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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
1368-1644_중간허씨설문해자오음운보_重刊許氏說文解字五音韻譜_중국국가도서관 소장[13696]
《설문해자說文解字.121》서문
古者庖羲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視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易》八卦, 以垂憲象. 及神農氏, 結繩為治, 而統其事. 庶業其繁, 飾偽萌生. 黃帝史官倉頡, 見鳥獸蹄迒之跡,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 百工以乂, 萬品以察, 蓋取諸夬. “夬, 揚於王庭”, 言文者, 宣教明化於王者朝庭, “君子所以施祿及下, 居德則忌”也.
옛날 포희씨庖羲氏가 천하의 왕이 되었을 때, 위로는 하늘의 형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살피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아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로써 처음으로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어 법의 형상을 드러냈다.
신농씨神農氏에 이르러서는 결승結繩으로 다스림을 삼고, 온갖 일을 총괄했다. 세상의 일들이 번잡해지고 꾸밈과 거짓이 싹트기 시작하자,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倉頡은 새와 짐승의 발자국 자취를 보고, 분별의 이치로 서로 다른 바를 알게 되어,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백공百工이 이를 따라 다스리고, 만물의 종류를 분별했으니, 이는 대개 쾌괘夬卦에서 취한 것이다. “쾌는 왕의 조정에서 드러난다[夬,揚於王庭]”는 말은, 문자가 왕의 조정에서 가르침을 널리 펴고 교화를 밝힌다는 뜻이며, “군자가 녹을 베풀어 아래에 이르고, 덕에 거처하면 삼갈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倉頡之初作書也,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即謂之字. 文者, 物象之本; 字者, 言孳乳而寖多也. 著於竹帛謂之書. 書者, 如也. 以迄五帝三王之世, 改易殊體, 封於泰山者七十有二代, 靡有同焉.
창힐倉頡이 처음 문자를 만들었을 때는, 대체로 유형類에 따라 형상을 본떠 그렸으므로 이를 ‘문文’이라 불렀다. 그 뒤로는 형체와 소리가 서로 더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자字’라 불렀다. ‘문’이란 사물의 형상을 본뜬 근본이고, ‘자’란 말이 번식하듯 불어나 점차 많아진 것을 이른다.
대나무나 비단에 기록한 것을 ‘서書’라 하니, ‘서’란 ‘같게 한다’는 뜻이다.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자는 고치고 바뀌어 그 형태가 서로 달랐고,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한 이는 모두 72대였으나, 서로 같은 모습은 없었다.
《周禮》: 八歲入小學, 保氏教國子, 先以六書. 一曰指事. 指事者, 視而可識, 察而見意, “上、下”是也. 二曰象形. 象形者, 畫成其物, 隨體詰詘, “日、月”是也. 三曰形聲. 形聲者, 以事為名, 取譬相成, “江、河”是也. 四曰會意. 會意者, 比類合誼, 以見指撝, “武、信”是也. 五曰轉注. 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 六曰假借. 假借者, 本無其事, 依聲託事, “令、長”是也.
《주례周禮》에는 이르길: 여덟 살에 소학小學에 들어가며, 보씨保氏가 나라의 자제들을 가르치되, 먼저 육서六書를 가르친다.
첫째는 지사指事이다. 지사란, 눈으로 보아 알 수 있고, 살펴보면 뜻이 드러나는 것이니, ‘上[위]’과 ‘下[아래’가 그 예이다.
둘째는 상형象形이다. 상형이란, 사물의 형상을 그려 이루며, 형체를 따라 굽이굽이 나타낸 것이니, ‘日[해]’과 ‘月[달]’이 그 예이다.
셋째는 형성形聲이다. 형성이란, 사물로 이름을 삼고 비유를 취하여 뜻과 소리를 함께 이루는 것이니, ‘江[강]’과 ‘河[하]’가 그 예이다.
넷째는 회의會意이다. 회의란, 같은 부류의 뜻을 합쳐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니, ‘武[무]’와 ‘信[신]’이 그 예이다.
다섯째는 전주轉注이다. 전주란, 같은 부류의 한 근본 글자를 세우고, 그 뜻을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니, ‘考[고]’와 ‘老[노]’가 그 예이다.
