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산해경 #천독
顧銘學. 考釋《山海經》中有關古朝鮮的兩條史料. 社會科學戰線. 04[2002]169-177
顾铭学. 考释《山海经》中有关古朝鲜的两条史料. 社会科学战线. 04[2002]169-177.
인용회수 5 [2025.4.8. 현재]
考釋《山海經》中有關古朝鮮的兩條史料
《산해경》에 등장하는 고조선 관련 두 사료 고찰
고명학顧銘學
內容提要
《山海經》中, 多處談到上古朝鮮半島的事物和情況, 而明確標出“朝鮮”二字者卻只有兩條, 按袁珂先生1995年的《山海經校譯》本, 則為《海內東經》篇的“海北山南”條和《海內經》篇的“朝鮮天毒”條. 對於前者, 如果明確了“在列陽東”和“海北山南”的各自含意, 便可知曉古朝鮮[起碼是公元前四至二世紀]的基本位置, 從而否定了什麼“遼寧說”和“遷移說”. 對於後者, 主要是把“天毒”二字解釋明白. 研究者們對“天毒”二字其說不一, 有“衍文說”、“東屠說”、“沃沮說”、“帶方孤竹說”和“遼西孤竹說”等, 而筆者則主張其為“王居說”, 它是古朝鮮都城在從古朝鮮語轉化為漢語時的譯音, 即戰國時譯為“天毒”, 其後又譯為“險瀆”, 最後落實到《史記》朝鮮列傳一文中的“王險城”, 古時的王險城即今日朝鮮首都——平壤. 而如“天毒”不是郭璞所注之古代“天竺國”, 則《辭源》中的“天毒”條似亦難於成立.
초록
《산해경山海經》에는 상고시대 조선반도에 관한 사물과 상황이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으나, 그중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를 명확히 표기한 곳은 두 조항뿐이다. 원가袁珂 선생의 1995년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본에 따르면, 이는 각각 《해내동경海內東經》 편의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과 《해내경海內經》 편의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이다.
첫 번째 조항에 대해서는 “열양의 동쪽에 있다[在列陽東]”와 “바다 북쪽, 산 남쪽[海北山南]”이라는 표현의 각 의미를 명확히 한다면, 고대 조선[적어도 기원전 4세기에서 2세기]의 기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른바 “요녕설遼寧說”이나 “천이설遷移說” 등을 부정할 수 있다. 두 번째 조항에 대해서는, “천독天毒”이라는 두 글자를 명확히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연문설衍文說”, “동도설東屠說”, “옥저설沃沮說”, “대방고죽설帶方孤竹說”, “요서고죽설遼西孤竹說” 등 다양한 주장을 내놓았으나, 필자는 “왕거설王居說”을 지지한다. 이 설에 따르면 “천독”은 고조선의 도성이 고조선어에서 한어로 옮겨질 때의 음역어로, 전국시대에는 “천독天毒”으로 음역되었고, 이후에는 “험독險瀆”, 마지막으로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타나는 “왕험성王險城”으로 정착되었다. 고대의 왕험성은 오늘날 조선의 수도인 평양平壤이다. 그리고 만약 “천독”이 곽박郭璞이 주석한 고대의 “천축국天竺國”이 아니라면, 《사원辭源》에 수록된 “천독” 항목 역시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關鍵詞: 列陽 海北山南 滿潘汗 天毒 險瀆 王險城
키워드: 열양列陽, 해북산남海北山南, 만번한滿潘汗, 천독天毒, 험독險瀆, 왕험성王險城
《山海經》十八篇, 談到古朝鮮和辰國的地方可謂不少, 但明確標出“朝鮮”二字者則只有兩條. 其一為第十三篇《海內東經》第四條的“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1]其另為第十八篇《海內經》第一條的“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人.”[2]為了指稱的方便, 暫稱前者為“海北山南”條, 後者為“朝鮮天毒”條. 至於開頭一句中所說的“辰國”, 則為《海內東經》第三條“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中的“蓋國”, 亦即其後古代朝鮮半島南半部的“三韓”, 暫不作本文的討論對象.
[1] 據袁珂著: 《山海經校譯》, 上海古籍出版社, 1985年.
[2] 同上揭書.
《산해경山海經》 18편 가운데 고조선과 진국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적지 않지만,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가 명확히 표기된 곳은 단 두 조항뿐이다. 그 하나는 제13편 《해내동경海內東經》 제4조에 나오는 “조선은 열양의 동쪽, 바다 북쪽 산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1]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18편 《해내경海內經》 제1조에 나오는 “동해 안, 북해의 한쪽 모퉁이에 조선·천독[朝鮮、天毒]이라는 나라가 있으니, 그 백성은 물가에 살며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사랑한다.”[2]는 구절이다. 지칭의 편의를 위해, 앞의 구절을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이라 하고, 뒤의 구절을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이라 칭한다. 서두에 언급된 “진국辰國”은 《해내동경》 제3조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에 속한다.”에 나오는 “개국蓋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후 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三韓”에 해당하지만, 본문에서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人們對《山海經》一書多少有些誤會, 不僅因其寫作風格頗為獨特, 而且記載的物事亦多難於理解, 便被後人批評為稀奇古怪、荒誕不經. 甚至司馬遷在其《史記》大宛列傳的最後也曾說: “至《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 餘不敢言之也.”乃至當代研究《山海經》的學者在自己的書中不勝感嘆地說: “我深怪司馬遷太過執著於自己的所見所聞, 對於“其文不雅馴”的文獻記錄, 多棄而不用. 這裡面該有多少氏族社會的情景在他的史筆下放過了.”[3] 其實, 司馬遷的所謂“不敢言”, 也只能說他審慎有餘, 對“所有怪物”不便輕易相信和妄加評說. 而據研究家說, 司馬遷在世之時見到的《山海經》大概只有十三篇, 而未及接觸令人易於憑信的海內四經等.
[3] 徐顯之: 《山海經探原》, 第275頁、第88頁, 武漢出版社, 1991年.
사람들은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단지 그 문체가 독특할 뿐 아니라, 그 안에 기록된 사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후대 사람들로부터 기이하고 황당한 책이라며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대원열전大宛列傳」 말미에서 “《우본기禹本紀》와 《산해경》에 나오는 괴물들은, 나머지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여서, 《산해경》을 연구하는 현대 학자조차 자신의 저서에서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사마천이 자신의 견문에 지나치게 집착했다고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문장이 우아하고 순하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문헌 기록을 폐기했는데,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씨족 사회의 풍경이 그의 역사 기록에서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다.”[3] 사실 사마천이 말한 이른바 “감히 말하지 않겠다[不敢言]”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신중함이 지나쳤다고 볼 수 있으며, “온갖 괴물들”에 대해 섣불리 믿거나 함부로 논평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마천이 생전에 접할 수 있었던 《산해경》은 대략 13편 정도였고, 비교적 신뢰하기 쉬운 《해내사경海內四經》 등은 아직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筆者並非專事研習《山海經》者, 只是由於專業的需要, 有時便須翻檢查閱, 一方面深感這是一部頗具史料價值的著作, 另方面又痛感它是一部難於讀得明白的書. 幸有袁珂先生的力作《山海經校譯》從旁幫助, 方能迷津得渡, 初步窺知該書的全豹. 撰寫《山海經校譯》這樣著作是有很大難度的, 在文史領域的科研工作中堪稱一大工程. 此書不僅對《山海經》進行了校勘、註釋, 把各篇內容分列成條, 便於閱讀和查尋, 而且把全書譯成現代漢語, 就更有助於讀者的理解和深入研究.
필자는 《산해경山海經》을 전공으로 삼는 연구자는 아니다. 다만 전공 분야의 필요로 인해 때때로 이 책을 들추어 보아야 할 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이 책이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저작이라는 점을 깊이 느끼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점에서 난해함을 절감했다. 다행히 원가袁珂 선생의 역작인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이 큰 도움이 되어, 길을 잃고 헤매던 가운데 마침내 방향을 잡고, 이 책의 전체적인 면모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과 같은 저작을 집필하는 일은 매우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며, 문사 분야의 학술 연구 가운데서도 하나의 대공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산해경》 전체에 대해 교감과 주석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각 편의 내용을 조항별로 나누어 배열함으로써 독자가 읽고 찾아보기에 훨씬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전편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함으로써 독자들이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심화 연구로 나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當然, 上述《山海經》中有關古朝鮮兩條, 即“海北山南”條和“朝鮮天毒”條, 從字面上看並不多麼難懂, 甚或非常接近現代漢語. 但其具體內容則比較曲折複雜, 只從外表看不出什麼問題, 而且諸家的考釋亦多不一, 乃至大相逕庭. 便想在本稿中, 依據1985年上海古籍出版社出版的由袁珂先生撰寫的《山海經校譯》一書, 進行某些考釋, 談談自己的看法.
