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윤순봉. 2025. 곽박(郭璞)의《산해경(山海經)》변론과 그 지적 유산. 윤순봉의서재.
https://yoonsb.com/2025/08/12/85971/
곽박(郭璞)의《산해경(山海經)》변론과 그 지적 유산
서론 – 변론의 시작, 기이함의 가치를 묻다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고전 가운데서도 가장 논쟁적인 책 가운데 하나다. 지리와 민속, 신화와 괴물 이야기가 뒤섞여 있어,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두고 오래전부터 격렬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한편으로는 우(禹)임금과 백익(伯益)의 저작이라는 전승 덕분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허황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많다는 이유로 황당한 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史記·大宛列傳》).
동진(東晉)의 학자 곽박(郭璞)은 바로 이 양극단의 평가가 팽팽히 맞서는 지적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남긴 《주산해경서(注山海經序)》는 단순한 책머리 글이 아니라, 《산해경》을 무가치한 잡서에서 우주의 질서를 비추는 철학적 거울로 격상시키려는 치밀한 변론이었다. 곽박은 장자(莊子)의 인식론을 끌어와 ‘기이함(異)’이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논증하고(Campany, 1996), 새롭게 출토된 《급총죽서(汲冢竹書)》 속 《목천자전(穆天子傳)》을 근거로 사마천(司馬遷) 이래의 경험주의적 회의론을 반박했다(Chen, 2016; Dorofeeva-Lichtmann, 2007).
이 보고서는 곽박의 서문이 어떻게 당대의 현학(玄學) 사유와 ‘지괴(志怪)’ 문화의 흐름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산해경》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했는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한 권의 ‘기이한 책’이 소멸의 위기를 넘어 불멸의 고전으로 살아남은 지적 여정을 추적하고, 그 유산이 후대 동아시아 문학과 사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1. 곽박 《산해경서(山海經序)》 원문·번역·통합 주해
3. 시대의 부름과 주석가의 탄생 – 현학(玄學) 시대의 곽박
4. 변론의 해부 – 《주산해경서(注山海經序)》 심층 분석
1. 곽박 《산해경서(山海經序)》 원문·번역·해설
[1] 세간의 평가와 문제 제기
- 원문: 世之覽山海經者。以其閎誕迂誇。多有竒怪俶儻之言。莫不疑焉。
- 번역: 세상에서 《산해경》을 보는 자들은, 그 내용이 크고 허황되며, 굽이져 과장되고, 기이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이 많다고 하여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다.
- 해설: 곽박은 서두에서 《산해경》에 대한 당대의 보편적 인식을 그대로 제시한다. ‘閎誕迂誇’와 ‘竒怪俶儻’이라는 병렬 표현은 이 책이 역사적 신뢰성이 낮은 잡설로 간주되었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독자의 의심을 먼저 인정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후 변론을 펼치기 위한 전략적 발판이 된다.
[2] 장자(莊子)적 인식론의 도입
- 원문: 嘗試論之曰。莊生有云。人之所知。不若其所不知。吾於山海經見之矣。
- 번역: 일찍이 논해 말하길, 장자(莊子)가 “사람이 아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나는 《산해경》에서 이를 보았다.
- 해설: 곽박은 장자의 말을 인용해 논의의 초점을 ‘《산해경》이 진실인가’에서 ‘독자의 지식이 완전한가’로 전환시킨다. 이는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전제로 하여, 《산해경》의 ‘기이함’이 텍스트의 결함이 아니라 독자의 한정된 시야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Campany, 1996).
[3] 우주의 복잡성과 ‘기이함’의 자연스러움
- 원문: 夫以宇宙之寥廓。群生之紛紜。陰陽之煦蒸。萬物之區分。精氣渾淆。自相潰薄。遊魂靈怪。觸象而構。流形於山川。麗狀於木石者。惡可勝言乎。
- 번역: 우주의 광대함과 온갖 생물의 번성, 음양의 기운, 만물의 구분, 정기(精氣)의 뒤섞임과 변화, 떠도는 혼과 신령스러운 존재들이 사물과 부딪혀 형상을 이루고, 산천과 나무·돌에 빼어난 모습으로 나타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해설: 곽박은 도가적(道家的) 우주관을 바탕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와 형상이 자연의 필연적 산물임을 묘사한다. 이를 통해 《산해경》 속 괴이한 존재들이 허구가 아니라 ‘우주의 다양성’ 속에서 발생 가능한 현상임을 전제한다(Dorofeeva-Lichtmann, 2007).
