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5년 조선(曹善) 필사본 《산해경(山海經)》: 문헌적, 학술적, 역사적 가치
요약 (Executive Summary)
1365년 원나라 학자 조선(曹善)이 필사한 《산해경(山海經)》 판본(이하 조선본)의 다층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이 필사본은 지난 800년간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표준이었던 남송 우무(尤袤 ) 간행본(1180년)을 능가하는, 현존하는 가장 우수하고 완전한 판본이다.
조선본의 문헌적 우수성은 여러 측면에서 입증된다. 첫째, 북송 시대 유서(類書)인 《태평어람(太平御覽)》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우무본의 오류를 교정하고 더 오래된 원형을 보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 둘째, 기존 판본의 모호한 지리 정보(‘장성 북쪽’)를 ‘장안성(長安城)’이라는 구체적인 성(城)의 이름으로 바로잡아, 잊혔던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의 복원과 학제간 연구의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2]. 또한, 조선본은 우무본 계열 판본에서는 완전히 누락된 곽박(郭璞)의 시적인 노래, 〈도찬(圖贊)〉 전문을 수록한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3]. 이는 원본 텍스트(經), 주석(注), 찬(贊)의 삼위일체 구조를 복원함으로써, 《산해경(山海經)》이 본래 그림과 문자가 결합된 다층적 텍스트였음을 재확인시킨다 [4].
예술적, 역사적 가치 또한 탁월하다. 원대 최고의 서예가 중 한 명인 조선의 해서체(楷書體)는 그 자체로 귀중한 예술품이며, 명나라 대학자 왕세정(王世貞) 등 저명한 문인들의 소장과 발문, 그리고 청나라 건륭제와 가경제의 어람인(御覽印)은 이 판본의 높은 위상을 증명한다 [5].
결론적으로, 조선본의 ‘재발견’은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6]. 이 판본은 더 이상 희귀 이본이 아닌, 모든 미래의 정본(critical edition) 확립, 번역, 학술 연구의 새로운 기초 문헌(foundational text)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7].
서론
《산해경(山海經)》의 수수께끼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고전 문헌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텍스트이다 [8]. 고대 지리, 신화, 민속, 박물학의 보고(寶庫)로 평가받는 이 책은 전통적으로 그 내용의 기괴함 때문에 ‘괴탄한 책(怪誕之書)’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대 중국 사회사를 연구하는 보물창고”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5]. 작자와 성립 연대에 대한 무수한 가설이 제기되었으나 어느 것 하나 정설로 자리 잡지 못한 채,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의 세계관과 상상력의 원형을 담고 있는 불가사의한 텍스트로 남아있다 [6].
조선(曹善)본의 소개
본 보고서의 핵심 주제는 원(元)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5년(1365)에 학자이자 서예가인 조선(曹善)이 필사한 《산해경(山海經)》 판본이다 [4].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하 ‘조선(曹善)본’으로 칭한다 [7]. 이 필사본은 저명한 소장 이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 진정한 문헌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수장고에 머물러 있었다 [3].
보고서의 논지
본 보고서는 조선(曹善)본이 단순히 기존 판본의 한 이본(異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간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기준이 되어 온 남송(南宋) 우무(尤袤 ) 간행본(이하 ‘우무(尤袤 )본’)보다 더 우수하고 완전한 문헌적 계통을 대표하는 판본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3]. 조선(曹善)본의 현대적 ‘재발견’은 《산해경(山海經)》의 원형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며, 오랜 기간 고착화된 본문의 오류를 바로잡고, 나아가 《산해경(山海經)》 연구 분야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8].
제1부: 시간의 흐름 속 판본의 여정: 전래와 형태
필사자와 그의 시대: 동오(東吳)의 조선(曹善)
조선(曹善)본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필사자인 조선(曹善, 자는 세량(世良), 호는 저산생(樗散生))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4]. 그는 송강(松江) 출신으로 후에 오문(吳門)으로 이주했으며, 당대 뛰어난 서예 실력으로 형 조세장(曹世長), 조카 조공(曹恭)과 함께 ‘동오삼조(東吳三曹)’라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았다 [7]. 명(明)나라 건국 후, 명망 높은 학자 송렴(宋濂) 등의 추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조에 출사하특정기를 거부하고 산수에 은거하며 시와 서예에 몰두한 강직한 인물이었다 [4]. 이러한 그의 은일적 학자로서의 정체성은 그가 세심하고 헌신적인 태도로 고전을 필사했으리라는 신뢰를 더해준다 [4].