여섯째는 가차假借이다. 가차란, 본래 해당 뜻을 가진 글자가 없을 때, 같은 소리를 가진 다른 글자를 빌려 써서 뜻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니, ‘令[영]’과 ‘長[장]’이 그 예이다.
及宣王太史籀, 著大篆十五篇, 與古文或異. 至孔子書六經, 左丘明述春秋傳, 皆以古文, 厥意可得而說也.
선왕宣王 때의 태사太史 주籀가 지은 《대전大篆》 15편에 이르러서는, 고문古文과 때때로 다른 점이 있었다. 공자孔子가 《육경六經》을 기록하고, 좌구명左丘明이 《춘추전春秋傳》을 지었을 때는 모두 고문을 사용했으나, 그 뜻은 능히 풀어 설명할 수 있었다.
其後諸侯力政, 不統於王. 惡禮樂之害己, 而皆去其典籍. 分為七國, 田疇異畝, 車涂異軌, 律令異法, 衣冠異制, 言語異聲, 文字異形. 秦始皇帝初兼天下, 丞相李斯乃奏同之, 罷其不與秦文合者. 斯作《倉頡篇》. 中車府令趙高作《爰歷篇》. 大史令胡毋敬作《博學篇》. 皆取史籀《大篆》, 或頗省改, 所謂小篆也.
그 뒤로 제후들이 힘으로 다투며 정벌하고 왕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으며, 예악禮樂이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고 여겨 모두 그 전적典籍을 없애 버렸다. 나라가 일곱으로 나뉘어, 밭의 이랑과 고랑이 서로 다르고, 수레의 바퀴 간격이 다르며, 율령의 법도, 의복과 관모의 제도, 말소리, 문자 형태가 각각 달랐다.
진시황秦始皇이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자,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이에 대해 아뢰어, 진나라 문자와 같지 않은 것은 모두 폐지하게 했다. 이사는 《창힐편倉頡篇》을 지었고,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는 《원력편爰歷篇》을 지었으며, 태사령太史令 호무경胡毋敬은 《박학편博學篇》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사주史籀의 《대전大篆》을 바탕으로 삼되, 어느 정도 생략하고 고친 바 있어, 이를 일컬어 ‘소전小篆’이라 한다.
是時, 秦燒滅經書, 滌除舊典. 大發吏卒, 興戍役. 官獄職務繁, 初有隸書, 以趣約易, 而古文由此絕矣. 自爾秦書有八體: 一曰大篆, 二曰小篆, 三曰刻符, 四曰蟲書, 五曰摹印, 六曰署書, 七曰殳書, 八曰隸書.
이때 진나라에서는 경서經書를 불태워 없애고 옛 전적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아전과 병졸을 대거 동원하여 수자리와 부역을 일으키고, 관청과 옥사獄事의 직무가 번거로워지자 비로소 예서隸書가 생겨났다. 간략하고 쓰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로 인해 고문古文은 이때부터 끊어졌다. 이로부터 진나라 글씨에 여덟 가지 체體가 있었으니, 첫째는 대전大篆, 둘째는 소전小篆, 셋째는 각부刻符, 넷째는 충서蟲書, 다섯째는 모인摹印, 여섯째는 서서署書, 일곱째는 수서殳書, 여덟째는 예서隸書라 한다.
漢興有草書. 尉律: 學僮十七以上始試. 諷籀書九千字, 乃得為史. 又以八體試之. 郡移太史並課. 最者, 以為尚書史. 書或不正, 輒舉劾之. 今雖有尉律, 不課, 小學不修, 莫達其說久矣.
한나라가 일어남에 초서草書가 생겨났다. 정위尉의 법률규정에 따르면, 학동이 17세 이상이 되면 비로소 시험을 치렀는데, 주문籒文 9천 자를 외워야 비로소 사관史이 될 수 있었다. 또한 팔체八體로 시험을 보았다. 각 군에서 태사太史에게로 이송하여 함께 시험을 보게 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를 상서사尙書史로 삼았다. 글씨가 혹 바르지 않으면 곧바로 들어서 탄핵했다. 지금 비록 정위의 법규정은 있으나 시험을 치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닦지 않아서 그 뜻을 통달하는 이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漢興有草書. 尉律: 學僮十七以上始試. 諷籀書九千字, 乃得為史. 又以八體試之. 郡移太史並課. 最者, 以為尚書史. 書或不正, 輒舉劾之. 今雖有尉律, 不課, 小學不修, 莫達其說久矣.