[4] 인식론적 선언: ‘기이함’의 주관성
- 원문: 物不自異。待我而後異。異果在我。非物異也。
- 번역: 사물은 스스로 기이하지 않고, 나로 인해 기이해진다. 기이함은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이 기이한 것이 아니다.
- 해설: 이 구절은 서문의 철학적 정점이다. ‘기이함’은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의 투영이라는 관점은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과 맞닿아 있다. 이는 《산해경》 비판의 근거를 허물고, 입증 책임을 비판자에게 전가하는 수사 전략이다.
[5] 문화 상대성의 비유
- 원문: 故胡人見布而疑。越人見罽而駭毳。
- 번역: 오랑캐는 베를 보고 의심하고, 월(越) 사람은 융단을 보고 털옷에 놀란다.
- 해설: 곽박은 지역과 문화의 차이가 인식의 기준을 결정한다는 점을 간결한 예시로 설명한다. 이는 ‘낯섦이 곧 기이함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현대 인류학의 문화상대주의 개념과도 통한다.
[6] 이중 잣대에 대한 논리적 공격
- 원문: 陽火出於冰水。陰鼠生於炎山。而俗之論者。莫之或怪。及談山海經所載。而咸怪之。是不怪所可怪。怪所不可怪也。
- 번역: 양의 불이 얼음물에서 나오고, 음의 쥐가 불타는 산에서 생겨도 세속의 논자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산해경》에 기록된 것을 말하면 모두 이상히 여긴다. 이는 이상히 여길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이상하지 않을 것을 이상히 여기는 것이다.
- 해설: 곽박은 당대 사람들이 다른 문헌 속 역설적 현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산해경》에 대해서만 유독 의심하는 ‘선택적 회의’를 비판한다. 이 구절은 비판자의 판단 기준이 자기모순에 빠져 있음을 드러내며, 논리적 우위를 점하는 장치가 된다.
[7] 역사적 증거의 제시: 《급총죽서(汲冢竹書)》와 《목천자전(穆天子傳)》
- 원문: 案汲郡竹書及穆天子傳…與竹書同…左傳曰…竹書所載。則是其事也。
- 번역: 《급군죽서》와 《목천자전》에 의하면…《사기》의 기록과 같고, 《좌전》의 말과도 부합한다.
- 해설: 곽박은 철학적 변론에서 역사적 증거 제시로 전환한다. 그는 최근 출토된 《급총죽서》 속 《목천자전》을 핵심 물증으로 제시하고, 그 내용이 《사기》·《좌전》과 교차 검증된다고 주장한다(Chen, 2016). 이로써 ‘기이함’이 반드시 허구가 아니라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8] 회의론 전통에 대한 정면 비판
- 원문: 司馬遷…至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余不敢言也。不亦悲乎。
- 번역: 사마천이 “《우본기》와 《산해경》에 있는 괴물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슬프지 않은가!
- 해설: 사마천의 발언은 경험주의적 사관을 상징하지만, 곽박은 이를 ‘증거 부재’에서 비롯된 시대 한계로 해석한다. 그는 《죽서》 발견이 없었다면 《산해경》이 폐기되었을 것이라 말하며,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이 해석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음을 강조한다(Dorofeeva-Lichtmann, 2007).
[9] ‘기이한 지식’의 실재 사례 열거
- 원문: 東方朔曉畢方之名…海民獲長臂之衣…於戲。群惑者其可以少寤乎。
- 번역: 동방삭이 필방의 이름을 알고… 해안 사람들이 장팔의 옷을 얻었다. 아! 온갖 의혹을 가진 자들이 조금은 깨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 해설: 곽박은 고사와 실례를 통해, 현실 세계에도 ‘기이한 지식’과 사물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는 《산해경》의 기이한 기록이 전적으로 허구가 아님을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10] 주석가의 사명 선언
- 원문: 道之所存。俗之所喪…故為之創傳。流其壅閡。闢其茀蕪。領其玄致。標其洞涉。
- 번역: 도리가 존재하는 바를 세속이 잃어버렸으니… 이에 창전(創傳)하여 막힌 것을 터주고 덮인 것을 헤쳐 그 깊은 뜻을 밝혀 두었다.
