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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컨센서스 23차 콜로키엄]

  • 주제: 21세기가 당면한 문제들과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 발제자: 이승환 교수 (고려대 철학과)
  • 일시: 2007년 6월 7일 오후 5시
  • 참석자: 김병국, 손동현, 윤순봉, 이정우
  • 자료정리: 송문희(EAI)

콜로키엄 정리자료_text 18p


[요약] 21세기가 당면한 문제들과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발제] 21세기가 당면한 문제들과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이승환 교수)

[토론]


[요약] 21세기가 당면한 문제들과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1. 21세기 세계사회가 당면한 문제들

현재 21세기는 정치적으로는 테러와 전쟁, 단극 패권주의의 위험 속에 놓여 있고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냉혹한 경제전쟁과 약육강식, 이로 인한 빈부간의 양극화 심화와 물신주의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이와 함께 공해·오염과 자원고갈, 기상이변 등의 환경문제까지, 한 마디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특히나 중국이 자원 소비형 미국 자본주의 방식의 고속성장을 계속한다면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이러한 21세기의 어두운 그림자들은 이성과 무한진보에 대한 맹신과 무한정한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서 문제가 파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 현재 당면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

1) 정치문제: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와 패권주의에 대항한 테러의 증가와 이에 대한 대 테러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 이식한다는 것을 대 테러 전쟁의 표면적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확산하기 위하여 타국의 자유와 자결권을 억압해도 좋은가? 자유민주주의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진리’인가? 다른 형태의 이상적인 공동체도 존재 가능한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국가는 타도되어야 하는가? 단극 패권주의는 다극화된 세계체제보다 더 안전한가?

2) 경제문제: 세계화(단일 자유시장)와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른 자유경쟁은 약육강식과 약자의 도태, 빈부의 양극화, 물신주의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단일국가 안에서 FTA로 인한 수혜자와 피해자는 누구인가? 국가와 국가간의 이러한 패키지식 자유경쟁은 공정한가? 동의하지 않는(without consensus) 구성원이나 집단, 산업, 국가의 자유는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패키지식 자유경쟁은 양국 국민 모두에게 호혜적인가? 자유경쟁체제에서는 단지 개인적인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에 낙오자가 생기는 것인가? 오늘날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소유의 자유’의 확산에 불과할 뿐 사회적 약자의 악화되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진보는 일부분의 진보에 불과할 뿐, 인간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는 오히려 “도덕적 퇴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환경문제: 자유경쟁 시장체제 하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화와 물질적 향유의 극대화를 위한 난개발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특히나 중국이 현 시장체제를 계속적으로 추구할 경우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원과 환경문제가 심각한 재앙으로 다가오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무한 진보는 가능한가? 무한 진보를 위한 자원은 충분한가?

3. 문제의 궁극적 원인: 현실 자유주의의 한계

‘자유’는 지고의 가치이지만 현실 ‘자유주의’는 너무도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본래의 철학적 자유주의와 각종 수사들(rhetoric)로 치장한 현실 자유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자유주의는 계몽주의 시기부터 이미 ‘가진 자’(부르주아)의 구호였으며 항상 강자의 이익을 위한 자기변호의 이념으로 기능해왔다. ‘강자의 자유’를 통한 ‘약육강식’과 ‘자연도태’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는 “자유의 소유(being at liberty, Having rights)”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자유의 사용법(how to practice those liberties)”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공동체 내의 덕(德)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현실 자유주의는 냉혈한적 자유주의(cold-blooded liberalism)이거나 비인간적 자유주의(inhumane liberalism)에 다름 아니다. 현실 자유주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harm principle” 아래 “나쁜 짓을 해도 좋은 자유(liberty to do wrong)”마저 승인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는 “자유의 한계”와 “harm”의 종류와 정도,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개념을 보다 명료히 할 필요가 있다.

