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식 변호사가 쓴 «남자는 싸우고 여자는 이어간다»라는 책에서 “20세기 학습서 – 미래인이 보는 20세기” 부분을 발췌했다. 미래 전망에 탁월한 식견을 보인다. 성대MBA과정에서 많이 활용했다. 성대MBA home
[목차]
- 초역사 시대
- 신(神)
- 군대(軍隊)
- 재산(財産)
- 살인(殺人)
- 실업(失業)
- 여성(女性)
- 감시조직(監視組織)
- 재판(裁判)
- 존재(存在)
- 집합표상(集合表象)
- 영성(靈性)
- 민주주의
- 지식(知識)
- 범죄(犯罪)
- 사랑
- 생명(生命)
- 이성과 상상력
- 가난과 부
- 학습과 교육
- 전사문명(戰士文明)
- 시간(時間)
- 주식
- 화폐와 가치매체
- 자유(自由)
- 상인문명(商人文明)
- 세금(稅金)
- 국가와 공동체
- 화폐체제(貨幣體制)
- 정의(正義)
- 자본주의
- 전쟁
- 경제시대의 종언
- 문인문명(文人文明)
- 문화공동체의 필러
- 권력과 헤게모니
- 환경문제
- 인간
- 역사관
-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 고난과 지혜
초역사 시대
우리는 20세기를 학습하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초역사(超歷史)시대를 살고 있다. 이에 비해 20세기는 역사시대였다. 초역사시대로의 문명의 전환은 21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인류는 21세기를 거치는 동안, 일찍이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많은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익숙했던 것들은 모두 진부한 것이 되었고, 새로운 것들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이 변혁의 파도에 국가, 강대국, 민주주의, 화폐경제, 산업사회, 욕망의 문화, 민주주의 등 모든 것이 휩쓸려 갔으며 인간의 삶, 사회, 문명이 한꺼번에 바뀌었다. 초역사시대란 무엇인가? 정치경제적 사건이 없는 시대이다. 그러면 역사시대란 무엇인가? 정치경제적 사건이 세상을 변화시키던 시대이다.
신(神)
우리는 신과 함께 하고 있으며, 우리는 신과 함께 함으로써 온전하다. 우리는 표상을 초월하는 실재로서 신과 함께 한다. 그러나 20세기의 사람들은 신과〈함께 한〉것이 아니라 신을 대상으로〈복을 빌었다〉하느님에게, 부처님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돈이나 권력을 얻게 해 달라고 빌었고, 좋은 일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또는 나쁜 일이 자신에게는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욕심으로 신을 변경시키려는 터무니 없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신에 대해 투쟁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만든 그림자를 두고 다투었던 것이다.
군대(軍隊)
20세기 국가의 최대 특징은 군대다. 이것은 그 이전시대의 전사계급이 물적 조직으로 전환된 것이다. 폭력은 이제 특정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의무가 되었다. 우리들은 폭력이 의무가 되는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를 학습하면 그러한 시대는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군대는 21세기에 문명의 전환이 개시될 즈음에 소멸하였다. 20세기 사람들은 상비군이 소멸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 지 못했다. 그들에게 폭력은 인간사회의 불가피한 요소였다.
재산(財産)
20세기는〈소유적 개인주의〉의 사회였다. 인간은 개인으로 규정되고, 삶은 재산의 소유에 의지하는 생존원칙이 지배했다. 노예는 채찍의 위협 속에 있지만, 기아(飢餓)의 위협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문명은 인간(개인)을 기아의 위협과 부유함에 대한 욕망의 가운데에 위치시켰다. 21세기에 이러한 구조가 전복되었다. 재산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노동이고 사회적 연대이다. 그리하여 21세기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삶의 구조를〈재산〉이라는 물신(物神)을 거치지 않고, 사회적 연대에 직접 연결시켰던 것이다. 중요한 재산은 이미 정보화되었기 때문에 실체성이 소멸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지, 재산이라는 물신을 추구하지 않는다.
