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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前漢時代 名臣으로「三國志」의 조조(曹操)와는 다른 인물
  • 허난성(河南省) 영천(潁川) 출생
  • 문헌과 옛 기록에 밝아 태상장고(太常掌故)라는 벼슬에 임용
  • 흉노에 대한 대책으로 둔전책(屯田策)[1]을, 지방 제후세력 억제를 위해 삭번책(削藩策)을 주장
  • 강경한 제후 억제책의 부작용으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2]이 일어났으며, 정치적 책임을 지고 처형됨

시대적 배경

최초의 통일제국 秦나라가 멸망하고 漢나라가 건국된 직후

  • 漢나라가 “안정된 帝國으로 成長하느냐 조기 短命하느냐”의 과도기

밖으로는 흉노의 압박, 안으로는 제후의 세력증대가 큰 문제였으며 조조는 그 해결을 위해 목숨을 바침


성장 과정

漢나라는 儒敎를 국시로 표방했으나 실제 통치술에서는 法家의 노선 견지

조조 역시 戰國時代 상앙(商怏)[3]등 法家의 학문을 배우고, 후일 실천에 옮김


주요 업적

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기의 太平聖代, 文景之治를 이룩한 주역

국경지대 소수민족과 공동전선을 구성하여 흉노를 견제하고 국방을 안정

당시 세력이 막강하던 지방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削藩’을 강행하여 황제의 권력 기반을 견고하게 구축


후대에 미친 영향

진시황의 중앙집권국가 형성이 실패에 그친 후, 漢나라는 봉건적 권리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 절충적 형태의 국가를 유지

조조의 삭번 이후 비로소 진정한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이 마련되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통일 중국의 초석을 형성


리더십 특성

① “필승 장수는 있어도 필승 백성은 없다”

백성을 비난하는 관리들에게 리더의 무한책임을 강조

국경지대인 농서[4]의 백성들은 흉노의 침략에 시달려 사기가 크게 저하되자, 당시 중앙관리들은 농서 백성들이 겁이 많고 나약하다고 비난

조조는 이는 백성의 탓이 아니라 장수들이 군대를 통솔하는 방법이 치졸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필승 장수는 있어도 필승 백성은 없다.”고 책임을 지도자에게 돌림. 지도자가 병법의 원리를 숙지하고 좋은 무기와 장비를 제공하면 어떤 백성도 필승 백성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리더의 책무를 강조

② 황제의 두터운 신임 확보

조조는 집무실이 출입이 불편하자 태상묘(太上廟, 한고조 劉邦의 부친의 사당)의 담 사이에 작은 문을 내어 통행한 것이 문제로 부각

그의 정적이던 승상 신도가(申屠嘉)는 황제 조상의 사당을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황제에게 고해 조조를 제거할 책략을 세움

이를 미리 간파한 조조는 전날밤 황제를 독대하여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함

황제는 신도가의 고발에 대해 “태상묘의 바깥을 두른 낮은 담에 문을 냈을 뿐이며, 그나마 내가 허락한 것이다.”라고 옹호함으로써 오히려 신도가가 실각ㆍ사망하는 계기가 됨

후일 경제로 즉위한 태자의 스승으로서 조직관리와 권력유지를 위한 비법을 전수하여 왕권 강화에 기여

이른바 ‘술수(術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조직관리의 기법을 전수.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고 그 무리를 다스릴 줄 알면 신하들은 두려워 굴복하며 명령을 따르고, 일을 처리할 줄 알면 감히 속이거나 감추지 못한다.”

당시 조정 대신들은 태자의 술수 학습에 반대했지만 조조는 과거 군주들이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살해된 원인이 ‘술수’를 몰랐던 때문이라고 반박하고 교육을 강행

③ ‘삭번(劉邦)’을 강행하여 중앙집권국가의 기반 구축

景帝 즉위초(BC 155), 조조는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취임하여 삭번을 전격 건의

제후들을 각 지역 영지(藩)의 王으로 봉하는 관례를 깨고, 郡 하나 정도만 封地로 남기는 극단적인 조치

삭번책 건의를 들은 조조의 아버지는 “劉씨(皇室)가 편안해지니 우리 晁씨는 위태워지는구나”라고 탄식하며 음독자살

제후들이 吳楚7國의 난을 일으키며 강력 반발하자, 조조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처형됨

제후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개혁에 반대하는 중앙 대신들까지 조조를 탄핵. 대부분의 대신들은 모든 정국불안의 책임을 조조에게 전가 → 결국 조조는 조례복을 입고 입궁하여 참수당함

이후 제후들의 반란이 진압되고 조조의 업적은 재평가됨. 반란을 평정한 등공(登公)은 삭번을 가리켜 “제후들의 세력이 더 강해지기 전에 이를 억누르고 황실의 권위를 세운, 萬代에 利益이 되는 계책”이라고 평가 → 통일 중국의 기초는 진시황에게서 시작되어 조조에 의해 완성


[1] 둔전책(屯田策): 중국 漢나라 이후 淸나라 때까지 시행된 토지제도. 특정지방에 집단적으로 경작지를 설정하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영토나 관유지를 경작케 함. 국가의 방위 혹은 재정상의 직접적 재원을 확보하는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활용.

[2]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중국 前漢 景帝시대인 BC 154년 吳나라 왕의 주도 아래 劉氏가문이 중앙정부에 대해 일으킨 반란. 정부는 조조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였으나 여러 제후세력을 회유하는 데는 실패. 마침내 周亞夫가 주동세력인 吳王을 물리침으로써 반란을 진압. 이로써 中央政府의 권한이 강화됨.

[3] 상앙(商怏, ? ~ BC 338): 중국 戰國時代 秦나라 정치가이자 법가사상가. 효공(孝公) 때 출사하여 귀족층의 특권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만드는 정책을 단행해 후진국이었던 秦나라를 강국으로 발전시킴. 그러나 귀족층의 원망을 사서 孝公이 죽은 뒤 극형에 처해짐.

[4] 지금의 감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