4. ‘부덕한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이처럼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현실 자유주의를 ‘부덕(不德)한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덕(不德)한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소극적 자유만이 아닌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의 소유(所有)’에 대한 인지와 더불어 ‘자유의 사용법(使用法)’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며 공정한 경쟁조건에 대한 합의 또한 필요하다. 시민이 누리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주의”와 “국가적 단위의 자유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써 패권국가가 누리는 ‘강자의 자유’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의 일탈에 대한 견제는 언제나 민주주의의 강화에 의해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5. 동양철학으로부터의 제언

근대철학은 이성과 자유, 진보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물질적 진보는 이루어진 반면 인간의 영적인 진보는 오히려 퇴보했으며, 강자(强者)의 자유를 중심으로 행사되는 자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드러냈다. 인간은 무한진보에 대한 맹신으로 닥쳐올 재앙을 인식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해왔다. 이처럼 이성(理性)의 불확실성과 진보(進步)의 제한성, 그리고 자유(自由)의 폭력성 등의 문제가 노정됨에 따라 근대성은 점차 유효성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중세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즉, 자원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안분지족할 줄 알아야 하며, 양도 불가능한 개인적 자유와 권리만 주장하며 타자(他者)를 무시하고 사회를 해체시키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항상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덕스러움에 기반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무제한적인 자유의 주장이 아니라 자유의 행사와 사용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간 인류는 남성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봉사해야 하는 시녀 정도로 여겨왔다. 그러나 예로부터 동양철학에서는 “天之生財, 只有此數, 不在上則在下, 不在我則在彼”이라 하여 자원의 유한성을 일찌감치 인식해왔다. 석유자원 등 화석연료의 고갈위험에 따른 대체연료 개발이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 인류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늘은 아버지(天=父)이고 땅은 어머니(地=母)이며 인간은 맏형(人=長子)으로서 우주자연에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주역의 사상은 극단적인 자연 중심주의와 극단적인 인간 중심주의의 조화점을 보여준다.

송대 성리학자인 주렴계는 생명에 대한 연민감을 “吾欲觀其生意”라는 말로 표현했다.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는 공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은 remote people에 대한 호혜적 대우의 필요성을 말한다. 공자의 “從心所慾不踰矩”나 맹자의 “寡欲養心”, 장자의 “無用之大用” 등은 욕망의 조절과 자기 도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유학의 관점에서도 패권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패권의 성격은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덕스러운 패권(soft power, virtuous power)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단극적 국제체제 하에서 패권을 휘두르고 있는 미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6. ‘Korea Consensus’의 초안을 위한 제언

‘Korea Consensus’는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강자와 약자를 소통·조정·매개할 수 있는 중개자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단극 패권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윤리적 지침과 국제정치적 로드맵을 제시하고 부덕한 시장 자유주의를 교정할 수 있는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델을 창안해 내야 한다. 소유와 배려, 소비와 절제, 물욕과 영성 간의 조화를 일깨워주는 철학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패키지식 경쟁자유주의의 폭력성을 교정할 수 있는 경제철학적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국가적 차원의 자유주의의 정립과 함께 자유주의의 일탈은 언제나 민주주의의 강화에 의해서만 교정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국제사회에서 강자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제민주주의를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키워드>

자본주의적 근대성, 이성, 무한진보, 부덕한 자유주의, 냉혈한적 자유주의(cold-blooded liberalism), 자유의 사용법, 덕스러운 자유주의, 새로운 중세주의, 공동체성 회복, 약자에 대한 동정심, remote people에 대한 호혜적 대우, 덕스러운 패권(soft power, virtuous power)


[발제] 21세기가 당면한 문제들과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이승환 교수)

1. 21세기 세계사회가 당면한 문제들과 근본적인 질문들

현재 21세기는 정치적으로는 테러와 전쟁, 단극 패권주의의 위험 속에 놓여 있고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냉혹한 경제전쟁과 약육강식, 이로 인한 빈부간의 양극화 심화와 물신주의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이와 함께 공해·오염과 자원고갈, 기상이변 등의 환경문제까지, 한 마디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특히나 중국이 자원 소비형 미국 자본주의 방식의 고속성장을 계속한다면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이러한 21세기의 어두운 그림자들은 이성과 무한진보에 대한 맹신과 무한정한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서 문제가 파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중에도 특히 그 바탕에 ‘인간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자유(自由)’의 문제가 세계사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1) 정치문제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와 패권주의에 대항한 테러의 증가와 이에 대한 대 테러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은 불량국가를 제거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 이식한다는 것을 대 테러 전쟁의 표면적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중동지역에서의 패권유지와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목적이 숨어 있고 종교적 편견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를 확산하기 위하여 타국의 자유와 자결권을 억압해도 좋은가? 자유민주주의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진리’인가? 다른 형태의 이상적인 공동체도 존재 가능한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국가는 타도되어야 하는가? 단극 패권주의는 다극화된 세계체제보다 더 안전한가?

