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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904, 쓰촨성(四川省) 출생
  • 1918, 프랑스로 유학
  • 1927, 귀국 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운동 가담
  • 1933, 마오쩌둥(毛澤東)을 따라 長征에 참여
  • 1949, 장장(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 주도
  • 1954,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역임
  • 1955, 정치국 위원 역임
  • 1966, 文化革命[1] 시 反毛走資派[2]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
  • 1973,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
  • 1976, 저우언라이(周恩來) 사후 다시 실각, 마오쩌둥 사망
  • 1977, 복직
  • 1981, 실질적인 권력 장악,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 단행
  • 1989, 4월 天安門 사태
  • 1997, 2월 19일 사망

시대적 배경

신해혁명(辛亥革命)[3]으로 淸朝가 무너지고 일본 등 外勢의 侵入, 국민당과 공산당의 內亂이 激甚하던 시절 정계에 등장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고 내부 분열에 대항하여 누가 통일 중국을 다시 건설하는가 하는 치열한 경쟁상황

인생의 후반기에는, 마오쩌둥 말기의 文化革命과 마오쩌둥 사후에 중국 공산당 제2기의 리더십 혼란기를 거치면서 피폐해지고 경직된 중국의 재도약이 시급


성장 과정

16세에 프랑스에 유학하여 서구 문물과 유럽 사회주의 사상을 체득

23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 공산당 중앙비서장을 맡을 정도로 고속승진


주요 업적

실용주의, 개방주의 노선 아래 사기업과 시장의 힘을 끌어들여 중국경제를 재도약시킴

견고한 ‘竹의 帳幕’ 속에 숨어 폐쇄성과 후진성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중국을 강국으로 발돋움시킴

천안문 민주화운동[4]의 무력 유혈진압은, 또 한 번의 혼란을 용인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나온 결단이지만, 중국의 정치발전을 저해했다는 평가도 있음


후대에 미친 영향

마오쩌둥보다 더욱 존경받는 현대 중국의 리더

政治安定과 經濟改革이라는 그의 노선은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사회주의 국가개혁 모델로 평가받음


리더십 특성

ⓛ 뚝심을 지닌 온건파(外柔內剛)

규칙을 지키면서 온순하고 예의가 바르며 좀처럼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묵묵히 업무에 열중하는 스타일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날부터 주로 보좌역과 비서장 등을 역임하면서 리웨이한(李維漢), 저우언라이(周恩來), 리리산(李立三) 등의 여러 상사들을 모심

합리성과 ‘常識의 카리스마’를 겸비한 지도자로 성장

文化革命의 최대 희생자이면서도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 당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문화혁명을 전면 부정하지 않음

마오쩌둥에 대한 전체 부정이 중국혁명의 근대사와 공산당의 역사에 대한 부정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 개인적 원한을 억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와 달리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업적을 “70%의 功, 30%의 過”라고 평

온건파이면서도 자신의 기본적인 원칙을 고수

문화혁명 시 자신의 보스였던 마오쩌둥과의 노선투쟁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아 결국 실각되고 큰 고초를 치름

② 치명적 失脚에서 부활한 信念의 정치인

원칙에 대한 소신이 오히려 정치수명을 길게 하고 결국 최고 권좌에까지 오를 수 있는 밑바탕이 됨

정치적 굴곡에 상관없이 항상 선두에 서 있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와는 대조적으로, 치명적 실각을 두 번이나 당하고 다시 재기. 오뚝이라는 뜻의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을 얻음

자기 노선에 대한 신념을 상황에 따라 바꾸지 않는 뚝심. 문화혁명의 공포 분위기 하에서 작성된 「自己批判書」에서도 자신의 행적이 잘못되었다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음

※1956년 9월 당대회에서 “지도자에 대한 사랑 이것은 본질적으로 당의 이익, 계급의 이익, 인민의 이익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개인의 神格化는 아니다.”라고 말하여 마오쩌둥 노선을 전면적으로 비판

