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한 시대를 함께 평범하게 살아온 어느 범부의 자서전적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일반적인 자서전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절반은 자신의 추억이고 나머지 절반에는 당시 세상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눈 앞에 잔잔히 펼쳐집니다. 부디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추억을 함께 하십시요.

 

프롤로그

Ⅰ. 고향 이야기

중학동 골목길의 추억

나의 고향 혜화동

용감한 이발사

건국훈장 애족장

보성의 천년바위

싸움꾼

평남 강서사람, 아버지

사춘기의 울타리, 을지로 교회

선생님 고맙습니다

만리포 모래사장에 묻어둔 참담한 추억

못 다 갚은 빚, 등록금

어머니의 추억 지키기

가난, 빛과 그림자

Ⅱ. 세월의 보초

고등어 가시와 형사 콜롬보

장발, 미니스커트

장교 후보생

술, 반백 년의 인연

초라한 군생활 성적표

한탄강 방어 진지

100km 행군을 아시나요

Ⅲ. 일 중독자, 나는 행복한 사람

203 포럼

신입사원 근무수칙

운명적인 만남

관리의 삼성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유감

수기원장과의 전쟁

나는 행복한 사람

강원도의 힘

관동8경 이야기

하동관 곰탕

가장 큰 부정, 무능

생활신조 (得意淡然 失意泰然)

신뢰의 원칙

잠실

Ⅳ. 왜 불러

삼성생명에서 받은 선물

민짜로 주세요

Change Management

정조대와 변화 관리

중국어 공부

북경 귀양살이

중국, 중국인, 북경

안식년에 안식은 없었다

새롭게 얻은 직장, SC제일은행

SIM (Sales Innovation Manager)

엉터리 은행원

숭어 따라 뛴 망둥이

Ⅴ. 지옥이 별건가요

익숙한 길 낯선 길

지옥이 별건가요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2월 30일생

허리병 탈출기

교각살우 (矯角殺牛)

잘 걷는 비결

걸으면 건강하다

탁구 이야기

친척, 가족, Sweet December

은퇴생활 백서

에필로그

 

 

 

 

프롤로그

걷다가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매일 아침 서울 공항 옆 세곡천변을 울리는 군부대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걸은 지도 어언 3년이 넘었다. 새벽잠이 사라져 생긴 틈을 걷기로 메우기로 작정하게 된 것은, 혈당 관리하라는 의사의 권고도 있었지만, 걷기 시작하던 날 우연히 듣게 된 기상나팔 소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기상을 강요당하기 전에 이미 기상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우쭐한 기분.

1977년 임관 후 첫 임지는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에 위치한 보병부대였다. 소대장 부임 첫날, 우리 소대에서 군생활하다 제대한다며 인사 온 소대원은 힘든 부대에 오셨는데 같이 근무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리저리 꼽아 보니 제가 이 부대에서 30개월 지내는 동안, 훈련받으면서 걸은 거리가 필리핀에 갔다 오고도 남습니다. 소대장님도 미리 고생할 각오를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에게 다시 하라면 저는 못 합니다. 바로 탈영합니다. 소대장님 군생활 열심히 하십시오」

군 훈련 중에 걸을 때에는 개인의 의사나 몸 상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오직 부대의 이동 목표와 계획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개의 경우 육신의 고단함과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군대 시절 원치 않던 걷기에 진력이 났던 탓일까 제대 후 40년이 지날 때까지도 부득이 한 상황이 아니면 걷기 이외의 다른 선택을 했다.

그렇게 살다가 2019년, 60대 중반에 이르러 해파랑길(완주770km)을 시작으로, 그 해 1년간, 2,000km가량 걸었다. 성남누비길(완주62km), 태안해변길(완주100km), 강화나들길(일부구간 151km)등을 걸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아침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5km를 걸었다.

지금 걷고 있는 서울 주변의 길들을 걷고 나면, 이미 걸은 해파랑길에 이어 남파랑길(1,463km), 서해랑길(1,804km), DMZ 평화누리길(541km)의 코리아둘레길을 걸을 계획이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스페인 산티아고순례길(780km), 일본 시코쿠순례길(1,200km), 미국 PCT 트레일코스(4,300km), 꿈의 길 실크로드(12,000km)에도 도전하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을 잇는 느리지만 제일 확실한 이동수단이고, 추가적인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장 경제적인 교통수단이다.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단순한 운동, 걷기의 어떤 면이 나를 걷기 마니아의 길로 접어들게 했을까? 혈기왕성했던 20대에 마지못해 걸으며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여하히 떨쳐 버리고, 다 늙은 나이에 걷기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나이 먹은 몸이 아직도 쓸 만한지 알아보는 상태 점검 차원이었고, 이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체력측정, 아울러 계속 걷는다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만나게 되었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얻어지는 일상의 활력, 걸으면 걸을수록 늘어나는 묘한 자신감, 걷고 난 후에 얻어지는 짜릿한 성취감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좋아서 계속 걷게 되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육신은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정신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흔적들을 더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걷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몸이 힘들어지면 쉬었다가 회복되면 다시 걷는 것을 반복하면 그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두 다리는 기계적으로 전진하는데, 뇌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아 쉬지 않고 계속 걷는 일이 생기곤 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적당한 간격의 휴식을 강제하는 조치가 필요하게 되어, 중간에 쉬어가는 시간을 알리는 알람을 설정하고 걷게 되었다.

한순간 「걸으며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조각들을 모아서 정리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왕에 정리할 것이라면 체계를 갖추어 정리해보기로 작정했다.

과거 나의 생각과 행동을 오늘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지만, 지난 세월의 상황과 여건을 재조명하며 당시 생각과 행동의 불가피성·정당성을 부여해보는, 스스로를 변호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해서 과거와 현재의 시각차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심리적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면, 그 연장 선상에서의 미래도 더욱 편안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을미(乙未)생인 나는 금년도에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았다.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UN에서 정한 「노인」기준에 맞는 연령, 지하철 무료승차 기준 「어르신」이 돼버린 것이다.

사회가 노인이니 어르신이니 해서 대접을 달리 해 주는데 맞추어 나 스스로 어르신 되기 전을 정리해보고 어르신 된 후를 조망할 기회를 갖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도 여겨졌다.

집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시간이 길다 보니 다양한 주제, 많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서로가 상대방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특정 사실에 대한 생각과 느낌의 차이 같은 것이 아니라 특정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여부 조차를 모르는, 완벽한 무지의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40년 가까이를 한 이불 덮고 같이 산 집사람, 평생을 함께 하시다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 학교라는 공간에서 불과 몇 년간을 같이 수학한 동창들, 회사에서 일정 기간 겹쳐 근무하는 동안 알고 지냈던 선·후배 동료들이 알고 있는 「나」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모르고 살게 하는 것이 마음 편할 수도 있겠지만 몰라서 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특히 가까울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이제껏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았음에도 모를 수 있었다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더 늦기 전에 나를 적극적으로 알리자」라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5개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어려서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를 1부로 했고, 대학과 군복무 시절을 2부, 삼성 입사 후 부장까지를 3부, 삼성 임원, SC제일은행, 자기사업을 통해 경제활동을 하던 시절까지를 4부, 그 후의 은퇴생활 모습을 5부에서 다루었다.

정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과 근거는 나의 생각과 기억이다.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가급적 자료와 문헌을 찾아 보완하려 노력했고 그래도 자신이 없으면 정리에서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동향으로 지어진 아파트에서 사는 즐거움은 해 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글쓰기를 멈추고 거실로 나가 커피를 마시며 만나는 행복. 일출.

오래도록 행복한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Ⅰ. 고향 이야기

혜화동에서 수백 미터만 걸으면 갈 수 있는 명륜동·와룡동·성북동·삼선동·이화동의 수없이 많은 골목들, 그 주변에 있던 서울·성균관·우석대학교, 보성·경신·동성·성북·삼선 중고등학교, 동구여상·한성여중고, 여러 개의 초등학교, 모두가 그 시절 나의 운동장이고 놀이터였었다.

「본문 중에서」

중학동 골목길의 추억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연 이래, 조선왕조는 외적으로부터 도읍을 지키기 위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에 연하여 성곽을 쌓고, 성의 안과 밖을 잇는 통로로 4대문(흥인, 돈의, 숭례, 숙정)과 4소문(혜화, 광희, 소의, 창의)을 만들었다.

그 성곽 중 남아있는 부분들과 통로로 사용되었던 문들, 그리고 그 주변의 역사적 유물과 자연경관을 엮어 트래킹코스로 개발한 것이 「한양도성길」이다.

한양도성길은 총 길이 18.6km에 불과한 길지 않은 길이지만 6개의 코스가 있다. 주요 포스트인 인왕산, 북악산, 남산 어느 곳에 오르더라도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한복판에 내가 태어났고 유년 시절을 보냈던 종로구 중학동이 있다.

지금은 너무 많은 변화가 있어서 정확한 위치가 가늠되지는 않지만, 우리집에서 300m 거리 이내에 지금의 한국일보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그만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한옥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집이었고 골목 시작부터 골목 끝 막다른 집까지의 거리는 50m 정도에 불과했었다. 포장되지 않았던 골목 흙길은 그 동네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었다. 그 놀이터에서 남자아이들은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타기를 했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과 공깃돌을 가지고 놀았다.

어둑어둑 해가 지고 밥 먹을 때를 알리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이들은 정신없이 놀이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놀다가도 한센병 환자(그 당시에는 문둥이라 불렀다)나 상이군인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한옥 문 닫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잠그고 모두 집에 들어가 숨었다.

한센병 환자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딱지가 앉은 피부병 흔적과 몸 곳곳을 지저분한 붕대로 감싼 몰골이 골목 어귀에 나타나면, 먼저 본 아이가 큰 소리로 「문둥이다!」라고 외치고, 이후 소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었다.

상이군인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모습은, 계급장 없는 군모가 얹힌 덥수룩한 머리, 상처 있고 더러운 얼굴, 갈고리로 대신한 팔, 절단된 다리와 목발 등이 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일은, 미처 문을 닫지 못해 그들을 집안에 들이거나, 불행하게도 문이 닫혀 있어 미처 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과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에 들어와 음식이나 돈을 요구했고 소득을 얻기 전에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문이 닫혀 있어 미처 집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문둥이에게 꿀밤을 맞은 작은 누나가, 문둥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며 몇 날 며칠을 울며 머리를 감고 또 감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이던 두 누나는 공기와 고무줄 명수였다. 여럿이 둘러앉아 「많은 공기」 놀이를 할 때 우리 누나들 앞에는 늘 따 온 공깃돌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어린 나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누나들의 성과를 감동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특히 아버지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큰 누나는 신기에 가까운 고무줄놀이 실력자였다. 두 사람이 거리를 두고 긴 고무줄을 맞잡고 서 있으면 그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며(노래는 고무줄놀이 하는 아이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 박자와 율동에 맞춰 고무줄을 뛰어 넘다가 고무줄의 위치를 높여 마지막에는 머리 위 두 뼘까지 올려서 기량을 겨뤘는데, 큰 누나는 최고난도까지를 너무도 쉽게 실수 없이 해내곤 했다.

가장 어려운 「머리 위 두 뼘」에 맞춰 부르던 노래 곡조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1950년대 말 골목길에서 불리던 노래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제목은 「우리 대통령 노래」이고 이승만 대통령 팔순인 1955년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었다. 작사자는 박목월, 작곡자는 김성태였다. 애국가보다는 짧은, 3절짜리 노래인데 그중 1절만 적어본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평생 한결같이 몸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 오리다

내가 태어났던 서기 1955년은 단기로는 4288년이 된다. 4288에서 88을 끊어 약칭 쌍팔이라 하고 단기 4288년을 「쌍팔년도」라고 불렀다. 휴전 협정 체결 다음다음 해인 쌍팔년도는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때로 인당 국민소득이 320불에 불과했었다.

나의 고향 혜화동

강화 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하는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이 시작되는 지점 인근에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대한 성공회는, 1896년 한국인에게 첫 번째 세례를 강화에서 베푼 인연으로, 1900년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을 강화에 건립했다. 서유럽 건축양식과 불교사찰양식을 조합하여 만든,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 건물이다.

크지 않은 규모의 한옥으로, 다분히 지역 친화적이고, 거부감 적은 모습으로 지어진 듯했으나, 「혜화동 성당」에서 비롯되어 나의 뇌리에 남아있던 성당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라 다소 혼란스러웠었다.

1927년 건립된 「혜화동 성당」을 바라보면, 돌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오르면 여러 개의 기둥과 출입문이 있는데 그 위 벽면에 희고 큰 부조의 그림이 장식되어있다.

부조 중앙에는 그리스도가 앉아있고, 왼쪽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 요한복음 14장 6절」말씀과 그 아래 날개 달린 사자와 독수리 그림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21장 33절」 성경 구절과 그 아래 천사와 날개 달린 소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출생지 중학동을 떠나 이사한 곳은 모든 기록상 나의 본적지로 되어있는 「종로구 혜화동 84번지 1 (도로명 주소 등록기준지 : 종로구 창경궁로 35번길 11)」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2층집이었는데 혜화동 성당과 마주하고 있었고 집과 길 건너 성당과의 직선거리는 200~300미터 내외였다. 지금은 다른 건축물에 막혀있지만 당시에는 장애물이 전혀 없어 2층 창가에서 보면, 다소 위압적인 성당의 모습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부조의 그림, 어려운 성경 구절이 한눈에 들어오곤 했었다.

집에서 혜화동 로터리를 향해 100미터도 안되는 곳 왼쪽에는 파출소, 오른쪽에는 주유소 겸 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4·19 때 파출소는 완전히 부서졌는데, 부서진 집기들 사이에서 주운 실탄과 여러 발의 탄피는 혜화동을 떠날 때까지 나의 좋은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파출소 앞에는 혜화동 로터리가 있었고 미아리고개 밑에서 시작해서 삼선교, 혜화동, 원남동, 광장시장을 거쳐 을지로4가를 오가는 전차가 다녔다. 로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우체국, 서점, 빵집, 중국음식점, 주점, 잡화점 등 주변에 사는 사람들 생활에 편리함을 주는 공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터리에서 옛 보성 중·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폭이 좁은 개천이 흘렀다. 그 개천 건너에는 시멘트·벽돌·모래·자갈 등의 건축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운송수단으로 마차를 썼다. 마차를 끄는 말을 보기 위해 가끔 그곳에 가곤 했는데, 어마어마한 양의 소변과 비상식적인 크기의 생식기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개천을 건너 현 명륜교회(당시 동소문교회)를 지나면 명륜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고 그 언저리에 도심에선 낯선 풍경의 조그마한 과수원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어른들과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공식적으로 결투를 하는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었다. 근처에는 전쟁고아들이 모여 사는 고아원도 있었는데, 모두들에게 가급적이면 접근하지 말아야 할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집 뒷문으로 나가 골목을 두어 개 돌아가면, 주변에 있는 한옥·양옥·일본식 건축양식의 집들과 어울리지 않는 초가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초가집을 지나가면 조그만 구릉이 있었다. 어느 날 그 구릉에서 「돌 멀리던지기」놀이를 하다 방향과 거리에 착오가 생겨 새로 지은 집 스레트 지붕 위에 돌이 떨어지고 스레트에 구멍이 났다. 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어머니는 고초를 겪으셨다. 1962년 당시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구권의 가치는 떨어졌고 교환이 힘든 신권이 아니면 물건을 사기 힘들어 변상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혜화동에서 수백 미터만 걸으면 갈 수 있는 명륜동·와룡동·성북동·삼선동·이화동의 수없이 많은 골목들, 그 주변에 있던 서울·성균관·우석대학교, 보성·경신·동성·성북·삼선 중고등학교, 동구여상·한성여중고, 여러 개의 초등학교, 모두가 그 시절 나의 운동장이고 놀이터였었다.

「혜화동 84번지 1」을 떠나 이사한 후에도 1973년 보성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혜화동과의 직간접적인 인연은 이어졌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혜화동의 영향권을 벗어나 생활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 혜화동이 나의 고향이다.

용감한 이발사

외세침략과 크고 작은 정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 강화도. 그 굴곡진 세월의 역사와 문화, 자연생태와 환경을 묶어 트레일 코스로 개발된 길이 「강화나들길」이다.

조선조 철종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용흥궁」을 지나, 몽골 침략의 아픈 상처인 피난지 왕궁터 「고려궁지」를 가다 보면 「강화초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강화초등학교 담장에는, 1896년 개교 이후 현재에 이르는 13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학교역사를 알 수 있게 하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학교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강화초등학교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960년대 혜화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들을 보며 향수에 젖었었다.

1961년 봄, 나는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슴에 흰 수건이 달려있는 체크무늬 양복, 소가죽 냄새가 나는 란도셀 가방, 검정색 가죽구두와 흰색 양말, 이발소를 거친 하이칼라 머리, 곱게 화장하고 양장을 차려입은 예쁜 엄마의 손, 이것들은 돈 있는 아버지가 학교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장남에게 준 입학선물이었다.

1910년 개교한 혜화초교는 오랜 역사 외에도, 입시경쟁을 통해 많은 졸업생을 명문 중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시 명문 남자 중학으로는 경기·서울·경복의 3대 공립과 보성·휘문·양정·배재·중앙의 5대 사립, 용산·사대부중 등이 있었다. 이들 명문 중학교에 입학한 초등학교별 인원수가 신문에 실리곤 했는데, 절대인원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초등학교가 「혜화」와 「수송」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6·25 전쟁 이후 태어난 많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울의 초등학교들은 학생 수가 폭증하여 몸살을 앓고 있었다. 거기에 부모들의 교육열이 더해져 소위 명문 초등학교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민등록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제한된 공간에서 많은 수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몇몇 명문초교에는 2부제, 3부제 수업도 있었다. 나의 6학년 시절, 입시 부담이 있는 6학년을 제외하고 1~3학년은 3부제, 4~5학년은 2부제로 수업을 했었다.

당시 6학년에 18개 학급이 있었고 학급당 학생 수가 90명이 넘었으니 적게 잡아도 전교생이 10,000명은 되었을 것이고, 당연한 결과로 명문중 합격자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입시를 거쳐 좋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대부분의 친구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학원이 거의 없던 때라 과외 공부가 일반화된 공부 방법이었고 일부에서는 극성스럽기까지 해댔다. 그룹과외, 개인과외, 종합과외, 과목과외.

중학교 진학 후 담임선생님이 「과외공부하지 않은 사람 손들어 봐」라고 할 때 손 든 사람은 나 하나였다. 과외를 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돈이 없어서」.

란도셀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몇 년이 못가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고 급기야 돈이 없어 「졸업앨범」도 사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나에게 혜화초교 54회 졸업앨범이 없음을 미안해 하셨다.

과외공부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과외공부를 안 해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을 마음껏 누리며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첫 번째 좋은 점은 공부 부담 없이 싫도록 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공부 안하고 논다는 것은 말썽부리고 싸움질하는 것을 의미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이 종례에 앞서 나를 교탁 앞에 세워 놓고 말씀하셨다. 「조정빈이 말썽을 하도 많이 피워서 오늘 이후에는 선생을 그만두겠다」 선생님의 엄포와 짐 싸는 척 하는 연기에 속아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 안에서 구슬치기하는 아이들 구슬을 빼앗아 신발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아이들을 두들겨 패 큰 말썽이 되기도 했었다.

나이 많은 고아원 아이들과 영역 다툼 할 때는 명륜동 넘어가는 길 옆에 있는 과수원을 이용해 결투를 했는데 구경꾼들이 만든 원 안에서 주먹과 발로 승부를 겨뤘고, 결판이 나면 깨끗이 승복하는 아름다운 사나이들만의 문화도 자주 경험 했었다.

여섯 가족을 도끼로 살해한 고재봉 사건 이후 「고재봉 같은 놈」이라는 새로 생긴 욕을 써먹을 대상 찾아 욕하기, 김일·장영철 레슬링에 나온 기술을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 재연해보기, 길거리 만홧가게에 푹 빠져보기, 성북동과 삼선교를 잇는 개천에서 왕잠자리 잡기 등등. 이러한 짓거리들은 노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을 때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두 번째 좋은 점은, 그 당시에는 공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좋아하는 「책읽기」를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만화였다. 당시 만화는 일정 기간의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방식으로 발간되었다. 그 시절에 나왔던 만화 중에서 순정만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만화를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읽었다. 만홧가게에 내야 할 돈은 대개의 경우 깡패짓의 결과물로 충당했다. 만화 보는 속도도 빨라 내가 본 만화 권수의 절반 이하에 해당하는 돈만 내도 주인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만화 이외에도 책의 형태를 갖추었으면 기꺼이 시간을 할애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책들은 다 본 지 오래됐고 가까운 친구들 집에서도 안 본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책 볼 기회가 가장 많이 제공된 곳은 홍릉에 사시던 이모님 댁이었다. 산부인과 의사이시던 이모부 서재에 책이 가득했는데 휴일이나 방학 때 이모 집에 놀러 가면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을 계속 서재에 머물면서 책을 읽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많은 책을 읽으려면 책 읽는 속도가 빨라야 했고 그렇게 자꾸 읽다 보니 책 읽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만홧가게 주인 속이기는 땅 짚고 헤엄치기)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은 이후 나의 삶에 있어 훌륭한 자양분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느낌이 크고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 하나를 소개해 본다.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

용감한 이발사.

유럽 어느 마을에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여동생과 둘이서 살았다. 생계를 위해 이발소에 나가 일을 했지만 급여가 적어 늘 쪼들리는 생활을 했다. 동생이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사주는 것은 고사하고 양식이 부족해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칼을 차고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장군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마을에 왔다. 장군은 이발소를 찾아와 면도를 요구하며 말했다. 「면도를 상처 없이 잘하면 요금의 두 배를 주겠다. 그러나 면도하다 얼굴에 상처를 내면 이 칼로 목을 치겠다」 그 말을 들은 어른 이발사들은 두려움에 면도할 엄두를 못 내고 뒷걸음치는데, 그 소년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면도를 하겠습니다. 그 대신 요금 더 주신다는 약속은 꼭 지켜주십시오」

소년은 무사히 면도를 마쳤고 장군은 약속한 요금 이상의 돈을 주면서 물었다. 「어린 네가 무서웠을 텐데 수고 많았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그런데 무슨 생각을 갖고 면도를 한 거냐?」 소년이 답하길 「저는 사랑하는 동생과 제가 쓸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만약 면도 중에 상처를 내면 제가 먼저 알게 되고 장군님 칼에 죽지 않으려면 면도칼로 장군님의 목을 그어 죽일 수 있었기에 무섭지 않았습니다」

모골이 송연해진 장군은 소년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추가로 돈을 더 주었고 그 날 이후 면도할 때 더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되었다.

건국훈장 애족장

수락산, 불암산을 타는 「서울 둘레길」 1코스 14.3km를 오전에 마치고, 오후에 2코스까지 걷기로 했다. 묵동천·망우산·용마산·아차산을 잇는, 서울 둘레길 중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2코스. 2코스 12.6km까지 다 걸으면 하루에 26.9km, 그것도 절반 이상이 산길인데 무리가 되겠다는 일행의 의견이 있었지만 나는 강행을 유도했다. 망우 묘지 공원에 빨리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우 묘지 공원의 잘 포장된 고갯길 양옆에는, 정비된 도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초라한 묘지들이 많이 있었다. 간혹 재력 있는 후손의 손길이 닿아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묘지도 있었지만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독립유공자 고송 조종완 할아버지도 1994년 5월 묘소가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그곳 망우리 공동묘지에 계셨었다.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 성묘 행사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종로구 혜화동에서 망우리 고개 밑까지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동하였으나, 한강이 바라보이는 할아버지 묘소까지는 가파른 비포장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고갯길을 힘들게 걷는 동안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평생을 나라 위해 사셨고 일제에 항거하다 치른 옥고의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으며, 구체적 내용으로 임시정부 자금조달, 흥사단·수양동우회 활동 등을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단지 고갯길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묘소는 규모 면에서 주위의 다른 묘소와 큰 차이가 있었다. 봉분의 크기도 많이 컸고 봉분 전후좌우의 공간도 무척 넓었다. 작은 규모 묘소 10개 이상을 합친 정도의 크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앞에는 굽이쳐 흐르는 한강이 있고 저 멀리에는 남한산성까지 툭 터져 보이는, 그야말로 명당자리였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 명당은, 북한군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만행으로 많이 훼손되었다. 8부 능선에 위치하여 남쪽 전망이 좋았던 묘소 전면에 공용화기 진지가 구축되었는데, 봉분을 제외한 무덤 주위는 참호로 사용하기 위해 파헤쳐졌고 상석과 비석은 부서져 참호벽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묘소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 몇 트럭분의 흙이 부어지고 잔디작업도 있었지만 여건 상 완전한 복원이 되지 않아 부모님의 안타까움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었다.

1985년, 할아버지 기일에 맞춰, 축대를 쌓고 상석과 비석을 다시 세우고 봉분 주변과 활개를 정비하고, 잔디를 교체하는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삼성대리 월급 몇 달치가 들었지만 만족해하시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잘 한 일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독립유공자를 포함한 국가유공자 전체를 원호대상자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원호대상자」, 무슨 이유로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도 없었고, 구호대상이나 원조대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다분히 비하하여 부른다는 느낌이 드는 호칭이었다. 대학 시절 원호처에서 나오는 장학금을 원호장학금이라 하여 게시했는데 받기는 했지만 거부감이 컸던 기억이 난다. 1985년 이후에는 호칭이 보훈대상자로 바뀌어 국가에 대한 공훈에 보답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듯하다. 나는 출생 이래 지금까지 원호대상자를 거쳐 보훈대상자로 생활하고 있다. (독립유공자의 경우 손자녀까지가 보훈대상자로 지정된다.)

실로 25년 만에 망우리 고개를 걸으며, 할아버지를 떠올려보았다. 할아버지의 서훈(건국훈장 애족장)덕에 독립유공자 집안의 영예와 함께 매월 독립유공자 유족 연금을 받는 물질적 혜택을 받고 있으나 정작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시면서, 무엇을 희생하셨는지 그 대가로 무슨 고초를 겪으셨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자책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늦었지만 할아버지가 걸으셨던 발자취를 내 나름대로 따라가 보기로 작정했다. 여러 가지 제약과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하지만, 더이상 늦출 수도 남을 시켜 대신 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나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부모님 생전에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간락하게 할아버지 소개를 올려본다.

할아버지는 1890년 3월 15일 평남 강서군에서 선친 조창균씨와 자당 선우씨의 가정에서 출생하셨고, 평양 사립 대성학교(조만식 설립)에서 수학하셨다.

수양동우회 사건 3차례 공판기록(1939, 1940, 1941)에 의하면

  • 1920년,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한 죄로 1921년 평양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셨고,
  • 1938년, 치안유지법·형법위반으로 피체되어, 194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재차 복역하셨다.
  • 주소지는 함흥, 직업은 상업(석유판매업, 고무신대리점업)

해방 후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시다가 1948년 8월 12일 세상을 떠나셨다.

정부는 1968년 독립유공자 포상, 1990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수양동우회 (위키백과)

수양동우회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 결성된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이다. 흥사단의 자매단체이며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1926년 1월 흥사단의 조선지부 격인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통합되어 출범하였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1938년 대규모로 체포, 구속되어 해체되었다. 수양동우회는 국내의 지식인들에게도 자극을 주어 흥업구락부, 청구구락부 등의 청년단체들과 기독교 계열 단체인 적극신앙단의 조직에 영향을 주었다.

1937년 6월 6일부터 8월 10일까지 경성지회 회원 및 경기도 지회 회원 55명, 평양 선천 지회 회원 93명, 1938년 3월 안악 지회 회원 33명 등 총 183명이 체포되어 강제 해산되었다. 이 중 41명이 기소되고 나머지는 불기소 상태로 재판받다가 1941년 11월 전원 무죄로 석방되었다.

보성의 천년바위

1967년,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지원학교를 정해 입학원서를 내고 응시해서 합격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몇 차례 「배치고사」라는 이름의 모의 평가시험을 치르고 담임선생님 지도하에 진학 희망 학교를 정하게 된다. 나의 배치고사 성적은 3대 공립중에서는 「경복」지원이 가능하고, 5대 사립이나 「용산」등은 무리 없는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입시를 위해 과외공부를 한 적도 없고, 학교에 가는 목적이 공부 이외의 딴짓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훌륭한 결과였다.

지원 가능 범위 안에 있던 학교들의 수준 차이가 크지 않았으므로 걸어서 등교가 가능하다는 강점을 가진 「보성」을 선택하였고, 응시결과는 합격이었다. 본적지 「혜화동 84번지 1」에서 혜화초교 「혜화동 13번지 1」을 거쳐 보성중학교 「혜화동 1번지」에 입학한 것이었다. (기억나는 1번지 학교로 경기-화동 1번지, 중앙-계동 1번지가 있다.)

「혜화동 1번지」 정문에 들어서면 작은 운동장이 있고, 전면에 담장이 넝쿨로 뒤덮인 붉은 벽돌 건물이 나오는데 보성고등학교 교사다. 붉은 벽돌 교사는 중국인들에 의해 지어졌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벽돌로 쌓아 올린 실력을 가져서인지 상당히 견고했고, 6·25 때 파손된 일부를 한국인이 보수했는데 실력 차이가 나서 보수 부분만 재보수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붉은 벽돌 교사 뒤 계단을 오르면, 정규 축구장 규모 수준의 대운동장과 강당이 나오고 운동장 관람석 위에는 화강암으로 마감된 중학교 교사가 있었다.

보성이 1989년 송파구로 이전한 후 혜화동 교정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학교 정문부터 학교 뒷담장인 한양도성 성곽에 이르는 혜화동 1번지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1906년, 당시 탁지부 대신이던 「이용익」선생은 고종황제로부터 교명을 하사받고 보성학교를 설립하였다. 흥학교이부국가(興學校以扶國家, 학교를 세워 나라를 떠받친다)라는 교육이념에 걸맞은 보성(普成, 널리 사람됨을 이룬다)이 보성학교 건학정신이다.

내가 보성 다닐 때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지만, 학교가 평준화되고 사학의 특성이 사라지다 보니 근자에 와서 내가 졸업한 보성을 전남 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있고, 용산구에 있는 보성여고의 자매학교로 오인하는 사람도 있어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 없지 않아 있다.

1980년 전두환 정부는 학생 및 사회운동세력을 강력히 탄압하는 한편, 반발세력에 대한 유화책으로 중·고등학교의 두발과 교복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 이후에는 중고등학교 남학생의 머리가 길어졌지만 이전까지 중·고 남학생의 머리는 빡빡머리에 가까운 짧은 머리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보성에서는 두발의 길이를 문제 삼지 않았었다.

길이보다는 청결이 강조되어 지저분하지 않고 단정하면 머리를 길러 가르마를 타도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이발을 제때 하지 않아 옆머리가 귀를 덮거나, 삭발을 하고 면도까지 해서 윤이 나는, 소위 배코를 치면 문제아로 지목되었다. 교장선생님이 바뀌어 새로운 교육방침을 내세우거나 「교련시간」 신설 등이 학교 두발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큰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교복에 명찰도 달지 않았었다. 「적발이나 구속」을 위해 교복 위에 다는 명찰보다는 언제나 떳떳한 마음의 명찰을 달고 다녔다.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규제나 억압」보다는 「자율과 창의」에 가치를 두는 교풍의 일면이 두발과 명찰에 녹아있었다고 생각된다.

보성학교 교가(이광수 작사, 이상준 작곡)의 특이한 점은 4분의 5박자라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보통의 노래들이 갖는 박자가 아니다 보니, 박자감각이나 음감이 모자라는 사람은 박자를 맞추기도 힘들고 따라 부르기도 쉽지 않았다. 특히 동문들이 만나 술이라도 한잔하고 마지막으로 교가를 부르며 마무리를 하려다 보면 엇박자가 속출해서 엉망이 되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학창시절 조회 때 교가제창 순서가 되고 음악선생님이 강단에 올라 지휘를 하실 때의 복잡한 지휘 동작을 회상해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1학년 음악시간에 여러 번 교가를 배웠고, 크고 작은 학교 행사 때에도 빠짐없이 교가를 불렀건만 아직도 5박자 노래는 여전히 힘들다. 5박자 작곡을 먼저 하고 작사를 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교가는 유지되고 있다.

(교가 1절)

구름에 솟은 삼각의 뫼에 높음이 우리 이상이요

하늘로 오는 한강의 물이 깊음이 우리 뜻이로다

흐르는 피에 숨은 옛날을 영광에 다시 살리려고

씩씩한 무리 모이어드니 우리의 모교 보성일세

보성 보성 보 ~ 성

혜화동 교정을 경험한 보성 졸업생들에게 공통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을 꼽아보라면 「천년바위」가 될 것이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오르내렸던 수많은 바위들을 만날 때마다 보성중학교 교사 옆에 있던 천년바위가 생각났었다. 대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중학교 신관 교사에 이르는 3~4층 높이의 바위군 사이에 소나무들이 버티고 있고, 정상부근 바위 위에 성리학자 송시열이 새겨놓았다는 글귀.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래! 그렇게 살자.

싸움꾼

보성중학교 합격을 확인하고 입학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보성중학교 교무실로 가서 두 분의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한 분은 아버지 연희전문 선배이신데 영어 과목을 맡고 계셨고, 다른 한 분은 후배이시면서 상업을 담당하신다고 하셨다. 두 분이 번갈아 가며 하신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할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제와 싸우다 옥고를 치르신 훌륭한 애국자이시다.

둘째, 아버지는 비록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시지만 모두가 아는 효자이시고 학창시절 공부와 운동을 잘하셨던 대단한 분이시다.

셋째. 보성중학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좋은 학교이므로,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큰 뜻을 품고 성실히 노력한다면, 학교는 너에게 도움을 주고 기반이 되어줄 수 있다.

넷째. 입학을 축하하며 조상에 부끄럽지 않은 보성인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며 바르게 성장해 주기 바란다.

두 분 선생님과의 만남이 단순한 인사이든, 아니면 아버지의 의도가 담긴 연출이든, 그 모임은 나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그때 가졌던 부담은 나의 중·고등학교 전 기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만남 이후 입학식이 치러지기 전까지, 나는 「앞으로 학교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첫째, 무덤에 계신 할아버지는 차치하고, 매일 얼굴을 맞대는 아버지가 두 분 선생님께 창피할 짓은 하지 않는다.

둘째, 공부가 재미있지 않고, 학교성적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이지만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중간 이상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셋째, 어머니가 늘 걱정하시던 싸움질, 친구 괴롭히기는 그만하고, 흡연은 절대 하지 않는다.

「첫째」를 구체화 시킨 것이 「둘째」, 「셋째」이고, 이후 보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신과 한 이 약속은 지켜졌다.

스스로와의 약속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싸움질」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싸움질에 대해서 죄의식도 없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질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내가 알고 행하던 「싸움질」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나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둘째, 승패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손과 발 등의 몸동작으로 가려진다.

셋째, 승패를 겨루다 발생한 부상은 스스로 해결하고, 비겁하게 어른들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싸움질」에 대한 그릇된 인식보다 더 큰 문제는, 100전 이상을 치른 풍부한 실전 경험과 높은 승률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싸움을 운동이나 오락쯤으로 여겼고 싸움을 잘해 얻어지는 이익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학 당시 우리 학년은 8개 반 480명이었다. 종로구, 성북구 출신뿐만 아니라 버스 통학은 물론 기차 통학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경상도, 전라도에서 유학을 온 친구도 있었다. 시험을 통해 진학하다 보니 재수생도 있었고 6·25동란을 겪으며 제때 취학을 못 해 나이 많은 친구도 적지 않았다. 출신 지역, 나이, 성장 속도 등에서 차이가 났고 이러한 차이들은 쉽게 갈등요인이 되어 마찰과 충돌이 일어날 것이 쉽게 예견되었었다.

설렘과 우려 속에 입학을 했는데 문제는 너무 쉽게 풀렸다.

혜화초교 동창생 가운데 걸어서 등교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60명이 넘는 친구들이 동급생이 되었고, 이들은 다른 초등학교 출신들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기꺼이 전달하였다.

싸움과 관련된 나의 경력과 무용담(?)에 과장이 더해져 전해지다 보니 입학 초부터 갈등이 생길 소지가 원천적으로 제거된 것이었다.

이 후 발생하는 작은 갈등들은 「스스로와의 약속」으로 극복하게 되었다.

인류는 일찍부터, 흐르는 시간에 단락을 주고 새로운 단락의 시작점에서 발전적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해와 달의 바뀜을 통해서, 행사와 의례를 통해서 그러했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전환점에서 과거의 잘못에 발목 잡혀 「무엇을 하지 말자」는 소극적 대처보다 「무엇을 하자」라는 적극적 접근이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평남 강서사람, 아버지

딸만 가진 친구가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도 밀어주고 탕에 앉아 담소도 나누는 것이라 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가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간 적이 있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같이 목욕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 와서 후회해야 소용없지만, 목욕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으로 모시고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기회를 많이 만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자못 아쉽다.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목욕탕은 집에서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혜화동 로터리와 현재 서울시장 공관(당시 대법원장 공관)사이, 일제 시절에 지어진 건물 1층에 있었다.

그 목욕탕에는 여느 목욕탕과 마찬가지로 체중계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킬로그램이 아닌 관(3.75kg)으로 눈금이 표시되고 눈금의 끝은 32관(120kg)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체중은 28관(105kg) 내외였는데, 아버지가 저울에 오르시면 종업원과 주위 사람들이 저울 눈금을 확인하러 모여들곤 했다. 요즘 같으면 과체중이 부끄러웠겠지만 그때에는 과체중인 아버지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숭인 상업학교를 거쳐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하셨다. 학창시절 내내 축구를 하셨는데, 어린 나이에 조선 대표선수, 연희전문 입학해서 졸업 때까지 주전선수로 뛰셨고, 이후 6.25전쟁 전까지 함흥축구단, 상공부 축구단의 멤버로 활약하셨다.

공부로는 일본인과 같은 조건으로 경쟁할 수 없었던 시절에 축구를 만났고, 운동장에서라면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축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라 하셨다. 축구에 대한 사랑과 함께 나름대로의 축구관도 확고하셨는데,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첫째, 강한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둘째, 양발을 모두 쓰는 수준 높은 개인기를 갖춰야 하며, 셋째는, 팀워크가 전제된 전술 구사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전후반 휴식 없이 90분을 뛰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장전으로 이어지기도 했기에,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했으며, 체력 향상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훈련해야 했다. 당연한 결과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었고, 에너지는 섭생을 통하여 채워졌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대식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셨다. 연희전문 시절 친구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종목에 관계없이 모든 운동선수들 중에서 최고의 대식가로 평가받았고, 한자리에서 불고기 20인분을 거뜬히 드시는 수준이라고 했다.

신장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지는 월드컵이 있던 2002년 6월 24일 운명하시기 직전까지 의식이 있으셨다. 6월 22일 스페인과의 8강전 승리 소식에 기뻐하셨고, 4강전에서 독일을 만나면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하셨었다.

당시 축구협회에서는 월드컵 경기장 초정장과 경기장 오실 때 입고 오실 양복을 맞출 수 있는 옷감을 보내주었는데 옷을 지어보지도 경기장 관람도 못 하시고 집에서 TV로 월드컵을 관람하시다 축구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셨다.

독일과의 4강전은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아버지 없이 혼자 보았다. 터키와의 3.4위전은 삼우제 다음날인 6월 29일에 있었고 우리나라는 4위의 성적으로 월드컵을 마쳤다.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나는 불효를 후회하며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렸다.

태조 이성계가 삼봉 정도전에게 8도 사람을 평해보라는 하명에, 평안도 사람을 평하기를 「산림맹호(山林猛虎), 산림 속에 사는 사나운 호랑이」라고 했다(경기 鏡中美人, 충청 淸風明月, 전라 風前細柳, 경상 松竹大節, 강원 岩下老佛, 황해 春波投石, 함경 泥田鬪狗). 1920년 출생이래 평남 강서인임을 자랑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걸맞은 표현인 듯하다. 아버지 생전에 언급하시던 평남 강서 동향분들 중 기억나는 사람으로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손정도 목사(손원일 제독 아버지), 백선엽 장군 등이 계신다.

아버지는 외모에서 느끼는 강인함과 아울러 평생 강직함을 지니고 사셨다. 역사관·정치관·인생관이 뚜렷하셨고 한결같으셨다. 아버지가 즐겨 쓰셨고 그분의 정신세계를 잘 설명하는 구절이 있어 적어본다.

석가파불가탈기견(石可破不可奪其堅, 돌은 깨어질 수 있으나 그 단단함은 빼앗기지 않는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셨고 독립운동하신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특히 「정직」을 강조하셨다. 수양동우회의 모체인 흥사단과 할아버지 모교인 대성학원을 설립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던 덕목이 할아버지를 통해 아버지께 전해진 듯하다. (도산은, 정직이 애국이다. 죽어도, 농담으로도, 꿈에서도 거짓을 말라 했다.) 그런 이유로 첫아들인 나의 이름에 「바를 正」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1941년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하셨는데 재학 기간 중 할아버지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넘게(1938~1941) 수감생활을 하셨다. 지금도 교도소 생활이 쉽지 않은데 그 시절 정치범의 형무소 생활은 말도 못 하게 비참하였으리라.

효심이 지극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겪으시는 고초의 일부라도 함께하기 위해 겨울에도 내의와 외투를 입지 않고 생활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 절친이시며 을지로 교회,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신 바 있던 지 목사님 전언).

아버지께서는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를 여의게 된 안타까움을 한시 구절을 통해 표현하시곤 하셨다.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움직이지 않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강직과 정직」을 지키고 경제력까지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우리 가족은 경제적 여려움으로 힘든 생활을 했다. 집이 없었고, 학비는 물론이고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이 안 되는 생활, 가난이 주는 불편함, 육체적 고통, 정신적 한계, 그 시절 나는 부자로 사셨던 할아버지가 당신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지 말고 아버지께 남겨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가족들의 힘든 모습을 지켜보는 가장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가난의 질곡을 건너오는 동안은 물론이고, 마지막 운명하시던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강직과 정직」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사춘기의 울타리, 을지로 교회

걷기를 시작하고 나서 친구들과 걷기 경험을 나누다 보면 나오는 질문이 있다.

「하루 종일 뭐하며 걷니?」, 「뭐하며 걷다니, 그냥 걸었지」 답은 그렇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두 다리를 놀리는 동작 말고도 무언가를 하며 걸은 것은 확실하다.

우선, 많은 생각을 한다. 과거도 곱씹어보고, 이런저런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열하기도 하고, 가족과 자신의 앞날을 걱정해 보기도 한다. 동행이 있으면 주로 대화를 나눈다. 대화가 다툼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걷기의 긍정적 에너지」에 힘입어 기분 좋게 마무리된다. 그러다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거나 대화거리가 바닥났을 때, 갑자기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으면 같이 노래를 하기도 한다. 노래는 유행가, 팝송, 군가, 가곡, 동요,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아는 곡조면 무엇이든 좋았고, 가사를 모르면 허밍으로 이어졌다.

불교 집안에서 성장한 집사람이 다닌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는데, 매주 교목이 인도하는 예배시간이 있었고, 성경은 정식 교과목이었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고등학교 3년간 많은 찬송가를 부르게 됐고, 그때 배운 찬송가들은 「걷기 동행길」에서 노래 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집사람과는 2019년 1년 동안 약 750km를 함께 걸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 「을지로 교회」를 다니면서 성가대까지 했으므로, 집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찬송가를 알고 있었다.

