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해부] 한국사회의 아젠다 메이커 삼성경제연구소. 월간중앙. 2004.11. 원문보기
주진 월간중앙 기자
고객이 원하면 지옥行도… 소비자 지향 연구로 간판 싱크탱크 급부상
‘세리(SERI)’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삼성경제연구소
평범한 직장인에서부터 오피니언 리더, 정책 입안자, 기업CEO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SERI’라는 광산에 지식을 캐러 몰려든다. 이를테면 ‘지식 러시(Knowledge Rush)’인 셈이다. ‘사이버 SERI’ 회원만 80만 명. 급변하는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지식산업의 대중화에 성공하고 ‘상상력발전소’ ‘지식 테마파크’로 사랑받는 SERI가 설립 18년 만에 국내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으로 성장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람부터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SERI의 모든 것. |
국내 3대 광고회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K사에서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김현성(32) 대리는 매주 광고 아이템회의를 준비하거나 기획서를 쓸 때 꼭 삼성경제연구소(SERI: Samsung Economic Research Institute) 홈페이지(www.seri.org)를 찾는다. 광고시장은 그야말로 경제동향이나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사소한 아이템 하나를 찾더라도 시장조사는 필수다. 클라이언트인 기업의 광고가 성공하려면 우선 업계 동향, 매출 현황, 소비자 선호도, 유행 트렌드 등 각종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면 김씨는 허둥지둥 ‘세리’부터 뒤지기 시작한다.
“세리(SERI)에 가면 정말 없는 게 없어요. 궁금한 건 콕콕 집어 주죠. 일을 하다 막히면 무의식중에 세리를 찾게 돼요. 어린 시절 잘 보던 만화영화 있잖아요? 마법사 ‘요술공주 세리’. 저에게는 SERI가 요술 부리듯 척척 일을 해결해 주는 요술공주 세리나 마찬가지예요.”
김씨는 주위 동료들도 모두 자신처럼 ‘세리’를 애용하는 마니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직장인들이 세리를 즐겨 이용하는 이유로 ▷분류가 잘되어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고 다양한 정보가 많으며 ▷이슈에 맞는 시의적절한 연구보고서들을 제때 받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회원으로 가입하면 이들 대부분의 자료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지난 9월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직장인 음주 행태와 기업의 대책’이라는 이색 연구 보고서를 반영해 주류회사 광고 아이템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연구가 연구로만 끝나지 않고 그 결과물이 기업 일선 현장에까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여당 중진급 의원의 보좌관인 신모(37) 씨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매주 발행하는 ‘CEO Information 연구 보고서’를 꼬박꼬박 챙겨 본다. 그리고 필요한 자료는 스크랩해 두었다 의원에게 페이퍼를 제출하기도 하고, 입법 활동이나 정책 입안 활동을 위한 기초 자료로 쓰기도 한다.
“SERI의 연구 보고서들은 정치인이나 보좌진에게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현재의 이슈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죠. 세계의 흐름과 전망, 경제 동향을 수시로 점검하고 우리 사회의 현상을 진단하는 데 SERI 보고서는 제게 나침반이 되어 줍니다.”
SERI는 지식계 요술공주?
해당 상임위가 ‘통일외교통상위’인만큼 남북 관계 및 국제 문제 관련 보고서들은 꼭 챙겨 본다는 신씨는 17대 국회 들어 처음으로 하는 국감을 잘 치르기 위해 SERI 자료들을 참고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SERI는 일반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기업 CEO, 오피니언 리더, 정부 부처 실무자, 국회의원 보좌관 같은 정책입안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식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SERI가 ‘디지털 삼성’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인터넷 등 새로운 전파 수단을 활용해 지식정보 대중화를 추구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인터넷 홈페이지 SERI(www.seri.org)는 국내 최고의 지식정보 홈페이지로 각광받으며 2004년 10월 사이버 회원 85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2001년에는 세계적 인터넷 리서치 기관인 알렉사(http://www.alexa.com)가 실시한 조사에서 헤리티지 재단, 브루킹스 연구소, 노무라 연구소 등 세계적 연구기관을 제치고 싱크탱크 부문 1위 사이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알렉사는 ‘SERI는 정보 공개화 방침으로 축적된 연구 자산을 신속 정확하게 외부에 공개하는 등 고객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SERI는 세계뿐 아니라 이미 국내 싱크탱크 부문에서도 점유율 74%를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 대표 경제경영 지식 포털로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고 있다.
