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지도 #송원비각
[1]张晓旭. 宋元碑刻研究(下篇)[J]. 南方文物, 2008(03)139-144.
[1]张晓旭. 宋元碑刻研究(下篇)[J]. 南方文物, 2008(03)13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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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초록] 張曉旭(2005). 宋元碑刻研究[上篇][J]. 5회 인용.
[논문초록] 張曉旭(2006). 宋元碑刻研究[中篇][J]. 4회 인용.
[논문초록] 張曉旭(2008). 宋元碑刻研究[下篇][J]. 2회 인용.
宋元碑刻研究(下篇)
송원비각연구[하편]
장효욱張曉旭
소주비각박물관蘇州碑刻博物館
5. 중외문화교류비각中外文化交流碑刻
有關中外文化交流方面的碑刻, 宋元時期也有不少。如泉州海外交通史博物館保存有一百多方有關泉州的伊斯蘭教石刻, 這些石刻大部分是有關中外文化交流的。宋元時期泉州為中國對外貿易大港, 唐初伊斯蘭教傳入中國, 隨之而來的是阿拉伯人、波斯人來泉州傳教、經商, 有一部分人長期居住泉州, 後來形成回族。
중외 문화 교류와 관련된 비각은 송원시대宋元時代에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천주泉州 해외교통사박물관海外交通史博物館에는 천주泉州와 관련된 이슬람교伊斯蘭敎 석각 1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중외 문화 교류와 관련된 것이다. 송원시대 천주는 중국 대외 무역의 큰 항구였으며, 당唐 초기에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그에 따라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천주에 와서 포교하고 장사하다가, 일부는 천주에 오래 거주하여 뒷날 회족回族을 형성했다.
現在泉州伊斯蘭教艾蘇哈卜寺內有阿拉伯文碑刻《古蘭經》。還有為數眾多的回族墓碑等。其中最早的紀年墓碑是回曆 567 年(1171 年)的花崗岩刻石。墓碑有阿拉伯文、波斯文和突厥文等, 其中以阿拉伯文為大宗, 書寫時往往與漢文並書。比較典型的石刻為刻有阿拉伯文和中文「蕃客墓」的墓碑和阿拉伯文泉州郭姓回族墳墓碑等。
지금 천주 이슬람교 애소합복사艾蘇哈卜寺[알아스하브 사원] 안에는 아랍어로 새긴 《고란경古蘭經》[꾸란] 비각이 있다. 그 밖에 수많은 회족 묘비 등도 있다. 그중 가장 이른 기년 묘비는 회력回曆 567년[1171]의 화강암 각석이다. 묘비에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 아랍어가 가장 많고, 쓸 때는 한문漢文과 함께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비교적 전형적인 석각으로는 아랍어와 한문「번객묘蕃客墓」가 함께 새겨진 묘비와, 아랍어로 새긴 천주泉州 곽씨郭氏 회족回族 분묘비 등이 있다.
上述石刻既是研究伊斯蘭教在中國傳播的實物證據, 又是一份泉州回族史的珍貴資料。
위의 석각들은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을 연구하는 실물 증거이자, 천주 회족사回族史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另外, 在江蘇省揚州市博物館內有一塊元代意大利人馬可波羅遊揚州的石碑, 該碑為意大利語碑刻, 碑額呈圓弧狀, 碑身下部殘缺。碑載馬可波羅遊揚州時所見所聞, 是一件很珍貴的中外文化交流碑刻。
그 밖에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박물관 안에는 원대元代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馬可波羅]가 양주揚州를 유람한 일을 기록한 석비가 한 점 있다. 이 비는 이탈리아어로 새겨진 비각으로, 비액碑額은 둥근 호弧 모양이며 비신碑身 아랫부분은 깨져 있다. 비문에는 마르코 폴로가 양주를 유람할 때 보고 들은 바가 실려 있어, 매우 귀중한 중외 문화 교류 비각이다.
在江蘇揚州東關城外運河東岸的土岡上的《普哈丁墓石刻》及其阿拉伯文墓碑亦是比較珍貴的中外文化交流石刻。普哈丁相傳為伊斯蘭教創始人穆罕默德第十六世裔孫, 他於南宋末年來揚州傳教, 曾在城內建禮拜寺任職, 死於宋德祐元年(1275 年), 並葬於此岡。墓建於南宋末年, 與埃及金字塔外形相類似。普哈丁墓石刻主要為墓門題字「西域先賢普哈丁之墓」和第三層墓塔上的陰刻阿拉伯文《可蘭經》中的某些章節。
강소江蘇 양주揚州 동관성東關城 밖 운하 동안東岸의 토강土岡 위에 있는 〈푸하딩 묘 석각[普哈丁墓石刻]〉과 그에 딸린 아랍어 묘비 역시 비교적 귀중한 중외 문화 교류 석각이다. 푸하딩普哈丁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穆罕默德]의 16세손이라 하며, 그는 남송 말년에 양주에 와서 포교하면서 성안에 예배사를 짓고 그곳에서 일을 보다가 송 덕우德祐 원년[1275]에 죽어 이 언덕에 묻혔다. 묘는 남송 말년에 조성되었으며, 외형은 이집트 피라미드[金字塔]와 비슷하다. 푸하딩 묘 석각의 주요 내용은 묘문墓門에 새긴 「서역선현푸하딩지묘西域先賢普哈丁之墓」라는 제자題字와, 제3층 묘탑墓塔에 음각된 아랍어 《코란[可蘭經]》의 몇몇 장절章節이다.
在普哈丁墓旁還有元代阿拉伯人乙古伯等人的墓碑, 碑文載乙古伯等阿拉伯人在中國傳教、定居之事, 是中國和阿拉伯、波斯人民傳統友誼的見證, 是我國保存的一處難得的伊斯蘭教文化遺跡。
푸하딩 묘 옆에는 또 원대 아랍인 을고백乙古伯 등의 묘비가 있는데, 비문에는 을고백 등 아랍인들이 중국에서 포교하고 정주定住한 일이 실려 있다. 이는 중국과 아랍·페르시아 인민들의 전통적 우의를 보여 주는 증거이며, 중국에 보존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이슬람교 문화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普門禪寺碑》, 青石質地。碑長 1.12, 寬 0.54 米。碑文共 440 餘字, 載宋代日僧寂照在當時宰相丁謂的指意下到浙江寧波向天台宗知禮法師請教以及短期客居蘇州研究佛教經義和傳教事, 為古代中日文化交流的珍貴實物, 現藏蘇州碑刻博物館。碑為明代刻石。
〈보문선사비普門禪寺碑〉는 청석靑石 재질이다. 비의 길이 1.12미터, 너비 0.54미터이며, 비문은 모두 440여 자에 이른다. 비문에는 송대 일본 승려 자쿠쇼[寂照]가 당시 재상 정위丁謂의 지시에 따라 절강浙江 영파寧波에 가서 천태종天台宗 지례知禮 법사法師에게 가르침을 청한 일과, 소주蘇州에 잠시 머무르며 불교 경의經義를 연구하고 포교한 일이 기록되어 있어, 고대 중일 문화 교류의 귀중한 실물이다. 현재 소주비각박물관蘇州碑刻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는 명대明代의 각석이다.
6. 종교비각宗敎碑刻
宗教石刻在宋代也比較多。如位於四川省大足縣城南的玉皇觀內, 有宋代道教石窟寺的南山造像, 寺內有窟龕六個, 窟龕內布滿道教人物像, 其中正面龕中刻有玉清、太清、上清像。龕左右壁立六道君像, 洞壁內還立有 220 座石雕天尊。上述道教像上大多刻有文字題記, 內容讚美道教, 或記一些日常瑣事。
종교 석각은 송대宋代에도 비교적 많다. 예를 들어 사천성四川省 대족현大足縣 성 남쪽 옥황관玉皇觀에는 송대 도교 석굴사石窟寺인 남산조상南山造像이 있다. 절 안에는 굴감窟龕이 여섯 개 있으며 굴감 안에는 도교 인물상이 가득하다. 그중 정면 감龕에는 옥청玉淸·태청太淸·상청上淸의 상이 새겨져 있고, 감의 좌우 벽에는 육도군상六道君像이 서 있다. 동굴 벽 안에는 다시 220기의 석조 천존天尊이 늘어서 있다. 위 도교 조상造像 대부분에는 문자 제기題記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도교를 찬미하거나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을 적은 것이다.
再如位於四川省大足縣城東聖府洞的石門山石刻, 系宋代儒、釋、道三教造像, 有窟龕十餘個, 造像千餘軀, 大部分有造像銘文及署名。
또한 사천성 대족현 성 동쪽 성부동聖府洞에 있는 석문산石門山 석각이 있다. 송대 유儒·불釋·도道 삼교三敎의 조상이며, 굴감이 10여 곳, 조상이 1천여 구에 이르고, 대부분에 조상造像 명문銘文과 서명署名이 있다.
還有位於四川省大足縣城西南子母殿和千佛崖的石篆山石刻, 也是宋代儒、釋、道三教造像。佛教造像, 如如來佛等; 儒教造像, 如孔子及其弟子像等; 道教造像如老君、聖母等, 這些造像大部分有造像題記。
그리고 사천성 대족현 성 서남쪽 자모전子母殿과 천불애千佛崖에 있는 석전산石篆山 석각도 송대 유·불·도 삼교의 조상이다. 불교 조상으로는 여래불如來佛 등이 있고, 유교 조상으로는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상 등이 있으며, 도교 조상으로는 노군老君과 성모聖母 등이 있다. 이들 조상에는 대부분 조상 제기題記가 있다.
