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少華.學習譚其驤先生對鄂君啟節地理釋證的幾點體會[J].歷史地理硏究,2021,41[02]:1-4.
徐少华.学习谭其骧先生对鄂君启节地理释证的几点体会[J].历史地理研究,2021,41[02]:1-4.

 

學習譚其驤先生對鄂君啟節地理釋證的幾點體會
담기양 선생의 악군계절 지리 해석에 대한 몇 가지 소고

서소화徐少華
[무한대학武漢大學 역사학원歷史學院, 호북湖北 무한武漢 430072]

 

譚其驤先生是我國著名的歷史地理學家、教育家,亦是中國歷史地理學的開創者、奠基人之一,在長達六十餘年的學術生涯中,譚先生在歷史人文地理、歷史自然地理、歷史地理文獻和歷史地圖等多個研究領域均取得了巨大的學術成就,作出了舉世矚目的貢獻,是中國歷史地理學界永遠的旗幟、楷模和豐碑。我沒有機緣接受先生的耳提面命,然因專業學習以及教學研究的需要,長期以來深受譚先生治學方法、思路和學術新見的薰陶、影響和啟迪,受益良多,終生難忘。這裏就學習譚先生於20世紀60年代前期在「鄂君啟節」地理釋證方面所取得的一系列重要成果談幾點切身的體會,錯誤之處,敬請師友批評指正。

담기양譚其驤 선생은 중국의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이자 교육가이며, 중국 역사지리학의 개척자이자 기틀을 다진 인물 중 한 명이다. 60년이 넘는 학문 인생 동안, 담譚 선생은 역사인문지리, 역사자연지리, 역사지리문헌, 역사지도 등 여러 연구 분야에서 커다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세계적인 공헌은 중국 역사지리학계에 영원한 깃발이자 모범이며 기념비로 남았다. 나는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전공 공부와 교육 연구 때문에 오랫동안 담譚 선생의 학문 연구 방법, 사고방식, 새로운 학술적 견해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평생 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1960년대 초 담譚 선생이 ‘악군계절鄂君啟節’의 지리적 해석 분야에서 이룩한 중요한 성과들을 공부하며 느낀 몇 가지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스승과 동료들의 비판과 가르침을 구한다.

 

1957年和1960年,先後在安徽壽縣邱家花園出土了5件鄂君啟節,形制爲仿竹節剖析而成的弧面青銅鑄件,正面均有長篇錯金篆書銘文,其中車節3件,形制、銘文一致,每件有銘文9行144字,另有重文1、合文3;舟節2件亦相同,每件銘文爲9行162字,另有重文、合文各1。兩種節文分別記載了鄂君車、舟商隊所經行的路線、範圍,以及對鄂君經商所作的若干規定和限制,反映了楚懷王前期楚國疆域和經貿的若干重要信息,對研究戰國時期楚國的歷史、地理、商貿、關稅乃至區域經濟均有十分重要的價值①。材料刊布以後,即受到學界的廣泛關注與重視,先後有不少學者對鄂君啟節的文字釋讀、文本理解及其所涉歷史地理、商業貿易和關稅制度等做過多方面的研究,取得了一系列重要成果①,促進了諸多疑難問題的相繼解決,對這批材料的重要內涵有了比較全面、深入的認識。其中譚其驤先生的兩篇研究論文《鄂君啟節銘文釋地》[以下簡稱「《釋地》」]和《再論鄂君啟節地理答黃盛璋同志》[以下簡稱「《再論》」]②,在對鄂君啟節若干地理疑難的破解與交通線路的復原方面作出了重要貢獻,對相關研究起到了很好的推進作用。