살인(殺人)
20세기에는 살인이 일상적인 것이었다. 개인적인 살인도 매일 일어났지만, 아예 살인을 직업으로 하는 폭력산업(마피아 등)도 있었다. 나아가 국가는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을 영웅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20세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야만인이 아니라 가장 진보한 문명인이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때… 가령 원자탄으로 1초에 수백만을 죽일 수 있을 때… 더욱 문명적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과 같은 유(類) 즉, 인간을 죽인다. 이것은 인간이〈본능적 존재〉가 아니라〈표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은 본능에 의해 제약되나 인간은 행동에 있어 본능에 의한 제약이 없다. 결국 문명이 그것을 좌우한다. 우리시대에 이르러 살인은 사라졌다.
실업(失業)
우리 사회는 노동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 소득(所得)이 주어진다. 그리고 약 70%의 사람들이 직접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사람들은 소득과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실업자라고 불렀다. 국가는 실업자를 없애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실업률이 낮은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20세기 사람들은 시간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은 평생 동안 일할 때도 있고 일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시대에는 누구나〈오늘〉을 살기 위해 오늘〈일해야〉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굶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미의 사회에서도 80%의 개미가 놀고 먹는다. 인간이 개미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여성(女性)
오늘날의 여성은 남성에 비해 우월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 자신에게 무조건 지불되는 소득(연대소득)만이 아니라, 양육하는 미성년의 아이들에게 지불되는 소득(연대소득)이 그 어머니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성은 남성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우월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와 사회를 근원적으로 전복시켰다. 이것으로 착취적이고 노예적인 사랑과 결혼이 사라지고, 진정한 사랑과 결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직업이었던 매춘이 사라졌다. 20세기의 여성들은 여권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득제도의 변혁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감시조직(監視組織)
20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옥을 알아야 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20세기만큼 감옥이 번창한 시대는 없었다. 감옥이란 다수의 사람을 하나의 공간에 집합시켜 소수의 사람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감시조직이다. 이러한〈감시조직의 원리〉는 20세기 사회전반에 응용되었다. 감옥, 군대, 학교, 병원, 관료조직, 기업조직 등 일체의 사회조직은 감시조직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었다. 20세기 사회는 말하자면 감옥의 사회였다. 그러나 평생 감옥에만 있었던 사람은 자신의 삶이 감옥의 삶인지 알지 못한다. 20세기의 인류가 그러했다. 이러한 감시조직은 21세기에 이르러 커뮤니케이션 조직(人的 組織)으로 대체됨으로써 소멸하였다. 일정한 시·공간에 집합시켜 통제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감옥과 군대와 관료체제는 소멸하였고, 학교와 기업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 변형되었다.
재판(裁判)
20세기 사회에서는 사법제도가 중요했고, 검사·판사·변호사 등의 직업이 권위가 있었다. 죄수를 수용하는 거대한 감옥이 있었고, 공개된 법정에서 재산싸움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한 하나의 예이다. 하지만 그들이 특별히 약하거나 권태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사회에서는 참으로 많은 범죄와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왜 그토록 범죄와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는가를 반성하지 않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나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인간사회에는 당연히 범죄가 많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분쟁이 드물다. 사법제도는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화폐사회는 끝났고, 우리는 소유에 삶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연대가 개개인의 삶을 보장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믿는다.
존재(存在)
우리는 존재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다. 그런데 20세기의 인류-서구문명-의 철학, 과학, 그리고 사유를 지배한 것은〈존재〉라는 개념이었다. 그들은 존재를 전제하고 존재의 관계와 법칙을 이해하려 했고 근원적 존재(실재)를 탐구했다. 그들은 신도 존재라고 생각했다. 존재라는 것은 실재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표상이다. 중세적 신이 중세인이 창조한 표상이라면, 존재라는 것은 근대인들이 창조한 표상 (집합표상)이었다.