방대한 지식·정보의 보고(寶庫)인 사이버 SERI를 잠시 살펴보자. 우선 ‘Knowledge@SERI’ 코너. SERI의 ‘CEO 인포메이션’ ‘SERI경제포커스’ ‘글로벌 이슈’ 등 연구 결과물 및 각종 세미나 자료들이 담겨 있다. 지난 1995년부터 매주 펴내는 ‘CEO 인포메이션’은 주로 사회 이슈나 현실을 진단한 내용으로, SERI를 대표하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보고서의 주요 독자층은 기업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일선 실무자들. 업무상의 문제 해결을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시의적절한 내용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제공한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극복을 위한 경제 개혁 방안을, 지난해에는 ‘부동산 등 자산 버블’에 대한 경고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최근에는 농업·농촌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Knowledge@Web’이라는 코너는 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검색 노하우를 활용해 전 세계 지식자원을 수집하고 분류한 유익한 정보를 국내외 자료 브리핑, 토픽 뉴스, 채용 정보, 콘퍼런스, 전문가 정보 등으로 나누어 서비스하고 있다. SERI는 또 경제·경영·정책·정보통신기술(IT) 분야 전문가들이 지식을 교환하고 창출하는 사이버 연구 커뮤니티 포럼도 함께 운영중이다. 10월 현재 1,700여 개의 포럼이 개설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이버 인기 강사 배출 창구 역할도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의 국정 아젠다 설정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최근에도 참여정부를 위해 ‘국민소득 2만 달러로 가는 길’ ‘국정과제와 국정운영에 관한 아젠다’를 제시했다.
SERI 회원들은 사이버상에서뿐만 아니라 가끔 삼성경제연구소가 있는 서울 용산 국제센터빌딩 지하 맥주집에 모여 모임을 갖기도 한다. SERI 회원이 되면 매일 자신의 책상에 앉아 SERI.org에 업데이트되는 자료를 메일로 받아 보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물론 무료 메일링 서비스다.
온라인 동영상 유료 사이트인 ‘SERI CEO(www.se riceo.org)’는 연회비 120만 원, 그럼에도 회원이 4,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기업 임원급이 주 회원인 이 사이트는 시장 흐름, 기술 진보, 마케팅 추세 등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최고 기업 CEO들의 ‘상상력발전소’로 자리잡고 있다. 연구소 연구원과 각 분야 전문가들이 5~7분짜리 짧은 동영상 강의를 통해 급변하는 기업환경 속에서 경영 위기에 대한 조기 경보는 물론 경영 안목과 역량을 높이는 체계적인 학습, 새로운 사업 기회 포착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게다가 바쁜 일과로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경영층만을 위한 라이프 스타일 정보도 제공한다. 골프, 건강, 이미지 컨설팅, 신(新)손자병법, 대중문화 읽기, 와인 이야기 등 가벼운 콘텐츠들도 CEO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다.
최근에는 ‘이순신’의 열풍을 반영한 듯 서강대 경영학과 지용희 교수의 ‘이순신의 리더십’ 강좌가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눈높이 맞춤 서비스가 이 사이트의 강점인 셈이다. 때때로 이 사이트를 통해 유명 인기 강사가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골프 클리닉 코너를 진행하는 김광호 씨는 일약 스타 강사로 떴고, 이미지 컨설턴트 이종선 대표는 <따뜻한 카리스마>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최근 오픈한 ‘SERI GLOBAL(www.seriglobal. org)’은 정구현 소장이 목표로 내건 ‘한국 경영 사례의 세계화’를 전파할 사이버 전진기지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EBIT Zone(www.ebitzone.org)’은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지식의 공유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사이트로, 경제·경영·산업·기술에 대한 전 세계 최신 뉴스와 관련 사이트를 소개한다.
