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더 황당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입니까? 다른 산입니까?
같은 산이죠. 대개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부르고 중국 사람들은 같은 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한때는 달랐다가 지금은 같은 산이 됐습니다. 좀 왔다갔다 하는데요.
그 분기점이 청나라 강희제 때 1712년, 1718년 이때가 우리나라 조선 숙종 때인데요. 그때부터 희비가 갈립니다.
1712년이 무슨 연도냐 하면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지던 때입니다.
그리고 1718년에는 거기에 정계비를 세우고 나서 지도를 만들죠. 《황여전람도》. 이 지도가 그 이후 거의 100년 동안 동북아시아 표준 지도가 됩니다. 엄청난 역사왜곡이 들어가 있는 지도죠.
원래 백두산은 여기 있었습니다. 현재 백두산의 동북쪽 1천 여리. 여기 있는 산을 장백산, 백두산, 불암산, 태백산이라고 우리들은 불렀는데 강희제가 백두산정계비를 이쪽에 세우고 나서 원래 있던 백두산과 장백산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흔적은 고지도에 그대로 남아 있죠. 1266년도에 나온 《남송여지도》인데요. 이것은 비석에 새겨져 있는 지도의 탁본입니다.
모사본을 보시죠.
오른쪽 위를 보면 장백산, 장백봉 보이시죠. 한반도는 훨씬 남쪽 밑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1270년도에 나온 《거란국지》에 《거란지리지도》가 실려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고려와 장백산은 엄청나게 떨어져 있죠. 그 사이에 강도 있고, 산도 있고, 들판도 있고, 숲을 지나야 장백산이 나옵니다.
다른 판본인데요.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장백산은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1666년도에 나온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인데요. 서울역사박물관에 두 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확대를 해보면, 장백산과 백두산이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죠. 장백산은 만리장성 한참 위에 있고 백두산은 저 아래쪽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림인데요. 마찬가지로 장백산과 백두산이 완전히 다른 산으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1666년도에 나온 《조선팔도고금총람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도는 북쪽 지방 상하를 조금 압축 해놨기 때문에 위도가 비슷하게 보이지만 확대를 해보면 위도가 좀 차이가 납니다. 장백산과 백두산은 완전히 다른 산이죠.
이 지도가 상당히 재미난 지도인데요. 17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인데 《천하도, 중국십삼성도》라는 지도입니다.
하나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갖고 있는 지도인데요. 왼쪽 지도를 보시면 중국의 십삼성도인데 우리나라 부분을 확대를 하면 먼저 백두산과 장백산은 완전히 다른 산으로 표시가 되어 있죠. 백두산은 조선 위에 있고 장백산은 저 위에 만리장성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만리장성이 있는데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이것은 산해관이죠. 우리가 잘 아는 노룡현에 있는 산해관입니다. 우리가 관광할 때 많이 가죠.
그런데 그 오른쪽에 성이 쭉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만리장성이라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유네스코에 등록해 놓은 성인데요. 그 성이 려성[麗成]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려[麗] 자를 쓸 때는 고구려[高句麗]를 줄인 말입니다. 고구려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도가 말하는 것은 산해관까지는 중국 사람들이 지었고
산해관부터 쭉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성은 고구려 사람들이 지었다고 이 지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지도는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 대영도서관에서도 거의 동일한 지도를 갖고 있습니다.
조금 확대해서 보면 똑같죠. 백두산, 장백산은 완전히 다르고 산해관이 있고 그 오른쪽에 조금 희미하게 보입니다만 려성[麗成]입니다. 이것이 고구려성입니다.
그다음에 그림만 보시죠.
완전히 다른 산으로 표시된 지도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 구경하러 가자!”고 하면 어디로 갔을까요? 당연히 함경북도 쪽으로 갔겠죠. 그런데 실제 옛날 역사책을 보면 함경도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갔습니다.
요동반도 한가운데와 백두산은 천몇백 리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왜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을 구경하러 함경도로 가지 않고 요동반도로 갔을까요?
황경원 선생은 대제학까지 하셨으니까 학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고봉까지 오르신 분이죠.
이분이 쓴 시 중에서 《영액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자 원본은 이렇고 이것이 《강한집》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원본이고요.
