侯甬堅.《中國歷史地圖集》主編譚其驤先生的品質[J].歷史地理研究,2021,41(02)5-10.

侯甬坚.《中国历史地图集》主编谭其骧先生的品质[J].历史地理研究,2021,41(02)5-10.

 

《中國歷史地圖集》主編譚其驤先生的品質
《중국역사지도집》 주편 담기양 선생의 품격

후용견侯甬堅

 

1954年秋,毛澤東主席在中南海懷仁堂出席第一屆全國人民代表大會,會間與吳晗談到應組織人把《資治通鑑》整理一個標點本出來,還談到應該有一部歷史地圖放在手邊,作讀《資治通鑑》時查閱歷史地名之用。會後吳晗找到范文瀾、尹達等商議,地圖從改繪清人楊守敬《歷代輿地圖》做起,請復旦大學譚其驤來北京主持這一工作,並制定了初步的計劃。吳晗寫信向毛澤東匯報,毛澤東給吳晗寫了回信,表示同意他的計劃。得到毛澤東的指示後,吳晗立即邀集中國科學院第一歷史研究所、第二歷史研究所、北京大學、國家出版總局、高等教育部、地圖出版社等單位的負責人和專家商議,于當年11月2日成立了“標點《資治通鑑》及改編‘楊圖’委員會”,後一項工作,經吳晗推薦,委員會一致同意請譚其驤進京主持,責成高等教育部向復旦大學借調,時間暫定一年。[1]([1]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廣東人民出版社2014年版,第207—208、213—214頁。)

1954년 가을, 모택동毛澤東 주석은 중남해中南海 회원당懷仁堂에서 열린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다. 회의 도중 오함吳晗과 만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표점을 찍어 정리한 책을 만들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을 때 역사 지명을 찾아볼 수 있도록 역사 지도책을 곁에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회의가 끝난 후 오함吳晗은 범문란范文瀾, 윤달尹達 등과 상의했다. 지도는 청나라 사람 양수경楊守敬의 《역대여지도歷代輿地圖》를 수정하여 그리는 것부터 시작하고, 복단대학復旦大學의 담기양譚其驤을 북경北京으로 초빙하여 이 일을 주관하게 하면서 초보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함吳晗은 모택동毛澤東에게 편지로 보고했고, 모택동毛澤東은 답장을 보내 그의 계획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모택동毛澤東의 지시를 받은 후, 오함吳晗은 즉시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 제1역사연구소, 제2역사연구소, 북경대학北京大學, 국가출판총국國家出版總局, 고등교육부高等教育部, 지도출판사地圖出版社 등의 책임자 및 전문가들과 상의했다. 그해 11월 2일 ‘《자치통감資治通鑑》 표점 및 ‘양도楊圖'[양수경의 지도] 개편 위원회’를 설립했다. 지도 개편 작업은 오함吳晗의 추천으로 위원회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 담기양譚其驤을 북경北京으로 초빙해 주관하도록 했다. 고등교육부高等教育部는 복단대학復旦大學에 그의 파견을 요청했으며, 기간은 잠정적으로 1년으로 정했다. [1]([1]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광동인민출판사廣東人民出版社 2014년판, 207–208, 213–214쪽.)

譚其驤先生其時在復旦大學,得到陳望道校長的通知後,既感興奮又覺突然,考慮到赴京工作後的時間安排及資料提供,相當操心。[2]([2]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214—215頁。)1955年2月11日(乙未年正月十九,周五),譚其驤啟程去北京,次日到達,這預示著繪圖工作將要開始。譚先生時年44歲,有子女四人(二男二女),自己一出差,孩子就全由夫人照看。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그때 복단대학復旦大學에 있었다. 진망도陳望道 총장에게서 통지를 받고 흥분되면서도 갑작스럽다고 느꼈다. 북경北京에 가서 일하게 될 경우의 시간 안배와 자료 제공 문제를 생각하며 꽤 마음을 썼다. [2]([2]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214–215쪽.) 1955년 2월 11일[을미년乙未年 정월 십구일, 금요일], 담기양譚其驤은 북경北京으로 출발하여 다음 날 도착했다. 이는 지도 제작 작업이 곧 시작될 것을 예고했다. 당시 담譚 선생은 44세였고, 자녀 4명(아들 둘, 딸 둘)이 있었다. 그가 출장을 가면 아이들은 모두 부인이 돌봐야 했다.

據譚先生《京華日記》,2月17日(周四),在“科學院,開標點《通鑑》改繪楊圖會,我所提的意見未經仔細討論,一切需俟實際工作中決定矣”[3]([3]譚其驤著,葛劍雄編: 《譚其驤日記·京華日記》,文匯出版社1998年版,第24頁。)。到北京六天後的第一次會議上,譚先生就提出了自己的意見,但會上並沒有進行深入討論。譚先生很快明白了其中的情形——“一切需俟實際工作中決定”,這預示著該項工作將會進入一個搖擺不定,或是遙遙無期的茫然狀態之中。日記3月7日有載,“開始撰楊圖各朝年代說明”[4]([4]譚其驤著,葛劍雄編: 《譚其驤日記·京華日記》,第26頁。),說明譚先生彼時已開始做實際工作了。

담譚 선생의 《경화일기京華日記》에 따르면 2월 17일(목요일)에 “과학원科學院에서 《통감通鑑》 표점 및 양도楊圖 개편 회의가 열렸다. 내가 제기한 의견은 자세한 토론 없이 모든 것을 실제 업무 중에 결정하기로 했다”고 적혀있다. [3]([3]담기양譚其驤 저, 갈검웅葛劍雄 편: 《담기양일기·경화일기譚其驤日記·京華日記》, 문휘출판사文匯出版社 1998년판, 24쪽.) 북경北京에 도착한 지 엿새 만에 열린 첫 회의에서 담譚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지만, 회의에서는 깊이 있는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담譚 선생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모든 것을 실제 업무 중에 결정한다’는 것은 이 작업이 방향을 잃고 헤매거나 기약 없이 미뤄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3월 7일자 일기에는 “양도楊圖의 각 왕조 연대 설명을 쓰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4]([4]담기양譚其驤 저, 갈검웅葛劍雄 편: 《담기양일기·경화일기譚其驤日記·京華日記》, 26쪽.) 이는 담譚 선생이 그때 이미 실제 작업에 착수했음을 보여준다.

