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사마천 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특히 그중에서도 열전 부분 제일 앞에 나오는 백이열전입니다. 백이열전에 대해서는 혹시 들어 보신 분들도 많으시리라고 생각됩니다.
백이와 숙제 두 분이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죠. 남송 때 화가인 이당이라는 분이 그리신 채미도입니다. 캘 채에 고사리 미. 그러니까 고사리를 캐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죠.
그런데 부제가 조금 거창합니다. 잊혀진 이름들에 대한 기억 남기기. 여기서 키워드는 두 개죠. 하나는 이름, 다른 하나는 기억입니다. 백이열전은 전체 788자의 한자말로 기술돼 있죠.
그런데 대개 백이열전이라고 하면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가 담겨 있겠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그 중에서 백이숙제의 이야기는 215자에 불과합니다. 전체 788자의 27%밖에 안 되죠. 그러니까 나머지 73%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73%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대략 네 가지 이야기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깊숙이 숨겨져 있죠.
먼저 첫 번째, 백이열전은 사마천 사기 열전 부분의 서론에 해당하죠. 그러니까 도입부, 인트로덕션 또는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사마천 사기 전체도 마찬가지지만 열전 부분에도 서론이나 결론, 그러니까 프롤로그나 에필로그가 없습니다. 열전 제일 뒤에 태사공자서, 다시 말해서 태사공 사마천이 스스로 쓴 서론이라는 뜻인데요. 이 태사공자서가 사기 전체의 서론과 결론을 합해 놓은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전이 시작되는 백이열전에는 겉으로는 아무런 표시도 없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열전의 도입 부분을 숨겨놓은 것이죠. 바로 이 부분이 나머지 73%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백이열전을 보면 사기를 쓴 사마천 선생이 완유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완유. 완고한 유학자라는 뜻이죠. 태사공 사마천은 공식적으로는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사가를 표방하지만 그 속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완유, 완고한 유학자의 모습을 아주 심도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유학자들 중에서는 상당히 개혁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죠.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백이열전에서도 공자가 하신 말씀에 대해서 세 번에 걸쳐서 아주 담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말이 질문이지 어떻게 보면 잘못된 것 아니냐라는 도발로 여겨질 수 있는 수준이죠. 그렇지만 사마천도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의 한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죠. 한마디로 체제 내에서 개혁가의 입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찻잔 속의 태풍을 일으킬지언정 찻잔 깨뜨리기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다음 세 번째, 백이열전은 사마천 사기 전체의 아주 작은 프랙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fractal,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을 보면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 형태와 닮은 도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시면 임의의 한 부분을 확대하거나 축소를 해도 닮은 꼴의 모습이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나죠. 이런 모습을 프랙털이라고 하죠.
제가 개인적으로는 한국복잡계학회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이고 현재도 고문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만 프랙털은 복잡계 이론에서는 기초개념 중 하나죠. 제 서재를 보시면 관련된 동영상이 몇 편 들어 있습니다. 참고하시죠.
사마천 사기는 전체 526,500여 자로 돼 있습니다. 그중에서 불과 788자 백이열전 속에 사기 전체의 큰 흐름이 아주 축약적이고 압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사기가 대우주라고 하면 백이열전은 소우주라는 것이죠. 과장된 이야기 같습니다만 대우주의 프랙털이 소우주인 우리 인간 몸속에서 반복되듯이 백이열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다음 마지막 네 번째, 부제에서도 표현했다시피 저 개인의 관점으로 해석해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으로 기억된다’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보신 좀 익숙한 문구죠. 김춘수 선생께서 쓰신 꽃이라는 시입니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나오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죠.
제가 프리퀄로 만들어서 며칠 전에 올렸던 동영상인데 한번 보시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를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된다’라고 원문에 되어 있죠. 이를 비유하면 역사가인 사마천 내가, 그의 이름을 사기라는 글 속에 담았을 때, 그는 비로소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기억이라는 중요한 키워드가 나오죠.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유명한 히스토리아라는 역사책을 쓰면서 프롤로그에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역사란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문구죠. 여기서 과거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 499년부터 449년까지 근 50년에 걸쳐서 일어났던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이 서사시나 또는 구전, 입을 통해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헤로도토스 자기가 이 기억들을 역사책으로 기록함으로써 보존된다는 이런 뜻이겠죠.
