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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542,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의 성주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長男으로 출생
  • 156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동해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
  • 1603,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서 에도(江戶)[1]에 막부(幕府)를 설치
  • 1614~1615,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일본을 천하통일

시대적 배경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 영웅들의 전국시대로 통일 기운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


성장 과정

치열한 전국시대 작은 지역 영주의 아들로 출생, 수많은 위기와 고난을 겪으며 성장

4세 때 이마가와(今川) 가문에 볼모로 보내져 우여곡절 끝에 18세까지 인질생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항상 2인자의 역할로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실력을 키움


주요 업적

15세기말부터 1백 년 간 지속된 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해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구축


후대에 미친 영향

에도막부(江戶幕府) 설치 이후 3백 년 간 일본 近世封建社會를 확립[2]

정치적 안정과 평화를 누렸으나 鎖國政策과 國民統制로 사회가 다소 정체상태 지속


리더십 특성

① 은근과 끈기 “기다림”의 리더십

이에야스는 자기를 주장하기보다는 때를 기다리는 겸손한 리더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장기안목으로 세상을 파악

‘새 울게 하기’의 일화는 유명

  • 오다 노부나가 (冷嚴): “울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自信): “달래고 꼬여서 어떻게든 울게 한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忍耐): “울 때까지 기다린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3]의 병법을 상기, 항상 완벽한 승리보다는 온건한 절충안을 채택

신겐은 평소 “兵法의 극치는 5부(分)의 승리를 最上으로 하고 7부를 中으로 하며 10부를 最下로 한다. 5부는 탄력을 낳지만 7부는 게으름을, 10부는 오만(傲慢)을 낳는다”고 강조. 즉, 적을 반만 제압하면 부하들이 좀더 잘 싸우겠다는 의욕이 생기지만, 적을 완전히 제압해버리면 자만심에 빠져서 노력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히데요리(豊臣秀賴)[4] 軍을 격파한 후 오사카에 남아 있던 西軍의 총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게 타협의 손길을 내밂. 철저하게 공격해서 완벽한 擊滅을 꾀할 수도 있었으나 피를 덜 흘리는 방향을 선택

② 리더-부하 간 신뢰를 평생 유지

이에야스는 인질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 끝까지 충성을 바친 家臣들에 감동, “家臣이 최고의 보배”라는 신념을 평생 간직

이에야스가 어린 시절 인질이 된 후, 가신들은 주군을 잃고 이마가와 가문의 하급부대로 전락

이마가와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녹봉을 제공하지 않고, 직접 호미와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짓도록 했으며, 전투가 있을 때마다 위험한 전선에 투입, 자연 소멸을 시도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았으며, 우연히 13세의 이에야스가 자신의 영지를 방문했을 때 그때까지 비축해둔 돈, 식량, 무기를 보여주며 무사히 성장할 것을 당부

③ 에도막부(江戶幕府) 건설

연고지가 아닌 에도(江戶)로 발령낸 히데요시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면서도 웅대한 비전을 버리지 않음

히데요시와 연합하여 오다와라(小田原)[5]를 격파(1590)한 뒤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이에야스에게 주어진 것은 당시로는 奧地였던 간토(關東)의 6개 지방.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다져온 5개 지방, 특히 그의 발원지인 미카와(三河)는 환수됨

영지는 늘어났으나 미개간 황무지에 불과했으며, 수도와 거리도 멀어짐. 하코네(箱根)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간토로 내려가면 上京 희망은 거의 단절되고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질 위기에 봉착 → 家臣들의 불만이 극에 달함

그러나 이에야스는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으니 언젠가는 上京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가신들을 설득 → 간토의 황무지였던 에도(江戶)가 오늘날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로 발전

④ 뛰어난 유지관리 능력

이에야스는 전투지휘에서도 물론 뛰어났으나 행정-조직관리에서 특히 탁월한 역량을 발휘

3명의 영웅은 16세기 일본사에서 제각기 다른 리더십을 발휘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일본 중세 이후의 낡은 가치관을 타파하고 구체제를 파괴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새로운 가치체계를 갖춘 사회를 건설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두 선배가 한 일을 완성시켜 오랫동안 유지 관리

히데요시와 협력하게 된 이후 히데요시가 시코쿠(四國), 큐슈(九州) 정벌 등 外政에 바쁜 사이 그는 內政을 담당하여 행정관리에 많은 경험 축적 → 이런 경험은 幕府體制 설계에 큰 역량으로 작용


※이에야스의 維持管理 원칙

1) 구분원칙, “머리와 몸을 구분한다”

이에야스는 쇼군(將軍)이 된 지 2년 만에 은퇴하고 셋째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쇼군직을 승계