집합표상(集合表象)
인간은 생각(집합표상)의 포로이고, 사회는 공통된 사고방식(집합표상) 위에 성립한다. 동물은 본능적 존재인데 대해 인간은 표상적 존재이다. 우리의 생각(집합표상)은 결국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추구하는 것, 사회, 문명… 이 모든 것은 결국 집합표상이고 환상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환상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사람들은 진리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들은 종교적 진리, 과학적 진리, 이데올로기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환상을 진리라고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지성에 중요한 것은 집합표상이 환상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성(靈性)
오늘날 우리에게 영성이라는 관념은 익숙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발견한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 바로 정신세계라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우리는 사용한다. 초역사시대의 무리 문명은 바로 이러한 영성, 정신세계의 개척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시대에는 이러한 영성의 세계를 석가, 예수, 마호멧 등의 이름으로 우상화시켰다. 한때는 그 반동이 일어나 종교가 쇠퇴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20세기 인류)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진리가 인간에게 열어주는 해방을 알지 못했다. 인류가 그 말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21세기에 일어난 문명의 전환 이후이다.
민주주의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진부하게 하는 거대한 변화가 21세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권력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교육과 문화에 관한 권한이 정치가의 손에서 떠났다. 이어서 경제에 관한 권한도 국가 권력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권력은 법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과 사법의 성격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정치인들의 게임, 정치 권력자의 선출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나 권력 자체가 우리에겐 중요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식(知識)
문명의 무게는 지식의 깊이이다. 문명이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조형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축적된 지식이다. 우리들의 문명은 지식의 축적 위에 있다. 역사 이래의 모든 지식이〈지적 인프라스트락처 Knowledge Infrastructure〉에 축적되어 있다. 너무나 방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어떤 분야의 지식을 모두 알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또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지적 인프라스트락처에 축적된 지식을〈사용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이다. 20세기 사람들은 어떤 분야의 지식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저 중세 사제의 후예들-을 지식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했다.
범죄(犯罪)
우리 사회에는 범죄가 거의 없다. 일반 사람들은 범죄가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류가 이러한 사회에 도달하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운 길을 걸어왔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20세기의 사회에서는 수많은 범죄와 범죄인을 처벌하는 절차에 관여하는 거대한 기구가 있었고, 범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은 항상 만원이었다. 21세기에 문명이 전환하면서 모든 것들은 일소되었다. 범죄의 온상이었던 화폐사회가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사회는 화폐가 아니라 정보에 의하여 조직된다. 인간이 이러한 지혜에 도달하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실로 그것은 간단한 이치인데도 인류는 왜 그것을 일찍 몰랐을까? 그것은 역사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이다.
사랑
우리나 20세기의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예찬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도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회적인 가치지만, 20세기의 사랑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였다. 우리는 성적 엑스타시에 우월한 영적 엑스타시를 보편화시켰지만, 20세기 사람들은 오직 섹스만을 유일한 것으로 알았다. 여자와 섹스의 노골적인 상품화는 20세기의 특징이다. 인생이 진실한 환상이라면, 사랑은 환상의 진실이다. 그것은 표상적 존재가 표상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길이다. 그러나 20세기는 이 보편적 초월이 소유와 집착에 의해 오염되었다.
생명(生命)
오랫동안 인류는 표상적 자아와 생물학적 생명 그리고 연대적 생명을 혼동해 왔다. 우선 인간은 표상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지, 생물학적 생명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식물인간이 되는 것(표상적 자아의 종언)을 두려워하지, 식물인간이 죽는 것(생물학적 생명의 종언)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 보통 자아로 인식하는 표상적 자아(자아의 집합표상)은 사실은 실체가 아니라 관념적 환상(幻想)이다. 진정한 실재는 개별적 자아를 초월하는〈연대적 생명〉내지〈우주적 생명〉또는〈신〉이다. 그러나 연대적 생명은 개아를 소멸시켰을 때 인식의 지평에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환상으로부터의 깨어남이다. 20세기에는 개인주의 사회였으며, 말하자면 환상적인〈我相의 사회〉였다. 21세기 연대적 문화에로의 전환에 따라, 연대적 생명, 연대적 자아는 상식화하였다. 그것이 역사를 지양(止揚)하였다.