물론 위에서 언급한 《산해경》 속 고조선 관련 두 조항, 즉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과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은, 문자 그대로 보면 그리 어려운 표현은 아니며, 오히려 현대 중국어에 매우 가까운 문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비교적 곡절이 많고 복잡하여, 표면만 봐서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기 어렵다. 게다가 여러 학자들의 해석 역시 제각각 다르고, 심지어는 전혀 상반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본고에서는 1985년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출간된 원가袁珂 선생의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을 바탕으로 몇 가지 고찰과 해석을 시도하고, 필자의 견해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關於“海北山南”條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에 대하여
“海北山南”條原在《海內北經》, 而《山海經校譯》一書則將其改列在《海內東經》. 據該書《序》稱: “現在查明海內四經錯簡現象最為嚴重, 大荒四經也偶爾有之, 自然都必須改正過來, 恢復其本來面貌. 例如海內東經‘蓋國在鉅燕南’已下九節[連同這一節共是十節]文字, 都錯簡到海內北經‘舜妻登比氏生宵明、燭光’節後面去了”[此書的所謂“節”, 本稿則稱作“條”]. 筆者認為, 這種改列是恰當的. 於是便明確了: 整個《海內東經》一篇所記述的, 大致是圍繞現今黃海[包括渤海]一圈的沿岸事物.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은 원래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속해 있었지만,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에서는 이를 《해내동경海內東經》으로 재편성하였다. 이 책의 「서문[序]」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현재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해내사경海內四經에서의 편차 오류가 가장 심하고, 대황사경大荒四經에서도 간혹 발견되며, 이는 모두 반드시 바로잡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해내동경의 ‘개국蓋國이 거연鉅燕의 남쪽에 있다’는 구절을 시작으로 하는 아홉 조항[이를 포함하면 열 조항]이 모두 해내북경 ‘순舜의 아내 등비씨登比氏가 소명宵明과 촉광燭光을 낳았다’는 조항 뒤로 잘못 옮겨져 있었다.” [이 책에서 “절節”이라고 부른 부분을, 본문에서는 “조條”로 칭한다.] 필자는 이러한 재분류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로써 분명해진 것은, 《해내동경》 전편은 대체로 오늘날 황해黃海와 발해渤海를 포함한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한 사물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이다.
針對“海北山南”條, 《校譯》一書的句讀和標點是: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而其今譯則是: “朝鮮在列陽的東邊, 北面有大海, 南面有高山. 列陽也是屬於燕的.”[4] 這樣的標點和今譯是否正確? 而如事先說出其癥結所在, 則是: 第一把“海北山南”解釋為“北面有大海, 南面有高山”是否正確? 筆者以為是不正確的; 第二把“朝鮮在列陽東”的後面標以讀號, 在“海北山南”之後標以句號, 便成為“海北山南”是“在列陽東”的“海北山南”, 是進一步解釋“在列陽東”的, 筆者以為這也是不確切的. 一般認為, 這不過是標點、句讀問題, 但在這裡卻非常重要. 因為它表現了標點者對該條內容的理解, 而不同的理解便產生不同的句讀. 這裡的“海北山南”條在整個《山海經》中不過是普普通通的小條目, 只有十四個字, 但它卻蘊含著較大的史料價值. 它能夠說明中外學者迄今爭論不休的古朝鮮[起碼是公元前四到二世紀的古朝鮮]所處的基本位置, 對研究古代朝鮮史和古代中朝關係史頗為重要.
[4] 見《山海經校譯》第240和243頁, 第301頁.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에 대해 《교역校譯》에서의 문장 구두점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 북쪽과 산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이에 대한 현대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으며, 북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남쪽에는 높은 산이 있다. 열양 또한 연나라에 속한다.”[4] 이러한 구두점 처리와 현대어 번역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에 앞서 이 조항의 핵심 쟁점을 먼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북산남海北山南”을 “북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남쪽에는 높은 산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필자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둘째,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다[朝鮮在列陽東]” 다음에 쉼표를 찍고, “해북산남海北山南” 뒤에 마침표를 찍어, 마치 “해북산남”이 “열양의 동쪽”에 대한 부연 설명인 것처럼 문장을 구성한 점도 부정확하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보면 단순히 구두점과 문장부호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구두점의 처리는 곧 해당 문장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며, 해석이 다르면 문장 구분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은 《산해경》 전체에서 보자면 매우 짧고 평범한 소항목에 불과하며, 총 14자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료적 가치가 담겨 있다. 이 조항은 지금까지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쟁되어 온 고조선[적어도 기원전 4세기부터 2세기 사이의 고조선]의 기본적인 위치를 밝혀주는 단서가 될 수 있으며, 고대 조선사 연구와 고대 중조 관계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於是, 筆者想到, 客觀事物是有其產生和發展的過程的. 如果我們從“海北山南”條產生和發展的時代背景和歷史脈絡中細心探索, 也許會看得更清楚些, 說不定會得出較為合理的結論. 而它便是燕國與古朝鮮早期交往和交涉的一些片斷. 《三國志·魏書·東夷傳》韓條注引《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為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為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為界, 朝鮮遂弱.” 《魏略》的這段文字, 簡明細緻, 乃至細緻到提出朝鮮的大夫叫作“禮”的這一具體人物, 便大大提高了這則史料的信憑度.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객관적인 사물에는 그것이 생겨나고 발전해 온 고유한 과정이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이 만들어지고 전해진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를 세심하게 탐색해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다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항은 곧 연燕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초기 교류와 접촉을 담은 몇몇 단편적인 기록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주석에서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연燕이 스스로를 왕이라 높이며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맞아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그의 대신 예禮가 이를 간하자 마침내 그만두었다. 예를 사신으로 서쪽 연나라에 보내어 설득하니, 연 또한 공격을 멈추었다. 그 후 자손들이 점차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마침내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그 서방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은 약해졌다.” 《위략魏略》의 이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매우 세밀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신 이름이 “예禮”였다는 구체적인 인물까지 제시하고 있어, 이 사료의 신뢰도를 크게 높여주고 있다.
據考, “燕自尊為王”在燕易王十年, 即公元前323年, 是公元前四世紀晚期事. 朝鮮侯得知燕自立為王, 並準備向東取地, 便不甘心, 隨後也“自稱為王”, 並準備發兵打退燕國的東進. 當時二國, 分處兩地, 所爭者何? 實為二國中間的大片周王朝的土地, 因而朝鮮侯“欲興兵逆擊燕”時, 才打出“尊周”的旗號. 於是, 在當時周室衰落不堪, 早已無足輕重的情況下, 雙方都在瞪大眼睛注視著這片土地, 甚至不惜一戰. 當此之時, 前述古朝鮮方面饒有見地、深識大體的大夫禮, 向朝鮮侯提出意見, 認為這個仗不能打, 打不得. 朝鮮侯接受意見, 並派禮出訪燕國, 進行交涉. 燕國考慮到當時的自國情況, 只要朝鮮不向西擴展, 也就安於現狀, 一場戰事就如此消彌下來. 此為迄今見諸史載之燕朝交涉的開始, 也是有文字記錄的中朝官方交往的首次, 時為公元前四世紀晚期. 至於“後子孫稍驕虐”, 實際是說朝鮮侯的後人過了一段時間驕傲自大、任所欲為起來, 也就是不遵守當年燕朝之間的商定, 擅自向西推進. 於是, 燕國於公元前280年左右[昭王末年]“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為界”.
고증에 따르면,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칭했다[燕自尊為王]”는 일은 연나라 역왕易王 10년, 곧 기원전 323년의 일로, 기원전 4세기 말기의 사건이다. 조선후朝鮮侯는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동쪽으로 영토를 취하려는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후 역시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의 동진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준비를 했다. 당시 두 나라는 서로 떨어진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들이 다투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는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광대한 주왕조周王朝의 토지였다. 그래서 조선후가 “군대를 일으켜 연을 거슬러 공격하려 했다”는 말 속에는 “주나라를 높이 받든다[尊周]”는 구호를 내세운 까닭이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주왕실은 이미 쇠락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양측은 이 땅을 두고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며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려 했다. 이때, 앞서 언급한 고조선 측의 식견이 깊고 대의를 잘 아는 대신 예禮가 조선후에게 의견을 제시하여, 이 전쟁은 해서는 안 되며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후는 그 의견을 받아들였고,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외교 교섭을 진행하게 했다. 연나라는 당시 자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선이 서쪽으로 확장하지 않기만 하면 현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하여, 전쟁은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사서에 보이는 연나라와 조선의 외교 교섭의 시작이며, 문헌에 기록된 중조中朝 간의 공식 교류의 첫 사례로, 시기는 기원전 4세기 말이었다. “후손들이 점차 교만하고 포학해졌다”는 것은 실제로 조선후의 후손들이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이는 과거 연나라와의 합의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연나라는 기원전 280년경, 즉 소왕昭王 말년에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서쪽을 공격하게 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삼았다.”
