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꽃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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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길

 

낙동강 변

다대포

바다 위를 걷다

영접

벚꽃 엔딩

창포원 여름

걷기에 바치는 러브레터

명례성지

튤립

수월경화(水月鏡花)

추석 이브

로드킬

마른 땅에 핀 연꽃

산과 같은 친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걷기 예찬

예술 산책

이바구길

마음을 담다

이기대

동네커피

끝눈

 

2 발견

 

해인사

하심송(下心松)

감춰진 꽃

큰 바위 얼굴

개미와 풀꽃

발견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저편, 저 너머

정숙

카페 38.5

겸손은 마음의 각도

풀꽃처럼 작은 한마디

이너 서클(Inner Circle)

두부

페이지나인 – PAGE 9

촌애

갈매기의 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울산 대왕암

끝물

뒤태

여백

카르페 디엠

프레임

 

3 순간

 

과속

기다림 – 종유석

꽃들의 합창

동그라미

동지

두손 모아

명상

묵언

물방울

미어캣

백자

붉은 감탄사

빈궁

송편

숭엄

시인

연출

이발

일몰

절 방석

큐브

통갈치구이

할매 은퇴

합장

 

4 교감

 

내 마음속 블루

OK

마음 백신

사과

목련

꿈의 아파트

감읍

그냥

계란 한 판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이중섭의 「흰 소」

사유의 방

단 한 점

유물의 뒷모습

죽향(竹香)

K 클래식

먼 기억에서

이런 친구를 그대는 가졌는가

황상근

윤순봉의 서재

노인과 바다

 

5 생활

 

티슈

후드티

가맥

새해 여행

텅 빈 충만

빈 배 가득

소확행

스마트폰

몽블랑

디지털 웰빙

파김치

자기애

중년의 배신

카페

착한 밥집

다시 어버이날

등 굽은 소나무

스토리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

골프채를 놓다

전작주의자

평생 현역

에필로그 | 감사한 일

 

감춰진 꽃

사랑은 달콤한 꽃이다. 그러나 그것을 따기 위해서는
무서운 벼랑 끝까지 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스탕달

 

 

작가의 말

 

찰칵, 찰나의 울림이 세상 끝에 닿기를


그날은 오후 두어 시쯤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다. 살다 보면 세상으로 향한 문을 닫고 싶을 때가 있다. 말문을 거의 닫고 있을 때, 먹는 것도 건너뛰며 대충 때울 때다. 차림도 마음 따라 가는지 몰골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듯 후줄근한 행색으로 밥집에 들어섰다. 가정식 백반집인데 때가 지 나 손님은 나 혼자 뿐.
소위 혼밥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 잡기 전이라 그날의 혼자 먹는 밥은 왠지 뒤가 불안하고, 앉아 있어도 아웃사이더의 수행 같은 시간이었다.
백반 상차림 전에 시키지도 않은 호박전 한 접시가 나온다. 메뉴판에 없는 그것은 휴대폰 통화를 엿들은 여주인이 나의 생일임을 알아차리고 소주 잔술과 함께 서비스로 내놓은 것이다. 젓가락 끝이 나도 모르게 한참을 떨고 있었다. 달짝지근한 호박전의 진노랑 기억과 불콰한 술기운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한 장의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사진은 시간의 흔적을 담고 기억을 재생한다. 사진 속 시간은 멈추었지만 추억과 시간 여행이라는 선물을 안겨준다.‘ 모든 사람과 사물에는 그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처럼 한 장의 사진 속에도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0여 년 동안 갤러리에 담은 수만 장의 사진 중 120점을 추린 후 짧은 글을 덧붙여 내놓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와 뒤에 숨은 이야기, 속에 스며든 이야기, 그리고 사물에 깃든 세월까지 담으려 했다.
글을 매만지다가 사진에 빠져들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찰칵, 하는 울림이 중심에서 밀려난 변방의 끝에 닿는다는 믿음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걸음을 잠시 멈추고 셔터를 누른다.

 

2023년 겨울 초입

김병준

 

 

 

1 길

 

 

 

낙동강 변

한낮의 반짝임보다
저물녘 일몰이 좋은
가을 나이

 

다대포

강이 흘러 바다로 가는 것은
그리움을 찾아 나선 것

 

바다 위를 걷다

2021.3 해운대

짧은 산책길에서도
이르는 곳마다
어느 하나
선(善) 아닌 것이 없다.

 

영접

세상은 나의 끊임없는 노크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우연히 만난 낯선 아이는
눈을 마주치고, 손을 내밀고, 말문을 연다.
비 그친 시간의 파도 소리는 축복의 음악이다.
잊고 있었던 내 유년의 기억들도 함께 물결친다.
까만 먹물로는 반짝거림을 그릴 수 없다고 믿었는데
오랜만에 컬러를 본다.
동안보다 동심,
동심은 순수와 진실과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벚꽃 엔딩

거창의 벚꽃 명소인 곰실마을의 덕천서원을 찾았다.
올해는 개화가 빨라서 벚꽃의 절정이 조금 지난 듯하다.
가속하는 나이만큼 꽃들이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도 짧다.
찬란한 꽃의 시간 뒤에는 짙어가는 초록이 기다린다.

 

창포원 여름

사진 한 장을 놓고 지난 1년을 추억한다.
겨울임에도 시간은 아직 창포원의 여름에 머물러 있다.
황혼을 훌쩍 넘긴 필름 카메라를 떠올린다.
아껴 찍던 24장, 36장짜리 아날로그 감성이 그립다.
그 시절 반짝이던 눈은 사라지고 어느새
셔터를 마구마구 난사하는 대충의 미학이 자리잡았다.
사진은 카메라가 아니라 시선이 만든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다.
초록의 계절은 지났지만 겨울 내내 마음은 여름밭이다.
치렁치렁한 버드나무 가지에는 마음 급한 연두가
이미 초록이다.
빈 벤치에 첼로를 앉힌다.
첼로는 4개의 현을 바람에 맡기고 반짝이는 윤슬 아래
한여름 이야기를 중저음 초록으로 써 내려간다.

 

걷기에 바치는 러브레터

비 오는 날, 합천 대야성 함벽루 주위를 걸었다.
‘걷기에 바치는 러브레터’라는 부제가 달린 신간 도서
「걷는 존재」는 비 오는 날 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흔히 맡게 되는 흙냄새는 젖은 흙에서 생성되는
지오스민이라는 물질 덕분인데,
인간은 이 냄새를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진화했다.
비가 오면 공기 중에 음이온이 증가해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고, 생기있는 자연 때문에 도파민이 급격히 분비된다.
비 올 때 밖으로 걸어볼 만한 이유는 수두룩하다.

비와 동행하다 보니 폰의 걷기앱은 이미 만보를 돌파했다.
걷기는 하루를 짧게 하지만, 인생을 길게 한다.

 

명례성지

비가 듣거니 맺거니 흐린 날
명례에 내린 빛을 따라가 보았다.

치유와 명상의 땅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에게 지친 영혼을 누일 수 있는 곳
고요와 평화, 침묵의 장소

밀양시 하남읍에 자리한 명례성지는
1896년에 건립된 경남 최초의 천주교회 본당이다.
코로나19가 일상을 멈추게 하고
신앙의 발걸음도 멈추게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앞에 둔 명례 언덕은
우리에게 등을 내주는 언덕이며, 우리가 비빌 언덕이다.
세상사가 인간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느낄 때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존재에 기대는
편안하고 성스러운 쉼터다.