이성과 상상력
20세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이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이성이란, 사실은 표상(表象)의 문법(文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성이란 결국 상상력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이것은 깨달음의 정신적 구조를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진리나 창조성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깨달음의 산물이다. 그리고 깨달음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의 확장에서 오는 것이다. 깨달음 자체가 상상력의 확장인 것이다. 우리들은 합리적이 아니라 창조적이다.
가난과 부
우리는 부(富)와 자본을 정보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부와 자본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창조하였다. 이제 자본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의사 결정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20세기는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전의 역사시대이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부가 전부였고, 사람들 모두가 오로지 부를 추구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었고, 거리에는 구걸을 하는 거지가 있었다. 실로 인간사회에서 거지가 없게 하는 일은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인류는 역사에서 해방되었다. 우리가 20세기를 이해하는 핵심의 하나는 그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학습과 교육
오늘날 학습제도(교육제도)의 핵심은 지적 성취에 대한 고정한 평가제도이다. 학습의 정도를 어떻게 공정하게 인정해주고 평가정보로서 공시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정교하고 광범한 분야에 걸친 세밀한 평가를 시행하고, 이것을 자격제도와 연계시키고, 사회적 정보로 축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통합원리-공시와 신뢰의 원칙-의 교육적 구현이다. 20세기의 학습제도는 평가제도가 아니라 학교제도였다. 20세기 사람들은 학습(교육)이란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교육을 문해력(文解力, literacy)의 향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식의 주입으로 생각했다.
전사문명(戰士文明)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에는 세 종류의 문명이 있었다. 전사문명, 문인문명, 상인문명이 그것이다. 21세기의 전환은 상인문명에서 문인문명에로의 전환이었다. 전사문명에서 지배계급은 전사였다. 중세의 기사들은 오직 싸우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들은 문인처럼 학습하는 것을 귀찮아 했으며, 상인처럼 화폐를 계산하거나 투자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음에 직면하는 용기 있는 삶을 선호했다. 전쟁이 없어지자 오락으로 만든 토너먼트 같은 것도 거의 전쟁의 성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전사문명은 여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쳐 여자들이 폭음을 하거나 하녀를 걷어차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0세기의 상인문명에서는 이러한 전사들도 상인화되었다. 그들은 칼과 총 대신 냉정한 계산과 과학으로 살육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사적 명예감도 없었다.
시간(時間)
20세기의 사람들은 시간이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흐름이 아니라 생성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모든 사물들이 변화, 운동하는 리듬이다. 그런데 이 변화의 리듬이 모든 사물들에 일정하게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든 사물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세계적 연대성의 표현이다. 시간은 바로 당신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주식
오늘날 경제사를 학습하는 사람들은 20세기에 실재했던〈주식〉이라는 제도를 대단히 신기하게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학습하면 학습할수록 신기하고 기묘한 것이다. 우리가 볼 때 20세기 사람들은 마치 노름꾼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사고 팔면서 노름을 했다. 그것도 사회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주식이라는 것을 사고 파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게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날그날의 주식시세를 들여다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으며, 자신의 카드 패를 어떻게 바꿀까를 연구했다. 이는 참으로 희한한 풍속도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일하려고 하는데도 주식시장이 붕괴함으로써 대공황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공황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식과 금융시장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화폐와 가치매체
20세기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가치매체(value media)라는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가치매체라는 범주가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렇다고 20세기 사회에 가치매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화폐가 바로 20세기의 가치매체였다. 그것은 유일한 가치매체였다. 모든 사람들은 오직 화폐만을 추구했고, 화폐가 모든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유일한 가치매체였다. 21세기에 일어난 문명의 전환은 정보혁명과 함께 화폐를 많은 가치매체 중의 하나로 격하시켰고, 이러한 가치매체들은 정보화 되었다.