을지로 교회는 중구 인현동(을지로4가 세운상가 옆)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회다. 내가 교회에 다니던 시절 목사님은 아버지와 동향이시며 연희전문 동기 동창이신 지 목사님이셨다. 그의 전도로 나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지 목사님은 후에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 미국으로 건너가셨다. 지 목사님은 당시 경제적으로 어렵던 우리집 가정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그 도움은 심방을 통해 전해진 듯했다. 심방 오신 날은 꼼짝없이 잡혀 함께 예배를 보았는데 우리집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목사님의 기도와 설교 중에 「손이 붉어 교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성도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몰랐으나 후에 적수공권(赤手空拳,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을지로 교회를 다니던 2년여 기간 동안, 매 주말 예배에 참석해 들은 설교 말씀을 통해 마음의 양식을 얻었고, 성가대원으로 활동하여 종교음악에 대한 이해수준도 높였으며, 신약·구약성경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고 토론하는 성경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재 나의 짧은 성경 지식이나 나름의 종교관은 오롯이 을지로 교회 시절에 갖추어진 것이고 그 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싸움을 즐겨했던 전력이나 어려웠던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비행소년이 될 소지가 농후했던 사춘기 그 시절에, 나는 훌륭하신 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을지로 교회에서 중등부 성경 지도 교사이신 최 선생님.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당시 의정부에 있는 중학교에서 영어선생님으로 교편을 잡고 계셨으며 주말에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하셨었다.

(대학입시 1차에 실패하고 2차 대학을 선택할 때 성균관대학이 아닌 한국외국어대학을 지망한 것은 선생님이 졸업하신 외국어대학에 대한 인식이 좋아서였다.)

선생님은 성경과 기독교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고, 「기독교를 머리로 이해하나 마음으로 믿지 못하는 사이비 신자」를 이끌어가는 지혜와 「사춘기 중학생의 반항과 고민」을 상담하신 경험이 풍부하신 분이셨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성경공부시간 중이나 간혹 성경공부 후에도 이루어졌는데 나는 질문하고 선생님이 답변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우리가 죄사함을 구하면 용서해 주시나요?

그렇단다.

어떤 나쁜 죄를 지어도 그런가요?

물론이다.

그럼 죄를 짓고 나서 죽기 전까지 죄사함을 구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너는 언제 죽을 건데? 죽을 때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죄를 지을 때마다 기둥에 못을 박았다가 죄사함을 구하고 못을 빼면, 기둥에서 못은 사라져도 못자국은 남겠지. 하나님은 용서하셨어도 너의 죄로 인해 하나님 마음에 남은 죄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거란다.

죄사함을 구해도 그럴진대 죽는 순간을 놓쳐 죄사함을 구하지 못하면 어쩔 건데!

이러한 방식의 대화는 매주 주제를 달리해서 이루어졌고, 회가 거듭할수록 나의 정신세계는 풍요로워졌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우리집은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기자촌으로 이사하였고 그 후로는 을지로 교회와 멀어졌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나의 사춘기는,

을지로 교회를 다니면서,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면서,

무사히 지나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걷기에 나서면 하루에 대략 8~10시간, 거리로는 25~35km를 걷는다. 평지가 많지만 험한 산길도 적지 않다. 평지에는 포장도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흙길, 자갈길, 모래밭길이 혼재되어 있고 난이도도 제각각이다.

등에 멘 배낭에는 음료수, 간식거리(비상식량), 여벌의 옷, 구급용품 등이 들어있는데 5kg 내외의 무게지만 오랜 시간 걷게 되면 체력저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힘든 산길을 오르거나 뙤약볕을 받으며 걸어 체온이 오르게 되면 배낭의 무게로 인해 「걷기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걷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육체적 어려움을 능가하는 정신적 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신적 만족이 크다고 해서 모든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소위 잘 걷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know-how가 있기 마련이다. 잘 걷지는 못하지만 나도 나만의 「걷기 요령」을 갖고 있다.

첫째, 걷기 코스와 날씨를 사전에 점검, 대비한다.

상황에 맞는 신발(등산화 또는 트레킹화)과 옷을 준비하고, 배낭에 담길 물건은 최소화한다.(걷기 중에 구매나 보충이 가능한 물건은 처음부터 배낭에 담지 않는다.)

둘째, 시간을 정해 휴식을 갖는다.

50분을 걸으면 반드시 10분을 쉰다. 힘들어 쉬는 것이 아니라 힘든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쉰다. 힘들면 무리하게 되고 무리하면 몸에 이상이 와서 더이상 걷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휴식이 끝나면 몸이 걷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휴식 중에는 최대한 편안히 느긋하게 쉰다.

쉬는 장소는 편안히 걸터앉을 수 있는 벤치, 정자, 계단이 좋다. 쉴 때는 배낭과 신발은 물론이고 반드시 양말까지 벗는다. 맨발바닥을 마사지해 발바닥의 열을 내리고, 음료와 간식을 섭취하여 몸에 에너지를 보충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경우에도 체력의 20% 이상은 남겨둔다.

당일 걷기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돌발 상황에도 대비하고, 다음날 일정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함이다.

「참 꾸준하게 열심히 잘도 걷는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그렇게 하지!」

친구가 잘 걷는다는 이야기를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소리로도 들렸다. 돌이켜 보면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제대로 해 본 기억도 없고, 하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싸움질만 했고, 중학생이 돼서는 고등학교를 시험 없이 진학하는 소위 「동계진학」덕에 시험 걱정 없이 잘 지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등록금도 걱정되고 대학 진학해서 공부하는 것보다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는 것이 맞다는 판단 착오로 공부에 전념하지 않았다.

등 떠밀려 들어간 대학에서는,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공부 이외에 다른 일을 더 많이 해야 했고, 유신독재와 그에 저항하는 데모로 학교가 열린 날보다 휴교한 날이 더 많아 공부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부를 안 하고도 학창시절은 잘 마무리됐는데, 제대 후 취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1979년 2차 오일 쇼크가 오자 지난해까지만 해도 구인난을 겪었던 기업들조차도 극소수의 신입사원만을 뽑게 되었다. 학군 장교들이 전역하기 전에 면접만으로 여러 회사에 취직이 결정되던 시절은 막을 내린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학교, 전공, 운)로 취업이 안 된, 나를 포함한 많은 수의 예비 실업자 학군 장교는, 그해 대학졸업생들과 입사시험 경쟁을 통하여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6월 말 전역하고 「면접을 통한 취업 불가」가 확인된 후, 입사시험을 위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기간으로 주어진 시간은 3개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통수 길이었다.

공부해야 할 과목은 전공과 영어.

법학은, 전공한 것이 후회될 정도로 공부할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기업이 요구하는 법률지식에 부합하는 상법·민법·민사소송법 등에 집중하기로 했고, 영어는 아쉬운 대로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은 형편없이 적은데 머릿속에는 「대학 시절 놀아먹은 후회와 군대에서 개 잡아먹던 추억」뿐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등에서 허벅지까지 땀띠가 나고, 땀띠 난 자리가 곪고, 그렇게 3개월을 지내고 나니, 삼성을 포함해서 몇 군데 회사에 합격하게 되었다.

시험 합격의 1등 공신은 영어였다. 공부 안 하고 지낸 세월이 그리도 긴데 어떻게 영어 성적이 좋을 수 있었을까?

사립학교인 보성에는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었다.

우선 좋은 학벌에 걸맞게 「실력」을 갖추고 계셨고, 이동 없이 장기근속하실 수 있기에 맡고 계신 과목에 대하여 「책임감」이 충만하셨다. 또한 보성 제자라면 당연히 도달해야 할 수준을 나름대로 설정하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자들의 수준 미달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사명감」도 남다르셨었다.

어린 시절에 실력, 책임감, 사명감을 갖춘 훌륭한 선생님들에게서 배운 영어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절박한 상황이 되니 모두 되살아나 큰 도움을 받은 듯하다.

특히,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담임 맡은 반 칠판 한쪽에 수십 개의 영어단어를 적어 두고 암기 여부를 일일이 확인한 후 암기가 안 된 학생은 귀가를 불허했던, 상업과목 담당 洪선생님.

3인칭 단수의 동사 어미 변화를 이해 못 하고 발음하지 못한다고 무자비한 체벌을 가해, 죽을 때까지도 「I get up, She gets up」을 잊지 못하게 도와주신 李선생님.

고맙습니다.

만리포 모래사장에 묻어둔 참담한 추억

「태안 해변길」은 태안 해안 국립공원 내 태안반도와 안면도의 리아시스식 해안을 따라 7개 구간 100km에 걸쳐서 만들어졌고 관리되고 있다.

태안(泰安). 예로부터 자연재해 없고 기후가 온화하며 먹거리가 풍부하여 그곳에서의 삶이 고단하지 않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2007년 12월, 태평하고 안락하여야 할 지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청정한 자연과 지역 주민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대규모 인재가 발생하였다. 유조선과 해상 크레인의 충돌로 유출된 기름은 태안의 아름다운 해변과 풍요로운 바다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사고 이후 태안은, 전국에서 모여든 10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과 지역주민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노력에 힘입어 재해를 극복하고 옛 모습을 되찾은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2019년 12월, 연말연시 도시의 들뜬 분위기를 피해 태안해변길을 찾았다.

1969년 태안을 처음 만난 이래 실로 50년의 세월이 흘렀고, 인재로 얼룩진 소식을 접한 이후에도 12년이 지났다.

설레고 궁금한 마음을 억누르며 첫 구간인 「바라길」을 다 걷기도 전에 나는 인재를 극복한 위대한 사람들의 노고와 승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기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태안해변길 두번째 구간 「소원길」에 있는 만리포 해수욕장은 대천·변산 해수욕장과 더불어 서해안 3대 해수욕장 중 하나이고, 2.5km가 넘는 질 좋은 모래사장과 얕은 수심이 자랑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으나 교통수단, 도로, 숙박시설, 식당, 놀이시설의 인프라나 발전된 주변 지역의 모습에서는 옛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만리포 해수욕장」. 철없던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친구들과의 여행 행선지였다. 방학을 멋지게 보내기로 의기투합한 우리 일행 6명은 연장 가능을 전제로 한 5박 6일 일정, 텐트 숙박, 자체 취사 등의 계획을 갖고 여행을 시작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발 길이에 관대한 학교를 다닌 덕에 방학 전부터 기른 머리는 만족할 만큼 길었고, 사춘기를 넘긴 몸은 이미 충분히 커서,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중학생 신분을 숨기기에 충분했었다.

등에 멘 배낭에는 먹고 자는데 필요한 도구와 식재료가 들어있었는데,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군용텐트, 반합, 버너 등이 주요 캠핑장비였다.

몸만 어른인 우리 일행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에 갔고, 인천 어느 부두에선가 배를 타고 몇 시간의 멀미 끝에 서산 인근 항구까지 이동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의 끝에 있는 만리포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출발해서 저녁나절까지의 긴 여정 끝에 만난 서해의 낙조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이동 중에 우리는 여행 중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대학생이라 속이기로 작당하고, 앞으로의 짜릿한 일탈을 기대하며 흥분하기도 했었다.

모래사장 끝에 2인용 군용텐트 2개로 숙소를 마련하고, 빈약한 음식으로 허기를 달랜 뒤 카바이트 불(빈 깡통에 카바이트를 넣고 모래를 덮은 뒤, 물을 부으면 기포가 올라오는데, 기포에 불을 붙이면 훌륭한 조명기구가 된다.) 앞에 둘러앉아, 이 시간 이후 어떻게 놀고 어떤 추억을 가져갈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카바이트 불 밖은 완전한 어둠으로 가득 차 주위 분간이 어려웠고, 파도소리, 풀벌레소리, 그리고 멀리서 간간히 들려오는 통기타소리, 노래소리. 도심을 떠나 자연을 찾아온 여행이 실감날 즈음 우리는 「인천쫀놈」을 만나게 된다.

인천 쫀놈(촌놈)은 까맣게 그을린 근육투성이 상체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긴 바지를 성의 없이 잘라 너덜거리는 반바지만 입은 채 소리 없이 다가와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우리 앞에 섰다. 이어 우리를 하나하나 쏘아보며 불량기 농후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나는 인천 쫀놈인데 형씨들은 어디서 왔수?

서울에서요.

누가 여기다 텐트 치랬어!

네? 모르고 쳤는데요.

일어나 당장 무릎 꿇어!

거기까지였다. 인천쫀놈에게 1대6의 열세는 애당초 없었다.

고양이 한 마리에 쥐 6마리. 인천조직과 서산조직의 경계 부근에 텐트를 친 우리는 인천쫀놈을 만나는 순간 인천 조직의 졸개가 된 것이었다.

다음날 두 조직 간에 패싸움이 있었고 우리의 여행은 참담한 기억을 남기고 끝이 났다. 출발의 역순으로 귀경하는 길에 우리는 서로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 사건 이전까지 쥐노릇 졸개노릇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더더군다나 무력의 위협에 무릎 꿇은 적이 없었던 나는 한동안 많이 괴로워했었다.

「맞아 죽더라도 싸워나 볼걸.」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사건 이후 아직까지 무릎 꿇은 적이 없다.

그때 현장에 함께 있던 친구들과는 자연히 멀어졌다. 서로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 창피해서일까?

태안 기름 유출 사고는 말끔히 치유되었지만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만리포 사건은 아직도 낯 뜨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못 다 갚은 빚, 등록금

트레킹코스로 개발된 길을 걷다 보면 나와 비슷한 목적을 갖고 걷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수수한 등산복 차림에 크지 않은 배낭을 메고, 꾸준함을 무기 삼아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 어쩌다 세 사람이 넘는 이들이 무리 지어 걷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일행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드물게 혼자서도 걷는다.

나는 해파랑길 770km 중 600km(집사람 500km, 아들 50km, 친구 50km)를 둘이서 걸었고 170km를 혼자 걸었다.

함께 걸을 때 좋은 점은, 장시간 걷기에서 오는 무료함을 달랠 수 있고, 걷고 쉬는 호흡을 일정하게 가져가 무리하게 걷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위험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배가되고, 숙박이나 식사 시에 선택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의사결정을 할 때 완벽한 의견 일치를 필요로 하는 어려움이 있고, 걷기의 가장 중요한 즐거움 중 하나인 혼자만의 정신세계 여행이 동반자로 인해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다.

따라서 장시간 함께 걷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내가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상대방도 나와 같은 양보와 배려를 해주면 금상첨화). 그런 면에서 가족인 집사람과 아들은 당연히 합격 수준이다. 그런데 친구(이하 DS)와 함께한 해파랑길 50km는 어떠했을까?

DS와 내가 해파랑길을 찾은 것은 2019년 4월 말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점인 삼척시 맹방해변까지는 대중 교통수단으로 이동하고 동해시를 거쳐 강릉항에 이르는 110km를 3박 4일간 걷기로 하였다. 출발 전에 비 예보가 있었지만, 나의 걷기 경험과 DS의 강한 체력을 믿고 강행하기로 하였다.

DS는 운동이 직업이라 할 정도로 다양하고 오랜 운동 경력을 갖고 있었다. 소싯적 배운 태권도가 수준에 올라 태권도 도장도 운영했었고, 쇼트트랙 서울시 장년부 대표로 전국체전에 참여한 경력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90년대 어느 해인가는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마라톤 대회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본인의 주장도 있고, 최근까지 산악자전거 매니아로 전국을 누빈 것도 모자라 일본 원정 라이딩을 하기도 했었다.

첫날, 새벽부터 서둘러 고속버스를 타고 삼척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맹방해변에 도착한 것은 10시, 그때부터 8시간 이상을 걸어 동해역 앞에 있는 여관에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우비와 우산이 있었지만 바닷가에서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를 제대로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코스가 비교적 평탄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첫날은 26km를 걸었고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무용담도 나누고 성공을 자축하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간간이 비는 왔으나 전날보다는 양이 적어 한결 수월하게 걷기를 시작했다. 추암해변을 지나 망상해변까지는 무난했는데, 망상해변부터 DS의 발놀림이 이상해졌고, 오래지 않아 언덕길을 내려갈 때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연히 걷는 속도가 느려졌고 휴식시간도 잦아졌다. 본인 말로는 아침부터 발목 통증이 있었는데 참아가며 걸었고 오래전 쇼트트랙을 하다가 부상 입은 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목적지인 옥계시장까지는 아직도 10km 가량을 더 걸어야 하는데 이용할 교통수단도 없고 쉬어갈 마땅한 장소도 없는 험한 곳이라 난감하기만 했다. 쉬엄쉬엄 천천히라도 걷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DS는 고통을 참아가며 10시간 이상 동안 25km를 걸어서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두워져서야 찾은 숙소를 나와서 저녁식사를 하며 에너지 보충을 하고 술도 한잔 하고 싶었지만, DS의 몸상태로 식당까지 걸어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배달음식으로 간단히 때우고 일찍 잤다.

다음날, 원래 계획은 옥계해변·정동진을 지나 안인해변까지의 23km를 걷는 것인데, 그중에 해파랑길 50개 코스 중 코스 난이도가 가장 높은 36번 코스(9.4km)가 포함되어 있었다.

DS는 숙소를 나서며 더이상 걸을 수 없음을 선언했고, 가장 가까운 시간에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표를 샀다. 나는 서울에 가서 침 맞고 잘 쉬라는 말을 건넸고, 이후 2일간 홀로 걷기 끝에 최종 목적지인 강릉항에 도착하는 일정을 마무리했다.

나와 해파랑길 500km를 함께 걸은 집사람은 누가 봐도 허약체질이다. 키 160cm에 몸무게 44kg. 그래도 함께 20일 가까이를 걸었지만 낙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낙오하지 않는 비결은 간단하다. 힘들면 쉬어가고(하루를 걷지 않고 쉰 적도 있음), 걷지 못할 상황이 되면 계획을 변경·축소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종료하면 된다. 낙오는 전체의 움직임에 동참하지 못하고 뒤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낙오 또한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DS는 낙오를 했다.

DS는 보성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1967년에 만나 2020년 현재까지 53년을 친구로 지내고 있다.

DS는 나의 특수과목 선생님이기도 했다. 술, 담배, 여자, 바둑, 당구 등 현존하는 온갖 잡기를 한 분의 선생님에게서 배웠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DS에게 갚지 못한 빚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2/4분기 등록금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 3/4분기 고지서까지 나왔을 때, DS는 자신이 납부해야 할 3/4분기 등록금으로 나의 2/4분기 등록금을 대신 내주었다. 우리집에서 해결해 줄 때까지 둘은 3/4분기 등록금 미납자 명단에 올라 특별관리 대상이 되어야 했었다.

친구이고 선생님이면서 채권자인 DS가 낙오한 것의 배후에는 「나는 완주했고 너는 낙오했으니 내가 너보다 낫다」는 나의 비뚤어진 우월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체를 움직여 DS의 낙오를 확정짓는 죄를 지은 것이다. DS가 우천과 부상으로 걷기 힘들어했을 때, 속도 조절이나 휴식시간 연장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도 계속 힘들어하면 일정을 단축하거나 종료시켜 낙오로 망가질 DS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통 큰 배려가 있었어야 했다.

DS에게서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데 배울 기회가 더 있을지는 의문이다.

「제멋대로, 되는대로 사는 낙천적 생활」을 모토로 하여 살고 있는 DS는 지난 해파랑길 걷기가 화제에 오르면 「남구만의 시조」를 읊으며 낄낄댄다. (절룩거리며 고통스럽게, 동해 심곡 약천마을을 지나며 급하게 화장실을 빌어 쓴 곳이 「약천 남구만」의 사당이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어머니의 추억 지키기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시작,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다를 따라 걷는 해파랑길 770km. 발 닿는 곳곳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바다, 모래, 자갈, 암석, 나무, 숲 등의 자연은 계절, 날씨, 접근방법·시각, 조망위치·범위 등의 조건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비치곤 한다.

해파랑길 50코스 중에서, 접근이 쉽고 가까이서 볼 때, 바다와 암석이 만들어 낸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삼척 구간 30코스에 있는 용화·장호해변이지 싶다. 투명한 바닷물, 수면 밑에서 시작해서 수면 위로 우뚝 솟은 바위들,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용화·장호해변이었다.

2017년, 90세의 어머니, 환갑이 넘은 아들, 그 아들의 50년지기 친구, 3인이 일행이 되어 어머니가 늘 다시 가고 싶어 하시던 그곳을 1박 2일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어머니는 여행 중 추억에 잠기기도 하시고 수다스럽게 많은 말씀도 하시며 즐거워하시고 만족해하셨다. 동행이 되어, 어머니 대화 상대도 되어주고, 어리광도 피워준, 재간 많은 친구 DS가 지금도 고맙다.

어머니는 1928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출생하셨고, 중국 용정에서 성장하셨다. 용정 광명 여학교 졸업 후 해방과 함께 서울로 이주, 1948년 아버지와 혼인하셨다.

용정에서 대지주로 많은 부를 쌓으셨던 외할아버지는 중국의 공산화가 시작되자, 말을 타고 하루 종일 가도 땅 전체를 볼 수 없다던, 그 많은 재산을 제대로 처분도 못 하고 온 가족이 도망치듯 용정을 떠나 서울로 오시게 됐다. 막상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남아있는 재산이 거의 소진된 듯했다. 부잣집 셋째 딸로 호강만 하시다가 갑자기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상황이, 20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되신 이유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상공부 공무원으로 계셨고, 1930년대 말부터 서울에서 생활하셔서 서울에 기반도 있는 상태였었다.

우리 세대 대부분의 자식들이 지니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공통된 기억은 희생, 고통, 눈물, 죄스러움, 후회 등의 단어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가장에 대한 원망도 크셨겠지만 우선 4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는 것이 당면과제였고, 많은 부분을 어머니 홀로 감당하셨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말까지 15년간,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생활까지 무탈하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희생 덕이라 생각한다.

그 어렵던 기간 동안 나는,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일들을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말썽꾸러기, 싸움꾼이었던 나는 중학생 이후 어머니가 기억하실만한 사고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문제를 일으켜도 무조건 내 선에서 끝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문제가 커지기 전에 알아서 마무리 짓곤 했다.

어머니께서 당신이 마주하고 있던 「답답하고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지실 때면 종종 어릴 적 중국 용정에서의 생활을 되뇌이곤 하셨다. 집은 러시아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규모가 크면서 냉·난방이 잘 되어 쾌적하였고, 승용차와 마차가 있었다고 하셨다. 운전기사, 마부, 정원사, 찬모, 침모 외에도 허드렛일 하는 사람 여럿이서 집안일을 도왔고, 많은 식구들이 먹는 음식은 부족함이 없도록 손수레나 박스째로 날라 저장 창고에 보관했는데 그중에는 귤이나 바나나 같은 남방과일도 있었다고 했다. 특히, 「광명여학교」에 재학 중에, 부잣집 딸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일들에 대한 말씀도 많이 하셨다.

중국이 개방된 이후 용정에서 서울로 다니러 오신 친지 분들을 만나신 후에는 용정의 집과 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많이 궁금해 하셨다.

2011년 6월, 56세 아들은 83세의 어머니를 모시고 백두산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다. 연길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고, 용정에서 윤동주 사적지 탐방 후 다시 연길로 나와 귀국하는 3박 4일의 짧은 여정이었다.

이 여행을 계획한 목적은, 어머니가 백두산에 오르셔서 천지 물과 북한의 산, 만주벌판의 숲을 보시게 하는 것 이외에도, 용정에서 자유시간을 얻어 전에 사시던 집도 찾아보고, 용정의 랜드마크인 용드레 우물, 다니시던 광명여학교에도 가서 추억에 잠겨보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길지 않은 자유시간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시느라 어머니는 무척 힘들어하셨다. 여름철이었음에도 계속 한기가 느껴지신다며 내 손을 꼭 잡곤 하셨다.

더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 용드레 우물에서 시작하여 방향을 잡아 찾아간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광명여학교는 해방 이후 인근 5개 학교와 더불어 남녀공학인 대성중학교에 통폐합되었다가 이후 교명을 용정중학교로 바꿔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인천행 비행기 안에서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가 꼭 잡으시던 것은 내 손이 아니라 소중한 과거의 추억이었고, 느끼시던 한기는 그 추억이 훼손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진즉에 사라져서 볼 수 없게 된 옛집과 모교가, 어머니의 추억을 고스란히 지켜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무척 깔끔하고 부지런하신 분이셨다. 또한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경우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어머니 주변은 늘 깨끗했고 해야 할 일이 뒤로 미뤄지는 적이 없었다. 아주 맑은 물과 같으셨다.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

(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따르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 기준에서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지저분하고 게을렀던 것 같았다. 당연한 결과로 어머니 기대에 못 미칠 것이 확실한 아파트 경로당 같은 장소에 나가보신 적이 없었다.

1983년 가난한 집 장남과 결혼한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어머니를 한집에서 모셨고, 집에서 어머니 임종까지 지킨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다.

어머니는, 치매 초기 증상으로 기억력은 많이 쇠하셨어도, 2019년 9월 23일 대동맥 판막 협착증 진단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게 사시려고 노력하셨었다.

병원 입원 경험이 전혀 없었던 상태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입원하셨는데 병원 생활에 적응을 못 하셔서 조기 희망 퇴원하셨다가 집에서 임종하셨다.

가난, 빛과 그림자

해파랑길 포항 구간, 구룡포항에서 호미곶을 지나 영일만 안으로 들어와 걷다 보면, 바다 건너 멀리 포항 영일 신항만이 마주보이는 곳에 길고 넓은 모래사장의 멋진 해변이 있다. 해병대가 상륙훈련장으로 쓰고 있는 「도구해변」이다.

해변에 서면, 순차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상륙정이 함께 어우러져 전진하는, TV 뉴스 속 자료화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해병대가, 정규전 수행능력을 보거나 조직 구성원의 사기·단결력·용맹성을 볼 때, 최고의 군대라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례와 근거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었을까? 이를 우회적으로 설명해주는 말이 있다. 「해병은 지옥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옥을 미리 경험하게 하는 「담금질」이 그 답이다.

나에 대한 담금질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시작해서 대학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돈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담금질.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 내거나, 노력을 통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어린 나에게, 그 담금질의 세월은 정말 피하고 싶은 고통의 연속이었었다. 비참한 의식주, 무너지는 자존심,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은 늘 현실 생활 속에 있는데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라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말씀이 가슴에 와닿을 리 만무했다.

힘겹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은 했지만 가정형편이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세월은 흘러 고3이 되었다. 더이상 결정을 늦출 수 없는 선택의 시간에 다다른 것이다. 대학 진학을 해서 눈물겨운 과정을 거쳐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대졸 학력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진학을 포기하고 경제활동을 하며 고졸자로 내 갈 길을 갈 것인지. 대학 졸업 후 얻을 수 있는 가치와 대학 졸업까지의 과정에서 겪을 고통 값의 크기를 수도 없이 견주어 보았지만 결론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1973학년도에 대학 진학을 하려면, 먼저 국가에서 주관하는 대입 예비고사를 치러야 했고, 예비고사에 합격한 학생만이 희망대학에 원서를 내고 대학에서 주관하는 본고사에 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었다. 따라서 고3이 되면 본고사를 치르는 대학에 맞추어 반 편성을 했는데, 편성은 본인의 희망을 참고하되 고2까지의 성적이 주가 되어 이루어졌다. 나는 문과 서울대반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고3 여름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장만 받으면 경제활동을 시작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족이 함께 기거할 공간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잠은 혜화동 로터리에 있던 사설 도서관에서 자고, 끼니는 친구들의 용돈으로 때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다보니 매일 학교 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난생 처음 술도 마시게 됐고, 숙취가 가시지 않아 학교를 빠지는 날도 많았다. 심지어는 예비고사 전 날에도 과음하여 가까스로 시험장에 도착하는 촌극도 벌어졌었다.

고3 여름방학 이후 단 하루도 공부한 적이 없던 나는, 명문대 합격 인원 숫자에 민감하셨던 담임선생님의 강권에 못 이겨 1차 대학 응시는 했으나 당연히 낙방했고, 친구가 사온 입학원서 덕에 2차 대학에 응시했고 합격했다.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단지 불편함일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졌고,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를 거머쥔, 성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상적인 말이다. 나도 생각을 바꾸어 이 악물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1차 대학에 합격했으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지독한 가난을 겪은 내가 생각하는 가난은 다르다.

「가난은 부끄러움이고 죄악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매우 치명적인 질병이다」

가난은 「불편함」 따위의 감상적 수사로 표현될 수 없는 지독스런 병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이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만약에 병에 걸렸으면 빠른 시간 내에 고쳐야 한다. 병에 걸린 상태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게 된다.

이 병의 또 다른 패악은, 쉽게 대물림 된다는 것과 주변이 함께 고통을 겪게 되는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다. 금수저 흙수저 얘기나 보증서고 함께 망한 얘기들이 그것이다.

중학생 시절 교회 다닐 때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선도 만들고 악도 만들어 세상을 이토록 복잡하게 하셨을까? 전능의 범주에 악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능력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였었다.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것과, 인간이 절대선과 절대악을 구분할 수 없듯이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깊은 뜻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수긍할 수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두 맞는 답인 듯도 하다.

내가 겪은 가난이라 함은, 내가 「기대하는 경제 수준과 그에 못 미치는 현실과의 괴리」를 달리 표현하는 방법이었고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내가 겪은 가난이 죄악이고 병뿐이었다면, 내가 가난을 통해 얻은 소득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해병이 살아 돌아온 지옥이 해병을 강하게 만들었다고 이해된다면, 나의 가난도 달리 조명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경제적 어려움을 통한 담금질은 학창시절 이후의 나를 경쟁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의미를 알기에 우산도 미리 준비했고, 고통을 알기에 최선과 차선을 달리 선택해야 하는 상황판단도 할 줄 알게 되었으며, 끝을 알기에 두려움 없이 대응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린 시절 가난의 그림자 속에서 살던 나는, 지금은 가난의 빛을 받으며 살고 있다.

Ⅱ. 세월의 보초

군가 : 세월의 보초                      

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

그 누가 싸움을 좋아하랴만

불의 보고 피한다면 사내 아니다

꽃다운 청춘을 나라에 바쳐

이슬처럼 사라진들 원이 있으랴

누구 하나 우리 마음 몰라주어도

너와 나는 세월을 지켜가리라

고등어 가시와 형사 콜롬보

집사람과 길 걷기에 나서면 늘 신경 쓰이는 것이 숙소다. 혼자 걷거나 일행이 남자라면 걷기가 끝나는 곳에서 가까운 숙박시설을 이용하면 되지만, 집사람과 함께 기거할 숙소는 화장실과 침구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가급적 출발 전에 깨끗할 것으로 여겨지는 곳을 예약하려 하지만, 예약이 여의치 않거나 일정의 변화가 생기면 현지에서 적당한 숙소를 찾아 헤매야 한다.

숙소만큼은 아니지만 저녁식사의 선택도 매우 중요하다. 하루 종일 걸어 고갈된 에너지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으면서 소화 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어야 하고, 식당의 위치도 숙소와 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강릉 구간, 강릉항에서 출발하여 경포대·연곡해변을 지나 주문진항에 도착해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방은 작았지만 청결했고,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욱이 좋은 점은 호텔 가까운 곳에 다양한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여럿 있어서 골라 먹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불고기·삼겹살에서 벗어나 고등어·갈치·꽁치가 함께 나오는 모둠 생선구이를 맛있게 먹는 행복한 저녁시간을 가졌다.

우리나라 사람들 목에 가시가 제일 많이 걸리는 생선이 고등어라는 통계를 오래전에 보았다. 고등어 밑으로 정확한 순위는 모르지만 꽁치·우럭·삼치 등이 있었다.

고등어 가시가 목에 잘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시 생김이 다른 생선과 다르거나 아니면 특별한 위험요소가 있어서일까? 가시가 목에 잘 걸리므로 특별히 조심해야 하고 가급적 먹지 말아야 하나? 답은 「아니다」이다.

고등어 가시가 목에 걸린 절대 횟수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많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고등어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많이 잡혀 값도 싸고, 맛도 있어 많은 사람이 자주 먹다 보니, 목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형사 콜롬보」는 아주 재미있게 본 미국 드라마 중 하나이다.

대학 시절 KBS에서 주말에 상영했는데 추리극의 요소를 갖춘 수사극이어서 눈으로 보면서 머리 회전도 함께 해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매회 비슷한 Format으로 드라마가 꾸려졌는데, 높은 지적능력을 가진 범인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하고 증거 조작·인멸을 통해 범죄를 은폐하려 한다. 콜롬보는 살인 현장에 남겨진 증거를 통해 용의자와 접촉, 집요한 질문과 추궁으로 결국 살인범을 손들게 한다.

형사 콜롬보가 국내에 방영되기 전부터 인기를 끌던 우리나라 수사극으로 「수사반장」이 있었다. 최불암 씨가 수사반장으로 주연을 맡았고,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800회 이상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육영수 여사가 최불암 씨에게 전화 걸어서 「극 중에서 담배를 적게 피우세요, 담배 피는 장면이 나오면 대통령도 담배를 꺼내 뭅니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일화라든지 출연 수사관을 실제 경찰로 오해하여 어설픈 행동을 하다 검거된 범죄자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온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던 프로그램이었다.

그 시절 자조적인 농담 하나를 소개해 본다.

「우리나라 수사력은 미국 수사력보다 한 수 위다. 콜롬보는 살인자가 누군지 다 알면서도 범인 체포까지 1시간 30분(드라마 러닝타임)이나 걸리는데, 최불암은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 1시간도 안 돼서 범인을 잡는다」

1973년에 시작한 대학생활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데모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려는 독재정권의 휴교령·위수령 등으로 비정상적으로 돌아갔었다. 학교를 갈 수 있는 날보다 학교 문이 닫혀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휴강을 밥 먹듯 했고 시험은 곧잘 리포트로 대체되곤 했다.

군사정권은 그들의 목표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유신헌법 제정의 명분을 쌓고 법적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제한·박탈하는 방법에서, 불의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열망을 잠재우는 수단에서,

「고등어 가시」와 같은 통계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거나, 「드라마 러닝타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통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국민들을 호도하였다.

나는 국가권력의 정당하지 못한 행태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했다. 데모대의 꽁무니에 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어찌 보면 비겁했던 행동들이 전부였었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따로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최근에 TV채널을 돌리다 보면 과거 드라마를 종종 볼 수 있다.

「형사 콜롬보」, 우리나라 수사력이 미국의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던 드라마.

내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지 지금 봐도 재미만 있다.

장발, 미니스커트

1973년,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그 해, 정부는 경범죄 처벌법을 개정, 장발과 저속의상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1971년 퇴폐 풍조 단속에 이은 조치다.

기록에 의하면 1973년 한 해 장발단속으로 12,870건이 적발되었고, 나도 적발 건수에 일조하였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외관이 두발 길이로 구분되던 그 시절에 대학생이 머리를 기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장발을 소위 「노는 놈들의 상징」이나 「풍기문란한 족속들의 일탈」쯤으로 여기고, 모호한 기준을 내세워 단속을 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경범죄 처벌법에 정한 장발단속 대상은 「남녀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긴 머리를 함으로써 좋은 풍속을 해친 남자」였다.

남녀 구분만 되면 단속대상에서 제외되는지?

긴 머리의 길다는 무엇보다 길다는 것인지?

좋은 풍속과 나쁜 풍속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이렇듯 명확하지 않은 단속 규정을 보완하기 위해 추가적 기준이 마련되었다. 「옆머리가 귀의 윗부분을 조금이라도 덮어서는 안 되고, 뒷머리는 옷깃 윗부분을 가리지 않는 단정한 상태」

옆머리가 귀를 덮지 않게 귀 뒤로 넘겨놓으면 적발대상이 아닌지?

목이 짧은 사람의 불이익을 구제할 방법은 없는지?

뒷머리를 묶거나 파마를 해 올려놓아도 단속이 되는지?

앞머리는 어느 정도까지 길러도 되는지?

기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보니 단속은 단속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졌고 단속 결과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었다.

게다가 단속경찰은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다녔는데 단속 현장에서 가위나 바리깡으로 즉결 처분을 했다. 거칠게 저항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리깡으로 앞머리에서 뒷머리까지 고속도로를 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표시 날 정도로만 가위로 옆머리나 뒷머리를 잘랐다. 머리 잘리기를 거부하면 경범죄 처벌법 위반으로 즉결심판을 받게 했었다.

한번 걸리면 최소한 몇 달 기른 머리가 송두리째 잘려나가다 보니 단속경찰에게 붙들리기 전에 도망을 쳤다. 어처구니 없는 추격전이 시도 때도 없이 대학교 주변이나 도심 한복판에서도 벌어지곤 했었다.

미니스커트로 대표되는 저속의상 처벌 규정의 대상은 「점잖지 못한 옷차림을 하거나 장식물을 달고 다님으로써 좋은 풍속을 해친 사람」이고 단속기준은 「치맛단이 무릎 위 17cm이상 위에 있는 짧은 치마의 저속한 옷차림」이다. 무릎 시작점도 불분명하고 다리 길이 차이에 대한 고려도 전혀 없다 보니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더군다나 전문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고 형평성도 잃은 기준을 들고 「30cm 자」로 무장한 경찰이 길가는 여성을 잡아 놓고 무릎 위에 자를 들이대는 웃지 못할 풍경이 시내 곳곳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펼쳐졌었다. 단속경찰 중에 여성경찰은 거의 없었는데 적발된 여성에게 하는 권고는 「치맛단을 뜯어 길게 내려라」는 것이었고, 확인은 어려우나 무릎 위 20cm가 넘으면 즉결심판에 회부되는 기준도 있었다고 하였다.

그 시절에는, 지금은 생각하기도 힘든 「보행위반자 계도소」도 설치 운영되었다. 1965년에, 1961년 5·16혁명 이래 견지해 온 「시민 자각과 협조에 호소하는 방법」을 버리고, 「망신 주기를 통한 교통법규의식 고취」로 방향 전환을 하고 만들어진 제도인 듯하다.

인도가 아닌 차도를 걷거나, 차도를 무단 횡단하거나, 보행신호를 무시하다 적발된 위반자는 계도소에서 한동안 억류된 후 풀려났다. 계도소는 통행인이 많은 교차로 옆 인도 한 귀퉁이에 설치되었는데, 말이 계도소지 끈이나 낮은 장애물로 사각형의 공간을 확보하고 보행위반자 계도소 간판만 세워놓으면 그곳이 바로 계도소가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적발되어 갇힌 사람은 한동안 곁을 지나는 통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가, 감시 경찰관의 처분으로 풀려날 때까지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언론에 의해 「짐승우리」·「몽키하우스」 운용, 지나친 인권침해 등의 비판을 받았으나 1975년 이후까지도 이 거친 단속은 지속되었었다.

얼마 전 북경에 있는 인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중국인 친구가 「한국 국민의 교통법규 준수 수준 높음」을 부러워하길래 「보행위반자 계도소」를 말해주었더니 믿지 못하겠다며 농담하지 말라 하더라. 선진 외국에 비해서도 높은 보행자들의 교통법규 의식이 「보행위반자 계도소」운용 덕만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혹자가 이야기하듯 장발이나 미니스커트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 새로운 시대를 찾아가는 젊은이들의 열망이었다는 거창한 해석이나, 단속기준의 모호성으로 죄형 법정주의가 훼손되었다는 법률적 비판은 무시하더라도, 자유의사를 제한하는 조치들이 당시 젊은이들의 생활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국가 권력에 대하여 불신과 반감을 갖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장교 후보생

1975년 만 20세가 되던 나는 병역문제를 놓고 고민했었다. 군면제나 보충역 해당사항이 없기도 했지만, 편법을 동원해 비켜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현역으로 가는 여러가지 선택을 놓고 많은 생각 끝에, 최종적으로 ROTC 장교로 가기로 결정했다.

ROTC 장교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복무기간이 28개월로 해병대 24개월을 제외하고는 가장 짧았다. (현역사병 36개월에서 교련과목 취득 학점에 따라 복무기간 단축, 해·공군 장교 사병 공히 36개월 이상)

둘째, 중도에 휴학하지 않고 졸업까지 계속 학업을 유지하는 것이 학비 조달에 유리했다. (경제적 사유)

셋째, 장교로 군생활하는 것이, 본인 성격에 맞아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덜 할 것 같았고, 전역 후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한국명 학생군사훈련단, 약칭 학군단은 초급장교 육성을 위해, 대학에서 선발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조직이고, 학군단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되어 복무하게 된다.

학군단원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제반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과 신체검사에 합격한 후 최종적으로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없어야 했다. 신체검사 체중기준(56kg 이상) 미달이 걱정되어 신검 당일 아침에 물을 잔뜩 먹고 체중계에 오른 것 말고는 무난하게 학군단원으로 선발되어 119학군단 학군 15기 후보생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군단 입단식은 학년 시작 전에 있었다. 입단식 행사가 끝나면 선서한 바와 같이 정식으로 1년차 장교후보생으로 살아가게 된다. 어제까지는 일반학생, 오늘부터는 장교후보생 학생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신분이라는 「껍데기 변화」에 걸맞은 「내용 변화」를 기대하며 만들어진 사전교육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AT(Assistance Training)이다.

피교육생인 1년차 후보생들은 AT를 「Animal Training」이라고 새겨 불렀다. 2주 남짓의 훈련을 현역 교관이 아닌 2년차 선배후보생들이 맡아서 했는데, 훈련이 끝난 후에는 훈련의 효과를 쉽게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변화를 접할 수 있었다.

우선, 외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머리카락은 삭발을 갓 벗어날 정도로 짧아졌고, 얼굴은 검게 그을렸으며, 두 눈은, 스스로는 초롱초롱하게 변했다고는 말하지만, 무언가에 쫓기는지 불안해하며 끊임없이 좌우로 돌아갔다. 목과 허리는 어색하게 꼿꼿해졌으며, 주먹에는 피딱지로 보이는 붉은색이 비쳤고, 겉으로는 알 수 없으나 궁둥이와 허벅지에는 검푸른 멍이 잔뜩 자리 잡게 되었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않는 변화였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상황 인지능력이 대폭 향상된 것이었다.

수학시간에 배운 1과 2의 차이 말고 더 엄청난 차이가 두 숫자 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년차와 2년차)

시간 개념의 상대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으며,

자신이 알고 살던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음도 두 눈으로 확인했고, 한민족이라 모두가 비슷비슷할 것이라던 생각은 생각지도 못한 인간 군상과의 만남 속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게다가 같은 말도 억양과 말하는 사람·시점·상황 등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학군단에서 제공하는 군사교육 내용은, 사관학교 교과 중 초급장교에게 필요한 것을 축소 요약한 것으로 군인 기본교육·지휘통솔·전투·전술·화기 등이 있었다. 학기 중에는 학교 내에 있는 강의실·운동장에서 교육을 받았고, 여름방학에는 군부대에 입소하여 병영생활과 실습 위주의 집중훈련을 받았다.

학군단의 교육은 현역 장교로 구성된 전문 교관과 조교가 맡아하는 「정규교육」이 주된 내용이 되고, 따로 명칭이 주어지지 않아 내가 자의적으로 이름 짓는다면, 2년차 선배가 하는 「지도교육」, 동료들이 보직을 받아 역할을 담당하는 「역할교육」, 스스로 반복 숙달하는 「자기학습」이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선배가 하는 「지도교육」에 대하여는 할 말이 많다.