일부 박물관 기록에는 ‘조선가(曹善嘉)’라는 이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명(明)나라 학자 요수(姚綬)와 왕세정(王世貞)의 발문 및 현대 학계의 연구는 일관되게 ‘조선(曹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7]. 특히 요수(姚綬)의 발문은 그의 이름이 ‘선(善)’임을 명확히 하고 있어, 본 보고서에서는 ‘조선(曹善)’을 표준으로 삼는다 [4].
재질과 예술적 가치
조선(曹善)본은 총 4책(四冊)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송대(宋代)에 제작된 최고급 종이인 송전(宋牋) 위에 검은색 선이 그어진 오사란(烏絲欄) 형식으로 필사되었다 [3]. 이는 판본 자체가 높은 수준의 재료로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서예 작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탁월하다. 전체는 단정하고 힘 있는 작은 해서체(小楷)로 쓰여졌는데, 명(明)대의 저명한 문인이자 감식가인 왕세정(王世貞)은 그의 발문에서 이 서체가 위(魏)·진(晉) 시대 서예의 대가인 종요(鍾繇)의 풍격, 특히 그의 대표작인 〈천계직표(薦季直表)〉의 필의(筆意)를 담고 있다고 극찬했다 [4]. 이처럼 뛰어난 예술적 가치는 조선(曹善)본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귀중한 예술품으로 인식되어 오랜 세월 동안 보존되고, 후일 청(淸)나라 황실의 소장품이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4].
소장의 연대기: 명대 문인에서 청대 황실까지
조선(曹善)본의 가치는 그 저명한 소장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4]. 이 필사본은 명(明)나라 시대 저명한 학자들의 손을 거치며 그들의 평가가 담긴 발문(題跋)이 더해졌다 [4].
- 요수(姚綬, 1422-1495): 그의 발문은 필사자 조선(曹善)의 생애와 인품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4].
- 왕세정(王世貞, 1526-1590): 그의 긴 발문은 《산해경(山海經)》 내용의 역사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어, 명(明)대 학자들의 고증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제4부에서 상세히 논의) [4].
- 진계유(陳繼儒, 1558-1639)와 동기창(董其昌, 1555-1536): 이 필사본은 만명(晩明) 시기 문화계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들의 소장품 목록에도 포함되었으며, 특히 동기창(董其昌)은 책의 표지에 제목을 직접 쓰기도 했다 [9]. 이는 조선(曹善)본이 당시 최고 엘리트 문화의 중심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9].
황실의 인증: 건륭제와 가경제의 인장
조선(曹善)본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은 책의 첫머리에 찍힌 두 개의 붉은 인장, 즉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와 ‘가경어람지보(嘉慶御覽之寶)’이다 [9].

이 인장들은 각각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와 가경제(嘉慶帝)가 직접 감상했음을 나타내는 공식적인 어람인(御覽印)이다 [10]. 이는 조선(曹善)본이 황제가 개인적으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국보급 보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1]. 이 인장들의 존재는 조선(曹善)본이 청(淸)대 황실의 서화 소장품 목록인 《석거보급(石渠寶笈)》에 수록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10]. 《석거보급(石渠寶笈)》에 수록되기 위한 공식적인 요건 중 하나가 바로 이 인장들이었기 때문이다 [11]. 실제로 이 필사본은 《석거보급(石渠寶笈)》에 등재되어 있다 [12].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조선(曹善)본이 황실의 보물, 즉 서예 작품(法書)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 문헌적 가치가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간과되는 결과를 낳았다 [12]. 당시 청(淸)나라에서는 필생의 역작으로 《산해경(山海經)》의 교감과 주석 작업을 수행하던 고증학자 학의행(郝懿行)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3]. 그의 연구는 후대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지만, 그는 황실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曹善)본이 아닌 널리 유포된 우무(尤袤 )본 계열의 판본에 의존했다 [3]. 이는 조선(曹善)본이 ‘예술품’으로 분류되어 자금성(紫禁城) 내에 물리적으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텍스트’를 연구하던 문헌학자들의 지적 탐구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즉, 조선(曹善)본의 심미적 가치가 그 문헌 교감학적 가치를 압도하여, 최고의 판본이 고증학의 황금기에 오히려 외면당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표 1: 조선(曹善)본의 연대기
| 연대/시대 | 사건 | 주요 인물 | 의의 및 출처 |
| 1365년 (원(元)) | 조선(曹善)이 《산해경(山海經)》을 필사함. | 조선(曹善) | 필사본의 제작 [7] |