①〈關於鄂君啟節的發現、釋文和初步研究〉:郭沫若:《關於鄂君啟節的研究》,《文物參考資料》1958年第4期;殷滌非、羅長銘:《壽縣出土的「鄂君啟金節」》,《文物參考資料》1958年第4期;以及《安徽日報》1961年2月23日的報道。另參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編:《殷周金文集成》[修訂增補本],第12110—12112器:鄂君啟車節,第12113器:鄂君啟舟節,中華書局2007年版,第6601—6606頁;劉彬徽、劉長武:《楚系金文彙編》,第104器:鄂君啟節,湖北教育出版社2009年版,第25、393—395頁。
①自「鄂君啟節」1957年出土以來,學術界的研究成果衆多,台灣學者洪德榮與大陸學者趙思木兩位先生曾做過比較全面的匯集整理與述評,見洪德榮:《先秦符節研究》上、下冊,潘美月、杜潔祥主編:《古典文獻研究輯刊》第16編第25冊,花木蘭文化出版社2013年版;趙思木:《鄂君啟節銘文集釋》,高文出版社2018年版。
②譚其驤:《鄂君啟節銘文釋地》,《中華文史論叢》第2輯,中華書局1962年版,第169—190頁;譚其驤:《再論鄂君啟節地理答黃盛璋同志》,《中華文史論叢》第5輯,中華書局1964年版,第169—193頁。按:兩篇論文後均輯入譚先生所著《長水集[下]》,人民出版社1987年版,第193—232頁。

1957년과 1960년, 안휘安徽 수현壽縣 구가화원邱家花園에서 총 5점의 악군계절鄂君啟節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대나무 마디를 쪼갠 모양을 본떠 만든 곡면 형태의 청동 주물이다. 앞면에는 모두 금을 입힌 긴 전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중 차절車節[수레 통행증]은 3점으로 모양과 명문이 같고, 각 점에는 9행 144자의 명문과 중문重文 1자, 합문合文 3자가 있다. 주절舟節[선박 통행증]은 2점으로 역시 동일하며, 각 점에는 9행 162자의 명문과 중문重文 및 합문合文이 각각 1자씩 있다. 두 종류의 통행증 명문에는 각각 악군鄂君의 수레와 선박 상단이 지나다닌 노선과 범위, 그리고 악군鄂君의 상업 활동에 대한 몇 가지 규정과 제한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초회왕楚懷王 전기 초楚나라의 영토와 경제 무역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역사, 지리, 상업 무역, 관세, 지역 경제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①. 이 유물이 공개된 후 학계의 폭넓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많은 학자가 악군계절鄂君啟節의 문자 해독, 내용 이해와 관련된 역사지리, 상업 무역, 관세 제도 등에 대해 다방면으로 연구하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①. 이를 통해 여러 난제들이 해결되었고, 이 유물의 중요한 의미에 대해 비교적 전반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중 담기양譚其驤 선생의 두 연구 논문인 《악군계절명문석지鄂君啟節銘文釋地》[이하 《석지釋地》]와 《재론악군계절지리답황성장동지再論鄂君啟節地理答黃盛璋同志》[이하 《재론再論》]②은 악군계절鄂君啟節의 여러 지리적 난제를 해결하고 교통 노선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여 관련 연구를 크게 발전시켰다.

關於舟、車兩篇節銘所描述的交通線路,譚先生在此前郭沫若、殷滌非、羅長銘、商承祚等諸位先生的相關認識基礎上,經過認真分析排比,歸納出鄂君商船「舟行凡分四路」,即漢水沿線的西北路、長江下游的東路、江南湘資沅澧油諸水的西南路、長江中游楚郢都一帶的西路;車隊所行大致由南陽東北之陽丘經方城、象禾而東進,至淮河中游的下蔡、居巢等地進行商貿活動的單行路線。由於文字釋讀的懸而難決和地名考定的複雜多變,譚先生在若干具體問題的考釋、定位方面的研究雖有不少值得進一步商討的空間或餘地,然經過60多年的幾輪討論、認識,再討論、再認識,大浪淘沙,汰劣存優,譚先生當初所論的一些具體認識儘管部分被加以修訂、調整,但先生所歸納復原鄂君商隊的幾條經行路線與基本框架經過學術的檢驗和否定再否定後,被證明是相對合理的,符合兩種節銘的原意,成爲現今學界的基本共識。