지도교육을 달리 말하면 「후배 군기 잡기」다. 단지 먼저 경험했다는 이유 하나로 후배들을 닦달하고, 괴롭히고, 몰아세우는 행태에 교육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이다.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군기 잡히기 싫으면 학군단을 그만두어야 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이목도 있고, 이미 교육 받은 세월이 아까워 참고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각 대학 학군단에는 군기잡기와 관련된 전통이 있었다. 내가 속했던 119학군단은 타 학군단에 비하면 양반 중의 양반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군기 잡히기를 거절했다. 지시에 순응하지 않았고, 위협을 우습게 알았으며, 구타는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2년차였던 고등학교 시절 선배가 나름 회유해 보기도 했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갈 때까지 가야한다면 끝까지 가보자」라는 나의 우려 섞인 각오와 달리 여름방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도교육의 강도는 대폭 약해졌고 나는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2년차 선배들이 임관하여 나가고 내가 2년차가 된 후 선배 노릇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1년차들에게 단 한마디도 건넨 적이 없다. 가르쳐줄 내용도 없고, 선배라고 나서기도 싫었으며, 잘못하다 개성 강한 후배를 만나 봉변당하기는 더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77-0102X. 내 군번이다. 77은 임관년도인 1977년을 말하는 것이고 102X는 1977년 임관한 동기들 중에서 후보생 시절 성적으로 나의 위치를 말해주는 석차다. 임관동기가 3500명 내외이니 上中下로 나누면 上에 해당한다.

성적은 上이었지만 후보생 생활은 下였다고 생각된다. 선배들 눈 밖에 난 재수 없는 후배 역할 말고도, 우리를 담당하시던 현역중대장 조 소령님 심기도 여러 차례 건드렸었다. (통금있던 그 시절, 새벽녘에 비상연락을 받고, 학교 주변 파출소에 학군단복 입은 채 억류돼있던 나를 2회에 걸쳐 구출해 주셨다) 「조정빈이 꿈에 나타날까 겁난다」고 우리 동기들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후보생의 완성은 임관이다. 다행히 아무 사고 없이 임관이 됐다. 이 자리를 빌어 늦게나마 나의 옹졸함과 무모함으로 마음 고생하셨던 선배님들과 조 소령님께 죄송했었다는 말씀을 올린다.

후보생 시절 여름방학에는 군부대에 입소하여 하계병영훈련을 한 달씩 받았다. 2년차가 되어 안동 36사단에서 훈련받던 중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어머니 유품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버지에게 보낸 유일한 편지 전문을 소개해본다.

아버님

무더운 날씨에 편찮은 곳 없이 안녕히 계신지 멀리 떠나온 불효자식은 염려가 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몸 건강히 아무 사고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세어진 머리를 생각할 때, 아버님의 남모르는 고생과 가족들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생각할 때 저는 빨리 사회에 나가 아버님의 역할을 제가 대신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 길어야 삼 년 반입니다. 그때까지만 고생을 하시면 더 이상의 고생을 아버님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고생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제가 모든 것을 맡아 아버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버님, 건강을 생각하셔서 과음을 피하십시오. 특히 어머님이 싫어하시니 가능하면 약주 드실 좌석을 피하십시오. 가족들의 아버님에 대한 생각은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좋은 분 훌륭하신 분이란 것을 생각하시고 가족들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회피하십시오. 제가 이렇게 쓰는 것은 제가 불효란 것을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려는 노력이란 것으로 생각하시고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편지 이후에는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편지를 않겠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아버님의 슬하로 돌아갈 날까지 몸 건강히 계십시오.

불효자 정빈 올림.

술, 반백 년의 인연

「걷기 여행」도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Plan-Do-See의 과정을 거친다.

행선지와 일정이 정해지면 Plan의 절반 이상은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거리를 일정에 맞추어 나누고, 기본 사항 준비, 돌발 변수 예측, 코스별 고려사항 점검 등이 겹쳐지면 전체 일정 Plan은 완성된다. Do는 Plan에 따라 일정 내내 진행되는 것이고 See는 귀환 후에 여유를 갖고 이루어진다.

Do가 진행되는 매일 매일에도 Plan-Do-See가 있다. 첫날 전체일정 Plan에 맞추어 Do가 끝나면 대개 저녁시간이 되는데, 식사를 하며 그날의 Do를 See하고 다음날의 Plan을 점검하게 된다. 그러므로 걷기에서 매일의 저녁 식사시간은 영양 보충 이외에 중요한 일도 해야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나는 걷다가 맞게 되는 저녁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항상 식사에 술을 곁들였다. 집사람도 처음에는 「많이 걸어 힘이 많이 들었는데 꼭 술을 마셔야 하느냐」며 편치 않게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나의 음주행각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나는 무슨 이유로 힘들게 걷고 난 후 먹는 저녁식사에 술을 곁들였을까?

첫째, 술을 곁들이면 충분한 양의 식사를 여유있게 할 수 있다.

적어도 8시간 많게는 10시간 이상을 걸으며 사용한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칼로리 높은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야 하고 먹은 음식이 천천히 소화될 수 있도록 시간 여유를 주어야 하는데 이 역할을 술이 하게 된다.

둘째, 술을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는 보다 솔직할 수 있다.

걷는 일은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몸 상태나 부상 여부가 Plan과 Do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 그런데 자칫 미안함이나 자존심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거나 은폐될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이때 이를 효율적으로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음주 중에 나누는 진솔한 대화이다.

셋째, 술과 음식을 함께하는 비교적 「긴 식사」는, 평상시의 생체리듬이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많이 걷고 나면 몸이 피곤해져 쉬고 싶고 자고 싶어진다. 그러나 몸의 요구에 따르다보면 초저녁부터 자게 되고, 그렇게 자고나면 너무 이른 새벽에 일어나게 되니, 생체리듬이 깨지고 다음 스케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하며 자는 시간을 늦추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긴 식사」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걷기 일정 중 먹는 저녁식사에는 늘 술이 곁들여진다. 잘 걷기위해 술을 마시는 건지, 명분있게 술을 마시기 위해 걷는 건지 판단이 잘 안 서기도 한다. 조금 더 걷다보면 알 수 있을까?

술과 인연을 맺은 지 어언 반백 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술과의 첫 만남」에서 술이 내게 준 자극과 그에 따른 내 몸의 변화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제사 없는 집에서 자라다 보니 음복할 일도 없었고, 아버지가 집에서는 술을 드시지 않았기에 주전자를 들고 술심부름 한 기억도 전혀 없었다. 술에 관한 한 그야말로 virgin인 상태에서 술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었다.

첫 잔의 느낌은 따스함이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따뜻한 기운이 복부에 전해지자 이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왔다. 한두 잔을 더 하자, 잔을 쥔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반병을 넘어가니 동공이 풀리는지 눈이 침침해지고 미간이 벌어지며 눈꼬리가 처짐을 느끼게 됐다. 한 병을 다 마시자 혀가 꼬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지면이 일어나고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몸이 마구 비틀거렸다. 친구의 부축을 받고 술자리를 떠난 것이 기억의 끝이었고, 깨어보니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이어진 불쾌한 메스꺼움과 골이 파이는 듯한 두통. 술과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듯, 헤어질 때의 아픔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술을 마셔온 사람이라면 술에 얽힌 기막힌 사연 하나 쯤은 가지고 있다. 나도 그렇다.

친구 DS의 군입대 송별 모임을 위해 7명의 친구들이 안국동에 있는 DS 자취방에서 만났다. 미리 준비한 고량주 20병을 비우고 인근 가게방을 순례하며 수거한 고량주 10여병을 마저 마신 후 술판이 끝났다. 자취방을 나선 일행 중 누군가가 노상방뇨를 하다 방범대원과 시비가 붙었고 DS 포함 2명이 구류처분을 받아 종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다. 당연히 DS는 군입대가 늦춰지고 송별회 다시 하자는 말도 못 한 채 쓸쓸히 홀로 입대하는 것까지가 1막이다.

2막은 친구 KK 입영 하루 전에 가진 조촐한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모임 참가자는 「부선망 독자」로 짧은 현역 생활을 끝낸 DS와 KK 그리고 나 세 사람이었다. DS 송별회의 나쁜 전례가 있었으니 오늘은 적게 마시고 일찍 헤어지자고 약속했고, 명동에 있는 사진관에 들러 어깨동무하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간단히 마시자는 약속대로 인근 튀김집에 갔는데 간단치 않게 술잔이 오가다가 끝내는 판이 깨지는 소동이 벌어지고, 경찰이 왔을 때 미처 피하지 못한 KK는 명동 파출소로 연행되어 갔다. DS와 나도 헤어졌는데, 나는 다음날 입영해야 하는 KK가 걱정이 되어 KK집을 찾아가 어머니에게 상황을 알려드렸다. 다음날 KK는 어머니 덕에 중부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나 무사히 입영했다.

그리고 며칠 후 DS를 만나 그날의 자세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와 헤어진 DS는 필동에 있던 수경사까지 걸어가 수경사 헌병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중부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그곳 유치장에서 KK와 만났다. KK는 원망의 눈초리로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거 봐. 내가 뭐랬어!!」

초라한 군생활 성적표

광주 보병학교 교육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배치받은 부대는 6군단 예비사단인 26사단 75연대 1대대 1중대였다. 3번 국도를 따라, 사단사령부는 의정부시, 연대본부는 동두천시, 대대는 연천군 한탄대교 부근에 위치했었다.

1977년 6월말, 1소대장 부임 당시 우리 중대는 한탄강 유원지 건너편 방어진지에서 참호와 교통호 일부를 콘크리트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바뀐 군 작전 개념에 의하면, 북괴군의 기습공격으로 전방사단이 무너지면 예비사단이 전방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전방사단은 예비사단 후방으로 후퇴·재편·공격준비를 하고, 예비사단은 이미 구축한 현재의 방어진지에서 적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 전개되면 지금 작업 중인 방어진지가 우리들의 무덤이 되는 것이었다.

부대 내에는, 2년 전인 1975년 월남이 패망할 때까지 월남에서 실전을 경험했던 다수의 간부가 있어 그들의 무용담을 접할 기회가 적지 않았고, 불과 10개월 전인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발령된 데프콘2(전쟁 돌입 상태)는 병사들 대부분에게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또한 부대가 집합·해산할 때는 항상 호전적인 구호를 제창해 적개심을 키웠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전쟁이 멀지 않아 보였다.

소대장 재임 중에 전쟁이 터진다는 전제 하에 목표를 세웠다.

「우리 소대와 북괴군 1개 소대가 맞붙으면 무조건 우리 소대가 이긴다」

이기기 위해 소대장인 나는 병사들을 지휘·통솔하기 위한 군사지식과 전술능력 이외에도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 필요했고,

병사들에게는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격술과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훈련이 강력히 요구되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징집에 응한 병사들에게 거창한 군생활 목표나 목적이 있을리 만무다. 군대에 가기 싫었지만 안 갈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온 것이고,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건강하게 고향 앞으로 가는 것이 군생활의 목표요 섭리라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소대장이 새로 와서 느닷없이 「전쟁」이니 「북괴군 1개 소대」니 할 때는 우스갯소리로 들렸으나, 이어지는 행동을 보자 고달픈 군대생활이 예감되었고, 그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특히 주·야간 사격 훈련은 성과 위주로 무자비하게 이루어졌고, 전투·전술훈련도 외상없이 현찰로만 돌아갔다. ROTC 출신 장교에 대한 푸근한 기대가 깨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육사나 3사 출신과 비슷하기만 해도 좋겠다 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전쟁이 났다면 우리 소대가 이길 수 있었을까?

총기자살 1명, 탈영 2명, 탈영미수(사단 위수지역 내) 다수.

내가 소대장하던 2년 동안 우리 소대에서 발생한 사고다.

포탄 떨어지는 전장에서 난 사고도 아니고, 철책 넘나드는 특수부대에서 난 사고도 아니고, 3,000명 연대나 700명 대대에서 난 사고도 아닌, 총원 40명의 일반 소총 소대에서 난 사고다.

제대 신고를 마친 소대원이 나의 면전에서 말하길 「소대장님 사회 나가서 나를 만나게 되면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릅니다」

제대를 앞둔 고참 병장이 술 한잔하며 말하길 「결혼해서 아내가 애를 낳게 되면 옆에 있다가 사내애면 젓가락으로 눈을 찔러 병신을 만들 겁니다. 아들에게까지 이런 군대 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답은 「이기지 못한다」이다.

소대원들의 몸과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데, 소대장 혼자 하는 「전투력 강화 훈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자의적·독단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조직원들의 수용 능력이나 파급 효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목표만을 향해 치닫다가, 참담한 결과를 맞은 「실패한 리더」.

나의 초라한 군생활 성적표이다.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과욕과 무지로 결과를 그르친 유사한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958년 모택동은 중국을 산업화시켜 경쟁력있는 강대국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거듭된 무지한 정책으로 대 흉년이 오고 3600만 명이 굶어 죽게 되어 1959년 모택동은 국가 주석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1961년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무지한 정책 중 하나를 소개하면,

모택동이 농촌 시찰 중 곡식을 축내는 참새떼를 보고, 참새는 해로운 조류니 박멸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북경에 참새 섬멸 총지휘부를 설치하고, 지역별로 목표를 할당, 전 인민이 하나 되어 참새 섬멸에 힘쓴 결과 1958년 한해에 2억1천만 마리의 참새가 중국 대륙에서 사라졌다. (참새와의 전쟁에서 몽둥이·새총·포획망·독극물 이외에도, 참새가 쉴 수 없게 하여 죽이는 기발한 방법도 동원)

1959년이 되니 참새가 사라진 들에는 해충이 창궐하게 되었고, 다른 요인이 겹치면서 대 흉년의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참새를 쉬지 못하게 하여 죽이는 방법>

  1. 참새가 자주 모이는 곳에 인민들을 위치시킨다.
  2. 북·징·솥·그릇 등을 두드리며 큰소리를 낸다.
  3. 참새들이 내려앉지 못하고 4시간 이상 날다 지쳐 죽는다.

<실패 사례 요약 비교표>

조정빈 소대장 모택동 국가주석
목표 북괴군 1개 소대와 맞붙으면 무조건 싸워 이긴다 산업화를 통해 강대국으로 도약한다
수단 사격술·전투력 강화훈련을 원칙대로 시행 참새섬멸 등 무지한 정책을 전개
실패원인 소대원들의 수용 한계 초과 자연 생태계 파괴
결과 군생활 스트레스 증가로 사고 발생

자살1, 탈영2, 탈영미수 다수

대 흉년 원인 제공

아사자 3,600만명

한탄강 방어 진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답사여행에서 사전 공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그렇게 언급하기 전에도, 여행에 앞서 여행일정을 잡으면서 행선지와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미리 알고 출발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가 신문기사나 방송주제로도 채택되다 보니 여행 이외의 분야에서도 폭넓게 쓰이게 되었는데 요즈음엔 컴퓨터 게임에서도 「아만보」라는 줄임말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아는 만큼 보인다」의 의미를 확장하여 「아는 만큼 성장한다」, 내용을 잡아 늘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목적을 비꼬아 「아는 것만 본다」 등의 아류까지 생겼다.

나도 걷기여행에 앞서 여러가지를 준비한다.

복장이나 배낭 속 내용물을 세세하게 챙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여행일정에 포함된 교통편·숙박시설·식사장소 및 편의시설도 미리 파악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챙기는 준비물은 여행 끝에 가져올 「생각과 느낌」이 담길 그릇이다.

걷기여행 : 걸을 때/떠오르는/생각과 느낌을/풍요롭게 하기 위해/미리 많이 비우고 출발

다른여행 : 보면서 /얻어지는/지식과 정보를/극대화시키기 위해 /미리 많이 알고 출발

그렇게 사전에 충분한 정보나 지식 없이 걷다 보니, 걸으면서 본 것이 무엇인지 여행 중에 파악이 안 돼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찾아보는 수고를 하기도 한다.

강화 나들길에서 만난 「돈대」가 바로 그런 경우다.

섬에서 걷다 보면 쉽게 바다와 만난다.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부분이 해안인데 강화도의 해안에는 늘 돈대가 있었다. 갑곶돈대, 용두돈대, 망양돈대, 장곶돈대, 분오리돈대….

낯선 지명 뒤에 붙어 있어 그 의미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드는 돈대. 돈대라는 꼬리를 출발점으로 강화가 걸어왔던 고단하고 힘겨웠던 역사 속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강화현이라는 지명을 얻은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강화도는 항상 「외세와 그에 맞서는 처절한 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때의 상흔은 지금도 섬 곳곳에 남아있다.

몽고 침입시에는 38년간(1232~1270년) 고려의 임시수도,

정묘호란(1627년) 인조의 피난처,

병자호란(1636~1637년) 조선의 예비수도,

병자호란 이후 한동안(효종~숙종) 북벌전진기지,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서구세력과의 전쟁터,

운양호사건(1875년) 강화도수호조약(1876년) 일본 침략의 빌미.

1636년 병자호란이 나자 인조는 세자빈과 봉림대군·인평대군에게 종묘 신주를 들려 강화도로 피신케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군에 맞서지만 결국 패배한다. 패배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의 인질이 되었고 8년간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후 현종과 숙종에 이르기까지 「청에 대한 복수」, 「북벌계획 추진」을 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것의 일환으로 숙종 5년(1679년), 강화도에 내성·외성·축조와 함께 12진보(鎭堡) 53돈대(墩臺)가 구축된다.

돈대는 강화의 해안에서 주변보다 높아 보이는 곳에 예외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돈대는 돌이나 흙벽돌(塼)을 높직하게 쌓아 올린 구조물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루나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포루 역할을 하는 초소인데, 외부는 그 자체가 성곽이 되고 내부 공간은 군사시설로 이용된다.

좁게는 몇백 평에서 넓게는 천여 평의 규모로, 작은 성(城)인 보(堡)에는 미치지 못하고 군사 요충지에서 군영이 되는 진(鎭)과는 그 역할 면에서 사뭇 다르다.

지금의 군체계로 본다면, 소대 또는 소대 이하의 부대가 맡고 있는 방어 진지와 그에 부속된 참호 정도로 여겨진다.

어찌 보면 소박하고 달리 보면 서글프기도 한 아담한 방어진지다.

2020년 봄,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국민의 일상이 망가지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집사람과 함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학담을 찾아갔다.

지난 걷기 여행 때 강화도 돈대, 아차산 보루를 보고 난 후 군대시절 참호와 방어진지가 떠올랐고, 한번 시간을 내서 가보리라 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를 핑계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새로 난 고속도로와 확장된 도로 덕에 한 시간 남짓 운전으로 학담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과거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만으로 40년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아쉬움이 컸다. 너무 늦게 온 것이었다.

초성리역, 57탄약고, 5사단 검문소, 대구식당, 태광옥, 다정옥, 초성 초등학교. 익숙하던 지명들이 지난 그대로인지는 자신할 수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부대막사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과 26사단이 해체, 타사단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확인되었다.

부대 앞에서 차로 5분쯤 가면 매일 아침 구보 반환점으로 돌던 38선 돌파기념비가 있다. 거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한탄대교, 좌회전하면 참호가 있는 방어진지가 나온다. 방어진지는 한탄강을 사이에 두고 한탄강 유원지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해발고도와 무관하게 높게만 느껴졌다. 방어진지의 전사면에는 1977년 여름에 우리 부대가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만든 2인용 참호들이 늘어서 있었었다.

지금까지도 남아있을까? 용기를 내서 30여분을 찾아 헤맨 끝에 참호를 찾을 수 있었고, 참호 입구에서 음각으로 이렇게 쓰인 표지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준공일자 : 1977. 8. 20
준공부대 : 제5702부대 1중대
대대장 : 중령 손 경 수
중대장 : 대위 천 연 우
소대장 : 소위 조 정 빈

100km 행군을 아시나요

선배 소대장이 전해준 장XX 사단장의 「보병부대 훈련목표」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24시간 내에 100km를 행군 이동하여 48시간 동안 보급지원 없이도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강한 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의하면, 미 제2보병사단(26사단 위수지역 내 동두천에 위치)의 사단장이 「100km 행군」의 무모함과 예상되는 부작용을 언급하며 만류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 사단장 재임 중은 물론 사단장이 교체된 후에도 100km 행군은 계속되었고,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른 부대에까지도 전파 확산되었다.

75년도 월남 패망 그해에 사단장으로 부임했고, 76년도 도끼만행사건으로 전쟁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장사단장은 북괴와의 일전을 늘 염두에 두었고, 유사시 6군단 예비사단인 26사단이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강한 부대」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였다.

실제 병사들 입장에서 보면 하루에 100km를 행군할 기회가 많은 것은 아니다. 연대 훈련인 RCT(Regimental Combat Team)와 대대 훈련 측정인 ATT(Army Training Test)에서 경험할 수 있겠는데 군 생활 기간 중 많아야 4~5회 정도일 것이다.

「거꾸로 매달아도 세월은 간다」는 철학이 군 생활을 지배하던 그 시절 행군 날짜만 따져보면 4~5일에 불과한데 「100km 행군」의 어떤 점이 군 생활 중엔 「걱정거리」, 제대 후에는 「얘기거리」가 되었는지 정리해 보자.

먼저 100km를 무난히 걸으려면 발바닥이 튼튼해야 한다.

발바닥에 문제가 생기면 천하 없는 사람도 계속해서 100km를 걸을 수 없다. 그래서 발바닥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로 나온 것이 「신발 안 신기」다. 당시 26사단 예하 보병부대에서 단기하사 이하의 사병은 영내 생활 중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 밤낮없이 맨발로 살다보면 발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고 나중에는 신발 신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진다.

위생을 고려해서 내무반 출입구에 발 세척장까지 따로 만들어 내무반에 들어갈 때는 발을 씻고 슬리퍼를 이용하여 내무반 침상까지 이동하게 했다.

두 번째는, 48시간 보급지원 없이 전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짊어져야 할 군장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이다.

체력 강화에 앞서 감기 같은 잔병치레를 막기 위해서 여름에 피부가 햇볕을 많이 받는 것이 좋다 하여 취해진 조치가 「하절기 상의 안 입기」다.

「신발 안 신기」대상자는 「상의 안 입기」대상도 되었는데, 이들이 상의를 벗은 상태에서 폐품으로 반납된 바지를 잘라 만든 반바지만을 입다 보니 작업모만 벗기면 새까맣게 그을린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이 된다.

상의를 안 입는 소극적 대책 말고도 「육체미 가꾸기」의 적극적인 대책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근력운동을 위한 도구들이 소대·분대·개인별로 주어지고 만들어졌다. 철봉·수평·벤치프레스·역기·덤벨·아령 등이 제작 또는 구입되어, 중대 막사 앞과 내무반 귀퉁이, 침상 위 개인 관물대를 채웠다. 근력운동의 성과와 휴가를 연계시켜, 근육량이 늘지 않으면 휴가 대상에서 제외되는 가혹한 조치도 병행되었다. 직복근·대흉근·활배근·승모근·이두박근·삼두박근 등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와 어쩔 수 없이 친해져야만 했었다.

그렇게 발바닥과 몸의 근력이 강화되면 최소한의 준비가 끝난 것이다. 기간이 짧아 준비가 미흡한 신병이나 타부대에서 온 전입사병은 어찌해야 하나? 그들도 예외 없이 100km를 걸어야 했고, 사람에 따라서는 다음번 100km를 성공적으로 걷기 전까지 「100km 행군 고문관」으로 불리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었다.

걱정과 공포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100km 행군」날이 다가왔다. 내일의 출발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자는 둥 마는 둥 한 상태에서 기상나팔이 울리고 평시보다 훨씬 이른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식사 후 집합, 군장검사를 마치고 대략 06:00 전후의 시각에 행군이 시작된다.

출발에 앞서 하는 대대장 훈시 속에 인근 부대 100km 주파 기록이 언급되고, 우리는 더 짧은 시간 내에 행군을 끝내자는 대대 참모들의 결기가 모아지면, 「우리는 죽었다」라고 복창을 할 수밖에 없었다.

48시간 동안 보급지원 없이 전투임무를 수행하려면 배낭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배낭 속은 텅 비어 있고 배낭의 형태 유지를 위해 얇은 베니어(Veneer)판으로 틀을 짜서 넣었다. 외부에서 보이는 화기·텐트·우의·야전삽 등은 어쩔 수 없이 가져가야 했기에, 휴대품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러나 무게와 상관없이 낙오의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휴대하는 물건들도 있었다. 행군 중에 쉽게 망가질 수 있는 발바닥·발목·무릎·어깨 부위의 통증에 듣는 진통제, 마지막 구간에서 잠을 쫓아주는 각성제,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 술이 그것이다. 약과 술은 대개 분대별로 준비됐는데, 소주는 물이 들어있어야 할 수통(용량 1000ml) 3~4개에 담겨 운반되었다.

24시간 중에서 중간에 때우는 두 끼의 식사시간, 50분 걷고 10분 쉬는 휴식시간을 제하면 20시간 정도가 남고, 그 시간에 100km를 걷자면 시속 5km 이상의 속도가 유지되어야 한다.

걷기 시작해서 한동안은 시속 6km에 가까운 빠른 속도로 걷지만, 대충 때운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고 때 이른 저녁식사가 끝날 즈음부터는 5km 유지도 힘들어지고, 70km 지점을 넘어서면 피로와 통증으로 4km 이내로 급격히 떨어진다.

졸음·피로·통증이 극에 달하는 마지막 10km 구간에 이르면, 대오가 무너지고 소속까지 뒤엉킨 오합지졸이 되어 부대는 작전 수행 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패잔병 무리가 따로 없을 정도다. 멀리서 동이 터오고 부대 막사가 보이는 마을 어귀에 다다라, 군인가족·가게주인·잔류병들이 도열하여 치는 박수 소리가 들리면, 「100km 행군」이 끝났음을 실감하게 된다.

「군대의 작전 훈련」이 아닌 「걷기와 시간과의 싸움」이 끝나면 2~3일 간의 정비시간이 주어지고, 늘 그렇듯 「인원·장비 이상무」로 보고된다.

졸면서 잃어버린 장비와 물이 찬 무릎, 부은 발목, 곪아 터진 발바닥은 당연히 「이상무」 범주에 묻혀 지나가고, 시간이 가면 소리 소문 없이 채워지고 치유된다.

그렇게 60만 대군은 국방부 시계를 돌리고 돌렸다.

그 시절 부하들이 매일 목청 높여 부르던 최애창 군가 「용사의 다짐(조정제 작사, 최창권 작곡)」을 혼자서 불러본다.

남아의 끓는 피 조국에 바쳐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했노라

눈보라 몰아치는 참호 속에서

한 목숨 바칠 것을 다짐했노라

전우여 이제는 승리만이

우리의 사명이요 나갈 길이다

Ⅲ. 일 중독자, 나는 행복한 사람

이후 몇 차례의 만남이 더해졌고, 나는 「좋은 사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씩씩하게 청혼했다. 「금년 내로 결혼합시다」

  • 심성이 바르고 착하다.
  • 거세지 않고 여자답다.
  • 기본이상의 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
  • 매우 건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장애나 질환은 없는 듯하다.
  • 부모님을 모시고도 살 수 있다고 했다.
  • 소주를 1병 이상 마실 줄 알고 화투도 잘 친다.
  • 나를 사랑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203 포럼

「203 포럼」은 만들어진 지 40년이 넘은 오래된 친목모임이다. 나는 모임이 만들어진 이래 지금까지 203포럼의 회원으로 지내왔다. 이 모임의 회원이 되려면 「삼성그룹 공채 20기 3차」로 삼성에 입사한 후 삼성생명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공채」를 공개채용의 약칭으로만 사용하고 있으나, 예전 삼성에서는 계열사에서 자체적으로 인력을 선발 채용하는 「자체」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룹 주관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하고 교육하여 계열사에 배치하는, 채용의 주체가 그룹이 되어 공동 채용하는 것을 「공채」라 했다. 그러다 보니 공채 면접시험에 한하여 이병철 회장이 면접관으로 나오기도 했었다.

「20기」는 공채가 시작된 이후의 연차이고, 「3차」는 채용연도 중에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받은 회차이다.

따라서 「203 포럼」회원은, 그룹 주관으로 1979년도 선발된 신입사원 중에서 3번 회차(1차 해·공군 장교, 2차 학군장교, 3차 대졸사원)교육을 수료한 사람들이다.

20기 3차 신입사원 입문교육은 1979년 11월 15일 용인에 있는 동방연수원에서 합숙으로 4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교육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죽임을 당한 「10·26 사태」 이후에 시작해서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끝이 났다.

두 개의 비극적이고 역사적인 사건 사이에 교육이 진행되었던 「동방연수원」은 용인 자연농원(현재 에버랜드) 내 제일 깊숙한 산 중에 위치해 있었다. 주변에 다른 시설이 전혀 없고 주거지역과도 많이 떨어져있어 교육생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데는 제격이었다. 교육을 위한 제반 시설도 당시로서는 최고급으로 갖추어져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에도 최적이었다.

연수원에서의 일과는, 새벽 6시에 기상해서 점호와 체조로 정신을 수습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낮 동안에는 다양한 내용의 강의를 듣고 이후 밤늦게까지 분임토의를 하고 토의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을 갖다보니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세상 모르고 주중을 살고나면 주말에는 일요일 오후까지 외출이 허락되었다.

매일 새벽 점호 때마다 느꼈던 초겨울 한기와 발표준비·과제해결을 위해 늦도록 잠을 못 자 강의시간에 쏟아지던 졸음과 싸우면서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입문 교육의 내용을 기억해보면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삼성가족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삼성정신·역사·경영이념·사업내용·관계사 현황 등에 대한 내용 전달을 통해 「삼성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사회인·직장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과 교양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질있는 삼성인」이 되도록 한다.

마지막은, 경쟁사회에서 승자가 될 수 있도록 개인의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능력있는 삼성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던 집중 훈련을 구체적으로 보면 직장인 기본자세, 상황대처능력, 문제해결력, 발표력, 갈등해소, 커뮤니케이션, 인간관계관리 등 이었다.

강의를 맡은 강사진은, 사회저명인사, 분야별 전문가, 유명대학교수, 삼성의 임원·간부들로 구성되어 최고 수준의 강좌를 제공하였다. 삼성의 교육 전문가들로 짜인 교육팀은 엄격하면서도 매끄럽게 전체 교육을 진행하였다. 교육생들로 만들어진 자치조직도 아침 점호진행, 휴식시간 운용, 일과 후 생활들을 맡아 무리 없이 꾸려나갔다.

외부와 격리되어 교육효과가 저절로 커지는 교육장소에서,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과 매끄러운 진행으로 3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마지막 주에는 삼성의 사업장을 찾아서 현장 교육을 받았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사업장을 견학하고, 현지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만나 교류도 하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해보기도 하며 삼성인으로서의 자신감과 긍지를 키워나갔다.

중간에 탈락된 사람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223명의 동기생이 20기 3차로 입문 교육을 마쳤고, 나를 포함한 56명이 삼성생명(당시 사명 : 동방생명)에 배치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삼성 입문 교육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교육에 앞서 나름대로 정리하였던 「다짐」에 더해서 교육이후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다짐 + 변화」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퇴직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 되었고,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다짐」은 교육 받기 전에 지난날을 반성하며 앞으로의 직장생활을 겨냥한 방향설정이었고, 「변화」는 교육받는 과정에서 배움을 통해 얻어진 성과이다.

다짐      1.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2.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변화      1. 주인의식을 갖고 일한다.

              2. 자신감을 갖고 시작한다.

전주제지에서 현장 교육받을 때 있었던 무용담 하나.

낮 동안 빡빡했던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늦은 시각에 숙소인 여관에 들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모처럼 얻은 자투리 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나를 포함한 3인의 술꾼은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하였다.

때는 10·26으로 계엄이 선포되어 22:00 이후에는 통행이 금지된 상태였고 계엄군이 파출소에 주둔하여 경찰들과 함께 순찰을 돌며 질서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술 시작은 통금 전이었지만, 주점과 여관이 가까이 있고 달리기에는 자신있다는 생각에 통금시간을 넘겼다. 술집주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점을 나서자마자 주위에서 순찰을 돌던 현역 계엄군과 술 취한 교육생의 빨리 달리기 경주가 시작됐고, 결과는 2명 연행, 1명 도주 성공으로 끝이 났다.

도주에 성공한 나는 교육진행자에게 상황보고를 했고, 다음날 일정이 걱정된 교육진행자는 전주제지 총무부에 「SOS」를 날렸다.

상황은, 전주제지의 지역사회 공헌도와 총무부서의 문제해결력을 의심받기 직전인, 다음날 아침에야 가까스로 종결됐다.

뒤늦게 돌아온 두 동기들의 무용담은 이러했다.

파출소로 끌려가 캐비넷으로 가려진 간이 유치공간에서 경찰서 이송을 기다리던 중에, 소변이 급하게 마려워 벽을 향해 대충 소변을 보았고 소변이 캐비넷 밑을 통과해 집무공간으로 흘러가자 이에 격분한 파출소 근무자로부터 상응한 조치를 받았노라고.

입문 교육을 마치고 회사 배치 결과를 보니 두 문제 동기 중 한 명이 전주제지에 배치되었고, 발령받은 부서는 총무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입사원 근무수칙

삼성생명 배치 후 첫 발령부서는 개인보험 사업본부 산하 「서울총국 영업과」였다. 서울총국(이하 서총) 영업과가 회사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군조직과 비교해보았다.

육군 육군본부 군/군단 사단/연대 대대/중대
삼성생명 개인보험

사업본부

총국 영업국 영업소
스텝조직 사업부/부 부/과

서총은 서울과 경기북부·강원도에 위치한 영업국(소)를 관장하는 조직으로 군대로 치면 「군」에 해당하고, 타지역에 있는 나머지 5개 총국 전부를 합한 정도의 규모를 갖고 있었다.

서총영업과는 서총의 스텝 조직 중 하나로 산하 영업조직의 판촉과 시장관리를 담당했고 주요업무로 목표부여, 실적 및 효율관리, 평가 및 시상, 판촉시책운용, 영업점 증설 및 통폐합, 영업점장 임면 및 전배, 설계사급여·점포운영비·판촉비 지급 등을 맡아했다.

서총영업과는 과장을 포함하여 1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규모지만 담당하는 일의 중요성은 매우 높았다. 보험매출의 90% 이상이 개인보험에서 나왔고 그중 50% 이상을 서울총국에서 맡다 보니 본사 부서 이상의 주목을 받는 주요부서 중 하나였다.

서총영업과에서 3년 8개월 지내는 동안, 총국장(임원) 4분, 부장 3분, 과장 4분을 상사로 모셨다. 두 분의 총국장님은 후에 대표이사까지 승진하셨고 세분 부장님 모두와 한 분의 과장님도 임원까지 승진하셨다. 당시의 상사분들은 함께 근무하면서 많은 배움을 주셨고, 이후 내가 삼성생명 내에서 성장·발전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어 주셨다.

특히 첫 번째 과장으로 황 과장을 만난 것은 천운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황 과장은 업무지식이 풍부하고 회사 경험이 많아 소위 「일 잘하는 관리자」셨다. 또한 학군 선배이면서 나와의 나이 차이도 적지 않아 상사로 모시는데도 거부감이 없었다.

문제는 나의 거친 행동과 태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맞고 큰 놈 사람 구실 못한다」는 아버지의 양육관 덕에 어려서부터 맞아 본 적이 없었고 군대까지 장교로 다녀오다 보니 기본적으로 사람을 어려워하거나 일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의 당돌함과 무모함을 다듬어 주고 감싸준 사람이 황 과장이셨다.

황 과장으로부터 일을 제대로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전수받고, 한심한 잘못까지 교정받으며 직장 생활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게 되었다.

그 시절,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고 일할 사람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총국이 새로이 출범하다 보니(1980. 02 개국), 개국준비와 개국 초에 기틀 다지는 일의 양이 장난 아니었다. 매일 통행금지 시간을 걱정하며 귀가해야 했고 주말도 없이 일했다. 일 중독자가 되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였고 그렇게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나의 역할이 비중 낮은 허드렛일 처리에서 과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로 바뀌게 되었다.

서총영업과 일의 특성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정확성이다.

하는 일의 대부분이 통계를 기초로 하여 판단되고, 행동으로 이어져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보니, 무엇보다 제반 통계가 정확하게 유지 관리되어야 했다.

둘째는 시의적절성이다.

보험영업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때맞추어 의사결정과 현장지원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때를 놓치고 핑계를 대거나 양해를 구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점포운영비나 설계사급여가 제때에 지급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셋째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총국의 임무는 본사와 영업현장의 중간에서 영업력이 극대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 발생을 사전에 예측하고 조기에 해소하기 위하여, 항상 정보를 수집 관리하고 본사·현장과 소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상사들은 내가 일을 하면서 「정확성」과 「시의적절성」에 기여한 바가 컸다고 생각한 듯했다.

상·하반기 업적평가와 연간 능력평가 결과를 받아보면 항상 우수하게 평가되어 상여금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았고, 1년에 1호봉 승급에 1호봉이 더해지는 특별 승급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3년 3월 입사 동기들보다 1년 먼저 대리로 승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자. 오늘의 문제는 반드시 오늘 해결한다.」                                                                                                                                         – 조정빈 근무수칙 1 –

황 과장 : 옳게 작성된 자료가 잘못됐다고 나와 후배사원을 질책하고 해명도 듣지 않은 채 저녁약속을 이유로 퇴근.

조정빈 : 억울함을 억누르고 후배사원 2명과 함께 화곡동 황 과장집(단독주택) 부근 술집에서 황 과장 귀가 대기.(사모님께 귀가 시 연락할 술집 전화번호 남김)

황 과장 : 귀가는 했으나 연락 없이 취침.

조정빈 : 통금시간이 다 돼가고 황 과장의 상황회피가 의심되므로 후배사원에게 담을 넘을 것을 지시.

모두 : 자정 넘긴 시간부터 황 과장 집에서 2차 회식.

단체 취침 후 익일 단체 출근.

「상사가 싫으면 일도 싫어진다. 상사를 미워하지 말자.」

– 조정빈 근무수칙 2 –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출퇴근 시간 내내 내가 외우던 주문.

「나는 황 과장님을 사랑한다.」

운명적인 만남

<해파랑길과의 만남>

동해안을 따라 걷는 해파랑길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2018년 10월, 「203포럼」은 삼성 입사 39주년 기념 행사로, 부산 단체여행을 1박2일 다녀왔다. 첫날, 송도, 자갈치시장, 용두산 공원, 광안리를 거쳐 해운대에서 1박하고, 다음날, 청사포, 해동용궁사, 동백섬을 걸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UN기념공원 방문 전에 잠시 들른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해파랑길과의 운명적 만남」의 단초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일행이 오륙도 스카이워크 앞에서 관광 안내원으로부터 「오륙도가 왜 오륙도인지?」를 설명받는 동안 나는 별생각 없이 인근에 있는 해파랑길 관광 안내소에 가 보았다. 그곳에서 해파랑길 시작점이 오륙도 해맞이 공원임을 알게 되었고 전체구간이 나와있는 안내지도와 안내서를 얻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SRT 안에서, 인상 깊었던 부산의 바다풍경과 안내서에 나오는 해파랑길을 오버랩시키며, 언제 기회가 되면 해파랑길을 걸어보리라 생각했다.

2018년 연말을 무료하게 보내면서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회의가 들었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때 오륙도가 떠올려졌고 해파랑길 안내지도를 꺼내 부산 구간 73.7km를 가늠해 보았다.

2019년 1월 초에 출발해서 며칠 걷다 오겠다는 여행계획 통보에, 집사람은 본인도 함께 가서 걸어보자고 했다. 차표와 숙소예약이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별다른 준비도, 충분한 사전 정보도 없이 그렇게 「해파랑길과의 만남」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9년 1월 2일, 새벽에 SRT를 타고 서울을 떠나 아침을 부산역에서 먹고, 지체 없이 오륙도 출발점으로 이동해 걷기를 시작했다. 오르내림의 고단함과 바닷가 찬바람이 있었지만, 이기대공원. 광안리해변, 동백섬, 해운대해변을 거쳐 미포에 이르는 1코스 17.8km를 걷고 나서 내린 결론은 「해파랑길 전 구간 도전 가치 있음」이었다.

이후 3일에 걸쳐, 청사포, 송정해변, 임랑해변, 간절곶, 진해해변까지 2~4코스 55.9km를 더 걸었다. 해파랑길의 아름다움, 걷기로 얻어지는 무형의 가치, 긍정적인 신체의 변화를 경험하고 나서 이렇게 다짐했다.

「해파랑길 전 구간을 금년 내로 걷는다」

다짐은 5월에 이르러 현실이 됐다. 10개 구간 50개 코스 770km 완주.

<좋은 사람과의 만남>

서총영업과의 업무는 영업현장의 활동 주기에 맞추어져 있었다.

매월, 영업실적과 효율 점검·분석, 영업전략 수립 및 시책전달, 점포 증설 및 통폐합, 점포장인사, 영업제경비 지급 등의 일로 바빴고, 분기·반기·연간 단위로도 대규모 회의나 행사가 있어 「삶의 질」같은 고상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적은 없었지만 기회가 없어 엄두도 내지 못하던 차에, 옆 부서 교육과 동료가 「좋은 사람 있으니 만나보라」는 제안을 했다. K대 써클 후배면서 본인 wife 친구이고 착한 심성을 가져 나와 잘 맞을 거라 했다.

관심은 있었으나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보리라 답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집사람과의 운명적 만남」은 예약되었다.

1982년 1월, 총국의 전년도 실적을 점검하고 새해 전략을 공유하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인 기관장 전략회의를 무사히 마쳤다. 큰일을 무탈하게 치렀다는 안도감과 갑자기 할 일이 사라져 느껴지는 허탈감은 내게 전과 다른 행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교육과 동료에게 좋은 사람 아직도 잘 있냐고 물어보았고, 며칠 후 큰 기대 없이,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좋은 사람」은 고대 혜화병원 정형외과 병동 간호사로 있었다.

「Day/Evening/Night」 3교대 간호사 근무시간과 「8 to 9」교대 없이 일하는 일 중독자 근무시간이 겹치지 않게 조정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힘들게 만남이 성사되었다.

기대는 크지 않았으나 그동안 여성을 만나 볼 기회가 너무도 적었던 탓에 나름 긴장도 되었다. 첫눈에 반할 외모나 조건을 가지진 않았지만, 착하고, 순진하고, 여려 보여 호감이 갔다. 어쩌면 거칠고 당돌하기까지 한 나와 잘 조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첫 만남을 마무리했다.

이후 몇 차례의 만남이 더해졌고, 나는 「좋은 사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씩씩하게 청혼했다. 「금년 내로 결혼합시다」

  • 심성이 바르고 착하다.
  • 거세지 않고 여자답다.
  • 기본이상의 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
  • 매우 건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장애나 질환은 없는 듯하다.
  • 부모님을 모시고도 살 수 있다고 했다.
  • 소주를 1병 이상 마실 줄 알고 화투도 잘 친다.
  • 나를 사랑하고 있다.

청혼 이후 손위 처남 혼사에 밀려 해를 넘겼으나, 1983년 3월 11일 우리는 결혼식을 가졌다.

