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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769, 지중해 코르시카 섬 출생
  • 1779, 부친을 따라 프랑스에 건너감
  • 1784, 파리육군사관학교 입학
  • 1789, 프랑스혁명 발발, 코르시카로 귀향
  • 1792, 다시 프랑스로 이주
  • 1793, 툴롱항의 왕당파 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
  • 1795, 10월 5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진압
  • 1797,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 건설
  • 1798,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원정
  • 1799, 11월 9일 군을 동원, 500인회[1]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 시작
  • 1804,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
  • 1805, 트라팔가 해전[2]에서 넬슨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함. 12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격파
  • 1812, 러시아 원정에 실패
  • 1814, 엘바 섬에 유배
  • 1815, 엘바 섬 탈출, 황제 복위, 6월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시대적 배경

청년 시절 프랑스혁명을 경험. 프랑스혁명이 과도하게 급진화되었다가 안정국면으로 회귀하는 시점에서 등장

프랑스혁명이 이룩한 성과 위에서 프랑스의 국력을 세계에 떨칠 수 있는 기회를 포착


성장 과정

학창 시절 유별난 코르시카 사투리로 외톨이로 지냈으며 혼자 도서실에서 역사책을 읽는 내성적인 성격. 그러나 강한 자존심과 야망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장


주요 업적

프랑스혁명 이후 국정안정, 산업발전, 군사력 강화, 나폴레옹 법전[3] 편찬 등을 통해 프랑스의 국력을 한 단계 상승시킴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제패하여 통일 유럽의 비전을 현실화

당시 여러 봉건국가를 원정하면서 프랑스혁명의 유산을 전 유럽으로 확산


후대에 미친 영향

나폴레옹 법전은 현대 민법에도 그 주요 원리가 대부분 살아 있을 정도로 근대적인 원리를 망라

그의 통일 유럽의 비전은 오늘날 유럽연합(EU)의 형성을 통해 구체화되어가고 있음

그 자신은 군사 독재를 행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나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전파하여 근대민주주의 확산에 큰 영향


리더십 특성

① 후천적 노력으로 핸디캡을 극복

내성적 성격으로 교우관계가 활발하지 못했으나 비상시에는 리더십 발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태생으로 프랑스어에 능통치 못해 학교 시절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함

따라서 교우관계보다는 혼자 독서와 공부에 빠져드는 시간이 많아 학구파이자 독서광의 성격이 이때 형성. 전쟁기간 중에도 항상 루소, 괴테 등의 서적을 소지했으며 스스로 소설, 시, 논저 등을 저술

그러나 학교에서 태풍, 화재 등 긴급 사태가 있을 때마다 나폴레옹은 자연스럽게 생도들을 지휘하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

“보나파르트를 보려거든 에콜 마리테르의 승마장에 가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승마광

후일 馬上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작전을 구상하는 영웅 나폴레옹의 모습이 이루어짐

당시의 철학자 헤겔은 말을 탄 나폴레옹을 보고 “말 등에 앉은 신(세계 정신, Weltgeist)”[4]이라고 지칭

프랑스어 미숙과 단신이라는 결점을 특유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성장의 계기를 마련

코르시카어에는 이태리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어 나폴레옹은 소년 시절 자기 이름 ‘보나파르트’를 ’보오나파르테‘라고 발음했는데, 후일 정적들이 그를 비아냥거릴 때마다 ’보오나파르테‘라고 부름. 프랑스어를 마스터하겠다는 노력으로 프랑스인보다 더 정확한 프랑스어를 구사, 반면 프랑스인 특유의 잔소리 버릇은 사라져 필요할 때 필요한 말만을 하는 간결성을 체득

157cm의 단신으로 ‘꼬마 下士’라는 별명을 지님. 주로 마상에서 군을 지휘함으로써 단신의 약점이 잘 눈에 띄지 않도록 했으며, 뛰어난 마술로 위풍당당한 이미지 전파

② 좌우 진영 부하들의 황금비율 유지

나폴레옹은 좌우대립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후, 좌우 진영 인물들을 고르게 기용하여, 모두 포용

양 진영에서 가장 합리적인 인물들을 모아 내각을 구성, 중도 정책을 펴며 국민통합을 시도

2대 총리(Consul) 캄바세레스는 혁명 당시 국왕 弑害者(루이 16세의 처형을 주장, 실행한 인물)로서 급진파

3대 총리 르브룅은 루이 15세 때의 전직 관료출신(혁명파의 공격 대상)

나폴레옹은 양 진영에 대해 때로는 견제하고 때로는 힘을 실어주면서 교묘한 균형을 유지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가의 왕족인 엔기엔(Enghien) 공작을 반역 혐의로 총살

나폴레옹은 엔기엔 공작의 처형명령에 직접 사인함으로써 그의 부하 중 프랑스혁명시 국왕처형에 가담했던 國王弑害派(Regicides)과 책임을 함께 한다는 의지 표명

