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학. [칼럼] 한국에는 왜 탐정(探偵) 직업이 없을까? 이데일리(필자 일부 수정). 2011.10.1.
추석 연휴 기간이던 지난 9월 13일, KBS에서 특집영화로 <조선 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방영했다. 조선시대에 웬 탐정(探偵)? 궁금해서 열심히 봤는데 영화 속 주인공은 내가 기대했던 ‘탐정’이 아니라 ‘특별수사 공무원’이었다. 내가 아는 탐정은 영국의 추리작가 코난 도일(Conan Doyle, 1859~1930)이 만든 셜록 홈스가 대표적이다.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을 읽으며 막연히 ‘탐정’이 되는 꿈을 꾼 적도 있다. 어린 나에게 홈스는 민간인 신분이지만 경찰 공권력이 전전긍긍하며 해결하지 못하는 복잡한 사건을 쾌도난마(快刀亂麻)하는 영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조선명탐정>의 주인공은 민간 탐정이 아니었다. 왕의 특명을 받아 사건의 내막을 은밀하게 파헤치는 ‘특별수사관’ 쯤이었니, 나는 요즘 말로 제목에 ‘낚인 셈’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결코 셜록 홈스와 같은 명탐정이 생길 수 없다. 셜록 홈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명탐정 코난>,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ristie)의 추리소설 등을 보고 스스로 명탐정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곳이 한국이다. OECD 국가 중에 거의 우리나라만이 탐정이라는 직업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탐정이라는 명칭마저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탐정으로 활동하는 민간조사관이 5만 2천명이고, 영국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탐정 직업을 갖고 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약 4천명이 탐정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일본에서도 종사자 수는 알 수 없지만 민간조사업체가 약 3900개에 이른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탐정이 하나의 직업군으로 어엿이 자리 잡고 있다. 이와 달리, 탐정 직업이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탐정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소설이 인기를 끄는 게 신기하다.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탐정 서비스의 수요가 적은 게 아니다. 극장 관객 744만 명을 끌어들여 2011년 최고 흥행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는 <써니>에서 주인공은 오래 전의 여고 동창생을 찾기 위해 불법인 줄 알면서도 흥신소를 이용하는 장면이 있다. 일종의 암시장 거래인 셈이다. 당연히 이런 거래는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며, 의뢰자나 의뢰 대상자의 사생활 침해와 개인정보의 악용 가능성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약(藥)을 구하려다 독(毒)을 얻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는데도 사람들이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를 찾는 이유는 경찰 행정 서비스에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찰 행정은 공익을 앞세우고 보편적 서비스를 지향하기 때문에 국민 개개인의 니즈(needs)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한계가 있음이다. 우리가 국가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정부의 공권력을 인정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까닭은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개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따라서 국방(國防)과 치안(治安)은 국민으로부터 공권력을 위임받은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제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필수 서비스이다. 여기서 국방은 논외로 하고 치안 서비스만 보면, 문제는 사람마다 처해있는 상황이 다른 탓에 필요로 하는 치안 서비스의 양(量)과 질(質)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아 또는 실종자를 찾는 사람이나 억울하게 사건에 휘말려 결백을 입증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 경찰 수사 서비스는 속도나 전담시간 등에서 태부족으로 느끼기 마련이다.이렇게 정부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 때에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 그 부족분을 민간시장에서 자유롭게 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부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경비업법’을 통해 민간경비업무는 인정하면서도 탐정과 같은 민간조사업무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라도 민간조사업무를 합법화해야 한다. 불허한다고 해서 현실적인 수요가 없는 것도 아니니 지하시장 거래를 양지로 끌어 올려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약 3000건의 미아(迷兒) 사건이 발생한다. 미아를 포함한 실종 사건이 매년 6만 건 내외 발생하고 있으나 경찰만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고 미제(未濟) 사건도 쌓여가고 있다. 실종자 데이터베이스(DB)의 문제, 담당 수사관의 주기적인 부서 이동 등 행정시스템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공익침해 사건을 우선하는 경찰행정의 특성상 실종자 가족들의 애타는 속을 달랠 수 있을 만큼의 시원한 서비스를 공급할 수 없다. 공적 서비스의 부족을 시장적 해법으로 보완해야 하는 이유이다. 민간조사제도는 허용되지 않고 공적 서비스는 태부족하다보니 잃어버린 아이를 부모가 직접 나서 찾겠다고 직업도 버리고 가정은 풍비박산된 채 전국을 헤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움을 넘어 정부의 ‘제도 실패’에 분노마저 느끼게 된다.어느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실종아동 1명을 찾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손실비용이 5억 7천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사회적 손실비용도 줄이고 실종자 수색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조사에 전문 역량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건을 의뢰할 수 있도록 민간탐정제도를 조속히 도입하기를 거듭 촉구한다. 그렇게 하면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새로운 산업, 일자리가 창출되는 부수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관건은 제도 도입에 책임이 있는 국회에 달려 있다. 이 문제는 이미 1999년부터 논의되어 왔던 사안이고, 18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행정안전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그러나 법무부는 관련 제도를 꼭 도입해야 한다면 경찰청이나 행정안전부가 아니라 법무부 소관으로 해야 한다 하고, 변협은 변호사 시장 잠식을 우려하면서 민간조사업을 변호사의 업무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국민의 필요와는 무관한 논쟁을 일으키며 법안심의를 지연시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미제(未濟)사건은 늘어나고, <살인의 추억>(2003), <그 놈 목소리>(2007), <아이들>(2011)과 같은 불행한 영화의 리스트도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