이밖에 출판물로는 국내 저자들의 지혜와 경륜을 담은 ‘SERI 연구 에세이’ 시리즈가 있다. 지금까지 11권이 발간된 연구 에세이는 색다른 주제와 감각이 돋보이는 기획물이다. <지식점프> <영어공용론> <동북아로 눈을 돌리자> 등이 있다. 이 연구 에세이 시리즈는 출간에 뜻이 있어도 복잡한 출판 과정과 판매에 따르는 부담으로 주저하던 지식인들에게 출판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와 직접 만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열어 준다. 세계인에게 한국경제의 주간 동향과 이슈를 진단, 전달해 주는 영문 보고서 도 매주 발행한다.
‘생각은 높게, 발은 현실에’
삼성경제연구소는 1986년 삼성생명 부설 연구 기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설립 초기에는 임동승 소장을 중심으로 삼성그룹의 싱크탱크 역할을 담당하면서 점진적으로 기업 경영 노하우를 중소기업에 전수하고, 정부에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등 한국의 싱크탱크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1995년 제2대 최우석(현 부회장) 소장이 취임하면서 연구소는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생각은 높게 하되 발은 현실에서 떼지 않는’ 최 소장의 ‘실용주의’ 개혁 마인드는 당시 지식정보화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둔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었다. 조그마한 기업 연구소에 지나지 않았던 삼성경제연구소를 ‘한국 최고’라는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도 바로 그다.
최 부회장은 중앙일보 경제부장·편집국장·주필을 지낸 언론인 출신. 30여 년간 현장에서 발로 뛰며 실물경제를 몸으로 체험한 감각으로 연구 과제와 아젠다를 직접 챙기기도 했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다져진 통찰력과 직관력, 한번 목표가 정해지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추진력. 그의 카리스마는 연구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앞서 말한 ‘이론과 현장을 연결하는 현장 밀착형 연구’와 ‘지식인의 사회적 사명’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기업·정부·대학 등에 정보를 제공하던 틀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에게도 SERI의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 공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눈을 돌린 매체 수단이 바로 출판과 인터넷이었다. SERI가 최초로 출간한 책은 ‘초(秒)관리’라는 혁신운동을 통해 성과를 거둔 삼원정공의 사례를 쉽게 풀어 쓴 ‘1초를 잡아라’였다. 이 책은 1993년 1쇄를 찍은 후 3년 동안 22만 권이 팔려나갈 정도로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SERI를 대표하는 주간 이슈 진단지 , 인터넷 홈페이지 ‘seri.org’를 만들어 일반인에게 다가갔다. 몇백 장짜리 이론만으로 가득 찬 보고서에서 탈피해 부피는 최대한 얇게, 내용은 알기 쉽게 풀어 쓴 트렌드성 보고서를 선보인 것.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어느새 삼성경제연구소가 하나 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SERI의 연구는 철저한 ‘고객 서비스 마인드’로 무장되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은 “고객이 원하면,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우리는 지옥에라도 간다”고 설명했다. “고객이 없는 연구는 아무리 좋은 연구라 할지라도 얼마 가지 않아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된다”는 것. 그만큼 현실을 바탕에 두지 않는 연구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윤 부사장은 특정 고객이 없어도 연구에 임할 때는 늘 가상의 고객을 설정하고 진행한다고 덧붙였다.
“가령 이 연구는 40대 화이트칼라 남성을 대상으로 한다고 미리 정하죠. 고객을 설정하고 보고서를 준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매우 큰 차이가 나요. 고객으로 하여금 보고서를 끝까지 읽게 하려면 고객의 성향을 파악해 거기에 정확히 맞추는 것이 SERI의 서비스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사회 아젠다 설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
지난해 9월 취임한 정구현 소장은 SERI 글로벌화를 차기 목표로 내걸었다.
