대 교통 지리를 더 살펴보면,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가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동하고 문화를 전파한 것은 주周나라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이주는 주周나라가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후, 상殷나라 사람들과 그 주변 민족들, 즉 맥貊족을 포함한 이들이 대거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쫓겨날 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당시 상殷나라 말기 유신인 ‘기자箕子’가 무리를 이끌고 요동遼東과 조선朝鮮으로 피신한 것과 거의 동시에 수륙 두 교통로에서 일어났다. 또한 이는 요동반도遼東半島와 그 넓은 배후지에서 발견된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로 대표되는 고고학 문화의 시작 시점이 상商·주周 교체기와 일치하는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를 통해 동북 남부의 ‘맥貊’족은 ‘동이東夷’에서 갈라져 나와 적어도 3천 년 전부터 동북東北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토착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인용한 선진先秦 문헌에서는 대부분 ‘맥貊’, ‘맥례貊隸’, ‘만맥蠻貊’, ‘호맥胡貉’으로 단독으로 칭하며, 이는 동한東漢 정현鄭玄이 주석한 ‘동북이東北夷’를 뜻한다. 한漢나라 이후에 이르러서야 역사책에서 ‘예맥穢貊’으로 합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북쪽의 예穢와 남쪽의 맥貊이 결합한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설명).
(二) 遼東貊族,真正作為一個民族共同體的形成,應是在從“東夷”中分化出來,並定居東北南部以後。所以先秦諸文獻所指“燕北”之“貊”族,已不是新石器時代末期居住在山東半島的“東夷”,而是北遷後具有新的文化共同體的東北之貊族(東北夷)。這在時間上,與東北的早期民族肅慎、東胡、高夷、孤竹、屠何等大體相當。標誌著商周之際,在東北歷史上開始形成諸獨立的民族共同體。這又與西周初年的分封制和“五服”方國的制度確立有關。
(2) 요동遼東의 맥貊족이 진정한 민족 공동체로 형성된 것은 ‘동이東夷’에서 갈라져 나와 동북 남부 지역에 정착한 이후일 것이다. 따라서 선진先秦 시기 여러 문헌에서 가리키는 ‘연燕나라 북쪽’의 ‘맥貊’족은 신석기 시대 말기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살던 ‘동이東夷’가 아니라, 북쪽으로 이주한 뒤 새로운 문화 공동체를 형성한 동북東北의 맥貊족(동북이)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동북東北의 초기 민족인 숙신肅慎, 동호東胡, 고이高夷, 고죽孤竹, 도하屠何 등과 대체로 비슷하다. 이는 상商·주周 교체기에 동북東北 역사상 독립적인 여러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는 서주西周 초기의 분봉제分封制와 ‘오복五服’ 방국方國 제도가 확립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三) 古文獻中雖然沒有給遼東古貊族劃定一個準確的分布範圍,但綜合分析和比較東北南部發現的商周至秦漢之際的考古學文化類型及特點,可以勾勒出其大體地理位置:即以遼東半島為中心,以遼河為縱軸線,主要分布于遼河以東的東北南部,環黃、渤海縱深千里,並以鴨綠江、渾江、太子河和渾河流域為中心,含朝鮮半島北部、長白山和龍岡山脈以南地區。在考古學上,則正是以東北南部的大石棚、積石墓和石蓋墓、石棺墓為主要特徵的文化分布區。
(3) 고대 문헌에서 옛 요동遼東 맥貊족의 정확한 분포 범위를 정해주지는 않았지만, 동북 남부에서 발견된 상商·주周 시기부터 진한秦漢 시기까지의 고고학 문화 유형과 특징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하면 대략적인 지리적 위치를 그려볼 수 있다. 즉,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중심으로 요하遼河를 세로축으로 하여 주로 요하 동쪽의 동북 남부, 황해와 발해를 둘러싼 천리 깊은 지역에 분포했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 혼강渾江, 태자하太子河,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 장백산長白山과 용강산맥龍岡山脈 이남 지역을 포함했다. 고고학적으로는 바로 동북 남부의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개묘石蓋墓, 석관묘石棺墓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분포한 지역과 일치한다.
(四) 在考察文獻中關於貊族的記載時,還應當注意与之有關的“發”。《史記·五帝本紀》正義:“北山戎、發、息慎”;《大戴禮記·少閒篇》記載“海之外,北發、息慎來服”。《管子·揆度篇》則記載:“發·朝鮮之文皮一笑也”。其後《漢書·武帝紀》亦追述:“周之成康,刑錯不用,德及鳥獸,教通四海,海外肅慎、北發、渠搜、氏、羌來服”[12]。
(4) 문헌 속 맥貊족에 대한 기록을 살필 때, 이와 관련된 ‘발發’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정의正義에는 “북쪽에 산융山戎, 발發, 식신息慎이 있다”고 되어 있고, 《대대례기大戴禮記》〈소간편少閒篇〉에는 “바다 밖에 사는 북발北發과 식신息慎이 와서 복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자管子》〈규도편揆度篇〉에는 “발發·조선朝鮮의 무늬 있는 가죽은 천하제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에서도 “주周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시대에는 형벌을 쓸 일이 없었고, 덕이 새와 짐승에까지 미치고 가르침이 사해에 통하여, 해외의 숙신肅慎, 북발北發, 거수渠搜, 씨氏, 강羌이 와서 복종했다”고 기술했다[12].
