殷夢昊、張思睿、金雨豐. “紅色基因 賡續百年: 他主編的《中國歷史地圖集》,開山傳世!譚其驤110週年誕辰之際,重溫先生的這四句話…”. 融媒體中心. 2021-05-25. https://news.fudan.edu.cn/2021/0524/c4a108976/page.htm

 

紅色基因 賡續百年: 他主編的《中國歷史地圖集》,開山傳世!譚其驤110週年誕辰之際,重溫先生的這四句話……

[붉은 유전자, 백년을 잇다] 그가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 시대를 연 역작이 되다! 담기양 110주년 탄신을 맞아, 선생의 네 마디 말을 되새긴다.

은몽호殷夢昊, 장사예張思睿, 김우풍金雨豐

 

在復旦,曾有這樣一位先生,數十載嘔心瀝血,終一生躬行求真,於《禹貢》發軔,繪《圖集》三秩,一套輿圖縱覽九州山川,悠悠長水澤被桃李三千。他就是譚其驤,中國歷史地理學的主要奠基人和開拓者,他主編的《中國歷史地圖集》被公認為是新中國社會科學最重大的兩項成果之一。適逢譚先生誕辰110週年,5月25日,復旦將舉行譚其驤院士110週年座談會暨文獻展覽揭幕儀式,讓我們追溯過往,重溫教誨,回顧先生的傳奇一生,體悟一代大師的精神與風範。

복단復旦대학에 이런 선생이 한 분 있었다. 수십 년간 심혈을 기울였고, 평생 참됨을 실천궁행했다. 《우공禹貢》에서 시작하여 30년에 걸쳐 《지도집[圖集]》을 그려냈으니, 한 질의 지도로 구주九州의 산천을 조망하게 했고, 유유히 흐르는 긴 강물처럼 수많은 제자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가 바로 담기양譚其驤이다. 그는 중국 역사지리학의 주요한 기틀을 다지고 개척한 인물이다. 그가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신중국 사회과학 분야의 가장 중대한 두 가지 성과 중 하나로 공인받았다. 담譚 선생 탄신 110주년을 맞은 5월 25일, 복단復旦대학은 담기양譚其驤 원사 110주년 좌담회 및 문헌 전람 개막식을 거행한다. 과거를 되짚어보며 가르침을 되새기고, 선생의 전설적인 일생을 돌아보며, 한 시대 대가의 정신과 풍모를 느껴보고자 한다.

담기양譚其驤선생

 

我們受帝國主義者的壓迫真夠受了……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실컷 압박을 받았다……

推開光華樓西主樓2101室的門,一股書香撲鼻而來。幾排木製書架,放置了不少“大部頭”。隨手翻開一本,紙張泛黃,天頭地腳密密麻麻的批注卻清晰可辨。這裡是譚其驤文庫。2003年,譚其驤的家屬將其生前藏書捐給復旦,收藏於此。文庫共藏線裝書660餘種4880冊,平裝書3200餘冊,雜誌近1000冊,其他各類文獻資料等664宗,這裡面就包括譚其驤常用的《歷代輿地圖》《水經注箋》等古代地理類文獻。陸侃如編纂的《屈原》,是目前所發現的譚先生最早的一本藏書。翻開封面,一行小字映入眼簾:譚其驤 一九二八。

광화루光華樓 서쪽 본관 2101호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책 내음이 코를 찔렀다. 여러 줄의 목제 책장에는 두꺼운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아무 책이나 한 권 펼쳐보니,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책의 위아래 여백에 빽빽하게 적힌 주석들은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담기양 문고譚其驤文庫’다. 2003년, 담기양譚其驤의 가족들이 그의 생전 장서를 복단復旦대학에 기증하여 이곳에 소장되었다. 문고에는 총 660여 종 4,880책의 선장본, 3,200여 책의 일반 장정본, 약 1,000책의 잡지, 그리고 기타 각종 문헌 자료 664건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담기양譚其驤이 자주 사용했던 《역대여지도歷代輿地圖》, 《수경주전水經注箋》 등 고대 지리 문헌도 포함된다. 육간여陸侃如가 편찬한 《굴원屈原》은 현재까지 발견된 담譚 선생의 가장 오래된 장서다. 표지를 넘기자, ‘담기양譚其驤 1928’이라는 작은 글씨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 시절의 담기양譚其驤

 

這一年,譚其驤迎來人生中重要的轉折點——他決心投身史學,寫下這段話:“其驤十五以前渾渾噩噩,十六十七獻身革命,十八而志於學,從今而後,矢志不移。” 生於1911年的譚其驤,曾有過一段短暫的革命時光——1926年,受進步思潮影響,心向革命,他考入由共產黨人創辦的上海大學,並參加共青團,經常跟隨組織上街發傳單、演講。上海工人第三次武裝起義時,他帶著手槍隨一位指揮員上前線。“四一二事變”後,上海大學被封,他被國民黨憲兵關押,因查無證據被保釋出獄。他千方百計找不到組織,短暫的革命生活被迫畫上了句號。後來,譚其驤來到暨南大學,先進中文系又轉外文系。然而,譚其驤覺得自己形象思維能力有限,卻長於邏輯推理,正適合研究歷史,因而轉入了新開設的歷史社會系。1930年,譚其驤在潘光旦教授的指導下完成本科畢業論文《中國移民史要》。同年9月,他來到燕京大學研究院,師從顧頡剛,對歷史地理產生濃厚興趣。勤勉而又有天賦的譚其驤,很快在學界聲名鵲起。

