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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바이칼 호 근처 출생, 어릴 때 이름은 ‘테무친’
  • 1189, 몽골 씨족연합의 맹주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으로 칭호
  • 1203, 타타르․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
  • 1204, 몽골 초원을 통일
  • 1206,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제(千戶制)라는 유목민집단을 95개로 편성
  • 1207, 西夏 점령
  • 1215, 金나라에 공격하여 수도인 中都(지금의 베이징)에 입성
  • 1219,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에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를 계기로 중동원정 시작
  • 1220, 코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축출
  • 1223, 하르하 강변에서 러시아군 격파
  • 1227, 西夏 공격 중 병사

시대적 배경

9세기 중반 이후 몽골제국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세계사는 未曾有의 분열기를 경험

  • 중세말기 동서양의 문명사회가 모두 文弱에 빠지고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유교)가 득세
  • 동아시아도 金나라, 南宋, 西夏로 나뉘어서 대립
  • 서아시아는 압바스朝의 약화로 각지에서 지방정권들이 발호
  • 유럽도 왕권과 교황권이 대립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

정치적 혼란은 유라시아 전역의 교통과 상품유통을 교란, 국제교역은 크게 위축

새로운 통합과 안정을 지향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몽골인들의 내재적인 능력이 결합되면서 놀라운 통합력이 분출


성장 과정

극도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이겨내면서 이를 삶의 강력한 에너지로 전환

9세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고 부족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어머니와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됨

어머니와 함께 적에게 쫓겨 숲속에서 9일 동안 숨어 있었으나 적이 사라진 줄 알고 나왔다가 생포됨.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의 계략에 빠져들었으며, 잊을 수 없는 학습을 한 칭기즈칸은 평생 다시는 계략에 빠지지 않음


주요 업적

東으로 高麗, 西로는 폴란드와 이집트에 이르는 유라시아제국 형성. 칭기즈칸이 지배한 면적은 777만㎢로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이 지배한 348만㎢의 2배, 히틀러(1889~1945)의 219만 ㎢의 3배, 나폴레옹 (1769~1821)의 115만㎢의 5배에 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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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당시 몽골의 영토

유라시아 대평원은 “대륙 속 바다, 즉 제2의 지중해”로서 칭기즈칸은 말을 배처럼 이용하여 넓은 바다를 서핑(surfing)하는 마음으로 산야를 지배

100만 명의 몽고족이 당시 전 세계 인구 3억 명의 3분의 1인 1억 명을 지배


후대에 미친 영향

미국의「워싱턴포스트」紙는 지난 1천 년 간 인류사에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1995.12)

  • 오늘날의 ‘지구촌’ 성립의 서막을 연 인물
  •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냈고 동서양 문명의 연결을 강화(중세의 GATT 체제에 해당)
  • 800년 전에 이미 global communication network를 구축(오늘날의 internet에 해당)

元 멸망 후 몽고족이 쇠퇴를 거듭하면서 지난 400여 년간 칭기즈칸의 이름은 주변국들의 압력으로 거론조차 불가

최근 개혁의 흐름을 타고 몽골에 칭기즈칸 부활의 움직임이 일고 있음


리더십 특성

① 원대한 꿈의 실현

초기에는 동족 간의 살상을 막는다는 소박한 꿈에서 출발

“정복을 통한 경제적 통일만이 초원의 빈약한 물자를 놓고 벌어지는 만성적인 동족 간 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소박한 비전으로 시작

나중에는 동족의 경제적 번영, 자신의 파워 확대, 적군의 파괴, 공명정대 확보 등으로 비전을 확대

유목민은 위대한 지도자(칸, Khan)가 나타나면 강한 결집력을 보임

농경정착사회의 군주처럼 방대한 군대를 조직하는 정치력 측면에서 유목민은 상대적으로 열세

하지만 흉노족(匈奴族)의 선우(鮮于)나 몽고족의 칭기즈칸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뭉치고, 지도력이 사라지면 다시 붕괴

② 스피드를 중시하는 현대적 전략 구사

20세기의 대표적 전략사상가인 리델 하트(Liddell Hart)의 저술

「전략론(Strategy)」이라는 책에서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세계사를 바꾼 세 인물로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를 지목

