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慧竹. 漢代以前山東與朝鮮半島南部的交往[J]. 北方文物, 2004[01]16-23.
李慧竹. 汉代以前山东与朝鲜半岛南部的交往[J]. 北方文物, 2004[01]16-23.
인용회수 26 [2024.12.2. 현재]

漢代以前山東與朝鮮半島南部的交往
한대 이전 산동과 한반도 남부의 교류

리혜죽李慧竹

〔關鍵詞〕山東 朝鮮半島南部 戰國時期 文化交往

〔內容提要〕

根據《史記》等文獻記載,山東與朝鮮半島南部的文化交往始於秦代。本文從考古實物出發,在韓國出土的考古實物中辨別出來自戰國時期齊國的銅劍和銅鼎等遺物,從而以確鑿的考古證據證明山東和朝鮮半島南部的人員與文化交往至少在戰國時期就已開始了。戰國時期齊國亡民應是從山東半島出發,經海路直接東渡到達朝鮮半島南部的,這對於糾正學界認為這條航路開通於南朝劉宋時期的傳統認識也有一定幫助。

〔中圖分類號〕K207 〔文獻標識碼〕A 〔文章編號〕1001-0483(2004)01-0016-08

초록

《사기史記》 등 문헌 기록에 따르면 산동과 한반도 남부의 문화 교류는 진秦나라 때 시작되었다. 이 글은 고고학 실물 자료에서 출발하여, 한국에서 출토된 고고학 실물 중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에서 온 청동검과 청동솥 등의 유물을 식별해냈다. 이를 통해 산동과 한반도 남부의 인적·문화적 교류가 적어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로 증명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유민은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출발하여 바닷길로 직접 동쪽으로 건너와 한반도 남부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는 이 항로가 남조南朝 유송劉宋 시기에 개통되었다는 학계의 전통적인 인식을 바로잡는 데에도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이다.

 

목차

1. 석붕石棚 문제에 대하여

2.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문화 교류文化交流

(1) 청동검青銅劍

(2) 청동솥[銅鼎]

(3) 청동솥[銅鼎]과 수정 목걸이[水晶項鏈]

3. 결어結語

주석注釋

 

中國的山東省與韓國隔海相望, 相互之間的人員和文化交往有相當長的歷史, 經過學界的不懈探索, 公元前2世紀以後(即中國歷史上的漢代以後), 山東與朝鮮半島南部的往來歷史已比較清楚, 但對於在此之前的交往卻所知甚少。本文意在探討公元前11世紀至公元前202年山東與朝鮮半島南部的交往歷史。在周代尤其東周以來, 中國內地長期處於諸侯割據、戰亂紛爭狀態, 導致內地居民為避戰亂而不斷外遷。山東地處中國東部沿海, 尤其山東半島向東突於海中, 是大陸與遼東及朝鮮半島跨海距離最短的地方, 所以自然成為當時內地居民向北向東外遷的重要跳板。然而, 由於文獻記載的闕如或記錄不詳, 致使這一段歷史一直模糊不清。筆者近年來有機會接觸到山東和韓國屬於周代的一些出土的實物資料, 感覺得能夠反映山東與朝鮮半島南部在周代進行文化交流的考古實物還是比較清楚的, 並且在很大程度上可以彌補文獻記載的不足之處, 其意義是不言而喻的。現在把所獲認識提出來, 並願以此與學界同道共同探討。

중국의 산동성과 한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양 지역의 인적, 문화적 교류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계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기원전 2세기 이후, 즉 중국 역사에서 한대漢代 이후의 교류 역사는 비교적 명확히 밝혀졌다. 하지만 그 이전의 교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글은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산동과 한반도 남부의 교류 역사를 탐구하고자 한다. 주周나라 시대, 특히 동주東周 시기 이래로 중국 내륙은 오랫동안 여러 제후국이 나뉘어 다투는 전란 상태에 있었다. 이로 인해 내륙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끊임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산동은 중국 동부 해안에 있으며, 특히 산동반도山東半島는 바다 쪽으로 동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이곳은 대륙에서 요동遼東 및 한반도와의 해상 거리가 가장 짧은 곳이다. 그래서 당시 내륙 주민들이 북쪽이나 동쪽으로 이주할 때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문헌 기록이 부족하거나 상세하지 않아 이 시기의 역사는 지금껏 불분명했다. 필자는 최근 산동과 한국에서 출토된 주周나라 시대 유물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주周나라 시대에 산동과 한반도 남부 사이에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문헌 기록의 부족한 부분을 상당 부분 보완할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이제 필자가 알게 된 점들을 제시하고,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토론하고자 한다.

 

1. 석붕石棚 문제에 대하여

石棚, 即日本、韓國和朝鮮學界所稱“支石墓”, 是周代和秦漢時期廣泛分布於中國東北南部、朝鮮半島和日本的一種重要墓葬形式。它以四周立石、上蓋巨石板為基本特徵, 是東北亞古老的巨石崇拜觀念在喪葬習俗上的反映。經過四國學者多年來的研究探索, 東北亞的石棚基本可分為兩種, 即“北方式支石墓”或“桌子式支石墓”和“南方式支石墓”或“棋盤式支石墓”。第一種主要分布在遼東半島和朝鮮半島北部, 它以建造精美、規模宏大著稱, 而且用立石建造的墓室大都高出地面, 如遼寧海城析木城石棚和遼寧莊河店子石棚等[1]。第二種主要分布於朝鮮半島南部和日本九州一帶, 建造比較粗糙、規模較小, 而且墓室往往在地下構成箱式石棺, 如韓國全羅北道高敞邑石棚等[2]。這兩種石棚從建造技術上和出土隨葬品看, 是有早晚差別的, 即北方式早于南方式, 換言之, 東北亞的石棚有從東北逐漸向朝鮮半島和日本傳播的趨勢。關於石棚的年代, 一般認為北方式始建于西周時期, 沿用到春秋戰國, 南方式則較晚, 約始于春秋戰國時期, 直到公元1、2世紀的漢代還存在于朝鮮半島南部和日本九州。

석붕石棚은 일본, 한국, 북한[朝鮮] 학계에서 ‘지석묘支石墓’, 즉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주周나라와 진한秦漢 시기 중국 동북부 남부, 한반도, 일본에 널리 퍼져 있던 중요한 무덤 양식이다. 주변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리는 것이 기본 특징으로, 동북아시아의 오래된 거석巨石 숭배 사상이 장례 풍습에 반영된 것이다. 여러 나라 학자들의 오랜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고인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로 ‘북방식 지석묘北方式支石墓’ 또는 ‘탁자식 지석묘桌子式支石墓’와 ‘남방식 지석묘南方式支石墓’ 또는 ‘기반식 지석묘棋盤式支石墓’이다. 첫 번째 유형은 주로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한반도 북부에 분포한다.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규모가 큰 것으로 유명하며, 세운 돌로 만든 무덤방이 대부분 지상에 드러나 있다. 요녕遼寧 해성海城의 석목성析木城 석붕과 장하莊河의 점자店子 석붕 등이 그 예이다[1]. 두 번째 유형은 주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 구주九州 일대에 분포한다. 비교적 거칠게 만들어졌고 규모가 작으며, 무덤방이 땅속에 상자 모양의 돌덧널[석관, 石棺] 형태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한국 전라북도全羅北道 고창읍高敞邑의 고인돌이 대표적이다[2]. 이 두 종류의 고인돌은 제작 기술과 출토된 껴묻거리[수장품, 隨葬品]로 볼 때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북방식이 남방식보다 이르다. 다시 말해, 동북아시아의 고인돌은 동북 지역에서 점차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된 경향을 보인다. 고인돌의 연대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북방식은 서주西周 시기에 처음 만들어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남방식은 그보다 늦어 대략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시작되었고, 서기 1~2세기인 한漢나라 시대까지도 한반도 남부와 일본 구주九州에 존재했다.