 

튤립

2020.3 화명생태공원

수백 년 전 네덜란드
황소 수백 마리를 팔아야 가질 수 있었던
부와 신분의 상징 ‘튤립’
이러한 투기적 욕망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는데
코로나는 인간의 어떠한 욕망 때문에 팬데믹이 되었는지.

격리와 멈춤으로 무료한 오후
집 근처 튤립 꽃밭에서
매혹, 고결, 우아를 스마트폰에 담았다.
만개의 절정을 지나 꽃들이 시들 즈음
바람에 날리는 꽃잎과 함께 코로나도 사라졌으면.

 

수월경화(水月鏡花)

‘물에 비친 달과 거울에 비친 꽃’

볼 수는 있어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비유하거나
작품이나 풍광이 너무 훌륭해 이루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창포원의 이른 연꽃이 그러했다.
빗방울 또르르 구르는 연꽃의 자태를 좀더 가까운 곳에서
담으려다 비 온 뒤라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됐다.
‘진흙 없이 연꽃 없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추석 이브

2022.9 진주성

가을밤 나는
여치 한 마리 되어
찌릉찌릉
환한 달빛을 따라다닌다.

 

로드킬

이른 아침 빗길에 널브러진 슬픔 하나
죽음의 도로에 뛰어든
노란 사슴 한 마리
비명도 없이 멈춘 바퀴
위험이 도사리는 길에서
인간은 왜 이리 서두르는가.

 

마른 땅에 핀 연꽃

낮고 낮은 곳 마른 땅에 누워
지나치는 걸음마다 피어오르는
연꽃의 화엄
꽃이 질 때 짓이겨져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미소

 

산과 같은 친구

2021.11 거창 우두산

온갖 생명의 안식처
언제나 편하고 든든한
산과 같은 친구

늘 그 자리에
서로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나무와 같은 친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녀의 진주 목걸이가 터져
별처럼 반짝인다.
어두운 골목에
꽃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걷기 예찬

는개비를 살짝 맞아가며 쉬엄쉬엄 느림보 마음으로 걷는다.
걷기, 단순한 운동을 넘어 명상이기에
걸으면서 여러 말들을 곱씹는다.

-신이 내린 최고의 자연 요법
-걸어 다니는 명상학
-걷지 않고 사색할 수 없다.
-위대한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적자생존 아닌 걷자생존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 식보보다 행보(行補)
-누죽걸산,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나이들수록, 아플수록, 피곤할수록 걷는다.
-길 위엔 신분도 귀천도 없다. 오직 나만의 자유가 있을 뿐.

 

예술 산책

내 안의 창의성이 사라졌다고 느낄 즈음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오직 예술만이 지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머문다는 사실을 깨친다.

 

이바구길

부산역에서 초량 산복도로 까꼬막까지 1.5km 테마 거리
골목 곳곳에 이바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부산 개항부터 6.25 전쟁을 거쳐 현대까지
생생한 역사와 삶의 현장이 이어진다.

경사 45도의 가파른 계단이 마치 우리네 삶과 같다.
168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산동네 주민과 관광객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비탈길 중턱에
모노레일이 설치되었다.

 

마음을 담다

부산 영도에는 피난민들의 애잔한 삶의 흔적을 간직한
흰여울문화마을이 있다. 봉래산 기슭의 낡은 집들은
리모델링을 통해 독창적인 문화 예술 마을로 거듭났다.
이곳의 공방을 겸한 기념품 가게 「마담」
마담은 ‘마음을 담다’의 줄임말이다.

서울 사는 친척들이 오랜만에 집에 들렀으나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는 얘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마음의 방이 내게 없었던 게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흰여울마을의 집들은 절벽을 따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은
여러 카페, 소품샵들과 잘 어우러진다.
그중 손바닥만 한 방 하나를 내 마음속에 들여다 놓았다.
굽이쳐 내리는 흰여울같이 흔쾌히 내주는 방 한 칸을
마음에 담았다.

 

이기대

부산 용호동 장산봉 해안의 평평한 바위를 이기대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수영성을 함락시킨 후 축하연 때
의로운 기녀 2명이 술에 취한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내려 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녀들의 의로운 죽음은 진주 촉석루 의암에서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의 충절에 비유된다.
이기대에서 바라본 왼쪽 바위는 오른쪽 의암의 데자뷔다.

 

동네커피

카페는 이제 차와 음료만 파는 것이 아니라 ‘공간 경험’을
판다. 커피 한 잔 가격에는 공간 값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도심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편안한
제3의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과 소비를 원한다.
카페가 대형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트렌드와는 달리 동네 카페는 동네 서점, 동네 슈퍼,
동네 사진관처럼 동네라는 단어가 주는 친밀감이 있다.
시골 소읍에 조그만 카페가 하나 들어섰다.
곁, 틈, 사이, 구석, 쉼표 등의 단어와도 잘 어울린다.
가까이 있어 혼자서라도 불쑥 찾기 쉽고,
창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멍때리기 좋은 곳이다.
가격이 착해 주인도 착한 분일 것 같아
나 혼자만 알았으면 하는 곳이다.

 

끝눈

간밤에 내린 눈이 올겨울 마지막 눈이라 여기다가
이내 생각을 바꾼다.
끝말, 끝물, 끝판, 끝장, 끝자락…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기에 끝눈도 언젠가 또다시
첫눈으로 이어짐을 믿는다.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삶.
출근길 눈을 보며 첫눈 올 때의 떨림을 기억한다.
나는 온돌방에 군불을 지피고
그녀는 눈길에 젖은 양말을 구석에 펴놓는다.
이렇듯 겨울 하루가 또 지나간다.

 

2 발견

 

 

 

해인사

변방이 창조 공간이다, 라는 생각으로
해인사의 변경, 그늘, 샛길을 걷다가 우연히 담은 사진
마치
고승이 지팡이 잡은 듯
불자가 합장하는 듯
소나무가 사람 人자 만드는 듯

자연은 최고의 경전이다.

 

하심송(下心松)

머리를 숙이면
세상과 부딪칠 일이 없다.

 

2021.11 진주 남가람별빛길

틈은 숨 쉬고, 숨 돌리는 안식의 공간이다.
어두컴컴한 틈 속에도 볕이 들고, 바람이 불고, 별이 뜬다.
대나무 틈새로 비가 적시고, 풀꽃이 피고, 나비도 날아든다.
담장처럼 반듯한 사람보다 구멍난 돌담처럼 군데군데
빈틈이 있는 사람이 편하고 좋다.
상대의 빈틈은 나의 빈틈을 메워주기도 한다.

 

감춰진 꽃

‘사랑은 달콤한 꽃이다.
그러나 그것을 따기 위해서는
무서운 벼랑 끝까지 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기침, 가난,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하지만
‘사랑’이란 단어가 초록 이파리에 살짝 감춰져 있다.
어쩌면 험하고 가파른 벼랑 끝까지 발품을 팔아
스스로 익힌 사진들.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를 담으려 했다.
눈앞에 반짝이는 것보다 세상에 묻혀 숨어 있는 것을
쫓아다녔다.
잡힐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찾듯.

 

큰 바위 얼굴

2020.12 부산 송도 구름산책로

시인과 사진작가의 공통점은 새로운 발견과 끝없는 탐구다.
낡은 반복과 상투를 거부하며 과거의 되새김질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무심히 지나가는 것들을 유심히 살핀다.
낯선 사물에 말을 걸고, 생명을 불어넣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낯선 여행을 떠난다.