이 해, 담기양譚其驤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역사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런 글을 남겼다. “나 기양其驤은 열다섯 이전에는 몽매했고, 열여섯, 열일곱에는 혁명에 몸을 바쳤으며, 열여덟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이제부터는 그 뜻을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1911년에 태어난 담기양譚其驤은 짧은 혁명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1926년, 그는 진보 사조의 영향을 받아 혁명에 뜻을 두고 공산당원이 설립한 상해대학上海大學에 입학했다.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조직을 따라 길거리에서 전단을 돌리고 연설을 하기도 했다. 상해上海 노동자 3차 무장봉기 때는 권총을 차고 한 지휘관을 따라 최전선에 나갔다. ‘4.12 사변’ 이후 상해대학上海大學이 폐쇄되자, 그는 국민당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보석 석방되었다. 온갖 방법으로도 조직을 다시 찾지 못하면서, 그의 짧았던 혁명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담기양譚其驤은 계남대학暨南大學에 진학하여 중문과에 들어갔다가 영문과로 전과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형상적 사고 능력은 부족하지만 논리 추리에는 뛰어나 역사 연구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 개설된 역사사회학과로 옮겼다. 1930년, 담기양譚其驤은 반광단潘光旦 교수의 지도 아래 학부 졸업논문인 《중국이민사요中國移民史要》를 완성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연경대학燕京大學 연구원에 들어가 고힐강顧頡剛을 스승으로 모시며 역사지리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근면하고 재능이 있었던 담기양譚其驤은 곧 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1930년 여름, 계남대학暨南大學을 졸업한 담기양譚其驤 (가운데).

 

後來,譚其驤先生弟子、復旦大學資深特聘教授葛劍雄曾問老師:“如果當時找到了組織,是否繼續要革命?” 譚其驤答:“當然。” 又問:“面對白色恐怖,您不害怕嗎?” 答:“我當時一點也沒有想過。” 與革命擦肩而過、轉而投身學術的譚其驤,並未忘記救亡圖存的歷史責任。有感於“中華民族沒有一部像樣的歷史書”,1934年,譚其驤與其師顧頡剛共同創辦了一個專門研究中國沿革地理為宗旨的“禹貢學會”,以我國最早一篇系統描述全國自然、人文地理的著作——《禹貢》作為名稱;並決定創辦《禹貢》半月刊,作為學會的機關刊物。發刊詞中,譚其驤寫道:“我們受帝國主義者的壓迫真夠受了……大家希望有一部《中國通史》出來,好看看我們民族的成分究竟怎樣,到底有哪些地方是應當歸我們的。”

훗날 담기양譚其驤 선생의 제자인 복단復旦대학 원로 특별초빙교수 갈검웅葛劍雄이 스승에게 물었다. “만약 그때 조직을 찾으셨다면, 혁명을 계속하셨을 겁니까?” 담기양譚其驤은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다시 “백색테러 앞에서 두렵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자,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혁명과 스쳐 지나간 뒤 학문에 투신한 담기양譚其驤이었지만, 나라를 구하고 지키려는 역사적 책임감을 잊지는 않았다. ‘중화민족에게는 제대로 된 역사책이 한 권도 없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1934년 스승인 고힐강顧頡剛과 함께 중국의 연혁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우공학회禹貢學會’를 창립했다. 학회의 이름은 중국 최초로 전국의 자연 및 인문지리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작인 《우공禹貢》에서 따왔다. 그리고 학회의 기관지로 《우공禹貢》 반월간지를 창간하기로 결정했다. 담기양譚其驤은 창간사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실컷 압박을 받았다. (…) 모두가 《중국통사中國通史》가 나와서 우리 민족의 구성이 과연 어떠한지, 도대체 어느 지방이 우리에게 속해야 하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공禹貢》 창간호 표지

 

學會成立之初,會員就只有顧頡剛和譚其驤兩人,學會所需費用也都是兩人自掏腰包。譚其驤把當年投身革命的一腔熱血投入到《禹貢》半月刊的創辦中。1937年全面抗戰爆發,學會成員星散,《禹貢》半月刊也被迫停刊,但《禹貢》的種子種下了,不少學會成員後來成為當代著名史學家和歷史地理學家。戰亂動盪的歲月中,譚其驤輾轉大後方,生活艱苦。譚其驤長子譚德睿回憶,在貴州浙江大學任教時,一家人租住在半山腰的木板房中,當地百姓平日吃的“菜”,不過是用鹽巴蘸水再加上當地的乾辣椒末而已。即便如此,譚其驤始終堅持教學與研究。1946年,譚其驤隨浙江大學遷回杭州,1950年起轉任復旦大學教授,再未離開。