《普利陀大白傘神咒幢》, 立於宋熙寧三年(1070 年), 為宋代經幢之精品。該幢形制與唐幢同, 幢身刻楞嚴諸咒, 並附有後記, 正書, 共 490 餘字。現藏江蘇省無錫市惠山寺。該幢雕刻精緻, 花紋裝飾華麗, 既是研究我國古代佛教的重要實物, 也是一件珍貴的雕刻藝術珍品。
〈보리타대백산신주당普利陀大白傘神咒幢〉은 송 희녕熙寧 3년[1070]에 세워졌으며, 송대 경당經幢의 가품佳品이다. 이 당幢의 형제形制는 당대唐代 경당과 같고, 당신幢身에는 능엄경楞嚴經의 여러 진언諸咒이 새겨져 있으며 후기後記가 덧붙여 있다. 글씨는 정서正書이고 모두 490여 자이다. 현재 강소성 무석시無錫市 혜산사惠山寺에 소장되어 있다. 이 당은 조각이 정교하고 무늬 장식이 화려하여, 중국 고대 불교를 연구하는 중요한 실물이자 귀중한 조각 예술 작품이다.
《大玄真宮祖碑》在遼寧省阜新市西南醫巫閭山北麓。碑石為龜趺螭首, 通高 4.30、寬 1.33、厚 0.33 米, 石質為褐色砂質岩。碑石紋飾華麗, 雕有雲閣天宮、寶相、牡丹、纏枝花紋和卍字圖案。碑陽和碑陰共刻有 3484 個文字, 載道士楊志谷三十年的傳道活動和宮觀沿革及所擁有的土地、財產情況。同時記錄了阜新地區文化、地理方面的概況, 是一方重要的歷史文物。現為遼寧省文物保護單位。
〈대현진궁조비大玄眞宮祖碑〉는 요녕성遼寧省 부신시阜新市 서남쪽 의무려산醫巫閭山 북록北麓에 있다. 비석은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었으며, 통고通高 4.30미터, 너비 1.33미터, 두께 0.33미터, 석질은 갈색 사질암砂質岩이다. 비석 무늬 장식이 화려하여 운각천궁雲閣天宮·보상寶相·모란牡丹·전지화문纏枝花紋과 만卍자 도안이 새겨져 있다. 비양碑陽과 비음碑陰을 합쳐 모두 3,484자가 새겨져 있는데, 도사道士 양지곡楊志谷의 30년간 전도傳道 활동과 궁관宮觀의 연혁, 그리고 그 궁관이 소유한 토지와 재산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신阜新 지역의 문화·지리적 개황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역사 문물이다. 지금은 요녕성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北宋景祐五年(1038 年)的《趙州陀羅尼經幢》亦另具特色。該幢在河北趙縣。經幢為平面八角形, 一、二、三層刻陀羅尼經, 四至七層分刻佛教人物、故事、動物、花卉等, 高約 18 米, 是我國現存石經幢中最高的一座。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인 북송北宋 경우景祐 5년[1038]의 〈조주다라니경당趙州陀羅尼經幢〉도 또 하나의 특색을 지닌 것이다. 이 당은 하북河北 조현趙縣에 있다. 경당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1·2·3층에는 다라니경陀羅尼經이 새겨져 있고, 4층부터 7층까지는 불교 인물·고사·동물·화훼 등이 각기 새겨져 있다. 높이는 약 18미터로, 중국에 현존하는 석경당石經幢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另外, 江蘇蘇州玄妙觀內至今保存有四通著名的宋代道教碑刻。
이 밖에 강소 소주의 현묘관玄妙觀 안에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송대 도교 비각 4통이 보존되어 있다.
一通是《詔請三清殿上梁文碑》, 碑高 1.62, 寬 0.93, 厚 0.20 米。刻於南宋嘉定十一年(1218 年)。由著名刻工張允迪鐫石。碑文由龔頤正撰文。行楷。該碑主要記載宋代名觀——蘇州玄妙觀三清殿的歷史沿革。
그 한 통은 〈조청삼청전상량문비詔請三淸殿上梁文碑〉이다. 비의 높이는 1.62미터, 너비 0.93미터, 두께 0.20미터이다. 남송 가정嘉定 11년[1218]에 새겨졌다. 이름난 각공刻工 장윤적張允迪이 새겼고, 비문은 공이정龔頤正이 지었으며 행해行楷이다. 이 비는 송대의 이름난 도관, 곧 소주 현묘관 삼청전三淸殿의 역사적 연혁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另一通是《通神先生何蓑衣事實碑》, 碑高 1.55, 寬 1.08, 厚 0.20 米。立於南宋慶元二年(1196 年)。碑額為宋孝宗趙昚手書「通神庵」三大字, 碑文由胡袤撰, 共 680 餘字, 正書。載蓑衣何真人(何道人)之生平事蹟。何道人是淮陽人, 紹興初來蘇州, 淳熙三年(1176 年)宋孝宗趙昚命人在蘇州天慶觀建通神庵賜與。
또 한 통은 〈통신선생하사의사실비通神先生何蓑衣事實碑〉이다. 비의 높이는 1.55미터, 너비 1.08미터, 두께 0.20미터이다. 남송 경원慶元 2년[1196]에 세워졌다. 비액碑額은 송 효종宋孝宗 조신趙昚이 직접 쓴 「통신암通神庵」 세 글자이고, 비문은 호무胡袤가 지었으며 모두 680여 자, 정서正書이다. 사의蓑衣 하진인何眞人[하도인何道人]의 생애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도인은 회양淮陽 사람으로 소흥紹興 초년에 소주로 왔으며, 순희淳熙 3년[1176]에 송 효종이 명하여 사람을 시켜 소주 천경관天慶觀에 통신암通神庵을 짓고 그에게 하사하게 했다.
第三通是《天慶觀尚書省札並部符使帖碑》, 碑高 1.94, 寬 1.05, 厚 0.22 米。碑額鐫《朝旨蠲免天慶觀道正司科敷度牒省札部符使帖》, 碑文共刻官方四道文書, 大意是根據觀主陳天一的陳訴和皇帝的旨意, 尚書省同意免除天慶觀道正司科敷科買度牒。
세 번째 비는 〈천경관상서성찰병부부사첩비天慶觀尙書省札並部符使帖碑〉이다. 비의 높이는 1.94미터, 너비 1.05미터, 두께 0.22미터이다. 비액에는 〈조지견면천경관도정사과부도첩성찰부부사첩朝旨蠲免天慶觀道正司科敷度牒省札部符使帖〉이라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모두 네 통의 관문서官文書가 새겨져 있는데, 그 대의는 관주觀主 진천일陳天一의 진소陳訴와 황제의 지의旨意에 따라, 상서성尙書省이 천경관 도정사道正司의 과부科敷 도첩度牒 구매를 면제하기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度牒是官府發給道士的特許憑證。獲牒者可免地稅、徭役。宋室南渡, 經濟每況愈下, 於是度牒的出售成為宋王室財政收入的重要來源。碑文為研究宋代道教和社會經濟狀況提供了珍貴史料。
도첩度牒은 관부官府가 도사道士에게 발급하는 특허 증빙이다. 도첩을 얻은 자는 지세地稅와 요역徭役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송 왕실이 남쪽으로 옮긴 뒤 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도첩을 파는 일이 송 왕실 재정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비문은 송대 도교와 사회·경제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第四通是《老子像碑》, 碑高 1.8, 寬 0.88, 厚 0.30 米, 青石質地。碑石保存完好。碑分上、中、下三方面內容。上部為唐代大書法家顏真卿所書唐玄宗李隆基對老子的讚語; 中部為唐代畫聖吳道子所畫老子像; 左下方為落款。
네 번째 비는 〈노자상비老子像碑〉이다. 비의 높이는 1.8미터, 너비 0.88미터, 두께 0.30미터이며 청석 재질이다. 비석은 잘 보존되어 있다. 비는 상·중·하 세 부분의 내용으로 나뉜다. 윗부분은 당대唐代의 대서법가 안진경顏眞卿이 쓴, 당 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가 노자老子를 찬미하는 글이다. 가운데 부분은 당대 화성畵聖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노자상老子像이고, 왼쪽 아랫부분에는 낙관落款이 있다.
上部讚語全文如下:
윗부분 찬어贊語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玄宗皇帝御讚
爰有上德, 生而長年;
白髮垂相, 紫氣浮天;
金口默默, 永劫綿綿;
東訓兄父, 西化金仙;
百王取則, 累聖攸傳;
萬教之主, 先天地焉;
函谷關右, 傳經五千;
道非常道, 玄之又玄。
顏真卿書
현종 황제 어찬玄宗皇帝御贊
이에 위대한 덕이 있어, 태어나매 장수하셨네.
백발이 늘어져 어우러지고, 자색 기운이 하늘에 떠도네.
금구金口는 묵묵히 다물려, 영겁토록 면면히 이어지네.
동으로 형제와 아비를 가르치고, 서쪽으로 금선金仙[부처]을 교화하셨네.
백왕百王이 본받고, 누대의 성인이 그 가르침을 전했네.
온갖 가르침의 주인이시며, 천지보다 앞서 계셨네.
함곡관函谷關 오른편에서, 경전 오천 자를 전하셨네.
도道란 평상한 도가 아니니, 가물고 또 가물도다.
안진경顏眞卿 씀
讚語共 8 行, 行 8 字, 楷書。
찬어는 모두 8행, 매 행 8자이며 해서楷書이다.
下部為老子像。
아랫부분은 노자상이다.
左下方落款為:
왼쪽 아래 낙관은 다음과 같다.
