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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은 ‘공화’라는 한자말의 기원에 대한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지난번 에피소드에서는 사마천 선생께서 공백화의 존재를 숨기고 굳이 있지도 않았던 소공과 주공, 두 번의 공화 행정을 조작해 내고, 이를 통해서 중국의 상고사를 왜곡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첫 번째가 궁형에 대한 사적 보복입니다. 사마천 선생께서 한무제의 오해로 인해서 정말 치욕스러운 궁형이라는 엄중한 형벌에 처해지고 이에 대한 원한으로 사기라는 책을 통해서 사적인 보복을 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동했을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 춘추대의와 춘추필법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마천 선생께서 공자께서 쓰신 춘추에 나오는 춘추대의와 춘추필법을 이어받고, 이를 바탕으로 사기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했을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마지막으로 사마천 선생께서 과거의 여러 가지 역사자료를 총 취합해서 중국의 역사 기년을 총정리했습니다. 역사기년의 시작점인 역사기원이 서기전 841년. 즉, 공화원년으로 특정 되었고 마침 이때가 공백화라 분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주나라 여왕을 몰아내고 섭정, 또는 대행을 했다는 춘추필법에 따르면 정말 낯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이런 역사를 차마 사기에 기술하지 못하고 그래서 있지도 않았던 소공과 주공 두 분께서 힘을 합해서 주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소위 공화 행정을 조작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을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역사기년과 역사기원에 대해서 살펴보죠. 위키백과 중문판을 보면, 공화원년이라는 표제 아래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공화원년. 즉, 서력기원전 841년, 음력 경신년은 중국 역사상 확실한 기년의 시작이다. 유추해서 말씀드리면 역사상 확실한 기년을 역사기년이라고 하죠. 그리고 역사기원은 역사상 확실한 기년의 시작점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마천 선생께서 쓰신 사기에는 여러 가지 표가 수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삼대세표, 그리고 두 번째가 십이제후년표입니다.

삼대세표에서는 우리들이 삼황오제라고 할 때 오제, 그리고 그 이후 하상주 3대의 계보와 그 당시 발생했던 주요한 이벤트를 수록하고 있는데, 삼대세표에서는 연도가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순서대로 나열은 했지만, 언제 그 이벤트들이 일어났는지 특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십이제후년표부터는 기원전 841년 주나라 공화원년부터 1년 단위로 연도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확실한 역사기년을 수록했고, 그 출발점인 역사기원이 공화원년, – 841년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앞서 에피소드 11편에서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만, 하필이면 이때 주나라 여왕이 폭정을 했고 공백화라는 분이 백성들을 선동해서 소위 말하는 국인폭동을 일으켰고, 주나라 여왕은 체라는 지방으로 도망가죠. 자료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대행 또는 섭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 흐름을 보면 요새 기준으로 공백화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두고 사마천 선생께서는 아마 많은 고민을 하셨겠죠. 중국 역사가 유구하다고 하지만 삼황과 오제, 하나라 상나라의 역사가 어느 정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연도를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미비하고, 실제 자신의 입장에서 봐도 제대로 된 중국 역사가 기원전 841년부터 시작되는데 사마천 선생은 완유로서, 정말 존경하고 숭상해야 할 주나라 왕실이 쿠데타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작은 제후국의 백작이었던 공백화라는 사람이 정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춘추필법에서 핵심 가치관인 존화양이: 주나라 왕을 존숭하고, 제후나 오랑캐를 낮추어야 한다는 가치판단 잣대로 보면 도저히 자기 손으로 기록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역사죠.

지난 에피소드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위국휘치, 주나라를 위해서 치욕스러운 부분을 숨기고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의 역사기원입니다. 도저히 숨기고 생략하고 넘어갈 수는 없죠. 아마 그래서 있지도 않은 가상의 이야기를 조작해 냈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 조작도 후손들 또는 유학자들이 봐서 아주 그럴듯한 그림이면 금상첨화죠.

