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漢族 출신으로 淸朝에 충성한 淸朝中興의 名臣
- 1811, 후난성(湖南省) 샹샹현(湘鄕縣) 출신
- 1864,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진압을 주도
- 淸朝中興을 위해 ‘동치중흥(同治中興)’[2] 추진
-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3]의 개척자
시대적 배경
淸나라 쇠퇴기로, 밖으로 서구제국의 압박에 시달리고 안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겪던 상황
특히 滿洲族 정부인 淸나라에 대해 漢族의 불만 팽배
증국번은 이런 상황에서도 淸國政府에 대한 충성을 다하며 기존 질서의 안정과 재흥을 위해 노력
성장 과정
부농의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원에 들어가 정통관료 생활을 시작
1838년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에 임관, 이때에 나라의 번병(藩屛; 防壁)이 되겠다는 뜻으로 국번(國藩)이라고 이름을 바꿈
정통 유학자이자 문장가로서 중국의 전형적인 선비 출신[4]
주요 업적
정부군이 아닌 義勇軍으로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결정적 공을 세움
- 태평천국군이 압도적인 위세로 후난성(湖南省)에 공격하자, 황제로부터 후난을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농민과 병사를 의용군(湘軍)으로 편제하는 한편, 장강수군(長江水軍)도 조직하여 태평천국 진압을 주도
- 이홍장(李鴻章)에게 회군(淮軍)을 조직하도록 하고, 영국과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들여 난징(南京)을 공략, 탈환에 성공
- 염군(捻軍)[5] 등 華北農民暴動도 성공리에 진압
이후 서양의 군사기술 도입에 앞장서고 ‘同治中興‘을 선도
후대에 미친 영향
쇠퇴해가던 淸나라의 수호자로서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문명을 지키되 서양의 기술만은 도입하자는 주장)’의 사상을 통해 중국의 자존심을 지키려 함
장제스(蔣介石)가 그를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마오쩌둥도 젊었을 때에 그의 강한 정신력을 높이 평가. 나중에 마오쩌둥은 ‘인민의 도살자’로 비판했지만, 최근에는 국가파산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해낸 역량 있는 지도자로서 재평가
리더십 특성
① 反淸理念보다 기존 질서 내에서 實益 우선
中華中心主義에 입각한 反淸情緖에 기울지 않고 淸나라의 질서를 인정하고 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함
당시 사람들은 漢族이면서 滿洲族 淸황실에 충성하여 漢族을 탄압했다 하여 ‘漢姦’(漢나라 姦臣)이라고 비난[6]
그러나 기존 질서를 중시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모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당시의 무분별한 反淸情緖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지킴
宋代 性理學을 깊이 연구했으면서도 외래 사상의 장점은 취한다는 유연성 추구
儒敎사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고자 노력
“자기가 일어서려면 남을 일으켜주고 자기가 이루려면 남을 이루게 한다”는 論語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
외국과의 不平等 條約(天津條約,[7] 北京條約 등)도 감수하고,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배우고자 노력
② 서양 군사기술의 적극적 도입
조잡한 기술력과 빈약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기존 자원을 최대한 활용, 서양 군사기술의 신속한 도입을 추진
증국번은 중국의 국력 회복을 위해서는 서양식 무기의 도입이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서양 무기를 얻기 위해 서양식 병기창(安慶軍械所)을 건설
급조된 서양식 병기창이 기술 부족으로 성과가 저조하자 1862년 당시 35세의 룽훙을 미국에 보내 필요한 기계를 구입 (룽훙은 미국 예일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중국인)
증국번은 룽훙을 접견하고 한눈에 인물됨을 간파, 막대한 군자금을 주고 서양식 무기제조 기계 장비의 구입을 지시
룽훙은 1862년부터 2년에 걸쳐 유럽, 미국을 탐색해 피츠버그 소재 ‘푸트남 기계회사’로부터 무기를 구입, 뉴욕에서 상하이로 운반
룽훙이 가져온 장비들은 기존 장비와 결합되어 총포를 제조하는 기계로 정상 가동됨 → 중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총포
당시 한 영국인은 증국번의 병기창을 방문해 총, 포, 전함이 중국인의 손으로 제조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음
[1]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청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이 1851년에 농민 1만 명을 이끌고 ‘태평천국’을 세운 뒤 14년간 淸왕조에 대항한 사건.
[2]동치중흥(同治中興): 중국 淸末의 제10대 황제 동치제(同治帝, 재위 1861∼1874) 때 국력이 일시적으로 부흥한 일.
[3]양무운동(洋務運動): 서유럽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近代化를 이루려는 淸國 政府의 自强운동.
[4]정주이학(程朱理學)과 한유(韓愈)의 사상 및 문체에 기울었고 스승 왜인(倭仁)으로부터 엄격한 자성(自省)을 배움. 그 뒤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지금의 文敎次官), 공부좌시랑(工部左侍郞, 지금의 建設次官),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지금의 國防次官)으로 승진.
[5]염군(捻軍): 허난성(河南省), 산둥성(山東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의 화북(華北)지방을 중심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白蓮敎) 비밀결사의 한 지파인 염당(捻黨)이 일으킨 反淸暴動.
[6]한간(漢奸), 즉 漢族의 민족 反逆者로 비판받기도 함.
[7]톈진조약(天津條約): 淸나라가 제2차 아편전쟁에 패한 후 1858년 6월 톈진(天津)에서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와 맺은 조약으로서, 모두 편무적(片務的) 최혜국대우조항이 규정된 일방적인 조약. 예컨대 對英國條約에서는 외교사절의 베이징(北京) 주재, 내륙지 여행과 양쯔강(揚子江) 연안 개항장 자유왕래, 새로운 무역규칙과 관세개정을 위한 회의개최(이 회의에서 아편무역이 합법화), 개항장 증가,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 영국·프랑스에 대한 보상금 지불 등이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