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馮時. 夷夏東西與華夏一統[J]. 吉首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24, 45[01]: 1-11.
冯时. 夷夏东西与华夏一统[J]. 吉首大学学报[社会科学版], 2024, 45[01]: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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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夏東西與華夏一統

이하동서와 화하통일

풍시馮時
[중국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북경北京100101]
作者簡介: 馮時, 男, 中國社會科學院學部委員,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研究員, 博士生導師.
필자 소개: 풍시馮時, 남성, 중국사회과학원 학부위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 박사과정 지도교수.

摘要:

中國的上古文明並非一統的局面, 而呈現為夷夏東西的形勢. 以太行山為界, 其東分佈著東夷文化, 是為今日以彝族為核心的西南少數民族的古代文化; 其西則分佈著華夏文化, 也就是華夏民族的古代文化. 這一事實通過文字起源和考古學研究已充分而清晰地展現出來. 早期文明夷夏東西的形勢至夏王朝的建立而得到改變, 夏後通過確定其王朝正統文字及重定天地之中的措施, 確立了華夏文明統一的宗教觀與政治觀. 這種以地理之中及通神文字所建立的人君與至上神的固有聯繫, 使後繼王朝必須肩負起繼承前朝遺產的使命, 即恪守天地之中及通神的文字, 這是王權合法性的根本保證. 正是這一政治與宗教傳統, 使中華文明綿延數千年而不絕.

초록:

중국의 상고 문명은 일원화된 상태가 아니라, 이하夷夏가 동서로 나뉜 양상을 띠었다. 태행산太行山을 경계로 하여, 그 동쪽에는 동이東夷 문화가 분포했는데, 이는 오늘날 이족彝族을 중심으로 한 서남 지역 소수민족의 고대 문화이다. 그 서쪽에는 화하華夏 문화가 분포했으며, 이는 곧 화하華夏 민족의 고대 문화였다. 이러한 사실은 문자 기원과 고고학 연구를 통해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초기 문명의 이하夷夏 동서東西 구도는 하夏 왕조의 성립으로 인해 변화되었고, 하후夏后는 왕조의 정통 문자를 확립하고 천지 중심의 질서를 새로 정립하는 조치를 통해 화하 문명의 통일된 종교관과 정치관을 세웠다. 이러한 지리적 중심과 신과 통하는 문자를 통해 형성된 인간 군주와 최고신 간의 고유한 연결은, 후대 왕조들로 하여금 앞선 왕조의 유산을 계승해야 하는 사명을 지우게 했으며, 곧 천지 중심과 신과 통하는 문자를 준수하는 것이 왕권 정통성의 근본 보장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적·종교적 전통이 중화문명이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원동력이 되었다.

關鍵詞: 中華文明; 東夷; 華夏; 文字
키워드: 중화문명中華文明; 동이東夷; 화하華夏; 문자文字

목차

1. 문자기원의 이하동서. 文字起源的夷夏東西

2. 상고 우주관에서의 이하 차이. 上古宇宙觀之夷夏差異

3. 눈과 영혼을 통한 신과의 교감을 보는 종교관에서 드러나는 이하의 차이. 眼目通神宗教觀的夷夏之別

4. 이하동서에서 화하통일로. 夷夏東西到華夏一統

결론 結論

참고문헌參考文獻:

영문초록

《公羊傳·隱公元年》云: “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 何謂”大一統”? 《漢書·王吉傳》說得很清楚: “《春秋》所以大一統者, 六合同風, 九州共貫也.” 很明顯, “大一統”的本義其實就是重視一統①, 反對分裂割據, 這集中體現了中國文化以居中而治為鮮明特徵的傳統政治觀.

①《荀子·性惡》: “大齊信焉而輕貨財.” 楊倞《注》: “大, 重也.” 《荀子·非十二子》: “上功用、大儉約而僈差等.” 王念孫《讀書雜誌》: “大, 亦尚也, 謂尊尚儉約也.” 此皆”大”訓重視之例.

《공양전公羊傳》〈은공원년隱公元年[BC 722]〉에 이르길, “어째서 ‘왕정월王正月’이라 말했는가? ‘대일통大一統’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일통”이란 무엇인가? 《한서漢書》〈왕길전王吉傳〉에서는 아주 명확히 말하고 있다.” 《춘추春秋》가 대일통이라 한 이유는, 천하가 같은 풍속을 따르고, 구주九州가 함께 꿰뚫려 있기 때문이다.” 매우 분명하게, “대일통”의 본래 뜻은 사실상 하나됨을 중시하는 것이며①, 분열과 할거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문화가 가운데에 거하여 다스린다는 뚜렷한 특색을 지닌 전통적 정치관을 집중적으로 드러낸다.

① 《순자荀子》〈성악性惡〉: “큰 제후가 그것을 믿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다.” 양량楊倞의 주注: “대大는 중重이라는 뜻이다.” 《순자》〈비십이자非十二子〉: “위로는 공용을 숭상하고, 검약을 중요시하며, 차등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왕념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誌》: “대大는 또한 숭상尚의 뜻이니, 검약을 존중하고 숭상한다는 뜻이다.” 이 모두 “대大”가 중시한다는 뜻이라는 예이다.

春秋時代, 這種重視一統事業的”大一統” 觀念長期影響著我們的認識, 秦漢以後長期的一統局面深刻地束縛著後人的思想, 以至於使學者習慣以一種一統的政治觀審視我們的上古文明, 認為其不僅政體一統, 而且文字也應一統. 然而考古學證據所展現的事實卻並非如此. 史料表明, 中國前國家時代的上古文明並不具有一統的形勢, 而呈現為夷夏東西的格局. 這一夷夏兩種文化的畛界就是太行山, 太行山以東分佈著東夷文化, 太行山以西則分佈著華夏文化, 這個事實印證了傅斯年先生早年據對文獻史料的梳理而提出的夷夏東西的觀點[1]. 這種夷夏交勝的局面自距今八千年前甚至更早就已形成, 直到家天下的夏王朝的建立才徹底改變. 顯然, 正確地認識這一基本史實, 對於正確認識中國上古文明是非常重要的.

[1] 傅斯年. 夷夏東西說[J]. 國立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集刊[外編], 1935: 1093–1134.

춘추시대, 이러한 일통一統의 대업을 중시하는 “대일통大一統” 관념은 오랫동안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끼쳤고, 진·한 이후 장기간 지속된 통일된 정세는 후대 사람들의 사유를 깊이 억눌러, 학자들이 자연스레 상고 문명을 일통된 정치관으로 바라보게 했으며, 그 결과 정치체뿐만 아니라 문자 또한 하나로 통일되었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가 보여주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료에 따르면, 중국의 국가 성립 이전 시기의 상고 문명은 일통된 형태가 아니었으며, 이하夷夏 동서의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이 두 문화의 경계선이 바로 태행산太行山이며, 태행산 동쪽에는 동이 문화가, 서쪽에는 화하 문화가 분포했다. 이 사실은 부사년傅斯年 선생이 문헌 사료를 정리하며 제시했던 ‘이하동서夷夏東西’라는 견해를 입증해 준다[1]. 이러한 이하가 서로 엇갈려 우세했던 국면은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 심지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천하를 집안이 소유하게 된 하나라夏王朝의 성립으로 인해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분명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중국 상고 문명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1. 문자기원의 이하동서. 文字起源的夷夏東西

中國文字的起源和發展經歷了從宗教性向世俗化的轉變. 文字產生於人與神靈溝通的需要, 這意味著原始文字對於神靈而言必須是不教而識的, 否則人神的溝通就無法實現. 顯然, 建立一種人神共知的符號體系只能通過對客觀物象的忠實描寫, 這就是象形. 然而, 象形造字的方法僅能創造出具有名詞性質的字詞, 而只有名詞的文字是無法記錄語言的, 這決定了早期書面語的形式一定不同於晚世以豐富的實詞和虛詞所構成的書面語特點. 這些問題當然都是我們在進行文字起源研究的時候必須關注的.

중국 문자의 기원과 발전은 종교성에서 세속화로의 전환 과정을 거쳤다. 문자는 인간이 신령과 소통할 필요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곧 원시 문자가 신령에게 있어서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과 신의 소통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간과 신이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기호 체계를 세우려면, 객관적 사물을 충실히 묘사하는 방법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상형象形이다. 그러나 상형 문자 창제 방식은 명사 성격의 글자만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명사뿐인 문자로는 언어를 기록할 수 없다. 이는 곧 초기 문어書面語의 형식이, 훗날의 실사와 허사를 풍부하게 갖춘 문어의 특징과는 분명히 달랐음을 뜻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문자 기원의 연구 과정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지점들이다.

如果前國家時代的上古文化並沒有形成一統局面的話, 那麼很明顯, 上古先民所使用的文字也就一定不可能只有一種. 這意味著探討中國文字的起源並不能僅針對漢字的起源研究, 而應廣及生活在黃河流域與長江流域的古代先民所使用的文字的起源研究. 因此, 文字起源的探索必須首先明確使用其文字的先民的族屬, 理由很簡單, 原始文字的宗教性使象形造字法成為先民創造文字普遍採用的方法[2].

[2] 馮時. 中國古文字學概論[M].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6: 10–11.

만일 전前국가 시대의 상고上古 문화가 일원화된 정세를 형성하지 못했다면, 상고의 선민先民들이 사용한 문자 역시 하나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곧 중국 문자 기원의 탐구가 한자漢字의 기원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며, 황하黃河 유역과 장강長江 유역에 살았던 고대 선민들이 사용한 문자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자 기원의 탐색은 우선적으로 해당 문자를 사용한 선민의 종족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원시 문자의 종교성으로 인해 상형 문자 창제 방식은 선민들이 문자를 만들 때 널리 사용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2].

然而, 在不同的文字體系中, 相同的象形符號, 其所表達的意義可能完全不同, 如果不將使用不同文字的文化或族屬加以區別, 那麼基於不同文字體系的文字釋讀就將毫無意義. 因此, 通過考古學研究區分不同的文化顯然是文字起源研究不可或缺的基礎工作.

그러나 서로 다른 문자 체계에서는 동일한 상형 기호라 하더라도 표현하는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문자를 사용하는 문화나 종족을 구분하지 않으면, 다른 문자 체계에 대한 해독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구분하는 일은 문자 기원 연구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기초 작업이다.

20世紀90年代初, 山東鄒平丁公龍山文化晚期遺址出土約屬公元前2300年的陶刻文字, 存十一字[圖1][3],

[3] 欒豐實、方輝、許宏. 山東鄒平丁公遺址第四、五次發掘簡報[J]. 考古, 1993[4]: 295–299; 385–386.

1990년대 초, 산동山東 주평鄒平 지역의 정공丁公 용산문화 말기 유적에서 BC 2300년경에 해당하는 도기에 새긴 문자가 출토되었는데, 총 11자의 글자가 남아 있다[그림1][3].

圖1 山東鄒平丁公出土龍山時代契刻文字
그림1 산동 추평 정공에서 출토된 용산시대의 계각문자

具有嚴整的書面語形式, 顯然已屬於成熟的文字. 丁公文字的結構與以殷商甲骨文為代表的漢字體系大相徑庭, 反與今日分佈於滇川黔桂的彝族古文字相同, 可據以進行完整的釋讀.

이들은 엄격한 문어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명백히 성숙한 문자에 속한다. 정공 문자 구조는 은상殷商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한자 체계와는 매우 다르며, 오히려 오늘날 운남雲南·사천四川·귀주貴州·광서廣西 일대에 분포하는 이족彝族의 고대 문자와 일치하며, 이를 통해 완전한 해독이 가능하다.

其漢字直譯為: “魅卜, 阿普瀆祈, 告. 吉長, 百雞拐爪.” 意即為惡鬼諸邪而卜, 祈求彝族之祖公瀆, 以行告祭. 引吉, 各種雞卦均已應驗. 卜辭反映了彝族常見的百解祭, 目的在於占卜驅邪求吉[4].

[4] 馮時. 山東丁公龍山時代文字解讀[J]. 考古, 1994[1]: 37–54.

그 한자 직역은 다음과 같다. “매복魅卜, 아보독기阿普瀆祈, 고告. 길장吉長, 백계괴조百雞拐爪.” 이는 악귀와 여러 사악한 것들을 점치고, 이족의 조상인 공독公瀆에게 제사를 고하는 것을 뜻한다. 길함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가지 닭점이 모두 효험을 보였다는 내용이다. 이 점사卜辭는 이족에게 흔한 ‘백해제百解祭’ 의례를 반영한 것으로, 점을 통해 사악함을 몰아내고 길운을 기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4].