  • 끊임없는 군대의 기동성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위대한 지휘관 연구(Great Captains Unveiled)」라는 책에서 1241년에 있었던 헝가리-몽골의 무히(Muhi) 대회전(大會戰)을 자세히 분석

  • “현대의 戰史家들은 2가지 면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첫째, 몽골 군대가 은밀하게, 기동성 있게, 그리고 기계적 정확성으로써 부대를 배치 완료하는 점이다. 둘째, 무서운 일제사격. 1세기 뒤 영국에서 활이 전략적으로 활용되기 전까지는 중세의 유럽 군대는 주로 돌격-  백병전에 의존했다. 몽골 군대는 활을 일제 사격한 후에 적의 말과 병사가 피로에 지쳤을 때 접근하여 백병전을 전개했다. 몽골 군대는 사상 처음으로 일제사격으로써 돌격의 길을 개척하는 전법을 도입했다.”
  • “중무장한 유럽 기병들이 돌격하면 그들은 후퇴하면서 흩어졌다. 먼 거리에서 재집결한 그들은 다시 공격을 감행하고, 이런 전술을 되풀이하여 적을 지치게 만든 뒤 비로소 결정적인 돌격을 가하여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들은 전쟁에서는 기동성(mobility)이 최고라는 교훈을 남겼다. 기동성이 충분하면 가벼운 무장으로도 중무장 군대를 꺾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전투력은 무장력에 기동력을 곱한 것이다. 이 기동력이야말로 어떤 무장보다도 유리한 방어인 것이다.”
  • 유럽에서는 기병이 반드시 보병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어 기병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보병에 달려 있는 날개에 불과하지만, 몽골軍은 전원이 기병으로서 조직이 단순하고 전장에서 운용하기가 간편하여 기동성이 더욱 강력

병사 한 명당 4~5마리의 말을 지급, 1시간마다 바꿔 탐

폴란드 공격 시에는 눈 덮인 지역 300km를 3일 만에 돌파

칭기즈칸의 첫째아들 주치의 죽음을 알리는 데 킵차크한국(지금의 키예프, 모스코바 지역)에서 수도 카라코룸(Kharakorum)까지 4,000km를 10일에 주파

세계최초의 군용이동식량인 ‘보르츠’를 개발

중간보급을 받을 곳이 마땅찮은 대초원을 수천km씩 달려야 했던 몽골기마군단은 ‘보르츠’라는 이동식량을 개발

매년 가을 소나 양을 잡아 뼈를 발라낸 뒤 肉脯를 떠서 3∼4개월 간 말린 뒤 가루로 빻은 것

소나 양의 방광(오줌보) 하나에 한 마리 분량이 들어가며, 무게는 3∼4kg에 불과

병사들은 보르츠를 넣은 방광을 두 개씩 휴대해 다니다가 더운 물에 조금씩 풀어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해결(소 한 마리가 1년 치 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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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츠를 만들기 위해 말리는 육류

③ 정보를 장악, 정보전을 전개

세계최초의 정보통신망인 ‘역참(驛站)-역전(驛傳)’ 제도를 운용

40km마다 驛을 세우고 말, 군량, 장비, 관리인을 비치하여 고려~러시아 모스크바공국까지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를 연결

몽골제국 전체의 역참 수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중국 내에 둔 역참 수는 1,519개이며 비치된 말과 노새가 50,000마리, 소가 9,000마리, 수레가 4,000량, 배가 6,000척에 달했다고 함

「워싱턴포스트」紙는 “오늘날의 인터넷보다 700년이나 앞서 국제통신망을 건설한 것”으로 평가

13세기 후반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1]는 역참을 따라 편하게 여행했다고「동방견문록」에 기술

16세기초 러시아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귀족 폰 헤르베르슈타인은 640㎞ 거리인 노브고로드~모스크바를 72시간에 주파(하루 평균 214㎞), “이는 놀라운 일”이라고 역참제의 효율성을 찬양

수도 카라코룸을 떠난 기마부대가 러시아를 공격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두 달