歷來史家多引此言,但缺乏詳釋。從文獻中分析,其一,在先秦時居于北方的“山戎”和“肅(息)慎”之間,曾有一支“發”族存在;其二,《三國史記》中既稱“北發”,其地当在周和燕之北。而從《管子》和《史記》中的排列看,“北發”又應在“肅慎”之南,并与古朝鮮相臨,貢獻周庭以“文皮”。因此早年顧頡剛、譚其驤先生等編著《中國古代地圖集》時,把“發”划在東北吉、長一帶。郭沫若先生更直釋为“發即貊也”。郭老之識很有見地,所謂先秦之“北發”,從地理上看,也正是古遼東“貊”族的北部。
역대 사학자들이 이 기록을 많이 인용했지만 자세한 해석은 부족했다. 문헌을 분석해 보면, 첫째, 선진先秦 시기 북방의 ‘산융山戎’과 ‘숙신肅慎’(息慎) 사이에 ‘발發’이라는 족속이 존재했다. 둘째,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북발北發’이라고 칭했으므로 그 땅은 주周나라와 연燕나라의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자管子》와 《사기史記》의 나열 순서로 보면, ‘북발北發’은 ‘숙신肅慎’의 남쪽에 있으면서 고조선古朝鮮과 인접하여 주周나라 왕실에 ‘무늬 있는 가죽文皮’을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찍이 고힐강顧頡剛, 담기양譚其驤 선생 등이 《중국고대지도집中國古代地圖集》을 편찬할 때, ‘발發’을 동북東北의 길림吉林, 장춘長春 일대로 표시했다. 곽말약郭沫若 선생은 더 나아가 “발發은 바로 맥貊이다”라고 직접 해석했다. 곽郭 선생의 식견은 매우 통찰력이 있는데, 이른바 선진先秦의 ‘북발北發’은 지리적으로 볼 때 바로 옛 요동遼東 ‘맥貊’족의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五) 在漢和漢以前幾乎同時出現在歷史上的穢和貊,在文化上應有密切關係。但二者又是具有不同文化特點和分布區域的部族集團。日本學者三上次男在所著《滿鮮原始墳墓的研究》一書中寫道:“中國東北地方和朝鮮地方,無論從自然地理還是從風俗習慣上,相似的地方很多。 可以推測,從公元前六至五世紀起,這個地方的丘陵、平原地帶就散布着中國先秦時代文獻上總稱為貊的部落;而在海濱、河畔的低窪地帶和江河域,則散布着叫作穢的部落[13]”。
(5) 한漢나라 및 그 이전 시기에 거의 동시에 역사에 등장한 예穢와 맥貊은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문화적 특징과 분포 지역이 다른 부족 집단이기도 했다. 일본 학자 미카미 츠기오三上次男는 저서 《만선 원시 분묘의 연구滿鮮原始墳墓的研究》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 동북 지방과 조선 지방은 자연지리적으로나 풍속·습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기원전 6~5세기부터 이 지역의 구릉, 평야 지대에는 중국 선진先秦 시대 문헌에서 통칭하여 맥貊이라 부르던 부락이 흩어져 살았고, 해변이나 강가의 저지대와 강 유역에는 예穢라고 부르는 부락이 흩어져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13]”
三上次男的推測,有一定的見地。當公元前六至五世紀(相當于春秋、戰國之際),確是先秦文獻中東北貊和穢族的活躍時期。但僅以山居和水居來區別漢以前的貊與穢,顯然失之偏頗。質言之,漢和漢以前的東北貊與穢,也應有南、北之別,居于南部的鴨綠江、渾江和渾、太二河的“水居”部族,與遼東山地的貊族,都統稱為“貊”部,她與北部的“穢”二者在考古學文化上,仍具有諸多異同之處。本文下節所詳列的東北地區“巨石文化”的考古發現及其類型分析,將有助於認識這一點。
미카미 츠기오三上次男의 추측은 일정한 견해가 있다. 기원전 6~5세기(춘추·전국시대)는 실제로 선진先秦 문헌에서 동북東北의 맥貊족과 예穢족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단지 산에 사는 것과 물가에 사는 것으로 한漢나라 이전의 맥貊과 예穢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히 편협한 시각이다. 다시 말해, 한漢나라 및 그 이전 동북東北의 맥貊과 예穢 역시 남과 북으로 구분해야 한다. 남쪽의 압록강鴨綠江, 혼강渾江과 혼하渾河·태자하太子河에 살던 ‘물가 거주’ 부족과 요동遼東 산지의 맥貊족은 모두 ‘맥貊’ 부락으로 통칭된다. 이들은 북쪽의 ‘예穢’와 고고학 문화에서 여전히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본문 다음 장에서 자세히 나열할 동북東北 지역 ‘거석 문화’의 고고학적 발견과 그 유형 분석이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從考古學文化上對漢以前遼東貊族遺存的比較印證
고고학 문화로 본 한나라 이전 요동 맥貊족 유적 비교·검증
從上節所引大量文獻記載及其初步分析可以看到,漢以前的貊族,在歷史上延續了近千年。 時期正是東北地區青銅文化的發展分布時期。歷年來的考古發現,已經為我們分析考察漢以前遼東貊族的遺存及其性質,提供了大量資料(儘管尚不充分),以至有可能對這一問題開展考古類型學及其相關學科的探討。在遼東及其毗鄰地區,漢初和漢以前的考古發現,如從新石器時代晚期以來算起,除遼河中游腹地的“新樂上層類型”、“高台山類型”、“順山屯類型”和松花江中、上游的“西團山文化”下層外,遍布在遼東、吉南山地和遼東半島及鴨綠江左岸,是以大石棚、積石墓、石棺墓、石蓋墓及同類遺址為主要特徵的文化遺存。這幾種遺存,總體上都是漢以前青銅文化的遺存,并通常被包括在“巨石文化”和稍后“青銅短劍文化”的范疇內。這些集中分布于遼東及其周邊地區的以大石棚、積石墓和石棺墓等為代表的考古遺存,在分布地域、文化類型、遺物特徵和葬式、葬具諸方面,均表現出考古學文化上的近緣關係及其共同特點。本文限于篇幅、并為比較分析的方便,特將這一文化在鴨綠江西岸的主要分布範圍及其遺存特點,择要排比如下表:
앞 장에서 인용한 많은 문헌 기록과 그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을 통해, 한漢나라 이전의 맥貊족이 역사적으로 거의 천 년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바로 동북東北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고 분포하던 시기였다. 여러 해에 걸친 고고학적 발견은 비록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한漢나라 이전 요동遼東 맥貊족의 유적과 그 성격을 분석하고 고찰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이로써 이 문제에 대해 고고학적 유형론 및 관련 학문 분야의 탐구가 가능해졌다. 요동遼東 및 그 인접 지역에서 한漢나라 초기 및 그 이전에 발견된 고고학 유적은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따져볼 때, 요하遼河 중류 중심지의 ‘신락 상층 유형新樂上層類型’, ‘고대산 유형高台山類型’, ‘순산둔 유형順山屯類型’과 송화강松花江 중·상류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 하층을 제외하고, 요동遼東·길남吉南 산지와 요동반도遼東半島 및 압록강鴨綠江 좌안에 널리 퍼져 있다. 이들은 주로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 석개묘石蓋墓 및 유사한 유적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 유적이다. 이 몇 가지 유적은 전반적으로 모두 한漢나라 이전의 청동기 문화 유적이며, 보통 ‘거석 문화巨石文化’와 그 이후의 ‘청동 단검 문화青銅短劍文化’ 범주에 포함된다. 요동遼東과 그 주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 등으로 대표되는 이 고고학 유적들은 분포 지역, 문화 유형, 유물 특징, 장례 방식 및 부장품 등 여러 면에서 고고학적으로 가까운 관계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지면의 한계와 비교 분석의 편의를 위해, 이 문화가 압록강鴨綠江 서안에 주로 분포하는 범위와 유적의 특징을 요약하여 아래 표와 같이 정리했다.
