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제蒼帝와 창힐倉頡은 같은 사람이다
서론: 역사의 미제未濟 사건, ‘창힐’의 진짜 정체
역사의 기록 보관소에는 수많은 미제未濟 사건 파일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사건 파일의 이름은 바로 ‘창힐倉頡’이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기호로 전환하여 문자를 발명한, 인류 문명의 비밀을 처음으로 풀어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신원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옛 기록[1차 사료]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깊은 안개 속에 싸여 있다.
한 인물이 어째서 이토록 다양한 이름과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까?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의 의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들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시대가 그에게 부여했던 역할과 신격의 변천사를 담고 있다.
창힐의 여러 이름과 그 속에 담긴 의미
기본 명칭
창힐倉頡: ‘창고 창倉’에 ‘목을 들 힐頡’. 이는 지식의 창고를 열어 그 비밀을 캐내는 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문자의 기능적, 체계적 측면을 강조한다.
창힐蒼頡: ‘푸를 창蒼’에 ‘목을 들 힐頡’. 푸른 하늘蒼天의 뜻을 살펴 그 진리를 드러내는, 보다 신성하고 근원적인 존재의 느낌을 준다.
제왕적 칭호
사황史皇: ‘역사 사史’에 ‘임금 황皇’. 역사를 기록하고 관장하는 제왕이라는 뜻으로, 단순한 기록자를 넘어선 통치자의 위격을 암시한다.
창제倉帝: ‘창고 창倉’에 ‘임금 제帝’. 질서와 풍요, 문명의 기록을 다스리는 제왕을 의미한다.
창제蒼帝: ‘푸를 창蒼’에 ‘임금 제帝’. 동쪽 하늘을 다스리는, 우주적 권위의 제왕을 가리킨다.
전설 속 이름 및 신화적 별칭
후강侯剛: ‘제후 후侯’, ‘굳셀 강剛’. 일부 전설에서 전해지는 그의 본래 성과 이름이다.
창힐의 정체
이처럼 이름의 변천사 속에 그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가 숨어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전국시대戰國時代 문헌들은 그를 비범한 능력을 가진 한 명의 전문가로 묘사한다.
《순자荀子》해폐解蔽
故好書者眾矣,而倉頡獨傳者,壹也。
그러므로 예로부터 글씨를 잘 쓴 자는 많았으나, 창힐倉頡만이 홀로 전해지는 것은 그가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이 기록 속 창힐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신분은 격상되기 시작한다. 어떤 기록은 그를 국가 시스템에 편입된 공무원, 즉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만들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서敘
黃帝之史官倉頡,見鳥獸蹄迒之跡,知分理之可相別異也,初造書契。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창힐倉頡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그 무늬가 서로 구별될 수 있음을 깨닫고 처음으로 서계書契, 글자를 만들었다.
반면, 어떤 기록은 그를 아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독립적인 제왕帝王으로 묘사하며, ‘사관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노사路史》후기後紀 卷三十二
是則倉帝、史皇,非人臣之目明矣。後世徒見其有史皇之名,因謂為史官爾。… 倉帝、史皇,豈得云人臣之號哉。
그렇다면 창제倉帝와 사황史皇은 신하의 명칭이 아님이 분명하다. 후세 사람들은 단지 그에게 사황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사관史官이라고 일컬었을 뿐이다… 창제倉帝와 사황史皇이 어찌 신하의 칭호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그의 신분을 둘러싼 논쟁은 팽팽하다. 하지만 이 논쟁의 표면 아래에는 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바로 ‘한자漢字의 기원’이라는 문명의 뿌리에 대한 질문이다. 한문은 화하족華夏族이 만들었나? 동이족東夷族이 만들었나? 아니면 공동의 작품인가?
수수께끼의 열쇠는 창힐의 또 다른 이름, ‘창제倉帝’와 ‘사황史皇’에 있다. 수많은 옛 기록들은 창힐을 이 이름들로 부르며 그를 제왕이자 신神으로 묘사한다.
《회남자淮南子》본경훈本經訓
昔者蒼頡作書,而天雨粟,鬼夜哭。
옛날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자 하늘에서는 곡식이 비처럼 내렸고 귀신은 밤새도록 울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창제’라는 이름이 다름 아닌 동방東方을 다스리는 최고신의 칭호라는 점이다.
