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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컨센서스 8차 콜로키엄]

  • 주제: 권력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 無爲의 진화론적 해석
  • 발제자: 최종덕 교수 (상지대 교약과/철학전공)
  • 일시: 2007년 1월 8일 (월요일) 오후 5시
  • 장소: EAI 회의실
  • 참석자: 김병국 손동현 윤순봉 이정우
  • 정리: 송문희(E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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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권력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 無爲의 진화론적 해석

[발제] 권력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 無爲의 진화론적 해석

[토론]


[요약] 권력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 無爲의 진화론적 해석

도가의 무위(無爲)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는 대체적으로 무위자연과 소요 및 관조의 통로에 치우쳐 있다. 70 년대 이후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그 대안적 사유로서 자연친화적인 도가철학이 부각되는 과정에서 노장철학이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버린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회남자의 무위개념을 분석해 본 결과 무위사상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위개념 사이의 대척점은 결국 신비적 현현함의 최고 경지로서 이해되는 한 측면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왕의 제왕술이나 직분과 명분을 고착시킴으로써 계급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현실적 의도로 이해되는 또 다른 측면을 갖는 스펙트럼의 양단을 보여 준다. 좀더 철학적으로는 개인의 철저한 자유를 보장하는 개체지향성의 측면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담지해야 할 도덕율의 정착을 위한 사회지향성의 측면이라는 스펙트럼의 양단으로 말할 수도 있다. 회남자의 무위개념의 핵심은 무위자연 없는 현실참여는 권력과 맹목의 유혹만 낳고, 현실참여 없는 무위자연은 공허하며 사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청정무위의 틀을 유지하지만 공허한 무위가 아니라 실용적이며 실질적인 내용을 담은 道와 德이 핵심이다.

이처럼 다양한 무위(無爲)의 층차에 진화심리학적 해석을 도입해 보면 무위사상이 자연철학적 근거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회남자와 진화론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 무위의 개념 안에는 이미 현실참여의 통로가 내포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청정의 내재적 무위지향의 마음과 외재적 현실참여지향의 마음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이중적, 병존적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자연의 지향성과 현실참여의 지향성은 충돌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의 지향성은 독립적으로 진화한 성향적 표현형이기 때문이다. 흔히 유가적 전통과 도가적 전통을 크게 이 두 갈래의 지향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이 두 갈래는 종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마음속에 따로 혼재하며,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중적인 지향일 뿐이다

<키워드>

무위(無爲)의 층차, 유안의 회남자, 진화심리학적 자연주의, 무위의 진화론적 해석, 제왕학으로서의 무위, 청정자연으로서의 무위, 본성론(本性論), 인간의 이중성(무위자연과 현실참여),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생물학적 이타성(利他性), 유아적 진화


[발제] 권력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 無爲의 진화론적 해석

1. 동양과 서양의 자연 개념의 차이

서구 고대 사유 구조에서 자연의 의미는 세계를 바라보는 초자연적 시선에서 자연적 시선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에서 자연이며, 신화적 대상에서 인간의 언어 앞에 내놓여진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며, 나아가 신과 물질이 아직은 덜 분화되어 정령화된 힐로조이즘(hylozoism)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 반면에 중국 고대 사유구조에서 말하는 자연은 스스로(so self)그리고 저절로(by self) 그러함이며 성(性)의 원천으로서의 자연이며 기(氣)의 미분화 상태이거나 혹은 만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서양의 자연주의는 세계의 운행방식을 물질적 자연의 기초단위로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이다. 반면 동양의 자연주의는 주체와 객체가 그 연원과 작동방식에서 같으며, 인간의 운행방식과 자연의 운행방식이 동형적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이다. 서양에서는 물질과 그 물질을 지배하는 존재원리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지지만, 동양에서는 물질과 물질의 작동원리가 일체화된 기(氣)의 은유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는 서양의 고대 자연철학에서 대상세계에 대한 지식론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양에서는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본성과 수양을 통한 변화가능성 사이의 관계를 타진하는 인성론으로 점진하게 되었다. 문제는 근래의 철학사 텍스트들이 유가와 도가 사이의 간극(間隙)을 분명히 분리해 놓음으로써 유가와 도가의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유가의 본성론(本性論), 도가의 무위론(無爲論)이라는 스펙트럼의 양단설정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무위사상이 과연 청정자연과 소요의 성격만 가진 것이었을까? 과거 춘추전국시대에 무위철학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면 본성론과 무위론은 서로 연결되는 스펙트럼 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무위를 이해하는 층(層)차