몇 년 새 천지개벽한 부산 송도의 구름산책로를 걸으면
거북섬을 만나게 된다.
뜻밖에 어떤 바위와 마주치게 되자 바로 셔터를 눌렀다.
우연과 즉흥이 주는 선물이다.
입을 굳게 다문 형상을 한 이 바위를
‘큰 바위 얼굴’이라 이름 지었다.
무채색의 무생물에 생기가 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을 떠올린다.
인간의 가치는 돈, 권력, 명예,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구와 성찰에 있음을 되새긴다.

 

개미와 풀꽃

개미와 풀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신의 존재도 알 수 없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서랍 속에 누운 하모니카
한 자세로 굳건히 앉은 막사발
부름받을 차례 기다리는 신발장의 신발
한 번도 비추지 않은 거울
퉁퉁 불어 아무도 손이 안 가는 어묵 한 꼬치
눈 속에서도 하늘을 들어올리는 풀꽃
발밑에서 풀꽃 씨앗을 멀리 나르는 개미
저마다의 자리에서 인내와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평범한 사물들,
그들에게 오늘만은 사랑을 전한다.

 

발견

걷기 나선 늦은 밤
초등학교 후문에 걸린 현수막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글귀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이 시집엔 「시」라는 제목의 짧은 시가 실려 있다.

그냥 줍는 것이다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버려진 채 빛나는
마음의 보석들

걸으면서 그냥 줍줍 하듯 깨친다.
시, 예술, 인생도 ‘발견’임을.
걷기가 내게 준 선물이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경고문>
화단에 있는 고추 모종 부러뜨린 못된 녀석 발견 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 구덩이 파서
묻어버리겠음!!!

며칠 후 다시 찾았을 땐 그 팻말이 다음과 같이
바뀌어져 있었다.

<안내문>
이 화단은 동네 아이들이 고추 모종을 키우고 있는
공간입니다. 부러뜨리지 않게 조금만 조심해 주세요.

 

저편, 저 너머

2022.8 거창 문바위

Beyond
저편, 저 너머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힘

 

정숙

처음엔 깜짝 놀랄 수밖에.
그 시절의 정숙을 흰여울문화마을 골목에서 만나다니!
정숙(靜肅)이 아니라 정숙(貞淑)으로 읽는다.

뜨거움보다 절제와 차분함으로 나직이 속삭이는
잔잔한 수필 같은 친구.

 

카페 38.5

부산 영도의 어느 카페 문을 들어서며
이곳에 어울릴 법한 시 한 편 떠올린다.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허연 시인 / 얼음의 온도

「카페 38.5」는
체온 36.5도에서 2도의 열정이 더해진 이름이다.
그래서 이 카페는 사람의 온도마저 잊고
불에 타는 줄도 모르고 천년을 사랑해도 식지 않는
뜨거운 연인에게 딱인 곳이다.
이런 곳에 나 같은 핫바지가 잘못 들어왔나 싶어
카페 안팎 풍경 서둘러 몇 컷 찍은 후
핫바지 방귀 새듯 은근슬쩍 이곳을 빠져나왔다.

 

겸손은 마음의 각도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다.

겸손은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숙이는 것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는 것

「대지」의 작가 펄 벅은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다.
이 딸은 펄벅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이었지만
딸로 인해 세상을 겸손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그녀의 저서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술회한 바 있다.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긴 수업 시간이라 했다.

낮은 곳에 귀 기울이며 자못 겸손하게 흐르는 집 앞
낙동강 가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풀꽃처럼 작은 한마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일’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온다.
-문정희 시인

 

이너 서클(Inner Circle)

금 바깥으로 내몰린 눈들은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원 안쪽 힘 있는 눈들은 저들의 자리와 몫을 많이 차지한다.
핵심 중추 세력인 그들만의 리그,
소위 ‘이너 서클’이다.

그러나 밀려난 우리들은
원 밖의 더 큰 세상에서 원 안의 그들을 품는다.

 

두부

<알림>
출소자에게 두부, 요구르트, 소금 등을 사용하고 남은
음식물은 길바닥에 버리지 말고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흔적을 남기면 다시 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부산구치소 면회 대기실에 붙은 글귀다.
‘흔적을 남기면 다시 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임팩트가 크다.
출소자들이 두부를 먹는 이유는 두부처럼 하얗게 살고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뜻일 게다.
박완서 작가는 수필 「두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므로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
두 번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당부다.
콩밥은 감옥을, 두부는 자유를 상징한다.

 

하루를 쓸어 담고 비운 수고들이
한자리에서 숨을 고른다
낮은 곳 구석구석
빛나던 비질 삽질

비질, 걸레질, 삽질… 모두 허리를 굽혀야 하는 일
일과 후 허리 쭉 편 청소 도구들이 가족처럼 한데 모여
휴식을 취한다.
마치 빨래가 널려 있는 듯한 풍경으로
송골송골한 땀을 바람이 식혀 주고 있다.
제 몸 닳고 닳아 마침내 숨 고르는 곳,
그마저도 눕지 못해 매달려 서성인다.
자식 건사와 부모 봉양에 애쓰는 우리네 모습이다.
청소란 세상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하던 일 잠시 멈추고 조금만 쉬었다 가자.
휴~ 하고 내쉬는 한숨이 휴(休)라는 쉼으로 바뀐다.

 

페이지나인 – PAGE 9

벌컥벌컥, 와인을 원샷 하지 않는 이유는 조금씩 멈춰 가며
특유의 향과 진미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함이다.
사진 역시 거칠게 마시는 막걸리나 맥주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마시는 와인처럼 향유하듯 촬영해야 하거늘,
허기 채우는 데 급급해 후루룩 목안으로 욱여넣다 보니
뷰(view)의 성찬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카페 「페이지나인」에서의 일이다.
이곳은 경주 현지인들이 ‘보문 제1경’으로 꼽을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
풍광에 취해 가득 담을 욕심에 셔터를 마구 눌러대다 보니
그럴듯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고 말았다.
시각 예술 사진을 미각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직도 미식이 아니라 과식과 폭식에 머무는
내 사진에 대한 반성과 함께 페이지나인을 한 장씩 넘긴다.

 

촌애

맛집 순례하다 보면 가게 이름에 꽂힐 때가 있다.
거창군 마리면 소재 「촌애」
한적한 촌에 자리잡은 숯불고기 맛집인데 가격도 착하다.
언뜻 촌에 간다, 촌에 살고 있는 아이, 로 상상되지만
촌애(村愛)라는 간판을 보면 고개가 끄떡여지고 사랑스럽다.

진주시 문산읍에 「두루춘풍」이라는 맛집이 있다.
두루춘풍은 누구에게나 두루두루 좋게 대한다는 뜻.
두루치기 전문점인 이 가게의 메뉴와 상호의 조어(造語)가
절묘하다.

부산 수정동의 핫한 고기 맛집 「고기앞」
벽면 글귀들이 눈길을 끈다.
–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앞으로 가라.
–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참는 건 이류, 먹는 건 육류다.

 

갈매기의 꿈

흰 돌에 갇힌 파란 꿈
곧 하늘로 바다로
날아갈 것임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테트라포드’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 해안 구조물.
태풍이 오면 큰 파도에 의한 부양으로 테트라포드의
상호간 구속 효과를 떨어뜨린다.
스크럼을 꽉 짠 채 한덩어리로 뭉친 것들은 살아남지만
홀로 떨어져 나간 것들은 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깨져
저멀리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돌, 자연, 사랑 역시 체인처럼 꽉 끼워 맞물려져야
위험을 이긴다.
이완보다 긴장이 필요할 때다.