우리 말로 해석을 하면 “삼차하의 수원은 백두산에서 나오니” 라고 쭉 되어 있습니다.
이 삼차하는 지금의 요하를 가리키는 것이고 요하의 물줄기가 백두산에서 나온다는 말씀 들어보셨습니까? 백두산에서는 압록강, 두만강이 나오죠. 요하는 저 위에서 나오는 것이죠.
이분이 중국에 사행[使行]을 가면서, 사신으로 가면서 시를 상당히 많이 남겼는데 시 중에서 많은 부분은 지명들이 나옵니다.
봉성, 연산관, 낭자산, 냉정, 요동, 천산 등 쭉 나오는데 이것을 나열을 해서 실제 지도 위에 제가 표시를 해보니까 어떤 행적이 나오느냐 하면 이런 식입니다.
의주에서 출발을 해서 쭉 원래는 심양까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심양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서 이제 북경까지 가는 것인데요. 이분은 심양에서 바로 북경으로 안 가고 심양에서 잠깐 쉬면서 농땡이를 치죠. 뭐를 하느냐 하면 백두산 구경을 합니다. 백두산 구경을 가는데 영액성, 영액문이라는 곳에 백두산 구경을 가는 것이거든요.
심양으로부터 영액성까지는 소위 지금으로 따지면 훈허[渾河]라는 강이 있고 옛날에 그 강을 압록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양에서 영액문까지 가는 강을. 압록강을 배를 타고 올라와서 영액문에서 내려서 백두산 구경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양에서 백두산으로 가려고 하면 이쪽으로 가야죠. 그런데 이분은 그쪽으로 간 게 아니라 심양까지 갔다가 심양에서 영액문에 갔다가 영액문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그게 지금까지 우리한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당한 이야기 아닌가요? 저도 이런 시를 보고 해석을 하면서 정말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때까지 제가 근 70년 동안 알았던 역사 지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왜곡되고 잘못됐는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제가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삼차하는 강이 3개가 만나니까 삼차하라 하는 것이고 심양에서 배를 타고 쭉 올라가면 그 길이 압록강입니다. 끝이 영액문, 영액성이라는 지역인데요.
제가 추정하기는 바로 여기가 단군께서 고조선을 만들었던 지역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1712년 그 이후에는 강희제가 장백산을 옮기면서 지도상에 여러 개의 장백산들이 등장을 합니다.
1822년도 《황청지리도》를 보시면 이 부분을 확대를 해보면 장백산이 무려 네 군데 나타납니다.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1842년도에 《해국도지》라는 지도를 보시면 확대를 해보면 장백산이 네 군데 나타납니다.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장백산.
1875년도에 《조선전도》. 이것은 일본의 육군 세작[細作, 스파이]들이 실제 밀정 역할을 하면서 만든 지도인데요.
이 부분을 확대해서 보시면 장백산이 세 군데 나타납니다.
그다음에 이것은 마찬가지로 《만주기행부도》라는 지도데요. 이것도 일본의 세작이 만든 지도인데 장백산이 무려 다섯 군데 나타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원래 있던 장백산을 없애고 강희제가 지금의 장백산 백두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장백산의 위치가 확정이 안 됐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여기도 장백산, 저기도 장백산.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죠.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이기도 하고 다른 산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상 네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제가 이번에 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차별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쇼비니즘. 과도한 국수주의를 거부를 합니다. 쇼비니즘[chauvinism]이라는 것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광신적인 애국주의나 국수적인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죠.시쳇말로 표현을 하면 국뽕, 환빠가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만간 다가올 중국과의 역사전쟁에 돌입을 하려면 철저하게 과학에 근거한, 입각한 자료, 증거만을 대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이런 환국의 지도, 한민족 세계정복설, 고구려의 강토 같은 지도를 보면 정말 가슴이 뿌듯하죠. 정말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했을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하는데요.