역참들 사이에는 파발(擺撥)들이 거주하며 정보를 전달

통상 5km마다 30~40호 규모의 마을을 두고 파발꾼들이 거주, 릴레이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 파발은 허리에 방울을 달고 말을 달리는데, 먼데서 방울소리가 들리면 즉각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지체 없이 전통(전통(箋筒))을 인계받아 다음 파발에 전달

통신문(通信文)은 미리 약속된 부호나 기호 또는 소수부족의 언어를 사용

파발의 통행증(패자, 牌子)은 제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여권이자 비자이며 앞을 가로막는 경우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부여

우리나라도 300년이 지나 조선 선조(宣祖) 때인 1579년에 역참제를 도입. 임진왜란 중에 봉수제(烽燧制)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파발을 설치, 인조(仁祖) 때 완성. 의주~한성까지 1,050리에는 86개, 경흥~한성까지 2,300리에는 96개, 동래~한성까지 920리에는 31개의 역참을 설치. 현재 서울의 구파발은 벽제관을 출발해 의주로를 통해 변방으로 달리던 파발의 출발지

말이 달릴 수 없는 곳에는 송골매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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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참 지도

전투에서는 정보전과 심리전을 전개

행군 시 1개 부대는 2일 간 노정(路程) 앞에 보내 경계하고 본대의 측면, 후면에 1개 부대씩을 두어 기습에 대비. 철저히 수색, 정찰하여 적의 주력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기마병에게 장애가 되는 지형을 사전에 분석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첩자, 척후를 보내 공격대상 지역의 정보를 획득. 거주민, 상인, 여행자 등을 통해서도 사전에 정보를 충분히 획득한 후에 작전회의를 열어 공격로를 선정

城을 공격할 때는 정찰대를 먼저 보내 동향을 파악하고 그 지역 포로들을 동원하여 해자(垓子)[2]를 메우게 하고 투석기 같은 공성장비를 운반토록 함. 공성장비(攻城裝備)는 주로 남송(南宋)의 한인(韓人)들, 金나라 기술인력들이 제작

城 내부로 미리 스파이를 보내 몽골軍의 잔학성을 퍼뜨려 공황상태를 유발

④ 넓은 포용성으로 팍스 몽골리카나[3]를 건설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보유

중국 한족(漢族)은 일원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황제의 지배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변 민족을 모두 야만인(오랑캐)로 취급

유목민들은 다원적 세계관을 통해 다른 지역, 문화, 국가, 민족들의 독자적인 정치적 질서와 문화적 특징을 인정하고 장려함

과거에 관계가 소원했던 지역들과 경제적 교류를 활성화하여 지중해 연안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육상은 물론 해로를 통한 원거리 교역이 발달

지방 특성을 인정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

몽고족의 관습에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 한 피정복지의 내부문제나 경제문제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았으며, 이를 법률로 공포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가능한 한 그 지방의 관습법에 위임

피정복지에서도 그 나라 고유법에 따라 처리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

“모든 종교를 차별 없이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신의 뜻이다.”

칭기즈칸 자신이 샤머니즘 신봉자였지만,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며 이러한 종교개방 정책은 정복과정에서 효력을 발휘

칭기즈칸은 모든 神을 존중. 최초 金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불칸산에 올라 천신(天神)에게 제사. 코레즘 점령 후 이맘(이슬람 승려)이 경전을 설교토록 함. 도교(道敎)의 분파인 전진교(全眞敎)의 교주 장춘진인(長春眞人)을 사마르칸트에 초청하여 도교의 가르침을 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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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몽골 샤마니즘의 상징물)

항복한 군사들과 정복지의 국민은 자국민과 동일하게 대우

적군도 항복하면 몽골군에 편입, 응분의 직책과 계급을 부여하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사용

칭기즈칸의 군사(軍師)인 야율초재(耶律楚材)는 金나라 관료 출신의 거란족. 야율초재는 행정, 법률, 전략 등 몽골군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 앞장

자파르 코자라는 아라비아 대상(隊商)을 중용하여 정보전을 전개. 정보전, 심리전을 펼 수 있는 첩자집단을 양성하여 코레즘 전투에서 크게 활약. 코자는 대상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적국의 군사정보, 적진의 내부구조 등을 염탐하고, 적지에 몽골군의 잔학성을 퍼트려 심리적 동요를 유도