자유(自由)
우리는 자유에 관해 논의하지 않는다. 자유란 큰 소리로 외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유란 그야말로 지고의 가치였다. 그들은 심지어,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방식이라고까지 추앙하였다. 자유란 신분계급체제에서 화폐체제로 이행하면서 형성된 개념이다. 그것은 사실 화폐의 선물(膳物)이었다. 문명이 전환한 우리들의 공동체에 있어서는 국가와 권력이 소멸함으로써 자유란 이제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어서 논의할 필요도 없고 이념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또한 연대 경제공동체가 성립함으로써 소유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자유나 소유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다.
상인문명(商人文明)
20세기 문명은 전형적인 상인문명이다. 원래 신분계급사회에서 상인문명이란 지배계급이 토지 소유를 추구하거나, 원거리 교역에 의한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사회의 문명이다. 상인문명의 지배계급은 싸우는 전사도 아니고, 학습하는 문인도 아니며, 계산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20세기의 문명은 바로〈화폐가 투입된〉상인문명이었다. 화폐가 모든 경제적인 관계를 매개하고, 화폐가 일체의 가치에 대한 척도가 되어 버리자, 인간들 역시 화폐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전사도 월급을 받는 자(군인)가 되었고, 문인도 지식을 파는 자(지식인)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의 문명이었다. 20세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명이 상인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가장 발전된 문명으로 믿었다. 20세기의 상인문명은 21세기에 문인문명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동시에 동양문명의 부활이었다.
세금(稅金)
20세기에는 국가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앞서 말한 바 있다. 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화폐를 징수하였는데, 그것이 세금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세금이 없다. 우리의 공동체에서는 세금을 전혀 징수하지 않는다. 20세기에 세금이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로, 모든 소득은 개인소득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화폐가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그 양을 실체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공동체에서는 소득은 모두 개인소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금 문제는 화폐정보에 의한 통합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와 공동체
세계는 세 가지 종류의 공동체가 있다. 문화공동체, 경제공동체, 국가공동체 (법률공동체)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 공동체는 공간적 영역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대체로 문화공동체의 영역이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경제공동체의 영역이 크며, 법률공동체의 영역은 작다. 개인은 모두 이 세 가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버리고 다른 공동체에 자유롭게 소속될 수 있다. 또 기존의 공동체 내에 사는 사람들이 더 작은 공동체를 독립적으로 창설할 수도 있으며, 작은 공동체가 합해져 더 큰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20세기를 공부할 때,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는 이러한 공동체의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 대신 국가라는 것이 있었다. 그 당시 인류와 지구는 국가에 의해 평면적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국가에 소속되어 태어났다.
화폐체제(貨幣體制)
20세기 사회는 중세의 신분계급을 화폐가 대체한 사회였다. 화폐는 토지와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고, 폭력을 물적 조직(군대)으로 만들었다. 21세기에 바로 이러한 화폐제도에 근원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두 가지 동력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정보혁명은 화폐를 정보화 하는 길을 열었고, 새로운〈가치매체〉가 창조됨으로써 화폐와 그 기능이 재규정되었다. 화폐는 부와 자본으로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20세기 사회의 본질이 변혁되었다. 이제 화폐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인간과 인간의 삶은 화폐에서 해방되었다.
정의(正義)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키케로의 정의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지만 그것은 철학적 담론일 뿐이다. 실제 현실적으로 정의란 언제나〈강자의 이익〉이었다. 이것이 역사시대의 정의였다. 우리 초역사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의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의의 개념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정의라는 개념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정의의 본질은 힘의 문제였다. 폭력이 사회적으로 효력을 상실함으로써 힘에 의한 불의(不義)가 소멸했다. 경제가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으므로 물질의 분배에 있어서의 불의가 소멸했다. 진리(정당성)를 쟁취하는 투쟁이 소멸함으로써 집합표상에 있어서의 불의가 소멸했다. 그리고 불의가 소멸함으로써 정의도 소멸했다.
