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
- 국가 리더십 사례: 대처, 이케다, 아데나워, 블레어, 룰라, 페론
- 영국 “대처” 수상의 리더십
- 일본 “이케다” 수상의 국민소득배증계획(國民所得倍增計劃)
- 독일 “아데나워” 수상의 리더십, 라인 강의 기적
- 영국 “블레어” 수상과 독일 “슈뢰더” 수상의 리더십
-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리더십
- 아르헨티나 “페로니즘”
[목차]
1. 강력한 리더십이 중요
2. ‘합의 정치’의 도입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
3. 노사안정과 유연한 노동시장이 경쟁력을 좌우
Ⅰ. 鐵의 여인 대처
1. 등장 배경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공업화에 성공하여 20C 초반까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
빅토리아 여왕은 1837∼1901년 64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Pax Britannica)을 건설 → 영국의 최고 황금기
한때 영국은 전세계 영토의 20%, 인구 25%를 통치. 전세계 식민지를 통해 영국은 국력을 강화
대영제국은 20C 초부터 점차 쇠퇴
에드워드 7세 재임(1901∼1910) 중 영국은 쇠퇴하기 시작. 사회 활력과 국민의 극기심 약화, 엘리트의 긴장 와해가 원인
에드워드 7世 당시의 社會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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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차 세계대전, 30년대의 대공황 발발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에 치명타
2차 세계대전과 영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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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식민지 만이 영국의 해외영토로 남고 나머지 식민지 국가들은 모두 독립
아일랜드(21년), 인도, 파키스탄(47년) 독립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은 영연방(Commonwealth) 내에서 완전 독립(26년)
후발국인 미국과 독일의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영국 제조업의 국제 경쟁력은 현저히 약화
기업 국유화, 복지비용 부담 등으로 기업가정신이 약화된 영국기업들은 국제경쟁력을 완전 상실
제조업의 약화로 영국은 주요 경제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받음
- 부동의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던 조선산업은 세계시장점유율이 77년 4%, ’80년에는 2%로 급감
- 1차 대전까지도 1백만명을 고용하고 있던 석탄산업은 80년에 1/4로 규모가 축소
- 50년 영국은 세계 철강의 10%를 생산하였으나 80년에는 6%로 떨어졌고 생산성도 소련에 이어 세계 최하위
- 자동차산업의 생산성도 낮아 73년 에스코트(Escort) 모델 1대를 생산하는데 영국은 독일보다 67% 추가 인력을 투입
- 수입품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65년 5%에서 82년에는 무려 58%로 급증
합의 정치의 전통은 2차 대전 이후 40년간 지속
합의의 정치(politics of consensus)는 2차 대전 시기의 연립내각에 의해 시작되어 79년 대처내각의 출범과 함께 막을 내림. 40년에 걸쳐 ‘합의’는 영국정치의 기둥 역할
보수당과 노동당 중 어느 쪽이 집권하든 사회의 핵심 집단들 (특히 노조)과의 협의와 자문을 통해 통치 → 코포라티즘적 경향
양당 중 어느 쪽이 집권하든 재정정책을 통해 완전고용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국민에 대한 적절한 사회복지 제공 및 기간산업에 대한 정부통제를 유지하도록 노력
두 가지 합의 내용은 노동당으로서는 당연한 내용이었으나 보수당이 수용하기에는 곤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민감해진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보수당으로서도 복지와 기간산업의 국영화를 전제로 하는 합의 수용이 불가피
전쟁 직후인 45년 복지를 강령으로 내세운 노동당의 애틀리(Clement Attlee)가 전쟁영웅인 처칠에게 대승을 거둔 사건은 보수당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본노선의 변화가 불가피