- 해설: 곽박은 자신의 주석 작업을 ‘창전’이라 명명하며, 단절된 학문 전승을 복원하는 사명감을 천명한다. ‘壅閡’과 ‘茀蕪’를 제거한다는 표현은 지식의 흐름을 회복하고 전승의 길을 닦는 적극적 의지를 드러낸다.
[11] 후대에 대한 기대와 독자의 자격
- 원문: 非天下之至通。難與言山海之義矣。嗚呼。達觀博物之士。其鑒之哉。
- 번역: 천하에 지극히 통달한 자가 아니면 《산해경》의 뜻을 함께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아! 멀리 보고 널리 아는 선비여, 이를 살펴라.
- 해설: 곽박은 ‘至通’한 자만이 《산해경》의 뜻을 논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이해의 문턱을 높인다. 이는 비판자의 식견 부족을 노출시키는 효과를 가지며, 텍스트에 대한 권위와 배타성을 동시에 강화한다.
2. 논쟁의 유산 – 곽박 이전의 《산해경》
곽박이 《산해경(山海經)》 변론에 나서기 훨씬 전부터, 이 책은 안정된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찬사와 불신 사이에서 흔들려 왔다. 한편에서는 제국 질서 속에 편입되어 국가 운영에 유용한 경전으로 격상시키려는 시도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정전화(正典化) 시도: 유흠(劉歆)의 실용적 해석
한(漢)나라 황실 도서관장이었던 유흠(劉歆)은 《산해경》을 제국 질서 안으로 편입하려 했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상산해경표(上山海經表)」에서 이 책은 성군(聖君) 우(禹)임금의 업적을 기록한 저작이라 주장되었으며, 먼 지방의 특산물·자원과 지리를 기록한 실용적 자료집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기이함’으로 가득 찬 텍스트를 국가 통치에 필요한 경전의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전략이었다.
권위 있는 회의론: 사마천(司馬遷)의 경험적 비판
그러나 당대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기(史記)》 〈대완열전(大宛列傳)〉에서, 장건(張騫)의 서역 탐험이 신화 속 곤륜산(崑崙山)을 찾지 못한 사례를 언급하며, “《우본기(禹本紀)》와 《산해경》에 있는 괴물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至於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 余不敢言也)”고 했다. 이는 경험적 사실과 문헌 기록의 불일치에 기초한 유보적 태도로, 이후 《산해경》에 ‘믿기 어려운 책’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촉한(蜀漢) 학자 교주(譙周)의 비판
사마천의 회의론은 후대 촉한의 학자 교주(譙周)에게 이어졌다. 그는 사료 고증을 통해 《산해경》의 허망함을 드러내려 했으며, 고대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경계했다. 이로써 곽박 이전까지의 《산해경》은 국가적 유용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경험적 검증을 중시하는 회의론이 팽팽히 대립하는 지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곽박은 바로 이러한 양극단의 논쟁 한가운데에서 제3의 길을 제시하려 했다. 그는 현학(玄學)의 사유 틀과 새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를 결합해, 《산해경》의 ‘기이함’을 결함이 아닌 가치로 전환시키는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3. 시대의 부름과 주석가의 탄생 – 현학(玄學) 시대의 곽박
곽박(郭璞, 276–324)의 변론은 단순한 개인적 역량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상적 흐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곽박은 《산해경(山海經)》을 재해석하기에 최적의 시기에, 최적의 지적 도구를 갖춘 인물이었다.
박물군자(博物君子)로서의 곽박
곽박은 경학(經學), 문자학, 점술, 지리, 문학을 아우른 박물군자였다.
- 경학가이자 문자학자: 그는 유교 경전과 고문자에 정통하여 주류 학계에서 정통성을 확보했다. 이는 난해한 고어와 고지명으로 가득한 《산해경》을 해독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 점술가·우주론자: 그는 점술·풍수와 같은 상징 해석 체계에 능통하여, 세계를 기운과 상징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했다. 이는 《산해경》의 신화적·우주론적 서술과 잘 맞아떨어졌다.
- 시인·문장가: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기이함’을 단순한 허구로 치부하지 않고, 심미적 가치와 사유의 가능성을 포착하게 했다.
