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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837, 성공한 사업가였던 주니어스 S. 모건의 아들로 출생
  • 1856, 獨逸 괴팅겐 대학 입학
  • 1861, JP모건 설립(2년 뒤 해산)
  • 1871, 드렉셀모건회사 설립
  • 1879, 아버지와 함께 뉴욕센트럴철도주 26만 주 인수
  • 1895, JP모건 재설립, 금융위기 극복 지원
  • 1901, 카네기, 록펠러 철강회사 인수
  • 1907, 국가적 공황발생에 대응, 은행장을 소집하여 자금을 갹출, 증권거래소의 위기를 타개
  • 1913, 이집트 여행 중 사망(73세)

시대적 배경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 농경사회에서 産業社會로 이행하는 과정


성장 배경

유복한 환경에서 유럽 유학을 통해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음. 독일에서는 수학교수 자리까지 제의받음. 아버지가 성공한 대은행가인 2세 경영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 감각과 자산을 통해 젊어서부터 금융, 철도, 철강 등 기간산업에 투신, 당대 최고의 사업가로 성장

“뉴딜 전후 미국을 지배하는 3인은 J.P. 모건, 록펠러, 앤드루 멜런[1]” 이라고까지 회자됨


주요 업적

당시 국제적 규모의 투기, 과도한 독점을 통한 산업지배 등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 발전에 이바지한 공헌을 인정받음

탁월한 금융가로 수차례 미국 금융위기 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단순히 私利私慾이 아니라 국가의 經濟秩序를 위해 행동

J.P. 모건家의 富는 미국 국민총생산 증대와 거의 같은 속도로 동반성장


후대에 미친 영향

미국 초기 은행가로서 投資銀行의 산 교과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미국 金融資本의 礎石을 마련

모건家는 여섯 세대에 걸쳐 富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고 淸敎徒의 미국 이주 이후 미국 역사의 계속성을 대표해옴


리더십 특성

① “정말 중요한 것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

돈을 추구하는 금융가이면서 돈을 초월하는 가치관을 계승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은 “진정 갈망하는 것이 나타났을 때는 돈을 따지지 말라.”고 가르침

유럽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여 교양과 지식을 쌓았으며, 만년에는 미술품, 골동품 등 방대한 예술품 수집

② 사람을 알아보고 평생 신뢰

사람에 대한 直觀的인 판단력을 갖추고 한번 믿은 사람은 평생 신뢰

그는 미술품, 골동품, 특히 명사들의 자필원고의 수집광이었는데 대규모로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당한 사례가 거의 없음

이는 영국 문호 대커리(Thackeray)의 자필원고를 구입하면서 만난 전문가 호일러를 평생 신뢰했기 때문. 호일러의 평생 감정 활동으로 그는 귀중한 진품원고를 대량수집

호일러를 처음 만났을 때 J.P. 모건은 “진본을 판정하기에 자네는 너무 젊은 것 같다”고 했고 호일러는 “17세 때부터 이 일을 해왔으며, 제 자신 이 방면에서는 결코 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응수, 모건은 이 대답과 눈빛을 보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는 평생 그를 신뢰

투자결정 시에도 객관적인 자료나 담보보다는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

회사의 증권을 담보로 내어놓겠다는 사업가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 “당신의 담보는 다른 은행과의 거래에서 필요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사업실적과 당신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빌려주는 것이다.”

③ 금융위기 극복과 聯邦準備制度[2]의 구상

중앙은행 시스템도 없고 정부의 역할도 미미한 20세기 초 대규모 金融危機(1907)가 발생

재력가와 은행 소유자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우리만이라도 은행에서 돈을 빼지 말자”고 결의했으나, 회의가 끝난 뒤 한두 시간도 채 안되어 서로 앞 다투어 돈을 빼내가는 극도의 혼란상 연출. 무능한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

J.P. 모건은 미국 금융가의 마지막 보루로서 네덜란드의 제방 아래 서 있는 소년처럼 물구멍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함

J.P. 모건이 정부를 대신해 한 달여 동안 不撤晝夜로 금융계를 재조직한 결과, 11월 들어 금융위기가 비로소 진정. 모건 혼자 힘으로 中央銀行 역할을 수행

J.P. 모건은 危機狀況에서도 理性을 잃지 않고 의연하고 침착하게 위기대응 수순을 밟음

전체 은행이 연쇄파국의 위기에 직면하자, 즉시 전문가들과 함께 전국 은행 중 회생가능, 불가능 은행을 구분하고 현실가능한 방파제를 구축하는 등 기민하게 조치

파국이 우려되던 어느 날 뉴욕 주식거래소 이사장이 J.P. 모건을 찾아와 뉴욕거래소의 문을 정상 영업시간보다 조금 빨리 닫을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고. 그는 “정상 폐장시간 3시보다 1분이라도 문을 빨리 닫아서는 안 된다.” 고 단호하게 선언. 당국의 당황한 모습이 금융시장을 더욱 빨리 불신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임을 간파

그는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은행가들을 한데 모아놓고 회의실을 잠그는 등 극단적 행동을 통해 단결을 유도(카리스마적 리더십)

1907년 11월, J.P. 모건은 모건도서관 회의실에서 은행가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

당시 200만 달러 정도의 갹출을 각오하고 있던 은행가들에게 2,500만 달러의 醵出을 요구

은행가들은 각 은행의 책임문제, 걱정거리를 털어놓으며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일부 인사가 자리를 뜨려 했으나 회의실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

J.P. 모건은 회의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포켓에 넣어둔 채 다음날 새벽 5시15분 전까지 회의를 진행, 전원의 갹출 동의를 받아냄

J.P. 모건은 중앙은행도 없던 초기 미국 금융가에서 단신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여 1907년 공황이 파국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아냄

그는 공황을 겪으면서 미국의 은행체제에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

1907년도의 공황은 그가 자신의 私的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막아 냈지만, 특정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미래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 그의 이러한 先見은 이후 6년 뒤 윌슨 대통령 때 聯邦準備制度의 창설로 결실을 맺음


[1]앤드루 맬런(Andrew Mellon, 1885~1937): 모건家, 록펠러家와 함께 미국의 대부호 가문 중 하나인 멜런家 2세. 쿨리지 대통령 시절 財務長官을 지내면서 1920년 미국의 租稅制度 改革에 공헌. 맬런家는 피츠버그 지역을 중심으로 금융업과 알루미늄(ALCOA), 석유사업(걸프석유) 등으로 富를 축적.

[2]연방준비제도(聯邦準備制度, Federal Reserve System): 1913년 12월 23일 성립한 연방준비법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1935년에 개정됨. 미국 전역을 12개 연방준비구로 나누어 각 지구마다 연방준비은행을 두고, 이들 12개 준비은행에 은행권 발행의 독점권, 가맹은행의 법정준비금의 집중 보관, 가맹은행에 대한 어음의 재할인, 공개시장조작 등의 역할을 담당. 각 준비은행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운영 총괄하며, 이사회는 국회와 직결된 국가기관으로 대통령 산하의 재무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