 

울산 대왕암

울산의 대왕암에 닿았다.
용이 승천하다가 떨어졌다는 바위다.
경주의 대왕암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울산의 대왕암은 문무왕비가 잠든 바위다.
호국의 넋이 용이 되어 지금껏 동해를 지킨다.
대왕암 입구에 하늘 향해 누운 붉은 얼굴 바위 하나,
표류하는 영혼이 스스로 결박한 듯
파도가 칠 때마다 포박은 더 단단히 조여 온다.

 

끝물

제법 선선한 바람이 여름의 등을 떠민다.
식물의 생육이 정지되어 시들기 시작한다는 처서를
며칠 앞두고 창포원 연밭을 찾았다.
여름의 기세가 사그라들면서 연꽃들도 꽃잎을 접고
또 다른 아름다움을 준비한다.
화려할 때 물러날 줄 아는 군자의 꽃을 렌즈가 응시하면
분분했던 마음도 차분해진다.
마스크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연꽃원에서
속세에 물들지 않은 향기를 만끽한다.
가을이다.

 

뒤태

LA에 사는 친구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곳 한인 교회에서 트럼펫 특별 연주를 앞두고
팔을 모은 채 보면대와 마주한 그의 자태는
신 앞에 꾸밈없는 참모습 그대로다.
외로운 중년의 뒷모습이 아니라
예술가의 후면 자화상 같기도 하고,
하나님과 독대하며 경건의 시간을 갖는
성직자의 초상 같기도 하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무의식, 속이거나 거짓 없는 내면.
이래서 친구의 뒤태는 늘 아름답다.
마음의 수첩에 저장해 놓고 수시로 꺼내 볼 참이다.

 

여백

2023.8 국립중앙박물관

모녀의 뒷모습
빈 자리가 일깨우는 아름다움을 숨죽이며 본다.
다 드러나지 않아서 좋다.
사진은 빼기 예술
여지를 남겨두었기에 울림은 외려 더 커서
여운은 지금껏 가시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너의 모습이 그랬다.

 

카르페 디엠

친구가 팔에 커다란 문신을 하고 나타났다.
‘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발돋움한 김민재의 가슴팍에도
새겨져 있는 글자 문신이다.
친구는 배 아래 커다랗게 새겨진 용(龍) 문신도 보여준다.
파격과 자유가 부럽다.
35년을 교육계에 헌신한 그의 변신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명대사를 떠올렸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가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러한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다.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라.
너희들만의 특별한 삶을 살아라.
시간 있을 때 장미 꽃봉오리를 즐겨라.

 

프레임

명소 곳곳에 액자 포토존이 많이 생겨났다.
사진을 찍으며 프레임(frame)에 대해 생각한다.
프레임은 어떠한 생각의 틀 속에서 상황을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같은 그림을 두고 누구는 포르노,
누구는 성화(聖畵)로 인식할 수 있다.
사진은 사각 프레임의 예술이다.
사각의 틀 속에서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인지를
선택한다.
프레임 속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프레임 바깥에서
놓친 장면은 없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세상 보는 창을 관성과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이 해야겠기에
고착화된 사진 프레임을 수시로 리프레임(reframe) 한다.
예술은 틀을 깨는 작업이다.

 

3 순간

 

 

 

과속

2022.11 구포 무장애숲길

첫 만남 손잡고
초승달 언뜻 쳐다보는 찰나
만삭 배 속 발길질
환한 보름달 배냇짓

 

기다림 – 종유석

2015.5 단양 고수동굴

넌 천장에서 눈물 한 방울
난 바닥에서 까치발
마침내 잇닿아
한몸 기둥 될 때까지

 

꽃들의 합창

큰 목소리 내는 세상
내 소리 죽이고
남의 소리 귀담아들으며
한 호흡으로 화음을 내는
색색의 꽃들

 

너도 아닌데
눈은 왜 이리
희고
맑고
부드러운가

소멸을 알면서도 온몸으로 내리는 눈
앞서간 이 없는 백지 위
단숨에 내두른 발자국 글씨
거침없이 쓰고야 마는
자유의 초서

 

동그라미

2020.12 거창 신원면 인풍정

고목이 된 가계
실핏줄까지 막힌
돈맥경화

그놈의 돈
손가락으로 그린
OK 싸인

 

동지

우리의 사랑은
겨울 팥죽처럼 펄펄 끓다가도
죽 떠먹은 자리처럼
표 안 나서 좋다

새알심같이 깊이 감추었던 사랑은
모락거리는 김으로도 넉넉한데
뭉근히 익어가는 긴 밤
뜨겁고 찰진 정분을 어찌 잠재우나

 

두손 모아

2022.11 한결고운갤러리

어둠 환히 밝혀줄
초 한 자루 기다리며
여태 풀지 않은 저린 발등
기다림 뒤에 부처님 그림자

 

명상

덜거덕거리는 시간의 닦달
잠시 멈추고
내 안의 소리를 듣는
멍때림의 시간

 

묵언

2022.12 국립광주박물관

서랍 속 하모니카처럼
입을 봉한 그녀의 편지처럼
아무 말 없는 고미술관 그림처럼

 

물방울

2022.11 부산 송도 케이블카

찰나의 아름다움
소멸 직전의 긴장감
유 그리고 무
그 경계의 빛남

 

미어캣

2020.12 부산 이기대

지평선 사막에서 수평선 바다로
외발로 꼿꼿이 선 동그란 눈의 보초
햇볕 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잠잠히 지키는 파란 평화

 

백자

해맑은 눈(雪)빛
옹기종기 부대낌이
동지 팥죽 새알심 같아
아끼다 단 하나 남은
가마 속 하얀 알몸

 

붉은 감탄사

동백이 참 붉다
봄 마중 나온 새색시처럼
카메라 앞에 부끄러워
발아래 느낌표 뚝뚝 지고

 

빈궁

2023.4 국립경주박물관

어둠 내리면 꽃은 입을 닫고
나무도 가지를 모은다
달 뜨고 지는 일 없는 진공의 빈 뜰
꽃잎 한 장이
마른 낮달처럼 어둠을 지키고 있다
달빛 물고 찾아온 나비 한 마리
꽃 다시 피우는 날갯짓
오래전 허물어진 아기집 구석 어디쯤
허리 오그린 초승달 같은 곡옥(曲玉)

빈집에도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송편

고향 반달
서울 반달
마주보면 보름달

아껴둔 입술
분홍 반달 두 조각
한입에 만월

밤새 빚은 설렘
차오르는 그리움
달뜬 그대 이미 만삭

 

숭엄

모두가 고개를 떨굴 때
나는 하늘을 우러르며
겨울을 기다린다

 

시인

겨울나무가 촉을 세우고 있다
예민한 더듬이와 날카로운 펜촉
촉수에 닿은 글감 벼리며
봄 맞을 집 한 채 짓는다

 

연출

노란 병아리 넷
낙하하는 달걀들을 재촉하고 있다

 

이발

머리를 자른다
내 생명은 나일론 천에 목 졸리고
가위와 칼을 쥔 그의 손아귀에 달렸기에
차마 눈을 감는다

달마다 새로워지는 생

 

일몰

무거운 노을 밥상을 이고
서쪽으로 걸어가는 여인
길가 코스모스도 긴 허리가 휜다
서산에 걸려 넘어지는
내 누이의 서른아홉 가을

 

절 방석

수많은 기도가 쌓인 침묵
미처 털어내지 못한 비밀과 사연
한 장 한 장 켜켜이 무량한 마음
절 방석, 그대가 이미 부처

 