在中國的山東省也發現有石棚, 其中最有名的是今山东淄博市淄川區王母山上的一座石棚。1928年10月, 日本考古學家鳥居龍藏首先發現該石棚, 並于1941年對石棚進行了發掘。從他的發掘報告看, 這座石棚的蓋石長1.84、寬1.16、厚0.88米, 其下以三個柱狀天然石塊做支撐, 高僅0.70米(圖一)[3]。1957年, 著名古史學家王獻唐先生也曾報道了這座石棚。但到1992年山東大學考古系和日本學者田村晃一等再次前往調查時, 這座石棚已蕩然無存。1998年, 山東大學考古系方輝教授發表了兩張由原齊魯大學加拿大籍教師明義士先生保存的照片, 為明氏1935年考察王母山石棚時拍攝, 照片清楚展現了這座石棚的原始面貌(圖二)[4]。

중국 산동성에서도 석붕石棚, 즉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늘날 산동 치박시淄博市 치천구淄川區 왕모산王母山에 있던 고인돌이다. 1928년 10월, 일본의 고고학자 토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이 고인돌을 처음 발견했고, 1941년에 발굴을 진행했다. 그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1.84미터, 너비 1.16미터, 두께 0.88미터였다. 그 아래에는 3개의 기둥 모양 자연석이 받치고 있었으며, 높이는 0.70미터에 불과했다(그림 1)[3].

 

1957년에는 저명한 역사학자 왕헌당王獻唐 선생도 이 고인돌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나 1992년 산동대학山東大學 고고학과와 일본 학자 타무라 코이치田村晃一 등이 다시 조사하러 갔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1998년, 산동대학山東大學 고고학과의 방휘方輝 교수가 예전 제로대학齊魯大學의 캐나다인 교사였던 명의사明義士 선생이 보관하던 사진 두 장을 발표했다. 이 사진은 명의사明義士가 1935년에 왕모산王母山 고인돌을 답사할 때 촬영한 것으로, 고인돌의 원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그림 2)[4].

另外, 在山東半島據說也有不少石棚, 如半島東端的榮成、文登等縣市都曾有所發現, 可惜現今多已不能辨其原址和形狀。不過, 現今山東半島仍保存了不少以“石棚”命名的村莊, 如萊陽市前店鄉東石棚村、榮成市馬道鄉杏石棚村、榮成市夏莊鎮石棚閻家村、乳山市馬石莊鄉下石棚村、乳山市大孤山鎮石棚楊家村等[5], 向我們暗示出山東石棚分布的大致範圍。由於石棚原物多已不存, 我們對山東石棚的年代和性質所知甚少, 不過從王母山石棚照片和有關文字描述我們不難看出, 它的建造比較粗糙, 規模也不大, 與分布於朝鮮半島南部的棋盤式支石墓有相似之處, 如果王母山石棚能夠代表山東石棚的某些特點的話, 那麼山東石棚與朝鮮半島南部以韓國為分布中心的棋盤式支石墓很可能有一定聯繫。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에도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도 동쪽 끝의 영성榮成, 문등文登 등 현縣과 시市에서 발견된 적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대부분 원래 위치나 형태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산동반도山東半島에는 여전히 ‘석붕石棚’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내양시萊陽市 전점향前店鄉의 동석붕촌東石棚村, 영성시榮成市 마도향馬道鄉의 행석붕촌杏石棚村, 영성시榮成市 하장진夏莊鎮의 석붕염가촌石棚閻家村, 유산시乳山市 마석장향馬石莊鄉의 하석붕촌下石棚村, 유산시乳山市 대고산진大孤山鎮의 석붕양가촌石棚楊家村 등이 있다[5]. 이는 산동 고인돌의 대략적인 분포 범위를 짐작하게 한다. 고인돌 실물이 대부분 사라져 산동 고인돌의 시대나 성격에 대해 아는 바가 적다. 하지만 왕모산王母山 고인돌 사진과 관련 기록을 보면, 제작 방식이 비교적 거칠고 규모도 크지 않아 한반도 남부에 분포하는 기반식棋盤式 고인돌과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왕모산王母山 고인돌이 산동 고인돌의 특징을 일부 보여준다면, 산동 고인돌은 한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한반도 남부의 기반식棋盤式 고인돌과 어떤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另外, 在山東半島東南部還發現了一種存在于西周中晚期至春秋前期的考古遺存“南黃莊文化”, 它以乳山、文登、榮成為主要分布範圍。其墓葬形式獨具特征, 即墓壁四周以石塊砌成, 再蓋以大石板, 石板上積以石塊封堵(圖三)。這種形式與山東其它地方以土坑墓為主要墓葬形式的周代墓葬很不相同, 而與遼東半島、朝鮮半島比較常見的石棺墓有近似之處, 只不過其墓壁四周以較平整的小石板或石塊砌成, 目前一般認為它是支石墓即石棚的進一步發展, 日本、韓國部分學者甚至把它歸入廣義的支石墓當中[6]。南黃莊文化還有一個比較重要的現象, 就是它的分布範圍與現今山東半島保存的石棚地名的分布範圍比較重合, 即都以山東半島東部的榮成、文登和乳山為分布重心。所有這些可能同樣意味著它與韓國的棋盤式支石墓及其發展形態石棺墓有一定聯繫。

이 외에도 산동반도山東半島 동남부에서는 서주西周 중기·후기부터 춘추春秋 전기까지 존재했던 ‘남황장 문화南黃莊文化’라는 고고학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문화는 주로 유산乳山, 문등文登, 영성榮成 지역에 분포한다. 무덤 양식이 독특한데, 무덤 벽을 돌로 쌓고 그 위를 큰 돌판으로 덮은 뒤, 다시 돌무더기로 막는 형태이다(그림 3).

이런 형식은 흙구덩무덤[토갱묘, 土坑墓]이 대부분인 산동의 다른 주周나라 시대 무덤과는 매우 다르다. 오히려 요동반도遼東半島나 한반도에서 흔히 보이는 돌덧널무덤[석관묘, 石棺墓]과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무덤 벽을 비교적 평평한 작은 돌판이나 돌로 쌓았다는 차이가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를 고인돌[지석묘, 支石墓], 즉 석붕石棚이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로 본다.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심지어 이를 넓은 의미의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6]. 남황장 문화南黃莊文化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그 분포 범위가 오늘날 산동반도山東半島에 남아있는 ‘석붕石棚’ 지명의 분포 범위와 상당히 겹친다는 점이다. 즉, 모두 산동반도山東半島 동부의 영성榮成, 문등文登, 유산乳山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이 모든 사실은 남황장 문화南黃莊文化가 한국의 기반식棋盤式 고인돌 및 그 발전 형태인 돌덧널무덤[석관묘, 石棺墓]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문화 교류文化交流

如果說根據石棚所透露的歷史信息, 我們還不能遽下結論認為山東與朝鮮半島南部在西周和春秋時期已有明顯的文化交往的話, 那麼到了戰國時期, 這種文化交往的跡象就比較明顯了。這就是韓國境內發現的來自于戰國時期齊國的銅劍和銅鼎及水晶項鏈等。

만약 고인돌이 알려주는 역사 정보만으로는 서주西周와 춘추春秋 시대에 산동과 한반도 남부 사이에 뚜렷한 문화 교류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면 그 교류의 흔적이 훨씬 분명해진다. 바로 한국 영토 안에서 발견된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청동검, 청동솥, 수정 목걸이 등이 그 증거이다.