「老子聖像, 吳道子筆。斯本久矣, 不教珍藏, 謹捐命工刊石, 以廣其傳。寶慶初元民歲臘日, 姑蘇天慶觀大同道士馮大同」。
「노자老子의 성상聖像은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다. 이 본本을 오래 가지고 있었으나, 깊이 감추어 두지 않고 삼가 사재私財를 내어 장인에게 명해 돌에 새기게 하니, 이로써 그 전함을 널리 하고자 한다. 보경寶慶 초원初元 민세民歲 납일臘日, 고소姑蘇 천경관天慶觀 대동도사大同道士 풍대동馮大同.」
此碑為南宋寶慶(1225~1227 年)年間所刻。刻者為南宋名匠張允迪。吳道子所作的這幅老子像, 以天縱之才, 窮丹青之妙, 超然脫俗, 且出新意於法度之中, 寄妙筆於豪放之外, 始變前人道釋人物畫細巧之積習, 用筆厚拙粗辣, 筆勢縱橫健拔, 衣紋作「鐵線描」, 流利勁挺足稱唐代道釋人物畫之妙品。
이 비는 남송 보경寶慶 연간[1225~1227]에 새겨졌으며, 새긴 이는 남송의 이름난 장인 장윤적張允迪이다. 오도자가 그린 이 노자상은 하늘이 낸 천재의 솜씨로 단청丹靑의 묘妙를 다하고, 초연히 속됨을 벗어났으며, 법도 안에서 새로운 뜻을 내고 호방함 밖에 묘필을 부려, 이전 사람들의 도道·석釋 인물화가 가졌던 세교細巧한 관습을 처음으로 바꾸었다. 운필은 두텁고 거칠며 강하고, 필세는 종횡으로 굳세고 빼어나며, 옷 주름은 이른바 「철선묘鐵線描」로 그려져, 유려하고 굳센 필치가 당대唐代 도·석 인물화의 묘품妙品이라 일컬을 만하다.
7. 문학예술비각文學藝術碑刻
宋代碑刻還有一個重要門類, 就是文學藝術碑刻, 此種內容的碑刻亦可以說是宋代碑刻的一個顯著特點。唐代是我國文學藝術較發達的一個朝代, 特別是「唐詩」, 在中國文學史上可稱空前絕後。但把文學作品刻在碑上, 唐代並不多, 幾乎可以說是空白。
송대 비각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 곧 문학예술비각文學藝術碑刻이 있다. 이러한 내용의 비각은 송대 비각의 한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당대唐代는 중국에서 문학예술이 비교적 발달한 시대로, 특히 「당시唐詩」는 중국 문학사에서 가히 공전절후空前絶後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비석에 새기는 일은 당대에는 많지 않았고,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宋代文學藝術也很繁榮, 尤其是「宋詞」在中國文學史上的地位並不遜色於「唐詩」。與唐代不同, 宋代的文學藝術作品通常被人刻於石碑、摩崖。像宋代眉山創作的《宋觀海市詩並引碑》, 刻於宋元豐八年(1085 年), 正書, 此石現在山東蓬萊縣蓬萊閣。還有由歐陽修撰文, 蘇軾書丹的聲譽卓著的宋《豐樂亭記碑》, 正書刻石在安徽全椒縣。另外, 由歐陽修撰文, 蘇軾書丹的《宋醉翁亭記碑》, 正書, 刻於宋元祐六年(1091 年), 現亦在安徽全椒縣。由蘇軾書丹的《宋浴日亭記碑》, 正書, 刻於宋嘉定辛巳(1221 年), 現在廣州南海神廟前亭內。由蘇軾書丹的《宋蘇上清祠碑》, 刻於宋元祐二年, 現碑石已毀。
송대에는 문학예술이 매우 번영했으며, 특히 「송사宋詞」는 중국 문학사상의 지위가 「당시唐詩」에 결코 손색이 없다. 당대와 달리 송대에는 문학예술 작품을 흔히 석비와 마애摩崖에 새겼다. 가령 송대 미산眉山에서 지은 《송관해시시병인비宋觀海市詩并引碑》는 송 원풍元豐 8년[1085]에 새겨졌고 정서正書이며, 현재 산동山東 봉래현蓬萊縣 봉래각蓬萊閣에 있다. 또 구양수歐陽修가 짓고 소식蘇軾이 글씨를 쓴 명성 높은 송 《풍락정기비豐樂亭記碑》는 정서이며 각석은 안휘安徽 전초현全椒縣에 있다. 그 밖에 구양수가 짓고 소식이 글씨를 쓴 《송취옹정기비宋醉翁亭記碑》는 정서이며, 송 원우元祐 6년[1091]에 새겨졌고 역시 안휘 전초현에 있다. 소식이 글씨를 쓴 《송욕일정기비宋浴日亭記碑》는 정서이며, 송 가정嘉定 신사년辛巳年[1221]에 새겨졌고, 현재 광주廣州 남해신묘南海神廟 앞 정자 안에 있다. 소식이 글씨를 쓴 《송소상청사비宋蘇上淸祠碑》는 송 원우 2년에 새겨졌으나, 지금은 비석이 이미 훼손되었다.
另外, 范成大書寫的《四時田園雜興六十首碑》, 也特別有名, 碑石共八塊, 刻石現在江蘇蘇州石湖, 所述內容為反映范成大退隱石湖後的閒居生活, 文辭生動、優美。
그 밖에 범성대范成大가 쓴 《사시전원잡흥육십수비四時田園雜興六十首碑》도 특히 유명하다. 비석은 모두 8개이며, 각석은 현재 강소 소주 석호石湖에 있다. 그 내용은 범성대가 석호로 물러나 은거한 뒤의 한가한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문사文辭가 생동하고 우미優美하다.
上述詩、詞、散文都是中國文學史上的名篇, 其內容與價值毋庸贅述。
위에 든 시·사·산문은 모두 중국 문학사에서 이름난 작품들이며, 그 내용과 가치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還有一塊鮮為人知的宋代《雲龍山詩刻》。此石刻在江蘇省徐州市南郊雲龍山上。雲龍山佔地面積很廣, 由於其蜿蜒起伏, 狀如游龍, 巨石嶙峋, 自古以來為遊覽勝地, 山上有宋、明、清三朝詩刻, 其中以宋代蘇軾行書詩刻為最佳, 詩文亦寫得極其優美, 可謂宋代詩文名篇。其詩云:「醉中走上黃茅岡, 滿岡亂石如群羊, 岡頭醉倒石作床, 仰觀白雲天茫茫。歌聲落谷秋風長, 路人舉首東南望。□□□□□□□, 拍手大笑使君狂。」詩後題:「元豐元年九月十七日, 張天驥、蘇軾、顏復、王鞏, 始登此山」二十二字。
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송대 《운룡산시각雲龍山詩刻》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 석각은 강소성 서주시徐州市 남쪽 교외 운룡산雲龍山 위에 있다. 운룡산은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넓고, 산세가 구불구불 일어났다 내려갔다 하여 마치 노니는 용과 같으며, 큰 바위들이 들쭉날쭉 솟아 있어, 예로부터 유람의 명소였다. 산 위에는 송·명·청 3대의 시각詩刻이 있는데, 그중 송대 소식이 행서行書로 쓴 시각이 으뜸이며 시문 또한 매우 아름다워, 송대 시문의 명편이라 할 만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취중에 황모강黃茅岡에 올라 보니, 강마루에 어지러이 흩어진 돌이 양 떼 같구나. 강마루에서 취해 쓰러져 돌을 침상 삼고, 누워 흰 구름 바라보니 하늘은 아득아득. 노랫소리 골짜기에 떨어지고 가을바람 길어, 길 가는 이 머리 들어 동남을 바라보네. □□□□□□□, 손뼉 치며 크게 웃으니 사군使君이 미친 듯하다 하리.」
시 뒤에는 「원풍元豐 원년 9월 17일, 장천기張天驥·소식蘇軾·안복顏復·왕공王鞏이 비로소 이 산에 올랐다」라는 22자가 적혀 있다.
《定林寺摩崖題刻》也較著名。不過有一部分為遊記題刻。該題刻在江蘇南京東郊明孝陵之北的鐘山懸崖上, 共有南宋題刻五處, 分別是陸游、韓無咎、趙方、趙希蒼和李謂道。一處為不知名的「淳祐己酉」刻工題記。其中三首題刻較為著名。陸游題刻為:「乾道乙酉七月四日, 笠澤陸務觀冒大雨獨遊定林」。韓無咎題刻為:「乾道丁亥八月十日, 叔渙、伯玉、中父、子雲、無咎、伯山、方叔來遊鐘山, 攜入功德水, 過定林烹茶乃還。」趙方題刻為:「曉來秋色挾秋聲, 萬慮經心事又新, 慷慨長哦洗兵馬, 大功尤屬小心人。」該題刻既反映了南宋末年一部分朝中大臣主戰、愛國的思想與信念, 又是一件新發現的宋代詩詞作品。
〈정림사마애제각定林寺摩崖題刻〉도 비교적 유명하다. 다만 그중 일부는 유람기 성격의 제각이다. 이 제각은 강소江蘇 남경南京 동쪽 교외 명효릉明孝陵 북쪽의 종산鐘山 절벽에 있으며, 모두 다섯 곳의 남송 제각이 있는데 각각 육유陸遊·한무구韓無咎·조방趙方·조희창趙希蒼·이위도李謂道의 것이다. 한 곳은 작자 미상의 「순우기유淳祐己酉」 각공刻工 제기題記이다. 그중 다음 세 편의 제각이 비교적 유명하다.
육유의 제각: 「건도乾道 을유년乙酉年 7월 4일, 입택笠澤 육무관陸務觀이 큰 비를 무릅쓰고 홀로 정림定林을 유람하다.」
한무구의 제각: 「건도 정해년丁亥年 8월 10일, 숙환叔渙·백옥伯玉·중보中父·자운子雲·무구無咎·백산伯山·방숙方叔이 종산을 유람하러 와서, 공덕수功德水를 떠 들어가 정림定林을 지나며 차를 끓여 마시고 돌아갔다.」
조방의 제각: 「새벽이 오니 가을빛은 가을 소리를 끼고 오고, 만 가지 시름이 마음을 거치니 일이 또 새로워라. 강개하여 길게 「세병마洗兵馬」를 읊으니, 큰 공은 더욱 마음 조심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네.」
이 제각은 남송 말년 일부 조정 대신들의 주전主戰·애국 사상과 신념을 보여 줌과 동시에, 새로 발견된 송대 시사詩詞 작품이기도 하다.
