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주요 문구
첫째, 걸령挈令의 제목에 붙은 ‘정위廷尉’나 ‘광록光祿’과 같은 중앙 관청의 명칭, 그리고 ‘낙랑樂浪’이나 ‘북변北邊’과 같은 지역 이름은, 어떤 것이든 공포公布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즉, 중앙 관청 이름이 붙은 걸령은 중앙에서 출발해 지방으로 단계적으로 필사·전달된 문서였다는 것을 뜻한다.
논문요약 [openai 3.0]
걸령挈令은 한漢 왕조가 통일 율령을 반포한 뒤, 각 행정‧사법 기관과 지방 군현이 자기 업무에 맞추어 관련 조항을 발췌하고, 목판이나 죽간冊에 새겨 두어 실무 지침으로 삼았던 발췌형 법령집이다. 본래 ‘걸挈’ 자는 ‘계契’와 통용돼 ‘새기다, 매달다’의 뜻을 가지고, ‘령令’은 명령을 의미한다. 따라서 걸령은 글자를 나무판에 음각하여 벽에 걸거나 필요한 곳에 휴대하며 공포‧참고한 문서 형식을 가리킨다.
1. 전승 문헌에 보존된 세 가지 걸령 제목
1] 정위걸령廷尉挈令
《한서漢書·장탕전張湯傳》에 나온다. 장탕이 정위廷尉로 재직하면서 황제의 재가를 받은 판례를 《언법讞法》과 함께 걸령에 기록해 후날의 모범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걸령이 사법 영역에서 표준 판례집 구실을 했음을 보여 준다.
2] 광록걸령光祿挈令
《한서·무오자전武五子傳》의 주석에서 안사고顔師古가 인용했다. 여기에는 “시험 대상자가 정해진 도소都所에 모이지 않으면 자격을 박탈한다”는 조항이 일부 보존돼 있어, 인사‧의례 분야에서도 걸령을 편찬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3] 낙랑걸령樂浪挈令
《설문해자說文解字·실부糸部》에 ‘낙랑걸령직樂浪挈令織’이라는 예시가 보인다. 낙랑樂浪이라는 지방 명칭이 붙은 점으로 미루어, 군현 단위에서도 자체 편찬본을 뒀음을 시사한다. 다만 실제 조문의 전문은 전하지 않는다.
2. 문자 이체와 기록상의 변형
《사기史記·혹리열전酷吏列傳》은 같은 대목을 ‘정위결령廷尉絜令’으로 기록했으며, 《후한서後漢書·양이척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에는 ‘정위판령廷尉板令’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결絜과 걸挈은 모두 계契 계열 이체자로서 ‘새기다’ 뜻이 통하고, 판령板令은 ‘나무판에 새긴 명령’이란 직역형 표현이다. 이는 필사본·판본에 따라 글자가 달라졌어도 목판 게시법령이라는 제도적 실체는 동일했음을 보여 준다.
3. 근현대 출토 한간漢簡의 증거
죽간·목간 자료가 대량으로 나온 거연居延, 무위武威, 돈황敦煌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걸령 표제가 확인된다.
- 북변걸령北邊挈令: 북방 변경 수비와 군사·민정 규정 발췌본.
- 어사걸령御史挈令·위위걸령衛尉挈令·난대걸령蘭臺挈令: 각각 감찰, 궁궐 호위, 어문고 기록 부서에서 편찬한 실무 규정.
- 대홍로걸령大鴻臚挈令·대위걸령大尉挈令: 외교 의례와 군무 총괄 부서용.
대부분은 제목이나 목차만 남고 조문 전문은 드물지만, 부서·지역별로 통일 율령을 발췌해 자체 수첩처럼 운용했음을 분명히 해 준다. 간독 중에는 판결 결과나 상벌 기준을 구체적으로 옮겨 적은 단간도 있어, 현장 집행과 연계된 사실을 뒷받침한다.
4. 편찬 방식과 운용 절차
1] 중앙 유가·법가 학자들이 율령 본문[李悝 6편, 蕭何 9편, 張湯 27편 등]을 정리한다.
2] 각 행정 부처와 군현은 업무상 자주 쓰는 조항을 발췌해 걸령이라는 별책으로 재편집한다.
3] 목판에 새겨 관청 벽에 게시하거나 휴대용 죽간冊으로 만들어, 하급 관리와 병사 · 백성에게까지 집행 기준을 알린다.
4] 새로운 판례나 황제 재가가 내려지면 걸령 내용도 갱신하고, 낡은 판은 소각하거나 보관한다.
5. 연구 의의
걸령은 중앙 율령과 지방·기관 실무 규정 사이의 매개 문서로 작동했다.