완전고용을 기반으로 한 노조의 영향력이 강화
완전고용과 국유화의 진전으로 노조의 조직률 및 권한 강화
양당은 51∼64년 동안 완전고용을 선거강령으로 채택할 정도로 고실업은 허용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 그 결과 48∼70년 동안 실업률은 3% 이내에서 안정
국가의 간섭 하에 전시경제가 형성된 결과 전후에도 자연스럽게 혼합경제 개념이 도입되고 기본적인 에너지 부문의 국유화가 단행
실업률이 최저로 떨어지고 주요 산업부문의 국유화로 고용보장이 강화되면서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대폭 강화
전쟁 이후 51년까지 여당이었던 노동당은 모든 관련정책을 노조와 상의하는 선례를 남겼고 이러한 노조의 특권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처정권 이전까지 유지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노조의 영향력은 정부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고비용과 비효율을 초래한 합의정치의 폐해
완전고용을 경제목표의 최우선 순위로 추진한 결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과잉고용이 생겨나는 한편 생산성 향상을 능가하는 임금인상이 매년 반복
사회복지정책은 사회 안정에 기여했지만 과다한 세금부담을 초래
정부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주력할 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 합의라는 개념은 ‘정부개입’ 또는 ‘해결사로서의 정부’를 전제로 하는 것이나 영국 내각들은 경제문제 해결은커녕 어떻게 하면 경제침체를 막고 회복을 도모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조차 없었음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완전고용이 불가능하게 되자 영국 정부는 경제성장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이라고 단정
경기부양 과정에서 국가역할은 계속 확대되어 갔고 이는 재정고갈과 관료주의적 간섭을 초래
“합의정치는 신념, 원칙, 가치와 정책을 저버린 채 문제해결을 회피하며 방법상의 동의만을 구하는 과정으로 전락” (대처 수상)
79년 대처 보수당 정부의 출범으로 수십 년 전통의 합의정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신념정치(conviction politics)’의 시대가 도래
전후∼70년대 후반 영국 정부는 국유화정책을 유지
노동당의 애틀리 정부(45∼51년)는 철강, 석탄, 전기, 가스, 철도, 통신, 방송 분야 등을 잇달아 국유화
이후 보수당 정권 하에서도 국유화정책은 그대로 유지
대처수상 취임 이전 80여개의 기업을 정부가 소유 → 자본주의 국가 중 국영기업이 최다
70년대 후반 영국병 심화로 ‘대영제국 멸망론’까지 대두
높은 인플레이션, 낮은 경제성장률, 계속되는 노조파업으로 사회혼란이 극심
영국의 말기적 현상에 대해 호주의 한 신문이 ‘영국병(British disease)’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
영국병은 국가 개입,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내세우는 영국형 사회주의에 기인
76년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하는 2류국으로 전락
집권 노동당의 친노동자 정책으로 인해 재정적자 확대, 빈번한 파업, 과도한 임금인상 등이 지속
그 결과 외환위기가 초래되어 76년 12월 노동당 정부는 IMF 에 구제금융을 신청. IMF는 40억 달러를 지원하면서 임금억제와 재정지출 삭감을 요구
IMF 긴축프로그램으로 영국은 예산-통화정책의 주권을 포기하고 경제정책을 전면 수정
2년 만에 IMF 관리체제를 졸업하였으나 IMF의 긴축프로그램 후유증으로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영국의 노동조합은 70년대에 ‘제2의 정부’ 행세
1900년 노동조합 운동을 모태로 노동당 출범
‘영국을 지배하는 것이 의회인가, 노조인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 70년대 영국의 빈번한 정권 교체는 노조의 영향력 때문
노동당 정부는 노동조합의 이익을 대변하여 복지정책, 완전고용정책, 노동조합의 과보호정책 등을 실시
노조는 정부의 완전고용정책을 무기로 파업을 통한 임금인상에 주력
68년부터 노동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으나 히스, 윌슨, 칼라한 내각의 노동법 개정 시도는 모두 실패. 히스 보수당 정부는 소득정책을 통해 노조의 자율적인 임금억제를 유도했으나 노조 반발로 실패. 윌슨 노동당 내각도 사회계약추진도 역시 노조 반대로 무산