這裡的關鍵問題有三個: 一為“攻其西方”, 二為“取地二千餘里”, 三為“至滿潘汗為界”. 首先, “攻其西方”四字非常重要, 必須講說清楚, 以免造成誤會. 那便是燕國進兵古朝鮮域外的西方, 而非攻打古朝鮮域內的西部領土. 何以見之? 請看如下資料.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서쪽을 공격하다[攻其西方]”이고, 둘째는 “2천여 리의 땅을 빼앗다[取地二千餘里]”이며, 셋째는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삼다[至滿潘汗為界]”이다. 우선 “서방을 공격하다”라는 네 글자는 매우 중요하므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반드시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는 연나라가 고조선 영역의 서쪽 내부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외부 영역의 서방 지역을 향해 진군했다는 뜻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알 수 있는가? 아래 자료를 보자.
《史記·匈奴列傳》說: “其後, 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這是說, 先在遼西趕走了東胡. 接著, 《鹽鐵論》中御史大夫桑弘羊在述說“齊桓公越燕伐山戎, 破孤竹, 殘令支. 趙武靈王逾句注, 過代谷, 略滅林胡、樓煩”之後, 又繼續說: “燕襲走東胡, 辟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사기史記·흉노열전匈奴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었는데, 오랑캐에게 인질로 보내졌고, 오랑캐는 그를 매우 신뢰했다. 돌아온 뒤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격파하고 쫓아냈으며, 동호는 천여 리 물러났다.” 이는 먼저 요서遼西 지역에서 동호를 쫓아낸 것을 말한다.
이어 《염철론鹽鐵論》에서 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桑弘羊은 “제환공齊桓公이 연을 넘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孤竹을 격파하고, 영지令支를 짓밟았으며, 조 무령왕은 구주句注를 넘어 대곡代谷을 지나,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거의 멸망시켰다”라고 말한 뒤, 또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이 동호를 습격해 쫓아내고, 천 리에 이르는 땅을 개척한 뒤, 요동을 건너 조선을 공격했다.”
前面, 筆者雖曾說過《魏略》一書寫得簡明細緻, 終是簡明有餘而細緻不足. 它在這裡便把上述兩則非常重要的史料漏掉, 只簡略地寫為“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儘管作者魚豢心裡明白, 卻給後人造成誤會, 以為是攻打了古朝鮮域內的西部, 奪取了古朝鮮的二千多里土地. 其實不然. 卻也有人一意堅持這種造成誤會的說法, 便將“度遼東而攻朝鮮”, 句讀標點為“度遼, 東而攻朝鮮”. 他們認為, 即便在遼西是“燕襲走東胡, 辟地千里”, 那麼“度遼, 東而攻朝鮮”, 則起碼表明遼東還是古朝鮮的. 其實, 這種句讀是十分錯誤的, 是有意為之的, 也是非常拙劣的. 再如, 《戰國策》卷二十九《燕一》: “蘇秦將為從[縱], 北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沱、易水, 地方二千里.”此則史料, 時間早些, 似在燕自稱為王的稍前, 卻更說明問題. 但亦有任意歪曲之者, 主張朝鮮、遼東之間不加隔點, 而是“燕東有朝鮮遼東”, 意思是燕的東邊有朝鮮的遼東. 這種辦法同樣不能奏效, 只有那種外國的蹩腳漢學家才能想出這類餿主意.
앞에서 필자가 《위략魏略》이라는 책이 간결하면서도 자세히 쓰였다고 말하긴 했지만, 결국 간결함은 충분하나 세밀함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사료를 빠뜨리고, 단지 간략하게 “연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고만 썼다. 비록 저자 어환魚豢은 속으로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겠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마치 연나라가 고조선 영역 내부의 서방을 공격하여 고조선의 2천여 리 땅을 빼앗은 것처럼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해석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어서, “요수를 건너 조선을 공격했다[度遼東而攻朝鮮]”는 구절에 대해, 문장부호를 “요수를 건너고,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공격했다[度遼, 東而攻朝鮮]”로 끊는다.
이들은, 비록 요서에서는 “연이 동호를 습격해 쫓아내고, 천 리의 땅을 개척했다[燕襲走東胡, 辟地千里]” 하더라도,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조선을 공격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적어도 요동은 여전히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문장 구분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의도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한 매우 서툰 해석이다.
또한 《전국책戰國策》 권29 〈연燕1〉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진蘇秦이 합종[從(縱)]을 도모하여 북쪽으로 연문후燕文侯를 설득하며 말했다. ‘연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 남쪽에는 호타呼沱와 역수易水가 있으며, 영토는 방형 2천 리입니다.’”
이 사료는 시기로 보아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기 조금 이전의 일이지만, 오히려 문제를 더 명확히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이들이 있어, 조선과 요동 사이에 쉼표를 넣지 않고 “연의 동쪽에는 조선요동이 있다[朝鮮遼東]”라고 하며, 연의 동쪽에 조선의 요동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려 한다. 이런 방식 역시 통하지 않는다. 오직 외국의 형편없는 한학자들만이 이런 엉터리 주장을 생각해낼 수 있을 뿐이다.
上面解釋了“攻其西方”, 同時自然也就說明了什麼叫“二千餘里”. 至於“滿潘汗”究為何物, 究在何處, 一真是個爭論不休的“老大難”. 儘管韓國已故元老史家李丙燾先生早就提出: “滿潘汗”實即指《漢書》地理志遼東郡十八屬縣中的“文縣”和“番汗縣”, 並表示文縣和番汗縣在戰國燕時也許是一個縣即“文番汗”縣, 秦漢時才分為兩縣, 同時比定番汗縣在今平安北道博川, 文縣則為其鄰縣.[5]李氏之說實事求是, 堪稱鄭重, 但信者自信, 疑者自疑, 迄無定論.
[5] 見震檀學會: 《韓國史》古代篇, 1973年, 乙酉出版社.
위에서 “서방을 공격하다[攻其西方]”라는 표현에 대해 설명했으니, 자연스럽게 “2천여리二千餘里”가 의미하는 바도 밝혀진 셈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만번한滿潘汗”이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 위치한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것은 정말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비록 한국의 고故 원로 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선생이 일찍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만번한滿潘汗’은 《한서漢書》 지리지에서 나오는 요동군 18속현 가운데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전국시대 연나라 시기에는 문현과 번한현이 아마 하나의 현, 즉 ‘문번한文番汗’현이었으나, 진한 시기에 이르러 두 현으로 나뉜 것”이라 보고, “번한현은 오늘날 평안북도 박천博川에 해당하며, 문현은 그 이웃 현이다”라고 비정했다.[5] 이 이병도 선생의 견해는 사실에 충실하고 매우 신중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스스로 믿고, 의심하는 사람은 여전히 의심하며,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확정된 결론이 없다.
幸虧上世紀八十年代朝鮮考古學家於朝鮮平安北道發現了所謂“大寧江長城”. 據朝鮮學者撰文稱[6]: “從當地居民口中得知, 大寧江的東堤, 自古以來便被稱作“萬里長城”, 傳說這條長城從博川郡向北延伸, 直至鴨綠江, 並繼續延伸到鴨綠江以北.”實際上, 這段長城應是從我國寬甸縣一帶, 沿昌城江、大寧江東側延伸下來, 最後進入大寧江與清川江末端之間的博川郡, 並止於博川郡西南端的壇山里.
[6] 孫永鐘: 《關於大寧江畔的古長城》, 載朝鮮的《歷史科學》1987年第2號.
다행히 지난 세기 1980년대에 조선[북한]의 고고학자들이 평안북도에서 이른바 “대녕강장성大寧江長城”을 발견했다. 조선 학자들이 쓴 글에 따르면[6],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대녕강의 동쪽 둑은 예로부터 ‘만리장성’이라 불렸으며, 이 장성은 박천군에서 북쪽으로 연장되어 압록강에 이르고, 다시 압록강 북쪽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장성 구간은 오늘날 중국의 관전현寬甸縣 일대에서 시작되어, 창성강과 대녕강의 동쪽을 따라 남하하다가, 대녕강과 청천강清川江 하류 사이에 있는 박천군에 이르며, 박천군 남서단의 단산리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關於壇山里, 筆者記起了日人學者谷豐信的一段話: “平安北道博川郡壇山里, 曾出土半圓形瓦當. 瓦當紋飾雖有些破損, 卻無疑屬於戰國時期燕國半圓形瓦當所特有的獸面紋. 考慮到戰國時瓦的使用僅限於國家的建築物, 因而設想壇山里曾有過燕的重要建築物, 也並非不合理.[7] 儘管《關於大寧江畔的古長城》一文的作者, 強調該段長城是高麗興建的, 並命名為“大寧江長城”, 但僅從該文敘述的某些內容也足以促使筆者相信, 它是戰國時期燕國北長城的最東段. 於是, 筆者認為, 所謂“至滿潘汗為界”, 與其說以“文番汗縣”或“文縣”及“番汗縣”為界, 不如說以滿水、潘水、汗水三條江為界更為明確. 也許這三條江正是昌城江、大寧江和清川江的古稱, 或許“文番汗縣”之名出自這三條江名.
[7] 谷豐信: 《樂浪郡的位置》, 載朝鮮史研究會編《朝鮮史研究會論文集》第24輯.
