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고(疑古)를 주창한 고힐강을 의고한다: 동북공정의 기반을 마련한 비운의 천재 학자들

요약

“한국은 본래 중국의 일부였다.” 이 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글은 이 주장이 아주 오래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20세기 중국의 거대한 격변 속에서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현대의 발명품임을 논증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역사학자 고힐강(顧頡剛)과 그의 제자 담기양(譚其驤)이라는 두 인물이 있다.

고힐강은 1923년에 쓴 교과서에서 ‘칠족론(七族論)’이라는 논리를 통해, 한민족을 중국 역사를 이룬 민족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이는 독립된 국가끼리 교류했던 기록을 마치 한 나라 안의 일처럼 해석하는 논리적 비약에 기대고 있다. 그의 제자 담기양은 1982년, 국가적 사업으로 만들어진 『중국역사지도집』을 통해 스승의 생각을 학문적으로 완성시켰다. 그는 중국 역사상 영토가 가장 넓었던 청나라 시기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역사적 중국’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원칙을 통해,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 북부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었다.

이 글은 두 학자의 대표적인 저작과 지도 제작 원리를 따라가며, ‘더 큰 중국(Greater China)’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그들이 남긴 역사관이 오늘날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뿌리가 되고, 국제적으로 중국의 시각을 퍼뜨리는 도구가 되었음을 밝힌다.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는 역사 서술이 어떻게 한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목차

 서론

1.  위기의 국가, 그 지적 해류: 이데올로기적 토대

1.1. 고힐강의 역설: 회의주의자에서 국가 건설자로
1.2. 학문적 양심과 시대적 사명 사이의 고뇌: ‘의고(疑古)’에서 ‘구국(救國)’으로
1.3. 전통 이데올로기의 재활용

2. 교실에서 심은 서사: 고힐강의 1923년판 『본국사』

2.1. 『현대초중교과서본국사』의 텍스트 분석
2.2. 근원적 논리의 오류 비판
2.3. 지도에 각인된 서사

3. 정의할 수 없는 것의 정의: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과 최대 강역의 원칙

3.1. 국가적 기념사업으로서의 지도집 편찬
3.2. ‘총편례(總編例)’의 해부: 이데올로기적 설계도

4. 지도로 위조된 역사: 지도 제작 수정주의 사례 연구

4.1. 허구의 만리장성: 연·진 장성의 한반도 연장
4.2. 왕조 지도의 왜곡: 한(漢)에서 원(元)까지

5. 영속하는 유산: 학문적 정전(正典)에서 정치적 독트린으로

5.1. 제도화와 국제화: 정설(定說)이 된 왜곡
5.2.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학문적 초석

결론

참고문헌

 

서론

2017년 4월, 당시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져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1]. 이 한마디는 단순한 말실수나 한 개인의 생각을 넘어, 오늘날 중국의 국가 정체성과 역사관을 지배하는 거대한 흐름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 이 발언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특정 시기에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까?

이 글은 시진핑 주석의 발언으로 대표되는 이 역사관이 고대의 사실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20세기 중국의 정치적, 지성사적 격변 속에서 체계적으로 만들어지고 교육된 현대의 구성물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특히 이 거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인물, 역사학자 고힐강(顧頡剛, 1893-1980)과 그의 제자 담기양(譚其驤, 1911-1992)의 학문적 활동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들이 만든 교과서와 역사 지도책은 ‘중국’이라는 개념의 지리적, 민족적 경계를 새로 그렸고, 이는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세우려던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강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첫째, 20세기 초 중국이 마주했던 위기 상황과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고민을 살펴보며, 고힐강과 담기양의 역사관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났는지 살펴본다. 둘째, 그들의 대표작인 1923년판 교과서와 1982년판 『중국역사지도집』을 면밀히 분석하여, ‘더 큰 중국’이라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글로 쓰이고 지도로 그려졌는지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만든 역사관이 오늘날 중국의 국가 정체성,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프로젝트, 그리고 국제 관계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평가하며, 역사 서술이 어떻게 국가의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1. 위기의 국가, 그 지적 해류: 이데올로기적 토대

20세기 초,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계속된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혼란으로 나라 전체가 큰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지식인들은 낡은 전통을 깨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은 단순히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을 넘어,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이념적 틀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고힐강과 담기양의 역사 서술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요구와 지적인 흐름 속에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작업은 낡은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근대 민족주의와 결합하는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1.1. 고힐강의 역설: 회의주의자에서 국가 건설자로