如果丁公文字屬於古彝文, 那麼山東龍山文化就應該是彝族的早期文化, 而不會是華夏文化. 今日定居於我國西南地區的彝族, 其族源問題一直未能徹底解決, 其源出東西南北各有主張, 眾說紛紜. 然而如果將這些觀點置於上古時代夷夏東西的文化格局下考慮, 看似矛盾的現象就不是不可能調和的. 山東地區的古代部族本稱東夷, 而新中國成立前, 今日彝族的族稱正作”夷” ①.

① 彝族傳統文獻始終自稱其族為”夷”, 新中國成立後, 誤以”夷” 有歧視之義, 遂改為”彝” .

정공丁公에서 출토된 문자가 고이문古彝文에 속한다면, 산동山東 용산문화龍山文化는 이족彝族의 초기 문화여야 하며, 화하문화華夏文化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서남 지역에 정착한 이족의 족원族源 문제는 아직까지도 철저히 해결되지 않았고, 그 기원이 동서남북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주장이 있어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상고 시대 이하夷夏의 동서 문화 구도 안에서 생각한다면, 겉보기에는 모순된 듯한 현상도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다. 산동 지역의 고대 부족은 본래 ‘동이東夷’라 불렸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에는 오늘날 이족이라 불리는 민족의 명칭이 바로 ‘이夷’였다.

① 이족彝族의 전통 문헌에서는 줄곧 자신들의 민족을 ‘이夷’라 불러 왔으며, 신중국 수립 이후 ‘이夷’라는 말에 차별적 의미가 있다는 오해로 인해 ‘이彝’로 바꾸게 되었다.

當然, 這種族名相同的現象並不像表面看上去那樣簡單, “夷”字讀音為ni21, 漢意為人, 這個事實恰可以建立今之彝族與上古東夷的聯繫. 殷商卜辭和金文多記商王對居住於山東及淮水流域的族群用兵, 其所伐之方伯即稱“人方”, 與彝族以“人”名族的事實相合, 證明今之彝族實即古之東夷. 人方於西周易名為東夷, 其後隨著華夏勢力的擴張, 東夷或與華夏融合, 或受華夏勢力的壓迫逐漸南遷, 至宋元時代終於集中安居於西南地區. 西周早晚不同时代的銘文分別見有東夷、淮夷、南淮夷、南夷的稱謂變化, 也可見夷族逐漸南遷的史實.

당연히 이러한 동일한 족명 현상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夷’ 자의 음은 ni²¹이고, 한나라 때의 뜻은 ‘사람’이며, 이 사실은 오늘날의 이족彝族이 상고 시대의 동이東夷와 연관되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은상殷商의 복사卜辭와 금문金文에는 상왕商王이 산동山東과 회수淮水 유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에 대해 출병한 기록이 많으며, 그가 정벌한 방백方伯을 ‘인방人方’이라 칭했는데, 이는 이족彝族이 ‘사람人’으로 이름을 삼은 사실과 일치하므로, 오늘날의 이족彝族이 곧 고대의 이족夷族임을 증명한다.

인방人方은 서주西周 시기에 동이東夷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 뒤 화하華夏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동이東夷는 화하華夏와 융합되거나, 화하의 압박을 받아 점차 남쪽으로 이주해 송宋·원元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서남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서주西周의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명문金文에서는 동이東夷·회이淮夷·남회이南淮夷·남이南夷 등의 호칭이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이족夷族이 점차 남쪽으로 이주해간 역사적 사실을 잘 보여준다.

今日彝族的歷史能否上溯到新石器時代, 相信這是很多人心中的疑惑. 討論這一問題可以先從彝族重視世系的傳統分析. 彝人頗重父系親屬關係, 對父系世次可追溯很遠, 一般在幾十代以上, 且男子必須從小背誦家譜, 否則在宗族中就沒有地位. 據彝文典籍《帝王世紀·人類歷史》所記貴州水西土司安氏家譜可知, 自人類始祖希母遮到撮侏渎之世歷三十代, 撮侏渎之子渎母吾傳八十四代到安坤, 於清康熙四年[1665年]被吳三桂所滅, 安坤以後到民國十九年又傳六代, 共計一百二十代[5]. 若參考孔子世系, 每代可以三十二年計, 則彝族歷史已有三千八百年以上. 若參考安坤以後至民國十九年有確切紀年的彝族世系, 每代可以四十四年計, 則彝族歷史至少已有五千年.

[5] 丁文江. 爨文叢刻: 甲編[M]. 上海: 商務印書館, 1936: 146.

오늘날 이족彝族의 역사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 우선 이족彝族이 족보와 계보를 중시하는 전통을 분석해볼 수 있다. 이족彝族은 부계 혈연 관계를 중시하며, 부계 세대를 매우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십 세대 이상을 추적할 수 있으며, 남자 아이는 어려서부터 반드시 족보를 암기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씨족 내에서 지위를 가질 수 없다.

이족彝族의 문자 고전인 《제왕세기帝王世紀》〈인류역사人類歷史〉에 따르면, 귀주貴州 수서土司 안씨安氏의 가계는 인류의 시조 희모차希母遮로부터 촬주독撮侏渎에 이르기까지 30세대를 거쳤으며, 촬주독撮侏渎의 아들 독모오渎母吾로부터 안곤安坤에 이르기까지 84세대를 계승했고, 안곤은 청 강희康熙 4년[1665]에 오삼계吳三桂에게 멸망당했다. 안곤 이후로 민국 19년까지 또 6세대를 이어, 총 120세대를 전했다고 한다[5].

공자孔子의 세대를 기준으로 세대당 32년으로 계산하면, 이족彝族의 역사는 이미 3, 800년이 넘는다. 안곤 이후 민국 19년까지는 정확한 연대가 있으므로, 세대당 44년으로 계산하면 이족彝族의 역사는 적어도 5000년이 넘는다.

同時需要注意的是, 彝人取名採用父子連名制, 即父名的最後一字即為子名的第一字. 然而據馬長壽先生研究, 自渎母吾到六祖之間遺漏代數甚多, 不能銜接[6], 如此看來, 彝族的歷史必更為悠久. 其實對於今日彝族文化與歷史上東夷文化的聯繫, 考古學、歷史學、文獻學與民族學的研究同樣提供了充分的證據, 有關問題我已有考證[4], 不贅述. 有趣的是, 今日彝人仍稱漢人為夏人[ʂɑ33][7], 這一稱謂特點顯然只能形成於夷夏交勝的時代, 是為上古夷夏東西史實的孑遺.

[6] 馬長壽. 彝族古代史[M].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7: 56.
[7] 果吉·寧哈. 論滇川黔桂彝族文字[M]. 北京: 民族出版社, 1988: 209.

동시에 유의할 점은, 이족彝族은 이름을 지을 때 부자연명제父子連名制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아들의 이름의 첫 글자가 된다. 하지만 마장수馬長壽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독모오渎母吾에서 육조六祖 사이에 여러 세대가 누락되어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6],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족彝族의 역사는 실상 더욱 오래되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이족彝族 문화와 역사 속 동이東夷 문화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고고학·역사학·문헌학·민족학의 연구에서 모두 충분한 증거가 제시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문제는 내가 이미 고증한 바 있으므로[4]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이족彝族은 한족을 여전히 하인夏人[ʂɑ³³]이라 부르는데[7], 이러한 호칭은 분명 이족夷族과 화하華夏가 패권을 다투던 고대 시대에 형성된 것이며, 고대 동서 양방의 역사적 관계를 드러내는 잔재라 할 수 있다.

誠然, 彝族歷史的古老並不意味著彝文的歷史也同樣古老, 這一問題並非不需要說明. 事實上, 古彝文文獻對彝文的創造多有記載[8], 至遲在東漢初年, 彝文由上帝派遣祭司宓阿叠創造的說法就已廣泛流行[5]. 《後漢書·西南夷列傳》所收《白狼歌》, 其原本或即彝文, 因歌中漢字記音所反映的語音特點與彝語極近, 從今日彝語支的文字分析, 也只有彝文與其適合[9]. 今存較早的古彝文文獻或屬蜀漢時期[10], 與《白狼歌》的時代恰好相當. 因此, 彝文在東漢時期已經發展為一種相當成熟的文字是沒有問題的. 更早的史料顯示, 《楚辭》中一些以漢語無法解釋的語詞, 卻可以在彝語中找到合理的答案[11–12]. 顯然, 彝文的創制時間可以追溯得更早.

[8] 武自立、紀嘉發、肖家成. 雲貴彝文淺論[J]. 民族語文, 1980[4]: 36–42.
[9] 馬學良、戴慶廈. 《白狼歌》研究[J]. 民族語文, 1982[5]: 16–26.
[10] 貴州省畢節地區民委. 彝文金石圖錄[M]. 成都: 四川民族出版社, 1989: 38.
[11] 陳士林. 《楚辭》“女嬃”與彝語mo21ȵi55[J]. 民族語文, 1991[2]: 31–34.
[12] 陳士林. 《楚辭》“兮”字說[J]. 民族語文, 1992[4]: 16.

물론 이족彝族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이문彝文의 역사도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설명이 필요하다. 실제로 고이문古彝文 문헌에는 이문彝文의 창제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며[8], 늦어도 동한東漢 초년에는 이문이 상제上帝가 제사장 복아첩宓阿叠을 보내 창제하게 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5]. 《후한서後漢書》〈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에 수록된 〈백랑가白狼歌〉는 그 원본이 이문彝文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 노래에 나오는 한자 음차는 음운 특징이 이족어彝族語와 매우 유사하다. 오늘날 이족어 계통의 문자 가운데에서도 이문彝文만이 여기에 부합한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9]. 현재 남아 있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고이문 문헌은 촉한蜀漢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10], 〈백랑가白狼歌〉가 만들어진 시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동한 시기에 이문彝文은 이미 상당히 성숙한 문자 체계로 발전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 이른 역사 자료에 따르면 《초사楚辭》에 나오는 한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부 어휘들이 이족어彝族語에서는 논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밝혀졌다[11–12]. 이는 이문彝文의 창제 시기를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추정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丁公文字屬於古彝文, 這一事實的確定為中國文字起源研究奠定了堅實的基礎, 它使我們有理由擺脫以“大一統”觀點看待上古文明的舊有認識, 建立起新的夷夏東西的文化視角, 並以這種新視角審視夷夏兩域不同文化的文字. 就東夷文字的解讀而言, 不僅與龍山文化同時代的良渚文化已經發現陶器和玉器契刻文字, 而且時代更早的大汶口文化和雙墩文化也見有陶器契刻文字. 這個傳統甚至可以一直追溯到距今八千年前河南舞陽賈湖新石器時代的龜甲文字[圖2], 這些文字無例外地都可以通過古彝文對比解讀[13].

[13] 馮時. 試論中國文字的起源[J]. 四川文物, 2008[3]: 46–49.

정공문자丁公文字는 고이문古彝文에 속하며, 이는 중국 문자 기원 연구에 견고한 기초를 세워 준 중요한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상고上古 문명을 ‘대일통大一統’의 시각으로만 보던 종래의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이하夷夏’ 동서 문화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이러한 시각에서 이하夷夏 양 지역의 서로 다른 문자 문화를 다시 살펴보게 한다. 동이東夷 문자의 해독에 있어서도, 용산문화龍山文化와 동시대의 양저문화良渚文化에서는 이미 도기와 옥기에 새긴 각계문자契刻文字가 발견되었고, 시대적으로 더 오래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쌍돈문화雙墩文化에서도 도기에 각계문자가 나타난 바 있다. 이 전통은 심지어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 하남 무양河南舞陽 가호賈湖 신석기 시대의 귀갑문자龜甲文字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그림2 참조]. 이 문자들은 예외 없이 고이문과의 비교를 통해 해독할 수 있다[13].

1. 河南舞陽賈湖出土龜甲文字; 2, 3. 良渚文化玉璧文字.
圖2 新石器時代文字

1. 하남 무양河南舞陽 가호賈湖에서 출토된 귀갑문자龜甲文字; 2, 3. 양저문화良渚文化 옥벽玉璧에 새겨진 문자
그림2 신석기 시대 문자

與東夷文字並存的華夏文字, 其發展脈絡也很清楚. 安陽殷墟的商代甲骨文顯然不是最早的漢字, 鄭州小雙橋商代遺址已經發現屬於公元前十五世紀的朱書文字, 而在距今四千年前的山西襄汾陶寺夏代早期遺址更發現朱書的”文邑” 二字[圖3], 相同的內容甚至在近八百年後仍見於殷墟的甲骨卜辭. 當然, 較夏代更早的河南汝州洪山廟遺址也發現了漢字體系的文字[13], 而對漢文字的溯源, 目前已可早到距今七千年前的湖北秭歸柳林溪陶器文字, 其與漢字體系一脈相承, 無疑就是漢字的祖先[14]. 事實上, 考古學所提供的直接史料對我們判斷文字起源之夷夏東西的事實是足夠充分的.