東北地區大石棚、積石墓、石棺墓文化分布概覽表
동북지구 대석붕, 적석묘, 석관묘 문화 분포 개람표
| 명칭 | 시대 | 지점 | 유존현상遺存現狀 및 유물 |
| 노철산老鐵山 적석묘 | 신석기시대 만기晩期 | 여순구旅順口區 노철산老鐵山, 장군산將軍山, 조가촌刁家村 북산北山 등지 | 40여 좌座가 발견되었고, 회갈도灰褐陶, 마제석기磨製石器, 마광흑도磨光黑陶가 출토됨. 후자는 “용산문화龍山文化”와 관계가 밀접함. |
| 우가타두于家砣頭 적석묘 | 상말주초商末周初 |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口區 철산향鐵山鄉 우가촌于家村 | 면적 960평방미터, 묘장 58좌 발견, 단실묘單室墓가 많음. 출토된 토기는 사립흑갈도夾砂黑褐陶에 편직문編織紋이 장식됨. |
| 후목성역後牧城驛 석관묘, 적석묘 | 춘추春秋-전국戰國 |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口區 영성자營城子 동쪽 ‘누상樓上’과 후목성역촌後牧城驛村 동북쪽 ‘강상崗上’ | 총 3좌 발견, 장방형 단실 석관묘石棺墓. 청동단검青銅短劍, 도끼斧, 끌鑿, 칼刀 등 수장. |
| 삼간보三澗堡 석관묘 | 춘추春秋 |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口區 삼간보三澗堡 장가촌蔣家村 | 청동단검青銅短劍 2점 출토, 불에 탄 흔적이 있음. |
| 북령北嶺 적석묘 | 춘추春秋 |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口區 강서진江西鎮 소반가촌小潘家村 북령北嶺 | 곡인단경曲刃短頸 청동단검青銅短劍 4자루 출토. |
| 소관둔小官屯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대련시大連市 금주구金州區 향응향向應鄉 소관둔小官屯 동쪽 산 위 | 총 2좌, 그중 하나는 파손됨. 다른 하나는 화강암花岡岩으로 구축, 사벽석四壁石이 끼워져 상자 형태를 이루고 합쳐져 있고 위에 개석蓋石이 있음. |
| 대불大佛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대련시大連市 서강자구西崗子區 대석불사大石佛寺 정상부 | 대부분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남은 흔적만 있음. |
| 서가구徐家溝 석실묘石室墓 | 전국戰國 | 대련시大連市 장해현長海縣 대장산大長山 하선도哈仙島 서가구徐家溝 | 여러 종류의 청동 공구 출토, 모두 불에 탔음. 곡인단검曲刃短劍 1점, 직인단검直刃短劍 5점. |
| 와룡천卧龍泉 적석묘 | 춘추春秋-전국戰國 | 대련시大連市 금주구金州區 동가구董家溝 와룡천촌卧龍泉村 | M5는 적석묘. 동검銅劍, 석검石劍 각 1자루, 동부銅斧, 동촉銅鏃 출토, 묘는 불에 탔음. |
| 유둔劉屯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대련시大連市 신금현新金縣 안파향安波鄉 유둔劉屯 동쪽 산비탈 | 화강암花岡岩으로 구축, 이미 무너져 덮개돌이 부서짐. |
| 유둔劉屯 석개묘石蓋墓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신금현新金縣 안파향安波鄉 유둔劉屯 서산西山 | 총 10좌, 지하 토광 위에 큰 돌을 덮음. 사립황갈도호夾砂黃褐陶壺 출토, 인골은 불에 탔음. |
| 왕둔王屯 석관묘 | 춘추春秋 | 요녕성遼寧省 신금현新金縣 보란점普蘭店 왕둔王屯 서남쪽 산비탈 | 2좌, 석판으로 장방형으로 구축. 사립갈도관夾砂褐陶罐 5점 출토, 구연부에 부가퇴문附加堆紋 장식. |
| 쌍방雙房 석관묘, 석붕石棚 | 서주西周-춘추春秋 | 요녕성遼寧省 신금현新金縣 안파향安波鄉 쌍방촌雙房村 서산西山 남쪽 비탈 | 석붕 6좌, 석관묘 3좌. 홍갈도통형관紅褐陶筒形罐, 도호陶壺 및 청동단검青銅短劍 등 수장. 석붕 아래에 인골 있음. |
| 대황지大荒地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장하현莊河縣 탑령향塔嶺鄉 대황지촌大荒地村 | 화강암花岡岩으로 구축, 동, 서, 북 삼면의 벽석이 함을 이룸. 덮개돌은 부러짐. |
| 양둔楊屯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장하현莊河縣 태평령향太平嶺鄉 양둔楊屯 서북쪽 | 3곳, 화강암花岡岩으로 구축. 사립홍갈도편夾砂紅褐陶片, 석기, 인골 출토. |
| 백점자白店子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장하현莊河縣 영렬향英烈鄉 소방신촌小房身村 백점자둔白店子屯 북쪽 고수석산姑嫂石山 위 | 2좌, 화강암花岡岩으로 구축, 사벽이 함 형태로 둘러싸고 위에 덮개돌을 덮음. |
| 석붕구石棚溝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신금현新金縣 석붕구촌石棚溝村 | 10여 좌가 한 무리를 이룸. 사립조갈도夾砂粗褐陶 출토, 소면素面이고 마광磨光됨. |
| 하북河北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개현蓋縣 양운향楊運鄉 하북촌河北村 용조산龍爪山 위 | 3좌, 사벽은 대부분 파손됨, 덮개돌은 대부분 타원형. |
| 운운채運雲寨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개현蓋縣 십자가향什字街鄉 연운채촌連雲寨村 서쪽 산비탈 아래 | 2좌, 화강암花岡岩으로 구축. 그중 하나의 덮개돌은 타원형으로 길이 3.4미터, 너비 2.7미터. |
| 장발강長脖崗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개현蓋縣 십자가향什字街鄉 패방촌牌訪村 장발강長脖崗 위 | 3좌, 모두 무너져 파손됨. 겹쳐 쌓인 거석만 남아있음. |
| 추둔鄒屯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개현蓋縣 십자가향什字街鄉 추둔촌鄒屯村 | 석붕군石棚群, 5개 지점에 분포, 10여 좌, 화강암 재질, 현재 모두 무너져 파괴됨. |
| 홍석촌紅石村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수암현岫岩縣 용담향龍潭鄉 홍석촌紅石村 하북河北 | 2좌가 동서로 나란히 서 있음. 그중 하나는 입석 3개, 돌 길이 1.18~1.94미터. |
| 산두山頭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수암현岫岩縣 조양향朝陽鄉 황지촌荒地村 산두둔山頭屯 동쪽 | 2좌가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음. 모두 화강암으로 구축. |
| 고가보高家堡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수암현岫岩縣 삼가자진三家子鎮 고가보자촌高家堡子村 | 2좌, 그중 하나는 이미 파손됨. 다른 하나는 대부분 지하에 묻혀있고 노출된 부분은 길이 1.9미터, 너비 2.1미터. |
| 화동광鏵銅礦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복현復縣 이궁향李宮鄉 화동광촌鏵銅礦村 | 사방의 거석이 둘러싸고 위에 덮개돌을 덮어 처마를 만듦. 내부에서 회도관灰陶罐, 홍갈도호紅褐陶壺 및 인골 등 출토. |