 

(1) 청동검青銅劍

韓國全羅南道的完州上林里遺址曾出土了3件直刃青銅劍, 長在44.4~47.2厘米之間, 寬4厘米左右[7]。其形制基本相同, 均為首、莖與劍身連鑄, 圓首內凹, 扁圓實莖上有兩道銅箍, 蝠形厚格, 劍身狹長有脊, 其中兩件劍身前端的三分之一段較細, 而且劍身兩側開刃明顯, 在刃線與脊線之間形成了兩道比較寬淺的血槽, 這使劍身剖面呈略出刃角的菱形。另一件雖然未繪出開刃線, 但從菱形剖面也略出刃角看, 也應開刃出現寬淺的血槽(圖四:3~5)。

한국 전라남도全羅南道 완주完州 상림리上林里 유적에서 곧은 날을 가진 청동검 3점이 출토되었다. 길이는 44.4~47.2센티미터, 너비는 4센티미터 정도이다[7]. 형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손잡이 끝장식[수, 首], 손잡이[경, 莖], 칼몸[검신, 劍身]이 하나로 주조되었다. 손잡이 끝은 둥글고 안으로 오목하며, 납작하고 둥근 손잡이에는 두 개의 구리 테[동고, 銅箍]가 있다. 코등이[격, 格]는 박쥐 모양으로 두껍고, 칼몸은 가늘고 길며 등날[척, 脊]이 서 있다. 그중 2점은 칼몸 앞쪽 3분의 1 부분이 비교적 가늘고, 양옆으로 날이 선명하게 서 있다. 날과 등날 사이에는 비교적 넓고 얕은 피홈[혈조, 血槽]이 두 줄로 파여 있어, 칼몸의 단면이 약간의 날 각을 이룬 마름모꼴이다. 나머지 1점은 그림에 날이 선 모습이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마름모꼴 단면에서 날 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날이 서 있고 넓고 얕은 피홈이 있었을 것이다(그림 4: 3~5).

這3件銅劍與朝鮮半島南部同時期常見的細形銅劍在形制和鑄造上截然不同。細形銅劍在棋盤式支石墓、石棺墓和少量漢式土坑木椁墓中都大量出土, 是朝鮮半島南部周代和秦漢時期劍類銅兵器的主要形式。它的顯著特征是劍身與劍柄多不連鑄, 脊呈扁柱形, 劍身整體呈針葉形, 開刃雖然明顯但在刃部後端有明顯淺凹槽, 兩條血槽非常明顯但不抵劍鋒部位, 如韓國大邱市晚村洞出土者(圖四:7)[8]。學界一般認為, 這種細形銅劍是由主要分布于遼東半島和朝鮮半島北部的“東北系”曲刃銅劍(又稱“琵琶形劍”, 多出于桌子式支石墓中)發展而來的[9]。

이 3점의 청동검은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에서 흔히 보이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형태 및 제작 방식에서 완전히 다르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기반식棋盤式 고인돌, 돌덧널무덤[석관묘, 石棺墓], 그리고 일부 한漢나라식 덧널무덤[목곽묘, 木槨墓]에서 대량으로 출토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의 주周나라와 진한秦漢 시기 칼 종류 청동 무기[동병기, 銅兵器]의 주요 형태이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의 뚜렷한 특징은 칼몸과 손잡이가 따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고, 등날은 납작한 기둥 모양이며, 칼몸 전체는 침엽수 잎 모양이라는 점이다. 날은 뚜렷하게 서 있지만 날 뒷부분에 얕은 홈이 있고, 두 줄의 피홈은 매우 선명하지만 칼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국 대구시大邱市 만촌동晚村洞 출토품이 그 예이다(그림 4: 7)[8].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세형동검細形銅劍이 주로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한반도 북부에 분포하는 ‘동북계東北系’ 곡인동검曲刃銅劍, 즉 ‘비파형동검琵琶形劍’에서 발전한 것으로 본다[9].

由於上林里出土的這3件銅劍與細形銅劍在形制和鑄造上具有顯著差別, 所以韓、日學界普遍認為上林里銅劍應來自春秋戰國時期的中國內陸, 稱之為“中國式銅劍”。這種觀點有一定道理。這種有格有首、劍刃基本平行的銅劍的確在中國內陸的春秋戰國時期墓葬中大量出土, 是這一時期中國內陸劍類銅兵器的主要形式, 屬於中國中原式銅劍。對此, 林壽晉等先生已有深入研究[10]。

상림리上林里에서 출토된 이 3점의 청동검은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형태 및 제작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학계는 보편적으로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중국 내륙에서 온 것으로 보고 ‘중국식 동검中國式銅劍’이라 부른다. 이러한 관점은 일리가 있다. 코등이와 손잡이 끝장식이 있고 칼날이 거의 평행한 이런 청동검은 실제로 중국 내륙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무덤에서 대량으로 출토된다. 이는 이 시기 중국 내륙 칼 종류 청동 무기[동병기, 銅兵器]의 주요 형태로, 중국 중원식中原式 청동검에 속한다. 이에 대해서는 임수진林壽晉 선생 등이 이미 깊이 연구한 바 있다[10].

但韓日學界對上林里銅劍來自於中國內陸戰國時期哪個地域或哪個國家還有不同意見, 有的學者推測可能來源於與朝鮮半島陸路最近的燕國。對此筆者不敢苟同。經綜合比較分析, 筆者認為上林里銅劍應來自齊國。

하지만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이 중국 내륙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어느 지역 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는 한반도와 육로로 가장 가까운 연燕나라에서 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필자는 이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한 결과, 필자는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이 제齊나라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戰國時期燕國的轄境主要在河北北部和遼寧西部, 在戰國晚期燕昭王時曾將遼東半島納入領土範圍在地域上的確與朝鮮半島距離最近。但問題並不這樣簡單。從近年來在戰國燕國都城燕下都(今河北易縣)的考古發掘成果看, 燕國的銅劍有自身特色, 以一種無格或窄格、無開刃線或開刃不明顯、無脊或扁平脊、剖面呈六角形的銅劍最常見, 如燕下都第44號墓出土者[11]。顯然, 燕國銅劍與上林里銅劍在具體形制和鑄造細節上是不甚相同的, 所以, 作為中原式銅劍一部分的燕國銅劍不可能是上林里銅劍的來源。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영토는 주로 하북河北 북부와 요녕遼寧 서부였다. 전국戰國 후기 연소왕燕昭王 때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영토로 편입하여 지역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최근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수도였던 연하도燕下都(현재의 하북河北 역현易縣)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보면, 연燕나라 청동검은 독자적인 특징이 있다. 코등이가 없거나 좁고, 날을 세운 흔적이 없거나 뚜렷하지 않으며, 등날이 없거나 납작하고, 단면이 육각형인 청동검이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연하도燕下都 제44호 무덤 출토품이 그 예이다[11]. 분명히 연燕나라 청동검은 상림리上林里 청동검과 구체적인 형태 및 제작 세부 사항에서 상당히 다르다. 따라서 중원식中原式 청동검의 일부인 연燕나라 청동검이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의 기원일 수는 없다.