학회 설립 초기 회원은 고힐강顧頡剛과 담기양譚其驤 두 사람뿐이었고, 학회 운영 비용도 모두 두 사람이 사비로 충당했다. 담기양譚其驤은 과거 혁명에 바쳤던 열정을 《우공禹貢》 반월간지 창간에 쏟아부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하자 학회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우공禹貢》 반월간지도 부득이하게 정간되었다. 하지만 《우공禹貢》의 씨앗은 뿌려졌고, 많은 학회 회원들은 훗날 저명한 현대 역사학자 및 역사지리학자가 되었다. 전란으로 동요하던 시기, 담기양譚其驤은 후방 지역을 떠돌며 고된 생활을 했다. 그의 장남 담덕예譚德睿는 귀주貴州의 절강대학浙江大學에서 재직할 때를 회상했다. 온 가족이 산 중턱의 판잣집을 빌려 살았는데, 현지 주민들이 평소 먹는 ‘반찬’이란 소금물에 현지 고춧가루를 찍어 먹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담기양譚其驤은 시종일관 교육과 연구를 계속했다. 1946년, 그는 절강대학浙江大學을 따라 항주杭州로 돌아왔고, 1950년부터는 복단復旦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다시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담기양譚其驤 부부와 자녀들. 1940년대 중기 항주杭州에서 촬영.

 

歷史好比演劇,地理就是舞台;如果找不到舞台,哪裏看得到戲劇!
역사는 연극과 같고, 지리는 바로 무대다. 만약 무대를 찾지 못한다면, 어디서 연극을 볼 수 있겠는가!

早在創辦《禹貢》半月刊時,譚其驤就有編制一部規模較大、內容詳贍的中國地理沿革圖的願望。他感慨:“歷史好比演劇,地理就是舞台;如果找不到舞台,哪裏看得到戲劇!” 新中國成立後,譚其驤中斷近二十年的歷史地圖之夢,終於有了實現的可能。1954年,毛澤東主席與著名歷史學家吳晗談及標點整理《資治通鑑》時說,讀歷史不能沒有一部歷史地圖放在手邊,以便隨時查看歷史地名的方位。吳晗向毛主席推薦譚其驤重編改繪清末楊守敬的《歷代輿地圖》(以下簡稱“楊圖”)。1955年,譚其驤欣然應命赴北京,從此,將自己全部精力和學識貢獻於這項艱鉅任務。

일찍이 《우공禹貢》 반월간지를 창간할 때부터, 담기양譚其驤은 규모가 크고 내용이 상세한 중국 지리 연혁도를 편찬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역사는 연극과 같고, 지리는 바로 무대다. 만약 무대를 찾지 못한다면, 어디서 연극을 볼 수 있겠는가!”

신중국 성립 후, 담기양譚其驤의 거의 20년간 중단되었던 역사지도 제작의 꿈이 마침내 실현될 가능성이 열렸다. 1954년, 모택동毛澤東 주석이 저명한 역사학자 오함吳晗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표점 정리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역사를 읽을 때는 역사 지도를 곁에 두고 수시로 역사 지명의 위치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함吳晗은 모毛 주석에게 담기양譚其驤이 청나라 말기 양수경楊守敬의 《역대여지도歷代輿地圖》(이하 ‘양도楊圖’)를 다시 편찬하고 수정하여 그리도록 추천했다. 1955년, 담기양譚其驤은 흔쾌히 명을 받아 북경北京으로 갔고, 그때부터 자신의 모든 정력과 학식을 이 막중한 임무에 쏟아부었다.

1957년 8월 26일, 담기양譚其驤(왼쪽)이 고힐강顧頡剛(가운데), 후인지侯仁之와 함께 잠산사湛山寺를 유람하고 있다.

 

“楊圖”改繪並不是想像中的那麼簡單,須對原地名一一重新考證,搬到今天的地圖上,極其耗時費力。譚其驤足足花了近兩年的時間,才完成了秦漢圖初稿和一部分清圖底稿。然而,復旦本身有許多工作等著譚其驤去做,他便決定帶著青年助手王文楚、鄒逸麟回到上海繼續完成任務。1958年9月,《中國歷史地理圖集》(以下簡稱“《圖集》”)編繪體制發生變化,編繪工作被列入復旦大學研究工作計畫,由復旦大學負責組織。伴隨著《圖集》的編纂,歷史地理學科在復旦大學發展起來。

‘양도楊圖’를 수정하여 그리는 작업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원래의 지명을 하나하나 다시 고증하여 오늘날의 지도 위에 옮겨야 했기에,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었다. 담기양譚其驤은 꼬박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서야 진한秦漢 지도 초고와 청淸나라 지도 밑그림 일부를 완성했다. 그러나 복단復旦대학 자체에도 그를 기다리는 일이 많았기에, 그는 젊은 조수 왕문초王文楚, 추일린鄒逸麟을 데리고 상해上海로 돌아와 임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958년 9월,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이하 ‘《지도집》’)의 편찬 체제에 변화가 생겼다. 편찬 작업이 복단復旦대학의 연구 업무 계획에 포함되었고, 복단復旦대학이 조직을 책임지게 되었다. 《지도집》의 편찬과 더불어, 역사지리학과도 복단復旦대학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복단復旦대학 역사지리연구실 지도 편찬 인원 단체 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담기양譚其驤.