노조는 노동당의 ‘최악의 친구(worst friend)’라 표현될 만큼 노동당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
IMF 졸업 전후로 정부의 임금정책에 저항하는 전국적인 파업이 발생하여 무정부사태가 초래
임금인상 폭을 둘러싸고 정부와 노조가 마찰. 정부: 5%로 임금인상 억제. 노조: 정부가 제시한 수준보다 5배 이상(20∼40%) 요구
78년 가을∼79년 봄 공공부문의 파업사태 확산. 78년 9월 포드자동차의 파업을 계기로 26년 이래 최대의 총파업 발생. 79년 봄 150만명의 공공분야 노동자들이 24시간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학교, 병원, 공항 등 사회 전기능이 마비
불만의 겨울
국민들의 원성은 가라앉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됨으로써 78년말까지 전국적인 파업사태가 계속되었다. 파업확산으로 소방, 쓰레기 처리, 응급환자 수송, 시체매장 등 국가 주요기능이 마비되었다. 쓰레기는 길거리에 쌓이고 응급환자는 방치되었고, 시체매장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악취가 풍겨났다. 계속되는 공급제한 조치로 주유소에는 석유를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사무실 난방이 끊기는가 하면 단전조치가 확산되었다. (Guardian誌) |
74년 히스 정부의 정치적 패배와 79년 ‘불만의 겨울’로 노동당 정부 침몰
노조의 힘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증가
79년 ‘영국병 치유’를 개혁의 기치를 내건 대처 보수당이 압도적으로 승리
‘불만의 겨울’로 칼라한 노동당 내각의 불신임안이 통과
79년 2월 실시된 총선에서 영국인들은 노조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노동당의 리더십에 실망하여 보수당을 선택. ‘불만의 겨울’이 보수당 정권의 탄생시킨 사건
대처수상 등장 이전의 상황
2. 철의 여인 대처의 등장
1913 영국 중부지방인 랭커셔(Lancashire) 주의 그램덤(Grantham)에서 잡화상인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Alfred Roberts)의 둘째 딸로 출생
※ 그램덤은 영국 왕가의 역사와 관련된 인구 3만명의 소도시
1950년 옥스퍼드대학 서머빌 칼리지 졸업(화학과 미술 전공)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
1947∼51년. 런던의 한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변호사시험 준비
1952년. 데니스 대처(Denis Thatcher)와 결혼
1954년. 변호사 시험 합격(세법 전공)
1959년. 34세에 의원 당선(보수당, 런던 북부의 핀츨리)
1975년. 보수당 당수로 선출
1979년. 여성 최초로 수상에 당선
1983, 87년. 재선, 3선
1990년. 수상직 사임
프로테스탄트(감리교)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
전형적인 중산층 계급
아버지 알프레드는 감리교 교리와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검소한 생활양식을 갖춘 인물. 신념, 자조와 근면, 노력, 성실을 원칙으로 하는 금욕주의자
‘네가 할 일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라고 자녀들에게 강조
잡화상 주인에서 자수성가하여 그랜덤시의 시장에 당선
대처의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
감리교적 신앙심과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이 대처의 인격형성에 그대로 반영
아버지가 대처로 하여금 정치에 입문하도록 한 장본인
어린 시절의 경험을 전통적 가치의 기준으로 삼음 → ‘그랜덤 주의’라고 부름
대처는 대학시절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
서머빌 칼리지는 급진파의 본거지로 대처는 대학생활 동안 외톨이 생활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학생이지만 성적은 보통 (대기만성형)
전공은 화학이었으나 정치에 깊은 관심을 보여 옥스퍼드대학교 의 보수협회(OUCA)에서 회장으로 활동
1945년 20세에 이미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를 위해 선거유세 활동
대처는 조직도 없는 외곬수의 소수파 정치인
그 당시 유머는 보수당 정치가에게 필수 덕목으로, 취미가 넓다는 것은 정치 식견이 넓다는 것을 의미
처칠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아마추어 화가, 히스는 요트맨이며 오케스트라 지휘자. 하지만 대처는 정치 이외의 일에 눈을 돌릴 줄 모르는 정치인