復旦大學葛劍雄教授所著《悠悠長水: 譚其驤傳》,以兩章的篇幅,即“編繪《中國歷史地圖集》”之上下,詳細敘述了傳主譚先生在其中的親身經歷。閱讀下來,留給筆者最深印象的往事有三件。

복단대학復旦大學 갈검웅葛劍雄 교수가 쓴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은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편찬’ 상·하 두 장에 걸쳐 주인공인 담譚 선생이 직접 겪은 일을 자세히 서술했다. 글을 읽으며 필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일은 세 가지이다.

 

1. 譚其驤先生為在京繪圖事不得不袒露心扉(1956年3月18日信函)
1. 담기양 선생이 북경에서의 지도 제작을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다 (1956년 3월 18일 편지)

上述1955年2月12日,譚先生只身到達北京,先住地圖出版社,4月遷至科學院歷史二所宿舍,每天在京忙於改繪圖工作及各項事務,此次在京一直住到1956年8月18日,為時一年有半。回上海近兩個月,10月12日又返回北京。

앞서 말했듯이 1955년 2월 12일, 담譚 선생은 홀로 북경北京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지도출판사地圖出版社에 머물다 4월에 과학원科學院 역사 제2연구소 숙소로 옮겼다. 그는 매일 북경北京에서 지도 수정 작업과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지냈으며, 이번 체류는 1956년 8월 18일까지 1년 반 동안 이어졌다. 상해上海로 돌아가 약 두 달을 보낸 뒤, 10월 12일에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왔다.

其實,到1956年2月,暫定一年的借調時間就到了。當時,復旦大學和家裡都要譚先生回到上海,而科學院方面因改繪圖工作緊急則希望挽留住譚先生,在北京繼續作圖。屬於公家之間的交涉都做了,“楊圖”委員會還希望譚先生給學校寫封信,表達一下自己的想法。據譚先生日記,3月21日,委員會“決定由余去函復旦洽商”;3月22日,“起草致學校信函”;3月30日,“今日自早至晚,竟日作致復旦談返校問題書。夜十二時始成” [1]([1]譚其驤著,葛劍雄編: 《譚其驤日記·京華日記》,第76—77頁。)。這封信落款為3月18日,葛劍雄解釋這應該是譚其驤開始寫信的時間,此解釋相當合理。[2]([2]故此,這封信可以稱之為“1956年3月18日譚其驤信函”。在1997年華東師範大學出版社出版的《悠悠長水·譚其驤前傳》第254—255頁處尚無這封信的內容,至2014年廣東人民出版社出版的《悠悠長水: 譚其驤傳》(修訂版)第222—224頁,作者葛劍雄先生已插入了這封信的全文。)譚先生在信函中首先強調了“現在的問題只是如何把這項必須完成亟待完成的繪圖工作繼續下去”[3]([3]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222頁。),然後分述此項工作在京滬兩地展開情形之不同(表1)。

사실 1956년 2월이 되자 잠정적으로 정했던 1년의 파견 기간이 끝났다. 당시 복단대학復旦大學과 집에서는 모두 담譚 선생이 상해上海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과학원科學院 측은 지도 수정 작업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담譚 선생을 붙잡아 북경北京에서 계속 작업하기를 바랐다. 기관 사이의 협의는 모두 이루어졌고, ‘양도楊圖’ 위원회는 담譚 선생이 학교에 편지를 써서 자신의 생각을 밝혀주기를 희망했다. 담譚 선생의 일기에 따르면 3월 21일, 위원회는 “내가 복단復旦에 편지를 보내 협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3월 22일에는 “학교에 보낼 편지 초고를 작성했다”고 적었고, 3월 30일에는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복단復旦에 보낼 복귀 문제에 관한 편지를 썼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완성했다”고 했다. [1]([1]담기양譚其驤 저, 갈검웅葛劍雄 편: 《담기양일기·경화일기譚其驤日記·京華日記》, 76-77쪽.) 이 편지의 날짜는 3월 18일로 되어 있는데, 갈검웅葛劍雄은 담기양譚其驤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날짜일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는 상당히 합리적이다. [2]([2]그래서 이 편지를 ‘1956년 3월 18일 담기양譚其驤 편지’라고 부를 수 있다. 1997년 화동사범대학출판사華東師範大學出版社에서 출판한 《유유장수·담기양전전悠悠長水·譚其驤前傳》 254-255쪽에는 이 편지 내용이 없었으나, 2014년 광동인민출판사廣東人民出版社에서 출판한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개정판) 222-224쪽에는 저자인 갈검웅葛劍雄 선생이 이 편지 전문을 삽입했다.) 담譚 선생은 편지에서 먼저 “지금의 문제는 반드시 완수해야 하고 시급히 완수해야 할 이 지도 제작 작업을 어떻게 계속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3]([3]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222쪽.) 그리고 이 작업을 북경北京과 상해上海 두 곳에서 진행할 경우의 차이점을 나누어 설명했다(표 1).