| 석붕욕石棚峪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영구현營口縣 (대석교大石橋) 동북쪽 20리 석붕욕둔石棚峪屯 서남산西南山 | 화강암 석판으로 구축. 사벽석 높이 2미터, 너비 2.5미터, 위에 덮개돌을 덮음, 각 변 길이 약 4미터. |
| 고수석姑嫂石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해성시海城市 석목성향析木城鄉 고수석촌姑嫂石村 | 2좌, 그중 하나는 보존 상태 양호. 6개의 석판으로 지탱하여 축조. 덮개돌 길이, 너비 각 5미터. 석붕 아래에서 토기편과 인골 발견. |
| 동패루東牌樓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해성시海城市 패루향牌樓鄉 동패루촌東牌樓村 동남쪽 300미터 지점 | 2좌, 모두 화강암 재질. 큰 석붕은 무너졌고, 작은 석붕은 덮개돌이 남아있음. |
| 삼도하자三道河子 석관묘 | 춘추전국春秋戰國 | 요녕성遼寧省 요양시遼陽市 하란향河欄鄉 이도하자촌二道河子村 동탕하東湯河 연안 | 석관묘군群. 정리 발굴 결과 석판으로 관벽을 쌓고 석판으로 관 뚜껑을 만듦. 청동단검青銅短劍, 사립갈도기夾砂褐陶器 출토. 소면, 평저이고 삼족기三足器는 없음. |
| 갑방甲幫 석관묘 | 춘추시기春秋時期 |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전례향前例鄉 대갑방촌大甲幫村 북쪽 비탈 | 석판으로 석관을 축조. 관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음. 사립홍갈도호夾砂紅褐陶壺 출토. 아래 배에 교상이橋狀耳橋狀耳가 있음. 요양遼陽 이도하자二道河子 석관과 유사하며, 삼족기三足器 없음. |
|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 석관묘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 구역 | 다수 발견. 1982년 6좌 발굴, 모두 장방형 석관. 사립홍갈도호夾砂紅褐陶壺와 단검短劍 출토. 유형은 요양遼陽 이도하자二道河子, 대갑방大甲幫 등과 유사하며, 삼족기三足器 없음. |
| 묘후산廟後山 동혈洞穴석실묘石室墓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본계현本溪縣 산성자촌山城子村 묘후산廟後山 | 동혈묘군洞穴墓群, 10여 좌만 정리. 불규칙한 돌덩이로 묘광을 쌓았으며 화장火葬함. 수장 토기는 사립홍갈도완夾砂紅褐陶碗, 발鉢 등이 있고 모두 수제手製, 소면, 평저이며 삼족기 없음. 마제석부磨製石斧, 자귀锛, 칼刀, 곤봉두棍棒頭 등도 함께 출토. 요동지역 석관묘와 동일. |
| 양가梁家 석판묘石板墓 | 춘추春秋-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명산구明山區 고대자향高台子鄉 양가촌梁家村 | 석판으로 묘실을 축조. 청동단검青銅短劍 2자루, 쌍뉴동경雙紐銅鏡 1면 출토. |
| 석라자石砬子 석관묘石棺墓 | 춘추春秋 | 요녕성遼寧省 법고현法庫縣 대고가자진大孤家子鎮 위자촌位子村 서남 황화산黃花山 북쪽 비탈 | 2좌, 상광석관묘上壙石棺墓. 사립홍갈도호夾砂紅褐陶壺, 관罐 각 1점 출토. 형태는 요양遼陽 이도하자二道河子와 같음. |
| 남자목南雜木 석관묘 | 춘추春秋 |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남자목진南雜木鎮 서산西山 | 토광석관묘. 사립홍갈도관夾砂紅褐陶罐, 석제 방추차石紡輪 각 1점 출토. 토기陶罐는 소면素面, 가권족假圈足이며, 배 부분에 유정乳丁 장식. |
| 포가包家 석관묘 | 춘추春秋-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영릉향永陵鄉 포가촌包家村 북산北山 | 토광석관묘. 사립홍갈도관夾砂紅褐陶罐 3점, 석부石斧, 석분石锛, 석산石鏟과 청동도青銅刀 1점 출토. |
| 탕도湯圖 석관묘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탕도향湯圖鄉 하서촌河西村 | 토광석관묘. 석부石斧, 석착石鑿, 석분石锛 출토. |
| 성홍산城紅山 석관묘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성홍산城紅山 남쪽 비탈 아래 | 소형 석관묘. 사립홍도夾砂紅陶, 이질홍도호泥質紅陶壺 출토. 높은 목에 꺾인 어깨高領出肩. |
| 연화보蓮花堡 석관묘 | 전국戰國 | 무순시撫順市 이가보향李家堡鄉 연화보蓮花堡 후산後山 | 석관묘군群. 사립회갈도쌍이관夾砂灰褐陶雙耳罐, 사립흑도관夾砂黑陶罐 등 출토. |
| 자구茨溝 석관묘 | 전국戰國 | 무순시撫順市 년반향碾盤鄉 자구촌茨溝村 | 사립회갈도호夾砂灰褐陶壺, 사립흑도쌍이관夾砂黑陶雙耳罐 출토. 평저平底, 염구斂口, 교상횡이橋狀橫耳. |
| 대전자大甸子 석관묘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사하향四河鄉 대전자촌大甸子村 | 장방형 석판으로 구성, 바닥에 조약돌을 깜. 청동단검青銅短劍과 “명도전明刀錢” 200여 매 출토. 인골은 화장됨. |
| 화륭和隆 석관묘 | 춘추春秋 | 요녕성遼寧省 서풍현西豐縣 화륭향和隆鄉 부풍둔阜豐屯 남산南山 년반하碾盤河 상류 | 석관군群. 장방형 석관은 석판으로 짜 맞춤. 사립흑갈도관夾砂黑褐陶罐, 호壺 출토. 소면, 평저이며 소량의 청동기, 삼족기 없음. |
| 이가대李家台 석관묘 | 춘추春秋-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개원현開原縣 이가대촌李家台村 서쪽 계관산雞冠山 아래 | 2좌, 장방형 석관묘. 사립갈도쌍횡이관夾砂褐陶雙橫耳罐 1점 출토. 형태는 길림吉林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석관묘 출토품과 동일. |
| 이가보李家堡 석관묘 | 춘추春秋-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청원현清原縣 삼가향三家鄉 이가보李家堡 동북 대호로구大葫蘆溝 | 석관묘 4좌. 사립홍갈도夾砂紅褐陶 및 청동단검青銅短劍, 곡인모曲刃矛 출토.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 일대 출토품과 동일. |
| 마가점馬家店 석관묘, 대묘大廟 석관묘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청원현清原縣 하가보향夏家堡鄉 마가점촌馬家店村과 감정자향甘井子鄉 대묘촌大廟村 | 유적 및 유물은 이가보李家堡 유형과 동일. |
| 토구자土口子 석관묘石棺墓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청원현清原縣 토구자土口子 중학원 내 | 사립회흑갈도호夾砂灰黑褐陶壺 1점 출토. |
| 초구草溝 석관묘 | 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청원현清原縣 성城 동남쪽 소착초구구小錯草溝口 | 묘벽은 석판으로 쌓음. 석검石劍 2자루 출토 (청동기 모방). |
| 위당구葦塘溝 석붕石棚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개원현開原縣 신변향新邊鄉 영원촌寧遠村 위당구葦塘溝 후산강後山岡 위 | 화강암 재질. 덮개돌 길이 약 3.5미터, 너비 2.9미터, 두께 0.35미터. |
| 수아둔樹芽屯 석관묘 | 춘추春秋-전국戰國 | 요녕성遼寧省 철령시鐵嶺市 수아둔樹芽屯 동쪽 황칠강黃七岡 위 | 장방형 석판 석관묘. 토기 14점 출토. 모두 사립조갈도夾砂粗褐陶의 관罐, 호壺, 두豆임. 그중 두豆는 길림吉林 왕청汪清 백초구百草溝와 동일. |