단산리壇山里에 대해 필자는 일본 학자 곡풍신谷豐信의 한 말을 떠올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안북도 박천군 단산리에서는 반원형 와당이 출토된 바 있다. 비록 와당의 문양이 일부 파손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국시기 연나라의 반원형 와당에 특유한 수면문獸面紋에 속한다. 전국시대에 기와는 국가의 건축물에만 사용되었음을 고려할 때, 단산리에 연나라의 중요한 건축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은 결코 비합리적인 일이 아니다.”[7] 비록 《대녕강 반도의 고장성에 대하여[關於大寧江畔的古長城]》라는 글의 필자가 해당 장성이 고려가 축조한 것이라 주장하며 이를 “대녕강장성大寧江長城”이라 명명했지만, 그 글에서 서술된 일부 내용만으로도 필자는 이것이 전국시기 연나라 북장성의 최동단 구간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필자는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至滿潘汗為界]”는 표현을, “문번한현文番汗縣” 혹은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을 경계로 삼았다고 보기보다는, 만수滿水, 번수潘水, 한수汗水라는 세 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명확하다고 본다. 아마도 이 세 강은 각각 창성강, 대녕강, 청천강의 고명일 가능성이 있으며, “문번한현”이라는 지명 또한 이들 강 이름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從古代中朝關係史的角度, 此為有史實記載的燕朝官方交涉的第二回合. 如果說公元前四世紀末葉第一回合的交涉可稱之為“和平談判”, 那麼此公元前三世紀早期的第二回合, 則可稱之為“取地劃界”階段. 雖云燕方取遼西、遼東兩千餘里土地, 卻未佔據古朝鮮的一寸領土, 亦未見到兩國之間的硝煙彌漫. 可以想像得出, 燕軍進至清川江下游北岸, 古朝鮮軍也早在此嚴陣以待, 並出面交涉, 宣稱來此已是朝鮮國地. 燕國軍隊遇此山海險要, 便也就勢停下腳步, 在這裡以“滿潘汗”劃出國界, 繼之又築以燕國北長城之最東段, 直抵博川郡的壇山里.
고대 중조中朝 관계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 연나라의 공식 외교 교섭 중 두 번째 회차에 해당한다. 만약 기원전 4세기 말의 첫 번째 교섭을 “평화 담판”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 기원전 3세기 초의 두 번째 교섭은 “영토 획정” 단계라 할 수 있다. 비록 연나라가 요서와 요동 지역에서 2천여 리에 이르는 땅을 취했다고는 하나, 고조선의 영토를 한 치도 점령하지 않았으며, 양국 사이에 전쟁의 포성이 울려 퍼졌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는 바는, 연군이 청천강 하류 북안까지 진군했을 때, 고조선 군도 이미 이곳에 진을 치고 맞설 준비를 마친 상태였으며, 나아가 이곳이 조선의 국토임을 분명히 밝히며 교섭에 나섰다는 점이다. 연나라 군은 산과 바다로 험준한 이 지형을 마주하자, 마침 이 지점을 경계로 삼아 진군을 멈추었고, 여기서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여 국경을 설정했다. 그 뒤에는 이 경계선을 따라 연나라 북장성의 최동단 구간을 쌓았고, 그것은 곧 박천군의 단산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至於燕朝之間官方關係的第三回合, 《魏略》未予記載, 只得求助於《史記》朝鮮列傳中共計十八個字的一句話: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障塞.”此事發生於何時? 朝鮮列傳只簡記為“全燕時”, 那便是指燕國全盛之時, 應是燕昭王在位之時[公元前312年~前279年], 尤其是公元前284年~前279年, 是其打敗齊國、勢力大振的全盛時期, 便與燕向東取地, 與古朝鮮在滿潘汗劃界的年代相銜接, 亦即在這之後不久. 這次軍事行動由誰人指揮, 或仍由秦開統率, 不見史載.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공식 관계에서 세 번째 회차에 해당하는 사건은 《위략魏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오직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실린 단 열여덟 글자의 문장만이 이를 전해준다. 바로 “자시전연시自始全燕時, 상략속진번·조선[嘗略屬真番、朝鮮], 위치리為置吏, 축장새築障塞”라는 구절이다. 이 일이 일어난 시기는 언제인가? 《조선열전》에서는 단지 “전연시全燕時”라고만 간단히 적고 있는데, 이는 연나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를 뜻하며, 대체로 연燕 소왕昭王 재위 시기[기원전 312년~기원전 279년]를 가리킨다. 특히 기원전 284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 연 소왕이 제나라를 크게 물리쳐 세력이 한껏 확장되었던 전성기와 맞물린다. 이는 곧 연나라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고조선과 만번한滿潘汗에서 국경을 획정한 시기와 이어지는 것으로, 그 직후에 해당하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군사 행동을 누가 지휘했는지에 대해서는, 혹시 진개秦開가 계속해서 지휘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사서에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盡人皆知, 全燕略屬真番、朝鮮, 並非略屬它們的全部, 只是略屬了一部分. 這被略屬的一部分究為何地, 位於何處? 便成為問題. 從北面來說, 無疑始於清川江[時稱漢水]中下游一帶, 而向南略屬止於何處? 僅從朝鮮列傳還看不出來. 到這時, 《山海經》中海內東經的“海北山南”條便派上用場: “朝鮮在列陽東”和“列陽屬燕”, 可謂一語道破, 令人恍然大悟.”列”為“列水”, 即今朝鮮之大同江, 已為今日大多鄭重學者不爭之議. 便可認為略屬之地向南止干如今大同江中下游之北岸, 其具體標誌城邑則為北岸之列陽. [至於“真番”, 則是個更加專門的問題, 此處不贊, 容當另說.]
누구나 알다시피, 연나라가 진번真番과 조선朝鮮의 일부 지역을 잠시 점령했던 것[略屬]은, 그 전 지역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점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점령된 일부”는 과연 어느 지역이며, 어디에 위치했는가? 이것이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된다. 북쪽으로 보자면,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청천강[당시 이름은 한수漢水] 중하류 일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쪽으로는 어디까지였을까? 《조선열전》만으로는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산해경山海經》의 〈해내동경海內東經〉에 나오는 “해북산남海北山南” 항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다[朝鮮在列陽東]” 그리고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列陽屬燕]”라고 적혀 있어, 마치 한 마디로 핵심을 꿰뚫는 듯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문득 깨달음을 얻게 한다. 여기서 “열列”은 곧 “열수列水”를 가리키며, 이는 오늘날 조선의 대동강大同江을 말함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중한 학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이견이 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연나라가 점령한 지역은 남쪽으로 지금의 대동강 중하류 북안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경계 도시로는 북안의 열양列陽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진번真番’에 대한 논의는 보다 전문적인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다음 기회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以上所述, 便是戰國時期燕與古朝鮮官方關係的三個回合或三個階段. 而就中的第三回合, 則是燕國略屬了對方從清川江中下游到大同江中下游之間的土地. 但您不必擔心, 到漢初實際上物歸原主, 又回到古朝鮮手中. 此即《史記》朝鮮列傳所說: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次水[清川江]為界, 屬燕.”這兩句話雖也極其簡略, 卻把當時的基本情況都交代出來. 而所有這些便是理解“海北山南”條的歷史背景.
이상에서 서술한 내용은 전국시대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공식 관계가 세 번의 회합, 또는 세 단계로 진행되었음을 정리한 것이다. 그중 제3회는 연나라가 청천강 중하류에서부터 대동강 중하류에 이르는 지역의 일부를 점령한 시기였다. 그러나 독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나라 초기에는 이 지역이 실제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 다시 고조선의 손에 넘어갔다. 이것이 바로 《사기》 〈조선열전〉에서 말한 바이다. “진이 연을 멸하고, (그 지역을) 요동의 변경 바깥[外徼]에 귀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성책을 수리하고, 차수[次水, 곧 청천강]를 경계로 하여 연에 속하게 했다[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次水[清川江]為界, 屬燕].” 이 두 문장은 비록 매우 간략하지만, 당시의 기본적인 정세를 모두 잘 전달해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든 역사적 맥락이 《산해경》 〈해내동경〉에 등장하는 “해북산남海北山南” 항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筆者在前面說過, 句讀標點很重要, 它代表標點者對該條的理解. 筆者與《山海經校譯》一書之“海北山南”條的標點不同, 認為雖不過十四字的小條目, 卻是由各具不同內容的三句話組成, 便應標點為:
필자는 앞서 문장 부호와 구절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해당 구절에 대한 표기자의 이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이라는 책에서 “해북산남海北山南” 조항에 사용된 구두점 표기와는 견해를 달리하며, 이 짧은 14자의 항목이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표기해야 한다고 본다:
朝鮮在列陽東.
海北, 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다.
바다는 북쪽에 있고, 산은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這三句話作為漢語已很現代化了. 之所以還要譯成現代漢語, 是想說明一下筆者對它的進一步理解或解釋:
朝鮮在列陽的東面.
原本位於大海的北邊, 高山的南邊.
如今, 列陽歸屬於燕.