戰國時期齊國的銅劍也很有特色, 以一種首、莖與劍身連鑄的銅劍最常見, 其具體形制和鑄造細節與上林里銅劍非常相似, 文字描述不再重複。這種銅劍在齊國都城的今山東臨淄一帶多有發現[12], 在齊國近畿地區的今濰坊一帶出土也很多[13], 足以證明是齊國鑄造的。另外, 在山東半島和泰沂山脈南麓也多有出土, 如長島王溝[14]、棲霞金山[15]和新泰郭家泉[16]等地的戰國墓中都有出土(圖四:1、2、6)。其中山東半島在戰國以前屬萊國轄境, 公元前567年萊國被齊國攻滅, 山東半島納入到齊國統治範圍。新泰所在的泰沂山脈南麓在戰國之前屬魯國管轄之地, 但在戰國時期為齊國蠶食, 郭家泉第10號墓中與帶寬淺血槽銅劍同出的高柄豆、長頸壺等典型齊文化陶器就是明證。所有這些再次證明, 山東半島和泰沂山脈南麓戰國墓出土的這種帶寬淺血槽的銅劍應來自齊國, 屬於戰國時期中原的齊式劍。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청동검 또한 매우 특징적이다. 손잡이 끝장식, 손잡이, 칼몸이 하나로 이어진 청동검이 가장 흔한데, 그 구체적인 형태와 제작 세부 사항은 상림리上林里 청동검과 매우 비슷하여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청동검은 제齊나라의 수도였던 오늘날 산동 임치臨淄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며[12], 수도 인근 지역인 지금의 유방濰坊 일대에서도 많이 출토되어[13] 제齊나라에서 제작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와 태기산맥泰沂山脈 남쪽 기슭에서도 많이 출토되는데, 장도長島 왕구王溝[14], 서하棲霞 금산金山[15], 신태新泰 곽가천郭家泉[16] 등지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무덤에서 모두 나왔다(그림 4: 1, 2, 6). 이 중 산동반도山東半島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전에는 내국萊國의 영토였으나, 기원전 567년 내국萊國이 제齊나라에 멸망당하면서 제齊나라의 통치 범위에 포함되었다. 신태新泰가 위치한 태기산맥泰沂山脈 남쪽 기슭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이전에는 노魯나라의 관할 지역이었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齊나라에 잠식되었다. 곽가천郭家泉 제10호 무덤에서 넓고 얕은 피홈이 있는 청동검과 함께 출토된 높은 굽 접시[고병두, 高柄豆], 목이 긴 항아리[장경호, 長頸壺] 등 전형적인 제齊나라 문화의 토기가 바로 그 명백한 증거이다. 이 모든 사실은 산동반도山東半島와 태기산맥泰沂山脈 남쪽 기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무덤에서 출토된, 넓고 얕은 피홈이 있는 이 청동검이 제齊나라에서 온 것이며,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원中原의 제식검齊式劍에 속함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我們選用新泰郭家泉第10號墓和棲霞金山第1、2號戰國墓出土的3件銅劍與同樣帶寬淺血槽的上林里銅劍進行比較(見圖四)。比較的结果無疑能夠證明, 上林里銅劍應來源于戰國時期的齊國。在此基礎上, 我們可以對上林里銅劍的具體年代做出進一步推斷。原發掘者把棲霞金山第1、2號墓斷在戰國早期, 將郭家泉第10號墓斷在戰國中期, 是比較正確的。上林里這3件銅劍的總體特征與金山和郭家泉的3件銅劍基本相同, 表明不能晚于戰國晚期。同時, 就血槽發達程度而言, 上林里3件銅劍又與郭家泉最接近, 而金山銅劍的血槽還不太發達。因此, 上林里這3件銅劍的年代應在戰國中期, 即公元前4世紀後半葉。上林里銅劍的發現者全榮來先生後來認為這3件銅劍在公元前五六世紀之交, 相當于中國的春秋中期前後, 這明顯偏早, 應予糾正[17]。

우리는 신태新泰 곽가천郭家泉 제10호 무덤과 서하棲霞 금산金山 제1, 2호 전국시대戰國時代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검 3점을, 마찬가지로 넓고 얕은 피홈이 있는 상림리上林里 청동검과 비교해보았다(그림 4 참조). 비교 결과,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이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의 구체적인 연대를 더 추정할 수 있다. 원래 발굴자는 서하棲霞 금산金山 제1, 2호 무덤을 전국戰國 초기로, 곽가천郭家泉 제10호 무덤을 전국戰國 중기로 편년했는데, 이는 비교적 정확하다. 상림리上林里의 청동검 3점은 전체적인 특징이 금산金山과 곽가천郭家泉의 청동검 3점과 기본적으로 동일하여, 전국戰國 후기보다 늦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피홈이 발달한 정도로 보면, 상림리上林里의 3점은 곽가천郭家泉 출토품과 가장 가깝다. 반면 금산金山 청동검의 피홈은 아직 덜 발달했다. 따라서 상림리上林里 청동검 3점의 연대는 전국戰國 중기, 즉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한다. 상림리上林里 청동검의 발견자인 전영래全榮來 선생은 나중에 이 3점의 청동검이 기원전 5-6세기 전환기, 즉 중국의 춘추春秋 중기 무렵의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명백히 너무 이른 시기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17].

 

(2) 청동솥[銅鼎]

韓國慶尚南道的蔚山市下岱遺址第23號墓曾出土一件銅鼎, 通高50、口徑30厘米, 子母口內斂, 圓腹稍平底, 沿下安一對外侈高附耳, 腹部偏上有一周銅箍, 下腹安三獸足較粗壯。尤其值得注意的是, 其腹部滿飾圓形的小“鑄物固定痕”(圖五:2)[18]。

한국 경상남도慶尚南道 울산시蔚山市 하대下岱 유적 제23호 무덤에서 청동솥[동정, 銅鼎] 1점이 출토되었다. 전체 높이 50센티미터, 입구 지름 30센티미터이다. 입구는 자모구子母口 형식으로 안으로 약간 오므라들었고, 배는 둥글고 바닥은 약간 평평하다. 입구 바로 아래에는 밖으로 벌어진 높은 귀가 한 쌍 달려 있다. 배의 위쪽에는 구리 테[동고, 銅箍]가 한 바퀴 둘러져 있고, 아래쪽 배에는 굵고 튼튼한 짐승 모양 다리[수족, 獸足] 세 개가 달려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배 부분에 둥근 모양의 작은 ‘주물 고정 흔적[주물고정흔, 鑄物固定痕]’이 가득하다는 것이다(그림 5: 2)[18].

韓國學者鄭仁盛先生最近對朝鮮半島出土的銅鼎做了可貴的集中和深入研究, 並把這些銅鼎分為輸入品與仿鑄品兩大類, 把下岱這件銅鼎歸入輸入品一類, 這是很有見地的。但他認為下岱這件銅鼎晚于實為戰國晚期的良東里銅鼎(良東里銅鼎詳下), 這一點筆者並不以為然, 我們的意見正好相反, 下岱這件銅鼎從種種跡象看應早于秦漢時期, 屬於戰國時期的齊式銅鼎[19]。

한국 학자 정인성鄭仁盛 선생은 최근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솥[동정, 銅鼎]에 대해 귀중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이 청동솥들을 수입품과 모방 제작품 두 종류로 나누고, 하대下岱의 청동솥을 수입품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매우 탁월한 견해이다. 그러나 그는 하대下岱의 청동솥이 실제로는 전국戰國 후기 유물인 양동리良東里 청동솥(자세한 내용은 뒤에 설명)보다 늦은 시기의 것이라고 보았다. 필자는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의 의견은 정반대이다. 하대下岱의 청동솥은 여러 흔적으로 보아 진한秦漢 시기보다 이르며,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제齊나라식 청동솥[제식동정, 齊式銅鼎]에 속한다[19].

