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815,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Junker, 중소지주)의 아들로 출생
- 1836, 프로이센의 관리로 임용
- 1848, 베를린의 3월혁명(1848)[1] 때 혁명을 반대하고 보수당 창립에 가담
- 1851, 獨逸聯邦議會에 프로이센 대표로 임명
- 1859~1862, 러시아, 프랑스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약
- 1862,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 ‘철혈정책(鐵血政策)’ 발표
- 1871, 獨逸統一과 함께 獨逸帝國 초대 총리 역임(1871~1890)
- 1890, 2세 황제 즉위 후 총리 사임
시대적 배경
당시 독일은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된 채 주변 강대국(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입김으로 통일을 위한 노력이 억제당하고 있었음
프로이센은 독일 내에서는 최강국이었으나 내부 階層葛藤 등 國論 分裂에 빠진 상황
성장 과정
태생적 保守主義者, 王政主義者로 1948년 3월 혁명 시에 군주제를 사수하기 위해 30대의 나이로 反革命을 모의. 실패했으나 프로이센 왕실에 강한 인상을 각인
프랑스, 러시아 대사를 역임하면서 國際感覺과 국가간 外交原理를 파악, 향후 大정치가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 프로이센, 독일, 유럽을 넘어 세계적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을 터득
주요 업적
중세 이래 천년 간 분열되었던 독일을 통일
노동운동을 억제하면서 ‘社會保險’의 개념을 창안
후대에 미친 영향
프로이센 개혁의 결과로 소득세, 국민군, 사회보험, 대학의 정비 등 이후 근대국가 제도의 골격을 마련
리더십 특성
① 國益을 위해서라면 背反者라는 비난도 감수
중소지주(Junker) 출신으로 보수주의자이며 독실한 신교도
정통 관료 출신으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적 가톨릭 교도들에 대해 敵對感을 표시
그러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국 프로이센의 國益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보유
상황에 따라 자신의 노선을 바꾸었으며 “오늘의 적은 내일의 친구”라는 좌우명을 정치생활의 신조로 삼음
주변으로부터 背反者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國益을 최우선시하는 그의 원칙이 구현된 결과
당시 러시아의 속국이던 폴란드의 반란시 신속정확한 판단으로 외교력 발휘
폴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독일 내에서는 전제군주인 러시아 황제에 대한 반감과 폴란드 반군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沸騰
비스마르크는 반란의 성공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조기에 러시아 지지 발표. 러시아를 확실한 友軍으로 만듦으로써 훗날 독일 통일시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견제를 상쇄할 명분 확보
당시 독일국민은 독일영토 내에 폴란드 유민수용을 거부하는 등 실제 행동과 감정적 여론이 불일치. 비스마르크는 감정적 여론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실리적 외교노선을 채택
그는 낭만주의, 허세, 가식이 일체 없었으며 화려한 수사법이나 大義名分보다는 최종적인 成果로 국민에 호소한다는 자세를 견지
② 교착상태에 빠진 政府-議會 갈등 정면 돌파
프로이센은 당시 자유주의 성향의 의회가 軍部를 견제하기 위해 수십 년 간 정부의 군비예산 증대 요구를 거부
1815~1850년 간 인구는 크게 증가했으나(1,100만에서 1,800만), 군사력은 답보 상태 → 주변 국가와의 군비경쟁에서 낙후
당시 의회는 상공업 부르주아 출신이, 軍部는 중소지주 출신이 장악한 상황으로, 두 계층 간 갈등이 국가 의사결정의 교착상태를 초래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세력강화를 우려해 일체의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
비스마르크는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憲政鬪爭(constitutional struggle)’을 통해 국가 의사결정 과정을 혁신
정부-의회의 의견 대립으로 국가적 의사결정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정부가 최종결정 권한을 가진다고 유권해석. 의회 승인 없이 군비증강을 위한 增稅를 단행, 의회를 무력화
1862년 하원 연설에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국가의 문제들은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鐵)과 피(血), 곧 兵器와 兵力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 → ‘철혈정책(鐵血政策)’이란 말 유래
1862년부터 시작된 군비증강은 짧은 시간 내에 가장 효과적으로 군사력 강화로 연결
※ 정부-의회 교착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를 총리에 임명. 비스마르크의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당시 프러시아 국왕 빌헬름 1세는 그를 거북하게 여겼다고 함. 그러나 의회의 견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비스마르크를 선택
③ 초기 後裝式 小銃 ‘니들건’의 도입
니들건(needle gun)은 총 뒤에서 총알을 장전하는 후장총(後裝銃)으로, 당시 상용되던 전장총(前裝銃)에 비해 성능이 탁월
분당 5~8발 사격 가능하여 최대 3발 사격 가능한 전장총을 압도
특히 전장총은 1미터 길이의 막대기로 총구를 통해 정전하는 방식으로 서거나 앉아야 했으나, 후장총은 엎드린 자세로 장전하여 서 있는 적군을 조준 사격하는 것이 가능

비스마르크는 1862년부터 니들건을 도입하고 훈련을 개시하여 4년 뒤인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활용
1828년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Nikolaus von Dreyse)는 니들건의 대량생산을 프로이센 정부에 신청하지만 당시 의회는 이를 거절
니들건의 위력으로 프러시아는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서 大勝을 거두고 독일의 통일과 건국의 기반을 구축
전쟁 이후 전장총은 유럽 전선에서 급속하게 사라짐
[1]3월 혁명(三月革命, Mrzrevolution): 1848년 3월 베를린과 빈에서 일어났던 민중봉기와 그 외에 독일연방 여러 나라에서 있었던 정치적 혁명. 獨逸國民會議를 결성하고, ‘獨逸國憲法’을 개정했으나, 혁명세력 내부의 계층간 갈등으로 분열하여 10월에는 빈 봉기가 진압되고, 12월엔 국민의회가 해산됨에 따라 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