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봉. 제2의 외환위기를 막기 위하여. 2001.4.27.
[목차]
- 제3세대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는다
- 제1세대 위기와 제2세대 위기
- 공적자금 투입과 재정적자
- 높은 실업률과 정치적 부담
- 정책의지에 대한 국제투자가들의 의심
- 외환보유고의 실질내용
- 최악의 시나리오가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
- 우리가 피해야 할 최악의 가상시나리오
최근 들어 제2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조심스레 거론된다. 정말 한국경제는 외환위기의 재발 가능성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인가?
먼저 결론부터 요약하자. 현재의 상태가 미래에도 그대로 지속된다면, 실제 확률은 지극히 낮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외환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위기의 유형은 우리가 1997년 말에 당했던 제3세대 외환위기가 아니라 그와는 다르게 제1세대 외환위기와 제2세대 외환위기가 결합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제1세대 외환위기는 재정적자와 같은 거시경제 문제로 인해 야기되며 제2세대 외환위기는 높은 실업률 같은 경제현안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새로운 유형의 외환위기는 재정적자 문제와 높은 실업률 문제가 겹치는 동시에 조만간 개막될 대선 정국으로 인해 한국경제의 바닥(場, field)이 크게 흔들리면서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굳이 외환위기 재발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우리가 외환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주요 원인을 미리 파악하고 사전에 길목만 지키고 있는다면 최악의 사태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제3세대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는다
먼저 외환위기가 재발한다 해도 1997년 말과 같은 제3세대 위기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충분히 학습했고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제3세대 위기의 촉발요인은 크루그만의 주장처럼 ‘헷징되지 않은 대규모의 외화표시 단기부채’다. 한국이 세계 금융시장 자유화의 와중에서 정책당국의 관리 감독 소홀로, 헷징되지 않는 외화표시 단기부채를 대규모로 안고 있던 상태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에 빠지자 위기가 한국에까지 전염된다. 국제투자가들은 한국에도 동남아와 같은 문제가 잠재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헤지펀드를 필두로 국제투자가들이 동남아로부터 자본을 철수하면서 같은 범주로 분류되어 있던 한국에 대한 투자액까지 한꺼번에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원화가 평가절하되자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를 풀어 환율방어에 나선다. 헷징되지 않은 외화표시 단기부채를 안고 있던 국내 단자회사들도 부채상환을 위해서 달러화 매입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원화가치는 더욱 폭락한다. 그로 인해 해외투자가들의 심리가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탈출 러시가 일어난다.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로 이를 막으려 하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IMF 측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보듯 감독당국이 금융회사에 대해 제대로 현상파악만 한다면, 그리고 해외로부터 부채를 들여오더라도 장기로 차입을 한다면, 단기로 차입하더라도 상당 부분을 원화로 계약한다면, 설사 달러로 계약하더라도 헷징만 해놓는다면 1997년 말과 같은 제3세대 외환위기가 한국에서 재발할 가능성은 없다.
2. 제1세대 위기와 제2세대 위기
만약 위기가 재발된다면 제1세대 외환위기와 제2세대 외환위기가 결합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제1세대 위기와 제2세대 위기에 대해 살펴보자.
