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545, 서울 출생
- 1576 (宣祖9년), 무과 급제
- 1591, 류성용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승진
- 1592, 임진왜란 발발, 옥포, 사천, 당항포에서 연승, 7월 한산대첩
- 1597, 백의종군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승리
- 1598, 노량해전(露粱海戰) 중 전사
- 총 23전 23승의 성과를 거둠
시대적 배경
전국시대가 끝난 일본은 도요토미(豊臣秀吉) 정권의 유지를 위해 사무라이들의 실업난 해결 차원에서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
반면 건국 이래 큰 전쟁이 없던 조선은 내부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사력이 크게 약화돼 있던 형편
성장 과정
5대조가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4대조가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낸 명문가였으나 조부 백록(百祿)이 기묘사화(己卯士禍)[1] 때 피해를 입음으로써 관직이 끊김
기묘사림(己卯士林, 己卯士禍 때 趙光祖와 함께 피해 입은 선비)의 가문으로서 엄격한 수양과 도덕적 기풍으로 후대에 청렴결백과 자기의무의 충실 등의 태도가 이 때 형성
후에 각종 부정부패를 만날 때마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아 모함을 당하거나 파직당하는 등 군생활이 험란
어머니 초계(草溪) 변씨(卞氏)는 명가의 며느리로서 이순신이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인사하러 왔을 때 “어서 가서 나라의 치욕을 씻으라”고 당부하던 여인상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여 군생활이 순탄치 않았지만 그의 능력은 이미 공인되어 있었음. 그가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친구인 류성용의 천거 탓도 있지만, 다가오는 위기상황에서 유능한 해군 사령관이 꼭 필요했기 때문
주요 업적
임진왜란 시 지상전의 초기 패전을 해상수송로 차단을 통해 반전시키고 섬나라인 일본의 해군을 격파하는 강력한 해상역량 과시
마지막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침략군을 응징함으로써 적당히 타협하려는 明나라의 압력을 극복하고 국가의 위신을 세움[2].
이순신과 함께 朝明 연합함대를 지휘한 明將 진린(陳璘)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는 분”이라고 극찬
후대에 미친 영향
한국민의 가슴 속에 각인된 영웅으로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치적 목적으로 聖雄視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탁월한 군인이자 리더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지되고 있음
이순신의 존재는 영웅을 필요로 할 때마다 다시 부각. 1795년(정조19년), 왕권 강화와 충성심 강조가 필요할 때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3]를 간행.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 이후 丹齋 申采浩는「이순신전」을, 일제시대 이광수는 소설「이순신」을 저술, 민족영웅에 대한 갈망 표현
리더십 특성
①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제외한 모든 전투에서 시기와 장소를 골라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적을 유인
자신이 원한 장소에서 대응전술이 준비된 상황에서만 전투를 벌임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순신은 답답할 정도로 꼼꼼한 인물이었다고 평가. 그러나 이러한 주도면밀한 준비와 세심한 관리는 모든 명장의 필수 요건
행정에서도 효과 극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
군비 확충과 조달, 전투준비와 장병들의 사기진작, 부족한 전투병력 보충을 위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승려와 농민들을 접촉
그러면서도 총사령관격인 三道水軍統制使가 직접 모든 부하들을 관리하기는 힘들다는 판단에, 중간관리자들한테 책임감을 심어주고 과감히 권한을 위양
② 엄격함과 인자함을 겸비
노여움이나 즐거움에 대한 표현을 자제, 상벌도 엄격
승리할 때마다 전과를 개인적으로 명시, 수훈에서 누락되지 않게 하고 군령을 어긴 사람은 엄하게 처벌
겨울의 농한기에 병사들을 교대휴가 보내 농사일을 준비하게 하고, 노획품 가운데 의복과 무명, 베 등을 군사들에게 배분. 이에 부하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함
경상도 동래와 陽山戰鬪 시
경상좌수사인 박홍(朴泓)이 싸우지도 않고 철수, 순천의 영군병방(營軍兵房)은 근처에서 출병하지도 않고 좌시. 이순신은 관계자들을 엄격히 처벌
피난민들이 소와 재물을 도둑질하기 위해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자 주모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
반면, 피난민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그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강구
임금에게 “피난민들이 돌산도로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도록 해달라.” 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함
③ 절망적 상황에서도 병사의 사기를 고취하는 호소력
이순신은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生卽死 死必卽生).”라고 부하들의 사기 독려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대첩을 앞두고,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병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決死救國’의 각오 고취
화살에 맞고도 전쟁을 지휘
1578년 두만강 어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管)으로 근무할 때 오랑캐의 기습으로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몰래 돌아서서 화살을 뽑고 태연히 부대를 지휘
④ “임금의 명령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있다.(君名有所不受)”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이라도 전군의 전략상 맞지 않는 것은 불복해야 한다는 소신을 지님
통신이 불비한 상황에서 조정의 명령은 실제 현장전투에서는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음. 당시의 통신 상황은 1593년 8월 1일 발송된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장이 동년 10월 9일에 전달될 정도
만약 명령불복종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각오
※“전쟁터에 나간 장수는 왕의 명령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君名有所不受)”는 병법을 중시
백의종군이라는 사형선고와 같은 不名譽를 극복한 절대충성을 보여줌
한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함
해군의 막강한 전력이 다 무너진 상황에서도 “아직도 배가 12척이나 남아 있었구나” 하며,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조국을 구하고 절대충성의 심정으로 최후를 맞음
적장 가토오(加藤淸正)가 이중첩자를 통해 흘린 거짓정보에 속아 조정은 공격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짓정보로 판단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음
왕명 거부의 죄로 문책한다면 목숨은 내놓을망정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유
결국 이 항명으로 인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됨
⑤ 陸戰 전술이던 ‘학익진’을 해전에 응용
적은 아군에게 종대가 되고, 아군은 횡대가 됨으로써 아군의 포격 유효사거리 안에 적을 최대한 유도하는 전술
3백 년 후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러일전쟁에서 원용,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둠

또한 이순신은 화약에 정통하여 황자총통(黃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천자총통(天字銃筒)[4] 등을 개량해 거북선 및 판옥선에 배치
[1]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中宗 14) 11월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상(勳舊宰相)에 의해서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화를 입은 사건.
[2] 明나라 장수인 유정(劉艇)과 진린(陳璘)은 고니시(小西行長)로부터 뇌물을 받고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려 했으나 이순신 장군의 설복으로 뜻을 거둠.
[3]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이순신 장군의 전집. 1795년(正祖 19년) 왕명에 의해 교서관(校書館)에서 유득공(柳得恭)의 지휘 아래 편집. 총 14권 8책.
[4] 총통(銃筒): 조선시대 화포의 총칭. 구경이 넓고 포신이 짧은 투박한 모양으로 화약을 사용하여 철환(鐵丸)이나 철촉전(鐵鏃箭)을 발사. 종류로는 대포인 별대완구·대완구와, 이보다 작은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황자(黃字)총통 등이 있었으며, 소포인 우자(宇字)·주자(宙字)·영자·측자총통 등도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