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 #서계 #고대한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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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백과의 “서계書契”에 대한 설명은 임운林澐(2003)이라는 논문을 그대로 전재했습니다. 인용처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해당 논문: 林澐. 說書契[J]. 吉林師範大學學報[人文社會科學版], 2003[01]83-85. [전문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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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백과: 서계書契
書契是正面寫字、側面刻齒以便驗對的竹木質券契, 是一種有契約性質的文書; 它亦指文字.
서계書契는 정면에는 글자를 쓰고, 측면에는 톱니[치齒]를 새겨 맞춰볼 수 있도록 한 죽목竹木 재질의 권계券契로, 일종의 계약 성격을 지닌 문서이다. 또한 ‘서계’는 문자를 뜻하기도 한다.
간략한 소개 簡介
關於中國古代文字的產生, 古書有不同的說法. 先秦時代的《易·繫辭傳下》中說: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百官以治. 萬民以察. 」《繫辭傳下》中又說, 「作結繩」 和「作八卦」 都是庖犧氏的事. 雖然「後世聖人」 究竟是誰沒有說, 總之是庖犧氏以後的事了.
중국 고대 문자의 발생에 대해서는 옛 책마다 다양한 설이 있다. 선진 시대의 《역경易》〈계사전하繫辭傳下〉에서는 “상고上古에는 매듭을 지어 다스렸다. 후세의 성인이 이를 서계書契로 바꾸었다. 백관은 이를 통해 정치를 행하고, 만민은 이를 통해 살폈다”고 했다. 또 《계사전하》에서는 “매듭을 짓는 것[作結繩]”과 “팔괘를 만든 것[作八卦]”이 모두 포희씨庖犧氏의 일이라고 했다. 비록 이른바 ‘후세의 성인’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어쨌든 포희씨 이후의 일로 본 것이다.
後來假託孔安國作的《尚書序》中說: 「古者伏犧氏之王天下也, 始畫八卦, 造書契, 以代結繩之政, 由是文籍生焉. 」 把結繩說成是伏犧氏以前的事. 但仍然認為: 書契的發明晚於結繩, 而且是代替結繩之用的.
후대에 공안국孔安國의 이름에 가탁假託해 지은 《상서서尚書序》에서는 “옛날 복희씨伏犧氏가 천하를 다스릴 때, 처음으로 팔괘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 정치를 대신했으며, 이로부터 문적文籍이 생겨났다”고 했다. 여기서는 ‘매듭[결승]’의 사용을 복희씨 이전의 일로 보았지만, 여전히 서계의 발명이 매듭보다 늦고 그 매듭을 대신한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했다.
「書契」一詞, 今天的《辭源》、《辭海》、《漢語大詞典》都列出兩種解釋, 以《辭源》為例, 一是「猶言文字」; 二是「契約之類的文書憑證」. 而且, 從這些辭書所舉的書證來看, 都認為《易·繫辭傳下》和《尚書序》中的「書契」 是指文字而言, 而《周禮》中提到的「書契」 是指契約之類的憑證而言. 其實, 這些辭書中列出的兩種解釋, 都不是「書契」一詞的本義.
‘서계書契’라는 말에 대해, 오늘날의 《사원辭源》, 《사해辭海》,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은 모두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사원》을 예로 들면, 하나는 “곧 문자[猶言文字]”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 종류의 문서 증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전이 인용한 문헌들을 보면, 《역경》〈계사전하〉와 《상서서》 속의 ‘서계’는 문자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하고, 《주례周禮》에 언급된 ‘서계’는 계약류의 증빙으로 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사전들이 제시한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서계’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아니다.