| 1490년대경 (명(明)) | 요수(姚綬)가 발문을 추가함. | 요수(姚綬) | 조선(曹善)의 전기적 사실 기록 [7] |
| 1580년대경 (명(明)) | 왕세정(王世貞)이 발문을 추가함. | 왕세정(王世貞) | 서예 및 내용에 대한 비평 [7] |
| 1600년대경 (명(明)) | “진계유(陳繼儒), 동기창(董其昌) 등과 연관됨.” | “진계유(陳繼儒), 동기창(董其昌)” | 만명(晩明) 시기 문인 문화의 중심에 있었음을 증명 [9] |
| 1745-1816년경 (청(淸)) | “청(淸)나라 황실 소장품이 됨. 건륭(乾隆), 가경(嘉慶) 어람인이 찍힘.” | “건륭제(乾隆帝), 가경제(嘉慶帝)” | 황실의 보물로 인정받음 [1] |
| 1925-1949년 |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으로 베이징에서 타이베이로 이전. | – | 현대적 보존의 시작 |
| 20세기 후반/21세기 | 현대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됨. | 녹억록(鹿憶鹿) 등 | 학술적 가치가 본격적으로 조명됨 [3] |
제2부: 조선본의 문헌적 권위: 비교 분석
기존의 표준: 남송(南宋) 우무(尤袤 )본
조선(曹善)본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교의 기준이 되는 판본을 이해해야 한다. 1180년(순희(淳熙) 7년)에 간행된 남송(南宋) 우무(尤袤 )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해경(山海經)》 인쇄본이다 [3]. 이 판본은 지난 800여 년간 대부분의 후대 판본, 특히 청(淸)대 학의행(郝懿行)의 권위 있는 주석서인 《산해경전소(山海經箋疏)》를 포함한 여러 판본의 모본(母本) 역할을 해왔다 [3]. 따라서 조선(曹善)본의 가치가 재조명되기 전까지 사실상 모든 현대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기초는 우무(尤袤 )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더 나은 저본’ 가설과 중국 학자들의 논증
현대 학계의 핵심적인 주장은, 조선(曹善)본이 우무(尤袤 )본의 저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정확한, 지금은 사라진 필사본(祖本)을 바탕으로 필사되었다는 것이다 [3].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송(宋)나라 황제들의 휘(諱)를 피하는 피휘(避諱) 관습에서 찾을 수 있다. 대만 학자 녹억록(鹿憶鹿)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曹善)본에서는 송(宋) 진종(眞宗)의 이름인 ‘항(恒)’과 인종(仁宗)의 이름인 ‘정(禎)’ 등의 글자에서 마지막 획을 생략하는 피휘(避諱)의 흔적이 발견된다 [3]. 이는 조선(曹善)본의 저본이 송(宋) 인종(仁宗)(재위 1022-1063) 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만약 그렇다면 1180년에 간행된 우무(尤袤 )본보다 최소 100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3].
중국 학자 진련산(陳連山)은 여기서 더 나아가, 조선(曹善)본의 저본이 우무(尤袤 )가 사용했던 ‘유흠(劉歆)이 정한 판본’과 유사했을 것이며, 두 판본의 차이는 우무(尤袤 )의 교감 작업이 정밀하지 못했기(校對不精) 때문에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3]. 중국 학자 유사량(劉思亮)은 조선(曹善)본의 발견이 갖는 교감학적 의의를 강조한다. 그는 우무(尤袤 )본이 널리 보급된 이후, 후대의 모든 판본이 그 계통을 따르게 되면서 텍스트에 포함된 오류들이 마치 ‘굳어진(固化)’ 상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曹善)본은 우무(尤袤 )본이 간행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판본(別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증거로서, 수백 년간 고착화된 오류의 사슬을 끊고 텍스트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8].
초기 유서(類書)를 통한 교차 검증과 곽박(郭璞) 주석의 복원
조선(曹善)본의 텍스트적 우수성을 증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초기의 유서(類書), 즉 일종의 백과사전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983년경 편찬된 북송(北宋)의 《태평어람(太平御覽)》은 당시 유통되던 《산해경(山海經)》 판본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다 [1]. 여러 사례에서 조선(曹善)본의 구절이 《태평어람(太平御覽)》의 인용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반면, 우무(尤袤 )본은 다른, 종종 비논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남산경(南山經)〉에 등장하는 ‘제어( 鮆魚)’에 대한 곽박(郭璞)의 주석이다. 우무(尤袤 )본의 주석은 이 물고기가 “긴 머리(長頭)”를 가졌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태평어람(太平御覽)》은 이 주석을 “긴 수염(長鬚)”으로 인용하고 있다. 놀랍게도 조선(曹善)본의 주석 역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동일하게 “긴 수염(長鬚)”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물고기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 있어 훨씬 합리적인 표현이다 [1].