선진시대 중국철학 중에서 집단과 개인의 응대를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관계로 인식하는 도가의 흐름이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도가철학을 소요와 무위자연 혹은 청정자연의 의미로만 국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가의 이해 폭을 현실초탈의 소요와 인위를 적극 부정하는 무위자연에만 국한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노자의 무위개념을 지나치게 신비화시킨 귀결일 뿐이다. 문제는 무위의 철학이 무엇이냐 하는데 있다. 대체로 일반인들이 느끼는 노자에 대한 이미지는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되어가는 무위자연이며 혹은 욕망의 세속을 초월한 초탈적인 모습들, 나아가 작은 것이 좋다는 소국과민의 모습들이다. 이처럼 무위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는 무위자연과 소요 및 관조의 통로에 치우쳐 있다. 70 년대 이후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그 대안으로서 자연친화적 사유인 도가철학이 부각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장철학이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왔다.

그러나 무위사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무위의 대척적 이해의 구조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연속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무위개념 사이의 대척점은 결국 신비적 현현함의 최고 경지로서 이해되는 한 측면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왕의 제왕술이나 직분과 명분을 고착시킴으로서 계급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현실적 의도로 이해되는 또 다른 측면을 갖는 스펙트럼의 양단을 보여 준다. 좀더 철학적으로는 개인의 철저한 자유를 보장하는 개체지향성의 측면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담지해야 할 도덕율의 정착을 위한 사회지향성의 측면이라는 스펙트럼의 양단으로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대척적 상황이란 실제로는 그 사이를 잇는 무수한 연속적 상황들 중에서 양쪽의 두 가지 단면일 뿐이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대척적 상황 자체가 인간의 본질적인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첫째 통로로서 무위와 유위를 연속적으로 간주하는 몇몇 구조는 다음과 같이 재현될 수 있다. 무위를 대유위(大有爲)로 보는 입장으로서 무위와 유위는 연속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유위를 집단 유지를 위한 인위적 유위와 자연적인 개체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유위로 구분함으로써, 유위와 무위 사이에서 새로운 연결구조를 추가한다. 둘째 통로로서 대척적 상황을 굳이 연속적으로 연결하지 않으면서 모순처럼 보이는 두 상황이 한 인간 안에서 항상 이중적으로 붙어 다니는 모습자체가 인간본연의 성질이라는 점이다. 욕망(慾)과 절제(敬), 자유와 도덕, 본능적 선천과 양육적 후천, 권력지향과 무정부주의적 심미주의, 성(聖)과 속(俗), 성(性)과 정(情), 문명적 당위와 자연적 사실 등의 이중적 배위구조 안에서 인간의 인성이 해명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전개하기 위하여 백가 중 하나로서 유가나 도가보다 시대가 늦은 유안의 ‘회남자’를 도입해본다.

3. ‘회남자’의 무위와 적응진화론을 도입한 무위의 재해석

회남자는 한대 초기 회남지방의 제후였던 유안(劉安, BC 179-122)과 그의 초청빈객들이 공동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남자의 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무위자연 없는 현실참여는 권력과 맹목의 유혹만 낳고, 현실참여 없는 무위자연은 공허하며 사치일 뿐이다. 청정무위의 틀을 유지하지만 공허한 무위가 아니라 실용적이며 실질적인 내용을 담은 도(道)와 덕(德)이 핵심이다. 그리고 제왕을 위한 주도술과 백성을 위한 실용지식을 동시에 전달하고자 한다. 회남자에서 이 내용은 다음의 두 갈래를 보여준다. 강한 법률과 형명정치의 부당함을 느끼면서 그 반작용으로 청정무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제왕의 도를 지향하는 주도술의 무위를 고수한다. 시황제의 독단정치에 대한 반작용과 거부감이 무위자연의 도학으로 발전했지만, 제왕의 도와 무위를 연결하는 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회남자는 노장자의 무위사상이 자칫 백성으로 하여금 허무한 몽매로 빠지게 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회남자는 도를 항시 강조하지만 도의 내용을 채우는 현실적인 나침반을 제시하고자 했다. 결국 회남자의 철학적 요지는 무위자연과 현실참여가 한 인간에게서 상보적으로 혹은 종합적으로 발현되는 경우, 그러한 인간형이 아마도 최상의 인간모형이라는 명제를 시사한다.