《聽松石》, 在江蘇省無錫市錫惠公園內, 石長 1.99、寬 0.87、高 0.56 米。石面刻有唐代篆書名家李陽冰的手蹟「聽松」二篆字。石旁還刻有李久中、俞慶長、何得之等宋人題字兩則:「松、石相望於十步外, 不知幾何時合而相從? 理若有符。政和甲午, 睢陽張回仲賢得而出之。可以盤礴, 可以偃仰, 遂為茲山登臨勝處, 至者當自得之。唯勿遷, 勿伐、俾勿壞!」
〈청송석聽松石〉은 강소성 무석시無錫市 석혜공원錫惠公園 안에 있으며, 길이 1.99미터, 너비 0.87미터, 높이 0.56미터이다. 돌 표면에는 당대 전서篆書의 대가 이양빙李陽冰이 직접 쓴 「청송聽松」이라는 전서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돌 옆에는 송대 사람 이구중李久中·유경장俞慶長·하득지何得之 등의 제자題字 두 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나무와 돌이 열 걸음 밖에서 마주 보고 있는데, 그 둘이 언제부터 만나 서로 의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치는 마치 부합한 것 같다. 정화政和 갑오년[1114], 휴양睢陽 장회중현張回仲賢이 이를 발견하여 드러내었다. 두 다리 뻗고 앉을 만하고 누워 우러러볼 만하여, 마침내 이 산에 올라 노닐 만한 명승이 되었으니, 이르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그 멋을 얻으리라. 다만 옮기지 말고, 베지 말며, 깨뜨리지 말지어다!」
此外, 還有兩塊被稱之為「宋三絕碑」的也屬此類。一塊是《荔子碑》, 該碑現藏廣西壯族自治區柳州市柳侯祠內, 宋刻。石碑所刻韓愈詩篇, 由蘇東坡手書, 碑文內容所示為柳宗元的生平事蹟。因為三者都係名人, 故後人譽之為《韓詩蘇書柳事碑》, 又稱「三絕」。
이 밖에 「송삼절비宋三絕碑」라 불리는 비석 두 점도 같은 부류이다. 하나는 《여자비荔子碑》로,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유주시柳州市 유후사柳侯祠 안에 소장되어 있으며 송각宋刻이다. 비에 새겨진 글은 한유韓愈의 시편으로 소동파蘇東坡가 직접 썼고, 비문 내용은 유종원柳宗元의 생애 사적을 다루고 있다. 세 사람이 모두 명사이기에 후세 사람들이 이 비를 《한시소서유사비韓詩蘇書柳事碑》라 일컬으며, 또한 「삼절三絶」이라고도 부른다.
另一塊是北宋詞人《秦觀詞碑》, 該碑在湖南省郴州市蘇仙嶺公園內的懸崖石壁上。南宋咸淳二年(1266 年)由柳州太守鄒恭命人翻刻。碑上的詞由秦觀所作, 跋由蘇軾所題, 字為大書家米芾所書, 故世人也稱之為「三絕碑」。
또 다른 한 점은 북송 사인詞人 진관秦觀의 사詞를 새긴 《진관사비秦觀詞碑》이다. 이 비는 호남성 침주시郴州市 소선령공원蘇仙嶺公園 안의 절벽 돌 벽에 있다. 남송 함순咸淳 2년[1266]에 유주태수柳州太守 추공鄒恭이 사람을 시켜 다시 새기게 했다. 비 위의 사는 진관이 지은 것이고, 발문은 소식이 썼으며, 글씨는 대서가大書家 미불米芾이 썼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 비도 「삼절비三絕碑」라 부른다.
8. 송원기타비각宋元其他碑刻
宋代其他碑刻亦較興盛。象秦漢以來帝王的封禪碑, 宋代亦有。如山東泰安岱廟所存《大宋封東嶽天齊仁聖帝碑》, 為宋真宗加封「泰山神」為「天齊仁聖帝」的封號碑, 刻於北宋大中祥符六年(1013 年), 龜趺螭首。碑通高 8.2 米, 寬 2.2 米, 厚 0.60 米。碑頂由六條互相纏繞的螭作裝飾。碑座也很奇巧, 龜趺(碑座)下另設有一個四周雕以雲紋的基座, 通體古樸偉觀。
송대의 기타 비각도 비교적 흥성했다. 진한秦漢 이래 제왕의 봉선비封禪碑가 송대에도 있었다. 가령 산동山東 태안泰安 대묘岱廟에 남아 있는 《대송봉동악천제인성제비大宋封東嶽天齊仁聖帝碑》는 송 진종宋眞宗이 「태산신泰山神」을 「천제인성제天齊仁聖帝」로 봉하는 봉호비封號碑이다. 이 비는 북송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에 새겨졌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다. 비의 통고는 8.2미터, 너비 2.2미터, 두께 0.60미터이다. 비석 머리에는 여섯 마리의 이螭가 서로 엉켜 장식을 이루고 있다. 비좌도 매우 정교하여, 귀부 아래에 다시 사면에 운문雲紋을 새긴 기단을 두었으니, 몸 전체가 고박古樸하고 웅장한 모습이다.
《大宋封祀壇碑》是宋真宗大中祥符二年(1009 年)封禪泰山後所刻, 由丞相王旦撰文, 裴行書並篆額, 其碑陰有宋代中央軍政官員、地方刺史、少數民族首領、周邊國家使臣題名。另外還有王欽若撰《社首壇頌》, 陳堯叟撰《朝覲壇頌》, 皆刻石為碑, 凡隨宋真宗在山頂上舉行典禮的官員都在《封祀壇碑》的碑陰題名; 凡在山下參加祭祀地神的官員均在《社首壇頌碑》的碑陰題名。
《대송봉사단비大宋封祀壇碑》는 송 진종이 대중상부 2년[1009]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례를 마친 뒤에 새긴 비로, 승상 왕단王旦이 짓고, 배행裴行이 글씨를 쓰고 비액의 전서를 함께 썼다. 그 비음에는 송대 중앙의 군·정 관원과 지방 자사刺史, 소수민족 수령, 주변 국가 사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 또한 왕흠약王欽若이 지은 《사수단송社首壇頌》, 진요수陳堯叟가 지은 《조근단송朝覲壇頌》도 모두 돌에 새겨 비로 세웠다. 송 진종을 따라 산 정상에서 전례에 참여한 관원들은 모두 《봉사단비》의 비음에 이름을 올렸고, 산 아래에서 지신地神에 대한 제사에 참여한 관원들은 모두 《사수단송비》의 비음에 이름을 올렸다.
上述封禪碑, 其內容(碑陽文字)均係封禪泰山事。《大宋封祀壇碑》現藏泰安岱廟, 其餘兩碑(《社首壇頌碑》和《封祀壇碑》)現下落不明。
위에 든 봉선비는 그 내용[비양의 문자]이 모두 태산에서의 봉선과 관련된 일이다. 《대송봉사단비》는 현재 태안 대묘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 두 비《사수단송비》와 《봉사단비》는 지금 행방이 분명하지 않다.
與封禪碑相類似的還有《宋代祈風石刻》。該石刻在福建省南安縣豐州鎮旭山村旭日東西兩峰, 現存宋代至清代摩崖題刻 75 處, 石質為花崗岩。其中有 10 處南宋祈風石刻尤為珍貴, 現為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祈風」, 指當時泉州港的中外遠洋商舶一年兩度專靠信風驅動航行。宋代政府為表示對遠航的重視, 每年一次或二次在九日山昭惠廟舉行祈風儀式, 向海神祈求遠航商船順風航行, 以便安全抵達目的地。儀式完畢, 將整個祈風儀式經過刻於摩崖上, 故人們稱之為「祈風石刻」。該石刻記錄了遠洋商舶運行的起訖點和航行時可能遇到的「不測風雲」, 也是研究我國海外交通史的重要物證。有蔡襄、蘇才翁、蘇紳、虞仲房等人的題刻, 其書體分隸書、楷書和行書三種, 別具一格, 又是一份珍貴的古代書法藝術作品。
봉선비와 유사한 것으로 〈송대기풍석각宋代祈風石刻〉도 있다. 이 석각은 복건성福建省 남안현南安縣 풍주진豐州鎭 욱산촌旭山村의 욱일동·서 양봉兩峰에 있는데, 송대부터 청대까지의 마애 제각이 75곳 보존되어 있으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그중 10곳의 남송 기풍석각이 특히 귀중하여 현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기풍祈風」이란 당시 천주항泉州港의 중외 원양 상선들이 한 해에 두 차례 계절풍信風에 의지해 항해했음을 가리킨다. 송대 정부는 원양 항해를 중요시한다는 뜻을 드러내고자 매년 한두 차례 구일산九日山 소혜묘昭惠廟에서 기풍祈風 의식을 거행했다. 해신海神에게 상선들이 순풍을 만나 안전하게 목적지에 닿게 해 달라고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의식이 끝나면 그 전 과정을 마애에 새겼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풍석각」이라 부른다. 이 석각은 원양 상선의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항해 중 만날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풍운風雲」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중국 해외교통사 연구의 중요한 실물 증거이기도 하다. 채양蔡襄·소재옹蘇才翁·소신蘇紳·우중방虞仲房 등의 제각이 있으며, 글씨체는 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 세 가지로 각기 풍격이 달라, 귀중한 고대 서법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
明代《天妃宮碑》也屬此例, 該碑現存南京市獅子山下原天妃宮內, 碑刻於明永樂十四年(1416 年)。碑文記載我國明代航海家鄭和第三次出海時「遇颶風黑雨, 晦冥黯慘, 雷電交作、洪濤巨浪, 摧山倒嶽, 龍魚變怪, 詭形異狀, 紛雜出沒, 驚心駭目」, 後轉危為安事。「天妃」為海神, 系福建興化府莆田縣濱海湄洲人, 是明代所崇拜之航海女神。明成祖以為鄭和平安出海並順利歸國是「天妃」保祐之故, 故刻此碑以報「天妃」保佑之功。
명대 《천비궁비天妃宮碑》 역시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 비는 현재 남경시 사자산獅子山 아래 옛 천비궁天妃宮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명 영락永樂 14년[1416]에 새겨졌다. 비문에는 명대 항해가 정화鄭和가 세 번째 출항했을 때 「태풍颶風과 검은 비를 만나 바다가 어둡고 음산해지며, 우레와 번개가 함께 일고 큰 파도가 산을 무너뜨릴 듯 일어났으며, 용과 물고기가 괴이하게 변하고 기괴한 형상들이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져 보고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끝내 위기에서 벗어나 안전을 되찾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천비天妃」는 해신海神으로, 복건福建 흥화부興化府 보전현莆田縣 해변 미주湄州 사람이며, 명대에 숭배된 항해의 여신이다. 명 성조明成祖[영락제永樂帝]는 정화가 안전하게 항해해 무사히 귀국한 것은 「천비」가 보우한 덕분이라 여겨, 이 비를 새겨 「천비」의 보우의 공을 기렸다.