이런 자료들의 근거가 《환단고기》라든지 《규원사화》라든지 이런 책들은 현재 위서 논쟁이 붙어져 있거든요. 이런 책들을 우리들이 인용을 해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역사 전쟁에서 그냥 단칼에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용할 수 있는 자료는 중국의 정사 24사, 25사 또는 신뢰도가 확보된 사료를 근거로 해야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고지도 이야기인데요. 제가 이번 작업을 하면서 고지도를 약 천 장을 구했습니다. 처음에 한두 편 모으다 보니까 신기하다, 신기하다 해서 지도를 약 천 장을 모았는데요.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설명을 드리고, 인터넷에 공개를 하고, 제 개인 블로그에 올릴 작정인데요.
오래된 것은 기원전 250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 지도인 《마왕퇴한묘지도》 이런 지도도 있고
비석에 새겨진 지도, 중국의 국보로 된 지도부터 시작을 해서 최근까지 지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지도들은 중국에서 구한 것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전부 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만, 이런 데서 구했죠. 중국은 자기 지도를 공개하는 순간 엄청난 역사왜곡과 조작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기 때문에 자기들이 지도를 공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인지 몰라도 최근 1~2년 사이에 이 고지도들이 수도 없이 공개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볼 때는 코로나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박물관, 도서관들이 폐쇄 상태에서 사람은 지켜야 되고 하다 보니까 있던 자료를 디지털화 하자 이런 식인데요.
제가 가장 고지도를 많이 구했던 곳은 미국의 의회도서관, 하버드대학 도서관, 그리고 하버드대학의 옌칭연구소 도서관에도 고지도가 상당히 많습니다. 스탠포드대학 도서관도 꽤 있죠. 그리고 일본의 내각문고, 일본의 국회도서관, 그리고 영국의 국립도서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 의외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도 고지도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고 공개를 하고 있습니다.
지도 하나 구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하루 종일 지나갑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아, 아 소리를 하면서 하루 종일 시간이 지나갈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적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는 지도들이 상당히 많죠.
그다음 세 번째는 빅데이터 활용입니다. 과거에는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해서 이런 식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고 하면
빅데이터가 나오고 나서는 거꾸로 방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고문헌들은 거의 다 디지털화가 됐습니다.
디지털화가 됐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접근성[accessibility]이 좋아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것이 대규모로 축적이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죠. 그걸 우리들이 빅데이터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네 번째 제가 차별화한 요소는 제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논문, 텍스트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죠. 접근성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오디오나 비디오로 만들겠다고 제가 아까 말씀을 드렸고 제가 동영상을 약 100편 제작 중에 있는데 제작되는 대로 윤순봉의 서재 채널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 네 번째입니다.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두 가지 말씀을 드리는데요. 고지도, 고문헌.
테라[terra], 땅입니다. 테리토리[territory], 떼루아르[terroir]. 땅이죠. in = not. 부정에 대한 접두사죠. 코그니타[cognita] 코그니션[cognition], 인식.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땅을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라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미지의 땅이죠.
예를 들어서 콜럼버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서쪽으로 갈 때는 그쪽에 뭐가 있는지 몰랐죠. 테라인코그니타가 있었습니다.
발견하고 나서 테라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가 테라코그니타[terra cognita]로 바뀌는 것이죠.
우리들이 고지도를 볼 때는 중요한 것은 그 지도상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지도에 무엇이 그려져 있지 않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당시 지도를 그렸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그 땅의 인식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바로 무엇이 없는가? 라는 것이 테라인코그니타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도 하나를 보죠. 1121년도에 만들어진 《구역수령도》라는 지도죠. 사천박물관에 현재 소장되어 있습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지도인데요. 이것에 대한 모사본인데 재미난 것은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지 않는 땅을 바다로 표시를 했습니다. 물론 동쪽은 바다고 남쪽의 일부도 바다지만 북쪽과 서쪽은 당연히 땅이잖아요. 땅인데도 바다로 표시를 하고 이를 사해, 4개 바다라고 불렀죠.
그리고 자기들이 인지하는 땅을 해[海]의 안쪽이니까 해내[海內]라고 부르고 그 바깥쪽을 해외[海外]. 해외가 바로 테라인코그니타죠. 북쪽은 우리하고 관련 되니까요.
북쪽을 보시면 북쪽에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당시 지나족들이 인지하고 있던 땅의 끝이죠.
이 지도를 현재 구글에 찍어보면 톈진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지도를 그렸을 때 지나인들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북쪽 땅의 끝은 톈진입니다.