4. 인간본성의 영원한 이중성

무위자연의 지향성과 현실참여의 지향성은 상보적(相補的)이기보다는 이중적(二重的)이다. 한 인간 안에서 무위자연과 현실참여의 종합과 상보라는 뜻은 매우 이상적인 인간형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상보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이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생물학적 인간의 보편적인 표현형이다. 무위의 개념이 기존의 편견대로 소요적 도가의 장르에서 이해되거나 아니면 유가적인 현실참여의 장르에서 이해되느냐의 문제는 결국 큰 테두리의 철학학파의 분류논쟁을 떠나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엿보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무위자연의 지향과 현실참여의 지향은 인간에게서 영원한 이중성의 숙제로 남는다. 이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최근의 진화심리학의 가장 강력한 방법론적 도구는 다윈 진화론의 적응주의(adaptationism)와 선택이론인데 그 중에서도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보다는 성(性)선택이론(sexual selection)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 그런데 현실참여 지향성은 생물학적 성(性)선택의 적응진화의 뿌리를 갖는다. 동시에 인간의 무위자연 지향성 역시 혈연선택이론에서 본 우회적인 ‘생물학적 이타성(利他性)’이라는 적응진화의 뿌리를 갖는다. 특히 주도술로서의 무위와 양생으로서의 무위인 경우,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현실참여 혹은 세간의 물적 조건을 포기함에 따르는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한다. 이런 경우 현재의 무위적 표현은 임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유위(有爲)를 향한 무위(無爲)활동이 된다. 이런 상황은 진화론에서 흔히 논쟁하는 우회적 이타주의의 한 사례이며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로서 인간본성을 파악하는 주요한 이론적 도구이다. 결국 무위자연 지향성과 현실참여 지향성은 인간에게서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한 인간본성의 생물학적 표현형이다.

무위자연 지향성은 더 높은 사회적 성과를 산출하기 위한 우회적 방법의 누적적 적응 과정에서 진화한 마음의 사회화일 뿐이다. 마음의 사회화 과정은 일종의 문화적 진화이다. 마음의 사회화로서 무위자연 지향성을 볼 경우, 무위자연은 자연적 마음이고, 현실참여는 인위적 문화라는 대립적 배위(配位)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무위자연 지향성이나 현실참여 지향성 모두 인간본연의 본성적 행위활동의 갈래일 뿐이다. 나의 마음 한가운데서 무위자연의 지향성과 현실참여의 지향성은 충돌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의 지향성은 독립적으로 진화한 성향적 표현형이기 때문이다. 흔히 유가적 전통과 도가적 전통을 크게 이 두 갈래의 지향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두 갈래는 종합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나아가 중용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마음속에 따로 혼재하며,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중적인 지향일 뿐이다.

5. 이타주의(利他主義)의 진화론적 설명

현실참여 지향은 기본적으로 집단보존 기능에 얹혀 있다. ‘얹혀 있다’는 뜻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그 기능을 수행할 경우 더 많은 집단이익이 산출되는 그런 상황을 묘사한다. 개체보존보다 집단보존기능이 우세하며 이를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감수할 경우 이를 이타적이라고 말한다. 기존 진화론 논쟁에서 ‘이타성’에 대한 정의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집단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이타성이며, 다른 하나는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본성자체가 이타적이어서, 그런 본성적 이타행위를 할 경우 자연적으로 개인의 보존과 자손증식이 성공적일 경우로서의 이타성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이타성은 집단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 표현된다. 여기서 진정한 이타성과 우회적 이타성이 구분된다. 진화심리학은 우회적 이타성을 논거한다. 우회적 이타성이란 혈연집단에 대하여 개인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들을 이타적으로 대하는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서 혈연집단전체의 생식적 이득이 산출되는 경우이다. 진화심리학은 문화적 소산물 역시 사회화의 결과이며 따라서 적응진화의 소산물로 간주한다. 현실참여 지향성이나 청정자연 지향의 무위사상 역시 사회화의 적응적 진화의 결과인 것이다.