전승 문헌은 제목 위주로 남았으나, 출토 간독이 보완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한대 법령 전달 체계를 3단계[중앙 율령 → 기관·지역 걸령 → 현장 집행]로 복원할 수 있다. 낙랑걸령 같은 지방 표제는, 한사군漢四郡 지역에서도 중국식 법령 편찬 체계가 그대로 운영됐음을 시사해, 동아시아 법·행정 교류사 연구에도 중요 자료가 된다. 문자 이체[挈·絜·契·板] 분석은 필사·판본학, 음운학 연구에도 활용 가치가 크다. 요컨대 걸령은 한나라 시기 국가 법령을 현장에 맞게 요약·게시한 목판 법령집으로, 전승 문헌 세 제목과 다수의 출토 한간 자료를 통해 그 편찬 주체·형식·적용 범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문
“挈令”新論
作者:凡國棟 發布時間:2009-06-13 00:00:00
(武漢大學簡帛研究中心)
(中國簡帛學國際論壇2009提交論文首發)
傳世文獻中“挈令”一語,可徵之者有“廷尉挈令”、“光祿挈令”、“樂浪挈令”,凡見有三。其中“廷尉挈令”見於《漢書·張湯傳》,“是時,上方鄉文學,湯決大獄,欲傅古義,乃請博士弟子治《尚書》、《春秋》,補廷尉史,平亭疑法。奏讞疑,必奏先為上分別其原,上所是,受而著讞法廷尉挈令,揚主之明。”[1]“光祿挈令”見於《漢書·武五子傳》“將軍都郎羽林”句下顔師古注對“都”字的解釋,“都,大也。謂大會試之。漢光祿挈令‘諸當試者,不會都所,免之。’”[2]“樂浪挈令”見於《說文·糸部》“𥿮,樂浪挈令織,从糸从式。”[3]
전승 문헌 중에서 ‘걸령挈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정위걸령廷尉挈令’, ‘광록걸령光祿挈令’, ‘낙랑걸령樂浪挈令’, 이 세 가지로 확인된다. 그중 ‘정위걸령’은 《한서漢書·장탕전張湯傳》에 보이는데,
“이때, 황제가 마침 문학을 장려하고 있었고, 장탕은 중대한 형사 사건을 판결하며 고대의 뜻을 따르려 했다. 이에 박사의 제자들을 불러 《상서尚書》와 《춘추春秋》를 연구하게 했으며, 정위사廷尉史로 보임시켜 정위 관서의 의심스러운 법 조항을 바로잡게 했다. 의심스러운 사건을 상주할 때면 반드시 황제에게 아뢰었고, 먼저 그 사건의 근본을 분별해 설명했다. 황제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은 받아들여 《언법讞法》과 정위걸령廷尉挈令에 기록하여, 군주의 밝음을 드러냈다.”고 되어 있다. [1]
[1]《漢書》,中華書局本,第2639頁。
‘광록걸령’은 《한서·무오자전武五子傳》 “장군·도랑·우림羽林”이라는 구절 아래에 안사고顔師古가 ‘도都’ 자를 해석한 주석에 보이는데,
“‘도都’는 ‘크다’는 뜻이다. 대규모로 모여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한나라의 광록걸령에 ‘시험 대상자 중 도소都所에 모이지 않은 자는 자격을 박탈한다.’는 조항이 있다.”라고 했다. [2]
[2]《漢書》,第2756頁。
‘낙랑걸령’은 《설문說文·실부糸部》의 “지𥿮: 낙랑걸령의 직織이며, 실糸과 식式에서 유래했다.”는 항목에서 보인다. [3]
[3]《說文解字》,中華書局本,第271頁、
值得注意的是,《漢書·張湯傳》所見的“廷尉挈令”在《史記·酷吏列傳》中寫作“廷尉絜令”。此外,《後漢書·楊李翟應霍爰徐列傳》有“廷尉板令”,不知與“挈令”是否有關。古代有不少學者都曾對此做過解釋,具體意見詳見下文。這里需要說明的是,傳世文獻中“挈令”有三見,其中只有顔師古所引“光祿挈令”存有令文的只言片語,至于“廷尉挈令”和“樂浪挈令”則僅存其目,內容不得而知。但是值得幸運的是,近代以來的出土簡帛文獻中屢見有“挈令”、“絜令”的材料,這些新材料的出現,使我們得以對“挈令”(絜令)的面貌有更多的認識。
주목할 점은, 《한서漢書·장탕전張湯傳》에 보이는 ‘정위걸령廷尉挈令’이라는 표현이 《사기史記·혹리열전酷吏列傳》에서는 ‘정위결령廷尉絜令’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후한서後漢書·양이척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에는 ‘정위판령廷尉板令’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이것이 ‘걸령挈令’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대에는 이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해석을 시도한 바 있으며, 구체적인 의견은 아래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전승 문헌에서 ‘걸령’이라는 표현은 세 가지밖에 보이지 않으며, 그 가운데 안사고顔師古가 인용한 ‘광록걸령光祿挈令’만이 법령 조문의 일부 문장이 전해지고 있고, ‘정위걸령’과 ‘낙랑걸령樂浪挈令’은 제목만 남아 있을 뿐, 그 내용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근대 이후 출토된 죽간竹簡‧백서帛書 문헌 속에서는 ‘걸령挈令’ 또는 ‘결령絜令’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자료의 등장 덕분에, 우리는 걸령또는 결령의 실체에 대해 한층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據統計,出土簡帛文獻中的“挈令”(絜令)主要有如下數種:
1、
龍勒寫《大鴻臚挈令》、《津關》
《敦煌》2027[4]
2、《太尉絜令》:“盜縣官縣□
”
《敦煌》982
3、《北邊絜令》第四:候長、候史日跡及將軍吏勞二日皆當三日。
《合校》10·28[5]
4、《北邊挈令》第四:北邊候長、候史跡二日當三日。
《合校》562·19
5、《北邊絜令》第四:候長、候![]()
《合校》198·7
6、不道,在《御史挈令》第廿三。![]()
《武威》简8[6]
7、赦,不得赦下蠶室。在《蘭臺挈令》第百![]()
《武威》简9正
8、
□法,在《衛尉挈令》![]()
《武威》简9背
上列的1-5條,高恒先生在《漢簡牘中所見令文輯考》一文中曾作輯錄并有詳細闡釋,[7]其中3-5條,大庭脩先生亦曾有論述,[8]而6-8條,李均明、劉軍先生曾進行過討論,[9]此後參與討論的還有籾山明先生等人。筆者近見岳麓書院藏秦簡有“某某共令”之類的令名,[10]頗疑這類令名與“挈令”有關,是解讀“挈令”問題的重要綫索。遂翻檢相關論述,在學習前人論述的基礎上,對“挈令”的意義和用法産生了一些新的看法,下面我們擬在此基礎上對“挈令”的有關問題作進一步的探討,不當之處祈請方家指正。
目前可見有關“挈令”的材料已備列如上,在進入正題之前有必要對文獻中“挈”與“絜”的具體寫法作出說明。如上文所揭《漢書·張湯傳》的“廷尉挈令”在《史記·酷吏列傳》中寫作“廷尉絜令”,《史記集解》引韋昭曰:“在板絜”, 而《漢書》顔注引韋昭曰則作“在板挈也” ,可見在傳世文獻中“挈”、“絜”存在混用現象,這一點也表現在出土文獻中,如上引2、3、5寫作“絜”,1、4、6、7、8寫作“挈”,也明顯存在混用的現象。需要指出的是高恒、大庭脩二位先生雖然都注意到“挈”、“絜”寫法有別,並在文中討論了二者孰為本字的問題,但是二氏在引述相關簡文的時候都將該字寫作“絜”,而忽視了該字在簡文中的本來寫法。經過覈對圖版,我們發現2、3、5的確寫作“絜”,1的寫法由于未見圖版而無法覈對,不過《敦煌漢簡》、《敦煌漢簡校文》、《敦煌漢簡釋文》等著作均釋作“挈”,[11]似乎可以肯定應該是寫作“挈”的。
由于“挈”、“絜”二字孰為本字的问题關繫到文義的理解和闡釋,前人說解的分歧也由此而產生,因而我們有必要對此作出具體說明。以下試按論點的不同將前人對此問題的看法加以介紹。
第一種意見是以“契”為本字,其說大致又可別為兩類,其一是如段玉裁解作栔刻之“栔”,其二是如王筠解作契券之“契”。[12]我們懷疑作栔刻之“栔”這種意見最早很可能是韋昭提出來的,他的意見《史記集解》引作“在板絜”,《漢書》顔注引作“在板挈也”。但“挈”、“絜”很可能都不是其本字,我們推測韋氏字或本寫作“契”,取在板上契刻法令之意,范曄《後漢書》中所見的“廷尉板令”或許本亦應作“挈令”,而致誤之原因恐怕乃范氏誤解韋氏本意。[13]
段玉裁《説文解字注》“𥿮”字條云:“挈,當作栔,栔,刻也,樂浪郡栔于板之令也。” 又“挈”字下段玉裁注云:“縣者,系也。胡㳙切。下文云:提,挈也。則提與挈皆謂縣而持之也。今俗語云挈帶。古叚借爲契栔字,如爰挈我龜,傳云:挈,開也。又如𥿮字下云:樂浪挈令。”
단옥재段玉裁가 《설문해자주説文解字注》에서 「𥿮」 자를 해석하면서 말하길:“‘걸挈’은 마땅히 ‘설栔’로 써야 하니, ‘설栔’이란 새기는 것이다. 낙랑군樂浪郡에서는 목판에 법령을 새겨 게시했다.”
또 「挈」 자 아래에서 단옥재가 덧붙이길:“‘현縣’이란 매다는 것이며, ‘호흠胡㳙’의 음으로 읽는다. 아래 글에서는 ‘제提는 곧 걸挈이다’라고 했으니, 제提와 걸挈은 모두 ‘매달아 잡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속어로도 ‘걸대挈帶’라는 말이 있다. 고대에는 종종 ‘걸挈’을 ‘계契’나 ‘설栔’ 자로 빌려 썼다. 예를 들어 〈爰挈我龜〉내 거북을 들어 올리다라는 문장에 대해 주석에서는 ‘걸挈’을 ‘열다’라고 풀이했다. 또 ‘𥿮’ 자 아래에 ‘낙랑걸령樂浪挈令’이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可見段氏雖然認為“挈”有“懸”之意,可與“提”互訓,但是在“挈令”的解釋上仍然主張讀作“契”。至于作契券之“契”這一意見,沈家本歸之于王筠,其實此說之首倡者很可能為顔師古。《漢書·張湯傳》“挈令”句下顔註曰:“挈,獄訟之要也。”要者,《書·多方》“我惟時其戰要囚之”句下孫星衍《疏》謂:“為其罪法之要辭也。”[14]《周禮·秋官·鄉士》“異其死刑之罪而要之”句下孫詒讓《正義》云:“訴訟之小成,群士所專定而上之司寇者也。”[15]據此推顔氏本意,字當作契約之“契”。