元代還有不少純漢文碑刻, 包括墓碑、墓誌等, 這方面較著名的碑有《太師泰安武穆王神道之碑銘》, 該碑高 6.35 米, 寬 1.77 米, 厚 0.65 米, 碑刻於元延祐四年(1317 年), 原在泰安城武穆王祠, 現藏泰安岱廟。碑文記載蒙古族人武穆王博羅歡在元朝的創立中武功卓著, 尤其在治理泰安州一帶, 表現了高超的軍事統治才能。此碑龜趺螭首, 雕刻精細剔透, 為元碑之佼佼者。
원대에는 또한 순수 한문漢文으로 새긴 비각도 적지 않다. 묘비墓碑·묘지墓誌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 방면에서 비교적 유명한 비로 《태사태안무목왕신도지비명太師泰安武穆王神道之碑銘》이 있다. 이 비는 높이 6.35미터, 너비 1.77미터, 두께 0.65미터로, 원 연우延祐 4년[1317]에 새겨졌으며, 원래 태안성泰安城 무목왕사武穆王祠에 있었으나 지금은 태안 대묘岱廟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에는 몽골족 사람 무목왕 박라환博羅歡이 원 왕조 창업 과정에서 무공이 탁월했음을, 특히 태안주泰安州 일대를 다스리며 뛰어난 군사 통치 역량을 보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귀부·이수에 조각이 정교하고 투조透彫처럼 정밀하여, 원대 비각 가운데 빼어난 작품이다.
泰山靈巖寺有一塊元代成吉思汗的聖旨碑是元「兔兒年八月二十八日」下給靈巖寺的, 內容為元朝統治者成吉思汗對該寺納稅的規定, 即「每除稅糧以外, 不揀大小差發……」, 是研究元代寺院經濟的極好材料。
태산 영암사靈巖寺에는 원대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성지비聖旨碑가 한 점 있다. 이는 원의 「토끼해兔兒年 8월 28일」에 영암사에 내려진 것으로, 내용은 원의 통치자 칭기즈 칸이 이 사찰의 납세에 관해 정한 규정이다. 곧 「부과되는 세량稅糧 외에는, 크고 작은 차역差役을 가리지 않고 부과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원대 사원 경제를 연구하는 더없이 좋은 자료이다.
有關反映農民戰爭的碑刻也有一些。如泰山至今存有宋末《姜博士起義刻石》, 元末《紅巾軍起義》等刻石。陝西省博物館也有兩塊反映這方面內容的碑刻。一是《重修牛山土主忠惠王廟碑》。碑載元朝末年, 農民起義在全國爆發, 興安路(今陝西安康)一支紅巾軍於至正十一年(1351 年)攻克安康城, 殺污吏, 毀衙門, 燒寺廟。牛山土主忠惠王廟也被農民軍付之一炬。此碑是元至正十四年(1354 年)重修該廟時所立, 碑文還記述了封建政權鎮壓了這支農民軍的史實, 碑陰刻有封建官吏題名, 是研究元代農民戰爭的珍貴史料。二是《劉尚神道碑》, 該碑為元元貞二年(1296 年)歷任金、元兩朝的官吏, 陝西耀縣人劉尚的墓碑。碑文記述了劉尚鎮壓「紅巾軍」起義的史實, 並記載了關中另一支起義軍首領趙斌聚眾起義, 並自立王號的經過, 以一個側面為我們提供了研究元代農民起義的珍貴資料。
농민 전쟁을 반영한 비각도 일부 있다. 가령 태산에는 지금도 송말宋末의 《강박사기의각석姜博士起義刻石》, 원말元末의 《홍건군기의紅巾軍起義》 등이 남아 있다. 섬서성陝西省 박물관에도 이 방면의 내용을 반영한 비각이 두 점 있다. 하나는 《중수우산토주충혜왕묘비重修牛山土主忠惠王廟碑》이다. 비문에는 원 말년 농민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흥안로興安路[지금의 섬서陝西 안강安康]의 한 홍건군紅巾軍이 지정至正 11년[1351]에 안강성을 함락하여 탐관오리를 죽이고 관아를 부수고 사찰을 불태웠으며, 우산토주충혜왕묘도 이 농민군의 손에 불타 버린 일이 실려 있다. 이 비는 원 지정至正 14년[1354] 이 사당을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문에는 봉건 정권이 이 농민군을 진압한 사실도 함께 기술되어 있고, 비음에는 봉건 관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원대 농민 전쟁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다른 하나는 《유상신도비劉尙神道碑》인데, 이 비는 원 원정元貞 2년[1296]에 세워진 것으로, 금金·원元 두 왕조에서 관직을 지낸 섬서 요현耀縣 사람 유상劉尙의 묘비이다. 비문에는 유상이 「홍건군紅巾軍」 봉기를 진압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고, 관중關中의 또 다른 봉기군 수령 조빈趙斌이 무리를 모아 군사를 일으키고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기에 이른 경위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원대 농민 봉기 연구에 한 측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此外, 宋代交通碑刻也有新的發展。中國古代有一種稱之為《儀制令》的交通規則。約始於唐代, 在唐和北宋, 這種儀制令通常做成木牌形式, 懸掛在城內交通要道可專為皇家進出的道路口上, 作為交通規則, 令眾人遵守。至南宋由懸掛木牌, 發展到刻立石碑。這種《儀制令》石碑, 在南宋應該說是比較多的, 但能保存至今的卻為數不多。近年在陝西省略陽靈崖寺大殿左廈房內發現一塊《儀制令》石碑。該碑高 0.60 米, 寬 0.40 米, 碑陽正中上段刻楷書「儀制令」三個大字, 下段為儀制令內容:「賤避貴, 少避長, 輕避重, 去避來」十二字。碑陽左側為「淳熙辛丑(1181 年), 邑令王立石」字樣。
이 밖에 송대 교통交通 비각도 새로운 발전을 보였다. 중국 고대에는 《의제령儀制令》이라 부르는 교통 규칙이 있었다. 대략 당대에 시작되었으며, 당과 북송 시기에는 이 의제령을 대개 나무패木牌 형태로 만들어 황실이 드나드는 성내 교통 요로의 길목에 걸어 두고 모두에게 준수하게 했다. 남송에 이르러서는 나무패를 거는 방식에서 돌에 새겨 세우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의제령》 석비는 남송에 비교적 많았다고 할 수 있으나,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근래 섬서성 약양현略陽縣 영애사靈崖寺 대전 좌측 곁채에서 《의제령》 석비 한 점이 발견되었다. 비의 높이는 0.60미터, 너비 0.40미터이며, 비양碑陽 정중앙 상단에 해서楷書로 「의제령儀制令」 세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단에는 의제령의 내용으로 「천한 자는 귀한 자를 피하고, 어린 자는 어른을 피하며, 가벼운 짐은 무거운 짐을 피하고, 떠나는 자는 오는 자를 피한다[賤避貴, 少避長, 輕避重, 去避來]」라는 12자가 새겨져 있다. 비양 왼쪽에는 「순희淳熙 신축년辛丑年[1181], 읍령邑令 왕王이 돌을 세우다」라는 글이 있다.
碑陽所刻「避」字是「讓」的意思, 儀制令反映了封建社會的等級制度和禮儀法規。
비양에 새겨진 「피避」 자는 「양讓」, 곧 「양보한다」는 뜻이다. 의제령은 봉건사회의 등급 제도와 예의禮儀 법규를 반영하고 있다.
河南湯陰縣岳飛廟藏有《前後出師表刻石》共四十塊, 刻石均係正方形, 邊長約 0.66 米。文章作者為蜀漢丞相諸葛亮。碑石書體為大草, 書者一般認為是岳飛。因為刻石末有岳飛的跋語:「紹興戊午(1138 年)秋八月, 過南陽, 謁武侯祠, 遇雨, 遂宿於祠內, 更深秉燭, 細觀壁間昔賢所讚先生文祠詩賦及祠前石刻二表, 不覺淚下如雨。是夜, 竟不成眠, 坐以待旦。道上獻茶畢, 出紙索字, 揮涕走筆, 不計工拙, 稍舒胸中抑鬱耳。岳飛並識。」也有人認為其書者為明成化、弘治年間蘇州人白麟。
하남 탕음현湯陰縣 악비묘岳飛廟에는 《전후출사표각석前後出師表刻石》이 모두 40점 소장되어 있다. 각석은 모두 정사각형이며, 한 변의 길이는 약 0.66미터이다. 글의 작자는 촉한蜀漢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며, 비석의 글씨체는 대초大草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일반적으로 악비岳飛로 본다. 각석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악비의 발문이 있기 때문이다.