그리고 이 노란 점들을 쭉 연결을 해보면 바로 역수라는 강이 흐르죠. 현재 이 역수하, 역하가 그 당시에 지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던 땅의 북쪽 끝이죠. 그것을 요수라고 불렀습니다.
현재로 보면 북경 아래쪽에 있는 대청하 수계의 일부인데요. 이쪽까지가 중국 사람들의 천하죠.
그다음에 1584년도에 나온 《법계안립도》라는 지도를 보시면 동진단국도. 동진단은 인도 사람들이 중국을 부를 때 동진단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른쪽 위를 보시면 북경 오른쪽에 요동, 요동 위에 백이숙제의 나라가 있죠. 벌써 이 지도를 봐도 장성 밖에 그렸다는 것은 백이숙제의 나라는 지나족의 나라가 아니라는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흐르는 강을 요수라고 해놨죠. 이것이 지금의 난하인 것이죠.
더 재미난 것은 1877년에 일본의 세작들이 그린 《만주기행부도》라는 지도가 있습니다. 제가 이 지도를 며칠 동안 들여다봤는데 정말 잘 그린 지도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가 아주 많이 담고 숨겨져 있는 지도인데 희미해서 잘 안 보이지만 지도가 보면 중간에 뚝 잘려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일본의 세작들이 땅 끝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렸는데요.
이 윗부분은 땅과 지면과 산과 도읍을 다 그려놨는데 아랫부분은 공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주땅과 세작이 알고 있었던 만주 땅이 다른 것이죠.
이 공란이 뭐냐하면 여기가 우리 옛날의 조선 땅이죠. 조선 땅이니까 만주라고 안 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만주는, 조선 위쪽을 만주라고 본 것이죠.
그러니까 그 당시 이 사람들이, 일본의 세작들이 지도를 그렸을 때 테라인코그니타가 된 것이죠.
제가 고지도에서 테라인코그니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다음 고문헌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까 빅데이터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떤 식으로 최근에 빅데이터를 활용을 할 수 있느냐 라고 한 용례 중 한 가지가 이 역사연구인데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테라인코그니타라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는가?”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테이블을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쭉 지명을 적었습니다. 지명이라는 것이 대개 그 당시 나라의 국경이라는 게 지금처럼 철책이 있는 게 아니고 대부분 강이나 산이나 산맥을 중심으로 국경이 이루어집니다. 자연의 지형지물이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역하로부터 시작을 해서 우리나라 압록강 사이에 있는 유명한 지명을 쭉 나열을 했습니다. 역하, 조백하, 갈석산, 난하, 소릉하, 대릉하, 의무려산, 요하, 압록강. 쭉 나열을 했거든요. 나열을 했다는 이야기는 만일 역하에서 출발을 해서 지금의 압록강까지 누가 간다라고 하면 반드시 거쳐야 되고, 또 역사책을 쓴다고 하면 반드시 언급해야 되고, 누가 사행길을 갔다 오면 반드시 일기로 남겨야 되는 지명들을 쭉 나열을 한 것이죠.
그다음 두 번째, 위에서 아래는 연도순으로 쭉 나열했습니다.
가장 정확한 연도순은 중국의 24사, 25사죠. 제일 위가 사마천 《사기》고 제일 아래가 《청사고》입니다. 그럼 이런 표가 나오겠죠.
그럼 이런 표를 놓고 현재 나와있는 여러 가지 중국 사서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서치해서 각각의 역사책에 이 지명이 나타난다, 나타나지 않는다고 동그라미를 쳐보면 이런 동그라미가 쳐집니다. 한눈에 보셔도 이 경향성을 알 수가 있죠. 크게 사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제일 아래 《청사고》는 최근의 책이니까요. 이 《청사고》에서는 모든 지명이 다 나타납니다.
제일 위 사마천 《사기》에서는 지명이 두 개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가 역수, 하나가 갈석산. 그러니까 사마천 선생이 《사기》라는 책을 쓸 당시에 자기 머리 속에 있던 땅의 끝은 역수와 갈석산까지라는 것이죠.