나아가 중국 학자 오위팡(吳鬱芳)은 조선(曹善)본이 곽박(郭璞) 주석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청(淸)대 학의행(郝懿行)의 권위 있는 주석서인 《산해경전소(山海經箋疏)》와 조선(曹善)본을 비교한 결과, 학의행(郝懿行)의 판본에 포함된 곽박(郭璞)의 주석 중 상당수가 후대에 추가된 내용임을 밝혀냈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단지 〈남산경(南山經)〉, 〈서산경(西山經)〉, 〈북산경(北山經)〉 세 편에서만 보더라도 학의행(郝懿行)의 판본에는 있으나 조선(曹善)본에는 없는 곽박(郭璞)의 주석이 40개 조항에 달한다 [13]. 이는 조선(曹善)본이 곽박(郭璞)의 원주(原注)를 더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13].
이러한 사례들은 인쇄술의 발달이 반드시 텍스트의 정확한 보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1180년 우무(尤袤 )가 10여 종의 판본을 수집하여 교감한 후 간행한 우무(尤袤 )본은 인쇄술 덕분에 널리 보급되었고, 그 과정에서 판본에 포함된 오류들까지 함께 ‘정본(定本)’처럼 굳어졌다 [6]. 반면, 《태평어람(太平御覽)》이나 조선(曹善)본의 저본과 같이 더 우수한 텍스트 계통은 소수의 필사본 형태로만 명맥을 유지하다가 대부분 소실되고, 조선(曹善)본만이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본(孤本)’이 되었다 [3]. 이는 인쇄술이 때로는 불완전한 텍스트를 표준으로 확산시키는 역기능을 할 수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핵심 사례 연구: ‘장안성(長安城)’의 재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
조선(曹善)본의 문헌적 가치는 단순히 글자의 오류를 바로잡는 수준을 넘어, 역사적 사실의 해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산해경(山海經)》 〈해내서경(海內西經)〉에 기록된 고대 국가 맥국(貊國)의 위치에 대한 묘사이다. 기존의 명(明)대 판본을 비롯한 여러 통용본(通行本)과 조선(曹善)본의 기록을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 통용본: 貊國在漢水東北, 〈今扶餘國, 即濊貊故地, 在長城北去玄菟千里, 出名馬、赤玉、貂皮、大珠, 如酸棗也.〉地近于燕, 燕之滅.
- 해석: 맥국은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 <지금의 부여국으로, 즉 예맥의 옛 땅이며, 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도까지 천 리다. 명마, 붉은 옥, 담비 가죽, 대추만 한 큰 진주가 나온다.> 연나라와 가까워, 연이 이를 멸망시켰다.
- 조선(曹善)본: 貊國在漢水東北, 〈今扶餘國, 即濊貊故地, 有長安城北去玄菟千里, 出名馬、赤玉, 貂皮, 大珠, 如酸棗也.〉地近于燕, 燕之滅.
- 해석: 맥국은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 <지금의 부여국으로, 즉 예맥의 옛 땅이다. 장안성이 있으며,(그곳에서) 북쪽으로 현도까지 천 리다. 명마, 붉은 옥, 담비 가죽, 대추만 한 큰 진주가 나온다.> 연나라와 가까워, 연이 이를 멸망시켰다.


이 두 기록의 차이는 단순히 몇 글자에 그치지 않고, 역사 지리적 정보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 모호함에서 구체성으로: 역사적 서사의 재구성: 통용본의 ‘재장성북(在長城北)’이라는 표현은 ‘만리장성 북쪽’이라는 매우 막연하고 광범위한 위치를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조선(曹善)본의 ‘유장안성(有長安城)’은 ‘장안성(長安城)이라는 이름의 성(城)이 있다’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전달한다. 이는 단순한 오자 수정이 아니라, 잊혔던 고대사의 한 장면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 기록은 고대 맥국(貊國)의 영토 내에 장안성의 성곽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곽박(郭璞)의 주석(부여, 예맥과의 연관성) 및 본문(연나라에 의한 멸망)과 결합하여 ‘한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장안성을 거점으로 삼았던 예맥계 국가가 연나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일관된 역사적 서사를 구성하게 한다.