在紙發明以前, 用簡牘為主要書寫載體的時代, 「書契」本來是人們生活中習見的一種事物. 它一般是一式兩份, 一方面在兩件簡牘上都寫上字, 另一方面把兩者並在一起, 同時在一側刻上一定數量的齒, 然後由當事雙方各執其一, 作為便於驗對的憑證. 用文字記錄有關事項, 刻齒就起到今天蓋騎縫章的作用. 今天在居延、敦煌等地發現的漢代簡牘中, 可以見到很多這種又寫了字又刻有齒的「書契」. 有的是涉及糧、錢、物出入往來的憑據, 有的是出入關卡的通行證, 有的是執行邊防任務的證件, 不一而足. 據日本學者米刃山明的研究, 刻齒不但起驗對的作用, 不同齒形和齒數還起著記錄有關數值的作用.[1]
[1] 米刃山明. 刻齒簡牘初探: 漢簡形態論[J]. 載日本木簡研究第十七號; 胡平生. 簡牘刻齒可釋讀[J]. 載中國文物報, 1996年3月3日第三版介紹了米刃山明的研究成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간독簡牘을 주요한 필기 매체로 사용하던 시대에 ‘서계書契’는 원래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던 사물이었다. 보통은 같은 내용을 두 부 작성하여, 한편으로는 두 조각의 간독에 모두 문자를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조각을 맞붙여 한쪽 옆면에 일정한 수의 톱니를 새겼다. 그런 다음 당사자 쌍방이 각자 하나씩 보관하면서 대조를 위한 증표로 삼았다. 문자로 관련 사항을 기록하고 톱니를 새기는 것은 오늘날의 ‘기봉騎縫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 거연居延, 돈황敦煌 등지에서 발견된 한대漢代의 간독 가운데는 이처럼 문자도 쓰고 톱니도 새겨진 ‘서계書契’가 많이 보인다. 어떤 것은 곡식이나 돈, 물품의 출납에 관한 증빙이고, 어떤 것은 관문 출입을 위한 통행증이며, 또 어떤 것은 변방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쓰인 증서로서 종류가 다양하다. 일본 학자 요네야마 아키라(米刃山明)의 연구에 따르면, 톱니를 새긴 것은 단순히 대조를 위한 용도일 뿐만 아니라, 톱니의 형태와 수량이 각각 다른 수치를 기록하는 기능도 했다고 한다.[1]
《周禮》中提到的「書契」 正是指的這種東西. 例如《周禮·質人》「質人掌成市之貨賄: 人民、牛馬、兵器、珍異. 凡賣儥(買)者質劑焉. 大市以質, 小市以劑. 掌稽市之書契, 同其度量, 壹其淳制, 巡而考之. 犯禁者舉而罰之. 凡治質劑者, 國中一旬, 郊二旬, 野三旬, 都三月, 邦國期. 期內聽, 期外不聽. 」 東漢學者鄭玄註釋這段文字時說: 「質劑者, 為之券藏之也, 大市人民、牛馬之屬用長券; 小市兵器、珍異之物用短券. 」 「書契, 取予市物之券也. 其券之象, 書兩札, 刻其側. 」 可見鄭玄還了解這種在市場上做買賣時曾經廣泛使用的券契, 它既是交易的憑證, 又是發生糾紛打官司的依據. 「書兩札(札也就是簡), 刻其側」 扼要而準確地表現了券契的特徵.
《주례周禮》에서 언급된 ‘서계書契’는 바로 이러한 물건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주례周禮》〈질인質人〉에 이렇게 나와 있다. “질인質人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사람, 소와 말, 병기, 진귀한 물건—를 관장한다. 무릇 파는 자와 사는 자는 질제質劑를 사용한다. 대시大市에서는 질質을 쓰고, 소시小市에서는 제劑를 쓴다. 시장의 서계書契를 관장하여 도량형을 같게 하고, 순제淳制를 하나로 하며, 순시하면서 이를 살핀다. 금령을 어긴 자는 적발하여 처벌한다. 무릇 질제를 다루는 일은 국중國中에서는 열흘, 교외에서는 스무 날, 들에서는 서른 날, 도都에서는 석 달, 방국邦國에서는 한 해로 한다. 기한 안이면 청송을 받아들이고, 기한이 지나면 받지 않는다.” 동한東漢의 학자 정현鄭玄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질제質劑란 계약 문서를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다. 대시에서 사람이나 가축 따위에는 긴 계약서[長券]를 쓰고, 소시에서 병기나 진귀한 물건에는 짧은 계약서[短券]를 쓴다”고 했고, 또 “서계書契란 시장에서 물건을 주고받는 데 쓰는 계약 문서[券]이다. 그 계약의 모양은 두 조각의 찰札에 글씨를 쓰고 그 옆면을 새긴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보아 정현 역시 시장에서 매매할 때 일찍이 널리 쓰이던 이 권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거래의 증빙이자, 분쟁이 생겨 송사를 다툴 때의 근거이기도 했다. “두 조각의 찰札[찰은 곧 간簡이다]에 글씨를 쓰고 그 옆면을 새긴다”는 말은 권계의 특징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周禮·小宰》中也提到「書契」, 「以官府之八成經邦治: ……六曰聽取予, 以書契; 七曰聽賣買, 以質劑……」 鄭玄注文中引鄭眾的說法: 「書券, 符書也」 也是對的. 關於漢代的符券可以舉一個例子. 在敦煌酥油土漢代烽燧遺址出土一件木質的符券, 長14.5釐米, 寬1.2釐米, 正面寫著「平望青堆燧警候符左券齒百」, 下端有一穿孔, 穿著一條黃絹繩, 以便佩帶. 這件警候符的上端右側有一個刻齒, 齒的缺口中有一個左半的「百」字.[2] 看來, 在驗證持符者的身分時, 不但要把這件「左券」 和右券的刻齒對上, 還要使缺口中的百字的兩半密合. 這比單靠刻齒對合更加鄭重其事.
[2] 敦煌縣文化館. 敦煌酥油土漢代烽燧遺址出土的木簡[A]. 漢簡研究文集[M]. 蘭州: 甘肅人民出版社, 1984.