이 세 문장은 이미 한어로서 매우 현대화된 표현이다. 그럼에도 이를 다시 현대 중국어로 번역하려는 이유는, 필자가 이에 대해 더 나아간 이해나 해석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다.
원래는 큰 바다의 북쪽, 높은 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열양이 연나라에 속해 있다.
顯而易見, 筆者認為“海北山南”並非對“在列陽東”的進一步說明, 便須在“在列陽東”之後加一句號. 而“海北山南”則是指當初燕國略屬古朝鮮部分土地之前古朝鮮的南北邊界——黃南前海之北, 妙香山脈之南. 第二句表達完畢之後, 才又回到第一句的時期, 如今列陽已歸屬於燕.
분명히 드러나듯이, 필자는 “해북산남海北山南”이 “열양의 동쪽에 있다[在列陽東]”는 내용의 부연 설명이 아니라고 보며, 따라서 “열양의 동쪽에 있다” 다음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해북산남”은 연나라가 고조선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기 이전, 본래 고조선의 남북 경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즉 황해 남쪽 앞바다의 북쪽, 묘향산妙香山맥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문장이 이를 표현한 뒤에야 다시 첫 번째 문장의 시기로 돌아가, 이제는 열양이 연나라에 귀속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至於“列陽”, 雖有人說是列水之陽的泛稱, 但從該條文理而言, 應為具體地名. 不過, 這一古代地名已很難考證. 韓國已故歷史學家李丙燾先生推斷列陽在大同江北側, 具體在今平壤的大城山下. 彼謂《東國輿地勝覽》平壤府條曾稱九龍山[即大城山]為魯陽山. 因此他認為, 此“魯陽”可能是“列陽”的同稱. 但李氏又曰: 暫置此說, 有待考證.[8] 附帶說一點, 筆者以為《山海經校譯》一書將“海北山南”解釋為“北面有大海, 南面有高山”是值得商榷的. 筆者以為“海北山南”僅從古漢語的角度, 亦應解釋為“在海之北, 在山之南”, 而從歷史地理角度則更是如此. 但該書今譯之“大海”和“高山”卻頗有道理, 山不高, 海不大, 不足以作地理之屏障和事物之標誌.
[8] 見震檀學會: 《韓國史》古代篇, 1973年, 乙酉出版社.
‘열양列陽’에 대해서는, 어떤 이들은 이를 열수列水 북안의 일반적인 명칭이라 보기도 하지만, 해당 조항의 문맥상으로 보자면 구체적인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만, 이 고대 지명은 이미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기 어려운 상태다. 한국의 고故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선생은 열양이 대동강 북측, 구체적으로는 현재 평양의 대성산 아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동국여지승람》 평양부 조에 구룡산[곧 대성산]을 노양산魯陽山이라 칭한 대목이 있다며, 이 “노양魯陽”이 “열양列陽”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병도 선생은 이 설을 잠시 제기하는 데 그치고, 향후의 고증을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였다[8]. 덧붙여 한 가지 말하자면, 필자는 《산해경교역》이라는 책에서 “해북산남海北山南”을 “북쪽에 큰 바다, 남쪽에 높은 산이 있다”라고 해석한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견해로는, “해북산남”은 고한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바다의 북쪽에 있고, 산의 남쪽에 있다”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며,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만, 그 책에서 “해海”를 “큰 바다”로, “산山”을 “높은 산”으로 옮긴 해석 자체는 일리가 있다. 산이 높지 않고, 바다가 크지 않다면 지리적 경계나 상징이 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總括以上, 一個活生生的古朝鮮, 起碼是公元前四~二世紀的古朝鮮, 呈現在我們的面前: 它北起如今妙香山及清川江一線[所謂“山南”]; 南抵黃海南道前方的大海[所謂“海北”]; 東以現今的北大峰山脈和阿虎飛嶺山脈與那時的沃沮、東涔部落為界; 西則面對著煙波浩森一望無際的黃海. 這便是當年的“箕氏朝鮮”, 或某些韓國學者所說的“韓氏朝鮮”或“潑貊朝鮮”, 以及朝鮮學者所主張的“後朝鮮”.
종합하자면, 하나의 생생한 고조선, 적어도 기원전 4세기부터 2세기까지의 고조선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그 영역은 북쪽으로 오늘날의 묘향산과 청천강 일대까지 이르며[이른바 “산남山南”], 남쪽으로는 황해남도黃海南道 앞바다의 대해에 닿는다[이른바 “해북海北”]. 동쪽은 지금의 북대봉산맥과 아호비령산맥을 경계로 삼아, 그 당시의 옥저沃沮와 동잠東涔 부족과 접하고, 서쪽은 아득히 펼쳐진 황해의 잔잔한 물결과 마주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당대의 “기씨조선箕氏朝鮮”, 또는 일부 한국 학자들이 말하는 “한씨조선韓氏朝鮮” 혹은 “발맥조선潑貊朝鮮”, 그리고 조선 학자들이 주장하는 “후조선後朝鮮”이 존재했던 땅이다.
關於“朝鮮天毒”條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에 대하여
“朝鮮天毒”條為《山海經》第十八篇《海內經》之首條. 《山海經校譯》一書將其句讀標點為“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假人愛人.”其古語今譯為: “東海海內, 北海的角上, 有國家名叫朝鮮、天毒, 人們都傍水而居, 對人憐憫慈愛.” 標點很清楚, 今譯也明白, 問題在於句中的“天毒”是怎回事.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은 《산해경山海經》 제18편 《해내경海內經》의 첫 번째 항목이다. 《산해경교역》이라는 책에서는 이 구절의 문장부호를 다음과 같이 표기하고 있다: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일조선·천독, 기인수거, 가인애인.”
이 고문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동해의 바다 안,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 천독이라 불리는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은 물가에 기대어 살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한다.”
문장부호는 명확하고, 현대어 번역도 분명하다. 문제는 문장 속의 “천독天毒”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東晉文學家、訓詁學家郭璞[276~324]對“朝鮮天毒”有注: “朝鮮今樂浪郡也. 天毒即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中也.”[9] 他這一注不得了, 硬是把“天毒”拋到遙遠的古代印度, 便信心十足地說什麼“天毒即天竺國”. 致使今人袁珂先生不得不在郭璞注下加按: “天竺即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迥異, 未知是否. 或許中有脫文訛字, 未可知也.” 老實說, 戰國時代的中國人能否像東晉時人那樣已經知道天竺國, 還是個問題. 筆者以為, 戰國時代的中國人很有可能不知天竺為何物. 直至近些年, 認真研究“天毒”的人才稍多起來. 雖還各執一說, 迄未得到統一, 終是相互啟發, 朝著樂觀的方向發展. 而據筆者了解, 在這方面大致有如下幾說.
[9] 見《山海經校譯》第240和243頁, 第301頁.
동진東晉의 문학자이자 훈고학자인 곽박[郭璞, 276~324]은 “조선천독朝鮮天毒”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다. 천독은 곧 천축국天竺國이며, 도덕을 숭상하고, 문서·금은·화폐가 있으며, 부처[浮屠]가 이곳에서 나왔다.”[9] 그의 이 주석은 심상치 않다. 억지로 “천독天毒”을 멀리 떨어진 고대 인도로 연결 지으며, 마치 확신에 찬 듯 “천독은 곧 천축국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학자 원가袁珂 선생은 곽박의 주석 아래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축은 지금의 인도로, 우리나라의 서남쪽에 있다. 그러나 이 ‘천독’은 동북쪽에 있으므로,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동일한 존재인지 알 수 없다. 혹시 이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글자가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전국시대의 중국인들이 동진 시대 사람들처럼 이미 천축국을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전국시대의 중국인들은 천축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 “천독天毒”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비록 아직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고 있고, 통일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이 문제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首先有所謂“衍文”說. 認為“有國名曰朝鮮天毒”中的“天毒”二字, 突然而來, 莫名其妙, 與上下文絕少聯繫, 如按郭璞注, 則更加蹊蹺荒唐, 簡直是風馬牛不相及. 便以為這是在長期流傳過程中, 由於某些原因而多出來的兩個字, 去掉了事, 無礙大局, 然後這條文字就容易解釋了. 當然, 這是一種不了了之的辦法, 是無可奈何的下策. 實際上, 它並非衍文, 因而也難於構成一說, 故不可取.