第二種意見是以“絜”為本字,此見首倡者為沈家本先生。他在《漢律摭遺》中對“挈令”有過系統的論述,為便于討論,我們將其觀點引述如下:
按:挈,段解作栔刻之“栔”,王解作契券之“契”,[16]韋昭云“在板挈”,則段說為勝,而《史記》字又作“絜”,《說文》:“絜,麻一耑也。”段曰:“一耑,猶一束也。耑,頭也。束之必齊其首,故曰耑。《人部》係下云:‘絜束也。’是知絜為束也。束之必圍之,故引申之,圍度曰絜。”王曰:“絜之為言挈也,束之便於提挈。”是此字當從《史記》作絜,絜者,絜束也,度也。法之絜束出于省度,而可以為後式者也。《溝洫志》:“元鼎六年,上曰,令內史稻田租挈重,[17]不與郡同。”顏注:“租挈,收田租之約令也。”約令亦挈束之意也。絜,《說文》:“縣持也”,於絜令之義較遠。《釋名》:“絜,結也。結,束也。束持之也。”與絜束之意為近。然則絜者正字,挈叚借字。廷尉、光祿二寺有此令,樂浪郡署有此令,似漢時中外官府皆有此令,以為法式。蓋皆不在正律之中者。唐臺省多書格令於屋壁,嗣聖中令內外官人書格令聽事之壁,殆亦有所承歟?《張湯傳》“著讞法廷尉絜令”,言著其所讞之法于廷尉之挈令也。師古注微不明。[18]
高恒先生亦持此見,然理解與沈氏不同。他認為此令原本可能是“絜令”,而不是挈令,並由“絜”字作“束”講來立論,據此認為“絜令”就是“令集”。[19]張積先生對沈氏“法之絜束出于省度,而可以為後式者也”的解釋表示贊同,但對“絜束”的對象提出了不同看法。他認為“絜束”不是著於簡牘上的法令,而是指“絜束”各個官府機構的行為。因此他認為“挈令是專門適用于中央與地方政府機構的一種特殊的法令。從性質上講,它應屬于行政法規的范疇,專供約束和規范中外諸官府機構行為之用。”[20]
不過更多學者認為“挈”為本字,這就是第三種意見,也是目前的一種主流看法。王先谦《漢書補注》云:“挈,舉也。《史記》作‘絜’,借字。挈、絜古通用,《周禮·夏官》序官“挈壺氏”注:‘挈,讀如絜髮之絜。’《大學》:“是以君子有絜矩之道也。”《注》:‘絜,挈也。’是其證。”王氏以“舉”釋挈,其說實際上本之於《說文》 “挈,懸持也”的說法,在此基礎上,王先谦復疏理句意云:“言上所允行者,則受而書之於板,著其上請之事爲定法,復舉此令以宣布上美。《杜周傳》云‘後主所是疏爲令也。’”顔說之疏,沈氏以“師古注微不明”加以評析,可置之不論。此後,大庭脩先生亦從“挈”字立論。其主要依據在於《方言》、《集韻》、《廣雅》對“挈”字的解釋。我們將其論述引述如下:
《集韻》中云“挈,博雅,獨也。或作絜。”《方言》中云:“挈,特也,秦曰挈。”《廣雅·釋詁》也云:“挈,獨也。”可見有“獨”、“特”的意思。這就是說,可以把“挈”理解為僅應用於廷尉、光祿勛等的令、獨令、特令、特別令。……我以為《方言》中所講的“特”的意義是最好的。因此,我想把它解釋為僅適用于一個官署、一個地區等的特令。[21]
李均明、劉軍二先生亦主張“挈”為本字,但是其說解與王、大庭二氏均有不同。他們據 “挈”有提起、摘起的意思立論,認為以“提綱挈領”比喻“挈令”之“挈”最適宜。因此他們主張
挈令之實質當為中央有關機構根據需要從國家法令中提起與自己有關的部分,以地域命名的挈令則是根據地域需要提起。國家法令是以皇帝名義制詔簽發的,各部門僅是編錄而已,故云“挈令”。[22]
李、劉二氏之說由于能夠結合當前出土文獻的實際情況作出較為圓滿的解釋,因而在學界流傳甚廣,頗有影響。不過近見有籾山明先生提出新說,他據《周禮·夏官》 “挈壺氏”鄭注認為,挈令恰當的語義不應該是“手提的令”,而是“高高掛起來的令”,並據沈家本“唐臺省多書格令於屋壁,嗣聖中令內外官人書格令聽事之壁,殆亦有所承歟”之說認為,挈令是指掛在機關牆上的法令,可能就像唐人把“當司格令”寫在機關的牆上一樣,漢人也把記有詔令的冊書掛在機關的牆上。他說:
挈令的本質不在於摘錄、編纂,而在於揭示、佈告。因此與其說它是法典不如說它近似於“告訴牌”。
這樣攷慮的話,關于漢令的機能,我們又得到了幾個新認識。第一,挈令上所冠的“廷尉”、“光祿”的機關名,和“樂浪”、“北邊”的地區名,不管哪一個都被認為是佈告的主體。所以,被冠以中央機構的名稱的挈令,是從中央向地方依次被抄寫而傳達的。……第二,……挈令不是詔書,是經過官府而公佈的法令,所以,不隻是令文,而且還可以附有被認為對公務參攷價值的案例。[23]
이렇게 고찰해 보면, 한나라漢 시기의 ‘령令’의 기능에 대해 몇 가지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걸령挈令의 제목에 붙은 ‘정위廷尉’나 ‘광록光祿’과 같은 중앙 관청의 명칭, 그리고 ‘낙랑樂浪’이나 ‘북변北邊’과 같은 지역 이름은, 어떤 것이든 공포公布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즉, 중앙 관청 이름이 붙은 걸령은 중앙에서 출발해 지방으로 단계적으로 필사·전달된 문서였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걸령은 조서詔書가 아니라, 관청을 거쳐 공포된 공식적인 법령이기 때문에, 단순히 법령 조문만이 아니라, 업무 참고용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사례판례도 함께 첨부될 수 있었다.