1998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제1세대 외환위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먼저 러시아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규모의 재정적자가 발생한다. 그러자 국제투자가들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루블화를 대량으로 찍어낼지 모르며, 그러면 루블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중앙은행이 달러화를 매각하여 환율방어에 나설 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중앙은행이 달러를 매각하면 언젠가는 달러가 고갈되면서 달러가치가 폭등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달러를 사들인다. 그로 인해 달러가치는 실제로 폭등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은행이 루블화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달러 매각을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달러는 완전히 소진되고 결국 외환위기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제1세대 외환위기의 촉발제는 세 가지다. 하나는 재정적자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투자가들이 정책당국을 신뢰하지 않고 경제정책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외환보유고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통화당국이 환율방어에 나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992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제2세대 위기를 살펴보자. 먼저 출발은 영국의 높은 실업률이었다. 실업률이 높아지자 정책당국에 통화팽창정책을 펼쳐 실업자를 구제하라는 정치적 압력이 가해진다. 그러나 영국으로서는 조만간 출범 예정이었던 유럽통화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환율을 안정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만일 통화팽창정책을 하면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없게 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국제투자가들에게는 영국 정부가 통화팽창정책을 펼칠지 모른다는 의심이 증폭되었고 그즈음 소로스 같은 국제투기꾼들이 파운드화에 대한 공격에 나선다. 덩달아 국제투자가들도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할 것을 염려하여 파운드화를 대량으로 매각했고 파운드화의 가치는 급락했다. 이에 중앙은행이 개입하여 환율방어에 나서지만 결국 역부족으로 영국은 환율 방어를 포기하게 되고 유럽통화체제에서 탈퇴한다.
여기서 제2세대 외환위기의 촉발제는 네 가지다. 하나는 고실업 등 경제현안으로 인해 정치적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투자가들이 정책당국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로스 같은 투기꾼들이 개입했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외환보유고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제1세대 위기와 제2세대 위기를 결합하면 그 요인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대규모의 재정적자가 생긴다.
둘째, 실업률이 급증하여 정치적 부담이 된다.
셋째, 국제투자가들이 정책당국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넷째, 소로스 같은 국제투기꾼들이 개입한다.
다섯째, 외환보유고가 충분치 않다.
여기서 국제투기꾼의 개입이 없다 해도 위기가 발생하므로 핵심 요인은 네 가지다. 이를 차례대로 하나씩 살펴보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나 대응방안, 그리고 대응방안이 실행되지 않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검토한다.
3. 공적자금 투입과 재정적자
공적자금 투입과 재정적자는 현재의 부실과 빚을 미래로 넘기는 일이다. 외환위기 이전에 한국의 재정운영이 워낙 안정적이었다 해도 요즘 식으로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재정적자가 늘어나면 앞으로 경제운용상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공적자금 투입이 급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IMF의 고금리 처방 때문이다. IMF의 고금리 처방은 한계 기업은 물론 이익을 낼 수 있는 기업들까지 도산으로 몰고 갔다. 이는 금융기관 부실과 공적자금 투입으로 연결되었다.
둘째, 기업의 부실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경제외적인 원인도 여럿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만 보면, 한마디로 기업의 경쟁력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 년째 구조조정만 하다 보니 개혁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었고 기업으로서는 탈진 상태에 빠져 정작 경쟁력에 직결되는 기술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해외 마케팅 판로 개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셋째,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침으로써 공적자금 투입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외환위기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여러 문제는 그때그때 처리했으면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여러 가지 경제외적인 이유로 미루고 또 미루고 해서 가래로 막기에도 역부족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만일 벤처국가 정신에 입각해서 기동성 있게 일을 처리했다면 미래로 이연시킬 빚이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넷째,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늘리는 과정에서 공적자금이 더 늘어난 측면도 있다. 외환보유고와 공적자금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깊은 관련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위의 원인들을 거꾸로 돌리면 처방이 된다.
첫째, IMF가 주도한 고금리 정책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둘째, 경제정책의 초점을 조속히 구조조정에서 경쟁력 강화로 돌려야 한다. 경쟁력이 강화되면 구조조정 문제는 대부분 저절로 해결된다. 우리나라에 포항제철과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10개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일이다. 지금과 같이 과거의 누적부실을 치우는 구조조정은 아무리 잘해봐야 전체 파이가 커지지 않는 제로섬게임이다. 그보다는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승산이 있다.
셋째, 경제운영의 타이밍을 맞추어야 한다. 실기를 하게 되면 작은 구멍 한 두 개로 인해 둑이 무너진다는 우화 속의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경제 외적인 이유로 실기를 하게 되면 그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다. 1997년의 예를 볼 때 2002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대선 정국이 개막되면 경제논리는 당연히 정치논리에 눌려 실종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넷째, 외환보유고를 늘려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서 다시 살펴보자.