대처는 소련으로부터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음
75년 보수당 당수 취임 이후 첫 연설에서 서방세계의 데탕트 무드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소련을 비난하고 공격
이 때문에 소련 측으로부터 ‘철의 여인(Iron Wo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됨
대처는 프랑스의 드골과 같은 민족주의자
대처는 루디아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작품을 좋아함. 키플링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대영제국을 찬미하는 작품이 많기로 유명
빅토리아시대를 흠모 → ‘빅토리아시대로 돌아가자’는 슬로건
보수주의 정책을 추구
경제주체들의 DIY(Do It Yourself) 정신을 강조. 국유화정책, 지나친 복지정책을 반대
영국을 대중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꿈. 영국 국민 모두를 중류계급으로 만들고 영국인 개개인이 자본주의자가 되는 경제사회를 지향. 영국형 사회주의와는 대치되는 정책 이념
‘큰 정부’를 주장하는 케인즈주의를 배격하고 전후 전통적인 합의제 정치에도 반대. 대처의 ‘작고 강한 정부’는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슘페터 등에 이론적 근거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899~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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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의 정책노선은 키스 조셉(Keith Joseph)으로부터 직접 영향
조셉은 ‘대처리즘의 지적 설계사’, ‘사상의 장관(minister of thought)’으로 불림. 그는 정책연구센터(Centre for Policy Studies) 소장 재직 시 하원의원인 대처를 부소장으로 임명
대처에게 왜 자유시장경제여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심어 줌
Ⅱ. 대처리즘(Thatcherism)
1. 대처리즘 개요
대처리즘(Thatcherism)이란 대처 수상(79∼90년, 3기 집권)이 추진했던 개혁정책을 총칭
대처 수상은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하고, ‘작고 강한 정부’를 지향하여 강도 높은 구조개혁을 추진
- 작은 정부: 규제완화와 시장기능의 극대화(경제부문)
- 강한 정부: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앙정부로 권력을 집중, 포클랜드전쟁 감행(정치부문)
노조 개혁, 공기업 민영화, 정부기능 축소, 기업 규제 완화, 외국인 투자유치, 금융개혁(빅뱅) 등이 주된 내용
포클랜드전쟁은 대처수상의 리더십에 큰 분수령
대처수상도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은 아님
대처 수상은 보수당내 지지기반이 없어 집권 초기에 정적인 히스 전 수상의 인맥들이 내각을 장악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전쟁(82년 3∼6월)을 계기로 대처는 개혁에 필요한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 전쟁 직후 대처수상의 지지율은 60%에 육박.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83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승하여 야당과의 의석 차를 43석→144석으로 확대
포클랜드戰爭과 대처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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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처총리는 영국병 치유를 위해 과거 노동당 정부가 추진하지 못했던 과감한 구조개혁을 추진. 노조 개혁, 국영기업 민영화, 주주의 대중화, 공영주택 불하, 조세체계 간소화와 세율 인하, 교육제도 개혁 등을 추진
대처리즘의 시기별 추진내용
1期 (’79~’83) | 2期 (’83~’87) | 3期 (’87~’90) |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통화금융정책 | 노조개혁, 사유화, 탈규제 | 교육 및 직업훈련 체계와 지방정부 개혁 |
2. 대처리즘의 주요 내용
경제정책을 분배에서 성장 위주로 전환
정책갈등 시 해결 원칙으로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
완전고용 대신 인플레 억제를 거시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