고힐강이라는 학자의 삶은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그는 20세기 초, ‘옛것을 의심한다’는 기치를 내건 ‘의고파(疑古派)’의 선두에 서서, 고대 문헌과 신화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며 기존의 전통적인 역사관을 해체하는 데 앞장섰다 [3]. 그의 방법론은 삼황오제(三皇五帝)와 같은 신화 속 인물들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겹겹이 쌓아 올린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이는 중국 고대사 연구에 실증적인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3], 낡고 비과학적인 과거와 단절하려 했던 신문화운동의 정신과도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그의 학문은 과거를 해체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특히 1920년대 이후, 그의 연구는 낡은 신화를 허무는 동시에 근대 국가에 어울리는 새로운 ‘나라의 역사(國史)’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4]. 이는 단순한 학문적 변절이라기보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겪었던 시대적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하고 군벌들이 나라를 나누어 차지하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학문적 진실만을 파고드는 ‘해체’ 작업은 자칫 민족의 자부심을 꺾고 나라의 분열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비판적 역사학의 목표는 점차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묶고, 드넓은 영토를 아우르는 통일되고 위대한 국가의 이야기를 만드는 정치적 과제로 바뀌어 갔다 [5].

결국 고힐강의 학문적 여정은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도구가 어떻게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새롭게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의 후기 연구에서 나타나는 팽창주의적 역사관은, 초기 의고파로서의 모습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적 위기라는 거대한 압력 속에서 비판의 에너지가 민족주의적 재구성의 동력으로 전환된 필연적인 결과에 가까웠다.

1.2. 학문적 양심과 시대적 사명 사이의 고뇌: ‘의고(疑古)’에서 ‘구국(救國)’으로

고힐강이 엄격한 회의주의자에서 국가주의적 서사의 구축자로 변모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을 지배했던 ‘구국(救國)’, 즉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시대적 사명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의 지적 전환은 학문적 양심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학문을 통해 국가를 구하려 했던 한 지식인의 고뇌에 찬 선택이었다.

초기 고힐강이 이끈 ‘의고파’의 목표는 명확했다. 그는 중국의 역사를 지배해 온 네 가지 거대한 관념, 즉 ① 모든 민족이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했다는 ‘민족 일원론’, ② 모든 영토가 본래부터 통일되어 있었다는 ‘영토 통일론’, ③ 신화적 인물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여기는 ‘신화 인격화론’, ④ 고대를 이상적인 황금시대로 보는 ‘고대 황금기론’을 타파하고자 했다 [6]. 이는 비합리적 신화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역사학을 정립하려는 순수한 학문적 열정의 발로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만주국이 세워지는 등 ‘국망(國亡)’의 위기가 현실화되자, 그의 학문적 목표는 재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서재에 앉아 순수한 학문적 진리 탐구에만 매달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구국’은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본업인 ‘학술 활동’ 그 자체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과제였다 [7]. 그는 허구적 신화에 기반한 낡은 역사관으로는 분열된 민족을 통합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낡은 신화를 해체하는 ‘의고’ 작업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새롭고 강인한 ‘국사(國史)’를 재건축하여 민족의 생존과 부흥을 위한 정신적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했다.

이러한 그의 사명감은 1934년 ‘우공학회(禹貢學會)’의 창설과 학술지 『우공』의 발간으로 구체화되었다 [7]. 초기 역사지리학 연구에 집중했던 『우공』은 만주사변 등 심화되는 변강(邊疆)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점차 정치, 경제, 국방 등 현실적인 문제로 연구 범위를 확장했다. 이는 그의 학문이 어떻게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변모해갔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론적으로 고힐강의 지적 여정은 ‘배신’이나 ‘전향’이라는 단선적인 평가로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과정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학문적 엄밀성을 추구했지만, 그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시대 상황에 따라 ‘진리 탐구’에서 ‘국가 구제’로 전환된 것이다.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날카로운 칼로 낡은 신화를 해부했던 그는, 그 칼을 다시 들어 국가 통합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역사를 재단하기 시작했다. 즉, 문헌의 모순을 찾아내던 실증적 비판 방법론이, 이제는 국가 서사에 부합하는 근거를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도구로 용도가 변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중화민족’ 개념은 문화적 공동체에서 점차 국가주의적(state-nationalism) 성격을 띤 ‘국족(國族)’ 개념으로 변모했고, 이는 결국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팽창주의적 역사 왜곡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7].