첫째는 이른바 “연문衍文”설이다. 이는 “나라 이름을 조선천독이라 한다[有國名曰朝鮮天毒]”라는 구절에서 “천독天毒” 두 글자가 돌연 등장하며 전후 맥락과 거의 연결되지 않고, 곽박의 주석에 따를 경우 더욱 기이하고 황당하여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오랜 전승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불필요하게 삽입된 두 글자라고 보고, 이를 제거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며 전체 문장의 해석도 쉬워진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결국 뚜렷한 근거 없이 얼버무리는 방식이며, 어쩔 수 없는 최하책이다. 실제로 보았을 때, “천독”은 삽입된 문장이 아니며, 그런 이유로 독자적인 하나의 해석설로 보기 어렵기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其次是所謂“東屠”說. 此說見於《山海經探原》一書, 該書說: “天毒, 在‘北海之隅’, ‘其人水居’. 晉郭璞說: ‘天毒即天竺國’. 今人袁珂說: ‘天竺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迥異.’此天毒是古之東屠.”接著該書對此論證說: “《禮記·王制》注引《風俗通》說: ‘東方謂之夷, 其類有九: 一曰玄菟, 二曰樂浪, 三曰高驪, 四曰滿飾, 五日鳧臾, 六曰索家, 七日東屠, 八曰倭人, 九曰天鄙.’天毒、東屠音近. 又東屠即東鞮. 《漢書·地理志·吳地》: ‘今會稽海外有東鞮人, 分為二十餘國.’”[10] 該書之主張“天毒”為“東屠”, 主要由於二者音近, 雖位於會稽海外, 總比印度近得多多. 但朝鮮與東鞮有何“因緣”而相提並論, 且在所處位置上仍是相距太遠.
[10] 徐顯之: 《山海經探原》, 第275頁, 第88頁, 武漢出版社, 1991年.
둘째는 이른바 “동도東屠”설이다. 이 설은 《산해경탐원山海經探原》이라는 책에 등장한다. 해당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독天毒은 ‘북해의 모퉁이에 있으며’, ‘그 백성은 물가에 거주한다.’ 진晉의 곽박郭璞은 ‘천독은 곧 천축국’이라 했고, 오늘날의 학자 원가袁珂는 ‘천축은 지금의 인도로, 우리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이 천독은 동북에 있어 방향이 전혀 다르다’고 하였다. 이 천독은 고대의 동도東屠다.” 이어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논증을 덧붙인다. 《예기禮記》 〈왕제王制〉 주석에서 《풍속통風俗通》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방을 이夷라 부르며, 그 계열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 첫째 현도玄菟, 둘째 낙랑樂浪, 셋째 고려高驪, 넷째 만식滿飾, 다섯째 부유鳧臾, 여섯째 삭가索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 왜인倭人, 아홉째 천비天鄙다.” “천독天毒”과 “동도東屠”는 음이 유사하며, 또 동도는 곧 동제東鞮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오지吳地〉에 따르면 “지금 회계會稽 해외에는 동제인東鞮人이 있으며, 스무 개가 넘는 나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10]. 해당 책이 “천독天毒”을 “동도東屠”로 보려는 주장의 핵심은 두 단어의 음이 유사하다는 데에 있다. 또한 동도가 회계會稽 해외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아무리 멀더라도 인도보다는 훨씬 더 가까운 곳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과 동제가 과연 어떤 “연결 고리”가 있어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양자의 위치 또한 여전히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第三是所謂“沃沮”說. 此說見於《博物館研究》之《山海經“天毒”考》一文[11]. 該文主張: “《山海經》中的‘天毒’實際就是‘天毒’之誤. 1958年和1961年曾分別在今平壤一帶發現‘夫租芗君’銀印和‘夫租長印’, 日人崗崎敬認為‘夫租’即‘沃沮’, 這一觀點已為學術界所公認. 其實, ‘天’、‘天’、‘夫’都是形近字, 在書寫和閱讀時稍一不慎就容易將三字搞混而造成誤寫或誤讀. ‘沃’和‘天’是可以通用假借的. ‘毒’、‘租’和‘沮’的讀音相近, 作為族名, 可視為同音異寫. 因此, 我們可以肯定, 戰國時的‘天[天]毒’, 也就是漢代的‘夫租’或‘沃沮’.”[12] 該文進一步認為: “《山海經》說古朝鮮和‘天[天]毒’是在‘東海之內, 北海之隅’, 其語意是有些模糊的, 我們要搞清其具體內容, 還需進行靈活理解和細緻分析. 所謂‘北海之隅’已如前述, 是指古朝鮮地處黃海的東北角, 這‘北海’與天[天]毒無涉. 所謂‘東海之內’, 是指天[天]毒在日本海環抱之中, 這是古人的一種理解, 這‘東海’當與古朝鮮關係不大.”[13] 簡而言之, 即該文主張“天毒”就是“沃沮”; 認為古朝鮮位於如今黃海東側西朝鮮灣的“北海之隅”, 而“天毒”則位於如今日本海西側東朝鮮灣的“東海之內”. 是耶? 非耶? 有待進一步研究.
[11] [12] [13] 劉子敏: 《山海經‘天毒’考》, 載《博物館研究》1995年第1期.
셋째는 이른바 “옥저沃沮”설이다. 이 설은 《박물관연구博物館研究》에 실린 〈산해경“천독”고[山海經“天毒”考]〉라는 논문에서 제기된 것이다[11]. 해당 논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산해경》에 나오는 ‘천독天毒’은 실제로는 ‘옥저沃沮’의 오기이다. 1958년과 1961년에 각각 현재의 평양 일대에서 ‘부조향군夫租芗君’ 은인銀印과 ‘부조장인夫租長印’이 발견된 바 있으며, 일본인 학자 강기경崗崎敬은 ‘부조夫租’가 곧 ‘옥저沃沮’라는 견해를 제시했고, 이 주장은 이미 학계의 공인을 받았다. 실제로 ‘天’, ‘夫’, ‘夆’ 등은 서로 자형이 비슷하여 필기나 판독 과정에서 약간의 부주의만으로도 오기나 오독이 생기기 쉬운 글자들이다. 또한 ‘沃옥’과 ‘天천’은 통용이나 가차假借가 가능한 글자이고, ‘毒독’, ‘租조’, ‘沮저’는 음이 유사하여 부족[族]의 명칭으로 쓰일 경우, 같은 발음의 다른 글자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전국시대의 ‘천天[天]독毒’이 곧 한대漢代의 ‘부조夫租’ 또는 ‘옥저沃沮’였다고 확신할 수 있다.”[12] 해당 논문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산해경》은 고조선과 ‘천독天毒’이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東海之內, 北海之隅]’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의미가 다소 모호하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유연한 해석과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른바 ‘북해의 모퉁이[北海之隅]’이라는 표현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조선이 황해의 동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임을 뜻하며, 여기서 말하는 ‘북해’는 천독과는 무관하다. 한편 ‘동해의 안[東海之內]’이라는 표현은 천독이 일본해에 둘러싸인 지역에 있다는 의미로, 고대인의 일종의 공간 인식 방식이다. 따라서 이 ‘동해’는 고조선과는 큰 관련이 없다.”[13] 간단히 말하자면, 해당 논문은 “천독天毒”이 곧 “옥저沃沮”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고조선은 오늘날 황해 동쪽, 즉 서조선만에 해당하는 지역의 “북해의 모퉁이[北海之隅]”에 위치했으며, “천독”은 오늘날 일본해 서쪽, 즉 동조선만에 해당하는 지역의 “동해의 안[東海之內]”에 자리했다고 본다. 그런가? 아닌가? 이는 앞으로의 더 깊은 연구를 기다려야 할 문제다.
第四是所謂“帶方孤竹”說. 說見《社會科學戰線》1997年第6期《朝鮮箕氏考》一文. 此文的兩位作者認為, “天毒為天竹之誤字”. 且稱: “齊桓公於公元前七世紀之北逐山戎、北狄, 制令支, 斬孤竹的尊王攘夷活動, 造成中國境內的民族大遷移; 亞述帝國之滅亡, 羅馬帝國之衰落, 匈奴族之西遷, 其遠因實由於這次攘夷運動. 孤竹族之遭此次打擊, 其支族由遼左北移東遷遼東地區, 一部分東遷朝鮮半島——循箕氏族團舊跡建立天毒[竹]方國, 孤竹族不忘本族族源, 仍以‘天毒’[竹、竺]命國. 《海內經》把朝鮮與天竹並提, 它們均在‘東海之內, 北海之隅’的朝鮮半島上, 故‘其人水居’, 並以‘假人愛之’為本.”[14] 該文著者, 又在《學習與探索》1998年第1期的《漢四郡考》中明確表示: “《山海經》的‘天毒’實為天竹[竺]之誤. 《三國遺事》: ‘北帶方, 本竹覃城.’竹覃即典竹、天竹之倒置, 而帶方當是臺方的音變. 孤竹族在齊桓公北伐的打擊下, 北上, 循箕氏族團的足跡, 從遼左經遼東進入朝鮮半島, 在帶水[漢水]流域建帶方國, 以水名族, 不忘故國, ‘本名竹覃城’,”給我們留下了痕跡. [15]
[14] 張碧波、喻中權: 《朝鮮箕氏考》, 載《社會科學戰線》1997年第6期.
[15] 張碧波、喻中權: 《漢四郡考釋》, 載《學習與探索》1998年第1期.