表1 1956年譚其驤分述京滬兩地繪圖的情形差異
표1 1956년 담기양譚其驤이 설명한 북경北京과 상해上海 두 지역에서의 지도 제작 환경 차이

항목 상해 상해上海 복단대학復旦大學 북경 역사연구소·지도사北京 歷史所·地圖社
1 주편主編이 상해上海로 갈 경우, 조편助編, 회도원繪圖員, 지도사地圖社 편집부가 모두 동행할 수 없다면 지도 제작 일정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
主編到上海, 助編、繪圖員、地圖社編輯部都不能隨行的話, 會影響繪圖進度
주편主編이 계속 북경北京에 남아 일하면, 복단復旦에서의 강의 업무에는 영향이 크지 않다.
主編繼續留在北京工作, 對復旦的學工作影響不大
2 조편助編 3명, 회도원繪圖員 3명이 주편主編을 따라 상해上海로 갈 경우, 업무 및 생활 준비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助編3人、繪圖員3人, 隨主編到上海, 工作及生活安排上會有困難
북경北京에서의 지도 제작 등의 작업은, 이후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개설하고 대학원생을 지도하는 데 더 나은 교육 준비 작업이 될 수 있다.
在京的繪圖等工作, 可以以後返校的開課、指導究生, 做更好的學準備工作
3 주편主編인 내가 복단復旦으로 돌아가면, 강의 업무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지도 제작 작업에 영향을 줄 것이다.
主編的我回到復旦, 因有學工作, 當然會影響繪圖工作
일 자체만 놓고 보면 두 가지를 병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차라리 북경北京에 남아 지도 원고를 먼저 완성하고, 완공 후 학교로 돌아가 강의 업무를 재개하는 것이 낫다.
就工作論工作, 二者兼顧很難, 不如留京先把圖稿繪出來, 完工後再返校恢復學工作

 

事實上,在上海復旦校園工作的一個相當要緊的理由,就是可以照顧家庭,可是在這封信裡譚先生只字未提。為了繼續在北京作圖,他還不惜翻出舊賬,講述1951年出版總署約自己編繪中國歷代疆域圖的事情,當時學校“沒有同意,結果顧了教學顧不了繪圖,拖了一年多所成無幾,完工遙遙無期,被迫停止”。信的末了,他說到此次繪圖的價值和責任,在於“比較詳細的歷史地圖的出版實為多年來學術界所迫切需求,如果再過三兩年還搞不出來,豈特主持此項工作的幾位同志無法向上交賬,恐怕也很難得到學術界大眾的諒解”[4]([4]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224頁。)。就是這樣,一封號稱極為“難寫”書信(內容如上),讓譚先生採用實事求是的方式完成了,在展現其工作責任感的同時,他也向學校等方面訴說了自己的學術追求和理想。

사실 상해上海 복단復旦 캠퍼스에서 일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가정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이 편지에서 담譚 선생은 그 점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북경北京에서 계속 작업하기 위해 과거의 일까지 꺼내 들었다. 1951년 출판총서出版總署가 자신에게 중국 역대 강역도 편찬을 의뢰했을 때, 학교가 “동의하지 않아 결국 가르치는 일에 신경 쓰느라 지도 제작을 돌보지 못했고, 1년 넘게 끌었지만 성과가 거의 없어 완공이 요원해져 부득이 중단했다”고 말했다. 편지 말미에 그는 이번 지도 제작의 가치와 책임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역사 지도의 출판은 실로 여러 해 동안 학계가 간절히 요구해 온 것이다. 만약 2~3년이 지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이 작업을 주관하는 몇몇 동지들이 상부에 보고할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학계 대중의 이해를 얻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4]([4]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224쪽.) 이처럼, 쓰기 매우 “어려웠다”는 편지를 담譚 선생은 사실에 근거하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그는 일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학교 측에 자신의 학문적 포부와 이상을 이야기했다.

 

2. 譚先生不以主編,而是以一名工作人員的身份參加繪圖工作
2. 담 선생이 주편이 아닌 일개 작업원의 신분으로 지도 제작에 참여하다

到了1957年年初,在北京編圖又進行了一年後,鑒於編繪地圖工作量浩大,曠日持久,加上復旦大學和家裡的再次催促,1月12日,譚先生終於離開北京,于次日回到上海。在復旦大學的支持下,為全力推進繪圖工作,1959年在歷史系成立歷史地理研究室。可是,20世紀50—60年代的政治運動接二連三,譚先生在校園裡一一經歷,很難安心定神地從事自己心儀的繪圖工作。當時校園停課,人人參加運動,繪圖工作一度中止。1969年5月,上海市革命委員會有鑒於繪圖工作是毛主席交辦的事項,曾安排把這一工作恢復起來,但強調:“現在不是主編負責制,而是民主集中制,但該看的也要看。”(這是對譚先生來說的)[1]([1]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389頁。)譚先生的工作情形,可參見1969年的兩則日記:

1957년 초, 북경北京에서 지도 제작을 1년 더 진행한 후였다. 지도 편찬 작업량이 방대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복단대학復旦大學과 집에서의 거듭된 재촉에 담譚 선생은 마침내 1월 12일 북경北京을 떠나 다음 날 상해上海로 돌아왔다. 복단대학復旦大學의 지원 아래 지도 제작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59년 역사학과에 역사지리연구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1950~60년대에 정치 운동이 연이어 일어나 담譚 선생은 학교에서 이를 모두 겪으며 마음 편히 그토록 원하던 지도 제작에 몰두하기 어려웠다. 당시 학교는 수업을 중단했고 모두가 운동에 참여하면서 지도 제작 작업은 한때 중단되었다. 1969년 5월, 상해시上海市 혁명위원회는 지도 제작이 모毛 주석이 지시한 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작업을 재개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편 책임제가 아니라 민주집중제이다. 하지만 봐야 할 것은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담譚 선생을 두고 한 말이었다) [1]([1]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389쪽.) 담譚 선생의 작업 상황은 1969년의 두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6月21日 ……下午全室大會,討論以後工作,開展大批判,批譚過去一套,討論編例應與大批判結合,有純業務傾向。下星期六批判清圖體例及目前在工作中譚的表現,舊明圖編例留下供大家參考,做批判用。至五點。[2]([2]譚其驤著,葛劍雄編: 《譚其驤日記·京華日記》,第186頁。)