[14] 馮時. 華夏文明考: 源柳林溪先民宇宙觀[J]. 中國文化, 2023[1]: 1–20.

동이東夷의 문자와 공존했던 화하華夏의 문자 또한 그 발전 맥락은 매우 분명하다. 안양安陽 은허殷墟에서 나온 상대商代의 갑골문甲骨文은 분명 가장 이른 한자漢字는 아니다. 정주鄭州 소쌍교小雙橋의 상대 유적에서는 기원전 15세기에 해당하는 주서문자朱書文字가 발견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산서山西 양분襄汾 도사陶寺의 하대夏代 초기 유적지에서는 ‘문읍文邑’이라는 두 글자의 주서문자도 발견되었다[그림3]. 이와 동일한 내용은 800년 후 은허의 갑골 점사문卜辭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물론 하대보다 앞선 하남河南 여주汝州 홍산묘洪山廟 유적에서도 한자 체계의 문자가 발견되었다[13]. 한자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현재까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 호북湖北 자귀秭歸 류림계柳林溪 도기陶器 문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 문자는 한자 체계와 일맥상통하므로 의심할 여지 없이 한자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14]. 사실 고고학이 제공하는 직접적인 사료만으로도 문자 기원의 동서夷夏 차이를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1. 器物摹本; 2. 文字摹本.
圖3 山西襄汾陶寺出土夏代早期朱書文字

1. 기물器物 모사본; 2. 문자文字 모사본
그림3 산서 양분 도사 출토 하대 초기의 주서문자

夷夏文字兩源的事實同樣見於文獻的記載. 戰國時代的《世本》云: “沮誦、倉頡作書.” 可見在先秦時期, 人們認為創造文字的先賢並不是一位, 而是二聖. 清人段玉裁《說文解字注》以為沮誦與倉頡皆為黃帝之史官, 諸書多言倉頡而少言沮誦乃是因為文有省略, 這種解釋顯然不能令人接受. 唐蘭先生推測, 沮誦即為祝融[15], 近於事實. 在古史系統中, 祝融作為顓頊之子而屬東夷族系, 後又轉變為楚人的祖先①, 這顯然加深了東夷文化與楚文化的聯繫.

① 參見《山海經·大荒西經》《左傳·昭公二十九年》.
[15] 唐蘭. 中國文字學[M].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1: 52.

이하夷夏의 문자가 두 갈래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문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전국시대의 《세본世本》에는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선진先秦 시대 사람들은 문자를 창조한 성현이 한 명이 아니라 두 성인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사람 단옥재段玉裁는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서, 저송과 창힐이 모두 황제黃帝의 사관이었다고 보고, 여러 책에서 창힐은 자주 언급되지만 저송은 드물게 언급되는 이유를 문장의 생략 때문이라고 해석했는데, 이러한 설명은 분명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란唐蘭 선생은 저송이 곧 축융祝融일 것이라고 추정했으며[15], 이 해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고대사 체계에서 축융은 전욱顓頊의 아들로서 동이東夷족계에 속했고, 이후 초楚나라 사람들의 조상으로 변모했으니, 이는 동이東夷 문화와 초나라 문화의 연관성을 분명히 강화시킨 것이다.

①  《산해경山海經》〈대황서경大荒西經〉,  《좌전左傳》〈소공 29년〉 참조.

不無巧合的是, 與祝融相關的商代融氏遺存竟發現於山東青州[16-17], 這當然絕非偶然. 事實上, 先秦文獻對於沮誦與倉頡分別作為東夷文字與華夏文字創造者的暗示相當清楚, 這與我們通過對早期文字的研究所重建的夷夏文字東西兩源的事實完全符合.

[16 ]山東省文物考古研究所、青州市博物館. 青州市蘇埠屯商代墓葬發掘報告[J]. 海岱考古, 1989[1]: 21.
[17] 王迅. 東夷文化與淮夷文化研究[M].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4: 133.

공교롭게도 축융祝融과 관련된 상商나라 융씨融氏의 유물이 산동山東 청주青州에서 발견되었는데[16-17],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선진先秦 문헌은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이 각각 동이東夷 문자와 화하華夏 문자의 창조자였다는 점을 비교적 명확히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초기 문자 연구를 통해 우리가 복원한 이하夷夏 문자의 동·서 양원兩源 기원설과 정확히 부합한다.

當然, 在漢字一統天下之後, 創造漢字的倉頡的地位必將得到極大的提升, 而沮誦便逐漸淡出了歷史舞臺, 以至於人們在追述文字創造的時候只保留了對倉頡一人的記憶而已. 由於沮誦本是東夷文字的創造者, 而其遺存也正發現於山東夷地, 這種文化現象與我們考證的山東本屬東夷文化故域的事實若合符契.

물론, 한자漢字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한자를 창조한 창힐의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고, 반대로 저송은 점차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어 결국 후대 사람들이 문자 창제를 회고할 때 창힐 한 사람만 기억하게 되었다. 저송은 본래 동이 문자의 창시자였으며, 그 유물 또한 산동 지역의 동이 땅에서 출토되었기에, 이러한 문화 현상은 산동이 본래 동이 문화의 옛 지역이라는 우리의 고증 결과와 꼭 들어맞는다.

同樣重要的是, 通過對目前所見夷夏兩種文字的解讀, 可以明顯看出兩域先民精神追求的不同, 這導致了夷夏兩種文化的差異. 東夷文字普遍反映出他們更關注祈求天地、問卜通神、求吉避凶的人神溝通與吉凶占卜, 但西方華夏文字的內容雖也不乏對上帝的崇拜, 但其本質卻更強調受命於天的君權, 更注重先民在農業文明基礎上逐漸形成的文德教命, 顯然, 兩域文化的差異涇渭分明.

또한 중요하게는, 현재까지 밝혀진 이하夷夏 두 문자 체계의 해독을 통해, 양 지역 선민先民의 정신적 추구가 서로 다름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이하 문화의 차이를 낳았다. 동이 문자에서는 주로 하늘과 땅에 대한 기원, 점복을 통한 신과의 교통, 길흉을 묻고 재앙을 피하려는 인간과 신의 소통 및 점복의 내용이 나타나는 데 반해, 서방의 화하 문자는 상제에 대한 숭배도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명을 받은 군권君權을 더욱 강조하고, 농경문명을 토대로 선민이 점차 형성한 문덕文德과 교명敎命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분명히, 두 지역 문화는 뚜렷이 구분된다.

《禮記·表記》引孔子曰: “夏道尊命, 事鬼敬神而遠之, 近人而忠焉. ……殷人尊神, 率民以事神, 先鬼而後禮.” 殷商文化源於東夷, 故其重視占卜通神本即體現著東夷文化的固有傳統. 以此比較早期夷夏文字史料, 可以相信, 孔子的追憶其實正反映了上古時代之信史.

《예기禮記》〈표기表記〉에서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夏나라는 천명을 높이고, 귀신을 섬기되 공경하되 멀리했으며, 사람 가까이에 충성을 다했다. …… 은殷나라는 신을 숭상하여 백성들을 인도해 신을 섬기게 했고, 귀신을 앞세우고 예를 뒤에 두었다.” 은나라 문화는 동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점복과 신과의 소통을 중시한 것도 본래 동이 문화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초기 이하 문자 사료를 비교해 보면, 공자의 이러한 회고는 사실상 고대 시대의 진실한 역사信史를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상고 우주관에서의 이하 차이. 上古宇宙觀之夷夏差異

文字起源之夷夏東西的事實表明, 太行山東西兩域的上古先民本來使用着不同的文字, 那麼兩域的文化也就應該分屬於不同的族群. 很明顯, 建立不同地域文化與不同族群之間的聯繫, 對於考古學、歷史學以及民族學的研究都非常重要.

문자의 기원이 동쪽의 동이東夷와 서쪽의 화하華夏로 나뉘는 사실은, 태행산太行山을 경계로 한 동서 지역의 상고시대 사람들이 본래 서로 다른 문자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두 지역의 문화 역시 서로 다른 민족 집단에 속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서로 다른 지역 문화와 서로 다른 민족 집단 사이의 연관을 밝히는 일은 고고학, 역사학, 민족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探究夷夏兩種文化的差異, 除文字起源的研究之外, 考古學研究也並非無所作為. 《周易·繫辭上》: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雖然器物的比較常會受先民交流的影響而難以確定其真正的族屬, 但思想觀念一旦形成卻是相對固化和持久的, 對於區別不同的族屬和文化, 形上之道往往可以建立起相對明確的研判標準.

이하夷夏 두 문화의 차이를 탐구함에 있어, 문자의 기원 연구 외에도 고고학적 연구는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역周易》〈계사상繫辭上〉에서는 “형이상적인 것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적인 것을 기器라 한다”고 했다. 비록 유물器物의 비교는 종종 선민先民들 사이의 교류로 인해 그 정확한 민족적 소속을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일단 형성된 사상과 관념은 상대적으로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성격을 가지므로,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를 구분하는 데 있어 형이상적인 ‘도道’는 비교적 명확한 판단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

天極璇璣之天文觀.
천극天極과 선기璇璣에 대한 천문관

天文作為中國傳統文化之源, 其歷史已可上溯到距今八千年前甚至更早. 天文學產生的根本目的當然在於為農業生產提供準確的時間服務, 這不僅導致了與時空有關的傳統知識體系的形成, 而且也為王權的誕生奠定了基礎. 傳統天文觀測的重點集中在兩個天區, 其一是二十八宿所分布的黃赤道帶, 其二則是北斗所規劃的天球北極. 當然, 從上古政治觀與宗教觀的角度思考, 對北天極的觀測活動更具有意義.

천문학은 중국 전통문화의 근원으로, 그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문학이 발생한 근본 목적은 당연히 농업 생산을 위해 정확한 시간을 제공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시간과 공간에 관련된 전통 지식 체계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왕권의 탄생에도 기초를 제공했다. 전통적인 천문 관측에서 중점을 두는 두 개의 천구 영역이 있었는데, 첫째는 28수宿가 분포하는 황도대黃赤道帶, 둘째는 북두칠성北斗이 규정하는 천구 북극이다. 물론 상고시대의 정치관과 종교관의 관점에서 보면, 북천극北天極에 대한 관측 활동이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北天極是北天之中的不動點, 對其位置的確定並不容易, 在人們尚不能準確確定天極的時候, 簡單的做法就是將天極放大, 通過北斗的繞極運動首先規劃出北極天區, 當這個圓形的區域確定之後, 其圓心的位置自然就是天極. 這個由北斗繞極運動所規劃的圓形天區, 古人名之曰璇璣, 而北斗斗魁的前三星, 第一星名天樞, 意為極星, 而第二星名天璇, 第三星名天璣, 即反映了北斗繞極以規劃北極的事實. 因此, 璇璣之名既是北斗星名, 也是由北斗的璇、璣二星所規劃的北極天區的名稱.

북천극北天極은 북쪽 하늘에서 움직이지 않는 지점이며, 그 위치를 정확히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아직 천극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던 시기에는, 간단한 방법으로 천극의 범위를 확대하여 파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즉, 북두칠성北斗이 하늘의 중심을 도는 운동—즉, 요극운동繞極運動을 통해 먼저 북극 천구 영역을 설정하고, 이 원형 영역이 확정된 다음에는 그 중심점이 곧 천극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북두칠성의 요극운동으로 설정된 원형의 천구 영역을 고대인들은 ‘선기璇璣’라 불렀다. 북두칠성 중 앞부분의 세 별을 ‘두괴斗魁’라 하며, 그중 제1성은 ‘천추天樞’라 불리는데, 이는 극성極星을 의미한다. 제2성은 ‘천선天璇’, 제3성은 ‘천기天璣’라 불리며, 이 명칭 자체가 북두칠성이 선회하여 북극을 설정한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선기璇璣’는 북두칠성의 별 이름이자 동시에 ‘천선天璇’과 ‘천기天璣’ 두 별에 의해 설정된 북극 천구의 명칭이기도 하다.

璇璣的形象從平面上看是圓形, 但從側面看去, 則呈中央凸起的形狀. 這種想像不僅來源於璇璣中央的天一、太一二星因亮度極低, 其與規劃璇璣的明亮的北斗相比, 似可誘發璇璣的中心有着較北斗的距離比觀測者更遠的感覺, 於是古人想像其呈現凸起的形狀, 而且從原始宗教觀的角度講, 璇璣的頂點如果成為上帝的居所, 那也正好可以體現其至高無上的至上神的崇高地位. 事實上, 璇璣這種中央凸起的形象特徵不僅在《周髀算經》中有着詳細的描述, 而且也廣泛見於東方夷夷族文化的遺存.