 

1965년, 복단復旦대학 역사학과 역사지리 전공 1기 졸업생 단체 사진.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담기양譚其驤.

 

除了參與具體編纂和審校工作,譚其驤在編圖過程中最重要的一項貢獻,便是確定了中國歷史地理研究的空間範圍。他指出,我們偉大祖國是各族人民共同締造的,各少數民族在各個歷史時期建立的政權,都是中國的一部分。1960年,“楊圖委員會”決定打破傳統中原王朝體系,為繪製邊疆地區和少數民族政區圖幅,由譚其驤牽頭,陸續邀請全國相關研究單位的專家學者參加各邊區圖的編繪工作,中國科學院歷史研究所、考古研究所等單位也參加了原始社會遺址圖和其他圖的編繪。為保證地圖集的質量和內容的豐富度,譚其驤寧可一再推遲項目的完成時間。到1966 年5月底,《圖集》初稿終於基本完成。十年多里,譚其驤每天白天到校工作,晚上工作到深夜甚至黎明,奉獻了四五十歲這段學術研究的黃金歲月。改繪“楊圖”的十年里,譚其驤只發表了12篇論文,甚至有四年完全是空白。終其一生,譚先生只留下一部個人著作《長水集》。而即便著作有限,稿酬微薄,他晚年還是捐出幾乎所有個人積蓄兩萬元,設立一項資助歷史地理研究的基金。

구체적인 편찬 및 심의·교정 작업에 참여한 것 외에도, 담기양譚其驤이 지도 제작 과정에서 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로 중국 역사지리 연구의 공간적 범위를 확정한 것이다. 그는 위대한 조국은 각 민족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각 소수민족이 여러 역사 시기에 세운 정권은 모두 중국의 일부라고 지적했다. 1960년, ‘양도위원회楊圖委員會’는 전통적인 중원 왕조 체계를 깨고, 변강 지역과 소수민족 행정구역 지도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담기양譚其驤이 주도하여 전국의 관련 연구 기관 전문가와 학자들을 초빙해 각 변강 지역 지도 편찬 작업에 참여시켰다.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 고고연구소 등 기관도 원시사회 유적 지도 및 기타 지도 편찬에 참여했다. 지도집의 질과 내용의 풍부함을 보장하기 위해, 담기양譚其驤은 프로젝트 완료 시기를 계속해서 늦추는 것을 감수했다. 1966년 5월 말이 되어서야 《지도집》 초고가 마침내 거의 완성되었다. 10여 년 동안, 담기양譚其驤은 매일 낮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밤에는 심야나 새벽까지 일하며 40대와 50대라는 학문 연구의 황금기를 바쳤다. ‘양도楊圖’를 수정하여 그리는 10년 동안, 담기양譚其驤은 단 12편의 논문만을 발표했고, 심지어 4년 동안은 논문 발표가 전혀 없었다. 평생에 걸쳐 담譚 선생은 개인 저서로 《장수집長水集》 한 권만을 남겼다. 저서가 한정적이고 원고료도 미미했음에도, 그는 말년에 개인적 저축 거의 전부인 2만 위안을 기부하여 역사지리 연구를 지원하는 기금을 설립했다.

《장수집長水集》

 

在《長水集》自序中,他這樣總結道:“這是我的第一部個人著作。作為一個一輩子做學問的人,年逾七十,為什麼此前從沒有出過一本書,這才是第一部呢?客觀原因是由于:各個時期都有一些比寫書更迫切需要應付的業務……” “學術的追求和維護國家利益的信仰相結合,是譚其驤先生從事研究的持續動力。”葛劍雄說。1974年,《圖集》內部本初稿完成,1984 年起《圖集》公開本出版。這部編纂歷時30年的空前巨著共8 冊、20 個圖組、304 幅地圖,收錄了清代以前可考證的約7 萬餘地名。《圖集》以其內容之完備、考訂之精審、繪製之準確,贏得了國內外學術界的高度評價,是中國歷史地理學最為重大的一項成果,對今天的生態環境、防災減災、國土整治、經濟開發等,仍發揮着重要的基礎性作用。

그는 《장수집長水集》 서문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것은 나의 첫 개인 저서다. 평생 학문을 한 사람으로서, 나이 일흔이 넘도록 왜 이전에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이제야 첫 책을 내게 되었는가? 객관적인 이유는 각 시기마다 책을 쓰는 것보다 더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검웅葛劍雄은 말했다. “학문적 추구와 국가 이익을 수호하려는 신념의 결합이 담기양譚其驤 선생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1974년 《지도집》 내부용 초고가 완성되었고, 1984년부터 공개본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30년에 걸쳐 편찬된 이 전례 없는 대작은 총 8책, 20개 지도 그룹, 304폭의 지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淸나라 이전까지 고증 가능한 약 7만여 개의 지명을 수록했다. 《지도집》은 그 내용의 완벽함, 고증의 정밀함, 제작의 정확성으로 국내외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중국 역사지리학의 가장 중대한 성과이며, 오늘날의 생태 환경, 재해 예방 및 감소, 국토 정비, 경제 개발 등에도 여전히 중요한 기초적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1988년 1월 26일, 《국가역사지도집國家歷史地圖集》 편찬위원회 단체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담기양譚其驤.