소득세 및 법인세 삭감
세제개혁을 통해 비대해진 국가기능을 축소하고 경제를 활성화
소득세 삭감: 최저세율 33% →30%(79년) → 25%(88년)
주식배당 등 투자소득: 최고세율 83% → 60%(79년) → 40%(88년)
법인세: 79년 42% → 84년 30%
‘시장경제’ 위주의 구조조정에 착수
산업보조금 축소, 공기업 민영화가 최우선
경직된 노동시장과 빈번한 파업, 잦은 피케팅 등 전투적인 노사 분규가 영국병의 주범
대처는 노사관계의 근본적인 개혁과 총체적인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英國病의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불만의 겨울’이 노조개혁의 결심을 굳히게 한 결정적 계기
점진적, 단계적으로 노조 세력을 무력화
히스 보수당 내각은 71년 단일포괄입법을 통해 노조개혁을 시도했으나 노조 반발로 실패한 경험
대처는 79∼90년 동안 5개의 노동법을 통과시켜 노조 내 민주주의를 부활하고 노조의 면책특권을 대폭 축소
노동법 개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음
① 클로우즈드 숍 제도의 완화 → 철폐
② 동정 파업, 지원 파업의 금지
③ 파업권의 확립, 노조간부 선출 등의 주요 안건을 비밀투표제로 할 것
노조의 면책특권
면책특권은 1906년 노총이 노동당을 설립할 당시 제정 면책특권의 주요 내용
면책특권은 노조가 실정법을 초월한 힘을 갖게 하는 기반 |
84∼85년 가장 강력하고 전투적인 탄광노조 파업의 제압은 영국 노사관계의 대전환점이 됨
대처정부와 탄광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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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정부의 노동개혁
구 분 | 勞動法 改正 內容 |
1次 雇用法
改正 (80年) |
「클로우즈드 숍(Closed shop」(채용조건으로 노조 가입 의무화) 채택 시 비밀투표 의무화
2차 피케팅 불법화 2차 파업을 주도한 노조간부에 대한 면책특권 삭제 |
2次 雇用法
改正 (82年) |
매 5년마다 비밀투표로 클로우즈드 숍 유지여부 결정
합법적인 노사분규를 명문화하고 노조간부의 면책특권도 제한 → 정치적 파업, 근로자집단 간 분규, 노동조합 상호간 분규에는 면책특권 불인정 |
勞動組合法 改正 (84年) | 비밀투표를 통해 과반수 지지를 얻은 경우에 대해서만 노조의 면책특권 인정
노조 간부는 매 5년마다 조합원 비밀투표를 통해 선출 노조 조합원의 엄격한 관리 10년마다 조합원 투표를 통해 정치기금 사용여부 결정 |
雇用法 改正 (88年) | 클로우즈드 숍에 대한 법적 보호규정 삭제
클로우즈드 숍 조항 신설을 위한 쟁의 불법화 투표절차 엄격 규제 파업불참 노조원의 권리조항 신설 →조합원 권리보호를 위해 감독관 제도 도입 |
雇用法 改正 (90年) | 클로우즈드 숍 제도의 완전 폐지
모든 2차 쟁의행위 불법화 불법 쟁의행위에 대한 노조 책임 부과 |
노조개혁 이후 노사분규와 이에 따른 노동손실일수가 현저히 감소
노사분규로 인한 연간 노동손실일수는 70년대에 약 1,300만일이었으나 80년대에는 650만일로 감소
대처 수상이 79∼90년 동안 노조를 무력화시킴으로써 90년대 들어 각종 규제완화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가능해짐
노동개혁은 생산성 향상, 노동쟁의 감소, 임금안정에 기여해 영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향상시킴
기업의 해고비용을 감축시켜 주고 유연한 노동시장을 구축
대처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의 조성에 주력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하여 정부기능을 축소하고 규제를 대폭 완화
시장경제 위주의 산업정책을 추진. 기업투자를 촉진하는 각종 규제완화 실시
공영주택의 불하
대중자본주의의 실현 차원에서 ‘주택의 개인 소유화’에 주력
80년대 주택법은 공영주택 거주자들이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현재 살고 있는 공영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여 공영주택의 매각을 촉진
주택 구입시 저리 융자제도를 활성화하고 주택 융자금의 반환 이자에 대한 소득세 감면조치를 실시
84년에는 시장가격의 거의 반액 정도로 가격인하를 단행
79년∼83년 6월까지 약 50만호의 공영주택을 매각하는 등 10년간 주택 소유자 수가 백만 명 이상으로 증가. 영국민의 주택소유율은 68%로 유럽 최고수준
공영주택의 불하는 일부 노동자 계급을 보수화시켜 재선에 유리하게 작용
정부조직의 혁신
공무원 수 감축: 80년 75만명 → 87년 64만명 → 97년 51만명
개혁 프로그램인 ‘넥스트 스텝(Next Step)’ 추진. 반관 반민 단체인 각종 대행기구(agency)를 설립하여 정부의 행정서비스를 대폭 이관-위임. 110여개 대국민 행정서비스 사업을 각종 대행기구에 이관