| 소고낭산小孤娘山 유지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단동시丹東市 진안구振安區 소고낭산小孤娘山 | 면적 2500평방미터. 사립홍갈도夾砂紅褐陶 출토. 수제手製, 소면素面, 각획문刻劃紋 토기. 동부 석붕, 석관묘 문화와 동일. |
| 대호로구大葫蘆溝, 강가보康家堡 석관묘 | 청동시대青銅時代 | 요녕성遼寧省 청원현清原縣 내하철광萊河鐵礦 대남구大南溝 서산두西山頭 및 강가보康家堡 등지 | 석관묘군群, 강가보康家堡에만 30여 좌. 황갈도관黃褐陶罐, 사이호四耳壺, 직경출견直頸出肩, 교상이橋狀耳 출토. 청동단검青銅短劍도 함께 출토. |
| 삼도외자三道崴子 유지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성 서북 75킬로미터 이도외자二道崴子 서구西溝 | 유존이 풍부. 그중 토기는 사립갈도소면평저관夾砂褐陶素面平底罐, 배杯, 두豆가 위주. 교상횡이橋狀橫耳가 많고 후기 고구려 토기와 유사하며 삼족기 없음. |
| 장천長川 유지, 대주선구大朱仙溝 유지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황백향黃柏鄉 장천촌長川村과 유수향榆樹鄉 대주선촌大朱仙村 대지 | 유지에서는 모두 사립홍갈夾砂紅褐, 회도관灰陶罐, 호壺, 발鉢 등이 출토. 모두 수제, 소면, 삼족기 없음. 청동기를 모방한 석검石劍, 석모石矛가 함께 출토. |
| 왕가둔王家屯 유지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왕가둔王家屯 | 면적 24평방미터. 황갈도黃褐陶, 홍갈도관紅褐陶罐 등 출토. 모두 수제, 소면이며 판이板耳가 있음. 마제석고磨製石鎬, 석부石斧, 석도石刀도 있음. |
| 낭두산狼頭山 석관묘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영길현永吉縣 서양향西陽鄉 낭두촌狼頭村 | 석관은 판석을 세워 쌓음. 사립갈도관夾砂褐陶罐, 완碗 등 출토. 횡이橫耳가 많음. 유지에는 삼족기三足器가 있으며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에 속함. |
| 서단산西團山 석관묘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길림시吉林市 서남 환희향歡喜鄉 길흥촌吉興村 | 서단산 석관묘는 대부분 화강암 판석을 세워 쌓음. 사립갈도관夾砂褐陶罐, 호壺, 완碗 출토. 석부石斧, 석도石刀 및 저골豬骨도 있음. 동류 유지에 삼족기인 정鼎, 격鬲 등이 있음. |
| 후석산猴石山 석관묘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길림시吉林市 교외 고점향孤店鄉 고가자촌孤家子村 북산北山 | 석관묘는 대부분 괴석塊石으로 쌓음. 사립갈도관夾砂褐陶罐, 호壺, 석부石斧, 저골豬骨 출토. 청동모青銅矛 동류가 함께 출토. 유지에 삼족기가 있으며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에 속함. |
| 근가구靳家溝 유지 | 춘추春秋-전국戰國 | 길림성吉林省 해룡현海龍縣 안가가향晏家街鄉 근가구靳家溝 | 면적 7500평방미터. 사립황갈도夾砂黃褐陶, 회도灰陶 출토. 소면, 수제의 관罐, 완碗, 두豆, 호壺에 교상이橋狀耳, 판이板耳 있음. 유지에 삼족기 있음. |
| 석외자石崴子 석관묘 | 청동시대青銅時代 | 길림성吉林省 화전현樺甸縣 팔도하자진八道河子鎮 서서외자西西崴子 서산西山 | 석관묘는 판석을 세워 쌓음. 청동검青銅劍 출토.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만기에 속함. |
3. 對漢以前大石棚和石棺墓文化性質及其族屬的綜合考察
한나라 이전 대석붕大石棚과 석관묘石棺墓 문화의 성격 및 족속族屬에 대한 종합 고찰
上述所列對遼東及其周邊地區六十餘處以大石棚、積石墓、石棺墓(含青銅短劍)文化的排比編年,儘管對已發現的這類考古資料的臚列尚不盡完備,其中有些環節尚待進一步補充。但卻可以結合文獻記載,對這類文化遺存的某些內在聯繫,進行理論探討和歸納。筆者深知,對這一重要考古文化性質和族屬問題的解決,不僅不是以個人的淺薄能勝任的,而且有待于更多新發現。而這一過程的完成,也許要經過幾代學人的努力。本文的目的,只是就現有材料和現有認識水平,對這一文化類型的性質及其規律,提出淺見,并試圖与文獻學和歷史地理學相印證,拋出引玉之言。
위에 나열한 요동遼東 및 그 주변 지역 60여 곳의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청동 단검 포함) 문화의 편년은, 이미 발견된 고고학 자료를 완벽하게 나열한 것은 아니며 일부는 추가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헌 기록과 결합하여 이러한 문화 유적의 내부적 연관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탐구하고 정리할 수는 있다. 필자는 이 중요한 고고학 문화의 성격과 족속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개인의 얕은 지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더 많은 새로운 발견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과정은 아마도 여러 세대 학자들의 노력을 거쳐야 완성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단지 현재의 자료와 인식 수준에서 이 문화 유형의 성격과 규칙성에 대한 소견을 제시하고, 이를 문헌학과 역사지리학과 비교 검증하여 더 나은 의견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一) 首先從遼東地區繼新石器時代以後,以大石棚、積石墓和石棺墓為代表的文化分布區域看,其南界,起于遼東半島南端大連地區。其中以1977年發掘的旅順于家砣頭積石墓地、雙駝子和崗上墓地為代表。稍北在遼東半島的縱深區域,則以新金縣雙房石蓋墓、王屯石棺模以及蓋縣、營口的大石棚、石蓋墓為代表。其北端則可達遠至松花江中游的吉林墾星哨石棺墓等,屬“西團山文化”的南支。而具有代表性的,應是柳河和輝發河上游的樺句、柳河、海龍等地的遺址和墓葬。在渾河上游,則以清原縣李家堡、土口子和開原縣李家台等地的石棺墓更具有典型性。
(1) 먼저 신석기 시대 이후 요동遼東 지역에서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로 대표되는 문화의 분포 구역을 보면, 그 남쪽 경계는 요동반도遼東半島 남쪽 끝 대련大連 지역에서 시작된다. 그중 1977년에 발굴된 여순旅順 우가타두于家砣頭 적석묘지, 쌍타자雙駝子와 강상崗上 묘지가 대표적이다. 약간 북쪽인 요동반도遼東半島 깊숙한 지역에서는 신금현新金縣 쌍방雙房 석개묘石蓋墓, 왕둔王屯 석관묘 및 개현蓋縣, 영구營口의 대석붕大石棚, 석개묘石蓋墓가 대표적이다. 북쪽 끝은 멀리 송화강松花江 중류의 길림吉林 간성초墾星哨 석관묘 등에 이르며, 이는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의 남쪽 갈래에 속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유하柳河와 휘발하輝發河 상류의 화전樺甸, 유하柳河, 해룡海龍 등지의 유적과 묘장이다. 혼하渾河 상류에서는 청원현清原縣 이가보李家堡, 토구자土口子와 개원현開原縣 이가대李家台 등지의 석관묘가 더 전형적이다.