1.3. 전통 이데올로기의 재활용

새로운 국가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고힐강과 같은 학자들은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던 전통 이데올로기에서 역설적으로 그 자원을 발견했다. 그들은 낡은 개념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근대 민족주의의 필요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배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존화양이(尊華攘夷)’ 개념이 핵심적인 이념적 무기로 동원되었다 [8]. 본래 ‘존화양이’는 주나라 왕실(華)을 존중하고 주변의 이민족(夷)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중화 문명 중심의 위계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전근대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근대적인 민족-국가 개념과 결합시켰다. 여기서 ‘화(華)’는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민족’으로, ‘이(夷)’는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었거나 경계에 위치했던 주변 민족으로 재정의되었다. 이러한 재해석을 통해 ‘존화양이’는 ‘중심(華)’ 민족이 ‘주변(夷)’ 민족을 통합하고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는 논리로 변모했다. 이는 과거 중국과 교류했던 모든 주변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잠재적인 중국의 강역으로 간주하는 팽창주의적 역사관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둘째, ‘기연파경(欺軟怕硬)’이라는 현실주의적 국제 인식 또한 중요한 시대정신(Zeitgeist)으로 작용했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강한 자를 두려워한다’는 이 개념은 19세기 이래 중국이 겪었던 굴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생존 전략이자, 대외 관계를 규정하는 실질적인 행동 원리였다. 역사 서술의 영역에서 이 원리는 과거 주변국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에도 투영되었다. 중국에 저항했던 강한 국가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중국에 복속하거나 우호적이었던 약한 국가는 업신여김과 흡수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과 같이 오랜 기간 중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어온 국가의 역사를 독립적인 주권 국가의 역사로 존중하기보다는, 힘의 논리에 따라 언제든 중국의 일부로 귀속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재해석된 전통 이데올로기들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에 그치지 않고, 과거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해석의 틀’로 기능했다. 고힐강과 담기양이 역사 문헌을 마주했을 때, 그들의 독해는 이미 ‘존화양이’와 ‘기연파경’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필터에 의해 전제되어 있었다. 이 틀 안에서 고구려나 발해와 같은 고대 국가들은 중국과 대등한 경쟁자나 독립된 정치체로 인식될 수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중화 중심의 위계적 질서 속에서 하위의 ‘번속(藩屬)’ 또는 ‘지방 정권’으로 규정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는 것은 그 이데올로기 체계 내에서는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 되었다.

2. 교실에서 심은 서사: 고힐강의 1923년판 『본국사』

고힐강이 만든 새로운 국가 이야기는 학자들 사이에서만 오간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역사 인식을 만드는 교육 현장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그가 1923년 왕종기(王鍾麒)와 함께 펴낸 『현대초중교과서본국사』(現代初中教科書本國史)는 이러한 시도의 결정판이자,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이 체계적으로 심어지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5]. 이 교과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쓰여, 어린 시절부터 특정 역사관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2.1. 『현대초중교과서본국사』의 텍스트 분석

이 교과서는 첫머리부터 “몇 개의 종(種)이 중국 역사를 구성하는가? 어느 종(種)이 주요 구성원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9]. 여기서 ‘종’은 오늘날의 종족(種族) 또는 민족(民族)을 뜻한다. 교과서는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친다 [9].

“이 두 질문에 대해 우리들은 역대 내려온 역사서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중국 역사를 구성하는 민족은 화(華), 묘(苗), 동호(東湖), 몽골, 돌궐, 티베트, 한(韓)의 칠족(七族)이다. … 칠족 가운데서 바로 화족(華族)이 주요 구성원이다.” [9]

이것이 바로 교과서의 핵심 논리인 ‘칠족론(七族論)’이다. 이 이론은 중국 역사가 단일 민족이 아닌, 화족을 중심으로 한 7개 민족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9]. 여기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한(韓)’, 즉 한민족이 중국을 구성하는 7대 민족 중 하나로 명시되었다는 사실이다 [9]. 교과서는 이 일곱 민족이 같은 뿌리를 가졌는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모두 중국 역사의 구성원으로 단정한다 [9].