주절舟節과 차절車節 명문에 묘사된 교통 노선에 대해, 담譚 선생은 곽말약郭沫若, 은척비殷滌非, 라장명羅長銘, 상승조商承祚 등 여러 선생들의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꼼꼼히 분석하고 정리하여 악군鄂君 상단의 배가 “총 네 갈래 길로 다녔다”고 결론 내렸다. 즉, 한수漢水 유역의 서북로, 장강長江 하류의 동로, 강남江南의 상수湘水·자수資水·원수沅水·예수澧水·유수油水 등 여러 강을 지나는 서남로, 장강長江 중류 초楚나라 영도郢都 일대의 서로가 그것이다. 수레 상단은 대략 남양南陽 동북쪽의 양구陽丘에서 출발해 방성方城, 상화象禾를 거쳐 동쪽으로 나아가, 회하淮河 중류의 하채下蔡, 거소居巢 등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단일 노선으로 파악했다. 문자 해독의 어려움과 지명 고증의 복잡함 때문에, 담譚 선생의 구체적인 해석과 위치 비정 연구에는 추가로 논의할 부분이 있다. 하지만 60여 년간 여러 차례의 토론과 연구를 거치며 좋은 것은 남고 나쁜 것은 걸러졌다. 담譚 선생의 초기 견해 일부는 수정되거나 조정되었지만, 그가 복원한 악군鄂君 상단의 주요 이동 경로와 기본 틀은 학문적 검증을 통해 비교적 합리적이고 명문의 원래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증명되어, 현재 학계의 기본적 공통 인식이 되었다.

當初譚先生在《釋地》一文的前言中說:「我對古文字學和古器物學是一個十足的門外漢,並不想也不可能在文字和名物制度等方面對四位先生的考釋有何補益。本文只是在四位先生釋文的基礎上,專就銘文所載水陸途程,從歷史地理角度出發,作一番比較系統的探索。」正是因爲譚先生深厚的學術功底,以及對歷史地理文獻與研究方法的熟練掌握和充分運用,經過一番「系統的探索」,取得了超越他人的重要成果,爲節銘所載交通路線的確立和相關地名[如水道、城邑等]的考釋、定位奠定了有利的基礎。

당시 담譚 선생은 《석지釋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문자학과 고기물학에 대해 완전한 문외한이라, 문자나 명물 제도 등에서 네 분 선생의 해석에 무언가 보탤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이 글은 단지 네 분 선생의 해석을 바탕으로, 명문에 기재된 수륙 경로에 대해서만 역사지리학적 관점에서 비교적 체계적인 탐구를 한 것이다.” 이처럼 담譚 선생은 깊은 학문적 역량과 역사지리 문헌 및 연구 방법에 대한 능숙한 지식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탐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뛰어넘는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고, 통행증에 기재된 교통 노선을 확립하고 관련 지명[수로, 성읍 등]을 해석하고 위치를 찾는 데 유리한 기초를 마련했다.

 

關於節銘中一系列地理疑難問題的考釋,譚先生亦作出了諸多重要貢獻。如舟節之「彭射」,當初釋作「彭■」,郭沫若先生讀爲「彭蠡」,即今之鄱陽湖,譚先生依據李平心先生「疑彭■即彭澤」的看法,認爲「則此『彭■』亦即彭澤所指也應該是一個邑聚而不是一個澤藪。……應在以彭蠡爲名簡稱彭的澤藪之旁」。雖譚先生「疑即六朝時代之大雷戍,今安徽望江縣」的定位稍有偏差,但所言「應該是一個邑聚而不是一個澤藪。……應在以彭蠡爲名簡稱彭的澤藪之旁」的思路是非常正確的,爲其後進一步分析提供了很好的參考和借鑒。