장소 : 출판 문화 회관 강당 (동십자각 근처)

주례 : 홍종인 (언론인)

사회 : 박영세 (교육과 동료, 두 사람 소개)

이후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관리의 삼성

지금은 삼성과 현대 두 그룹의 주력 업종과 규모가 판이하게 달라져 단순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나, 2000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두 그룹의 경영방식이나 조직 문화를 놓고 「관리의 삼성」 「영업의 현대」라고 표현하며 비교하곤 했었다.

1983년 대리가 된 후 서총영업과를 떠나게 되었고, 새로 발령받은 부서는 관리본부 산하 관리부 관리과였다.

발령 후 알게 된 관리부의 주된 업무는 「회사의 손익 관리를 통해 회사 이익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부서 명칭만으로 부서 업무를 친절히 설명하자면 「관리부」앞에 「손익」을 더해 「손익 관리부」로 했으면 좋으련만 「손익」을 과감(?)히 생략하고 그냥 「관리부」로 편제되어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관리부」의 관리와 「관리의 삼성」의 관리가 맞닿아 있는 개념이고, 따라서 「관리의 삼성」을 「손익관리의 삼성」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나의 개인적 견해를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어떤 이가 정리한 「삼성과 거래하며 만났던 삼성(인)의 생각과 행동」이란 글을 접하며, 나는 당시 삼성(인)의 뇌리에 손익개념이 녹아있었음을 확신했다.

  • 여간해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 부정이 없어 깨끗하고 일 처리도 깔끔하다.
  • 과정과 결과를 모두 중요시해서 거래하기에 까다롭다.
  • 성공적 거래와 신뢰가 쌓이면 안정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관리부의 업무가 회사의 손익을 관리하는 중요한 일이다 보니 매사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관련 지식과 경험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각기 다른 일을 하는 관련 부서도 많아서, 사내 정보를 획득하는 채널도 구축해야 했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법도 알아야 했으며, 이해가 상충되어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하는 기술도 갖추어야 했다. 상당수의 결재 보고서가 관리본부장이나 CEO에게까지 오르다 보니 상사의 의사결정을 받아내는 능력도 갖추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관리부의 업무 처리 프로세스는 철저하게 「Plan-Do-See」의 cycle로 돌아갔다.

일례를 들면,

Plan 1. 임원급이 맡고 있는 부서단위 별로 연간 매출과 비용에 대한 자체 계획을 받는다.

2. 계획의 타당성·실현가능성·구체적 전략 등을 검토한다.

3. 해당 부서와의 조정을 거쳐 계획을 확정한다.

Do 4. 월·분기·반기 별로 진척상황을 점검한다.

5. 문제 발생 시 해당 부서가 차질 원인과 향후 대책을 수립하도록 한다.

See 6. 반기·연간 단위로 성과를 평가한다.(계획 대비 실적)

7. 평가 결과에 따라 해당 부서와 임원의 고과를 매기고 향후 임원인사에 반영한다.

서총영업과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성실하게, 적극적으로, 상황에 맞게 (일이 되게) 일하는, 「일에 임하는 기본자세」를 배웠고, 관리부에서 보낸 3년여의 기간 중에는, 이후 나의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일하는 방법」을 배웠다.

  • 일의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 정하기 (전체⟶부분, 大⟶小)
  • 「Plan-Do-See」하는 절차와 방법
  • 지식과 경험의 필요성
  • 정보 획득 방법과 활용방안
  •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인식과 적극적 소통방안
  • 갈등 회피 및 해소 기술
  • 상사와의 신뢰 구축 필요성 및 상사 설득 능력 …

관리부 생활은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피로가 몇 곱절 컸다.

관리부 일이 현업조직을 움직여 일을 하게 하는 「주인 역할」과 일의 결과를 평가하는 「감독자 역할」이다 보니 늘 현업부서와 마찰이 많았다. 대리·과장이 현업부서의 부장·임원을 상대하여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건방지다」거나 「돼 먹지 못했다」라는 말을 쉽게 들었다.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한 것이 현업부서를 괴롭히거나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연관이 있는 일이거나 업무관련성이 높고 지속적인 거래관계에 있는 부서와 일 처리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게 되면 매우 곤혹스러웠었다.

관리부에서도 상사들은 나를 우수한 대리로 평가하여 1호봉 특별 승급을 주었다. 서총영업과에 이어 계속 특별 승급했으므로 다른 입사동기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앞서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의 기대와는 달리 과장 승진은 1차에서 누락되었고 6개월이 지나서야 융자부 융자2과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승진이 늦은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입사 6년 만에 입사 동기 중에서 유일하게 2호봉 특별승급 했고, 욕을 먹더라도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제일 먼저 승진 못 한 것이 분하기까지 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일을 잘하는 것과 주변과 조화하여 일이 되게 하는 것을 구분 못 하고, 너무 열심히 일만 한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유감

해파랑길을 포함하여 내가 걸었던 트레일코스는 모두 「구간 이어 걷기 (릴레이 걷기)」방식으로 걸었다.

구간 이어 걷기는 한 구간을 걷고 난 후, 한참 후에 다시 이전 걷기가 끝난 지점으로 이동해 다음 구간 걷기를 반복하는 걷기 방식이다. 이때 걷는 사람이 임의로 구간을 정하면 되는데, 보통의 경우 걷는 기간이나 걷는 지역을 기준으로 한다.

해파랑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부산·울산·경주를 두 번에 나누어 걷고 난 후, 포항 양포항에서 영덕 강구항까지의 123km를 세 번째 구간으로 정하고 걷기 도전에 나섰다.

일정은 이동거리를 감안하여 5박 6일로 잡았다. 일정 기간 중에 구정 연휴가 포함되어 동행하는 집사람에게 모처럼 진정한 휴가를 준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서울 집에서 출발지 양포항까지, 종착지 강구항에서 서울 집까지 대중 교통 수단이 여의치 않아 이동할 때 승용차를 이용하였다.

세 번째 구간을 걸으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되었고 잊지 못할 추억거리도 많이 만들었다.

구정을 집 밖에서 보낸 것도 처음. 포항이라는 도시에 발 디딘 것도 처음. 한겨울 저녁 바닷바람의 매서움을 느껴본 것도 처음. 차가 끊겨 히치하이킹 해본 것도 처음. 늘 「좋은 사람」이었던 집사람의 독한 면을 느낀 것도 처음.

마지막 귀경길에서 추억과는 결이 다른 또 하나의 처음을 경험하였다.

「설날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승용차로 이동하다 보니, 2017년 추석 명절 이후 「유료도로법 시행령」으로 정해진 통행료 면제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혜택은 받았지만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비용은 수익을 얻은 자가 부담 한다」는 것이고, 고속도로를 이용한 대가인 통행료를 고속도로 이용자가 부담하지 않고 세금으로 충당한다면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은 납세자는 손해를 보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법이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최근에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찾아가는 것이 대세라고 알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일례로, 2011년 고등법원 판결은, 은행에서 부동산 담보대출 시에 발생하는 근저당권 설정 비용을, 종전에는 경제적 약자인 차주가 부담했지만, 이후에는 근저당권 설정으로 이득을 보는 은행이 부담하게 하였다.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무슨 이유로 통행료 면제를 시작했는지 알아보니 「국민 사기 진작」, 「내수활성화」, 「차량정체 최소화」를 위함이었다고 했다. 상식을 거스를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식을 거스르는 것 이외에도 다른 수단이 있었을 터인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관리부 손익관리를 달리 말하면 「매출증대」와 「비용축소」다.

「매출 – 비용 = 손익」

만약에 현업부서가 자발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매출을 늘리고 스스로 낭비요인을 없애 비용을 줄인다면 관리부의 할 일은 없어진다.

그러나 현업부서의 「자발적」이나 「스스로」를 기대하기 어렵고, 자율에만 맡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할 필요가 있다면, 관리부의 역할이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매출은 늘었는데 잠재적 Risk도 함께 늘어난다거나 미래비용이 덩달아 더 크게 늘어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비용은 줄었는데 미래를 위한 포석과 투자가 소홀해지는 「기회상실」이 된다거나, 집행이연에 의한 「착시현상」이라면 이 또한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관리부 전입 초기에는 비용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비용을 크게 영업비용과 일반관리비로 나누는데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덜 요구되는 일반관리비를 맡았다.

업무내용은, 해당 부서 예산범위 이내이면 집행 후 확인, 예산범위 밖이면 예산추가배정 후 집행 확인하는 것이다. 본사 모든 부서와 관련이 있고 비용 집행 사유도 복잡 다기하여 일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 스스로 「일반관리비 집행 확인 원칙」을 만들어 업무처리를 하니 일에 속도가 붙고 현업부서의 불만도 줄일 수 있었다.

원칙 1. 꼭 필요한 비용은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질문 ①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가?

질문 ② 내 돈이라도 그렇게 쓰겠는가?

질문 ③ 시점과 규모는 적절한가?

원칙 2. 우선순위와 부서 간 형평을 최대한 유지한다.

질문 ① 전체 비용에 영향을 주는 사항인가?

질문 ② 부서 간 중복집행이나 불합리한 차별은 없는가?

원칙 3. 상식이나 사회 통념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질문 ① 비용과 관련된 일반적인 사회 원칙에 맞는가?

질문 ② 횡령·착복·배임 등의 개인 부정 소지는 없는가?

36년 전에 내가 정한 원칙들이 지금도 통용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절에 「설날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로 세금을 사용하겠다는 의사결정을 나에게 구했다면, 나의 답은 「사용불가」였을 것이다.

사유는   첫째,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어긋나고

둘째, 세금사용으로 얻어지는 추상적 효과에 대한 의도가 의심스럽고

셋째, 내 돈이라면 그렇게 쓰지 않겠다.

수기원장과의 전쟁

과장 승진과 동시에 발령받은 융자부는, 계약자가 납부한 저축보험료의 일부를 자금으로 배정받아, 대출이라는 운용방법을 통해 자산을 증식시키는 부서이고, 내가 과장이 되어 맡게 된 융자2과는 대출 중에서 개인들에게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대출수요가 배정자금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았으나, 창구 혼잡을 방지하고 보험영업을 지원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보험영업조직에서 추천한 건에 한하여만 대출을 진행시켰다. 제반업무가 전산화되기 전이라 수작업 업무량이 아주 많았고 직원들 사기는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었다.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큰 주식·채권 등의 유가증권 투자나 투자한도로 묶여있는 부동산에 비해 고객 확보가 쉽고 고수익·저위험인 「대출」을 늘려야 했는데, 당시의 업무처리 방법으로는 대출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대출이 늘면 인력이 비례해서 늘고 관리 RISK까지 덩달아 커지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전산화가 답이었다. 그것도 아주 시급하게 대출업무 전과정을 전산화하지 못하면 「미래 개선」은 고사하고 「과거 수습」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모든 금융기관이 「전산원장」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삼성생명 융자부에서는 「수기원장」을 쓰고 있었다.

수기원장 전산원장
고객내방 시

직원행동

원장보관 파일에서

고객의 원장을 찾아온다.

화면에서 고객을

찾는다.

이자수납

업무처리

이자계산하고 수납 후

원장에 손으로 기재

자동계산 화면입력
결재 원장 모아서 건별

결재 후 원장 원위치

결재권자가 비대면

화면 결재

 

시간이 지날수록 원장의 수는 늘어났다. 원장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도, 빨리 찾아오기도 힘들어지고, 고객을 앞에 두고 이자계산·원장기재를 해야 했으므로 고객 응대 시간도 당연히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원장을 정리하고, 결재받고, 원위치 시키는 일이 미뤄지고 쌓여서 정리가 끝나지 않은 「미결 원장」이 부서 내 곳곳에 쌓여있었다.

상황파악이 끝난 후, 전산화 계획을 품의하고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결재과정에서 「업무 공백 불가」, 「RISK 최소화」 지시를 받았고 「6개월 내 완성」을 약속드렸다.

전산 관련 업무는 사원·대리 시절에 경험한 바 있다. 비록 간단한 통계자료 산출이나 몇 가지 조건과 산출식을 걸어 결과를 도출해내는 분석system을 만드는 것에 불과했으나 그 경험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 사람이 수작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전산으로 할 수 있다. (효율성은 차치하고)
  • 전산에 대한 신뢰는 Data에 대한 신뢰다.

사실 대출업무 전산화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 대출을 시작하는 것이라면 좋은 Program을 사서 장착하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이미 대출이 진행되고 있고, 그것도 오래전부터 나름 개선을 이어가며 업무처리하는 방법을 유지해 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기존 업무처리 방법과 순서를 존중하여 전산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기존 Data의 처리와 신규 Data처리를 구분해서 Data불신으로 야기되는 업무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전산화 계획에 따르면, 전산화 설계를 마친 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미 대출된 건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시키는 것이었다.

「대출건철(채권서류철)」에 들어있는 대출정보와 「수기원장」에 있는 입출금 정보를 입력할 방을 새로 마련하여 입력하는 일과, 입력한 내용이 정확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기존 인력을 전산화업무로 돌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남자사원 1명만을 전산화 업무에 참여시켰고, 단순 입력업무는 아르바이트생을 활용했으며 확인업무는 과장이 직접 맡았다.

수개월 간 주 100시간 이상 일한 결과 목표기일 전에 전산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완성된 프로그램은 「JJPL」이라고 이름 지었다. 조정빈 과장과 제○○ 사원이 만든 개인대출(Personal Loan) 처리 시스템.

연체와 대손은 융자부서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다.

연체는 이자가 일정 기간 납입되지 않은 것이고, 대손은 원금회수가 불가능하여 손실이 확정된 것이다.

대손이 발생하기 전 단계에서 연체가 생기고 연체가 대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수단으로 담보물이나 차주, 보증인에 대하여 법적 조치를 한다. 법적 조치의 예로 압류, 담보물 경매 등이 있다.

정상적인 대출의 경우에도 연체가 있을 수 있으나, 적절한 법적 조치가 취해진다면 대손을 막을 수 있다.

융자2과 1년, 융자1과(기업 대출) 2년, 3년간의 융자부 근무 중에 처리된 대출 중에서 대손이 확정된 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

해파랑길 강릉 구간은 옥계에서 시작하여 심곡항, 정동진역, 안인해변, 강릉항, 경포대, 연곡을 지나 주문진 해변까지, 바닷길, 산길, 호수길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지명과 눈을 감아도 떠올려지는 아름다운 풍광.

강릉은 이제껏 살면서 서울을 떠나 가장 오래 머물렀었던 곳이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꼴로 찾아보는 곳이다 보니, 해파랑길 10개 구간 중 가장 편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강릉과의 인연은 1992년 강릉에 위치한 관동영업국 국장으로 발령받으며 시작되었다. 융자부 과장 3년, 의정부 영업국 관리과장 1년, 본사 신경영 방침 실천 T/F 팀장 1년 총 5년의 과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삼성생명 영업의 꽃이라 불리는 「영업국장」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관동영업국장은 여러모로 과분한 직책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입사 경력도 짧았고 영업현장 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직급도 과장이어서 누가 봐도 걱정스러울 수 있었다.

관동 영업국은, 전국에서 영업소와 설계사 수가 가장 많았고, 관장구역도 가장 넓은 영업국으로 초임 국장이 맡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강릉에는 개인적인 지역 연고나 알고 지내던 회사 내 인맥도 전혀 없었다. 발령받아 도착한 강릉비행장 출구에서 영업국 승용차 기사가 피켓을 들고 기다릴 정도로 모든 것이 낯선 곳이었다.

영업을 경험했던 사람이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영업은 숫자로 말한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영업능력도 검증되지 않아 좋은 결과를 장담하기 쉽지 않았음에도 상사들은 나에게 관동영업국을 맡겼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아름다운 숫자」를 보여드릴 것을 다짐했다.

  •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한다.
  • 부정이나 잘못된 관행과는 타협하지 않는다.
  • 다시 돌아볼 일이 없게 매사를 철저하게 마무리한다.

그룹 입문교육을 마치고 삼성생명 배치받았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낙담하시며 「하필 보험회사냐, 다른 회사로 바꿀 수는 없니?」라며 걱정하셨었다. 보험영업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하신 말씀이셨다.

보험영업이 힘든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상품이면서, 수요가 없는 상태에서 수요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어려움」을 든다. 고객을 직접 만나는 보험 설계사들은 이 어려운 보험상품을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 힘들게 팔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도 없는 거절을 당하고 좌절과 고통을 겪는 보험설계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조직이 영업소(현재 명칭 지점)이고, 영업소를 관리·지원하는 조직이 영업국(현재 명칭 지역단)이다.

발령 초에 관동영업국에는 22개 영업소와 1,000명이 넘는 보험설계사가 있었고, 영업소는 강릉시 이외에도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 동해시, 삼척시에 고루 소재해 있었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서 지역이 달라도 만남과 소통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에는 거리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전 영업소장과 간단한 전화 통화만 하더라도 반나절이 모자라고, 영업소 전체를 잠깐씩만 방문하는데도 몇몇 일이 걸렸다.

영업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영업소장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를 알리고 신뢰를 쌓아가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 영업국장 근무시간 무한 연장
  • 직원들의 가슴과 머리에 깊게 남을 수 있는 강한 Impact

강릉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거진(고성군)영업소까지 승용차로 2시간 이상 걸리는 이동시간은 출발시간을 근무시작 2시간 전으로 해서(06:00 출발) 극복하고, 강릉으로 복귀하면서 간성(고성군), 속초, 양양 소재 영업소를 방문하면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 이동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오후에 강릉시내 영업소를 돌아보고 동해를 거쳐 삼척으로 가서 저녁식사 후에 강릉으로 돌아오면 하루 만에 전 소장과의 짧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Impact를 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스텝 조직을 이용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만들어 미리 숙지한 후 만남을 가졌다.

짧은 시간에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는 것이 반복되면, 상대방도 만남에 앞서 준비를 철저히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만남의 시간이 길지 않아도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조직 관리」의 주요수단은 목표를 부여하고 성과를 측정하여 인사 고과에 반영하는 것이다. 상대 평가에 따라 매겨진 인사 고과로 상여금이 결정되고 향후 보직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공정하고 공평한 조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예외를 두거나 사심이 개입되면 불신과 반목의 원인이 되므로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안 오면 결근, 늦으면 지각, 일찍 가면 조퇴」.

영업소에 대한 「지원」은 자원의 원천에 따라 영업국 지원과 총국 등 상급부서 지원의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영업비용·스텝 지원·국장동행 등 한정된 영업국의 인적·물적 자원을 이용하여 지원할 때는 영업 성과 여부나 과다가 중요 판단 기준이 되었다.

상급부서 협조를 얻어야 하는 고과 T/O·일반예산·대출씰링 배정, 사무실·집기 비품 구매, 지역홍보 협찬 등의 지원 자원은 영업국장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여 상급부서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관리」와 「지원」의 궁극적 지향점은 영업소의 「업적증대」다.

그러나 관리가 잘되고 지원이 원활해도 「업적증대」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한 보완으로 영업소장들의 「걱정과 갈등」을 보조지표로 활용했었다. (걱정거리가 늘었는지 줄었는지, 갈등이 있는지 없는지).

영업활동은 그 자체가 걱정에서부터 시작하므로 걱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영업 이외의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은 큰 문제이다. 갈등은 만남과 대화, 욕심과 양보, 융화와 반목 등 조직문화와 관련이 있으므로 적극 나서서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었다.

관동영업국에서 근무했던 2년 동안 윗분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고 자부한다. 「아름다운 숫자」도 여러 차례 보여드렸다.

나와 함께 근무했던 부하직원들의 기억 속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다.

회식 후 자리를 파하기 전에 늘 합창으로 불렀던 「관동영업국 국가(局歌)」를 소개해본다.

나는 행복한 사람

오동식 작사·작곡

이문세 노래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때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 받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그대를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강원도의 힘

군시절에는 하루에 100km도 걸어봤지만(걷고 난 후 2~3일 동안은 정상적인 생활 불가능), 3일 이상 계속 걷는다는 전제하에 하루 걷기로 적당한 거리는 30km 이내라고 판단된다.

산과 들과 바닷가에 펼쳐져 있는 「자연의 길」은 1시간(10분 휴식 포함)에 3km를 걷기 힘들고, 포장도로 옆에 난 길이나 데크가 깔린 「조성된 길」은 4km 이상도 걸을 수 있다. 「자연의 길」과 「조성된 길」을 섞어서 8~10시간 걷는다면 대략 30km 전후를 걸을 수 있다.

해파랑길 걷기는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부산 구간을 지나며 아름다운 경관에 반하기도 하고,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긍정적 변화가 좋아져서 계속 걷게 되었다.

이어 걷기 방식이라지만 한 달 이상의 날들을 하루 종일 걸어서 해파랑길을 완주해보겠다 라는 목표를 정하고, 목표달성을 확신한 데에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해파랑길 총 770km 중에서 40%가 넘는 315km가 강원도에, 그것도 내가 영업국장을 하던 관장구역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시작해서 울진까지 올라와서 경상북도 경계를 넘어 강원도 삼척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쉽게 걸을 수 있으리라는 비이성적 기대와 자신감이 부지불식간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었다.

강원도 사람을 이르는 「암하노불(岩下老佛)」이나 「감자바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착함」, 「순박」, 「평온」, 「안정」 등이 되겠다. 매우 긍정적이고 누구나 갖추고 싶은 덕목이겠으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데에는 다소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착함이나 순박은 실천력이 없다거나 어리석음으로, 평온이나 안정은 열정이 부족하거나 진취적이지 않음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릉 부임 초기에 가졌던 이 생각들은 관동영업국 직원들과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관동영업국 직원들(80명 내외)의 출신지역을 보면 80% 이상이 강원도 영동지역, 10% 내외가 영서지역, 나머지 10% 이내가 강원도 이외 지역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류를 이루는 강원도 영동지역 출신들의 특성은 나의 「기존 관념 속 강원도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첫째는, 남녀를 불문하고 당당하고 씩씩했다. 한두 명을 만났을 때는 개인의 특성이겠거니 했는데, 만나는 직원마다 주눅들지 않고 쭈뼛거리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서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다. 회식 때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 위해 음식점은 단골을 정해 다녔고, 「이제껏 나온 요금은 안 받을 테니, 더이상 옆 손님 피해 안 가게 나가 달라」는 당구장 주인의 짜증 섞인 호소도 여러 차례 들었었다.

어떻게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데 그렇게 큰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영동지역 역사서를 뒤적여 보니 「북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 「고구려의 후예」라는 내용이 있어 수긍이 가기도 했다.

「당당함과 큰 목소리」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자신있다」는 것은 「준비」가 되어있고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것인데, 관동영업국 직원들은 무슨 준비를 끝냈고 어떤 결과를 확신했던 것이었을까?

둘째, 관동영업국 영업소장들은 본인들이 맡은 일을 책임지고 완수할 줄 알았다. 「책임진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 중에는 「책임진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듯하다. 「책임진다」는 것은 책임지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책임지고 성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책임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데는 「근면성」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책임지고 성과를 내려면 「근면성」에 더하여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저 열심히 땀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 하기 위해 머리를 쓰고, 주변을 활용하고, 대책을 만들고, 고통을 감수하며 피를 흘리는 것까지가 책임지는 것이다.

상황과 여건이 변해 도저히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까지도 책임을 다하려 했던 영업소장들의 자랑스러운 면면이 기억난다.

셋째, 대관령을 넘어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순박하고 의리가 있었다. 순박하다는 것은 어리숙하다는 것이 아니라, 요령 피울 줄 모르고 바른길을 걷는다는 의미다. 일단 원칙이 정해지면 샛길을 찾지 않고 정해진 길을 갈 수 있는 실력을 닦는 노력을 했다. 영업소장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설계사와의 동행」도 원칙대로 했고, 설계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교육훈련을 시키는 일도 제대로 했다. 「요령은 거듭돼도 남는 게 없지만 실력이 쌓이면 큰 힘이 된다」는 영업국장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 주었었다.

그들의 의리는 신뢰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서로 믿는 것이 의리인 것이다. 모두가 법과 질서를 지킨다는 믿음 위에 관계 설정이 되다 보니, 부정을 감춰주고 불의에 침묵하는 소위 범법자들의 의리는 불필요했다. 의리를 지키는 것이 정도를 걷는 것이기에 힘들지도 않았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희생이나 인내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믿고 살았다.

강원도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낸 회사 내의 성과나 그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강원도 땅을 걷는 것은 그 시절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일이기에 육체적 힘듦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라도 그 땅을 밟고 싶었는데 「해파랑길」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인지 모른다.

관동8경 이야기

울진이 1962년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편입되기 전까지 「관동8경」은 모두 강원도에 있었다.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의미하고, 8경은 동해 바다와 부근에 위치한 호수변에 펼쳐져 있는 명승지 8곳을 말한다. 「관동8경」은 고려조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많은 시인, 묵객, 선비들의 글과 노래에 오르내린 절승지들을 묶어 부르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고유 명사이다. 따라서 현재 일반화되어 있는 8곳 이외에도 2~3곳이 관동 8경의 하나로 포함되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해파랑길은 관동8경 중 휴전선에 막혀 갈 수 없는 총석정(통천군)과 삼일포(고성군)를 제외한 6곳을 품고 있다. 6곳 모두에 「정자나 누대」가 있는데,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노래했던 선인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고, 긴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쌓인 전설과 설화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정자나 누대」는 역사적 건축물로서의 의미도 있고 주변 경관에 걸맞은 조형미를 갖추고 있지만, 「정자나 누대」 그 자체가 관동8경의 하나로 지정된 대상물이 아니라 「정자나 누대」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모습이 찬탄의 대상이었다고 판단된다. 해파랑길을 걷다가 「정자나 누대」를 만나면, 안내판이나 현판 따위에 현혹되지 말고, 즉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눈을 크게 돌리고 자연을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그곳에서 신의 놀라운 창조물을 만날 수 있다.

휴전선 이남에 있는 관동8경 6곳을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보면, 청간정(고성군 간성읍), 낙산사(양양군), 경포대(강릉시), 죽서루(삼척시), 망양정(울진군), 월송정(울진군 평해읍)이 있다. 경포대는 호수변에, 죽서루는 오십천변에 자리잡았고 나머지는 동해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대관령 넘어 동해에 닿아 있는 지역이면 어느 곳이라도 청정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관동8경」의 이름하에 구체적 지역을 정해 그 아름다움을 시와 글로 전하다 보니 방문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혹여, 기대가 커서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관동8경 주변에 널린 수 없이 많은 전설과 설화 중 경포대에서 들었던 이야기 하나.

제목 : 경포대에서 볼 수 있는 다섯 개의 달

상황 : 보름날 밤, 남녀가 경포대에 올라 음주행각 중 5개의 달을 발견

내용 : 하늘에 뜬 달

바다에 비친 달

호수에 잠긴 달

술잔에 빠진 달

님의 눈동자에 깃든 달

결과 : 전해 들은 내용은 없지만 추측은 가능

하동관 곰탕

북경에서 어학연수 받던 시절, 중국어를 가르치던 중국 선생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며 분위기를 잡아가곤 했었다. 대부분의 질문은 일상에 관한 것이었고 늘 비슷비슷한 질문을 반복해 일상적인 대화를 익히는 데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이 묻고 학생이 답변할 때는 단어가 아닌 완성된 문장을 요구했고 잘못되면 즉석에서 바로 잡아주고 반복시켜 제대로 된 중국어를 구사하도록 가르쳤었다.

선생 : 어제 저녁 「都一處」에서 식사했다면서요, 어땠어요?

학생 : 좋았어요.(好)

선생 : 好·不好로 대답하지 말고 문장으로 말해보세요.

학생 : 맛있었어요.(好吃)

선생 : 아니요. 맛은 어땠고, 식당의 입지, 주차 및 교통 편의   성, 종업원의 근무태도, 환경의 좋고 나쁨, 위생 정도,

가격의 합리성 등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식당 평가를

하려면 다는 못 해도 몇 가지는 언급해야지요.

학생 : …….

중국어 배우면서 식당 평가 방법까지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후 타인에게 식당을 추천할 때는 평가항목 몇 가지를 떠올리며 추천사유 속에 포함시켜 말하곤 한다.

삼각동에 있던 1939년에 개점한 「하동관」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곰탕집이다. 1994년 본사 관리부장으로 발령받은 이후에 따뜻한 국물 생각이 나면 자주 찾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식당 평가 기준에서 합격점을 받을 항목이 「맛」 하나 뿐인, 어찌보면 황당한 식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동관 곰탕 맛을 보려면 교통불편, 불친절, 열악한 환경, 비위생, 불합리한 가격을 감수하고 줄까지 서야 했고, 게다가 줄은 아주 길었었다.

회사이익이 관리의 목표인 관리부장 입장에서 보면 하동관은 배울 점이 많은, 부러운 사업체였다. 최대 경쟁력인 「맛」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익 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는 선순환의 궤도에 이미 진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동관에서 식사하고 태평로 사무실까지는 걸으면 10분 남짓의 시간이 필요했다. 걷는 동안 포만감을 가라앉히기도 했지만 머리로는 「하동관의 성공사례」를 분석해보곤 했다.

먼저 식당업의 핵심 요체인 맛과 고객을 보면,

맛은, 이미 고객으로부터 선택받았으므로 쓸데없이 식재료를 달리하거나 조리방법을 바꾸지 않는 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객은, 개점 이후 아버지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다양한 연령층과 정계 재계 학계를 망라한 직업군에 단골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어 고객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은 크게 필요치 않았다.

하동관이 전개 중이던 가장 중요한 영업 전략은,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 더 많은 고객에게 곰탕을 제공하고 식당의 이익도 키우는, 소위 「회전율」을 높이는 것으로 보였다.

  1. 효율적인 주문과 사전 식대 계산.
  • 메뉴를 곰탕 1가지로 통일 (특과 보통 구분)
  • 식당입구에서 식권 사전 판매 (사전주문과 결제)
  • 조리와 홀서빙 시간 절약 가능
  1. 식사 및 식당 체류시간 단축 아이디어
  • 반찬은 무조건 1인당 김치 1접시 (깍두기 + 배추김치)
  • 뜨거운 곰탕에 넣어 먹을 수 있는 차가운 깍두기 국물 제공 (먹기 적절한 온도에 조기 도달)
  • 소주 판매 권장하지 않고 주문 시에는 소주병과 소주잔이 아니라 내용물만 맥주잔에 부어서 제공 (잔 나누기, 돌리기 원천 배제)
  • 식수는 출구에 있는 self 음수대 활용
  • 방에 앉아 식사한 손님 신발은 식사 끝나고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방 밖에 대령 (식사 위치와 신발 위치 연계 관리 시스템 존재)
  1. 눈물 나는 공간 활용
  • 식탁은 8인용이 기본 (4인용 식탁 사이에 있는 공간 없애는 방법)
  • 등받이 없이 길게 붙어있는 의자 (60년대 만홧가게 의자)
  • 식권구입 후 대기 장소는 식사하는 손님 식탁 사이 (기다리면서 먹는 사람 구경은 덤)
  1. 종업원들의 적극적인 호응 유도
  • 영업시간을 07:00~16:30으로 정하고 준비된 식재료가 떨어지면 조기 영업 종료 (바쁠수록 빨리 퇴근 가능)
  • 낯 두껍게 고객 합석시키기

얼핏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았는데 적지 않은 회전율 제고 전략이 숨겨져 있었다. 식권을 사고 나서 빠르면 10분, 늦어도 15분 후면 식당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막힌 system.

「하동관」은 2007년 청계천 재개발로 삼각동 시대를 마무리 짓고 본점을 명동으로 옮겼다. 이후 강남과 여의도에 분점을 내는 점포 확대 전략이 추가되었지만 회전율을 높이는 전략의 근간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어찌 생각해보면 하동관에서 판 것은 곰탕만이 아니라 「곰탕+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부정, 무능

해파랑길을 걷다 보면 가끔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맬 때가 있다.

해파랑길에는 50개의 코스가 있고, 코스 당 평균거리는 15km가 조금 넘는데 짧은 코스는 10km에 못 미치지만 긴 코스는 20km도 넘는다. 코스 내에는 여러 개의 알만한 지형지물들이 있고, 지형지물 사이에는 해파랑길을 인식시키는 「안내 표식」이 있다. 거점과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표지판」과 해파랑길임을 표시하는 「방향표지판, 리본」이 걷는 이의 코스 이탈을 막아주는 안내 표식 역할을 하고 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안내 표식」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내표지판은 1km 내외의 간격으로 설치되어 놓칠 수도 있다지만, 리본은 100m 내외의 간격으로 매어져 있어 여간해서는 놓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간혹 알 수 없는 이유로 안내 표식이 훼손되어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걷는 이가 딴생각을 하면서 갈림길에서 엉뚱한 길로 잘못 들어서고, 그 상태가 일정 시간 유지되다가 길을 잃었다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두 가지 중 하나의 방안을 선택하여 대처해야 한다.

① 본인의 길 찾기 능력과 감각을 믿고 방향을 수정, 앞으로 나아가며 코스 재진입을 시도한다.

② 본인의 부주의를 인정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가서 안내 표식을 다시 찾아본다.

두 가지 방안 모두 장·단점을 갖고 있어 선택을 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택에 따라 행동이 나오고 행동의 결과가 성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여건 검토와 상황 분석을 토대로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이 「유능」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능」이다.

길을 걸으며 유·무능을 따지는 것은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사실 길을 걷는 재미 속에는, 길을 잃고 헤매다 다시 찾았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나, 헤매는 과정에서 겪는 두려움, 후회, 자책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여곡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던 코스에는 기억할 만한 추억거리가 남아있지 않았었다.

혼자 또는 마음 맞는 두셋이 모여 놀이로 걷는 걷기는 재미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많은 이가 함께 정해진 목표를 향해 걸을 때 리더가 길을 잃거나 판단을 잘못해서 전체가 어려움에 봉착하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이병철 회장 시절 삼성그룹의 경영이념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였었고,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이후 다시 정리된 경영이념은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한다」이다. 삼성 출범 이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인재」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삼성의 인재는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여간해서는 길을 잃지 않고, 설사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가도 바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

삼성의 기업문화 속에서 횡령, 착복, 수뢰, 배임 같은 유의 허접한 부정은 발붙이기 힘들다. 설사 「안내 표식」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사심을 갖고 딴 길로 접어드는 따위의 「부정」이 있더라도 감사기능에 의해 조기에 적발, 조치된다.

그렇지만 여건이나 상황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길을 잃거나 진퇴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서 실기하거나 오판하여 어려움에 이르게 하는 「무능」은 감사대상이 되기도 힘들고 여간해서는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무능」을 사전에 예방하고 무능한 처사를 평가 조치하는 것이 「삼성의 관리」이다. 이를 통해 현업부서가 길을 잃지 않고 결국 회사의 이익을 증대시키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94년 내가 부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관리부는 부서 이름을 경영지원팀으로 바꾸었다. 관리라는 이름이 피 관리조직 입장에서 볼 때 거부감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2년간 경영지원팀장 역할을 수행하며 회사 경영 전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주주·종업원·고객의 가치 충돌 관리 방안, 중장기 발전방향 속에서 단기성과 구현 방안, 개인 및 조직 능력 극대화 방안,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분간 하는 방법 등등.

기억나는 성과로는 업계 최초로 「보험 품질 보증제도」 도입이 있다.

삼성에서 「무능」은 부정의 범주에 속할 뿐 아니라 가장 큰 부정으로 간주된다. 「무능」은 가뭄과 같아서 범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여러 갈래로 피해가 발생하고 치유하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홍수처럼 피해 범위도 제한적이고 조치도 비교적 용이한 「전통적 부정」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생활신조 (得意淡然 失意泰然)

1995년 부장으로 승진했다. 사원으로서는 최고 직급에 오른 것이다. 1979년 입사 이래 15년 2개월 동안 큰 잘못 없이 열심히 일한 결과라고 생각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머잖아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봉착할 것이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었지만 당시 삼성생명의 직급체계는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이었고, 직급에 따라 다른 역할이 주어졌다. 사원·대리는 부서원, 과장은 과의 책임자, 차장·부장은 영업국장이나 부서장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간혹 직급별 인력수급과 개인능력에 따라 역할이 달리 주어지기도 했다. 나를 예로 들면, 과장을 달고 부서장(경영 방침 실천 T/F팀장 1년, 관동 영업국장 6개월)역할을 했고, 차장 신분으로 본사 주요부서 경영지원팀장(2년)을 하기도 했다.

부장역할이 새로울 것도 겁날 것도 없지만, 학년이 바뀌듯 해가 바뀌듯 직장생활에서 또 하나의 획이 그어진 것이었다.

삼성에서 관리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 중에는, 직급 변동이 있었을 때 바뀐 직급에 맞는 능력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부장 진급 직후에 받았던 교육이 있었는데 명칭, 기간, 장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교육효과는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육은 외부와 격리된 장소에서 며칠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스스로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교육 내용의 전부였다. 교재도 강의도 없었고 집합하는 일도 리포트 작성도 없었다. 각자가 제공받은 노트에 정리된 생각을 적어가지고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25년 전에 작성된 그 노트를 꺼내보았다.

< 가훈 >

  • 크게 보고 미래를 생각한다.
  • 바르고 성실하게 행동한다.
  • 반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우리집에는 「가훈」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는 조상들의 지혜를 구체화한 것이 없었다. 단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당부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었다.

가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후대가 실천하게 할 덕목을 구체화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 끝에 만들어 보았다. 「정직」이 가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생각-실천-마음가짐을 구체화한 것이다.

아버님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다 보니 형상화시켜 내다 걸 수는 없었지만 내 후대에서 가훈으로 받아들이고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생활신조 >

득의담연 실의태연 (得意淡然 失意泰然)

일이 뜻대로 되더라도 호들갑 떨지 않고 담담하게 행동하고,

일이 잘 안 돼도 볼썽사나운 모습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나와 내 주변에서 일의 결과에 따라 반응했던 모습들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일까를 함축적으로 정리해보았다. 일의 잘·잘못에 휘둘림 없이 초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다짐의 표현이다.

사실 이 생활신조는 중국 명나라 유학자 최선(崔銑)의 「인생교훈 6연」의 내용 중 일부이다. (인생교훈 6연은 경주 최부자집 수신(修身)가훈이기도 하다.)

자처초연 처인애연 (自處超然 處人靄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유사참연 무사징연 (有事斬然 無事澄然)

일이 있을 땐 명쾌하게 처리하고 일이 없으면 맑은 마음을 지닌다.

득의담연 실의태연 (得意淡然 失意泰然)

일이 잘 될 때에는 담담히 행동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태연하게 행동한다.

가족과 회사사람들과의 관계개선 방향도 정리돼 있었다.

부모님

  • 자주 소통한다.
  • 대소사를 상의한다.
  • 화를 내지 않고 순종한다.

  • 진심으로 위해준다. (가사 돕기, 싫어하는 일 하지 않기)
  • 대화를 많이 갖고 관심표현을 자주한다.
  • 즐거운 일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딸·아들

  • 다정한 아빠가 된다.
  • 같이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 생활 속에서 존경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상사

  • 순응한다.
  • 대화하고 인내한다.
  • 정보를 주고 교육한다.

부하

  • 질책보다 지도한다.
  • 입장바꿔 생각한다.
  • 인격을 존중하고 심한 말을 하지 않는다.
  • 잦은 대화의 장을 갖는다.

동료

  • 상스런 말을 삼간다.
  • 자주 연락하고 인간적 교류를 심화시킨다.
  • 불리한 발언을 삼가고, 격려·칭찬을 한다.

생활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강

  • 조깅을 시작한다.
  • 담배를 끊는다.
  • 술을 줄인다.

생활

  • 문란한 생활을 없앤다.
  • 근검·절약한다.
  • 몸을 많이 움직이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자기개발

  • 꾸준히 영어공부를 한다.
  • OA(사무자동화)자격증에 도전한다.

당시에 5년 후, 10년 후를 조망한 내용도 있었다.

5년 후(2000년) 10년 후(2005년)
가족

연령

46세, 43세, 15세(중3),

12세(초6)

51세, 48세, 20세(대2),

17세(고2)

재산 50평, 현금 2억 50평, 현금 5억
직장 삼성(이사) 삼성(상무) 또는 자기사업

 

교육기간 중 정리한 가훈, 생활신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 방향, 생활 변화 방향 등을 집사람에게 전하면서, 집사람이 보는 나의 장단점을 적어 달라 하였더니 며칠 후 답이 왔다. (전문)

내가 본 당신의 장점

  1. 당신은 책임감이 강하다.
  2. 당신은 자기관리를 잘한다.
  3. 당신은 약속을 잘 지킨다.
  4. 당신은 자신의 일에 자신감이 있다.
  5. 당신은 비판능력이 뛰어나다.
  6. 당신은 경제적 감각이 있다.
  7. 당신은 무엇이든 잘 먹는다.
  8.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9. 당신은 성실하다.
  10. 당신은 무슨 일이든 잘 할 수 있다.
  11. 당신은 노래를 잘한다.
  12. 당신은 건강하다.
  13. 당신은 유머감각이 있다.
  14. 당신은 똑똑하다.
  15. 당신은 책을 많이 읽는다.
  16. 당신은 어려운 사람을 이해한다.
  17. 당신은 상상력이 풍부하다.
  18. 당신은 정리 정돈을 잘한다.
  19.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20. 당신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내가 본 당신의 단점

  1. 많은 장점들이 가족에겐 빛을 발하지 못한다. (특히 아이들과 나)
  2. 패션 감각이 조금 떨어진다.
  3. 술을 많이 마신다.
  4.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걸 좋아한다.
  5. 가족이 본인의 생각을 따르길 은근히 강요한다.

이상입니다. 단점은 생각나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신뢰의 원칙

내가 경험했던 트레일 코스 대부분은 자동차 도로변의 길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연의 길을 걷다가 험한 지형을 만나 걸을 수 없게 되거나, 군사시설, 산업시설, 발전소, 비행장 등에 가로막히면, 우회가 불가피하고 이런 과정에서 자동차 도로를 만나게 된다.

자동차 도로변은 비교적 평탄하여 걷기는 쉽지만 교통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방심은 금물이다. 자동차들은 길이 한적하니 쉽게 과속을 하게 되고, 걷는 사람은 도로에 차가 없으니 아무 생각 없이 차도로 들어서게 된다. 제 속도 내고 제 길을 걸으면 나지 않을 사고가 쉽게 발생할 수도 있다.

「신뢰의 원칙」이라는 형법상의 법리가 있다.

교통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운전자는 다른 사람도 교통 규칙을 준수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으로 족하고, 다른 사람이 비이성적으로 행동을 하거나 규칙을 위반하여 행동할 것을 미리 예견하여 조치할 의무는 없다.

쉽게 예를 들면, 푸른 신호를 보고 진행하는 운전자는,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차가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로 조심하며 서행으로 운전할 의무는 없다.

쉽게 이야기하면 정당한 규칙(제도·기준·지시)을 믿고 한 행동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는 사회(조직)가 선진 사회(조직)이고, 이 원칙이 적용되면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1996년 1월, 3년 동안 몸담았던 경영지원팀을 떠나 개인보험사업본부 산하 영업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발령에 앞서 고위임원들과 상사로부터 발령 배경을 들었다.