한나라가 흥함에 초서가 있었다. 정위廷尉의 법률규정에 학동이 17세에 이상이면 비로소 시험을 보는데 주문籒文 9천자를 외워야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팔체로 시험을 보았다. 고을에서 추천을 받아 태사가 주관하는 회시를 보러 이송하였으며, 가장 뛰어난 자를 상서사로 삼았다. 글씨가 혹 바르지 않으면 문득 들어 탄핵했다. 지금 비록 정위의 법규정이 있지만 시험을 보지 않고, 소학을 수업하지 않아 그 말을 통달하지 않음이 오래 되었다.
孝宣皇帝時, 召通《倉頡》讀者, 張敞從受之. 涼州刺史杜業, 沛人爰禮, 講學大夫秦近, 亦能言之. 孝平皇帝時, 徵禮等百餘人, 令說文字未央廷中, 以禮為小學元士. 黃門侍郎揚雄, 采以作《訓纂篇》. 凡《倉頡》以下十四篇, 凡五千三百四十字, 群書所載, 略存之矣.
효선황제孝宣皇帝 때에 《창힐편倉頡篇》을 통달하여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니, 장창張敞에게서 이를 전수받은 양주자사涼州刺史 두업杜業, 패현沛縣 사람 원례爰禮, 강학대부講學大夫 진근秦近 등이 모두 이를 말할 수 있었다. 효평황제孝平皇帝 때에 원례 등 100여 명을 징빙하여 미앙전未央廷에서 문자를 설명하게 하였고, 원례를 소학원사小學元士로 삼았다. 황문시랑黃門侍郎 양웅揚雄이 이 내용을 채록하여 《훈찬편訓纂篇》을 지었다. 대체로 《창힐편》 이하 14편은 모두 5,340자로, 여러 문헌에 실린 바를 대략 여기에 보존한 것이다.
及亡新居攝, 使大司空甄豐等校文書之部. 自以為應製作, 頗改定古文. 時有六書: 一曰古文, 孔子壁中書也. 二曰奇字, 即古文而異也. 三曰篆書, 即小篆. 四曰左書, 即秦隸書. 秦始皇帝使下杜人程邈所作也. 五曰繆篆, 所以摹印也. 六曰鳥蟲書, 所以書幡信也.
망한 신나라新에서 왕망王莽이 섭정하였을 때, 대사공大司空 견풍甄豐 등으로 하여금 문서의 부류를 교정하게 했다. 견풍은 자신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제정하는 것이라 여겨, 자못 고문古文을 고치고 정리하였다. 이때 당시에 여섯 가지 서체가 있었으니,
첫째는 고문古文으로, 공자孔子의 벽 중에서 나온 글씨를 말한다.
둘째는 기자奇字로, 고문과 같지만 모양이 다른 글자이다.
셋째는 전서篆書로, 즉 소전小篆이며, 진시황秦始皇이 하두下杜 사람 정막程邈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것이다.
넷째는 좌서左書로, 곧 진나라의 예서隸書를 말한다.
다섯째는 무전繆篆으로, 인장을 모각摹刻할 때 사용하던 서체이다.
여섯째는 조충서鳥蟲書로, 깃발이나 부절符信에 글자를 새길 때 사용한 서체이다.
壁中書者, 魯恭王壞孔子宅, 而得《禮記》、《尚書》、《春秋》、《論語》、《孝經》. 又北平侯張蒼獻《春秋左氏傳》. 郡國亦往往於山川得鼎彝, 其銘即前代之古文, 皆自相似. 雖叵復見遠流, 其詳可得略說也.
벽중서壁中書란, 노공왕魯恭王이 공자孔子의 옛 집을 허물었을 때 얻은 《예기禮記》·《상서尚書》·《춘추春秋》·《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을 말한다. 또 북평후北平侯 장창張蒼이 《춘추 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바쳤으며, 각 군현에서도 산천에서 정鼎과 이기彝器를 간혹 얻었는데, 그에 새겨진 명문은 곧 옛 시대의 고문古文으로, 모두 서로 유사하였다. 비록 문자의 멀리 전해진 흐름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대략 설명할 수 있었다.