큐브

점, 선, 면, 각, 뿔, 벽, 네모, 꼭짓점, 모서리…
시간을 돌려가며 풀어야 할
수많은 삶의 난제 앞에
새해 첫날
나이 한 살 더 얹고 마법을 건다

 

통갈치구이

자르지 않은 통째 그대로
도량이나 씀씀이가 1미터나 되는 통갈치
한 조각만으로 여럿 배를 채우고도 남을
지극한 투신
칼 한 자루 누워 있다
왜 칼치라 하는지 알겠다
가만 누운 장도(長刀)는 처분만 바라는 듯
군데군데 난 칼집과 상처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한 수 가르치겠다는 듯
항해하던 심해를 상 위에 펼쳐놓는다
살을 바르며 나의 가시 돋친 말과
거추장스러운 잔뼈를 추스른다
눈부신 은빛 몸매 금세 사라졌지만
갈치속젓 깊은 뜻 여태 곱씹고 있다

 

할매 은퇴

점포 메메, 열락처

맞춤법은 틀려도
셈은 안 틀리고
간 맞추는 건 더 확실히 했는데

 

합장

세찬 바람 꽃비 내릴 때도
단단히 매달려 있더니만
바람마저 잠든 밤
나의 상사(相思)를 알아챈 듯
스스로 날개 접고 내려와
바닥에 함께 눕다

 

4 교감

 

 

 

내 마음속 블루

Once a blue, Always a blue

영국 EPL의 이름난 프로축구 클럽 「첼시」의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으로 동지애를 추억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블루(blue)에 주목한다.
파랑은 천상의 빛이며, 신의 색깔이다.
바다와 하늘을 품은 색이다.
우리가 깊게 내려가 닿을 수 없는 심연의 색이며
높게 올라가 미칠 수 없는 초월의 색이다.
미(美)를 향해 평생을 쫓아다니는 예술가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색이다.

 

OK

오케이 싸인을 주었더니 그도 그대로 답한다.
응, 그래, 좋아, 괜찮아, 잘될 거야,
원하고 뜻하는 일 모두 잘되길 바래.
오케이, 참 좋은 단어다.
골프에도 오케이존이 있다.
아마추어 골퍼에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오케이 싸인에
그린 동반자들도 훈훈해진다.

Okay.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고,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으면 하는 단어다.

 

마음 백신

2022.7 기장군 하녹카페

시 한 편 읽고 나니
굳게 닫힌 마음의 문짝이 빗장을 푼다.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한쪽 문이 열리고
다시 바람이 넘나든다.

 

사과

사과는 역사를 바꾸는 힘이 있다.
이브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가 그랬다.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한 폴 세잔의 사과와
2조 달러짜리 사과인 스티브 잡스의 애플 역시
세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달달한 사과를 한 움큼 베어먹다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과 하나를 떠올린다.
내 손이 살짝 기울어진 지구를 쥐고 있다.
작지만 단단한 사과, 쪼개지 않고 껍질째 한입 크기다.
천하의 애플도 내 손안에 있기에 부럽지 않다.
이 사과 속엔 역사를 바꾼 사과들이 다 들어 있다.
작은 우주가 있다.
나의 무대는 사과 박스처럼 작지만
우주의 큰 기운으로 한 해를 보낸다.

 

목련

파란 하늘에 수다를 떨고 있는 목련이 봄을 견인한다.
나무에 피는 연꽃인 목련은 꽃눈이 붓을 닮아
‘목필(木筆)’이라 불린다.
목필로 경주의 봄을 스케치한다.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 언덕에 목련꽃이 흐드러졌다.
앵글에 담다가 한 곡조 흥얼거린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박목월 작시 「사월의 노래」 중

봄을 알리는 목련은 우리나라 땅 어디서나 일찍 뵈옵는
반가운 선생님, 목월을 닮았다.
하얀 꽃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꿈의 아파트

경기 침체와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시장은 대세 하락기에
접어들었다.
매수 심리가 꽁꽁 얼어버린 역대급 거래 절벽 상황에서
나는 숲속의 프리미엄급 새 아파트를 2채나 사들이는
만용을 저질렀다.
당연히 남들은 미친 짓이라 손가락질한다.

다행히 꿈이었다.
최근 교체한 사무실의 공기청정기 2대가 아파트로 변신해
꿈에 나타난 것이다.
밤이면 가끔 내 마음속 꿈의 궁전, 펜트하우스를 짓는다.

 

2017.8 부산 더팜471

법은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들고,
예술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예술가들은 법과 도덕, 관습에서 자유롭다.
통제와 질서라는 담 안에서 숨막히게 사는 우리들에게
숨길을 터준다.
특히 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
문법적 질서에서 벗어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시적 허용, 시적 자유다.
현실이라는 감옥을 무너뜨리고, 금기의 벽을 깨고,
통념이라는 담을 넘으면 자유와 상상력의 날개가 펼쳐진다.
알타미라 동굴의 소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안락사 절의 벽화를 깨뜨리며 용이 승천하고,
이중섭의 성난 황소가 뒷걸음치기도 한다.
예술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이며 비유, 상징이다.

 

감읍

첫 시집 「거울을 보는 남자」를 받아 본 지인들의
응원 메시지가 목이 멜 정도로 벅찬 감동이다.

– 난생처음 시집 선물, 저자 싸인까지 고맙습니다.
– 첫 시집은 아기 탄생의 기쁨과 버금간다던데
– 10년 뒤 수능에 출제되길
– 머리맡에 두고 시시때때로 들춰봅니다.
– 느낌표로 다가온 시집, 두고두고 꼭꼭 씹어 먹을게요.
– 사생팬을 넘어 순수한 심장으로 시인님을 지켜냅니다.
– 시집(媤) 보내준다기에 무척 설레었어요.
– 거울에 새겨진 시인의 마음을 점자 읽듯 더듬어봅니다.

수많은 메시지 이외에 시 제목을 공들여 새긴 서각 작품,
행간을 주제로 한 감성 캘리그라피,
졸시 「안부」를 새겨 나를 청년으로 만든 디자인 케이크
역시 감읍이다.

 

그냥

한밤중 시내에서 서성이다가 무심코 들어간 「그냥식당」
“왜 전화했니?”   “그냥.”
“내가 왜 좋으니?”   “그냥.”

아무 뜻이나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이유 없이,
변명이나 과장 없이, 대신 겸손을 조금 담은 말.

“운동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피겨 여왕 김연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날짜도 몰라요. 그냥 수영만 해요.”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

달리 새로울 것 없이, 늘 그렇듯
강물이 흐르고, 해가 지고, 사람이 떠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슬며시 손잡고 싱긋 한 번 웃어주며 거리낌없이 보듬는 말.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마주쳐도 마음에 품는 말.
그냥, 이도 더 줄이면 ‘걍’
그냥이라는 말 하나로 생각과 생활이 더욱 웅숭깊어지기를.

 

계란 한 판

친구로부터 온 문자 한 통

“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그물에 또 걸려버렸네.
암 재발.
그래도 바람처럼 다시 빠져나와 훨훨 날아다니는 날이
꼭 올 것이란 믿음으로 감사하게 버텨보려고.
뼈까지 전이된 상태라 항암 치료를 언제까지 해야 할지
의사도 모른다니.
암이란 폭설에 파묻혀 그냥 버티기 작전 ㅎㅎ.”