(2) 경제문제

세계화(단일 자유시장)와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른 자유경쟁은 약육강식과 약자의 도태, 빈부의 양극화, 물신주의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단일국가 안에서 FTA로 인한 수혜자와 피해자는 누구인가? 국가와 국가간의 이러한 패키지식 자유경쟁은 공정한가? 동의하지 않는(without consensus) 구성원이나 집단, 산업, 국가의 자유는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패키지식 자유경쟁은 양국 국민 모두에게 호혜적인가? 자유경쟁체제에서 단지 개인적인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에 낙오자가 생기는 것인가? 경쟁에서 도태된 낙오자는 운수(luck)인가? 자유시장이라는 경제체제 때문인가?

오늘날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소유의 자유’의 확산에 불과할 뿐 사회적 약자의 악화되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자유주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는 분명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삶이 오히려 더욱 빈곤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질적인 진보는 일부분의 진보에 불과할 뿐, 인간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는 오히려 “도덕적 퇴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환경문제

자유경쟁 시장체제 하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화와 물질적 향유의 극대화를 위한 난개발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무한 진보는 가능한가? 무한 진보를 위한 자원은 충분한가? 일찍이 철학자들과 환경론자들은 인류에게 주어진 자원의 제약 등으로 인해 자원소비형 산업화가 더 이상 지속가능 하지 않다는 경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공해와 오염 등의 각종 독극성 부산물(poisoned gift)들을 생산해내면서 자원확보를 위한 경쟁과 무한진보를 향한 무한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나 중국이 현 시장체제를 계속적으로 추구할 경우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원과 환경문제가 심각한 재앙으로 다가오게 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국민들은 각 집마다 자동차나 냉장고를 한 대씩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또한 없는 것이다.

2. 문제의 궁극적 원인: 현실 자유주의의 한계

‘가족’은 소중하지만 ‘가족주의’는 문제가 많은 것처럼 ‘자유’는 지고의 가치이지만 현실 ‘자유주의’는 너무도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본래의 철학적 자유주의와 각종 수사들(rhetoric)로 치장한 현실 자유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자유주의는 계몽주의 시기부터 이미 ‘가진 자’(부르주아)의 구호였으며 항상 강자의 이익을 위한 자기변호의 이념으로 기능해왔다. 자유주의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강자의 자유’를 통한 ‘약육강식’과 ‘자연도태’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는 “자유의 소유(being at liberty, Having rights)”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자유의 사용법(how to practice those liberties)”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공동체 내의 덕(德)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Jeremy Murphy의 수영장에 빠진 아이의 예는 미국식 자유주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의 아이를 구해 줄 권리와 의무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유주의의 답은 “no”인 것이다. 이처럼 자유와 권리의 관계는 너무도 냉혹하고 현실 자유주의는 냉혈한적 자유주의(cold-blooded liberalism)이거나 비인간적 자유주의(inhumane liberalism)에 다름 아니다. 현실 자유주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harm principle”아래 “나쁜 짓을 해도 좋은 자유(liberty to do wrong)”마저 승인한다. 자유주의와 세계화 논리에 따라 국경을 넘어 생겨나는 거대 다국적기업의 대형마트로 인해 망하는 동네구멍가게가 속출하고 있다. 과연 이것은 공정한 자유경쟁의 논리에 따른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대형마트의 운영자는 동네가게 주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인가? 같은 경우를 놓고 볼 때 동양의 맹자는 “무측은지심(無惻隱之心)이면 비인야(非人也)”라 하며 아는 아이든 모르는 아이든, 구해줄 권리와 의무가 있든 없든 간에 물에 빠진 아이는 일단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맹자는 공동체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서로 존중하고 대우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자유주의는 “자유의 한계”와 “harm”의 종류와 정도,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개념을 보다 명료히 할 필요가 있다.