시대정신: 현학(玄學)과 ‘지괴(志怪)’의 유행
진(晉)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으나 사상적으로는 자유로웠다. 한대(漢代)의 통일적 유학이 약화되면서, 『노자』·『장자』·『주역』을 바탕으로 만물의 본질, 언어의 한계, 자연의 질서 등을 탐구하는 현학(玄學)이 지식인의 담론을 주도했다. 현학은 인위적 규범보다 ‘자연(自然)’을 존중하고, 세속을 초월한 정신적 자유를 추구했다.
이 시기에는 귀신, 이변,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지괴(志怪)’ 문학이 유행했다(Campany, 1996). 이는 ‘기이함’이 더 이상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탐구할 만한 지적 자원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곽박은 이 흐름을 활용하여, 《산해경》의 ‘기이함’을 결점이 아니라 우주의 심오함을 드러내는 강점으로 전환시켰다(Dorofeeva-Lichtmann, 2007).
곽박의 등장은 단순히 한 명의 주석가가 고전을 보존한 사건이 아니라, 당대의 사상적 토양이 한 학자에게 부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4. 변론의 해부 – 《주산해경서(注山海經序)》 심층 분석
곽박 서문의 가치는, 《산해경(山海經)》을 변호하기 위해 구축한 정교하고 다층적인 논증 구조에 있다. 그는 철학·역사·수사를 넘나들며 전통적 회의론을 해체하고, 텍스트를 읽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철학적 변호 – ‘기이함’은 사물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곽박은 개별 기록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기이함(異)’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는 장자(莊子)의 구절을 인용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전제한 뒤, 서문의 핵심 명제를 제시한다.
物不自異,待我而後異;異果在我,非物異也.
이는 ‘기이함’이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관찰자의 경험·문화·편견이 반영된 결과임을 시사한다(Campany, 1996). 그는 북방 사람이 베를, 남방 사람이 융단을 보고 놀라는 비유를 들어, 낯섦이 곧 기이함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로써 곽박은 입증의 부담을 비판자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만든다.
역사학적 변호 – 새로 발견된 증거로 회의론을 흔들다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뒤, 곽박은 논증의 무게중심을 역사로 옮긴다. 핵심 무기는 당시 비교적 최근에 출토된 《급총죽서(汲冢竹書)》 속 《목천자전(穆天子傳)》이었다(Chen, 2016). 주(周) 목왕(穆王)의 서방 원정과 서왕모(西王母)와의 만남을 기록한 이 문헌은, 내용이 《산해경》만큼 기이하면서도 선진(先秦) 시대의 실제 기록이라는 권위를 지녔다. 곽박은 이 이야기가 《사기(史記)》와 《좌전(左傳)》의 내용과도 부합한다고 강조하며, 기이한 서사에 역사적 신뢰성을 부여한다.
수사학적 전략 – 독서의 틀을 전환시키다
곽박은 논리적 설득을 넘어서, 독자의 독서 태도 자체를 바꿔놓는다. 그는 서두에서 독자의 의심을 인정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결론부에서는 《산해경》을 “박식한 군자를 위한 거울”로 재정의한다(Fracasso, 1991). 거울은 판단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비추듯, 《산해경》은 편견 없는 지성인에게 우주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풀 속 작은 새’와 ‘하늘을 나는 대붕’의 대비를 통해 독자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한다. 이는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하는 행위가 곧 비판자 자신의 식견 부족을 드러낸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미래의 비판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5. 주석가의 사명과 그 영원한 유산
곽박(郭璞)의 《산해경(山海經)》 서문은 단순한 학문적 변론을 넘어, 소멸 직전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려는 선언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단순한 주해(註解)가 아닌 “창전(創傳)”이라 명명하며, 잃어버린 전승을 되살리고 지식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사명감을 드러냈다.
“창전(創傳)” – 단절된 전승을 다시 세우다
곽박은 《산해경》이 세월이 흐르며 지명(地名)이 변하고, 이를 해석할 스승의 가르침(師訓)이 끊겨 전승이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를 “도가 존재하는 바를 세속이 잃어버렸다(道之所存,俗之所喪)”고 표현하며, 막힌 지식의 흐름(壅閡)을 뚫고 덮인 것을 헤쳐(茀蕪) 본래의 뜻을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잊힌 길을 다시 열어 학문과 문화의 연속성을 복원하려는 의지였다.