以上,我們對學術界關于“挈令”的看法作了大致的疏理。從目前的研究現狀來看,第一種觀點已經為學界所摒棄,第二種觀點雖有學者堅持,但信從者不多。第三種看法較為流行,但是其中具體的分析和理解又各自不同。究其原因,除“挈”、“絜”用字本身所造成的歧義而外,尤為重要的一點是學界對秦漢令的編集存在不同的認識。因此,對“挈令”語義與用法的闡釋,既要注意“挈”、“絜”二字本身的語言學特徴,更重要的是站在秦漢令編集這一角度作通盤的攷察。
我們注意到傳世文獻與出土文獻中都是“挈”、“絜”兩種寫法並存。從文字學的角度來看,無論是哪一種寫法,按照文字通假的規律讀作“挈”、“絜”甚至讀作“契”都是可以的。因此從這個角度很難判斷以上說法的是非曲直。不過從訓詁學的角度來看,大庭脩先生所舉《方言》的說法值得我們特別重視。這一點在以前沒有能引起其他學者的注意,下面試結合我們的理解稍作闡釋。
《方言》的原文是這樣的:
絓,挈,𠎽,介,特也。楚曰𠎽,晉曰絓,秦曰挈。物無耦曰特,獸無耦曰介。
周祖謨《方言校箋》在“特”字下作有這樣的注釋:
案:絓挈二字訓特,未詳其義。原本玉篇絓下云:“胡卦反,左氏傳驂絓於木而止。野王案絓猶礙也,離遇也,淮南飛鳥不動不絓網羅是也。楚辭心結絓而不解,王逸曰絓懸也。方言絓持也,晉曰絓。說文繭滓絓頭以作湅絮。一曰繫𦃇也。廣雅絓止也,絓獨也,聲類有所礙也。”此引方言作絓持也。絓慧琳音義卷八十一卷九十六兩引方言亦作持,不作特。獨特之訓惟見廣雅釋詁三。蓋方言傳本有異,故廣雅訓獨,而玉篇訓持也。持者懸持之義,絲結謂之絓,惡絲亦謂之絓。今人猶謂布絲之有結者曰絓絲,音畫。至于挈字,說文云:“懸持也,周禮有挈壺氏。”釋名釋姿容云:“挈,結也,絜,結也。結,束也。束持之也。莊子在宥篇釋文引廣雅云:“挈,持也。”據是挈亦訓持,不訓特。疑此條本分為二:“絓挈持也”為一條,“𠎽介特也”為一條。[24]
周氏以《玉篇》、慧琳《一切經音義》所引《方言》的異文證明《方言》傳本存在寫作“持”的例子,又據《釋名》證挈有“持”意。此類說明均屬合理,但是據此懷疑《方言》傳本將兩條合為一條則恐為不妥。王念孫《廣雅疏證》云:“挈,亦介也。語之轉耳。《說文》‘絜,麻一耑也。’聲與挈近而義同。”[25]吳予天《方言注商》謂“絓”、“介”雙聲,絓為介之語轉。[26]華學誠《揚雄方言校釋滙證》在引述周說的基礎上指出,“若依吳予天、王念孫說,‘絓’、‘挈’為‘介’之語轉,則‘絓’、‘挈’訓‘特’當以方音求之。今仍舊本,兩說並存。”[27]其實周氏將此條一分為二尚需解決後文如何析置的問題,即“楚曰𠎽,晉曰絓,秦曰挈。物無耦曰特,獸無耦曰介。”這一句如何與上文配合分置的問題。更加關鍵的是這種意見並沒有版本上的依據作為堅實的支撑,因此如華氏那樣存疑的態度應該是謹慎可取的。而從文字學的角度來看,“持”、“特”均從“寺”得聲,二者互作的例子也並不鮮見。如《莊子·齊物論》:“何其無特操與?”《釋文》:“特本或作持。”《文選》謝靈運《登池上樓詩》李注引作“持”。又《荀子·禮論》:“持手而食者不得立宗廟。”《史記·禮書》持作特。[28]由此可見,周氏所舉《玉篇》、慧琳《一切經音義》所引《方言》“特”寫作“持”的異文也能不排除屬于這種情況的可能。
再者,從詞義發展的角度來看,懸持、絓束之物因位置凸顯,特別引人矚目,由此引申而有獨、特之義也是合乎情理的。 “挈”訓為“特”可由如下實例為證。
《春秋穀梁传》“隐公四年”載:“稱人以殺,殺有罪也,祝吁之挈,失嫌也。” 注云:“不書氏族,提挈其名而道之也。衆所同疾,威力不足以自固,失當國之嫌。” 洪頤煊曰:“謂特書其名。”[29]
又,《漢書·溝洫志》:“今內史稻田租挈重,不與郡同。”顏注:“租挈,收田租之約令也。”是顔氏以“挈”訓為契約之契,而顧炎武則有不同的看法,他在《日知錄》一書中寫道:“挈,偏也。《說文》有‘觢’字,注云‘角一俯一仰’,意同。” [30]王先謙《漢書補注》認為顔、顧二說“二義並通”,而沒有作出裁斷。今按,我們認為顧氏對文義的的理解較顔氏更為合理,租乃田租賦稅,秦漢古書中“租稅重”的說法往往有之,或云“重租稅”,[31]而以顔氏的解釋讀“挈”為“契”,則“租契重”亦僅此一見,且“租契重”亦嫌不辭。顧氏提出新見恐怕也是出於這種攷量,其對文義的理解雖然較顔說合理,不過我們認為《方言》“特也”的訓釋放在此處正好合適,若然句意當理解為“內史的稻田租稅與郡相比特別的重”,這樣文義不但無礙,較之顔、顧二說,似更為合理。
大庭脩先生在其著作中申述“挈令”為“特令”的意見時並未就《方言》本身的問題進行攷察,這也使其論述存有某些疑點。而通過上述分析,我們有理由相信《方言》“挈,特也”的說法是可信的。這樣的話,大庭脩先生的意見也有了更加堅實的基礎。這也是我們撰文對“挈令”重加攷察的初衷,在評述上述諸家觀點的基本上,我們認為大庭脩先生的意見是合理的。之所以得出這樣的結論,除了對《方言》本身的攷察而外,下面將要談到的岳麓書院藏秦簡所提供的新材料也可以視為這一看法的重要依據。