넷째는 이른바 “대방고죽帶方孤竹”설이다. 이 설은 《사회과학전선社會科學戰線》 1997년 제6호에 실린 〈조선기자고朝鮮箕氏考〉라는 논문에 등장한다. 해당 논문의 두 저자는 “천독天毒”이 “천죽天竹”의 오자라고 보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환공齊桓公이 기원전 7세기에 북방의 산융山戎과 북적北狄을 몰아내고, 영지令支를 제압하며, 고죽孤竹을 정벌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활동은 중국 내의 민족 대이동을 초래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로마 제국의 쇠퇴, 흉노족의 서방 이주 등도 멀리는 이때의 ‘양이攘夷’ 운동에 원인을 두고 있다. 고죽족은 이때의 타격으로 인해 그 지파가 요좌遼左에서 요동 지역으로 북이동·동이동하였고, 일부는 조선반도로까지 동이주하였다. 이들은 기자족 집단의 옛 자취를 따라 조선에 정착해 ‘천독天毒’ 또는 ‘천죽天竹’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며, 고죽족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여전히 ‘천독’[죽竹 혹은 축竺]이라 나라 이름을 붙였다. 《해내경海內經》이 조선과 천죽을 함께 언급한 이유는, 이들 모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東海之內, 北海之隅]’에 있는 조선반도 위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특징을 함께 갖는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14] 해당 논문의 저자들은 《학습여탐색學習與探索》 1998년 제1호에 실린 〈한사군고漢四郡考〉에서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산해경》의 ‘천독天毒’은 실은 ‘천죽天竹’ 혹은 ‘천축天竺’의 오기이다. 《삼국유사》에 ‘북대방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죽담竹覃’은 곧 ‘전죽典竹’ 또는 ‘천죽天竹’의 어순이 바뀐 표현이며, ‘대방帶方’은 ‘대방臺方’의 음운 변화로 보아야 한다. 고죽족孤竹族은 제환공齊桓公의 북벌로 인한 타격을 받고 북상했으며, 기자족 집단의 발자취를 따라 요좌遼左를 거쳐 요동遼東을 지나 조선반도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대수帶水[즉, 한수漢水] 유역에 대방국을 세우며, 하천의 이름을 따서 족명을 삼고, 옛 고국을 잊지 않고 ‘본래 이름이 죽담성’이었다는 흔적을 남겼다.”[15]
第五是所謂“遼西孤竹”說. 2001年, 吉林文史出版社出版了《東北史地考略》之第三輯. 該書作者在第三章“箕子朝鮮是否初在遼西問題”中, 雖然同意“天毒”即“孤竹”之說, 卻對“孤竹族在齊桓公北伐的打擊下, 北上, 循箕氏族團的足跡, 從遼左經遼東進入朝鮮半島, 在帶水[漢水]流域建帶方國”的極富傳奇性和想像力的故事, 卻不曾提及, 亦未置可否. 據筆者的理解, 《考略》一書雖認為“天毒”即為“孤竹”, 卻不主張是什麼帶方的孤竹, 而認為只是遼西的孤竹. 因此, 他對此條的解釋是: 東海之內, 有國, 名曰朝鮮; 北海[渤海]之隅, 有國, 名曰天毒. 而天毒便是渤海之隅的天毒, 不必遠到當年的帶方去找. 這樣一來, 便使“東海之內”與“北海之隅”, 分處兩地, 各有所指; 東海之內針對朝鮮, 北海之隅針對天毒.[16]筆者則以為不然, 與該條原意似不相符, 原意應是: 後面的“北海之隅”乃是前面的“東海之內”的進一步說明.
[16] 李健才: 《東北史地考略》第三集, 吉林文史出版社, 2001年.
다섯째는 이른바 “요서고죽遼西孤竹”설이다. 2001년, 길림문사출판사에서 출간된 《동북사지고략東北史地考略》 제3집에서 이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제3장 〈기자조선이 처음 요서遼西에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비록 “천독天毒”이 곧 “고죽孤竹”이라는 설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고죽족이 제 환공의 북벌로 인해 타격을 받고 북상하여, 기자족 집단의 자취를 따라 요좌를 거쳐 요동으로, 다시 조선반도로 들어와 한수 유역에 대방국을 세웠다”는 전설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또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고략考略》이라는 책은 “천독天毒”이 곧 “고죽孤竹”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이른바 대방의 고죽이라는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고, 단지 요서遼西의 고죽일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해당 조항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동해의 안에는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북해[발해]의 모퉁이에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천독이라 한다.” 이때의 “천독”은 곧 발해의 모퉁이에 위치한 천독이므로, 굳이 멀리 떨어진 옛날의 대방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동해의 안[東海之內]”과 “북해의 모퉁이[北海之隅]”은 서로 떨어진 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 각각 조선과 천독을 지시하게 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는 이 조항의 원래 의도와 부합하지 않는 듯하며, 원래 뜻은 후반의 “북해의 모퉁이”이 앞선 “동해의 안”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16]
上述五種, 便是筆者後學迄今所能見到的對“天毒”一詞的詮釋. 雖非眾說紛紜爭論熱烈, 卻也各執一詞自成說法. 如更能盡情一些, 將對繁榮學術有所裨益. 至於筆者對“天毒”的理解, 則如下述.
위에서 소개한 다섯 가지 설이, 바로 필자 같은 후학이 지금까지 접할 수 있었던 “천독天毒”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들이다. 비록 설이 난무하거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각자 나름의 해석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견해를 이루고 있다. 만약 이보다 더 활발하고 자유로운 논의가 이뤄진다면, 학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필자가 “천독”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上世紀九十年代初, 筆者在《先秦時期中朝關係問題初探》一文中, 曾順便提及所謂“天毒”為“險讀”的看法, 認為“天毒”似為“險讀”之誤, “朝鮮天毒”條應該解釋為: “東海的裡面, 北海的角上, 有個國家名叫朝鮮, 首府就在險瀆, 人們都傍水而居, 待人很親熱, 對人有感情.”[17]但該文並非專談此事者, 便不曾展開敘述. 而且認為“天毒”似為“險讀”之誤, 也是不確切的. 現趁此機會, 作進一步闡釋.
[17] 顧銘學: 《先秦時期中朝關係問題初探》, 載《韓國學論文集》第一輯, 北京大學韓國學研究所編, 1992年.
1990년대 초, 필자는 《선진시기중조관계문제초탐_先秦時期中朝關係問題初探》이라는 글에서 “천독天毒”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당시에는 “천독”이 “험독險瀆”의 오독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으며,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수도는 바로 험독險瀆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물가에 기대어 살고, 타인을 매우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한다.”[17] 하지만 해당 글은 이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었기에, 상세한 논의를 펼치지 못했다. 또한 “천독”이 “험독”의 오기일 수 있다는 그때의 판단 역시 지금 보자면 그리 정확한 해석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번 기회를 빌려, 이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설명을 해 보고자 한다.
下面便從《史記·朝鮮列傳》和《漢書·地理志》及其有關注釋談起. “燕王盧緩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 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真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下面, 緊接著便有《史記集解》注: 徐廣曰: “昌黎有險瀆縣.”緊跟著又是《史記索隱》韋昭云: “古邑名.”應劭注《地理志》云: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狴水之東.” 再看《漢書·地理志》, 在談到遼東郡十八縣的險瀆之時, 應劭注曰“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臣瓚批評他所說錯誤: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自此是險瀆也.”意思是說, 朝鮮王滿都是王險城, 它在樂浪郡浿水水之東, 這裡談的是遼東郡險瀆縣, 兩者不是一碼事. 顏師古結論性地說: “瓚說是也.”意思是說, 應劭張冠李戴, 南轅北轍, 還是瓚說得對! [浿水: 隋唐時改指大同江.] 那麼, 在這裡, 應劭為什麼總是把“險瀆”與“王險城”攪在一起? 筆者以為, 他可能知道當年朝鮮王首都的稱呼在所謂漢字化的過程中, 曾譯為“險瀆”之事. 人們曾稱讚應劭“博覽多聞”, 但筆者認為他的記性不好, 亂點鴛鴦譜, 把王險城之險瀆硬是安到遼東郡險瀆縣的頭上. 試問, 遼東郡怎會有王險城? 此為今日之朝鮮學界亦均知其非是. 古代的王險城[或王儉城]只能是今天朝鮮首都平壤.
이제부터는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과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및 그 관련 주석들에서 출발하여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연왕燕王 노완盧緩이 반역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은 도망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다니며, 털가죽을 걸치고 오랑캐 복장을 한 채, 동쪽으로 달아나 변방을 빠져나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上下障에 정착했다. 점차 진번真番과 조선朝鮮의 오랑캐를 부리게 되었고, 옛 연燕과 제齊에서 도망친 자들을 아울러 통치하면서 왕이라 칭했고, 도읍을 왕험王險에 두었다.”