6월 21일 … 오후에 연구실 전체 회의에서 앞으로의 작업을 토론하고 대비판을 전개했다. 담譚의 과거 방식을 비판하고, 편집 체례 토론은 대비판과 결합해야 하며 순수 업무 경향이 있다고 논의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청나라 지도 체제와 현재 작업 중인 담譚의 태도를 비판하기로 했다. 옛 명나라 지도 편찬 사례는 모두의 참고 및 비판용으로 남겨두었다. 5시에 끝났다. [2]([2]담기양譚其驤 저, 갈검웅葛劍雄 편: 《담기양일기·경화일기譚其驤日記·京華日記》, 186쪽.)

12月12日 早天天讀集中批余前日發言,改造不自覺,以“忘記了”為翹尾巴,談及重複勞動、改變計劃為挑釁,不是執行反動科研路線,而是初則獨霸,繼則拒絕青年參加,引誘青年走白專道路,排擠青年,拉牛鬼蛇神,最後怠工,又批“不重視”。[3]([3]譚其驤著,葛劍雄編: 《譚其驤日記·京華日記》,第200頁。)

12월 12일 아침 학습 시간에 그저께 내 발언을 집중 비판했다. 사상 개조가 자발적이지 않다, ‘잊어버렸다’고 한 것을 두고 잘난 체하는 것이라 했다. 중복 노동과 계획 변경을 언급한 것은 도발이며, 반동적 과학 연구 노선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독점하려 했고, 그 다음에는 청년의 참여를 거부하고 청년들을 ‘백전도로白專道路'[정치보다 전문 업무에만 치중하는 길]로 유인했으며, 청년을 배척하고 우귀사신牛鬼蛇神[정치적 문제 인물]을 끌어들이다가 마지막에는 태업을 했다고 했다. 또한 ‘중시하지 않는다’고도 비판했다. [3]([3]담기양譚其驤 저, 갈검웅葛劍雄 편: 《담기양일기·경화일기譚其驤日記·京華日記》, 200쪽.)

一方面,“文革”期間譚先生為各種政治活動所累,對於逼近自己的運動已噤若寒蟬;另一方面,繪圖工作已進行十多年,雖然為運動所衝擊,但在譚先生的日常工作生活里,卻是無法放下。他借一個機會談到自己:“這些年我也夠辛苦的了,可以說是復旦所有教授中最辛苦的一個,有時星期天也不休息,每天三班時間都泡在這上面。我希望將來還能繼續讓我畫,能夠搞出一個結果來。”[4]([4]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385頁。)他還說:“今後如果讓我繼續畫歷史地圖的話,最好有人幫助出主意、定方針,讓我在下面干些具體工作。”[5]([5]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386頁。)因為歷次運動動輒讓譚先生自我檢查、寫材料、受審查、接受批判,他已經非常害怕了,復旦的工宣隊也批判他“怕”字當頭的想法,卻不知道這“業務掛帥”與“政治掛帥”是無法統一協調到一起的。此時的譚先生已經不做主編了,別人對他也就少了許多尊重。但所謂“該看的也要看”,是說繪圖到最後還是需要譚先生把關,“並希望他如果認為自己意見是正確的,應該堅持”,對此譚先生表示“心裡卻是很怕”,因為指出別人的錯,別人就會不開心,說不定還會引起其他風波。這一時期,譚先生採用自己習慣的方式,兩次抓住《文匯報》記者採訪的機會,談出自己的想法和處境,留下筆錄,不能不說是對這段歷史負責任的做法。

한편으로, ‘문화대혁명’ 시기 담譚 선생은 각종 정치 활동에 시달려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동에 대해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지도 제작 작업은 10년 넘게 진행되었고 비록 운동의 충격을 받았지만 담譚 선생의 일상 업무와 생활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한 기회에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 몇 년간 저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복단復旦의 모든 교수 중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매일 세 타임 내내 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도를 그리게 해줘서 결과물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4]([4]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385쪽.) 그는 또 말했다. “앞으로 계속 역사 지도를 그리게 한다면,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고 방침을 정하는 것을 도와주고 저는 아래에서 구체적인 작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5]([5]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386쪽.) 여러 차례 운동을 거치며 걸핏하면 자아비판서를 쓰고, 자료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고, 비판을 당했던 그는 이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복단復旦의 노동자선전대도 그의 ‘두려움’을 앞세우는 생각을 비판했지만, ‘업무 우선’과 ‘정치 우선’은 결코 하나로 조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때 담譚 선생은 이미 주편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 대한 존중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소위 “봐야 할 것은 봐야 한다”는 말은 지도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국 담譚 선생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뜻이었고, “만약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주장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담譚 선생은 “마음속으로는 매우 두렵다”고 표현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가 불쾌해하고, 어쩌면 다른 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담譚 선생은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두 차례 《문회보文匯報》 기자 인터뷰 기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처지를 이야기하고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이 역사에 대해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在1973年1月10日的一次協作會議上,譚其驤先生還談道:“這次會議的目的主要是討論決定我們下一階段的戰略戰術,以求達到最後的勝利,達到正式出版的水平,出版後要能讓毛主席老人家看了滿意。”[6]([6]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418頁。)這是譚先生當時的心情流露,即使在極為困難的境遇中,他仍能夠忍辱負重,凡事總是以工作為重,為工作着想,見解又最具水平,所以,作圖的實際工作中還是不可能離開他的。