명문에 나오는 여러 지리적 난제 해석에 있어서도 담譚 선생은 많은 중요한 공헌을 했다. 예를 들어, 주절舟節의 ‘팽사彭射’는 처음에 ‘팽■’로 적혔고, 곽말약郭沫若 선생은 이를 ‘팽려彭蠡’, 즉 오늘날의 파양호鄱陽湖라고 읽었다. 담譚 선생은 이평심李平心 선생의 “‘팽■’은 아마도 팽택彭澤일 것”이라는 견해에 따라, “‘팽■’이 가리키는 팽택彭澤은 호수가 아니라 마을이어야 한다. …’팽彭’으로 줄여 불리던 호수 팽려彭蠡의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담譚 선생이 “아마도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대뢰수大雷戍, 즉 지금의 안휘安徽 망강현望江縣일 것”이라고 추정한 위치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호수가 아닌 마을이어야 한다. …호수 팽려彭蠡 옆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매우 정확했다. 이는 이후의 연구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松陽」,《釋地》認爲:「當即今安徽樅陽縣。樅陽在古代是一個很有名的地方,漢武帝南巡曾過此,作樅陽之歌。」也得到學界的廣泛認同。

‘송양松陽’에 대해, 《석지釋地》는 “바로 지금의 안휘安徽 종양현樅陽縣이다. 종양樅陽은 고대에 매우 유명한 곳으로, 한무제漢武帝가 남쪽을 순시할 때 이곳을 지나며 종양의 노래樅陽之歌를 지었다”고 밝혔다. 이 견해는 학계의 폭넓은 인정을 받았다.

「瀘江」,《釋地》起初按照商承祚先生的釋文,認爲「瀘江當即廬江」,並對以「廬江」爲名的古水道進行了系統梳理。後雖於《再論》中受其他學者影響改釋爲「浍江」,但《釋地》中對古代多條廬江水道的梳理無疑爲後來的正確考定提供了文獻與地理上的支撐;同時,譚先生於《再論》中曰:「浍江當即桑欽所謂淮水,即今青弋江。楚滅越以前在大江南岸的疆域大致即東盡於此。」展現出深邃的學術洞察力,令人嘆服。

‘호강瀘江’에 대해, 《석지釋地》는 처음에 상승조商承祚 선생의 해석에 따라 “호강瀘江은 여강廬江일 것”이라고 보고, ‘여강廬江’이라는 이름의 옛 물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나중에 《재론再論》에서는 다른 학자들의 영향으로 ‘회강浍江’으로 해석을 바꾸었지만, 《석지釋地》에서 여러 여강廬江 물길을 정리한 것은 후대의 정확한 고증에 문헌적, 지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동시에, 담譚 선생은 《재론再論》에서 “회강浍江은 상흠桑欽이 말한 회수淮水로, 바로 지금의 청익강靑弋江이다. 초楚나라가 월越나라를 멸망시키기 전, 장강長江 남쪽 기슭의 동쪽 경계가 대략 이곳까지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깊은 학술적 통찰력을 보여주어 감탄을 자아낸다.

「爰陵」,譚先生在《釋地》一文中定於「今桐城縣東南六十里」,後於《再論》中做了調整,說:「浍江旣爲今之青弋江,則爰陵當即漢代丹陽郡治宛陵縣。……銘文此路航線當由江入青弋,或徑達青弋江上的漢宛陵故城,或折入支流水陽江達於今宣城。」譚先生此論雖在改釋「瀘江」爲「浍江」上出現了偏差,然在考定浍江爲今青弋江、確定爰陵爲青弋江上的「漢宛陵故城」方面的建樹,堪稱經典。

‘원릉爰陵’에 대해, 담譚 선생은 《석지釋地》에서 “지금의 동성현桐城縣 동남쪽 60리” 지점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재론再論》에서 이를 수정하여 “회강浍江이 지금의 청익강靑弋江이라면, 원릉爰陵은 한대漢代 단양군丹陽郡의 치소였던 완릉현宛陵縣일 것이다. …명문에 기록된 이 뱃길은 장강長江에서 청익강靑弋江으로 들어가거나, 청익강靑弋江에 있던 한대漢代 완릉宛陵 옛 성으로 바로 가거나, 혹은 지류인 수양강水陽江으로 꺾어 들어가 지금의 선성宣城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담譚 선생의 이 주장은 ‘호강瀘江’을 ‘회강浍江’으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는 있었지만, 회강浍江을 지금의 청익강靑弋江으로, 원릉爰陵을 청익강靑弋江 위의 ‘한대漢代 완릉宛陵 옛 성’으로 확정한 업적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若干年以後,黃盛璋先生在論及節銘中這幾處地理位置的考定時言:「《再論》考訂爰陵爲漢代之宛陵,即今宣城前身,語音、方位皆合,此地名自此可定,拙文此處所論有誤,應改從譚文。」「■江即廬江,乃青弋江之古名,歷史地理上長期爭論不明之廬江問題,自此它全獲得解決。」①由此可見譚先生的學術貢獻。