크게 닥친 불행도 감사해하며 ㅎㅎ 웃어넘기는 강단 있는
그녀에게 보낸 답신

“친구의 계란 한 판은 29개뿐이다.
너에겐 한계란 없기 때문이다.
곧 눈이 녹고 꽃이 필 것을 믿는다.”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집 나간 영감을 왜 기다리나, 했는데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쓰는 그 영감이 아니라
창조적인 착상을 뜻하는 영감, 즉 Inspiration.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영감은 열중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이를 확인한 건 경주예술의전당 『앙리 마티스展』
-작품명 「뾰족한 턱을 한 나디아」

 

이중섭의 「흰 소」

2021년 신축년 소의 해, 흰 소와 함께 큰절 올린다.
한때 소는 재산 목록 1호로 부와 풍요의 상징이었으며,
우직과 근면의 아이콘이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성어로
인간을 가르치기도 한다.

흰 소는 재물과 명예가 찾아오고
신성한 기운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이중섭의 「흰 소」 그림을 벽에 걸고
흰 소의 상징과 기운을 접한다.
원작은 아니지만 원화를 선명하게 재현한 캔버스 액자에서
명작의 감동을 그대로 느껴본다.

이중섭은 25점의 소 작품을 남겼다.
소는 그에게 고향이기도 하고, 조국이기도 하다.
흰 소는 일제의 압박을 잘 견뎌낸 백의민족의 기상을
비유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023.5 소마미술관

산의 화가 유영국은 왜 산을 그리느냐는 질문에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등 모든 게 다 있다.
사계절 변화 속의 심오한 원리와 여러 모양의 인생이
숨어 있다.”라고 답했다.

화가는 보이는 산이 아닌 가슴 속의 산을 그린다.
산이 안 보이는 도심에서도, 지나는 사람의 얼굴에서도
자신만의 산을 본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는
유영국의 말을 새기며 그의 산 그림들을 내 마음의 방
곳곳에 걸어놓는다.

 

사유의 방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은
국보 반가사유상 2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뺨에 기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은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유물을 빼곡히 진열하지 않고 2점만을 위한 넓은 공간은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온화한 미소와 독대하며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단 한 점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에는 「손기정 청동 투구」가 있다.
많은 유물과 함께 진열되었던 투구를
넓은 공간에 단독 배치해 집중도를 높였다.
최근 이곳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40여평의 전시실에 손기정 투구 단 한 점만 자리하고
빈 공간은 관람객이 채운다.
이 투구를 앞, 옆, 뒤 다각도로 찬찬히 보면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과
기원전 마라톤 평원에서 숨가쁘게 달리던 그리스 병사를
생각한다.

 

유물의 뒷모습

박물관 전시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단 하나의 작품만을
강조하는 단독 전시가 새로운 흐름이다.
유물과 함께 공간도 중시함에 따라 전시관이
역사 인식의 장소에서 쉼과 치유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국보 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국립경주박물관에 새로이 등장한 높이 1.77m의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했다.
관람객들은 불상의 정면부터 옆을 지나 뒷모습까지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감상 집중을 위해 벽에 유물 설명도 없다.
불상의 뒷면은 불두에서 법의(法衣) 아래까지
5개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유물의 뒷모습은 정면과 달리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자칫 작품을 만든 장인(匠人)에게만 머물렀던 세계를
이제 우리들에게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죽향(竹香)

조선 후기의 대금 명인 정약대는 하루도 빠짐없이 인왕산에
올라 대금을 불었다.
나막신 한 짝을 놓고 한 곡 끝날 때마다 모래를 한 알씩 넣어
신이 가득 차야만 산에서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 모래에서 풀이 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리 내는 데 3년 걸린다는 대금은 참으로 어려운 악기다.
마음속 잡념, 미움, 더러움, 불안을 깨끗이 비워야
옳은 소리가 난다.
최진택의 대금 산조가 덕유의 밤을 가득 채운다.
득음에 이른 듯 마음을 깊게 가라앉힌 영혼의 소리 앞에
두손을 모으고 귀를 세운다.

 

K 클래식

– 우리 모두를 천상으로 이끄는 천재
– 피가 끓어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
– 베토벤이 환생한 듯, 강림한 듯
– 죽어 있던 내 몸의 세포들이 다시 살아나
– 덕분에 처음으로 클래식에 빠져
– 피아노가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인지
– 신의 선물, 상상 속의 피아니스트가 지구에
– 하늘의 별들이 건반 위에 쏟아져 내리고
– 연어들이 물을 거슬러 튀어 오르고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의 네티즌 감상평이다.
2022년 세계적 권위의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인 임윤찬.
52개 흰 건반, 36개 검은 건반을
섬광, 폭풍, 괴물처럼 잡아채는 연주는
지휘자를 춤추게 하고 청중을 신들리게 한다.

 

먼 기억에서

성 밖 처녀야,
마당 한 편 산초나무 곁에서
가지 끝 취산꽃차례로 핀 꽃 바라보던
처녀야, 성 밖 처녀야.
오월이 가고 웃음도 먼 기억으로
사위어, 지금은
빈 들녘 가득 붉발이 어린다.
그 우물터 어림엔
도깨비바늘 관모(冠毛)만 시쁘게 흩날린다.
– 「먼 기억에서」 詩 신중신 / 畵 이상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기억은 과거를 살게 해준다.
복사꽃 걸음으로 다가온 봄은 먼 기억으로 사위어갔지만
아직도 하이얀 기억들은 꽃잎 되어 흩날린다.
화관을 쓰고 하얀 미소로 찾아온 그녀의 신성한 빛.

 

이런 친구를 그대는 가졌는가

시인 구상이 폐결핵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병원을 다녀갔지만, 유독 친했던 이중섭만
오지 않았기에 구상은 몹시 서운했다.
뒤늦게 찾아온 중섭에게 서운함을 토로하자
그는 천도복숭아 그림 한 점을 꺼내 보인다.

“어른들 말씀이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얼른 일어나게.”

과일 살 돈이 없어 건강을 기원하는 그림을 그리느라
늦었다는 것이다.
구상은 20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구가 그려준
천도복숭아를 걸어놓고 평생을 함께한 것으로 전해진다.
– 경주문화관 이중섭 레플리카展

 

황상근

특정인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는다는 건 예사롭지 않다.
황상근. 초등학교 동창인 이 친구를 볼 때마다
‘모든 사람이 부처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성 깊은 내 친구가 불자들의 기준이자 향도임이
실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나 같은 엉터리 불자도 이 친구와 함께하면
뭔가 모르는 염력이 발동하여 신실한 마음을 갖게 된다.
상근은 ‘원담(圓潭)’이라는 법명을 가졌다.
잔잔한 못에 동그랗게 물결이 이는 듯 둥글고 원만하게,
고요하고 막힘없이 불법에 임하고 참마음으로 시봉한다.
상근은 ‘상근(上根)’이다. 불교에 대한 이해도나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불도를 잘 닦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불심에서 비롯된 사랑은 산문 밖이든 안이든 한결같다.
묵향 같은 그를 어쭙잖은 글로 평함이 송구스럽다.
나서지 않으며 묵묵하고 겸손한 그는 우리들의 뒷배다.
그에게 감히 ‘후주(後舟)’라는 호를 지어드린다.

 

윤순봉의 서재

마르지 않는 생각의 샘.
윤순봉의 서재가 자리한 곳은 ‘맑은 못’이라는 뜻의 청담동.
문화 곳간, 상상력 창고, 창의 아지트, 케렌시아, 슈필라움…
공간을 일컫는 어떠한 단어도 부합되는 장소에서
최고 전략가와의 만남.
나는 이곳에서 통찰력, 우주의 기운, 선한 영향력 같은
키워드를 주워 담기 바빴다.