전문은 이렇습니다.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모두의 놀라운 업적을 기록함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핵심 부분이죠. ‘특히 두 인종이’ 그러니까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두 인종이 어떻게 갈등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히스토리아의 프롤로그에서 쓰고 있습니다.
요컨대 과거 사람들의 기억을 현재 역사가인 헤로도토스 자기가 역사책으로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사마천의 기억은 좀 다릅니다. 현재 자기 앞에 수없이 많은 기록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내가 취사선택을 해서 사기라는 책에 포함하여 기록함으로써 후대, 미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기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헤로도토스와 사마천 양자를 비교하면 얼핏 들어보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차이가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 내가 역사로 남기겠다 하는 것이고 사마천은 현재 있는 기록들 중에서 내가 골라 뽑아서 기록함으로써 미래 후손들의 기억 속에 남기겠다고 한 것이죠.
물론 사마천이 구체적으로 이런 기억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해석이 그렇다는 것이죠. 어쨌든 과거든 미래든, 헤레도토스든 사마천이든 이름을 불러주면 기억 속에 남는 것은 마냥 마찬가지 아니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금 뉘앙스 차이가 있죠.
역사관, 좀 더 강하게 말씀을 드리면 이념이라는 것의 개입 여부 문제가 있죠. 물론 헤로도토스도 나름대로 역사관을 가지고 히스토리아를 기술했겠지만 비교적 있는 사실을 그대로 충실하게 기록하는 데 요점을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역사관이나 이념의 개입이 적은 것 같습니다. 현재 있는 수많은 기억들을 큰 그릇에 담아서 나름대로 기준에 따라 정리한 것이죠. 그런데 사마천의 경우는 좀 다르죠. 역사관이나 이념이 상당 부분 아주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관의 기본이 소위 춘추대의, 어떤 분들은 춘추필법이라고 하시는데요. 춘추대의라고하는 선악포폄의 서법이죠. 선악포폄. 선한 것은 포상하고 악한 것은 폄하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사기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고 있습니다.
공자께서 쓰신 춘추 또는 춘추경이라는 책은 대개 역사책이라고들 하십니다. 기존에 있던 노나라 역사책을 공자 자신의 이념 잣대에 맞추어서 개작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춘추라는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취하고 있는 형식은 편년체, 다시 말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일어났던 사실들을 쭉 열거하고 있는 분명히 역사책이 맞죠.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춘추는 역사책이 아니라 철학책이라는 생각이 들죠. 공자께서 일가견을 이룬 나름대로의 이념에 맞추어서 너무 손을 많이 봤죠. 어떻게 보면 자신의 철학과 이념을 역사라는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철학서의 사례집처럼 느껴지죠. 물론 이 역시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사마천 사기는 어떨까요? 사마천 사기가 사서, 역사책이냐 아니면 경서, 철학책이냐. 둘 중에 하나 고르라고 하면 물론 사서, 역사책입니다. 그런데 철학과 이념의 냄새가 너무 깊숙이 배어있죠.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역사 왜곡을 하기까지 하죠.
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인데요. 우리가 이제껏 쭉 살펴보았던 공화. 이 문제도 사마천 선생께서 범했던 역사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고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요순우가 선양을 했다는 역사기록 또한 현재로서는 역사왜곡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화나 선양이란 문제가 사마천 사기에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죠.
이상을 요약하면 사기의 백이열전은 열전 전체의 서론이고 이 부분을 통해서 사마천 선생이 완유, 완고한 유학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백이열전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이 사기 전체의 작은 프랙털 중 일부라는 것이고 특히 사마천 선생은 사기를 통해서 이름과 기억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이념을 펼치고 있죠.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백이숙제 이야기부터 살펴보죠. 전체 백이열전 중에서 이 부분, 215자가 백이숙제에 관련된 부분이죠.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 여기서 고죽군은 고죽국의 제후, 군주를 말하는 것이죠.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역사지도라고 하는 중국역사지도집을 보면 고죽국의 위치가 여기입니다. 확대해서 보면 더 잘 보이시죠. 옆에 난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죠.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위키피디아 중문판을 보면 연두색 부분이 당시 상나라의 강력도입니다. 앞에서 본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이곳에 고죽국이 있다고 했죠. 그런데 위키지도를 보면 고죽국은 상나라의 제후국이 될 수 없습니다. 상당히 많이 떨어져 있죠.