 

你們應該超過我,否則學術怎麼進步呢?
자네들은 나를 넘어서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학문이 어찌 발전하겠는가?

“文章千古事,沒有獨到的見解,不能發前人所未發,寫這種文章幹什麼?”這是譚其驤的治學原則。在葛劍雄看來,譚其驤先生一輩子都在思考如何創新。早在譚其驤求學時,他就與老師顧頡剛先生就西漢十三部的問題展開學術討論,師生來往多封信件,辨明真理,最終顧頡剛以寬宏的胸襟承認了自己的錯誤。而這種實事求是、追求真理的精神,被譚其驤傳承下來。葛劍雄讀書期間,曾發現一本內部刊物上關於歷史大辭典的條目信息不完整,譚其驤便鼓勵他在雜誌上發表補充意見。後來葛才知道,那個條目的作者,正是譚先生自己。葛劍雄記得:“先生一直說,我應該超越清朝那些做歷史地理的學者,比如錢大昕、王國維。而你們應該超過我,否則學術怎麼進步呢?”

“문장은 천고의 일이니, 독창적인 견해가 없어 선인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히지 못한다면, 그런 글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이것이 담기양譚其驤의 학문 원칙이었다.

갈검웅葛劍雄이 보기에,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평생 어떻게 혁신할지를 고민했다. 일찍이 담기양譚其驤이 학업에 정진하던 시절, 그는 스승인 고힐강顧頡剛 선생과 서한西漢 13부[部]의 문제에 대해 학술 토론을 벌였다. 스승과 제자는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리를 밝혔고, 결국 고힐강顧頡剛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러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진리 추구의 정신은 담기양譚其驤에게 계승되었다. 갈검웅葛劍雄은 학창 시절, 한 내부 간행물에 실린 역사대사전 항목의 정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담기양譚其驤은 그에게 잡지에 보충 의견을 발표하라고 격려했다. 나중에야 갈검웅葛劍雄은 그 항목의 저자가 바로 담譚 선생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갈검웅葛劍雄은 기억한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나는 전대흔錢大昕, 왕국유王國維 같은 청나라 역사지리 학자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자네들은 나를 넘어서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학문이 어찌 발전하겠는가?'”

1970년대 후기, 담기양譚其驤이 동료들과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개정판을 연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오응수吳應壽, 담기양譚其驤, 추일린鄒逸麟, 왕문초王文楚, 주유연周維衍.

 

為傳承學術、提攜後學,譚其驤付出了巨大的精力和心血。復旦大學中國歷史地理研究所退休教授王文楚回憶,編繪《圖集》時,為了使“邊干邊學”的年輕學生們盡快掌握編繪地圖的專門技能,譚先生經常為他們授課,講解這一歷史時期中原王朝和邊區政權的疆域變遷,並認真批改他們試寫的釋文。“他從頭到尾給我們講清楚。歷史地理本來很枯燥,但他講解得很生動。他還要一個人審閱十幾個初稿,會詳細地指出錯誤及其原因。”王文楚說。譚其驤嚴謹認真的學術作風,給學生們樹立了榜樣。編纂《圖集》時,譚其驤堅持改用依據最新測繪資料新編的底圖,這對保證地圖集的精確性起了決定性的作用。葛劍雄回憶,動輒二三十萬字的博士論文,譚其驤會逐字逐句審閱,一篇博士論文要看一兩個星期。有時實在忙,他寧可只看其中的一部分,並且在提意見時加以說明,也不願意敷衍應付。譚德睿也回憶,父親給助手、學生留下的題字,多是“實事求是”四字。

학문을 전수하고 후학을 이끌기 위해, 담기양譚其驤은 막대한 정력과 심혈을 쏟았다. 복단復旦대학 중국역사지리연구소 퇴직 교수인 왕문초王文楚는 《지도집》을 편찬할 때를 회상했다. ‘일하며 배우는’ 젊은 학생들이 지도 제작 전문 기술을 빨리 익히도록 하기 위해, 담譚 선생은 자주 그들을 위해 수업을 열었다. 그는 해당 역사 시기의 중원 왕조와 변강 정권의 강역 변천을 설명하고, 그들이 시험 삼아 쓴 해설문을 꼼꼼하게 교정해주었다. 왕문초王文楚는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명확하게 설명해주었다. 역사지리는 본래 매우 지루한 학문이지만, 그는 생동감 있게 설명했다. 그는 또한 혼자서 십여 명의 초고를 심사하며, 잘못된 부분과 그 원인을 상세히 지적해주었다.”