6. 유아적 진화의 필요성(Man에서 Baby로!)

개의 신체적 다양성을 살펴보면 진화의 방향이 성체에서 유아로 거꾸로 진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를 ‘유아적 진화’의 한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암컷중심사회로서 협동적 권력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보노보 사회는 1인 권력사회이면서 투쟁적인 침팬지 사회와 구분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보노보 성체는 침팬지 새끼와 모양이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유추할 수 있는가? 유아는 온순하고, 비폭력적이며, 사회성이 발달해 있고 표현력이 다양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보노보 사회와 침팬지사회의 차이는 무위의 재해석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무위사상도 침팬지사회에 존재하는 제왕술로서의 권력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와 대비되는 형태인 보노보 방식인 소요와 청정자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

토론주제

  • 무위사상의 해석: 무위(無爲)의 이중성(二重性)
  • 무위사상(無爲思想)과 진화론(進化論)의 연결
  • ‘유아적 진화’의 필요성과 가능성?

1. 무위사상의 해석: 무위(無爲)의 이중성(二重性)

최종덕: 맹자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은 자연주의적인 도덕적 근거를 갖고 있다.[1] 회남자의 무위사상 또한 독립적인 자연주의적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맹자의 본성론이나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가 서로 단절된 스펙트럼상의 양 극단에 존재한다는 관념은 극복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무위에도 현실참여지향성이라는 유위(有爲)의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청정자연지향과 현실참여지향이라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 중 어느 한 면만 치우쳐 보려는 편향적인 시각은 문제가 있다. 무위사상을 해석하는데 있어 속세를 떠난 소요와 청정자연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정우: 회남자의 무위는 속세를 떠나는 청정자연의 무위와 권력에 대한 지향과 고도의 통치전략이라는 현실참여의 유위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측면은 오랜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에서 서로 독립적인 자연주의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을 맹목적으로 합치려는 시도보다는 이런 이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병국: 무위사상의 층차를 다차원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 이를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청정자연, 은둔의 무위와 제왕술, 처세술로서의 무위는 어떻게 연결되는 개념인가? 본성론과 환경론의 대립구조 속에서 무위사상은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개념이나 사상 같은 것도 흡사 생물처럼 진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인가?

손동현: 인간의 경험성과 선험적 초월성 사이에는 늘 갈등이 존재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현상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이 영원히 이중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 자신도 자연적, 동물적 실체를 갖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자연주의적 사실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초자연주의적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려 하지 않고 그저 이중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남자의 무위(無爲)라는 것도 결국 청정자연의 의미가 아닌 양생(養生)의 극한적 표출일 수 있다. 따라서 경험성(經驗性)과 선험성(先驗性)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인간의 이중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2. 무위사상(無爲思想)과 진화론(進化論)의 연결

최종덕: 어떤 개념이나 사상을 현실세계에 적용시키려 할 때 형이상학적 도덕의 원천이 완전히 경험화 되어버릴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진화윤리학은 윤리학 그 자체보다는 현실문제 적용을 더 중시함으로써 선험적인 것을 모두 경험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유가의 형이상학적 선험적 도덕규범이란 것도 실제로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사상이었다. 무위사상도 이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위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를 제왕학으로 보든 청정자연으로 보든 결국은 진화의 과정에서 ‘자기존속’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형이상학적 선험적 도덕규범이나 무위사상이나 모두 당위적 측면과 실용적 측면 사이에서의 인간진화의 한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무위사상이란 것도 결국 ‘생물학적 우회적 이타성’이라는 진화의 소산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연주의와 인간 본성의 이중성이란 것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처럼 초자연적이고 선험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이다.

이정우: ‘무위’의 개념은 ‘인위적으로 하지 말라’는 의미, ‘스스로 그렇다’는 의미에서 자연과 같은 의미이다. 즉, 무위는 곧 자연(自然)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위의 개념과 자연주의의 진화는 차원이 다른 것이 아닌가? 무위와 진화론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자연주의에서 말하는 ‘진화했다’ 라는 개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이 만약 ‘특정한 환경에서 살아남았다’는 의미라면 ‘진화’라는 말은 단순한 ‘사실’만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화는 단순히 환경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이에 맞서는 생명체간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나오는 산물로 볼 수 있다. 정치, 사회나 인간이 만든 제도, 사상이라는 것은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현대 문명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작업에 있어 사회생물학적, 진화인류학적 분석은 어떤 함의를 줄 수 있는가?