《주례周禮》〈소재小宰〉에서도 ‘서계’가 언급된다. “관부官府의 여덟 가지 업무로 나라의 정사를 다스린다. … 여섯째는 수수收受를 심리하는데 서계書契를 쓰고, 일곱째는 매매를 심리하는데 질제質劑를 쓴다….” 정현鄭玄의 주석에서 인용한 정중鄭眾의 견해 “서권書券이란 부서符書이다”도 옳은 말이다. 한대漢代의 부권符券에 관해서는 한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돈황敦煌 수유토酥油土의 한대 봉수烽燧 유적에서 나무로 된 부권 한 점이 출토되었는데, 길이 14.5㎝, 너비 1.2㎝로, 정면에는 “평망청퇴수경후부좌권치백平望青堆燧警候符左券齒百”이라 쓰여 있고, 하단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어 황견黃絹 끈을 꿰어 몸에 차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경후부警候符의 상단 우측에는 하나의 톱니가 새겨져 있고, 그 톱니의 갈라진 틈새에는 ‘백百’ 자의 왼쪽 절반이 들어 있다.[2] 보아하니, 부권 소지자의 신분을 검증할 때 이 ‘좌권左券’과 ‘우권右券’의 톱니를 맞춰볼 뿐 아니라, 갈라진 틈새 속 ‘백百’ 자의 좌우 반쪽이 꼭 들어맞는지까지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톱니 맞춤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더 엄중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因為竹木易朽, 漢代以前的書契現在還沒有發現過. 但戰國文獻中常提到「左契」、「右契」. 如《老子》中有「是以聖人執左契, 不責於人. 」 《禮記·曲禮》中有「獻粟者執右契」, 《戰國策·韓策》中有「操左契, 而為公責德於秦、魏之主」, 等等. 還有的文獻中提到券契的齒, 例如《管子·輕重甲》「與之定其券契之齒, 釜區之數. 」 《列子·說符》「宋人有遊於道得人遺契者, 歸而藏之, 密數其齒. 告鄰人曰: 『吾富可待矣. 』」 《說符》的記載明顯反映了刻齒兼有記數值的作用. 由此可見, 現在一般認為是戰國成書的《易·繫辭傳》中使用的「書契」一詞, 理應是指這種既寫字又刻齒的券契.
죽목竹木은 쉽게 썩기 때문에 한대 이전의 서계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하지만 전국시대 문헌에는 ‘좌계左契’와 ‘우계右契’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노자老子》에는 “이런 까닭에 성인은 좌계를 쥐고도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고 했고, 《예기禮記》〈곡례曲禮〉에는 “곡식을 바치는 자는 우계를 쥔다”고 했으며, 《전국책戰國策》〈한책韓策〉에는 “좌계를 쥐고 공公을 위해 진秦·위魏의 군주에게 덕을 책임지운다” 등의 구절이 보인다. 또 어떤 문헌에는 권계券契의 톱니에 대해 언급한 곳도 있다. 예컨대 《관자管子》〈경중갑輕重甲〉에는 “그와 함께 그 권계의 톱니와 부구釜區의 수를 정한다”고 했으며, 《열자列子》〈설부說符〉에는 “송나라 사람이 길을 가다 남이 떨어뜨린 계약서를 주워 돌아와 감추고는, 몰래 그 톱니의 수를 세어보고 이웃 사람에게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을 기다릴 만하다’고 했다”고 전한다. 〈설부說符〉의 이 기록은 톱니 새김이 동시에 수치를 기록하는 기능을 겸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로 보아, 오늘날 일반적으로 전국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역경易》〈계사전繫辭傳〉에서 사용된 ‘서계書契’라는 말도 이처럼 글자를 쓰고 톱니도 새긴 권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漢代以後, 簡牘逐漸退出歷史舞臺. 唐代的陸德明對這種刻齒的券契已經不甚了了, 他在《經典釋文》中解釋《尚書序》「書契」一詞時說: 「書者文字, 契者刻木而書其側, 故曰書契也. 一云: 以書契約其事也. 鄭玄云: 以書書木邊言其事, 刻其木, 謂之書契也. 」 他不知道書契上的文字本來是寫在簡牘的正面的, 而契才是刻在簡牘的側面的, 把鄭玄說的「書兩札, 刻其側」誤解為寫字也是寫在簡牘的側邊, 還把他的這種理解強加在鄭玄頭上. 當然, 像上文提到的警侯符, 在側邊是寫一個百字用以合符的, 所以陸德明說的「書其側」, 不能說全不對. 但應該強調的是, 真正能起到「言其事」 作用的文字, 本是寫在簡牘正面的. 陸德明所提到的另一種解釋「以書契約其事也」, 已經不再把「契」理解為刻齒, 就使「書契」一詞變成「起契約作用的文書」之意.