설립 18년 만에 한국 최고의 민간 싱크탱크로 자리잡은 SERI. 이제는 아시아와 세계 최고의 민간 경제연구소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난 2003년 9월 취임한 제3대 정구현 소장은 “경제연구소도 이제는 세계화돼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며 “한국적인 경영 사례를 세계화하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그와 더불어 기업편향적 연구소를 지양하고 국가사회 발전을 위한 연구에 역량을 집중해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의 국정 아젠다 설정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전인 지난해 2월 중순, 삼성경제연구소는 연구원 70여 명이 투입돼 작성한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아젠다’라는 400여 쪽의 보고서를 노 대통령 당선자 측에 전달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국정과제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들을 제출한 바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에도 참여정부를 위해 ‘국민소득 2만 달러로 가는 길’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아젠다’를 제시했다. 노무현 정부는 핵심 국정과제로 선정한 ‘동북아 중심’ 프로젝트의 상당부분을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존하고 있다. 현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SERI의 보고서들을 정책 입안에 참고하는 셈이다.
지난 7월, 이해찬 총리는 최우석 부회장에게 국무총리실 공무원들의 교육 연수를 부탁했다. 삼성이 축적한 기업조직 혁신 사례를 벤치마킹해 정부 조직과 공무원들의 마인드를 대대적으로 혁신하겠다는 이 총리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총리의 부탁대로 SERI는 정부 공무원들에게 리더십, 조직 혁신 사례를 주제로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은 주로 참여자들의 능동적인 토론과 대화형 강좌로 이루어졌다. ‘만약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망한다면, 또는 망했다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명 ‘조직이 망했다’라는 시나리오를 설정해 10여 명씩 한 팀을 이루어 그룹토론을 진행했다. ‘망한 조직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또는 ‘조직을 망하지 않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 행동 수정뿐 아니라 조직 혁신 방안에 대해서도 조직원들 스스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교육 연수에 참여한 공무원들의 호응은 예상 외로 뜨거웠다.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조직 혁신 방안을 담은 아이디어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함께 연수를 받던 이해찬 총리도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했다는 후문. 이 총리는 기획예산처를 통해 전 공무원에게 연수를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그동안 감사원 공무원, 서울시 고위공무원, 그 외 무역협회 간부 및 직원들을 상대로 외부 위탁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재정경제부·기획예산처 등 정부 부처와 국민-주택은행 통합, 농-축협 통합, 카이스트, 한양대 등 수많은 기관에 대한 컨설팅도 했다. SERI는 이러한 컨설팅 부문 사업으로 연간 50억~60억 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삼성이 축적한 기업경영 사례가 정부기관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한 연구원은 “위탁교육을 진행할 만큼 연구소 인력이 많지 않은데도 외부의 도움 요청이 쇄도하는 실정”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 10월7일 목요일 오전 9시, 삼성경제연구소 8층 원탁회의실. 정구현 소장을 비롯한 SERI의 임원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에 열리는 임원회의. 회의에서는 최근의 정치·경제·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이슈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지난해 3월 초에도 외부에 발표할 ‘한국경제의 버블 가능성’이라는 보고서를 두고 3시간가량 설전을 벌인 끝에 ‘부동산은 이미 거품 발생, 주식시장은 거품 조짐’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기도 했다. 이 임원회의를 통해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과제들이 결정되거나 변경되는 일이 많다고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기술환경, 경쟁 여건이 급변하는 시대에 ‘범과 같은 스피드’와 ‘매의 눈과 같은 정확성’으로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발 빠른 준비와 대응만이 경쟁력이라고 믿는 임원진의 마인드는 연구원들의 연구 과정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조직 시스템 운영의 유연성으로 귀결되었다.