자본주의
20세기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관해 논쟁했다. 그것은「웃음은 악마의 것인가 신의 것인가」에 관한 중세논쟁처럼 그 시대 특유의 논쟁이었다. 우리는 20세기를 자본주의가 아니라 화폐체제로 본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화폐에 의해 매개되고, 일체의 가치가 화폐에 의해 규정되고, 일체의 공기가 화폐애(貨幣愛)에 의해 종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체제에서 화폐는 정보수치의 일종이다. 그것도 지극히 원시적인 정보매체이다. 우리의 사회는 화폐가 아닌, 다양한 정보에 의하여 통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환은 간결한 것이었으나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부(富)가 정보화 함으로써 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사라졌다. 또한 자본이 정보화 함으로써 불경기나 대공황이 사라지고, 화폐정보를 조절하는 경제공동체가 독립함으로써 국가가 변혁되었다.
전쟁
20세기 사람들은 전쟁은 인간사회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전쟁은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이 그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사회의 하나의〈제도〉이다. 제도로서의 전쟁은 노예제도나 신분계급과 같이 폐지될 수 있는 것이라는 집합표상이 보편화하는 데는 21세기 중기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제도로서의 전쟁은 21세기 중기에 철폐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쟁은 인간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군대의 폐지와 함께 이루어졌다. 국가가 여러 종류의 공동체로 분화하자, 국가간의 투쟁인 전쟁이 무의미해 졌으며, 공동체의 성격이 변화함으로써 상비군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다.
경제시대의 종언
근대 500년은 인류 역사상 유일한 경제시대였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경제에 있었고, 인간의 삶은 경제적 삶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경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불과 5%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실현적인 일,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우리 사회에서 화폐와 시장은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상관없이 받는 소득(연대소득)이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경제보다는 문화가 더욱 중요한 시대로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교육과 문화부문에 종사하고, 인간의 관심은 문화적 가치를 향했고, 삶은 문화적 삶이 되었다. 그것은 인류사회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이었다. 경제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사랑에의 길이었다.
문인문명(文人文明)
특수한 문명의 하나로 문인문명이 있다. 중국의 송나라 이후, 한국의 조선시대, 서구 중세 사제들의 문화 등이 그것이다. 문인문명이란 지배계급이 학습자들인 문명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한때 과거라는 독특한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지배계급의 출세 길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 관문을 뚫기 위해 학습에 열중하였다. 지배계급이 전사나 상인이 아닌 학습자들이라는 것은 특이한 점이었다. 21세기에 일어난 문명의 거대한 전환은, 동아시아에서 성숙된 문인문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정보혁명이 문인문명의 부활에 한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과거의 상인적 활동보다 문인적 활동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되었으며, 경제보다는 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문화공동체의 필러
우리 사회에서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되는 지위는 정신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문화공동체의 필러(Pillar)이다. 경제공동체나 정치공동체(국가)에는 세계조직이 없지만, 문화공동체에는 세계조직이 형성되어 있고, 세계 최고의 필러도 존재한다. 물론 각 지역의 문화공동체에도 필러가 존재한다. 필러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필러는 단지 인류를 위하여 고뇌하고 말할 뿐이다. 필러는 다만 정신적 권위의 상징일 뿐이다. 이 정신적 권위야말로 권력이나 자본에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권력의 사회가 아니라 정당성의 사회이며 윤리의 사회이다. 20세기는 권력의 사회였고 자본의 사회였다.