80년부터 강제적 경쟁입찰제도인 CCT(Compulsory Competitive Tendering)를 통해 지방정부 업무에 경쟁개념을 도입. 지방정부와 민간기업이 함께 입찰에 참여하여 낙찰된 기관이 공공서비스를 공급
대처 정부는 공기업의 민영화를 지속 추진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기업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 79년까지 공기업의 적자로 매년 30억 파운드 이상의 재정손실 발생
민영화 추진의 3대 원칙과 효과
원칙 | 효과 |
대상사업을 최대한 경쟁에 노출 | 효율성 촉진, 균등 이익 분배 |
민영화 과정에서 국민 주식 소유 확대 | 노조 반발 무마 및 고용 안정 |
민영화 과정에서의 최대 매각 수익 실현 | 정부의 재정 건전화 기여, 국민의 납세 부담 감소 |
대처정부는 집권 13년 동안 BP를 시작으로 48개의 공기업과 공공사업을 민영화
민영화정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 민영화로 인한 경제악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보수당내에서도 점증. 국부 유출론, 소비자 보호론, 실행 불가능론 등 민영화정책 자체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제기
하지만 대처는 민영화 추진상의 문제점을 최소화하면서 민영화 작업을 강행.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대처정부는 적절한 비율의 특별주식 (황금주식)을 발행
주요 공기업 민영화 사례
매각 대상 | 업종 | 賣却時期 | 매각비율(%) | 매각수입
(백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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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Petroleum | Ⅰ | 석유 | ’77. 6월 | 17. 0 | 564 |
Ⅱ | ’79. 11월 | 5. 0 | 290 | ||
Ⅲ | ’83. 9월 | 7. 0 | 566 | ||
Ⅳ | ’87. 10월 | 36. 8 | 240 | ||
British Tech. Group | ICL | 전자기기 | ’79. 12월 | 24. 4 | 37 |
Fairey | 특수기기 | ’80. 6월 | 100. 0 | 15 | |
Ferranti | 전자기기 | ’80. 7월 | 50. 0 | 43 | |
Inmos | 반도체 | ’84. 8월 | 76. 0 | 95 | |
British Airways | Inter. Aeradio | 항공통신 | ’83. 3월 | 100. 0 | 60 |
BA Helicopters | 운수 | ’86. 9월 | 100. 0 | 14 | |
BA | 운수 | ’87. 2월 | 100. 0 | 892 | |
British Rail Group | Brit. Trans. Hotel | 호텔 | ’83. 3월 | 45 | |
Sealink UK | 운수 | ’84. 7월 | 100. 0 | 66 | |
British Gas Group | Wytch Fram | 석유 | ’84. 5월 | 100. 0 | 80 |
British Gas | 가스 | ’86. 12월 | 97. 0 | 5,434 | |
British Telecom | Ⅰ | 통신 | ’84. 11월 | 50. 2 | 3,916 |
Ⅱ | ’91. 12월 | 25. 9 | 5,403 | ||
Ⅲ | ’93. 7월 | 21. 9 | 5,051 |
공기업 민영화 이후 재정수입이 증대되고 민영화된 공기업들은 대부분 경영 정상화에 성공
80년대 후반 공기업 매각으로 정부는 매년 재정수입 55억 파운드를 마련(총 600억 파운드)
80년 178만 5천명에 달하던 공기업 종사자수는 92년 47만명으로 대폭 감소하고 기업들은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확보
공기업 민영화 사례와 성과
대상기업 | 추진 내용 | 성과 |
British Petroleum | 순차적 지분 매각(65. 8%)을 통한 민영화 | 실질적인 소비자 가격 35% 인하로 인한 국민 부담 감소 |
British Airways | Inter. Aeradio, BA helicopters등 자회사 매각을 통한 100% 민영화 |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항공회사로 발돋움 |
British Telecom | 순차적 지분 매각 | 전화회선 30% 이상 증가 |
전국민의 주주화(Shareholder Economy)를 통해 대중자본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구도를 해소
공기업 민영화 시 종업원지주제를 적극 도입한 결과 종업원의 90% 이상이 자사주식을 보유
- 주식보유 인구가 14명당 1명에서 4명당 1명으로 급증