而世人大共非訾, 以為好奇者也, 故詭更正文, 鄉壁虛造不可知之書, 變亂常行, 以耀於世. 諸生競逐說字, 解經誼, 稱秦之隸書為倉頡時書, 云: “父子相傳, 何得改易!” 乃猥曰: “馬頭人為長, 人持十為斗, 虫者, 屈中也.” 廷尉說律, 至以字斷法: “苛人受錢, 苛之字止句也.” 若此者甚眾, 皆不合孔氏古文, 謬於《史籀》. 俗儒鄙夫, 翫其所習, 蔽所希聞. 不見通學, 未嘗睹字例之條. 怪舊埶而善野言, 以其所知為秘妙, 究洞聖人之微恉. 又見《倉頡篇》中“幼子承詔”, 因曰: “古帝之所作也, 其辭有神僊之術焉.” 其迷誤不諭, 豈不悖哉!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를 비난하며,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바른 문자를 속이고 고쳐서, 시골 벽에 알 수 없는 글씨를 헛되이 만들어, 통용되는 상례를 바꾸고 어지럽혀 세상에 과시하려 했다고 했다. 여러 유생들이 다투어 글자를 풀이하고 경전의 뜻을 해석하면서, 진나라의 예서를 창힐倉頡 시대의 문자라 하며, “부자가 서로 전해 내려왔는데 어찌 그것이 바뀔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함부로 말하기를, “말馬의 머리에 사람[人]을 더하면 장[長]이 되고, 사람[人]이 열[十]을 들고 있으면 두[斗]가 되며, 벌레[蟲]는 가운데[中]가 굽은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정위廷尉가 율령을 해석하면서 글자로 법을 판단하는 데 이르러, “사람을 가혹하게 하여 돈을 받았다[苛人受錢]”라는 문장에서 ‘苛’ 자는 ‘止’와 ‘句’가 합쳐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았지만, 모두 공자孔子의 고문古文과는 합하지 않고, 사주史籀의 주문籒文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세속의 선비와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익힌 바에만 집착하고, 드물게 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해 밝은 학자를 보지 못하고, 글자의 조례條例, 즉 육서六書의 규범을 일찍이 본 적도 없었다. 옛 예술을 기괴하다고 여기고, 거칠고 엉터리 말들을 좋게 여기며, 자기가 아는 것을 신묘한 비결이라 여기고는 성인의 미묘한 뜻을 다 꿰뚫었다고 자처했다.
또 《창힐편倉頡篇》 가운데 “어린아이들이 조서를 받든다[幼子承詔]”는 구절을 보고, 이로 인해 “이는 옛 제왕이 지은 것으로, 그 말 속에는 신선의 기이한 술법이 담겨 있다”고 여겼다. 이런 미혹되고 잘못된 말들을 분별하지 않으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書》曰: “予欲觀古人之象.” 言必遵修舊文而不穿鑿. 孔子曰: “吾猶及史之闕文, 今亡矣夫.” 蓋非其不知而不問. 人用己私, 是非無正, 巧說邪辭, 使天下學者疑.
《서경書》에서 이르길 “내가 옛사람의 형상을 보고자 한다”라고 한 것은, 반드시 옛 기록과 문서를 따르고 다듬되, 제멋대로 억지로 파헤치지 말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공자孔子 또한 “나 역시 사관이 빠뜨린 글에 이르러서는 이제는 [그 글이] 없어졌구나”라고 했으니, 이는 알지 못하면서도 묻지 않거나, 사람들이 제 사사로운 뜻을 따르며 시비是非에 바름이 없고, 교묘한 말과 그릇된 글로 천하의 학자들을 미혹하게 만듦을 비판한 것이다.