한대漢代 이후로 간독簡牘은 점차 역사 무대에서 물러났다. 당대唐代의 육덕명陸德明은 이러한 새김 톱니 방식의 권계에 대해 이미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경전석문經典釋文》에서 《상서서尚書序》의 ‘서계書契’라는 말을 풀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書는 문자이고, 계契는 나무에 새기되 그 옆에 글을 쓰는 것이니 그래서 서계라 한다. 또 한 가지 설로는 ‘글로 그 일을 계약한다’고 한다. 정현은 이르기를 ‘나무의 옆면에 글을 써서 그 일을 말하고, 그 나무에 새기는 것을 서계라 한다’고 했다.” 그는 서계 위의 문자가 본래 간독의 정면에 쓰였고, ‘계契’야말로 간독의 측면에 새겨진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정현이 말한 “두 조각의 찰札에 글을 쓰고 그 옆면을 새긴다[書兩札, 刻其側]”는 말까지 ‘글자도 간독의 옆면에 썼다’는 의미로 오해했고, 또 이런 자신의 이해를 정현의 견해로 억지로 돌렸다. 물론 앞서 말한 경후부警侯符처럼 옆면에 ‘백百’ 자 한 글자를 써서 부합符合을 맞춘 예도 있으므로, 육덕명이 말한 “그 옆에 쓴다[書其側]”는 설명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점은, 실제로 “그 일을 말하는[言其事]” 역할을 하는 문자는 본래 간독의 정면에 쓰였다는 점이다. 육덕명이 언급한 또 다른 해석 “글로 그 일을 계약한다[以書契約其事也]”는 이미 ‘계契’를 새김 톱니로 이해하지 않은 것이며, 이에 따라 ‘서계書契’라는 말은 ‘계약의 역할을 하는 문서’라는 뜻으로 바뀌게 되었다.
這種傾向, 早在東漢已經出現了. 鄭玄在註《周禮·小宰》「六曰聽取予, 以書契」時, 不採取鄭眾「符書」的說法, 而主張「書契, 謂出予受入之凡要. 凡簿書之最目、獄訟之要辭皆曰契. 《春秋傳》曰: 『王叔氏不能舉其契』. 」 就把契虛化為「總帳」、「案卷」的抽象意義了. 唐人賈公彥作疏時曲意附和鄭玄的說法, 批評鄭眾說: 「云『書契, 符書』也者, 謂官券符璽之書. 此據官予民物, 何得為符璽之書解之?」 這是因為賈公彥根本不知道漢代的「符書」是什麼樣子, 把它誤解為有官印的文書. 其實, 在居延和敦煌簡牘中, 不少官方的錢物出入憑證正是和符書一樣有刻齒的. 所以《周禮·冢宰》的「書契」, 和《周禮·質人》的「書契」一樣, 也是「書兩札, 刻其側」的券, 並不需要另作解釋. 就是《左傳》中的「晉侯使士平王室, 使王叔氏與伯輿合要, 王叔氏不能舉其契. 」 其中提到的「要」, 在當時也正是書契形式的合約, 而不是一般意義的文書.
이러한 경향은 이미 동한東漢 시기에 나타났다. 정현鄭玄은 《주례周禮》〈소재小宰〉의 “여섯째는 수수收受를 심리하는데 서계書契를 쓴다[六曰聽取予, 以書契]”를 주석할 때, 정중鄭眾의 ‘부서符書’라는 설을 채택하지 않고 “서계書契란 내어줌과 받아들임의 대강[凡要]을 말한다. 무릇 장부의 표제[最目]와 송사의 요점[要辭]을 모두 계契라 한다.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왕숙씨王叔氏가 그 계를 내놓지 못했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계契’를 ‘총장總帳[총장부]’, ‘안권案卷[사건 문서철]’이라는 추상적 의미로 허화虛化시켜 버린 것이다. 당唐 사람 가공언賈公彥은 소疏를 짓면서 정현의 설에 억지로 맞추어 정중을 비판해 “‘서계는 부서이다’라 한 것은 관청의 권계[官券]와 부새符璽의 문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관官이 백성에게 물품을 주는 일을 말하는데, 어찌 부새의 문서로 풀이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가공언이 한대의 ‘부서’가 어떤 모양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이를 관인官印이 찍힌 문서로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실제로 거연居延과 돈황敦煌의 간독 중에는 관청의 금전·물품 출납 증빙이 부서와 마찬가지로 톱니를 새긴 것이 적지 않다. 따라서 《주례周禮》〈총재冢宰〉의 ‘서계’도 《주례周禮》〈질인質人〉의 ‘서계’와 마찬가지로 “두 조각의 찰札에 글을 쓰고 그 옆면을 새긴” 권계이며, 굳이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좌전左傳》에 “진후晉侯가 사평士平을 시켜 왕실의 일을 처결하게 하고, 왕숙씨王叔氏와 백여伯輿로 하여금 요약[要]을 맞춰 보게 했는데, 왕숙씨가 자신의 계契를 내놓지 못했다”고 한 구절에서 언급된 ‘요要’ 역시 당시에는 일반적인 문서가 아니라 서계 형식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東漢時代是一個紙和簡並行的時代, 劉熙《釋名·釋書契》中說: 「書, 庶也, 紀庶物也. 亦言著之簡、紙, 永不滅也. 」 正反映了這種過渡性的歷史特點. 該篇中還提到「契, 刻也. 刻識其數也. 」 可見古來簡牘側面刻齒紀數的習慣還沒有全然淡出人們的意識. 但是「書契」一詞畢竟不是人人都知道其本義了. 隨著「書契」之「契」在含義上的虛化, 人們對「書契」一詞的理解就越來越偏重於文字一義了. 所以, 班固在作《漢書》時使用「書契」一詞, 就幾乎完全當成「文字」的典雅的說法了. 如「自書契之作, 先民可得而聞者, 經傳所稱, 唐虞以上, 帝王有號諡, 輔佐不可得而稱矣」(《古今人表》)、「自古書契之作而有史官, 其載籍博矣. 至孔氏籑之, 上繼唐堯, 下訖秦繆. 」(《司馬遷傳贊》) 特別是對中國文字學產生巨大影響的《說文解字》, 在其《敘》中先說「黃帝之史倉頡, 見鳥獸蹏迒之跡, 知分理可相別異也, 初造書契. 」 接著又說「倉頡之初作書」, 也是把「書契」和「書」作為同義語換用的. 因此東漢以後的文人學士, 絕大多數都承襲了這種習慣的用法. 偽古文《尚書序》的作者, 正是把「書契」作為文字的同義語來用的, 所以在「造書契」之後, 緊接著就說「由是文籍生焉」.