- 79년에 300만명이었던 개인주식 보유자가 약 1,100만명으로 증가
대처정부는 79년 10월 외환거래 자유화를 전면 실시
외환거래 관련 대부분의 규제가 철폐됨으로써 대외 금융거래가 완전 자유화. 기업과 개인은 본국 외국환은행과 취급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해외예금, 증권투자가 가능
그러나 외환자유화에 따른 부작용(자본유출 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이 실시되고 영란은행(BOE)의 은행감독업무가 강화
대처수상은 금융시장의 불안과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환자유화를 지속적으로 추진
당시 전 보수당 당수이자 수상이었던 에드워드 히스는 물론 노조 등은 심각한 실업문제와 국부유출 문제를 제기하며 외환통제의 필요성을 주장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융자유화는 지속되어 ’86년 빅뱅 (Big-Bang)이라 불리는 금융제도의 획기적 자유화로 연결
6) 외국인투자 적극 유치
투자환경의 대폭 개선
내외국인 차별정책의 전면 철폐
투자관련 규제의 완화 내지는 철폐, 각종 인센티브 제공. cash grant 확대, 법인세 감면, 과실송금 규제 완화 등
대외홍보를 통한 적극적인 유치활동 전개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의 적극 개입
79년 상공부 산하에 투자유치 전담기구 영국투자청(IBB) 신설
Ⅲ. 대처리즘의 성과
1. 경제적 성과
80년대 중반 이후 영국경제는 체질 개선에 따라 본격적인 성장국면에 진입
영국경제는 루트(√)형 경제사이클을 보이면서 점차 회복
81∼82년 마이너스(-) 성장을 보인 이후 80년대 중반 이후 4∼5% 성장을 지속
영국경제 성장률 추이(75∼88년), 자료: IFS
대처 집권기에 국민소득 1만불을 달성
대처 재임기간(79~90년)중 연평균 6. 6%의 인당 GDP 성장 달성
84년 인당 GDP 1만불 시대를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12년 후인 96년 2만불을 달성
영국의 국민소득 및 성장률 추이
80년대 중반 이후 영국경제의 체질 개선과 빅뱅 등의 규제완화로 외화가 대규모로 유입되어 자본수지가 흑자로 전환
자본수지 흑자가 87년 280억불, 88년 321억불로 급증
영국의 자본수지 추이, 자료: IFS
무분별한 노조활동 규제로 80년대 후반부터 파업건수와 노동손실일수가 대폭 감소
대처정권의 노조개혁으로 매년 1,000건이 넘던 파업건수와 쟁의참가자들이 급격히 감소
특히 90년대 들어서는 유럽 국가 중 독일 다음으로 안정된 노사관계가 정착
노사관계 안정이 영국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
파업건수와 노동손실일수가 감소함으로써 노동생산성 향상
강력한 노조 때문에 영국 진출을 꺼려왔던 외자계 기업들도 영국진출을 가속화
영국의 노사분규 추이
물가는 81년 이후 안정되기 시작했으나 실업자수는 정치적 마지노선인 100만명을 지나 85년에는 300만명을 돌파
고용을 희생해서라도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긴축통화정책과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한 대처정책이 낳은 산물
70년대 초반 오일 쇼크 전까지 영국은 거의 완전고용을 유지. 이는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와 물가불안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대가
대처 수상은 실업문제와 관련하여 단기적인 재정정책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장의 힘에 의해 해결한다는 기본정책 고수
11%를 웃돌던 실업률이 80년대 중반 이후 구조조정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점차 하락
하지만 실업률이 구조조정 이전 수준(5%)으로 낮아지는 데는 약 10년 이상 소요
실업자수 및 실업률 추이(71∼90년)
영국은 대처리즘에 힘입어 세계 4위, 유럽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
영국은 99년부터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 내 2위,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
유럽에서 가장 실업률이 낮은 국가 중 하나
영국은 저렴한 노동비용, 유연한 노동시장, 규제완화로 유럽 제1의 외자 유치국으로 부상
적극적인 외자계 기업 유치정책은 경제성장과 실업문제 해소에 결정적으로 기여
영국의 외자유치 추이
2. 정치적 성과
현재도 대처리즘은 영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기조로 정착
대처수상의 지지율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때 15%까지 하락했으나 83년, 87년 총선에서 연속 승리