① 1995년 결산을 전망컨대 비차손의 발생이 예견되고,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손실은 매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② 비차손 발생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이면서 이를 해소해야 할 책임이 있는 개인보험 사업본부의 역할 수행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③ 전사 손익 관리 경험있는 경영지원팀장이 영업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겨 비차손이 발생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한다. (반드시 점포 축소와 판매 비례비 지급기준 변경을 포함)

개인보험 사업본부장, 영업담당임원, 영업기획팀장이 동시에 바뀐 상황이므로, 고위임원이 특별히 비차손 대책 실무작업을 맡아 할 부장을 불러 배경 설명과 구체적 업무지시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보험회사가 사용하는 비용의 재원은 계약자가 납부하는 보험료의 일부(부가보험료)이다. 재원을 초과해서 비용을 사용하게 되면 비차손이, 재원 내에서 사용하면 비차익이 발생한다. 비차손이 발생하는 이유는 재원이 줄어들었거나 비용이 늘어났기 때문인데 1995년의 손실은 비용증가가 주 원인이었다. 비용의 85% 이상이 판매 비례비(설계사수당, 점포운영비 등)이고 영업실적에 연동된 기준에 의해 지급되는데, 최근 몇 년간 변경된 지급기준이 비용증가의 원인으로 지목 되었다.

비차손 대책을 수립하는 일은 영업기획팀 고유업무를 하면서 추가로 진행되어야 했으므로 별도 T/F팀을 만들어 수행하기로 하고 업무계획을 만들었다.

 

비차손 대책 T/F팀 구성 : 정보 공유 및 업무 분담

 

작업 범위 설정 : 작업 대상 및 규모 결정

 

대책 수립 : 세부내용 구체화

 

의사결정 : 관련부서 합의 및 전결권자

승인

 

현장교육·전파 : 배경 및 내용 설명

 

Top-Down으로 진행된 일이었으므로 T/F팀 구성은 순조로웠으나 작업범위를 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개인보험 사업본부내의 의견은, 비차손 제거에는 동의하지만 설계사 수당을 깎거나 점포를 축소하는 것은 영업현장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되니 다른 방법을 찾길 원했다.

「총론 찬성, 각론 반대」

작업 범위를 정함에 있어 고위임원 지시와 개인보험 사업본부 내 의견이 상충되는 상황이었지만 원활한 업무진행을 위해 나름대로의 작업 범위를 정하고 대책수립에 돌입했다.

< 설계사 수당 삭감 >

모집수당

– 수당지급 기준이 되는 성적계산 방법 축소 변경

– 분급이연 (2년 이상까지)

– 퇴직자 잔여 모집 수당 지급 중지

수금수당

– 자동이체·지로 등 비 방문 수금 수당 대폭 삭감

– 방문 수금 수당 지급율 축소

< 점포 관련 >

  • 부진 영업국 폐쇄 및 통폐합
  • 점포 운영비 지급율 축소
  • 시책비, 판촉비, 회의비 낭비요인 제거

완성된 대책은 별다른 수정 없이 결재되었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비차손은 원천적으로 제거되고 비차익이 발생하는 구조로 전환될 것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영업현장에서 근무하는 점포장들에게 대책수립 배경과 내용을 설명하고 양해와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업무의 중요도로 보면 사업본부장과 담당 임원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되었으나, 6개 총국 방문 계획을 만들어 상의하는 과정에서 내려진 결론은 「본인들은 내용을 잘 모르니 대책수립을 도맡아 한 영업기획팀장이 가서 설명해라」였다. 결재란에 서명은 했지만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간접적 의사표시로 생각되었다.

비차손 대책을 달리 말하면, 영업사원 월급 깎고 영업자금 조이고 진급포스트를 줄인 것이다. 흔쾌히 받아들일 사람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느슨함」이 「절박함」으로 바뀌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6개 총국 가는 곳곳 난리가 났고, 나는 영업을 망치는 나쁜놈이 되어 영업기획팀장 1년 만에 잠실영업국장으로 좌천되었다.

현장의 반발은 많았지만 대책은 원안대로 실행되어 비차손은 완전히 해소되었고 비차익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비방문 수금 건의 수당삭감은 향후 지로·자동이체가 늘어남에 따라 그 효과가 매년 커졌고, 업계 최초로 퇴직자에게 잔여 모집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조치는 업계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영업기획팀장 발령 전 나를 별도로 불러 임무를 명확히 해준 고위임원,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결재를 한 사업본부임원, 그분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정당한 지시가 있었고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하여 성과를 내더라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좋지 않은 교훈 하나를 챙긴 것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잠실

결혼 후 신혼살림이 차려진 곳은 잠실에 있던 서민 아파트였다.

잠실동 19번지 주공아파트 15동 401호.

아버지는 1976년 1월 아파트를 취득하셨고, 이후 나는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 생활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생활도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4년 2월, 온갖 대출을 동원하고 15동 401호 전세 준 돈까지 끌어 모아 마련한 고덕아파트로 이사하기까지 8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었다.

잠실은, 처음에는 강남구 잠실동이었지만 이후 행정구역 변경으로 강동구(1979년)를 거쳐 지금은 송파구(1988년) 잠실동이 되었다.

옛 문헌에 잠실은 원래 한강 이북에 위치해 있던 동네였었다. 그러다 1900년 즈음 어느 날 홍수로 북쪽에 물길이 생기면서 강물에 싸인 섬이 되었다가, 1970년대 초 한강정비사업을 하면서 남쪽 물길을 막아 강남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지금은 재건축을 통해 「잠실 엘스 아파트」로 거듭나 고급아파트가 되었지만, 내가 살았던 15동 401호는 분양면적 13평 방 2개의 조그만 아파트였다.

처음에는 5식구(부모, 누나, 나, 동생)가 살았었고, 작은 누나가 시집가서 4식구, 동생 군입대로 3식구가 살다가, 결혼하면서 다시 4식구가 살게 되었다.

5층짜리 아파트에 승강기는 당연히 없었고, 계단을 걸어 4층까지 배달되는 연탄으로 난방과 취사를 했다. 더운물이 공급되지 않아 찬물로 씻거나 솥에 물을 데워서 써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주거환경이었었다.

방황하던 10대를 혜화동과 그 언저리에 있는 강북지역에서 보내고, 20대가 되어 살기 시작했던 잠실. 그곳에서 생활했던 8년의 세월은 「바르게 일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기간」이었고, 그 시절 흘렸던 땀의 결실로 이후의 삶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져 갔다.

1997년 1월 잠실영업국장으로 발령받았다. 잠실을 떠난 지 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떠날 때 20대 후반의 청년은 40대의 장년이 되었고, 대리는 부장이 되었으며, 신혼의 남편에서 두 아이가 있는 가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외양만 보면 금의환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조직 생활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하고, 희망과 의욕도 상실한 채 내동댕이쳐졌다는 표현이 적합한 상태였었다.

발령 당시 잠실영업국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 임원으로 발탁된 전임자의 무책임한 업적 Drive의 후유증.
  • 분할 규모에 못 미치는 영업국을 무리하게 분할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갈등.
  • 조직능력을 상회하는 과도한 목표와 급작스런 조직 변화로 떨어진 조직원들의 사기.
  • 무엇보다 큰 문제는 새로 발령 난 영업국장의 「정리되지 않은 심리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선택을 마치고 행동하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었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① 삼성생명을 떠난다.

  • 다른 회사를 찾는다.
  • 월급쟁이를 청산하고 내 사업을 시작한다.

② 계속 근무하며 현 상황을 극복한다.

그 당시 15동 401호에는 부모님 두 분만 따로 살고 계셨다.

고덕으로 갈 때 들였던 세입자를 내보내고 대대적인 수리를 거쳤어도 여전히 불편한 구석이 남아있던 15동 401호.

어머니는 나의 잠실 발령을 너무 좋아하셨다. 표현은 않으셨어도 아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어머니. 발령 첫날 점심 먹으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좋아하는 국수를 준비해 놓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가까이 왔으니 자주 와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시자며 두 손을 꼭 잡아주시던 어머니.

보험회사의 영업조직은 조직 단위별로 목표가 주어진다.

설계사는 자격·급수에 따라 계약 목표가 있고, 영업소장은 관리하는 설계사들을 통해 달성해야 할 영업소 목표가 있다. 영업국장도 영업소를 지원 관리하여 얻어내야 할 영업국 목표가 따로 있다.

각 조직 단위는 주어진 목표와 실적을 견주어 평가받고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는다. 설계사가 많은 소득을 얻으려면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영업소장의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영업소장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본인이 잘하는 것 이외에도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영업국장의 지원이 필요하다.

마음은 ①번을 선택하고 싶으나 머리는 ②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실망을 안겨드리기 힘들었고, 영업국장이 불안정해서 부하들이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판단을 하더라도 ①번을 선택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②번을 선택하고 영업국 현황 파악을 마쳤다.

  • 과도한 목표(1월 영업국 목표 달성률 56%, 마이너스 실적 영업소 총 7개 영업소 중 2개)
  • 잘못된 영업 관행(부실·작성계약, 영업비용의 그릇된 집행)

총국과 상의하여 일부 영업소장을 교체하고 영업자금 추가지원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부하들이 땀을 얼마나 어떻게 흘리느냐에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생각하고 부단히 노력했다. 7개 영업소인 잠실영업국에서 23개 영업소의 관동영업국에서 하던 일의 2배 이상을 했었다고 생각한다.

힘겹게 상반기를 보내고 잠실영업국은 9월 전사 최우수 영업국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매달 1곳이 선정되는 전사 최우수 영업국을 100개 영업국이 돌아가며 한다면 8년 이상이 걸린다.)

나는 후배(부하) 복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관리자가 되어 거쳐 온 부서에서 만났던 후배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나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어려움도 이기고, 결국 좋은 성과를 만들어 냈다.

IMF 사태로, 쉽지 않은 영업목표가 부여되었었지만, 잠실의 후배들은 나와 하나가 되어 멋지게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Ⅳ. 왜 불러

마음이 가야 몸이 가고 의사가 있어야 행동이 따른다.

공부하기 싫은 놈 책상 앞에 앉혀놓은들, 물먹기 싫은 말 강가로 끌고 간들, 정조관념 없는 여자 정조대 채운들, 변화할 의사 전혀 없는 조직을 project로 밀어붙인들,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삼성생명에서 받은 선물

태안 해변길은 집사람과 둘이서 다녀왔다. 2019년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 3박 4일 동안 서울의 크리스마스 들뜬 분위기에서 벗어나 겨울 서해바다의 매력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태안군 원북면 학담포에서 시작해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만리포, 몽산포, 백사장항, 꽃지해변, 황포항을 거쳐, 안면도 최남단 영목항에 이르는 7개 코스 100km.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비교적 평탄하게 조성된 태안 해변길의 「서해」는 해파랑길에서 만났던 「동해」와는 사뭇 달랐다. 「다르다는 것」은 비교 우위나 열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르다거나, 낫고 모자라다거나, 좋고 싫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해와 서해는 그렇게 달랐다.

1999년 1월 삼성생명에서 삼성생명 자회사인 삼성선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유형의 「자리바꿈」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삼성생명은 더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그간의 정리(情理)를 생각해서 얼마간의 말미를 주니 그 이후 생활은 알아서 미리미리 챙겨라.
  • 기대를 하지는 않겠지만, 자회사에 있는 동안 회사의 배려에 감사하며 할 수 있는 일은 충실히 하라.

19년 2개월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의 결정을 받아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늘 「주인의식」을 갖고 일했고 어떨 땐 「네가 주인이냐?」는 비난까지 받아가며 살아온 「착각의 세월」이 못내 한스러웠다. 임원 승진을 기대하고 있다가 받은 결정이어서 충격이 더 했다.

사원·대리·차장 때 한 번씩 총 3회에 걸쳐 유례없는 특별승급도 했었고, 매 반기 하는 업적고과, 연 1회 하는 능력고과 결과 대부분 우수 또는 탁월의 평가를 받았고, 나쁜 평가를 받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나름 내세울 만한 기여도 적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회사에서 쫓겨났는지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IMF사태는 나의 개인적인 고통과 갈등을 식혀주는 진통제가 되었다. 시체가 사방에 널려있는 전쟁터에서, 보는 이도 관심 갖는 이도 없는데, 부상 입었다고 소리쳐 보았자 득 될 일이 없었다. 비바람은 일단 피해가자고 마음먹었다.

  • 삼성생명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내색 하지 않는다. (가족, 친지, 아는 사람 누구에게도)
  • 이번 기회에 전직과 창업을 조용히 준비한다. (3년 이내 완성)
  • 새로 맡은 삼성선물 업무는 충실히 수행한다. (미경험 분야, 창업에 도움)
  • 눈치 보거나 거리낌 없이 자신 있게 내 삶을 산다. (더 잃을 게 없는 상황)

새롭게 시작하는 삼성선물에서 해야 할 일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장을 포함해 전 직원이 10명도 안 된 상태에서, 석 달 뒤인 1999년 4월 출범하는 한국선물거래소의 일원이 되어 회사가 영업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했고, 그에 앞서 회사의 골격을 만들어 일반적인 업무가 돌아가게 하는 일과, 전산시스템, 리스크 관리시스템 등 금융회사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도 시급했다.

경영지원실장·상무 호칭을 달았지만, 보수는 삼성생명 부장에도 못 미쳤고, 해야 할 일은 신입사원이나 여사원이 하던 허드렛일부터 회사경영과 관련된 비중 있는 일까지 눈물 나게 많았다. 사업의 근거가 되는 법률과 감독기관의 기준에 맞추어 회사 정관과 규정을 만들어야 했고, 업무와 영업을 담당할 직원들을 채용하는 것도 나의 업무였다. 예를 들 것도 없이 영업, 경리, 관리, 인사, 총무, 교육, 홍보, 전산 등 모든 일에 나의 결재가 필요했다.

몇 달을 일에 파묻혀 정신없이 보냈다. 하도 바쁘다 보니, 「내가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내쳐진 것이 아니라, 일을 잘해서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보내진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월급날이 없었으면 착각의 시간이 많이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삼성생명의 여러 자회사 중에서 삼성선물은 만들어진 배경이 달랐다. 여타의 자회사는 모회사의 조직, 업무, 기능 일부를 떼어내 분사시키거나 업무의 효율성·편의성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져 어떤 형태로든 모회사 업무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삼성선물은 삼성생명 업무와는 무관하게, 미래 금융시장의 발전 방향을 예측하고 「국제선물」이라는 조그만 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인수자금을 포함한 자본금을 삼성생명이 부담하다 보니 모·자 관계가 만들어진 경우이다.

삼성선물의 사업영역은 국내외 파생상품의 중개와 매매이고, 거래는 선물거래소를 통해 이루어지며, 제반 경영활동은 금융감독원의 감독대상이 된다. 이렇다 보니 다른 자회사와 달리 삼성생명의 「지시와 간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일부나마 자회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영판단도 가능하였다. 가끔 울화가 치미는 삼성생명의 「설익은 지시와 간섭」을 제외하면, 삼성선물에서의 생활은 만족에 가까웠다. 「소득과 명예」는 거꾸로 갔어도 그보다 더 큰 「배움과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분야>

완전할 순 없었으나 20년 가까운 세월은 보험과 보험회사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거기에 얼마간의 시간이 더해진다고 해도 크게 차이 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은 배우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됐다.

  • 사업과 회사경영의 근거가 되는 법률·규정·제도
  • 감독기관·유관기능의 업무영역·관계관리
  • 금융상품(기초/파생) 및 가격 결정 구조
  • 금융상품별 고객·시장 / 거래방식·RISK관리 등등

기쁜 마음으로 선물거래중개사 자격증도 땄고, 오랜만에 공부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다.

<두려움 없는 시작>

새롭게 시작할 때 느껴지는 두려움은, 대개의 경우, 새로움에 대한 정보·지식이 부족하거나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선물에서의 시작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부족한 정보와 지식은 기꺼운 마음으로 배우고 익히니 문제될 게 없었고, 신설회사이기에 적응해야 할 「조직구조」나 「기업문화」가 따로 없었다. 앞으로 내가 만든 조직에서 나에게 익숙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 될 것이었다.

마치 공부하길 원했던 「그림 그리기」를 배울 기회를 얻고 나서, 아무 흔적도 없는 흰 도화지까지 받아들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내 취향대로 그리는 것처럼.

<무료수업>

중소기업의 어려움 중 하나가 원하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기업의 규모를 놓고 보면 많은 사람을 쓸 수는 없는데, 해야 할 일의 분야는 대기업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여러 가지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의 분야를 비제조 기업 기준으로 몇 가지만 열거해도, 영업, 경리, 세무, 인사, 총무, 교육, 홍보, 전산, 금융 등이 있다.

최소 인력으로 출범한 중소 금융회사 삼성선물의 상황이 그러했다. 처음에는 힘들게 일을 배워 직접도 해보았고, 나중에는 분야별로 업무에 적합한 사람을 구해 일을 맡겼다. 그 과정에서 업무의 속성·특성, 관리 포인트, 리스크 등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향후 전직을 하던 창업을 하던 두루 필요한 것이었기에, 과정에서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꺼이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2001년 4월 삼성선물을 떠나 다시 삼성생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2년 3개월,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늘 동해안을 걷다가도 서해가 불현듯 생각나면 서해안을 걸을 수 있고, 매일 짜장면을 먹었는데 갑자기 짬뽕이 땡기면 짬뽕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 애써 선택하지 않은 일이 좋은 결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삼성선물 2019년도 결산내역을 보면 매출 810억, 당기순이익 190억, 임직원 110명, 시장점유율 1위이다.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최고의 선물회사로 성장하였다.

(부임 당시 자본금 100억, 현재 250억)

민짜로 주세요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에 가게 되면 전에 없던 장면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주메뉴가 나오기 전에도 식탁에 반찬이 오르면 수저를 들던 우리 때와는 달리, 음식 차려지기가 전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난 후에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음식의 맛이나 사용한 재료뿐 아니라 맛깔스레 보이는 모양도 중요해진 듯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음식의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식재료, 소위 「고명」이 갖는 의미가 전과 다르게 되었다.

모두가 즐겨먹는 음식인 냉면은 특별한 반찬 없이 차려지므로, 면사리 위에 얹히는 고명의 비중이 다른 음식보다 크다. 소고기·돼지고기 수육이 자리 잡기도 하고 꿩고기로 만든 완자가 오르기도 한다. 삶은 계란, 예쁘게 준비된 지단, 여러 종류의 김치, 배와 같은 과일 등 화려하지는 않아도 차별화된 경쟁력을 과시하기 위해 정성이 깃든 고명들이 얹힌다.

아버지는 모든 면 요리를 즐겨 드셨고 그중에서도 냉면을 특히 좋아하셨다. 계절에 관계없이 냉면을 즐기셨는데 늘 평양냉면 「민짜」를 주문하셨다. 대식가답게 고기를 드신 후 냉면으로 입가심하실 때도 의례 「민짜」를 찾으셔서 민망할 때도 있었다.

냉면을 주문하게 되면 면사리 위에 고명이 얹힌 「보통」이 나오고, 면을 넉넉하게 먹을 생각이면 곱빼기를 시키거나 사리를 추가해서 먹는다. 특별나게 인심 좋은 주인이 아니라면 곱빼기나 사리를 추가할 때 값을 치러야 한다.

추가비용 없이 보통 값으로 면을 넉넉히 먹고 싶을 때 주문하는 것이 「민짜」다. 민짜는 면의 양이 보통의 2배 가까이 되는 대신 고명이 없다. 만족할 만한 양의 면과 육수로만 구성된 것이 민짜다. 모양이나 꾸밈이 빠지고 냉면 본연의 맛을 즐기면서 양도 충족시킬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다.

민짜가 모든 냉면집에서 취급되는 것은 아니고, 설사 민짜를 팔더라도 메뉴판에는 민짜의 존재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름나고 전통 있는 냉면집에서 냉면의 진정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끼리 서로 비밀을 주고받듯 암암리에 즐기는 메뉴다.

온 나라를 슬픔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IMF사태는, 이후 개인들의 삶과 기업의 경영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개인차는 있겠으나,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할 필요성에 적극 동의하게 되었고, 스스로 가치 판단 기준을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IMF사태를 거치는 동안 기업의 생존을 위협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검토와 대책을 준비하게 되었고, 「외형 또는 실질」, 「양 또는 질」같은 해묵은 논쟁에 대한 종지부도 찍을 수 있었다. 특히, 기업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영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도 모아지게 되었다.

다른 금융기관과 마찬가지로 삼성생명도 IMF사태를 거치며 유동성 위기라는 공포를 경험하게 되었다. 「손해 봐도 좋으니 맡긴 돈 돌려 달라」는 계약자들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도 거절할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유동성있는 자산은 바닥을 향해 치닫는 상황. 소위 말하는 「비상대책」을 동원해서 가까스로 급한 불은 껐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회사를 어떠한 외부환경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선 것이었다.

리스크 관리.

보험회사의 경영은 「고객의 리스크에 값을 매기고 회사는 리스크를 인수·관리하는 과정에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당연히 경영의 본질인 리스크 관리를 중심으로 판단·결정되었어야 했을 일들이 조직, 매출, 이익 같은 일반회사의 「전통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게 된 것이었다.

관리해야 할 리스크 요인들을 열거, 각각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기준과 제도를 만들고 이들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시스템화하면 리스크 관리의 틀은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을 운용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경영판단기준을 전통적 가치에 두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이나 리스크 관리에 실패하여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새로이 만들어진 시스템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합한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삼성선물에 있던 나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과거 근무했던 부서의 상사·동료·부하로부터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적임자로 낙점받을 때까지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제까지의 인사 관행상 자회사로 방출한 사람을 다시 데려오는 사례도 없었거니와,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중책을 맡기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정빈」을 더이상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어 방출했던 사람과 필요하니 다시 데려오라는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내가 적임자로 결정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지만 IMF사태가 준 교훈이 그대로 살아있었고, 리스크 관리 실패의 책임을 지고 영업을 맡았던 대표이사와 담당 임원이 보직에서 물러나는 등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커진 점, 나를 지지하는 상사·동료·부하들의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설득이 주효하여 나의 복귀는 결정되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 떠난 지 2년 3개월만인 2001년 4월 삼성생명 마케팅 팀장으로 돌아왔다.

유례없는 자회사에서의 복귀, 부장으로 떠났다가 상무보 3년차로의 승진, 선망의 대상인 주요 보직, 누가 보아도 화려한 귀환이었다. 회사가 적임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내가 후보자가 되었다는 것도, 밀고 당기는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최종 결정이 난 후에야 전해 들었다. 복귀를 기대한 적도, 복귀를 위해 노력한 것도 없었기에 나를 추천하고 지지해준 분들이 더욱더 고마웠다.

능력도 부족하고, 강한 성정으로 많은 단점을 갖고 있던 나를 선택해주신 분들의 판단기준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명 있는 「보통」보다는, 고명은 없지만 냉면 본연의 맛도 즐기고 포만감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민짜」냉면.

잔칫날 잡을 돼지의 「얼굴」보다는 「육질과 무게」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닐까 싶다.

Change Management

초등학교 시절 여자아이들의 대표적 놀이 도구가 고무줄과 공기라면, 사내 자식들에게는 구슬과 딱지였다. 상대적 고가품인 구슬은 고학년에서, 딱지는 저학년에서 주로 가지고 놀았다. 딱지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집에서 종이를 접어 만드는 딱지치기용과, 딱지 제조업자가 인쇄하여 파는 다용도가 있었다. 다용도 딱지는 구슬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놀이 도구도 되고 재화(?)로서의 역할도 했다. 다용도 딱지는 100장을 한 묶음으로 해서 상자에 보관하곤 했는데 딱지가 많이 모여 상자에 가득 차면 세상을 얻은 것처럼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다용도 딱지로 「계급 따먹기」놀이를 많이 했다. 딱지에 그려진 계급을 비교하여 높으면 따고 낮으면 잃는 놀이이다. 계급은 별 넷 대장이 제일 높고 작대기 하나 이등병이 제일 낮았다. 한 장씩 비교하기도 하고, 몇 장을 묶어 마지막 장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 놀이의 묘미는 「챈지」에 있다. 「챈지」라고 인쇄된 딱지가 나오면 상대방 계급에 상관없이 무조건 상대방과 딱지를 교환해야 했다. 「챈지」를 상대방의 높은 계급과 바꾸면 내가 유리해지고, 낮은 계급과 바꾸면 내가 불리해지는 것이다. 「Change」딱지가 어떻게 쓰였느냐에 따라 놀이의 승패가 갈렸었다.

2001년 8월 새로이 조직된 변화관리팀(Change Management Team)으로 발령받았다.

마케팅 팀장을 했던 5개월 동안, 개인보험 영업부문의 손실 해소 대책 설계와 영업조직 구조조정 준비를 마무리 짓고, 본격적으로 전사적인 「Change」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삼성생명은, IMF사태로 얻은 교훈과 그룹의 권고로,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아 변화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Mckinsey & Company(이하 맥킨지)와 전략컨설팅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내용에 따라 맥킨지의 전략컨설팅을 지원하고 감독할 삼성생명 파트너 부서로 만들어진 것이 변화관리팀이다.

변화관리팀이 맥킨지와 함께 수행해야 할 일들은 다음과 같았다.

  1. 변화의 기본방향 설정
  2. 주요과제 도출
  3. 과제 수행부서 지정 및 역할분담
  4. 과제 수행 계획 수립 지원
  5. 진척도 관리 및 평가

맥킨지 컨설턴트들은 세계 유수 대학의 석·박사 학력 소지자가 대부분이었고, 맥킨지가 컨설팅을 통해 얻은 경험과 자료는 체계적으로 축적되어 있어 컨설턴트의 경력이 짧아도 보완이 가능했으며, 단순 기능 업무는 별도 시스템으로 지원되어 컨설턴트들의 업무 생산성은 대단히 높았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건이나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일을 처리해내는 프로의식이었다.

맥킨지 컨설턴트들과 함께 일할 변화관리팀 팀원들의 수준도 맞추어져야 했으므로 팀 구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변화의 기본방향을 잡고 주요과제를 도출하는 일은 맥킨지팀, 변화관리팀과 CEO가 결정하면 끝날 일이지만, 과제수행부서 지정부터는 현업과의 마찰과 갈등이 불가피했다.

「모두가 상황이 바뀐 것을 인정했지만, 아무도 변화를 원치 않았다」

변화의 기본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결정사항이었지만, IMF사태의 교훈과 그룹의 권고가 있어서 쉽게 마무리 되었다.

① 경영의 틀을 「Return」에서 「Risk & Return」으로 바꾸어 Risk를 염두에 둔 의사결정이 일상화 되도록 한다.

② 조직과 인력의 수준이 「Amateur」에서 「Professional」로 바뀌도록 제도를 만들고 체계화한다.

③ 영업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고객 정보가 「방치」되지 않고 「적극활용」되도록 정보가치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등의 기반을 만들어 미래 경쟁력을 확보한다.

변화의 기본방향에 맞추어 회사 전체로 31개의 변화관리 project가 선정되었고, 그 밑에 sub project와 업무내용들이 구체화되었다.

변화관리 project는 비용절감 및 구조조정, 조직재설계, 판매채널개혁, 자산운용 역량제고, 상품운용 경쟁력 강화, HR혁신, 전사 CRM체제구축, 전략적 IT구축, 해외진출 및 제휴 등 경영 전 부문에 걸쳐있었고 project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과제들이었다. 변화관리 project는 31개에 불과했지만 해야 할 일들은 수백·수천이 되었다. 그것도 전에는 하지 않던 새로운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Middle Up Down」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는 「Top Down」이었으므로 밑에서 받는 압력은 대단했다.

매주 1회 업무별 일정별 진척사항이 점검·보고·평가되었다. 현업의 변화과제 책임자는 임원들이었고 변화관리팀에도 과제별로 담당자가 있었는데 직급이 낮았지만 지휘 부서에 있다 보니 묘한 관계가 형성되어 이 또한 현업부서에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배우자 사망을 스트레스 지수 100으로 했을 때 다른 「생활 사건」들을 상대적으로 지수화한 연구가 오래전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로부터 있었다. 「Holmes & Rahe Stress Scale」로 알려진 연구에서 43개의 생활사건이 지수화되었고, 지난 1년간 지수의 합이 300을 넘게 되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연구의 내용이었다.

43개의 생활 사건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모두가 변화와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살다가 변화를 만나 만들어진 스트레스 지수를 보면, 이혼 73, 별거 65, 감옥살이 63, 가까운 가족사망 63, 본인 부상·질병 53 등으로 배우자 사망 100의 뒤를 잇고 있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 변화 중에서도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변화, 예측이 안 된 상태에서의 느닷없는 변화,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 이루어진 수동적 변화들의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변화관리팀과 맥킨지가 주도하고, 현업부서가 주체가 되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현업부서가 받는 스트레스 지수는 얼마나 됐었을까?

기구조직상 변화관리팀은 2003년 12월까지 존속했었다. 그러나 이미 2002년 하반기에는 변화관리 project를 관리하는 기능을 빼앗겼고 이후 작업은 현업부서에서 각자 알아서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회사 내 주요부서에서 우수인력을 모아 변화관리팀을 직접 만들었고, 마지막까지 팀장 역할을 담당했던 나로서는 아쉬움이 컸다.

변화관리팀이 PMO(Project Management Office)가 되어 추진한 전사 경영혁신, 명분이 뚜렷했고 방향도 맞았다. 변화관리팀을 비롯하여 관련된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일했고 제반 지원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변화관리팀의 역할 중단 사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익명투서로 시작된 그룹비서실의 감사결과나 변화 저항세력이 지적했던 변화관리팀원들의 부적절한 처신과 같은 곁가지들을 쳐내고 나면 분명해진다.

변화 주도세력과 변화 저항세력 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변화 주도세력의 리더인 CEO가 변심을 한 것이었다. 변화 주도세력은 명분, 성과, 피, 땀, 헌신같은 무기를 들고 「보직」을 걸고 싸웠다면, 변화 저항세력은 인간관계, 조직분위기, 눈물, 뒷조사, 투서 따위를 무기삼아 「직장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

경영혁신을 결정하고 시작했을 때는 CEO가 변화 주도세력 편에 서 있다가, 변화 피로가 축적되고 저항세력이 만든 잡음이 커지자 다른 걱정이 생긴 것이라 생각되었다. 어찌 보면 오너가 아닌 전문 경영인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

변화관리팀의 역할 중단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도 없이 몇 개월의 공전 끝에 엉뚱한 「6시그마」가 거론되다가 변화관리팀은 사라졌다. 변화관리팀이 해체된 후 팀원들은 인사상 심대한 불이익을 받았다. 고과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를 떠난 사람, 석연치 않은 징계를 받은 사람이 있었고, 진급누락, 한직 발령을 받아 지방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헌신적 노력의 대가로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치졸한 인사보복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친구와 술잔 기울이며 「Change」딱지 잘못 써서 판을 망가트렸다고 했더니, 「Change Management를 잘하려면 Change Management를 먼저 했어야 했다」고 해서 뜻을 물었더니, 「변화관리를 잘 하려면 똥별들을 먼저 날렸어야 했다」는 의미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스트레스 지수(성인)

(Holmes & Rahe Stress Scale)

생활사건 점수 생활사건 점수
배우자 사망

이혼

별거

수형생활

가까운 가족의 사망

100

73

65

63

63

자녀와의 별거

배우자 식구와의 갈등

우수한 업적 성취

배우자의 취직·퇴직

입학·졸업

29

29

28

26

26

본인의 부상이나 질병

결혼

해고

별거 후 재결합

은퇴

53

50

47

45

45

생활환경의 변화

개인의 습관 교정

직장 상사와의 갈등

근무시간·조건의 변화

거주지 변화

25

24

23

20

20

가족의 건강변화

임신

성적 장애

가족 수의 증가

사업 재정비

44

40

39

39

39

학교 변화

여가활동 변화

종교활동 변화

사회활동 변화

만불 이하의 대출

20

19

19

18

17

재정상태의 변화

친한 친구의 사망

근무 부서의 변화

배우자와의 언쟁회수 변화

만불 이상 주택담보 대출

38

37

36

35

32

수면습관의 변화

동거가족 수의 변화

식습관의 변화

휴가

명절

16

15

15

13

12

담보권 행사

직장에서의 담당업무 변화

30

29

가벼운 법률 위반 11
  • 1년간의 생활사건 점수를 합하여 300점이 넘으면 건강에 적신호. (동일사건 반복 발생 시 반복회수를 더하여 계산)

정조대와 변화 관리

12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시작해서, 13세기에 프랑스, 이후 15세기에는 전 유럽에 걸쳐 유행했었다는 발명품이 있다. (현존하는 물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임)

장사를 위해 먼 길 떠나는 상인이나, 십자군 원정 등으로 장기간 집을 비우는 군인들이 주요 구매자였었고, 튼튼한 가죽이나 쇠·은 등의 금속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잠금장치도 있어 주인의 의사에 반하는 타인의 사용이 배제되었던 물건.

처음에는 외부로부터의 강제적 침탈을 막겠다는 방어적 목적이 컸지만 나중에는 내부의 불건전한 욕구를 강제적으로 억누르는 용도로 주로 쓰였던 물건.

남편이 아내, 아버지가 딸을 위해 어려운 결정 끝에 비용을 부담하고 구매했지만 사용자로부터 전혀 환영받지 못했던 물건.

좋은 의도를 갖고, 비싼 재료를 써서 견고하게 만들어 자물쇠까지 달아 놓았지만, 실제로는 무용지물이었고 조롱의 대상까지 되었던 물건.

남편에게는 자물쇠 달린 물건과 열쇠를 팔았고, 아내에게는 별도 열쇠를 고가로 팔아 장사꾼들에게 떼돈을 몰아주었던 물건.

물건 믿고 경계심 늦춘 남편과 기회를 틈타 스릴있는 자유를 만끽한 아내, 한심한 내외들을 양산했던 물건,

「정조대」.

배설은 가능하지만 성교나 자위행위는 못 하게 막을 수 있는 설계 능력과 가죽이나 금속소재에 잠금기능까지 갖춘 제조기술을 사는데 들인 「비용」. 때맞추어 잠그고 열고 해야 하는 「수고」. 착용의 불편함과 치욕감으로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욕설을 참고 들어줘야 하는 「인내」. 그러면서도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도달할 수도 없는 현실에서 느끼는 「자괴감」.

정조 관념을 심어주면 될 일이었지만, 가늠이 용이하지 않은 정조 관념보다는, 눈에 보이는 정조대를 너무 쉽게 선택하다 보니, 성과도 없이 치른 대가가 너무도 컸다.

마음이 가야 몸이 가고 의사가 있어야 행동이 따른다.

공부하기 싫은 놈 책상 앞에 앉혀놓은들, 물먹기 싫은 말 강가로 끌고 간들, 정조관념 없는 여자 정조대 채운들, 변화할 의사 전혀 없는 조직을 project로 밀어 붙인들,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변화관리팀장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조직이 원치 않는 변화를 강요받으면 대부분의 경우 저항을 하고 이때의 저항은 크게 네 가지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듯했다.

첫째는 「위장」, 상황을 판단해보고 다른 의사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변화를 수용하는 것처럼 자신과 주변을 속이는 행동이다.

둘째는 「왜곡」이다. 요구받은 변화로 가는 길이 힘들어 대체안을 낸다지만 그 대체안의 대부분이 변화를 유야무야 시키기 십상인 경우를 말한다.

세 번째는 「거부」이다. 변화를 강요받고 일정 기간 지난 후에 나타나는 반응 중 하나이다. 변화에 대하여 검토도 많이 했고 변화하려는 노력도 해 보았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변화가 불가하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인데, 대부분 주변에 동조세력이 있다.

마지막은 「공격」이다. 변화 의사결정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는 등 변화 자체에 대한 공격뿐 아니라 변화주도 조직에 대한 공격도 함께 한다. 특히 변화주도 조직의 변화속도, 범위 등 운용방법의 무모함을 적시하거나 변화주도 조직원 개인의 언행, 예절, 도덕적· 법률적 흠결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필요하면 여론몰이, 투서, 음해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변화가 가져올 파장이 큰 조직에서 행해지고 공격을 통해 변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정조대 착용을 강요당한 여인네들의 저항도 이와 비슷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일이 되게 하려면 일할 수 있는 역량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적절하게 배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이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일의 속성 파악은 몇 개의 카테고리를 정해 놓고 그 일이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변화관리팀의 일」들을 카테고리에 넣어보자.

1. 해야 할 일 / 해서는 안 될 일

외부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다.

2. 내가 할 일 / 다른 사람이 할 일

회사를 바꾸는 일을 CEO가 아닌 하부조직에서 맡고 CEO는 심판보듯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CEO가 직접 꿰차고 했어야 할 일이다.

3. 즉시 할 일 / 시간 두고 할 일

시작은 즉각적으로 하더라도 변화가 자리 잡을 때까지 부문별로 사안별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4. 대충할 일 / 철저히 할 일

하기만 하면 될 일이 아니고, 잘못되면 변화 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철저히 해야 할 일이다.

고통스러웠던 수형생활이나 지옥 같았던 군대생활을 마친 이들이, 꿈 속에서 끔찍했던 옛날로 돌아가는 악몽에 시달리듯 나도 가끔 변화관리 시절이 꿈에 나온다.

컨설팅회사에 지불한 많은 「비용」, project를 놓고 현업부서와 밀고 당기는 와중에 많은 땀을 흘렸던 팀원들의 「수고」, 욕설을 넘어 저주 섞인 말까지도 참아내야 했던 「인내」, 그렇게 애를 쓰고도 변화관리를 완성하지 못하고 팀원들의 장래까지 망치게 했다는 「자괴감」.

오늘 이후로는 변화관리팀 시절 꿈 말고 좋은 꿈만 꾸고 싶다.

변화관리팀장을 마지막으로 삼성생명에서 어떠한 보직도 맡지 못했다.

준비기간을 포함해 1년 동안의 북경 어학연수를 마치고 2005년 1월 안식년을 받았으나,

2005년 7월 스스로 삼성생명을 떠났다.

중국어 공부

2003년 말에, 2004년 임원 해외연수 대상자로 통보받았다. 연수기간은 1년이고 연수국가는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중국과 영국, 중국어와 영어를 놓고 고심한 끝에 중국으로 결정했다.

임원이 해외연수를 떠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업무상 해외연수가 필요한 임원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수 목적보다는, 마땅한 보직이 없거나 보직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임원에게 잠시 일에서 떠나있도록 하는 배려 차원의 조치이다. 나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됐는데, 스스로 느끼기에는 배려 차원의 조치라기보다는 강제 귀양 조치라고 받아들여졌었다.

죄도 없이 귀양 가는데 더 멀리 가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연수기간이 짧아 정규교육과정을 밟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1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현지에서 말을 배우고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 전부일 수 밖에 없었다. 10년 배우고도 제대로 못하는 영어를 다시 해보겠다고 헤매기 보다는 백지에서 시작하는 중국어가 차라리 나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앞으로 중국이 부상하면 중국어가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미래지향적(?)인 긴 생각과, 전혀 모르는 걸 배우면서 재미 붙이면 시간도 잘 갈 것이라는 짧은 생각에 중국어를 선택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외국에 나가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1년 반 전에 홀로 되신 고령의 어머니와, 직장생활과 어머니 모시고 하는 집안일, 두 아이 대학진학 지도까지 해야 하는 집사람에게, 심리적·지리적 거리를 크게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궁리의 과정을 거쳐 중국 북경이 연수지로 낙점된 것이었다.

중국어를 난생 처음 접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인 구성도 배우고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단어와 생활 회화라도 알고 떠나려고 학원 등록을 했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 보니 출발이 늦어져 3월 20일이 되어서야 북경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북경 首都공항을 향해가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전개될 북경생활 계획을 정하고 다짐해 보았다.

  •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제대로 익힌다.
  • 중국을 떠날 때 「되돌아 보아야 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 살아서 돌아간다.

북경 주재사무소에서 준비한 연수 내용은 중국외교부 산하 교육기관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교육기관 명칭은 北京外交人員語言文化中心, 영어로는 Beijing Language and Culture Center for Diplomatic Missions로 표기되었고, 우리는 그냥 「학교」라고 불렀다.

중국 외교부가 만든 학교에서는 북경에 주재하는 외교관과 그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는데, 어학으로는 중국어 이외에도 영어와 몇 개의 외국어가 더 있었고, 피아노·바이올린, 서예 등 예능 부분의 교과목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학을 담당하는 선생들은 대부분 석사 이상의 고학력자들이었다. 중국어와 영어를 기본으로 하고 다른 외국어도 구사가 가능하여 외교관들의 어린 자녀를 교육할 때도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생 중에서 한국어를 따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교과목과 교육시간은 매월 학교와 학생이 상의하여 정할 수 있었고 수업형태도 1:1 또는 1:다수 수업 중에서 선택이 가능했다. 수업료는 교육시간과 수업형태에 따라서 달리 정해졌다.

나는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 이 학교의 학생이 되어 중국어 회화 중심의 교육을 주5일 하루 6시간 1:1 수업을 받으며 보냈다.

학교 잘 다니는 것과 공부 잘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마찬가지다. 특히 어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 말고도 따로 시간을 내어, 익히고, 사용하고 숙달하는 자기 노력의 과정이 있어야 함을 알기에 공부하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과외공부를 하기로 했다.

첫째는 학습과외다. 평일 매일 저녁식사 후 2시간, 주말 2일간 오후 2시간, 과외선생을 집으로 불러 1:1 수업을 받았다. 교재는 학교에서 쓰는 교재와 다른 것을 선택하여, 재미도 있고 중국에 조금 더 빨리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둘째는 식사과외다. 평일 점심시간 포함 1시간 반 동안 과외선생과 식사를 하며 의식주(중국에서는 식의주)를 주제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이다. 학교에 식당이 따로 없어 매일 점심을 사먹어야 했는데 식당을 찾기도 음식 선택도 쉽지 않아 도움이 필요했었고 밥 먹으며 공부까지 하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학교공부와 과외공부 시간을 합해보니 주 50시간이 넘었다. 학교를 걸어서 오가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국말을 중얼거린 시간, 집안 구석구석에 단어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입술을 주문 외우듯 움직인 시간, 잠자리에 들었다가 낮에 배운 문장과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일어나 확인해보느라 잠을 설친 시간까지를 포함한다면 정말 많은 물리적 시간을 중국어 공부에 할애했었다.

물리적 시간 투여와 아울러 중국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노력도 병행했었다. (3개월 시한부, 6월말까지)

첫째, 북경에 나와 있는 한국사람, 회사사람이든 학교동창이든,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

둘째, 한국 TV 채널은 절대 보지 않는다.

셋째, 한국과의 전화통화도 삼가고 서울과 하는 통화는 주말 1회로 한다.

넷째, 북경연수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북경행을 계획하는 가족·친지의 방문은 7월 이후로 미루도록 양해를 구한다.

마지막으로, 조선족 파출부 아줌마는 집안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하고, 약속이 지켜지면 월말에 특별보너스 500위안을 추가로 지급한다.(월급 1,200위안+특별 보너스)

6월 말까지의 시한부 조치가 끝난 뒤에도 중국어를 배우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은 중국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7월 이후에는 중국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중국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도 하면서 내공을 쌓아 나갔다. 그러다가 2004년 12월 23일 만 9개월의 북경생활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귀국했다.

2017년 봄, HSK(중국어 수준 평가시험) 5급 이상의 자격이 있으면 경제활동도 가능하고, 수준 높은 소일거리도 생길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도전을 생각해 보았다.

