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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8세기말 신라의 한 섬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출생[1]
  • 신라의 경직된 골품제도(骨品制度)에 한계를 느끼고 도당(渡唐)
  • 당군(唐軍)에 입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무령군(武寧軍)의 군중소장(軍中少將: 고급장교)으로 임명
  • 唐에서 활동 중 海賊에게 잡혀온 신라의 양민이 노예로 매매되는 참상을 접한 후 귀국을 결심
  • 828, 신라 흥덕왕(興德王)에게 해적 토벌의 뜻을 밝힌 후, 청해진(淸海鎭, 지금의 전남 완도에 위치)이라는 軍陣의 설치를 진언하여 허락을 얻음
  •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장려함으로써 동북아 해상을 지배
  • 840,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2]를 보내어 삼각무역(三角貿易)을 수행
  • 846, 정치적 분란에 휘말려 암살됨

시대적 배경

동북아제국의 국가권위가 약화되고 海上秩序가 혼란해진 시기

국가권위의 약화로 官- 公무역이 점차 퇴조하고 民間貿易에 대한 수요가 대두

黃海에서 발호하던 해적 소탕에 대한 국가간 공감대 형성

기근과 신분차별을 피해 본국을 떠나 唐, 일본에 정착한 신라 유민들은 대부분 상업에 종사(신라방(新羅坊)[3], 신라촌(新羅村) 등)


주요 업적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를 동북아 국가들의 허브로 육성, 당대 동북아 무역세계를 지배[4]. 中東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할 정도로 광활한 영역을 활동무대로 삼음[5].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이 唐나라를 여행하면서도 장보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지니고 갔을 정도

남북(新羅vs.渤海)의 교류가 단절된 분단 상황 속에서 對外進出을 통해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을 장악

장보고1.jpg


후대에 미친 영향

장보고 死後, 신라의 해상세력은 쇠퇴했으며 이후 근세조선까지 半島國 으로 후퇴


리더십 특성

① 넓은 包容力

다양한 인적구성과 기능이 복합된 청해진을 중심으로 광활한 활동영역을 일사불란하게 경영

民軍 1만여 명과 그 가족들을 거느렸던 海上王國이 질서 속에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포용력이 요구

옛 후배였지만 唐에서 불화가 있었던 정년(鄭年)을 반갑게 부하로 받아들이면서 많은 군사와 권한을 부여하여 정년을 감복시킴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在外 新羅人을 한 네트워크 아래 결집

조선술, 항해술, 통역 등 청해진에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할 인적 자원을 대부분 해외에서 조달

중국의 기록에서는 그의 넓은 도량에 대해 극찬

唐의 대시인인 두목(杜牧)은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장보고를 칭송

‘안록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 진압에 공이 컸던 唐나라 장수 곽분양(郭汾陽)과 동렬에 서는 큰 인물로 장보고를 평가

② 글로벌 스탠더드의 조직과 인프라 구축

글로벌 네트워크의 구심점을 확보하기 위해 佛敎, 組織 職制 등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채용

당시 佛敎는 羅-唐 日을 포괄하는 가장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

唐나라 산둥(山東)반도에 법화원(法華院)을 세웠으며 청해진 내에도 사찰을 두어 航路의 安寧과 繁昌을 기원하는 場으로 활용

청해진을 구성한 주요 인물은 대부분 在唐 신라인 출신으로, 직위명칭도 대사, 병마사 등 唐의 직함을 그대로 차용

③ 民間貿易時代의 ‘東北亞 貿易 허브’ 구상

唐의 고급장교로 재직하면서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 민간무역시대의 도래를 예견

중앙집권적 질서가 와해되는 ‘緊張緩和’ 시대의 도래로 민간교역이 증대할 것임을 간파

羅-唐-日 항로의 중심점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오늘날의 經濟特區에 비견할 수 있는 軍-産-商 복합체로 육성

청해진은 신라 영토 내에 있었지만 獨立的인 기구로서 정치, 경제, 군사적인 기능을 자체 보유한 독특한 조직

조직화된 민간 차원의 무역거래를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기존의 무역 개념을 새롭게 정의

군사력과 교역 노하우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競爭優位 확보

군사력을 지닌 兵部와 무역조직인 民部-在唐民이 유사시 긴밀하게 역할을 교대

바다에서의 능률적인 활동을 위해 신라의 발달된 造船術- 航海術을 최대한 활용

광범위한 지역, 장기간의 물류기간 등 장애요인을 극복하기 위해 信用去來 도입


[1] 장보고의 고향이 전남 완도(莞島) 부근이라는 주장도 있음.

[2]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 장보고가 唐나라에 파견한 무역사절. 장보고는 이 견당매물사의 인솔 하에 교관선(交關船)을 파견하여 羅唐貿易을 독점.

[3] 신라방(新羅坊): 중국 唐나라에 있던 신라인의 자치거주지역.

[4] 청해진(淸海鎭)의 입지: 장보고는 오지나 다름없던 서남해안 구석의 완도가 남북 중국항로와 대일본 항로를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간파. 완도 앞바다는 다도해의 암초, 밀물- 썰물의 변화, 육지와 부딪쳐 소용돌이치는 해류, 계절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해풍 등으로 변화가 무궁무진하여 공격과 방어를 위한 천혜의 요새.

[5] 슐레이만, 「중국의 인도소식」(851년), 알 마소디,「황금초원과 보석광」(965년) 에도 장보고가 언급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