首先, 它的附耳奇高, 而且頂端方折, 這與秦漢時期常見的附耳特征格格不入, 秦漢銅鼎就目前所見絕大多數附耳較粗矮, 而且頂端均圓折, 一如鄭仁盛先生在文中列舉的平壤一帶出土的幾件漢式銅鼎所見。其次, 下岱銅鼎的中腹偏上所飾銅箍並不突出, 這與漢式銅鼎所飾銅箍非常發達、幾成寬沿的特征(亦如平壤出土的漢式銅鼎所見)截然不同。這兩條證據已能證明下岱銅鼎應屬秦漢之前之物。

첫째, 이 솥의 귀는 매우 높고 끝부분이 각지게 꺾여 있다. 이는 진한秦漢 시기에 흔히 보이는 귀의 특징과 전혀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발견된 진한秦漢 시기 청동솥은 대부분 귀가 굵고 낮으며 끝이 둥글게 꺾여 있다. 이는 정인성鄭仁盛 선생이 논문에서 예로 든 평양平壤 일대 출토 한漢나라식 청동솥에서도 볼 수 있다. 둘째, 하대下岱 청동솥 배의 위쪽에 있는 구리 테는 그다지 돌출되지 않았다. 이는 한漢나라식 청동솥의 구리 테가 매우 발달하여 거의 넓은 테두리처럼 보이는 특징과 완전히 다르다(이 또한 평양平壤 출토 한漢나라식 청동솥에서 확인된다). 이 두 가지 증거만으로도 하대下岱 청동솥이 진한秦漢 시대 이전의 물건임을 증명할 수 있다.

經過反覆比較揣摩, 我們進一步認為:下岱銅鼎應屬戰國時期的齊式銅鼎。問題的關鍵在於其腹部所飾圓形“鑄物固定痕”。這種“鑄物固定痕”實際上就是齊式銅鼎上特有的圓形乳丁脫落後造成的痕跡。齊國銅器上多裝飾有圓形乳丁, 這是很多學者都已經指出的, 如齊國故城附近的臨淄北楮莊和淄川磁村就出土過身飾乳丁銅敦[20], 臨淄後李則出土過身飾乳丁的陶敦(圖五:4~6)。鑒於這種身飾乳丁的做法只見于齊國, 所以有很多學者已經指出, 東周以來裝飾乳丁的銅器基本可徑稱為“齊式銅器”[21]。1985年, 在山東省安丘縣毛子埠遺址出土了一件身飾乳丁的平頂銅鼎(圖五:1), 平頂蓋是齊國銅器的又一項明顯特征, 再加上身飾乳丁, 明確證明毛子埠出土的這件銅鼎應屬於齊國鑄造[22]。以此, 腹飾獨特的圓形“鑄物固定痕”的下岱銅鼎應屬齊式鼎已無疑義。

거듭 비교하고 연구한 결과, 우리는 하대下岱 청동솥이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제齊나라식 청동솥[제식동정, 齊式銅鼎]에 속한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배 부분에 있는 둥근 ‘주물 고정 흔적’이다. 이 흔적은 사실 제齊나라식 청동솥 특유의 둥근 젖꼭지 모양 장식[유정, 乳丁]이 떨어진 자국이다. 제齊나라 청동기에는 둥근 젖꼭지 모양 장식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많은 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이다. 예를 들어, 제齊나라 옛 도성 근처인 임치臨淄 북저장北楮莊과 치천淄川 자촌磁村에서는 몸에 젖꼭지 장식이 있는 청동 제기[동돈, 銅敦]가 출토되었고[20], 임치臨淄 후리後李에서는 같은 장식이 있는 토기 제기[도돈, 陶敦]가 출토되었다(그림 5: 4~6). 이처럼 몸에 젖꼭지 장식을 하는 방식은 제齊나라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동주東周 시대 이래 젖꼭지 장식이 있는 청동기는 기본적으로 ‘제식齊式 청동기’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21]. 1985년, 산동성 안구현安丘縣 모자부毛子埠 유적에서 몸에 젖꼭지 장식이 있는 평평한 뚜껑의 청동솥[동정, 銅鼎]이 출토되었다(그림 5: 1). 평평한 뚜껑 역시 제齊나라 청동기의 또 다른 뚜렷한 특징이다. 여기에 젖꼭지 장식까지 더해져, 모자부毛子埠 출토 청동솥이 제齊나라에서 제작된 것임이 명확히 증명된다[22]. 따라서 배 부분에 독특한 둥근 ‘주물 고정 흔적’이 있는 하대下岱 청동솥이 제齊나라식 솥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安丘這件銅鼎的兩耳內傾, 腹較淺, 三獸足較細高, 這是戰國早期齊式銅鼎的典型特征。而下岱銅鼎的整體形制與山東章丘女郎山第一號大墓所出的仿銅陶鼎基本相同(圖五:3), 女郎山一號大墓的墓主據考證是戰國中期齊國大將軍匡章, 下岱銅鼎的鑄造年代應與女郎山一號大墓大致相當, 換言之, 下岱銅鼎應是安丘銅鼎的進一步發展, 屬於戰國中期, 即公元前3世紀上半葉[23]。這在目前山東尚未見戰國中期身飾乳丁的齊式銅鼎資料發表的情況下, 下岱銅鼎的價值彌足珍貴。

안구安丘에서 나온 이 청동솥은 양쪽 귀가 안으로 기울어져 있고, 배가 비교적 얕으며, 세 개의 짐승 모양 다리는 가늘고 높다. 이는 전국戰國 초기 제齊나라식 청동솥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한편, 하대下岱 청동솥의 전체적인 형태는 산동 장구章丘 여랑산女郎山 제1호 대형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모방한 토기 솥과 기본적으로 같다(그림 5: 3). 여랑산女郎山 1호 무덤의 주인은 전국戰國 중기 제齊나라의 대장군 광장匡章으로 고증되었다. 따라서 하대下岱 청동솥의 제작 연대는 여랑산女郎山 1호 무덤과 거의 같아야 한다. 다시 말해, 하대下岱 청동솥은 안구安丘 청동솥이 더 발전한 형태로, 전국戰國 중기, 즉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속한다[23]. 현재 산동에서는 전국戰國 중기에 해당하는, 몸에 젖꼭지 장식이 있는 제齊나라식 청동솥 자료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하대下岱 청동솥의 가치는 매우 귀중하다.

下岱第23號墓是一座土坑木椁墓, 與銅鼎同出的還有高領圈足陶壺等物, 從此墓形制和陶壺特征看, 其時代應較晚。韓國的發掘者已將其定在公元3世紀中葉, 比下岱銅鼎鑄造的年代晚了將近400年, 這在情理上是可以說通的, 它反映了人們對銅器的珍愛意識和長期使用, 同時這也正是所飾乳丁脫落留下“鑄物固定痕”的原因所在。結合當時朝鮮半島的形勢看, 這件銅鼎基本可以肯定是從戰國中期的齊國輾轉流入當地, 並在當地長期使用保存下來的。

하대下岱 제23호 무덤은 흙구덩 덧널무덤[토갱목곽묘, 土坑木槨墓]이다. 청동솥과 함께 목이 높은 굽다리 토기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의 형태와 토기 항아리의 특징으로 보아, 그 시대는 비교적 늦다. 한국의 발굴자들은 이 무덤을 서기 3세기 중엽으로 편년했다. 이는 하대下岱 청동솥이 제작된 시기보다 거의 400년이나 늦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청동기를 소중히 여기며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장식이었던 젖꼭지 모양[유정, 乳丁]이 떨어져나가 ‘주물 고정 흔적’을 남긴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청동솥은 전국戰國 중기 제齊나라에서 여러 경로를 거쳐 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와 오랫동안 사용되고 보존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3) 청동솥[銅鼎]과 수정 목걸이[水晶項鏈]

韓國慶尚南道的金海市良東里(又寫作“良洞里”, 其東南與釜山市相鄰, 東北與下岱相隔不遠)遺址第322號墓曾出土一件銅鼎和一串包括兩顆水晶珠在內的項鏈[24]。其中銅鼎通高17.5、口徑16.1厘米。它具有明顯的戰國晚期銅鼎的特征, 子母口稍內斂, 腹略深, 上腹較直並裝飾一周銅箍, 下腹安三個粗矮的獸足, 兩附耳粗矮外侈, 耳頂端弧折(圖六:1)。這種形制的銅鼎廣泛出土于中國戰國晚期的諸侯國境內, 在山東也不能例外, 如濟南千佛山的戰國晚期墓中就有發現(圖六:4)[25]。