중국을 떠나온 지 만으로 12년이 지났고 이따금 중국여행가서 생활중국어 사용한 것이 전부인데 가능할까? 듣기, 독해, 쓰기 각각 100점씩 총 300점 만점에 180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데 영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집사람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2018년 1월 응시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시작하고 보니 북경 시절 공부하던 기억도 나고, 아직까지 뇌세포에 쓸모 있는 중국어 찌꺼기가 적잖이 남아있는 듯 했다. 준비하는 9개월 동안 밤낮없이 중국어에 파묻혀 살았다. 예전 습관대로 쓰면서 공부하다 보니 손에 마비가 오기도 했고 다 쓴 볼펜도 7~8자루가 나왔다.

시험결과 듣기 77점, 독해 85점, 쓰기 80점 합계 242점 우수한 성적으로 HSK 5급 자격을 받았다.

그렇게 어렵게 받은 성적통지서는 한 번도 사용된 적 없이 책꽂이 한 귀퉁이에 있는 중국어교재 사이에 꽂혀있다.

북경 귀양살이

북경의 아침은 국기게양식으로 시작한다. 천안문 광장 국기게양대 앞에 국기보위대원 36명이 행진해 와서 도열하고 동쪽 지평선에 붉은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게양수가 멋진 동작으로 오성홍기를 펼치면서 게양이 시작된다. 해의 아랫부분이 지평선을 박차고 떠오르는 순간까지 게양이 계속되는 것으로 되어있고 게양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중국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이 연주된다. (실제는 예보된 일출시간에 게양이 시작되고 의용군 행진곡 연주시간 2분 7초 후 게양이 끝난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북경을 찾은 수없이 많은 중국인 여행객들은 새벽잠을 포기하고 천안문 광장에 모인다. 전국 각처에서 북경 관광길에 오른 중국 사람들이 반드시 챙겨야 할 관광거리가 된 국기게양식. 그들은 가슴 뭉클한 게양식을 보며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온몸으로 느끼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북경에서 살던 집 三全아파트는 朝陽區 東三環에 연해있는 고급 레지던스 아파트였다. 거주자들 대부분은 독일인과 일본인이었고 가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방 두 칸 거실 하나에 관리비 포함한 한 달 월세가 2,500불(18,000위안)로 상당히 비쌌고 비싼 값에 걸맞은 냉·난방, 청소, 침구세탁, 보안서비스가 제공되었다(비용을 추가로 부담하면 식사, 의류세탁, 마사지 등도 가능). 아파트에서 걸어서 30분 이내 갈 수 있는 곳에 고급백화점 燕莎쇼핑센터, 朝陽공원, 유명 디스코텍 天上人間이 있는 쉐라톤 장성 호텔, 三里屯술집거리가 있었다.

한마디로 상당히 괜찮은 주거환경이었다.

파출부 아줌마는 매일 아침 06:30에 와서 아침식사를 차려주고, 내가 학교 간 후 청소, 세탁, 주방일, 생필품 구입 등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고 퇴근했다. 아줌마는 40대 중반 나이의 조선족으로, 길림성 고향에 소학교 선생님인 남편과 두 아이를 남겨두고 북경에 와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월급 1,200위안과 한국말 안 하는 조건으로 받는 보너스 외에 내가 소개해준 낮 시간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까지 해서 2,000위안(34만원)남짓의 소득을 챙겼다. 그중 일부는 숙박비와 생활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고향에 송금하며 눈물겹게 살고 있었다. 내가 귀국할 때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주며 나와 지냈던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더니 「06:30 이른 출근과 내가 말이 없어 침묵이 흐를 때」라고 답했다.

북경의 공기에서는 지저분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조개탄 난로 때던 시절 자주 맡을 수 있었던 연기 냄새가 기본으로 깔리고 거기에 차량매연, 먼지 냄새, 음식 냄새 등 온갖 냄새가 범벅이 된 유쾌하지 않은 냄새. 주중에는 매일 학교까지 북경의 냄새를 맡으며 걸어 다녔다. 아파트 옆을 흐르는 亮馬개천을 따라 꽃시장을 지나고 동삼환로를 건너서 20여 분을 천천히 걸으면 학교에 닿았다.

아침 러시아워에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과 무시무시하게 많은 자전거 행렬, 인도를 가득 채운 분주한 발걸음들. 모두들 일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데 한가하게 걸음을 옮기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당장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장래에 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 한심스럽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에는 정말 학교 가고픈 마음이 사라지곤 했었다.

매일 학교 수업 6시간 동안 선생 한 사람당 2시간씩 3명의 선생을 만났다. 선생들은 대략 남녀 2:8의 비율로 분포되었었고, 연령은 30대가 대부분이나 가끔 20대 후반이나 40대 이상도 있었다. 학교 다니던 8개월 동안 열 명 남짓의 선생들에게 중국어를 배웠다. 수업이 1:1로 진행되다 보니 수업에 빠질 수 없었고, 수업 중에 딴짓거리를 하거나 예·복습을 게을리해서 부끄러운 상황을 만들 수도 없었다. 처음 3개월은 꼼짝없이 원칙대로 수업을 받았지만 7월이 지나면서는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컨디션이 나쁘거나 수업받을 기분이 아닌 날은 가끔 교실 밖 수업을 제안하곤 했다. 누구라도 학생 입장이 되면 「교실 안」보다는 「교실 밖」이 편하다. 교실 밖 수업 장소로 적합한 곳으로는 공원, 쇼핑센터, 문화공간, 시장, 지하철 등이 있었다. 교실 밖 수업을 받다가도, 서울에서는 한참 일하고 있을 「일과 시간」 중인데 나이 어린 선생과 사무실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일이 아닌 다른 짓을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날에는 속이 많이 상했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탁구를 치기도 했지만 그 마저 끝나면 집에 돌아가야 했고 그 시간이 되면 늘 우울해졌다. 돌아가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날 친구도, 할 일도, 놀 거리도 없이 오직 중국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대단한 고통이었다. 특히 말도 통하지 않던 북경살이 초기에는 모든 것 다 때려치고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개의 중국식당을 지나치게 되는데, 전면을 유리로 마감해서 둘러앉아 식사하는 사람들을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직장동료, 친구, 가족들인 듯한 사람들의 모임. 먹으며, 담소하는 보통의 일상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텅 빈 집에 들어가 파출부가 준비해 놓은 저녁밥을 차려서 먹으며, 혼자 하는 식사가 이렇게 처량한 줄 처음 알았고 사람의 체온이 없는 공간이 얼마나 썰렁해질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저녁 9시경이 되어 과외공부가 끝나면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한국채널은 완전 배제하고 중국채널이나 스포츠채널을 보았는데 우선순위는 스포츠채널에 있었다.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는 다른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무료함을 달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17세 어린 나이, 미모, 실력, 괴성의 「마리아 샤라포바」가 여자단식에서 처음 우승했던 2004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 중계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좋아하는 술은 우리나라 소주지만 비정상적 가격으로 사고 싶은 생각이 없어 맥주를 주로 마셨다. 우리가 고량주라고 부르는 백주도 싫지는 않았지만 긴 시간 마시기에 부적합했고 안주를 따로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靑島맥주가 낙점되었다. 파출부가 준비해야 하는 생필품 1호가 맥주였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고 양도 많았지만, 거의 매일 무식하게 마셔댔다. 어떤 날은 혼자서 맥주 20캔을 마시고도 모자라 백주까지 마시다 아침을 맞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필경 서울에서 과거 변화관리팀 부하가 보내온 좋지 않은 소식을 접했거나 우울증 증세가 도진 날이었었다고 생각된다.

불건전하고 불안정한 생활은 중국말이 어느 정도 돼서 중국인들과 교류하고 지방여행도 다니기 시작하면서 정상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람직하지 않았던 몇 개월의 일탈은 후유증을 크게 남겼다. 머리가 급속도로 빠지고 하얘져서 염색을 시작했고, 전에 없던 고혈압과 당뇨가 생겨 지금까지도 약을 먹으며 살게 된 것이다.

나의 해외살이 고달픔을 달래 주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위문단자격으로 북경을 다녀갔다.

고교 선후배모임 623회 회원들과 예전 관동영업국 직원모임 심곡회 회원들이 어려운 시간을 내주었고, 자기 자신도 추스르고 나도 위로할 겸 해서 먼 길을 일행도 없이 홀로 왔다가 돌아간 2명의 지인, 집사람과 아들, 어머니와 딸도 따로 팀이 되어 三全아파트를 다녀갔다.

북경을 떠나기 직전에는 10명의 처갓집 식구들을 북경 패키지 여행 상품으로 초대해서 집사람 목에 힘도 실어줬었다.

북경 중국어 연수과정에서 발생된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했다.

주거비와 식대를 포함한 생활비 및 파출부 비용, 학교 수업료와 과외비 등 공부하는데 소요된 비용, 현지 문화와 인프라를 견학하는데 사용된 여행경비 등 제반 비용들이 회사경비로 집행되었다.

일 안 하고 월급 받고, 회삿돈으로 고급아파트에서 살며 여행도 하고, 중국어도 배웠던 북경살이. 사전에 내 의사가 반영된 연수였었으면 정말 값진 기회가 되었을 텐데.

지내놓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중국, 중국인, 북경

예전부터 알고 있던 바와는 다르게, 북경에 사는 동안 중국 국가권력이 중국 인민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인민들이 법질서를 무시하고 공권력을 낮춰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았다. 도로에 나서면, 자동차의 경적이 끊임없이 울려대는 가운데 자동차와 자전거, 사람이 한데 뒤엉켜 만들어가는 극도의 무질서가 있고,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새치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른들과 낯 뜨거운 스킨십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는 젊은이들, 그리고 고성에 고성을 더해 귀가 멍멍해지는 소란함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공장에서는, 기준에 미달하는 불량품을 만들어 생산품을 받아든 소비자가 물건으로 쓸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만들어 자원을 낭비하고 있고, 시장에 가면, 흥정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있어 시간을 허비하거나 가짜와 진짜를 구분 못 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일견, 국가권력에 의해 의도됐거나 짜였거나 관리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낮은 시민의식에 맡겨져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방임의 상태로 보였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놓고 헷갈려하는 나에게, 본업이 방송국 아나운서인 과외선생이 거들어 준 말이 있었다.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에서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인 중에서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외국인이 겪어보지 못한 공권력의 실체를 중국인은 세월이 준 교훈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공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6·70대 늙은이들의 그늘진 얼굴 표정에서 문화대혁명(1966~1976년)시절 홍위병의 회한이 읽히고, 펴보지도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난 저항 엘리트들의 고뇌 속에 천안문사건 유혈 진압(1989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점이 이어지면 선이 되고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 그리고 면을 합하면 형태가 만들어진다」

점으로 있으면서 선과 면을 건너뛰어 형태를 알아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점으로 살다가도 어느 비 오는 날 밤 내려치는 번갯불에 선과 면과 형태가 드러나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도 있게 된다.

「外國人 臨時 住宿 登記」라는 제도가 있다. 중국 출입국 관리법에 의하면, 중국에 온 외국인이 호텔에 숙박하게 되면 임시숙박 신고서를 작성해야 하고(대개의 경우 호텔 프론트 직원이 여권을 보고 대신 작성), 호텔 이외의 곳에서 숙박시에는, 도시 24시간이내, 농촌 72시간 이내에 파출소에 가서 신고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데, 신고하지 않고 있다가 적발되면 벌금이 부과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여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라고 우습게 보거나, 몰라서 방심하다가 벌금부과라는 번개가 치고 나면 선도 보이고 면도 보이고 실체파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중국은, 번개가 치기 전까지만, 점으로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 나라이다.

영화 「사랑과 영혼」으로 알려진 미모의 여배우 데미무어가 삭발까지 하며 출연한 영화가 있다. 「지 아이 제인」. 여군 제인이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미해군 특수임무부대 네이비 씰의 3개월 코스 특전단 훈련을 받는 장면들이 볼거리로 제공된다.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갖추려면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다. 요구능력이나 상황에 따라 훈련, 교육, 수련, 수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공통적인 키워드는 고통, 인내, 노력, 극복 등이 되겠다. 제인은 특전단 훈련이라는 「모종의 조치」를 통해 바다·하늘·땅에서 특수임무 수행이 가능한 네이비 씰의 멤버가 된다.

「모종의 조치」로 얻어지는 것을 개념적으로 표현하면 「한계 확장」과 「수준 제고」이다. 다리찢기를 예로 들면 처음에도 130〬까지 밖에 벌어지지 않던 다리가 「모종의 조치」를 통해 180°까지 벌어진다. 이때 180°에 이르는 과정이 「한계 확장」이고, 다리 찢기를 언급하면 으레 180°가 떠오르는 것이 「수준 제고」다.

짧은 기간 중국에 머물며 중국인을 만나면서 도저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어떤 한계를 느꼈었다. 아무리 「모종의 조치」를 취하더라도, 우리는 절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절망적인 수준 차이.

귀성길에 올라 수천km를 며칠에 걸쳐 이동하면서도 머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중간 안내멘트 없어도 8시간 동안 항공기 연발이 풀리기를 군말 없이 기다리는 여유, 만리장성과 대운하에 투입된 가공할 만한 인력과 시간, 병마용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 서북 고산지대 사람들의 믿기 힘든 적응력 등등. 죽을 때까지 해 보아도, 한자가 너무 많아 다 못 배우고, 땅이 너무 넓어 다 못 가보고, 음식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 다 못 먹어 본다는 그들의 수준과, 대학까지 마쳤으니 배울 만큼 배웠고, 볼 만한 데는 거의 다 가봤고, 웬만한 건 다 먹어봤다는 우리 수준과의 차이랄까?

시간과 공간을 놓고, 길이, 크기, 넓이로 중국과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量이 아니라 質이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3,000년 전 주나라 때 역사기록에 등장한 「북경」은, 전국시대에는 연나라가 위치했었고, 거란족의 요나라 때 이르러 「연경」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얻는다. 몽골의 원나라 때에는 수도로 지정하고 「大都」로 불렀다. 현재의 북경 모습은 명나라 영락제가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현위치로 수도를 옮기며 만들어졌는데, 자금성을 세우고 이름을 북경으로 하여 만주족의 청에 이른다. 청이 무너지고 쑨원의 중화민국 수도가 남경으로 옮겨갔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수도의 지위를 되찾는다.

가히 북경을 역사의 도시, 중국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 보니 중국 각처에서 북경으로 온갖 물화(物貨)가 모이고 다양한 문화가 꽃피워졌다.

요즈음의 북경에는 볼거리 먹거리가 넘쳐나고, 많은 안내서와 여행기에서 소개된 곳도 널려있지만, 나의 북경 귀양시절 기억에 특별하게 남아있고 가끔씩 가보고픈 생각이 드는 몇 곳을 꼽아보았다.

<판지아위엔(潘家园) 골동품시장>

외국살이하며 힘든 것 중 하나가 가족 친지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할 일도 없는 명절과 주말에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특히 전날 과음하고 맞은 다음 날이 주말이면 더욱 힘들다. 그런 주말에는 潘家园에 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옷을 갖춰 입을 필요도 심지어는 세수를 할 필요도 없다. 그곳에 있는 골동품들과 골동품보다 더 골동품같은 상인들, 각처에서 모인 어리어리한 구경꾼들과 어울리려면 꾀죄죄하게 보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즈음 도깨비시장(鬼市)으로 시작해서 1995년 규모를 키워 골동품 종합시장으로 발전한 潘家园은 주말인 토·일요일에만 열린다. 장이 열리면 전국 각처에서 온 2,000명이 넘는 상인들이 전(廛)을 펼친다. 취급하는 품목은 옛날 생활용품, 가구, 민예품, 옥공예품, 칠보공예품, 서화, 자기, 옛날 화폐, 문방사우, 보석류, 심지어는 최근 도굴했다는 도굴품, 공룡이 낳았다는 정체불명의 알,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까지 없는 물건이 없다.

시장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주로 구경과 흥정만 했을 뿐 산 물건이라고는 20위안 주고 산 돌로 만든 화병 하나가 전부다. 1~2시간 시장을 걸으며, 중국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들어보고, 상인들과 흥정해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었다.

潘家园시장 관리 위원회에서 근무하던 중국인이 2001년에 잡지에 기고했다는 「고객 국적별 호가기준」을 보면 흥정에 도움이 될 듯하다.

손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따라 부르는 가격이 다르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이라면 원래 파는 가격의 10배, 일본인은 8배, 한국인 또는 선진국에서 온 화교 5배,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민이거나 그곳 거주 화교 3배, 중국 내 외지인 2배, 북경인 1.5배를 부른다.

<홍치아오(紅桥) 시장>

중국인의 상술과 국민정서를 엿볼 수 있는 속담들이 많은데 그중에 貨比三家不吃亏 「(화비삼가부끽휴) 물건을 사기 전에 세 군데 이상의 상점에서 가격, 품질, 거래조건 등을 비교한 후에 사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紅桥시장은 북경 남쪽 천단공원 옆에 있는 시장인데 한국인에게는 짝퉁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시장의 영어이름HongQiao Pearl Market에서 보듯 원래는 진주로 유명한 시장이었다. 지금은 귀금속, 진주, 의류, 가방, 여행용품, 기념품, 악세사리 등을 취급하는데 여행객들에게 여러 면에서 인기가 좋다.

물건이 싸서 흥정을 하고 깎을 만큼 깎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다른 집에 갔더니 더 싸게 팔고 있는, 황당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딱 맞는 곳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고 저가품을 찾는 중국인들이 주로 찾는 「秀水시장」과 비교를 많이 하는데, 물건의 다양성이나 흥정의 재미, 주변의 먹거리를 감안하면 紅桥시장이 더 나았던 것 같았다.

강릉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다니러 왔던 후배가 싸고 그럴듯한 여행가방을 하나 사서 끌고 다녔는데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망가져 낭패 본 일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추엔쥐드어(全聚德) 북경오리 구이집>

내가 살던 三全아파트 거실 벽 한쪽에 화제(畵題)로 桂林山水甲天下(계림산수갑천하)가 쓰여있는 동양화 한 점이 걸려있었다. 계림의 산수가 천하제일이라는 의미다. 그림 덕에 한자어 「甲」이 제일이라는 뜻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리를 뜻하는 한자어 鴨(압)은 甲字와 鳥字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오리가 새 중에서 제일이라는 의미로 새겨진다.

기록에 의하면 이름난 미식가인 건륭제(청나라 6대 황제)가 1761년 3월 5일 ~ 3월 17일까지의 13일 동안 오리고기를 여덟 번 먹었다고 한다. 오리고기가 맛있을 거라는 방증이 될 수 있겠다. 이렇듯 원래 맛있는 최고의 식재료를 보다 더 맛있게 조리해서 제공하는 북경오리구이(베이징덕)의 대표음식점이 全聚德이다. 1864년에 개점하여 오늘에 이르는 동안 정치지도자, 외국귀빈, 북경여행자, 현지 미식가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천안문 광장 남쪽에 있는 본점 이외에도 북경시내에 다수의 분점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데 맛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차이가 난다. 최근에는 짝퉁 저가 북경요리가 등장해서 주의가 요망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해서 맛있는 집이다. 재료의 선택, 조리 및 차림 방법 등에서 축적된 전문성이 맛을 더해 주는 듯 했다.

<뚜이추(都一处) 만두가게>

천안문 남쪽에 있는,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밀가루 음식점이다. 건륭황제로부터 음식점 이름과 간판을 하사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소개해 본다.

음식점이 문을 연 건 1738년(건륭3년), 당시 가게 이름은 「李記」였다. 규모도 작고 음식 맛도 변변치 않았지만 살아남기 위한 영업 전략으로 연중무휴 새벽부터 삼경 넘어 까지 가게 문을 열었다.

그러던 중 1752년 섣달 그믐날 밤, 건륭황제와 수행환관 일행이 지방 암행시찰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시장기를 느껴 李記에 들어오게 된다. 보잘것없는 음식과 술이었지만, 아무도 장사를 안 하는 섣달 그믐날 문을 열어 황제의 추위와 시장기를 가시게 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지어 주게 된다. 「都一处」, 며칠 후 황제는 간판을 만들어 보내주고 그때 받은 간판이 지금 식당 내부 걸려있는 그 간판이다.

都一处의 맛있고 값싼 회족식 만두 샤오마이(烧麦)가 부르주아 음식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음식이라는 이유로 문화대혁명의 참화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나도 처음에는 음식점의 역사에 끌려 호기심으로 찾았지만 烧麦을 먹어 본 후에는 맛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북경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북경나들이 길에서 반드시 들리는 곳이 都一处다.

지금도 가끔 그 맛이 떠올려진다. 문제는 都一处 이후 다른 집에서 파는 만두가 만두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식년에 안식은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삼성을 떠났던 2005년 즈음 삼성생명에서는, 임원으로 재직하다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른 시기에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임원에게 일자리와 관련하여 「약간의 배려」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퇴직 임원이 스스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다면 설사 그곳이 경쟁관계에 있는 같은 업종의 회사일지라도 축하받을 일이었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못 찾게 되면, 떠나는 본인은 퇴직과 동시에 일거리와 소득이 일거에 사라지는 충격을 받게 되고, 남아 있는 부하직원들의 눈에는 떠나는 상사의 뒷모습이 너무도 안쓰럽게 비칠 수 있었다.

이때 「약간의 배려」가 역할을 하게 된다. 퇴직의 충격을 완화시켜 그릇된 판단과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미리 막아주고, 남아있는 직원들이 느낄 수 있는 「비정한 회사」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꿔 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약간의 배려」는 퇴임하는 임원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보통의 경우 2년 정도의 한시적인 일자리를 주거나, 일정 기간 퇴임 전 소득의 일부를 보전하여 스스로 앞날을 준비하게 하는 말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자리」는 자회사나 영향력이 미치는 관련 회사에서 찾아주는데 실제 업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새로운 소속과 일, 사무실과 의전, 부하직원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높다.

「소득 보전」은 신분을 계약직으로 바꾸고 상담역이나 자문역으로 호칭도 바꿔 부르며 퇴직 직전에 받던 급여의 일부 또는 일정액을 계약기간 동안 지급하는 것이다. 이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업무는 주어지지 않는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 정도가 제공된다.

수십 년 동안 회사를 위해 노력하여 임원까지 올랐으나, 나이 들고 세상도 바뀌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퇴직대상 임원. 이들을 어느 날 갑자기 회사 밖으로 내동댕이칠 수도 있겠으나 「약간의 배려」를 통해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것은 인간적인 조치였다 라고 생각된다.

북경 어학연수에서 돌아와 2005년 1월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

1년 동안 업무를 떠나 이국에서 마음고생 하다 왔는데 다시 1년 더 쉬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편히 쉬는 해. 安息年 (Sabbatical Year).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듯 7년에 1년은 쉬라는 안식년. 농사짓던 땅도 7년에 1년은 아무것도 심지 않아 땅이 지력을 회복하게 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준다는 안식년. 재충전의 기회. 과연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안식년의 끝에는 새로운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어학연수에 이은 안식년이 주는 메시지를 「약간의 배려」의 다른 형태로 받아들였다. 비록 어느 누구도 나에게 퇴직 통보를 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떠나되 알아서 떠나라는 퇴직요구를 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안식년 기간 중에 급여는 정상적으로 주어졌고, 근속기간이 이어지니 퇴직금도 제대로 적립되었다. 단지 일을 안 하니 성과급이 없다는 안내를 받았을 뿐이었다. 출근할 사무실도, 할 일도 없으니 시간은 넘쳐났다. 중국에서와는 다르게 모르는 길도 없고 말도 통하니 어디 가서 무엇을 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집사람은 모처럼 좋은 기회가 왔으니, 편히 쉬며 중국에서 망가진 건강도 회복하고, 가고 싶었던 곳에도 가보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마음 편히 즐겁게 지내면 어떠냐고 했다.

견디기 쉽지 않았다.

임박한 죽음에 대한 심리학적인 반응을 정리한 퀴블러 로스의 「죽음에 이르는 심리적 변화 과정 5단계 (Kubler Ross Death Stages)」,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조직 내에서 임박한 나의 죽음(퇴직)도 이들 단계를 다 밟아야 끝이 날 듯했다. 매일 분노하였고 매일 우울 속을 헤맸다. 한동안 출근하듯 대모산에 올랐고 끼니 때우듯 술을 마셨다. 건강이 바닥을 치고 식구들의 걱정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 자신과의 타협을 가까스로 마치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현실을 수용하게 되었다.

2005년 5월, 몇 군데 헤드헌터사에 삼성 퇴직과 취업 희망 의사를 밝히고 일정을 잡아서 「헤드헌터를 처음 만나던 날」을 끝으로, 삼성과 이별해야 하는 상황을 완전히 수용했고 마음 속 정리도 마칠 수 있었다.

「조정빈」의 사용가치가 남아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삼성 재직 시절 나는 후배들에게 몸값 이야기를 할 때 「몸값은 다니면서 받는 연봉이 아니라, 떠난 후 새로 잡은 일터에서 받게 되는 연봉이다」라며,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험을 많이 쌓고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을 찾고, 제대로 된 몸값을 받아야 한다」 새로운 스트레스였다. 나의 경험상 스트레스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M카드 장 사장은 여러 가지로 득이 되는 조언과 함께 취업 면담 기회도 주었고 취업의 결정적 역할까지도 해주었다.

장 사장이 나의 취업 마인드 교정과 성공적인 면접을 위해, 만들어준 자료 일부를 소개해 본다.

취업채널 효율 통계 (미국 경험치, 취업가능성, %)

  • 인터넷 4, 이력서 DM 7, 광고 14, 헤드헌터사 16, 지인소개 33, 직접방문 47, 총력전 86

사용자 판단 기준 순서 (높은순)

  • 검증된 인재, 탁월한 업적, 신뢰하는 사람 추천, 헤드헌터사, 광고, 이력서

예상 질문 유형

  • 이직사유, 회사선택 이유, 기여 방법, 자기소개, 선발해야 하는 이유, 현실인식, 향후 방향, 주요 과제, 추진 방법

몇몇 기업의 사주도 만났고 취업 조건들을 견주어 본 결과 최종적으로 SC제일은행을 선택하였다. 선택에는 몸값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안식년의 절반을 보내고 2005년 7월부터 SC제일은행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새롭게 얻은 직장, SC제일은행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왼쪽을 선택하면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에 이르는 「해파랑길」에 들어서게 되고, 오른쪽으로 가면 전남 해남 땅끝마을까지 펼쳐진 「남파랑길」을 만날 수 있다.

2020년 추석 연휴, 집사람과 4박 5일 일정으로 부산에 있는 남파랑길 5개 코스 98.7km를 걸었다. 작년에 걸었던 부산소재 해파랑길 73.7km를 더해 총 172.4km, 부산에 있는 바닷길 전부를 걸은 것이다. (참고로 서울 외곽을 한 바퀴 휘감아 도는 서울 둘레길 총 연장 157km). 트레일 코스 길이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부산광역시의 규모가 대단함을 발로 걸으며 느꼈다.

부산을 걸으면서, 학창시절 부산에서 서울 유학 온 친구들이나 직장에서 만난 부산 출신 동료들에게 부산을 시골이라 칭하면 그들이 몹시 기분 상해했던 기억이 났다. 서울 사람 기준으로 볼 때 서울 아니면 모두 시골이니 악의 없이 말한 것인데, 부산 사람으로서는 부산처럼 큰 도회지를 시골이라 부르니 싫었겠구나 싶었다. (표준 국어 대사전, 서울의 반의어 시골, 시골의 반의어 서울).

2005년, 안식년 기간 중에 삼성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한 결과 운 좋게도 「K생명보험」과 「SC제일은행」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K생명보험(이하 보험)은 사주를 만나 4시간이 넘는 면담을 하고 난 후에 입사 절차는 인사 담당 임원과 상의하라는 답을 얻었다. 인사담당이 제시하는 조건을 내가 수용하면 바로 출근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SC제일은행(이하 은행)은 외국인 행장과 이사회의장 면접 이후, 주요 외국인 임원들과 식사를 겸한 회합 면접을 거치면서 내가 제시하는 조건을 그들이 수용할 수 있으면 같이 일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합격 통지를 받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삼성 입사 결정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이 직장을 구할 때 생각해 두었던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직장」을 되새겨 보았다.

① 5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직장. (지난 세월 동안 일을 너무 많이 했다,)

② 소신껏, 재미있게, 마음고생 안 하고 다닐 수 있는 직장.

③ 최선을 다해 일하고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직장.

①번은 나의 의지와 선택으로 정할 수 있는 사항이므로 보험·은행 두 곳 모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②번, 보험은 내가 오랜 기간 경험했으므로 자신 있었으나, 은행은 새롭게 배우고 알아야 할 업무들과 다를 수도 있는 조직문화가 있어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③번, 보험은 기존 조직 내의 질서를 쉽게 깰 수 없어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조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은행에서는 내가 제시하는 조건이 다소 파격적이었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③번만 놓고 보면 은행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생소할 수도 있는 은행업무와 경험해보지 못한 영국계 기업의 문화를 여하히 소화하고 적응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나름 자신이 있었기에 은행업무와 나의 경험을 견주어 어느 정도 소화가 가능할지만 검토해 보았다.

은행업무(상품) 삼성에서의 경험 비고
수신 보험 영업관리 4년 찾아가는 보험영업이 한수 위
여신 기업융자 2년

개인융자 1년

대손 0%
어음·수표 관련 기업융자 2년

(단기 자금운용)

외국환 삼성선물 2년

(원달러 선물)

선물거래중개사 자격
금융파생상품 삼성선물 2년

(금리 선물)

선물거래중개사 자격
방카슈랑스 보험 영업관리 4년 보험 상품
신용카드

 

크게 문제가 될 사항이 없을 것이라 결론내리고 2005년 7월 은행과의 고용계약을 체결하였다.

< 계약서 상 주요 내용 >

소매금융 내 Senior Vice President (상무)

비즈니스 개발부문의 장

연봉 △억 (기본급+상여, 삼성의 2배 이상 수준)

근무보장 기간 없고, 은행이 퇴직 요구할 때는 근속기간에 관계없이 1년치 기본급 지급

차량, 15일 유급휴가, 건강검진 등 복리후생

은행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됐다고 주변에 알리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데 재주 좋게 직장 구했다는 축하, 새로 시작하니 앞으로 한참 더 일할 수 있겠다는 축하, 퇴임임원에게 삼성에서 제공하는 「약간의 배려」를 안 받아 좋아 보인다는 축하 등등.

여러 가지 축하 중에서 새로 얻은 직장이 은행이기에 자랑스럽겠다는 축하가 이채로웠다. IMF 이후 은행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일반·특수·지방은행을 제1금융권, 비은행 금융기관을 통틀어 제2금융권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고 각각에 대한 인식이나 대접을 달리하고 있다.

2005년, 제2금융권 변방에 있던 보험회사 삼성생명에서 제1금융권 일반은행 SC제일은행으로 직장을 바꾼 것을 두고 마치 개천에서 용 난 듯 말하며 과도하게 축하해 주신 분도 여럿 있었다. 오래전에 「은행의 위세」를 경험했던 아픈 기억 때문에 은행임원을 보험회사 임원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렇게 시골 촌놈 서울 가서 출세한 듯, 제2에서 제1로 영전한 듯 자리를 바꾸어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부러움 속에서 시작된 은행원 생활은 2년을 못 채우고 끝났다.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소신껏, 재미있게, 마음고생 안 하고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보니 은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은행 생활 적응을 방해한 것들을 정리하면,

  • 골격은 스텐다드 차타드 은행으로 바뀌었지만, 피와 살은 아직도 제일은행으로 남아있는 데 따른 갈등과 반목 (업무처리, 의사결정, 책임소재 등)
  • 눈이 하나뿐인 노조와 노조에 빌붙어 연명하려는 이전 제일은행 임원과 간부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 핵심인력 간 의사소통이 영어로 이루어지는 데서 오는 불편함.

2005년 8월 1일부터 2007년 5월 31일까지 1년 10개월 간의 은행근무로 여러 가지를 얻었다. 우선 연봉에 더해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아 짭짤한 수입이 생겼다. 아울러 제1금융권 은행의 제반 수준이 절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외국 선진 금융이라고 해서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 기분 좋은 소득은, SC 싱가포르에서 함께 일하자고 하는 제의를 내가 거절했더니, 컨설팅 회사를 만들어 밖에서라도 일을 도와 달라기에 졸지에 컨설팅 회사 사장을 하며 2008년 1년을 보낸 것이었다. (회사명 : 에이프로탑, 컨설팅 Fee는 비용을 감안해 SC제일은행 연봉의 2배 이상)

은행 근무 이후 골프장 그린에서 내가 홀에 못 미치는 퍼팅을 하게 되면 동반자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은행원 생활 얼마나 했다고, 소심하긴」

SIM (Sales Innovation Manager)

SC제일은행 고용계약서에 기술되어 있는 나의 역할은 소매금융 비즈니스 개발 부문의 장으로 되어있으나 기존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 업무 분장이 되어있지도 않아 한동안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누구의 가르침도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하고 기다리면서 지내다 보니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임원회의 때 만났던 한국인 임원도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어 보고 학연·군대 인연을 엮어 찾아낸 사람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은행이 기대하는 나의 역할이 은행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 역할이 아니라 그들의 절실한 고민을 해결해주는 「용병의 역할」임을 알게 되었다.

행장에게 부여된 가장 큰 과제는,

① 노조를 포함한 조직 장악

② 주주(SC런던)가 요구하는 이익 목표 달성인 듯 했다.

②가 원활하게 되려면 ①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①을 하는 과정에서 놓지 않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간의 싸움이 불가피하고 싸움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승리하는 것이 행장의 의도라고 생각되었다.

• SC은행 그룹(주주)

• SC화 한 제일은행원

• 용병

VS • 대부분의 제일은행원

• 노조

 

예나 지금이나 용병에게 기대하는 바는 그들을 고용한 자를 위해 싸워 이겨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용병은 개인 역량을 갖추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모할 정도의 용감성, 목숨보다 목표를 중시하는 책임감 등도 갖추어야 했다.

나는 용병이고 싶지 않았기에 「잘못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러 왔지 싸우러 온 것이 아닌데 후회막급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고용계약 체결할 때 내가 적응 못 해 쫓겨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기에 근무보장 기간이 없어도 사인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난감했다. 한 가지 위안은, 내 의사에 반하여 은행 의사로 나를 내보내게 되면 근속기간에 상관없이 1년 치 기본급을 퇴직금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었다.

상황판단을 끝내고 결론을 내렸다. 「직장·소득에 연연하지 않고, 옳고 그름만을 판단기준으로 하여 이제껏 살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신껏 임한다」

은행 입장에서 볼 때는 용병이면서 용병이기를 거부하기도 하고, 노조가 생각할 때는 적인 줄 알았는데 자신들에게 우호적으로 행동하기도 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몇 달을 보내고 나서 2006년 1월부터 매킨지 영업현장교육 프로그램의 은행 측 파트너 역할을 하는 업무를 새로이 맡게 되었다.

SSP(Sales Stimulus Project). 영업현장에서 근무하는 조직원을 대상으로 현장교육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교육 프로그램. 삼성생명 변화관리팀 Project 중 하나로 간접 경험한 바가 있었고, SSP 수행업무가 지점 근무자의 능력 향상과 은행의 영업 경쟁력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했다.(일 같은 일이라 내심 기뻤다)

SSP를 돌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장 교육을 담당할 교육요원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과장부터 차·부장에 이르는 간부들 중에서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 우리 부서로 발령내면 훈련은 매킨지에서 맡아 했다.

2007년 5월 말 은행을 떠나기 전까지 양성된 교육요원은 60여명이었고 그들이 한 회차 5~6주의 일정으로 전국에 있는 지점으로 나가 현장 근무자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훈련받고 현장으로 나가 교육을 시키는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성장했고 팀으로 결속되었고 이후 은행 지점의 영업력 향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그들을 SIM(Sales Innovation Manager)라고 불렀다.

SIM은 총 4기에 걸쳐 선발·육성되었는데 1기만 매킨지의 도움을 받았고 2기부터는 자체 교육으로 육성시켰다. 교육내용은 업무 실행 부문과 자세·태도 부문이 있었는데 자세·태도 부문은 중요성이 컸으므로 내가 맡아서 교육시켰다. 당시 교재의 목차와 핵심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본다.

  1. 책임감
  • 행위가 아니라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
  • 농민적 근면성 + 전략적 접근
  1. 솔선수범 (희생정신)
  • 사기있는 조직 만들기 : 솔선수범 + 교육훈련
  • 어려운 일에 대한 인식 : 출·퇴근시간, 화장실 청소
  1. 자신감
  • 철저한 준비로 내공 갖추기
  • 결과에 대한 확신 : 동료·조직·Program·System 신뢰
  1. 높은 지향 목표
  • 목표 몸값
  • Quality 관리
  • 넓이뛰기·단거리 달리기
  1. 정직 (도덕성)
  • 타협이나 자기 만족 회피
  • 독립적 판단·선택
  • 설득력있는 Program 운영 가능

은행을 떠나고 8년이 지난 2015년 2월, 나는 SIM들이 만든 연회에 참석하였다.

모임이름 : 조정빈 상무 회갑연

장소 : 안국동 소재 한정식 전문식당

참석자 : 조정빈 내외 및 SIM 40여명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았던 SIM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나 홀로 고통 속에서 진퇴를 고민하며 보낸 은행 시절을 잘 아는 집사람이 연회장 상석 테이블 밑에서 내 손을 꼭 잡으며 눈시울을 붉히던 일이 기억난다.

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아직도 여러 명의 SIM과 연락하며 지낸다. 그렇게 앞으로도 오래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엉터리 은행원

길 걷기 나서기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걷기 코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는 방법 중의 하나가 「걷기 여행길 길라잡이를 자처하는 앱」들을 들여다보는 것이었고 그중에서 내가 즐겨 사용하는 앱은 「두루누비」다.

걷기 코스를 확정짓기 전에 두루누비를 열어서 난이도, 평점, 여행지 형태를 본다. 코스의 어렵고 쉬운 정도에 따라 코스를 소화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가늠해 보고, 평점에 나와 있는 안전관리·안내시스템·편의 시설 수준에 맞추어 배낭 속 준비물을 달리한다. 아울러 여행지 형태가 순환형인지 비순환형인지에 따라 어떤 교통편을 이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아무리 짧은 일정일지라도 사전에 코스를 알아보는 과정을 제대로 거쳐야 즐겁고 보람찬 여행길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코스는 어려울 수도 쉬울 수도 있고, 평점이 높고 낮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코스 형태는 길을 따라 그냥 갈 수도 가다가 휘돌아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난이도·평점·여행지 형태를 미리 알아보는 것은 코스의 좋고 나쁨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코스별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서로 다름에 대한 대비를 사전에 하고자 함이다.

은행 생활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사전에 알아야 할 것들을 알지 못하여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잘못을 인정하고 늦게라도 알려는 노력을 해야 했었다. 반성하기는커녕 「알고 있는 짧은 지식과 과거의 경험」이라는 자신에게만 익숙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어려운 상황 자체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양 몰아가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로 은행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입행 이전에, 늦어도 입행 초기에라도 은행과 보험이 어떻게 다른지를 다각도로 면밀히 공부하고 알려는 노력을 했었더라면 없었을 「시행착오」들이 생겼고 시행착오들은 「은행이 잘못됐다」로 해석되다가 급기야 「은행에 잘못왔다」로 바뀌었다. 당연한 결과로 나의 초기 은행 생활은 「고통과 인내」 그 자체였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길 걷기 나서기 전에 하듯 사전 은행 공부도 하고 삼성 시절 과포장된 자존심만 적절히 죽였어도 더 즐거운 은행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통과 인내의 몇 달을 보내고 맡게 된 SSP(영업현장 교육 프로그램)은 삼성생명에서 경험도 했고 시행착오에 대한 나름의 대비도 있어 시작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SSP의 목표가 지점 근무자들의 생산성 향상이었고, 목표 달성을 위해 영업 스킬 향상 Tool을 제공하는 동시에 지점 근무자들의 헌신과 노력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SSP를 경험한 지점에서 SSP 전과 후의 생산성 변화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SSP를 측면 지원해 줄 성과 보상 제도가 없으면 생산성 향상이 지속되기 힘들다는 데 있었다. 지점 영업 성적에 의해 보직과 진급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지점장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에게 「헌신과 노력」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흘린 「피와 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불행히도 호봉제로 운영되던 은행의 급여 체계로는 한계가 있었다. 잘하나 잘못하나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피와 땀」을 흘릴 이유가 없다는 것도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영업 Tool을 수용하고 고객을 상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그 결과 초과근무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초과근무는 했는데 초과근무 수당이 적게 나오거나 나오지 않게 되면 근무자들의 불평요인이 되었고 그러한 것들은 노조에게 할 일이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노조는 명분이 뚜렷한 SSP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노조집행부가 은행의 잘못에 눈을 감았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 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은행 의사로 나를 해임한다는 통보를 받고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잘못 물었다가 해임 통보를 번복할까봐 걱정도 됐고 내가 스스로 떠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몇억 원이나 되는 1년 치 기본급을 퇴직금으로 추가해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차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견주어 보건대 나에 대한 해임통보는 노조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SSP가 활발하게 돌아가다 보니 더 많은 SIM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4기 SIM을 선발하고 나니 부서 인원이 대폭 늘게 되었다. SIM 61명과 Staff를 포함해 70명, 그것도 간접관리가 안 되고 직접 관리를 해야 할 부하들이었으므로 인사관리 차원에서 이것저것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삼성생명 직원들과 현저하게 차이 나는 점을 발견하였다.

「주거환경이 불안정하고 소비수준이 높다」

SC제일은행 (SIM) 삼성생명
자가 비율

강남거주 비율

50% 이내

2% 이내 (1/61)

80% 이상

30~40%

골프(스크린 포함)

기타취미활동

음주 시 비용처리

80% 이상

적극적

개인

30% 전후

소극적

법인(개인부담회피)

  • 별도 통계작성 없이 기억과 감에 의존한 비교,
  • 함께 근무했던 입사 10년차 이상 차·부장급 직원 기준

삼성생명 직원들은 입사 초기부터 빚을 내서 집을 사고 빠듯하게 살면서 빚을 갚아 나가 기회가 생기면 강남으로 이사가고 다시 쪼들리는 생활을 반복하는 반면, 제일은행 행원들은 능력이 충분해지면 집을 사고, 미리부터 집을 사기 위해 생활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급여 수준이 크게 차이나지 않았으므로 서로 다른 행동 방식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좋게는 팍팍하게 사는 삼성맨보다 유유자적하는 은행맨들이 좋아 보였는데 그렇게 살아도 되는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은행원이 집을 적극적으로 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입행 초부터 「무주택자 대상 무이자 전세 지원 대출」이라는 복리후생제도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었다. 집을 사게 되면 무이자로 받은 전세 대출을 갚아야 하므로 집 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소비 수준이 높은 것은 「정년 보장」이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60세 즈음까지 보장된 은행 정년과 규정에 있는 55세 정년도 보장 못 받는 삼성의 체감 정년 50세와는 10년의 차이가 있어 소비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이 나는 10년 동안 자녀 학비를 포함한 많은 비용 집행이 기다리는 삼성맨들은 내핍에 내핍을 거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엉터리 은행원 생활을 정리하고 몇 개월 지났을 때 SC제일은행을 관리 감독하는 「SC싱가포르 은행」에서 SC제일은행에 다시 들어가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몸과 마음이 떠난 후라고 거절했더니 소속을 SC싱가포르로 하고 SC제일에 파견하는 형태는 어떻겠냐고 재차 제안받았으나 다시 거절했다. 그러면 은행 소속으로 하지 말고 컨설팅 회사 만들어 은행 밖에서 일만 해주면 좋겠다 해서 승낙했다.