고전의 재탄생과 영향
곽박의 주석본은 이후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해경》의 표준 해석본으로 기능했다(Strassberg, 2019). 후대 모든 주석가들은 그의 주석을 바탕으로 연구를 이어갔으며, 곽박이 ‘기이함’을 ‘심오함’으로 재해석한 덕분에 《산해경》은 단순한 괴이서(怪異書)가 아닌, 사유와 상상력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했다.
도연명(陶淵明)은 「독산해경(讀山海經)」에서 “산해도를 두루 보고(流觀山海圖)” 이를 시로 승화시켰고, 송대의 문인들도 곽박 주석본을 기반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전통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조선시대에도 곽박 주석본이 간행·유통되었으며, 사대부들은 이 책 속 ‘조선(朝鮮)’·‘군자국(君子國)’ 등의 지명을 자국 고대사 탐구의 실마리로 삼았다.
유산의 성격
곽박의 작업은 한 권의 ‘기이한 책’을 소멸 위기에서 건져내어, 철학·역사·문학의 경계를 넘는 고전으로 재탄생시켰다. 그의 변론과 주석 덕분에 《산해경》은 수천 년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우주에 대한 열린 마음과 지적 겸손을 가르치는 보물창고로 남아 있다(Dorofeeva-Lichtmann, 2007).
결론 – 기이한 이야기에서 심오한 거울로
곽박(郭璞)의 《산해경(山海經)》 서문은 철학·역사·수사학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지적 걸작이다. 그는 장자(莊子)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기이함(異)’을 재정의하여, 그것이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관찰자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논증했다(Campany, 1996). 또한 새롭게 출토된 《급총죽서(汲冢竹書)》 속 《목천자전(穆天子傳)》을 근거로 사마천(司馬遷) 이래의 경험주의적 회의론을 반박하며, 고고학적 증거가 고전 해석을 어떻게 전환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Chen, 2016; Dorofeeva-Lichtmann, 2007).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산해경》을 실패한 지리서나 괴이서가 아니라, 우주의 무한한 다양성을 비추는 철학적 거울로 재탄생시킨 데 있다. ‘기이함’을 결점이 아닌 장점으로 전환시킨 이 해석 덕분에, 《산해경》은 후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합법적인 상상력의 원천이자 사유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Strassberg, 2019).
만약 곽박이 없었다면 《산해경》은 황당한 이야기 모음으로 잊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변론과 주석은 이 책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냈고, 오늘날까지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린 시선과 지적 겸손을 일깨우는 고전으로 남게 했다. 이 보고서가 추적한 곽박의 변론은, 한 학자의 치열한 사유가 어떻게 한 문헌의 운명을 바꾸고 동아시아 지성사의 지형을 재편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참고문헌
고전 문헌
- 《사기(史記)》
- 《산해경(山海經)》
- 《산해경주(山海經注)》
- 《목천자전(穆天子傳)》
- 《목천자전서(穆天子傳序)》
- 《죽서기년(竹書紀年)》〔또는 《급총죽서(汲冢竹書)》〕
- 《좌전(左傳)》
현대 연구
- Campany, R.F. (1996) Strange Writing: Anomaly Accounts in Early Medieval China. Albany, NY: SUNY Press.
- Chen, J. (2016) ‘Discoveries of Bamboo-Strip Manuscripts in Early China’, in Galambos, I. (ed.) Studies in Chinese Manuscripts. Leiden: Brill, pp. 23–54.
- Dorofeeva-Lichtmann, V. (2007) ‘Mapless Mapping: Did the Maps of the Shan hai jing Ever Exist?’, in Bray, F., Dorofeeva-Lichtmann, V. and Métailié, G. (eds) Graphics and Text in the Production of Technical Knowledge in China. Leiden: Brill, pp. 215–294.
- Fracasso, R. (1991) ‘The Shanhai Jing: A Bibliography by Subject’, East Asian Library Journal.
- Strassberg, R.E. (2019) A Chinese Bestiary: Strange Creatures from the Guideways through Mountains and Seas. Rev. edn.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기타 참고자료
- 維基文庫 (n.d.) ‘山海經/郭璞序’. Available at: https://zh.wikisource.org/zh-hant/山海經/郭璞序 (Accessed: 12 August 2025).
- 維基文庫 (n.d.) ‘汲塚書’. Available at: https://zh.wikisource.org/zh-hant/汲塚書 (Accessed: 12 August 2025).
- 陶淵明, ‘讀山海經十三首’. 維基文庫.
- 蘇軾, ‘和讀山海經十三首’. 維基文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