이 역시 위키 중문판에 실린 영어로 표기된 지도인데요. 상나라의 고적과 유물이 발견된 지역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이 또한 고죽국 부근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죠. 다만 다른 항목, 목야지전. 목야전투와 관련된 지도를 보면 고죽국이 상나라의 세력범위도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지도가 맞을까요? 과연 고죽국이 상나라의 세력권 속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독립국이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나라의 세력권 속에 있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백이숙제의 고향인 고죽국이 과연 상나라의 제후국이었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일설에는 상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우리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정도 하고 다른 에피소드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죠.
이어서 계속 백이열전을 보시죠.
아버지가 숙제를 제후로 세우려 했는데,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가 말하기를 아버지 명령이라고 하고는 바로 달아나버렸다. 조금 복잡한데요. 여기서 백이숙제의 족보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를 부를 때 앞에 백 자, 중 자, 숙 자가 있는데요. 백은 맏 백, 그러니까 큰아들이죠. 중은 중간 아들이고 숙은 끝 숙이니까 막내아들이라는 뜻이죠.
다시 읽어 보죠. 아버지가 셋째 아들인 숙제를 제후로 세우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셋째인 숙제가 첫째인 백이에게 양보했다는 것이죠. 근데 백이가 말하면서, ‘아버지 명령인데 따라야 된다.’하고는 도망가버렸다는 것이죠.
당시 고죽국의 관례가 장자양위, 다시 말해서 큰 아들한테 군주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관행으로 확립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제가 찾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지 상식하고는 상당히 다른 양위 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아마 그 과정에 역사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숨은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계속 보죠.
숙제 또한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둘째 아들을 제후로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무렵에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서백창이라는 분이 노인을 잘 모시고 공경한다는 말을 듣고서 어찌 가서 의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그쪽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나라 서백창은 천하통일을 한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죠. 서백창이라는 이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서백은 서쪽에 있는 백입니다. 백은 우리가 백작, 공작, 남작할 때 백이죠. 제후의 호칭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상나라 서쪽에 있는 제후들 중에서 우두머리, 수장이 서백입니다. 그리고 이분의 이름이 희창, 그래서 서백 희창인데 줄여서 서백창으로 불리는 것이죠.
그런데 나중에 주나라 무왕이 자기 아버지를 추존을 해서 문왕, 그러니까 주나라 문왕이니까 줄여서 주문왕으로 불리는 것이죠.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이라고 되어있는데요. 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왕이 된 자가 자기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왕의 칭호를 주는 일. 이것을 추존이라고 하죠. 계속 보시죠.
주나라에 이르자 서백은 이미 죽고 아들 무왕이 나무로 만든 위패를 실어서 서백을 문왕으로 추존하고 동쪽으로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벌써 무왕이 자기 아버지 서백을 문왕으로 추존한 것을 보면 이미 자기가 새로운 왕조의 천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봐야죠.
본인 스스로 무왕이라고 왕을 참칭하고 또 아버지 상 중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것으로 봐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길을 떠난 것 아닌가라고 봐야겠죠.
지도를 보면 주무왕은 당시 도읍이었던 주원(현재의 치산현)에서 출발해서 상나라 걸왕과 그 유명한 목야전투를 벌인 목야(현재의 낙양 부근) 쪽으로 가는 길에서 백이숙제를 만났죠. 대개 지도상으로 보면 대략 이쪽으로 이동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만에서 나온 중국역사지도집에 주나라 초의 봉건도가 있는데요. 확대를 해서 보면 왼편이 주원(현재의 기산 부근) 여기서 출발해서 오른편에 무왕벌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했다고 적혀있는 목야(현재 신향시 부근) 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백이숙제가 주무왕을 만났던 것이죠. 출발점이 고죽이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이동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계속 보죠. 백이와 숙제는 주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하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창칼을 들다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을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신하라고 하는 것은 당시 주나라가 상나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신하죠. 그리고 임금은 상나라 주왕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주나라 무왕 당신이 상나라 주왕을 치러 가는 것이냐라고 질책하는 것이죠.
