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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BC 100, 로마 출생
  • BC 69, 재무관. BC 65, 안찰관(按察官). BC 63, 법무관 등 여러 관직 역임
  • BC 60,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동맹(三頭同盟)[1] 체결
  • BC 59,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관직인 執政官(Consul)에 취임
  • BC 58~52, 갈리아 전쟁으로 게르만족 평정
  • BC 53, 크라수스 사망, 삼두동맹 파기
  • BC 49, 원로원의 명령을 거역하고 루비콘 강 도하, 폼페이우스와 내란 상태 돌입
  • BC 48,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 격파
  • BC 47,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즉위시킴
  • BC 44, 브루투스 등에 의해 암살당함

시대적 배경

이탈리아 반도의 일개 소국이었던 로마가 끊임없는 팽창을 통해 세계 제국으로 도약하기 전야

주변 강국인 이집트, 페르시아 등의 기력이 쇠하고 게르만족은 아직 야만 상태로 지중해를 둘러싼 유라시아 제국 건설의 호기


성장 과정

귀족 출신이었으나 조상 중 명성을 얻은 이는 없었음

대담한 용기와 언변, 그리고 뛰어난 지략을 통해 스스로 정치적 입지를 굳히며 성장.  주로 선거를 통해 관직을 획득했는데, 설득력 있는 웅변술과 민심을 읽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 민중의 인기를 독차지

청년 시절에 권력자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젊은 시저를 제거하고자 노력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 청년은 아이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마리우스(당시 거물급 정치인)가 들어 있다.”고 응답


주요 업적

‘갈리아 원정’으로 오늘날 유럽 지역을 로마의 판도 내로 흡수

또한 선진문명국이던 이집트를 로마 영향력 내로 포섭하고, 불안한 삼두정치 시대를 종식시킨 절대 권력자로 등장, 향후 제국 성립의 기초 형성


후대에 미친 영향

로마제국의 찬란한 문명은 서양 문명의 원류가 되었으며, 특히 ‘갈리아 전쟁’[2]으로 현재의 유럽 지역에 로마문명을 전파, 서유럽 사회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

최초의 실질적 황제로서(유럽의 始皇帝), 이후 유럽의 황제의 칭호는 그의 이름으로부터 파생: 독일 카이저(Kaiser), 러시아 차르(Tsar) 등


리더십 특성

① 곤경 속에서도 용기와 담력을 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대담함과 자존심을 발휘

청년 시절 해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해적들이 몸값으로 20달란트[3]를 요구하자, 스스로 50달란트로 올리라고 요구

38일 간 감금되어 있는 동안 해적들을 하인처럼 부렸으며, 야만인이라고 욕하고 석방된 후 모두 토벌하겠다고 공언. 실제로 석방된 뒤 밀레투스의 군병을 소집, 자신을 감금했던 해적 대부분을 생포

연설과 문장에 뛰어났으나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뒤에는 웅변술에 시간을 투입하지 않았으며, 간결하지만 강력한 연설을 함

시저의「갈리아 원정기」[4]는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로마 군인의 기상이 살아 있는 문장으로 높이 평가

de-bello-gallico

시저는 젤라 시 부근에서 소아시아왕 파르나케스를 속전속결로 쳐부순 후 로마의 친구에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단 세 마디만을 편지에 적어 보냈다고 함

② “로마의 2인자보다는 야만족의 추장이 되겠다.”

작은 조직의 리더가 큰 조직의 참모보다 어렵다고 생각

시저가 알프스를 넘어 소수의 야만족이 사는 황량한 마을을 지날 때 동행하는 부하들이 이들을 멸시하며 “이런 곳에도 리더가 되려는 경쟁이나 상호간의 반목질시가 있을까?”라고 묻자 시저는 “로마의 2인자가 되기보다는 야만족의 추장이 되고 싶다.”고 대답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과 덕목은 유사함을 강조

강한 자에게는 거칠고 오만했으나, 부하들에게는 세심하게 마음을 씀

행차시 노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농부의 오두막에 피신하게 되었을 때 한 사람만 쉴 수 있는 방밖에 없자, 시저는 “명예에 관한 일이라면 강한 자에게 양보하겠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약한 자에게 양보해야 한다”며, 자신의 부하 오피우스를 방에서 자게하고 자신은 문간 처마 밑에서 밤을 새움

③ 결단력과 스피드 군의 主장비를 창에서 칼로 바꿈

운명을 결정한 루비콘 강 도하에서 시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로 자신의 결단과 그에 따른 역사적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표명[5]

정적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손을 잡고 시저의 군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시저는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쿠데타를 감행

로마의 국익, 자신에 대한 평판 등 모든 요인들을 장시간 검토했으나 결론이 서지 않자 결국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거사 단행

시저의 로마 군단은 속도를 중시, ‘필라(pila)’라는 두 개의 투창과 ‘글래디엄(gladium)’이라는 단검을 통해 스피드 제고

투창을 던져 적 보병의 방패에 꽂히면 그 무게 때문에 방패를 끌어내려 무방비 상태로 만든 후, 적군에게 신속하게 다가가 단검으로 육탄전을 전개

단검을 효과적으로 휘두르기 위해 병사들의 오른쪽 공간을 6피트 정도 비웠으며, 병사들은 이 공간을 위해 各列을 엇갈리게 함

밀집대형을 중시한 그리스군은 사리사(Sarisa)라는 장창을 들고 ‘고슴도치 대형’을 유지. 밀집대형 유지가 곤란한 복잡한 지형에서 기동성을 잃고 심각한 약점 노출

시저는 항상 예비부대를 만들어 비상상황에 대비

로마군은 병력 교체작전 훈련을 철저히 받았고, 그에 따라 하나의 대열을 다른 대열이 교체해 새로운 추진력을 얻는 전술을 구사

가장 완력을 필요로 하는 선두대열에는 젊고 잘 훈련받은 병사들을 배치하고, 후미 트리아리에(예비대)에는 나이 든 병사들을 배치. 트리아리에는 속전속결로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만 마지막에 투입되어 선두대열을 추가 지원


[1] 삼두동맹(三頭同盟, triumvirate): 파벌 중심의 원로원에 대항하여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시저 세 사람이 정치상 서로 이해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밀약한 동맹. 집정관인 시저의 권력과 폼페이우스의 권위와 크라수스의 부(富)가 결합하여 정권을 독점. 2차 삼두정치는 BC 44년 시저 암살 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국가재건을 위한 3인 위원’으로 활동(BC 44~36).

[2] 갈리아 전쟁(Gallic Wars): BC 58∼51년 로마의 장군 시저가 갈리아를 정복한 전쟁. 발단은 갈리아인들이 부족 간의 내분에 대한 개입을 시저에게 요청. 이 전쟁으로 갈리아 전 지역이 로마의 영토가 되었으며 평화가 성립, 막대한 富를 차지한 시저는 정치적·경제적 실력을 강화했으며, 로마는 일개 도시국가에서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기초를 다짐.

[3] 달란트(dallant): 성경시대 화폐단위로 달란트와 데나리온(denarion)이 존재. 1데나리온은 군인이나 일꾼들의 하루 일당에 해당.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16년 간의 품삯에 해당. 따라서 1달란트를 현재 화폐가치로 계산하면(일당을 7만원 으로 가정), 약 4.2억 원.

[4]「갈리아 원정기」: 8권으로 구성. 제7권까지는 시저 자신이 쓴 것이고, 제8권은 그가 죽은 후 부하 히르티우스가 집필. 묘사는 간결 웅혼하며, 문학작품으로서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갈리아인, 게르만인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

[5] BC 49년 1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함으로써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보수파와 내전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