這一文化分布的西界,不過今遼河平原的康平、法庫界;而其東界則越過了鴨綠江左岸,進入了朝鮮半島北部波及日本海沿岸。即所謂在鴨綠江左岸(東岸)發現的“集中在西北地區的北方式石棺墓”[14]。其形制通常“建于地上,包括六塊薄板拼成矩形盒狀”[15]。其形制與遼東地區的早期石棚和石板墓极其類同。屬典型的穢貊系石棺葬。
이 문화 분포의 서쪽 경계는 오늘날 요하遼河 평원의 강평康平, 법고法庫 경계를 넘지 않는다. 동쪽 경계는 압록강鴨綠江 좌안을 넘어 한반도 북부로 들어가 동해 연안까지 이르렀다. 이는 이른바 압록강鴨綠江 좌안(동안)에서 발견된 “서북 지역에 집중된 북방식 석관묘”이다[14]. 그 형태는 보통 “지상에 세워지며, 6개의 얇은 판을 조합하여 직사각형 상자 모양을 만든다[15]”. 그 형태는 요동遼東 지역의 초기 석붕石棚과 석판묘石板墓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전형적인 예맥穢貊 계통의 석관 장례 방식에 속한다.
上述這一文化的分布區,除了遠至松花江中游的“西團山文化”以外(下文另述),基本上集中在文獻中漢和漢以前“貊人”集中分布的“大水”(鴨綠江兩岸)、“小水”(渾江)、“梁水”(太子河)及其北鄰渾河和柳河上游,以及与山東半島海路銜接的遼東半島腹地。這与歷年來考古工作者調查發現“石棚(應包括石棺墓)在我國的山東,特別是遼東半島、遼河以東的大連、營口、鞍山、撫順、丹東、本溪和吉林省通化地區都有發現”完全相合[16]。
위에서 언급한 이 문화의 분포 지역은, 멀리 송화강松花江 중류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를 제외하면(아래에서 별도 서술), 기본적으로 문헌 속 한漢나라 및 그 이전 ‘맥인貊人’이 집중적으로 분포했던 ‘대수大水’(압록강 양안), ‘소수小水’(혼강), ‘양수梁水’(태자하) 및 그 북쪽에 인접한 혼하渾河와 유하柳河 상류, 그리고 산동반도山東半島와 해로로 연결되는 요동반도遼東半島 중심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여러 해 동안 고고학자들이 “석붕石棚(석관묘 포함)이 중국의 산동山東, 특히 요동반도遼東半島, 요하遼河 동쪽의 대련大連, 영구營口, 안산鞍山, 무순撫順, 단동丹東, 본계本溪와 길림성吉林省 통화通化 지역에서 발견된다”고 조사한 결과와 완전히 일치한다[16].
(二) 以遼東半島為中心的這一文化分布區,如果從考古學文化區域類型的微觀上分析,尚可分出有局部差别的南、北區系。即在遼東半島腹地,以千山山脈分水嶺為界限,千山山脈以南為蓋縣、莊河、新金、大連、長海地區、在積石墓、石棺墓或稍早類型如“小珠山上層文化”遺址中,有山東半島新石器文化和青銅文化常有的泥質灰黑陶和三足器。而在千山山脈以北的太子河、渾河和鴨綠江、渾江流域(包括朝鮮半島),同樣的遺址和墓葬中,卻絕少見三足器,而且全部是手制夾砂陶。
(2)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중심으로 한 이 문화 분포 지역을 고고학 문화 구역 유형의 미시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일부 차이가 있는 남북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요동반도遼東半島 중심부에서 천산산맥千山山脈 분수령을 경계로, 천산산맥千山山脈 이남인 개현蓋縣, 장하莊河, 신금新金, 대련大連, 장해長海 지역의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 또는 그보다 약간 이른 유형인 ‘소주산 상층 문화小珠山上層文化’ 유적에서는 산동반도山東半島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에서 흔히 보이는 진흙질 회흑색 토기와 세발토기三足器가 발견된다. 반면, 천산산맥(千山山맥) 이북의 태자하太子河, 혼하渾河와 압록강鴨綠江, 혼강渾江 유역(한반도 포함)의 동일한 유적과 묘장에서는 세발토기三足器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전부 손으로 빚은 모래 섞인 토기이다.
再從這一文化分布區的北緣看,松花江中游的“西團山文化”,普遍也有三足器。而往南進入柳河、渾河和渾河上游,即龍岡山脈和哈達嶺以南,三足器明顯漸少以至絕跡。這一區域性的考古學文化差異的原因,筆者認為,其南部應是受山東半島新石器時代文化影響的遺留,即如有研究者指出,大連地區的這一文化是“受到山東龍山文化影響的具有地方特點的文化”[17]而北部則應受松花江流域“西團山文化”,即古“穢”族文化的影响及交叉。只有遼東貊族的核心地區“二江”(鴨綠江、渾江)和“二河”(太子河、渾河)流域,一直保持着古“貊”人固有的土著文化特徵。
다시 이 문화 분포 지역의 북쪽 가장자리를 보면, 송화강松花江 중류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에서도 보편적으로 세발토기三足器가 발견된다. 그러나 남쪽으로 유하柳河, 혼하渾河 및 혼하 상류, 즉 용강산맥龍岡山脈과 합달령哈達嶺 이남으로 들어오면 세발토기三足器가 현저히 줄어들어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지역적 고고학 문화 차이의 원인에 대해 필자는, 남부 지역은 산동반도山東半島 신석기 시대 문화의 영향이 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부 연구자가 지적했듯이 대련大連 지역의 이 문화는 “산동 용산 문화山東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은 지방적 특징을 가진 문화”이다[17]. 반면 북부 지역은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 즉 고대 ‘예穢’족 문화의 영향과 교차를 받았을 것이다. 오직 요동遼東 맥貊족의 핵심 지역인 ‘두 강’(압록강, 혼강)과 ‘두 하천’(태자하, 혼하) 유역만이 고대 ‘맥貊’인의 고유한 토착 문화 특징을 계속 유지했다.