‘선기璇璣’의 형상은 평면에서 보면 원형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가운데가 솟아오른 형상으로 상상되었다. 이러한 상상은 단지 시각적 착각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다. 선기의 중심을 구성하는 ‘천일天一’과 ‘태일太一’ 두 별은 밝기가 매우 약해서, 선기 전체를 구성하는 북두칠성의 밝은 별들과 비교하면 그 중심이 더욱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로 인해 고대인들은 중심이 돌출된 형태로 선기를 상상하게 되었다.

또한 원시 종교 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만약 선기의 정상부가 천상의 신—즉 상제上帝의 거처라면, 중심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형상은 곧 그 신의 지고지상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것이 된다. 실제로 이와 같은 중심이 돌출된 선기의 이미지적 특성은 《주비산경周髀算經》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방의 이족夷族 문화 유물 속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目前發現最早的璇璣圖形見於距今約八千年前的湖南高廟文化, 稍晚的浙江河姆渡文化的璇璣圖形甚至還伴有璇、璣二星, 而在大汶口文化、龍山文化、薛家崗文化、良渚文化的各類遺物中[圖4], 或者晚至商代晚期的三星堆文化銅器之上, 璇璣圖形更是普遍存在. 良渚文化先民不僅在斗魁形玉件的頂端雕刻出璇璣的造型, 而且以斗魁形象為核心的太一神徽, 其表現天蓋的部分也呈現為中央凸起的璇璣[圖4-2].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선기璇璣’ 도형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의 호남湖南 고묘문화高廟文化에서 나타난다. 그보다 조금 뒤의 절강浙江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에서 발견된 선기 도형에는 ‘선璇’과 ‘기璣’ 두 별이 함께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룡산문화龍山文化, 설가강문화薛家崗文化,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여러 유물들에서도 선기 도형은 매우 널리 발견되며[그림4], 심지어 상나라 말기의 삼성퇴문화三星堆文化 청동기에서도 이러한 도형이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선민들은 두괴斗魁 모양의 옥기玉器 꼭대기에 선기 모양을 조각했을 뿐 아니라, 두괴의 형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태일신휘太一神徽, 태일신을 상징하는 문장에서 하늘의 덮개를 나타내는 부분 역시 중앙이 솟아오른 선기의 형태로 표현되었다[그림4-2].

1. 大汶口文化璇璣北斗圖像; 2, 3. 良渚文化璇璣斗魁形象.
圖4 新石器時代北斗圖像

1.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의 선기璇璣와 북두北斗 도상; 2, 3. 량저문화良渚文化의 선기璇璣와 두괴斗魁 형상
그림4 신석기 시대의 북두北斗 도상

與此形成鮮明對比的是, 在太行山以西的新石器時代文化區域, 似乎並不存在這種璇璣天極的認識, 所以至今也沒有發現有關這種圖形的任何線索. 很明顯, 璇璣造型只可能反映東方夷夷族文化先民對天極的認識是可以肯定的.

이와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은, 태행산太行山 이서以西 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에서는 이 같은 ‘선기 천극璇璣天極’ 개념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이와 관련된 도형의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선기璇璣’ 도형은 동방의 이족夷族 문화 선민들이 천극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這種璇璣造型雖然不見於早期華夏文化, 但是在西南地區納西族的文化傳統中, 卻留有對璇璣天蓋造型的完整認識. 納西文的”天”字即寫作中央凸起的璇璣造型[圖5], 這一傳統甚至在商周時代的文字中還留有痕跡. 這些事實當然建立了東方夷文化與今日西南民族文化的密切聯繫.

이러한 선기璇璣 형상은 비록 초기 화하華夏 문화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서남 지역 납서족納西族의 문화 전통 속에는 선기 천개天蓋 형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남아 있다. 납서문納西文에서 ‘하늘 천天’ 자는 중앙이 솟은 선기 모양으로 쓰이며[그림5], 이러한 전통은 상商·주周 시대의 문자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실들은 동방의 이족夷族 문화와 오늘날 서남 민족 문화 사이의 긴밀한 연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圖5 納西文”天” 字 [第二欄]
그림5 납서문 ‘천天’ 자 [두 번째 열]

龜書八角之地理觀.

位於太行山以東地區的新石器時代文化遺存普遍流行有一種指向四方的八角圖形, 特色鮮明, 其中最重要的發現莫過於安徽含山凌家灘新石器時代墓葬出土的玉版[圖6-1], 年代約當距今5300年. 玉版夾放於玉龜的背甲和腹甲之間[圖6-2, 3], 而玉龜作為天然的宇宙模型, 其穹窿形的背甲象天, 亞形的腹甲象地, 加之龜壽久長, 盡知天下古今之事, 因此成為占卜問神的天生神物. 玉版夾放於玉龜中間, 正像置身於天地之間的人位.

귀서龜書 팔각의 지리관

태행산太行山 동쪽 지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 유적에서는 사방을 지시하는 팔각 형상이 널리 유행했으며, 그 특징이 뚜렷하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발견은 안휘安徽 함산含山 능가탄凌家灘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옥판玉版이다[그림6-1]. 그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5300년 전이다. 이 옥판은 옥으로 만든 거북이의 등딱지와 배딱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으며[그림6-2, 3], 옥거북은 자연적인 우주 모형으로, 볼록한 등딱지는 하늘을, 오목한 배딱지는 땅을 상징한다. 거북은 수명이 길고 예로부터 천하의 옛일과 지금의 일을 모두 아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점을 치고 신에게 묻는 천성적인 신물로 간주됐다. 이 옥판이 옥거북 가운데에 놓인 모습은 마치 천지 사이에 놓인 인간의 자리와도 같다.

圖6安徽含山凌家灘出土龜書
그림6. 안휘安徽 함산含山 능가탄凌家灘에서 출토된 귀서龜書

玉版自內而外繪刻四層圖像, 中心圓區內刻有一個指向四方的八角圖形; 其外的圓區均分為八區, 呈四正四維的分布, 且每區之內各刻注一枚矢狀標, 指明該區所屬的方位, 即屬於四正的東、南、西、北以及屬於四維的東北、西北、東南和西南; 八區之外專在四維處刻注四枚矢狀標表現四維, 體現了從四方五位發展到八方九宮, 對四維的認識乃是其中最關鍵一步的觀念; 圖像最外層則以鑽孔的形式表現了四組數字, 左旋正讀為四、五、九、五, 正合太一行九宮之數. 因此, 玉版圖像的設計完美地表現了凌家灘先民早已具有的太一行九宮的天文數術思想, 這意味著位居中央的特殊八角圖形其實就是表現空間方位的九宮圖. 太一在天, 也即數術化的至上神, 其表現形式則是北斗星的繞極運動, 而玉龜背甲恰好鑽有四孔以象斗魁四星[圖6-2]. 九宮的規劃雖然在地, 但也對應於天. 故在天人合一宇宙觀的背景下, 這些圖像的設計必協和於天地. 事實上, 這種強調空間知識的圖形正是上古文獻所記載的”龜書” , 於晚世則稱”洛書” , 其中指向四方的特殊八角圖形所表現的九宮圖即是龜書的核心.

옥판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네 층의 도상을 새겨 놓았는데, 중심 원 안에는 사방을 향하는 팔각 형상이 그려져 있고, 그 바깥 원은 여덟 구역으로 나뉘며, 정사각 네 방위와 사각 네 방위동북, 서북, 동남, 서남로 나뉘어 각 방위마다 화살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해당 방향을 나타낸다. 여덟 구역의 바깥에는 특히 네 모서리 방향에만 네 개의 화살형 표식을 더 새겨 ‘사유四隅’를 강조했는데, 이는 사방 오위五位에서 팔방 구궁九宮으로의 발전을 뜻하며, 이 가운데 사유에 대한 인식이 가장 핵심적인 단계임을 보여준다. 가장 바깥 원에는 네 조의 숫자가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새겨졌으며, 왼쪽으로 돌리며 읽으면 4, 5, 9, 5가 되는데, 이는 바로 태일太一이 운행하는 구궁수九宮數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처럼 옥판의 도상은 능가탄 선민先民들이 이미 태일 운행의 구궁 체계에 따른 천문·수술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중앙에 배치된 독특한 팔각 형상은 사실 공간 방위를 나타내는 구궁도九宮圖인 것이다. 태일은 하늘에 있는 존재로, 수술화된 최고의 신이며, 그 표현 방식은 북두칠성이 북극 주위를 도는 운동이다. 옥거북의 등껍질에는 네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북두의 두괘斗魁 네 별을 상징한다[그림6-2]. 구궁의 계획은 비록 땅 위에 있지만, 동시에 하늘과도 대응된다. 그러므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 속에서 이 도상들은 천지의 이치를 함께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공간 지식을 강조하는 도형은 고대 문헌에서 말하는 ‘귀서龜書’이며, 후세에는 ‘낙서洛書’라고 불린다. 이 가운데 사방을 지시하는 독특한 팔각 도형이 나타내는 구궁도는 바로 귀서의 핵심이다.

圖7新石器時代文化所見特殊八角紋
그림7. 신석기 시대 문화에서 보이는 특수한 팔각 문양

這種特殊的八角圖形在東方新石器文化中普遍出現[圖7], 自東北遼河流域的小河沿文化, 南至黃淮流域的大汶口文化和凌家灘文化, 再南到長江中下游的高廟文化、大溪文化、馬家浜文化、崧澤文化和良渚文化, 不僅分布廣泛, 而且流行的時間也相當久長, 約自距今八千年前而至四千年前. 但與此形成鮮明對比的是, 到目前為止, 在悠悠四千年的漫長時間裡, 位於太行山以西地區的新石器文化遺存中, 這種特殊八角圖形竟一件也沒有出現. 顯然, 這種文化差異所表現的夷夏東西的事實已再清楚不過了.

이러한 특수한 팔각 도형은 동방 신석기 문화에서 널리 나타난다[그림7]. 동북 지역 요하遼河 유역의 소하연小河沿 문화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황하와 회하 유역의 대문구大汶口 문화와 능가탄凌家灘 문화, 더 나아가 장강 중하류의 고묘高廟 문화, 대계大溪 문화, 마가방馬家浜 문화, 숭택崧澤 문화, 양저良渚 문화에 이르기까지, 이 도형은 널리 분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행한 시기도 매우 길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부터 4000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점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무려 4000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태행산太行山 이서以西 지역의 신석기 문화 유적에서는 이러한 특수 팔각 도형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바로 동방의 ‘이夷’와 서방의 ‘하夏’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儘管太行山以西的考古遺存不曾出現這種特殊造型的八角圖形, 或者說這種圖形並不體現華夏文明的固有傳統, 但這絲毫不妨礙我們在西南少數民族的文化傳統中找到其遺續. 彝族、苗族、傈僳族等民族的文化傳統中廣泛地保留著這一圖案[圖8], 雖然他們已不了解圖形的本質含義, 而將其簡單地作為吉祥符號, 但有些圖像特意與八卦相配, 仍然體現著某種既有的古老傳統.

비록 태행산 서쪽 지역의 고고 유적에서는 이러한 특이한 팔각 도형이 나타나지 않거나, 이 도형이 중원 화하華夏 문명의 고유 전통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서남 소수민족의 문화 전통 속에서 그 흔적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이족彝族, 묘족苗族, 리수족傈僳族 등의 문화 전통에는 이러한 문양이 널리 보존되어 있으며[그림8], 비록 이들이 도형의 본질적 의미는 더 이상 알지 못하고 단지 길상吉祥 문양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일부 도상은 팔괘八卦와 의도적으로 결합되어 여전히 오래된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圖8 西南少數民族文化所見特殊八角紋
그림8 서남 소수민족 문화에서 보이는 특수 팔각 무늬

這種特殊的八角圖形體現了上古先民對空間方位的認識與規劃, 而原始空間觀的終極認識就是九宮. 九宮除中央之外的八宮即為八卦所表現的方位, 而彝族的八角圖形, 有些就將八角與八卦相互配伍, 甚至彝語中八卦與八角的關係表述得更為直接, 因為彝語稱八卦正為”八角” . 很明顯, 新石器時代文化中的這種特殊八角圖形完全可以建立起上古東夷族群與晚近西南少數民族的聯繫, 此一事實非常清楚.