1973년 1월 10일의 한 협력 회의에서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회의의 주된 목적은 우리의 다음 단계 전략과 전술을 토론하고 결정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정식 출판 수준에 도달하며, 출판 후에 모毛 주석 어른께서 보시고 만족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6]([6]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418쪽.) 이는 당시 담譚 선생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굴욕을 참고 맡은 바를 다했으며, 모든 일에서 항상 일을 우선시하고 일을 위해 생각했다. 또한 그의 견해는 가장 수준이 높았기에, 실제 지도 제작 작업에서 그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3. 1986年,譚先生為臺灣和南海的畫法堅持主編立場
3. 1986년, 담 선생이 대만과 남해 작도법을 두고 주편의 입장을 고수하다

在1974年《中國歷史地圖集》內部發行本問世、1982年《中國歷史地圖集》公開本前幾冊發行後,第七、八冊的修改過程中,有關台灣島和南海的畫法曾出現不同的意見,甚至產生激烈的爭論。因為茲事體大,譚其驤先生寫了材料,準備向中央匯報。這是一個令人心焦如焚的時刻:

1974년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내부 발행본이 나오고, 1982년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공개본 앞 몇 권이 발행된 후, 제7, 8책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대만도臺灣島와 남해南海의 작도법을 두고 다른 의견이 나타났고 심지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안이 매우 중대했기 때문에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자료를 작성하여 중앙에 보고할 준비를 했다. 애가 타들어 가는 순간이었다.

……有人問他:“要是中央不明確表態怎麼辦?”他說:“那我只有在第八冊的後記中寫明,此圖集所有的點、線都有史料根據,唯有第七、第八冊中台灣和南海的畫法是根據某部門的指示。”“如果辦不到,最低限度也要在第七、第八冊上取消譚其驤的主編字樣。”他表示,主編可以不當,圖可以不出,但歷史事實不能歪曲。[1](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469頁。)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만약 중앙에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제8책 후기에 ‘이 지도집의 모든 점과 선은 사료에 근거했지만, 오직 제7, 8책의 대만臺灣과 남해南海 작도법만은 특정 부서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면, 최소한 제7, 8책에서 ‘주편 담기양譚其驤’이라는 이름을 빼야 합니다.” 그는 주편을 그만둘 수도 있고, 지도를 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왜곡할 수 없다고 밝혔다. [1](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469쪽.)

譚其驤表示: 黨的十一屆三中全會號召解放思想,撥亂反正,實事求是,修改方案就是要講歷史事實,講實事求是。[2](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470頁。)實際上,這符合改革開放初期制定的修改內部本的工作原則,當時所定第一條修改原則就是:“這次修改工作,一定要根據黨的十一屆三中全會精神,實事求是,嚴格按照歷史事實。” [3](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447頁。)可見,當時譚先生堅持自己想法的底氣,是來源於十一屆三中全會的精神,來源於中國改革開放宏偉事業的時代潮流。

담기양譚其驤은 이렇게 밝혔다. “당의 11기 3중전회는 사상 해방, 발란반정撥亂反正[혼란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돌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호소했다. 수정안은 바로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실사구시를 말하는 것이다.” [2](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470쪽.) 실제로 이는 개혁개방 초기에 정해진 내부 발행본 수정의 작업 원칙과 일치했다. 당시 정해진 첫 번째 수정 원칙은 바로 “이번 수정 작업은 반드시 당의 11기 3중전회 정신에 근거하여 실사구시하고, 역사적 사실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3](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447쪽.) 이를 통해 당시 담譚 선생이 자신의 생각을 고수한 자신감은 11기 3중전회의 정신과 중국 개혁개방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另外,譚先生善於堅持自己想法的底氣,是來自長期從事歷史學研究中形成的自我認知。從《譚其驤年譜》得知,高中之後,譚先生先後就讀於上海大學社會學系、國立暨南大學中文系(校址在上海真如)。1928年,暨南大學秋季開學,譚先生即轉入外文系,兩周後轉入歷史社會學系,主修歷史學,兼修社會學。此時的譚先生,經過一年的學習,感覺自己的形象思維能力有限,卻長於邏輯推理,判斷自己搞文學創作未必會有成績,研究歷史倒相當合適。[4](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18、605頁。)這就是譚先生學習史學、練習考據學、閱讀古籍的開端。

또한, 담譚 선생이 자신의 생각을 잘 고집할 수 있었던 자신감은 오랜 기간 역사학 연구를 통해 형성된 자기 인식에서 나왔다. 《담기양연보譚其驤年譜》에 따르면, 고등학교 졸업 후 담譚 선생은 상해대학上海大學 사회학과, 국립기남대학國立暨南大學 중문과[교사校舍는 상해上海 진여眞如]를 차례로 다녔다. 1928년, 기남대학暨南大學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담譚 선생은 바로 영문과로 옮겼다가 2주 후에 역사사회학과로 다시 옮겨 역사학을 전공하고 사회학을 부전공했다. 이때 담譚 선생은 1년간의 학습을 통해 자신의 형상적 사고 능력은 부족하지만 논리적 추론에는 강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학 창작으로는 성과를 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역사 연구는 자신에게 꽤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4](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18, 605쪽.) 이것이 담譚 선생이 역사학을 공부하고 고증학을 연습하며 고전을 읽기 시작한 계기였다.