실제 이런 대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목소리는 백이숙제의 실제 대화일 수도 있지만 사마천께서 백이숙제의 입을 빌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낸 목소리일 수도 있는 것이죠.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하죠. 아버지 상 중에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느냐? 불효자라는 것이죠. 그다음 어떻게 신하가 임금을 죽이려고 나섰느냐? 불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무왕 당신은 불효, 불충 두 가지를 다 범하고 있으니까 인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앞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제가 뒤에서 상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사마천 선생이 완유, 완고한 유학자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죠.
태사공 사마천 선생이 공식적으로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를 표방하지만 그 속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완유, 완고한 유학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무왕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죠. 그때 강태공이 나섭니다.
이 사람들은 의인,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가로막으면서 따로 모시고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강태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낚싯대로 세월을 낚았다고 하는 바로 그 강태공입니다. 나이가 일흔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주군을 만나지 못해서 강에 가서 휘어지지 않은 낚싯바늘로 낚시를 하다가, 그러니까 세월을 낚은 것이죠. 나이 일흔에 주문공을 만난 후에 태사, 제후의 선생이죠. 태사가 되고 아들 주무왕 때 목야전투에서 일약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죠. 나중에 제나라 땅에 봉해져서 제나라의 초대 제후가 됩니다.
대만판 중국역사지도집을 보시면 춘추열국도가 나오는데요. 확대를 해 보면 여기가 제나라 땅입니다. 상당히 넓은 땅을 하사받죠.
연이어서 주나라 무왕은 이미 은나라, 상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았다. 이때 일어났던 전투가 목야전투입니다. 정확한 연도는 지금도 논란 중에 있습니다.
목야에서 일어난 전투를 목야지전, 또는 무왕극은. 무왕이 은나라, 상나라를 극복을 했다 이런 뜻이겠죠. 그다음 무왕벌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대만판 중국역사지도집에는 무왕벌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중국역사지도집을 보면 서주 시대 때 중심 구역도가 나오는데 가운데 목야가 보이시죠. 우리가 많이 언급했던 공백화의 고향, 공이 바로 왼쪽에 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신향시 동북쪽에 위치하는 것이죠.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입니다. 폭군의 대명사죠. 주나라 무왕입니다. 성군 반열에 들어선 분이죠.
목야전투의 모습인데요. 이 그림의 달처럼 보이는 것이 세성(목성)입니다. 그날 아침에 지평선 위에 목성이 뜨자 주무왕은 자기가 이긴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는데요.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목성이 떴다는 사실은 목야전투가 언제 일어났느냐라는 연도를 측정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죠.
그다음 연이어서 주무왕이 천하통일을 하니까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절개를 지켜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수양산의 위치가 어디일까요? 사기의 주석판인 정의를 보면 역사책에 전하거나 여러 글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곳이 다섯 군데로 나오는데 그 각각의 근거가 있지만 어느 것이 확실한지 잘 모르겠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수양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백이숙제를 그린 그림들 보면 수양산은 심심산골로 묘사되어 있죠.
그다음에 굶어 죽기에 앞서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랫말은 이와 같다. 채미가가 나오죠. 캘 채 자에 고사리 미. 고사리를 캐는 노래죠.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하나를 제가 골랐습니다.
저 서산에 오르네, 고사리를 캔다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 상나라 주왕의 폭력을 주나라 무왕이 폭력으로 바꿨다는 것이죠.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 그 잘못을 모른다네. 신농, 우, 하의 뜻이. 여러 성군들의 뜻이 돌연히 없어지니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 죽어야 하리라. 나의 명이 다했구나. 이것이 채미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구가 ‘마침내 백이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아사했다고 되어있죠.
이상 여기까지 백이숙제가 기록된 부분, 215자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