당시 수도 카라코룸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최대의 국제도시

몽골인, 중국인, 페르시아인, 위구르인 등 민족적으로도 다양

종교도 기독교, 불교, 도교, 이슬람 등 갖가지. 무슬림 거주구역과 중국인 거주구역을 별도로 설정, 불교사원이 12개소,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가 2개소, 교회당이 1개소

국제무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화폐단위도 통일

우수한 ‘씨’를 받기 위해 멀리서 온 손님에게 아내와 동침(同寢)케 함

몽고족들은 근친혼에 대한 폐해를 경험으로 학습.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백치에 가깝거나 열성유전인자가 쉽게 발현, 종족의 우성요소를 파괴. 결혼상대자는 가능한 멀리 떨어진 다른 부족에서 선택

멀리서 손님이 방문하면 동침케 하는 데도 법도가 존재. 손님을 맞은 씨족장은 회의를 개최, 남자의 지적 수준과 외모, 됨됨이를 보고 전체 구성원이 동침 여부를 합의결정

⑤ 험난한 환경에 길러진 야성과 뛰어난 변화 감지력

유목민들은 극도로 험난한 초원에서 생존하면서 패배를 모르는 야성을 자연스럽게 체득

매서운 바람, 혹심한 추위와 타는 듯한 더위는 주름진 눈매, 높이 솟은 광대뼈, 숱이 없는 머리털로 조각된 얼굴과, 힘줄이 불거진 단단한 몸을 선사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작동하는 수렵을 통해 체질과 사고방식이 야성화(野性化). 몽고족의 시력은 평균 4.0 이상이며, 수십 리 밖의 밥하는 냄새를 맡고, 날씨의 변화를 감지, 추위와 더위에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 몽고족의 체력과 정신력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프로로 단련되고 조직이라는 그릇에 담기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발현

전투에 임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고,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며 성질이 매우 험하고 잔인. 보급이 끊어지면 말 젖을 먹고 때때로 사냥한 들짐승을 먹으며 보통 1개월쯤 견딤. 남자는 이틀 낮 이틀 밤(二日二夜)을 말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견디며 말이 풀을 먹는 동안 잠잘 수 있도록 훈련. 급한 임무를 수행할 경우, 10일쯤 불도 피우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고 강행군, 자기가 타는 말의 정맥을 끊어 피를 빨아먹기도 함

몽고족의 인사는 “당신이 온 곳에서 별일이 없습니까?”

영어로 “news”

현재 유대인들의 인사도 “별일 없습니까”

⑥ 부하들과 동거동락하는 현장경영 실천

칭기즈칸은 부하들을 골육지정(骨肉之情)으로 사랑하고 검소하게 생활

“적에게는 무자비하고 부하들에게는 너그럽다”는 단순 명쾌한 피아(彼我) 구분은 戰場에서 통용되는 원칙 제1조

부하들은 “칸은 자신의 옷으로 부하들을 입히고 자신의 말에 부하들을 태운다”라고 존경. 일반 병사들은 칭기즈칸을 “너”라고 호칭

칭기즈칸부터 장교, 말단 병사까지 동일한 천막집(겔)에서 거주하고 같은 음식을 식사

“하느님께서는 중국의 오만과 사치에 싫증이 났습니다. 나는 북방의 야만인입니다. 나는 소와 말을 치는 사람과 같이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노획물을 나눕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마치 갓난아기처럼 보살피고 나의 병사들을 형제처럼 대합니다.”

“칭기즈칸께서는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 먹으려면 다른 사람과 같이 먹어야 한다. 또 전우보다도 많이 먹는 것을 금지한다.”

병사들이 죽더라도 가족들의 생활은 걱정 없도록 준비

적의 칼에 맞아죽은 병사의 후손에게 3대에 걸쳐 수당을 지급

몽골軍은 전사하면 시체를 찾아 낙타에 싣고 귀국, 또는 전사자의 모든 소유물을 자루에 넣어 매장

南宋의 사신의 일행으로 1236년 몽골을 방문한 서정(徐霆)은 “군대에서 사망할 경우 만약 노비가 죽은 주인의 목을 낙타에 싣고 온다면 주인의 가축과 재산을 지급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온다면 처와 노예 그리고 가축과 재산을 주었다.”라고 기록