- 판본 계통의 우수성 입증: 한 글자의 차이가 이처럼 중대한 의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조선(曹善)본이 단순한 이본(異本)이 아니라 훨씬 더 정확하고 원형에 가까운 텍스트를 보존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후대의 판각 과정에서 필사자들이 낯선 지명인 ‘유장안성(有長安城)’을 더 익숙하고 일반적인 표현인 ‘재장성북(在長城北)’으로 고쳤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어려운 원문을 그대로 보존한 조선(曹善)본의 가치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 학제간 연구의 가능성 제시: 이 발견은 문헌학의 성과가 어떻게 역사학, 고고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조선(曹善)본의 정확한 기록을 통해, 역사학자들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지도 위에 ‘장안성(長安城)’이라는 새로운 거점을 설정하고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고조선 및 부여(扶餘) 관련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새로운 고고학적, 문헌적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2].
결론적으로 ‘장안성(長安城)’ 사례는 조선(曹善)본이 단순한 교감의 대상을 넘어, 왜곡되거나 잊혔던 고대의 정보를 되살리는 ‘살아있는 증거’임을 웅변한다. 이는 조선(曹善)본이 모든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표 2: 주요 텍스트 변이 비교: 조선(曹善)본 vs. 우무(尤袤 )본 및 《태평어람(太平御覽)》
| 출전 (산해경) | 우무(尤袤 )본 기록 | 조선(曹善)본 기록 | 《태평어람(太平御覽)》 기록 | 우수성 분석 |
| “〈남산경(南山經)〉, 부옥산(浮玉山), 제어( 鮆 魚) 주석” | 長頭 (긴 머리) | 長鬚 (긴 수염) | 長鬚 (긴 수염) | ‘긴 수염’이 물고기( 鮆 魚)의 특징 묘사로 더 적합하며, 10세기 문헌인 《태평어람(太平御覽)》의 기록과 일치하여 조선(曹善)본의 저본이 더 오래되고 정확함을 증명 [1] |
| “〈남산경(南山經)〉, 회계산(會稽山) 본문” | “上有禹 冢 , 幷井. (위에 우(禹)임금의 무덤과 우물이 함께 있다.)” | 上有禹 冢 及井. (위에 우(禹)임금의 무덤 및 우물이 있다.) | 上有禹 冢 及井. (위에 우(禹)임금의 무덤 및 우물이 있다.) | ‘幷’과 ‘及’은 의미상 유사하나, 조선(曹善)본의 ‘及’이 《태평어람(太平御覽)》의 인용과 일치하여 더 오래된 형태를 보존하고 있음을 시사 [1] |
| “〈해내북경(海內北經)〉, 곽박(郭璞) 주석” | “陵魚人面, 手足, 魚身. (능어(陵魚)는 사람 얼굴에, 손과 발이 있고, 몸은 물고기다.)” | “陵魚人面, 手足, 魚身, 在海中. (능어(陵魚)는 사람 얼굴에, 손과 발이 있고, 몸은 물고기이며, 바다 속에 있다.)” | “陵魚人面, 手足, 魚身, 在海中. (능어(陵魚)는 사람 얼굴에, 손과 발이 있고, 몸은 물고기이며, 바다 속에 있다.)” | 조선(曹善)본과 《태평어람(太平御覽)》에만 있는 ‘在海中(바다 속에 있다)’ 구절은 문맥상 필수적인 정보로, 우무(尤袤 )본에서 누락되었음을 보여줌. 조선(曹善)본이 더 완전한 텍스트를 보존하고 있음 [1] |
제3부: 삼위일체의 복원: 곽박(郭璞)의 〈도찬(圖贊)〉 회복
온전한 텍스트: 경(經), 주(注), 찬(贊)
전통적으로 《산해경(山海經)》은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인 텍스트로 이해된다. 첫째는 원본 텍스트인 ‘경(經)’, 둘째는 4세기 학자 곽박(郭璞, 276-324)이 단 필수적인 ‘주(注)’, 그리고 셋째는 곽박(郭璞)이 《산해경(山海經)》의 기이한 생물과 신들의 그림(圖)에 부쳐 지은 시적인 노래인 ‘찬(贊)’이다 [14]. 이 세 가지, 즉 경·주·찬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산해경(山海經)》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14].
수백 년간의 공백을 메우다
조선(曹善)본이 갖는 가장 결정적인 학술적 기여는 바로 이 세 번째 요소인 곽박(郭璞)의 〈도찬(圖贊)〉 전문을 각 권의 말미에 온전히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표준 판본이었던 우무(尤袤 )본과 그로부터 파생된 모든 판본 계열에는 이 〈도찬(圖贊)〉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따라서 조선(曹善)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자, 경(經)·주(注)·찬(贊) 세 요소를 모두 갖춘 유일하고 완전한 판본으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3].