문화혁명을 시도한 마오쩌둥의 동참요구를 끝내 외면하고 결국 숙청당하는 과정을 감수

1967년 7~8월 사이에 덩샤오핑은 중난하이(中南海)[5]에서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으며, 9월에는 그의 다섯 자녀들이 모두 중난하이에서 쫓겨났고, 큰 아들은 허리 아래를 못 쓰는 중증장애인이 됨

본인도 1969~1973년 사이에는 장시성(江西省)에 있는 트랙터 공장으로 추방되어 육체노동자로 전락

③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흑묘백묘론을 주장하여 수단보다는 목적이 중요함을 강조

묘론(猫論)과 모론(摸論)을 주장

  • 묘론(猫論):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不管白猫黑猫, 能柧到老鼠就是好猫).”
  • 모론(摸論):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摸石頭過河).”

은퇴한 후에도 덩샤오핑은 유명한 화가에게 ‘쌍묘도(雙猫圖)’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그것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함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에게 일본 사람이 신칸센을 태워주면서 “정말 빠르지 않습니까”라고 자랑하자 그는 “어딜 가려고 하는가?”라고 응수하여 맹목적 효율보다는 목적이 중요함을 지적

實用主義 哲學의 기반 위에서 開放論을 전개

스스로 개방론을 業績으로 자랑

“중국의 經濟開放政策은 내가 제기한 것이다.”라고 자랑스럽게 공언하고 그 내용을 對外開放, 對內開放, 一國兩制[6]로 제시

개방정책에 따라 외자도입이 활성화되고,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적용한 경제특구가 설치. 개방의 전초기지로서 經濟特區를 적극 활용

“특구는 개방의 기지로서 경제와 인재양성 측면에서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외영향력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광둥승 주요 책임자들과 광둥의 발전전망 토론 中)

덩샤오핑의 開放經濟政策

  • 경제특구를 설치하여 연해도시를 개방하고, 연해경제개발구를 설치하여 창장(長江) 강 연안도시와 내륙지역의 성도(省都, 省政府所在地)를 개방한다.
  • 外資를 도입하고 외국인의 對中國投資를 환영한다.
  •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외 경제기술 교류를 확대하고 외국의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한다.
  • 대외무역을 확대하여 외화수익을 늘리고, 무역체제를 개혁하여 지방과 기업의 수출을 적극 장려한다.
  • 자급자족의 자연경제 관점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관념을 철저히 포기한다. 국내시장과 국제시장을 모두 개척하되 국내시장을 우선시 하고, 국내경제의 관리능력과 대외 경제무역의 관리능력을 배워야 한다.

소련 모델을 벗어나 자본주의 장점을 감안한 ‘修正 經濟모델’ 창안

국내자본투자에 집중되었던 기존 경제정책을 소비재 생산 및 외국자본 도입으로 방향 전환

특히 관료 중심의 경제운용을 經營者 중심으로 전환. 소규모 공장을 다수 건설해서 업적을 채우려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여 효율을 제고.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私營企業과 시장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게 됨


[1]文化革命: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10년 간 중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치적, 사회적 동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 자칭했지만 이는 사회주의 사회혁명운동으로서 중국사회를 격심하게 뒤흔들어 전례 없는 혼란에 빠뜨렸으며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줌.

[2]反毛走資派란, 反毛澤東的인 資本主義 노선을 疾走하는 집단이라는 의미.

[3]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에 일어난 중국의 民主主義 革命. 이로 인해 淸朝가 멸망하여 2천 년 간 계속된 專制政治가 終末을 고하고, 中華民國이 탄생.

[4]천안문 민주화운동: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天安門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5]중난하이(中南海):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의 중앙에 있는 호수. 중하이(中海)와 난하이(南海) 주변지역의 명칭. 중국 공산당과 정부 주요기관, 그리고 요인의 주택이 많음.

[6]일국양제(一國兩制): 중국이 하나의 국가 안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공존시킨다는 뜻으로, 중국이 홍콩과 대만에 대해 경제적 독립성을 인정해준다는 의미. 덩샤오핑이 1978년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사회주의를 핵심으로 하되, 경제체제는 사회·자본주의 두 개를 병행할 수 있다”고 한 것에서 유래. 이후 일국양제는 선전 등 경제특구와 1997년 7월 홍콩의 중국 반환 때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