1930年秋,譚其驤進入燕京大學歷史系,做了顧頡剛先生的研究生。次年秋季開學,顧先生講授“尚書研究”課程,講義里主張《尚書》〈堯典〉所記虞舜時的“肇十有二州”,是襲自漢武帝時的制度。譚其驤覺得應該是東漢的制度,在向顧先生口頭表達以後,“先生當即要我把看法寫成文字”。譚先生後來說:“我本來只想口頭說說算了,由於他提出了這一要求,迫使我不得不又查閱了《漢書》《後漢書》《晉書》等書的有關篇章。結果益發增強了對自己看法的信心。就把這些看法寫成一封信交給了顧先生。” [5](譚其驤: 〈關於漢武帝的十三州問題討論書後〉,《復旦學報》1980年第3期。)這就是顧、譚師生討論兩漢州制問題的開始,隨後的進展如下。

1930년 가을, 담기양譚其驤은 연경대학燕京大學 역사학과에 입학하여 고힐강顧頡剛 선생의 대학원생이 되었다. 다음 해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고顧 선생은 ‘상서 연구’ 과목을 강의했다. 강의안에서 그는 《상서尚書》 〈요전堯典〉에 기록된 우순虞舜 시절의 ‘십이주十有二州 설치’가 한무제漢武帝 때의 제도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담기양譚其驤은 그것이 동한東漢의 제도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顧 선생에게 구두로 의견을 밝히자 “선생께서는 즉시 내게 그 견해를 글로 써보라고 하셨다.” 담譚 선생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말로만 하고 끝내려 했는데, 그분께서 그런 요구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등의 관련 부분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그 결과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이 견해들을 편지로 써서 고顧 선생께 드렸다.” [5](담기양譚其驤: 〈한무제의 십삼주 문제에 관한 토론서 후기〈關於漢武帝的十三州問題討論書後〉〉, 《복단학보復旦學報》 1980년 제3기.) 이것이 고顧 선생과 담譚 선생 사제가 양한兩漢의 주州 제도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한 계기였으며, 그 후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第一封信及其回應: 1931年10月2日(星期五)晚,譚其驤書寫,稱作“甲、譚其驤與顧頡剛書”。當日,顧頡剛日記:“修改所草〈堯典〉講義。抄其驤來書二千余言。”“草〈答其驤論漢武帝十三州書〉,得千八百言,不愜意。”次日(3號),又記“重草〈答譚其驤君書〉,得四千五百言,畢,甚快。(久不作論學之文矣,今日奮筆而下,几有腦充血之感。)”

첫 번째 편지와 그에 대한 답: 1931년 10월 2일(금요일) 저녁, 담기양譚其驤이 편지를 썼고, 이를 ‘갑, 담기양譚其驤이 고힐강顧頡剛에게 보낸 편지’라고 칭한다. 같은 날 고힐강顧頡剛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작성한 〈요전堯典〉 강의안을 수정했다. 기양其驤이 보낸 2천여 자의 편지를 베껴 썼다.”, “〈기양에게 답하는 한무제 십삼주에 관한 글〈答其驤論漢武帝十三州書〉〉의 초고를 썼는데, 1천 8백 자를 썼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 날(3일)에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담기양 군에게 답하는 글〈答譚其驤君書〉〉을 다시 썼다. 4천 5백 자를 쓰고 나니 매우 상쾌했다. (오랫동안 학문을 논하는 글을 쓰지 않았는데, 오늘 붓을 휘둘러 써 내려가니 뇌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第二封信及其回應: 1931年10月9日(星期五),譚其驤書寫,稱作“乙、譚其驤再與顧頡剛書”。當日,顧頡剛日記“看其驤來信。……其驤熟於史事,予自顧不如。這次爭論,漢武十三部問題,予當屈服矣”。10月24日(星期六),顧頡剛日記:“作〈再答譚其驤書〉,論漢代十三州事,得三千言,畢。” [6](以上敘述,參見顧頡剛、譚其驤: 〈討論兩漢州制致顧頡剛先生書〉,譚其驤: 《長水集(上)》,人民出版社2009年版,第22—43頁;譚其驤: 〈關於漢武帝的十三州問題討論書後〉,《復旦學報》1980年第3期;還收錄于《顧頡剛日記》第2卷,《顧頡剛全集》第45冊,中華書局2010年版,第569—575頁。)

두 번째 편지와 그에 대한 답: 1931년 10월 9일(금요일), 담기양譚其驤이 다시 편지를 썼고, 이를 ‘을, 담기양譚其驤이 고힐강顧頡剛에게 다시 보낸 편지’라고 칭한다. 같은 날 고힐강顧頡剛의 일기에는 “기양其驤이 보낸 편지를 보았다. … 기양其驤은 역사에 정통하여 내가 스스로 그만 못함을 돌아본다. 이번 논쟁에서 한무제漢武帝 13부部 문제는 내가 마땅히 굴복해야겠다”고 적혀있다. 10월 24일(토요일), 고힐강顧頡剛의 일기에는 “〈담기양에게 다시 답하는 글〈再答譚其驤書〉〉을 썼다. 한대漢代 13주州의 일을 논하여 3천 자를 쓰고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6](이상의 서술은 고힐강顧頡剛, 담기양譚其驤: 〈양한 주 제도에 관해 고힐강 선생께 드리는 글〈討論兩漢州制致顧頡剛先生書〉〉, 담기양譚其驤: 《장수집長水集(상)》,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 2009년판, 22-43쪽; 담기양譚其驤: 〈한무제의 십삼주 문제에 관한 토론서 후기〈關於漢武帝的十三州問題討論書後〉〉, 《복단학보復旦學報》 1980년 제3기; 또한 《고힐강일기顧頡剛日記》 제2권, 《고힐강전집顧頡剛全集》 제45책, 중화서국中華書局 2010년판, 569-575쪽에도 수록되어 있음.)