①黃盛璋:〈鄂君啟節地理問題若干補正〉,《歷史地理論集》,人民出版社1982年版,第286—288頁。

몇 년 후, 황성장黃盛璋 선생은 명문에 나오는 이 지명들의 위치를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재론再論》에서 원릉爰陵을 한대漢代의 완릉宛陵, 즉 지금의 선성宣城의 전신으로 고증했는데, 발음과 위치가 모두 들어맞는다. 이 지명은 이로써 확정할 수 있으며, 내 글의 이 부분 논의는 잘못되었으므로 담譚 선생의 글을 따라야 한다.” “■강은 즉 여강廬江으로, 청익강靑弋江의 옛 이름이다. 역사지리학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던 여강廬江 문제가 이로써 완전히 해결되었다.”① 이처럼 담譚 선생의 학문적 공헌은 매우 크다.

關於湘水一線的「■陽」,當時或釋「涉陽」「■陽」,《釋地》按照商承祚先生的意見釋作「洮陽」,且進一步分析「漢置洮陽縣,故治位於湘水上游支流洮水北岸;洮水即今廣西全縣北黃沙河」。並言「此路溯湘水而上,南極越城嶺下」。

상수湘水 유역의 ‘도양洮陽’에 대해서는, 당시 ‘섭양涉陽’ 또는 ‘■양陽’ 등으로 해석되었다. 《석지釋地》는 상승조商承祚 선생의 의견에 따라 ‘도양洮陽’으로 해석하고, “한漢나라 때 설치된 도양현洮陽縣은 상수湘水 상류의 지류인 도수洮水 북쪽 기슭에 있었다. 도수洮水는 지금의 광서廣西 전현全縣 북쪽의 황사하黃沙河이다”라고 더 깊이 분석했다. 그리고 “이 길은 상수湘水를 거슬러 올라가 남쪽 끝 월성령越城嶺 아래에 이른다”고 말했다.

「入㵢」,譚先生認爲「當即湘水支流耒水。……此路由湘入耒,南抵南嶺北麓」。得到學界的一致認可。但是,「入㵢」之後的「■」,當初隸爲「鄙」,譚先生推測「當即漢代的便縣,在耒水中游北岸,即今湖南永興縣」。後有學者改釋作「郴」,即楚漢之際項羽遷義帝於郴之地,今湖南郴州,較漢之便縣更加合理一些,實乃在譚先生所論耒水、便縣基礎上的進一步深化,可謂青出於藍而勝於藍。

‘입뢰入㵢’에 대해, 담譚 선생은 “바로 상수湘水의 지류인 뢰수耒水이다. …이 길은 상수湘水에서 뢰수耒水로 들어가 남쪽으로 남령南嶺 북쪽 기슭에 닿는다”고 보았다. 이는 학계의 일치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입뢰入㵢’ 다음에 나오는 ‘■’에 대해, 당초 ‘비鄙’로 예정되었는데 담譚 선생은 “아마도 한대漢代의 편현便縣일 것이며, 뢰수耒水 중류 북쪽 기슭, 즉 지금의 호남湖南 영흥현永興縣이다”라고 추측했다. 후에 어떤 학자가 이를 ‘침郴’으로 수정하여 해석했다. ‘침郴’은 초한楚漢 시기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옮겨 살게 한 곳으로, 지금의 호남湖南 침주郴州이다. 이는 한대漢代의 편현便縣보다 더 합리적인 해석으로, 담譚 선생이 논한 뢰수耒水와 편현便縣을 기초로 더 깊이 연구한 것이다. 가히 청출어람[靑出於藍而勝於藍]이라 할 수 있다.

