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봉. 크루그만 신드롬의 신화: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의 한계. 삼성경제연구소, 2000.

크루그만 신드롬은 허구다. 크루그만은 동아시아의 위기를 예견한 적이 없다.

동아시아의 경제성장률이 점진적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했을 따름이다.

[관련자료] “크루그만 교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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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발췌]

『크루그만 신드롬의 신화』라는 이 글의 난해한 제목은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크루그만’과 ‘신드롬’ 그리고 ‘신화’라는 각 단어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먼저 첫 번째로, ‘크루그만’이라는 단어다. 한국의 외환위기 전후에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한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을 들라면 단연 미쉘 캉드쉬(Michel Camdessus)와 폴 크루그만(Paul Krugman)일 것이다. 캉드쉬는 IMF의 총재라는 자격으로 한국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면서 영미식 자본주의체제를 한국사회 깊숙이 이식시키는 데 주역을 맡았다는 평가에는 별 이견이 없다. 물론 캉드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평가가 마땅치 않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역사는 그렇게 기술할 것이다. 반면 크루그만은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미리 예견한 선견력 있는 경제학자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11월 12월『포린 어페어즈』지에 발표한「아시아 기적의 신화: 우화적 경고」라는 화제의 글을 통해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가 누리고 있는 고도의 경제성장 추세가 조만간 한계에 달할 것이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주장을 폈다. 동아시아는 자본이나 노동과 같은 생산요소를 대량으로 투입하여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나 이제는 추가적으로 투입할 생산요소가 고갈되고 있으므로 고도성장세가 꺾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크루그만의 주장을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으로 부를 것이다. 1997년 말에 크루그만의 예견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외환위기가 일어났다. 역시 세계적인 석학은 다르다는 평가가 뒤따랐고, 그의 발언이 화려하게 언론을 장식해 갔다.

크루그만은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을 펼치면서 이론적 근거로서 소위 ‘솔로우 모형(Solow Model)’을 사용했다. 이 모형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성장이란 주로 자본이나 노동과 같은 생산요소의 투입량을 늘림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이를 ‘총요소투입증가’라 한다. 그리고 경제성장 중에서 총요소투입증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기술진보가 기여한 것이라고 간주하며, 이를 총요소생산성증가라 부른다. 시카고대학의 영(Alwyn Young) 교수가 1994년에 쓴「숫자의 전제」라는 글에 따르면 동아시아의 경제성장 대부분이 자본과 노동을 대규모로 투입한 결과다. 즉, 총요소투입증가는 높지만 총요소생산성증가는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크루그만은 이를 차용하여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에서는 기술진보가 기여한 부분은 미미하고, 향후에는 과거처럼 대규모의 자본이나 노동을 추가적으로 투입할 여력이 없어질 것이며, 생산요소를 투입하더라도 한계생산성이 체감할 것이므로 결국은 소련처럼 경제성장률이 점진적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크루그만이 내놓은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의 골자다. 또한 이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크루그만’이라는 단어는 크루그만이라는 인물 개인이 아니라 크루그만이 펼친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을 뜻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단어가 ‘신드롬’이다. 크루그만이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을 발표한 이후 많은 논란을 일으키다가 1997년에 한국이 위기상황에 봉착하게 되자, 한국 내에서도 크루그만의 예견이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신드롬이 일어난다. 한국의 몰락과 비례해서 크루그만의 명성은 국내외적으로 급상승한다. 국내 여러 언론에 크루그만의 이름이 오르내렸으며, 여러 학자와 이코노미스트도 그의 주장을 곧잘 언급했다.

신드롬의 심각성은 이러한 사후 문제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위기를 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있다. 하버드대학의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 교수는 크루그만의 주장이 동아시아 경제의 미래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지적했으며, 뉴욕대학의 루비니(Nouriel Roubini) 교수도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크루그만의 가설을 확인해 주었다고 평했다.

크루그만이 주장한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에 대한 논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국을 필두로 동남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국제투자가들은 크루그만의 예견이 현실화되는 것으로 믿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크루그만 자신도 동아시아의 몇 나라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걱정했고, 시티은행에 아시아 지역의 신용을 줄여 가도록 조언한 사실도 있다고 1998년 3월에 홍콩에서 열린 CSFB(Credit Suisse First Boston) 주관 세미나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몇몇 헤지펀드가 동남아로부터 자본탈출을 시도하자 이를 신호탄으로 국제투자가들이 앞다투어 동아시아로부터 자본을 유출시킴으로써 소위 ‘소떼 이론’이 현실화되었다. 또한 동남아 위기가 ‘경제적으로 전염’되면서 한국에 악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경제적 전염과정에 대해 크루그만은『디플레이션 경제의 회귀』라는 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동아시아 지역으로 들어가는 해외자본의 유입은 신흥시장 펀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 펀드는 동아시아 지역을 한 묶음으로 보기 때문에 태국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오자 많은 자금이 펀드에서 빠져나갔고, 그 여파로 이 지역의 모든 나라에서 자본이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국제투자가들의 선호도가 높았고 해외투자가 촉진된 이유는 이 지역의 여러 국가가 ‘동아시아의 기적’을 공유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국 경제가 기적과는 무관하다는 점이 밝혀지자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대한 국제투자가들의 믿음도 흔들렸다는 것이 크루그만이 주장하는 경제적 전염 효과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신화’라는 단어다. 신화란, 크루그만이 주장한 동아시아 성장한계론과 그로 인해 야기된 크루그만 신드롬이 ‘허구에 찬’ 것이라는 의미다. 신화(myth)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미토스(mythos)다. 미토스는 역사(history)라는 말의 어원인 히스토리아(historia)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히스토리아는 ‘실제로 발생한’이라는 뜻이므로, 결국 신화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신화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단순히 꾸며낸 질서 없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 글에서 굳이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크루그만이 쓴「아시아 기적의 신화」라는 글의 제목 때문이다. 1993년에 세계은행이 출간한『동아시아 기적』이라는 책을 비판하기 위해 크루그만은「아시아 기적의 신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크루그만이 주장하는 바는 여러 사람이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기적이라고 칭송하지만 자기가 보기에는 기적이 아니라 허구에 불과한 신화라는 것이 다. 이에 빗대어 이 글에서도 크루그만이 제기한 동아시아 성장한계론과 크루그만 신드롬 역시 허구에 찬 것이라는 뜻에서『크루그만 신드롬의 ‘신화’』라는 제목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