3. ‘부덕한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색

이처럼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현실 자유주의를 ‘부덕(不德)한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덕(不德)한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소극적 자유만이 아닌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의 소유(所有)’에 대한 인지와 더불어 ‘자유의 사용법(使用法)’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며 공정한 경쟁조건에 대한 합의 또한 필요하다. 권투경기에서도 라이트급, 헤비급, 플라이급 등으로 체급을 나누는데 시장에서는 왜 이처럼 체급을 나누지 않는 것인가? 캘리포니아의 드넓은 농장에서 대규모로 재배된 쌀과 한국 농부가 재배한 소량의 쌀이 과연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것인가를 묻고 싶다. 이솝 우화 속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라는 것 역시 자유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토끼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뛰어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실에서는 토끼가 계속 뛰고 있으며 거북이는 결코 토끼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시민이 누리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주의”와 “국가적 단위의 자유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적 단위의 자유경쟁이 개인에게 미치는 해(harm)와 패키지식 자유경쟁이 패키지 안의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에게 미치는 해에 대한 냉철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FTA(자유무역협정)체결 과정에 있어 구성원들의 폭넓은 동의(consensus)를 얻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적 단위의 자유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써 패권국가가 누리는 ‘강자의 자유’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의 일탈에 대한 견제는 언제나 민주주의의 강화에 의해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4. 동양철학으로부터의 제언

근대철학은 이성과 자유, 진보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물질적 진보는 이루어진 반면 인간의 영적인 진보는 오히려 퇴보했으며, 강자(强者)의 자유를 중심으로 행사되는 자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드러냈다. 인간은 무한진보에 대한 맹신으로 닥쳐올 재앙을 인식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해왔다. 이처럼 이성(理性)의 불확실성과 진보(進步)의 제한성, 그리고 자유(自由)의 폭력성 등의 문제가 노정됨에 따라 근대성은 점차 유효성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중세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즉, 자원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안분지족할 줄 알아야 하며, 양도 불가능한 개인적 자유와 권리만 주장하며 타자(他者)를 무시하고 사회를 해체시키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항상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덕스러움에 기반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무제한적인 자유의 주장이 아니라 자유의 행사와 사용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간 인류는 남성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봉사해야 하는 시녀 정도로 여겨왔다. 그러나 예로부터 동양철학에서는 “天之生財, 只有此數, 不在上則在下, 不在我則在彼”이라 하여 자원의 유한성을 일찌감치 인식해왔다. 상위 20%에 속하는 강대국 국가들이 전세계 에너지 총량의 80%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이다. 미국 국민 1인이 이디오피아 국민 581명이 쓸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형평성 면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석유자원 등 화석연료의 고갈위험에 따른 대체연료 개발이 현안이 되고 있는 지금, 인류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늘은 아버지(天=父)이고 땅은 어머니(地=母)이며 인간은 맏형(人=長子)으로서 우주자연에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주역의 사상은 극단적인 자연 중심주의와 극단적인 인간 중심주의의 조화점을 보여준다. 송대 성리학자인 주렴계는 생명에 대한 연민감을 “吾欲觀其生意”라는 말로 표현했다.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는 공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은 remote people에 대한 호혜적 대우의 필요성을 말한다. 공자의 “從心所慾不踰矩”나 맹자의 “寡欲養心”, 장자의 “無用之大用” 등은 욕망의 조절과 자기 도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욕망의 조절과 자기수양이 필요했던 주체는 생활에 쫓기며 굶고 있어 조절할 욕망자체가 부족했던 95%의 국민들이 아니라, 생활의 곤궁함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인해 욕망이 넘쳐나던 상위 계층들이었다. 유학의 관점에서도 패권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패권의 성격은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덕스러운 패권(soft power, virtuous power)이었다. 과거 유학자들은 장기적인 관점(long-term interests)에서 볼 때 “인정(仁政)이 곧 이(利)”라는 것을 제왕들에게 납득시키면서 인(仁)과 의(義)에 기반한 인왕(仁王)이 되어야 함을 설파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단극적 국제체제 하에서 패권을 휘두르고 있는 미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5. ‘Korea Consensus’의 초안을 위한 제언

‘Korea Consensus’는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강자와 약자를 소통·조정·매개할 수 있는 중개자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단극 패권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윤리적 지침과 국제정치적 로드맵을 제시하고 부덕한 시장 자유주의를 교정할 수 있는 ‘덕스러운 자유주의’의 모델을 창안해 내야 한다. 소유와 배려, 소비와 절제, 물욕과 영성 간의 조화를 일깨워주는 철학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팩키지식 경쟁자유주의의 폭력성을 교정할 수 있는 경제철학적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국가적 차원의 자유주의의 정립과 함께 자유주의의 일탈은 언제나 민주주의의 강화에 의해서만 교정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국제사회에서 강자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제민주주의를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토론]

토론주제

  • 공동체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덕스러운 자유주의’가 21세기의 대안인가?
  • 자유주의와 덕(德)은 양립이 불가능한가?
  • 한국적 특색에 맞는 미래 자유주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 동서양 사상의 ‘융합(融合)’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공동체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덕스러운 자유주의’가 21세기의 대안인가?