《예기주소禮記注疏》卷十四
迎春祭倉帝靈威仰於東郊之兆也。
봄을 맞이하며 동쪽 교외의 제단에서 창제倉帝 영위앙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동방은 동이족東夷族의 활동 무대였다.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
〈王制〉云:東方曰夷。夷者,柢也,言仁而好生,萬物柢地而出。故天性柔順,易以道御,至有君子、不死之國焉。
〈왕제〉에서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뿌리라는 뜻이니, 어질고 생명을 사랑하며 만물이 땅에 뿌리내려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여 도로써 다스리기 쉬우며, 군자의 나라와 죽지 않는 나라가 있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옛 기록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모든 조각을 맞추면 하나의 가설이 떠오른다. ‘동이족의 제왕인 사황 또는 창제, 속명俗名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이 가설의 핵심, ‘창힐[倉頡, 蒼頡]과 창제[蒼帝, 倉帝]는 동일인물이다’라는 명제를 원본 기록[1차 사료]을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핵심 자료 1: 《노사路史》의 상세한 기록
남송南宋의 나필羅泌이 저술한 《노사路史》는 ‘倉帝’가 ‘倉頡’과 동일 인물임을 가장 상세하고 집요하게 기록한 문헌이다. 일부에서는 《노사》에 등장하는 ‘倉帝’가 ‘蒼帝’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노사》의 전체 맥락과 우리가 곧 살펴볼 다른 기록들과의 교차 검증을 무시한 편협한 시각이다.
《노사》는 창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길게 기록하고 있다.
《노사路史》전기前紀 卷六
史皇氏。 倉帝史皇氏,〈倉頡廟碑作蒼,非是。按蒼氏出於蒼舒,倉氏出於倉頡。論衡倉頡字,盡作倉。春秋時有倉葛,字不從草。〉 名頡,姓侯岡。龍顏侈哆,四目靈光,實有睿德,生而能書。及受河圖綠字,於是窮天地之變,仰觀奎星圜曲之勢,俯察龜文、鳥羽、山川、指掌而創文字。文字已成,而天為雨粟,鬼為夜哭,以其泄天地之秘也;龍為潛藏,以其得神龍之duğ也。以正君臣之分,以嚴父子之儀,以肅尊卑之序。 〈䣊里之閒〉 法度以出,禮樂以興,刑罰以著,為政立教,領事辨官,一成不外是,而天地之蘊盡矣。〈倉帝所制,乃古文、虫篆。孔壁古文、科斗書,即其體也。魏略言邯鄲淳善倉頡虫篆,是矣。自倉頡至周宣,皆倉頡之體也。宣王紀其功,而史籀作大篆,稍加厘改,即小篆之前身。許慎作說文,以篆為本,其曰新莽之時以古文考之,可見矣。〉
사황씨史皇氏. 창제 사황씨倉帝史皇氏는 〈창힐묘비에는 창蒼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살펴보건대 창씨蒼氏는 창서舒에게서 나왔고 창씨倉氏는 창힐倉頡에게서 나왔다. 《논형論衡》에서는 창힐의 ‘창’ 자를 모두 ‘倉’으로 썼으며, 춘추시대에 창갈倉葛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葛’ 자에 초두머리[艹]가 없다.〉 이름이 힐頡이고 성은 후강侯岡이며, 용의 얼굴에 큰 입, 네 개의 신령한 눈을 가졌다. 실로 총명한 덕이 있었고 태어나면서부터 글을 쓸 줄 알았다. 이후 하도河圖와 녹자綠字를 받고, 이에 천지의 변화를 끝까지 궁리하고, 위로는 규성奎星의 둥글고 굽은 형세를 관찰하고, 아래로는 거북의 등껍질 무늬, 새의 깃털, 산과 내, 손바닥을 살피어 문자를 창제하였다. 문자가 이루어지자 하늘에서는 곡식이 비처럼 내렸고 귀신은 밤새도록 울었으니, 이는 천지의 비밀을 누설했기 때문이다. 용은 모습을 감추었으니, 신룡의 위엄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군신君臣의 분별을 바로잡고, 부자父子의 위의를 엄하게 하고, 존비尊卑의 질서를 엄숙하게 하였다. 〈마을 사이에서〉 법도가 나오고 예악禮樂이 흥하며 형벌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정치를 세우고 가르침을 베풀며 일을 맡기고 관리를 분별하는 일이 한 번에 이루어져 이에서 벗어남이 없었고 천지의 깊은 이치가 모두 드러났다. 〈창제倉帝가 만든 것은 곧 고문古文과 충전虫篆이다. 공자묘 벽의 고문과 과두문자가 바로 그 자체이다. 《위략魏略》에서 한단순邯鄲淳이 창힐의 충전을 잘 썼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창힐부터 주나라 선왕宣王 때까지는 모두 창힐의 서체였다. 선왕이 그 공을 기려 사주史籀가 대전大篆을 지어 약간 더하여 고쳤으니, 이것이 곧 소전小篆의 전신이다. 허신許愼이 《설문해자》를 지으며 소전을 근본으로 삼았고, 그가 ‘신나라 왕망 때에 고문으로 고찰했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사路史》후기後紀 卷三十二