當年年底,譚其驤通過答辯畢業,被推薦至國立北平圖書館任館員,負責編館藏方志目錄,並開始在有關刊物上發表論文。1934年秋季,顧先生準備赴蘇州奔喪時,特意作一信函,為燕京大學、北京大學聽課的學生推薦譚其驤先生。函曰:“本年續開之‘中國古代地理沿革史’一課,已請譚季龍先生代理。譚先生為專研沿革地理之學者,剛所久欽。其所述作,精嚴簡當,諒諸同學在《禹貢半月刊》及《史學年報》《燕京學報》上已經讀得,有此同感。”[1]([1]顧頡剛: 〈致兩校選課同學(1934年9月25日)〉,《顧頡剛書信集》第3卷,《顧頡剛全集》第41冊,第20頁。)言辭之間,得見顧先生對於譚其驤先生的器重。

그해 연말, 담기양譚其驤은 논문 심사를 통과하여 졸업했고, 국립북평도서관國立北平圖書館 사서로 추천되어 소장된 지방지 목록 편찬을 담당하며 관련 간행물에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4년 가을, 고顧 선생은 소주蘇州로 부친상을 치르러 가기 전에 특별히 편지를 써서 연경대학燕京大學과 북경대학北京大學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담기양譚其驤 선생을 추천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해 계속해서 개설되는 ‘중국 고대 지리 연혁사’ 강의는 담계룡譚季龍[담기양의 자] 선생께 대리를 부탁드렸습니다. 담 선생은 연혁 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로, 제가 오랫동안 존경해 온 분입니다. 그가 쓴 글들은 정밀하고 간결하여, 여러 학생들도 《우공반월간禹貢半月刊》과 《사학연보史學年報》, 《연경학보燕京學報》에서 이미 읽고 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1]([1]고힐강顧頡剛: 〈두 학교 수강생들에게 (1934년 9월 25일)(致兩校選課同學(1934年9月25日))〉, 《고힐강서신집顧頡剛書信集》 제3권, 《고힐강전집顧頡剛全集》 제41책, 20쪽.) 말 사이에서 고顧 선생이 담기양譚其驤 선생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時隔近50年之後,譚先生還說出了當年那次討論對於自己從事學術研究的意義:

거의 5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담譚 선생은 당시의 그 토론이 자신의 학문 연구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通過這場討論,使我這個青年對歷史地理發生了濃厚的興趣,又提高了我做研究工作的能力。這對於我後來能夠在大學里當一名還算稱職的教師,在學術上多少能夠取得一些成就,是起了很大的作用的。[2]([2]顧頡剛、譚其驤: 〈討論兩漢州制致顧頡剛先生書〉,譚其驤: 《長水集(上)》,第22—43頁。)

“이 토론을 통해 저라는 젊은이는 역사 지리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연구 능력도 향상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나중에 대학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교사가 되고, 학문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2]([2]고힐강顧頡剛, 담기양譚其驤: 〈양한 주 제도에 관해 고힐강 선생께 드리는 글〈討論兩漢州制致顧頡剛先生書〉〉, 담기양譚其驤: 《장수집長水集(상)》, 22-43쪽.)

這一種能力,實際上是受譚先生習用沿革地理考據學思維長期熏陶的結果。因為欲對史實做出準確或正確的梳理及判斷,就必須尋找、考訂和尊重真實可靠的史實,堅持住這一點,不僅可以了解歷史的真相,而且還可以做出對於歷史問題的通解。1947年,譚先生有機會在《浙大校刊》上發表〈近代杭州的學風〉一文,更將實事求是的根源做了一番通透敞亮的解說:

이러한 능력은 사실 담譚 선생이 오랫동안 연혁 지리 고증학적 사고방식을 사용하며 단련된 결과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정확하거나 올바른 정리와 판단을 내리려면, 반드시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료를 찾고, 고증하며, 존중해야 한다. 이 점을 지키면 역사의 진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도 내놓을 수 있다. 1947년, 담譚 선생은 《절대교간浙大校刊》에 〈근대 항주杭州의 학풍〉이라는 글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근원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求是即求真,要求是求真,必先明辨是非真假,要明辨是非真假,關鍵首在能虛衷體察,棄絕成見,才能舍各宗各派之非之假,集各宗各派之是之真。

“진리를 추구하는 것[求是]이 곧 참됨을 구하는 것[求眞]이다. 진리를 구하고 참됨을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관건은 먼저 열린 마음으로 살피고 선입견을 버리는 데 있다. 그래야만 각 학파의 그릇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각 학파의 옳고 참된 것을 모을 수 있다.”

學術的趨向可變,求是精神不可變。[3]([3]譚其驤: 〈近代杭州的學風〉,《國立浙江大學校刊》1947年復刊第149、150期,第6—8頁。收入葛劍雄編: 《譚其驤全集》第2集,人民出版社2015年版,第584—590頁。)

“학문의 경향은 변할 수 있어도,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은 변할 수 없다.” [3]([3]담기양譚其驤: 〈근대 항주의 학풍〈近代杭州的學風〉〉, 《국립절강대학교간國立浙江大學校刊》 1947년 복간 제149, 150기, 6-8쪽. 갈검웅葛劍雄 편: 《담기양전집譚其驤全集》 제2집,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 2015년판, 584-590쪽에 수록.)