그 다음으로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덧붙어 있다. 서광徐廣이 말하길: “창려昌黎에는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이어서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위소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고읍의 이름이다”라고 하였고, 응소應劭가 《지리지地理志》를 주석하면서 “요동에 험독현險瀆縣이 있으니, 이는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 했으며, 신찬臣瓚은 말하길: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
다시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면, 요동군 18현 중 ‘험독현險瀆縣’에 대해 응소應劭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단다. “조선왕 만滿의 도읍이다. 물가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했기에 ‘험독’이라 불린다.” 이에 대해 신찬臣瓚은 그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곳이 바로 험독이다.” 즉, 조선왕 만의 도읍은 ‘왕험성’으로, 이는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고, 지금 여기서 말하는 ‘요동군의 험독현’과는 전혀 다른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안사고顏師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신찬의 말이 옳다[瓚說是也].” 즉, 응소는 장소를 잘못 짚은 것으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으며, 신찬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패수’는 수·당 시대에는 대동강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응소應劭는 왜 계속해서 ‘험독險瀆’과 ‘왕험성王險城’을 혼동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아마도 응소가 당시 조선왕의 수도 명칭이 이른바 한자화되는 과정에서 한때 ‘험독’이라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응소는 예로부터 ‘박람다식’으로 칭송받았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엉뚱한 곳에 잘못 짝을 짓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왕험성의 ‘험독’을 억지로 요동군의 험독현險瀆縣으로 끼워 맞추고 만 것이다. 묻건대, 요동군에 어찌 왕험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오늘날 조선사 연구자들 역시 모두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고대의 왕험성[또는 왕검성]은 오직 오늘날 조선의 수도인 평양일 수밖에 없다.
就這麼一折騰, 反倒啟發了筆者. 應劭雖然知道“王險城”開始時譯過“險瀆”, 卻不知更早的戰國時代曾譯過“天毒”. “天毒”與“險瀆”音相近, 只是不如“險瀆”二字文雅和貼切. 筆者深深相信這一點. 同時, 筆者在這裡趁便表示: 上世紀九十年代初, 筆者提出的“天毒”為“險瀆”說[如能忝列一說], 從本文開始改作較為確切的“王居”[國王居住之所]說. 其實, 筆者以為上述諸說、諸文, 把“天毒”一詞想得過於複雜和神秘了. 如果先期揭出“謎底”, 不過是古朝鮮的王都從古朝鮮語向漢語轉換過程中的音譯之一種. 這樣一來, 問題就簡單多了. 而我之最初從漢字譯音去考慮, 則是受“險瀆”二字的啟發. 主要是一當《史記》、《漢書》提到“險瀆”, 應劭總是跟著便註釋為“朝鮮王舊都”或“朝鮮王滿都也”. 再加上“天毒”與“險瀆”音相近, 便形成“王險城”→“險瀆”→“天毒”的連續思路: 戰國時譯為“天毒”, 後來也許認為此二字不雅, 而改譯為“險瀆”. 險瀆二字確實譯得好, 文字上亦頗形象, 險為險峻, 瀆為大川, 這對處於大同江下游的王險城, 可謂再恰當不過了.
이처럼 한바탕 혼란을 겪으면서 오히려 필자는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응소는 비록 “왕험성王險城”이 한때 “험독險瀆”으로 번역되었던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이른 전국시대에는 “천독天毒”으로 번역되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천독”과 “험독”은 음이 매우 유사하지만, “험독”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문아文雅하고 적절하다는 점에서, “천독”은 다소 거칠고 미흡한 번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점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덧붙이자면, 1990년대 초 필자가 제안했던 “천독은 험독의 오기”라는 견해[만일 그것이 하나의 설로 간주될 수 있다면]는, 이제부터는 보다 정확한 표현인 “왕거王居”[즉 국왕이 거주하던 장소]설로 수정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사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앞서 소개된 여러 설들과 논문들은 “천독天毒”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복잡하고 신비롭게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처음부터 ‘수수께끼의 정답’을 밝혀 놓고 시작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고조선 왕도의 명칭이 고조선어에서 한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음역 형태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문제는 훨씬 단순해진다.
필자가 처음에 한자 음역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 데에는 “험독險瀆”이라는 두 글자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기》나 《한서》에서 “험독”이 언급될 때마다, 응소應劭는 언제나 덧붙여 “조선왕의 옛 도읍” 혹은 “조선왕 만의 도읍”이라고 주석을 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독”과 “험독”은 음이 유사하므로, 필자의 사고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왕험성王險城” → “험독險瀆” → “천독天毒”이라는 연속적인 사유 흐름이 형성되었다. 즉, 전국시대에는 이를 “천독”이라 음역했지만, 후대에 들어 이 두 글자가 세련되지 않다고 여겨졌고, 보다 문아文雅한 표현인 “험독”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험독”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도 훌륭한 번역이다. 글자 자체로도 상징적 의미가 크며, ‘험險’은 험준한 지세를, ‘독瀆’은 큰 물줄기대하를 의미하니, 대동강 하류에 위치한 왕험성의 지리적 특징을 이보다 더 잘 담아낸 표현은 없을 것이다.
前些時, 偶讀韓國學者梁榮煥氏的《韓國史論》一書[18], 彼亦認為“儉瀆”[即險瀆]或“王儉城”[即王險城], 是為古朝鮮語的漢語標音或者音譯.“天毒”、“儉瀆”或者“王儉城”以現代韓國語表示, 則應讀作“검터”[以漢語拼音字母拼出, 則為“gemte”]. 其中的“검”[gem]意為人君, 與日本語中的“きみ”[國君]相同, “터”[te]的意思是場所或痕跡, 進而可譯為所居之地或所住之城.
[18] 梁榮煥, 《韓國史論》, 圖書出版政法, 1989年, 漢城.
얼마 전, 필자는 우연히 한국 학자 양영환梁榮煥 씨의 《한국사론韓國史論》이라는 책을 읽었는데[18], 그 역시 “‘검독儉瀆’[즉, ‘험독險瀆’]” 혹은 “‘왕검성王儉城’[즉, ‘왕험성王險城’]”을 고조선어의 한자 표기음 또는 음역으로 보았다. 그는 “천독天毒”, “검독儉瀆”, 또는 “왕검성王儉城”을 현대 한국어로 옮기면 “검터”라고 하며, 한어 병음으로는 “gemte”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 표현에서 “검[gem]”은 임금, 국왕을 뜻하는 말로, 일본어의 “기미きみ”[국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터[te]”는 장소, 흔적을 뜻하는 말로, 확장해 해석하면 임금이 머물던 곳, 곧 도읍 혹은 궁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以上所述, 只是證明“天毒”為古朝鮮王的王城或都邑, 而非郭璞所說的什麼古代天竺國. 下面則是如何使“朝鮮天毒”條讀來更通順, 意思更明確. 便想到這是由於所謂“脫簡”而形成的丟字現象. 如果把丟掉的字按《山海經》一書的風格予以補充, 則為:
위에서 서술한 바는 단지 “천독天毒”이 고조선 왕의 왕성王城 또는 도읍都邑을 가리키는 말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곽박郭璞이 말한 바와 같은 고대의 천축국天竺國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조선천독朝鮮天毒” 조항을 보다 자연스럽고 명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다듬는 문제로 넘어가 보자. 필자는 이 조항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고대 문서에서 흔히 발생하는 ‘탈간脫簡’, 즉 죽간竹簡의 누락 현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산해경》이라는 책의 문체와 서술 방식에 맞춰, 누락된 글자를 보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有都, 名曰天毒,
其人水居,
假人愛人.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조선이라 하고,
도읍이 있으니, 이름하여 천독이라 한다.
그 백성은 물가에 거주하며,
사람을 대할 때 친절하고 인정이 많다.
如果把它譯成現代漢語, 那便是:
東海的裡邊,
北海的一角,
有個國家名叫朝鮮,
它的都邑叫作天毒,
那裡的人們,
住在水邊上,
待人很親熱,
有情又有義.
만약 이를 현대 중국어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한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도읍은 천독이라 불린다.
그곳 사람들은
물가에 기대어 살며,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정과 의리가 넘친다.
在本稿即將結束之際, 筆者突然想到, 1980年北京商務版《辭源》一書的第686頁有所謂“天毒”條: “古國名. 《山海經·海內經》: ‘天毒, 其人水居.’注: ‘天毒即天竺國.’參見‘天竺’.”這一條是把“天毒”當作“天竺”而寫了. 事情起源於郭璞的注. 如果本稿主張“天毒”為古朝鮮的都城即王險城之說可以成立, 則《辭源》的此條也許就難於成立. 而查《辭海》, 則無此條.
이 글이 마무리에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필자는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1980년 북경상무인서관北京商務印書館에서 간행된 《사원辭源》 제686쪽에 수록된 “천독天毒” 항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대 나라 이름. 《산해경·해내경》: ‘천독,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산다.’ 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다.’ ‘천축’ 항목 참조.”
이 항목은 ‘천독’을 곧바로 ‘천축’으로 간주하여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출처는 곽박郭璞의 주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본고에서 제시한 “‘천독’은 고조선의 도읍, 즉 왕험성王險城을 뜻한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다면, 《사원》에 실린 이 항목은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참고로 《사해辭海》에서는 ‘천독’이라는 항목 자체가 실려 있지 않다.
作者單位: 吉林省社會科學院
저자 소속: 길림성사회과학원吉林省社會科學院
責任編輯: 趙鳴岐
책임편집: 조명기趙鳴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