(三) 在表中所列以大石棚、積石墓和石棺墓為代表這類遺址和墓葬中,考古學上最具斷代和文化類型分析特點的陶器,具有許多驚人的一致性:即陶器均以夾砂紅褐陶、黑褐陶和黃褐陶為主;普遍為手制、素面、火候較低;器形以筒形平底為基型的筒形罐、鼓腹罐、壺、碗和等為主,極少見三足器和高圈足器。其造型單調、紋飾簡率(僅有弦紋和刻劃紋等),且多有板耳、橋 耳和橫耳。諸如上述,這一文化類的陶器組合,与同期或稍早的東北地區西南部的“夏家店下層文化”;中北部的“西團山文化”;東北部的“鶯歌嶺文化”,以及遼河流域的“高台山類型”等,都有顯著差别。相反,卻与鴨綠江東岸朝鮮半島北部的“北方型石棺墓”出土的“無紋陶器”具有很多相似外[18]。這一切預示着以遼東半島腹地渾、太二河和鴨綠江、渾江二江流域為中心的“無紋陶”,是古遼東“貊”人特有的陶器群組。
(3) 표에 나열된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로 대표되는 유적과 묘장에서, 고고학적으로 시대 편년과 문화 유형 분석에 가장 특징적인 토기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치성을 보인다. 즉, 토기는 모두 모래 섞인 붉은 갈색, 검은 갈색, 황갈색 토기가 주를 이룬다. 보편적으로 손으로 빚었고 민무늬이며 낮은 온도에서 구웠다. 그릇 형태는 원통형 평저를 기본으로 하는 통 모양 단지, 배부른 단지, 항아리, 사발 등이 위주이며, 세발토기三足器나 높은 굽다리가 있는 그릇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형이 단조롭고 무늬가 간략하며(새김줄무늬와 긋기무늬 등만 있음), 판 모양 손잡이, 다리 모양 손잡이, 가로 손잡이가 많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이 문화의 토기 조합은 같은 시기나 조금 이른 동북東北 지역 서남부의 ‘하가점 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 중북부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 동북부의 ‘앵가령 문화鶯歌嶺文化’ 및 요하遼河 유역의 ‘고대산 유형高台山類型’ 등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반면, 압록강鴨綠江 동쪽 한반도 북부의 ‘북방형 석관묘’에서 출토된 ‘무문토기無紋陶器’와는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18]. 이 모든 것은 요동반도遼東半島 중심부의 혼하渾河·태자하太子河와 압록강鴨綠江·혼강渾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무문토기無紋陶’가 옛 요동遼東 ‘맥貊’인의 특유한 토기 집단임을 시사한다.
(四) 這一文化葬俗亦獨具特色。從分布看多以墓群為主。特別是石棚和石棺墓,在遼東和“朝鮮半島各地……般都是墓群”[19]。反映了氏族共同墓地的性質。在葬俗上,以石質葬具為主,并有火葬,是其又一顯著性。其中太子河流域的本溪廟後山洞穴墓中,火葬習俗發現尤为集中,由此推測,石質葬具和火葬習俗,應是漢和漢以前遼東貊族的普遍特點。這個葬俗以至影響延續到漢代穢貊、夫余系統的高句麗民族的火葬和積石石圹墓等習俗特點。
(4) 이 문화의 장례 풍속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다. 분포를 보면 대부분 무덤 떼墓群를 이룬다. 특히 석붕石棚과 석관묘石棺墓는 요동遼東과 “한반도 각지에서…일반적으로 무덤 떼를 이룬다”[19]. 이는 씨족 공동묘지의 성격을 반영한다. 장례 풍속상 돌로 만든 장례 도구를 주로 사용하고 화장火葬을 한 것도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중 태자하太子河 유역의 본계本溪 묘후산廟後山 동굴 무덤에서는 화장 풍속이 특히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이를 통해 돌로 만든 장례 도구와 화장 풍속이 한漢나라 및 그 이전 요동遼東 맥貊족의 보편적인 특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장례 풍속은 한漢나라 시대 예맥穢貊, 부여夫餘 계통인 고구려 민족의 화장과 돌무지덧널무덤積石石壙墓 등의 풍속 특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五) 在以遼東為中心的石棚、積石墓和石棺墓遺存中,与夾砂粗褐陶共存的往往有青銅工具,其中以青銅刀、矛、鏃和青銅短劍為主。在表中所列六十餘處遺址、墓葬中,時代在春秋、戰國之際的,即發現短劍十五處。同時出土的磨制石刀、石斧、石锛及石矛、石劍等,後者更多有仿青銅器制品。林沄先生曾經把東北系青銅短劍稱之為“應是穢貊(包括高句麗、夫余等)、真番、朝鮮等族的祖先所共有的一種遺物”[20]。此論其本上是正确的。在這裡可以而且應該更進一步確切地說,以遼東半島和鴨綠江流域為中心的西周末至戰國時期的東北系“青銅短劍文化”,應是活動在這一地區的古“貊”人的文化遺存。它對應于遼西地區“東胡”系統的青銅短劍文化。儘管二者具有某些共同文化特徵(如短劍形制)和影響關係,但卻應是屬於北方不同地區的不同民族文化的遺存。
(5)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한 석붕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 유적에서는 모래 섞인 거친 갈색 토기와 함께 청동 도구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중 청동 칼, 창, 화살촉과 청동 단검이 주를 이룬다. 표에 나열된 60여 곳의 유적과 묘장 중 춘추春秋·전국戰國 시대에 해당하는 곳에서 15곳의 단검이 발견되었다. 동시에 출토된 마제 석도, 석부, 석자귀 및 석창, 석검 등은 청동기를 모방한 제품이 더 많다. 임운林沄 선생은 일찍이 동북 계통 청동 단검을 “예맥穢貊(고구려, 부여 등 포함), 진번真番, 조선朝鮮 등 족속의 조상들이 공유했던 유물”이라고 칭했다[20]. 이 논의는 기본적으로 옳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압록강鴨綠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서주西周 말부터 전국戰國 시대까지의 동북 계통 ‘청동 단검 문화’는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고대 ‘맥貊’인의 문화 유산이라고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요서遼西 지역 ‘동호東胡’ 계통의 청동 단검 문화에 대응된다. 비록 두 문화가 일부 공통된 문화 특징(예: 단검 형태)과 영향 관계를 가지지만, 북방의 서로 다른 지역에 속한 다른 민족의 문화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六) 遼東大石棚、石棺墓和青銅短劍文化的下限一般到西漢初,最晚不過漢武帝在這一地區設置遼東、玄菟、樂浪諸郡以後。同樣,在朝鮮半島西北部,“北方石棚和石棺墓当產生于西周末和春秋初,而且一直延續到戰國早期”,最晚在公元前二世紀已經消失[21]。遼東和朝鮮半島這一相同文化類型的相同消失現象,說明進入西漢以後,漢文化的廣泛傳入和影響,使土著的“貊”族文化更多地融匯于漢文化中。青銅工具和武器為鐵器代替;手制粗砂陶為質堅、胎細和高火度的漢陶代替;而穴居野處以石質葬具為主的傳統,除偏居山谷的高句麗等部族外,平原地區已為漢代的城邑、宮室建築和豎穴土坑墓乃至磚室木梓墓等所代替。廣闊的東北南部地區,包括鴨綠江左岸的樂浪郡地,至公元前二世紀前後,統一的郡縣制的确立和封建漢文化的影響,正是土著的“貊”族文化最終融入“漢文化圈”的歷史標誌。而這一土著文化的保留部分,与南下“穢”族文化相結合,則是漢初以後東北南部穢貊系統的高句麗文化的主體內涵。