SERI는 한창 연구를 진행하다가도 다른 이슈가 터지면 과감히 접고 다음 프로젝트로 옮겨간다. 사회 흐름에 민감하게 대응해 시의적절한 보고서를 내놓는 것이 SERI 연구원들의 사명이자 목표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연구 주제별로 연구원을 선정해 과제를 진행하다 보니 전공과 소속을 넘나드는 연구원 운용도 이뤄진다. 어떤 사회적 이슈가 생겨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운영은 SERI의 경쟁력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창의적이고 부지런한 멀티플레이어
이렇듯 세태를 반영하다 보니 ‘경제’라는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내용이 보고서들을 메우고 있다. 그에 따라 연구원들의 전공 역시 매우 다양해졌다. 물론 경제연구소의 특성상 경제·경영학과를 졸업한 이들이 다수지만, 금속공학·물리학 등을 전공한 카이스트(KAIST) 출신이나 사회학·정치학을 전공한 인문·사회계열 출신도 있다. 과거에는 음대 출신도 있었다. 문화예술 분야의 주제도 다루다 보니 관련 전공자도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다양한 인력을 바탕으로 SERI는 ‘타이거우즈 신화와 경영에의 시사점’ ‘가수 서태지와 기업경영’ ‘히딩크 리더십의 교훈’ ‘직장인 음주 행태와 기업의 대책’ 등 골프·음악·스포츠·역사인물 등을 통해 다채로운 주제와 내용을 제공한다. 때문에 국내 연구소들 사이에서 SERI 보고서는 한마디로 ‘코카콜라’로 통한다. SERI의 보고서들은 입안 가득 알싸하게 톡 쏘는 맛과 시원한 느낌의 탄산음료처럼 하나같이 재미있고 대중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의 저변에는 ‘깊이가 없다’ ‘가볍다’는 비판도 깔려 있다.
SERI 연구원들은 이같은 비판에 공감은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SERI를 있게 한 경쟁력이라고 본다. ‘녹차’처럼 깊이 있는 아카데믹한 연구는 대학 연구기관이 수행하고, 민간 연구기관이라면 실용성과 합리성이 가장 큰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제학원론’에 나오는 이론 중심이 아니라 현장 정보가 담긴 보고서만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SERI 연구원들 역시 이론과 현실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에 빠져 있다. 주제를 넘나들며 현실에 맞는 트렌드성 단기적 보고서들을 작성하다 보니 타 연구소처럼 한 해 단위, 6개월 단위 등으로 진행하는 아카데믹한 주제의 장기적 프로젝트가 부럽다는 연구원들도 생겨나는 실정이다. 그래서 일부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한 연구원은 “일이 과중해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독자적인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떠한 연구 주제라도 고객이 요청하면 하루, 아니 1시간이라도 빨리 ‘나와라, 뚝딱’ 하며 보고서를 내놓아야 하는 SERI 연구원들은 한가하게 앉아 ‘깊이’ 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신문사의 특집부를 방불케 하는 연구소 풍토 속에서 신속 정확하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쉼없이 톡톡 튀는 창의적 아이디어로 무장해 연구 주제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SERI의 연구원들은 입사하면 보름 이상 에세이 쓰기, 번역, 책 요약 등 문장연습 교육을 받는다. 최우석 부회장은 언론인 출신답게 “아무리 핵폭탄 같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이를 운반할 미사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사람들이 알기 쉽게 표현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신입 연구원은 5년 정도 된 연구원에게 1대 1로 연구 방법, 보고서 작성 방법, 자료실 이용 등을 지도받는 이른바 ‘멘토(mentor)’ 제도에 의해 인재로 길러진다.
피 말리는 경쟁, 100등까지 등수 매겨
국책 연구기관이나 대학 인력과 비교해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신입 연구원들은 SERI의 교육 과정을 통해 3~5년이 지나면 국내 최고의 훌륭한 인재로 성장한다. 그 누구라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SERI의 조직풍토 속에서 이처럼 인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지고 만들어지는 셈이다. 최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임원과 고참급 연구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신입 연구원일수록 혹독하게 일을 시켜라. 사람을 키워야 조직이 발전한다. 연구원은 게을러지면 바보가 된다.”