동한東漢 시대는 종이와 간독簡牘이 병행되던 시기였다. 유희劉熙의 《석명釋名》〈석서계釋書契〉에서 “서書란 서庶이다. 여러 사물[庶物]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또 이를 간簡이나 지紙에 써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과도기적 역사 특징을 잘 반영한다. 같은 편에서는 “계契는 새긴다[刻]는 뜻이다. 새겨서 그 수를 표시하는 것이다”라고도 했으니, 예로부터 간독 옆면에 톱니를 새겨 수를 기록하던 관습이 아직 사람들의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계書契’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게 되었다. ‘서계’의 ‘계契’가 의미상 허화됨에 따라, 사람들은 ‘서계’라는 말을 점점 ‘문자’라는 한쪽 뜻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래서 반고班固가 《한서漢書》를 지을 때 ‘서계’라는 말을 거의 전적으로 ‘문자’의 고아한 표현으로 썼다. 예를 들면 “서계가 만들어진 이래로, 선민先民의 말 가운데 들을 수 있는 것은 경전에서 일컬은 바, 당우唐虞 이전의 제왕에게는 시호[號諡]가 있으나 그 보좌한 이들은 일컬을 수 없게 되었다”〈고금인표古今人表〉, “예부터 서계가 만들어지자 사관史官이 있게 되었고, 그 전적이 풍부해졌다. 공씨孔氏가 이를 편찬하여, 위로는 당요唐堯를 잇고 아래로는 진목공秦繆公에 이르렀다”〈사마천전찬司馬遷傳贊〉 등이 그것이다. 특히 중국 문자학에 큰 영향을 미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敘〉에서는 먼저 “황제의 사관 창힐倉頡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蹏迒之跡]을 보고, 분리分離의 이치로 서로 구별할 수 있음을 알아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고 한 뒤, 이어서 “창힐이 처음 글을 지었다[倉頡之初作書]”고 하여, ‘서계’와 ‘서書’를 동의어로 바꿔 쓰고 있다. 이에 따라 동한 이후의 문인 학사들 절대다수가 이런 관습적인 용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위고문僞古文 《상서서尚書序》의 저자도 바로 ‘서계’를 문자의 동의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서계를 만들었다[造書契]”는 말 뒤에 이어서 “이로 말미암아 문적이 생겨났다[由是文籍生焉]”고 한 것이다.
到了唐代, 像陸德明那樣還能重視「書契」一詞原始意義的學者, 不止一個. 顏師古在註《漢書·古今人表》「書契」一詞時, 就提出了「契, 謂刻木以記事. 」 而李鼎祚《周易集解》中把《繫辭傳》中的「後世聖人易之以書契, 百官以治, 萬民以察. 」 解釋為: 「百官以書治職, 萬民以契明其事. 」 他們雖然都主張書契之契不能虛化, 但把它分別解釋為文字和刻木, 還是沒能弄明白古時的「書契」究竟是什麼東西.