결국 이상의 네 가지를 종합하면 재정적자가 줄어들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 속으로 첫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4. 높은 실업률과 정치적 부담
다음은 실업률 문제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실업률의 절대수준이 높다는 문제와 그것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문제다.
고실업 문제와 관련해서 수많은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실업급여가 올라가고, 최저생계보장제도가 만들어지고, 실업자 교육이 강화된다. 청년 및 고령자 실업대책이 마련되고 여성사업가 지원책도 만들어진다. 그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업대책이 강구되고 있지만 대개 재취업이나 창업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실업자들의 ‘마음 관리’ 수준에 그치고 있다. 국가재정이 무한정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해법은 단 한가지다. 정공법으로 국가경쟁력과 산업경쟁력 그리고 기업경쟁력을 높여 기업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업률 자체보다는 실업률이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1997년 상황에서는 정치인들 스스로 정치적인 부담을 만들어갔다. 노동쟁의가 생기기만 하면 대선주자들이 신속히 달려가 표밭을 일구었다. 그리고 표 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어떤 행위나 결정도 하지 않았다. 하반기부터 시작될 대선 정국엔들 이런 모습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 속으로 두 번째 발걸음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5. 정책의지에 대한 국제투자가들의 의심
이상의 두 가지가 한국 내부의 문제라면 세 번째 촉발점은 해외투자가들의 인식에 관련된 문제다. 정책당국이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고, 실업률 해결을 위해 정공법을 구사하면서, 한국경제가 정치논리에 휘둘려 왜곡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투자가들의 신뢰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고 입으로만 외쳐대거나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신뢰는 급락할 것이다. 아무리 입으로만 되뇌어봐야 노회한 국제투자가들이 속아넘어갈 리 만무하다. 특히 국제투자가들은 1997년에 한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해프닝을 아직도 머릿속에 담고 있을 것이므로 과거보다 한결 간단하게 한국에 대한 신뢰를 던져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주고 지속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할 때 한국을 신뢰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들이 한국경제에 대해 불신을 갖기 시작하면 정책당국이 재정적자를 줄이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통화팽창정책을 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원화를 달러로 바꾸기 시작하는 동시에 한국으로부터 탈출할 궁리를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서서히 위기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6. 외환보유고의 실질내용
다음은 외환보유고에 대한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재발하지 않는다”라는 세간의 상식을 들여다보면 그 바닥에는 한국은행이 현재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당연히 맞는 이야기다.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단기유동자금이 일시에 해외로 유출되어도 현재의 외환보유고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대외유동성 부족에 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001년 3월 말 기준으로 외환보유고는 944억 달러 수준으로 1997년 말 89억 달러에 비해서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다. 단기 대외지급능력을 나타내는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외채 비중’도 2001년 3월 말 기준으로 43.9%로 안정된 수준을 보인다.[1]
하지만 현재의 경제상황이 미래에 그대로 지속된다면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다고 자신할 수만은 없다. 지금 확보된 외환보유고의 성격이 경쟁력 강화를 통해 축적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현재의 외환보유고는 위기 이후에 무역수지 흑자와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 축적된 것이다. 무역수지 흑자는 수입보다 수출이 더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수출이 증가한 것은 우리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원화가 평가절하되고 교역조건이 악화된 결과다. 교역조건이 악화되었다는 의미는 수출물량은 증가하는데 제값을 받지 못하고 밑지면서 출혈 수출을 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외화는 들어오지만 기업 수지는 악화되고 기업 적자는 기업 내부에 잠재되어 있거나 아니면 일부는 기업도산 과정을 거쳐 이미 금융기관의 부실로 전가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은 언젠가 공적자금 투입으로 충당될 것이므로 이 역시 유사 형태의 재정적자로 간주할 수 있다. 기업경쟁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 출혈수출이 누적되면 기업도산은 빈발하게 되고 결국은 재정적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수입이 감소하는 것도 호화사치 소비재의 수입이 준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향후 확대재생산에 쓰일 자본재 수입이 더 많이 줄고 있어 한국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만큼 투자의욕이 떨어지고 창업가정신이 소멸되고 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자본수지 흑자도 반갑기만 한 현상은 아니다. 한국에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서 해외자본이 몰려든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헐값 세일로 나온 한국의 우량 기업과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또는 완전개방된 한국 금융시장에서 단기차익을 노리는 펀드들이 대규모로 유입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자본은 당장 입에는 달지만 앞으로 우리가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이다. 만약 우리가 매각한 자산을 재매입하려면 유입된 자본의 몇 배가 되는 자본이 해외로 유출될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잠재된 부실과 재정적자를 무한정 늘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원화를 무작정 평가절하시킬 수 없는 일이며, 출혈 수출이 누적되면 언젠가 기업들의 대량 도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더 이상 헐값에 팔 자산도 마땅치 않다. 더욱이 국내 시장이 완전개방되면서 여러 해외요인 악화가 한국경제에 직접적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기침체는 바로 수출감소로 연결되어 무역수지 흑자를 줄여 흑자 기조가 적자로 반전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난다면 현재 확충되어 있는 외환보유고는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다.