담기양譚其驤의 엄격하고 성실한 학문 태도는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지도집》을 편찬할 때, 그는 최신 측량 자료에 근거하여 새로 만든 밑그림 지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는 지도집의 정확성을 보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갈검웅葛劍雄은 20~30만 자에 달하는 박사 논문을 담기양譚其驤이 한 자 한 자 검토하며, 논문 한 편을 보는 데 한두 주가 걸렸다고 회상했다. 때로 너무 바쁠 때는 차라리 그중 일부만 보고 의견을 제시하며 그 사실을 명시할지언정, 대충 얼버무리지 않았다. 담덕예譚德睿 또한 아버지가 조수나 학생들에게 남겨준 글씨는 대부분 ‘실사구시[實事求是]’ 네 글자였다고 회상했다.

말년의 담기양譚其驤이 역사지리연구소 자료실에서 자료를 찾고 있다.

 

“學術之趨向可變,求是之精神不可變。”秉持着求真求實的精神,譚其驤在學術上不斷超越。過去學者皆認為黃河在東漢後長期安流是東漢水利家王景治河的結果,但譚其驤卻在綜合考察歷史文獻後,全新論證了其根本原因在於黃河中游地區天然植被的恢復。而他對古籍中雲夢與雲夢澤的含義和範圍的研究成果,也已為自然科學家用技術手段的考察所證實。“譚其驤先生為歷史地理學創建了理論框架,解決了前人未解決的重大問題。他對歷史地理學的貢獻是開創性的。”葛劍雄認為,歷史地理學能夠不斷進步,與譚先生的求真求實精神是分不開的,“他對我最大的影響,不是具體的學問,而是追求真理的人格。” 1959年,譚其驤先生在復旦大學創辦了歷史地理研究室,培養專業人才。1982年,復旦大學中國歷史地理研究所成立,譚其驤擔任首任所長。在譚其驤先生等老一輩學者的言傳身教下,復旦史地所素以學風嚴謹著稱。自成立以來,該所總體學術水平長期處於國內第一的地位。

“학문의 방향은 변할 수 있어도, 진리를 구하는 정신은 변할 수 없다.” 진실을 구하고 사실에 근거하는 정신을 견지하며, 담기양譚其驤은 학문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섰다. 과거 학자들은 모두 황하黃河가 동한東漢 이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흐른 것이 동한東漢의 수리 전문가 왕경王景의 치수 사업 결과라고 여겼다. 하지만 담기양譚其驤은 역사 문헌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후, 그 근본 원인이 황하黃河 중류 지역의 자연 식생 회복에 있음을 새롭게 논증했다. 또한 그가 고문헌 속 운몽雲夢과 운몽택雲夢澤의 의미와 범위에 대해 연구한 성과는, 훗날 자연과학자들이 기술적 수단을 이용한 조사를 통해 증명하기도 했다.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역사지리학의 이론적 틀을 만들고, 선배들이 해결하지 못한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의 역사지리학에 대한 공헌은 개척자적이다.” 갈검웅葛劍雄은 역사지리학이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담譚 선생의 진리를 구하고 사실에 근거하는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영향은 구체적인 학문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인격 그 자체였다.”

1959년,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복단復旦대학에 역사지리연구실을 창설하고 전문 인재를 양성했다. 1982년, 복단復旦대학 중국역사지리연구소가 설립되었고, 담기양譚其驤이 초대 소장을 맡았다. 담기양譚其驤 선생 등 노학자들의 가르침 아래, 복단復旦 역사지리연구소는 엄격한 학풍으로 유명하다. 설립 이래, 연구소의 전반적인 학술 수준은 오랫동안 중국 내 최고 자리를 지켜왔다.

1982년 6월, 복단復旦대학 중국역사지리연구소 설립. 담기양譚其驤이 소장을, 추일린鄒逸麟이 부소장을 맡았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담기양譚其驤, 왼쪽 첫 번째가 추일린鄒逸麟.

 

“可以說,復旦史地所是在譚先生個人學術研究的基礎上創建起來的,到現在已經培養了500多名碩博研究生。飲水思源,我們永遠記得譚先生對歷史地理學的貢獻。”葛劍雄說。

갈검웅葛劍雄은 말했다. “복단復旦 역사지리연구소는 담譚 선생 개인의 학문적 연구를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500명이 넘는 석박사 과정생을 배출했습니다. 근원을 잊지 않듯[飲水思源], 우리는 담譚 선생이 역사지리학에 기여한 공헌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鍥而不舍,終身以之
포기하지 않고 새기기를 계속하면, 평생에 걸쳐 이룰 수 있다.

“鍥而不舍,終身以之。”這是譚其驤的座右銘。在譚德睿印象中,父親生前每天工作到凌晨兩三點鐘才休息,“天天如此,年年如此” 。

“포기하지 않고 새기기를 계속하면, 평생에 걸쳐 이룰 수 있다.” 이것은 담기양譚其驤의 좌우명이었다. 담덕예譚德睿의 기억 속 아버지는 생전에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일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매일 그랬고, 해마다 그랬다.”

일하고 있는 말년의 담기양譚其驤.