(6) 요동遼東의 대석붕大石棚, 석관묘石棺墓, 청동 단검 문화의 하한은 일반적으로 서한西漢 초까지이며, 가장 늦어도 한무제漢武帝가 이 지역에 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 등의 군郡을 설치한 이후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서북부에서도 “북방 석붕과 석관묘는 서주西周 말과 춘추春秋 초에 발생하여 전국戰國 초기까지 계속되다가”, 가장 늦게는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사라졌다[21]. 요동遼東과 한반도에서 동일한 문화 유형이 동일하게 사라진 현상은, 서한西漢 시대에 들어서면서 한漢 문화가 널리 전파되고 영향을 미쳐 토착 ‘맥貊’족 문화가 한漢 문화에 더 많이 융합되었음을 설명한다. 청동 도구와 무기는 철기로 대체되었고, 손으로 빚은 거친 모래 토기는 단단하고 태토가 고우며 고온에서 구운 한漢나라 토기로 대체되었다. 또한 동굴이나 들에 살며 돌로 된 장례 도구를 주로 사용하던 전통은, 산골짜기에 치우쳐 살던 고구려 등 일부 부족을 제외하고 평야 지역에서는 한漢나라 시대의 성읍, 궁실 건축과 널무덤豎穴土坑墓, 벽돌덧널무덤磚室木槨墓 등으로 대체되었다. 압록강鴨綠江 좌안의 낙랑군樂浪郡 땅을 포함한 광활한 동북 남부 지역은 기원전 2세기 전후, 통일된 군현제郡縣制의 확립과 봉건적 한漢 문화의 영향으로 토착 ‘맥貊’족 문화가 최종적으로 ‘한漢 문화권’에 편입되는 역사적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 토착 문화의 남은 부분은 남하한 ‘예穢’족 문화와 결합하여, 한漢나라 초 이후 동북 남부 예맥穢貊 계통 고구려 문화의 주된 내용을 이루게 되었다.
綜上所述,以遼東、吉南(包括朝鮮半島北部)為中心分布區,相當于商周之際至漢代以前的大石棚、積石墓和石棺墓文化(含青銅短劍),早期是与山東半島“東夷”文化有歷史淵源的土著文化。這一文化在進入東北地區以後,既与當地土著文化結合成為獨具特色的東北亞貊系統中“貊”族文化的主體,她与松花江流域的“西團山文化”的關係,是同屬穢貊系統的南北不同地域的民族文化。兩者的主要區別在于,“西團山類型”及其波及區,廣泛含有中原地區典型的三足器,這是北部穢族受漢文化影響的產物。而集中于遼東山地和三河(鴨綠江、渾江、太子河)流域為中心的“貊”族文化中卻絕少三足器。在漢以前,東北“貊”与“穢”兩支文化的發展,呈南北交向趨同發展。所以在兩種文化南北交接地帶的渾河上游和輝發河、柳河流域,方出現貊与穢兩種文化的混合現象。即文獻中的“北發”(北貊)之地。這南北兩文化趨同發展,以至最終的結合,當在戰國末至兩漢初。并構成了漢代以後東北高句麗和夫余文化的先基。
이상을 종합하면, 요동遼東, 길남吉南(한반도 북부 포함)을 중심 분포지로 하여 상商·주周 교체기부터 한漢나라 이전까지에 해당하는 대석붕大石棚, 적석묘積石墓, 석관묘石棺墓 문화(청동 단검 포함)는 초기에는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 문화와 역사적 연원이 있는 토착 문화였다. 이 문화가 동북東北 지역에 들어온 후에는 현지 토착 문화와 결합하여 독특한 특징을 지닌 동북아 예맥貊 계통 중 ‘맥貊’족 문화의 주체가 되었다.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와의 관계는, 같은 예맥穢貊 계통에 속하지만 남북의 다른 지역에 위치한 민족 문화라는 점이다. 두 문화의 주요 차이점은, ‘서단산 유형西團山類型’ 및 그 영향권에서는 중원 지역의 전형적인 세발토기三足器가 널리 발견되는데, 이는 북쪽의 예穢족이 한漢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산물이다. 반면, 요동遼東 산지와 세 강(압록강, 혼강, 태자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맥貊’족 문화에서는 세발토기三足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漢나라 이전에 동북東北의 ‘맥貊’과 ‘예穢’ 두 문화의 발전은 남북으로 교차하며 점차 비슷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두 문화가 남북으로 만나는 지대인 혼하渾河 상류와 휘발하輝發河, 유하柳河 유역에서 맥貊과 예穢 두 문화가 혼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문헌에 나오는 ‘북발北發’(북맥北貊)의 땅이다. 이 남북 두 문화가 비슷하게 발전하여 최종적으로 결합한 것은 전국戰國 말에서 양한兩漢 초 사이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漢나라 이후 동북東北 고구려와 부여 문화의 기초를 형성했다.
주석注釋
[1]《史記》卷一百二十九貨殖列傳。
[2]《史記》卷一百一十匈奴列傳。
[3]《漢書》卷一上、高帝紀。
[4]《漢書》卷二十八地理志。
[5]《漢書》卷二十四食貨志。
[6]《後漢書》卷八十五東夷列傳。
[7]《東北歷史地理》卷369頁(黑龍江人民出版社)。
[8]《三國史記》卷十三琉璃明王本紀。
[9]《三國史記》卷十六新大王本紀。
[10]翦伯贊《中國史綱》第二卷16頁。
[11]《金文著錄簡目》137頁“已侯貉子殷”(中華書局1981年版)。
[12]《漢書》卷六一武帝紀。
[13]《滿鮮原始墳墓的研究》昭和三十六年, 日本東京吉川弘文館出版。
[14][15]李松來《朝鮮青銅時代文化及其起源的考察》(1990年“環渤海考古討論會”論)。
[16]許玉林:《遼東半島石棚之研究》《北方文物》1985年第3期。
[17]許明綱:《大連古代石築墓葬研究》。《博物館研究》1990年第2期。
[18][19]李松來:《朝鮮青銅時代文化及其起源的考察》。
[20]林沄:《中國東北系銅劍初論》(《考古學報》1980年第2期)。
[21]全榮來:《朝鮮半島石棚的類型學研究》《東北亞歷史考古信息》1991年第1期徐光輝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