3. ‘유아적 진화’의 필요성과 가능성?

최종덕: 인류가 갖고 있는 권력충돌의 위험성과 권력의 여러 부작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인류는 ‘유아성’을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아적 진화’를 통해 문화의 다양성이 가능해짐으로써 획일화를 추구하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파리대왕>을 보면 어른 이상의 잔인함을 보이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유아적 진화’에서 말하는 ‘유아’의 개념은 어떤 고정된 본질이나 실체를 전제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온순함, 비폭력성, 친밀함 등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유아적 진화’로 간다는 것은 진화의 비가역성(非可逆性)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진화(evolution)는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은 갖고 있지 않지만 ‘퇴보(退步)’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유아적 진화’라는 것은 성체가 유아시절로 거꾸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새로 창출된 형태의 유아의 이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종족보존과 번식에 있어 권력집중보다 권력분산이 더 유리하거나 남성이 아닌 여성중심 체제가 더 유리하다면 진화는 그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족번식(reproduction)’이라는 과제가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진화의 방향에 있어서도 성체가 지닌 강함, 딱딱함, 폭력성 등의 특성보다 유순함, 부드러움, 협동성 등의 유아적 특성이 더 유리하다면 인류역사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김병국: 유아적 진화에서 말하는 유아의 시기는 언제인가? 유아가 평화적이고 온순하다고 전제하지만, 오히려 유아는 감정을 억제하기보다는 분출시키기가 쉽고 유아시기에도 폭력성과 경쟁은 엄연히 존재한다. 유아와 성체의 폭력성 중 유아의 폭력성의 정도가 더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는 검증된 자료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검증되지 않은 유아의 본성을 전제로 한 ‘유아적 진화’의 주장은 그 논거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오히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폭력성과 경쟁심이 극한으로 치닫지 않도록 이를 통제하고 순화시킬 수 있는 정치,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다양한 표현력을 갖는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유아’라는 생물학적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다원주의에 대한 설명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정치학에서도 다원주의적인(Pluralistic)제도가 경쟁력이 높다는 논의가 있고 경제학에서 볼 때 FTA도 획일화된 WTO를 넘어선 경제적 다원주의의 한 표현형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유아적 진화가 보다 평화로운 진화의 방향이라는 가설에 동의한다고 하여도 유아적 진화로의 역진화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이미 사회화된 인간이 유아적 심성으로 돌아가고 유아적 성격을 가진 인간들로 구성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유아적 진화의 과정에서 존재하는 각 나라별 시간차의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유아적 진화를 거친 국가가 성체단계에 머물러 있는(덜 진화된) 폭력적인 국가에게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말 위험성은 없을까?

이정우: 유아적 진화에서 ‘유아’는 신체적, 동물적 의미가 아닌 약함, 부드러움, 귀여움, 유연성, 비폭력성 등의 이미지를 뜻한다. 이것은 유아기로의 회귀라는 생물학적 진화는 실제 불가능하더라도 ‘유아기적 속성’을 의미하는 사회 트렌드의 일종으로서의 사회적 진화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 있어 유전학적 진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진화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윤순봉: 성체에서 유아로의 진화는 진화론에서 나오는 비가역성(非可逆性)을 거스르는 개념이 아닌가? 진화의 방향이 가역적일 수 있다는 것과 진화의 결과가 인류에게 적정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측면이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학적 진화의 논쟁구도에 있어 진화생물학은 왜 유독 ‘생존’의 문제에만 집중하는가? 이제 인류는 종족번식의 진화의 단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공진화(共進化), 초진화(超進化)의 개념에서도 나타나듯이 사람이 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환경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더불어 진화한다.

손동현: 인간의 삶의 질(質)을 단순히 생물학적 총량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적 삶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반드시 생물학적 생존이 기반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므로 ‘번식(reproduction)’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진화의 담론에 있어 개체(個體) 차원이 아닌 종(種)의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앞으로 몸과 단백질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가 아닌 실리콘에 기반한 포스트 휴먼과 같은 새로운 종(種)이 생겨난다면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인간의 문화적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생존적 기초는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

[1]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단서가 된다. 칠정(七情)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