‘과거를 알려면 박물관에 가고, 미래를 알려면 도서관에 가라.’
는 말처럼 책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멋과 맛, 젊음과 첨단이 모이는 청담동 거리에 가서
트렌드를 읽어라.
그리고 「윤순봉의 서재」에 들러 수많은 책과
그의 예지를 만나라.
그는 허한 문화혁명적 담론가가 아니라
경쟁력에 핵심 가치를 두는 해결사다.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구의 자연 감소가 가장 심각한 도시
‘부산’을 규정하는 자조 섞인 단어다.
일자리 감소와 도시 경쟁력 약화로 가장 먼저 사라질
광역시라는 보고서도 있다.
청춘을 함께한 부산이기에 노인과 바다만 남을 도시를
마냥 두고 보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들에게 던진 말을
떠올린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았다.
그러나 두 눈만은 예외였다.
바다 빛깔을 띤 파란 눈동자는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5 생활

 

 

갈색의 시간이 지나야
초록을 본다.

 

티슈

한 장 아낀다고 세상 달라질까 마는
나이 여든에도 나무 심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뽑을 때마다
봄 편지 건네는 설렘으로

 

후드티

캡모자나 캐주얼이 어색한 나이
목뒤 허전함을 달래주는 봄의 감촉
느슨하고 헐거운 시간을 담은 후드
구김 없이 편안한 너 같은 존재

 

가맥

또 한 주를 무사히 살아내며
길맥, 편맥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오늘은 가맥, 가게 맥주를 택했다.
얼리고, 녹이고, 말리기를 반복한
대관령 겨울을 연탄불에 굽는다.
속살 노란 황태가 포슬포슬 익고
걸쭉한 양념 소스가 예술이다.

 

새해 여행

일상이 새로운 여행이기를 바라며 새해를 맞이한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필요 없이 여행할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책이다.
아침에 집어 든 베스트셀러 2권,
책장을 넘기자 바윗돌 같은 내 머리에 푸른 싹이 돋는다.
책은 올해도 나의 도반이다.

 

텅 빈 충만

아침 첫차에 몸을 실었다.
헐한 차비에 승객이라곤 나 혼자뿐이라 괜스레 미안하고
고마워 버스 기사님께 절하고 싶은 심정이다.
‘꽃자리’라고 이름 붙인 나의 전용 지정석에 앉아
소중한 것들과 마주한다.
창밖 풍광을 눈에 넣고, 푸른 나무 키 크는 소리를 귀에 담고,
봄 향기를 킁킁거린다.
버스가 한참을 달렸는데도 손님은 여태 단 한 명.
너른 차 안에 홀로 있어도 오히려 마음은 넉넉하다.
이른바 텅 빈 충만이다.

법정 스님의 방에는 책 한 권, 서가 한 칸 없다.
자신이 책이다.
그가 풍기는 나무 향을 맡고 새들이 날아든다.

 

빈 배 가득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실은 것이라곤 달빛뿐
절망의 순간
주님이 빈 배에 타신다.
오직 주님으로
인생의 항해에 선장 삼으시길.

 

소확행

돈과 권력,
이 두 가지에서 멀어지면 소소한 행복이 많이 찾아든다.
시골에서 안분지족의 생활이 주는 낙은 크다.

튼실한 매실 한가득 발아래 두고
하늘엔 또 무엇이 있길래 일제히 눈길을 사로잡을까?
하늘도 즐겁고, 땅도 기쁘다.

 

스마트폰

전 국민이 사진사다.
다들 주머니 속에 작은 카메라 한 대씩 갖고 다닌다.
스마트폰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카메라의 영역을
빠른 속도로 대체 중이다.
전문 선수 중심의 엘리트 체육이 생활 체육으로,
순수 음악이 실용 음악으로 변신하는 흐름이라 할까.
스마트폰 덕분에 사진 역시 문턱이 낮아졌다.
예술의 엄숙주의가 깨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찍을 수 있는 손안의 카메라는
어려운 주제를 쉽게 표현한다.

 

몽블랑

명산은 명품을 낳는다.
몽블랑산은 「몽블랑」이라는 독일의 명품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만년필 뚜껑 끝에 새겨진 육각형의 흰색 별은
눈 덮힌 몽블랑 정상을 형상화했다.
심벌마크에서 신비스러운 힘이 나오기를 믿으며
사람들은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기록한다.

늘그막에 손에 쥔 명품 펜은
중년을 넘기며 시들어가는 자존감을 차오르게 했고,
가끔씩 불거지는 초라함을 가려주었다.
아날로그 감성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켰고,
그 포만감으로 프로 작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몽블랑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몽블랑산의 프로 알피니스트가 된 듯한 기분이었으니.

 

디지털 웰빙

스마트폰 알람으로 아침을 열고,
잠들 때 듣는 유튜브 음악으로 하루를 닫는다.
손바닥보다 작은 기기에 온종일 노예가 된 지 오래다.
사람 면전에서도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다.
일상이 스마트폰에 얼마나 붙잡혀 사는지 일간 주간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알려주는 「주간 리포트」가 있다.
앱 이름은 ‘디지털 웰빙 및 자녀 보호 기능’
이번 주 나의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9시간 18분,
충격이다. 몰입을 넘은 중독이다.

눈에 휴식이 필요하다. 화면으로부터 멀어지기로 했다.
눈부심과 무의미한 자극에서 벗어나 자연의 경이와
종이책의 매력과 벗하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꽁꽁 묶인 몸을 풀고,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파김치

파김치가 나를 사로잡았다.
입맛이 뚝 떨어지는 나이에 혓바닥을 콕콕 찌르며 등장해
미각의 존재와 기쁨을 일깨운다.
찬이 변변치 않은 밥상을 마주할 때도 맛의 감각을 절정에
빠뜨려 가끔씩 온몸을 소용돌이치게 만든다.
돌돌 말아 맛보는 알싸함은 나의 밥도둑 리스트에 추가된다.
세상의 젓국에 절어 파김치가 된 몸이 소금에 기죽은 파와
케미를 이룬다.
매운 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갑자기 누군가가 떠올랐다.
하얀 쌀밥에 몇 가닥 척척 걸쳐진 어머니 마음.
부들부들 숨이 죽은 아들에게 쪽파 같은 꼿꼿함을
잃지 말라며 다독인다.
축 늘어진 내 몸이 다시 기운을 낸다.
극강의 맛으로 미각의 회춘을 선물한 파김치가 고맙다.

 

자기애

고흐 다음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뭉크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며 자기도취라 했다.
자기애는 스스로에게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위다.
가끔 자기만족을 넘어 자기도취에 빠질 때가 있다.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말로 위안 삼지만
요리사가 자기 요리에 만족하고, 도공이 자기가 빚은
도자기에 감동하는 순간 내리막길임을 명심해야 할 듯.

 

중년의 배신

암스테르담 공항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파리 문양을 그려 놓았더니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량이
훨씬 많이 줄었다고 한다.
스티커 하나가 사람의 행동을 바꾼 것이다.
남자들은 소변 볼 때 파리 스티커를 과녁 삼아 조준 사격을
하게 된다. 군대에서도 서서쏴 자세는 힘들다.
나이들어 빈뇨, 잔뇨, 세뇨의 힘없는 오줌발로 정조준하기가
만만치 않다. 오줌을 참다가 쏘아 본다.
검정 파리 앞에서도 맥 못 추는 힘, 중년의 쓸쓸한 시도.

