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학. [칼럼] 스크린 쿼터 축소와 개방경쟁, 한국 여류바둑기사에게 배워라! 자유기업원 게재 칼럼, 한국경제학회에서 편찬한 ‘경제학 읽을거리(2011)’ 수록. 2006.3.15.
정부가 스크린 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연간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기로 어렵사리 확정했다. 정부는 3월 7일 총리 주재 하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스크린쿼터를 연간 상영일수의 40% 이상에서 20% 이상으로 줄이는 내용의 영화진흥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으며, 이 개정안은 7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영화인 대다수가 스크린 쿼터의 현행 유지를 주장하며 1인 시위 릴레이를 비롯하여 여러 이벤트를 벌였지만 어차피 안될 일이었다. 쿼터 축소는 미국투자를 유치하여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며 오래 전에 한국이 먼저 미국에 제의한 한미투자협정의 선결과제였다. 다만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 쿼터 축소도 한미투자협정도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금년에 한미 FTA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쿼터 제도의 향방이 우리의 경제개방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치환 인식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한국은 성공적인 대외거래를 통해 이만큼 발전해 왔고, 이제 와서 자급자족, 고립무원의 폐쇄체제로 회귀할 수 없는 일이므로 개방경쟁의 수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이에 쿼터 제도가 한국의 개방의지를 가늠하는 척도의 문제로 환원된 한, 규제 완화는 시기와 속도의 문제일 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라 하겠다.
시기적으로도 정부가 쿼터제한 완화를 더 미뤄야 할 이유도 없다. 21세기 들어설 즈음부터 국산 영화는 매년 대박 행진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국산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2001년 처음으로 50%를 넘어선 후 2004년에 거의 60%에 육박했으며, 작년 말에 출시된 영화 ‘왕의 남자’는 금년에도 계속 흥행을 기록 중이다. 토종 영화의 경쟁력이 향상되고 시장점유율이 영화진흥법 시행령에 규정된 40%를 크게 상회하다 보니 쿼터 규제는 오히려 무색하게 되었다. 시장점유율이 쿼터를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제도를 계속 유지하자는 것은 영화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경쟁을 피하고 그 대신 정부의 보호막에 안주하여 독점적 지대를 향유하겠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쿼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대박 흥행이 가능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쿼터 유지를 의도한 나머지 한국영화산업의 체질 개선과 영화의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오늘날의 성과를 만든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응당 돌려야 할 공(功)을 앗아가는 주장이다. 또한 비용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극장에 간 영화 소비자의 합리적인 선택마저 쿼터 탓으로 돌리는 것은 관객에 대한 비례(非禮)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기득권을 공격하고 자기 권리를 확장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면 위기의식이 발동하고 제도변화에 당연히 저항하게 된다. 마찬가지 원리로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스크린 쿼터의 축소는 기득권의 축소로 인식될 터이고 상실감도 적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개방경쟁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파고(波高)이다. 정부의 보호 손길에 기대지 않고 개방경쟁 환경에 의연하게 대처, 극복하겠다고 했어야 했다. 이는 다른 산업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한미 FTA가 체결되면, 산업별·기업별로 그 파장과 명암이 다를 것이다. 정부는 가급적이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해가겠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차라리 전면 개방경쟁을 각오하고 스스로 경쟁력을 높이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이와 관련, 쿼터 축소가 이미 확정된 영화산업은 물론이고 다가올 한미 FTA 파고에 영향 받게 될 모든 산업계는 우리나라 여류바둑기사의 도전정신과 성공사례를 교훈삼아 배워야 할 게 있다. 잘 알다시피 한국의 바둑은 조훈현, 이창호 등 걸출한 스타들을 중심으로 이미 오래 전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만해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의 여류바둑계가 최근에는 일본바둑을 이기고 중국과 상대할 정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사실은 잘 모르는 이가 많다.
한국여류바둑이 짧은 시간에 압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스스로 개방경쟁을 선택한 한국 여류바둑기사의 당찬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프로기사도 쉬이 이기는 루이나이웨이(芮內偉)를 불러들여 싸우고 지면서 다시 도전하고 이기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루이 9단이 중국을 떠나 처음 노크한 것은 일본기원이다. 그러나 일본의 여류기사들은 루이 9단이 일본에서 활동하게 되면 일본여성대회를 싹쓸이 할 거라며 절대 반대했다 한다. 시간이 흘러 루이 9단이 한국을 노크했을 때, 우리의 젊은 여류기사들은 일본에서와 달리 뜻밖의 당찬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루이 9단을 환영한다. 최강의 그녀에게 배워 그녀를 이기고 싶다’라고. 그리고 1999년 루이가 한국에 온 후 도전은 계속되었고 2003년, 우리의 여류기사들은 드디어 루이를 이기고 우승하기 시작하였다.
둘 간의 결승전은 이번으로 무려 14번째. 지난 달 11기 여류명인전 방어를 포함해 루이가 11회, 조혜연이 2회씩 우승을 했다. 통산 전적도 31승16패로 루이가 2배 앞서 있다. 하지만 학업을 병행 중인 조혜연(고려대 영문과)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태세다. 루이는 1999년 한국 정착 이후 국내 타이틀만 18개를 휩쓸었고 현재 여류 전관(3관)왕으로 군림 중이다. 여류국수전서도 루이가 6번 우승, 두 차례 정상에 섰던 조혜연을 압도하고 있다. 이방인 출신 철혈 여제(女帝)와 독재에 맞선 여대생의 항쟁 같은 모양새가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1]
개방경쟁을 한다 해서 토종 자본, 국내산업이 외국의 거대자본에 지는 건 아니다. 외국 문화에 노출되었다 하여 우리 문화가 소멸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월마트와 까르푸, 외국계 대형 할인점이 들어온 이후 할인점 시장규모는 급성장했고 이마트 등 국내 할인업체의 경쟁력은 더욱 향상되었다. 여류바둑계도 개방경쟁을 자청함으로써 경쟁력 향상은 물론 여류 기전의 규모를 늘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면 국내영화는 할리우드 거대자본 영화와 대등하게 경쟁하기 어렵지 않으냐고 걱정하는 이도 많지만 영화산업의 부가가치가 투입량에 비례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한국 여류기사의 사례에서처럼 개방경쟁을 회피하려고 하기보다는 적극 대처함으로써 우리의 영화 및 관련 산업도 시장규모를 키우고 경쟁력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2]
[1] 조선일보, 2010.3.1.자에서 사진, 기사 인용
[2] 후기: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바둑은 사상 처음 금메달 3개가 걸린 공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남녀 단체, 혼성 페어 3 종목 모두에서 중국을 이기고 우승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여자단체에서는 루이가 중국 대표선수로 나왔음에도 결승에서 이민진이 이기는 등 종합전적 2승1패로 우승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대만에게도 밀려 최하위인 4등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