〈도찬(圖贊)〉의 회복은 단순히 누락된 텍스트를 추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산해경(山海經)》의 본래 정체성을 복원하고, 이 텍스트의 장르와 해석의 틀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역사적으로 《산해경(山海經)》은 지금은 사라진 그림(圖)과 밀접하게 연관된 텍스트였으며, 〈도찬(圖贊)〉은 이 시각적 전통의 유일하게 남은 문학적 흔적이다 [14]. 지난 800년간 우무(尤袤 )본의 전통은 《산해경(山海經)》을 순수한 문자 텍스트(경+주)로만 제시했고, 이는 학자들이 이 책을 지리서, 역사서, 혹은 박물지로 접근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조선(曹善)본은 서술적인 본문과 학술적인 주석에 시적이고 신화적인 차원(찬)을 다시 결합시켰다. 이 복원된 삼위일체는 《산해경(山海經)》이 서술적, 주석적, 그리고 상상적·시적 차원에서 동시에 경험되도록 의도된 다층적 텍스트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해석의 초점을 “이 장소가 실재하는가?”, “이 동물이 실존했는가?”와 같은 실증적 질문에서 벗어나, 관찰, 구전, 시적 상상력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킨다. 즉, 〈도찬(圖贊)〉의 복원은 우리를 전근대 독자들이 완전한 형태의 《산해경(山海經)》을 경험했던 방식에 훨씬 더 가깝게 다가서게 한다.
제4부: 학술적 수용의 역사: 명대 골동 취미에서 현대적 재발견까지
명대 학자들의 시선: 서예와 역사성
조선(曹善)본에 대한 평가는 시대별 학문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명(明)나라의 대학자 왕세정(王世貞)은 그의 발문에서 조선(曹善)본을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했다. 첫째, 그는 《산해경(山海經)》 내용의 역사성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했다. 그는 텍스트 내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나 상(商)나라 시대의 사건들이 언급되는 것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내용들을 지적하며, 이 책이 전설적인 우(禹) 임금이나 백익(伯益)에 의해 저술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문인들에 의해 윤색되고 증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4]. 이는 사실에 근거하여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명(明)대 학자들의 고증학적 정신을 잘 보여준다. 둘째, 그는 조선(曹善)의 서예를 극찬하며 종요(鍾繇)의 필법에 비견했다 [4]. 이는 그가 조선(曹善)본을 문헌적 가치뿐만 아니라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도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한다.
왕세정(王世貞)과 같은 명(明)대 문인들은 조선(曹善)본을 하나의 총체적인 문화적 오브제로 감상했다. 그들의 접근 방식은 심미적(서예 감상)인 동시에 지성적(내용의 역사성 논쟁)이었다. 그들은 현대 문헌학처럼 판본 간의 세밀한 비교를 통해 ‘정본(critical edition)’을 확립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조선(曹善)본은 역사적 논쟁을 촉발하는 아름다운 예술품이었다.
청대의 공백기와 현대적 재평가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曹善)본은 청(淸)나라 황실에 소장되어 예술품으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만, 그 문헌적 가치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극적으로 반전된다. 조선(曹善)본의 ‘재발견’은 제한된 영인본만으로도 그 독자적 가치를 처음으로 인지한 주사기(周士琦)와 같은 초기 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3]. 이후 중국 학자 오위팡(吳鬱芳)은 199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조선(曹善)본이 기존 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곽박(郭璞) 주석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가치를 역설했다 [13]. 하지만 당시 그는 필사본의 행방을 알지 못해 “아마도 대륙에 남아 있을 것”이라 추측하며, 양쪽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13].
이러한 학문적 갈증은 필사본이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사실이 확인되고 그 전문이 공개되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연구는 대만 학자 녹억록(鹿憶鹿)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녀는 《고궁학술계간(故宮學術季刊)》 등에 발표한 여러 논문을 통해 조선(曹善)본이 우무(尤袤 )본보다 우수한 저본에서 유래했으며, 기존 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완전한 형태의 〈도찬(圖贊)〉을 복원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논증했다 [3]. 그녀의 연구는 조선(曹善)본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초석을 마련했다. 유사량(劉思亮), 진련산(陳連山)과 같은 다른 현대 중국 학자들 역시 조선(曹善)본이 향후 《산해경(山海經)》의 교감(校勘)과 연구에 있어 필수적인 자료임을 인정하며 그 중요성을 확인해주고 있다 [3].