권력과 헤게모니
18세기에 일어난 서구의 민주주의 혁명은 권력을 입법권·행정권·사법권으로 분리시켰다. 21세기에 일어난 문명의 전환은 헤게모니를 정치 헤게모니, 경제 헤게모니, 문화 헤게모니로 분리시켰다. 과거의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은 모두 정치 헤게모니였다. 그러고 그 외에 화폐와 사회 전체의 자본을 관리하는 경제 헤게모니가 창조되었다. 또한 교육과 문화적 결정을 하는 문화 헤게모니가 분화되었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구조가 새로운 세계의 사회체제이다. 이렇게 권력이 헤게모니로 변화함으로써 권력적 억압, 독재, 인권 탄압, 전쟁…… 등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환경문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문명의 대전환을 강요한 힘은 환경문제에서 나왔다. 불행하게도 그 교훈은 엄청난 환경재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인류에게 깨달음으로 왔다. 기상 변화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엄청난 삼림지역이 사막화했다. 온난화로 각종 바이러스가 변화되어 기이한 질병이 세계를 휩쓸었다. 마침내 지구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 21세기 초 미국의 서해안 지역, 일본 열도, 유럽 남부지역의 지진으로 침몰했다. 그리하여 세계 인구의 거의 20%를 죽게 하는 기아, 내전, 난민, 폭력사태를 야기했다. 이러한 엄청난 재난을 겪은 후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이 새로운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그 교훈은 간결한 것이었다. 인간은 만드는 인간(homo faber)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homo religious)이라는 것이었다. 경제적 인간에서 문화적 인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
동물은 본능적 존재인데 비하여, 인간은 표상적 존재이다. 인간은 이미지, 감각인상, 언어, 개념에 의하여 형성하는 표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한다. 인간은 본능이 파괴되어 있으며, 본능을 초월할 수 있고, 본능적 충동마저 표상에 의하여 규정된다. 인간에게만 사회, 문화, 역사가 형성되는 것은 인간이〈표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능적 존재로서의 동물은 사회도, 문화도, 역사도 만들지 않는다. 만들 필요도 없고 만들 수 있는 능력-표상-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문명에 필요한 것은 스스로가 형성한 모든 것-인생, 사회, 역사, 문명-이〈표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표상이 환상이며 동시에 창조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관
우리는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극소수의 문학도나 예술가들만이 역사를 연구할 뿐이다. 예술분야에 있어서는 과거의 것이 오늘의 것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사람들은 역사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삶은 감당할 수 없는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어떤 믿음을 끌어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들은 역사를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발전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 다음에 새로운 단계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역사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 동물이 아니라 표상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집합표상 내지 환상의 축적이다. 환상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임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러나 20세기 사람들은 역사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
세계가 열리기 전, 20세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성령에게 호소하고 있지만 사실은 성령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성령에게 불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랑의 숨길을 불어넣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열망한다. 우리가 간청한다고 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으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어떻게 받고 있는가를 헤아려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들 인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시고 계시다. 「인간은 제안하고 하느님은 그것을 결정하신다」라든가「인간은 조르고 하느님은 인도하신다」라는 따위의 격언처럼 비그리스도교적인 말은 없다. 이러한 생각들은 인간을 하느님의 노리개로 추락시키고, 하느님을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횡포하는 폭군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제안하고 인간이 그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제안하시고 인간에게 호소하시며 은혜를 베풀고 계실 뿐이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제공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가장 기뿐 소식이다.
고난과 지혜
불행하게도 인간은 직접 고난을 겪고 나서야 지혜를 얻는다. 역사는 지혜를 향한 고난의 기록이었다. 이제 이 세상은 하늘나라(그리고 불국토)의 한 영토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영토는 아니지만 하늘나라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는 영토인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인간의 영적 활동이 충분한 의미를 가지며, 그 활동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세계이다. 오직 이것만이 그 밖의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 있어서 명백하고도 영속적인 가치를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강의자료 – 1999년 가을학기]
- 1996.12.31. [data] 20세기 학습서 – 미래인이 보는 20세기. 송희식_text 18p
- 1999.8.23. [data]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아이디어. business week_text 8p
- 1999.8.25. [강의] 장기 경영환경 전망(새 천년의 메가트랜드)_text 28p
- 1999.8.25. [강의] 일류기업의 미래전략_text 54p
- 1999.10.5. [강의] GE는 왜 강한가_text 16p
- 1999.10.14. [강의] 시나리오 경영_text 16p
- 1999.10.20. [강의] 새 천년의 고객만족 경영
- 1999.11.3. [강의] 초일류기업의 21세기 대응_text 14p
- 1999.11.3. [강의] 2005년의 경쟁기업_text 8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