하지만 전권을 넘기지 않고 슨푸(駿府)[6]의 은거지에 다양한 인재들로 參謀陣을 구성, 정책을 수립하고 아들에게 이를 실행토록 함

정책을 만드는 머리 부분은 슨푸에 두고, 실행을 하는 몸과 손, 발은 에도에 두는 식

二元體制는 히데타다가 죽을 때까지 계속

노부나가가 恐怖를 이용한 덤프트럭 같은 관리를 했다면, 히데요시는 賢者의 倫理나 道德에 중점을 두고 부하들을 격려했고, 이에야스는 分斷 정책을 활용

2) 견제와 균형의 원칙, “꽃과 열매를 동시에 주지 않는다”

꽃은 勸力, 열매는 給與

이에야스는 남에게 신뢰를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중시

자신이 쇼군이 되기 전부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家臣들에게는 권력을, 정세 변화 때문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 다이묘(大名)[7]에게는 급여를 많이 지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천하를 장악한 이에야스는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신들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영지를 배분. 본거지인 간토(關東)와 종래 정치의 중심지인 교토, 오사카를 연결하는 지역 등 요충지에 폭넓게 배치하여, 2~3중의 방어선 구축

막부 개설 후, 대규모의 에도성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해 새 시대를 알리고, 예산을 다이묘들에게 부담지워 세력확장 및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을 사전예방

3) 大耳(큰 귀) 원칙: 늘 民心 동향을 파악하고 輿論을 聽取

이에야스는 후계자 선정 시 意見聽取力을 기준으로 적용. 아들 11명 중에서 최종후보로 둘째 히데야쓰(秀康)와 셋째 히데타다(秀忠)가 경합. 둘째 히데야쓰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일찍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정작 이에야스는 셋째 히데타다에게 승계. 長期的이고도 安定的인 조직관리를 위해서는 參謀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히데타다가 앞선다는 판단

이에야스는 일본의 전권을 쥐게 된 세키가하라 싸움에서도 여론을 충분히 활용.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요시 사후에, 히데요시의 본처인 네네를 지지하는 도쿠가와와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淀君)를 지지하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간의 싸움. 본처보다 첩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상식에 맞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지지함으로써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수많은 다이묘들이 이에야스를 지지

4) 改革 원칙,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막부를 출발시키면서 새 정치체제에 맞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등용

자신을 배신한 적이 있는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를 기꺼이 중용[8]. 마사노부의 능력은 과거의 반역행위를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정도라고 판단

오래된 家臣이라도 자기개혁이 가능한 사람만을 등용.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의 시기였기 때문에 武士보다는 文臣들을 점차 등용

태평성세에 맞지 않는 인물들은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한직으로 물러나게 함

5) 구두쇠 원칙, “종이 한 장까지 아낀다”

“상인의 검소한 생활과 계산능력, 재능을 본받자.”고 강조하고 매사에 생산성과 효율을 추구

무인이자 정치가였던 이에야스는 뛰어난 경제감각을 보유

천하통일 후 다이묘들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화장실에 다녀오다 옆구리에 낀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날아가자 맨발로 마당에 내려와 허공에서 춤추는 종이를 붙잡음. 다이묘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이에야스는 “나는 이렇게 해서 천하를 손에 넣었소.”라고 대꾸했다 함


[1] 에도(江戶)는 오늘날의 도쿄(東京).

[2] 에도시대(江戶時代)는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 페리제독이의 흑선이 들어와 일본을 개항시키고 도쿠가와 막부에 종언이 찍히면서 막을 내림. 이후 일본은 天皇을 내세운 다른 사무라이들이 나서서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개칭하고 새 정부를 세운 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선언함으로써 근대국가로의 길을 걷게 됨.

[3]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 일본 전국통일의 길을 연 인물로 일생 동안 단 한 차례도 참담한 패배를 당하지 않았으나, 1573년초 노부나가와 대립하던 중 진중에서 병이 들어 급사하면서 가문이 몰락. 일본 최고의 전략가,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라고 불림. 가이는 지금의 야마나시현(山梨縣).

[4] 히데요리(豊臣秀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늦둥이 아들

[5] 오다와라(小田原): 일본 혼슈(本州)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 있는 도시. 오다와라 호조씨(小田園 北條氏) 가문의 본거지.

[6] 슨푸(駿府): 지금의 시즈오카(靜岡) 市.

[7] 다이묘(大名): 일본 중세말부터 근세초까지 지방에 할거하던 봉건영주. 쇼군의 휘하에서 지방세력으로 존재.

[8]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1538~1616): 유년시절부터 이에야스를 섬기지만, 잇코잇키(一向一揆: 잇코의 난) 난에서는 반란군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에게 저항. 마사노부는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떨어지지만 실무에는 뛰어나서,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자신의 행정능력과 지략을 유감없이 발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