보수당은 대처 이후에도 총선에 승리하여 모두 18년간 장기집권에 성공. 노조개혁을 필두로 한 대처의 시장경제 개혁이 성공한 덕분
97년 집권한 블레어 노동당 정부도 대처리즘을 계승
Ⅳ. 시사점
1. 강력한 리더십이 중요
대처 수상은 명확한 국가비전을 실천한 지도자
대처수상은 국민들에게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라는 국가비전을 제시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대중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를 집권기간 중 실현
- 공영주택 불하 정책 → 국민 모두가 셋집이 아닌 자신의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 실현
- 공기업 민영화 → 국민주를 통해 전 국민을 주주화
성장 잠재력을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
노동개혁, 공기업 민영화, 외환거래의 전면 자유화 등 모든 개혁조치에는 강한 반발이 따르기 마련
‘철의 여인’ 대처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2차 세계대전 이래 만성화된 영국병을 치유
82년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대처의 리더십 강화
명확한 정책 제시를 통해 국민의 기대와 선택을 도출
최대의 위기상황에서 집권한 대처 수상은 정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제시. 최우선 순위 정책은 긴축을 통한 인플레 억제와 과잉노동력 제거를 위한 노조의 면책특권 철폐
60년대 이후 영국 역대 수상들과 달리 포퓰리스트(populist)로서의 면모를 전혀 지니지 않은 대처 수상은 인기 없는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도 엄격한 언행일치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획득
정책의 일관성은 실업률 두 자리, 실업인구 3백만명의 고실업 사태에서도 총선에서 승리하게 한 요인
특정 집단에 휘둘리지 않는 일관된 개혁이 필요
대처총리는 노조 및 공기업의 민영화를 일관되게 추진
1년여에 걸친 탄광노조와의 대치상태에서 국민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초 원칙을 철저히 고수
2. ‘합의 정치’의 도입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
‘합의’는 성숙한 민주주의 결정방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고 방해할 가능성
합의정치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의 경우 노사정 합의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
영국의 경우 합의 정치의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목적보다 절차를 우선시하는 왜곡된 방향으로 발전. 영국은 합의의 비용을 더 이상 지불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합의 구도 자체를 포기
합의정치는 목적보다 절차가 강조될 경우 비효율적인 의사결정 메커니즘으로 전락
3. 노사안정과 유연한 노동시장이 경쟁력을 좌우
전후 영국의 노사관계는 노조가 근로자 보호에만 치중할 경우 ‘시장의 마비’를 초래할 수 있음을 입증
노조가 점차 정치 세력화하면서 조직 이기주의 경향이 심화. 회사의 생산성이나 경쟁력과는 상관없이 근로자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꾸준히 향상시키려는 논리가 지배
임금수준과 근로조건에 대한 지나친 요구는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저하
영국 노조는 통치 파트너로 선정되면서 엄청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폐해가 심화
영국의 노동개혁은 국가경쟁력 회복에 있어서 유연한 노동시장의 중요성을 보여 줌
영국의 노동개혁으로 노사관계의 안정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제고
고질적인 영국병이 치유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제고되자 외국기업의 영국 진출이 급증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소득격차 심화, 고용안정 저해, 소속감 하락, 장기실업자 증가 등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유연화 정책의 도입-시행이 불가피하며 가장 확실한 경제적 성과를 가져다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