역수와 갈석산까지가 사마천 머릿속에 있는 천하의 전체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109년에 멸망을 했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대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사마천은 친구나 사돈팔촌 중에 많은 사람들이 위만조선 전쟁에 참가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죠. 당대 기록입니다. 당대 기록을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을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위만조선이 멸망을 하고 그다음 거기에 한사군이 세워졌다고 이야기할 때 대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평양 부근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다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요동땅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다음 아주 소수 의견이 갈석산 부근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럼 위만조선이 어디 있었느냐? 세 군데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평양, 어떤 사람들은 요하, 어떤 사람은 갈석산이라고 하는데 조금 전 테이블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쪽 땅은 사마천 머릿속에 존재 자체를 안 했던 땅입니다. 테라인코그니타였죠.
그러니까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시에 뭐라고 썼든지 간에 사마천은 갈석산 부근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거기에 위만이 망하고 나서 한사군이 만들어졌다고 책을 쓴 것이죠. 그런데 후대 사학자들이 해석을 하면서 역사조작과 역사왜곡을 한 것이죠.
만일에 이 당시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면 이 중간 사이에 있는 지명들 중에 최소한 서너 개는 나와야 됩니다.
사마천이라는 분이 얼마나 엄청난 분이신가 하면 서양으로 따지면 헤로도토스와 맞먹는, 거의 맞비교되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이분이 역사책을 쓰기 위해서 앉아서 쓴 것이 아니라 중국 땅 방방곡곡을 다 찾아다니고 또 여러 가지 자료를 채록한 이런 아주 엄청난 분이거든요.
그분이 만일 갈석산부터 평양까지 실제 사람이 갔다고 하면 아마 본인이 거기까지 가봤을 것이고 또 간접적으로 모든 자료를 채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지명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두 가지죠.
첫째 하나는 사마천이 역사책을 쓰면서 직무유기를 했다, 사가로서 자기 자세를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다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에 한나라 무제가 날틀, 비행기를 발명을 해서 그쪽에서 평양까지 가서 공수부대를 떨어뜨려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시 공수부대로 돌아왔다고 하면 평양에 한사군이 있는 것이 맞습니다. 두 개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한사군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테라인코그니타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지도나 문헌을 볼 때 무엇이 있는가 보다 무엇이 없는가를 통해서 역사의 허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고유명사가 마치 보통명사처럼, 발이 달린 것처럼 옮아 다닌다는 것이죠. 예컨대 먼저 동이에 대해서 말씀을 한번 드리겠습니다.
크게 보면 동이라는 이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대개 동이라고 하면 동쪽 오랑캐고 우리 한민족을 지나족들이 비하할 때 부르는 이름이 동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도 흐름과 이동과 역사가 있는 것이죠.
먼저 질문입니다. 공자가 동이족인가요? 맞습니다. 공자가 동이족입니다. 왜냐하면 주나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다 동이족이라고 불렀거든요.
여기가 주나라고 여기가 노나라니까 공자는 당연히 동이족이죠.
그런데 공자가 한민족인가요? 아니죠. 공자는 지나족입니다. 지나족 사이에서도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동이족이라고 부른 것이죠.
그러다가 후한서에 보면 동이열전이 나오죠. 여기서부터 우리 한민족을 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이한국인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다음 재미난 것은 우리나라 내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충주에 가면 고구려비가 있죠. 우리나라 국보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동이매금토, 동이는 매금의 땅이다. 매금은 마립간을 매금이라고 하죠. 마립간이라는 것이 신라왕의 별칭 아닙니까?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라를 깔보고 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다음에 조선 때 보면 성종 시절에 조선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동이, 동쪽 오랑캐라 불렀습니다.
양성지가 왕에게 올리는 글을 보면 동이는 일본으로서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며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동쪽 오랑캐라고 부른 것이죠.
일본 내에서도 교토 사람들이 에도 촌놈들을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에도 촌놈들 중에서 거친 사무라이들을 동이라고 불렀죠.
그러니까 동이라는 말은 종족과는 상관없이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해서 낮춰서 부를 때 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대개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가 동이족이었죠.
그러다가 우리 한민족 전체가 동이족이 됐다가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를 동이로 이야기했고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동이라고 했고
교토 사람들은 에도 사람들을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이라는 말이 옮아 다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