竊嘗考之,倉頡之號,曰史皇,又曰倉帝。河圖說徵云:倉帝起,天雨粟,青雲扶日。語亦見之洛書說河,而鴻烈解言史皇生而能書。是則倉帝、史皇,非人臣之目明矣。後世徒見其有史皇之名,因謂為史官爾。史豈今之所謂史乎哉… 粤復訂之,春秋河圖見於經,然士考質詩書,以其所見推其所不見,則自無懷而上可得而論矣。倉帝、史皇,豈得云人臣之號哉。
내가 일찍이 상고해보니, 창힐의 칭호는 사황史皇이라 하고, 또한 창제倉帝라고도 한다. 《하도설징河圖說徵》에서는 “창제倉帝가 일어나자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푸른 구름이 해를 감쌌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또한 《낙서설하洛書說河》에서도 보이며, 《회남자鴻烈解》에서는 사황은 태어나면서부터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창제倉帝와 사황史皇은 신하의 명칭이 아님이 분명하다. 후세 사람들은 단지 그에게 사황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사관史官이라고 일컬었을 뿐이다. 사史가 어찌 지금의 이른바 사史이겠는가… 다시 살펴보건대, 《춘추하도》는 경서에서 보이며, 선비가 《시경》과 《서경》을 상고하고 질문하여, 보이는 바로써 보이지 않는 바를 추론한다면, 무懷씨 이전의 일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창제倉帝와 사황史皇이 어찌 신하의 칭호라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옛 기록들의 교차 증언
《노사》의 기록은 결코 단독 증언이 아니다. 아래의 수많은 옛 기록들은 ‘창힐’이 곧 ‘창제’이며, ‘창제倉帝’가 곧 ‘창제蒼帝’임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상세 내용은 하단의 [부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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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결론: 사건의 재구성
원본 기록들은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창힐[倉頡/蒼頡]은 단순한 사관이나 성인이 아니라, 제왕帝王의 지위를 가진 ‘창제倉帝’로 불렸다. 또한 이 ‘창제倉帝’는 동방과 봄, 즉 ‘시작’을 관장하는 최고신을 가리키는 칭호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제蒼帝’와 동일한 신격임이 명확히 증명된다.
따라서 네 가지 명칭[倉頡, 蒼頡, 倉帝, 蒼帝]은 모두 문자를 창제한 태초의 동방 제왕이라는 단일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창힐 코드’의 비밀은 풀렸다. 그는 서기가 아니라, 군주였다.
[부록] 핵심 증거 자료 목록
증거 1: 倉頡과 蒼頡은 동일 인물이다.
청나라 황실에서 편찬한 서화보에서 ‘倉’과 ‘蒼’이 동일하게 쓰임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어정패문재서화보御定佩文齋書畫譜》卷二十二目 錄
倉頡 〈倉一作蒼〉
창힐倉頡. 〈창倉은 창蒼으로도 쓴다.〉
명말청초의 학자 마숙馬驌이 여러 사료를 인용하며 두 표기를 동일 인물에게 사용하고 있다.
《역사繹史》卷五
《論衡》:倉頡四目,為黃帝史。《淮南子》:蒼頡作書,而天雨粟,鬼夜哭。
《논형》: 창힐倉頡은 눈이 넷이고 황제의 사관이었다. 《회남자》: 창힐蒼頡이 글을 짓자 하늘에서 곡식이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울었다.
증거 2: 倉頡蒼頡은 帝[제왕]이며, 그 칭호는 倉帝이다.