2.2. 근원적 논리의 오류 비판

하지만 ‘칠족론’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고힐강이 한민족을 중국의 일부로 포함시킨 유일한 근거는 “중국의 옛 역사책에 한민족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는 것뿐이었다 [9]. 이는 역사적 관계의 본질을 완전히 뒤트는 비약이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기록에 주변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두 나라 사이에 외교, 무역, 전쟁 등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즉, 이는 두 주체가 서로 다른 독립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고힐강의 논리는 이러한 ‘외부와의 교류’ 증거를 ‘내부 구성원’의 증거로 둔갑시킨다. 이웃 나라와의 관계 기록을, 마치 한 집안의 다른 식구에 대한 기록처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얼마나 허술한지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한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수많은 중국 왕조와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고힐강과 같은 논리를 편다면, “중국 민족은 한국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므로 한민족의 일부이며, 중국 땅 전체는 본래 한민족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이다. 결국 고힐강의 ‘칠족론’은 학문적 논증이라기보다는, 주변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불과했다.

2.3. 지도에 각인된 서사

글로 쓰인 이러한 이야기는 지도를 통해 눈으로 보게 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교과서에는 『청조전성시대강역도』(淸朝全盛時代疆域圖)라는 지도가 실려 있는데, 이 지도는 조선을 청나라 영토의 일부로 뚜렷하게 색칠해 놓았다 [9]. 이는 ‘칠족론’이라는 민족 이론이 결국 영토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민족이 중국을 구성하는 민족 중 하나라는 글의 주장은, 한민족의 나라인 조선이 중국의 영토라는 지도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글과 지도를 결합하는 방식은 교육적으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학생들은 한민족이 중국의 일곱 민족 중 하나라는 설명을 읽고, 곧바로 조선이 중국 영토로 그려진 지도를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글의 주장은 지도를 통해 ‘객관적인 사실’처럼 보이게 되고, 지도는 글을 통해 그 정당성을 얻는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세대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은 의심할 여지 없는 ‘상식’으로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9]. 1923년의 이 교과서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중국의 팽창주의적 역사 이야기의 씨앗을 교실에 뿌린 중대한 사건이었다.

3. 정의할 수 없는 것의 정의: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과 최대 강역의 원칙

고힐강이 교과서를 통해 뿌린 씨앗은 그의 제자 담기양에 이르러 거대한 학문적 체계로 꽃을 피웠다. 담기양이 주도하여 펴낸 『중국역사지도집』은 20세기 중국 역사지리학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는 동시에, ‘더 큰 중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학문의 권위로 포장하여 공식화한 결정적인 도구였다 [10]. 이 지도집은 단순한 지도 모음이 아니라,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특정한 이념적 답을 제시하는 하나의 거대한 선언문과 같았다.

3.1. 국가적 기념사업으로서의 지도집 편찬

『중국역사지도집』 편찬은 한 학자의 연구를 넘어선 국가적인 프로젝트였다. 그 시작은 1954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청나라 말기 학자 양수경(楊守敬)의 『역대여지도』(歷代輿地圖)를 수정하고 보완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부터였다 [11]. 이 사업의 실무를 1955년부터 이끈 인물이 바로 담기양이었다. 그는 스승인 고힐강과 함께 1955년에 고대사 부분의 예비판을 내놓으며 고힐강의 역사관과 철학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후 수십 년의 작업 끝에 1982년, 총 8권으로 이루어진 완결판 『중국역사지도집』이 세상에 나왔다 [10].

이 지도집은 출간되자마자 중국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중국 학계는 이를 “최근 100년 이래 가장 완벽하게 만들어진 역사 지도이며, 역대 지도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성과”라고 극찬했다 [12]. 이러한 평가 덕분에 지도집은 중국의 모든 고대사 연구에서 표준적인 기준으로 사용되었고, 그 권위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3].

3.2. ‘총편례(總編例)’의 해부: 이데올로기적 설계도

『중국역사지도집』의 핵심적인 생각은 서문 격인 ‘전언(前言)’과 지도 제작의 원칙을 설명한 ‘총편례(總編例)’에 담겨 있다 [10]. 이 부분들은 지도집의 학문적인 겉모습 속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설계도와 같다.