이러한 특별한 팔각 도형은 고대 선민들이 공간의 방향을 인식하고 설계한 방식을 보여주며, 원시적인 공간 개념의 궁극적 인식은 바로 ‘구궁九宮’이다. 구궁에서 중심을 제외한 여덟 칸은 곧 팔괘八卦가 나타내는 방향에 해당하며, 이족彝族의 팔각 도형 중 일부는 팔각과 팔괘를 서로 결합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이어彝語에서는 팔괘를 ‘팔각’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분명히, 신석기 시대 문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특별한 팔각 도형은 고대 동이東夷 집단과 근세 서남 소수민족 사이의 연관성을 확고히 보여주는 것이며, 이 사실은 매우 명확하다.

3. 눈과 영혼을 통한 신과의 교감을 보는 종교관에서 드러나는 이하의 차이. 眼目通神宗教觀的夷夏之別

文字的創造來源於先民與神靈溝通的需要, 這意味著在這種人神溝通的活動中, 人的眼目對於通神具有特殊重要的作用. 簡而言之, 通神與否本質上取決於人們對溝通人神的文字是否認識, 只有能夠釋讀這種作為溝通人神的中間媒介的文字, 與神靈溝通的工作才可能實現.

문자의 창조는 선민先民이 신령과 소통할 필요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이러한 인간과 신의 소통 활동 속에서 사람의 ‘눈’이 신과의 교통에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신과 통할 수 있는지 여부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신과 소통하는 문자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로 작용하는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때에만 신과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眼目通神的文化意義在夷夏兩種文字中反映得都很清楚. 就漢字體系而言, 負責通神的巫覡之官, 其中的”覡”字即體現了目見通神的意義. 《說文·巫部》: “覡, 能齋肅事神明也. 在男曰覡, 在女曰巫. 從巫, 從見.” 徐鍇曰: “能見神也.” 事實上, “覡”字從”見”與其說表達了見神的意義, 倒不如說通過對溝通人神的文字的識認而通見神明, 所以眼目在通神活動中的作用是顯而易見的.

눈과 시선이 신과의 소통에서 갖는 문화적 의미는 이하夷夏 두 문자의 체계 모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자 체계에서 신과의 교통을 맡은 무격巫覡의 ‘覡’ 자는 바로 눈으로 신을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설문說文》〈무부巫部〉에는 “覡, 능히 재계하고 엄숙히 신명을 섬기는 자다. 남자를覡이라 하고 여자를 巫라 한다. 巫와 見에서 따온 글자다.” 라고 하였고, 서개徐鍇는 “신을 볼 수 있는 자”라고 풀이했다. 사실상 ‘覡’ 자가 ‘見’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신을 본다는 뜻이라기보다, 신과 소통하는 문자를 인식함으로써 신명을 접할 수 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눈이 신과 통하는 행위에서 하는 역할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許慎以“視”訓“見”, 而“視”字無論認為屬於會意還是形聲, 其所從的“示”都是表示讀音的部分. 《詩·周頌·敬之》: “示我顯德行.” 魯詩“示”作“視”. 陳奐《詩毛氏傳疏》: “示, 古視字.” 那麼“示”字何以會與“視”相通? 其緣何具有視見、看到的意義? 這個問題同樣與眼目通神的觀念有關. “示”字本為廟主的象形文, 其讀音如“視”的事實清楚地表明, 古人看到廟主之“示”就猶如他們看到了祖先, 人神的溝通當然也就自然可以實現. 與“示”有關的“祘”字也體現了同樣的文化認知. 《說文·示部》: “祘, 明視以筭之. 从二示. 讀若筭.” 段玉裁《注》: “明視故從二示.” 仍將“示”的意義等同於“視”. 筭是筮筭, 為上古先民筮占接神的主要方法, 《說文》將其與“禍”“祟”“”“禁”等字同列, 也明確了其與筮筭通神有關. 由此可見, 眼目在人神溝通的活動中發揮著至關重要的作用.

허신許慎은 ‘시視’를 ‘견見’으로 풀이했으며, ‘시視’자가 회의자이든 형성자이든 간에, 그 구성 요소인 ‘시示’는 음을 나타내는 부분으로 본다. 《시경詩經》〈주송周頌·경지敬之〉에 “시아현덕행示我顯德行”이라 했고, 노魯나라 계통의 시에서는 ‘示’를 ‘視’로 썼다. 진환陳奐의 《시모씨전소詩毛氏傳疏》에는 “示는 옛 ‘視’자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示’자와 ‘視’자가 왜 서로 통하게 되었는가? 그것이 어떻게 ‘보다’, ‘보이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는가? 이 문제 역시 ‘눈으로 신을 본다’는 통신通神의 관념과 관련이 있다. ‘示’는 본래 사당에 있는 신주神主를 본뜬 상형문자이며, 그 발음이 ‘시視’와 같다는 사실은, 고대인이 신주인 ‘示’를 보는 것이 곧 조상을 보는 것과 같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간과 신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시示’와 관련된 ‘산祘’자 역시 이러한 문화 인식을 반영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시부示部〉에서는 “祘, 밝게 보고 점쳐 계산하는 것이다. 두 ‘시示’에서 나왔으며, 발음은 ‘산筭’과 같다.” 라고 했다. 단옥재段玉裁는 주석에서 “밝게 본다는 뜻이기 때문에 두 개의 ‘시示’를 따랐다”고 해, ‘시示’의 뜻을 ‘시視’와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서 ‘筭’은 곧 ‘점치고 계산함’을 뜻하며, 상고시대 선민이 신과 교감할 때 사용하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설문》은 이를 ‘화禍’, ‘수祟’, ‘요祅’, ‘금禁’ 등과 함께 같은 부류로 다루며, 점술을 통한 통신과의 관련성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눈과 시각은 신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如果說在漢字體系中, 眼目與神明的聯繫還沒有直接反映出通神得吉的意義的話, 那麼在古彝文體系中, 這一意義就表達得非常直白而徹底了. 古彝文“吉”字讀音為 va⁵⁵, 其形作” “”, 正為取形眼目的象形文. 然而對於這樣一個象形文字, 人們卻並不以其字形所表達的眼目來理解, 反而賦予了其吉好的意義. 這種將取形於眼目的文字與吉好之義聯繫起來的做法, 雖然與華夏文化所具有的“眼目通神”觀念相同, 但其所表達的“目識文字則可通神、通神則吉”的思想, 卻比漢字所反映的“眼目通神”觀念更為清晰.

한자 체계에서 ‘눈’과 ‘신령’의 관계가 아직 ‘신과 통하면 길하다’는 뜻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면, 고이문古彝文 체계에서는 그 의미가 매우 직설적이고 철저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이문에서 ‘길吉’이라는 글자는 발음이 va⁵⁵이며, 그 글자 모양은 “”으로, 바로 눈의 형태를 본뜬 상형문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형문자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표현하는 ‘눈’의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길하다’, ‘좋다’는 뜻을 부여했다. 이처럼 눈을 본뜬 글자에 ‘길함’의 의미를 결부시키는 방식은, 비록 중화문화권의 ‘눈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관념과 유사하긴 하지만, ‘눈으로 인식하는 문자는 신과 통할 수 있고, 신과 통하면 길하다’는 사고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자보다 훨씬 분명하다.

河南舞陽賈湖新石器時代遺址出土的距今八千年前的龜甲文字作” “”[圖2-1], 為眼目的象形文, 相同的文字還契刻於良渚文化的祭天玉璧[圖2-2, 3]. 學者多據甲骨文對讀, 而將其釋為漢字的“目”, 但矛盾相當明顯. 古人緣何要將眼目之文刻於龜甲? 如果認為龜占的目的是祛除目疾, 那麼為什麼相同的文字又可以刻於祭天的禮器? 顯然“祛病”之解非常勉強. 然而如果據古彝文釋讀此文為吉凶的“吉”, 矛盾便可以迎刃而解.

하남河南 무양舞陽 가호賈湖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약 8000년 전의 귀갑문자龜甲文字는 “”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눈을 본뜬 상형문자이다[그림2-1]. 동일한 문자는 량주문화良渚文化의 제천祭天용 옥벽玉璧에도 새겨져 있다[그림2-2, 3]. 학자들은 보통 갑골문에 비추어 이 문자를 ‘목目’으로 해석하지만, 여러 모순이 존재한다. 고대인은 왜 ‘눈’을 상징하는 문자를 귀갑에 새겨 넣었을까? 만약 귀갑점의 목적이 안질눈병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면, 왜 동일한 문자가 제천용 예기禮器에도 새겨질 수 있었던 것인가? 이런 설명은 억지스러움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자를 고이문에 따라 ‘길흉을 뜻하는 길吉’로 해석하면, 이러한 모순은 쉽게 해결된다.

1. 河南舞陽賈湖出土龜甲文字; 2, 3. 良渚文化玉璧文字.
圖2 新石器時代文字

1. 하남 무양河南舞陽 가호賈湖에서 출토된 귀갑문자龜甲文字; 2, 3. 양저문화良渚文化 옥벽玉璧에 새겨진 문자
그림2 신석기 시대 문자

1. 器物摹本; 2. 文字摹本.
圖3 山西襄汾陶寺出土夏代早期朱書文字

1. 기물器物 모사본; 2. 문자文字 모사본
그림3 산서 양분 도사 출토 하대 초기의 주서문자

古人龜占的目的當然是求吉避凶, 所以於龜甲刻寫“吉”字理所當然, 殷商先民於占卜甲骨刻寫“吉”“大吉”“引吉”之辭非常普遍, 而祭天更是為了敬天求吉. 顯然, 釋讀為“吉”不僅可以揭示上古先民具有的眼目通神的樸素觀念, 而且證明東夷文字其實就是古彝文, 其本質當然將東夷文化與西南民族文化建立起了聯繫.

고대인이 거북점을 친 목적은 당연히 길함을 구하고 흉함을 피하기 위한 것이므로, 거북등에 ‘길吉’자를 새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은상殷商의 선민들은 점복용 갑골에 ‘길吉’, ‘대길大吉’, ‘인길引吉’ 등의 글을 새긴 일이 매우 흔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더욱이 하늘을 공경하고 길함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명히 이 문자를 ‘길’로 해석하는 것은, 고대 선민이 가지고 있었던 ‘눈으로 신과 소통한다’는 소박한 관념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이東夷의 문자가 사실 고이문古彝文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동이문화와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의 문화가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眼目之所以能見物, 那是由於眸子精明, 反之則目盲無識. 古代文字對於目盲的表述相當細膩. 《說文·目部》: “盲, 目無牟子也.” 又云: “瞽, 目但有朕也.” 更云: “瞍, 無目也.” “盲”“瞽”“瞍”雖然都是目盲, 但有區別. 盲是目無牟子, 牟子即眸子. 趙岐注《孟子》曰: “眸子, 目瞳子也.” 瞽是目但有朕, 朕是縫隙, 也就是眼目僅開一縫. 瞍是無目, 無目與無眸子不同, 應是目中空無眼珠. 很明顯, 如果人神的溝通必須通過眼目識字而完成的話, 那麼通神的眼目就必須表現為眸子精明, 而不應是目盲的形象.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눈동자가 밝기 때문이며, 반대로 밝지 않으면 시각이 없고 인식도 없다. 고대 문자에서는 눈이 먼 상태에 대해 매우 세밀한 표현을 하고 있다. 《설문說文》〈목부目部〉에서는 “맹盲은 눈에 모자牟子가 없는 것이다”, 또 “고瞽는 눈에 다만 틈朕만 있다”, 그리고 “수瞍는 눈 자체가 없다”고 설명한다. ‘맹’, ‘고’, ‘수’는 모두 시각장애를 의미하지만, 각기 다른 상태를 나타낸다. ‘맹’은 눈에 모자牟子, 곧 눈동자가 없다는 뜻이고, 조기趙岐가 《맹자孟子》를 주석하면서 말하길 “모자眸子는 눈동자이다”라고 했다. ‘고瞽’는 눈이 조금 틈만 열려 있는 상태이고, ‘수瞍’는 아예 눈알 자체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아주 분명하게도, 사람과 신의 소통이 문자 인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러한 눈은 반드시 밝은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며, 시력을 잃은 눈의 형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其實先民早已懂得人之雙目視力不同的一般道理. 《素問·陰陽應象大論》: “天不足西北, 故西北方陰也, 而人右耳目不如左明也.” 事實上, 賈湖龜甲文的“吉”字描寫的也正是人的左目, 其與漢字表現目見的文字以及陶器所刻之眼目圖像多取左目的做法一致[圖9][19-21], 這決定了先民必以二目中最明亮的左目表達目視通神的意義. 在這樣的認知基礎上考察上古文化遺存, 可以獲得很多新認識.

[19] 王宏. 湖北江陵荊南寺遺址第一、二次發掘簡報[J]. 考古, 1989[8]: 679–692; 698; 769–770.
[20] 王毅、張擎. 三星堆文化研究[J]. 四川文物, 1999[3]: 19.
[21]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二里頭陶器集粹[M].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5: 79.