그래서 결국 소공과 주공이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두 분의 재상이 계셨는데 이분들이 서로 힘을 모아서 여왕이 없는 사이에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리고 여왕이 죽자 아들인 선왕에게 대권을 물려주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수록하면서 공화라는 새로운 한자말을 창조해낸 것으로 짐작을 해도 상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사마천 선생께서 역사를 왜곡한 이유 중 첫 번째, 궁형에 대한 사적인 보복 심리가 작동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무제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로부터 오해를 사고 아주 즉흥적인 판단에 의해서 엄중한 궁형이란 형벌을 당하고 나서 군주제의 폐해에 대해서 절감했을 테고, 그래서 군주가 없는 상태에서 현자, 현인들이 서로 힘을 모아 국가를 운영해가는 시스템을 마음 한 켠에서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래서 소공과 주공이 함께 힘을 모아서 나라를 다스려가는 공화 행정이라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보면 꾸며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마천 사기 편지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다섯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본기는 왕들의 연대기, 그러니까 삼황오제의 오제로부터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당시인 한나라 무제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표, 여기에서는 제왕들과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한 연표를 담고 있습니다.

서, 역대의 정책과 제도 그리고 문물의 발달사와 미래 전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예법과 음악, 율법, 역법, 천관, 봉선(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 하거(황하를 다스리는 치수사업), 평준(경제)에 관한 이야기죠. 이렇게 총 여덟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제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열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에 대해 다루죠.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서민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표에서는 열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삼대세표, 두 번째가 십이제후년표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삼대세표부터 보겠습니다. 제일 앞에 사마천 선생의 발문이 나와 있습니다.

태사공이 말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오제와 삼대의 사적 기록은 아주 오래되어서 자세히 알기 어렵다. 오제는 삼황오제라고 할 때 오제고, 삼대는 하상주, 하은주 삼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황의 자료는 물론이고 오제와 삼대의 자료도 제대로 없다는 이야기죠.

다음으로, 은나라 하상주 할 때 상의 수도가 은이니까 은나라라고 하죠. 은나라 이전 제후들의 자료는 구했지만 별도의 보첩으로 편집할 수가 없었고, 하상주의 마지막 주나라 이래로 와서야 다소 저술이 가능할 정도로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기존의 노나라 역사서를 근거로 해서 춘추라는 책을 연대별로 편찬했는데, 시작점이 노나라 은공의 즉위 원년으로부터 비롯되고, 사시(사계절)와 일월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상서를 편찬할 때는 오히려 연월을 간략하게 만들었다. 어떤 부분은 연월이 있지만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서 기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의문스러운 부분은 의문을 남긴 채 전했는데, 이 또한 참으로 신중히 했다.

그러니까 공자 선생께서 춘추를 썼을 때는 춘추시대, 노나라 당대의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충분히 기초자료가 많았는데, 공자 선생께서 상서를 쓸 때는 요순시대부터 하상주의 역사를 편찬하다 보니 연월이 당연히 제대로 기록될 수 없었겠죠. 그래서 내가 첩기라는 책을 읽어 보니, 다행스럽게도 황제 이래의 모든 연대가 다 기록돼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역대  보첩과 오덕에 따라서 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 내용들을 앞뒤로 맞춰보니 고문의 기록들이 모두 서로 일치하지 않고,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공자 선생께서 상서를 지으실 때, 연월의 차례를 논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유 없이 그랬겠는가, 당연히 기초 자료가 없으니까 연월의 차례를 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천 선생이 오제계첩과 상서에 기록된 황제 이래 공화까지의 기록을 모아서 세표를 지었다. 요약하면, 한마디로 기초자료가 없다. 그렇지만 여기저기에 단편적으로 자료가 있으니까 그걸 총 취합해서 순서대로 오제, 그리고 삼대의 기록을 정리했는데, 불행하게도 연월을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가 나오죠. 표를 보면, 제일 앞에 ‘황제’가 보입니다. 그다음 ‘제전욱’, ‘제고’, ‘제요’, ‘제순’. 이렇게 황제, 전욱, 곡, 요, 순, 다섯 분이 오제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다음을 보시면 ‘제우’입니다. 하나라 우왕이죠. ‘제계’, ‘제태강’ 쭉 내려오는데요. 이분들은 하나라의 군주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앞의 오제는 한 사람. 황제, 전욱, 곡, 요, 순, 한 사람의 기록이고 제우부터는 하나라, 한 나라의 군주 계보가 적혀 있는 것이죠. 그다음부터 열 일곱분의 하나라 군주가 언급이 됩니다. ‘우로부터 걸까지 십칠세가 이어졌다.’