먼저 ‘전언’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몇십 개의 민족이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각 소수민족이 각각의 역사 시기에 중원 왕조에 예속을 당했건 아니면 자립 정권을 유지했든 간에 모두 중국의 일부분이다(都是中國的一部分).” [10]

이 문장은 지도집 전체를 꿰뚫는 대원칙을 보여준다. 즉, 역사상 중국 땅 안에서 활동했던 모든 민족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중국’의 구성원으로 본다는 것이다 [10]. 이는 고구려나 발해처럼 명백한 독립 국가의 역사조차 ‘중국사’의 틀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이러한 대원칙을 구체적인 지도 제작 방법으로 바꾼 것이 바로 ‘총편례’의 제13항이다. 이 조항은 이 지도집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면서, 가장 교묘한 논리가 숨어있는 곳이다.

“18세기 50년대 청조가 통일을 완성한 이후, 19세기 40년대 제국주의 침략 이전까지의 중국 판도는, 몇천 년의 역사 발전이 형성한 ‘중국의 범위’이다. 역사 시기에 이 범위 안에서 활동했던 민족들은 모두 중국 역사상의 민족이며, 이들이 건립한 정권은 모두 역사상의 중국의 일부분이다.” [10]

이 원칙은 ‘역사상의 중국’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역사상 영토가 가장 넓었던 청나라의 최대 영토 시기(1750년대-1840년대)라는 단 하나의 특정 시점에 고정되어 있다 [14]. 이는 역사 해석에 있어 심각한 시대착오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즉, 수천 년 전 고대 국가의 영토를 18세기 제국의 영토를 기준으로 재단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한번 팽창한 영토는 역사적으로 절대 축소되지 않는다는 ‘지도학적 래칫(cartographic ratchet)’ 효과를 만들어, 과거의 모든 영토를 현재의 잠재적 영유권으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14].

담기양의 이 원칙은, 정치적인 목표를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교묘한 기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넓은 중국을 만든다’는 노골적인 정치적 목표가, ‘청나라 최대 영토를 역사적 중국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학술 원칙으로 둔갑한다 [10]. 이 원칙이 적용되는 순간,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역사적 영토가 이 최대 판도와 일부 겹치는 한민족의 역사는 자동적으로 ‘중국사’의 일부로 흡수된다. 이제 논쟁의 초점은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였는가?”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고구려는 우리가 ‘역사적 중국’으로 정의한 공간 안에 존재했는가?”라는 방법론적 질문으로 바뀐다. 이는 반박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를 만든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치적 주장을, 미리 정해놓은 방법론의 논리적 결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 지도집은 팽창주의 역사관을 정당화하고 학문적으로 공인하는 가장 강력하고 세련된 도구가 되었다.

4. 지도로 위조된 역사: 지도 제작 수정주의 사례 연구

담기양이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세운 ‘최대 강역의 원칙’과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한반도 관련 역사를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구체적인 지도를 만드는 데 직접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장에서는 지도집이 어떻게 고대사부터 중세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의 영토사로 편입시키려 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왜곡은 한국 학계의 연구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그 허구성이 명백히 드러난다.

4.1. 허구의 만리장성: 연·진 장성의 한반도 연장

지도집의 가장 눈에 띄는 왜곡 중 하나는 전국시대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의 장성이 한반도 북부 깊숙이, 평양 근처까지 이어진 것으로 그린 점이다 [10]. 이는 중국의 동북쪽 경계를 압록강 남쪽으로 확장하여, 고대 한반도 북부가 일찍부터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은 어떠한 학술적 근거도 없다. 한국사학자 공석구의 연구에 따르면, 이 지도 표기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 기록을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물이다 [13]. 중국 측이 근거로 드는 기록에 나오는 ‘장새(障塞)’나 ‘장(障)’은 국경 지대에 설치된 작은 방어 시설이나 요새를 뜻하는 것으로, 수천 리에 걸쳐 쌓은 ‘장성(長城)’과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13]. 담기양의 지도집은 이 둘을 의도적으로 뒤섞어, 존재하지도 않았던 장성을 한반도 안에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지도집이 나온 뒤 중국 학계가 진나라 장성의 유적으로 주목했던 평안남도의 대령강 장성 역시, 이를 발굴한 북한 학계에서는 고구려 혹은 고려 시대의 성으로 보고 있어 중국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13]. 결국 지도집에 그려진 한반도 내의 장성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최대 강역 원칙’에 따라 중국의 고대 영토를 최대한 넓히려는 이데올로기적 필요에 의해 창조된 가상의 선에 불과하다.

4.2. 왕조 지도의 왜곡: 한(漢)에서 원(元)까지

장성 문제뿐만 아니라, 지도집은 중국의 여러 통일 왕조 및 정복 왕조 시대 지도에서 일관되게 한반도 북부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표기하는 왜곡을 반복한다.