한국 경상남도慶尚南道 김해시金海市 양동리良東里(또는 ‘양동리良洞里’라고도 쓴다. 동남쪽으로는 부산시釜山市와 인접하고, 동북쪽으로는 하대下岱와 멀지 않다) 유적 제322호 무덤에서 청동솥 1점과 수정 구슬 2개를 포함한 목걸이 한 줄이 출토되었다[24]. 그중 청동솥은 전체 높이 17.5센티미터, 입구 지름 16.1센티미터이다. 이 솥은 전국戰國 후기 청동솥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입구는 자모구子母口 형식으로 약간 안으로 오므라들었고, 배는 약간 깊다. 윗배는 비교적 곧고 구리 테가 한 바퀴 둘러져 있으며, 아랫배에는 굵고 낮은 짐승 모양 다리 세 개가 달려 있다. 양쪽 귀는 굵고 낮으며 밖으로 벌어져 있고, 귀 끝은 둥글게 꺾여 있다(그림 6: 1). 이런 형태의 청동솥은 중국 전국戰國 후기 여러 제후국의 영토에서 널리 출토되며, 산동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제남濟南 천불산千佛山의 전국戰國 후기 무덤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그림 6: 4)[25].

另外, 1999年在陝西省臨潼秦始皇陵的一座陪葬俑坑中發現了一件重達212公斤的大銅鼎, 非秦王朝宗廟重器莫屬, 同時也為秦代銅鼎提供了珍貴的標準器。其形制特征為子母口稍內斂, 上腹較直, 中腹飾一周發達的銅箍, 下腹較深, 3個獸足粗壯矮胖, 兩個附耳亦粗矮外侈且頂端弧折(圖六:5)[26]。這件銅鼎就其整體特征看明顯比良東里銅鼎有所發展, 從而再次證明良東里銅鼎應屬戰國晚期。韓國鄭仁盛先生認為良東里銅鼎早于屬戰國中期的下岱銅鼎是不妥當的。

또한, 1999년 섬서성陝西省 임동臨潼 진시황릉秦始皇陵의 한 배장갱陪葬坑에서 무게 212킬로그램에 달하는 대형 청동솥이 발견되었다. 이는 진秦나라 왕실의 종묘에서 쓰던 중요한 제기[종묘중기, 宗廟重器]임에 틀림없으며, 동시에 진秦나라 시대 청동솥의 귀중한 기준 유물이 된다. 그 형태적 특징은 입구가 자모구子母口 형식으로 약간 안으로 오므라들었고, 윗배는 비교적 곧으며, 가운데 배에는 발달된 구리 테가 둘러져 있고, 아랫배는 비교적 깊다. 3개의 짐승 모양 다리는 굵고 땅딸막하며, 두 개의 귀 또한 굵고 낮고 밖으로 벌어져 있으며 끝은 둥글게 꺾여 있다(그림 6: 5)[26]. 이 청동솥은 전체적인 특징으로 볼 때 양동리良東里 청동솥보다 발전된 형태임이 분명하다. 이는 양동리良東里 청동솥이 전국戰國 후기에 속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한국의 정인성鄭仁盛 선생이 양동리良東里 청동솥을 전국戰國 중기에 속하는 하대下岱 청동솥보다 이르다고 본 것은 타당하지 않다.

值得關注的還有該墓同出的一串項鏈, 其所含兩顆水晶珠是我們認為項鏈本身及銅鼎來自於山東的又一佐證。這兩顆水晶珠形制大小相同, 均為算珠形, 中間有圓孔以利穿系(圖六:2)。用水晶做成的物品在這一時期的朝鮮半島和日本還相當罕見, 但卻是齊國的大宗產品。僅以齊國都城所在的淄博的考古發現來看, 已在朗家莊第一號大墓、南馬坊第一號大墓中大量出土了水晶項鏈, 具體有水晶珠、環、管和蠶形器等[27], 其中水晶珠的形狀也為算珠形, 與良東里的水晶珠很相似(圖六:3)。另外, 在山東半島的戰國墓如長島王溝、棲霞金山等地也有發現, 亦能證明為齊國所造。

이 무덤에서 함께 출토된 목걸이 한 줄 또한 주목할 만하다. 목걸이에 포함된 두 개의 수정 구슬은, 목걸이 자체와 청동솥이 산동에서 왔다고 보는 또 하나의 보조 증거이다. 이 두 개의 수정 구슬은 형태와 크기가 같고, 모두 주판알 모양이며, 가운데에 끈을 꿰기 위한 둥근 구멍이 있다(그림 6: 2). 수정으로 만든 물건은 이 시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매우 드물었지만, 제齊나라에서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이었다. 제齊나라 수도가 있던 치박淄博 지역의 고고학 발견만 보더라도, 낭가장朗家莊 제1호 대형 무덤, 남마방南馬坊 제1호 대형 무덤에서 수정 목걸이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수정 구슬, 고리, 관, 누에 모양 장식 등이 있었는데[27], 그중 수정 구슬의 모양 또한 주판알 모양으로 양동리良東里의 수정 구슬과 매우 비슷하다(그림 6: 3).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무덤인 장도長島 왕구王溝, 서하棲霞 금산金山 등에서도 발견되어, 제齊나라에서 만들어졌음을 증명한다.

齊國大量使用水晶產品有其深刻的歷史背景。中國古代素有珍玉傳統, 在社會生活各個領域大量使用玉器是中國古代文化的一大特色。但齊國所統轄的山東北半部和山東半島玉料產地並不多, 所以就大量使用水晶和滑石制品, 以代替不易多得的玉器。與山東接壤的江蘇東海縣歷史上一直以盛產水晶而聞名, 這裏在周代應是莒國的統治範圍, 戰國時期莒國先為楚滅後又併入齊國領土, 所以齊國的戰國墓中大量出現水晶製品正與掌控了水晶產地有直接關係。

제齊나라가 수정 제품을 대량으로 사용한 데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고대 중국에는 옥玉을 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었고, 사회생활 여러 분야에서 옥기玉器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대 중국 문화의 큰 특징이다. 하지만 제齊나라가 다스리던 산동 북반부와 산동반도山東半島에는 옥玉 원료 산지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구하기 어려운 옥기玉器를 대신하여 수정과 활석 제품을 대량으로 사용했다. 산동과 인접한 강소江蘇 동해현東海縣은 역사적으로 수정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이 지역은 주周나라 때 거국莒國의 통치 범위였을 것이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거국莒國은 먼저 초楚나라에 멸망당했다가 다시 제齊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제齊나라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무덤에서 수정 제품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것은 수정 산지를 장악한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既然齊國大量生產水晶製品, 而同時期朝鮮半島和日本又罕見水晶製品, 所以良東里第322號墓出土的兩顆水晶珠就可以肯定來自於齊國。以此再看同墓所出的銅鼎, 無疑也應來自齊國了。

제齊나라는 수정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수정 제품이 드물었으므로, 양동리良東里 제322호 무덤에서 출토된 두 개의 수정 구슬은 제齊나라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무덤에서 나온 청동솥을 다시 보면, 이 또한 의심할 여지 없이 제齊나라에서 온 것일 것이다.

 

3. 결어結語

《三國志·魏志·東夷傳》記載:“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史記·朝鮮列傳》記載:漢初燕人衛滿“東走出塞, 渡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출전: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원문: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번역: 진승陳勝 등이 일어나 천하가 진秦에 반기를 들자, 연燕·제齊·조趙나라 백성 수만 명이 조선朝鮮으로 피난했다.