「入資、沅、澧、■」之「■」,《釋地》在此前諸位先生隸定釋文的基礎上擇善而從,贊同羅長銘先生「是油脂的油,此指油水,今湖北公安縣有油河」的看法並做更加細緻的分析和推進,「油水《漢書·地理志》南郡高成下作繇水,《水經·江水篇、油水篇》作油水;其水源出漢孱陵縣[故治在今公安縣西南]西界白石山,東過縣北,至漢華容縣界公安城[今公安縣西北古油口]西北入江,全長五百里。……油河一名實際已不復存在,其上游在湖南石門縣境內今名穿山河,澧縣境內今名邊山河,湖北松滋縣境內今名界西河;至於公安縣境內的油河故道,則久已湮塞,只剩下了一個以古油口爲名的集市[即明以前的公安縣治],倒確是古油水的入江之處」。將節銘所載的江南此四水論述得非常清楚,撥開了若干迷霧,使學界疑惑頓解。

“입자入資, 원沅, 예澧, ■”라는 구절의 네 번째 강에 대하여, 담기양譚其驤의 《석지釋地》는 앞선 학자들의 연구 중 좋은 것을 따랐다. 특히 라장명羅長銘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며 이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라장명羅長銘은 “이 글자는 기름 ‘유油’이며, ‘유수油水’라는 강을 가리킨다. 오늘날 호북湖北 공안현公安縣에 있는 유하油河가 바로 그 강”이라고 주장했다. 담기양譚其驤은 이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분석했다. “유수油水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서는 ‘요수繇水’로, 《수경水經》에서는 ‘유수油水’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강의 발원지는 한漢나라 잔릉현孱陵縣 서쪽의 백석산白石山이다. 물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현의 북쪽을 지나고, 화용현華容縣 경계의 공안성公安城 서북쪽에서 장강長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총 길이는 500리里에 달한다. […] ‘유하油河’라는 강 이름은 사실상 더는 쓰이지 않는다. 현재 상류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호남湖南 석문현石門縣에서는 천산하穿山河로, 예현澧縣에서는 변산하邊山河로, 호북湖北 송자현松滋縣에서는 계서하界西河로 불린다. 공안현公安縣에 있던 옛 유하油河의 물길은 오래전에 막혔고, 그저 ‘고유구古油口’라는 이름의 시장 터만 남아 있다. 바로 이곳이 옛 유수油水가 장강長江으로 합류하던 지점이다.” 이처럼 담기양譚其驤은 명문에 기록된 강남江南의 네 강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여, 학계가 오랫동안 가졌던 의문을 풀어주었다.

較之於舟節而言,車節所涉及的地理疑難相對少一些,譚先生的釋證亦有創見。如「陽丘」,《釋地》認爲:「當即漢代的堵陽縣,故治在今河南方城縣東六里。堵陽本秦陽城,見《漢書·曹參傳》注引應劭曰;王莽又改曰陽城。」

주절舟節에 비해 차절車節과 관련된 지리적 난제는 비교적 적다. 담譚 선생의 해석에는 독창적인 견해가 있다. 예를 들어 ‘양구陽丘’에 대해, 《석지釋地》는 “바로 한대漢代의 도양현堵陽縣이며, 옛 중심지는 지금의 하남河南 방성현方城縣 동쪽 6리 지점이다. 도양堵陽은 본래 진秦나라의 양성陽城이었는데, 《한서漢書》 〈조참전曹參傳〉 주석에서 인용한 응소應劭의 말에 나온다. 왕망王莽 때 다시 양성陽城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보았다.