요컨대 현재 상태가 지속되고 대외환경이 악화되면 재정적자 규모는 더욱 늘어나는 동시에 외환보유고가 안심할 수 없는 수준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본격적으로 작동한다.
7. 최악의 시나리오가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
위와 같은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해서 위기가 그리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네 가지 요인이 동시에 일어날 확률도 낮으며 설사 한꺼번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현실세계가 갖고 있는 ‘자연 치유력’으로 인해 ‘소극적인 되먹임 고리(negative feedback loop)’[2]가 작동하면서 각 요소의 파괴력을 완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예외적이지만 ‘적극적인 되먹임 고리(positive feedback loop)’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복잡계 이론(science of complexity)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개별 사건이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이 갑작스레 나타나는 모습을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이라 한다. 여기서 개별 요소를 합한 결과는 산술적인 합계보다 더 크다.
경제현장에서도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은 종종 목격된다. 1997년의 외환위기 상황을 보자. IMF가 주도했던 고금리 처방과 은행에 대한 BIS 비율 준수는 전혀 다른 개별 사건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도 적극적인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졌다. 금리를 높이자 기업은 지급이자 부담이 늘어나 수지가 악화되었고 그 상태에서 은행이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해 기업대출을 줄임으로써 기업부도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은행부실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BIS 비율이 낮아지자 은행은 대출을 더욱 줄일 수밖에 없게 되면서 결국은 대량부도 사태가 일어났다.
적극적인 되먹임 고리는 어떤 경우에 만들어지는가? ‘바닥(場, field)’이 흔들릴 때다. 1997년 당시 정권 말기의 레임덕이 없었고 대선 정국이 아니었다면 외환위기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노동개혁법과 금융개혁법 개정이 문제된 것도, 한보와 기아사태 해결이 지연된 것도 모두 바닥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종이를 얹고 담뱃갑을 세워보라. 담뱃갑을 쓰러뜨리려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밀어야 한다. 그런데 담뱃갑 밑에 있는 종이를 살짝만 움직이면 아주 작은 힘으로도 담뱃갑은 넘어간다. 담뱃갑 몇 개가 도미노처럼 놓여 있다면 종이를 조금만 움직여도 담뱃갑은 줄줄이 넘어간다. 바닥이 흔들리면 적극적인 되먹임 고리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1940년 미국 워싱턴주의 타코마 협곡교(Tacoma Narrow Bridge)라는 튼튼한 다리가 미미한 바람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 사실을 두고 학자들은 다리를 받치는 지지줄이 흔들리면서 공명현상, 즉 적극적인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위의 네 가지 위기촉발 원인도 마찬가지다. 재정적자, 실업률 증가. 신인도 하락, 외환보유고 고갈 등과 같은 문제는 어떻게 보면 개별적으로는 그리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과거에도 유사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또 슬기롭게 극복했던 경험과 저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개별 사건의 파괴력이 아니라 개별 사건이 다른 사건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바닥이 흔들려 적극적인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진다면 그 엄청난 파괴력으로 인해 결국 제2의 외환위기가 터지는 것이다.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첫째로, 모든 주체가 냉정해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남북문제나 대선 정국으로 최면상태에 빠져들 여유가 없다. 정부도 정치권도 국민도 산업계도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둘째로, 단절시켜야 한다. 여러 사건 중에서 어떤 사건이 상호작용을 할 것이며 설사 개별 사건이 폭발하더라도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관계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가령 개별 사건의 파괴력이 더 커진다 해도 상호영향력을 단절시킬 수만 있다면 전체 파괴력은 오히려 작아진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경제의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을 막기 위한 출발점은 냉정과 단절이다.