  • 한사군(漢四郡): 지도집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했다는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확고하게 위치시킨다 [10]. 그러나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논쟁이 뜨거운 주제이며, 많은 한국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그 위치를 한반도 바깥인 요동 지역으로 보고 있다 [15]. 지도집은 이러한 학문적 논쟁을 무시하고, 한반도 북부가 한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일방적인 시각만을 절대적인 사실인 것처럼 표기한다.
  • 위(魏)나라: 삼국시대 지도에서는 조조의 위나라가 평양 일대까지 장악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10]. 이는 당시 위나라가 남쪽의 촉(蜀), 오(吳)와 치열하게 대립하던 상황에서 요동을 넘어 한반도 깊숙이까지 안정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군사적, 행정적 여력이 있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낳는다 [14].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요서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격한 기록이 나타나는 등, 당시의 힘의 관계는 지도집의 묘사와 정반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 당(唐), 요(遼), 금(金), 원(元)나라: 이후 시대의 지도에서도 왜곡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당나라 시기에는 고구려 멸망 후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근거로 평양 이북을 당의 영토로 그리고 [10], 요, 금, 원과 같은 정복 왕조 시기에는 이들을 ‘통일적 다민족국가’ 이론에 따라 중국 왕조로 규정한 뒤, 그 영토가 평양 또는 개성 이북까지 미쳤다고 묘사한다 [10]. 특히 원나라 시기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상당한 정치적 간섭을 받았지만, 행정적으로는 독립성을 유지한 별개의 국가였다. 그러나 지도집은 이러한 복속 관계를 직접적인 영토 지배와 똑같이 취급하여 고려의 영토를 원나라의 판도 안으로 그려 넣는다 [14].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중국역사지도집』이 한반도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한 실수들의 모음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 북부는 원래 중국 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고고학적 증거가 없거나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부분까지도 무시하며 모든 사실을 꿰어 맞춘, 거대하고 체계적인 작업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표는 이러한 왜곡의 패턴을 시대별로 요약하여 보여준다.

표 4.1: 담기양 『중국역사지도집』의 한-중 경계 묘사에 대한 비교 분석

역사 시기 담기양 지도집의 묘사 비(非)중국 사료 및 고고학 기반의 지배적 학설 핵심 쟁점 및 인용 근거
연·진 (기원전 3세기경)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연장됨. 장성은 요동에서 끝남. 한반도 내 연장 증거 없음. 공석구의 ‘장새(障塞)’와 ‘장성(長城)’ 개념 혼동 비판 [13]. 고고학적 유물 부재.
한나라 (기원전 108년경)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확고히 설치됨. 한사군의 위치와 범위는 논쟁 중이며, 다수의 학자는 요동으로 비정함. 『한서(漢書)』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 간의 불일치 [15].
위나라 (서기 240년경) 위나라 영토가 평양까지 확장됨. 고구려가 해당 지역을 통제. 위의 원정은 점령이 아닌 일시적 공격이었음. 위나라가 촉, 오와 대치하며 한반도까지 전력 투사할 능력의 부재 [14].
당나라 (서기 668년경) 평양 이북의 옛 고구려 영토를 당의 영토로 편입. 안동도호부는 단명했으며, 실질적 통치는 미미했고 신라와 발해에 의해 축출됨. 당의 행정 지배 기간과 깊이를 과장함 [14].
원나라 (서기 1270년대) 쌍성총관부를 근거로 개성 이북을 원의 영토로 편입.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정치적 영향력 하에 있었으나 행정적 독립성을 유지함. 정치적 종속 관계와 직접적인 영토 편입을 혼동함 [14].

5. 영속하는 유산: 학문적 정전(正典)에서 정치적 독트린으로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이 만든 역사관은 단순한 학문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중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 깊고 오래가는 영향을 미쳤다. 이 지도집은 중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만드는 표준이 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팽창주의적 역사관을 퍼뜨리는 공인된 도구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동북공정과 같은 국가적 역사 프로젝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5.1. 제도화와 국제화: 정설(定說)이 된 왜곡