몽골軍은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일념에서 더욱 용감하게 싸움

반면 군율은 엄격

밤에 보초를 서다가 잠을 잔 2명의 병사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기꺼이 처형

이를 본 한 페르시아인이 놀라자, 몽골 지휘관은 “너희 타지크인들은 이런 경우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몽고인은 천명의 목숨이 달려 있더라도 거짓말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답변

⑦ 핵심인재를 집중 양성: 너커르, 안다, 사준마(四駿馬), 사구(四狗), 케식텐 등

너커르(정치적인 동지)

공격의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천호장(千戶長)이 되어 정치, 행정까지 담당

안다(의형제)

몽골인들은 안다를 맺기를 좋아하며, 칭기즈칸은 안다로 인해 자식이 백 명을 넘음

그의 아버지가 죽기 전 몽골의 실력자 옹 칸과 맺어놓은 안다가 제국 통일의 초석

몽고족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적이었던 자모카도 어릴 적 테무친과 안다를 맺었던 관계. 칭기즈칸은 ‘안다(맹약)’에 따라 자모카를 피 흘리지 않고 죽게 함

사준마 또는 사걸(四傑)

칭기즈칸의 주변에 포진하여 핵심정책을 결정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최고지원집단

보오르추(博彌), 모칼리(木花里), 칠라운(赤老溫), 보로콜(博忽)

사구(四狗) 또는 사맹견(四猛犬)

칭기즈칸의 충성스런 부하였던 4명의 장수. 쿠빌라이(虎必來), 수베에테이(速不台), 젤메(折里麥), 제베(哲別)

“네 마리의 맹견은, 무쇠 이마에 끌 주둥이와 송곳 혀를 가지고 있다. 강철 심장에 칼 채찍을 갖고 이슬을 먹고 바람을 타고 다닌다. 전투의 날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 교전하는 날 사람의 고기를 양식으로 하는 자들이다.”[4]

케식텐(친위대)[5]

몽골을 통일한 뒤 여러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집중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친위대를 조직. 부족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칸과 국가를 위해서만 충성하는 정예부대

엘리트들로 구성하여 칸에 대한 충성을 최상의 덕목으로 내세운 귀족제적인 집단. 처음에는 150명으로 시작, 나중에는 1만 명으로 확대. 구성원은 칭기즈칸의 사위, 능력 있는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 정복지 유력자의 아들 등

“영생의 텡그리 힘으로 천지에 기력이 더해지면서 모든 나라를 바로잡아 나의 고삐에 들게 한 이제 내게 친위대원을 천호별로 뽑아 들여라. 숙위, 궁사, 근위들을 뽑아서 만 명을 채우도록 하라. 또 친위대를 뽑아들이는 영을 천호마다 공포해 만호, 천호, 백호의 아들들이 친위대에 들어올 때 재능 있는 자, 용모가 단정한 자, 우리 곁에서 행할 만한 자를 들도록 하라.”

케식텐은 일종의 인질제도로 다른 부족들의 반란을 예방. 몽골국립대학교 역사학과 뭉크 에르덴 교수는 “천호장과 백호장 그리고 십호장의 아들들은 반드시 케식텐에 들어가야 했다. 만일 들어가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 아들이 케식텐에 속해 있기 때문에 천호장들은 칭기즈칸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조직은 모반이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장치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라고 설명

케식텐에게는 각종 특권을 부여하고, 다른 천호장보다 우월한 지위를 보장. “밖에 있는 천호보다 나를 친위하는 자가 높다. 밖에 있는 천호가 감히 나를 친위하는 자와 대등하다고 여겨 다투면 천호를 벌하도록 하라.”