출전: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원문: 漢初燕人衛滿“東走出塞, 渡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번역: 한漢나라 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요새를 나가 물을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真番, 조선朝鮮의 만이蠻夷 및 옛 연燕,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었고,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這是迄今所知中國與朝鮮半島發生人員交往的較早的兩條文獻記載, 其所言秦時齊民即指秦末為避戰亂從山東半島逃來的亡民, 所以現在學界多認為, 山東與朝鮮半島的人員交往始於秦代。但實際上, 秦代前後不過20年, 所言齊民極有可能包括了戰國時期亡來的齊民。本文的分析則表明, 在韓國已經發現了來自戰國時期齊國的考古實物, 其來源途徑無疑是齊之亡民越海攜來, 就以確鑿的實物證據證明了山東與朝鮮半島的人員交往與文化交往, 至少在秦代之前的戰國時期就已開始了。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중국과 한반도의 인적 교류에 관한 비교적 이른 두 개의 문헌 기록이다. 기록에 나오는 ‘진秦나라 때의 제齊나라 백성[제민, 齊民]’은 진秦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도망 온 유민을 가리킨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는 대부분 산동과 한반도의 인적 교류가 진秦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실제로는 진秦나라 존속 기간은 20년 남짓에 불과하며, 기록 속 ‘제민齊民’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망명해 온 제齊나라 사람들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글의 분석은 한국에서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고고학 유물이 발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유물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제齊나라 유민들이 바다를 건너 가져온 것이다. 이는 산동과 한반도의 인적 및 문화 교류가 적어도 진秦나라 이전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실한 실물 증거로 증명한다.

以這些考古實物為基礎, 我們可以窺見當時山東與朝鮮半島南部人員和文化交往的某些細節, 主要有以下5點:

이러한 고고학 유물을 바탕으로 당시 산동과 한반도 남부의 인적, 문화 교류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엿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 5가지이다.

1.目前所知這些來自戰國時期齊國的考古實物均發現於朝鮮半島南部的韓國境內, 而在朝鮮半島北部則主要見到來自戰國時期燕國和趙國的考古實物, 如朝鮮慈江道、平安北道和平安南道都出土了大量燕國明刀幣[28], 黃海南道則發現了戰國時期無血槽中原式銅劍[29], 而地處鴨綠江北岸的中國吉林省集安市發現了戰國晚期的趙國有銘文銅劍[30], 這不僅再次證明所謂秦時燕、趙、齊之亡民, 實際上應包括了戰國時期的這三國亡民, 而且也暗示出當時這三國亡民的不同流向, 即燕、趙亡民主要流向了朝鮮半島的北部, 而齊國亡民應主要流向了朝鮮半島南部今韓國境內。這對於具體追述山東與朝鮮半島南部的早期交往史具有一定的學術價值。

1. 현재까지 알려진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고고학 유물은 모두 한반도 남부인 한국 영토 내에서 발견되었다. 반면, 한반도 북부에서는 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유물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북한[朝鮮] 자강도慈江道, 평안북도平安北道, 평안남도平安南道에서는 연燕나라의 명도전明刀錢이 대량 출토되었고[28], 황해남도黃海南道에서는 피홈이 없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원식中原式 청동검이 발견되었다[29]. 또한 압록강鴨綠江 북안에 위치한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서는 전국戰國 후기 조趙나라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청동검이 발견되었다[30]. 이는 ‘진秦나라 때 연燕, 조趙, 제齊의 유민’이라는 표현이 실제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이 세 나라 유민을 포함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또한, 당시 세 나라 유민의 이동 경로가 달랐음을 시사한다. 즉, 연燕나라와 조趙나라 유민은 주로 한반도 북부로, 제齊나라 유민은 주로 한반도 남부인 오늘날의 한국 영토로 향했을 것이다. 이는 산동과 한반도 남부의 초기 교류사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는 데 일정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2.戰國時期燕國所在的今河北、遼寧, 從地理上看與朝鮮半島的陸路距離最近, 趙國所在的今山西北部一帶通過燕國也可從陸路直抵朝鮮半島, 而目前所知朝鮮半島發現的燕、趙考古實物也正分布在靠近遼東的朝鮮半島北部, 這說明當時燕趙亡民是通過陸路流徙而來的。但如果說齊國亡民也是通過遼東向東遷徙, 那麼齊國的考古實物理應在朝鮮半島北部集中發現, 但目前所知的考古資料卻是以朝鮮半島南部的韓國境內發現最多。這一現象在目前來講應予充分重視, 因為這很可能意味著戰國時期齊國亡民應是從山東半島出發, 經海路直接東渡到朝鮮半島南部的。目前學界多認為, 從山東半島橫渡黃海(朝鮮、韓國稱“西海”)抵達朝鮮半島這條航路是在南朝的劉宋時期開通的[31]。但本文從考古學證據出發, 認為這條航路的開通應更早, 至戰國時期就已初步開闢。

2.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가 있던 오늘날의 하북河北, 요녕遼寧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육로 거리가 가장 가깝다. 조趙나라가 있던 오늘날의 산서山西 북부 일대 역시 연燕나라를 거쳐 육로로 한반도에 직접 닿을 수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연燕, 조趙나라의 고고학 유물도 요동遼東에 가까운 한반도 북부에 분포하고 있다. 이는 당시 연燕, 조趙나라 유민이 육로를 통해 이주해 왔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만약 제齊나라 유민도 요동遼東을 거쳐 동쪽으로 이주했다면, 제齊나라의 고고학 유물은 당연히 한반도 북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고고학 자료는 한반도 남부인 한국 영토 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이 현상은 현재로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유민이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출발하여, 바닷길을 통해 직접 동쪽으로 건너와 한반도 남부에 도착했음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부분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황해黃海(한국에서는 ‘서해西海’라 부름)를 가로질러 한반도에 도착하는 이 항로가 남조南朝 유송劉宋 시기에 개통되었다고 본다[31]. 하지만 이 글은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이 항로의 개통이 그보다 훨씬 이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미 초보적으로 열렸다고 주장한다.

3.據《後漢書·東夷列傳》記載, 秦漢時期朝鮮半島南部主要有三大居民集團, 即馬韓、辰韓和弁韓, 其中馬韓勢力最大, 佔據西部沿海, 辰韓或稱秦韓是馬韓割其東界地予秦之亡人組建, 居于馬韓之東。按照有關學者據此標繪的歷史地圖[32], 全羅北道的上林里應在馬韓界內, 慶尚南道的下岱和良東里則在辰韓界內, 但如果辰韓確為亡來之秦人組成, 那麼下岱和良東里在戰國時期就應在馬韓的東部界內。這從一個側面證實了上引《後漢書·東夷列傳》記載的可靠性, 同時也說明馬韓割其東界地予秦之亡人具有一定的歷史背景, 因為考古資料已經證明, 戰國時期馬韓的東部界內已有亡來的齊民。

3.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기록에 따르면, 진한秦漢 시기 한반도 남부에는 주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는 세 개의 주민 집단이 있었다. 그중 마한馬韓의 세력이 가장 커서 서부 해안을 차지했다.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은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떼어 진秦나라 유민들에게 주어 세워졌으며, 마한馬韓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 관련 학자들이 이 기록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 지도에 따르면[32], 전라북도全羅北道의 상림리上林里는 마한馬韓의 경계 안에, 경상남도慶尚南道의 하대下岱와 양동리良東里는 진한辰韓의 경계 안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진한辰韓이 정말로 망명해 온 진秦나라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면, 하대下岱와 양동리良東里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에는 마한馬韓의 동쪽 경계 안에 있었을 것이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기록의 신뢰성을 한 측면에서 증명한다. 동시에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진秦나라 유민에게 떼어 준 것에는 일정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고고학 자료가 전국시대戰國時代 마한馬韓의 동쪽 경계 안에 이미 망명해 온 제齊나라 백성[제민, 齊民]이 있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4.目前在韓國發現的這些戰國時期齊國的考古實物主要是銅器, 包括劍和鼎等。中國上古時期對於佩劍者的社會地位有明確規定, 戰國時期出於形勢需要, 佩劍者的範圍有所擴大, 史載“昔趙文王喜劍, 劍士夾門而客三千多人”(《莊子·雜篇·說劍》)就是證明, 如果再考慮到被迫亡命、另謀生路的實際處境, 當時齊國亡民的身份應以一般平民和沒落貴族為多。但銅鼎作為一種重要禮器絕非一般人所能有, 尤其像下岱出土的這件高達50厘米的銅鼎更是如此, 這表明當時在齊國亡民中還有少數真正的貴族。流亡者既佩劍又攜鼎, 這反映了他們對流亡前途既心存恐懼又滿懷希望的複雜心境。