그렇게 「에이프로탑」이라는 컨설팅 회사가 만들어졌고 SC싱가포르와의 1년 계약 기간 동안 은행일을 계속했다. 일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고, 대충 생산성 향상·성과 보상·노조 관련 업무 등의 일들이었다.

에이프로탑은 은행일을 마친 이후에도 몇 건의 일반 회사 컨설팅을 수행하면서 2012년까지 존속했었다.

숭어 따라 뛴 망둥이

남파랑길 5코스는 부산 사하구 신평동 교차로에서 시작, 낙동강 하굿둑을 건너 을숙도 신호대교를 지나고, 멀리 가덕도를 바라보며 걷다가 부산 강서구 송정공원에 이르는 비교적 쉬운 코스다. 시작부터 끝까지 표고 차가 거의 없고 포장된 길을 따라 걷다보니 발 밑 장애물 걱정이 없었다. 자연히 길 주변 풍경과 사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눈을 들어 먼 곳을 볼 수 있는 여유까지도 즐길 수 있었다. 9월 말 햇살은 따가웠지만 강과 바다를 지나온 상쾌한 바람이 있어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육지와 을숙도를 잇는 낙동강 하굿둑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둑 위에는 차도와 인도가 있어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고, 둑에는 여러 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바닷물과 민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 할 수 있었다. 둑 위를 걷다가 바닷물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수도 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물 위로 솟구쳐오르는 장관이 눈에 들어왔다. 물고기들의 역동적인 몸 동작,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비늘, 한참을 서서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낚시꾼에게 물어보고서 알게 된 물고기 이름은 「숭어」였다. 낚시꾼이 숭어라고 답하는 순간 집사람은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의 가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거울 같은 강물 위에 숭어가 뛰노네

살보다 더 빠르게 헤엄쳐 뛰노네

나그네 길 멈추고 언덕에 앉아서

거울 같은 강물 위의 숭어를 보네…

가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찾아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의 원 제목은 독일어로 「Die Forelle (송어)」인데 숭어로 잘못 번역, 교과서에 까지 그대로 실리다보니 우리가 숭어로 잘 못 배웠다고 했다. (2011년 이후 교과서에는 송어로 수정). 우리 내외에게는 노래의 원제목이 숭어든 송어든 아무 상관 없었고 단지 걷다가 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을 즐길 수만 있다면 대만족이라고 생각했다.

집사람은 숭어를 보고 학창시절 부르던 노래를 생각했지만, 나는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남이 한다고 하니까 덩달아 나서거나,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잘 난 사람을 덮어 놓고 따라 한다」는.

「에이프로탑」은 은행과의 계약이 끝난 뒤에도, 크게 수익을 낼 일은 없었지만,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업기회가 생기면 기민하게 대처할 수도 있고, 출근하던 사무실을 갑자기 닫는 데서 오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으며, 4대 보험 등의 처리나 직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해서였었다. 그러던 중 과거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P로부터 사업권유를 받았다.

이름하여 「멀티 유저 솔루션」, 내용을 보면 「하나의 컴퓨터에 여러 개의 모니터를 연결하고 컴퓨터의 메모리를 나누어 쓸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IT나 컴퓨터와는 거리가 먼 전공을 했고 그쪽 방면 사회경험도 전혀 없었지만, 주변에서 뛰는 숭어들을 보니 나도 뛸 수 있을 것 같았고, 부하시절 P가 나에게 보여준 능력을 생각할 때 믿음이 갔으므로 쉽게 사업 참여를 결정하였다.

사업기회가 오면 기민하게 대처하려고 놔두었던 에이프로탑의 사업 종목에 「소프트웨어 개발 및 판매」, 「컴퓨터 주변기기 제조 및 판매」를 추가시키고, 법인명도 에이프로탑에서 「제우엔텍」으로 바꾸어 사업개시 준비를 마친 시점이 2012년 7월이었다.

자본금은 나와 P가 2:1의 비율로 나누어 출연하기로 했고 그에 따라 주식도 2:1의 비율로 나누었다. 두 사람은 업무 분장을 통해 안살림은 내가, 바깥일은 P가 맡기로 하되 각자 대표로 등기하여 업무를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각자 대표 공동 대표
대표방법 2인 이상의 대표이사

각각이 회사를 대표

2인 이상의 대표이사 모두가 합의하고 공동으로 서명하여 회사를 대표
장점 신속원활한 의사결정 대표이사 상호간 견제와 균형
단점 ·권한의 무분별한 행사로 전횡 여지

·대표이사 상호간 신뢰 전제

의사결정 지연
등기부상표기 대표이사 ○○○ 공동대표이사 ○○○

 

회사 골격을 확정하고 난 후, 두 명의 대표이사·기술담당 임원인 K를 비롯하여 창립 멤버로 향후 회사의 주역이 될 직원들이 함께 콘도에 모여 워크숍을 갖고 회사의 비전과 사업계획을 공유하며 성공을 다짐하는 기회도 가졌다.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사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내가 맡은 안살림은 비용을 관리하는 것인데 이렇다 할 매출도 없이 많은 비용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집행되고 있었다. 주요 내역을 살펴보았다.

첫째는, 멀티 유저 솔루션 상품명 「메두사」와 관련된 사업 양수도 계약에 소요된 비용이었다. 메두사는 기술담당 임원 K가 전 직장에서 만든 상품인데, K가 제우엔텍으로 오면서 전 직장에 남아있는 재고 및 부품 인수와 메두사 관련 영업권·지적재산권 일체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치루기로 한 금액의 25% 해당액(나머지 75%는 매출과 이익 발생 후 지급)을 계약금조로 지급하기로 하여 발생된 비용인데 규모가 자본금의 15% 이상이나 되었다.

둘째는, 메두사 매출 확대에 대비하여 메두사를 사전에 제조하는데 사용된 비용으로, 중국 하청업체 부품제작비와 조립용역비로 집행되었고 자본금의 20%에 달했다. (제작과 조립의 최소 물량 기준이 있어 낭비 요인).

셋째는, 업무처리와 영업필요에 따라 10명 가까이 까지 늘어난 직원들 인건비, 영업경비, 임차료, 제반관리 경비가 발생됐는데 매월 집행규모가 자본금의 10%까지 늘어나고 있었다. (매출이 정상화 될 때까지 대표이사 포함 3인의 임원은 급여 부지급).

6개월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집행된 비용의 총액은 자본금의 80%에 육박하였고 증자여부를 결정해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매출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바깥일을 맡은 P가 보고하기로는, 연고를 내세워서 대기업에 판매를 시도했으나 기술적 문제가 있어 마지막 단계에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했다. 영업직원들과 대화하면서 더 알아낸 사실은 기술적 한계 외에도 컴퓨터 사용자의 프라이버시 문제, 회사 차원에서 볼 때 보안·기밀 유출 문제 등이 있어 대기업을 상대로 한 대량 판매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비용이 추가로 소요되는 판매 유통망을 갖춰 개인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승부를 걸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버리고 참여한 직원들의 거취 문제, 제품·부품의 재고처리, 여러 가지 잡다한 계약들의 이행처리 등의 정리 절차를 거쳐 창업 후 1년 2개월 만인 2013년 9월 세무서에 폐업신고를 했다. 법인은 상법상 휴면법인 해산 조항에 의거 2018년 12월 해산하게 되었다.

최초 자본금 이상의 돈이 들어갔지만 빠른 의사결정으로 손실을 그 선에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숭어는 뛸만하니까 뛰었는데 망둥이가 숭어를 따라 뛰다 낭패를 본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실패를 실패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다.

  • 모르는 일에 함부로 뛰어들지 않는다.
  • 숭어가 뛴다고 따라 뛰지 않는다.

Ⅴ. 지옥이 별건가요

행복한 배변의 조건은 세 가지다. 적절한 시점, 적합한 장소, 제대로 갖추어진 도구 사용.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변이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본문 중에서」

익숙한 길 낯선 길

걷기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걸었던 길들을 돌이켜보면, 편한 마음으로 쉽게 걸었던 길이 있었는가 하면 힘이 많이 들어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나는 길이 있었다.

걷는 이의 입장에서는 모든 길이 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에 어떤 길이 편했었고 어떤 길이 편하지 않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은 「익숙한 길은 편했고 낯선 길은 편하지 않았다」였다. 매일 아침 걷는 산책길이야 당연히 익숙해서 편함을 알겠지만, 처음 걷는 길이면서도 익숙한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는 「익숙하다」는 것을 「어떤 대상을 자주 보거나 겪어서 처음 대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익숙하다의 정의를 생각해보며 내 나름대로 익숙해지기 위하여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정리해 보았다.

  • 우리 몸의 시각·청각 등 여러 감각기관과 근육(몸, 뇌)의 경험을 통하여 「정보」를 얻는다.
  • 얻어진 복수의 정보들과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만든다.
  • 정보 취득 과정과 지식 형성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느낌」이 생겨나고 이 느낌이 몸과 마음 속에서 살아있는 상태가 「익숙하다」이다.

< 익숙해지는 과정에 따른 길 구분 표 >

정보 지식 느낌 만족도
아는 길 익숙한 길
단순히 아는 길 상/중
모르는 길 알 수 있는 길 × 중/하
알 수도 없는 길 × × ×

 

길 걷기 시작점에서 끝점까지의 전 구간이 들여다 보이는 길이 아니라면, 처음 걷는 길은 대부분 모르는 길이다. 처음 걷는 모르는 길을 「알 수 있는 길」로 분류되게 하여 「단순히 아는 길」의 반열로까지 격상시키는 힘은 길 떠나기 전에 하는 사전 준비에서 나온다.

안내 서적이나 지도, 먼저 걸었던 사람들이 남긴 글 등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당연히 알고 길을 나서야 하고, 나아가 그러한 정보들이 실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보면서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야 「힘든 길」을 「편한 길」로 만들 수 있다.

이미 길에 나섰다면 이후 가장 중요한 정보 획득 수단은 감각기관인 「시각」이 된다. 보는 것을 통해, 거리와 높이를 가늠해 난이도를 판단하고, 장애나 위험요소를 피해갈 수 있으며, 계속 갈 것인지 쉬어갈 것인지도 결정할 수 있다. 자칫 한순간의 한눈팔기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시각」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몇 년 전에 종로에서 약속시간 사이에 시간이 남아 잠시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사람 「주제 사라마루」의 대표작이라 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했다.

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갑자기 나타난, 눈을 멀게 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전염병이 퍼졌고, 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시야가 하얗게 되는 증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실명 바이러스의 정체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은 시각을 잃게 되고 시각을 잃은 사람들은 강제로 격리 수용되는 고통 속에 빠진다. 격리된 사람들은 시각을 대신하기 위해 청각·후각·촉각 등의 감각을 총동원해보지만 허망한 노력으로 끝나고 그사이 원래부터 시각이 없었던 맹인들이 격리된 사회를 장악하고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알 수 없던 이유로 시작된 전염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치유되어 사람들은 시각을 되찾게 되고 사회는 정상을 회복하게 된다.

소설은 실명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주인공의 눈에 비친, 갑작스럽게 퍼지는 질병, 극심한 혼란, 정부의 야비한 대처, 격리사회의 문제, 극한 상황 하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행태 등을 묘사해 나간다. 작가가 의도하고 책에 함의하고 있는 여러 개의 메시지 중에서 「단지 시각 하나만을 잃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삶이 변하고 사회질서가 위협받고 세상이 바뀌는 결과로까지 치닫게 된다」라는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울림이 컸었다.

정보를 얻는 중요한 창구 중에서 「시각」 하나를 잃었는데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청각」을 잃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정도와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비슷한 이치로 시각이나 청각의 차단이 아니라 「네비게이션」없이 운전하기, 먹통 된 「스마트폰」들고 살아보기, 기능이 대폭 제한된 「컴퓨터」앞에 앉아보기는 어떨까?

감각기관이나 문명의 이기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쉽고 편하게 정보를 얻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그들이 얼마나 유용하고 고마운지 모르고 산다. 그러다가 어떤 변수의 작용으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되면 불편과 고통으로 힘들어 하게 되고 그들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익숙하다는 것은 객관화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대상에 따라 주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정상인과 맹인에게 있어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익숙한 것도 다르고 익숙한 정도도 같을 수 없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앉아 일 보던 세월은 이미 지났고 양변기를 이용한 지도 한참 되었다. 지금은 비데(bidet)가 일반화되어 뒷정리까지도 편히 하는 세상이 되었다. 비데에 익숙한 사람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자신이 직접 뒤처리를 하게 되면 찜찜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한다. 그렇지만 비데를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비데에게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맡기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렇듯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보다 익숙한 불편이나 불행을 선호하기까지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로 사람들의 일상이 망가지고 있다.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손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방역당국이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강제하는 전과 다른 생활 방식은 사람들에게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쉬울 수 없는 일이다. 익숙했던 것들에게 영원히 안녕을 고하면 모를까 기약은 못 하지만 언젠가 돌아와야 한다면 그 어려움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한 생활 방식의 변화나 알고 있는 지식 내용의 변경 정도가 아니라 익숙함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이 어려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옥이 별건가요

걷기 여행에서 날씨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맑고 흐리고 바람 불고 눈비 오는 것도 감안해야 할 사항이지만 제일 크게 생각해야 할 것은 「기온」이다. 걷는 중에는 체온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때 적절하게 체온 관리가 되지 않으면 오래 걸을 수 없으므로 기온이 높은 것보다는 낮은 것이 걷기에 도움이 된다.

나의 짧은 경험으로는 늦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초봄에 이르는 기간이 걷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생각된다. 기온이 영하로 많이 떨어진다면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훨씬 낫다. 쌀쌀하게 느껴지는 기온은 청량감도 주고 걸어서 오르는 체온을 잡아주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걷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에 한기가 느껴지는 것인데, 그럴 때 보온병에 담아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몸이 편안해지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같아 기분까지 좋아진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고, 야외 활동하면서 마신 커피의 양이 늘어나게 되니까 당연하게 소변이 자주 마려워져 화장실을 많이 찾게 된다.

어떠한 굴곡도 없이 펑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생리 문제 해결을 위해 화장실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처했던 경험은 몇 차례 가졌으리라고 본다. 술 좋아하고 준비성이 부족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낭패의 경험이 있다. 출근길 운전 중인 차 안에서, 골프 라운딩하다가, 휴지 없는 공중 화장실에서 일 마치고, 화장실 밖에서 줄 줄어들기 기다리며 등등. 되뇌이기 싫은 끔찍했던 기억들을 억지로 끌어내어 무슨 이유로 그 고생을 했고 대책은 있는지 나름 정리해 보았다.

행복한 배변의 조건은 세 가지다. 적절한 시점, 적합한 장소, 제대로 갖추어진 도구 사용.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변이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적절한 시점

변의(便意)를 느낄 때가 적절한 시점이다.

생활 리듬에 맞추어 살다보면 보통의 경우 변의 예측이 가능하다.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전 조치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생활 리듬이 깨지거나 섭취한 음식물에 대한 소화기관의 대처가 부적절해서 갑작스레 변의를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적극적 대비책은 변의가 없더라도 적합한 장소를 미리 찾아가 보는 것이고, 소극적 대비책은 적합한 장소가 있는 주변을 맴돌면서 신호가 잡히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적합한 장소

변의가 느껴지면 찾아가는 곳이 적합한 장소, 화장실이다.

화장실이 아예 없으면 부득이 노상이나 자연의 품에 안겨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화장실은 있는데, 화장실 관리 주체의 좁은 소견으로 잠겨있거나, 동파 등의 이유로 폐쇄됐거나, 다른 사람이 사용 중이어서 당장 사용이 곤란한 경우에는 대응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노상이나 자연 속에서 해결하기 힘든 주변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아무 집이나 찾아들어 사정 이야기를 하거나 무단 침입까지도 불사하게 된다.

불결해서 사용 못 하겠다거나 화장실 사용료를 받아 기분이 상할 때는 본인 상황에 맞추어 다른 선택지를 구할 수도 있다.

제대로 갖추어진 도구 사용

적합한 장소에 비치된 도구는 변기와 휴지다.

변기의 발전 단계에 따라 다양한 변기가 있는데 변기 선택은 급한 정도에 따라 종속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화장실 안에 휴지가 없는 경우이다. 평상시에 휴지를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대용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경험을 통해 추천할 만한 대용품으로 손수건, 장갑, 양말, 러닝셔츠가 있다. 대용품을 쓰기 싫으면 핸드폰을 이용해 도움을 구하는 것인데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지는 본인 판단이다.

걷는 중간 휴식시간에 마시는 커피의 맛에 취해 집사람과 나는 여러 번 난처한 경험을 하였다. 남자인 나야 자연 친화적인 문제해결력이 있지만 적합한 장소만을 고집하는 집사람은 문제해결이 쉽지 않았다. 그 흔하던 바닷가 공중 화장실들은 동파 예방 조치로 폐쇄됐고, 횟집, 카페, 상점들은 썰렁한 겨울 바닷가에서 손님 기다리다 지쳐 문 닫은 지 이미 오래다. 오전 시간대에는 마을회관, 경로당과 같은 공공시설조차 문을 걸어 잠가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난처했던 경험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었다.

중국과 네덜란드 화장실에서 겪었던 독특한 경험을 소개해본다.

<중국>

2004년 중국 어학연수가 결정되고 나서 먼저 중국을 다녀왔던 직원들로부터 들은 중국생활 유의사항 중에는 화장실 사용이 대단히 불편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관광차 버스 타고 가다가 버스를 벌판에 세우고 버스를 경계삼아 남녀가 갈라져서 일을 보았다거나, 칸막이도 문도 없는 화장실이 있는데 종대로 앉아 앞사람 등을 보고 볼일을 본다거나, 옆 칸막이는 있는데 문이 없어 통로에서 보면 평소 보기 힘든 광경을 볼 수 있다거나, 60년대 우리나라 군대 변소처럼 상반신은 드러내고 하반신만 간신히 가려진 화장실이 존재한다는 등등의 실례를 들어주며 깨끗한 화장실을 만나면 변의와 상관없이 일을 보라는 충고도 받았다.

2005년 북경 首都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다 화장실에 갔다. 국제 공항에 걸맞게 화장실은 깨끗했는데 입구에서부터 냄새가 났다. 들어가 보니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채로 중국 신사 두 분이 일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멀쩡했고 나는 화들짝 놀라 뛰쳐나왔다. 나는 그들이 화장실 문을 만들어 달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문을 만들어 달아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삼성선물에서 근무하던 1999년, 런던 금속거래소(LME) 회의 참석차 영국 출장길에 나섰다가 하루 일정을 빼서 유럽 물류의 중심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창고시설을 견학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비행기 타고 국경을 넘어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갑자기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변의가 느껴져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걸터앉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앉고 나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재래식 변기에서 좌식 양변기로 바뀔 때 쪼그려 앉다가 걸터앉으니 변이 나오지 않더라는 말은 들었지만, 앉아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되는지는 처음 알았다. 발끝만 간신히 바닥에 대고 개운치 않게 일을 마쳤다. 내일 아침에는 호텔 탁자 서랍 안에 있는 성경책을 꺼내 바닥에 깔고라도 발바닥을 붙이고 앉아 일을 보아야겠다는 대안을 생각해보았다.

저녁식사 후 간단히 한잔하러 술집에 들렀다가 맥주 몇 잔 마시고 화장실에 갔는데 기가 막혔다. 소변기가 내 허리 높이에 있는 것이었다. 발판을 딛지 않으면 이제껏의 방법으로는 소변을 볼 수 없었고 술집이다 보니 어린이용 소변기가 있을 리도 없었다. 대변기를 이용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어 진퇴양난이 되었다. 군대시절 화기분대 60미리 박격포를 떠올리며 「직사」가 안되니 「곡사」로 해결하기로 하고 상향조준 발사 후 중력에 의해 낙하위치를 가늠하는 기술을 발휘했다. 첫 시도이므로 약간의 편차는 불가피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왔고 다 마시지 못한 맥주는 그대로 남겨둔 채 호텔로 돌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이상한 이유로 조상님이 원망스러워졌었다.

(영국 임피리언 칼리지 런던 연구팀 조사 결과, 2019년 현재 국가별 19세 청소년 신장을 비교하니 네덜란드가 1위로 가장 컸는데 남자 183.8cm, 여자 170.4cm였다고 했다. 1999년 당시 조정빈 166.5cm)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지식층)의 나약함과 투기꾼의 약탈적 가격 책정을 보여주는 표지 같은 것이라는 거죠.

그들은 회의를 열고 투표를 실시하고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모든 와인을 레드와인 화이트와인으로만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할 겁니다.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와인은 생산된 해, 생산된 지역의 모든 자연 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한 모금만 마셔도 와인은 생산지의 그해 겨울 추위가 풀린 시기, 여름 강우량의 정도뿐 아니라 그해 바람의 특징이나 구름 낀 날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에 관한 것까지 머리에 떠오르게 할 것이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와인은 익명의 바다로, 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 (Amor Towles, 2016作, 「A Gentleman in Moscow」, 현대문학, 서창렬 번역, p231~233 내용 발췌)

볼셰비키 혁명 이후 자신들이 만든 틀로 미래를 재구성하려는 작업에 몰두하던 볼셰비키는 와인을 서빙하는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노동효율도 높인다는 미명하에 와인 병에 붙어 있는 모든 라벨을 일시에 제거하고 모든 와인을 레드와 화이트만으로 구분하여 단일가로 판매 서빙토록 한다는 소설 속 내용의 일부다. 물론 소설 뒷부분으로 가면 와인 라벨을 제거한 조치는 부작용과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어 원상으로 회복된다.

소설 속 내용 중의 와인처럼 세상에는 다양성에 기초하여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보존하고 높이기 위한 「조치」들이 동시에 존재하곤 한다.

내일로, 해파랑길 마지막 2개 코스(거진항~통일전망대)를 걷고 나면 전 구간 걷기가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자 오늘 하루 30km 넘는 강행군으로 몸은 말할 수 없이 피곤했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 750km 여정 중 500km를 같이 했던 집사람에게 사정이 생겨 같이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함께 왔더라면 숙소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 수도 있었을 텐데.

숙소 주변에 있는 조그만 카페를 찾아 와인을 주문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보았다. 해파랑길 걷기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짚어 보기도 하고, 걸으면서 떠올랐던 수없이 많은 생각들도 되새겨보았다. 그러다가 앞에 놓인 와인 병을 보는 순간 갑자기 연초에 읽었던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겪었던 「라벨이 떼어진 와인」의 황당한 경험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이제껏 살아온 세상에서는,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고 무시되거나, 다양한 것이 비효율로 간주되어 매도당하기도 했다. 또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수반되는 조치들이 거꾸로 가치에 우선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창조나 개혁이라는 단어로 포장되면서 가치를 훼손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성을 갖고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생활 속에서는 너무 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장서의 규모나 무게가 소장자의 독서량과 지적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책을 서가에 꽂을 때 가장 중요한 분류기준은 책의 내용보다 크기이다.
  • 걸은 거리·시간의 많고 적음이 걷기 여행 경험의 양과 추억의 질을 결정한다.
  • 나이가 많은 것이 자랑이고 머릿수가 많은 것이 힘이다.
  • 상사·선생·선배의 의도를 거스르는 부하·학생·후배의 행동은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힘들다.
  • 가장의 생각과 배치된 가족구성원들의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우리집에서)
  • 짜장이나 짬뽕 중 어느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은근히 요구되고 주문이 통일되면 뿌듯함이 느껴진다…

요즈음은 멀리서부터 보행 신호를 보고 바삐 움직이지 않는다. 걷던 속도를 유지하며 걸어가서 파란불에 닿으면 건너고 빨간불이면 기다리는 것이지 미리 보고 대응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조금 빨리 건너서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능률·효율·생산성이 의미 없게 되다 보니 무리하지 않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전에 못 느끼던 가치도 다시 느끼게 되고 「나」말고도 「주위」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친구 셋이 앉아 각기 다른 술을 마시기도 하고 술이 싫어 마시지 않는 친구가 술자리에 끼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전에는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단어까지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2월 30일생

2020. 10. 31. 남파랑길이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남(南)쪽의 쪽빛(藍)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라는 「남파랑길」. 해파랑길에 이은 코리아 둘레길의 두 번째 노선이다. 부산·경남·전남의 바닷길 90개 코스 1,470km에 달하는 걷기 여행길이 여러 해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정식 개통된 것이다. 아울러 개통을 기념하는 걷기 행사가 지역별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정식개통 전인 10월 초까지 부산의 5개 코스를 걸었고 개통 후인 11월 초에는 창원·고성의 7개 코스를 걸었다. 개통된 지 이미 10년이 넘은 해파랑길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의 관심과 노고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안내표식이 완전하지 않아 다소 불편했다는 점이다. 걷기 여행길 안내표식은 크게 안내표지판과 방향표지판으로 나뉜다. 안내표지판은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가야 할 거리 등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므로 안내내용의 정확성이 요구되고, 방향표지판은 갈림길이나 단조롭게 이어지는 길에서 걷는 방향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방향표지판의 위치나 안내 빈도가 중요하다. 내가 걸었던 남파랑길 몇 개 코스의 안내표지판은 내용이 잘못되어 혼선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고, 방향표지판을 찾을 수 없어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정식개통 이전 준비단계에서 잘못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것 같은데 아직 조치가 덜 된 것으로 보였다.

많은 비용을 들여 길을 만드는 Hardware와 안내표식을 만들어 걷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Software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Software가 미흡하여 Hardware까지 빛을 보지 못 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겠다. 10년 전에 개통된 해파랑길에서도 Software가 말썽인 곳이 있는 것을 보면 한 번 잘못된 것이 시정되거나 미흡한 부분이 수정 보완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남파랑길 안내표식의 조속한 시정 보완을 기대해 본다.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위로 두 분의 누님과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큰누님은 40여년 전에 미국으로 떠나 미국사람이 되어서 살고 있고, 위암을 앓던 작은 누님은 7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나 남은 동생은 4년 반 전에, 혈액암의 일종으로 백혈구가 자신의 뼈를 공격한다는, 다발성 골수종이 발병하여 지금까지 투병 중에 있다. 작년에 돌아가선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이 일찍 떠나고 병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시고 늘 마음 아파하셨었다.

동생의 원래 출생일은 양력으로 1959년 6월 11일이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셨고 고등교육을 받으신 부모님은 4자녀의 출생일을 양력과 음력으로 정확히 알고 계셔서 호적상의 생년월일도 모두 양력으로 신고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유독 동생만 공부상의 출생일이 「1960년 2월 30일」로 잘못 등재되어 있었다. 우리 세대에서는 호적이 잘못되어 실제와 다른 경우가 너무 많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잘못된 사항이 너무도 심각하여 잘못을 바로잡기로 결정하였다.

1976년 대학교 졸업반이던 나는 고등학생이던 동생의 호적상 생년월일을 바로잡기 위해 절차를 알아보았다. 사실 2월에 30일이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구청에 가서 말 한마디 잘하면 끝날 일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안내받은 절차는 간단하지 않았다. 먼저 출생일이 잘못 등재된 경위와 제대로 된 출생일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와 자료를 첨부하여 가정법원에 정정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가정법원에서 정정허가를 내주면 그 내용으로 다시 정정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절차를 밟아보기로 했다. 20년 가까이 지난 과거를 거슬러 실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가정법원에서 수긍할 정도의 내용으로 창작하는 것이 오히려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 1960년 음력 2월 29일을 출생일로 상정하고, (연도는 그대로 두기로 결정)
  • 1962년 이북에 호적을 두었던 실향민에게 남한 호적을 다시 부여하는 과정에서 신고와 정리가 잘못된 것이 오류의 원인이라고 주장 (신고 내용을 부르고 받아 적는 중에 음력 2월 말일을 2월 30일로 잘못 기재)
  • 관상대(현재 기상청)에서 발급한, 1960년 2월에는 양력으로나 음력으로도 30일이 존재하지 않고 음력 2월 말일은 양력 3월 26일에 해당된다는, 확인서를 서울 가정법원에 제출
  • 1976년 6월 서울 가정법원 정정허가를 받고 출생월일을 「2월 30일」에서 「3월 26일」로 정정 신고.

호적을 고치는 과정에서, 20대 초반 대학생 신분으로는 배우기 쉽지 않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 사회에서는 잘못을 바로잡고 미흡한 것을 보완하는 일이 쉽지 않다.
  • 모든 잘못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알아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 상식적 판단으로 잘못된 일이라도 잘못을 바로잡고자 할 때에는 자의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근거를 확보하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작년 어머님 사망신고 후 제적등본을 발급받은 후에 과거에 발급된 제적등본과 비교해 보다가 아들의 부(父)란에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등재돼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추측건대 과거 한자를 손으로 써서 관리되던 호적등본을 한글로 바꾸고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듯했다. (趙正彬 → 조옥빈). 가족관계증명서를 확인해보니 「조정빈」으로 제대로 돼있어 그냥 두기로 했다. 이유는 한 가지 「귀찮아서」.

남파랑길 안내표식 중 잘못된 안내표지판은 정정되어야 하는데 언제 누가 할까? 미흡한 방향표지판은 누가 어떤 식으로 보완할까?

허리병 탈출기

2020년초 설 연휴 포함 3박4일 일정으로 강화나들길 118km(5개 코스+α)를 걸었다. 2019년 10월에 걸었던 교동도 2개 코스 33km까지 합하여 전체코스의 절반을 걸은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후에 「서해랑길」이 개통되면 마저 걸어볼까 생각 중이다.

강화나들길 전부를 걷지는 않았지만 강화나들길은 다른 「걷기 길」과 다른 코스 상의 특징이 있는 듯했다. 첫째는 본섬과 다리로 연결된 교동도 석모도,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볼음도 주문도 등 4개의 부속 섬에도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에도 불구하고 바닷길과 산길의 비중이 5:5(느낌상으로는 4:6)정도로 평탄한 해변을 거니는 쉬운 코스가 아니라는 것이며, 셋째는 코스 설계가 외지인보다는 현지인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는데, 특정 지역이 여러 개의 코스에 중복하여 포함되어 있다든지 코스의 연결성이 부족해 번호를 따라 이어걷기보다는 하루에 한 개 코스 걷고 내일 다시 걷는, 현지 생활 리듬에 맞추어진 듯한 것 등이다.

2일째 일정은, 첫날 걸은 1번 코스에 이어 2번 코스를 걷고 난 후 6번 코스를 걷는 것인데, 먼저 걷게 되어있는 2번과 후에 걷는 6번 코스 모두에 포함되어 있는 해변 길은 한번만 걷기로 하고 6번 코스의 나머지 부분을 거슬러 걸어 숙소가 있는 강화터미널로 돌아가는 것으로 정했다.

걸어야 할 6번 코스는 전부 내륙코스 산길이었다. 강화 선원사지를 지나 목적지를 앞두고 마지막 휴식 직전 응달진 계곡 내리막 경사를 내려갈 때였다.

1월 말 영하의 날씨 속에 살짝 얼어있던 지표면은 잔설과 낙엽에 감춰져 있었고, 빨리 경사를 내려가서 쉬자는 조급함, 균형 잡는 데는 늘 자신 있다는 오만함이 사고를 불렀다.

한순간에 몸 전체가 허공에 떴는데 발이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몸은 땅바닥에 팽개쳐졌고 이어서 미끄러져 내렸다. 뒤따라오다 사고를 목격한 집사람은 비명을 질렀고, 무시무시한 비명소리에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숨겨진 미끄러움, 조급함, 오만함에 더해진 무모한 반사행동의 결과로 나는 다시 허공에 떠올랐고 패대기쳐졌고 미끄러져 내렸다.

모든 것이 멈추고 집사람의 비명지르기도 그치고 정적만이 흘렀다. 순간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어날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누운 상태에서 몸의 어느 부분이 망가졌는지 점검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의식을 잃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머리를 만져보았다. 방한모는 첫 번째 실족 때 벗겨졌는데 두 번째 넘어지며 뒷통수가 땅에 닿은 것 같기도 하여 걱정이 되었으나 통증이나 부상 없이 온전했다. 이어서 몸을 돌려보고 엉덩이를 들어 허리도 무사한지 점검해 보았다. 전에 허리가 아파 고생한 경험이 있어 일어나서 다시 한번 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팔·다리 관절도 움직여 보았다.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집사람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벗겨진 모자와 스틱을 챙겨 들고 제자리 뛰기 허리 굽히기를 해보이며 집사람을 안심시켰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2회의 공중부양 후 자유낙하, 이어서 10미터 이상을 미끄러져 내렸는데 다친 곳이 없음에 너무 감사했다. 손목에 온기가 느껴져 팔을 걷어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찰과상, 조급증과 오만함을 질책한 징표라고 생각하고 그마저도 감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휴식을 취하며 손목도 치료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배낭을 열고 귤과 과자가 담긴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귤과 과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눌린 상태였고 배낭 속 다른 물건들도 확인해보니 비슷한 상황이었다. 내 머리·허리 대신 망가진 물건들과 그들을 끝까지 감싸고 있던 「K2, 용량 28리터 배낭」덕에 무사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에는 늘 기쁜 마음으로 배낭을 메고 걷기 길에 나서고 있고, 지금도 K2 배낭을 보게 되면 그날의 사고가 떠오른다.

그 날 저녁식사 중 화제는 당연히 실족 사고였고 사고를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오늘 이전에 넘어진 게 25년 전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학창시절 균형 잡는 운동의 짱이었었다, 스케이트를 한 시간 만에 배우고 창경원 연못을 넘어지지 않고 수도 없이 돌았다 등등의 영혼 없는 말을 하는 동안 집사람은 영양가 있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병에 걸려서이고 다른 하나는 다쳐서이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면역력을 키우고 생활을 건전하게 가져가야 하고 다치지 않으려면 자세를 낮추고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 「어르신」이 된 나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그 날 밤은 곤히 잠들지 못했다. 31km를 걸었으면 곯아떨어져야 할 텐데 꿈속에서 여러 번 공중부양을 했고 그때마다 허리를 다치는 악몽에 시달렸었다.

나의 허리 통증은 역사가 깊다. 중학교 체육시간에 배구하다 삐끗한 허리가 시도 때도 없이 통증으로 다가와 침도 많이 맞았고 물리치료 기구가 어떤 발전단계를 거쳤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때가 되면 정형외과 신세도 졌었다. 그러나 아픈 정도가 심해 하던 일을 멈출 만큼은 아니었으므로 그때그때 대증요법을 쓰며 버텨왔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31일 비교적 긴 승용차 이동 후에 도착한 골프장 첫 홀에서 드라이버를 돌리는 순간 몸에서 팽팽한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고 심한 통증으로 라운딩을 중단했다. 이후 여러 날 동안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며 나아지기를 기다렸으나 차도가 없어 다른 치료 방법을 찾아 종합병원에 갔고 MRI도 찍었다.

MRI를 판독하면서 건네던 정형외과 의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상태가 매우 심각합니다. 현 상태를 방치하면 다음에는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올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상태의 환자 중에는 통증이 심해 대소변을 해결 못 하는 사람도 있는데 통증을 참아내시는 게 대단하십니다. 병명은 4, 5번 추간판 탈출증이고 치료방법은 수술·시술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골프장에서 주저앉은 지 한 달 만에 허리 통증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투병생활의 시작은 치료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최초 진단 병원 외에도 이대 목동병원 삼성 서울병원과 척추전문 개인 병원의 전문의들을 만나 치료에 대한 상의도 했고 병을 고친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투병 성공 사례도 들어보았고, 척추관련 서적·인터넷기사 등을 검색하고 종합하여 나만의 「치료 원칙과 방법」을 정했다.

  • 돌이킬 수 없는 수술이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시술은 하지 않는다.
  • 통증은 참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많이 힘들면 진통제로 해결한다.
  • 병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잘못된 자세와 습관은 즉시 바로 잡는다.
  •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운동과 조치를 꾸준히 한다.

나만의 「치료 방법」을 실천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통증을 참아내는 것이었다. 통증이 심할 때는 누워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돌아눕거나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누워도 앉아도 서도 아팠다. 그런 중에도 먹어야 했고 화장실에도 가야 했고 무언가는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몹시 아팠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고통 속에서 살 바에야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그렇게 한 달 이상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통증에 대처하는 요령도 생기고 적응도 하다 보니 진짜 투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른 자세와 습관」의 기본은 허리에 충격이나 압력이 가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직립 보행하는 척추동물의 취약점이 보완되도록 가급적 허리를 꼿꼿이 세워서 압력을 줄이는 노력을 했는데 특히 의자에 앉을 때, 걸을 때, 책이나 핸드폰·컴퓨터를 볼 때, 세면할 때, 식사할 때, 유의할 점이 많았다.

「접시돌리기」는 모든 관절을 움직이는 체조로 손에 접시를 올려놓고 관절을 돌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한 개도 못 했지만, 좌·우·양손 각각 100회 이상 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꾸준히 늘려나갔다.

「발끝 부딪히기」는 취침 전에 하체 근육 단련, 혈행 원활화, 틀어진 자세 바로잡기, 숙면 유도 등을 목표로 매일 했다. 처음에는 10개도 어려웠지만 후에는 1000개 이상까지 가능해졌다.

「반신욕」은 혈행 원활화를 위해 배꼽까지 잠기는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15분가량 앉아 땀을 흘리는 것으로 매일 했다. 몸을 물에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장점이 있는 반면 더운물로 인하여 피부 표면에 있는 지방질이 씻겨나가 피부가 짓무르는 부작용도 있어 유의해야 한다.

「산보」는 왼쪽다리 통증이 심해 처음부터 할 수는 없었다. 왼쪽다리를 가까스로 들 수 있을 때부터 시작했는데 10분을 못 걷던 것을 1시간 이상 걸을 때까지 계속했다. 거리는 생각하지 않고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독서」를 통해 고통스러운 시간의 대부분을 이겨냈다. 누운 자세로 편안하게 책을 보기 위해 거금을 들여 리클라이너 쇼파도 샀고 의자에 앉아 독서할 때는 책 받침대를 이용하는 습관도 들였다. 재미있는 내용을 보는 동안에는 통증도 잊을 수 있어 투병생활 중 「대망」같은 대하소설을 포함해 대충 30,0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읽었다. 부작용으로는 심각한 시력저하가 있다.

투병생활을 시작하고 만 4개월 (골프장에서 주저앉은 지 5개월)남짓 지난, 2015년 2월 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허리와 다리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프지 않았다. 그 후 5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물론 투병생활 중에 했던 일들 대부분은 지금도 계속 실천하고 있다.(재발이 무서워 다니던 병원에 재발률을 문의한 결과 한 병원에서는 100%, 다른 병원에서는 2년 이내 70%라고 했다.)

엄청난 허리통증 트라우마를 겪고 난 후 나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몸을 움직이기 전에 허리에 가해질 수 있는 충격과 압력을 먼저 생각해보고 행동했다. 무거운 물건 들기, 같은 동작 오래하기, 양반다리하고 앉기, 목이나 허리 구부리고 무엇인가 하는 것 등은 절대로 피했고, 간단한 운동 전후에도 몸을 풀어주며 혹시 있을지 모를 관절과 허리의 부담을 해소시키는 노력을 해왔었다.

그랬던 몸이 두 차례의 공중부양과 자유낙하를 겪었으니 어찌 보면 악몽을 꾸게 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고 본다.

아쉬운 점은 두 번째 실족인데, 지금도 그 원인을 집사람이 내지른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비명소리였었다고 생각한다.

교각살우 (矯角殺牛)

지금도 골프채를 놓지 않고 가끔씩 라운딩을 하니 통계상으로 보면 나도 아직까지는 골프인구에 포함되겠다. 비록 금년은 코로나19로 인해 골프치는 환경이 몹시 나빠져 라운딩 횟수가 10여 차례에 그쳤지만, 지나간 어느 해인가는 연 100회 가까운 출장기록도 갖고 있다. 머리 올릴 때 마련한 퍼터가 내 캐디백 안에서 먹은 나이가 28년이니 이제껏의 라운딩 횟수를 헤아려보면 어림잡아 1,000회에 이를 것도 같다.

금년도에 우리나라 골프장들은 다른 업종과는 다르게 코로나19로 내장객이 늘어나 긍정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듯하다. 예년 같으면 골프치기 적합하지 않은 계절에는 할인·초대 등의 판촉 활동이 이어졌겠으나, 해외 골프여행이 불가능해진 골수 골퍼들과, 다른 운동에 비해 골프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고객들의 등장으로 예약이 넘쳐나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한참 열심히 골프치던 시절에는 환경이 나쁘게 변하면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여해서 적극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벌써 몇 년 전부터 「골프와 거리두기」에 들어갔고 지금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상태다. 긴 세월 즐거움을 함께했던 골프와의 거리두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공이 잘 맞고 거리가 나고 성적이 좋아야 재미를 느끼는데 체력과 집중력이 전과 달라 뜻대로 되지 않으니 재미가 반감된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있는 정도를 매일 치는 탁구와 비교하면 비교가 불가능하다. 추억은 잔뜩 쌓여 있지만 현실은 아닌 거다.

둘째는 가성비가 매우 낮다. 팀 구성하고 예약하고 가방 챙겨 이동하고 운동 끝나고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들이 주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신경줄과 체력이 전과 같지 않고, 라운딩 당일에만 투여하는 시간이 적게는 8~9시간 많게는 12시간이나 되며,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그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접대·사교 같은 목적이 전혀 없다.)

셋째는 함께 라운딩할 멤버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재미없고 가성비 낮다는 공통된 생각 이외에도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최근에는 손자 돌보기로 시간 내기 어렵다는 이유까지 등장하다 보니, 한 팀 4명을 날짜와 시간까지 맞추어 구성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골프를 전처럼 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도 좋은 계절에 자연스럽게 멤버가 짜여지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스개로 하는 말이겠지만, 누워서 하는 놀이 중 최고는 sex, 앉아서 하는 것 중 최고는 마작, 서서 노는 것 중 최고가 골프라 하지 않았던가.

운동이 골프의 은어로 쓰이던 때가 있었다. 「주말에 뭐했니? 운동했어.」 이때 운동이 골프인 게다. 누구나에게 해당되던 사항은 아니지만, 골프 친 사실을 대놓고 말하기 뭐하거나 그렇다고 거짓말 할 필요까지는 없을 때 그리 말하곤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골프를 운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골프를 운동이라는데 거부감이 있었다. 걷고 몸을 움직이기에 골프가 운동이라면 뇌·허리·사지를 움직이는 sex나 마작도 운동이겠다. 골프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대회에 나가 상금을 노리는 프로골퍼들에게는 운동일 수 있지만, 주말이나 휴일, 은퇴 후 가끔 골프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운동보다는 재미로 즐기는 놀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골프장을 찾아 재미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자연, 맑은 공기, 자연과 조화된 조경, 시속 1~2km의 속도로 걷는 여유, 여유 속에서 나누는 대화, 가끔씩 나오는 나이스 샷 이런 것들일 것이다.