「소흥 무오년[1138] 가을 8월, 남양南陽을 지나다가 무후사武侯祠를 참배하던 중 비를 만나, 마침내 사당 안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어 촛불을 잡고 사당 벽에 옛 현인들이 선생(제갈량)을 기리며 지은 시부詩賦와 사당 앞 두 〈출사표〉의 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이 밤 끝내 잠들지 못해 앉아서 새벽을 기다렸다. 길 위에서 차를 올리고 나서 종이를 내어 글씨를 청하기에, 눈물을 훔치며 붓을 휘둘러 솜씨의 졸렬함을 따지지 않고 가슴속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보고자 했을 따름이다. 악비岳飛 함께 기록함.」
또한 그 글씨를 쓴 사람을 명明 성화成化·홍치弘治 연간[1465~1505] 소주蘇州 사람 백린白麟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前後出師表》刻石, 由於其大草灑脫, 遒美, 再加上它是諸葛亮所作之名篇, 向為世人所重。
《전후출사표》 각석은 대초의 필치가 시원하고 굳세며 아름다운 데다, 본래 제갈량이 지은 명편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귀중하게 여겨져 왔다.
《宋韓蘄王神道碑》位於蘇州吳縣靈巖山之西南麓。碑通高 8.26 米(其中碑座——龜趺高 1.70, 碑身高 5.46, 碑額高 1.10 米)。寬 2.12, 厚 0.30 米。碑首「中興佐命定國元勳之碑」十個大字(楷體)為宋孝宗御書, 字徑 0.30 米, 中刻「選德殿書」(選德殿, 宮內殿名, 這裡借指宋孝宗——筆者按)四小字, 並刻印一方。碑文由南宋參知政事、右丞相趙雄奉敕撰, 共 13900 餘字, 分 88 行, 行 150 字不等。碑石之高在中國碑刻史上實屬罕見, 碑文之長可謂世界之最。書寫人為樞密使、右丞相周必大。神道碑邊飾雲紋, 碑額飾夔龍紋。
《송한기왕신도비宋韓蘄王神道碑》는 소주蘇州 오현吳縣 영암산靈巖山의 서남쪽 기슭에 있다. 비의 통고는 8.26미터이다[그중 비좌인 귀부의 높이가 1.70미터, 비신이 5.46미터, 비액이 1.10미터이다]. 너비는 2.12미터, 두께는 0.30미터이다. 비수碑首의 「중흥좌명정국원훈지비中興佐命定國元勳之碑」 열 글자[해서체]는 송 효종이 직접 쓴 글씨로, 글자의 크기는 0.30미터이다. 그 가운데에 「선덕전서選德殿書」[선덕전은 궁중 전각의 이름이며, 여기서는 송 효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저자] 네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고, 인장 하나도 함께 새겨져 있다. 비문은 남송 참지정사參知政事·우승상右丞相 조웅趙雄이 칙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모두 13,900여 자, 88행으로, 한 행에 150자 정도로 일정하지 않다. 비석의 크기로는 중국 비각사碑刻史에서 보기 드물고, 비문의 길이로는 세계 으뜸이라 할 만하다. 글씨를 쓴 사람은 추밀사樞密使·우승상 주필대周必大이다. 신도비의 가장자리는 운문雲紋으로, 비액은 기룡문夔龍紋으로 장식되어 있다.
碑主韓世忠(1089~1151 年), 字良臣, 號清涼居士, 陝西延安人, 我國南宋著名抗金將領, 民族英雄, 後被南宋朝廷追封為蘄王。
비석의 주인공 한세충韓世忠[1089~1151]은 자字가 양신良臣, 호號가 청량거사淸涼居士이며, 섬서 연안延安 사람이다. 남송南宋의 이름난 항금抗金 장수이자 민족 영웅으로, 후에 남송 조정으로부터 기왕蘄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神道碑刻於南宋淳熙四年(1177 年), 迄立至今近千年「碑蝕亭頹, 煙荒草蔓, 蓬顆蔽冢。」清道光十三年(1833 年)宗後學葑《重修韓蘄王墓並建饗堂記》。1939 年 5 月神道碑為颶風所仆, 碑石縱橫斷裂折為十餘段。邊幅斜銳, 參差不等(民國二十五年, 單鎮《重修韓忠武王墓碑記》)。事隔七年(1946 年 5 月), 靈巖山妙真和尚邀集地方人士及韓氏後裔四處網羅資金召工將神道碑斷塊用水泥等澆合成兩段兩扶而置之墓道(神道碑原來立於龜趺上, 重修時分開)迄今。
신도비는 남송 순희淳熙 4년[1177]에 새겨졌으며, 세워진 지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 가까이 되었다. 「비는 침식되고 정자는 무너지고, 안개와 풀이 가득해 봉분이 가려진다」라고 했고, 청 도광道光 13년[1833] 종후학宗後學 풍葑이 《중수한기왕묘병건향당기重修韓蘄王墓並建饗堂記》를 지었다. 1939년 5월 신도비가 태풍에 쓰러져 비석이 가로세로로 부러져 10여 조각으로 깨어졌으며, 모서리와 가장자리는 어긋나게 잘려 들쭉날쭉한 모습이 되었다[민국 25년[1936] 단진單鎭의 《중수한충무왕묘비기重修韓忠武王墓碑記》]. 그로부터 7년 뒤[1946년 5월], 영암산 묘진妙眞 화상和尙이 지방 인사 및 한씨韓氏 후예들을 모아 사방으로 자금을 마련하고 장인을 불러, 부서진 신도비 조각들을 시멘트 등으로 이어 붙여 두 단으로 만들어 묘도墓道 양쪽에 세워 두기에 이르렀다[신도비는 본래 귀부 위에 세워져 있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따로 분리되었다]. 그 모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碑文記載了韓世忠西陲布衣, 仗劍從戎, 金戈鐵馬轉戰大江南北, 「平全閩, 夷江西, 翦湖湘, 殲苗劉, 摧兀朮, 鏖大儀, 拓東海, 扦楊楚, 震淮揚, 所當無非掠寇劇盜, 而功益俊偉不可及」之史實。宋代定論, 稱其為「中興武功第一」,「功名與日月爭輝」, 位在岳飛之上。
비문에는 한세충이 서북 변경의 평민布衣으로서 칼을 잡고 군에 들어가, 금과金戈와 철마鐵馬로 대강大江[양자강] 남북을 전전하며 싸운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곧 「복건福建을 완전히 평정하고, 강서江西를 평정하고, 호상湖湘을 베고 묘유苗劉의 난을 섬멸했으며, 올출兀朮[금金의 명장]을 꺾고 대의大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동해를 개척하고 양초楊楚를 막아 회양淮揚을 진동시켰다. 상대한 자들이 약탈을 일삼는 도적과 큰 도둑들이 아닌 자가 없었으되, 공功이 더욱 빼어나 따라잡을 자가 없었다」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송대의 공론公論은 그를 「중흥의 무공武功으로 첫째」, 「공명功名이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난다」고 일컬으며, 그 지위를 악비岳飛 위에 두었다.
另外, 神道碑洋洋一萬三千九百餘字, 披露了一些無人問津或鮮為人知的史料, 如北宋滅亡, 韓世忠首次提出建都江浙, 後被採納遂成史實的史料。還有, 神道碑首次披露了韓世忠親自活捉南宋農民起義領袖方臘等八大王等, 給宋史研究提供了新的資料。
그 밖에도 이 신도비는 1만 3,900여 자의 방대한 분량으로, 사람들이 거의 다루지 않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사료들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북송이 멸망한 뒤 한세충이 처음으로 강절江浙 지역에 도읍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는 자료가 그것이다. 또한 이 신도비는 한세충이 직접 남송 농민 봉기의 지도자 방랍方臘 등 「팔대왕八大王」을 사로잡은 일을 처음으로 공개해, 송대 역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다.
《瀧岡阡表碑》為北宋歐陽修撰文和書寫。這是一塊墓碑, 是歐陽修為其已故父(歐陽觀)母所撰所書。歐父逝於宋真宗大中祥符三年(1010 年), 歐母逝於仁宗皇祐四年(1052 年)。阡表洋洋千餘言, 寫父母事蹟、追憶父親遺訓、緬懷母親教誨, 述說父母品德與情操之高尚, 同時還表達了自己為官堅守情操、不隨波逐流是受父母遺訓、教誨所致。
《농강천표비瀧岡阡表碑》는 북송 구양수歐陽修가 짓고 쓴 글이다. 이는 묘비로, 구양수가 이미 돌아가신 부친 구양관歐陽觀과 모친을 위해 짓고 직접 쓴 것이다. 부친은 송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에 세상을 떠났고, 모친은 인종仁宗 황우皇祐 4년[1052]에 세상을 떠났다. 천표는 천여 자에 달하는 글로, 부모의 사적과 부친의 유훈遺訓을 회상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추모하며, 부모의 품덕品德과 정조情操가 고상했음을 서술하는 한편, 자신이 관직에 있으면서 절조를 지키고 세태에 휩쓸리지 않은 것이 부모의 유훈과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瀧岡阡表碑》高 2.12, 寬 0.96, 厚 0.24 米, 碑是用青州(今山東益都)石做的。碑陰還刻有歐陽修於熙寧三年(1069 年)編成的《歐陽氏譜圖序》。該碑現藏江西省永豐縣沙溪西陽宮。1957 年, 江西省政府將其公佈為第一批省級文物保護單位。
《농강천표비》는 높이 2.12미터, 너비 0.96미터, 두께 0.24미터이며, 비석은 청주靑州[지금의 산동山東 익도益都]의 돌로 만들었다. 비음에는 또한 구양수가 희녕熙寧 3년[1069]에 편찬한 《구양씨보도서歐陽氏譜圖序》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현재 강서성江西省 영풍현永豐縣 사계沙溪 서양궁西陽宮에 소장되어 있다. 1957년 강서성 인민정부는 이 비를 제1차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공포했다.