1997年,“《往事與沉思》傳記叢書”之《悠悠長水·譚其驤前傳》出版,作者葛劍雄先生特意將上述話語置放在作者肖像後一頁上(出版社還按此做成書籤贈與購書人),使這段話得到了更為廣泛的流傳。

1997년, ‘《과거사와 성찰往事與沉思》 전기 총서’ 중 하나인 《유유장수·담기양전전悠悠長水·譚其驤前傳》이 출판되었을 때, 저자 갈검웅葛劍雄 선생은 특별히 앞서 언급된 말을 저자 초상화 다음 페이지에 실었다(출판사는 이를 책갈피로 만들어 책 구매자에게 증정하기도 했다). 덕분에 이 말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回想1951年,新中國出版總署邀約譚其驤先生編繪《中國歷代疆域圖》,因學校教學諸事纏身而未能做下去,值1954年譚先生又獲得了前往北京出任中國歷史地圖主編之請,葛劍雄先生譽此為“一個千年難逢的時機”[4]([4]葛劍雄: 《悠悠長水: 譚其驤傳》,《葛劍雄文集》第3冊,第213頁。),從那時到1974年《中國歷史地圖集》內部發行本的問世、1982年暨1987年《中國歷史地圖集》公開本的出版,譚先生和他的合作者、支持者又經歷過多少艱難的歲月。到了1981年,國家決定編纂《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指定中國社會科學院為主辦單位,次年成立歷史地圖集編纂委員會,提名譚其驤先生為總編纂。[5]([5]國家地圖集編纂委員會: 《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第1冊,中國社會科學出版社2012年版。)譚先生時年71歲,不少友人都勸他不要再承擔這樣大的集體項目,他對自己的弟子說:“現在大家對《中國歷史地圖集》的評價這麼高,老實說這是因為以前沒有。但這畢竟只有疆域政區,稱‘歷史地圖集’是名不副實的,只有《國家歷史地圖集》搞出來了才能算數。這件事情完成了,我這一輩子也就不白活了。”這位弟子就是葛劍雄,後來在《悠悠長水·譚其驤後傳》中,葛先生專門寫下了“明知不可為而為之: 編繪《國家歷史地圖集》”一節,在這一節的後面,葛劍雄先生寫道:

1951년, 신중국 출판총서出版總署가 담기양譚其驤 선생에게 《중국역대강역도中國歷代疆域圖》 편찬을 요청했으나 학교 수업 등 여러 일에 얽매여 진행하지 못했던 일을 돌이켜보면, 1954년 담譚 선생이 다시 북경北京에 가서 중국 역사 지도 주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은 갈검웅葛劍雄 선생이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고 칭송한 일이었다. [4]([4]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 《갈검웅문집葛劍雄文集》 제3책, 213쪽.) 그때부터 1974년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내부 발행본이 나오고, 1982년과 1987년에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공개본이 출판되기까지 담譚 선생과 그의 협력자, 지지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 어려운 세월을 겪었던가. 1981년, 국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역사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 편찬을 결정하고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을 주관 기관으로 지정했다. 다음 해 역사지도집 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담기양譚其驤 선생을 총편찬으로 지명했다. [5]([5]국가지도집편찬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역사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 제1책, 중국사회과학출판사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2년판.) 당시 담譚 선생은 71세였고, 많은 친구들이 그에게 더는 이렇게 큰 공동 프로젝트를 맡지 말라고 권했다.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다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예전에 이런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결국 강역과 행정 구역만 다루었으니 ‘역사지도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습니다. 《국가역사지도집國家歷史地圖集》이 나와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완성하면 제 한평생도 헛되지 않을 겁니다.” 이 제자가 바로 갈검웅葛劍雄이다. 훗날 갈葛 선생은 《유유장수·담기양후전悠悠長水·譚其驤後傳》에서 특별히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행하다: 《국가역사지도집國家歷史地圖集》을 편찬하다’라는 절을 썼고, 그 절 뒤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我深知,他把編繪出一本足以反映我國歷史自然地理和人文地理研究成果的、世界第一流的巨型地圖集當作他一生的最終追求,作為他對祖國、對學術的最後奉獻,明知不可為而為之,一切困難和個人的利益早已置之度外了。[1]([1]葛劍雄: 《悠悠長水·譚其驤後傳》,華東師範大學出版社2000年版,第302頁。)

나는 그가 우리나라의 역사 자연지리와 인문지리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는 세계 일류의 거대한 지도집을 편찬하는 것을 일생의 최종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깊이 안다. 그는 이를 조국과 학문에 대한 마지막 공헌으로 여기고,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행했으며, 모든 어려움과 개인의 이익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1]([1]갈검웅葛劍雄: 《유유장수·담기양후전悠悠長水·譚其驤後傳》, 화동사범대학출판사華東師範大學出版社 2000년판, 302쪽.)

此處所言我國歷史自然地理和人文地理的研究成果,毫無疑問是整個歷史地理學界的科研目標所在,每一位研究者對此均有貢獻,方才有利於《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類似圖書的編纂形成。而在這樣的科研目標追求之中,譚先生就是我們大家共同的學術榜樣,其光輝品質亦是大家獲取精神力量的重要源泉。

여기서 말하는 우리나라 역사 자연지리와 인문지리 연구 성과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지리학계 전체의 연구 목표이며, 모든 연구자가 이에 기여해야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역사지도집中華人民共和國國家歷史地圖集》과 같은 서적의 편찬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학문적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담譚 선생은 우리 모두의 학문적 귀감이며, 그의 빛나는 품격 또한 모두가 정신적 힘을 얻는 중요한 원천이다.

(作者附言: 本文的構思和撰寫,甚為依賴葛劍雄先生所著《悠悠長水: 譚其驤傳》,文中引用之處甚多,在此謹向葛先生表示由衷的敬佩和感謝之意。)
(저자 부언: 이 글의 구상과 작성은 갈검웅葛劍雄 선생의 저서 《유유장수: 담기양전悠悠長水: 譚其驤傳》에 크게 의존했으며, 본문 중에 인용한 부분이 매우 많다. 이에 갈葛 선생께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