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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878, 도쿄 출생
  • 요코하마의 무역상 요시다 겐조(吉田健三)의 양자로 입적
  • 1906, 東京帝大 法學課 졸업
  •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화평공작(和平工作, 전쟁 중단 운동)’을 하다가 육군교도소에 투옥
  • 戰後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穗彦)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양내각에서 外務長官 역임
  • 1946, 자유당 총재 취임, 제1차 요시다(吉田)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 및 외무장관 겸임
  • 1947, 총선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되자 사임
  • 1948, 사회당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내각 총사퇴 후 제2차 요시다 내각을 구성, 1954년까지 총리 역임

시대적 배경

패전 이후 폐허가 된 일본의 재건이 현안과제로 대두

점령국 미국의 맥아더 사령관이 일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던 시절로 일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일본에 유리한 조치를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


성장 과정

四書五經 위주의 한학의숙(漢學義塾)에서 공부하고 중학교 시절 국수주의적 윤리학자 스기우라(杉浦)의 영향으로 황실에 충성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실을 존중하고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 사상 보유

東京帝大 출신의 엘리트 외교관으로 관료생활 시작

親英美派의 거두이며 고관이던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의 딸과 결혼, 이후 장인의 영향으로 일관되게 親英美 노선을 견지


주요 업적

폐허화된 일본 경제․사회의 재건을 이룩하고 일본 경제 고도성장의 礎石을 마련

패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GHQ)[1]를 통한 미국의 압력과 일본 국내 좌파세력의 반대를 지혜롭게 극복해가며 오늘의 일본을 이루는 토대를 형성


후대에 미친 영향

전후 군국주의 청산 과정에서 좌익 진보세력을 견제하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호응, 반공기지로서 보수적 민주주의의 노선을 지켜 지금의 일본의 國家的 正體性을 구축


리더십 특성

① 철저한 實利主義 정치인

養父인 무역상 겐조의 영향으로 商人的 國際政治觀을 보유

한 國家를 지배하는 것이 軍事力이 아니라 經濟力이라고 생각

태생적인 온건파로서 극단적 노선을 피했으며, 戰前부터 군국주의적 사고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

1932년 ‘초토외교(焦土外交)론’[2]을 주장하던 우치다(內田) 외무대신 휘하에서 주미대사(駐美大使)라는 요직을 제안받았으나 “외교방침이 다른 대신 밑에서는 충분히 일할 수 없다.”며 거절

유교적 발상인 존왕양이(尊王攘夷)와 親英美主義 노선을 적절히 배합

전쟁 말기 화평공작을 전개, 천황에게 패전의 불가피성을 알리고 화평을 요구하는 상소문 작성

英美와 화평하면 천황제는 유지할 수 있으나 전쟁을 지속하면 공산혁명으로 천황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

요시다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40일 간 구류생활을 했으나, 이것이 군국주의에 저항했다는 면죄부가 되어 미군 점령 이후 득세

정치선배 스즈키(鈴木) 前 수상의 “깨끗하게 지라”는 조언을 평생 실천

1947년 2월 1일 총파업 시도를 GHQ가 금지시키면서,[3] 요시다 내각의 인기가 급락 → 결국 1947년 총선(4월 25일)에서 자유당은 제2당으로 전락

제1당이 된 사회당도 과반수에 미달하여 연립내각을 제안했지만 요시다는 깨끗이 정권을 양도

이후 사회당 내각은 극심한 혼란을 겪음. 1년 반 후에 자유당이 총선에서 압승하고 2차 요시다 내각 성립 → ‘깨끗하게 짐’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획득

② GHQ를 최대한 활용

GHQ의 통치 아래 정치적 지분이 전무한 자유당에 일종의 ‘고용 총재’로 입당

기존 총재이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가 미국의 미움을 사 물러난 후, 역사적 정당성과 능력을 겸비한 유일한 保守人士로 부상

자유당에 대한 리더십 확보와 GHQ 통치 아래서 자신의 발언권 확보라는 두 가지 난제에 직면

농림대신 人選에 좌익 경력이 있는 와다 히로오(和田博雄)를, 거당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켜 雇用총재에서 實勢총재로 부상