함께 골프장을 찾아 즐겼던 지인들 중에는 골프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골프룰 신봉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골프룰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는 철저하게 룰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골프에는 경기 중에 지켜야하는 복잡한 룰들이 있는데 우열과 승패를 객관적으로 가르기 위함이겠으나 워낙 내용이 다양하고 복잡하여 룰 북(Rule Book)을 만들어 공유해야 할 정도이다. 게다가 매년 그 내용이 바뀌어 최신 버전의 골프룰을 모두 알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프룰 신봉자」들은 골프룰 연구 모임 차 필드에 나선 것처럼 룰을 지키고 룰을 지키는 것 자체를 큰 재미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비단 골프장에서 룰을 강조하는 것 말고도 사회생활하면서 유사한 사례를 적잖이 접할 수 있다.

  • 술 마시면서 맛있는 안주 먹으며, 넉넉해지는 분위기,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마신 술의 양에 집착해서 병을 세고 잔을 세는데 골몰하는 경우
  • 걷기 여행길에 나서서, 자연경관을 즐기고 낯선 곳이 주는 야릇한 해방감도 만끽하며 자유로운 사색과 운동으로 얻어지는 심신의 건강을 느끼기보다는, 걸은 km수에 집착하는 경우
  • 노래방에서 즐겁게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고 흥을 돋우며 스트레스를 풀기보다는, 기계에 표시된 점수에 목을 매는 경우
  • 탁구장에 가서, 땀 흘리고 웃으며 공치고 즐겁게 담소하며 건강 증진을 기대하기보다는, 이기고 진 게임 수에 일희일비하는 경우

이와 같은 사례를 찾으려면 끝도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본인의 생각을 동반자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골프룰·병수·km수·점수·게임수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적당선에서 그치지 않고 심하게 강요하고 나서면 판이 깨질 수밖에 없다.

판을 깬 「골프룰 신봉자」에게 적당히 하라는 충고를 하면 돌아오는 답이 있다.

「룰은 지키라고 있는 것인데 룰을 지키기 않는 것이 잘못이지 지키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냐」

「룰을 모르면 배워야하고 잘못됐으면 고쳐야지 무슨 소리냐」

사실 「골프룰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알고 지켜야 할 룰」은 별 게 아니다. 자주 문제가 되는 것들을 보면, 페널티 구역으로 공이 들어갔을 때의 처리 방법, 언플레이어블(Unplayable) 선언 후의 구제 방법, 무벌타 구제 범위 및 방법 등등이 있다. 골프를 몇 년 친 사람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룰이지만 흔쾌히 지키고 싶은 생각이 잘 들지 않는 경우가 있다.

구체적으로 「언플레이어블 선언」을 예로 들면, 친 공이 떨어져 놓인 위치가 공을 치기 곤란한 장소라면 1벌타 받고 다른 곳에 공을 놓고 다시 치겠다는 선언을 하고 공을 치는 것이다. 이때 다시 공을 칠 수 있게 허용된 3곳의 장소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먼저 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경우 공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OB가 난 것도 아닌데 실제로는 2벌타를 받는 것이니 억울한 생각이 들게 된다. 실제로는 골프장 사정상 되돌아가서 칠 수 있지도 않다. 두 번째는 공과 홀을 잇는 연결선 후방에서 치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냥 치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던지 아예 이동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 번째는 2클럽 이내의 원 안에서 치는 것이다. 가능하면 룰을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럴 때 우리들은 1벌타를 인정하고 공을 가지고 나와 페어웨이에 있는 좋은 곳에 놓고 친다. 이런 것이 「골프룰 신봉자」 기준으로 볼 때 룰을 모르고 지키지 않는 것이다.

교각살우(矯角殺牛) 소의 뿔이 굽은 것을 고쳐 바르게 하려다 소를 죽인다는 고사성어다.

소뿔 보려고 소 키우는 것이 아니라면 뿔이 조금 굽은 게 무슨 상관인가. 물론 「제사에 쓰이는 소」이므로 뿔이 곧아야 한다면 뿔 곧은 소를 고르면 되는 것이지 뿔 굽은 소를 붙잡고 실랑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실랑이 끝에 판까지 깨게 된다면 정말 미련한 짓이다.

골프룰을 완화하여 적용하는 것도 나이 먹은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 「양보와 배려」의 범주에 포함시키면 어떨까.

잘 걷는 비결

집사람을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집사람의 걷기 여행 경험을 듣고 나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누가 봐도 허약체질에 약골(160cm, 44kg↓)로 보이는 사람이, 하루에 20~30km를 너끈히 걷고, 4박 5일이면 100km이상을 걸어서 이제껏 걸은 거리가 1,000km 이상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대단하다고들 추켜세우지만 의구심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든듯 했다. 그 몸에, 어디서 나온 힘으로, 그렇게 걷느냐는 것이다.

걷는 일을 주로 맡아 하는 신체 부위는 발과 다리이다. 발과 다리를 움직여 몸을 이동시키는 것이 걷기이므로 걷기 좋은 몸은 가벼울수록 좋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집사람의 가벼운 체중이 걷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모르는 거다.

힘들어서 걷기를 포기하기에 이르기까지에는 매번 비슷한 「사전 징후」와 「변화 프로세스」가 있다.

단단히 준비하고 나섰지만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편치 않고, 어제 맨 배낭이 오늘 더 무겁게 느껴지며, 특히 신과 발이 닿는 접촉면에 무언가가 끼어있는 듯한 이질감이 감지되는 것이 사전징후이다.

그 상태에서 얼마간을 더 걸으면 첫 번째 변화로 발가락 끝이나 발바닥 한 귀퉁이가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문제 부위와 신발 면의 접촉을 줄이려고 발을 달리 디뎌보지만, 신발 안에서 발을 움직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통증 범위는 점점 확대된다. 오래지 않아 통증부위에는 물집이 잡히고 발을 디딜 때마다 고통은 가중된다.

문제가 왼발에서 시작됐다면 왼발의 고초를 함께 나누고자 오른발이 등장하지만 큰 도움이 못 되고 오히려 양 발바닥 모두가 힘들어진다. 그즈음에는 발목과 무릎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도우려 나서지만 결과는 역부족. 몇 번의 반전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나면 인내심마저 고갈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상태까지 가게 되면 당분간은 걸을 수 없게 된다. 그 과정을 다 밟고 망가지는 것이 아마추어이고 중간에 변화를 만들어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반전시키는 것이 프로이다.

잘 걷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지인들의 거듭된 질문에도 이제껏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었다. 나 스스로 확신 할 수 있는 답을 정리해서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과 운동」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걷기 경력도 내세울 정도가 못되어 설득력은 떨어지겠지만, 실제 걸으며 느낀 작은 경험들을 모아 정리해 보았다. 「잘 걷는 비결」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고 「걷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제언」정도로 이해되면 되겠다.

첫째, 걷기를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의 전 과정을 뇌가 지휘하고 통제하게 한다.

우리의 행동을 뇌가 관장하지 않을 때가 있을까? 많다. 뇌가 작동하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당일치기 짧은 일정이거나 여러 날을 걸어도 하루 10km 전후의 여행이라면 구태여 뇌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이상이 되면 반드시 뇌를 통해야 한다. 뇌를 통해야 부상을 예방하고, 몸의 상태를 최적으로 유지하며, 효율적으로 걷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 걷고 쉬는 원칙이 사전에 정해졌더라도 몸의 이상이 감지되면 반드시 뇌의 「새로운 판단」을 구한다. (불편을 참지 말고 다른 부위가 영향받기 전에, 휴식이나 치료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 최적의 몸 컨디션을 위해 갈증이 나기 전에 일정 간격으로 물을 마시고, 허기가 느껴지기 전에 적당한 요기를 한다.
  • 뇌가 알고 있는 바대로 오르막 내리막 걷기를 실천하고 등산 스틱 등의 장비도 적절히 활용한다. (귀찮다고 외면하고, 자신감으로 무리하는 팔다리의 본능을 뇌가 억제토록 한다.)

둘째, 최대한 가볍게 하고 걷기를 시작한다.

선조들이 남기신 생활의 지혜 중에 「한양 천릿길 과거보러 갈 땐 눈썹도 뽑고 가라」는 속담이 있다. 먼 길 떠날 때 짐이 주는 부담이 어떨지를 헤아리게 하는 말씀이 되겠다. 무게가 주는 부담은, 처음에는 크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시간과 거리가 누적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무게를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발과 다리는 많은 고통을 받게 되고 몸 전체로 볼 때도 체력이 쉽게 소진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짐을 적게 가져가려면 짐을 꾸릴 때부터 걷기 일정·코스·교통·숙박 등을 염두에 두고, 가져가야 할 짐을 선택해야 한다.

  • 현지에서 구매 가능한 물건은 미리 가져가지 않고, 보충이 가능한 물건은 최소량만 가져간다. (국내에서라면 가격이나 구매 편의성 등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 장비는 상황에 맞추어 준비하되 가급적 가벼운 것을 택한다.
  • 지난 여행에서 사용되지 않은 물건을 다시 가져갈 때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짐을 효율적으로 휴대 운반하는 방법은, 주머니에 넣거나 허리에 차거나 다리에 매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는 것이다.
  • 몸에 지니는 짐 말고 혹여 마음에도 짐이 있다면 내려놓고 가는 것이 좋다. 아주 가끔 마음의 짐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셋째, 걷기의 성패는 열 관리에 있다. 관리 대상은 체온과 마찰열이다.

걸으면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나서 옷이 젖고 갈증이 나게 된다. 체온 관리가 어려워지게 되면 걷기를 멈추고 쉬어야 한다. 체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걷기에 적당한 계절을 찾아야 하고, 하루 중에도 땀 관리가 용이한 시간대에 걷는 결정을 해야 하며 어떤 옷과 모자를 착용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아울러 상승한 체온이나 발한으로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 준비도 필요하다(여벌의 옷, 음료, 알소금 등).

가장 중요한 조언은, 걸을 때 신과 발의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마찰열을 여하히 관리하느냐에 걷기 성패가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앞서 열거한 모든 사항들이 성공적으로 돌아가더라도 마찰열이 발바닥을 망가뜨리게 되면 걷기를 끝내야 한다. 완벽할 수는 없으나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을 열거해 보겠다.

  • 신발 안창과 양말의 재질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고 자신에게 적당한 것을 고른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반론으로 설명하기 곤란)
  • 마찰열로 발에 땀이 나서 양말이 젖게 되면 발바닥이 쉽게 망가지므로 반드시 여벌의 양말을 준비한다.
  • 신발 바닥과 도로가 닿을 때 미끄러짐이 적으면 신발 안창과 발이 닿는 부위에서 마찰열이 많이 발생하므로 가급적이면 미끄러지지 않는 아스팔트길을 피하고 흙길을 밟아 마찰열을 줄인다. (아스팔트길<시멘트길<목재 데크길<흙길)
  • 오르막·내리막 등 경사지에서는 발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종아리·허벅지·상체(등산스틱)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본다.(훈련 필요)
  • 50분 걸으며 발생한 마찰열은 10분 쉬는 동안 반드시 확실하게 없애주어야 한다. 쉬기 시작하면 신과 양말을 벗고 발을 대기 중에 노출시키거나 차가운 돌 등에 대고 있다가 출발 직전에 양말과 신을 신는다.

집사람은 나의 도움말 없이도 잘 걸을 수 있는 조건을 이미 갖추었다. 첫째 뇌를 쓸 필요가 없다. 동행인 나의 뇌를 이용하면 된다. 둘째 짐 싸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다. 동행인 나에게 건네주면 된다. 셋째 몸도 가볍고 짐도 없이 걷다가 휴식 시간에 나를 따라 신과 양말을 벗고 신으면 마찰열도 문제될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어지면 「그만 걷고 싶어」라고 한마디 해서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다.

2019년 이래 집사람은 1,000km 이상을 나와 함께 걸었다. 해파랑길 500km, 남파랑길 350km, 태안해변길 100km, 강화나들길 90km 등등.

걸으면 건강하다

걷기를 시작하고 나서 주위 분들로부터 건강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건강해졌느냐, 체중은 어느 정도 줄었느냐, 무릎이나 발목에 무리가 가지는 않았느냐, 그렇게 걷고도 혈압·당뇨약을 계속 먹고 있느냐, 등등. 걷기 시작 이후에 겉으로 드러나는 몸의 변화는 거의 없다는 것이 나의 답이다. 체중은 늘 73kg 내외에 머물고 있고, 혈압·당뇨약은 수년 전 받은 처방 그대로 복용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상습적으로 접질리던 왼쪽 발목과 오스굿씨 병을 앓았던 무릎도 더 나빠지지 않고 그대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걷기 전에 비해 체력에 대한 자신감이 커졌고, 신체 여러 부위에서 전보다 단단해졌음이 느껴지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겠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몸은 어려서부터 건강했었다. 그러다가 직장 생활 시작하고 불과 몇 년 만인 30대 초반부터 간·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휴식 없이 일하고, 무식하게 마셔대고, 무지하게 피워대는데 병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랄 수 있겠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너는 마흔 살만 넘겨도 호상이다」

직장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던 어학연수를 받으며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위태위태하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고혈압이 심하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때 처음 먹기 시작한 혈압약을 아직까지 먹고 있고 그때 구입한 혈압측정기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당뇨가 의심됐지만 검사를 미루다가 귀국 직후 받은 검사결과는 초기 당뇨병이었고 이후 이제껏 아침마다 당뇨약을 먹고 있다. 두발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머리가 급속도로 희어지고 탈모가 많아져서 나이보다 너무 늙어 보였다. 추한 모습이 싫어 난생 처음 머리 염색을 중국에서 하게 됐고 지금까지 머리 염색을 하며 살고 있다. 9개월에 불과했던 북경 생활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철체력을 자랑하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북경에 있는 동안 늘 마음이 아팠다. 서울에서의 일들, 회사의 부적절한 조치, 어려움에 빠진 옛 부하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울화가 치밀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마음」이 많이 아픈데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몸」이 나서서 마음의 아픔을 나누었고 그 결과가 고혈압·당뇨병·탈모가 아닌가 한다. 만약 그때 몸이 나서지 않았다면 마음 혼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2014년, 60줄에 들어선 나이에 허리병을 몹시 앓았다. 엄청난 통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극도로 제한되었었고 회복을 기약할 수도 없다 보니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이 쉽게 들었었다. 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잘못된 자세와 생활습관은 완전히 바뀌었고 재발 없이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스스로는 완치됐다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통증으로 힘들어 하던 시기에 눈을 혹사시켜 시력 저하가 온 것이다. 다소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더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내고 있다.

최근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놓고 종합적으로 현재의 몸 상태를 보면, 당뇨와 고혈압으로 약을 먹고는 있으나 잘 관리되고 있고, 간 수치는 정상범위, 시력은 현상 유지, 탈모도 수용가능 수준이다. 허리·무릎·발목·어깨·팔꿈치 등 노인들이 주로 겪는 근골격계 질환 부위도 현재까지는 문제될 게 없다. 한마디로 「한동안은 큰 무리 없이 쓸 수 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몇 년 동안 건강에 문제가 생겨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해진 친구들이 부쩍 늘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걱정이 많다. 나이를 먹었으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겠으나, 희망은 죽기 전날까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걷기 여행을 시작했으나 계속 걷다 보니 좋은 점이 많았다. 체력이 유지되는 것 이외에도 정신건강에 도움 되는 것이 적지 않아 꾸준히 걸으면 「건강하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정리하던 중, 걷기를 통해 탈선 청소년을 선도하는 「쇠이유(Seuil)」라는 프랑스 단체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프로젝트를 알리는 책자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효명출판사, 임주현 옮김)」을 읽게 되었다. 탈선 청소년과 성인 동행자, 둘이서 프랑스 국경 밖으로 나가 3개월 동안 1,800km를 걷는 프로그램에 단계별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공동으로 쓴 책이다. 읽으며 공감하는 바가 많았고 그중 일부를 발췌해 보았다.

  • 걷기는 육체적 건강, 낙관적 생각, 미래의 구체적 계획을 가져다준다. (p.18)
  • 걷기는 흥분한 사람을 진정시키기도 하고 조용한 사람을 자극하기도 한다. (p.29)
  • 장거리 걷기 여행을 하고 나면 태도가 바뀌고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이 모르고 있던 의지를 깨닫게 된다. (p.31)
  • 걷기가 몸에 익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걷기에는 강압적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 (p.43)
  • 일주일을 걸으면 한 달 동안 큰소리칠 수 있다. (p.46)
  • 걷기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 결국 영향을 미치게 된다. 걷기 여행이 끝나도 「머릿속에서」 걷기는 계속된다. (p.82)
  • 오래 걷다 보면 생각이 하나로 모인다. (p.94)
  • 절약은 걷기에서 배우는 또 다른 가치이다. (p.130)
  • 걷기란 일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정체성의 제약과 그에 따른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p.141)
  • 장거리 걷기는 내적인 변모를 일으킨다. 처음에는 「산책」으로 시작하지만 차츰 내적인 이상향에 다가가기 위한 「순례」로 바뀌게 된다. (p.142)
  • 같이 오래 걸으면 소통이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함께 침묵을 지킬 수 있다. (p.142)

앞으로도 계속 걸을 작정이다. 걷다 보면, 혈압약과 당뇨약이 필요 없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생각만 조금 바꾸면 체중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초등학교 시절 많이 들었던 캠페인 송(1964년, 동아방송 제작)의 가사와 멜로디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걸어서 가자>                   1절/2절/3절

상쾌한 아침이다 / 유쾌한 기분이다 / 노을도 아름답다

걸어서 가자

너도 걷고 나도 걷고 / 학교에도 일터에도 / 동서남북 어디라도

걸어서 가자

걸으면 건강하다

걸어서 가자

상쾌한 아침이다 / 유쾌한 기분이다 / 노을도 아름답다

걸어서 가자

탁구 이야기

은퇴 후 나의 일상생활에서 탁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요즈음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오후에 2시간씩 탁구를 치는데 탁구장 오가는 시간까지를 포함하면 하루에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삼시 세끼 해결하는데 드는 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했으니 어언 8년 가까이 탁구와 함께 지냈다. 시작 무렵에는 도곡동·원효로 주민센터를 이용하다가 중간에 강남구 스포츠 문화센터를 거쳐 지금은 위례신도시에 있는 사설 탁구장에 다니고 있다.

중학생 시절에 탁구를 처음 만났으니 탁구 역사의 시작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멘트 바닥에 분필로 탁구대를 그린 다음 벽돌이나 나무 조각을 가운데 늘어놓아 네트 역할을 하게 하고 라켓도 없이 손바닥으로 공을 쳐서 넘기는 「원시 탁구」부터 시작했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진짜 탁구대와 라켓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에는 제대로 된 탁구를 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붐비는 날짜와 시간대만 피할 수 있으면 무료로 얼마든지 탁구를 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 중에는 탁구를 잘 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요즈음 내가 다니는 탁구장에서 실력자로 꼽히는 사람 중에도 전·현직 목사님이 몇 분 계신다.

대학 입학하던 1973년, 우리나라 여자 탁구팀이 당시 공산국가이던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과 일본을 누르고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구기종목에서 세계를 제패했다며 온 나라가 들썩였고 이후 한동안 탁구붐이 일어 동네마다 탁구장이 생겨났었지만 정작 나는 그 시기에 탁구와 떨어져 지냈다. 군생활 중에도 기회가 있으면 탁구를 쳤지만 탁구 실력 향상에 보탬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교회탁구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4년, 북경 어학연수 중에 탁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중국에서 탁구는 국기(國技)인 듯했다. 가는 곳마다 탁구대가 있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탁구를 칠 줄 알았는데 하나 같이 실력들이 대단했다. 하루 종일 탁구만 다루는 TV 채널도 있었고, 최근에 알아본 바로는 전체 등록 선수만도 2,000만 명 이상이고, 프로격인 탁구 리그가 5개 있는데 리그 당 팀이 12개씩 있다고 했다. 리그에 등록된 선수만도 7,000명이 넘는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다니던 중국어 학교에도 탁구대와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틈만 나면 낮 시간,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중국 선생들과 게임 위주로 탁구를 쳤다. 몇십 년만에 탁구를 치는데다가, 라켓이 셰이크핸드(Shake hand)뿐이라서 펜홀더(Pen holder)를 사용했던 나로서는 제대로 된 실력 발휘가 힘들었다. 선생들이 명시적으로 판정해 주지는 않았으나 上中下 중에서 下로 분류된 듯했다.

30여 년 전부터 탁구를 쳤는데 초급자 취급을 받으니 몹시 억울했고 내가 대한민국의 격(格)을 떨어뜨린 것 같아 죄송하기까지 했다. 탁구용품 전문 판매점을 찾아가 힘들게 펜홀더 라켓을 장만하고 게임 요령도 터득해 귀국 직전에는 中 정도까지로 수준을 끌어올렸다. 지금도 가끔 중국시절 탁구를 떠올리면 중국제 펜홀더 라켓과 동네 어귀 야외 탁구대에서 탁구를 즐기던 노인들의 환한 웃음이 생각난다.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 시작한 사업이 난관에 봉착했던 즈음, 사업을 접고 나면 무엇을 할까 남아도는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등으로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먼저 은퇴한 선배들도 찾아뵙고, 인터넷도 뒤적거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중 민원서류 발급 받으러 간 주민센터에서 교육·여가 활용 프로그램 팸플릿을 보고 센터 내에 있는 탁구장을 찾아가 보았다. 탁구공이 탁구대와 라켓을 만나며 내는 경쾌한 소리가 나를 부르는 듯했고 10년 전 중국시절 탁구가 오버랩 되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회원등록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은퇴 후 탁구가 시작된 것이었다.

다시 탁구를 시작하고 나니 헤어졌던 옛 애인을 만난 것 같았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 듯 매일 열심히 탁구를 쳐댔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탁구의 좋은 점을 알리고 탁구장으로 이끄는 탁구 전도사가 되었다. 전도내용을 열거해 보자.

첫째, 재미가 있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겨루는 운동은 대체로 재미가 있다. 상대방과의 신체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육체적 기량과 멘탈 역량이 합해져서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적 기량은 뒤지지만 멘탈이 강해 승리를 낚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멘탈이 변수로 작용하여 게임의 결과를 속단할 수 없는 것이 재미이다. 본인이 선수가 되어 직접 뛰든지 심판석에 앉아 제3자로 보고 있든지 머릿속은 끊임없이 게임의 흐름을 읽고 결과를 예측하는 것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재미가 더해진다.

둘째, 운동이 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운동 중에는 운동량이 흡족하지 않은 운동들이 더러 있다. 예컨대 당구, 골프, 걷기 등이 그것이다. 늙어서도 할 수 있는 탁구는 이들 운동에 비해 운동량이 대단히 많다. 시간당 소모되는 칼로리의 양을 가지고 비교하지 않더라도, 호적수를 만나 30분만 열심히 뛰면 온몸을 흥건히 적실 수 있는 양의 땀을 배출할 수 있다.

셋째, 부상의 우려가 적다.

운동량이 충분한 운동 중에는 위험요소를 내포한 운동들이 많으나 탁구는 운동량도 적지 않으면서 부상 입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충돌이나 충격에 의한 큰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염좌나 찰과상 같은 작은 부상도 발생하기 쉽지 않다. 가끔 용도가 다른 운동화를 착용하여 발목이나 무릎 관절에 무리가 가거나, 신체의 한쪽이 주로 사용돼서 오는 좌우 불균형 정도가 우려의 대상이다.

넷째, 준비물이 많지 않다.

지방에 다니러 갔다가 시간적 여유가 있어 심심파적으로 탁구치기를 작정하고 사설 탁구장을 방문한다면 아무 준비가 없어도 탁구를 칠 수 있다. 사용료를 내고 제공받은 라켓·신발·공을 들고 상의만 벗으면 탁구대 앞에 설 수 있다. 제대로 된 장비와 복장을 갖춘다 해도 라켓·운동화·운동복·탁구공이 전부다.

다섯째, 시간·공간의 제약이 거의 없다.

실내스포츠인 탁구는 계절이나 날씨와 무관하게 즐길 수 있고, 조명만 있으면 낮과 밤 언제라도 운동이 가능하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이상」에서 탁구장이 문을 닫았으나 그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본인이 원하는 시간대에 탁구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탁구대 1대가 놓이는 규격 공간은 가로×세로×높이 14m×7m×5m이나 공식 경기가 아니라면 탁구대 규격 1.5m×2.7m×0.76m보다 넓기만 하면 융통성을 발휘해서 즐길 수 있다.

여섯째, 비용이 적게 든다.

탁구 용품 중 가장 비싼 것이 라켓이다. 아마추어용 최고급 라켓 가격은 30만원 내외인데 정기적으로 러버를 갈아 붙이면 10년 이상도 사용이 가능하다. 마루바닥에 적합한 탁구화 10만원 내외, 전에 입던 티셔츠와 반바지만 꺼내 입으면 장비와 복장을 완전히 갖출 수 있고 소모품인 탁구공을 월 5천원어치만 사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참고로 현재 내가 사용하는 라켓은 2년 전에 10만원 주고 구입한 중고품이고 탁구화는 은퇴 탁구 시작하던 8년 전에 세일가 7만원 주고 산 나이키 운동화이다. 장비·복장 이외의 비용으로 탁구장 회비가 있는데 월 10만원이면 아무 때나 조건 없이 칠 수 있다. 별도의 레슨을 받고자 하면 월 10만원을 추가로 부담하면 된다.

일곱째, 적은 인원으로 함께 즐길 수 있다.

기본적으로 네트 건너편에 한 사람만 더 있으면 탁구를 칠 수 있다. 3명 이상 되면 번갈아 가면서 연습과 게임이 가능하다. 단체운동처럼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고 개인이 4명 모여야 재미있어지는 골프보다 적은 인원으로도 즐겁게 운동할 수 있다.

여덟째, 배우기 쉽다.

사설 탁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주민센터 탁구장에도 코치가 있어서 레슨을 통해 입문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고, 탁구인구가 많아져서 탁구장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연습과 게임을 하며 상호교육을 할 수도 있다. 사설 탁구장 중에는 원하는 공의 속도·방향·회전을 조작하여 공을 보내주는 「탁구 로봇」이 있어 레슨이나 상호교육 없이 독학도 가능하다.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지금처럼 탁구를 칠 것이다. 은퇴 후 탁구를 시작하고 한동안 함께 다녔던 것처럼 부부동반 탁구장 외출도 계획하고 있고,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서 집에서 탁구 치는 것도 가족들과 상의해 보아야겠다.

운동별 만족도 비교표

탁구 당구 골프 걷기 축구
재미 5 4 4 5 3
운동량 5 2 2 4 5
부상위험 5 5 3 4 1
준비물 5 5 3 5 3
時·空 제약 5 5 3 4 2
비용 4 2 1 5 4
적은 인원 5 5 4 5 1
학습 난이 4 3 2 5 3
합계 38 31 21 37 22
  • 2020년 현재 조정빈 개인 판단 기준.
  • 아주 좋다 5, 좋다 4, 보통 3, 아니다 2, 전혀 아니다 1

친척, 가족, Sweet December

6·25 전쟁 발발 직후 큰 아버님은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집에 숨어 계셨었다. 인민군을 앞세운 남로당원들이 들이닥쳐 5살 어린 딸에게 아버지 계신 곳을 물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딸아이는 아버지가 숨어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 길로 끌려가신 큰 아버님의 생사여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버지 형제 3남 1녀 중 끌려가신 큰 아버님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과, 어머니 형제 3남 6녀 분들은 모두 살아 생전에 뵐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분들 대부분이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님 두 분만 생존해 계신다.

친가·외가 친척들은 모두 북에 있는 고향을 버리고 남에 와서 정착하셨다. 친가 친척들은 해방 전부터, 외가 친척들은 해방 직후에 온 가족이 함께 서울에 와서 자리 잡았으므로 다른 이북 출신들에 비해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가고픈 고향」에 갈 수는 없고, 일찍이 기독교를 믿어 「제사」를 지내지 않다 보니 친척들이 한꺼번에 모일 기회는 적었지만 어려서는 왕래가 잦았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사촌들의 수도 늘고 친척의 범위는 넓어졌으나 「고향과 제사」라는 구심점이 없었고, 각자도생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 절실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왕래가 뜸하게 되었다.

친척들의 세속적인 성공·실패를 언급하거나 그들에 얽힌 이야기 나열은 가급적 지양하려 한다. 꼭 포함시켜야 할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것도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1983년 결혼 당시 집사람은 대학 병원의 간호사였었는데 교사 임용시험을 거쳐 결혼하고 2년 후부터는 서울에 있는 공립중학교 보건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86년에는 딸아이를 89년에는 아들놈을 낳아 엄마까지 되었다.

따뜻하고 푸근한 친정엄마의 외동딸로만 살아왔는데 결혼을 하면서, 일 중독자의 아내, 만만치 않은 함경도 또순이의 며느리, 선생님인지 간호사인지 어정쩡한 양호실장,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이 엄마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각각의 역할 뒤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들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감춰져있어 마음고생 몸고생을 끊임없이 강요당하였었다.

우려와는 다르게 집사람은 일인다역의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갔다. 잘 참고 순했고 착했다. 그리고 강해야 할 땐 강했다. 역할을 점수로 매긴다면 만점에 가까울 듯하다.

나는 집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많은 죄를 지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죄는 두 아이 출산할 때 한 번도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일을 핑계로 댔지만 당연히 옆에 있어야 했었다. 더욱더 미안한 건 한 번도 그 일로 집사람이 불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집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작년 말, 삼성 입사 초부터 격의 없이 친하게 지냈지만 서울과 지방으로 떨어져 살다 보니 자주 만날 수 없었던 회사 친구를 모임에서 만났다. 모임 끝나고 둘이서 지난 얘기도 하고 친구가 호텔에 들기 전에 적당히 취기도 올려줄 겸 해서 맥주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앉자마자 친구가 내뱉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아(아이)가 몇이고?

둘.

결혼했나, 안했재?

… 응.

애비가 지랄 맞으면 아(아이)들은 결혼 몬 한다.

친구에게 그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듣기 싫은 답이 나올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얼른 화제를 바꾸고 몇 잔 더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애비가 지랄 맞은 것은 인정하겠으나 결혼 못 한 원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 쉽지 않았다. 주위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애비와 아이들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유가 어떻든 딸아이와 아들놈은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두 아이 모두 엄마의 장점을 이어받아 착하고 온순하다. 놀기 좋아하고 억척스럽지 못해 가방끈이 길지는 않아도 지적 능력은 중간 이상이고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다.

아들놈은 대학졸업 후 취직을 안 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여의치 않아 접고 나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중이고, 딸아이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준비기간을 거쳐 떡케이크 전문가가 되어 최근에 사업장을 열었다.

「Sweet December」, 떡케이크를 주문 받아 만들어 팔면서 떡케이크 만드는 방법도 전수해 주는 딸아이 사업장 이름이다. 「기분 좋은 한 해의 마지막 달」, 「달콤한 케이크처럼 잘 마무리 되는 한 해」, 「나 12월에 개업했어요」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딸아이 말 속에 사업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있었다.

미적 감각이 무딘 나에게도 딸아이의 떡케이크는 예뻐 보였다. 먹어보니 달지 않고 맛도 있었다. 누가 떡케이크를 찾느냐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나왔다.

  • 전통을 중시하고 품위있는 멋과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
  • 따뜻한 마음이 제대로 가치있게 전달되기를 원하는 사람.
  • 생활 속에서 여유를 갖고 삶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사람.

듣다 보니 떡케이크 찾는 사람 대열에 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막 시작한 사업의 앞날을 문외한인 내가 가늠하기는 쉽지 않겠으나 노력을 쌓아 가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구나 라는 느낌이 왔다.

딸아이가 결혼하고 집에 있으면서 소소한 삶의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사업이 잘돼서 좋은 인연을 쉽게 만날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라는 희망도 가져본다.

「지랄 맞은 애비」때문이라는 오명을 벗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사업 잘 돼서 빨리 시집가길 바란다.

스윗디셈버           조 소 현

강남구 자곡로 106, S플라자 306호

주문 전화 : 02-3412-9307

카카오채널 : sweetdec

인스타그램 : s_weetdecember

네이버블로그 : sweet_december

은퇴생활 백서

자기 사업으로 시작한 「제우엔텍」을 접고 나니 당분간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했던 직장 생활에 이어 시작한 사업을 실패하고 나니 피로하기도 했고, 직장을 구하던지 새 사업을 찾든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휴식은 나의 상황에 맞는 직장과 일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쌓이면서 본의 아니게 은퇴생활로 접어드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생각도 못하고, 사전 준비도 없이 등 떠밀려 은퇴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처음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으나 지금은 나름의 생활 원칙도 정하고 일상생활도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소개해 본다.

<은퇴생활 원칙>

  •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한다.
  •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 여건이 허락하는 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 배우고 과감히 도전한다.

<일상 생활>

  • 05:00 전후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다가 날이 밝으면 집을 나서서 1시간 동안 5km를 걷는다. 걸으면서 그날의 일정도 짚어보고 여러 가지 생각도 정리해본다. (날씨나 기온변화가 있더라도 늘 걸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
  • 아침식사를 전후해서 신문을 본다. 일간지와 경제지를 꼼꼼히 보고 메모하고 스크랩도 한다. 이어서 TV 아침뉴스·스포츠 중계를 즐긴다.
  • 점심식사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집사람 도움 없이 식사를 하고 탁구장에 가서 최소 2시간 동안 탁구를 친다.
  • 저녁식사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저녁 설거지 담당) 가끔 집사람과 간단히 술을 마시기도 하고 외식을 할 때도 있다.
  • TV 저녁뉴스를 보고 가급적 10:00 이전에 잠자리에 든다.
  • 주말에는 걷기와 탁구를 생략하기도 하고 TV를 오랫동안 보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일상에 변화를 주는 일>

  • 가고 싶은 곳 가기

대표적인 것이 여행이다. 해외여행, 걷기 여행 이외에도 단순한 드라이브도 있고 골프여행, 단풍구경, 맛집기행 등도 있다.

  • 하고 싶은 일 해보기

중국어 공부, 지금 하는 글쓰기 같은 프로젝트 수준의 일 뿐 아니라, 이것저것 배우기, 의도적인 독서, 음식 만들어보기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기

점심·저녁식사 약속, 각종 모임을 통해 적극적·수동적으로 사람을 만난다.

  • 사람 도리 다하기

경조사 참석이 대표적이다. 경사보다 조사에는 가급적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경조사 이외에도 얼굴을 비춰야 할 곳이 있으면 관심을 표한다.

은퇴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가끔씩 지금의 이런 생활이 맞는가라는 회의가 들곤 한다. 지난 세월 힘들게 일하며 고생을 많이 했으니 놀아도 된다지만 몸도 성하고 의욕도 남아있는데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주사를 맞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은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직임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로이 지냄」으로 되어있었다. 「직임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의 의미는 「취업이나 자기사업하지 말고」 즉 「어떤 일도 하지 말고」로 해석되고, 「한가로이 지냄」은 「놀기 또는 쉬기」로 풀이되겠다. 여기에 생략된 기간 개념을 포함해 전체를 다시 써보면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놀기」. 간단히 등식을 만들어 보면 「은퇴생활 = 마냥 놀기」.

어려서부터 경제활동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커온 나는, 경제활동을 등한히 하는 것을 거의 죄악 수준으로 미워했다. 부지런히 움직여 성과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비정상이라 여겼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성경 내용」이나 「옛사람들의 관점」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게 하라」

– 신약성서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 일부 –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그 날은 먹지 않는다」

– 중국 당나라 회해(懷海)선사 실천사항 –

「달란트의 비유 – 1달란트 받고 땅에 묻은 게으른 종」

–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 14~30절 내용 중 –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 충북 음성 꽃동네 입구 비석 글 –

요즈음에는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강하게 느낀다. 마냥 놀다가 죽음에 이르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전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비슷한 상황에 놓인 주변 사람들보다는 「몸도 아직 쓸만하고」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앞서지만 몸을 지탱해줄 만한 「정신력도 건재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당분간 모색의 시간을 갖고 나서 방향과 속도를 정해 보겠다.

그리고 결론이 나면 최선을 다해 실천해보겠다.

에필로그

베트남 호치민시 북서쪽으로 60km, 승용차로 2시간 거리에 작은 농촌 마을 구찌(Cuchi)가 있다. 그곳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면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으로 남아 있는 「구찌 터널」이 있다.

터널은 2차 대전 후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기간 중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964년 이후 미국과 10년 넘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만들어지면서 사용되었다. 사람의 노동력과 호미·바구니 같은 농기구만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터널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당시에는 48km에 불과(?)했었으나 미국과의 전쟁 중에 길이가 늘어나서 종전 무렵에는 250km까지로 연장되었다. 얕은 곳은 지면에서 3~4m, 깊은 곳은 8~10m로 터널 위로 탱크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지금은 베트남의 대표적 관광지이자 사적지로 되어있고, 베트남 정부는 구찌 터널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추진하고 있다.

재작년 겨울, SC제일은행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퇴직한 후, 지금은 베트남에서 다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를 만나보기 위해 호치민시를 찾았다. 후배는 나를 위해 휴가를 냈고 가고픈 곳이 있는지를 물었다. 기후가 안 맞았고 이동 수단도 음식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관광이 꺼려졌지만 「구찌 터널」만큼은 꼭 가보고 싶어서 안내를 부탁했다. 동남아 한 귀퉁이 작은 나라 베트남이 강대국 프랑스를 처참하게 망가뜨려 쫓아내고, 세계 제일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힘의 원천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희망과 기대 때문이었다.

터널은 입장료를 받는 관광코스로 개발되어 있었다. 인솔자를 따라 정해진 통로로 이동하며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짧은 시간 터널 안으로 들어가 체험해 보는 것이 관광의 전부였다.

철저하게 은폐된 터널입구, 다양한 종류의 부비트랩, 무기와 생활용품 제작소 등이 볼거리로 제공되었고 돈을 내면 AK소총 실탄사격을 체험할 수도 있었다. 터널 안에서 좁은 통로 (너비 80cm, 높이 80cm)를 통해 수십m 이동하며 숙소·부엌·회의실·창고·병원 등의 생활공간을 볼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 모두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관광코스 구찌 터널 그 자체는 볼품없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땅굴 전시장이었다. 내 눈에 비친 모습만으로 평가한다면 오가며 들인 시간과 비용이 아까울 정도였다. 차라리 구찌 터널을 보지 말고 머릿속에 「가보고 싶었으나 아직 못 간 곳」으로 남겨놓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돌이켜보면 구찌 터널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실망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2004년 북경 북쪽 80km에 위치한 바다링(八达岭)장성에 올라 만리장성을 처음 보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동쪽 산하이관(山海关)에서 서쪽 지아위관(嘉峪关)까지 펼쳐져있고 가지 친 성벽까지를 합하면 물경 6,350km에 이르는, 유구한 중국역사를 대표하는 구조물 만리장성. 바다링장성에 오르니 모택동이 썼다는 비석(不到长城非好汉, 만리장성에 올라보지 않으면 대장부라 할 수 없다)을 포함하여 몇몇 건축물, 놀이기구, 편의시설이 있었는데 산 위에 만든 유원지라는 느낌이 컸다.

사실 250km터널이나 6,350km 성벽의 극히 일부만을 보면서, 터널과 성벽의 전체 공간, 그 공간 속에 녹아 있는 시간의 흐름, 그 시공(時空) 속에서 실재(實在)했던 일들까지를 일거에 알아차리고 수긍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글을 쓰는 동안, 겁도 없이 글쓰기에 도전한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다. 「걸으며 떠오른, 과거의 기억 조각들을 모아서 정리」하기로 쉽게 생각하고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쓰면 쓸수록 걱정이 늘어만 갔다.

첫째는, 글쓰기가 끝나고 만들어진 책이 혹평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종이가 아깝다거나 라면냄비 받침으로 쓰면 좋겠다거나 하는 농담 섞인 평가가 아니라 아무 말 없이 혀를 차는 모습이 떠올려지면 진도 나가기가 두려워졌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겪었고 느꼈던 사실 중심으로 정리했지만 내세울 만한 성과나 감동적인 과정이 없다 보니 내용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보잘것없는 내용들도 글을 꾸미는 능력이나 전달하는 표현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땅굴과 성벽이 실물로 남아있고 그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들의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서투르게 다루어지면 「싸구려 땅굴 전시장」이 되고 「조잡한 산꼭대기 유원지」로 비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글을 그만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둘째는, 지난 일을 정리하면서 「나는 부족한 인간」이라고 자각했음에도 솔직히 부족함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는 방어하고 변명하면서 감춰보려는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실망스러웠었다.

구체적 사례를 들기보다는 중국 당나라 때 관리 등용 평가기준이었던 「신언서판(身言書判)」에 견주어서 나의 부족함을 포괄적으로 자복(自服)해본다.

身 :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몸과는 거리가 있다. 일견 건강해 보이나 앞으로 건강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요함」 수준이다. 양쪽 발 길이, 팔 길이, 가슴 크기, 귀 높이가 다르고 몸의 근간인 척추도 바르지 못하다.

言 : 겸손·배려·아량으로 채워진 속에서 나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언어습관을 갖고 있다. 독설·직설을 즐겨하고 심지어는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書 : 독서량과 공부가 부족해 아는 것이 많지 않고 알고 있는 것도 깊이나 체계가 수준 이하이다.

判 : 욕심이 많고 사심도 있어 사리분별이 명확하지 않고 주변과 조화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셋째, 글을 쓰는 주체가 「나」이다 보니, 내가 글을 쓰는 행위로 인해 「남」이 상처받고 불편해할 수 있는 경우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이 꺼려지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써야 할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쓴 내용이 다 맞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을 때는 스스로 위축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내가 쓰고자 하는 것들을 사실에 입각해서 쓰겠다는 생각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처음이라 맞닥뜨렸던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초심을 유지한 채 마무리까지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읽어주고 교정봐주고 용기를 북돋아 준 가족들의 도움과 배려 덕분이었다.

이 책이 「조잡한 싸구려」로 평가받고 「라면냄비 받침」으로 사용돼도 이제는 도리가 없다.

마무리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지난 1년 동안을 같이했던 십여 자루의 몽당연필들을 필통 안에 잘 수습하고, 연필이 내달렸던 운동장 격인 여러 권의 노트도 반듯하게 정리해서 책꽂이 한 귀퉁이에 꽂아놓아야겠다. 특히 혹사당해 통증이 남아 있는 오른쪽 어깨는 더운물에 푹 담그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해주고 싶다.

<사족>

허리가 아파 고생하던 시절, 책을 읽으면서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에 한 권 이상을 볼 때도 있었다. 책에 빠져들면 고통을 쉽게 잊을 수 있어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 절실했었다. 인터넷·신문·잡지에 실린 서평이 도움이 되었고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보기도 했다. 책이 정해지면, 글쓴이의 노고를 생각해서 「책은 사서 본다」는 원칙대로, 온라인을 통해 구입했었다. 실물 확인 없이 사다 보니 가끔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실망스러운 책을 받아들 때가 있었다. 「얇은 책」이 그것이다.

내 기준으로 얇은 책은 300페이지에 미치지 못하는 책이다. 얇은 책들은 내용도 충실하지 못 했던 기억까지 있다 보니 사기 전에 책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모양새」가 갖추어졌는지 책의 분량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했었다.

책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들은 친구가 뜬금없이 말했다. 「길게 쓰지 마라」 이유를 물으니 명료한 답이 왔다. 재미없을 게 확실해도 친구 사이라서 끝까지 읽어야하는 고초를 혜량해 달라는 것이었다.

책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모양새」와 친구의 합리적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절충안을 찾았다.

  • 300페이지를 절대 넘기지 않는다.
  • 책값은 받지 않는다.

202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