이처럼 명(明)대와 현대의 평가는 동일한 대상을 두고 얼마나 다른 학문적 패러다임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명(明)대 학자들에게 조선(曹善)본은 역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예술품이었지만, 현대 학자들에게는 800년간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문헌적 증거이다. 조선(曹善)본의 가치는 그 자체로 내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시대의 질문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표 3: 학술적 평가의 종합적 시각
| 학자/시대 | 주요 평가 초점 | 핵심 주장 | 출처 |
| 왕세정(王世貞) (명(明)) | 서예 & 역사성 | “서예는 종요(鍾繇)의 풍격을 지녔다고 극찬했으나, 시대착오적 내용들을 근거로 텍스트의 고대 기원설에 의문을 제기함.” | [4] |
| 청(淸)대 황실 수장가 | 심미적 오브제 | 황제의 감상에 적합한 서예의 걸작으로 평가. 문헌적 가치는 간과됨. | [9] |
| 녹억록(鹿憶鹿) (현대) | 문헌 비평 & 완전성 | “우무(尤袤 )본보다 우수한 저본에서 유래했으며, 우무(尤袤 )본의 오류를 교정하고 완전한 〈도찬(圖贊)〉을 복원한 가장 우수한 판본임을 논증.” | [3] |
| 현재의 학계 공통 인식 | 기초 문헌 | “모든 미래의 연구, 교감, 번역에 있어 필수적인 기초 문헌으로 인정됨. 가장 우수하고 완전한 현존 판본.” | [3] |
결론: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새로운 토대
본 보고서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1365년 조선(曹善) 필사본 《산해경(山海經)》은 다층적인 가치를 지닌 독보적인 문헌이다. 그 가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 우수한 문헌적 증거: 《산해경(山海經)》 본문과 곽박(郭璞)의 주석에 대한 더 원형에 가깝고 정확한 내용을 제공한다.
- 가장 완전한 판본: 경(經), 주(注), 찬(贊)의 삼위일체 구조를 보존한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 서예의 걸작: 원(元)나라 시대 저명한 서예가의 예술적 성취를 담고 있는 중요한 예술품이다.
- 저명한 역사적 유물: 명(明)나라 최고의 문인들과 청(淸)나라 황제들의 손을 거친 명예로운 전래 과정을 지닌 문화재이다.
결론적으로, 조선(曹善)본은 더 이상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나 희귀한 이본이 아니라, 《산해경(山海經)》 연구의 새로운 기초 문헌(foundational text)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조선(曹善)본의 존재는 《산해경(山海經)》의 전체 문헌사에 대한 체계적인 재평가를 요구한다.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정본(critical edition)의 확립, 학술적 주석 작업, 그리고 다양한 언어로의 번역은 반드시 조선(曹善)본을 일차적인 참조점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曹善)본은 단순히 우리의 지식을 더해주는 것을 넘어, 기존의 지식을 교정하고,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를 탐험할 수 있는 훨씬 더 견고한 지반을 제공한다.
핵심 사례 연구: ‘장안성(長安城)’의 재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
조선(曹善)본의 가치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통용본에서는 완전히 왜곡되어 사라져 버린 ‘장안성(長安城)’이라는 세 글자를 되살려낸 대목이다. 이는 단순한 문자 몇 개의 차이가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사의 지도를 새로 그리게 할 만큼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진 발견이다.
결정적 차이: ‘재장성북(在長城北)’ 대 ‘유장안성(有長安城)’
《산해경(山海經)》 〈해내서경(海內西經)〉에는 고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맥국(貊國)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두 판본의 결정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 통용본(通行本) / 금본(今本):
“貊國在漢水東北, 〈…在長城北, 去玄菟千里…〉”
“맥국(貊國)은 한수(漢水) 동북쪽에 있다.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玄菟)까지의 거리는 천 리다…〉”
▶ 원(元) 조선(曹善)본:
“貊國在漢水東北, 〈…有長安城, 北去玄菟千里…〉”
“맥국(貊國)은 한수(漢水) 동북쪽에 있다. 〈…장안성(長安城)이 있으며, (그곳에서) 북쪽으로 현도(玄菟)까지의 거리는 천 리다…〉”
통용본의 ‘재장성북(在長城北)’은 맥국(貊國)의 위치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거대하고 막연한 기준점의 북쪽으로 설명한다. 이는 후대의 필사자들이나 학자들이 ‘장안성(長安城)’이라는 생소한 지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익숙한 ‘장성(長城)’으로 임의로 고쳤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반면, 조선(曹善)본의 ‘유장안성(有長安城)’ 은 맥국(貊國)이라는 나라 안에 ‘장안성(長安城)’ 이라는 구체적인 성(城)이 존재했음을 명시한다. 여기서 ‘장안(長安)’은 섬서성(陝西省)의 수도 장안(長安)이 아니라 ‘길고 안전한 성’이라는 의미의 고유명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지리적 기준점은 모호한 ‘장성(長城) 밖’에서 구체적인 ‘장안성(長安城)’으로 바뀌게 된다.