당대唐代에 이르러 육덕명陸德明처럼 ‘서계書契’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여전히 중시한 학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안사고顏師古는 《한서漢書》〈고금인표古今人表〉의 ‘서계’를 주석하면서 “계契는 나무에 새겨 일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이정조李鼎祚는 《주역집해周易集解》에서 《계사전繫辭傳》의 “후세 성인이 이를 서계로 바꾸어, 백관은 이로써 다스리고, 만민은 이로써 살폈다”는 구절을 “백관은 서書로써 직무를 다스리고, 만민은 계契로써 그 일을 밝혔다”고 해석했다. 그들은 모두 서계의 ‘계’를 허화虛化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을 각각 ‘문자’와 ‘나무에 새긴 것’으로 따로 풀이했으므로, 옛날의 ‘서계’가 정작 어떤 물건이었는지는 여전히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根據以上分析, 今天在辭典中為「書契」作解釋, 至少應該列出三條: 第一條最原始的意義, 應該是「正面寫字、側面刻齒以便驗對的竹木質券契」. 可引《周禮·質人》及鄭玄注和《周禮·小宰》及鄭司農注為主要書證. 第二條是「有契約性質的文書」, 可引《周禮·小宰》及鄭玄注為主要書證. 第三條是「指文字」, 可引《說文解字敘》中先說倉頡造書契, 後又說倉頡作書為主要書證. 但是, 第二、第三種解釋其實都是漢代人的認識, 所以先秦文獻如《易·繫辭傳》中提到的書契, 顯然應該按其原始的意義來理解才對.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사전에서 ‘서계書契’를 풀이할 때 적어도 세 가지 항목을 제시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본래적인 의미는 “정면에는 글자를 쓰고 측면에는 맞춰보기 위한 톱니를 새긴 죽목竹木 재질의 권계券契”이며, 《주례周禮》〈질인質人〉과 정현 주, 《주례周禮》〈소재小宰〉와 정사농鄭司農[정중鄭眾] 주를 주요 서증으로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계약의 성격을 지닌 문서”라는 의미이며, 《주례周禮》〈소재小宰〉와 정현 주를 주요 서증으로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문자를 가리킨다”는 의미이며, 《설문해자說文解字》〈서敘〉에서 먼저 창힐이 서계를 만들었다고 하고 뒤이어 창힐이 글[書]을 지었다고 한 것을 주요 서증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은 사실 모두 한대漢代 사람들의 인식일 뿐이므로, 《역경·계사전》 같은 선진先秦 문헌에서 언급된 서계는 분명 그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해야 옳다.
近代殷墟甲骨發現後, 最早的甲骨研究者之一羅振玉認為從甲骨刻辭可以「知古書契之形」, 他說: 「倉頡之初作書, 蓋因鳥獸蹏迒之跡, 知最初書契必凹而下陷. 契者刻也, 《荀子》之鍥即契之後起字. 小而簡冊, 大而鐘鼎, 莫不皆然. 故龜卜文字為古人書契之至今存者. 」[3] 他對「書契」一詞提出了一種新的解釋, 即「刻出來的文字」. 到1912年發表他收藏的甲骨文時, 就起名叫《殷墟書契》, 後來又陸續出了《殷墟書契後編》、《殷墟書契續編》. 這樣一來, 甲骨文就被很多研究者稱為「書契」了. 雖然早在1904年孫詒讓的《契文舉例》一書中已經把甲骨文稱為「契文」, 但這只是說甲骨文是刻成的文字而已. 經羅振玉這樣一發揮, 就把古已有之的「書契」一詞重新被詮釋為刻成的文字了.
[3] 羅振玉. 殷商貞卜文字考·餘說第四[M]. 1910.
근대에 은허殷墟에서 갑골이 발견된 이후, 초기 갑골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나진옥羅振玉은 갑골 각사刻辭로부터 “옛 서계의 형태를 알 수 있다[知古書契之形]”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창힐이 처음 글을 지을 때 대체로 새와 짐승의 발자국[蹏迒之跡]을 따랐으니, 최초의 서계는 반드시 오목하게 파여 내려앉은[凹而下陷] 형태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계契는 새긴다[刻]는 뜻이며, 《순자荀子》의 ‘계鍥’는 곧 ‘계契’의 후기자後起字이다. 작게는 간책簡冊, 크게는 종정鐘鼎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거북점[龜卜]에 새긴 문자는 옛 사람의 서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3] 그는 ‘서계’라는 말에 “새겨서 낸 문자[刻出來的文字]”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1912년 자신이 소장한 갑골문을 발표할 때 이를 《은허서계殷墟書契》라 이름 붙였고, 이후 《은허서계 후편後編》과 《은허서계 속편續編》도 잇달아 간행했다. 이로써 갑골문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서계’로 불리게 되었다. 비록 이미 1904년 손이양孫詒讓의 《계문거례契文舉例》에서 갑골문을 ‘계문契文’이라 부른 바 있지만, 이는 다만 갑골문이 새겨서 만든 문자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나진옥의 이러한 부연을 거치면서, 예부터 있어 온 ‘서계’라는 말이 ‘새겨서 만든 문자’라는 뜻으로 다시 풀이되게 된 것이다.