據這批秦簡的整理者陳松長先生所撰《岳麓書院所藏秦簡綜述》一文所公佈的信息來看,秦簡中有如下令名:
0355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甲
0690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乙
0522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丙
0351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丁
0465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戊
0316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己
0617 ●內史郡二千石官共令 第庚
此外還有“內史官共令”、“四司空共令”、“安□居室居室共令”、“食官共令”、“給共令”等令名。雖然這些令文的具體內容尚不得而知,但是就令名本身來看,我們懷疑“共令”與“挈令”似乎應該是相對而言的,也就是說,若“挈令”照大庭脩氏那樣理解為“僅適用于一個官署、一個地區等的特令”的話,“共令”應該是適用於多個官署的共同遵循的令。[32]
在此,與之相關的一個問題可一並作一辨析。睡虎地秦簡有《內史雜》律文共11條,睡虎地秦簡的整理者認為“內史雜”是“關於掌治京師的內史職務的各種法律規定” 。[33]栗勁先生則推斷:“《內史雜》律應該是《內史律》以外的與內史職務有關的行政法規。”[34]而截至目前,我們尚未找到秦代存在《內史律》這一律名的證據,因此栗勁先生的推測疑點頗多。其實這種推測的出發點是建立在將“雜”理解為“雜糅”的基礎之上的。我們認為這一理解恐怕是值得商榷的。“雜”也有表示“共”的義項。[35]如,《國語·越語下》:“逆節萌生,天地未形,而先爲之征,其事是以不成,雜受其刑。” 韋昭注:“雜,猶俱也。”《漢書·雋不疑傳》:“公車以聞,詔使公卿將軍中二千石雜識視。” 顔師古注:“雜,共也。”此外,在漢代讞獄中有一種會審制度常用“雜問”、“雜治”、“雜考”等來表示。如《漢書·楚元王劉交傳》:“ 昭帝初,﹝劉德﹞爲宗正丞,雜治劉澤詔獄。” 顏師古注:“雜謂以他官共治之也。”《漢書·杜周傳》:“廷尉王平與少府徐仁雜治反事”,顔師古注:“交雜同共治之也。”[36]張家山漢簡《二年律令》第328號簡云:“恒以八月令鄉部嗇夫、吏、令史相雜案戶籍,副藏其庭。”整理者注云:“雜,共。”[37]由此可見,《內史雜律》恐怕不能簡單的理解為一種繁雜的或是補充之規定。我們可以將其與上文所揭“內史郡二千石官共令”結合起來分析,就其命名來看,二者表現出一定程度的同化現象。秦漢律令文獻所見律、令名稱中的類似現象大致可如下表所示:
| 令 | 律 | ||
| 金布令甲 | 《漢書·萧望之传》 | 金布律 | 睡虎地秦簡、岳麓書院秦簡 |
| 內史旁金布令 | 岳麓書院秦簡 | ||
| 尉郡卒令 | 岳麓書院秦簡 | 尉卒律[38] | 岳麓書院秦簡 |
| 遷吏令 | 岳麓書院秦簡 | 置吏律 | 睡虎地秦簡、岳麓書院秦簡 |
可見在由令入律的過程中,律名也存在對令名的某種繼承關係。基于以上認識,我們傾嚮于認為《內史雜律》與“內史郡二千石官共令”之間也存在如上的關係。這樣不僅能合理的解釋“雜”、“共”在詞義上的共性,同時對正確地理解律令的內涵也有重要地啓示。
在認清了上述情形之後,我們發現,將“共令”、“雜律”作為一個與“挈令”相對而言的形態來理解的話,可以澄清不少以前的疑難之點。因此,諸如“共令”這類令名的出現完全可以作為支持大庭脩對“挈令”看法的一個證據。下面,我們再就秦漢律令本身的某些問題作幾點闡釋。
大庭脩先生在上文所引那段論述之後曾發出了“‘挈令’是否可以由官署獨自製定,以及它與律令有什么關係”這樣兩個疑問。關于第一個問題,大庭脩先生在文中作了簡單的闡述,他認為:
從《張湯傳》的記載看,似乎有這種可能性。但是,看一下居延簡《北邊挈令》的內容,就不能認為北邊諸郡太守可以不管中央機構而決定官吏的勤務日數。他們畢竟處于皇帝的屬下,作為地區或者官署內獨自的規定,應該在立法上的得到承認。