케식텐은 군대조직이라기보다는 국가를 경영하는 중심축 역할. 케식텐을 통해 칭기즈칸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일사분란하게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고 그것이 세계전쟁을 강력히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됨

⑧ 천호제를 통한 一絲不亂한 조직운영

천호제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치, 군사, 사회적 종합 통치 시스템으로 총력동원체제

혈연 중심의 연합체를 파괴하고 종적으로 확고한 연결고리를 가진 천호제를 구성. 혈연 중심의 군대는 항상 갈등과 반목의 여지, 모반의 씨앗이 되기도 함

십진법을 사용. 천호제는 열 명을 기본 단위로 하는 십호(十戶)에서 출발하여 백호(百戶), 천호(千戶), 만호(萬戶) 등 피라미드식으로 구성. 지휘관은 십호장(아르반), 백호장(자운), 천호장(밍간), 만호장(오르콘)

통일성과 호환성을 갖추기에 용이하며 조직의 외형을 키우는 데도 효율적. 몽고족이 타민족 또는 부족을 정복하면 적장만 처리한 뒤 정복된 군인들을 똑같은 조직원리로 흡수 통합

병사들과 가족들은 그들이 속한 조직을 떠날 수 없도록 사람들을 완전히 재배치. 모반을 막기 위해 지휘관들을 서로 교체하고, 감시를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수행

연대책임 통해 결집력을 제고

“공격할 때나 퇴각할 때 앞의 병사가 무기나 짐을 땅에 떨어뜨렸는데도 뒤에서 따라가던 병사가 그것을 주워주지 않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

프랑스의 수사 카르피니는 그의 견문록에서 “십호에서 두세 명 이상이 도망치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처형돼야 한다. 십호 소속원 전원이 도망치면 백호의 나머지 사람도 모두 처형돼야 한다. 만약 전부가 퇴각할 때가 아닌데도 혼자 도망치면 즉석에서 처형돼야 한다. 십호 소속원 가운데 적에게 붙잡힌 병사가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이 구해 내지 못하면 처형돼야 한다.”라고 기록

능력 위주의 인사원칙 준수

칭기즈칸이 철저히 능력 위주로 군사조직을 운영하여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에 기용.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시 다른 인물로 교체

말치기 바다이와 키실릭, 양치기 데게이, 목수 퀴취귀르, 대장장이의 아들 젤메 등 당시 비천한 신분의 인물들이 상당수 천인대장에 임명. 기존의 기득권을 가진 부족장이나 씨족장은 불만스러워했지만 일반 병사들과 백성들은 크게 환영

누구라도 장교가 될 수 있다는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는 몽골기마군단의 정신력과 전투력 향상으로 연결

⑨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최신의 전쟁기술 확보

타민족 기술인력을 중용

이슬람 정벌 시 생포한 목수, 대장장이, 농업 기술자, 방직 기술자 등 수천 명의 기술자를 몽골로 데려와 연구개발 인력으로 활용

타국 토목기술자를 동원하여 몽골서부 알타이 지방의 자반 강기슭에 항가이 城을 건설한 뒤 양조- 잠업 기술자, 도공, 화가 등 전쟁에 직접 관계없는 직종의 기술자들을 집단 거주시킴

수도가 카라코룸도 칭기즈칸이 데려온 이슬람과 중국 기술자들이 건설

뛰어난 학습능력

초기에는 주로 기마전술에 의존하여 동물 뼈나 가죽으로 병기를 제작했지만 나중에는 철, 구리 등을 이용한 금속무기 사용

몽골기마군단은 공성전투에 취약하여 金나라와 서하(西夏)를 공격할 때 고전. 金나라로부터 기술자들을 생포하여 공성무기를 개발

이란의 니샤푸르를 공격할 때 동원한 무기는 창 쏘는 기계 3천, 노포(弩砲, 화살을 쏘는 대포) 300,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700, 사닥다리 4,000, 돌을 던지는 장치 2,500개 등

몽골군은 전투시 가운데로 뛰어들어 혼전하지 않음

기마병의 기동성을 최대로 활용하여 적의 측면을 돌아가서 배후에서 적을 공격하여 적을 일단 혼란시킨 후 포위섬멸

때로는 거짓 패하는 척하여 퇴각하면서 적을 몽골진영 깊숙이 유인한 후 매복으로 급습

거짓으로 도주하다가 적이 따라오면 말을 달리면서 뒤로 활을 쏘아 적이 맞아 쓰러지면 곧 반격

‘갈가마귀처럼 모였다고 별처럼 흩어진다’는 아병살성진(鴉兵撒星陳)을 사용

기마병단은 신호에 따라 이합집산, 퇴각공격 등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훈련

불리하면 흩어졌다가 서로 연락을 취하여 어느 순간에 빠른 기동성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순간순간 한 지점에서 적에 대해 우위를 확보