중국 내에서 『중국역사지도집』은 출간되자마자 교육 및 연구 현장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수십 년에 걸친 국가적 지원과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후광은 그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지도집이 보여주는 왜곡된 국경선과 역사 이야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의 교과서와 대중 역사책에 그대로 실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생각은 학문적 가설이 아닌, 의심할 여지 없는 ‘상식’으로 중국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새겨졌다 [16]. 시진핑 주석의 2017년 발언은 바로 이렇게 수십 년간 쌓이고 공식화된 역사 교육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국가 주도의 역사관이 국제적으로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서구 학계와 정부 기관들은 이 지도집의 학문적 권위와 방대한 규모에 압도되어, 그 안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비판적으로 살피지 않은 채 주요 학술 자료로 인용했다. 대표적으로, 서양의 중국사 연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중국사(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시리즈는 담기양의 지도를 자주 사용한다 [17]. 또한, 2012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펴낸 한반도 통일 관련 보고서는 불과 수십 쪽 분량임에도 이 지도집을 무려 24차례나 인용하며, 한중 간의 역사적 국경 문제를 논하는 데 거의 유일한 근거로 삼았다 [18]. 이는 중국의 국가주의적 목표가 어떻게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적으로 포장되어 국제적인 공신력을 얻고, 전 세계인의 역사 인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5.2.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학문적 초석

담기양의 지도집이 남긴 가장 문제적인 유산은 2002년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국가적 역사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의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동북공정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 역사로 규정하여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연구 프로젝트로, 노골적인 역사 왜곡으로 인해 한국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19].

이 지점에서 담기양의 지도집과 동북공정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동북공정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20]. 그것은 담기양의 지도집이 수십 년 전에 이미 학문적으로 정리해 놓은 역사관과 영토관을 정치적으로 다시 확인하고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후속 작업에 가깝다. 담기양의 지도집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최대 강역 원칙’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활동했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이미 ‘역사적 중국의 범위’ 안에 포함시켰다 [14]. 동북공정은 바로 이 지도집이 제공한 ‘학술적’ 근거와 지도 위에서,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14]. 즉, 지도집은 동북공정의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었다.

결국 고힐강의 1923년 교과서에서 시작하여, 마오쩌둥의 1954년 지시, 담기양의 1982년 지도집 완간, 그리고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중국이라는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얼마나 길고 전략적으로 역사 서술을 관리하고 이용해왔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연속적인 과정이다. 국가의 지원을 받은 학문이 특정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가 학문적 ‘정전’으로 공인된 후, 수십 년이 지나 지정학적 목표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논리로 활용되는 정교한 공생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거를 통제하는 것이 현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미래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주는, 역사와 국가권력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론

본 보고서는 2017년 시진핑 주석의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발언의 지적, 역사적 계보를 추적함으로써, 이 서사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20세기 중국의 특수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탄생한 현대적 구성물임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 고힐강과 담기양은 주변 민족의 역사를 ‘대중화’라는 틀 안에 흡수 통합하는 새로운 국가 서사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분석 결과, 이 거대한 서사가 구축되는 과정에는 몇 가지 핵심적인 기제가 작동했음이 드러났다. 첫째는 고힐강의 ‘칠족론’에서 나타난 ‘역사적 관계의 전도(顚倒)’이다. 그는 독립된 정치체 간의 상호작용의 증거를, 단일 국가 내의 내부적 구성 증거로 둔갑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통해 주변 민족을 중국 민족의 일부로 규정하는 민족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둘째는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정립된 ‘방법론적 세탁’이다. 그는 ‘청나라 최대 강역’이라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기준을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지도 제작 원칙으로 제시함으로써, 팽창주의적 영토관을 반박하기 어려운 학문적 결론으로 위장했다. 이러한 기제들을 통해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반도의 고대사는 체계적으로 왜곡되었고, 그 결과물은 국가 공인 지도집이라는 권위를 업고 중국 내부는 물론 국제 사회에까지 무비판적으로 확산되었다.

궁극적으로 고힐강과 담기양의 사례는 역사학과 지도 제작이 단순한 과거의 기록과 재현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영토적 야심을 정당화하며 미래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남긴 유산은 동북공정이라는 구체적인 역사 프로젝트로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갈등과 상호 불신을 심화시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지도 제작 방법론은 현대 중국의 영토적 자기 인식과 주변국과의 역사 분쟁에 대응하는 기본적인 관점을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역사 서술이 언제나 특정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사료에 대한 엄밀한 비판과 다양한 관점의 교차 검증을 통해 국가주의적 서사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학문적 노력이 왜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과거를 둘러싼 투쟁은 결국 현재의 정체성과 미래의 질서를 둘러싼 투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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