其實關于這個問題,大庭脩先生在《秦漢法制史研究》一書中討論漢代制詔形態的部分已經作出了更加細致的分析。他將漢代立法手續劃分為如下三類:其一,皇帝以自己的意志單方面下達的命令,行使立法權時使用“著令”、“著為令”等語;其二,官僚在被委任的權限内提出的獻策得到認可,作為皇帝的命令而公佈的情況,附有“制可”等語;其三,皇帝指示政策大綱或意向之後,委託官僚詳細立法的情況,它由前兩種形式復合而成。這時,在第一形式的制詔末尾有“具為令”、“議為令”、“議著令”等語,官吏覆奏文中新的律令等文,如得到制可,即列入法典。[39]大庭氏的這一分類對于我們認識令的類別具有重要的指導意義。不過大庭氏所述的后兩類之間界限較為糢糊,往往很難分清。為便于操作,我們主張將後兩類合並為一,稱之為“官署令”,令出自官署;將第一類稱之為“天子令”,令出自天子。 “令” 的産生途徑雖然不同,但是最終都必須獲得皇帝的認可。在張家山漢簡《二年律令•津關令》中可見相國、御史接受來自内史、中大夫、長信詹事、備塞都尉、南郡守、長沙丞相、魯御史等二千石官奏請,進而制“令”的事例。[40]又如新近公佈的北荊州紀南鎮松柏1號墓“令丙第九”木牘在令文末尾署有“制曰可”的字樣,[41]這就表明該令所載丞相請令的內容獲得了皇帝的批準。此外,《二年律令·置吏律》簡219-220記載:“縣道官有請而當為律令者,各請屬所二千石官,二千石官上相國、御史,相國、御史案致,當請,請之,毋得徑請者。徑請者,罰金四兩。”這條記載實際上可以看作對律令製作程序的具體規範。而上述這些情況都表明,自天子以下各級官署雖然具有製定“令”的權限,但是隻有經過最高統治者的批準才能使“令”産生法律效力。
至于第二個問題,實際上涉及到“挈令”與干支令(令甲、令乙等)、以事項(內容)命名的令三者之間的關係問題。關於漢令何以分成干支令、以事項(內容)命名的令和挈令,分類的標準是什麼,三者之間的關係是什麼,學界向來爭議頗大。如上述李均明、籾山明等先生的看法認為挈令是有關機構、地區根據需要從國家法令中提起與自己有關的部分而形成的。富谷至先生推測漢代可能首先將所有的令都分為干支令,然後再根據各官署、州郡的需要將有關部分抽取出來,編輯成挈令。[42]這些意見實質上都是認為挈令需要經過再次的編纂。針對富谷至先生的意見,楊振紅先生撰文提出不同看法,他說:
假如是這樣的話,就無法理解武威旱灘坡出土的漢簡為何會將“田律”、“令在乙”、“公令”、“御史挈令”、“衛尉挈令”、“尉令”並列在一起。假如挈令是從干支令中抽取出來的,那麼,只要標出“公令”、“御史挈令”、“衛尉挈令”、“尉令”所在的干支令就可以了,否則,利用起來豈不是更不方便和混亂?而且我們至今尚未發現干支令與挈令中有重複的令條。將上述諸令與“田律”列在一起,就象“令”與“律”是並列關係彼此不能替代一樣,干支令與挈令以及以事項命名的令也應該是不能彼此替代的吧(各地方或官署挈令則不同,它們可能被重複收錄)?因此,上述三種令應該是並列的關係,而非統屬的關係。[43]
我們認為楊振紅先生的看法是合理的,可以佐證這一結論的尚有如下實例。武威出土《王杖十簡》有“蘭臺令第卅三,御史令第𠦜三,尚書令滅受在金”的記載,[44]武威《王杖詔書令》也有“蘭臺令第𠦜二”、“令在蘭臺第𠦜三”的記載。[45]而上文所引武威漢簡有《御史挈令》和《蘭臺挈令》。即便按照富谷至先生的理解,《御史挈令》和《蘭臺挈令》也應該是分別從“御史令”和“蘭臺令”這類以事項(內容)命名的令中抽取的,而不是來自於干支令。不過籾山明先生認為上引《武威》简8所見的《御史挈令》和《王杖十簡》的“御史令”是同一法律的名稱,所以將“御史令”看作是“御史挈令”的簡稱。[46]其實從令後的編號來看,二者並不相同,並且內容上也難以判斷二者具有一致性。[47]因此籾山明先生的觀點仍有進一步商榷的餘地。我們認為“御史挈令”之類的挈令,既不是“御史令” 這類以事項(內容)命名的令的簡稱,也不是從其它令中抽取出來重行纂輯的令;它應該是一種具有獨立性的,用于調整某一特定官署或地區有關事務的令。可以作為參照的例子猶如“蘭臺令”和“御史令”,照理說,蘭臺為御史中丞的官署,也是御史繫統的中樞機關,其令應該納入“御史令”之中。可是這並不妨礙漢令中“蘭臺令”和“御史令”二者並存。[48]
(編者按:本文收稿日期為2009年5月26日。)
[1]《漢書》,中華書局本,第2639頁。
[2]《漢書》,第2756頁。
[3]《說文解字》,中華書局本,第271頁、
[4]甘肅省文物考古研究所:《敦煌漢簡》,中華書局1991年。
[5]謝桂華、李均明、朱國炤:《居延漢簡釋文合校》(上、下),文物出版社1987年1月。
[6]武威地區博物館:《甘肅武威旱灘坡東漢墓》,《文物》1993年第10期。
[7]高恒:《漢簡牘中所見令文輯考》,中國社會科學院簡帛研究中心編輯:《簡帛研究》第三輯,廣西教育出版社1998年,第382-427頁。
[8]大庭脩:《論挈令》,《東洋史研究》第12卷第3號,1953年;本文參考氏著《秦漢法制史研究》(中譯本),上海人民出版社1991年,第74-77頁。
[9]李均明、劉軍:《武威旱灘坡出土漢簡考述——兼論“挈令”》,《文物》1993年第10期,第34-39頁。
[10]陳松長:《岳麓書院所藏秦簡綜述》,《文物》2009年第3期,第75-88頁。
[11]甘肅省文物考古研究所:《敦煌漢簡》,中華書局1991年;勞榦:《敦煌漢簡校文》《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四十:居延漢簡考釋之部》,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1986年,第204-240頁;甘肅省文物考古研究所編:《敦煌漢簡釋文》,甘肅人民出版社1991年。