 

1940年底,四歲的譚德睿跟隨母親到貴州和譚其驤相聚,父親刻苦用功的形象就烙印在了幼年的譚德睿心中。當時沒有電燈照明,譚其驤便就着昏暗的油燈光伏案讀書、寫作,直到深夜。譚其驤平日幾乎沒有時間陪伴子女,只有每年除夕守歲,會一直陪着孩子們遊戲直到12點。守完歲,大家休息,他繼續工作。譚德睿說,總有人誇獎父親記性好、博覽群書,而他覺得,父親的好記性和他淡泊名利、勤勉敬業的精神分不开。“父親總是在無言之中,以行動對我們進行教育。”譚德睿動情地說。1978年,譚其驤開始招收研究生,葛劍雄是慕名報考的眾多學生之一。葛劍雄沒有想到,自己的研究生複試竟然在上海龍華醫院的病房中進行。這年年初,譚其驤中風,病情險惡,左半邊肢體的活動能力喪失大半。然而,譚對研究生招生非常重視,正在康復期的他便在病房中考核了周振鶴、葛劍雄等人。周、葛二人,後來在譚其驤的培養下,成長為新中國第一批文科博士。

1940년 말, 네 살이었던 담덕예譚德睿는 어머니를 따라 귀주貴州로 가서 담기양譚其驤과 함께 지냈다. 아버지가 고생하며 공부하는 모습은 어린 담덕예譚德睿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당시 전등이 없어서 담기양譚其驤은 어두운 등잔불에 의지해 밤늦도록 책상에 엎드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담기양譚其驤은 평소 자녀들과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오직 매년 섣달그믐 밤을 새울 때만 12시까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다. 밤샘이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면, 그는 다시 일을 계속했다. 담덕예譚德睿는 사람들이 늘 아버지의 기억력이 좋고 박학다식하다고 칭찬했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좋은 기억력이 명리를 탐하지 않고 부지런히 업무에 매진하는 정신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말없이, 행동으로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담덕예譚德睿가 감정에 젖어 말했다.

1978년, 담기양譚其驤은 대학원생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갈검웅葛劍雄은 그의 명성을 듣고 지원한 많은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갈검웅葛劍雄은 자신의 대학원 2차 면접시험이 상해上海 용화병원龍華醫院 병실에서 치러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해 초, 담기양譚其驤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위독했고, 왼쪽 반신 마비로 활동 능력을 대부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원생 모집을 매우 중시하여, 재활 중임에도 병실에서 주진학周振鶴, 갈검웅葛劍雄 등을 시험했다. 주周, 갈葛 두 사람은 훗날 담기양譚其驤의 가르침 아래 신중국 최초의 문과 박사로 성장했다.

담기양譚其驤은 중국 최초의 문과 박사들을 길러냈다. 1983년 10월,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담기양譚其驤이 주진학周振鶴(왼쪽), 갈검웅葛劍雄(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住院期間,譚其驤堅持給研究生上課,並審閱、修改學生的習作。葛劍雄記得,他曾到病房找先生修改文章,見他正在接受頭針治療,不忍打擾老師。譚其驤卻留住他,仔細詢問相關情況。譚德睿回憶,有一次,半身不遂的譚其驤為了審閱博士生論文,在深夜查找資料、書籍並進行校對,以至於跌倒在地,不能起身,直到天亮才被保姆發現。因為長期高強度工作,譚其驤一隻眼睛幾乎失明,但習慣依然不改。晚年,譚其驤身體狀況每況愈下,但只要稍加恢復,他便重新投入學術研究中。修訂《圖集》,編纂《中國歷史大辭典》,整理《肇域志》……一個任務連著一個任務,譚其驤乾脆搬到賓館的一個房間里,幾乎與世隔絕地開展工作。1982 年,當《圖集》剛開始出版,年逾七十的譚其驤不顧親朋好友的反對,投身到另一個國家項目——《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以下簡稱“《國家歷史地圖集》”)的編繪工作。他不止一次和葛劍雄說:“《中國歷史地圖集》只有疆域政區,稱‘歷史地圖集’是名不副實的,《國家歷史地圖集》完成了,我這一輩子也就不白活了。”

입원 기간에도 담기양譚其驤은 꾸준히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학생들의 과제를 심사하고 수정해주었다. 갈검웅葛劍雄은 병실로 선생을 찾아가 글 수정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가 머리에 침을 맞는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방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담기양譚其驤은 그를 붙잡고 관련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담덕예譚德睿는 한번은 반신불수인 담기양譚其驤이 박사생 논문을 심사하기 위해 한밤중에 자료와 책을 찾고 교정을 보다가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날이 밝아서야 간병인에게 발견되었다. 장기간의 고강도 업무로 인해 담기양譚其驤은 한쪽 눈이 거의 실명했지만, 습관은 여전했다. 말년에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지만, 조금만 회복되면 다시 학술 연구에 몰두했다. 《지도집》 개정, 《중국역사대사전中國歷史大辭典》 편찬, 《조역지肇域志》 정리 등… 하나의 임무가 다음 임무로 이어졌다. 담기양譚其驤은 아예 호텔 방 하나를 빌려 거의 세상과 단절된 채 작업을 진행했다.