손동현: 21세기 사회적 삶의 기본양식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공동체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덕스러운 자유주의’가 그 해답인가? 현실 자유주의가 아닌,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를 되돌아 보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 시대가 처해 있는 현재의 맥락(context)과 사회적 상황(situation)들이 과거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점이다. “공동체주의”라는 것도 공동체가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인데, 오늘날 과연 공동체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동양고전에서 사유의 실마리를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이 또한 과거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고 정보화와 세계화 등으로 사회적 삶의 양상이 현격하게 달라진 현대에 이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실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반영된 아이디어를 모색해야 한다. 즉, 사회윤리학적인 이즘(ism)으로서의 ‘덕스러운 자유주의’보다는 사회 속에서 정치, 경제적 자유를 구분하고 이 양자가 어떠한 관련하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승환: 과거의 생산양식에서 나온 관념과 사유들을 오늘날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적실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사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성’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는 없는가? 물론 각각의 시대적 상황과 한계에 얽매이게 되는 결과 그 시대 상황에만 맞을 수 있는 특수성과 독특성을 가지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시대의 생산양식과 상황적 맥락을 넘어서도 여전히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나 사상(idea)’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 자원이 유한했던 농업사회의 풍선효과는 오늘날 석유자원 문제에도 그대로 작용될 수 있다. 강자(强者) 중심의 자유주의가 많은 폐해를 낳고 있는 국제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인 민주화를 도입할 것이 요청된다.

윤순봉: 이성, 진보, 자유라는 키워드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이들간의 유기적인 관련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인류 3백 만년의 역사 중에 99.9%는 ‘이성’이 아닌, 동물성과 감성이 지배하는 기간이었다. ‘진보’의 성격을 보면 물질적 진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정신적 진보는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유’의 문제에 관해서는 자유와 공동체 사이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각 개체가 자유를 추구하다 보면 전체적으로는 공동체를 위한 이타주의(利他主義)가 도출될 수도 있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민주주의로 극복할 수 있는가? 자유는 개인의 인권과 행복추구권 등을 신장시키는 정치적 자유와 개인들이 자유롭게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 두 부분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치적 자유를 가장 확대시키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본다면 민주주의도 결국 자유주의의 일부분이 아닌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만약 이들간에 관련성이 없다면 매개변수로 ‘경제성장’을 대입해 볼 수 있다. 경제성장과 정치적 자유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현재도 열띤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시카고의 프리드만 학파는 정치적 자유가 신장됨에 따라 지도자들의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가 사라지게 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들 양자간에 양(+)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논리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과 Jewish의 결탁모델에 불과한 것으로서 pistol capitalism, Shylock capitalism(샤일록/수전노 자본주의), casino capitalism이라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둘째, 경제성장과 정치적 자유간의 상충(-)관계를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바그와티는 한국의 박정희, 싱가포르의 이광요 등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이 정치적 자유를 희생하면서 경제성장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잔인한 선택(cruel choice) 혹은 잔인한 딜레마(cruel dilemma)”라고 표현했다. 셋째, 독일형, 스웨덴, 핀란드식의 북구형, 라틴아메리카 모형 등 수정된 형태의 사민주의 모델이 있다. 넷째, 초기에는 정치적 자유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만 경제발전에 따라 어느 정도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에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이 분출됨으로 인해 경제성장이 덫에 걸리는 소위 ‘만 불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절충적 견해가 있다.

‘덕스러운 자본주의’는 유교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현실 자유주의의 대안이라는 점에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교자본주의의 실체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교 역시 중국과 조선 등에서 지배층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공고화하는 통치 메커니즘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정착민의 역사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던 적이 없다. 그러나 과거 칭기즈칸이 이끌던 유목사회에서는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평등, 그리고 박애가 다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런 유목적인 삶에서 새 시대의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정우: 이승환 강연자와 윤순봉 위원은 ‘자유’라는 단어에 대한 접근에 있어 논의의 평면을 달리하고 있다. 윤순봉 위원은 자유주의의 범주를 정치와 경제 두 부문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반면 이승환 강연자는 현실 자유주의의 폐해를 교정하는 별도의 가치체계로서의 민주주의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2. 자유주의와 덕(德)은 양립이 불가능한가?