스스로 부르봉 왕가의 피를 손에 묻힘으로써, 王政復古를 가장 두려워하던 국왕시해파의 신뢰를 확보

오페라 극장에 가던 도중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가 벌어지자, 왕당파의 소행임을 알고도 당시 세력이 너무 강해지던 舊공화파 인물들을 지목하여 추방

③ ‘프랑스혁명의 아들’로 자처

프랑스혁명의 전파자로서 자유, 평등의 이념으로 학정을 일삼던 주변국의 국왕, 황제들에 대해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

나폴레옹 법전 등 내치에서 근대화를 달성함으로써 체제경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대외정복을 성공적으로 수행

절대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전제정치를 지향하지 않고 나폴레옹 법전에 따른 법치를 추구

혁명의 자유사상에 입각하여 이념의 자유를 옹호

스스로 “이집트에서는 회교도, 프랑스에서는 카톨릭 신자, 파리 대학에서는 자유사상가”임을 자처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開戰에 앞서 “병사들이여, 4천 년의 세월이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그대들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연설로 병사들을 격려

나폴레옹 자신이 역사상 성취해야만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의식하고 영광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의미

④ 기민한 정보전 ‘속도와 충격’

말(馬)을 이용하여 자신의 눈(眼)으로 敵의 진영을 정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략-전술을 수립

워털루전투[5]에서 영국군 사령관인 웰링턴[6]은 나폴레옹의 전황 파악능력에 대하여 “나폴레옹 한 사람이 진영에 나타나면, 그 즉시 4만 명의 병력에 해당하는 전력이 증강된다.”고 평가

번개 같은 속도와 충격으로 적을 무력화하는 것이 전략의 핵심

나폴레옹은 각개 부대가 상부의 명령 없이도 독립해서 작전할 수 있게 사단을 각 부대로 분할하고 권한을 과감하게 위양

사단들은 행군 도중 전투대형으로 전개, 더 이상의 명령 없이도 적과 싸울 수 있도록 부대편성

당시 프랑스에서 발명된 연필을 야전용 필기구로 활용함으로써 軍작전 연락의 혁신을 달성

프랑스의 과학자 콩테(conté)가 1795년 연필을 발명

진중의 문서업무, 특히 통신- 연락 업무를 신속- 정확하게 하고 그 기록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함으로써 軍 전술역량을 획기적으로 제고. 나폴레옹은 장교들에게 연필을 실에 매달아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함. 정확하고 빠른 지시전달 및 기록보존으로 책임소재의 명확화, 작전능력 개선 등에 크게 기여

후에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귀향시 연필을 들고 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증거품으로 자랑했다고 함


[1] 500인회: 당시 국민공회(국회에 해당)는 ‘원로원’과 ‘500인회’의 양원제로 구성. 5명의 총재로 구성된 행정부에 대한 지명권은 500인회가, 선출권은 원로원이 보유.

[2] 트라팔가 해전: 1805년 10월 21일 이베리아 반도 남서부 트라팔가 곶의 난바다에서 넬슨의 영국함대가 빌뇌브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한 해전

[3] 나폴레옹 법전: 나폴레옹이 4명의 편찬위원에게 기초를 명하여, 강대한 정치력을 이용해서 제정한 프랑스 民法典. 이 법전이 취하는 소유권의 절대성, 계약자유의 원칙, 과실 책임주의 등의 입장은 근대시민법의 기본적 원리이며 그 뒤에 제정된 각국 民法典의 모범이 됨.

[4] 세계정신(世界精神, Weltgeist):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정신적 원리. 세계영혼(世界靈魂)과 동의어로 사용. 이는 모든 사물 속에서 살아 있는 통일로서, 법칙으로서, 神的인 힘으로서 계속 작용.

[5] 워털루전투(Battle of Waterloo): 1815년 6월 나폴레옹의 지배를 결정적으로 종식시킨 전투. 나폴레옹이 이끈 12만 5천명의 프랑스군과 웰링턴 지휘하의 영국군 9만 5천 명, 블뤼허가 지휘한 프로이센군 12만 명, 합계 20만여 명의 연합군이 벨기에 남동쪽 위털루 남방 교외에서 접전. 6월 16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퇴각시킨 다음, 18일 영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또 다른 프로이센군의 지원으로 4만 명 전사자를 내고 패배. 영국군 전사자 1만 5천 명, 프로이센군 7천 명. 22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6] 웰링턴(Wellington, Arthur Wellesley, 1769~1852): 영국의 군인, 정치가. 1809년 포르투갈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나폴레옹의 프랑스軍과 전투,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을 계기로 프랑스군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낸 후, 프랑스로 추격하여 1814년 파리에 입성. 1815년 연합군사령관으로서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軍을 격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