[12]見下文所引沈家本說。
[13]沈家本認為:“板令卽挈令,韋昭所謂在板挈也。此與唐、宋之敕令相似。”參閱氏著《漢律摭遺》卷一“總述”,《歷代刑法考》(三),中華書局1985年,第1383頁。
[14]孫星衍:《尚書今古文註疏》,中華書局1986年,第466頁。
[15]孫詒讓:《周禮正義》,中華書局1987年,第2795頁。
[16]王为清代王筠,其說與上文所云顔師古說相同,或本之於顔氏。說見氏著《說文解字句讀》,中華書局1988年,第516頁。
[17]“令”為“今”字之誤。《漢書》,第1685頁。
[18]沈家本:《漢律摭遺》卷一“總述”,《歷代刑法考》(三),中華書局1985年,第1382頁。
[19]前揭高恒《漢簡牘中所見令文輯考》。
[20]張積:《令甲、挈令、科辨義》,中國政法大學法律古籍整理研究所編:《中國古代法律文獻研究》(第二輯),中國政法大學出版社2004年,第75-85頁。
[21]大庭脩:《秦漢法制史研究》(中譯本),上海人民出版社1991年,第76頁。
[22]李均明、劉軍:《武威旱灘坡出土漢簡考述——兼論“挈令”》。
[23]籾山明:《挈令新義》,中國社會科學院歷史研究所、中國社會科學院簡帛研究中心主辦:“中國社會科學院簡帛學國際論壇”,2006年11月:鄔文玲、趙凱:《中國社會科學院簡帛學國際論壇綜述》, 《中國史研究動態》2007年第3期。
[24]周祖謨:《方言校箋》,中華書局1993年,第42頁。
[25]王念孫:《廣雅疏證》,中華書局1983年,第80頁。
[26]引自華學誠:《揚雄方言校釋滙證》,中華書局2006年,第447頁。
[27]華學誠:《揚雄方言校釋滙證》,中華書局2006年,第449頁。
[28]高亨、董治安:《古字通假會典》,齊魯書社1989年,第406頁。
[29]洪頤煊:《讀書叢錄》,中華書局1985年。
[30]顧炎武著,黃汝成集釋:《日知錄集釋》,上海古籍出版社2006年,第1537-1538頁。
[31]《史記·平準書》,第1418頁。
[32]“食官共令”、“給共令”這兩個令名中的“共”似宜作“供”來講,“供給”之意,或不在本文論述之列。
[33]睡虎地秦墓竹簡整理小組:《睡虎地秦墓竹簡》,文物出版社1990年,第81頁。
[34]栗勁:《秦律通論》,山東人民出版社1985年。
[35]張伯元先生曾著文揭示出這一問題,參閱氏著《〈漢律摭遺〉與〈二年律令〉比勘記》,《出土法律文獻研究》,商務印書館2005年,第10-11頁。
[36]“雜問”的例子有如,《漢書·文三王傳》:“復遣廷尉、大鴻臚雜問。”又《漢書·翟方進傳》:“上使五二千石雜問丞相、御史。”“雜考”的例子有如,《漢書·劉向傳》:“辭果服,遂逮更生繫獄,下太傅韋玄成 、諫大夫貢禹 ,與廷尉雜考。”《後漢書·皇后紀上·和帝陰皇后》:“事發覺,帝遂使中常侍張慎與尚書陳褒於掖庭獄雜考案之。”
[37]彭浩、陳偉、工藤元男:《二年律令與奏讞書》,上海古籍出版社2008年,第222頁。
[38]曹旅寧先生認為“尉卒律”可能與睡虎地秦簡的“尉雜”有關。參閱氏著《岳麓秦簡中的一條內史雜律》,簡帛網2009年5月9日。
[39]大庭脩:《秦漢法制史研究》(中譯本),第165-192頁。
[40]彭浩、陳偉、工藤元男主編:《二年律令與奏讞書》,上海古籍出版社2007年,第179頁。
[41]荊州博物館:《罕見的松柏漢代木牘》,《荊州重要考古發現》,文物出版社,2009年1月,第209-212頁。
[42]富谷至:《晉泰始律令への道——第一部 秦漢の律と令》,《東方學報》(京都)第七二冊,2000年。
[43]楊振紅:《從〈二年律令〉的性質看漢代法典的編纂修訂與律令關係》,《中國史研究》2005年第4期。
[44]《武威漢簡》,文物出版社1964年
[45]武威縣博物館:《武威新出王杖詔令策》, 甘肅省文物工作隊、甘肅博物館編《漢簡研究文集》, 甘肅人民出版社, 1984年, 第34一61頁。
[46]前揭籾山明:《挈令新義》。
[47]大庭脩先生曾指出《武威》简1與簡8有可能是連續的,籾山明先生的判斷是建立在這一基礎之上的。
[48]關于這一問題,陳夢家等先生在探討武威王杖十簡的時候曾有論及,但都嫌于理不合。富谷至先生在《王杖十簡》一文的註釋中直言“蘭臺令”和“御史令”的由來不詳。這一問題實有待進一步研究。不過值得註意的是,王杖十簡所見“蘭臺令”和“御史令”的內容都見于武威《王杖詔書令》,但是《王杖詔書令》中隻稱“蘭臺令”而不稱“御史令”, “蘭臺”是否為“御史”的別稱亦未可遽然定論。甘肅博物館、中國科學院考古研究所:《武威漢簡》,文物出版社1964年;富谷至:《王杖十簡》,《中國法製史攷證》丙編第一卷,中國社會科學出版社,第514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