손동현: 서구사회가 자유주의를 경제적 활동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은 맞지만 이와 함께 기독교 신앙공동체 윤리가 병행되어 온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Jeremy Murphy의 수영장에 빠진 아이의 예에서도 remote people에 대한 기독교적 원인애(遠人愛)가 작동됨으로 인해 아이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흔히 엮이게 된다. 그러나 개인주의에서 말하는 “self”라는 것은 이미 분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community)를 중시하는 사회적인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김병국: 강연자는 본래의 자유주의가 아닌 ‘현실 자유주의’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강자(强者)의 논리로 사용되어 온 점을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뭐든지 “현실’이란 단어가 앞에 붙게 되면 “강자”를 위한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가정공동체는 가족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부(父)와 자(子)의 관계라는 것도 현실에서는 권위주의적인 가족주의로 흐르기 쉽다. ‘공동체주의’라는 것도 그 자체로는 철학적 유용성이 분명히 있겠지만 앞에 “현실”이라는 단어가 붙게 되면 이 또한 강자(强者)의 이익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의 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현실”을 뺀 “원래 의미의 자유주의”의 한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과연 자유주의 그 자체로는 ‘덕(德)’을 말할 수 없는가? 자유주의와 덕(德)은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의 관념 속에는 덕(德)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일견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로크나 벤덤,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사상 속에는 분명 ‘virtue’의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Mill의 경우 소수의 권리를 제한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공동체 전체에 해(harm)를 끼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소수의 이익이나 권리를 보호하려는 논의로 이어지고 이는 ‘virtue’개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그 자체에도 ‘덕(德)’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외 달리 만약 자유주의와 덕(德)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새로운 세계의 가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도 일정한 자기 정화능력이 있다. 물리적 폭력이나 강요에 기반한 하드파워가 아닌, 설득과 동화를 통한 소프트 파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 아담 스미스가 시장(market)을 찬양한 이유는 ‘시민(citizen)’이 주인이 되는 경제 공동체라는 점에 있었다. 이처럼 시장의 개념 속에 ‘시민’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면 시장도 윤리적 공동체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은가? 경제적 측면에서 자유주의가 물신주의로만 끝날 것인가? 물신주의(物神主意)를 초래한 것이 자유주의의 탓일까 아니면 본래의 인간 삶의 모습과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자유주의가 ‘virtue(덕목)’를 갖춘 ‘시민(citizen)’을 전제로 한 것임에도 결국 물신주의로 빠지게 된 것은 자유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삶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승환: 어떤 훌륭한 이론이나 가치도 현실 속에서는 오용되고 남용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현실은 언제나 강자(强者)의 편일 수밖에 없다는 반론에는 동의한다. 자유주의 그 자체에는 덕(德)이 존재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덕스러운 시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의 모습과 물질욕과 소유욕에 휩싸인 권리광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는 헤겔의 공동체 모습에 대한 언급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3. 한국적 특색에 맞는 미래 자유주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김병국: 신자유주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옳든 그르든 그 시대의 주류적인 사회상을 반영한 것임은 분명하다. 코리아 컨센서스도 한국만의 컨센서스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의 구성원리와 운영원리를 반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윤순봉: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 있어서는 무제한적인 자유주의보다는 강소정부(작지만 강한 정부)가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즉, 합리적인 규칙을 정립(rule-setting)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강한 정부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끄는 동시에 공평한 자원 배분에도 관여함으로써 빈부격차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유목사회에서는 칭기즈칸 등의 리더들이 비전을 제시하면 각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종족들이 자유롭게 모여들었고 견해를 달리 할 경우에는 언제라도 떠날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유목사회의 칸(Kahn)은 종족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화는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군림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미래 사회에는 지식, 브랜드, R&D 기술 등 눈에 보이지 않는(intangible) 자원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유목적 특성을 갖고 있는 가상공간의 장악 여부가 미래 경쟁력의 핵심요인이 될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작동하는 힘은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hard power가 아니라, 보다 감성적이고 문화적인 매력에 기반한 soft power가 될 것이다.