《襄樊銘》摩崖石刻在湖北襄樊市中峴山北麓。銘文共九十餘字, 記載了 1251 年南宋打敗蒙古人入侵者, 光復襄樊的歷史事件。字體為行楷書, 字徑約 60 公分, 雄渾遒勁, 威嚴壯觀。無撰者姓名。據分析, 撰書者可能是南宋將領李曾伯。因為在其詩文集《可齋類》有兩首詞《水龍吟》和《滿江紅》的自註中提及過此事, 有「待老臣為作襄樊銘, 勒諸石」句。銘文為「大宋淳祐十一年四月二十日, 京湖置制使李曾伯奉天子命遣都統高達武鋒王登提兵复襄樊兩城, 越三年正月元日銘」。其銘曰: 壯哉, 脊背骨, 翳蟠盤, 九陵谷, 乾能丈, 屏吾國。萬子年, 屏吾國。」
《양번명襄樊銘》 마애 석각은 호북湖北 양번시襄樊市 가운데 현산峴山 북쪽 기슭에 있다. 명문은 모두 90여 자로, 1251년 남송이 양번을 침입한 몽골군을 격파하고 양번을 회복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글씨체는 행해行楷이고, 글자 지름은 약 60센티미터이며, 웅혼하고 굳세며 위엄 있고 장관이다. 짓고 쓴 이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분석에 따르면 짓고 쓴 사람은 남송의 장수 이증백李曾伯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시문집 《가재류고可齋類稿》에 실린 사詞 《수룡음水龍吟》과 《만강홍滿江紅》의 자주自註에 이 일을 언급한 부분이 있으며, 「노신老臣이 〈양번명襄樊銘〉을 지어 절벽 돌에 새기기를 기다린다」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대송大宋 순우淳祐 11년 4월 20일, 경호京湖 치제사置制使 이증백李曾伯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도통都統 고달高達·무봉武鋒 왕등王登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양번兩城을 수복하게 한 지 3년이 지난 정월 원일元日에 새긴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장하다, 등뼈와 같은 산세여! 두텁게 서리고 얽혀 아홉 골짜기를 이루고, 굳세고 능히 막아 우리나라의 병풍이 되었네. 만년의 자손에 이르도록, 길이 우리나라를 지키리라.」
《畢昇墓碑》最近在湖北英山縣草盤地五桂墩村發現。碑的質地為褐灰色麻石, 圓首。碑高 1.10, 寬 0.70 米, 正中陽刻:「故先考畢昇神主 故先妣李氏妙音墓」。
《필승묘비畢昇墓碑》는 최근 호북湖北 영산현英山縣 초반지草盤地 오계돈촌五桂墩村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재질은 갈회색 마석麻石이며, 비수碑首는 둥근 형태이다. 비의 높이는 1.10미터, 너비 0.70미터이고, 정중앙에 양각으로 「돌아가신 선친 필승의 신주故先考畢昇神主, 돌아가신 모친 이씨 묘음의 묘故先妣李氏妙音墓」라 새겨져 있다.
上方寶珠頂華蓋, 下設梯形碑座, 左右分別為日月圖形, 邊沿為卷草花紋, 兩邊為小字陰刻「孝子畢嘉、畢文、畢成、畢榮; 孫男畢文顯、畢文斌、畢文忠、皇口四年二月初七日」據考證, 皇口四年為皇祐四年(1052 年), 時在畢昇發明活字印刷術的慶曆年間(1041~1048 年)之後數年。
비의 위쪽에는 보주寶珠를 얹은 화개華蓋 모양 장식이 있고, 아래에는 사다리꼴 비좌가 놓여 있다. 좌우에는 각각 해와 달 도안이, 가장자리에는 만초卷草화문이 새겨져 있다. 양옆에는 작은 글씨로 음각하여 「효자孝子 필가畢嘉·필문畢文·필성畢成·필영畢榮; 손자 필문현畢文顯·필문빈畢文斌·필문충畢文忠, 황구皇口 4년 2월 초7일」이라 적혀 있다. 고증에 따르면 「황구皇口 4년」은 곧 황우皇祐 4년[1052]으로, 필승이 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경력慶曆 연간[1041~1048] 이후 몇 년 뒤에 해당한다.
畢昇是活字印刷術的發明者, 為人類文明作出了偉大貢獻。
필승畢昇은 활자 인쇄술의 발명가로서, 인류 문명에 위대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宋代的《帝王紹運圖碑》也非常著名, 1961 年該圖碑與本文所提及的平江圖碑、天文圖碑、地理圖碑同被國務院列入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
송대의 《제왕소운도비帝王紹運圖碑》 또한 매우 유명하다. 1961년 이 도비圖碑는 본문에서 언급한 평강도비平江圖碑·천문도비天文圖碑·지리도비地理圖碑와 함께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帝王紹運圖碑是我國古代唯一的石刻帝王世系圖, 是研究中國古代政治史的重要史料。圖碑長 1.77 米、寬 1 米、厚 0.25 米, 青石。碑中下方原先裂為二段, 後修復, 其餘完好。
《제왕소운도비》는 중국 고대 유일의 석각 제왕 세계도世系圖로, 중국 고대 정치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이다. 도비는 길이 1.77미터, 너비 1미터, 두께 0.25미터이며 청석으로 되어 있다. 비의 중하부中下部가 본래 두 동강 나 있었으나 후에 복원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완호完好하다.
碑石最上端篆刻「帝王紹運圖」五字,「紹」字是繼承之意。
비석 가장 위쪽 끝부분에는 전서로 「제왕소운도帝王紹運圖」 다섯 자가 새겨져 있는데, 「소紹」 자는 「계승한다」는 뜻이다.
世系圖表刻有我國自黃帝至宋理宗這段歷史中的帝王世系, 共計 195 君。該圖表的特點是世系脈絡清楚, 經緯分明。圖表以朝代更替為主要框架, 每個朝代的國君依在位先後秩序從大到小排列。圖表漢族政權朝代列于圖表正中央。如夏、商、周、秦、漢、三國、晉、隋、唐、梁、唐、晉、漢、周、大宋等。對于從主要朝代中分離出來的則按時間順序列于該朝代的兩側, 如周代(東周)中的「春秋十二國」和「秦六國」如此安排, 如「東晉夷狄游處中國」, 即歷史上的五朝十六國。圖表作者有自己的政治評判標準, 如雖是漢族朝代的「五代十國」, 但由于「非正統」之故, 作者特意在圖表左側註明「五代(十國)潛偽」等字樣, 註明潛偽的國君和國家有十三國、十三君, 杭州的吳越國國王錢鏐排在首位。
세계도표世系圖表에는 중국의 황제黃帝부터 송 이종宋理宗까지의 역사 속 제왕 세계가 새겨져 있으며, 모두 195명의 군주가 등장한다. 이 도표의 특징은 세계의 맥락이 분명하고, 종횡의 줄기가 또렷하다는 점이다. 도표는 왕조 교체를 주요 틀로 삼고, 각 왕조의 군주는 재위 순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배열되어 있다. 도표는 한족漢族 정권의 왕조들을 도표 정중앙에 둔다. 가령 하夏·상商·주周·진秦·한漢·삼국三國·진晉·수隋·당唐·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대송大宋 등이 그러하다. 주요 왕조에서 분리되어 나온 왕조들은 시간 순서에 따라 해당 왕조의 양쪽에 배치되어 있다. 예컨대 주대周代[동주東周] 가운데 「춘추십이국春秋十二國」과 「진육국秦六國」이 그렇게 배치되어 있고, 「동진東晉 시기 이적夷狄이 중국에 뒤섞여 있던」 시기, 곧 역사상 「오조십육국五朝十六國」(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도 마찬가지이다. 도표 작자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판단 기준이 있어, 비록 한족 왕조라 하더라도 「오대십국五代十國」은 「정통이 아니다非正統」라는 이유로, 도표 왼쪽에 일부러 「오대[십국]잠위五代(十國)潛僞」 등의 글자를 적어 두었다. 「잠위」로 표시된 군주와 국가는 모두 13국, 13군에 달하며, 항주杭州의 오월국吳越國 국왕 전류錢鏐가 그 첫머리에 놓여 있다.
還有一個值得注意的問題是「春秋十二國」中沒有吳、越二國。這反映了歷史上的春秋五霸, 是一個有爭議的問題, 並為研究春秋五霸中究竟有否吳、越二國提供了實物依據。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춘추십이국春秋十二國」 안에 오吳·월越 두 나라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상 「춘추오패春秋五霸」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임을 반영하며, 「춘추오패」 가운데 오·월 두 나라가 포함되는지 여부를 연구하는 데 실물 자료를 제공해 준다.
圖說共 36 行, 行 16 字, 字體為正楷。圖說以「自古及今, 治不能十一, 而亂常八九, 為君者亦可以知所戒矣」為論點, 規勸大宋皇帝應吸取「治與亂」、「離與合」的經驗教訓, 進而維護和鞏固封建統治。碑石現藏蘇州碑刻博物館。
도설圖說은 모두 36행, 매 행 16자이며 글씨체는 정해서正楷이다. 도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잘 다스려진 시기는 열에 하나가 채 안 되고, 어지러운 시기는 늘 열에 여덟·아홉이니, 군주된 자는 또한 마땅히 경계할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라는 논점을 내세워, 송대 황제가 「치治와 난亂」, 「이離와 합合」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봉건 통치를 유지·공고히 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비석은 현재 소주비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9. 송대 금석학의 흥기宋代金石學的興起
碑刻上面的文辭, 可以補史、證史、研史, 這在很久以前, 我們的祖先便已運用它作為研究有關學科的珍貴史料了。不過研究「金石」或研究「碑刻」, 直到宋代才成為專門之學。
비각碑刻에 새겨진 문사文辭는 역사를 보충하고 검증하며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관련 학문 분야의 귀중한 사료로 삼아 온 일이다. 다만 「금석金石」이나 「비각碑刻」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하나의 독립된 전문 학문이 된 것은 송대宋代에 이르러서이다.
