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672, 황제 알렉세이[1]의 14째아들(후처 소생)로 출생
- 1682, 10세 때에 즉위했으나 궁중혁명[2]으로 크렘린에서 추방되어 시골로 이사
- 1689, 실권 장악
- 1697, 서유럽 사절단 파견,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직공으로서 포술․조선술 등을 습득, 귀국 후 서구화 위주의 개혁을 진두지휘
- 1700, 스웨덴과 북방전쟁 발발, 20년간 전쟁 끝에 승리
- 1721, 원로원이 대제(Peter the Great) 칭호 부여
시대적 배경
1480년까지 지속된 2백 년 동안의 몽고지배를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시점
1612년 로마노프 왕조가 출범했으나 17세기말까지 유럽 변방의 야만국가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시점
성장 과정
시골마을에서 자라면서 정규교육조차 접하지 못했지만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신분에 따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짐
소년시절부터 항구, 바다, 외국인(서구인)을 접하면서 글로벌 마인드 습득
대포, 조선 등 공업 관련 실용기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으며 특히 외국인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배우는 것을 좋아함
주요 업적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발트 해로 나갈 수 있는 不凍港(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확보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달성하여 서유럽 열강에 필적하는 군사강국으로 발전시킴
후대에 미친 영향
과감한 서방정책으로 러시아를, 아시아가 아닌 유럽의 일원으로 만듦
북방전쟁 시 스웨덴 군을 평원으로 유인한 전략은 이후 나폴레옹, 히틀러가 재현
리더십 특성
① 직설적인 성격, 사물을 꿰뚫어 보는 직관
세련된 매너나 교양은 부족했으나, 직설적이면서도 사물을 꿰뚫어 보는 직관을 보유
격의 없고 소탈하여, 육체노동을 즐겨 했으며 근로자, 기술자 등 하층계급과 대화하기를 좋아함
특히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직접 만나본 후, 배경이나 성분이 의심스러운 인물도 과감하게 등용
② 신분을 무시한 업적주의 관철
신분, 출신성분을 배제한 철저한 업적주의 인사를 평생 실천
황제의 권력을 활용하여 기존 신분제도의 높은 장벽을 깨뜨리고 ‘벽 없는 사회(borderless society)‘를 구현
- 계층에 무관하게 인력을 뽑아 쓰고 공적에 따라 작위를 내림
- 황제 자신이 가장 낮은 계급부터 군 경력을 시작
- 멘쉬코프(Menshikov) 공작은 요리사 출신이었으며 세무청장 쿠르바토프(Kurbatov)는 농노였음
- 러시아 역사상 평민에서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이 가장 빈번했던 시대
당시 신분상승한 신진세력들이 변화 주체(change agents)가 되어 구체제로 돌아가려는 反개혁을 저지하고, 러시아의 근대화를 앞당김
“신분이 아니라 직무와 업적이 우선하는 사회”는 표트르 대제 이후 1백 년 뒤 다시 세습귀족사회로 퇴보
인재확보, 특히 해외 기술인력 확보에 주력
1697~1698 서유럽을 방문한 후 귀국 시 1천 명의 전문기술 인력을 유치. 해외인력 확보는 이후로도 지속
그는 서유럽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력 강화의 수단으로 간주 (증국번의 中體西用과 유사)
국력 증진을 위해 이른바 ‘공무원’ 제도를 강화
표트르 대제는 에티켓과 매너를 중시하여 서구의 모델을 도입하고 실제 만찬회를 통해 신하들에게 전수
당시 러시아는 에티켓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공공장소에서 침 뱉기, 몸 긁기 등을 전면 금지. 러시아 특유의 구레나룻 수염을 금지하고 스스로 맨 먼저 면도. 특히 여성에 대한 에티켓과 신사도의 준수를 강조
③ ‘부동항 확보’에 국력을 결집
국가의 방향을 ‘부동항 확보’로 명쾌하게 정의하고 모든 국력을 동원
이제까지 타타르(몽고의 일족)와의 투쟁으로 동쪽을 바라보던 국가의 방향을 서쪽으로 통일하고 ‘부동항 확보’를 위해 국력을 결집. 어렸을 때부터 바다와 서구에 대한 동경을 키워온 결과
얼지 않는 바다를 획득하기 위해 주변국들과 전쟁을 단행
- 對 터키(크리미아 타타르 전쟁, 1695~1696) → 아조프 해
- 對 스웨덴(북방전쟁, 1700~1721) → 발트 해

재위기간 중 단 2년을 제외하고는 항상 전시. 부동항을 향한 그의 의지는 마치 얼음바다 속의 돌고래가 숨구멍을 찾듯 절박
북방전쟁의 승리로 숙원인 부동항 확보(발트 해 연안), 새로운 부동항에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여 → 페테르부르크(Peter’s Burg)
발트 해 확보를 위한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러시아의 광대한 평원을 이용한 후퇴전략을 처음으로 구사
지속적인 후퇴로 스웨덴군을 러시아 내부로 계속 끌어들여 병참선을 연장시키고, 병력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 天時와 地形을 십분 활용한 러시아군 전략의 원형을 제공
후일 쿠두조프가 나폴레옹을, 스탈린이 히틀러를 격파했던 전략의 원조
연이은 전쟁을 뒷받침할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기업활동을 적극 장려
기술, 노하우를 가진 외국인을 러시아인에게 연계시켜 기업활동을 장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이를 중개하고 적극적으로 자금과 인력을 지원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지주들이 농노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여 농업인력을 광산, 제조업으로 이동시킴
이들 기업은 진입, 퇴출이 자유로운 오늘날의 자유기업이라기보다는,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일종의 국영기업. 표트르 대제는 이들을 통해 러시아의 생산성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고 수출을 증대시킴으로써 전쟁 재원 확보
[1]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ksei Mikhailovich, 1629∼1676): 러시아 황제. 치세의 초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에서 시민 봉기가 빈발. 正敎의 분열을 초래한 니콘의 교회개혁을 이용하여 敎權에 대한 帝權의 우위를 확립. 또한 적극적 대외정책을 취함으로써 폴란드 스웨덴 투르크와 싸웠으며, 우크라이나를 합병. 이는 훗날 표트르 1세에 의한 서구화와 제국 건설의 기반이 됨.
[2] 궁중혁명(宮中革命): 1682년 표트르는 10세 때 황제에 즉위했으나 이복 누나인 소피아가 궁중혁명으로 실권을 장악, 이반 5세를 제1황제로 삼자 표트르는 제2황제가 되었고,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의 마을로 쫓겨가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