甲骨文被發現後, 古文字學界和一般知識界長期流行一種誤解: 認為商代既然沒有紙, 寫字就只能用刀刻在甲骨上的. 羅振玉知道甲骨文中的「冊」字是象簡冊之形的, 所以竹木製的簡在商代也肯定已經存在. 但他大概相信蒙恬造筆之說, 所以他認為先秦簡冊上的字也是刀刻的. 這種「書契」就是用刀刻成的文字的見解, 影響很廣, 例如朱自清在《經典常談·〈說文解字〉》中就說: 「『契』有『刀刻』的義; 古代用刀筆刻字, 文字有『書契』的名稱. 」 《辭海》還把這種觀點寫進辭條「書契」中, 「①指文字, 契就是刻, 古代文字多用刀刻, 故名. 」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 고문자학계와 일반 지식계에서는 오랫동안 하나의 오해가 유행했다. 곧 상商나라 때는 종이가 없었으므로, 글자를 쓸 때는 오직 칼로 갑골에 새기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진옥羅振玉은 갑골문의 ‘책冊’ 자가 간책簡冊의 모양을 본뜬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죽목竹木으로 만든 간簡이 상나라 때도 틀림없이 존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몽염蒙恬이 붓을 만들었다는 설을 믿었기에, 선진先秦 시대 간책 위의 글자도 칼로 새겨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서계書契’를 ‘칼로 새긴 문자’로 보는 견해는 널리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주자청朱自淸은 《경전상담經典常談》〈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계契’에는 ‘칼로 새긴다[刀刻]’는 뜻이 있다. 옛날에는 도필刀筆로 글자를 새겼으므로 문자에 ‘서계書契’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사해辭海》 역시 이러한 관점을 ‘서계’ 항목에 써 넣어 “① 문자를 가리킨다. ‘계’는 곧 ‘새기다[刻]’는 뜻이며, 고대 문자는 대부분 칼로 새겼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其實, 田野考古證明, 早在文字產生之前的仰韶時代, 陶器上美麗流暢的花紋就是用毛筆繪製的, 陶器上不同形式的記號也是用毛筆作出來的. 原始的有很強圖畫性的文字, 自然應該也是使用毛筆寫的. 在早於殷墟的時期, 鄭州小雙橋遺址中就已經發現過朱筆和墨筆寫在陶大口尊上的文字.[4] 殷墟的卜用甲骨上不僅有刻的卜辭, 同時也存在朱墨兩色的書寫文字.[5] 此外還有寫在石器、玉器上的文字殘留下來. 而商周時代的青銅器銘文, 也是先用毛筆寫出來, 再製成範的.[6] 商代和西周時代實際存在大量毛筆寫的簡牘文字, 只是因為比甲骨刻辭和銅器銘文易朽而不能保存到今天. 認為那時人們只能用刀來刻字, 完全是因為考古工作開展不夠充分, 以偏概全而造成的誤會.
[4] 河南省文物考古研究所等. 1995年鄭州小雙橋遺址的發掘[J]. 華夏考古, 1996(3).
[5] 劉一曼. 試論殷墟甲骨書辭[J]. 考古, 1991(6).
[6] 洛陽市文物工作隊. 1975-1979年洛陽北窯西周鑄銅遺址的發掘[J]. 考古, 1983(5).
사실 야외 고고학 조사로 증명된 바에 따르면, 문자가 생겨나기 훨씬 전인 앙소仰韶 시대에 이미 토기 위의 아름답고 유려한 무늬가 붓으로 그려져 있었고, 토기 위의 여러 가지 형태의 기호들도 모두 붓으로 그린 것이었다. 원시의, 그림 성격이 강한 문자도 자연히 붓으로 쓰였을 것이다. 은허보다 이른 시기의 정주鄭州 소쌍교小雙橋 유적에서도 이미 주필朱筆과 묵필墨筆로 대구존大口尊(토기 항아리)에 쓴 문자가 발견되었다.[4] 은허殷墟의 복용卜用 갑골에는 새겨진 복사卜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朱·묵墨 두 색으로 쓴 문자도 존재한다.[5] 이 밖에 석기·옥기 위에 쓰인 문자도 남아 있다. 상商·주周 시대의 청동기 명문銘文 역시 먼저 붓으로 글씨를 쓴 뒤에 그것을 본떠 거푸집[範]을 만든 것이다.[6] 상나라와 서주西周 시대에 실제로는 붓으로 쓴 간독簡牘 문자가 대량으로 존재했지만, 갑골 각사나 청동기 명문에 비해 쉽게 썩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보존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이 오직 칼로만 글자를 새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전적으로 고고학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사실만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한 데서 비롯한 오해이다.
所以, 對於學術界已經通行的用「書契」作為殷墟甲骨文代稱的做法, 可以不持異議. 但對於不顧歷史實際, 把「書契」解釋為刻成的文字, 而且當作這個詞的原始意義, 則是應該堅決擯棄的! 最後, 還想附帶談一個問題. 和羅振玉把甲骨文稱為「書契」相聯繫, 有一些學者便主張我國文字是因宗教的用途而由神職人員創制的. 這同樣也是一種以偏概全而造成的誤會. 先秦的「書契」既然並不是指甲骨文, 而是指既寫字又刻齒的用途不一的契券, 這種有字契券的主要用途是在處理經濟事務和行政管理事務, 所以我國文字的產生原因, 顯然不應僅從宗教用途考慮.
그러므로 학술계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서계書契’를 은허殷墟 갑골문의 대칭代稱으로 삼는 관습에 대해서는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역사적 실상을 무시한 채 ‘서계’를 ‘새겨서 만든 문자’로 해석하며 이를 이 말의 본래 의미로 간주하는 태도는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제를 덧붙여 말하고자 한다. 나진옥羅振玉이 갑골문을 ‘서계’라 부른 것과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중국] 문자가 종교적 용도 때문에 신직神職 계층에 의해 창제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선진先秦의 ‘서계’가 본래 갑골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쓰고 톱니도 새긴 용도가 다양한 계권契券을 가리키는 이상, 이러한 글자 있는 계권의 주된 용도는 경제 사무와 행정 관리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문자의 발생 원인 역시 종교적 용도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인증해석 引證解釋
書契, 指契約等書面憑證. 見《易·繫辭下》: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 」
서계書契는 계약 등 서면 증빙을 가리킨다. 《역경易》〈계사하繫辭下〉에 “상고上古에는 매듭을 지어 다스렸는데, 후세의 성인이 이를 서계書契로 바꾸었다”고 보인다.