맥아더 사령부의 통제를 逆으로 자신의 權力源泉으로 활용

맥아더에게 “내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조각에 착수

敗戰國의 수상임에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맥아더의 신뢰를 획득

외무대신 겸직으로 맥아더와의 채널을 독점, 맥아더의 권위를 자신의 정책 추진의 원천으로 삼음. 반대론자들에게 “이것은 원수의 의향이다. 원수를 만나본 일도 없는 당신들이…”라는 화술로 정면돌파 → 요시다 1인 정치 시대 개막

③ 일본의 좌경화를 사전차단하면서 ‘경무장 경제대국(輕武裝 經濟大國)’ 지향

전후 일본사회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농지개혁 추진

小作地의 80%가 해방되어, 소작지 비율이 全農地의 46%, 논의 53%에서 개혁 후 각각 13%, 14%로 격감

농민들의 좌경화 편승을 막고 농민을 小所有者로서 보수안정화. 농지개혁 결과, 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조합은 투쟁목표를 상실하고 급속히 쇠락

군사력을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에 전력투구하는 ‘輕武裝 經濟大國’을 일본의 국가목표로 제시

脫군사노선을 바탕으로 군사소국화의 이념을 담은 ‘日本國 憲法’을 채택

냉전 시대 동아시아에서 공산세력을 저지할 교두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미국의 보호 아래 경제건설에 매진. 美蘇에 의해 분열된 獨逸에 비해 훨씬 유리한 위치를 차지

④ 선택과 집중의 성장전략, ‘경사생산방식(傾斜生産方式)’[4]

‘傾斜生産方式’으로 선택과 집중을 중시하는 개도국 특유의 고성장전략을 추진

당시 탄광 광부의 1/3(12만4천 명)을 차지하던 한국인이 귀국하거나 탄광을 떠나 석탄생산량이 급감. 석탄 감소는 철강생산 감소로 이어져 全産業이 정체의 위기

탄광에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고, 증산된 석탄을 다시 철강생산에 중점적으로 투입

석탄, 철강의 증산분을 단계적으로 다른 산업에 할당하여 최종적으로는 모든 산업의 생산부흥을 가져온다는 계획

그러나 무리한 부흥정책으로 인하여 물가가 급등하고 生産財로부터 시작된 산업생산이 消費財까지 이어질 동안 일반 국민의 부담이 가중되는 등 부작용 발생

이른바 ‘닷지 라인'(Dodge Line)이라는 비상대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

1949년 2월 디트로이트 은행장인 닷지가 訪日, 일본 국가예산을 편성하고 재정- 경제의 全部門에 걸쳐 일본정부를 지도

닷지(Joseph Dodge)는 일본은 두 개의 죽마(竹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 두 개의 竹馬란 곧 미국의 원조와 일본정부의 보조금

초강경 균형예산, 징세강화, 임금안정, 물가통제, 무역과 외환통제의 강화 및 고정환율 등 강력한 정책 추진

닷지 라인은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어 1950년부터 물가가 잡히고 경제부흥의 길이 열림. 이는 요시다가 일본 국민의 역량을 신뢰하고 일본 전체의 운명을 건 모험을 단행한 결과


[1]General Headquarters of Supreme Commanders for the Allied Powers

[2]초토외교(焦土外交): 외무대신 우치다(內田)가 의회에서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주장을 관철시키겠다,”고 역설.

[3]중국 대륙에서 장제스 군대가 패주를 거듭하고 동유럽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익이 주도하는 총파업과 혁명운동이 불붙어 오르자 맥아더는 일본을 ‘동아시아의 반공기지’,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키울 결심을 굳힘.

[4]경사생산방식(傾斜生産方式): 생산기반확립을 위해 가장 기초적인 물자(생산재 위주)에 우선 노동력과 자원을 투입해 육성하고, 다음에 다른 산업으로 자원의 집중대상을 옮겨가는 방식. 대개 生産財에서 消費財로 이행하기 때문에 국민이 최종소비재 수요를 충족하려면, 상당시간이 소요되는 단점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