청나라 공식 편찬물에서 ‘창제’의 이름이 ‘힐’이라고 직접적으로 기록하여, ‘倉帝 = 倉頡’임을 확증한다.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직방전職方典 卷一百四十二
仓帝陵,在县西三十五里吴楼村,仓帝名颉。
창제릉은 현 서쪽 35리 오루촌에 있으며, 창제의 이름은 힐이다。
‘용안龍顏’은 오직 황제의 얼굴을 묘사하는 고유한 표현으로, 창힐을 제왕과 동일시했음을 보여준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역사繹史》 卷五에서 재인용
핵심 문구: 倉帝史皇氏名頡,姓侯岡,龍顏侈哆,四目靈光。
창제사황씨는 이름이 힐이고 성은 후강이며, 용의 얼굴에 큰 입, 네 개의 신령한 눈을 가졌다.
공식 지방지에서 ‘창힐의 무덤’이 곧 ‘창제의 무덤’이라는 지역의 전승을 기록하여, ‘倉頡=倉帝’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증명한다.
《강희하남통지康熙河南通志》 제34권 능묘陵墓
倉頡墓,在南樂縣西三十五里吳村。世傳倉帝塚云。
창힐묘는 남락현 서쪽 35리 오촌吳村에 있다. 세상에서는 창제倉帝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창제릉이 있는 마을의 이름 자체가 ‘창제촌’이라고 불렸음을 기록한 것은, ‘창제’가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卷四十九
又東北為倉帝村,即吳樓村也,有倉帝冢。
또한 동북쪽에는 창제촌倉帝村이 있으니, 곧 오루촌吳樓村이다. 이곳에 창제倉帝의 무덤이 있다.
문자 창제 시의 유명한 ‘천우속天雨粟’ 고사의 주체를 ‘倉頡’이 아닌 ‘倉帝’로 명시하였다.
《낙서雒書》. 《어정연감류함御定淵鑑類函》 卷三百九十五 등에서 재인용
說禾曰:倉帝起,天雨粟,青雲扶日。
[낙서의] 설화 편에서 말하기를: 창제倉帝가 일어나자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푸른 구름이 해를 감쌌다.
창힐을 가리키는 ‘창제’에게 동방상제의 이름인 ‘영위앙’을 부여했다.
《어정비자유편御定駢字類編》卷九十六
《春秋文耀勾》曰:倉帝其名靈威仰…
《춘추문요구》에서 말하기를: 창제倉帝의 그 이름은 영위앙이다…
지방지에 있는 창힐묘의 연혁을 설명하며 《노사》의 ‘창제’ 기록을 직접 인용하여 두 존재를 동일시하고 있다.
《산동통지山東通志》卷三十二
古倉頡墓,在縣西門外。《路史》〈禪通紀〉:史皇氏倉帝,居陽武,葬利鄉,即此。
옛 창힐의 묘는 현의 서문 밖에 있다. 《노사》〈선통기〉에 이르기를, 사황씨 창제는 양무에 살다가 이향에 묻혔으니, 바로 이곳이다.
증거 3: 倉帝와 蒼帝는 동일한 신격神格을 가리킨다.
오방五方의 최고신을 나열하며, 일반적으로 ‘蒼帝’로 알려진 동방의 제왕을 ‘倉帝’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두 칭호가 동일한 존재를 가리킴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모시주소毛詩注疏》卷四
《春秋文耀勾》曰:倉帝其名靈威仰,赤帝其名赤熛怒,黃帝其名含樞紐,白帝其名白招拒,黑帝其名汁光紀,是也。
《춘추문요구》에서 말하기를, 창제倉帝의 그 이름은 영위앙이고, 적제의 그 이름은 적표노이며, 황제의 그 이름은 함추뉴이고, 백제의 그 이름은 백초거이며, 흑제의 그 이름은 즙광기이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례인 입춘立春 제사에서, 동쪽을 상징하는 제사의 대상을 명백히 ‘蒼帝’가 아닌 ‘倉帝’라고 기록했다.
《예기주소禮記注疏》卷十四
迎春祭倉帝靈威仰於東郊之兆也。
봄을 맞이하며 동쪽 교외의 제단에서 창제倉帝 영위앙에게 제사를 지낸다.
명나라 국가 편찬물에서도 오제의 목록을 제시하며 동방의 신을 ‘倉帝’로 기록하여, ‘倉帝’가 ‘蒼帝’와 동일한 신격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영락대전永樂大典》卷五四五三
五帝自有名。即倉帝靈符,赤帝文祖,白帝顯紀,黑帝玄矩,黃帝神斗是也。
오제는 스스로 이름이 있으니, 곧 창제倉帝 영부, 적제 문조, 백제 현기, 흑제 현구, 황제 신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