(1) [characters]: 指文字. 「始畫八卦, 造書契. 」 ——《書序》
(1) [characters] : 문자를 가리킨다. “처음으로 팔괘를 그리고 서계를 만들었다[始畫八卦, 造書契]” ——《서서書序[상서서]》
(2) [evidence]: 指契約等書面憑證. 「掌稽市之書契. 」 ——《地官》
(2) [evidence] : 계약 등 서면 증빙을 가리킨다. “시장의 서계를 관장하여 살핀다[掌稽市之書契]” ——《주례周禮》〈지관地官〉
1. 指上古時代的文書. 《尚書·序》說: 「書者, 文字. 契者, 刻木而書其側, 故曰書契也. 」 這裏的意思是, 把文字刻在木片的一側即為書契, 是遠古時代的一種文字. 《書序》: 「古者伏羲氏之王天下也, 始畫八卦, 造書契, 以代結繩之政, 由是文籍生焉. 」 陸德明釋文: 「書者, 文字. 契者, 刻木而書其側. 」 《資治通鑑·晉安帝隆安三年》: 「珪曰: 『書籍凡有幾何, 如何可集?』對曰: 『自書契以來, 世有滋益, 以至於今, 不可勝計. 苟人主所好, 何憂不集. 』」 清龔自珍《西域置行省議》: 「東南臨海, 西北不臨海, 書契所能言, 無有言西北海狀者. 」 朱自清《經典常談》: 「『契』有『刀刻』的義; 古代用刀筆刻字, 文字有『書契』的名稱. 」
1. 상고 시대의 문서를 가리킨다. 《상서尚書》〈서序〉에서는 “서書는 문자이다. 계契는 나무에 새기되 그 옆에 글을 쓴 것이니, 그래서 서계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의 뜻은, 문자를 나무 조각의 한쪽 옆면에 새긴 것이 곧 서계이며, 이는 먼 옛날의 한 문자 형식이라는 것이다. 《서서書序》에 “옛날 복희씨伏羲氏가 천하를 다스릴 때, 처음으로 팔괘를 그리고 서계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사를 대신했으며, 이로부터 문적文籍이 생겨났다”고 했고, 육덕명陸德明의 《석문釋文》에는 “서는 문자이고, 계는 나무에 새기되 그 옆에 글을 쓴 것이다”라고 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진안제晉安帝 융안隆安 3년[399]〉에는 “탁발규拓跋珪가 ‘서적은 모두 얼마나 되며, 어떻게 모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길 ‘서계가 생긴 이래 세대가 지날수록 불어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임금께서 좋아하신다면 모으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는 대목이 있다. 청淸 공자진龔自珍의 〈서역치행성의西域置行省議〉에 “동남은 바다에 접하고 서북은 바다에 접하지 않으니, 서계가 말할 수 있는 바 가운데 서북쪽 바다의 형상을 말한 것은 없다”고 했고, 주자청朱自淸의 《경전상담經典常談》에는 “‘계’에는 ‘칼로 새긴다’는 뜻이 있다. 옛날에 도필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문자에 ‘서계’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고 했다.
2. 契約之類的文書憑證. 《周禮·天官·小宰》: 「六曰聽取予以書契. 」 孫詒讓正義: 「凡以文書為要約, 或書於符券, 或載於簿書, 並謂之書契. 」 《周禮·地官·質人》: 「掌稽市之書契. 」 唐張懷瓘《書斷》說: 「大道衰而有書, 利害萌而有契, 契為信不足, 書立言為徵. 書契者, 決斷萬事也. 凡文書相約束, 皆曰『契』, 契亦誓也, 諸侯約信曰誓. 」
2. 계약류의 문서 증빙을 가리킨다. 《주례周禮》〈천관天官·소재小宰〉에 “여섯째는 수수收受를 심리하는데 서계書契를 쓴다[六曰聽取予以書契]”고 했고, 손이양孫詒讓의 《주례정의周禮正義》에서는 “무릇 문서로 약정約定을 삼되, 부권符券에 쓰기도 하고 부서簿書에 싣기도 하는데, 이를 모두 서계라 한다”고 풀이했다. 《주례周禮》〈지관地官·질인質人〉에는 “시장의 서계를 관장하여 살핀다”고 나온다. 당唐 장회관張懷瓘의 《서단書斷》에서는 “대도大道가 쇠하자 글[書]이 있게 되었고, 이해利害가 싹트자 계契가 있게 되었다. 계는 신뢰만으로 부족할 때 쓰고, 글은 말을 세워 증거로 삼는다. 서계書契란 만사를 결단하는 것이다. 무릇 문서로 서로 약속하는 것을 모두 ‘계’라 하며, 계는 서誓이기도 하다. 제후가 신의로 약속하는 것을 ‘서誓’라 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