몽골군은 깃대를 뽑기 전에는 절대로 전장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재집결할 기회를 노리며, 적에게 생포되어도 절대 목숨을 구걸하지 않음

불리할 때는 삼십육계 주위상책(走爲上策)

36가지 계책 중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최상책”[6]

병가(兵家)에서 도망도 주요 전략

  • “도망치는 데 그를 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행동이 민첩하기 때문이다.” (孫子)
  • “강하면 이를 피하라.” (손자)
  • “이쪽은 이웃나라의 도움을 받고, 큰 나라가 적을 도와준다면 피하는 데 주저치 말라. 가망이 있으면 공격하고, 가망이 없으면 이를 피해야 한다.” (吳子)
  • “이길 것 같지 않으면 빨리 도망가라. 도망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라야 한다.” (오자)
  • “병가(兵家)에서 이르기를, 끌어당겼다가 피하라고 하였다. 적이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서다.” (李衛公)

개인약탈 금지는 요즘의 스톡옵션에 해당

칭기즈칸은 타타르와의 전투에 앞서 공표한 혁명적 서약서에서 “개별적 약탈을 금지하고 공평하게 분배한다”라고 공언

우선, 전투에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나중에 노획물을 모아 공평하게 분배하므로, 전투 와중에 개인적으로 약탈하는 적군보다 전투력에서 우위

부하들에게 정복에 성공하면 반드시 자신들에게도 노획물이 골고루 배당된다는 비전을 제공(요즘의 스톡옵션과 유사)

강력하고 다양한 무기를 개발

몽골軍의 40%가 중기마병(重騎馬兵). 가죽으로 무장하고 머리에 투구를 쓰고 창을 잡고, 주로 충격을 주는 데 활용

60%는 경기마병(輕騎馬兵). 활, 투창, 올가미 밧줄을 지니고, 두 개의 전통(戰筒)을 지니고 다녔으며 뒤에 화살 운반차량이 뒤따랐음. 정찰, 수색, 중기마병을 지원하고 소탕작전과 추격작전을 수행. 아라비아式 언월도(偃月刀)나 전투용 도끼(戰斧)를 소지

보신용으로 가벼운 동물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어서 기동력이 뛰어남

몽고족은 마배상족(馬背上族)

몽고족은 옛부터 “말에서 태어나서 말에서 자라고 말에서 죽는다.”는 마배상족(마배상족)으로 불림

13세기 초 몽골제국을 방문했던 유럽인 카르피니(Carpini)는 “어린 아이가 두 살이나 세 살이 되면 곧 말을 탈 줄 알게 되고, 사람들은 아이의 나이에 걸맞는 조그만 활을 주어 활 쏘는 법을 가르쳐준다.” 라고 기록

몽골의 준마는 하루 500㎞를 질주(천리마는 하루에 천리, 400㎞를 달리는 말)

우수한 말에게 조리모리 주법(走法)을 익혀 속도를 향상. 보통 말들은 앞의 두 다리가 뛰고 이어 뒤의 두 다리가 뛰는 전후구동(前後驅動) 방식이지만, 조리모리 주법은 낙타처럼 오른쪽 두 다리가 뛰고 이어 왼쪽 두 다리가 뛰는 좌우구동(左右驅動) 방식


[1] 마르코 폴로(Marco Polo): 이탈리아 베네치아공화국 출신의 상인으로 1271년 장사를 목적으로 중국으로 향하던 아버지 니콜로, 삼촌 마페오와 같이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1275년 元나라 북경에 도착. 쿠빌라이를 섬기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17년 간 元나라 관리로 생활. 1295년 베네치아로 귀환하여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베네치아와 교전 중인 제노바軍에 포로가 되어 투옥. 감옥에 함께 있던 피사의 포로인 루스티첼로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모아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동방견문록(Travels of Marco Polo)」.

[2] 城 밖으로 둘러서 판 못.

[3] Pax Mongolicana, 몽골인의 평화.

[4]「몽골비사」에서

[5] “케식”은 親衛, “케식텐”은 케식의 복수형.

[6] 宋나라 司馬光의 「資治通鑑」 141권에서 나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