이승환: 유교자본주의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칭기즈칸도 비몽골족이나 정복국가에 대해서는 매우 무자비하고 잔혹한 살상을 저질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목민은 특정하게 고정된 거점이 없다는 지리적인 특수성을 가졌고, 이로 인해 제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분명히 거점이 존재한다. 유목적 특성을 갖는 사이버 공간을 선점하려는 것도 결국 ‘강자(强者)’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윤순봉: 국가가 과정(process)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R&D)이나 의료, 복지 부분에 조정자로서 관여하는 점이 유교자본주의와의 차이일 것이다. 유교적 가치를 현대에 맞게 받아들일 때도 형식적인 절차가 아닌, ‘원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승환: 절차나 과정(process)의 중요성은 미국식 자유주의가 더 강조하는 덕목이 아닌가?

이정우: 합리적인 규칙을 정립(rule-setting)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작지만 강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유교와 일정 부문 친화성(affinity)이 존재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구현자로서 유목민의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목민의 두 얼굴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즉, 순박하고 욕심이 없고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대항하는 종족의 씨를 말릴 정도로 매우 잔혹한 모습도 분명 존재했다. 사이버 공간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재 사이버 세상의 도래를 맞아 한국이 말의 앞부분을 올라타고 있다고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만 조금 앞서 있을 뿐 컨텐츠는 엉망인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거품이 아닌가 걱정되는 측면이 있다.

김병국: 유목적인 삶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사안보와 경제영역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 일정한 거점이 정해져 있는 군사안보 영역에서는 강자에게 권력이 더욱 집중되면서 강자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 경제 영역은 다극적인 체제로 나누어지면서 권력이 분산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은 경제 부문에서 유목적 삶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면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또 다른 유목적 삶의 모습의 예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국가간 인적자원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교육’과 하층적 노동인력의 ‘이주(migration)’를 들 수 있다.

윤순봉: ‘사이버 개혁’이나 ‘디지털 개혁’이 앞으로의 인류 역사에 있어 큰 숙제가 될 것이다.

손동현: 한국 나름의 독특한 정치, 경제질서의 원형을 유목적 삶의 양태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참신하다. 미래 사이버 공간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사이버라는 유목적 공간 속에서 ‘힘’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 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그 힘을 비축하고 증진시켜 나갈 것인가?

4. 동서양 사상의 ‘융합(融合)’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병국: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과연 진보한 것이 맞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할 것이다. 동서양 철학이나 사상의 ‘융합’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소는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을 통해 무제한적인 자유주의가 초래하게 될 폐해와 위험을 자유주의 자체의 틀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약자(弱者)에 대한 동정심이 깔려 있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공자의 호혜성 논의 또한 칸트(Kant)에게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동서양 사상의 ‘융합(融合)’내지 ‘접목’이라는 것은 서양사상이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끌어들여 보충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호혜성, 욕망의 조절 등과 같은 각각의 꼭지들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근저에 깔려있는 논리가 동양과 서양에 있어서는 어떻게 다르며, 이러한 담론들의 전개방식은 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논의를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점점 유목적인 삶으로 가면 갈수록,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물신주의가 강화되면 될수록 미래사회의 해답은 ‘virtue(덕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와 유교로 나누어 동양과 서양의 가치를 대립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류 보편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손동현: 미래 인간은 이성보다는 동물성과 신체성에 더 집중하면서 살게 된다고 가정하는 경우 이런 사회를 과연 무엇으로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미래에는 고도로 섬세하고 정치한 형태를 띤, 보다 정교한 이성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의 세계와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세계간의 자유로운 호환(互換)을 통해야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승환: 동양과 서양의 사상 중 가장 큰 차이점은 ‘수양을 통한 인격 도야(self making)’에서 찾을 수 있다. ‘self’를 ‘주어진(given substance) 것’으로 인식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이를 ‘만들어 가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욕망의 조절과 인격 도야를 통해 자신(self)을 참다운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high self와 low self로 구분 짓는 과정에서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의 ‘self’는 더욱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self’를 채워주는 내용이 찰나적인 쾌락과 감각적인 느낌들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self’는 파편화되고(fragmented) 정처 없이 표류하게(drifting)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 존재(self)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더욱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인간은 뿌리 내린 자아의 모습과 정체성에 대해 항구성과 영속성이 필요한 존재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할수록 ‘느림’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디지털에 대한 반동으로 ‘아날로그 산업’이 다시 주목 받기도 한다. 이처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이버 세상의 위력이 날로 커져 가고 있지만 앞으로도 현실(real) 세계에 대한 향수는 계속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건전한 신체성과 정신성의 추구라는 인간의 욕구를 사이버 공간이 결코 완벽하게 채워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