사실 선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의 양쪽 눈의 시력이 다르다는 일반적인 이치를 알고 있었다. 《소문素問》〈음양응상대론陰陽應象大論〉에서는 “하늘이 서북 방면이 부족하므로, 서북은 음陰의 방위이며, 사람의 오른쪽 귀와 눈은 왼쪽보다 밝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가호賈湖에서 출토된 거북등 문자 ‘길吉’자는 바로 사람의 왼쪽 눈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한자에서 ‘눈으로 본다’는 의미의 글자들, 그리고 도기에 새겨진 눈 이미지들도 대개 왼쪽 눈을 따르는 방식과 일치한다[그림9][19-21]. 이로 인해 선민들은 두 눈 중에서 가장 밝은 왼쪽 눈을 통해 ‘신과 소통하는 시선’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고대 문화의 유물을 탐구하면 많은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

圖9 二里頭遺址出土陶器契刻眼目圖像
그림9 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陶器에 새겨진 눈 형상의 문자 이미지

新石器時代晚期的人面玉雕像常於正反兩面雕出人的兩幅面孔, 正面的人像眸子精明, 開口大笑, 獠牙畢現; 而反面的人像則張目無眸, 苦臉撇嘴, 面露哀容[圖10].

신석기 시대 말기의 인면人面 옥 조각상은 정면과 뒷면 양쪽에 각각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경우가 많다. 앞면 인물은 눈동자가 뚜렷하고,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이빨혹은 송곳니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뒷면 인물은 눈은 크지만 눈동자가 없고, 찡그린 얼굴에 입꼬리를 내리며 슬픈 표정을 띠고 있다[그림10].

圖10 新石器時代雙面玉人像 [斯密塞納美術館藏]
그림10 신석기 시대 양면 옥 인물상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소장]

這兩種完全不同的形象在三星堆遺址出土的青銅人像上表現得尤為鮮明. 三星堆青銅人像可明顯區別為兩類: 一類人像張目無眸, 低首撇嘴, 面露哀容[圖11], 與龍山玉人像的背面形象相同, 其為盲者可知;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이미지가 삼성퇴三星堆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인물상에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삼성퇴 청동 인물상은 뚜렷이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눈은 크나 눈동자가 없고, 고개를 숙이며 입꼬리를 내리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형상[그림11]으로, 용산龍山 문화의 옥 인물상 뒷면과 같으며, 맹인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圖11 三星堆遺址出土青銅人像
그림11 삼성퇴 유적 출토 청동 인물상

而另一類人像眸子精明, 面露喜色, 或目開眸見, 咧嘴而笑, 或眸子凸出, 縱而視天, 昂首大笑, 甚至於頭頂和兩耳還裝飾出表現天極的璇璣造型[圖12], 其表現人神相通的意義相當清楚.

다른 하나는 눈동자가 또렷하고, 얼굴에는 기쁨이 나타나 있으며, 눈을 활짝 뜨고 입을 벌려 웃거나, 눈동자가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치켜올라가 있고, 고개를 들고 크게 웃으며, 심지어 머리 위와 양쪽 귀에는 하늘의 극점天極을 상징하는 ‘선기璇璣’ 모양의 장식까지 달려 있다[그림12]. 이는 인간과 신이 소통하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圖12 三星堆遺址出土青銅縱目人像
그림12 삼성퇴 유적 출토 청동 눈을 치켜 뜬 인물상

《楚辭·九章·哀郢》: “瞭杳杳而薄天.” 洪興祖《補注》: “瞭, 目明也. 杳杳, 遠貌.” 此豈非對三星堆縱眸喜笑人像的完美詮釋!上帝居於天庭, 在上而位處天極, 故與其溝通者必裝飾天極璇璣, 而其昂首向天, 縱眸大笑, 更準確地表現出眼目通神的喜悅. 與此相反, 那些無眸的盲者由於尚未實現與神靈的溝通, 所以都表現出低首哀苦的形象. 很明顯, 這些遺物所體現的觀念與彝人所具有的眼目通神為吉的思想如出一轍.

《초사楚辭》〈구장九章·애영哀郢〉에 “요묘묘이박천瞭杳杳而薄天”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홍흥조洪興祖는 《보주補注》에서 “요瞭는 눈이 밝다는 뜻이며, 묘묘杳杳는 멀리 있는 형상”이라 설명했다. 이 말은 바로 삼성퇴의 눈을 치켜뜨고 기뻐 웃는 인물상을 완벽하게 해석해 주는 것 아닌가! 상제上帝는 하늘 위, 하늘의 극점에 거하며 자리하기에 그와 교통하려는 자는 반드시 천극天極의 선기璇璣를 장식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눈을 치켜뜨며 크게 웃으며, 눈을 통해 신과 소통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더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반대로 눈동자가 없는 맹인의 형상은 신령과의 소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이고 슬픈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들이 보여주는 사상은 바로 이족彝族 사람들이 가진 ‘눈을 통해 신과 소통하면 길하다’는 사고방식과 똑같다.

三星堆文化所屬的古蜀先民忠實地繼承了眼目通神的古老觀念. “蜀”字本作” “”, 從“視”從“蟲”, 且“蟲”在“視”下, 而“視”則作人遠眺之形. 古文字的“蟲”, 有些則為龍的寫實[22], 古以龍為鱗蟲之長, 其原型在天[23]. 故“蜀”字會意, 實像明目遠眺之人乘龍而升天通神, 這一形象在河南濮陽西水坡公元前五千紀的原始宗教遺存中早已有所表現[23].

[22] 馮時. 二里頭文化“常旜”及相關諸問題[J]. 考古學集刊: 第17集, 2010: 149–204.
[23] 馮時. 文明以止: 上古的天文、思想與制度[M].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8: 285–290.

삼성퇴三星堆 문화에 속한 고촉古蜀의 선민들은 눈을 통해 신령과 통하는 고대의 관념을 충실히 계승했다. ‘촉蜀’ 자는 본래 ” “”와 같이 쓰며, ‘볼 시視’와 ‘벌레 충蟲’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蟲’은 ‘視’ 아래에 있으며, ‘視’는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모양이다. 고대 문자에서의 ‘蟲’은 일부가 용龍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며[22], 고대에는 용을 비늘 달린 벌레의 으뜸으로 보았고, 그 원형은 하늘에 있다고 했다[23]. 따라서 ‘촉蜀’이라는 글자의 뜻은 밝은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신과 교통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러한 형상은 이미 기원전 5천년경 허난河南 부양濮陽 서수파西水坡의 원시 종교 유물에서도 나타난다[23].

而三星堆文化不僅以縱眸人像為其特徵, 而且廣見龍的造型, 此正與乘龍遠眺為蜀的意義相通. 事實上, 乘龍升天通神並非所有人都能擁有的資格, 在早期文明社會, 這更是為君者獨享的權力. 商周君王皆自稱“余一人”, 因此, 如果“蜀”表達的是君王獨享升天通神的觀念的話, 那麼這顯然決定了“蜀”應該就是“獨”的本字. 《老子》第二十五章: “獨立不改.” 郭店竹書《老子》甲本“獨”即作“蜀”. 《方言》卷十二: “蜀, 一也. 南楚謂之獨.” 郭璞《注》: “蜀, 猶獨耳.” 是為明證. 目見通神的結果必然加深了人與神明的聯繫, 這種建立人神之間的固有聯繫無疑是原始宗教特別強調的思想. 甲骨文、金文中上帝的“帝”字本所表達的觀念就是嫡庶的“嫡”[24], 真切地反映了原始宗教的本質其實就在於將人與上帝聯繫為一體的思考,

[24] 裘錫圭. 關於商代的宗族組織與貴族和平民兩個階級的初步研究[M]∥文史: 第17輯. 北京: 中華書局, 1983.

삼성퇴 문화는 세로로 눈을 뜬 인물상이 그 특징일 뿐 아니라, 용의 형상도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용을 타고 멀리 바라보는 것이 ‘촉蜀’의 의미와 통한다. 사실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 신과 소통하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아니며, 초기 문명 사회에서는 오직 군주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이었다. 상商과 주周의 군왕들은 모두 스스로를 “여일인余一人”이라 칭했는데, 따라서 만약 ‘촉蜀’이 군주만이 독점하는 상승·통신의 관념을 표현한 것이라면, 이는 분명 ‘촉蜀’이 바로 ‘독獨’의 본래 글자였음을 뜻한다. 《노자老子》 제25장에는 “독립불개獨立不改”라 했고, 곽점죽서본 《노자》 갑본에서는 ‘독獨’을 곧 ‘촉蜀’으로 썼다. 《방언方言》 권12에는 “촉蜀은 하나다. 남초南楚에서는 이를 ‘독獨’이라 했다”고 했으며, 곽박郭璞의 주에서는 “촉은 곧 독이다”라고 하여 이를 분명히 증명했다. 눈으로 신을 보는 결과는 사람과 신명 간의 연계를 심화시키며, 이러한 인간과 신 사이의 고유한 연계를 세우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원시종교가 특히 강조한 사유다. 갑골문과 금문 속 상제上帝의 ‘제帝’자 자체가 표현한 관념은 바로 적서嫡庶의 ‘적嫡’[24]이었으며, 이는 사람과 상제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사유가 원시종교의 본질임을 생생히 반영한다.

而“屬”則通過“蜀”的音讀準確地表達了這一思想. 《說文·尾部》: “屬, 連也. 從尾, 蜀聲.” 《漢書·陳餘傳》: “築甬道屬河.” 師古《注》: “屬, 聯及也.” 顯然, “屬”與“帝”一樣, 都在強調人通過與神明的溝通所確立的親密聯繫. 人既通神, 必伴其左右, 故見神更為清晰矚目, 於是“矚”字從“屬”為讀, 自具其親近神明而得見真尊的意義. 《文選·何劭遊仙詩》: “流目矚巖石.” 呂延濟《注》: “矚, 視也.” 《集韻·燭韻》: “矚, 視之甚也.” 很明顯, 古蜀文化所體現的眼目通神的傳統十分清晰, 其地域也與古代西南夷乃至今日彝族關係密切. 事實上, 今天我們已通過人物造型的比較將這種觀念追溯到龍山文化時代, 甚至通過文字的研究更將其形成年代上溯到八千年前, 這當然加強了東夷文化與古蜀文化的聯繫.

그리고 ‘속屬’은 ‘촉蜀’의 음독을 통해 이 사유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설문說文》〈미부尾部〉에 “속屬은 잇는 것이다. 미尾에서 따르고, 촉蜀의 소리를 따른다”고 했고, 《한서漢書》〈진여전陳餘傳〉에서는 “옹도甬道를 쌓아 하河와 이었다”고 했으며, 옛 주석인 사고師古는 “속은 연결하고 아우르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분명히 ‘속屬’ 역시 ‘제帝’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신명과의 교통을 통해 확립한 친밀한 연계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이미 신과 소통하면 반드시 신을 곁에 두게 되고, 따라서 신을 보는 일이 더욱 분명하고 뚜렷해진다. 그래서 ‘촉矚’자는 ‘속屬’에서 소리를 따르며, 본디 신명에 가까이 다가가 진정한 존엄을 뵙는 의미를 갖게 된다. 《문선文選》〈하소유선시何劭遊仙詩〉에서는 “눈을 흘려 암석을 주시하네”라고 했고, 여연제呂延濟의 주에서는 “촉矚은 보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집운集韻》〈촉운燭韻〉에서는 “촉矚은 매우 자세히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분명 고촉古蜀 문화가 구현한 눈으로 신과 통하는 전통은 매우 분명하며, 그 지역은 고대의 서남이西南夷와 더불어 오늘날의 이족彝族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인물 조형 비교를 통해 이러한 관념을 용산문화 시대로까지 소급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문자 연구를 통해 그 형성 시기를 8천 년 전까지 올릴 수 있다. 이는 동이문화와 고촉문화의 연계를 한층 강화시켜 준다.

通過對夷夏文字及相關考古資料的研究, 可以大致廓清夷夏兩域文化的分佈範圍. 具體地說, 在太行山以東, 北起遼河流域, 南至黃河下游, 再南到長江中下游的半月形地區, 分佈的應是東夷文化, 這一廣大地區的原始文化實際也就是今日西南少數民族文化的祖先. 而在太行山以西, 南至長江上游的廣大地區, 分佈的應是華夏文化. 這種夷夏東西的局面在夏王朝建立之前長期存在, 彼此的勢力互有消長, 交錯地帶也於不同時期有所變化, 但大致的政治格局卻沒有改變. 事實上, 上古東夷文化不僅是後世西南夷乃至今日西南少數民族的原始文化, 也是美洲古代文化的來源之一. 如果說東夷先民南遷的歷史是伴隨著其與華夏民族的融合逐漸完成的話, 那麼至遲在新石器時代, 部分東夷先民就早已向北跨越白令海峽進入了新大陸[18], 這個遷徙路線在數千年間從沒有中斷.