그다음 ‘은탕왕’ 은나라 상나라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스물 아홉 분의 군주들 이름이 열거됩니다. 마지막을 보면 ‘탕왕으로부터 주왕까지 29대에 걸쳐서 내려 왔다.’

그다음 하상주의 마지막 주나라가 시작되죠.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했다고 하면서 제일 위에는 주나라 군주의 연표를 열거하고 그 아래에는 11개 제후국들의 연표를 열거합니다. 노, 재, 진, 진, 초, 송, 위, 진, 체, 조, 연 11개 제후국이죠. 우리 발음으로 같은 ‘진’ 자가 세 개나 있습니다.

주나라 포함 12개 나라의 연표가 쭉 계속되는데요. 앞뒤 순서는 열거되어 있지만, 그때가 어느 연도인지 구체적으로 해당 연도 기년을 특정하지 못하죠. 상호관계와 순서만 나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여왕호(주나라 여왕)까지 해서 삼대세표가 마무리되죠.

요컨대, 오제로부터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여왕까지 왕들의 순서는 열거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연도는 잘 모르겠다는 거죠.

사기 원문에는 표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서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표로 그리면 이런 모습이죠. 한마디로 기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이제후년표입니다.

태사공이 말했다. 자기 스스로 이야기했다는 것이죠. 유가는 춘추의 문장을 가려서 대의를 취하고, 유세가는 그 어투를 응용하지만 그 본말을 종합하는 데 힘쓰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당시 나왔던 제자백가들의 책은 일종의 정치공학 + 철학에 관한 책이니까 본말을 종합하는 데 역사적인 시작과 과정과 끝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겠죠.

역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연월만을 채용하고, 음양가는 독특한 운명만 중시하고, 보첩을 연마하는 학자들은 그 세계와 시호의 기록만을 본다. 그래서 그들의 문장은 모두 아주 단순하고, 춘추의 여러가지 요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춘추처럼 편년체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마천 선생이 십이제후국의 보첩을 편찬했는데, 시작이 공화원년부터죠. 공화부터 시작해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연표는 춘추와 국어를 다듬는 학자들이 탐구하는 성쇠의 대의를 볼 수 있도록 편집해서 지었고, 학문을 이루거나 고문을 다듬는 자를 위해서 요점을 정리했다. 사마천 선생께서 자신이 힘들여서 십이제후년표를 만들었으니까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고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참고해 줬으면 좋겠다는 취지입니다.

십이제후년표라고 되어있죠. 다음 장을 보시면, 표가 시작됩니다. 제일 위에 주나라가 있고, 그 아래 11개의 제후국들 연표가 실려있죠. 왼편은 주석들입니다. 주석을 빼고 보면, 이런 모습으로 되죠.

주나라, 경신, 공화, 원년.

그러니까 공화원년이 경신년이고, 경신년은 육십갑자 기준으로 보면, 기원전 841년에 해당하는 것이죠. 이때부터 특정된 연도가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삼대세표와 연결해서 보면 주나라의 경우 삼대세표에서는 1대부터 10대까지 왕들의 순서만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공화 시대 때부터 기원전 841년이 시작되는 것이죠.

주나라 공화원년 왼편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화원년. 여왕의 아들은 소공궁에 머물렀고 나중에 선왕이 되었다. 왕이 어려서 대신들이 공화 행정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도 공화 행정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만, 이 연표에서도 압축적으로 내용이 요약되어 있죠. 계속해서 연표가 연도별로 이어집니다. 내용이 아주 긴데, 이것을 한 표로 만들어보면 이런 모습이 됩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삼대세표에서는 기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죠. 반면, 십이제후년표부터는 기년이 기록되는데, 그 출발점이 공화원년, 기원전 841년이라는 것이죠.

여기까지 공화라는 한자말의 어원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는데, 연이어서 호기심이 생기다 보니까 내용이 조금 방대해졌습니다. 조만간 기회가 되면 공화, 엄밀히 말씀드려서 리퍼블릭의 본래 의미,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 던지고 있는 시사점들에 대해서 따로 언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시청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