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912, 생시르 육군사관학교[1] 졸업,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중상을 입음
- 1940, 2차 대전 시 기갑사단장, 국방차관 역임, 프랑스가 獨逸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對獨 항전을 지휘
- 1944,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 수반
- 1945~1946, 총리 역임, 1953년 정계 은퇴
- 1958, 알제리 쿠데타 이후 정계 복귀하여 총리 취임, 제5공화정 발족[2]
- 1962, 4월 알제리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결
- 1965, 대통령 재선
- 1968, ‘5월 위기’[3] 이후 1969년 대통령직 사임
시대적 배경
2차 대전 후, 프랑스는 비록 戰勝國이기는 하나, 獨逸에의 치욕적인 패배와 인도차이나, 아프리카 등의 연이은 식민지 상실로 國威가 추락
특히 冷戰時代가 도래하면서 美蘇 양극화 상황에서 유럽과 프랑스의 역할이 급속히 위축
성장 과정
페탱 원수[4]의 부관으로 근무했으며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교관이 되어 군사이론과 軍지도자론을 담당
주요 업적
2차 대전 초기 나치 점령 하에 해외 임시정부에서 저항운동을 지도하여 전후 프랑스의 위상과 번영을 위한 준비작업을 함.
해방 후 冷戰의 틈바구니에서 獨自外交路線을 펼치며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
후대에 미친 영향
유럽인에 의한 유럽 정책을 지향하여 ‘유럽연합’의 이념을 제시하고 냉전 이후의 세계를 미리 준비
‘강력한 프랑스’라는 국가목표를 제시하여 프랑스인을 단결시키고 오늘날까지 프랑스 국민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
리더십 특성
① 機甲部隊 戰術 분야의 개척자
드골은 장교 시절 끊임없이 연구하는 專門軍人으로 기갑부대 전술 혁신에 큰 기여
드골의 기갑부대 전격전(電擊戰) 연구는 독일이나 영국의 연구보다 앞섰으나, 계급이 낮아 연구결과를 프랑스 軍戰力 향상에 활용하지 못함
독일군은 전격전 전술개발 시 드골의 연구결과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군을 격파
② ‘統治하되 實務에 개입하지 않는’ 드골式 大統領制 확립
과거의 ‘賢明한 君主’ 같은 스타일로 통치
정치, 행정의 사소한 세부사항에는 개입하지 않고 단지 국민 간 갈등증폭 상황에서 ‘國家的 仲裁者’의 역할을 수행
그의 최대 관심은 ‘위대한 프랑스’를 위한 ‘國民統合’이었으며,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면, 기회주의자로 오해받을 정도로 유연성을 발휘
식민지인 알제리 문제로 프랑스의 國論이 分裂되면서 국가적 위기에 봉착
알제리 해방운동이 격화되자, 프랑스의 진보파는 해방을, 보수파는 식민지 유지를 주장하며 국론이 양분
알제리 내 극우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드골을 수상으로 하는 제5공화국 출범. 극우파들은 드골이 집권하면 알제리를 억압하고 식민지 지속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
드골은 집권 후, 극우파의 기대와 다르게 중도 입장을 견지하면서 대안을 하나씩 삭제하여 결국 알제리의 무조건 해방을 달성
명확한 입장 표명 없이 ‘지그재그식’ 정책으로 자신의 敵과 同志를 모호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
그러나 자신이 주장한 民族自決主義 원칙에 따라 알제리의 해방이 시대적 必然임을 인지
- 알제리와 프랑스의 완전한 동화(assimilation),
- 프랑스와의 긴밀한 연합(association) 등 절충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러한 中道案들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자 최종적으로
- 무조건 해방을 제안하여 성사
극우파는 드골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강력 반발했으나 분쟁의 장기화로 지친 국민 대다수는 드골의 결단을 지지
③ 나치 점령 하에서도 ‘위대한 프랑스’의 自尊心 수호
드골은 단기적 성과나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品位와 最終目標(비전)를 중시
단기적 성과나 승패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전 국민의 힘을 結集할 수 있는 고귀한 목표라고 생각
프랑스가 점령당한 비참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위대한 프랑스’를 자신의 목표로 생각하고 모든 행동에서 品位와 尊嚴을 잃지 않도록 노력
그는 거만하고 고집불통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았는데, 이는 그가 프랑스의 대표로서 프랑스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신조를 고수한 결과
軍隊도, 資金도 없는 망명정부의 지도자로서 완강한 기질과 뚝심으로 聯合國의 一員으로 對等하게 자국의 이익을 옹호
레지스탕스 운동[5]을 기반으로, 드골은 피점령국 프랑스의 發言權 강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임
연합국 지도자와 회견시 國家元首 대접을 요구하고, 모든 협상에서 프랑스의 국익을 최우선시. 처칠은 그를 “다루기 까다롭고 오만한 고집불통”으로 간주. 그러나 英美 정부는 레지스탕스 내 左翼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保守主義者인 드골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음
드골은 임시정부의 합법성 강화를 위해 프랑스 식민지(적도 아프리카령, 태평양 제도, 마다가스카르, 시리아 등)의 지지를 기민하게 확보
프랑스 본토는 괴뢰정부(傀儡政府)가 수립되어 있었으나 해외영토를 장악함으로써 臨時政府의 위상을 확립
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프랑스는 전후 독일 점령국 4개국(美․英․蘇․佛)의 일원이 되는 등, 연합국과 對等한 地位를 확보
[1]생시르 육군사관학교(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코에키당에 있는 프랑스 國立陸軍士官學校.
[2]제5공화정: 1956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제1당이 되고, 수에즈 전쟁이 미궁에 빠지자 현지에 가있던 軍部와 백인 이주자들이 알제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킴. 이에 드골은 반란군의 힘을 배경으로 의회의 신임을 얻어 내각을 조직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 이 신헌법에 의해 드골이 19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프랑스 제5공화정이 탄생.
[3]5월 위기: 1968년 5월 파리에서 발생한 반전학생들의 소르본 대학 점령사건을 계기로 9백만 노동자가 참가하는 시위와 동맹파업이 일어나 드골 정권은 붕괴 위기에 직면. 6월 총선거에서 좌익이 패배해 겨우 수습되었으나, 드골이 국내 불안을 극복하고자 지방제도 개혁과 상원개혁의 두 안건을 1969년 4월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패배해 즉각 정계 은퇴.
[4]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 프랑스 將軍, 政治家. 1차대전 중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1916년 봄 서부전선의 요새인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武勳을 세워 ‘베르됭의 영웅’이라는 명성을 얻음.
[5]레지스탕스(résistance[佛]): 권력이나 침략자에 대한 저항운동. 레지스탕스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6월 18일 프랑스가 항복한 뒤 런던으로 도피한 드골이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호소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의 불길은 꺼져서는 안 되고, 또 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인해 일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