8. 우리가 피해야 할 최악의 가상시나리오
네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겹치고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이 일어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상적으로 그려보자.
먼저 기업경쟁력이 강화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창업가정신이 소멸된 상태에서 대외 경제여건까지 악화된다. 미국 경제는 부시와 그린스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착륙이 허사로 돌아간다. 일본도 장기불황의 침체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한국의 수출이 급속히 줄어든다. 반면에 자본재 수입으로 인한 수입감소도 한계에 달하여 무역수지는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되고 외환보유고도 점진적으로 감소한다. 결국 성장률이 4%로 떨어지고 물가와 실업률이 각각 4%대로 올라가면서 triple-4가 된다. 더욱이 헐값 세일로 해외에 매각할 우량자산도 더 이상 없고 주식시장 장기침체로 단기매매 차익을 노렸던 펀드들이 하나둘씩 한국에서 철수하여 또 다른 신흥시장을 찾아 나섬으로써 그나마 자본수지 흑자로 지탱되어 왔던 외환보유고는 더욱 고갈된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환경 악화로 몇 년째 지지부진하던 몇몇 대기업과 워크아웃 기업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산에 처하면서 국내 금융시장이 급속히 경색되고 은행 한두 개가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다. 급기야 정책당국은 공적자금을 추가로 투입하면서 실질적인 재정적자는 더욱 확대된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대선 정국이 시작된다. 경제에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이 경제논리와는 상관없이 정치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여러 이익단체가 제각각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고 길거리로 뛰어나와 시위를 벌인다. 실업자들이 연대하여 대규모 집단시위를 벌인다. 기업 현장에서도 노사문제로 곳곳에서 갈등이 생긴다. 모든 대권주자는 일일이 시위현장을 찾아다니며 격려하고 공약을 남발한다.
결국 해외투자자들은 정책당국이 실업자 구제와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통화증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그로 인해 원화 가치는 급속히 떨어지면서 하나둘씩 원화를 매각하고 달러를 사들이거나 아예 한국으로부터 탈출할 준비를 한다. 원화는 더욱 급속히 평가절하되고 한국은행이 환율방어를 위해 달러를 내다 팔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헤지펀드들이 한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면 그 이후에는 1997년의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발생할 가능성이 극히 낮지만 만에 하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사전에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응책 마련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책당국자들이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지전에 정신을 쏟기보다는 전체 판국을 읽는 데 보다 많은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설사 개별적인 파괴력이 더 커지더라도 여러 개의 사건이 동시에 터지지 않도록 전체 판을 조정해가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실력 있는 책임자를 정하고 모든 문제해결을 일임해야 한다. 공항 관제탑과 마찬가지로 국가 관제탑에서는 개별 비행기를 조종하는 문제까지 개입할 필요가 없다. 비행기 조종석에는 우수한 기장을 앉혀 놓고 모든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후에 비행기 조종은 일임시킨다. 관제탑에서는 비행기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제대로 착륙하고 이륙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1] 대개 60% 이하면 안정 수준으로 본다.
[2] Buckley, Walter (1998). Society: a Complex Adaptive System, Essays in Social Theory. Gordon and Breach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