蓋文字者, 經藝之本, 王政之始. 前人所以垂後, 後人所以識古. 故曰: “本立而道生.” 知天下之至賾而不可亂也. 今敘篆文, 合以古籀; 博采通人, 至於小大; 信而有證, 稽譔其說. 將以理群類, 解謬誤, 曉學者, 達神恉. 分別部居, 不相雜廁也. 萬物咸睹, 靡不兼載. 厥誼不昭, 爰明以喻. 其稱《易》孟氏、《書》孔氏、《詩》毛氏、《禮》周官、《春秋》左氏、《論語》、《孝經》, 皆古文也. 其於所不知, 蓋闕如也.
무릇 문자라는 것은 경전과 학문의 근본이며, 왕도 정치의 시작이다. 이는 앞사람이 후세에 전해준 것이며, 뒷사람이 옛것을 아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고 하였고, “천하의 지극히 깊은 이치를 알면 어지럽힐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지금 소전小篆을 정리하고, 이를 고문古文과 주문籒文에 맞추어, 식견 있는 사람들의 설을 널리 수집하였으며, 글자가 작든 크든 신뢰할 만하고 증거가 있는 것을 취하였다. 그 뜻을 살펴 헤아리고 참고하여 여러 부류를 바로잡고, 오류를 풀며, 학자들을 깨우쳐 신묘한 뜻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부수에 따라 분류하여 각기 제자리에 두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였으며, 만물의 형체가 모두 나타나도록 하여 빠뜨리는 것이 없게 했다.
그 뜻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이를 밝혀 알도록 하였으며, 여기서 《역易》은 맹씨본孟氏本, 《서書》는 공씨본孔氏本, 《시詩》는 모씨본毛氏本, 《예禮》는 《주관周官》, 《춘추春秋》는 좌씨본左氏本,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은 모두 고문古文으로 된 것이다. 알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대체로 빠뜨려 두었다.
敘曰: 此十四篇五百四十部. 九千三百五十三文, 重文一千一百六十三, 解說凡十三萬三千四百四十一字.
서敘에 이르기를, 이 책은 모두 14편, 540부로 되어 있으며, 글자는 9,353자이고, 중복된 글자는 1,163자이며, 해설한 글은 모두 133,441자이다.
其建首也, 立一為耑. 方以類聚, 物以群分. 同牽條屬, 共理相貫. 雜而不越, 據形系聯. 引而申之, 以究萬原. 畢終於亥, 知化窮冥. 粤在永元, 困頓之年. 于時大漢, 聖德熙明. 承天稽唐, 敷崇殷中, 遐邇被澤, 渥衍沛滂. 廣業甄微, 學士知方, 探嘖索隱, 厥誼可傳. 粵在永元, 困頓之年, 孟陬之月, 朔日甲申. 曾曾小子, 祖自炎神. 縉雲相黃, 共承高辛, 太岳佐夏. 呂叔作藩, 俾侯于許, 世祚遺靈. 自彼徂召, 宅此汝瀕. 竊卬景行, 敢涉聖門. 其弘如何? 節彼南山. 欲罷不能. 既竭愚才, 惜道之味, 聞疑載疑. 演贊其志, 次列微辭. 知此者稀, 儻昭所尤, 庶有達者, 理而董之.
처음에는 하나를 세워 머리 삼고
유사한 것 모아 갈래를 나누었네
이치 따라 조목이 서로 얽히고
형상 따라 엮어 만물을 풀었네
끝맺음은 해(亥)에 이르러 머물고
변화의 깊은 뜻 어둠까지 통했네
때는 영원의 곤궁하던 그 해
성덕 밝은 한나라 천하에 빛났네
하늘 뜻을 이으니 당을 본받고
은나라 법도는 널리 드러냈네
은택은 사방에 흘러 널리 미치고
지혜로운 학사들 깊이를 밝혔네
나는 염제의 후손, 초라한 자손
조상은 허 땅에 봉해졌도다
여수 가에 정착해 경행을 우러르며
성인의 문을 감히 두드려 보았네
그 도는 어이 그리도 넓고 큰가
남산의 절개 같아 멈추지 못하네
어리석은 재주 이미 다 써버리고
도리의 맛을 아껴 두 번 곱씹네
의심을 듣고 또다시 의심을 더해
그 뜻을 펼치며 자잘한 말 적었네
이 뜻 아는 자는 세상에 드물어도
혹여 밝은 이 있어 이끌어 주기를 바라네