「方城」,譚先生說:「楚之方城有三……銘文中的『方城』應在『陽丘』之東,顯然不可能指庸方城;方城上用『庚』不用『逾』,又可見不是指楚之長城而是指的那個在長城旁邊正當伏牛山隘口的小城。以地望推之,此城故址約相當於今方城縣東北方城、葉縣界上的保安鎮。」論說有據,條理清晰,亦爲學界所推崇。

‘방성方城’에 대해, 담譚 선생은 “초楚나라의 방성方城은 세 곳이 있다…명문에 나오는 ‘방성方城’은 ‘양구陽丘’의 동쪽에 있어야 하므로, 용방성庸方城일 리는 없다. 방성方城에 ‘경庚’ 자를 쓰고 ‘유逾’ 자를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초楚나라의 장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성 옆 복우산伏牛山 길목에 있던 작은 성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치로 보아 이 성의 옛터는 대략 지금의 방성현方城縣 동북쪽, 방성方城과 섭현葉縣 경계에 있는 보안진保安鎮에 해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근거가 있고 논리가 분명하여 학계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高丘」,譚先生論曰:「疑當在《水經·淮水注》中潤水所瀦的高塘陂附近。陂已湮,故址當在今安徽臨泉縣南。自緐陽東行抵此。」高丘的地望至今仍在討論,未有定論,然譚先生當初所推測的大致範圍與經行路線則是合理可取的,頗有借鑒意義。

‘고구高丘’에 대해, 담譚 선생은 “아마도 《수경·회수주水經·淮水注》에 나오는, 윤수潤水가 고여 있던 고당피高塘陂 근처일 것이다. 이 저수지는 이미 사라졌고, 옛터는 지금의 안휘安徽 임천현臨泉縣 남쪽에 있을 것이다. 번양緐陽에서 동쪽으로 가서 이곳에 이르렀다”고 논했다. 고구高丘의 위치는 지금까지도 논의 중이며 정해진 결론은 없다. 하지만 담譚 선생이 당시에 추측했던 대략적인 범위와 이동 경로는 합리적이어서 참고할 가치가 크다.

 

歸納而言,譚先生在鄂君啟節地理釋證方面的貢獻主要體現在兩個方面。一是對節銘交通路線的梳理與復原,如「舟行凡分四路」、車節由西向東的一路單行等,基本符合兩種節銘的原意,得到學界的普遍認可,不但爲具體地理的考定指明了範圍、確立了方位,同時對認識戰國中期楚國的疆域和交通路線具有重要的參考價值。二是對一系列城邑、水道如松陽、瀘江、爰陵、洮陽、耒、郴、陽丘、方城、高丘等的準確考釋與定位,可謂典範,對其他相關疑難問題的逐步破解具有重要的參照和推動作用。

요약하자면, 담기양譚其驤 선생이 악군계절鄂君啟節의 지리를 해석하는 데 기여한 공헌은 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교통 노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복원한 점이다. 배의 경로가 “네 갈래 길”로 나뉘고, 수레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단일 노선이었음을 밝혔다. 이는 명문의 원래 의미와 거의 일치하여 학계의 폭넓은 인정을 받았다. 이 연구는 단순히 지명의 위치를 찾는 데 방향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 초楚나라의 영토와 교통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둘째, 여러 성읍과 수로의 위치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찾아낸 점이다. 송양松陽, 호강瀘江, 원릉爰陵, 도양洮陽, 뢰耒, 침郴, 양구陽丘, 방성方城, 고구高丘 등 여러 지명의 위치를 정확하게 고증한 것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는 다른 어려운 지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참고 기준이 되었고, 관련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由於我個人研究時段與學術方向的原因,曾反復學習、研讀過譚先生的這幾篇重要論著,頗受啟發和教益,印象深刻,感觸良多。

나의 개인적인 연구 시기와 학문적 방향 때문에, 담譚 선생의 이 중요한 논문들을 반복해서 학습하고 깊이 읽었다. 이를 통해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받았으며, 깊은 인상과 감명을 받았다.