[18] 馮時. 中國天文考古學[M].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1: 157–158; 373–375.

이하 문자와 관련 고고학 자료에 대한 연구를 통해, 대체로 이하夷夏 양 문화권의 분포 범위를 밝힐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태행산太行山 동쪽, 북쪽은 요하遼河 유역에서 시작해 남쪽은 황하黃河 하류, 더 남쪽으로는 장강長江 중하류에 이르는 반달형 지역에는 동이東夷 문화가 분포했으며, 이 광대한 지역의 원시 문화는 실질적으로 오늘날 서남 지역 소수민족 문화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태행산 서쪽, 그리고 남쪽으로는 장강 상류까지의 광대한 지역에는 화하華夏 문화가 분포했다. 이러한 동서의 이하 구도는 하夏 왕조 성립 이전부터 장기간 지속됐으며, 상호 세력은 증감했고 교차 지대도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대체적인 정치 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사실 고대 동이 문화는 후대 서남이西南夷 및 오늘날 서남 소수민족의 원시 문화일 뿐 아니라, 미주美洲 고대 문화의 기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 동이 선민先民의 남하 역사가 화하 민족과의 융합을 수반하며 점차 완성됐다고 본다면, 늦어도 신석기 시대에는 일부 동이 선민이 이미 북쪽으로 베링 해협을 건너 신대륙에 진입했으며, 이 이주 경로는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18].

4. 이하동서에서 화하통일로. 夷夏東西到華夏一統

夏王朝的建立徹底破除了早期文化夷夏東西的形勢, 這種變革首先就要通過政治制度的變化體現出來, 其中最重要的標誌就是正統文字的制認與新的地中的確定.

하夏 왕조의 성립은 초기 문화의 이하夷夏 동서 대립 구도를 근본적으로 타파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은 우선 정치 제도의 변화로 나타났고, 그중 가장 중요한 표지는 정통 문자 제정과 새로운 천하 중심의 확정이었다.

華夏文字之一統.
화하華夏 문자의 통일

夏王朝作為中國歷史上第一個家天下的世襲王朝, 它的建立首先就需要完成對正統文字的確認. 由於原始文字的性質是宗教性的, 文字是用以溝通神靈的工具, 這意味著有夏王庭必須摒除其他文化的文字, 而只保留本文化的固有文字, 使其獨享與神靈交流的權力, 因此有夏確定的正統文字只能是到公元前第四千紀已至少傳承了三千年的華夏文字. 儘管其他文化的文字並沒有被取締, 但於祭祀和頒政這類國之重典已不再可能使用, 因此不屬於王朝的正統文字.

하夏 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세습적인 ‘가家天下’ 왕조로서, 그 성립은 무엇보다 정통 문자에 대한 확정이 선행되어야 했다. 원시 문자는 종교적 성격을 지녔으며, 문자란 신과 소통하는 도구였기 때문에, 유하有夏 왕정은 타 문화의 문자를 배제하고 자문화의 고유 문자를 보존함으로써, 오직 자신만이 신령과 교통하는 권한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로써 유하가 확정한 정통 문자는 기원전 4천년기까지 최소 3천 년 이상 전승된 화하 문자만이 될 수 있었다.

비록 타 문화의 문자들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제사나 국정을 반포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례에서 사용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는 왕조의 정통 문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太行山以西的山西襄汾陶寺遺址為夏啟建立的有夏王庭, 已經發現的朱書”文邑” 在殷商甲骨文中仍有傳續, 明確證明陶寺夏文字實際就是漢字的祖先[25]. 顯然, 夏王朝以其自己的文字作為王朝的正統文字, 這一事實不僅清楚, 也非常合理.

[25] 馮時. “文邑”考[J]. 考古學報, 2008[3]: 1–8.

태행산 서쪽의 산서성山西省 양분襄汾 도사陶寺 유적은 하계夏啟가 세운 유하 왕정의 소재지로, 그곳에서 발견된 주서朱書 ‘문읍文邑’이라는 글자가 은상殷商 시대의 갑골문에도 계속 등장한다는 점은, 도사에서 사용된 하대 문자가 곧 한자의 선조임을 명확히 입증해 준다[25].

분명히 하夏 왕조는 자국의 문자를 왕조의 정통 문자로 삼았으며, 이것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매우 합리적인 일이었다.

有夏正統文字確定的事實, 影響巨大而深遠, 正像秦”書同文” 的措施對中國歷史的巨大影響一樣, 甚至從某種意義上講, 夏文字的確定對中華文明的影響更為深刻. 秦文字已是步入世俗化的文字, 其與有夏具有宗教意義的文字不同, 兩種不同性質的文字對文化的影響自然大有區別. 宗教意義的文字, 其功用主要是實現與神靈的溝通, 這意味著人與神靈必須要通過其共識的文字才能建立起彼此固有的認知聯繫. 換句話說, 用於人神溝通的文字不僅需要被人王所認可, 同時更重要的是要被神靈所認可. 事實上, 當夏王朝形成以華夏文字作為其通神工具的政教一體的制度之後, 實際就等於限定了上帝的識字對象. 夏王朝近五百年的歷史已足以使神明習慣於接受華夏文字與其溝通的形式①, 而不會再承認其他文字的通神作用.

① 《通鑒外紀》卷二引《汲冢紀年》: “[夏十七王]四百七十一年.”

유하有夏 정통 문자의 확정이라는 사실은 엄청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마치 진秦의 ‘서동문書同文[문자 통일]’ 조치가 중국 역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과 같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夏 문자의 확정이 중화문명에 끼친 영향이 더 깊다고도 할 수 있다. 진나라의 문자는 이미 세속화된 문자였던 반면, 유하의 문자는 종교적 의미를 지닌 문자로, 그 성격이 다르기에 문화에 미치는 영향도 본질적으로 달랐다. 종교적 의미를 지닌 문자는 주로 신과의 소통을 실현하는 데 기능을 두고 있으며, 이는 인간과 신령이 서로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문자를 통해서만 그들 사이에 고유한 인지적 연결이 성립될 수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신과 인간의 소통에 쓰이는 문자는 인간 왕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신령의 인정 또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왕조가 화하문자華夏文字를 신령과 소통하는 도구로 삼는 정교일체政教一體의 체제를 확립한 이후, 이는 곧 상제上帝가 인식하는 문자의 범위를 한정짓는 셈이 되었다. 하왕조 약 500년의 역사는 신령이 화하문자를 통신 수단으로 인식하게 하기에는 충분했으며, 이후에는 다른 문자가 더 이상 신과의 소통 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① 《통감외기通鑒外紀》 권2에서 《급총기년汲冢紀年》을 인용한 내용: “[하나라 17왕] 재위 471년.”

於是儘管其後商滅有夏, 周滅殷商, 乃至鮮卑、蒙古、滿族入主中原並建立正統王朝, 都必須無條件地接受華夏正統文字, 從而使中華文明傳承有序. 事實上, 不同的王朝何以必須繼承有夏文字? 這與居中而治的傳統政治觀密切相關. 準確地說, 早期文字的宗教性建立了夏文字與上帝的固有聯繫, 而居中而治的宗教觀則使後繼者必須通過繼承已被上帝認可的文字才可能實現與上帝的溝通, 從而獲得王權的合法地位, 這當然造就了夏文字成為中華民族正統文字的事實. 早期文字夷夏東西的事實是通過沮誦與倉頡兩位聖賢分別創造了夷文字和夏文字而形成的, 這在先秦時代還被人們所記憶. 然而當夏王朝確立了華夏文字的正統地位之後, 東夷文字的地位便迅速衰落, 夷文的創造者沮誦自然也就失去了其原有的影響, 逐漸被人淡忘.

이리하여 이후에 상나라가 유하有夏를 멸하고, 주나라가 은상殷商을 멸했으며, 나아가 선비鮮卑·몽골·만주족이 중원을 장악하고 정통 왕조를 세웠다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화하華夏의 정통 문자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만 했고, 그로써 중화문명의 계승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왜 서로 다른 왕조들이 반드시 유하의 문자를 계승해야만 했을까? 이는 ‘중심에 거하여 다스린다’는 전통적 정치관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기 문자의 종교성은 하문자夏文字가 상제上帝와 고유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성립시켰고, ‘거중이치[居中而治]’라는 종교관은 후계자들이 상제에게 인정받은 문자를 계승해야만 상제와의 소통이 가능해지며, 그를 통해 왕권의 정당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로 작용했다. 이러한 체계는 결국 하문자가 중화민족의 정통 문자로 자리잡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초기 문자에서 이하夷夏의 동서 분화라는 사실은, 성현인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이 각각 이문자夷文字와 하문자夏文字를 창제했다는 고사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선진 시대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왕조가 화하문자의 정통적 지위를 확립한 뒤로는, 동이 문자의 위상이 급속히 쇠퇴했고, 이문자夷文字의 창조자인 저송沮誦 또한 자연히 원래의 영향력을 잃고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지게 되었다.

地中之變遷.
지중地中의 변천.

居中而治體現了中國文化傳統的政治觀與宗教觀. 君權源於天授, 故君王配天而作對在下. 由於授予君王權力的上帝居於天之中央, 也就是北極, 所以配帝在下的人王也就必須居於地的中央. 君王只有居中而治, 才能建立其與授命之帝最直接的聯繫, 從而獲得王權在宗教與政治兩方面的合法性, 這要求歷代君王都必須解決地中的問題. 早期夷夏東西的政治格局並不意味著君王不需要居中而治, 只是那時的地中概念與後世不同, 人們強調的還僅是南北的中央, 尚不具備四方之中的思想. 清華大學藏戰國竹書《保訓》在描述虞舜測求地中的時候, 唯求”上下遠邇”, [26] 意即著重於南北二方的測影工作, 即是對這一事實的真實反映.

[26] 李學勤. 清華大學藏戰國竹書: 壹[M]. 上海: 中西書局, 2010: 142–148.

거중이치[居中而治]는 중국 문화 전통 속 정치관과 종교관을 반영한 것이다. 군왕의 권력은 하늘의 부여에서 비롯되며, 그러므로 군왕은 하늘에 대응해 아래에서 자리하게 된다. 군왕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상제上帝는 하늘의 중심, 곧 북극에 거하므로,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왕 또한 땅의 중심에 거해야 한다. 군왕이 중앙에 거하여 다스릴 때에만 상제와 가장 직접적인 연결을 이룰 수 있고, 그로써 종교적·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역대의 군왕들이 모두 ‘지중地中’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초기의 이하夷夏 동서 구도는 군왕이 ‘거중이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그 당시의 지중 개념이 후세와는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사람들은 남북의 중심만을 강조했으며, 사방의 중심이라는 사고는 아직 갖추지 못했다. 청화대학 소장 전국시대 죽간 《보훈保訓》에서 우순虞舜이 지중을 측정하는 과정을 묘사할 때도 “상하 원이上下遠邇”만을 추구했다고 하니, [26] 이는 남북 두 방향의 그림자를 측정하는 작업에만 치중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考古資料對於早期地中地點的認定提供了堅實證據. 觀象授時是古代君王所壟斷的神聖權力, 而王庭的建立必在地中, 所以君王立表測影的活動也就稱為”立中”. 殷商甲骨文發現大量有關”立中”的卜辭, 是為立表測影. [27] 目前發現的屬於公元前五千紀至有夏早期的槷表只出於兩地, 一在河南濮陽西水坡, 另一則在山西襄汾陶寺. 重要的是, 出土槷表的兩個地點幾乎同處於一條緯度線上. 這個事實清楚地表明, 這一緯度其實就是夷夏兩域文化各自選擇的地中之地.

[27] 蕭良瓊. 卜辭中的“立中”與商代的圭表測景[M]∥科技史文集: 第10輯. 上海: 上海科學技術出版社, 1983: 27–44.