「金」學, 即研究三代(夏、商、周)銅器上的銘文之學, 不屬本文討論範圍, 因此, 我們在此只談宋代的「石學」, 即研究碑刻之學的概況, 以便了解宋代對中國碑刻的研究, 所作出的巨大貢獻。
「금학金學」은 곧 하夏·상商·주周 삼대三代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본 논문에서 다루는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송대의 「석학石學」, 곧 비각을 연구하는 학문의 개황만을 살펴, 송대가 중국 비각 연구에 미친 거대한 공헌을 짚어 보기로 한다.
宋代「石」學的創始人是歐陽修。蔡縧在《鐵圍山叢談》說:「文忠公(即歐陽修)喜集往古石刻, 遂又著書, 名《集古錄》。」歐陽修的《集古錄》共十卷, 在我國學術史上這是正式出現「石學」專著的開山之作。書成于仁宗嘉祐八年(1063 年), 共收錄作者平生所藏周秦至五代銅器銘文和碑版拓本以及自作的跋語共四百餘篇, 而以碑版為主。原書隨得隨錄, 未按年代排列。後世刻本之改以年代為序。其子歐陽棐後作《集古錄目》二十卷, 現僅存輯本。
송대 「석학石學」의 창시자는 구양수歐陽修이다. 채조蔡縧는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서 「문충공文忠公[곧 구양수]은 옛 석각을 모으기를 좋아하여 마침내 또한 책을 짓고 《집고록集古錄》이라 이름 붙였다」라고 했다. 구양수의 《집고록》은 모두 10권으로, 중국 학술사에서 「석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전문 저작이다. 책은 인종仁宗 가우嘉祐 8년[1063]에 완성되었으며, 작자가 평생 수집한 주秦부터 오대五代까지의 청동기 명문과 비판碑版 탁본, 그리고 본인이 직접 쓴 발문 등을 모두 400여 편 수록하고 있고, 그중 비판이 주를 이룬다. 원서는 입수한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연대순으로 배열되지 않았다. 후세의 각본刻本에서는 연대순으로 다시 배열했다. 그의 아들 구양비歐陽棐가 뒤에 《집고록목集古錄目》 20권을 지었는데, 지금은 집본輯本만이 전한다.
從歐陽修開始, 研究碑刻成為專門之學。後來趙明誠、李清照夫婦仿其體例寫成《金石錄》二十卷。書成于徽宗宣和末年, 著錄作者自藏金石拓本。前十卷是銅器銘文和先秦至北宋一千九百多種「石刻」的目錄, 其中碑刻佔主要篇幅。碑刻目錄多注有立碑年月和撰文、書寫者姓名, 這種體例開拓後世碑刻目錄專書之先河。後十卷是集作者對部分古器物、古碑刻所作的題跋 502 條, 是作者的研究成果。該書是中國現在最早的碑刻目錄和碑刻研究專著之一。
구양수에서 비롯되어 비각 연구는 하나의 전문 학문이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조명성趙明誠·이청조李淸照 부부가 그 체례體例를 본떠 《금석록金石錄》 20권을 지었다. 책은 휘종徽宗 선화宣和 말년에 완성되었으며, 작자 부부가 직접 소장한 금석金石 탁본을 저록하고 있다. 앞 10권은 청동기 명문과 선진先秦부터 북송에 이르는 1,900여 종의 「석각石刻」 목록이며, 그중 비각碑刻이 주된 분량을 차지한다. 비각 목록에는 비를 세운 연월年月과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자주 주기註記되어 있어, 이러한 체례는 뒷날 비각 목록 전문서의 단초가 되었다. 뒷부분 10권은 작자가 일부 고기물古器物과 고비각古碑刻에 붙인 제발題跋 502조를 모은 것으로, 작자의 연구 성과이다. 이 책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이른 비각 목록서이자 비각 연구 전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宋代還有一位出色的金石學家, 名叫洪適。洪適(1117~1184 年), 精於兩漢、魏晉和隋唐碑刻。所著《隸釋》二十七卷是現存最早的集釋和考釋漢魏刻石刻文字的專書, 共著錄漢魏碑 183 種, 在體例上創新, 除在碑前目錄載碑刻尺寸、具錄碑刻原文, 並用楷書將秦漢隸體碑文釋出, 故書名為《隸釋》。另外, 洪適還收錄《水經注》中漢魏碑目和敘錄為《隸古錄》, 故同歐陽修《集古錄》、趙明誠的《金石錄》、無名氏的《天下碑錄》中的漢魏部分一道, 派遣別著《隸續》二十一卷和《隸圖》、《隸續》等專科書。洪適在學術史上的貢獻還在於利用碑刻文字考訂史傳訛誤之誤。
송대에는 또 한 사람의 뛰어난 금석학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홍괄洪適이다. 홍괄[1117~1184]은 양한兩漢·위진魏晉·수당隋唐의 비각에 정통했다. 그가 지은 《예석隸釋》 27권은 현존하는 가장 이른 한위漢魏 각석 문자의 집석集釋·고석考釋 전문서이다. 한위 비 183종을 수록하고 있으며 체례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비 앞 목록에 비각의 크기와 비각 원문原文을 함께 싣고, 진한秦漢 예체隸體의 비문을 해서楷書로 풀어 적어 두었기 때문에 책 이름을 《예석》이라 했다. 그 밖에 홍괄은 《수경주水經注》에 실린 한위 비목碑目과 서록敍錄을 모아 《예고록隸古錄》을 엮었으며, 이는 구양수의 《집고록》, 조명성의 《금석록》, 작자 미상의 《천하비록天下碑錄》 가운데 한위 부분과 짝을 이룬다. 또한 그는 《예속隸續》 21권과 《예도隸圖》·《예속》 등 전문서를 따로 지었다. 학술사에서 홍괄의 또 다른 공헌은 비각 문자를 이용해 사전史傳의 그릇된 기록을 바로잡은 데에도 있다.
南宋初年的大史學家鄭樵也是一位蜚聲有名的金石學家。他的貢獻在於用史學家的眼光指出了碑刻在文化史、學術史上的地位, 如他在所著《通志金石略》所說:「三代而上, 惟勒鼎彝, 秦人始大其制, 而用石鼓; 始皇始詳其義, 而用豐碑, 自秦迄今, 惟用石刻」。這是說銅器銘辭的歷史較短(局限於商、周), 而石刻的歷史很長(秦~南宋), 從而說明了石刻在古代中國碑辭中佔據主要地位。
남송 초기의 대사학가 정초鄭樵 또한 이름난 금석학자였다. 그의 공헌은 사학자의 안목으로 비각이 문화사文化史·학술사學術史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분명히 한 데에 있다. 그가 지은 《통지通志》 〈금석략金石略〉에서 「삼대三代 이전에는 오직 정이鼎彝에 글을 새겼고, 진秦에 이르러 그 제도를 크게 키워 석고石鼓를 사용했으며, 시황始皇 때 그 의미를 자세히 정리하여 풍비豐碑를 쓰기 시작했다. 진秦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석각石刻만을 사용해 왔다」라고 했다. 이는 청동기 명문이 다루는 시기가 상·주에 한정되어 비교적 짧은 데 비해, 석각의 역사는 진秦에서 남송에 이르기까지 매우 길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 고대 비사碑辭에서 석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鄭樵還有《石鼓文考》一書, 在中國碑刻史上, 這是金石學家專為一書來考釋某一(組)碑刻的第一本專著。《石鼓文考》從各種角度證明石鼓是秦刻石, 其中比較關鍵的證據是石鼓書體為秦篆, 從而推翻了隋代至南宋時石鼓為周宣王時物的定論(隋代時, 石鼓在天興具三畤原出土)。
정초에게는 또 《석고문고石鼓文考》라는 책이 있다. 이는 중국 비각사碑刻史에서 금석학자가 어느 한 [조組]의 비각을 단독으로 고증한 최초의 전문 저작이다. 《석고문고》는 여러 각도에서 석고石鼓가 진대秦代의 각석임을 입증한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석고의 서체가 진전秦篆이라는 점이며, 이를 통해 수대隋代부터 남송에 이르기까지 「석고石鼓는 주 선왕宣王 시기의 물건」이라고 보던 정설을 뒤집었다[수대 때, 석고는 천흥현天興縣 삼치원三畤原에서 출토되었다].
宋代學者還利用碑刻補正史文, 並且著錄碑刻全文, 另加考證、研究、跋文。清代學者王昶的《金石萃編》便完全沿用了這一體例。
송대 학자들은 또한 비각 자료를 이용해 정사正史의 본문을 보정補正하고, 비각의 전문全文을 저록하면서 거기에 고증·연구·발문을 함께 붙였다. 청대淸代 학자 왕창王昶의 《금석췌편金石萃編》이 바로 이러한 체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此外, 宋代學者還把碑刻立作為研究古文字學的重要資料, 如王應麟的《困學紀聞》將碑刻文字附與《爾雅》、《說文》同列為「小學」(即文字學), 雖然這種分類雖不科學, 但把碑刻作為研究文字學的一個方面還是可取的。
이 밖에 송대 학자들은 비각을 고문자학古文字學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삼기도 했다. 가령 왕응린王應麟은 《곤학기문困學紀聞》에서 비각 문자를 《이아爾雅》·《설문說文》과 함께 「소학小學」[곧 문자학文字學]의 범주에 두었다. 이러한 분류 방식 자체는 학문적으로 그리 엄밀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비각을 문자학 연구의 한 방면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總之, 專門研究碑刻之學始於宋代, 從宋代開始, 碑刻才正式作為一種文化遺產立於學術之林, 這是中國文化史和中國碑刻史上的一件幸事。爾後, 清代金石學的大發展正是沿著這條道路發展的。
요컨대 비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문은 송대에 시작되었으며, 송대에 이르러 비로소 비각이 하나의 문화 유산文化遺産으로서 학술의 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중국 문화사와 중국 비각사碑刻史에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뒤 청대 금석학金石學의 큰 발전은 바로 이 길을 따라 이어진 것이다.
(責任編輯: 劉慧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