首先,是譚先生深邃的學術眼光和洞察力。他在綜合他人對兩種節銘釋字與考論的基礎上,先從交通路線的體系加以梳理,確定方位、範圍,然後再就具體地望逐一辨析、考定,這樣就明顯縮小了探索的範圍,在相對確定的區域或線路內有目的地搜尋、分析,減少了很多不必要的彎路,較大提升了節銘地理復原的準確度,如關於松陽、爰陵、洮陽、耒、陽丘、高丘諸地望的考辨。

첫째는 담기양譚其驤 선생의 깊은 학문적 안목과 통찰력이다. 그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바로 개별 지명을 파고드는 대신 큰 그림부터 그렸다. 먼저 교통 노선 전체를 파악하여 대략적인 방향과 범위를 정했다. 그 후에야 그 범위 안에서 송양松陽, 원릉爰陵, 도양洮陽, 뢰耒, 양구陽丘, 고구高丘 같은 구체적인 장소들을 하나씩 분석하고 위치를 찾아 나갔다. 이러한 체계적인 접근 덕분에 연구의 범위가 크게 좁혀졌고,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그 결과, 명문에 기록된 지리를 훨씬 더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其次,是譚先生淵博厚實的學術基礎和功底。不管是對節銘水道的討論還是城邑的定位,譚先生對相關史料都是信手拈來,匯集一處,結合歷史背景認真分析比較,盡可能做出符合各種條件的選擇和結論,如對瀘江、郴、方城等地名的釋證。即或略有偏差,但所匯集的有關材料和分析的思路,對其後的進一步探索、改進均有較大的參考作用,如彭澤、瀘江等。由此展現出譚先生對文獻史料的了然於胸和對歷史地理各類要素的熟悉程度。

둘째는 담기양譚其驤 선생의 해박하고 탄탄한 학문적 깊이이다. 명문에 나오는 강이든 도시든, 어떤 주제를 연구하든 그는 관련 역사 자료를 막힘없이 찾아내 한데 모았다. 그리고는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며 자료를 꼼꼼히 분석하고 비교하여,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호강瀘江, 침郴, 방성方城 같은 지명을 해석한 것이 좋은 예다. 설령 그의 결론에 작은 오류가 있는 경우라도, 그가 수집한 자료와 분석 과정은 그 자체로 매우 가치가 있었다. 팽택彭澤이나 호강瀘江 연구처럼, 그의 작업은 후대 학자들이 더 깊이 연구하고 내용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문헌 사료를 얼마나 훤히 꿰뚫고 있었으며, 역사지리의 모든 요소에 얼마나 익숙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再次,是譚先生精益求精、深入細緻的學術態度與治學精神。譚先生在分析問題時,從不做簡單臆斷或隨便下結論,而是在認真歸納、深入分析各類材料的基礎上做出盡可能合理的選擇,使結論堅實有據。這也正是譚先生雖自己謙稱不太精通古文字、古器物學,然在諸位學者初步認識的基礎上,仍憑藉其超人的學術眼光和淵博厚實的學術功底,在鄂君啟節地理釋證方面作出一系列開創性貢獻的實質所在,值得我們認真學習和繼承發揚。

셋째는 담譚 선생의 정밀함을 추구하고, 깊고 세밀하게 파고드는 학문적 태도와 정신이다. 담譚 선생은 문제를 분석할 때, 간단히 추측하거나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여러 자료를 신중하게 정리하고 깊이 분석한 기초 위에서 가능한 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여 결론에 확실한 근거를 더했다. 스스로 고문자학과 고기물학에 정통하지 않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여러 학자들의 초기 연구를 바탕으로 뛰어난 학문적 안목과 넓고 탄탄한 학문적 역량을 발휘하여 악군계절鄂君啟節 지리 해석 분야에서 선구적인 공헌을 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우리가 진지하게 배우고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할 점이다.

譚先生雖然離開我們多年了,作爲一位學術大師,一位中國歷史地理學的開創者和奠基人,留給了我們無比豐厚的學術遺產和精神財富。譚先生的治學理念與方法,人格魅力與師德風範,諄諄教導與對學術的不懈追求,影響著我們一代又一代的學術後人,並將永遠指引我們沿著先生及其他學術前輩們所開辟的道路努力奮進,開拓創新。

담譚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학문의 대가이자 중국 역사지리학의 개척자이며 기틀을 다진 분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풍부한 학문적 유산과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 담譚 선생의 학문 이념과 방법, 인격적인 매력과 스승으로서의 품격, 간곡한 가르침과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우리 후학들에게 대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선생과 다른 학문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노력하고 나아가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도록 영원히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