 

카페

예순 나이에 접어들자 그녀는 조그맣고 예쁜 카페를 차렸다.
여성들의 오랜 로망인 카페 주인이 된 것이다.
창밖의 푸른 숲은 자기 집 정원인 양 펼쳐지고,
통창 아래 떨어지는 빗소리는 진리이자 힐링 그 자체다.
커피, 책, 음악, 예쁜 장식 소품들과 함께하는 이곳은
그녀의 쉼터, 놀이터이자 감성 곳간이다.
이런 장밋빛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숲이 종일 하얗게 보이거나 아예 안 보일 때도 있었다.
하루 매상을 고민하며 출근하고,
가게 접을 걱정으로 퇴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카페 5곳 중 1곳이 1년 안에 문을 닫고,
5년 동안 살아남는 곳은 5곳 중 1곳뿐이다.
카페를 접고 나니 그녀에게 사계절이 보였다.
이른봄 수양버들의 새잎과 삶의 바깥으로 이어진 여름 숲길,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단풍의 몸짓 등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착한 밥집

성지 순례가 신앙을 두터이 하듯
맛집은 내 배와 마음을 살찌운다.
37년 전통의 갓성비 맛집인 부산 조방 앞의 「한진식당」은
내 식욕의 성지다.
숭늉을 필두로 가자미조림 등 15가지 반찬의 7천원짜리
상차림은 혜자스럽기 그지 없고,
검정 뿔테 안경 여주인의 후한 인심은 여전히 은혜롭다.
소식을 다짐했건만
밥도둑 앞에 혀를 꿇고 개(?)걸스럽게 해치운다.
내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격렬하게 흔들어댔을 것이다.
격렬비열도가 밥상 위에 펼쳐진다.
내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은유, 격렬비열도.
사랑이 그리울 때 이 섬을 떠올리듯 집밥이 그리울 때
이 밥집을 찾는다.

 

다시 어버이날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내보냈다.’
-탈무드 금언

어버이날을 앞두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 ‘어머니’를 되뇌며
1년 전 사진을 추억한다.
아흔다섯, 스타벅스 최고령 시니어 모델을 꿈꾸진 않았지만
어머님이 손에 꽉 쥔 것은 커피잔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과 소중함, 삶에 대한 의지다.
그녀가 끝까지 놓지 않는 그 무엇을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바로 ‘사랑’이란 것을.

 

등 굽은 소나무

‘틀딱충’, ‘연금충’,‘할매미’… 이런 단어들을 들어보셨는지.
틀니 딱딱거리는 벌레, 연금만 축내는 벌거지,
매미처럼 시끄럽게 울어대는 할배와 할매들.
경로 우대로 지하철을 공짜로 이용하는 노인을
조롱, 혐오하는 단어다.
나도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젊은이들의 눈치가 보여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젊은 낙엽족’, ‘나도족’, ‘대형 쓰레기’, ‘바둑이’…
이 단어들 역시 ‘삼식이’처럼 집에 있는 노인을 이르는 말.
황혼에 접어든 자들이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TV 프로그램에 왜 빠져드는지 수긍이 간다.

 

2021.3 해운대

바다를 무척 좋아하던 친구가 하늘에 영원히 닻을 내렸다.
조문차 장례식장에 추모의 닻을 내려 잠시 정박한 우리는
다들 멍하니 말이 없다.
중년 넘은 나이의 회오와 회한 때문이리라.
바다는 표나지 않고, 물들지 않음을 믿는다.
칼로 동강나도 금세 아물고,
붉게 파도치다가도 마침내 푸르름을 되찾는다.
조문 후 우리들은 생의 돛을 한껏 올리며
다시 각자의 바다를 찾아 나섰다.

 

스토리

#피난길

두 살배기 아기가 배 불룩한 엄마 등에 업혀 피난 가던 중
총격으로 등에 업힌 아기는 죽고, 엄마는 살고,
배 속의 아기인 저는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언니 덕분으로 살아갑니다.

#소주병

집에서 암 투병 중인 친구 문병을 갔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 빈 소주병들이 수북합니다.
걱정이 되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자신이 마신 술이라고 답합니다.

소주 안주로 최고인 김광석 노래를 틀어놓고
절절한 사연들을 가슴으로 읽는다.
집집마다 크건 작건 십자가 하나씩은 벽에 걸려 있고,
밝은 얼굴 뒤에는 검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

비 그친 다음 날, 부산지하철 수정역 출구 앞 길가에
반짝 문을 연 간이 우산 수리점

고쳐 쓰면 자원
버리면 쓰레기
한 사람이 한 개 버리면
자그마치 오천만 개
우산 사랑 나라 사랑

가게 주인장 할아버지는 일제 때부터 전쟁과 가난을
경험하며 절약이 몸에 밴 애국자다.
이분을 우러르며 「우산 명장」 칭호를 마음으로 드린다.

 

골프채를 놓다

골프채를 놓고 펜을 잡았다.
푸른 들판 너머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골프에 매몰된 엄청난 비용과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은 대중화되었지만,
당시 특정 계층과 기득권의 전유물이라는 틀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들만의 언어와 문법이 주는 무력감에서 탈출해
문학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야인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골프에 이어 술, 승용차와
차례로 이별했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남들은 반문하지만
하나씩 지워나갈 때마다 새로운 창, 새로운 세상이
또 하나씩 열리고 있다.

 

전작주의자

전작주의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조리 읽는
독서법이다. 한때 나는 소설가 이병주의 전작주의자였다.
단편 「철학적 살인」을 접하고 이병주 마니아가 된 후
스케일 큰 아포리즘에 열광했다.

– 나폴레옹 앞에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
–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그의 입담과 필력을 흠모하여 오래전부터 책장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문사철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과 특유의 상상력을
요즘도 가끔씩 꺼내 본다.

 

평생 현역

작가들의 글쓰기는 결핍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결핍과 존재의 불안이라는 고단한 시절이 있었다.
나의 문학은 양심의 눈으로 현실과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과 낙서로 출발했다.
문장과 이리저리 부대끼다 보니 자연스레 문학적인 삶,
예술적인 삶으로 이어졌다.
원고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나는 거울을 보는 남자가 되어 백지라는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았다.
행간에서 길을 잃기도 했지만,
골방 같은 밀실에서 광장을 꿈꾸기도 했다.
그곳은 이제 감성 놀이터와 문화 곳간으로 거듭났다.
은퇴 걱정 없이 오늘도 끄적인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작가는 평생 현역이다.

 

에필로그 | 감사한 일

 

2022.12 화명생태공원

어설픈 사진과 글로 소통하고 교감함은 큰 기쁨이다.
매년 한 권씩의 책 출간 계획에 잡것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책을 내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새로운 창이 하나씩 생기고, 새로운 세상이 하나씩 열리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승이며,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모든 것이 예술임을 일깨워준
서투르고 부끄러웠던 시간들.
빛의 아름다운 형상을 그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사진이 하는 말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사진은 Foot Art, 발의 예술이기에 발품을 더 많이 팔겠다는
다짐으로 오늘도 낯설고 아름다운 길을 떠난다.

 

 

김병준 사진에세이
감춰진 꽃
The hidden flower

2023년 12월 1일 초판 1쇄 펴냄

 

지은이_ 김병준
펴낸이_ 신승열
펴낸곳_ 도서출판 덕유아침
등록번호_ 제2015-4호
주소_ 경남 거창군 거창읍 거창대학로72, BI센터 2204호
전화_ 055-942-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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