주류 학계의 통설을 뒤흔드는 새로운 지리적 좌표
이 발견이 왜 중요한가? 이는 고조선(古朝鮮)과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기존의 모든 논의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류 학계의 통설:
현재 한국과 중국의 주류 학계는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맥국(貊國) 또는 예맥(濊貊)의 활동 범위를 대체로 만주(滿洲) 남부와 한반도(韓半島) 북부 지역으로 비정한다.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현도군(玄菟郡) 역시 초기에는 만주(滿洲) 무순(撫順) 일대에 설치되었다가, 토착 세력의 저항에 밀려 점차 동쪽의 압록강(鴨綠江) 중류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모든 논의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등 후대 사서의 제한된 기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조선(曹善)본이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
조선(曹善)본의 기록은 이 통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현도(玄菟)의 위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안성(長安城)에서 북쪽으로 천 리’ 라는 관계로 정의된다. 즉, 맥국(貊國) 영토 내의 ‘장안성(長安城)’이라는 실존하는 장소의 위치를 찾는다면, 현도(玄菟)의 위치 또한 자연스럽게 규명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역사적 파장: 동아시아 고대사의 재구성
조선(曹善)본의 기록이 원본에 가깝다고 인정한다면, 그 파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한사군(漢四郡) 위치 재설정:
현도군(玄菟郡)은 한반도(韓半島) 내부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만주(滿洲) 어딘가에 있었을 ‘장안성(長安城)’에서 북쪽으로 천 리나 떨어진, 훨씬 더 북쪽에 위치했다는 강력한 문헌적 증거가 된다. 이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와 영역에 대한 기존의 모든 지도를 무효화할 수 있다.
고대사 인식의 근본적 전환:
이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의 문제가 아니다. 고조선(古朝鮮)과 그 유민들이 세운 부여(扶餘國),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었던 한(漢)나라의 영향력 범위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조선(曹善)본에 기록된 ‘유장안성(有長安城)’ 이라는 단 세 글자는 통용본에서는 삭제되었던 고대의 진실을 복원하는 열쇠다. 이 발견은 ‘동아시아 고대의 역사지리학을 뿌리째 뒤흔드는 결정적인 증거’ 로서, 앞으로 고조선사(古朝鮮史)와 한사군(漢四郡)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가장 중요한 문헌 사료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 필사본 한 권의 가치는 실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수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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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鹿憶鹿. 〈《山海經》的再發現—曹善抄本的文獻價 值 考述〉. 《故宮學術季刊》 39, no. 1 (2021): 81–122.
[4] 鹿憶鹿. 《曹善手抄〈山海經〉箋注》. 臺北: 秀威經典, 2023.
[5] 中國國家圖書館. 〈中 国国 家 图书馆 公布了一批《山海 经 》的 数 字 资 源〉. 書格. 2024년 6월 23일 접속. https://www.shuge.org/meet/topic/141475/.
[6] 關東文脈. 〈關於《山海經》 你 應該了解的六大謎團〉. 中國吉林網. 2017년 8월 21일. https://culture.cnjiwang.com/gxt/201708/2487977.html.
[7] 國立故宮博物院. 〈元曹善書山海經(四) 冊〉. 故宮典藏資料檢索. 2024년 6월 23일 접속.(https://digitalarchive.npm.gov.tw/Collection/Detail/638?dep=P).
[8] 劉思亮. 〈從元代曹善抄本《山海經》看今本中存在的問題〉. 《文史》, no. 4 (2021): 165–81.
[9] 書格. 〈元曹善書山海經〉. 2022년 3월 21일. https://www.shuge.org/view/cao_shan_shu_shan_hai_jing/.
[10] ( 清 )張照 等編. 《欽定石渠寶笈》. 清 乾隆九年(1744年)內府朱格抄本.
[11] 藝術展覽. 〈台北故宮失散 姊 妹作《石渠寶笈》乾隆御題風俗圖HK$5000萬香港拍賣〉. The Value. 2021년 3월 15일. https://hk.thevalue.com/articles/sothebys-chinese-classical-painting-qing-court.
[12] 澎湃新 闻 . 〈故 宫 “石渠 宝 笈展” 晒画 , 内 行看 书画 ,外行看看“乾隆御 览 ”〉. 2015년 9월 8일.(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369683).
[13] 吳鬱芳. 〈元曹善《山海經》手抄本簡介〉. 《古籍整理 研 究學刊》, no. 1 (1997): 10–12.
[14] 謝秀卉. 〈創傳:郭璞與《山海經》的「經典化」〉. 《國文學報》, no. 63 (2018): 4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