현재 SERI의 연구원은 약 100여 명. 매년 10여 명의 신입 연구원을 수시 채용한다. 또, 연구원을 도와 프로젝트를 진행할 연구보조원(Research Assistant)도 상시로 채용한다. 연구원이 되려면 우선 1차 서류전형, 2차 면접 격인 세미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스스로 주제를 정해 소속 연구원들 앞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 세미나를 통해 철저한 실력 검증과 자격 여부가 판가름난다. 연구원들은 동료로서 함께 일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매우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거나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이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정식 연구원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1년 정도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다시 한 번 검증 단계를 밟는다. 1년 동안 실력을 테스트한 결과 자격이 미달하면 언제든 이별할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인 셈이다.
이러한 험난한 과정을 통해 정식 연구원이 됐다고 해서 결코 마음을 풀어놓을 수 없다. 연구원들은 해마다 피를 말리는 살벌한 경쟁 속에서 성장과 도태라는 부침(浮沈)에 시달린다.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실시하는 평가는 개개인의 성과급과 연봉 협상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고객이 유쾌한 ‘상상력발전소’
평가심사위원들은 큰 성과를 보여준 프로젝트에 좋은 점수를 주고, 프로젝트 리더들은 다시 팀 기여도에 따라 팀원들에게 점수를 차등 부여한다. 1996년부터 도입한 ‘맨데이(Man day – 연구원이 투입한 일단위 시간. 한 과제를 진행하는 데 하루를 일했다면 1맨데이가 된다)’라는 측정 제도는 연구원의 점수를 매기는 객관적 근거로 이용된다.
최종평가가 끝나면 전 연구원은 1등부터 100등까지 서열이 매겨진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연구원은 ‘S’로 분류된다. 평균점수는 B 제로(0)가 많으나, 최저 점수를 받은 연구원들은 통상 조직 내에서 도태되거나 다음에 진행되는 연구과제에서 좋은 팀에 합류할 수 없게 된다. 다른 연구원들이 ‘끼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이곳에서는 냉혹하게 적용된다.
연구원들이 좋은 연구 과제에 목숨을 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해 농사를 잘 지으려면 좋은 연구 과제 선택은 필수”라는 말이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불문율로 통한다. 그렇다 보니 ‘될성부른 떡잎’을 찾아 여기저기 프로젝트팀을 옮겨다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좋은 연구 과제라면 후배 연구원이 프로젝트 리더로 있는 팀일지라도 ‘끼워달라’고 로비하는 선배 연구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SERI다.
신입사원으로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해 올해로 11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동훈 수석연구원은 그야말로 극도의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리는 일상의 연속이라고 토로했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바로 옆의 선후배 동료가 나의 적이 될 수 있죠. 실적이 나쁘다고 해서 나가라고 하지는 않지만 결국 자기 발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히려 다른 조직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더 잘나가는 사람도 많죠. 최고의 경제연구소에서 최고의 인재가 되는 길은 너무나 버겁고 힘들어요. 조직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즉시 도태되고 맙니다.”
인사평가를 담당해온 윤순봉 부사장은 SERI의 평가 시스템에 대해 “연구소는 프로 게임이 존재하는 곳이고, 시장경제를 연구하는 곳이니만큼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는 곳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 “피를 말리는 SERI의 연구 작업을 이겨내려면 연구원들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지는 윤 부사장의 말이다.
“상상력과 호기심이야말로 응용연구를 하는 연구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건이자 에너지원입니다. 여기에 깊은 분석력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종합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돼요. SERI는 프로는 기본이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우리의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SERI에 가면 무한한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쾌한 즐거움이 있다. 문을 두드리면 누구든지 이 열린 공간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고,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다. SERI는 한마디로 ‘지식 테마파크’다. 그곳에서 앞선 연구, 열린 연구, 현장 연구를 통해 한국의 장밋빛 미래를 열어나갈 창의성과 꿈을 지닌 최고의 젊은 인재들이 눈부신 비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지식이 국력’이 되는 21세기 글로벌시대, 세계 지식산업의 메카로,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삼성경제연구소, SERI. 그 성공 신화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2004년 11월호 | 입력날짜 200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