고고학 자료는 초기 ‘지중地中’ 위치의 확정에 대해 탄탄한 증거를 제공한다. 천문을 관측하여 시기를 정하는 일은 고대 군왕이 독점하던 신성한 권한이었고, 왕정王庭의 수립은 반드시 지중에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군왕이 표를 세워 그림자를 측정하는 행위를 ‘입중立中’이라 불렀다. 은상殷商 시대의 갑골문에는 ‘입중’과 관련된 점복 기록이 다수 발견되며, 이는 모두 표를 세워 그림자를 측정한 내용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기원전 5천년기부터 유하有夏 초기까지의 측영용 표는 단 두 지역에서만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하남河南 복양濮陽 서수파西水坡, 다른 하나는 산서山西 양분襄汾 도사陶寺이다. 중요한 점은 이 두 유적이 거의 동일한 위도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바로 이 위도가 이하夷夏 양 지역 문화가 각각 ‘지중’으로 선택했던 지점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夏王朝的一統改變了史前夷夏東西的政治局面, 這使夏後的居中而治不僅要求南北之中, 也必求東西之中, 也就是說, 在夏後所建立的新的政治形勢下, 天地之中的概念必須有所改變. 原來由虞舜所定的地中顯然已不能適應新的王朝, 於是夏祖大禹以及夏代中晚期的商人王亥, 或重新規劃地理, 或進行大地測量. 禹變舜之十二州為九州, 而王亥之”亥” 即有兼該八方之義. 這些工作使得原本由虞舜所定的地中並非真正地中的矛盾愈發突顯了出來, 於是王亥之子上甲微開始重新求測地中, 並將這一新的地中確定在河南嵩山登封告成鎮, 傳承至今. 這裡今天還留有傳為周公測影的碑表——周公測景臺, 為周公隨武王滅商後重新校正上甲微所定新地中的遺物, 成為中國文化的紀念碑. [28]

[28] 馮時. 《保訓》故事與地中之變遷[J]. 考古學報, 2015[2]: 28.

하왕조의 통일은 선사시대 이하夷夏 동서의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으며, 이는 하후夏後의 ‘거중이치居中而治’가 남북의 중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의 중심까지 요구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하후가 수립한 새로운 정치 형세 아래에서는 천지의 중심 개념 자체가 변화해야 했다. 본래 우순虞舜이 정한 지중地中은 이미 새로운 왕조에는 부합하지 않게 되었고, 이에 하조夏祖 대우大禹와 하대 중후기의 상인商人 왕해王亥는 각각 지리 재편이나 대지 측량을 통해 새로운 정비를 시도했다. 대우는 순이 정한 12주州를 9주로 개편했고, 왕해의 ‘해亥’ 자 또한 8방위 전체를 포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작업들로 인해, 원래 우순이 정했던 지중이 실제로는 ‘진짜 중심’이 아니었다는 모순이 점점 뚜렷해졌다. 결국 왕해의 아들 상갑미上甲微는 다시 지중을 측정해 새로운 지중을 하남河南 숭산嵩山 등봉登封의 고성진告成鎮으로 확정했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곳에는 주공周公이 그림자를 측정했다고 전해지는 비석인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가 남아 있으며, 이는 무왕武王이 은商을 멸한 뒤, 주공이 상갑미가 정한 새로운 지중을 다시 교정한 유물로, 중국 문화의 기념비로 여겨진다. [28]

上甲微新定的地中與舊有地中相比具有兩個鮮明的特點, 其一, 地中的緯度更為偏南; 其二, 以嵩山告成鎮為中心的新地中正好處於西水坡與陶寺兩地連線的垂直平分線上, 說明上甲微所求的地中不僅重定了南北之中, 更新定了東西之中. 從此之後, 天地之中才真正具有了四方之中的空間意義, 而居於天地之中的王庭也才真正具有了四方之極的政治意義. 至此, 早期夷夏東西的政治格局最終破除, 華夏一統的局面重構了包括時空、政治和宗教在內的新內涵.

상갑미가 새로 정한 지중은 기존의 지중과 비교해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첫째, 그 위도가 이전보다 남쪽으로 치우쳤고, 둘째, 숭산 고성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중은 서수파西水坡와 도사陶寺를 잇는 직선을 수직으로 이등분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는 상갑미가 구한 지중이 단순히 남북 중심만을 다시 정한 것이 아니라, 동서 중심까지 새로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천지의 중심은 비로소 사방의 중심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그 중심에 위치한 왕정도 마침내 사방의 극점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 이하夷夏 동서의 정치 구도는 최종적으로 타파되었고, 중화의 통일이라는 국면이 시공간, 정치, 종교를 아우르는 새로운 내포를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這個四方之中的地理中央, 其概括表述就是“中或[域]”, 已見於西周早期的何尊銘文, 文獻則作“中土”“中州”“中原”“中國”. 至漢末南北朝時期, 又出現“中華”一稱, 其所強調的都是相對於四夷的中央. 王庭居中, 這是王權合法性的根本保證. 事實上, 不論居中而治還是逐鹿中原, 居中以治天下始終都是中國傳統政治觀與宗教觀的核心思想, 歷代統治者不論何族何民, 必居天地之中建立王庭, 也必須接受夏王朝所制定並為上帝認可的正統文字, 從而通過這種地理之中央與文字的傳承, 使統治者負有了傳承其文化的歷史使命, 這就是中華文明何以數千年不絕的根本原因.

이 사방의 중심에 해당하는 지리적 중앙은, 요약해서 표현하면 “中或[域]”이라 하며, 이는 서주西周 초기의 하존何尊 명문에 이미 보이고, 문헌에서는 “중토中土” “중주中州” “중원中原” “중국中國”으로 나타난다. 후한 말 남북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중화中華”라는 명칭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는 사방의 오랑캐에 대비되는 중앙임을 강조한 것이다. 왕정王庭이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곧 왕권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보증이다. 사실상, 중앙에 거하며 다스리는 것이든, 중원을 두고 다투는 것이든, ‘중앙에 있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언제나 중국 전통 정치관과 종교관의 핵심 사상이었다. 역대의 통치자는 어떤 민족, 어떤 인종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천지의 중심에 왕정을 세워야 했고, 또한 하夏 왕조가 제정하고 상제上帝가 인정한 정통 문자를 수용해야 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중앙성과 문자 계승을 통해, 통치자는 그 문화의 전통을 계승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중화문명이 수천 년 동안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온 근본적인 이유이다.

5. 결론 結論

中華文明自古即形成了多元一體的政治格局, 上古文化的多元性至少表現為夷夏東西的交勝, 至華夏一統, 才最終確立了漢文字的正統地位, 完善了以四方之中為核心的居中而治政治觀與宗教觀, 從而使中華文明綿延不絕. 綜上所述, 可將本文要點釐定如次:

중화문명은 예로부터 다원일체多元一體의 정치 구조를 형성해 왔으며, 상고 문화의 다양성은 적어도 이하夷夏의 동서 간 우열 교차로 나타난다. 이후 화하華夏의 통일을 통해 비로소 한자의 정통적 지위가 확립되었고, 사방의 중심을 핵심으로 하는 ‘거중이치居中而治’의 정치·종교관이 완비되었다. 이로써 중화문명은 끊임없이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본문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一是前國家時代的上古文明並非一統, 而呈現為夷夏東西, 太行山以東屬東夷文化, 太行山以西屬華夏文化, 這種形勢在夏王朝建立後才徹底改變.

첫째, 국가 이전 시대의 상고문명은 통일된 체제가 아니라, 이하夷夏의 동서 구도로 나타났다. 태행산太行山 동쪽은 동이東夷 문화권에, 서쪽은 화하華夏 문화권에 속했으며, 이러한 구도는 하나라夏王朝가 건립된 후에야 비로소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二是文字起源的夷夏兩源證明了夷夏東西的史實. 發現於太行山以東的東夷文字實即古彝文, 則東夷文化也即早期的彝族文化. 太行山以西的華夏文字是漢字的祖先. 夷夏兩系文字的歷史都可以追溯到距今八千年上下.

둘째, 문자의 기원에서도 이하 두 계통이 존재했음은 이하 동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한다. 태행산 동쪽에서 발견된 동이계 문자는 고이문古彝文이며, 동이문화는 곧 초기 이족彝族 문화에 해당한다. 태행산 서쪽의 화하 문자는 한자의 조상이다. 이하夷夏 두 계통의 문자는 모두 지금으로부터 약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三是考古學文化所表現的夷夏東西的事實同樣清楚. 分布於太行山以東的東夷文化, 其天極璇璣的天文觀、龜書八角的地理觀、眼目通神的宗教觀, 無不在今日西南地區的彝族、納西族、苗族、傈僳族等民族中有所存留, 而於華夏文化反不彰明. 這些事實建立了東夷文化與古代西南夷乃至今日西南少數民族文化的聯繫.

셋째, 고고학적 문화가 보여주는 이하 동서의 구도 역시 명확하다. 태행산太行山 동쪽에 분포한 동이문화는 하늘의 중심인 선기璇璣에 대한 천문 관념, 거북 껍질에 여덟 방향을 새긴 지리 관념, 눈과 신을 연결하는 종교 관념 등에서 나타나며, 이는 오늘날 서남 지역의 이족彝族, 납서족納西族, 묘족苗族, 리수족傈僳族 등의 민족 문화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반면 화하華夏 문화에서는 오히려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동이문화가 고대 서남 이夷, 더 나아가 오늘날 서남 소수 민족 문화와 이어져 있음을 입증한다.

四是夏王朝的建立不僅必須首先確立其用以通神的文字, 而且需要重定天地之中. 其定華夏文字作為具有宗教意義的正統文字, 從而建立了其與至上神的固有聯繫. 而新定的地中則完全破除了夷夏東西的政治格局, 建立了四方之中的觀念. 這些措施不僅延續了居中而治的傳統政治與宗教制度, 而且賦予了居中者必須傳承其文字, 並進而傳承其文化的歷史使命, 成為中華文明歷數千年而不曾中斷的根本保證.

넷째, 하나라夏王朝의 건립은 신과 소통하는 데 사용될 문자를 먼저 확립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천지의 중심’을 새롭게 설정해야 했다. 그들은 화하 문자를 종교적 의미를 지닌 정통 문자로 확정하여, 그것을 통해 지고신과의 고유한 연결을 구축했다. 새롭게 정한 ‘지리적 중심’은 이하 동서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해체하고, 사방의 중심이라는 관념을 수립했다. 이러한 조치는 ‘거중이치居中而治’라는 전통적인 정치·종교 제도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중심에 거하는 자에게 그 문자와 문화를 반드시 계승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이로써 중화문명이 수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보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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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편집責任編輯: 속세래粟世來]

영문초록

Dongyi Culture, Huaxia Culture and the Unification of Huaxia Chinese Full Text

FENG Shi; Institute of Archaeology,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Abstract:

China’s ancient civilization is not a unified one, but presents a situation with Yi in the east and Xia in the west. With Taihang Mountain as the boundary, Dongyi culture is distributed in the east, which is the ancient culture of the southwest minorities with the Yi ethnic group as the core today. And Huaxia culture, which is the ancient culture of the Chinese nation today, is distributed in the west. This fact has been fully and clearly demonstrated through the study of the origin of writing and archaeology. The situation of the early civilization of Yi and Xia chang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Xia Dynasty[about 2,070 BC-1,600 BC]. After the Xia Dynasty, by determining the orthodox characters of the dynasty and redefining the world, the unified religious and political views of Chinese civilization were established. This inherent relationship between the monarch and the supreme god established by the geography and divine characters requires that the subsequent dynasty must shoulder the mission of inheriting the legacy of the previous dynasty, that is, adhering to the established and divine characters, for this is the fundamental guarantee of the legitimacy of the monarchical power. It is this political and religious tradition that has made Chinese civilization last for thousands of years.

Keywords:

Chinese civilization; Dongyi; Huaxia; characters;

동이 문화, 화하 문화와 화하의 통일

풍시馮時;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초록:

중국의 고대 문명은 통일된 문명이 아니며, 동쪽의 ‘이夷’와 서쪽의 ‘하夏’라는 구도를 나타낸다. 태행산太行山을 경계로 동쪽에는 동이 문화가 분포하는데, 이는 오늘날 이족彝族을 중심으로 한 중국 남서부 소수민족의 고대 문화이다. 반면, 화하 문화는 오늘날 중국 민족의 고대 문화로서 서쪽에 분포했다. 이러한 사실은 문자 기원과 고고학 연구를 통해 충분히 명확하게 입증되었다.

이하夷夏의 초기 문명 구도는 하夏 왕조의 성립과 함께 변화했다[약 BC 2070년~BC 1600년]. 하 왕조 이후에는 왕조의 정통 문자를 확정하고 세계의 중심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중국 문명의 종교적·정치적 통일관이 수립되었다. 지리와 신성한 문자로 맺어진 군주와 최고신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이후 왕조가 반드시 전대 왕조의 유산을 계승하고 정해진 신성한 문자를 고수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도록 요구했다. 이는 군주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근본적인 조건이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적·종교적 전통이 중국 문명이 수천 년 동안 중단되지 않고 지속된 근거가 되었다.

키워드: 중국 문명, 동이東夷, 화하華夏, 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