1982년, 《지도집》이 막 출판되기 시작했을 때, 일흔이 넘은 담기양譚其驤은 친지와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또 다른 국가 프로젝트인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역사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이하 《국가역사지도집》) 편찬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갈검웅葛劍雄에게 한 번 이상 이렇게 말했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강역과 행정구역만 담고 있어서 ‘역사지도집’이라 부르기에는 이름값을 못 하네. 《국가역사지도집》을 완성해야 내 한평생이 헛되지 않을 걸세.”

말년의 담기양譚其驤. 1991년 자택에서 촬영.

 

當時項目組經費奇缺,為了節省經費,譚其驤到北京開會和審稿時經常住在一間平房內。比起物質條件的匱乏,更讓譚其驤擔憂的是,這項工作在國內外沒有先例可循,前期研究的任務很重,而他也不再是壯年。即便如此,譚其驤還是親自擬訂圖組和大部分圖目,審定各種工作條例和文件。特別是在保持和提高圖幅的質量方面,他總是認真考慮、反覆推敲,竭盡全力。直到彌留之際,譚其驤念念不忘的還是未出版的《國家歷史地圖集》。“他早已不會說話了,就總是啊啊啊地叫些什麼。”葛劍雄一遍遍在他耳邊向他承諾:“你放心,我們一定會把《國家歷史地圖集》編出來。”譚其驤就會平靜下來。葛劍雄說,目前該書第二冊已基本完成,第三冊也抓緊在做,儘管面臨一些困難。“但一想到譚先生對這套圖的責任感,我們一定要盡最大努力盡快完成。” 先生早已遠去,但他的治學方法、研究精神,就像那悠悠長水,絲絲浸潤、潤物無聲,滋養着一代代中國歷史地理學界的後輩學人。

당시 프로젝트팀은 경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담기양譚其驤은 북경北京에 회의나 원고 심사를 하러 갈 때마다 단층집에 머물렀다. 물질적 결핍보다 그를 더 걱정스럽게 한 것은, 이 작업이 국내외에 선례가 없어 초기 연구 과제가 매우 무겁다는 점과, 자신도 더 이상 장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기양譚其驤은 직접 지도 그룹과 대부분의 지도 목록을 작성하고, 각종 작업 규정과 문서를 심의하여 결정했다. 특히 지도 품질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면에서는, 항상 신중하게 고려하고 거듭 숙고하며 최선을 다했다. 임종 직전까지도 담기양譚其驤이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국가역사지도집》이었다. “그는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그저 ‘아, 아, 아’ 하고 소리를 낼 뿐이었습니다.” 갈검웅葛劍雄은 그의 귓가에 몇 번이고 약속했다.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국가역사지도집》을 완성하겠습니다.” 그러면 담기양譚其驤은 비로소 평온을 되찾곤 했다.

갈검웅葛劍雄은 현재 이 책의 제2책이 거의 완성되었고, 제3책도 서둘러 작업 중이며,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담譚 선생께서 이 지도에 대해 가졌던 책임감을 생각하면, 우리는 반드시 최선을 다해 가능한 한 빨리 완성해야 합니다.” 선생은 이미 멀리 떠났지만, 그의 학문 방법과 연구 정신은 저 유유히 흐르는 긴 강물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만물을 적시듯,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 역사지리학계의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다.

譚其驤(1911.2.25-1992.8.28),著名歷史學家、歷史地理學家,中國科學院院士,中國歷史地理學科主要奠基人和開拓者。創辦復旦大學中國歷史地理研究所並擔任首任所長。歷任第三、四、五屆全國人大代表、國務院學位委員會第一屆學科評議組成員、國務院古籍整理出版規劃小組成員。由其主編的八冊《中國歷史地圖集》是迄今最權威的中國歷史地圖集,被公認為是新中國社會科學最重大的兩項成果之一。他還主持編纂了《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主編《中國自然地理·歷史自然地理》、《辭海•歷史地理分冊》、《中國歷史大辭典·歷史地理卷》等,著有《長水集》、《長水集續編》等。為中國歷史地理學創建與發展作出了巨大的貢獻。

담기양譚其驤 (1911.2.25-1992.8.28)은 저명한 역사학자, 역사지리학자이자 중국과학원 원사이며, 중국 역사지리학의 주요한 기틀을 다지고 개척한 인물이다. 복단復旦대학 중국역사지리연구소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제3, 4, 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국무원 학위위원회 제1기 학과평의위원, 국무원 고적정리출판계획소조 위원을 역임했다. 그가 주도하여 편찬한 8책의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중국 역사지도로, 신중국 사회과학의 가장 중대한 두 가지 성과 중 하나로 공인받고 있다. 그는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역사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의 편찬을 주관했으며, 《중국자연지리·역사자연지리》, 《사해·역사지리 분책》, 《중국역사대사전·역사지리권》 등을 편찬했다. 저서로는 《장수집長水集》, 《장수집 속편》 등이 있다. 중국 역사지리학의 창립과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