4. 현재 한국에서 발견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고고학 유물은 주로 청동기이며, 칼과 솥 등이 포함된다. 중국 상고 시대에는 칼을 차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시대 상황에 따라 칼을 차는 사람의 범위가 다소 넓어졌다. 역사 기록에 “옛날 조문왕趙文王이 칼을 좋아하여, 칼 쓰는 선비 삼천여 명이 문 옆에 손님으로 머물렀다”(《장자莊子》 〈잡편雜篇·설검說劍〉)는 것이 그 증거이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망명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던 실제 처지를 고려하면, 당시 제齊나라 유민의 신분은 주로 일반 평민과 몰락한 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동솥은 중요한 예기禮器로서 결코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특히 하대下岱에서 출토된 높이 50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청동솥은 더욱 그렇다. 이는 당시 제齊나라 유민 중에 소수의 진정한 귀족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망명자들이 칼을 차고 솥까지 가지고 온 것은, 그들이 망명길의 미래에 대해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던 복잡한 심정을 반영한다.

5.目前戰國時期齊國的考古實物主要發現於朝鮮半島南部的韓國境內, 而目前山東還未發現同時期來自朝鮮半島南部考古文化的確鑿實物, 這表明當時山東與朝鮮半島南部之間的人員和文化交往是以單向流動為主的, 這是我們認為韓國發現的戰國時期齊國考古實物應是齊之亡民所為的基本背景考慮。與後來相比, 這種交往還處於比較原始的民間交往階段, 對這種自發和被迫的、時斷時續的民間交往, 我們不應過分渲染其歷史意義, 但作為一段發端歷史, 我們也不應視而不見。

5. 현재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고고학 유물은 주로 한반도 남부인 한국 영토에서 발견된다. 반면, 현재 산동에서는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 고고학 문화에서 온 확실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산동과 한반도 남부 사이의 인적, 문화 교류가 주로 한쪽 방향으로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가 한국에서 발견된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유물이 제齊나라 유민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배경이다. 후대와 비교하면, 이러한 교류는 아직 비교적 원시적인 민간 교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처럼 자발적이고 어쩔 수 없었으며, 때로는 끊어지기도 했던 민간 교류의 역사적 의미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 된 역사이므로, 우리가 이를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山東發現的石棚, 因為資料比較零散, 而且還有不確定因素, 所以它在山東與韓國早期交往史上的地位問題, 筆者不敢深論, 這裡只是提出參考線索, 希望以後中韓學術界能共同探討。

산동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자료가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요소도 있어, 산동과 한국의 초기 교류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필자가 깊이 논하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단지 참고할 만한 실마리를 제시할 뿐이며, 앞으로 한중韓中 학술계가 함께 탐구하기를 희망한다.

 

주석注釋

[1] 許玉林:《對遼東半島石棚有關問題的探討》,《環渤海考古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石家莊1992年), 知識出版社1996年。

[2] 全榮來:《高敞地方北方式支石墓三例》,《全北遺蹟調查報告》, 1983年。全北大學博物館:《高敞地方文物地表調查報告》, 1984年。又見全榮來著、徐光輝譯《朝鮮半島石棚的類型學研究》,《東北亞歷史與考古信息》1991年第1期。李隆助、河文植著, 李雲鐸、孤鳴鶴譯《關於韓國支石墓另一類型的研究》,《東北亞歷史與考古信息》1998年第1期。

[3] 鳥居龍藏:《中國石棚之研究》,《燕京學報》第31期, 1946年。

[4] 方輝:《山東淄川王母山石棚尋踪》,《文物天地》2000年第1期。

[5] 山東省測繪局編制《山東省地圖册》, 山東省地圖出版社1988年。

[6] 北京大學考古系等:《乳山南黃莊石椁墓》,《膠東考古》, 文物出版社2000年。

[7] 全榮來:《完州上林里出土中國式青銅劍》,《全北遺蹟調查報告》1977年第6卷。

[8] 金載元、尹武炳:《大邱晚村洞出土的銅戈銅劍》,《震檀學報》1966年第29、30期。

[9] 林沄:《中國東北系銅劍初論》,《考古學報》1980年第2期。收入《林沄學術文集》,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1998年。

[10] 林壽晉:《東周式銅劍初論》,《考古學報》1962年第2期。

[11] 河北省文物考古研究所:《燕下都》, 文物出版社1996年。

[12] 資料存於淄博市博物館、桓台縣博物館。

[13] 濰坊市博物館:《濰坊市博物館征集的部分青銅兵器》,《文物》1986年第3期。

[14] 煙臺市文物管理委員會:《山東長島王溝東周墓群》,《考古學報》1993年第1期。

[15] 煙臺市文物管理委員會:《栖霞市金山遺址的清理》,《考古》1996年第4期。

[16] 山東大學歷史系考古專業等:《山東新泰郭家泉東周墓》,《考古學報》1989年第4期。該劍現存山東大學博物館。

[17] 全榮來:《韓國磨制石劍石鏃編年研究》, 圓光大學1982年。

[18] 安宰浩:《蔚山下岱地區古墳的性質》,《第一屆嶺南考古學會發言及討論紀要》, 1992年。

[19] 鄭仁盛:《韓半島出土(青銅)鼎的風格》,《古文化》第48輯, 韓國大學博物館協會1996年。

[20] 淄博市博物館:《山東淄博磁村發現四座春秋墓葬》,《考古》1991年第6期。

[21] 朱鳳瀚:《古代中國青銅器》, 南開大學出版社1995年。王青:《海岱地區周代墓葬研究》, 山東大學出版社2002年。

[22] 徐新華等:《山東安丘出土一件戰國銅鼎》,《考古》1987年第12期。

[23] 濟青公路文物工作隊:《章丘繡惠女郎山一號戰國大墓發掘報告》,《濟青高級公路考古發掘報告集》, 齊魯書社1993年。

[24] 林孝澤:《金海良洞里古墳發掘調查簡報》, 1994年。

[25] 李曉鋒等:《濟南千佛山戰國墓》,《考古》1991年第9期。

[26] 段清波等:《秦陵又發現百戲陶俑陪葬坑》,《中國文物報》1994年2月27日。

[27] 山東省博物館:《臨淄朗家庄一號東周墓》,《考古學報》1977年第1期。淄博市博物館:《山東淄博市臨淄區南馬坊一號戰國墓》,《考古》1999年第2期。

[28] 李雲鐸譯《朝鮮考古學概要》, 1983年。

[29] 《考古學資料集》1974年第4集(朝文)。

[30] 張雪岩:《吉林集安縣發現趙國青銅劍》,《考古》1982年第6期。黃盛璋:《跋集安新發現陽安君劍》,《考古》1983年第5期。

[31] 牟元:《古代山東在中韓關係史上的地位》, 陳尚勝主編《第三屆韓國傳統文化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 山東大學出版社1999年。

[32] 譚其驤主編《中國歷史地圖集》第二册, 地圖出版社1982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